소설리스트

7화 (8/19)

### 챕터 7

‘부산 집이네…….’

이 바다는 이비가, 아니. 김현서가 알고 있는 장소였다.

김현서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지만, 어머니의 고향인 부산에 자주 오곤 했는데 부산에 오면 머물던 집을 좋아했다.

‘매일 바다 보느라 정신없었는데.’

김현서의 부산 집은 해운대 해변 바로 앞에 위치한 큰 주상 복합 빌딩이었다. 고층이다 보니 거실 전면창 앞에 앉아 바다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집이었다.

김현서였을 적부터 바다를 좋아했지만, 수영엔 영 소질이 없어 구명조끼와 튜브가 없으면 물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물놀이하다 몇 번 위험한 순간을 넘겼다 보니, 어린 시절부터 물에 들어가는 것보단 구경하는 것을 더 좋아했었다.

바다를 구경하기 딱 좋은 위치에 지어진 건물은 밖에서 보면 바다를 향한 면이 전부 통유리로 되어 있어 하늘이 선명하게 비쳤다. 덕분에 맑은 날 낮에 보면 푸른 하늘을 건물에 담아 둔 것처럼 보였다. 저가 살던 주상 복합 건물을 올려다보던 이비는 집이 몇 층이었는지 잊어버렸다는 사실에 쓰게 웃었다.

‘55층? 아니다. 53층이었나? 언제 마지막으로 왔더라. 10년 좀 넘었나?’

거리를 둘러보니 마지막 기억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이비는 제 손에 쥐고 있는 핫도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곳이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꿈 맞겠지? 갑자기 지구로 돌아온 건 아니겠지?’

카페 유리창에 비친 제 모습은 김현서의 모습이었지만, 이곳이 꿈이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제 육신 때문이었다.

‘죽은 몸이 다시 살아났을 리도 없고. 17~18살쯤인가? 그때부터 크지 않았으니까 죽기 직전의 모습일 수도 있겠네.’

죽기 직전의 자신의 모습이라니…… 기묘했지만, 이 또한 자신의 모습이라 그런지 별다른 거부감은 없었다.

꿈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현실감 있는 공간에서 깊게 생각하는 것을 포기한 이비는 핫도그를 한 입 베어 먹었다. 익히 아는 맛이 퍼졌다. 고소한 빵과 짭조름한 소시지가 케첩과 훌륭하게 어우러져 하모니를 이루었다.

꿈에서 맛이 느껴지는 것이 신기하고 퍽 기뻤다. 이비는 만족스럽게 웃으면서도 씁쓸함을 느끼며 이곳이 꿈임을 확신했다.

‘꿈 맞네…… 이때쯤 나는 아무 맛도 느끼지 못했으니까.’

원인을 알 수 없는 이름조차 없는 병. 그 병은 어린 김현서를 긴 시간 동안 괴롭혔고, 심한 날엔 진통제를 들이부어도 견딜 수 없게 만들곤 했다.

끝없이 지독하게 밀려오는 통증. 그 통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선택한 약물 치료는 김현서의 고통을 줄여 준 대신 미각을 앗아 갔다. 미각뿐만 아니라 신체가 느낄 수 있는 통각을 거의 다 죽여 버렸다.

‘뭐, 덕분에 더 큰 불효는 저지르지 않았지만…… 아니야. 그만 생각해. 지나간 일인데, 뭘 자꾸 생각하는 거야. 핫도그나 먹자.’

미각이 느껴지는 신기한 꿈에서 핫도그를 먹던 이비는 문득 쌍둥이 동생 현아가 떠올랐다. 어린 시절 핫도그를 먹을 일이 있으면 현아는 꼭 설탕을 묻혀 먹곤 했었다.

반면 현서는 설탕을 묻히지 않고 케첩만 뿌려 먹곤 했다. 사실은 설탕을 묻힌 게 더 맛있었는데, 형이 먹는 방법으로 똑같이 먹고 싶어서 그랬다는 건 혼자만 아는 비밀이었다.

꿈인 것을 확신한 이비는 이왕 이렇게 된 거, 디저트도 먹겠다며 지갑을 꺼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갑이 있었고, 옷도 사복이었다. 덕분에 환자같이 보이지 않아 기분이 좋았다.

“레모네이드 한 잔 주세요. 아, 레몬 마카롱도 하나, 아니. 마카롱 맛별로 전부 두 개씩 다 포장해 주세요.”

잠시 후 이비는 한 손엔 핫도그, 다른 손엔 레모네이드, 손목엔 마카롱을 포장한 봉투를 걸고 느긋하게 걸으며 입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여긴 꿈이고 수정을 사용한 것도 아니니 분명 금방 깰 것이고, 깨기 전에 다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크게 빨았다.

“쿨럭! 목 아파! 탄산 오랜만이네.”

새콤하고 시원한 청량감에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이비는 다시 핫도그를 먹으려다 멈칫했다. 저 멀리 특이한 옷을 입고 바닷바람에 긴 생머리를 흩날리는, 여기에 있으면 안 될 사람이 보였다.

“……카르젠?”

분명 조금 전까지 저와 잠옷을 입고 누웠을 텐데, 그가 입은 옷은 기사단 제복이었다. 이비는 저 제복을 숲의 마법사 표지 일러스트에서가 아닌 실제로 보는 것이 처음이었기에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그동안 매일 보면서도 카르젠이 잘생겼다는 것은 당연히 실감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부산에서 그를 두고 보니 주변에 모든 인간들이 오징어로 보였다. 아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는 마치 건어물 시장에 유일한 인간 같았다.

‘워어…….’

넋 놓고 감탄하고 있을 때, 그가 이비를 향해 돌아섰다. 눈이 마주친 순간 이비는 딸꾹질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이 모습을 알아볼 리는 없으니 그냥 지나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도저히 카르젠의 곁을 지나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결국 이비는 편하게 걸을 수 있는 아스팔트를 놔두고 백사장으로 방향을 틀었다. 목적지가 있는 건 아니지만 일단 자리를 피할 생각이었다.

‘좀 멀리 떨어져야지. 내 꿈이지만 정말 웃긴다. 카르젠이 부산에 있다니…….’

카르젠이라는 비현실적인 아름다운 존재 덕분에 이비는 해변의 수많은 건어물 사이로 지나가는 오징어 1호가 된 기분이었다.

해수욕할 날씨는 아니었지만 화창해서인지 방문객이 꽤 많았다. 적당한 자리를 찾은 이비는 주변을 둘러보다 수많은 오징어 사이에 빛나는 또 다른 사람을 발견하곤 놀라 눈이 커졌다.

‘크리시?’

그나마 사람이 없는 곳에 잔뜩 찌푸린 채 앉아 있는 크리시 역시 처음 보는 옷을 입고 있었다. 소매통이 넓고 은실로 자수가 들어간 것을 보니 신관복 같았다. 성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옷을 입고 바다를 노려보는 모습은 조각 그 자체였다.

‘워…… 진짜 잘생겼다. 현아가 들으면 또 외모로 사람 칭찬하냐고 혼냈을 텐데, 그래도 이건 어쩔 수 없어. 내 최애가 너무 멋지잖아!’

누가 봐도 신기한 옷을 입고 있는데도 주변 오징어들 중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비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크리시를 감상하며 핫도그를 우물우물 먹었다. 바다를 바라보는 최애라니. 잔뜩 찌푸리고 있어도 멋있었다.

수정으로 꾼 꿈을 제외하면 이 정도로 자유로운 자각몽은 처음이라 다가가서 말을 거는 것도 상상해 봤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역시 자신은 엑스트라처럼 그저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멀리서 지켜보는 게 편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카르젠이 크리시에게 다가갔다.

‘이야…… 정말 그림 같네. 현아가 보면 난리 났을 텐데.’

<숲의 마법사>에서 카르젠과 크리시를 엮길 좋아하던 동생 현아를 떠올리자니 웃음이 났다. 문득 이비는 <숲의 마법사> 스핀오프로 나온 BL 소설 <빛이 있는 세계>를 제대로 보지 않은 게 후회됐다.

막 연재가 시작된 터라 나중에 어느 정도 분량이 쌓이면 보려고 일부러 아껴 두던 소설이었다. 그래서 주인공이 크리시와 에벨루스 신의 가호를 받은 성기사 팔라딘이라는 것 외엔 아는 게 없었다.

‘팬들이 놀라워했지. 크리시는 당연히 지그하르트랑 이어질 거라고 생각했으니…… 아냐. 근데 모르는 거야. 지금 필리스도 숲의 마법사랑 내용이 다른데, 빛이 있는 세계도 달라졌을지도 모르잖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비는 제 최애 크리시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모습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그러다 별안간 카르젠의 모습이 떠올랐다.

앞으로 카르젠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까? 만약 그렇다면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될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카르젠이 누군가 좋아하게 되면…… 나랑 같이 자는 것도 자제해야겠지?’

숲의 마법사 세계에서는 동성혼도 흔한 일이었기에, 동성이라고 해서 쉽게 동침하는 것은 안 될 것 같았다. 물론 어떤 행위도 없이 잠만 자는 것이라고 해도 자신이 카르젠의 연인의 입장이라면 싫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낮에 종일 함께 있자니, 카르젠이 누군가 사랑하게 되었는데 곁에 붙어 있을 수도 없을 것이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크리시와 카르젠이 동시에 이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

눈이 마주친 이비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시선을 흐렸다. 그리곤 괜히 핫도그를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핫도그를 열심히 먹으며 바다를 구경하는 척 고개를 돌렸는데, 시야에 둘이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꿈이니까 그냥 말 걸어도 될 것 같지만, 좀 신경 쓰여…….’

아무리 꿈이라도 지금 이 모습으로 저 둘을 마주하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차라리 자리를 피할까 싶었지만, 모순되게도 이비는 저 둘을 지켜보고 싶었다. 가까이서는 말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말이다.

은근히 둘에게 시선을 돌린 이비는 다행히 저들이 뭔가 열심히 이야기하는 모습에 안도하고 조금씩 훔쳐봤다. 그림 같은 두 사람이 함께 앉아 있으니, 안구가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이후로도 시원한 레모네이드를 쪽쪽 빨며 지켜보다 둘과 눈이 마주칠 것 같으면 다시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핫도그를 절반 정도 먹어갈 때쯤, 카르젠이 일어나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일순 놀란 이비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릴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아 내고 바다만 봤다. 크리시도 자리에서 일어난 게 시야에 들어왔다. 이번에도 잘 참아 냈는데 두 사람이 점점 가까워졌다.

‘지금 설마 나한테 오는 건 아니겠지? 아니겠지?’

최애와 차애는 멀리서 지켜보는 게 좋은데, 갑자기 제게 다가오는 두 사람 때문에 이비는 혼란했다. 그냥 지나치길 바랐는데, 그 희망은 카르젠이 제 이름을 부르는 동시에 깨져 버렸다.

“이비. 왜 여기에 혼자 있어?”

“언제 오나 기다렸는데, 안 와서 우리가 왔습니다. 이렇게 여럿이 한 꿈에 모이다니, 신기하군요.”

“!?”

‘여럿이 한 꿈? 진짜 카르젠이랑 크리시라고!?’

이비는 눈치 보며 제 옆에 선 카르젠과 크리시를 조심스레 올려다봤다. 카르젠이 먼저 이비의 오른쪽에 털썩 앉아 무릎에 팔을 올려 두며 말했다.

“내년 여름엔 남부로 같이 휴양이라도 갈까? 지금은 좀 여러 문제도 있고, 무엇보다 봄까진 텔레포트 좌표를 따로 풀지 않는다고 했거든. 텔레포트 없이 가긴 힘드니까 나중에 체스한테 물어봐야겠네.”

이번엔 크리시가 이비의 왼쪽에 털푸덕 앉았다.

“좌표 풀리면 나도 데려가. 그런데 마카롱은 또 어디서 났습니까?”

이비는 제 지식엔 없는 저 짧은 대화만으로도 카르젠과 크리시가 자신의 꿈이 만들어 낸 형상이 아니라는 것을 대번 느꼈다. 긴장감에 떨리는 손을 감출 수가 없어 레모네이드와 핫도그를 꽉 쥐었다.

‘대체 나를 어떻게 알아본 거지?’

너무 당황한 나머지 이비는 두 사람의 질문을 못 들은 척하며 일단 핫도그를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크게 베어 문 핫도그를 일부러 천천히 씹던 이비는 잔뜩 긴장한 탓에 눈치채지 못했지만, 서로 눈짓을 주고받은 두 사람이 알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넸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하긴 어려울 것 같지만, 추측해 보자면 전이로 이어진 상태라 이렇게 된 것 같습니다.”

“많이 놀랐지? 우리도 이런 건 처음이야.”

“이렇게 장시간 전이하고 잠까지 자게 된 적은 처음이라 발생한 일 같기도 하고요. 아마 에벨루스 님께서 장난친 것 같긴 하지만…… 뭐, 그러니 깰 때까지 이야기나 할까요? 혹시 꿈에서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습니까?”

“…….”

“꿈이니까 괜찮을 것 같은데. 이비. 아무 말이라도 좋으니 뭔가 말할 수 있으면 해 볼래?”

카르젠이 조심스레 격려해 주는 모습에 당황한 이비가 눈을 도르륵 굴렸다.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저 둘이 꿈속의 인물이 아니라 진짜 크리시와 카르젠이라는 것을 듣고 나니 불안함에 몸이 절로 떨렸다.

‘그러니까… 크리시랑 카르젠 둘 다 진짜라는 거야? 아까 카페에서 봤을 때 분명… 내 모습이었는데… 어떻게 알아봤지? 설마… 크리시랑 카르젠은 내가 이비의 모습으로 보이나?’

그게 아니라면 설명할 길이 없었지만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확인해 보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았다.

저 둘이 꿈속의 인물이 아니라 진짜 카르젠과 크리시라면 ‘혹시 지금 제가 이비로 보이세요?’ 만큼 수상한 질문이 어디에 있을까 싶었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혼란에 빠져 있을 때 크리시가 이비의 손에 들고 있는 레모네이드를 집으며 말했다.

“신기한 세계군요. 대부분 머리가 흑발인 것도 그렇고요. 하여간에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지만, 바다가 이렇게 썩은 걸 보면 멸망 직전의 세계 같습니다. 에벨루스 님께서는 가끔 꿈을 통해 이미 멸망한 세계나 다른 세계를 보여 주시곤 하지만, 이렇게까지 구체화된 꿈은 처음이라 신기하군요.”

평소라면 크리시답지 않게 왜 이렇게 구구절절 설명을 늘어놓고 있을까 의아함을 느낄 법도 했으나, 혼란한 이비의 귀에는 ‘흑발’이라는 말, 그리고 ‘가끔 다른 세계를 보여 준다.’는 말이 귀에 콕콕 박혔다. 이어 카르젠이 바로 말을 받아쳤다.

“그렇구나. 에벨루스 님이 보여 주신 세계구나. 신기하네. 나도 이런 건 처음 봐.”

둘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를 해석하느라 정신없던 이비는 카르젠의 말투가 어설픈 연기 톤인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크리시는 이비 몰래 카르젠을 향해 그렇게밖에 못 하냐는 눈빛으로 째려봤다. 매서운 눈빛에도 카르젠은 어색한 연기 톤을 계속 이어 나갔다.

“이비처럼. 연하고 예쁜 크림색 머리는 없는 세계라니. 정말 신기하네.”

“…….”

이비는 카르젠이 말한 ‘이비처럼 연하고 예쁜 크림색 머리’라는 말에 슬쩍 제 머리카락을 당겨 봤다. 누가 봐도 검은 머리카락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크리시랑 카르젠에겐 내가 이비의 모습으로 보인다는 거지?’

이비가 용기를 내 조심스레 카르젠과 눈을 마주한 순간. 카르젠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어색한 연기 톤으로 말했다.

“바닷가에 있어서 그런가. 이비 머리 색이. 평소보다 훨씬. 더 밝아 보여.”

이비는 지금 카르젠의 말투가 국어책 읽듯 딱딱한 것보다, 그가 웃는 얼굴이 이 해운대에서도 눈부시다는 사실이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햇빛보다 쨍한 그의 화사한 미소 때문에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제 머리색이…… 지금은 어떻게 보이는데요?”

용기를 낸 이비가 육성으로 물었다.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카르젠이 입을 벌린 순간, 저 발 연기를 차마 더는 못 들어 주겠다고 판단한 크리시가 치고 들어왔다.

“평소랑 같죠, 뭐. 여기 햇빛이 강해서인지 평소보다 훨씬 밝은 색으로 보이긴 합니다.”

아까부터 둘 다 굳이 색을 강조하며 말했지만, 초조함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이비는 안도했다. 크리시는 카르젠에게 ‘그냥 내가 말할게. 넌 웃기나 해.’라고 입술로 말하곤 이비에게서 빼앗은 레모네이드를 마셨다가 눈이 커졌다.

“쿨럭!”

난생 처음 탄산을 접한 크리시는 제 점막을 따갑게 자극한 음료를 잠시간 노려보다 이비에게 돌려주었다. 레모네이드를 돌려받은 이비는 카르젠에게도 내밀며 물었다.

“카르젠 님도 마셔 볼래요? 레몬주스 같은데 맛있더라고요…….”

일부러 자기도 잘 모르는 음료인 것처럼 말하니 카르젠이 웃으며 사양했다.

“난 괜찮아. 신 음식은 별로 안 좋아하거든.”

“어? 신 거 싫어해요? 처음 알았어요.”

“내가 말하지 않았으니까. 이비는? 이비도 안 좋아하는 음식이 있어?”

어쩐지 다 좋아할 것 같지만. 이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안 좋아하는 음식에 대해 잠시간 진지하게 고민해 본 이비가 대답했다.

“음…… 전 당근이 싫어요. 아, 그리고 물고기도 무서워서 싫어요.”

“저도 당근 싫어합니다.”

“넌 남기지 마. 이비는 다른 거 다 잘 먹으니 남겨도 괜찮아. 그런데 물고기는 왜 무서워?”

당근을 남겨도 된다는 말에 일순 이비의 얼굴이 펴졌지만, 물고기를 떠올렸는지 순식간에 미간이 구겨졌다.

“으으…… 물고기 눈동자나 아가미나 지느러미나 비늘이 징그럽고 무섭더라고요. 아, 입 벌렸을 때 이빨도 무서워요.”

“그 정도면 그냥 어류 자체가 무서운 거 아닙니까?”

“어, 맞아요. 그런데 물고기 외형이 안 보이고 살만 있으면 먹을 수 있어요.”

“한마디로 살만 발라서 요리해 달라는 소리군요. 비늘이랑 지느러미까지 싹 제거해서.”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닌데요… 아니, 어… 네. 맞네요…….”

크리시의 말에 새빨개져 긍정한 이비는 민망함에 레모네이드를 쪽 빨았다. 대화 주제가 바뀌어서인지 카르젠은 평소처럼 자연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꼭 그렇게 요리하라고 휘테커에게 전해 둘게. 곧 겨울이니까 남부에서 다양한 해산물이 올라올 거야. 또 못 먹는 음식은 없고?”

“어… 음…….”

‘헉, 어쩌지? 카르젠이랑 생선 요리는 먹어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저도 모르게 생선이 싫다는 이야기를 한 이비는 내심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기억을 잃은 줄 아는 사람이 먹어 본 적 없는 생선을 무섭다고 하면 의심하지 않을까 싶어 초조함을 감추고 살폈지만, 카르젠은 잔잔한 미소를 지은 채 이비에게 가까이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또 생각나는 게 있으면 언제든 알려 줘. 이렇게 이비랑 대화할 수 있어서 정말 기쁘다. 이비와 같은 꿈을 꾸게 해 주신 에벨루스 님께 감사드려야겠어.”

“…….”

카르젠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눈부신 미소에 이비의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푹 고개 숙인 이비는 작게 끄덕이며 “저도요… 두 분과 대화할 수 있어서… 진짜 좋아요……”라고 웅얼거리듯이 대답했다.

‘오랜만에 목소리 내서 말하니까 진짜 편하고 좋다. 지금이 너무 즐거워서 꿈에서 깨기 싫다고 하면 둘 다 걱정할 것 같으니 이건 말하지 말아야지.’

살풋 미소 지은 이비는 어느새 저들 셋을 제외하곤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 백사장에 앉아 파도 소리를 들으며 두 사람과의 대화를 이어 나갔다.

***

“훌쩍… 훌쩍…….”

“으음…….”

“이…라나드… 흑…….”

“으응… 유사……?”

아기 여우의 칭얼거림에 부스스 눈 뜬 체스터가 제 옆자리를 더듬었다. 손에 닿은 작은 몸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천천히 일어나 앉은 체스터는 제 꼬리를 끌어안고 훌쩍이는 유사의 몸을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유사.”

“이라나드으… 으흐흑…….”

“유사. 유사. 일어나 봐.”

체스터는 잠에서 깨지 못하는 유사의 몸을 안아 들고 도닥여 주기 시작했다. 얼마나 운 건지 얼굴에 눈물 자국이 가득했다. 손으로 젖은 눈가를 훔쳐 주고 다시 유사의 등을 토닥이며 계속 이름을 불러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낑낑대던 유사가 힘겹게 눈을 떴다.

“아우? 체뜨?”

“응. 유사. 무서운 꿈 꿨어?”

무서운 꿈이라는 말에 유사가 칭얼대며 끄덕였다. 체스터는 유사를 안고 계속 일정한 박자로 작은 등을 토닥여 주며 말했다.

“괜찮아. 꿈이야. 그냥 나쁜 꿈이야.”

“우웅… 훌쩍. 훌쩍…….”

체스터는 유사가 진정할 수 있도록 아예 침대에서 일어나 침실을 걸어 다니며 달래 주었다. 평소의 유사라면 이렇게 달래 주면 금세 잠들곤 했는데, 오늘은 꿈자리가 영 사나웠는지 도통 잠들지 못했다.

“잠이 안 와?”

“웅…….”

“잠시 산책 나갈까?”

“앙.”

훌쩍이는 아기 여우를 잠시 침대에 내려 준 체스터는 방 소파에 걸쳐 둔 유사 전용 담요를 가져와 둘둘 말아 주었다. 순식간에 알록달록한 작은 부리또가 된 유사는 체스터가 가운을 입을 동안 침대에 눕혀진 상태로 얌전히 기다렸다.

제법 두툼한 가운을 걸쳐 입은 체스터는 유사 부리또를 안아 들고 제 침실을 나섰다. 침실 밖에는 조금 전 막 교대한 기사 둘이 서 있었다. 체스터는 그들에게 잠시 산책하고 올 테니 편히 대기하고 있으라고 말했다.

긴 복도를 지나 후원 온실까지 가는 내내 유사는 말이 없었다. 체스터는 유사가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였던 기점을 되짚다 보니, 저녁에 세비어 페일리 남작과 콜린 공자와 함께했던 시간이 떠올랐다.

체스터 입장에선 오랜만에 반가운 충신을 만나 남부 이야기도 듣고 여러 유익한 이야기가 오갔던 시간이었다. 특히 늘 남들 모르게 뒤에서 공을 세운 페일리 남작이 그동안 계속 거절했던 포상을 드디어 받겠다고 했기에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가는 상쾌함을 느꼈었다.

남작의 마음이 바뀌기 전 그동안 남작에게 주려고 묵혀 둔 여러 상여 서류에 서명을 하도록 지시하느라 신이 났던 체스터는 유사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던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일사천리로 서류 사인회가 끝난 후. 유사에게 선물로 줄 그림을 직접 건네주라고 했지만, 낯가림 탓인지 여우로 변한 유사는 체스터의 등 뒤에 숨어 나오지 않았다.

페일리 남작과 콜린 공자가 다정하게 먼저 말을 걸어도 흘끔거리기만 하고 그들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

체스터는 유사가 원래 심하게 낯을 가리는 아이라, 리엔과 마이어와 저만 빼고 다른 사람들하곤 대화도 안 한다고 둘러댔다. 결국 유사가 그린 그림도 대신 건넸다.

유사가 낯가림이 심하긴 하지만 상대는 일라나드의 가족들인데, 이렇게까지 숨는 것은 예상 밖이어서 체스터도 당황스러웠다.

이후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한 유사는 차가 식었을 쯤엔 아예 체스터의 등과 소파 사이에 파고들어 숨은 채 바르르 떨기만 했다. 마치 겁에 질린 것처럼.

알현이 끝나고 둘만 남았을 때 왜 그랬냐고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이후 유사는 체스터가 남은 일을 처리하고 침실로 갈 동안 찰싹 붙어 잠만 잤다.

저녁의 일을 떠올리며 온실에 도착한 체스터는 유사가 좋아하는 분수대에 걸터앉아 그새 고인 눈물을 가운 소매로 닦아 주며 말했다.

“꿈에서 일라나드가 나왔어?”

작게 끄덕인 유사가 체스터의 가슴에 볼을 비비며 훌쩍였다. 체스터는 유사의 통통한 볼을 보듬어 주며 물었다.

“어떤 꿈이었는지 나한테도 말해 줄래?”

“우웅, 이찌… 이라나드가 캄캄한 데서 혼자 이써떠…….”

“캄캄한 곳?”

“웅. 그래서 이찌… 이라나드가 우는 것 같아서 유사가 같이 있어 주려구 했는데… 가까이 못 가떠… 기억 안 나는데, 근데 무서워떠…….”

“그래. 괜찮아. 꿈이니까 잊어도 돼. 다 꿈이야. 현실이 아니야.”

다정하게 어르고 달래 주니 아까보단 진정한 유사가 훌쩍이며 체스터를 향해 물었다.

“이찌, 체스…….”

“응.”

“이라나드 아빠랑 동생 이짜나…….”

“응.”

“이라나드 가족이니까…… 착한 인간 맞지?”

그 물음에 체스터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내가 알기론 좋은 사람들이야.”

“우웅… 아라떠…….”

체스터는 유사가 굳이 저런 질문을 한 것이 의아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유사. 그건 왜 궁금해? 나한테만 살짝 알려 줘.”

유사는 잠시 망설이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체스터 역시 주변을 둘러봤다. 저 멀리 성을 순찰하는 기사 둘 외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다 둘러본 유사가 작은 목소리로 운을 뗐다.

“이찌, 이라나드 아빠 옆에…….”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에 체스터는 고개를 숙이고 제 귀를 유사의 입에 가까이 대 주었다. 잠시간 망설인 유사는 결심한 듯이 체스터의 귓가에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라나드 아빠 옆에…… 쪼꼬만 거였는데, 쪼그만데도 엄청 무서운 게 있어떠.”

“조그마한데 무서운 거? 그게 뭔데?”

그 물음에 잔뜩 움츠러든 유사가 낑낑대며 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유사 아빠가 보면 도망가라구 했던 거… 새카만 거…….”

‘마주치면 도망가라고 했던 것….’

체스터는 동대륙 북부를 다스리는 구미호 수장이 제 아들 유사에게 몇 번이고 강조하며 가르쳤던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아직 아기 여우인 아들에게 혹여나 마주치면 상대할 생각 하지 말고 꼭 도망가라고 일러 주었다는 사악한 존재.

과거 노인의 인두겁을 쓰고 나타났던 그것을 떠올린 체스터가 눈을 가늘게 떴다. 흰자위가 보이지 않는 새카만 눈동자로 진액 같은 더러운 눈물을 뚝뚝 흘리던 것은 죽은 몸을 차지하고 들어가 있던 불순하고 사악한 존재였다.

심지어 대상의 기억을 투영해 그 사람의 가슴에 남아 있는, 잊을 수 없는 이를 흉내 내는 악랄함도 가지고 있었다. 체스터는 오래전, 어린 나이에 감당할 수 없는 슬픔으로 스스로 삶을 마감한 4왕자이자 저가 가장 아꼈던 동생을 흉내 내던 존재를 떠올렸다.

‘악귀와 흡사하다고 했었지. 루나 지그하르트에게 조금 더 자세히 물어봤어야 했나.’

지그하르트가 별다른 언질은 없었어도, 악귀가 빠져나간 노인의 시체를 꽤 미묘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던 모습이 아른거렸다. 당시에는 저 기분 나쁜 존재가 뭐든 간에, 여정에 방해가 되지 않으면 굳이 추적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묻지 않았었다. 중요한 이야기라면 그가 언질을 주었을 거라 생각했고, 갈 길이 바빴으니까.

‘지그하르트 님은 대체 어디에 계신 건지….’

주변국들의 정세가 어지러운 시기, 루아인 왕국에 터를 잡은 블랙드래곤이 부재중인 것은 일급 기밀이었다. 통신 수정을 통해 메시지를 보내고 있지만, 답은 아직 오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필리스에서 가장 나이 많은 드래곤 중 하나이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 것 같았지만,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체스터의 손은 착실하게 유사의 등을 두드리고 있었다. 유사는 그 규칙적인 두드림에 하품을 하다가도 자기 싫다는 듯이 도리질하며 몸을 꼬물거렸다. 체스터는 유사가 들려준 이야기를 정리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유사. 유사가 말했던 그 새카만 거.”

“웅.”

“작다고 했잖아? 얼마나 작았어? 어떻게 생겼는지 말해 줄 수 있을까?”

“어… 징짜 작아떠. 이라나드 아빠 팔에….

말하다 만 유사가 꼬물꼬물 담요 안에서 짧은 양팔을 꺼내 제 손목을 빙 둘러 가리키며 말했다.

“요기에 이로케, 팔찌처럼 안개가 있어떠.”

“팔찌처럼… 손목에만?”

“웅.”

“혹시 우리가 예전에. 숲에서 봤던 그 할아버지 같은 거였어?”

유사는 숲에서 봤던 할아버지라는 말에 대번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해! 근데, 근데 이찌, 쪼금 다른 것 같기두 해떠.”

“어떤 부분이?”

체스터가 관심을 기울이며 물으니, 유사가 더 열성적으로 설명했다.

“무서운데, 새카만데, 그런데 어… 어… 그런데 쪼금 빛나써.”

“빛?”

“앙. 까만데… 어두운데, 근데 빛이 나떠. 까만 빛. 그때 하부지는 빛 없어써. 근데, 근데, 이라나드 아빠 손에는 조금, 아주 쪼금 빛나떠.”

더는 표현이 어렵다는 듯이 낑낑댄 유사가 같은 특징을 반복해서 말했다. 시커멓고 무서운데 손목에만 있을 정도로 작았고 빛이 나는 검은 형태. 모든 것을 조합해 본 체스터는 이걸 대체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일단은 아기 여우를 꼭 안아 주었다.

‘일단 에벨루스 신전에 가 볼까. 그래. 가 보자. 뭐든 애매하다 싶으면 신전이지.’

***

이비는 저와 양옆의 남자 둘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는 해변을 둘러봤다. 사람이 하나도 없는 해운대라니. 이상했다. 정신 차려 보니 어느 순간 사람은 모두 증발해 사라져 있었고, 바다와 크리시와 카르젠만 남아 있었다.

‘곧 깨려나?’

얼마 전까진 분명 해가 쨍쨍했는데, 조금 대화를 나눴다고 벌써 노을이 지고 있었다. 세 사람 모두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 붉게 타는 노을이 의미하는 바를. 그렇기에 아쉬운 마음이 컸다. 크리시는 주변을 둘러보며 끄덕였다.

“슬슬 일어날 시간이 된 것 같군요.”

멀리 보이던 고층 빌딩은 몰려오는 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노을과 같은 색으로 물든 불그스름한 구름이 세 사람을 향해 점점 좁혀 오기 시작했다.

이비는 구름 사이로 보이는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다 카르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셋이 나란히 앉아 대화를 시작한 후 카르젠은 내내 이비만 바라봤다. 이야기를 나눌 때도. 점점 구름이 몰려오고 있는 지금도 이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비는 카르젠의 맑고 푸른 눈동자가 오롯이 저만 담은 것을 잠시간 바라보다 입술을 뗐다.

“카르젠 님.”

“응.”

“깨기 전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카르젠은 뭐든 말하라는 듯이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비는 미소 탓에 눈부신 그를 향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전부 다 고맙습니다. 새삼스럽지만, 항상 이렇게 말로 꼭 전하고 싶었어요. 저를 살려 주셔서요. 그리고 보살펴 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정말로… 정말 살고 싶었거든요. 아무리 고맙다고 말해도 제가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다 전해지지 않겠지만, 정말로 고맙습니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그리고 이비의 마음은 이미 충분히 전해졌어.”

카르젠은 실눈을 뜨고 힘겹게 저를 피하지 않는 이비를 향해 여느 때처럼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는데, 이젠 한계인지 고개를 획 돌린 이비가 크리시에게도 인사했다.

“크리시 님도 이것저것 많이 신경 써 주시고, 매번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냥 크리시라고 부르라니까요. 그리고 고마울 거 없습니다.”

이비는 크리시가 카르젠을 아끼다 보니, 카르젠에게 도움이 되는 자신을 겸사겸사 도와주고 있다는 것을 당연히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도 고마운 것은 고마운 거였다. 아무리 제 친구를 위한 일이더라도 그가 자신을 진심으로 염려하고 있다는 것이 잘 느껴졌으니까.

‘2회차 인생 꽤 성공한 것 같아. 차애랑 같이 살고, 최애랑도 안면 트고 지내고. 물론 카르젠 저택 밖에선 뭔가 일이 많이 터지고 있는 것 같아 무섭지만, 밖에 나가지만 않으면 안전하겠지? 이렇게 쭉 평화롭게 살았으면 좋겠다. 크리시도 자주 놀러와 준다면 좋겠는데….’

노을을 담은 구름에 점점 가려지는 눈부신 금파를 보고 있자니, 문득 크리시가 주인공인 BL 소설의 다른 남주가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니 크리시 남친 후보는 누구지? 눈부신 외모의 성기사라고 했는데….’

“쿨럭! 쿨럭쿨럭!”

미래에 제 최애의 연인이 될 수도 있는 인물을 떠올리고 있을 때, 크리시가 갑자기 기침을 했다. 이비는 이전부터 크리시가 잔기침을 자주 하는 것이 걱정스러워 등을 통통 두드려 주며 말했다.

“크리시, 혹시 기관지가 안 좋아요?”

“쿨럭. 아닙니다. 쿨럭, 가끔. 흠흠. 가끔 이럽니다. 어디가 안 좋은 건 아닙니다.”

“그래도 자주 기침하는 것 같아서 걱정돼요….”

“누가 누굴 걱정합니까. 쿨럭. 그냥 사레 든 겁니다.”

괜찮대도 잔기침하는 그의 등을 꾸준히 두드려 주고 있을 때, 카르젠이 이비의 어깨를 감싸 안듯이 끌어당겼다.

반사적으로 돌아본 이비는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는 그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실눈을 떴다. 카르젠은 그런 이비를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크리시는 건강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난 이비가 걱정이야. 춥지는 않아? 점점 바람이 강해지네.”

“어, 네. 딱히 춥진 않은데….”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구름이 몰려와서 그런지 정말 바람이 불었다. 흩날리는 앞머리를 정돈한 이비는 맛은 느껴지지만 추위는 느껴지지 않는 꿈이 편리하다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춥지 않다고 했음에도 카르젠은 여전히 이비의 어깨를 당겨 안고 있었다. 덕분에 이비는 카르젠에게 몸을 살짝 틀어 기대앉은 상태였다.

‘딱히 춥지는 않은데… 이 세계에선 이 정도 스킨십은 평범한 거니까 이러고 있는 거겠지?’

애초에 필리스는 종족과 성별에 구애 받지 않는 세계였으니, 친근감을 표시하는 것도 허물없이 이루어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얌전히 안겨 있으니, 바람 때문인지 구름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시야를 삼키는 구름이 무서울 법도 한데, 어쩐지 평온했다.

이비는 카르젠이 마치 안개에 삼켜지는 것처럼 흐려지는 것을 바라보다 문득 뒤를 돌아봤다. 크리시 역시 구름에 서서히 흐려지고 있었다.

“이제 정말 일어날 시간인가 봐요.”

나지막한 말에 크리시가 먼저 인사했다.

“그런 것 같군요.”

“어떻게 깨야 해요?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되나요?”

혹시나 수정으로 잠들었을 때처럼 깨지 못하면 어쩌나 싶어 불안한 마음에 물으니, 어깨를 감싸 안은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눈 감고 편하게 기다리면 돼. 우린 이비가 깨는 거 보고 나갈게.”

“그게 가능해요?”

“가능할 것 같아. 곁에 있을 테니 안심하고 일어나.”

안심하라는 말에 이비는 카르젠에게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마음을 편하게 먹으니 마치 구름 위에 앉은 것 같은 몽실몽실한 기분이 들었다. 이어 몸이 아주 천천히 회전하는 것처럼 약간의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이윽고 시야가 밝아져 눈을 뜬 이비는 방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화창한 햇살에 미간을 찌푸렸다. 눈을 비비고 주변을 둘러보니, 어제 잠든 대로 카르젠의 방 침대였다.

‘잘 깼구나. 혹시나 못 깨면 어쩌나 했는데….’

카르젠은 아직 눈을 뜨지 않고 있었는데, 그의 얼굴이 퍽 가까웠다. 이비는 카르젠이 저를 안고 있는 것을 뒤늦게 깨닫곤 얌전히 그가 일어나길 기다렸다.

“아… 우으….”

혹시나 싶어 카르젠을 불러 보려 했지만, 역시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칫. 역시 안 되네. 그래도 꿈에서라도 대화한 게 어디야. 평범한 이야기뿐이었지만….’

기억상실이라는 자신의 설정값(?) 때문에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덕분에 일상적인 대화가 주였음에도 이비는 꿈에서의 대화가 굉장히 즐거웠다. 가능하다면 이렇게 종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다음에 또 같은 꿈을 꾸면 좋겠다. 그런데 카르젠은 왜 안 일어나지? 아직 꿈인가? 크리시랑 대화 중인가?’

이비는 잠든 카르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새삼 감탄했다. 어떻게 자는 모습조차 이렇게 멋진 걸까. 역시 괜히 서브 남주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바라보고 있을 때, 카르젠의 눈꺼풀이 살짝 움찔했다.

“…….”

‘깼나?’

면밀하게 관찰해 보니, 입술도 조금 움직인 것 같았다. 그럼에도 카르젠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깬 것 같은데?’

미동 없는 카르젠을 바라보던 이비가 매우 조심스럽게 그의 품에서 빠져나갔다. 천천히 팔을 풀고 옆으로 데굴 굴러 몸을 빼내는 데 성공한 순간.

와락-

“흐읏!”

다시금 제 몸을 끌어안은 팔에 깜짝 놀란 이비가 꺼내 두고 있던 토끼 귀와 꼬리털을 펑- 부풀렸다. 죄지은 것도 아닌데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놀란 가슴을 꾹 누르며 살며시 돌아보니,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카르젠이 보였다.

분명 일어난 걸 아는데 저리 눈 감고 있는 이유를 몰라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그가 팔을 더 당겨 안았다.

“!”

평소처럼 가벼이 감싸 안는 게 아니라, 어깨가 움츠러들 정도로 꽉 당겨 안는 강한 포옹이었다. 당황한 이비가 바르작거리니 후후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낑낑대며 겨우 몸을 돌려 마주 누운 이비는 손가락으로 카르젠의 너른 가슴에 글을 썼다.

-일어나세요.-

“으음… 조금 더 자고 싶은데.”

-아침 식사 해야죠.-

글씨를 알아들은 카르젠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품에 안긴 이비 역시 소리 없이 웃으며 가슴에 이마를 콩- 댔다.

‘조금만 더 빈둥거리지 뭐.’

밤사이 기온이 뚝 떨어진 늦가을의 아침이었지만, 이비는 쌀쌀함을 느낄 수 없었다. 지금은 그저 따뜻하고 포근했다. 게으름 부리기에 딱 좋은 평온한 아침이었다.

약간의 늦잠 후, 카르젠과 크리시와 아침 식사를 마친 이비는 가볍게 씻고 벼락치기로 예법 공부를 하려 했지만, 율리가 욕실로 끌고 오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었다.

‘이 정도면 혼자 목욕하기 아까운데…….’

율리가 준비한 목욕물을 본 이비는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오늘 목욕물이 과하게 느껴졌다. 입욕제를 종류별로 풀어 넣은 건지, 물은 평소보다 훨씬 탁했고 온갖 꽃이 둥둥 떠다녔다.

직전까지 율리에게 겉옷을 뜯기다시피 탈의한 이비는 율리가 파티션 밖으로 나간 후에야 얇은 끈 민소매와 호박 바지 같은 속바지를 벗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욕조에 천천히 들어가 앉으니 온갖 싱그러운 향기가 훅 끼쳤다.

다채로운 향에 기분 좋아진 이비는 물속에서 다리를 살살 주무르며 동동 떠다니는 꽃을 구경했다. 대부분 라넌큘러스와 비슷하게 생긴 꽃들이었는데, 크기는 훨씬 작았다. 동글동글 작고 귀여운 꽃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았다.

‘율리랑 주디가 엄청 흥분했던데, 손님이 후작 부인이라 신경 쓰여서 그런 거겠지? 있다가 둘이 인사하는 거 보고 따라 해야겠다.’

막상 후작 부인을 마주할 생각을 하니 새삼 걱정스러웠다. 시간 있을 때 귀족 예법에 대해 조금이라도 공부를 해 두었어야 했다고 후회하고 있을 때, 파티션 밖에서 율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비 님.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그 물음에 이비는 제 몸을 내려다봤다. 물이 탁해서 욕조 안이 전혀 보이지 않으니 괜찮을 것 같아 욕조를 노크하듯 한 번 두드렸다. 조금 아까 율리와 주디와 정한 신호였는데, 긍정은 한 번, 부정은 두 번이었다.

파티션 옆으로 나타난 율리가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오더니 팔을 걷어붙이며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목욕 시중을 들어 드려도 될까요?”

목욕 시중이라는 말에 기겁한 이비가 물속에 있어 보이지도 않는 가슴을 X자로 가리며 도리질했다. 율리는 당황한 이비를 향해 씩 웃더니 소매를 더 걷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머리만 감겨 드릴게요!”

“…….”

이비는 오늘따라 율리가 신경을 과하게 써 주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머리만이라는 말에 마지못해 끄덕였다. 너무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았고, 무엇보다 율리의 눈에 의욕이 가득했기에 거절한다고 해서 그냥 나갈 것 같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상대가 후작 부인이라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하나 보네.’

율리는 수건을 하나 둘둘 말아 이비의 목 아래 받쳐 주며 그대로 누우라고 했다. 욕조에 편하게 머리를 대고 누운 이비는 율리가 가져온 유리병을 보곤 눈을 꾹 감고 토끼 귀를 집어넣었다.

귀가 쏙 사라지자 율리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달그락 소리가 들리더니 달콤한 향이 훅 끼쳤다. 머리에 샴푸를 해 주는 율리의 손길에 이비는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노곤해짐을 느꼈다.

‘다른 사람이 머리 감겨 주는 거 기분 좋다…….’

얌전히 머리를 맡긴 이비는 욕실에 새롭게 퍼진 싱그러운 향에 눈을 떴다. 양손을 비빈 율리가 이비의 머리를 전체적으로 사악사악 빗질해 주듯 만져 주며 말했다.

“이건 요즘 귀족 부인들 사이에서 엄청 유행하는 향유예요. 모발을 건강하게 해 주는 성분이 들어 있대요.”

이비는 귀부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향유를 왜 저가 바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좋은 거라니 일단 끄덕였다. 머리를 살짝 헹궈 준 율리가 또 다른 유리병을 들고 설명했다.

“이것도 비슷한 건데, 이건 모발과 두피에 좋은 거래요. 이건 두피까지 바르고 헹구지 않아도 되니까 마지막에 전체적으로 마사지하듯이 발라 주시면 돼요.”

이비는 율리가 새로 들인 제품 순서를 알려 주기 위해 일부러 머리를 감겨 주러 왔나 보다 싶어 끄덕였다. 간단한 두피 마사지까지 끝난 후 율리는 새 속옷이 담긴 바구니를 파티션 안쪽에 두고 나갔다.

‘율리한테 미안한데…… 보좌관이 원래 이렇게 호사를 누리는 직업인가? 아! 내가 나중에 카르젠 목욕 시중을 들지도 몰라서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게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비는 율리가 주르륵 세워 둔 병의 순서를 주의 깊게 살피며 머리에 새겼다.

몸이 완전히 풀릴 때까지 느긋하게 목욕을 즐기고, 상쾌한 기분으로 욕실을 나서니 침실에서 율리와 주디가 대기 중이었다.

‘어? 둘이 왜 내 방에…….’

놀란 토끼 눈으로 바라보자 율리가 셔츠를 들고 다가와 말했다.

“이비 님. 이번에 새로 주문했던 옷인데요, 입혀 드릴게요.”

혼자 입을 수 있다고 말하려던 이비는 이번에도 둘의 의욕 충만한 눈빛에 저도 모르게 끄덕여 버렸다. 셔츠는 평소 입던 디자인보다 핀턱이 많이 잡혔고, 소매에 레이스도 달린 것이 조금 화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혼자 입기 어려운 스타일은 아니었다.

셔츠와 7부 정도 기장의 바지를 입고,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부드러운 양말도 신은 이비는 방을 나가려다 주디에게 붙잡혀 빗질을 당했다.

곱슬머리라 대충 빗어 넘기면 알아서 풍성한 스타일이 되어 따로 빗질은 잘 하지 않았는데, 주디의 손길을 받으니 평소보다 훨씬 단정한 머리가 되었다.

‘빗질로 차분해질 수 있는 머리였구나…….’

거울에 비친 제 헤어스타일을 감상하던 이비는 얼굴에 크림을 발라 주는 율리의 손길에 눈을 꾹 감았다.

‘뭐야. 뭔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머리카락을 만져 주는 손길과 얼굴을 찹찹찹 두드리는 손길을 동시에 느끼며 눈을 꾹 감고 있다 보니, 이번엔 차가우면서도 매끄러운 크림이 입술에 닿았다. 율리가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듯 발라 준 크림 향이 좋아 저도 모르게 입술을 핥은 이비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이비 님. 흡수될 때까지 기다리세요. 핥으면 안 돼요.”

혀에서 느껴진 인위적인 맛에 작게 끄덕인 이비가 다시 거울로 제 모습을 살폈다. 입술엔 뭔가 발라서 색이 날 줄 알았는데 평소 색과 다름이 없었다. 다만 더 도톰해 보이고 번지르르한 윤기가 났다.

머리카락에도 뭔가 발랐는지 좀 전보다 컬이 잡혀 풍성하고 깔끔하게 세팅된 상태였다. 주디가 입혀 준 조끼 단추를 잠그고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다듬은 이비는 거울 속의 자신과 눈을 맞추며 심호흡을 했다.

‘조금만 있으면 진짜 만나는구나. 푸른 별의 동향인.’

***

율리를 따라 서재가 아닌 응접실로 안내받은 이비는 소파에 앉아 있는 크리시와 카르젠을 보며 갸웃했다. 준비를 마친 두 사람은 평소와 다를 게 없는 모습이었다.

‘어쩐지 나만 엄청 신경 쓴 것 같은데?’

크리시와 이야기 나누던 카르젠이 막 들어선 이비를 향해 미소 지으며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자연스레 그의 옆에 앉은 이비는 카르젠이 직접 따라 준 차를 받으며 고맙다고 입술로 인사했다. 카르젠은 제 옆에 앉은 이비를 잠시간 바라보다 고개를 가까이 기울이며 말했다.

“머리가 단정해져서 그런가? 오늘은 평소랑 달라 보이네.”

그 말에 찻잔을 내려 둔 이비가 카르젠의 손바닥에 글씨를 썼다.

-오늘 프란제르 후작 부인을 처음 만나는 날이라 그런지 율리랑 주디가 많이 도와줬어요.-

제 손바닥에 쓰인 글을 읽은 카르젠이 다른 손으로 이비의 잔머리를 귀 뒤로 살짝 넘겨 주며 말했다.

“이렇게 단정한 것도 잘 어울린다.”

이비는 카르젠의 군더더기 없는 칭찬에 방긋 웃으며 입술로 고맙다고 말했다.

맞은편에 앉아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차를 마시던 크리시는 평소 잘 먹지도 않는 마들렌을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차가 썼다. 뭐라도 씹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레몬 향이 진한 마들렌을 삼킨 크리시는 회중시계를 꺼내 보며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곧 오겠군.”

“응. 곧 도착할 거야.”

“하…… 안 되겠어. 이비. 저를 좀 도와주시죠.”

‘도와달라고? 내가? 크리시를?’

이비는 제 최애의 도움 요청에 어리둥절한 것도 잠시, 곧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다 도와주겠다는 의지가 분명한 표정이었다. 크리시는 비장한 눈빛을 한 이비에게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곧 프란제르 아리스 후작 부인이 도착할 겁니다.”

끄덕.

“아리스는 카르젠과 체스터와 저와 유년 시절부터 꽤 친한 사이였지만, 지금은 유감스럽게도 사이가…… 좀 미묘합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가 저를 보면 일단 주먹을 쥐고 보는 사이라고 할 수 있죠.”

‘그 정도야!?’

불현듯 집사 바론이 정리해 둔 각 가문 문헌 내용이 떠올랐다.

<프란제르 후작가 응대 주의 사항: 프란제르 후작 부인 앞에서 절대 에벨루스 신의 이름을 꺼내거나, 프리스트 크리시의 이름을 꺼내지 말 것.>

무려 붉은색 잉크로 쓰여 있던 부분이었고, 크리시가 관련된 기록이었기에 이비는 저 부분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사이가 안 좋은 건 알았는데, 주먹다짐할 정도로 사이가 안 좋았다니!’

답지 않게 잔뜩 긴장한 크리시를 보고 있자니, 이비 역시 덩달아 긴장됐다. 하지만 크리시가 제게 부탁할 것이 있다는 말에 정신 차리고 비장한 얼굴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크리시는 결의에 찬 이비의 눈빛을 확인하곤 힘겹게 입술을 움직였다.

“아리스는 겉보기와 다르게 정말 강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어린아이들이나 노약자, 또는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 절대 힘을 휘두르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죠.”

끄덕.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이비는 누가 봐도 약해 보이죠.”

끄덕끄덕.

“즉, 당신은 아리스가 함부로 힘을 휘두르지 않을 대상에 포함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끄덕.

“그러니, 제가 당신 뒤에 좀 숨어 있어야겠습니다.”

이비가 힘차게 끄덕이려 할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크리시에게 일갈하려던 카르젠이 들어오라 하자 할리스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도련님. 포털 신호가 왔습니다.”

“예정보다 빠르군. 마중 나가도록 하지.”

자리에서 일어난 카르젠이 이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비는 자연스레 카르젠의 손을 잡고 일어나며 크리시를 바라봤다. 아리스와의 만남이 큰 부담이었는지, 크리시는 이제 다리까지 달달 떨며 말했다.

“아니다. 생각해 보니 난 여기에 있는 게 좋겠어. 역시 그건 카르 너한테 맡길 테니 네가 보여 주고…….”

“나가자. 포털 열어 줘야 해.”

중간에 말을 자른 카르젠이 이비를 에스코트하며 응접실을 나섰다. 블랙 드래곤 앞에서도 당당했던 전설의 프리스트인 크리시가 저렇게 긴장한 모습을 처음 본 이비는 덩달아 긴장해 저도 모르게 카르젠의 팔을 꾹 잡았다.

“이비. 걱정할 거 없어. 아리스는 무서운 사람이 아냐. 크리시와 사이가 조금… 음…… 미묘해서 그렇지, 나쁜 건 아냐. 조금 소동이 생길 수도 있지만, 크리시는 괜찮을 거야. 에벨루스 님이 보호해 주실 테니까.”

“!!!”

‘에벨루스 님의 보호까지 받아야 할 수준인 거야? 안 되겠어! 역시 내가 크리시 앞에 서 있어야겠어!’

알파3과 둘만의 대화를 위해 일단 첫인상으로 점수를 따야 했지만, 제 최애가 맞고 산다면 말이 달라졌다. 일단 크리시를 지켜야겠다고 판단한 이비는 보다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

입술을 앙다문 이비를 지켜보던 카르젠은 오해를 정정해 주려 했지만, 다가온 크리시가 이비의 뒤에 바짝 붙어 서는 바람에 침음을 삼켰다.

“이비. 기억하세요. 제가 이 저택에서 믿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입니다.”

“!”

크리시의 애절한 말을 들은 이비의 눈빛에 용맹함이 서렸다.

‘내 최애는 내가 지킨다.’

***

몇 번이고 피를 토해 낸 카르젠은 제 앞을 막아선 리엔의 등을 올려다봤다. 굳건히 버티는 그녀의 곁에 서기 위해 검으로 땅을 짚고 일어나려 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떻게든 일어나려 안간힘을 쥐어 짜내려는 순간….

-카르젠. 일어날 필요 없다.

-!!!

뚜벅뚜벅

-리엔. 그만 검을 내려라. 더 버틸 필요 없다.

포기하라는 것이냐고. 절대 그렇게 못 한다고 외치려던 리엔은 제 옆을 지나가는 지그하르트의 눈빛을 보자마자 울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리엔의 옆에서 겨우 버티고 있던 체스터는 지그하르트와 눈을 마주친 순간 버티는 것을 포기하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체스터와 리엔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검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선두에서 술법진으로 어떻게든 버티던 루는 입가에 흐르는 피를 방치한 채, 지그하르트를 향해 힘겹게 물었다.

-결정한 것이오?

지그하르트는 묘족 장로를 내려다보며 여상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한가로운 고갯짓에 루가 허허 웃으며 지팡이를 내렸다. 그리곤 쓰러지지 않기 위해 지팡이로 땅을 짚고 버티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긴 토끼 귀가 축 늘어진 루를 지나친 지그하르트가 최전방에 섰다. 아직 지그하르트의 정체를 모르는 마계의 소환물들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림자 신의 독이 통하지 않는 상대라는 것만으로도 경악스러웠는데, 그의 기백이 너무도 대단하여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그 진동이 마치 지진처럼 느껴졌다.

일행들과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진 지그하르트는 크리시와 에밀리를 향해 돌아보며 눈짓을 보냈다. 둘은 자신들의 신력을 모두 끌어모았다. 푸르스름한 은빛과 붉은빛의 두 실드가 높이 솟아오르다 돔 형태가 되어 그들의 일행을 보호하듯 감싸 안았다.

마계의 소환물들은 자신들의 독을 막아 주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거대한 신력을 끌어내는 행위에 의아함을 느꼈다. 신력으로는 신력을 막을 수 없다. 제아무리 중급 신이라 해도 이 독 역시 신의 힘이었다.

그들이 무엇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신력을 꺼냈는지 모르는 마계 소환물들이 고개 까딱거렸지만, 지그하르트는 그들이 뭘 생각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제 뒤에 펼쳐진 실드 안을 지그시 바라볼 뿐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이 실드 안의 미물들이 그의 안에 제멋대로 들어와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이. 그는 그 시작을 떠올려 보려 했으나 기억나지 않았다. 저들 마음대로 제 안에 파고들어 와 앉았으니, 알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여겼다.

‘그래봤자 한낱 미물들과의 찰나의 동행일 뿐이거늘…….’

그는 이내 기억을 더듬는 것을 멈추고 어이가 없다는 듯 작게 실소하였다.

‘이 보잘것없는 동행을 나는 이제 추억이라 부르게 되겠군.’

지그하르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이들과 함께 시간은 빛처럼 빠르게 지나갈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광속의 시간을 영원처럼 온전히 기억하기로 결심했다.

잠시간 고민을 끝낸 지그하르트는 어설프게나마 제 안에 멋대로 머물다 떠난 미물들의 흉내를 내보기 시작했다.

-성가시고 하찮은 녀석들아, 두려워 마라. 이 지그하르트가 지켜 주겠다.

환하게 미소 지은 그가 순수한 블랙드래곤의 힘을 개방했다.

숲의 마법사 10권 28~29페이지 中

***

어쩌다 보니 크리시를 뒤에 달고 걷게 된 이비는 카르젠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저택 뒷마당으로 향했다.

“이비. 지금은 아니지만 곧 이비에게 저택 관리를 맡길 예정이니 텔레포트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둘게. 이비가 알아 둬야 할 텔레포트 포털은 앞마당에 하나, 내 서재에 하나, 뒷마당에 하나씩 총 세 개야. 이비도 본 적 있는 앞마당 포털은 왕성 후문 바로 밖과 이어져 있어. 서재 포털은 체스터의 집무실과 이어져 있고. 나를 제외하면 이 포털을 사용할 수 있는 포털 스톤을 가진 사람은 체스터와 왕실 제2기사단 단장 리엔 뿐이야.”

이비는 이전에 체스터가 유사를 데리고 왔던 날, 급하게 부른 궁성 의원 하렌델과 함께 돌아갔던 앞마당 텔레포트를 떠올리며 끄덕였다.

“지금 가는 좌표는 온실 뒤야. 온실 뒤 포털과 연결된 반대편 좌표는 자주 바뀌어. 보통 설계자가 직접 지정한 위치로 바뀌는데, 포털 설계자는 블랙드래곤 지그하르트 님과 화이트드래곤 엘리시드 님이야. 뒷마당 포털은 거의 사용하지 않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지만 혹시나 새 작물을 심고 싶으면 곧 보게 될 위치만 피해 주면 돼.”

카르젠의 설명에 열심히 끄덕이던 이비는 화이트드래곤이라는 말에 갸웃했다. 이비가 알기로는 <숲의 마법사> 원작에선 주인공 일행과 연을 맺은 것은 오직 블랙드래곤 지그하르트뿐이었다. 그것도 꽤 후반에서야 주인공 일행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는데 그 말고도 인간과 연을 맺은 드래곤이 있다니, 처음 듣는 이야기에 이어질 설명을 기다렸다.

‘원작에선 지그하르트 이야기만 나왔지. 레드드래곤도 아주 조금 나왔지만 따로 연을 맺진 않았고. 알파3이 화이트드래곤이 준 로브 덕분에 납치당하지 않았다고 했던 걸 보면 프란제르 후작가와 인연을 맺은 드래곤인가?’

화이트드래곤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이비가 귀를 쫑긋 세우고 기다리니 이번엔 등 뒤에서 크리시가 설명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드래곤에 대해서도 잊었을 테니 잘 모르겠군요. 현재 필리스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드래곤은 드래곤 로드입니다. 그다음으로 블랙드래곤 지그하르트, 그다음이 화이트드래곤 엘리시드 순입니다. 그리고 화이트드래곤은 드물게 제 소유권을 주장한 드래곤입니다.”

‘소유권?’

전혀 예상 못 한 단어에 뜻을 가늠하려 할 때, 이번엔 카르젠이 설명을 이었다.

“엘리시드 님은 루아인 북부 영지의 일부를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하고 계셔. 드래곤 레어가 있는 북부를 화이트드래곤의 땅으로 인정한다면, 그 땅의 종족을 지켜 주겠다고 선언하셨지. 덕분에 뜻하지 않게 루아인에 소속된 최초의 드래곤이 된 셈이야.”

이비는 드래곤이 부동산 권리를 주장했다는 것으로 이해하며 끄덕였다.

“덧붙이자면, 드래곤은 다른 종족을 굳이 보살피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 화이트드래곤은 북부 땅이 마음에 들었는지 터를 잡겠다고 공식 선언했고, 루아인 선대왕과 인연을 만들었습니다. 오랜 세월 이어진 인연은 우정이 되었고 약 300여 년 전, 화이트드래곤이 루아인에 뿌리내리겠다고 선언했습니다. 5년 전 수면기에 들어갔지만, 이 땅에 드래곤이 잠들어 있으니 엘카사트 제국도 루아인 왕국을 함부로 건드리진 못하게 됐습니다. 하나의 드래곤은 신보다 강하니까요.”

“!?”

신보다 강하다는 말에 놀란 이비가 뒤를 돌아봤다. 이비와 눈을 마주친 크리시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좀 신학적인 개념의 농담 아닌 농담입니다. 가장 많은 이들이 섬기는 태양의 신 아르카라스, 붉은 달의 신 칼리아르, 푸른 달의 신 에벨루스 님과 같은 존재는 중간계에서 살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졌습니다. 즉, 일반적인 상식을 초월한 신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너무 강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간계에서 그들이 기침만 해도 대륙 하나가 날아간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죠.”

‘여긴 신도가 많을수록 신의 힘이 강한 세계였지. 그래서 고대부터 하늘에 있는 태양, 붉은 달, 푸른 달 이 셋이 태초의 신으로 가장 강하다고 했었고. 붉은 달은 원작대로라면 약해졌겠지…….’

<숲의 마법사> 원작에서 서술된 붉은 달의 신은 신들의 어머니가 빚어낸 미물들을 너무 사랑했다. 하찮은 미물들이 고통받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스스로 중간계에 개입한 존재였다. 그리하여 신으로서 많은 권능을 잃었고, 오랜 세월에 걸쳐 점점 약해진 신으로 묘사됐었다.

‘나중에라도 크리시한테 자세히 듣고 싶다. 신학 공부도 재미있을 것 같아. 그나저나 화이트드래곤이라니, 체스터가 믿는 구석이 있었구나.’

<숲의 마법사> 원작에서 체스터가 엘카사트 대제국의 황제를 대놓고 도발한 장면을 떠올린 이비는 체스터가 다 계획이 있어서 그랬구나~ 납득하며 경청했다. 크리시는 이비가 생각을 정리한 타이밍에 맞춰 설명을 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초월의 경지에 오른 신은 신들의 세계인 천상계에서만 머물게 되며 중간계에 큰 힘을 행세할 수 없습니다. 초월 신이 권능을 남용하면 책임이 따르기 때문에 신들은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범주 내에서만 중간계에 간섭하죠. 물론 초월 신 말고 하급이나 중급 신도 다수 존재하며 중간계에서 힘을 쓰기도 합니다만, 그들의 힘은 중간계 종족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크리시의 설명이 잠시 멈추자 이비는 끄덕이며 생각을 정리했다. 필리스 세계의 신은 초월 신과 그 밑에 하급, 중급, 상급 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특히 중급이나 하급은 그 수가 꽤 많은 편이었다.

‘중급이나 하급 신은 능력이 하찮은 게 대부분이었지만…… 나도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카르젠 얼굴을 열심히 믿어서 얼굴의 신으로 개화할 수 있게 시도해 봐야지. 그럼 혹시 내가 갑자기 죽거나 사라지게 됐을 때 카르젠이 스스로 슬픔을 정화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비는 이미 한 번 죽어 봤기에 오히려 죽음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이번 생은 가늘고 길게 사는 게 목표였지만,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저가 장수하는 종족이면 카르젠 곁에서 오래 살 수도 있겠지만, 종족과 별개로 갑작스러운 사고나 병으로 어느 날 쉽게 죽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설명을 잠시 멈췄던 크리시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싶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음…… 이야기가 좀 샜군요. 신에 대한 건 다음에 따로 설명해 드리죠. 다시 드래곤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면, 드래곤은 중간계에 속한 종족이기 때문에 자신의 힘에 대가성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존재입니다. 모든 것을 초월할 만큼 강인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 사실상 신이 강림하지 않는 한 드래곤이 이 중간계에서 가장 강하다고 볼 수 있겠죠. 그래서 신보다 강하다는 농담 아닌 농담이 생긴 겁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열심히 끄덕인 이비는 크리시와 카르젠의 인맥에 내심 감탄했다.

‘화이트드래곤은 수면기에 들어가서 여정에 함께하지 못했구나. 여기서 계속 살다 보면 언젠가 나도 드래곤을 만날 수 있을까?’

신과 드래곤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으며 넓은 뒷마당을 걷다 보니 벌써 온실이 보였다. 이비는 온실 뒤로 일렁이는 아지랑이 같은 현상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비, 보여? 저기가 포털 좌표로 등록된 곳이고, 허공에 일렁이는 것처럼 보이는 건 공간이 뒤틀린다는 것을 뜻해. 반대편에서 벌써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지.”

이비는 카르젠의 설명에 제 옷자락을 꾹 잡아 쥐는 크리시의 손길을 느꼈다. 아직 전이받고 있는 상태라 그런지, 극도의 긴장 탓인지 크리시의 손은 볼품없이 떨리고 있었다.

“저택으로 오는 포털을 열어 방문자를 들이는 것은 나만 할 수 있어. 만약 여기서 공간 뒤틀림이 보여도 지그하르트 님이나 엘리시드 님이 아니면 내 허락 없이 들어올 수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카르젠이 차분하게 설명하고 있을 때, 허공이 확 찌그러지듯 거칠게 일렁였다. 그 모습을 본 크리시가 이비의 뒤에 찰싹 붙어 말했다.

“카르, 빨리 열어. 아리스 화났나 봐. 쟤 포털 패고 있는 거 같아…….”

‘허? 지금 찌그러진 게 설마 반대편에서 주먹으로 때려서 그런 거야?’

그러고 보니 퍽퍽 찌그러지는 형상이 누군가 투명한 비닐 장막 밖에서 주먹으로 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저 기이한 뒤틀림을 본 크리시가 이비의 어깨를 잡고 뒤로 당겼다. 이비는 저도 모르게 크리시를 보호하듯 양팔을 살짝 벌리며 물러섰다.

이비의 손을 놓은 카르젠이 홀로 뒤틀리는 지점으로 다가가니 허공에 푸른 글자들이 맴돌았다. 그가 손을 뻗자 글자가 전부 한 지점에 모이며 푸른빛을 냈다. 이어 빛을 따라 마치 지퍼라도 열리듯 세로로 쭉 공간이 찢어지기 시작했다.

벌어진 틈새에서 강한 바람이 새어 나와 카르젠의 머리카락이 마구 흩날렸다. 점점 거세지는 바람에 눈을 가늘게 뜬 카르젠이 손을 내밀자 갈라진 틈새에서 새하얀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

하얀 손이 카르젠의 손을 맞잡은 순간, 공간이 더 벌어지며 연분홍색 머리의 소녀가 틈새를 비집고 나왔다. 그녀의 양쪽 발이 땅에 사뿐히 닿자 카르젠이 먼저 인사했다.

“오랜만이야. 아리스.”

“카르!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추워 죽을 뻔했잖아!”

앙칼지게 말해도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사랑스러운 목소리였다. 카르젠은 그런 아리스를 향해 생긋 웃으며 사과했다.

“미안해, 아리스. 그래도 제때 열었으니 용서해 줘.”

그렇게 말하며 옆으로 비켜서니 틈새에서 밀 빛 머리의 청년이 따라 나왔다. 청년의 몸이 다 나온 것을 확인한 아리스는 갈라진 틈새로 팔을 쑥 집어넣더니 제 몸보다 큰 가방을 끄집어냈다.

‘무슨 지퍼도 아니고…….’

이비는 좁은 틈새에서 거대한 여행 가방을 몇 개나 꺼내는 모습을 신기하게 지켜봤다. 밀 빛 머리의 청년 역시 거들었고 가방을 다 끄집어내자 카르젠의 손짓에 틈새가 바로 닫혔다.

다물어진 틈새가 완벽하게 소멸하자 거센 바람이 멎고 일렁임도 사라졌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카르젠이 이번엔 양팔을 벌리며 환하게 웃었다.

“어서 와. 아리스.”

카르젠의 가슴께 정도로 오는 아담한 아리스는 허리에 손을 착 올리고 흘겨보다 이내 그 품에 안기며 등을 토닥였다.

짧은 포옹 후 카르젠을 먼저 놓아준 그녀는 뒤에 이비와 크리시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이비는 크리시가 바짝 긴장한 것을 느끼고 팔을 조금 더 벌리며 앞을 막아섰다.

“크리시. 오랜만이다?”

담담하게 인사를 건넸을 뿐인데도 크리시는 눈에 띄게 흠칫했다. 이비는 제 뒤에 크리시가 뻣뻣하게 굳으니 덩달아 긴장하며 침을 꼴깍 삼켰다.

크리시에게 인사를 건넨 아리스는 이번엔 이비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잠시간 이비를 살피다 곧 흥미롭다는 눈빛을 감추지 않은 채 묘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카르. 소문의 그 사람인가 보네? 소개해 줄래?”

얼핏 보면 사랑스러운 미소였지만, 이비는 어쩐지 그녀의 눈빛이 날카롭고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저 맑은 눈동자가 마치 제 속을 다 꿰뚫어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뭐, 뭐지? 알파3 조금… 어, 조금 많이… 싸한데……?’

아리스와 시선을 마주한 이비는 바짝 긴장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녀의 눈동자가 꺼림칙했다.

겉보기엔 차가운 북부 남자도 사르르 녹일 만큼 사랑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음에도 마주하는 것 자체가 부담으로 느껴지는 날카로움과 묵직함이 있었다. 무의식중에 이비의 짧은 토끼 귀가 바짝 누웠다.

이비는 긴장으로 몸이 굳은 와중에도 제 뒤에 크리시가 걱정됐다. 제 최애가 왜 아리스를 무서워하는지 조금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무렵, 귓전에 혀 차는 소리가 들리며 크리시가 앞으로 나섰다.

이비는 저와 아리스 사이에 선 크리시의 등을 보고 귀를 쫑긋 세우며 다시 그의 앞으로 가려 했지만, 크리시가 팔을 뻗어 저지하며 말했다.

“눈에서 브레스 나오겠다. 이 사람이 심약한 사람이라는 소문은 못 들었나 봐?”

“어머나…….”

작은 감탄사에서조차 위압감이 느껴졌다. 이후 두 사람이 별다른 대화 없이 마주 보고 서 있기만 하자 이비는 조심스레 크리시의 옆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리스는 조금 전보다 한층 부드러워진 눈빛으로 크리시와 시선을 맞추고 있었는데, 크리시는 별다른 말 없이 아리스를 응시했다.

‘뭐지? 둘이 눈싸움이라도 하나? 기 싸움? 진짜 사이 안 좋은가? 어쩌지? 내가 말려야 하나? 카르젠은 왜 가만히 있는 거야?’

두 사람이 대화 없이 마주 보고 있기만 하자 더 초조해진 이비가 슬쩍 카르젠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아리스의 옆에 서 있던 카르젠은 어떻게 좀 해 보라는 이비의 간절한 눈짓에, 잠시간 웃음을 참아 내고 입을 열었다.

“아리스. 크리시. 둘이 정답게 인사 나누는 모습을 보니 정말 기쁘다. 체스터도 이 훈훈한 장면을 봤어야 하는데. 다음에 오랜만에 다 같이 모이는 것도 좋을 것 같네.”

‘대체 어디가 정다운데?’

혼란해하는 이비에게 다가온 카르젠이 긴장해 굳은 어깨를 감싸 잡으며 아리스에게 가까이 데려갔다. 어쩔 수 없이 아리스 앞에 서게 된 이비는 긴장하다 못해 주눅 들어 본능적으로 카르젠의 옷 허리께를 꾹 잡아당겼다. 가녀린 어깨를 다정하게 보듬은 카르젠이 아리스에게 이비를 소개했다.

“아리스. 앞으로 자주 볼 테니 정식으로 소개할게. 내 곁에서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이비라고 해. 이비는 목소리를 낼 수 없기 때문에 대신 소개하는 걸 이해해 줘.”

아리스와 다시 눈을 맞춘 이비는 그녀가 살풋 미소 짓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프란제르 칼라일은 사랑이 뭔지 모르는 소년이었다. 아리스를 만나기 전까진.』

<숲의 마법사>에서 프란제르 칼라일 후작이 어린 시절 아리스에게 반했던 짧은 회상 장면이 연상되는 미소였다.

조금 전 느꼈던 찌르는 듯한 날카로움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녀의 화사한 미소 덕분에 주변이 만개한 꽃밭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이번엔 다른 의미로 당황한 이비가 무의식중에 침을 꼴깍 삼키자 카르젠이 소개를 마저 이었다.

“지금은 잠시 요양 중이지만, 회복하면 내 보좌관으로 쭉 함께 지낼 예정이야.”

후작 부인에게 어떻게 인사해야 할지 모르는 이비는 이 순간, 자신이 말을 못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심스럽게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니 이번엔 아리스가 제 소개를 했다.

“프란제르 아리스라고 해요. 카르와는 아카데미 시절부터 우정을 나눈 친구랍니다. 앞으로 머무는 동안 잘 부탁해요.”

뜻밖의 존대에 당황한 이비는 저도 모르게 습관대로 작게 끄덕였다가 상대가 후작 부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바로 꾸벅 고개 숙였다. 아리스는 그런 이비를 향해 생긋 웃어 보이곤, 카르젠에게 옆에 청년을 소개했다.

“그리고 여긴 내 전담 셰프 제논이야. 제논은 독특한 이국의 음식을 개발하고 있어. 오늘 점심에 제논의 솜씨를 보여 주고 싶은데, 괜찮겠지?”

“물론이지. 휘테커도 기대하고 있어.”

카르젠이 바로 긍정하자 밀 빛 머리의 청년이 예의 바르게 허리 숙여 깍듯이 인사하며 제 소개를 했다.

“제논입니다. 다채로운 이국의 맛을 연구 중입니다. 머무는 동안 주방을 허락해 주신 만큼 노력하겠습니다.”

“고개 들게. 아리스가 그대에 대해 얼마나 칭찬하던지, 오늘을 학수고대했다네.”

다채로운 이국의 맛이라는 말에 이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고 보니 나 여기서 양식만 먹었어! 이국 요리라니, 어떤 요리일까? 혹시 동대륙 요리일까? 원작에서 동대륙은 아시아 같은 느낌인 것 같았는데!’

음식 이야기에 눈이 반짝반짝해진 이비를 물끄러미 보던 아리스가 곤란하다는 어투로 말했다.

“그나저나 카르의 손님이 소문으로 듣던 것과 많이 달라 큰일이네… 체스터에게 들은 이야기로 유추했을 때 마침 유사 경과 비슷한 또래라고 생각이 들어서…….”

‘뭐어? 유사 또래라니! 체스터, 대체 날 어떻게 설명한 거야!’

꽤나 당황스러운 말이었지만, 상대가 카르젠의 친구고 후작 부인이라 애써 표정 관리를 하고 있으니 아리스가 말을 이었다.

“아, 다른 의미는 아니랍니다. 그저 제가 준비해 온 선물이 연령에 맞지 않을 것 같아 조금 아쉬워서…… 그래도 괜찮다면 받아 주시겠어요?”

‘선물?’

한마디로 연령대를 오해해 맞지 않는 선물을 준비했다는 뜻이었다. 아리스가 일부러 제 선물을 챙겨 왔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더 놀라운 것은 크리시를 대할 때와는 천차만별인 태도였다.

혹시나 이비가 기분 상했을까 봐 차분히 해명하는 목소리는 굉장히 상냥했다. 조금 전 위압감이 대단했던 모습은 떠오르지도 않을 정도로.

‘으음… 그래. 첫인상으로 사람을 다 파악했다고 믿는 건 오만한 거야. 게다가 일부러 내 선물을 따로 준비했다니, 처음부터 내가 보좌관인 걸 알고 잘 지내려고 신경 썼을 수도 있고…….’

분명 아리스에 대한 첫인상은 싸하고 무서웠지만, 눈빛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생각한 이비가 꾸벅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래. 카르젠의 친구잖아. 좋은 사람이겠지.’

***

뒷마당에서 인사를 마친 이비는 제 방 침대와 하나가 된 상태였다. 점심 전까지 꼭 침대에 누워 있으라는 크리시의 당부 때문이었다.

‘아직 전이 중이니, 나 때문에 크리시가 많이 힘들겠지. 얌전히 있어야지. 선물이나 보면서.’

“와~ 이비 님. 부러워요. 이거 아직 서점에도 안 들어온 초판본이네요!”

“표지도 너무 예뻐요. 안에 그림도 너무 아름답고요!”

이비는 제 침대 옆에 의자를 끌고 와 앉은 율리와 주디를 보며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프란제르 아리스가 이비에게 선물로 준 것은 아직 출판되지 않은 동화책 세트였는데, 안에 그림도 컬러로 인쇄된 고급 양장본이었다.

<미남과 야수>, <인어 왕자>, <선남과 나무꾼>, <파란 모자>, <잠자는 숲속의 왕자>

‘지은이 오카네 잇파이…… 알파3의 동화용 필명인가 보네?’

머니마니 달러스에 이어 합당한 의심이 드는 필명이었다.

‘체스터랑 사교계에서 어떤 이야기를 들은 건지 모르겠지만, 소문만큼 내가 어리지 않아서 당황했나 보네. 그래도 선물을 준비했다는 건, 알파3도 내게 관심이 있다는 거겠지?’

자신의 이야기가 사교계에 퍼졌다는 것보다, 아리스가 얼굴도 모르는 제 선물을 따로 챙겨 왔다는 부분이 더 놀라웠다. 선물을 준비한 이유는 모르지만, 이 정도면 둘 사이의 첫 출발이 좋다고 생각했다.

머니마니 달러스가 책으로 이야기해 주었던 <푸른 별의 동향인>에 속하는 이비는 그녀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사소한 것부터, 최근 이 세계의 정세까지 전부 다 듣고 싶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빌런 <리치>에 대해 이야기 나눌 상대가 필요했다. 리치에 대해 카르젠이나 크리시에게 말한다면 두 사람 입장에선 기억 상실인 사람이 그런 정보를 어떻게 알고 있냐며 의심할 게 뻔하지만, 아리스에게 같은 빙의자라고 터놓고 비밀리에 말해 준다면 그녀가 알아서 해결할 만한 거물들에게 전달하고 대책을 세워 줄 것 같았다.

또한 최근에 아리스를 습격하려 했던 마법사가 정말 리치라면, 이비가 가진 정보가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내가 여기에 온 후로, 처음으로 도움이 될지도 몰라. 알파3에게 떠넘기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내 처지에 어쩔 수 없어. 난 내 몸 건사하기도 바쁜걸… 카르젠에게 도움이 되는 이유도 빨리 알아내야 할 텐데…….’

이비는 저가 이전 삶에서 숱하게 많은 소설로 봤던 빙의자들처럼 치트 키가 없었기에, 저 하나 구제하는 건 물론이고 제 은인인 카르젠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 게 늘 마음에 걸렸다. 물론 그게 제 잘못이 아니어도 이비는 카르젠에게 일종의 부채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자상한 카르젠은 이비가 곁에 있으면 제 몸이 건강해지니 그거로 충분하다고 말해 주었지만, 오히려 그게 더 큰 문제로 느껴졌다.

‘이러다 만약 어느 날 갑자기 카르젠의 건강에 도움을 줄 수 없게 되면…….’

닥치지 않은 미래를 상상한 것만으로도 아찔해졌다. 카르젠은 분명 심각할 정도로 자애로운 사람이지만, 제 몸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을 곁에 두고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줄 만큼 한가한 사람도 아니었다. 이비는 카르젠이 저를 물가에 둔 솜사탕처럼 극진히 대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확실히 신력은 아냐. 그러니 내가 무슨 재주로 카르젠의 슬픔 해소에 도움 주는 건지 그 방법을 알아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도움은커녕, 납치 미수 사건이나 수정 사건 등을 생각하니 양심이 콕콕 찔리는 기분이었다. 바쁜 그가 저를 위해 할애했던 시간을 떠올려 본 이비는 한숨을 쉬었다. 그를 도와도 모자랄 판에 사고만 치고 다닌 게 더 죄스러웠다.

‘일단 어떻게든 알파3과 개인적으로 대화할 자리를 마련해야겠어. 아, 미리 쪽지라도 쓰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네.’

필리스에서 사람을 많이 만나고 다닌 것은 아니지만, 카르젠이나 크리시를 제외한 사람들은 대부분 이비의 입술을 읽지 못했다. 유사의 경우엔 읽긴 했지만, 제 입술에 굉장히 집중하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역시 쉽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래. 일단 쪽지로 먼저 대화하자고 청하고, 지구에서 왔다고 밝히는 거야. 그리고 자연스럽게 리치에 대해 털어놓자. 음… 첫인상이 좀 무섭긴 했지만, 내가 먼저 예의 바르게 대하면 괜찮을 거야… 아마도…….’

이비는 꿰뚫어 보듯 날카로웠던 그녀의 시선이 여전히 신경 쓰이고 무서웠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아리스보다 리치가 훨씬 더 무서웠다.

리치가 무서운 이유도 여러 가지였지만, 삶에 대한 어마어마한 집착으로 타인의 목숨을 벌레만도 못하게 보는 잔혹함이 제일 무서웠다. 이전 삶에서 원작을 읽을 때, 리치가 나오는 부분이 너무 잔인해 제대로 눈 뜨고 읽지도 못할 정도였다.

‘어으, 생각하니 소름 돋아. 생각하지 말자. 아리스에게 리치에 대한 정보를 알려 주고, 원작처럼 지그하르트가 처리하게 하면 될 거야! 리치가 잡힐 때까지 난 절대 집 밖으로 나가지 말아야지. 원래 집 밖은 위험해.’

돌이켜 보면 원래 빙의자란 그런 법이었다. 주인공이 아무리 강한 호위 기사를 붙여 줘도 한눈판 사이 사건에 휘말리는 게 빙의자의 일이었다. 또는 소드 마스터인 주인공과 외출한다 하더라도 빙의자는 늘. 늘. 언제나 꼭 밖에서 위험에 휘말렸다. 새삼 혼자 도시락 싸 들고 외출했던 날을 떠올린 이비가 바르르 몸을 떨었다.

‘그땐 진짜 무슨 배짱으로 혼자 나간 건지, 으…… 이젠 카르젠이 나가자고 해도, 축제가 아닌 이상 안 나갈 거야. 아니지. 축제도 가면 안 돼. 집사 할아버지가 돌아오면 저택에서 보좌관 공부하고, 카르젠 일 돕고 책이나 읽어야지.’

리치가 잡힐 때까지 칩거 라이프를 다짐한 이비는 <인어 왕자> 책을 집어 들었다. 표지를 보니 푸른빛이 맴도는 은박으로 파도를 세공해 넣어 굉장히 고급스러워 보였다. 책장을 넘기니 예쁜 그림이 먼저 나왔다. 청초한 미남 인어가 큰 배 갑판에 앉아 있는 멋진 왕자를 바라보는 그림이었다.

‘음… BL 동화구나…….’

필리스에서 동성 간의 연애나 결혼이 딱히 특이한 일은 아니었지만,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다 온 이비는 동성 커플 동화책을 처음 접해 다소 생소하게 느껴졌다.

‘생각해 보면 누군가를 좋아하는데 성별이 벽이 되는 세상이 이상한 거겠지…….’

고급스러운 종이로 인쇄된 책장을 넘기자 익히 아는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사랑스러운 인어 왕자가 우연히 만난 인간 왕자에게 반해……

‘어? 왕자가 인간이 아니라 엘프네? 카르젠 닮았다.’

배 위에 있는 왕자는 흑발 긴 생머리의 엘프 왕자였다. 첫 장 삽화엔 아름다운 엘프에게 반한 인어 왕자가 몰래 그를 지켜보는 장면이 보였다. 배에서 생일 파티를 하던 엘프 왕자는 밤바다를 구경하다 인어 왕자를 발견한다.

엘프 왕자에게 호감을 느낀 인어 왕자가 먼저 인사를 건네 보지만, 엘프 왕자는 인어 왕자의 인사를 무시하고, 심지어 뱃머리를 돌리게 한다. 이유는 인어가 아름다운 노래로 사람을 홀린 후, 바다로 꾀어내 잡아먹는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음… 확실히 미국 영화에 나왔던 인어들은 좀 무서웠던 것 같기도 하고…….’

이비는 예전에 봤던 영화에서 인어가 선원을 바다로 끌어들여 잔인하게 잡아먹던 장면을 떠올리곤 바르르 떨며 다시 책에 집중했다.

외면당한 인어 왕자는 상처받았지만, 이런 경험이 꽤 있었는지 왕자의 반응에 익숙한 것처럼 담담하게 굴었다. 게다가 무시당했으면서 자리를 뜨지 않고 잘생긴 엘프 왕자를 보기 위해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며칠간 배를 따라다녔다.

‘며칠이나 따라다녔구나. 엘프 왕자 얼굴을 보겠다고…….’

동화치고 당황스러운 전개였지만, 엘프 왕자가 만약 카르젠처럼 생겼다면 아마 자신이었어도 조금 따라다니면서 보지 않았을까…… 상상해 보며 페이지를 넘겼다.

바로 뒤 페이지엔 바다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인어 왕자가 배에 가까이 다가가 엘프 선원들에게 곧 폭풍이 올 것 같으니 육지로 가라고 조언을 해 주는 장면이 보였다. 당연하게도 엘프 선원들은 인어 왕자를 무시하고 왕자에게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거센 폭풍 때문에 엘프 왕자가 배에서 떨어지는 장면이 보였다. 다행히 인어 왕자가 그를 붙잡는 데 성공했지만, 점점 거세지는 파도에 육지로 데려가는 것을 포기하고 어쩔 수 없이 기절한 엘프 왕자에게 <인어의 입맞춤>을 한다.

인어의 입맞춤을 받은 자는 물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게 된다는 설명을 읽은 이비는 <숲의 마법사>의 원작 내용을 짚어 봤다.

‘원작에선 인어에 대해 언급만 나오고, 따로 인어 캐릭터가 등장하진 않았는데…… 진짜 인어의 키스를 받으면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나? 나중에 카르젠한테 물어봐야지.’

이비는 추후 시간이 될 때 필리스에 존재하는 다양한 종족을 다룬 책도 읽어 봐야겠다고 다짐하며 몇 장 남지 않은 페이지를 넘겼다.

다음 삽화에선 인어들이 사는 깊은 바닷속 왕국으로 엘프 왕자를 데려온 후 간호하는 장면이 보였다. 인어 왕자는 엘프 왕자를 제 침대에 묶어 놓고 그가 깨어날 때까지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

깊은 심해에 위치한 인어의 성에서 엘프 왕자를 가만히 눕혀 두면 해류 때문에 둥둥 떠다니다 성 밖으로 몸이 빠져나갈 수 있어 그를 침대에 묶었다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

‘합당한 이유네.’

며칠 동안 묶인 채 간호를 받다 깨어난 엘프 왕자는 인어 왕자가 자신을 구했음을 알고 고마워할 뿐만 아니라 인어에게 가지고 있던 선입견으로 그를 무시했던 행동을 깊이 반성하고 사과한다.

엘프 왕자는 바다가 잠잠해질 때까지 인어 왕국에서 지내다 뭍으로 돌아가는데, 돌아간 후에도 둘은 바닷가에서 자주 만나게 된다.

태풍 사건 이후 엘프 왕자는 인어를 적대시하는 육지 종족들에게 인어는 우리가 들었던 것처럼 나쁜 종족이 아니라고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

당장 인어에 대한 선입견을 바꾸긴 힘들지만 엘프 왕자는 천천히 대중을 설득하며 인어에 대한 편견을 조금씩 없앴다. 동화는 ‘그렇게 긴 세월 만남을 이어 가던 두 왕자는 편견이 사라진 세상에서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로 막을 내렸다.

‘인어 왕자가 얼굴을 좀 많이 밝히긴 하지만, 선입견에 대한 교훈을 주는 동화구나. 난 인어의 키스를 부러워하는 속물이지만.’

김현서였을 적 이비의 수영 실력은 심각한 수준이었기에 인어의 키스로 물에서 숨 쉬게 된 엘프 왕자가 마냥 부러웠다.

지금은 필리스의 세계에 이비라는 사람의 몸에 빙의했다고 해도, 물에 대한 공포가 머릿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데다가 이런 가느다란 팔다리로 딱히 수영을 잘할 것 같진 않았다.

‘인어의 키스를 받으면 헤엄칠 필요 없이 물속에서 걸어 다녀도 되겠지? 그러다 상어라도 만나면 난감하겠지만…….’

동화 못지않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이비는 인어 왕자 책을 테이블에 올려 두고, 이번엔 선남과 나무꾼 책을 집었다.

선남과 나무꾼 역시 원작 선녀와 나무꾼과 비슷했다. 오크가 설치한 덫에 걸린 사슴을 나무꾼이 구해 주는데, 이 사슴이 은혜를 갚겠답시고 근처에 천족들이 목욕하는 폭포에서 천족의 옷을 훔치라고 알려 주는 장면이 나왔다.

익히 아는 장면인데도 불쾌함에 얼굴이 구겨졌다. 선녀의 옷을 훔쳐 강제로 아내로 삼는 원작 동화도 굉장히 마음에 안 들었는데, 굳이 이걸 그대로 써야 했나…… 까지 생각하던 이비는 다음 장을 확인하곤 반성했다.

다음 페이지엔 <정의로운 나무꾼은 다른 이의 옷을 훔치라고 귀띔해 준 무뢰한 사슴에게 큰 분노를 느꼈답니다.>라는 문구와 삽화가 있었는데, 삽화 속에 사슴은 나무꾼에게 뿔을 잡힌 채 바닥에 패대기쳐지고 있었다.

***

응접실 소파에 앉은 아리스는 팔짱을 낀 채 테이블 위에 상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맞은편 소파에 앉은 카르젠은 그녀가 수정을 충분히 살필 수 있도록 조용히 기다렸고, 크리시는 종일 앉아만 있어 종아리가 아프다는 이유로 카르젠이 앉은 소파 뒤에 서서 아리스의 표정을 살폈다.

“흠…….”

상자 속에 빈 수정을 대략 3분 정도 면밀하게 관찰한 아리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집중해서 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그냥 빈 수정으로만 보여. 도움이 안 된 것 같아 미안해.”

“미안하긴. 아리스 잘못이 아냐. 나도 나름 살펴봤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거든.”

격려하듯 상냥하게 대답한 카르젠이 상자 뚜껑을 덮고 크리시에게 건넸다. 크리시는 소파 등받이에 상자를 올려 두고 성력이 깃든 천으로 감싼 다음 포장하기 시작했다. 아리스는 그런 크리시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무것도 보이진 않았지만, 저걸 보자마자 기분이 확 나빠졌어. 아니, 단순히 기분 나쁜 정도가 아니라 소름이 돋을 정도로 극도의 불쾌감이 느껴지던데.’

“…….”

크리시는 아주 미세하게 끄덕인 후 묵묵히 상자를 포장했다. 그 반응을 지켜본 아리스가 이어 생각했다.

‘저걸 보자마자 이번 생을 통틀어 가장 끔찍하고 우울했던 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어. 악몽에 자주 등장하는 장소에 억지로 끌려 들어간 기분이었는데, 혹시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수정인 건가?’

아리스가 묵묵히 크리시만 응시하는 모습에 카르젠은 조용히 차만 마셨다.

포장을 마친 크리시는 카르젠 옆자리에 상자를 내려 두고 등받이에 상체를 기대섰다. 셋 중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아 조용한 응접실에서 아리스는 계속 생각을 이어 나갔다.

‘이게 뭔지 몰라도 다른 사람에겐 보여 주지 않는 게 좋겠어. 오늘 밤엔 꿈자리가 사나울 것 같네. 그 정도로 기분 나쁜 수정이야.’

꿈자리가 사나울 것 같다는 생각을 마치자 크리시가 조심스레 아리스와 시선을 맞췄다. 아리스는 별다른 감정 없는 눈으로 크리시를 바라보다 곧 생긋 미소 띠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크리시. 요즘 불법 수정 때문에 바쁘겠네?”

“어.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바쁘겠지.”

“아무리 바빠도 신전에서 긴급 연락 온 게 아니라면 제논의 음식은 맛보고 가는 게 어때?”

카르젠은 둘이 평범하게 이야기 나누는 모습에 기쁜 내색을 감추지 않고 거들었다.

“그래. 크리시. 점심 정도는 먹고 가. 정말 긴급한 일이 생기면 신전에서 따로 연락 주겠지.”

“프란제르 후작 부인의 전담 셰프가 만든 음식은 못 먹는 사람이 꽤 많다고 들었는데…….”

“그건 제논이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이야기고. 요즘엔 오히려 다들 제논이 만든 음식을 선호해. 내가 여기에 데려와서 아쉬워하는 사람도 많았어.”

아리스는 제 눈치를 살피는 크리시를 향해 살포시 미소 지어 보이며 덧붙였다.

“그리고 예전 일에 관해서는 이제 화 풀렸으니까, 그렇게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카르 뒤에 있지 말고 이리 와서 앉아.”

다정하고 상냥한 음성이었지만, 어째 명치가 얼얼한 기분이 든 크리시가 제 배를 살살 문지르며 시선을 피했다. 그 반응에 피식 웃은 아리스가 생각했다.

‘그땐 네가 도를 넘어서 화냈던 거야. 진짜 다 풀렸어.’

“…….”

‘앞으로 안 때린다고 맹세할게.’

“……그래. 점심 정도야 먹지 뭐. 정 급하면 연락 오겠지.”

여상하게 대답한 크리시는 여전히 카르젠의 뒤에 서 있었다.

***

율리와 주디가 점심 식사 준비를 하러 간 후, 혼자 침대에 누워 있던 이비는 수첩에 메모를 쓰고 있었다.

-프란제르 후작 부인. 선물 감사합니다. 정말 멋진 동화책이었어요. 벌써 몇 권 읽어 봤는데 삽화도 너무 예쁘고 내용도 재미있었습니다. 특히 나무꾼이 사슴을 패대기치는 장면이 인상 깊었어요. 선물해 주신 책 모두 소중하게 간직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인사는 이 정도로 하면 되겠지. 중요한 건 몰래 건네줄 쪽지 내용인데, 고민이네…….’

고민할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 <안녕하세요. 나도 지구에서 온 사람입니다. 나는 당신과 이 세계에 대해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습니다.>와 같은 패턴으로 쓰는 게 가장 편하겠지만……

‘문제는 내가 사건 사고를 달고 다니는 빙의자라는 거지.’

빙의자인 것이 문제인 이유는 다름 아닌 빙의자들의 흔한 패턴 때문이었다. 이전 삶에서 숱하게 봐 왔던 빙의물을 떠올려 보면, 빙의자들은 이벤트마냥 늘 크고 작은 사건 사고를 불러일으키고 다녔다.

특히 빙의자가 작성한 중요한 편지나 쪽지의 경우, 대략 83% 정도 확률로 보면 안 될 사람에게 들키거나 잃어버리곤 했다. 혹은 쪽지를 잘 전달해도 받은 사람의 부주의로 누군가에게 흘러들어 가 약점을 잡히거나 의심을 받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지금까진 내가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은 엑스트라 같아서 생각도 못 했는데, 나도 빙의자 클리셰 페널티는 받는 것 같으니까…….’

이비는 저가 빙의한 몸이 원작에 등장한 적도 없는 인물이라, 안일하게 생각했던 과거를 다시금 반성했다.

이미 원작과 다르게 흘러간 상황에 빙의한 터라 치트 키는 하나도 얻지 못했으면서, 어째 납치, 엄한 물건 건드려 사건에 휘말리기, 병약한 신체, 개복치 체력, 출생 or 신체의 비밀 등 빙의자 페널티 종합 세트는 골고루 다 받아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신중해서 나쁠 건 없으니 조심해야지. 일단 누가 우연히 주워 본다고 해도 문제없는 내용이어야 하는데…… 으음~ 아니면 분실 위험이 있으니, 차라리 쪽지를 따로 주지 말고 여기다 암호처럼 적어 볼까?’

수첩을 다시 앞 장으로 넘긴 이비는 저가 적은 글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장이 끝나는 지점에 귀여운 토끼를 그려 넣었다. 방긋방긋 해맑게 웃는 토끼 얼굴을 완성한 후, 토끼 옆엔 마찬가지로 빙그레 웃는 곰돌이와 고양이 얼굴도 그렸다.

그 외에 온갖 무해한 동물 그림을 그려 넣은 이비는 각 그림들 사이에 필리스 세계 사람들은 모르지만, 지구에선 거의 만국 공용어로 사용했던 글자를 한 글자씩 따로 떨어뜨려 쓰기 시작했다.

H. E. L. L. O.

***

‘이건……!’

이비는 제 눈앞에 차려진 음식을 보고도 믿을 수가 없어 눈을 크게 떴다. 이 음식을 여기서 볼 줄 몰라 너무 놀란 탓에 아리스가 저를 미묘한 시선으로 살펴보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아무리 봐도 이건 저가 익히 아는 음식이었다. 반가운 음식에 당장 스푼을 들고 싶었지만, 점잖게 놀라는 중인 카르젠과 크리시의 얼굴을 보고 저도 모르게 표정 관리를 했다.

‘헉, 나도 모르게 반가운 티 낼 뻔했네! 두 사람이 먼저 먹으면 먹어야겠다.’

카르젠과 크리시의 떨리는 눈빛만 봐도 음식 비주얼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둘 앞에서 이런 새로운 음식을 아무 거리낌 없이 바로 먹는다면 부자연스럽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 메뉴를 담당한 아리스의 전담 셰프 제논은 테이블에 둘러앉은 이들의 안색을 살폈다. 이 저택의 주인인 카르젠은 조금 당황한 듯했으나 불쾌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신기한 수프의 정체를 탐구하는 시선으로 뜯어보고 있었다. 물론 스푼은 아직 들지 않았지만, 크게 부정적이지 않은 모습을 확인한 제논이 크리시에게 시선을 옮겼다.

카르젠과 달리 크리시는 음식을 노려보고 있었다. 보통 셰프였다면 주눅 들 눈빛이었으나, 그간 온갖 역정을 들었던 탓인지 나쁘지 않은 반응이라고 느껴졌다. 제논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려는 찰나, 이비의 안색을 살핀 그의 입매가 굳어졌다.

이비는 입을 꾹 다문 채 초조한 눈빛으로 크리시와 카르젠을 흘긋거리고 있었다. 직전부터 이비를 유심히 살피던 아리스는 티 나지 않게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제논. 다소 생소한 음식이군. 설명을 해 주겠나?”

이비가 음식 앞에서 굳은 모습을 처음 본 카르젠이 일부러 제논에게 물었다. 카르젠의 곁으로 다가온 제논이 방긋방긋 웃으며 설명했다.

“예. 공자님. 이 수프는 미리 핏물 뺀 연한 송아지 고기를 곡물 기름에 볶은 후 약간의 향신료를 첨가해 잡내를 제거하고, 건강에 좋은 성분이 풍부한 해초를 함께 푹 끓여 낸 맑은 수프입니다. 수프와 안에 고기와 해초까지 모두 다 드시면 됩니다.”

“곡물 기름?”

“예. 참깨를 짜내 만든 기름입니다. 고소하니 맛이 아주 좋습니다.”

“그렇군. 향신료는 무엇을 넣었지?”

“마늘입니다.”

마늘이라는 말에 사용인들 틈에서 지켜보던 휘테커가 웃음을 참았다. 조금 아까 주방에서 제논이 ‘마늘 조금’이라며 한주먹 크게 집어 드는 모습을 보고 어이가 없었는데, 오늘 만든 요리에 기어이 그 많은 마늘을 다 쓴 게 마냥 신기했다.

마늘을 싫어하는 크리시는 스푼으로 해초를 뒤적이며 미간을 찌푸렸다. 녹색 빛을 띤 기름이 둥둥 떠다니는 국물 밑바닥에 잘게 다진 마늘이 가라앉은 게 보였다.

“마늘을 왜 이렇게 많이……”

생전 처음 보는 비주얼의 음식을 보고 망설이던 크리시는 아리스를 흘긋거렸다. 크리스와 눈이 마주친 그녀가 어서 먹어 보라며 말했다.

“마늘은 건강에 좋아. 특히 남성 건강에.”

“딱히 필요 없거든.”

카르젠은 저 둘의 대화엔 관심 주지 않고 이비만 살폈다. 이비는 초조해 보이는 얼굴로 카르젠과 크리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저 표정이 뭘 뜻하는지 모르겠지만, 새로운 음식에 겁먹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석한 카르젠은 이비를 안심시켜 주려는 의도로 먼저 스푼을 들었다.

‘일단 내가 먹는 모습을 보여 줘야 이비도 안심하고 먹겠지.’

마치 경계선 숲의 늪처럼 그릇을 가득 채운 해초를 은근히 밀어내고 큐브 형태의 고깃덩어리를 조심스럽게 스푼으로 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기와 미묘한 냄새의 녹색 빛 맑은 수프가 신경 쓰였지만, 조심스레 입에 넣은 카르젠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그 반응에 아리스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카르. 어때? 맛있지?”

점잖게 고기를 씹어 삼킨 카르젠이 끄덕이며 긍정했다.

“맛있다. 고기로 우려낸 수프인데도 진한 바다 향이 느껴지네.”

맛있다는 말에 제논이 활짝 핀 얼굴로 바쁘게 설명했다.

“맞습니다. 바다에서 건진 해초를 장기간 보관할 수 있게 그늘에서 아주 오랜 기간 바닷바람에 건조했기 때문에 바다 향이 진합니다. 또 마늘을 충분히 사용해 잡내를 잡아 특유의 비린내가 나지 않으니 해초와 함께 드시면 더 맛있습니다.”

제논의 설명을 들은 카르젠은 이번에 스푼으로 떠먹기 좋은 사이즈로 잘라 넣은 해초를 먹어 보았다. 미끄덩한 맛에 잠시 당황했지만, 꼭꼭 씹어 삼킨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제논을 칭찬했다.

“알려 준 대로 먹으니 더 맛있군.”

카르젠이 잘 먹자 크게 안도한 이비가 이번엔 크리시에게 고개를 돌렸다. 크리시는 열렬한 눈빛으로 저를 보는 이비의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어 녹색 해초를 조금 떴다. 내키지 않지만 입에 넣고 다소 급하게 삼켜 낸 크리시는 보기와 달리 비린 맛이 나지 않아 당황했다.

“의외로 맛있군요.”

크리시까지 맛있다고 하니 그제야 스푼을 든 이비가 큼지막한 고기를 떠먹었다.

‘아……! 역시! 내가 아는 맛이야!’

한번 수프 맛을 본 이비는 고기뿐만 아니라 해초까지 망설임 없이 퍼먹기 시작했다. 식사를 지켜보던 저택 사용인들은 이비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며 안도했고, 제논은 크게 감동해 눈시울을 붉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초 수프가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 것을 확인한 휘테커와 제논이 다음 요리를 가지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이비는 수프를 싹싹 다 비우고 만족스러운 듯이 입술을 살짝 핥으며 주방으로 이어진 문을 바라봤다.

‘하, 밥도 말고 싶다. 밥이랑 먹으면 진짜 최곤데…… 알파3은 북부에서 밥 말아 먹겠지?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수프처럼 따로 먹나 보네. 다음 음식도 내가 아는 음식이면 좋겠다.’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주방을 보고 있자니, 문이 열리며 이비가 익히 아는 냄새가 훅 끼쳤다.

‘헉… 이 냄새는……’

아리스와 크리시가 동시에 이비를 바라봤지만, 이비의 눈은 제논이 들고 온 거대한 접시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테이블 중앙에 내려 둔 접시에 가득 담긴 음식을 확인한 이비는 저도 모르게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불고기!’

아리스는 산처럼 듬뿍 쌓인 국물 자작한 고기 요리를 보고 격하게 감동 중인 이비를 흐뭇하게 감상했다.

제논에 이어 휘테커가 밀고 나온 수레로 시선을 옮긴 이비는 너무 반가워하지 않기 위해 입술을 꾹 말아 넣었다. 수레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과 온갖 넓은 잎채소가 있었다. 그리고 이 세계에선 절대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양념장도 함께였다.

***

식사가 끝난 후 이비는 아리스의 티타임에 초대받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비와 단둘이 대화하고 싶다고 그녀가 먼저 권해 왔다. 생각지도 못한 독대에 놀란 이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니 카르젠이 설명을 덧붙였다.

“아리스가 머무는 동안 이비의 예법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자진해 주었어. 그리고 앞으로 이비가 맡게 될 저택 내정 관리하는 방법도 알려 주겠다고 했고. 이비는 아직 회복 중이니 바로 공부를 시작하진 않을 거야. 오늘은 두 사람이 친해지는 자리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아. 혹시 부담되면 내가 같이 있어 줄……”

도리도리.

바로 고개를 가로젓자 내심 섭섭함을 숨기지 않은 카르젠이 되물었다.

“정말 괜찮겠어?”

끄덕끄덕.

“그래…… 그럼 난 크리시와 마무리할 일이 있으니 서재에 있을게.”

“이비.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최대한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겁니다. 그럼 할리스가 도와줄 겁니다.”

크리시의 조언에 아리스가 눈을 뾰족하게 떴다. 재빠르게 카르젠의 뒤로 자리를 옮긴 크리시가 지지 않고 덧붙였다.

“기억하세요. 혹시나 긴박한 사태가 벌어지면 찻잔이나 주변에 물건을 던져서라도 위험을 알리는 게 중요합니다. 큰 소리를 내야……”

“크리시. 바쁘지 않니?”

상냥한 목소리로 크리시를 부른 아리스가 슬며시 주먹을 쥐었다. 작지만 매서워 보이는 옹골찬 주먹을 본 크리시는 할리스에게 꼭 응접실 앞에 붙어 있으라고 덧붙이며 카르젠을 끌고 서재로 향했다.

카르젠은 뭐가 그리 아쉬운지 미련이 뚝뚝 넘치는 얼굴로 이비를 돌아봤지만, 아리스와 단둘이 있을 기회를 잡은 이비는 해사하게 웃으며 둘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저 둘을 서재로 보내고, 할리스를 따라 응접실로 안내받은 이비는 아리스와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았다. 할리스는 율리가 곧 차를 내올 거라 말하곤 문밖에서 대기하겠다며 응접실을 나섰다.

‘알파3이 예법 선생님이라니! 이렇게 일이 잘 풀리네!’

카르젠의 보좌관이 되려면 당연히 귀족 예법도 배워야 했고, 아리스와 단둘이 대화도 해야 했다. 일이 너무 잘 풀려 기뻐하는 이비를 바라보던 아리스가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대단한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할까요?”

‘통성명?’

이비는 그녀가 제 이름을 알고 있음에도 저리 묻는 게 의아해 갸웃했다.

‘아, 성을 말하는 건가? 난 성이 없는데… 아마도……’

“아뇨. 성 말고 당신의 진짜 이름이 알고 싶군요.”

‘아~ 성 말고 진짜 이름…… 어?’

그녀가 건넨 말이, 제 생각에 대한 답이라는 것을 눈치챈 이비는 정수리부터 목 언저리까지 싸해짐을 느꼈다. 크게 당황한 이비를 본 아리스는 의외라는 듯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설마…… 나 같은 사람 처음 봐요?”

그 물음에 당황한 이비가 얼떨떨해하며 삐걱이듯 끄덕였다.

“정말 처음?”

‘네…….’

잠시간 입술을 달싹인 아리스가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끄덕였다.

“그랬군요. 미안해요. 많이 놀랐겠네요. 이 세계에는 드물지만 나와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 더 있어요. 아, 정말 드무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수도에는 내가 알기론 한 명 있고…… 이젠 나까지 둘이겠네요. 나머지 하나는 지금 루아인에 없고, 아마 만날 일도 없을 거예요.”

타인의 생각을 들을 수 있는 이가 무려 둘이나 더 있다는 말에 이비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 혹시 나머지 두 사람 중 하나가…… 설마 카르젠은 아니겠죠?’

제발 아니라고 대답해 달라는 애절한 마음의 소리에 웃음 터진 아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이 저택에서 사는 사람은 절대 아니니 걱정 말라며 친절하게 말해 주었다.

거의 울상이었다가 눈에 띄게 안도한 이비가 가슴 쓸어내리는 모습에 아리스가 재차 물었다.

“그래서. 이름은?”

‘김현서라고 해요. 알파3은요?’

“난 크리스 와이츠. 한국 이름도 있었는데, 한국 이름으로는 준이라고 했어요.”

이비는 알파3이 당연히 한국인일 거라 생각했었기에 내심 놀랐다. 이비의 반응에 아리스가 덧붙였다.

“아버지가 미국인, 어머니가 한국인이었어요. 어머니는 한국 이름으로 준이라고 불러 주셨죠. 일 때문에 주로 한국과 미국을 포함해 해외를 많이 돌아다녔어요.”

끄덕끄덕.

“전생의 이야기보단, 내게 묻고 싶은 게 많을 텐데……”

전생이란 말에 잠시 멈칫한 이비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아리스와 이렇게 빨리 독대하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해 아직 질문을 다 정리하지 못한 상태였다. 묻고 싶은 것을 열심히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있을 때, 아리스가 먼저 말했다.

“아, 질문받기 전에 먼저 하나만 물어볼게요.”

‘네.’

“나이가 어떻게 되죠? 이전 삶과 지금까지 전부 합쳐서요.”

그 물음에 두 손을 꼭 모아 쥔 이비는 최대한 공손한 자세로 사근사근 웃으며 알아서 서열을 정리했다.

‘전 스무 살이요. 여기 온 지 한 달도 안 됐어요. 앞으로 형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아니면 누나? 전 그냥 편하게 불러 주시면 돼요!’

“어차피 나밖에 못 들을 텐데 그냥 아리스라고 불러. 나도 이비라고 부를게.”

이비는 바로 말을 편하게 하는 아리스를 보며 한미 합작으로 태어난 알파3도 한국식 서열 정리가 칼 같다는 생각을 하다 흠칫했다.

‘……욕한 거 아니에요.’

“그 정도는 나도 알아…… 그리고 누가 갑자기 들어올지도 모르니 수첩은 펴 둬. 몇몇 사람만 빼고 대부분 사람들에겐 비밀로 하고 있거든.”

바로 수첩을 펼친 이비는 아리스에게 보여 주려고 적었던 메모를 쓱 내밀었다. 귀엽게 HELLO 이니셜을 여기저기 흩뿌려 적어 둔 메모를 본 아리스가 작게 웃었다.

“귀엽네. 그래서 뭐가 가장 궁금해?”

‘리치요.’

“리치?”

‘네. 어쩌면 아리스를 공격하고 납치하려고 했던 게 리치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리치…… 마법사 말이야?”

이비가 격하게 끄덕였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생각을 흘려보냈다.

‘어, 그러니까. 원작에서는 원래 형 남편인 프란제르 후작이 흑막 악역이었잖아요? 빌런이요. 제 생각이지만 이번에 공격한 마법사가 원작에서 프란제르 후작에게 붙었던 리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원작에서 리치라는 이름이라면 어차피 한 명밖에 없었고, 칼라일 후작에게 붙어 있던 최종 빌런이었기에 이 정도만 알려 줘도 철석같이 알아들을 거라 생각한 이비는 혼란스러워 보이는 아리스를 보곤 당황했다. 이비의 생각에 전혀 거짓이 없음을 간파한 아리스가 차분하게 되물었다.

“……내 남편이 빌런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야?”

아리스는 정말 영문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어… 그러니까…… 원작이요. 숲의 마법사에 나오는 이야기요. 숲의 마법사는 아시죠?’

“숲의 마법사? 소문으로만 들었지, 직접 만난 적은 없는데?”

‘아뇨, 아뇨. 그 소원 들어주는 숲의 마법사 말고. 소설 제목이요! 그러니까 여기가 소설 속이고…… 아니 잠깐. 그럼 형은, 아니, 아니. 아리스는 여기에 어떻게 왔어요? 읽었던 책에 빙의한 게 아니에요?’

아리스는 얘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갸웃하며 물었다.

“어떻게 오긴. 이라크에서 자살 폭탄 테러 막다가 죽어서 왔지. 죽은 다음엔 억지로 신과 계약해서 온 건데?”

‘신과 계약이요? 무슨 신이요? 계약은 뭔데요?’

“나는 루이사와 계약 했고, 제논은 에벨루스와 계약했어. 그러고 보니 네 담당 신은 누구야?”

‘……네?’

말의 뜻을 이해하자 밀려온 충격에 잠시간 머리가 굳어 있던 이비는 아리스의 말을 다시 새겨 봤다.

‘그러니까…… 아리스는 신을 만났다는 거죠?’

“응.”

‘그리고 제논 셰프도 빙의자라는 거고요?’

“응.”

어안이 벙벙해진 이비가 멍하니 바라보자 아리스 역시 당황한 듯이 물었다.

“너도 당연히 신을 만났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네.”

‘그럼 혹시 제가 이미 만났는데 신인지 모르고 지나쳤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어쩌면 저도 모르는 새에 신과 접근했을지도 모른다는 이비의 추측을 들은 아리스가 즉시 부정했다.

“아냐. 신은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존재가 아냐. 신을 만난 순간 내가 감히 마주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느꼈거든. 이건 제논도 마찬가지라고 했었고.”

‘신은 사람처럼 생겼어요? 아니면 신화에 나오는 비둘기?’

“꿈에서 가끔 동물의 형상으로 나타나긴 하는데, 죽어서 마주했을 때의 형태는 기억나지 않아.”

저 대답에 혼란만 가중된 이비가 갸웃했다. 아리스는 자신과 제논의 경험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내가 죽고 나서 정신 차려 보니 어떤 곳에 떨어져 있었지. 어딘지 모르겠지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장소였어. 마치 우주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지나 누군가 나를 불렀어. 돌아봤을 땐 아무것도 없었지만, 거대한 존재가 나를 굽어보는 게 느껴졌지.”

“…….”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저 심판의 시간이 왔구나. 정도로 생각했지. 이후엔 잠시 대화를 했고.”

아리스는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 보려다 이내 고개를 저으며 정정했다.

“아 대화는 아니지. 서로 목소리를 낸 건 아니었거든. 하지만 우린 분명 의사를 주고받았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몰라. 신이니까 가능하겠지 뭐. 하여간에 그때 내가 알게 된 건 나를 이곳으로 인도한 신이 은하수의 신 루이사라는 거였어. 그리고 우린 약속을 했지.”

‘약속?’

“신은 내게 기회를 주겠다고 했어. 내 손으로 저지른 수많은 살생에 대한 업보를 청산할 수 있는 기회를. 물론 내가 군인이었고, 전쟁 중 적과 교전 명목으로 사살한 거지만, 명분을 제외하면 내가 살인자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으니까.”

살인자라는 말에 이비는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하지만 묵묵히 아리스의 말을 기다렸다.

“어떻게 업보를 청산하는지는 알려 주지 않았어. 그래서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지. 이왕 이렇게 다시 살게 된 거. 이번엔 누군가를 돕는 일을 하겠다고. 이후 딱히 별다른 제재가 없는 걸 보면 나름 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해.”

아리스가 그동안 머니마니 달러스 필명으로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지만, 모두 기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비는 일단 끄덕였다. 그는 분명 대외적으로 좋은 일을 하고 있었지만, 그와 별개로 이 상황이 의아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왜 이미 죽은 사람에게 심판이 아니라 업보를 상쇄하라고 한 걸까요? 설마 천국이랑 지옥이 없는 건가요?’

오랜 병상 생활 동안 김현서가 바라 왔던 것은 착하게 생을 마감하고 천국에 가는 거였다. 물론 가장 베스트는 죽음 이후 아무것도 없는 그야말로 <끝>이었지만, 어쩐지 죽음 이후에도 뭔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불안함에 김현서는 당연하게도 천국을 선호했다.

그런 김현서를 위해 무신론자였던 부모님도 신에게 기도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제 아들이 좋은 곳에 갈 수 있도록 김현서의 이름으로 재단을 만들고, 틈만 나면 기부를 하거나 자선기금 행사를 열었다.

타인에게 피해 끼치지 않고 착하게 살면 좋은 곳에 가서 안식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이비에겐 저 업보 상쇄라는 이야기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천국과 지옥은 있어. 다만 지금 거기에 자리가 없나 보지.”

“!?”

“어쨌든 난 선택권이 없었어. 어쩌겠어. 위에서 까라면 까는 게 내 일이었고, 이번 생에도 그럴 팔자인가 보다~ 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였을 뿐이야.”

이비는 저 태평한 반응에 놀라움을 느꼈다. 그런 걸 쉽게 받아들이다니, 역시 알파3은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끄덕였다. 이비의 속내를 들은 아리스는 양심에 조금 찔렸는지 은근히 덧붙였다.

“물론…… 협상에 약간 갈등이 있긴 했지만. 결론적으로 내가 신의 억지를 받아들였지.”

‘약간의 갈등이요?’

“또 살자니 피곤해서 그냥 지옥에 가겠다고 했더니 회유하더라고.”

이비는 이 대화를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일단 지옥에 보내 달라고 한 아리스도 대단했지만, 굳이 회유하면서까지 알파3이라는 존재를 이 세계에 보낸 의도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아리스 말대로라면 이비 자신도 죄가 있어서 이렇게 다른 삶을 살게 된 것일까, 혹시 그 죄가 형에 관련된 것일까, 역시 자신은 죄인인 걸까 혼란해지려 했다.

“아니야.”

‘아니라니요?’

“꼭 업보가 있는 사람만 여기에 오는 건 아닌 것 같아. 제논은 아무 죄 없는 사람이었거든. 제논의 과거니 내가 자세히 언급할 수 없지만, 제논은 이전 삶에서 남한테 피해 안 주고 고생만 잔뜩 하다 죽었어. 그러다 나처럼 신을 만나 두 번째 기회를 잡았을 뿐이야.”

아리스는 저들과 같은 빙의자인 제논은 평범한 소시민이었다는 것을 강조했다.

“여기에 왔다고 해서 다 죄인이 아니니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 그리고 지옥에 갈 만큼 심각한 죄를 지은 자들은 무조건 지옥으로 간다고 하니 날 너무 무서워하진 말아 줘.”

저 말을 이해한 이비는 당황해 고개를 마구 저었다. 절대 당신이 무서운 게 아니라고, 자신이 죄인이라 여기에 온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고 해명하려 했지만, 아리스가 됐다며 손사래 치는 것을 보고 허탈하게 웃었다.

‘아리스와 이렇게 대화하는 거 좋네요. 내 생각을 오해할 일도 없어서 좋고.’

보통은 제 속내를 꿰뚫어 보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느낄 텐데, 단순하고 솔직한 반응을 본 아리스가 쿡쿡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렇다면 다행이네.”

이비는 아리스를 따라 웃으면서도 현 상황에 답답함을 느꼈다. 결국 자신이 누군지도 모를뿐더러 이 세계에 온 이유도 몰랐고, 저를 보살펴 주는 신이 누군지 모르지만 만나 본 적이 없다는 것도 서글펐다.

‘저를 여기로 보낸 신은 왜 제게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았을까요…….’

“글쎄. 나중에 내가 물어볼게.”

“?”

그게 가능하냐는 혼란한 생각에 아리스가 설명을 덧붙였다.

“제논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보통 한 달에 한 번은 꿈에서 내 담당 신을 만나 대화하거든.”

‘진짜요? 그건 뭐 심리 상담 같은 거예요?’

“심리 상담이라…… 나름 비슷한 것 같아. 그런데 많은 것을 물을 수는 없어. 보통 한 번 만남에 질문 한두 개 정도 겨우 대답해 줄까 말까야. 그나마도 자기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엔 대꾸 안 하지만.”

“!!!”

질문 한두 개. 분명 굉장히 소중하게 써야 할 기회임이 분명했다. 그런 소중한 기회를 선뜻 제 신이 누군지 알아봐 주는 것에 써 준다는 게 미안했지만, 이비는 아리스의 제안을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예의상 거절하기도 힘드네요… 죄송해요……’

“됐어. 난 여기 온 지 꽤 됐고 이 세계도 잘 아니 딱히 급할 게 없어.”

급할 게 없다는 말에 정신 차린 이비가 도리질하며 말했다.

‘그래도 만약에요. 이번에 신과 대화하는데 질문을 하나만 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아리스를 습격한 게 누군지 물어보세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도…… 리치라면 드래곤이 처리해 줄 수 있지만, 만에 하나 리치가 아닌 경우도 대비해야죠.’

아리스는 저 순수한 반응에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신은 이 세계에 영향이 갈 만한 질문엔 대답하지 못해.”

‘네에? 그런 게 어디에 있어요?’

“이전에도 몇 번 시도해 봤는데, 이 세계에 영향이 갈 만한 일이나 삶과 죽음에 관련된 질문은 대답을 못 해 주더라고.”

‘되게 치사하다.’

이비는 신이라는 존재에 내심 짜증을 느껴 속으로 투덜댔다. 아리스는 그나마 얌전하게 짜증만 내는 이비가 귀여워 피식 웃으며 끄덕였다.

“더럽고 치사하고 재수 없지.”

‘그, 그렇게까지 욕해도 돼요? 신이면 다 들을 텐데?’

“다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그런데 말이야…… 신이라는 존재가 의외로 공평해지려고 노력은 하더라고. 물론 노력만 해. 노력만. 절대 공평하다는 뜻은 아냐.”

‘공평해지려고 노력이라도 하면 다행이네요…… 그럼 혹시 제논이 아리스가 말한 「푸른 별의 동향인 김」인가요?’

“아니. 그 김이라는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야.”

“!”

아리스와 제논 말고 또 다른 빙의자가 있다는 말에 이비의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아리스는 순식간에 혼란해진 이비의 생각이 갈무리될 때까지 차분하게 기다려 주었다. 잠시간 흥분했다가 겨우 진정한 이비가 제 형을 떠올리며 생각을 이었다.

‘그분과 제논은 혹시 몇 살인가요? 남자였나요? 아, 이걸 묻는 이유는 제 형이 실종됐는데 평범한 실종이 아니었거든요. 형은 갑자기 사라졌어요.’

“사라져?”

‘네. cctv를 확인했을 때 형이 지나가던 골목 안쪽에서 강한 빛이 났고, 형은 그게 뭔지 확인하러 갔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대로 사라져 버렸어요. 그 골목은 완전히 막다른 곳이라 형이 골목을 빠져나왔다면 분명 cctv에 찍혔을 거예요. 하지만 실종 신고가 접수되고 경찰이 cctv를 확인할 때까지 그 골목을 드나든 사람은 한 명도 없었어요. 당연히 형이 나오는 모습도 없었고요. 빛이 날 만한 것도 없었어요.’

“…….”

‘형 이름은 김현우구요. 실종 당시에 17살이었어요. 만으로 16살이었고요. 어쩌면 형도 필리스에 오게 된 게 아닐까 싶어서…….’

아리스의 표정을 살핀 이비는 뒤이어 나올 말이 저가 반기지 않을 말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런 이비에게 우리가 이 세계에 어떤 과정을 거쳐 오게 됐는지 생각해 보라고 말하려던 아리스가 말을 바꿨다.

“내가 만났던 김 씨는 이전 삶에서 30대 후반에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이었어. 제논도 지금은 남자지만, 이전 삶에선 여자였고.”

망연자실해진 이비의 귀가 일순 축 처지는 모습을 본 아리스가 덧붙였다.

“다음 꿈에서 신을 만나면 작은 힌트라도 얻을 수 있는지 물어볼게.”

아리스는 저가 할 수 있는 가장 다정한 대답을 내놓았다. 물론 가망은 없어 보였지만, 정제되지 못한 감정의 봇물을 몇 개만 주워들었음에도 김현서라는 존재가 어려서부터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는지, 또 얼마나 큰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아리스는 부정하는 대신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만이라도 힘을 실어 주고 싶었다.

“만약 신이 알려 줄 수 없는 문제라면, 네가 나를 알아본 것처럼 같은 동향인이 우리 존재를 알아볼 수 있도록 여러 방면으로 꾸준히 활동하면 돼. 그러다 보면 언젠가 소식을 들을 날이 올 수도 있겠지. 그러니 그렇게 속상해하지 마.”

이비는 아리스가 저렇게 말해 주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라 눈물을 글썽였다. 긴 시간 켜켜이 쌓인 이비의 죄책감과 그보다 큰 그리움을 고스란히 듣던 아리스가 위로해 주려 입술을 달싹인 순간,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런. 하필 타이밍도…….”

잠시 고민한 아리스는 이내 포기하고 들어오라고 허락했다. 지금 들어오지 말라고 하면 밖에서 오히려 이상하게 해석할까 싶어 오해하기 전에 설명하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할리스가 문을 열어 주자 수레를 밀고 들어온 율리는 훌쩍이는 이비를 보자마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할리스 역시 당황한 듯이 일순 표정을 갈무리하지 못했다. 저를 보고 휘둥그레진 둘을 본 이비는 당황해 급히 수첩에 메모하기 시작했다.

율리는 차마 후작 부인이 상대인지라 무슨 일이냐고 바로 묻지 못했지만, 수레를 옆에 세워 두고 후다닥 다가와 제 손수건으로 눈물을 톡톡 닦아 주며 속삭였다.

“이비 님. 밖으로 모실까요?”

개미만 한 목소리였지만, 율리의 생각을 들은 아리스는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잠시 대화하다 감정이 격해졌을 뿐이란다. 걱정하지 말렴.”

이비는 율리가 불경한 눈빛으로 아리스를 보기 전에 마구 끄덕였다. 그리곤 급하게 메모를 적어 율리의 얼굴에 수첩을 들이밀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후작 부인이 너무 따뜻하게 대해 주셔서 감동해서 그런 거예요.-

율리는 이비가 곤란하지 않게 일단 끄덕여 보인 후 눈가를 톡톡 닦아 주며 더 작게 속삭였다.

“이비 님. 나가고 싶으시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데리고 나갈 테니, 혹시 괴롭힘당하고 계신 거라면 펜을 살짝 흔들어 주세요.”

그 말에 이비는 한 치의 흔들림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펜을 꽉 쥐었고, 아리스는 연신 피식거리려는 입술에 힘을 빡 줬다.

정말이지, 제 친우의 사용인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귀여웠다. 그래서 아리스는 부집사 할리스가 은밀하게 서재로 향하는 것을 굳이 붙잡지 않았다. 그저 다 귀여웠다.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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