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챕터 6
장보기 취합을 마친 율리가 방을 나갔다. 이비는 다시 침대로 올라가 덮어 두었던 책을 펼쳤다. 마지막으로 읽은 페이지를 찾아 책장을 넘기니 <3.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줘.>챕터가 나왔다.
자세를 편히 잡은 이비는 3장의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다. 이 챕터는 알파3이라는 남자가 이곳 필리스라는 세계에 와서 겪은 초반 적응기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다.
내용이 자세히 서술된 것은 아니지만, 앞 챕터에서 종종 등장한 <전자>에 속하는 이비는 이를 알 수 있었다.
<…-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렇게라도 우린 이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고, 외롭고 힘든 싸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난 당신이 좌절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처음부터 계속 언급하고 있지만,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이게 바로 내가 이 챕터까지 전부 다 읽은 당신에게 해 주고 싶은 조언이다.
결코 쉽지 않겠지만, 우선은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봐라. 당신이 아는 지식을 모두 동원해도 막다른 길에 다다른다면, 그땐 좌절하지 말고 나를 떠올려 줘. 그리고 나를 찾아와 줘.>
마지막 페이지에는 <전자>에 속하는 자들이 머니마니 달러스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는 주소가 적혀 있었다.
‘어? 주소가 북부가 아니라 아브델이네? 출판사 주소인가? 기회가 된다면 알파3을 만나 보고 싶긴 한데… 분홍 머리 소녀라고 했지. 지금은 소녀는 아니겠구나.’
원작에서 프란제르 아리스는 체격이 작고 솜사탕 같은 연분홍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랑스러운 소녀라고 묘사됐었다. 이비는 아리스라는 사람을 떠올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녀의 곁에 시커멓고 큰 남자가 같이 떠올라 흠칫 떨었다.
‘프란제르 칼라일은 무서워.’
이비는 말 그대로 프란제르 칼라일 후작이 두려웠다. 물론 지금 후작은 원작과 달리 흑막이 아닌 것 같았지만, 그래도 가급적이면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인물 1순위였다.
단순히 소설 속 캐릭터였다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
‘칼라일 후작이 아리스 영혼 찾겠다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절대로 마주치고 싶지 않아!’
북부의 척박한 땅을 지키고 있는 프란제르 후작은 원작 <숲의 마법사>에서 왕가에 버금가는, 혹은 그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왕가에 충성하는 북부 대공으로 묘사됐었다.
덕분에 흑막이라는 것이 밝혀지기 전까진 굉장히 인기가 많았던 캐릭터이기도 했다.
‘체스터의 먼 외가 친척이었나? 피는 거의 섞이진 않았던 것 같은데, 그래도 체스터의 어린 시절 놀이 동무이자 멘토였지. 카르젠하고도 친했고.’
그랬던 프란제르 칼라일 후작은 <안식의 신>으로 위장한 흑마법사 리치에게 제대로 현혹당하는 바람에 많은 살생을 하게 된다.
타인의 생명을 흡수해야 살아갈 수 있는 리치는 원작에서 블랙드래곤 지그하르트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지금 시점에선 어떨지 알 수 없었다.
‘원작에선 프란제르 칼라일이 아리스의 영혼을 찾기 위해 악행을 저질렀지만, 여기선 아리스 몸에 알파3이 빙의하는 바람에 원작 내용이 틀어진 거겠지. 그럼 리치는? 그 리치가 살아 있으면 어쩌지? 원작대로 지그하르트에게 죽었다면 다행인데….’
<숲의 마법사> 원작과 달라도 너무 다른 내용에 이비는 혼란함을 느꼈다.
그저 서브 스토리가 틀어진 것이라면 그러려니 하고 넘겼겠지만, 칼라일과 리치는 최종 흑막이었다. 내용이 바뀌었다고 해서 단순하게 넘길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리치가 살아 있으면, 어딘가에서 또 자기 생명력 채우겠다고 사람들을 죽이고 있을 거 아냐?! 카르젠한테 혹시 리치라는 존재가 있었냐고 물어볼 수도 없고.’
리치는 소중한 사람을 잃어 좌절한 이에게 접근해 죽은 자의 영혼을 되찾아 준다고 현혹하며 많은 이들을 타락시키는 비겁한 존재였다.
프란제르 칼라일은 냉철하고 현명한 자였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리치에게 완벽하게 속은 것으로 묘사됐다.
그가 리치에게 넘어간 과정이 원작에선 자세히 서술되지 않아 독자들 사이에서 ‘현명한 사람이 저렇게 허술한 함정에 넘어간다니 말도 안 된다’, ‘악역으로 만들기 위한 억지 설정이다’ 등 말이 많기도 했었다.
일부 독자들로부터 조연 칼라일의 비중이 너무 높고 인기가 많아져서 일부러 악역으로 만든 것은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이비는 딱히 그 부분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는 건 괴로운 일이고, 다시 되돌릴 수 있다면 나도 뭔가 하려고 했을지도 모르니까….’
이비는 김현서였을 적 <숲의 마법사>를 읽으며 소중한 이를 잃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안식의 신>으로 위장한 리치와 거래를 택한 칼라일을 동정했었다.
물론 칼라일의 방식에 동의한 건 절대 아니었다. 다만, 누군가 자신에게 그럴싸한 증거를 보여 주며 형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했다면, 분명 본인도 사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 줬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뭐, 어쨌든 지금은 벌어지지 않은 일이니 후작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네. 물론 절대 마주치고 싶진 않지만! 원작 내용에 대해 걱정할 건 리치가 아직도 이 땅에 존재하는지 정도인가…. 일단 내가 알고 있는 내용과 다른 부분이 많은 것 같으니 알아봐야겠어. 그런데 이걸 카르젠에게 묻기는 조금 그렇고… 근대사로 알아보기엔 너무 최근 일이고, 어떻게 알아봐야 하지?’
이비는 책에 쓰여 있는 <우선은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봐라.> 구절을 떠올리곤 좌절했다. 현재로서 이비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보통 빙의로 이루어진 이야기들을 보면 소설의 전개가 달라지기 전, 그러니까 원작 내용 중간에 들어가게 되거나 원작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빙의되곤 했었다.
덕분에 미래를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꿀 수 있는 치트키를 하나씩은 갖기 마련이었는데, 이비는 치트키는커녕 본인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심지어 자신이 묘족 외에 다른 종족이 섞인 건지, 쉽게 피로해지고 몸이 떨리는 이유도 몰랐다.
‘하아아….’
원작의 모든 스토리가 끝난 직후도 아니고, 대략 1년 정도가 지난 시점에 빙의된 이비는 자신이 도움 될 만한 정보를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에 한숨이 나왔다.
아니, 치트키 삼을 만한 정보는 고사하고 현시점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속이 답답했다. 원작과 저가 알고 있는 현 상황을 최대한 끌어모아 비교해 보던 이비는 엔딩을 떠올리며 갸웃했다.
‘그럼 이계는 어떻게 된 거지? 설마 그 엔딩까지 틀어진 건 아니겠지?’
<숲의 마법사>에선 두 가지 반전이 있었는데, 하나는 조력자인 프란제르 후작의 흑막이었고, 또 하나는 여정의 마지막에 드러난 마족의 정체였다.
주인공 일행은 저들이 실제 마주한 마족의 정체가 세상에 알려진다면, 서대륙은 물론이고 동대륙까지도 발칵 뒤집힐 것이 뻔했기에 마족의 정체를 전반적으로 뭉뚱그려 <이계>라고 칭했다.
필리스 역사에 숨겨져 있던 거대한 진실을 마주한 주인공들은 선조에게 회의를 느끼고 자신들의 뿌리에 깊은 혐오를 느끼며 좌절에 빠진다.
물론 주인공 일행답게 어떻게든 이겨 내고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며 이야기가 막을 내리지만.
‘지금 딱히 이계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걸 봐선 역시 다들 함구하고 있나? 리엔도 체스터랑 커플로 맺어진 건 아닌 것 같고….’
남주는 제 3왕자 체스터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주 리엔과 본격적인 사랑 이야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런 부분 덕분에 독자들 사이에서도 <사랑이다> 파와 <우정이다> 파로 분분하게 갈렸는데, 이비는 우정파에 가까웠다.
‘아니면 아직 현재 진행형인가? 그러면 카르젠은 리엔과 어떤 관계지? 여전히 그냥 친구일까?’
문득 이비는 지금까진 신경 쓰지 않았던 체스터와 카르젠과 리엔의 관계에 의아함을 느꼈다.
분명 책으로 읽을 땐 카르젠이 리엔을 어느 정도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제 카르젠을 겪어 보니 어쩌면 그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는 개인적인 견해였지만, 이비는 카르젠이 저에게 주는 상냥함이 딱히 리엔에게 대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고 느껴졌다. 어쩌면 리엔에게 다정했던 것이 이성애를 기반으로 둔 것 같진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러고 보니 카르젠이 리엔에게 애정을 표현하거나 질투를 보였던 건 아니었지?’
원작에서 카르젠이 리엔을 좋아한다고 여겨질 만한 내용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게 해 주는 장면뿐이었다.
이는 필리스 세계 엘프의 특성 탓이었는데, 엘프는 자신의 마음을 허락한 이가 아니면 머리카락을 내주지 않는다는 설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근데 카르젠의 머리카락은 나도 만졌잖아?’
이비는 카르젠과 함께 처음 산책했던 밤의 기억이 선명했다. 당시 카르젠은 제 머리를 만지는 이비의 손길에 놀란 기색도 없었고, 심지어 이비가 넘기기 편하도록 허리를 숙여 주기까지 했었다.
‘엘프 머리카락에 대한 것도 원작과 조금 차이가 있나? 아니면 마음을 허락했다는 게 꼭 연인 관계를 말하는 게 아닐 수도 있겠지. 사랑에는 여러 형태가 존재하니까.’
원작 스토리와 현재 인물들의 관계. 그리고 종족에 대해 생각하던 이비는 문득 자신의 종족에 대해서도 의아함을 느꼈다.
‘묘족은 반려로 삼고 싶은 이를 보면 어떤 빛을 느낀다고 했지? 근데 원작에선 실제 빛이 아니라 빛나는 느낌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후광 같은 느낌이라고….’
카르젠이 웃을 때 발생하는 눈부신 빛을 떠올린 이비는 저도 모르게 실눈을 떴다.
저가 본 것은 단순하게 ‘아 이 사람이 내 이상형이구나!’라는 느낌을 주는 ‘반짝임’이 아니라, 말 그대로 눈부신 빛 그 자체였다.
그것도 재채기가 터져 나올 정도로 강렬한 빛.
묘족의 특성을 떠올린 이비는 설마 이 몸이 카르젠을 이상적인 반려로 생각하는 건가 싶어 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얼굴에 화끈하게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아냐. 이건 그냥 카르젠이 너무 잘생겨서 그런 걸 거야. 만약 반려로 생각한 거라면 크리시를 봤을 땐 왜 아무 반응 없었겠어? 내 최애는 크리시인데. 크리시에게서는 빛이 나지 않았다고! 게다가 조건만 보면 1등 신랑감이라고 생각한 체스터한테도 빛이 나지 않았으니 그건 아닐 거야. 어쩌면 묘족 외에 다른 종족이 섞여서 그럴 수도 있고.’
문제는 제 몸이 묘족 외에 또 어떤 종족이 섞였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새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원작과 달라진 내용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다는 걸 실감한 이비는 순식간에 시무룩해졌다.
‘다른 건 몰라도 루아인 근대사만큼은 좀 알아봐야 할 것 같은데….’
이비는 <나를 찾아와 줘.> 본문 마지막 페이지에 편지를 보낼 수 있는 주소를 보며 알파3을 떠올렸다.
그는 빙의한 지 꽤 됐으니, 알파3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여겨졌다. 하지만 이비는 이 세계에서 편지를 어떻게 보내는지 알지 못했다.
<숲의 마법사>에서 주인공들은 대부분 통신 수정을 이용했지만, 거기엔 늘 ‘값비싼 수정’이라는 부연 설명이 붙었다. 즉 이 세계가 통신 수정이 나올 만큼 생활 마법이 발달하긴 했지만,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설마 전서구를 쓰진 않겠지? 새는 아니어야 하는데….’
조류 공포증이 있는 이비는 부디 루아인 왕국의 보편적인 우편 전달 방식이 전서구가 아니길 빌며 바르르 떨었다.
***
…-보다 큰 눈사람이었다. 리엔은 대체 어떻게 해야 저렇게 큰 눈사람을 만들 수 있는 거냐며 일라나드를 향해 물었다.
-솔직히 말해 봐. 정령한테 도와달라고 했지.
-무슨 소리야? 정당한 승부였어.
-유사랑 이라나드가 이껴써! 리엔이랑 루가 져써! 지그하르트랑 크리시도 져써!
크리시는 지그하르트가 마법으로 만든 날개를 펴고 포효하는 드래곤 모양의 눈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무리 봐도 우리 눈사람이 더 큰데?
-그건 눈사람 아니쟈나! 눈사람은 이케, 이케 동그라케 생겨떠!
-그렇게 따지면 사람도 이렇게 동그랗게 생기지 않았거든?
-크리시는 바부야! 눈사람은 똥그래!
볼을 뿌뿌 부풀린 유사가 빨리 맞장구쳐 달라는 얼굴로 일라나드의 손을 잡아당겼다. 일라나드는 제 손가락을 꼭 잡은 아기 여우 요괴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미소 띠며 말했다.
-그러게. 저건 눈사람이 아니지. 눈용이지. 그리고 눈사람은 원래 동그랗게 생겼어.
-그치이~ 동그라치이이~.
힘차게 끄덕인 유사가 이번엔 리엔과 루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애초에 이길 생각이 없었던 리엔은 과장되게 어깨를 늘어뜨리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봐도 유사랑 일라나드의 눈사람이 아주 요~만큼 더 커 보이죠? 루?
루 역시 일부러 귀를 늘어뜨린 채 시무룩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
-아쉽지만 근소한 차이로 우리가 졌구먼. 이 몸도 소싯적엔 한 눈사람 하는 장로였는데, 아기 요괴에게 지다니… 허허~ 아쉽지만, 다음 승부를 기약하도록 하지.
전 묘족 장로까지 패배를 인정하자 유사의 꼬리가 힘차게 파닥거렸다. 그 꼬리에 맞은 크리시는 아프다며 비틀거렸고, 일라나드는 엄살 부리지 말라며 호탕하게 크리시의 어깨를 팡팡 쳤다.
리엔은 크리시가 진심으로 아파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꺄하학 웃으며 풍성한 꼬리로 크리시의 다리를 찰싹 찰싹 쳐 대는 유사가 귀여워 딱히 제지하진 않았다. 모처럼 갖게 된 평화로운 시간을 조금 더 느긋하게 즐기고 싶었다.
숲의 마법사 8권 121페이지 中
***
루아인 왕성 내 연구실이 밀집한 학술관은 학자들의 무덤이라 불렸다.
실제 연구 중 사고로 사망자가 발생한 것 때문은 아니었다.
대부분 이 학술관까지 끌고 오는 수준의 연구가 학자들의 피를 말리는 연구들이었고, 이에 학자들이 말버릇처럼 이 연구소에 뼈를 묻겠다는 말을 달고 살아 붙은 별명이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학술관에서 시행하는 연구 수준을 따라가기 벅차하면서도 열광했다.
특히 이 학술관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그것도 학술관 지하 출입증을 얻을 수만 있다면 목숨이라도 내놓겠다는 이들이 넘쳐났다.
“하아….”
즉 학술관 지하 연구소는 학자라면 죽기 전에 발이라도 디뎌 보고 싶어 하는 장소였다.
“후우우….”
그런 수많은 학자들이 선망하는 지하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던 궁성 의원 하렌델은 연신 한숨을 쉬었다.
“하이고, 우리 왕세자님 때문에 내가 제명에 못 살지… 옆 나라 왕자들처럼 대충 사시지, 어이구~ 정말.”
누가 들으면 참으로 불경한 소리라며 기함할 수 있으나, 하렌델은 이곳에서만큼은 자유로웠다.
학술관 지하 연구소 자체가 아무나 발을 들일 수 있는 곳이 아닌데다가, 하렌델이 있는 연구실은 왕세자 체스터의 개인 연구실이었으니 말이다.
체스터의 연구실은 블랙드래곤 지그하르트의 특별한 마법으로 작동하는 마도구가 없으면 문을 열 수조차 없었기 때문에, 출입할 수 있는 이는 현재로서 단 셋뿐이었다.
체스터와 하렌델. 그리고 이곳에 마법을 걸어 준 블랙드래곤 지그하르트.
혼자 넓은 연구실을 전세 내고 있던 하렌델은 종이 석 장을 팔랑거리며 중얼거렸다.
“이런 경우는 흔치 않은데 말이지.”
체스터가 은밀하게 부탁했던 유전학 검사 결과를 확인한 하렌델은 저도 모르게 찌푸리고 있던 미간을 주물렀다.
[토끼 묘족 31% / 미등록 종 69%]
검사 결과가 적힌 종이를 뱉어 낸 마법 장치를 노려봐도 변하는 건 없었다. 세 번의 검사 결과가 모두 같았다.
의자에 거의 흘러내리다시피 드러누운 하렌델은 작고 귀여운 토끼 귀를 가진 소년을 떠올렸다. 그는 자신이 묘족의 피가 섞인 줄도 모르고 있던 소년이었다.
‘골격으로 봐선 당연히 인간이랑 섞인 줄 알았는데 인간 유전 정보는 없단 말이지… 혹시 동대륙 종족이랑 섞였나?’
아직 등록되지 않은 동대륙 유전 정보가 꽤 있었기에 하렌델은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미등록 정보라고 하더라도 그중 인간형은 없었다.
게다가 미등록 종 비중이 69%나 차지하고 있다면 분명 그 종족의 티가 더 많이 나기 마련인데, 이비라는 소년의 몸에선 묘족과 인간 외 다른 종족의 흔적을 찾기가 어려웠다.
“이거 참….”
고민하느라 찌푸린 탓에 하렌델의 이마 주름이 깊어졌다. 검사 결과만 두고 보면 이비라는 소년은 바로 윗세대가 묘족과 인간이어야만 나올 수 있는 골격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인간과 신체 구조가 거의 흡사한 엘프나 다른 수인종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검사 결과지에 미등록 종으로 표기될 일은 없었다. 현재 루아인에서 수집하지 못한 인간형의 유전 정보는 없었으니까.
“토끼야. 대체 뭐랑 섞인 거니? 음… 음? 가만….”
손가락으로 결과지를 두드리던 하렌델은 순간 인간의 신체 조건에 가까우면서도 아직 등록되지 않은 두 종족을 떠올렸다.
“설마….”
연구실의 한쪽 벽면을 채우고 있는 거대한 세계수 그림의 상단과 하점에 위치한 두 공란을 바라보던 하렌델은 이내 픽 웃었다.
“어이구. 나도 참. 그럴 리가 없지.”
각 종족이 이어진 가지와 뿌리로 복잡하게 얽힌 그림 속엔 아직 수집하지 못한 종족의 여백들이 있었다.
그중 가장 많은 여백을 가진 공간은 바다에서 살아가는 미지의 종족들이었지만, 그들은 신체적 특성이 인간형으로 분류된 이들은 아니었기에 하렌델의 관심을 끌진 못했다.
“흠….”
하렌델은 한번 신경 쓰기 시작하니 자꾸만 제 눈길을 끄는 그림 최상단의 공란을 흘긋 바라봤다. 누가 곁에서 지켜보는 것도 아닌데, 보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지는 위치였다.
<천족>
잠시간 그림 위에서 머문 하렌델의 시선이 그림의 최하단 나무의 뿌리 사이 비어 있는 공간으로 내려갔다.
<악마>
그 글자를 바라보던 하렌델은 저도 모르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말도 안 되는 의심이었다.
***
이비는 습한 기운을 느끼곤 창가로 향했다. 아직 저녁 시간 전인데 벌써 창밖이 깜깜했다.
열려 있는 창을 닫기 전 하늘을 살피니 어둑어둑하고 꿉꿉한 것이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비가 오려나?’
기분 탓이 아니었는지 먼 하늘에서 우르르르릉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아래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마당을 내려다보니 몇몇 시종들이 빨래를 걷어야 한다며 뒷마당으로 달려가는 게 보였다.
‘율리랑 할리스가 장 보러 가서 아직 안 왔을 텐데….’
이비는 직장 동료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테라스에 나갔다.
시커멓게 몰려오는 비구름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물 한 방울이 볼에 톡- 떨어졌다.
손등으로 볼을 대충 훔친 이비는 손바닥을 위로 해 팔을 뻗었다. 잠시간 아무 느낌도 없었지만, 곧 빗방울이 하나둘 툭 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손을 거둔 이비는 옆방 테라스로 시선을 옮겼다. 창문이 열려 있었고, 건너편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르르릉- 쿠르르르르르릉-
머나먼 곳에서부터 거대한 바위가 굴러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심상치 않은 소리에 방으로 들어온 이비는 창문을 굳게 닫고 옆방으로 향했다.
저택의 손님용 방은 현재 이비가 쓰는 방을 제외하고 전부 비어 있었지만, 언제든 손님을 맞을 수 있게 매일같이 시종들이 청소를 하고 환기를 위해 창을 활짝 열어 두었다.
이비는 옆방으로 들어가 열려 있는 창문을 닫고 빗장을 잠갔다. 그리고 또 다른 방으로 들어가 창문을 닫으려는 순간.
콰과과과광-!
“!!!”
예고 없이 터진 천둥에 기겁하며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하늘이 쪼개지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큰 천둥이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이비는 창문을 걸어 잠그고 손님 없는 방을 나섰다.
또 다른 방 창문을 닫고 마지막으로 복도 제일 끝 방에 들어간 이비는 창밖으로 보이는 대문이 열리며 마차가 들어서는 것을 발견했다.
‘율리랑 할리스네. 다행히 비가 쏟아지기 전에 돌아왔구나.’
순수하게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을 때 하늘이 번쩍였다. 곧 하늘을 쪼갤 천둥에 마음을 단단히 먹은 이비는 창문을 걸어 잠그고 급히 방을 나섰다. 어쩐지 천둥이 치기 전에 어두운 방에서 나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복도로 빠져나오자마자 콰과과광!!! 천둥이 쳤다. 온 저택 창문이 흔들릴 정도로 강한 천둥이었다.
‘와, 날씨 때문에 음침하게 보이는 것 봐.’
아직 이른 저녁이라 수정을 많이 밝혀 두지 않은 탓에 저택 복도가 음침하게 느껴졌다.
이비는 복도 벽면에 걸린 수정을 마음대로 켜도 되는 건지 몰라 따로 손대지 않았다. 덕분에 복도는 평소보다 훨씬 어두웠다.
‘날도 꿉꿉하고. 카르젠 서재에서 근대사 책이라도 찾아봐야겠어.’
근대사를 핑계로 이비는 무의식중에 카르젠이 있는 서재로 향하고 있었다. 이렇게 비가 쏟아지고 천둥 번개가 치는 날엔 혼자 있고 싶지 않아서였다. 절대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근대사가 중요해. 근대사가. 난 이 세계를 파악해야….’
번쩍-
콰아아아아앙!!!!!!!!!
‘윽! 귀가…!’
하늘을 쪼갤 듯한 거대한 천둥소리에 일순 어지러움을 느낀 이비가 복도 구석에 주저앉았다.
무의식중에 청각에 집중한 건지 천둥소리가 고막을 강타한 것 같았다. 귀 안쪽이 찡- 울렸다.
‘어지러워….’
이비는 갑자기 제 몸을 덮친 어지러움에 중심 잡기가 어려워 벽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귀 안쪽에서부터 욱신욱신 통증이 피어올랐다. 통증은 맥박처럼 일정 박자에 맞춰 욱신거렸고, 그럴수록 청각은 더 예민해졌다.
이비는 어떻게든 제 토끼 귀를 넣기 위해 얼얼한 부분을 문지르며 낑낑댔다. 평소엔 쉽게 제어 가능했는데, 지금은 귀가 아픈 탓인지 잘 들어가지 않았다.
그때 또 눈부신 빛이 번쩍이며 복도가 점멸했다. 어마어마하게 큰 천둥이 내리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귀를 넣으려 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귀가 갑자기 왜 안 들어가지? 설마 고막을 다쳤나? 어지러운 걸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고막까지 개복치야 뭐야!’
새삼 제 몸이 연약하다는 것을 실감한 이비는 천둥에 대비해 귀를 꾹 내리눌러 잡고 몸을 웅크렸다. 모르긴 몰라도 조금 전보다 더 큰 천둥이 칠 것 같았다.
제발 고막이 무사하길 바라며 꽉 잡아 누르고 있을 때, 다가온 누군가가 제 손등 위로 손을 겹쳐 잡고 부드럽게 눌러 주기 시작했다.
“!”
그 손길에 놀란 이비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또다시 복도가 번쩍이며 점멸한 순간, 이비의 시야에 긴 흑발이 들어왔다.
머리카락의 주인을 알아본 것만으로도 안도감을 느낀 이비는 제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있는 남자를 마주 봤다.
귀가 아픈 탓인지 소리가 웅웅 울렸지만,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를 구분하는 것은 쉬웠다.
“괜찮아, 이비. 긴장하지 마. 저건 천둥이야. 그냥 자연이 들려주는 소리일 뿐이야. 괜찮아.”
카르젠은 이비가 기억 상실인 탓에 천둥이 뭔지 몰라 겁먹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비는 그간의 경험으로 이런 오해는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입술을 먼저 움직였다.
[그게 아니라, 귀가 들어가지 않아요.]
귀가 아플까 봐 벌벌 떨던 이비의 입술을 읽어 낸 카르젠은 나긋한 목소리로 괜찮다고 진정시켜 주며 말했다.
“괜찮아. 놀라서 그래. 긴장하지 말고 마음 편하게 가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그러니 이비가 원하는 대로 하면 돼. 다시 해 보자.”
카르젠의 격려에 안도감을 느낀 이비는 다시 한번 귀를 넣기 위해 눈을 꾹 감고 몸에 힘을 주었다.
꼭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귀를 빼거나 넣을 땐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갔다.
카르젠이 응원해 줘서 그런지, 두 번째 시도에선 다행히 토끼 귀를 넣는 데 성공했다. 순식간에 머리를 울리던 어지러움도 잦아들었다.
제대로 귀를 넣은 기쁨에 고개 든 이비가 고맙다고 말하려던 순간.
쿠과과과과과광!!!
이전보다 훨씬 큰 천둥이 치며 저택의 온 창문이 덜컹거렸다.
‘으악! 깜짝이야!’
마음의 준비를 했음에도 너무 큰 소리에 기겁한 이비가 몸을 흠칫 떨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르젠은 이비의 몸을 당겨 안으며 도닥여 주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천둥이 심하네. 괜찮아. 괜찮아, 이비.”
다정한 도닥임에 당황한 이비는 그게 아니라는 듯이 품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천둥이 무서워서 그러는 게 아닌데… 아니, 카르젠. 내가 애도 아니고….’
하지만 카르젠은 이비를 놓아주는 대신 안아 올렸다.
“!”
순식간에 몸이 붕 뜬 이비가 휘둥그레져 바라보니, 카르젠이 이비 너머를 향해 말했다.
“주디. 이비가 많이 놀란 모양이야. 서재로 갈 테니 허브티를 부탁할게.”
대체 언제부터 있던 건지 걱정스러운 얼굴의 주디가 보였다. 이비는 주디에게 절대 그런 게 아니라고 해명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이미 의욕 가득한 얼굴로 복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아….”
이비는 허공에 뻗은 손을 거두고 얌전히 카르젠의 품에 안겨 또 무언가를 포기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부끄러움을 감당하는 것은 이비 혼자만의 몫이었다.
***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한 가을비에 천둥이 끊이질 않았다. 하늘이 쪼개지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강한 천둥이 연이어 수도 아브델을 울렸다.
카르젠은 천둥이 크게 칠 때면 소파에 앉아 있는 이비를 살폈다.
천둥 때문에 겁먹은 모습을 보인 것이 자존심 상했는지, 천둥이 크게 울릴 때마다 흠칫거리면서도 괜찮은 척하는 모습이 오히려 더 안쓰러웠다.
‘묘족은 대부분 천둥을 무서워하니 딱히 부끄러워할 일은 아닌데.’
꽤 긴 여정을 묘족과 함께했던 카르젠은 당시 동대륙에서 온 묘족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천둥이 치는 날엔 모두 귀를 집어넣고 로브를 뒤집어쓰거나 모자를 꾹 눌러쓰곤 했다.
천둥이라는 자연의 현상이 무서워서는 아니었다. 그저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이 예민한 청력에 지장을 주기 때문이었다.
이비의 경우 혼혈이라 덜한 것 같지만, 순수 혈통 묘족들은 귀를 집어넣어도 큰 소리에 놀라거나 어지러움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대규모 전투를 치르고 나면 다친 고막을 치료하는 묘족들을 자주 봤었다.
멀지 않지만, 이제 추억이 된 기억을 떠올려 보던 카르젠은 이비가 읽고 있는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빛이 잠들지 않는 도시, 아브델의 명소들>
이전에도 이비가 읽었던 책이었다. 카르젠은 책을 정독하던 이비를 살폈다.
책에서 대단한 정보라도 발견한 건지 놀라 눈이 커지더니, 곧 수첩에 메모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의아함을 느꼈다.
‘저 책에 메모할 만한 내용이 있나?’
이비가 읽는 책은 다른 국가 또는 먼 지역에서 방문한 이들을 위해 서대륙 공용어로 쓰인 수도 관광 안내서였다.
얼마 전에 저 책을 읽고 이비가 혼자 외출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기한 카르젠은 중간중간 이비를 지켜봤다.
책에 집중한 이비는 저를 살피는 카르젠의 시선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수첩에 적은 메모를 확인했다.
<머니마니 달러스 편지 – 아브델 사론9거리-190>
<광장에서 가장 가까운 우체국 – 에벨루스 신전 뒤편에 빨간 벽돌 건물 (사론9거리-184)>
‘편지 보낼 주소가 바로 근처였어!’
명소 책에 적힌 에벨루스 신전 주소는 사론9거리-180이었다. 주소만 두고 보면 신전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굳이 우편을 보내지 않고 외출한 김에 편지를 두고 와도 좋을 것 같다 파악한 이비는 아브델의 명소 책을 내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편지에 대해서는 한시름 놓았으니, 이젠 필리스의 근대사를 알아볼 차례였다.
카르젠의 서재에는 다양한 책이 있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역사 관련 책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이비는 갸웃하며 한쪽 벽면의 책꽂이를 쭉 훑어봤다.
‘어? 역사책은 없나?’
반대편 벽면 책꽂이로 가서 살펴봐도 마찬가지였다. 이비는 역사책이 없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숲의 마법사에 나온 엔딩은 그대로였나 보네….’
<숲의 마법사>에서 주인공들이 겪은 최종 반전을 떠올린 이비는 무리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엔딩에서 드러난 심각한 역사 왜곡 때문에 주인공 일행이 선조에 대한 혐오감만 느끼며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비는 카르젠이 바이스 가에서 나온 이유도 저 엔딩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했다.
물론 대외적으로는 마족과의 긴 전쟁으로 인해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돕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사실은 바이스 가문이 고결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대륙 정세는 역시 머니마니 달러스에게 직접 듣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바로 곁에서 카르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비. 따로 찾는 책이라도 있어?”
“!”
놀란 이비가 고개 들어 보니 언제 다가온 건지 카르젠이 곁에 서 있었다.
이비는 카르젠에게 역사만 제외하고 저가 알고자 했던 것을 입술로 물었다.
[나중에 근무할 때 도움이 될 만한 책이 있는지 찾고 있었어요.]
“근무할 때? 어떤 게 궁금한데?”
[우편 처리 방법이나 예법 공부 같은 거요.]
딱히 둘러대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우편 관리는 보좌관이 매일 하는 일에 포함되어 있었고 꽤 중요한 일이었다. 또 이비는 카르젠이 자신을 많이 봐주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이 세계의 예법을 아직 잘 몰랐다.
“아아, 그렇구나. 맞아. 예법은 어렵지. 이비가 모르는 게 당연한 건데, 내가 간과했어. 그럼 예법에 대해서 공부할 수 있도록 선생님을 구해 볼게.”
“!?”
‘아니, 그냥 책이랑 부집사 할리스에게 배워도 될 것 같은데….’
당황한 이비가 입술을 움직이려 했지만, 카르젠이 더 빨랐다.
“그리고 예법도 공부해야겠지만, 춤도 배워야겠지.”
“???”
굳이 이비가 입술로 말하지 않아도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번에 파악한 카르젠이 말을 이었다.
“연말부터 크고 작은 행사들이 있어. 특히 연말 연초엔 필수로 참석해야 하는 행사가 대부분이라 이비도 함께할 예정이니, 미리 춤을 배워 두면 좋을 거야.”
‘춤? 연회복 입고 추는 그 춤? 내가 파티에서 춤출 일이 있나? 설마 공녀들하고 춰야 하는 거야?’
카르젠은 당황해 뻐끔뻐끔하는 이비를 내려다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법으로 명시된 건 아니지만, 루아인에서는 보통 파티에 초대받으면 한 곡은 추고 가는 게 예의라고 하거든. 기본 매너라고 볼 수 있지.”
‘그러고 보니 숲의 마법사에서 그런 내용이 나왔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 근데 내가 춤을 출 수 있을까?’
사람이 가득한 파티에서 춤을 춰야 한다니! 생각만으로도 긴장됐다. 그런 이비의 긴장감을 대변하듯 창밖에서 우르르르릉 천둥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카르젠은 굳어 버린 이비를 향해 안심하라는 듯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며칠간은 비가 내릴 것 같으니, 실내에서 춤 연습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그리고 난 개인적으로 이비가 춤을 꼭 배웠으면 해.”
[꼭…이요? 파티에서 제가 춤출 일이 있나요?]
당황한 이비가 입술로 머뭇머뭇 물었다. 입술을 다 읽어 낸 카르젠은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응. 이비가 내 파트너로서 함께 춤을 춰 준다면, 눈치 보지 않고 파티를 빠져나올 수 있겠지. 그럼 난 춤 신청을 거절하느라 애쓰지 않아서 편하고, 이비는 피곤한 파티에서 빨리 퇴근하니까 편하고. 서로 좋지 않겠어?”
카르젠의 말을 이해한 이비는 납득하면서도 당황스러웠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다른 공녀들의 춤 신청을 거절할 목적으로 나랑 추겠다는 거구나. 아니, 근데! 카르젠 엄청 인기 많을 텐데! 그럼 나 사교계에서 공공의 적이 되는 거 아냐!?’
콰과과과광!!!
이비는 저 천둥이 정말 하늘에서 울리는 소리인지, <이번 생은 가늘고 긴 삶>이라는 희망을 부숴 버리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생각하며 카르젠의 시선을 피했다.
***
얼떨결에 춤을 배우기로 약속한 이비는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내가 카르젠의 파트너라니…….’
서재에서도.
‘내가… 내가 카르젠과 춤을…….’
식당에서 카르젠과 저녁을 먹으면서도.
‘누가 발을 걸거나 나를 모함하면 어떻게 하지…….’
방에 돌아와 혼자 목욕을 하면서도.
‘카르젠을 좋아하는 귀족 자제들이 나를 괴롭히면 어떡하지?’
제 방 티 테이블 의자를 빼고 앉아서도 이비는 내내 걱정뿐이었다.
덕분에 오늘 저녁 식사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물론 평소처럼 맛있게 먹긴 했지만 걱정이 태산이었다.
이비는 데뷔탕트나 사교계 파티를 전부 로맨스 판타지 소설이나 웹툰으로 배웠다. 즉 이비가 아는 귀족의 파티는 서로를 물어뜯고 파벌을 만들며 힘겨루기를 하는 진탕 같은 곳이었다.
지나가다 눈만 마주쳐도 온갖 루머가 피어나고,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하는 곳…….
‘완전 약육강식의 세계잖아!’
그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이비는 최하층에 위치한 초식 동물이나 마찬가지였다. 하필 종족도 묘족인데, 타고난 힘마저도 초식 동물의 그것에 가까웠다.
‘보통 빙의물 주인공들은 다 타고난 힘 자체가 세니까 누가 시비 걸면 10배로 갚아 주던데, 나는…….’
이비는 자신이 강하지 않음을 매우 잘 알았다. 만약 누군가 흔한 클리셰 에피소드처럼 자신에게 시비를 건다면 당황해 제대로 대응도 못 할 것이 분명했다.
물론 카르젠이라는 든든한 아군이 있지만, 만약 카르젠이 잠시 한눈판 사이 악독한 귀족에게 걸린다면 뼈도 못 추릴 것이 뻔했기에 벌써 사교계가 무서워졌다.
‘아냐. 괜찮을 거야. 바이스 가문이 백작가이긴 하지만, 카르젠은 체스터의 친구고, 대륙을 구한 영웅 중 하나니까, 가 아니라 그 영웅이랑 춤을 추는 게 나라는 게 문제잖아…….’
괜찮다고 위안하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생각에 한숨을 푹 쉬었다.
춤 상대라니, 너무 과한 역할 같아 이제라도 거절하고 싶지만, 서재에서 카르젠의 반응을 떠올려 보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이비는 저가 얼떨결에 알았다고 끄덕였을 때, 카르젠이 행복하게 웃던 모습을 떠올리곤 저도 모르게 실눈을 떴다.
‘진짜 눈부시게 웃었지. 파티에서 빠르게 퇴장하는 게 그렇게 좋을까? 카르젠이 저렇게까지 기피하는 걸 보면 역시 파티는 위험한 곳이겠지? 이미 한다고 했으니 관둘 수도 없고. 그래도 카르젠 옆에 딱 붙어 있으면 소설처럼 남들 다 있는 데서 괴롭히진 않겠지. 그래. 어쩔 수 없어. 그냥 카르젠 옆에 코알라처럼 붙어 있자. 내 목숨은 내가 챙긴다.’
애써 스스로를 달랜 이비는 티 테이블 위에 올려 둔 물건으로 시선을 돌렸다.
티 테이블 위엔 수면의 질을 높여 준다는 <행복한 꿈> 책과 편지지와 작은 노트가 있었다.
편지지와 노트는 저택 창고에서 가져온 것이었고, 책은 오늘 율리가 사다 준 따끈따끈한 새 책이었다.
이비는 먼저 책과 함께 받은 부록 상자를 열어 봤다. 그러자 조잡한 끈으로 묶어 둔 작은 하얀 수정이 보였다.
‘꿈 수정이라. 보통 두 번밖에 못 쓴다고 하니 아껴 써야겠다. 책도 비싸고. 근데 책이 뭐 이리 조잡해?’
이비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조잡한 책을 펼쳤다. 수정 때문인지 책값이 무려 2만 클로였는데, <나를 찾아와 줘>처럼 얇은 소책자였지만 질은 훨씬 떨어져 보였다.
‘디자인도 별로고, 되게 급하게 대충 만든 것 같은데? 이거 믿어도 되는 거 맞겠지?’
물론 디자인이 전부는 아니지만, 너무 조잡해 보이는 표지였다. 이비는 걱정을 뒤로하고 일단 책장을 넘겼다. 그리곤 표지보다 훨씬 더 조잡한 내용에 점점 미간을 찌푸렸다.
‘와~ 책 내용 진짜 별거 없네. 그냥 수정 팔이 용이구나?’
책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수준이었다. 단순히 수정 사용 설명서에 가까웠는데, 그나마도 페이지를 늘리느라 같은 내용의 반복일 뿐이었다.
‘한마디로 보통은 1-2회, 많으면 3회까지 재사용 가능하지만 의존도가 높아질 수 있으니 이틀 연속으로 사용하지 말라는 거네.’
이비는 주의 사항을 다시 꼼꼼하게 체크했다.
이틀 연속 사용하지 말 것. 최소 하루걸러 사용할 것. 남용하지 말 것. 수면제와 함께 사용하지 말 것. 심리 치료를 받는 경우 사용하지 말 것. 체질에 따라 꿈을 꾸지 않고 숙면하거나 또는 아예 소용이 없을 수 있으나 환불 불가.
이 간단한 내용을 무려 20페이지에 걸쳐 반복 설명하고 있었다.
‘수정이 안 통하는 체질이면 진짜 돈 아깝겠다…….’
이비는 다시 상자 속 수정을 흘긋 봤다. 수정 자체도 굉장히 조잡해 보였는데, 아무리 봐도 신뢰가 가지 않았다.
‘돈만 버린 거면 카르젠에게 미안한데…… 그래도 일단.’
상자에서 수정을 꺼낸 이비는 끈을 목에 걸고 매듭을 묶어 길이를 조절했다.
어차피 수정은 많아 봤자 세 번 사용 가능하고, 이비는 내일 카르젠과 잘 예정이었으니 걱정할 만한 부분은 하나도 없었다.
이비는 편지지와 봉투를 티 테이블 위에 잘 갈무리해 두고, 그 위에 <행복한 꿈> 책을 올려 두고 정돈을 했다.
‘좋아. 일단 자자. 편지 내용은 내일 생각해 봐야지.’
아직 잠들기엔 이른 시간이었지만, 수정 효과가 궁금했기에 일단 눕기로 했다.
포근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은 이비는 손을 뻗어 협탁 램프 수정 표면을 쓰다듬었다. 손끝이 미미하게 지잉- 울리며 불이 꺼졌다.
자세를 편히 잡은 이비는 코끝까지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지만 바로 잠들 수는 없었다.
창밖으로 번개가 칠 때면 방안이 번쩍번쩍 점멸했고, 그때마다 눈 감고 있는 이비의 시야도 번쩍였다. 큰 천둥도 계속해서 내리쳤다.
이비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포근한 이불에 숨 구멍을 열어 두고 그 부근에 얼굴을 대고 눈을 감았다.
시야가 방해받지 않으니 적당히 들리는 빗소리와 우르릉 울리는 천둥소리가 더는 거슬리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바로 잠들긴 힘들겠지. 아직 잘 시간도 아니고… 빨리… 잠들었으면 좋겠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은데, 이비는 순식간에 자신이 잠에 빠져든 것을 인식했다.
감각으로 인식한 것은 아니었다. 시야가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이비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 순수한 감탄을 내뱉었다.
“와, 이게 뭐야. 무서워.”
이비, 아니 김현서의 육성이 흘러나왔다.
‘꿈이면 역시 내 본래의 목소리가 나오는 건가, 무의식인 건가?’
의아함보단 단순히 재미를 느낀 이비는 주변을 둘러봤다. 꿈속의 육신은 긴 복도에 서 있었다. 카르젠의 저택은 아니었다. 천장의 형광등과 각 문마다 도어락이 달려 있는 것을 보니 이 세계의 건물은 아니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복도엔 양옆으로 다닥다닥 문이 붙어 있었다. 문 사이사이 창문도 많았는데, 창문은 다 블라인드가 내려와 있었다.
생각보다 음침한 꿈에 당황했지만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문을 먼저 살폈다. 각 문마다 문패가 걸려 있었는데, 눈앞의 문패에는 아기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비밀번호가 필요한가?”
도어록을 어떻게 열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일단 손을 대 보니 아무것도 누르지 않았는데 삐리릭- 소리가 나며 철커덕 문이 열렸다.
이비는 문을 열고 들어가는 대신, 문틈 사이로 슬쩍 고개를 들이댔다. 밝은 공간이 보였다. 이비는 그 공간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병실이었다.
자신의 병실은 아니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은 이비의 어머니였다.
“엄마…….”
이비는 자신의 기억보다 젊은 모습의 어머니를 잠시 지켜봤다. 그녀는 제 옆에 아기를 안고 있는 아버지를 향해 웃고 있었다.
이비는 용기를 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저를 보지 못했다. 이비는 이 꿈의 공간에서 온전히 동떨어진 손님이었다.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는 김현서였다. 자연스레 아버지의 맞은편으로 시선을 옮긴 이비는 가슴이 욱신거림을 느꼈다.
어린 소년이 해사한 얼굴로 막 태어난 제 쌍둥이 여동생을 안고 있었다. 소년은 제 품의 동생이 신기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방긋 웃으며 이름을 불렀다.
“현아야. 안녕. 난 네 오빠야.”
어린 형의 목소리를 들은 이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비보다 7살 많은 형은 항상 어른처럼 느껴졌는데, 지금 제 앞에 있는 형은 그저 어린아이였다. 형의 어린 모습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형…….”
들릴 리가 없다는 것을 아는데도 불러본 이비는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형의 볼을 만져 보려 손을 뻗었지만 그대로 통과해 버리자 이비는 쓰게 웃었다.
‘닿을 수 없구나. 꿈인데도. 볼 수밖에 없구나.’
이비는 손을 거두고 뒤로 조금 물러섰다. 행복해 보이는 가족을 눈에 담고 있자니 여기서 나가고 싶지 않았다. 쭉 여기에 있고 싶었다. 닿을 수 없어도 그들과 있고 싶었다.
자리에 앉아 하염없이 부모님과 형과 아직 핏덩이에 불과한 자신과 동생을 바라보던 이비는 방 조명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완전히 어두워지기 직전, 이비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다.
“여보. 현서 잠들었어. 이거 봐. 정말…….”
아버지의 목소리가 끊기며 방이 암전됐다.
순식간에 컴컴해진 방은 마치 사라진 공간인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열린 문틈 사이로 빛이 들어왔지만 그 무엇도 밝히지 못했다. 빛은 그저 출구일 뿐이었고, 이 방 안의 세상은 사라져 버렸다.
신생아인 자신의 기억이 여기까지임을 알게 된 이비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삐죽거리며 투덜거렸다.
“쓸데없이 현실적이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빛을 향해 나가니 문이 자동으로 닫혔다.
이비는 이어 다른 방도 구경하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도어록을 해제하고 들어가 잊고 살았던 추억의 장면을 보고 있자니 행복했다.
유아기의 기억은 대부분 짧고 단편적이었지만 행복한 기억뿐이었다. 원래도 알고 있었지만 새삼 제 부모님과 형이 자신을, 그리고 동생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껴 주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아주 짧은 단편적인 기억의 방을 몇 번이고 지켜본 이비는 돌하르방과 귤이 그려진 방문을 발견하고 반가움에 문을 열었다.
‘제주도 여행이구나. 벌써 여기까지 왔어.’
이비는 9살쯤에 가족과 함께한 제주도 여행을 기억했다. 이비는 9살의 김현서를 어렵지 않게 찾았다. 호텔 정원 뒤 수풀 사이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어린 자신과, 저 멀리서 저를 발견하고 다가오는 형이 보였다.
어린 김현서는 풀숲 사이에 쓰러져 끙끙대는 고양이를 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었는데, 김현서의 시선을 따라간 이비는 고양이를 보고 놀라 눈이 커졌다.
분명 노란색 줄무늬 고양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꿈에서 본 고양이는 시커멓고 더러운 진액 같은 것이 온몸에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게다가 그 진액은 고양이의 코와 입으로 계속 파고들며 호흡을 방해하고 있었다.
“많이 아파? 어떻게 하지…… 야옹아, 왜 그래? 응? 물 마시고 싶어서 그래?”
고양이는 혀를 내밀고 숨을 몰아쉬며 몸을 질질 끌었다. 곧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이면서도 어떻게든 수풀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이비는 어린 김현서와 고양이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쭈그려 앉아 고개를 기울였다. 수풀 안에 고인 물을 보니 역시 자신이 봤던 것과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 기억엔 그저 평범한 물웅덩이였는데, 지금 수풀 사이에 고인 물은 눈부실 정도로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보석처럼.
“야옹아, 내가 도와줄게.”
고양이는 저를 향해 손을 뻗는 어린 김현서를 향해 연신 하악댔다. 고양이가 하악댈 때마다 몸에 붙은 검은 진액이 치이익 타들어 가며 연기를 냈지만, 어린 김현서의 눈엔 보이지 않았다.
“어떡하지, 많이 아파? 물 줄까? 저기 저 물 마시고 싶어서 그래?”
김현서는 자꾸만 고인 물로 향하는 고양이가 안쓰러워 다시 손을 뻗었다.
“하아악! 캬악!”
고양이가 기겁하며 앞발로 그 손을 쳐 냈지만 김현서는 괜찮다며 고양이를 안심시켜 주었다. 고양이에게 맞은 손이 아플 법도 한데, 아픈 고양이가 우선인 듯이 계속 손을 뻗었다.
“괜찮아. 도와줄게. 야옹아, 괜찮아. 해치지 않아.”
괜찮다는 김현서의 말과 달리 고양이의 눈동자엔 공포가 깃들어 있었다. 작은 아이의 손이 고양이의 앞발질을 견뎌 내고 닿은 순간, 고양이가 매섭게 울며 몸부림쳤다.
“냐아앍!”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에 놀란 김현서는 고양이의 몸을 잡고 힘주어 수풀로 밀어 넣었다.
이비는 김현서가 고양이의 몸을 잡고 수풀 안으로 밀어 준 덕분에 반짝이는 웅덩이에 상체가 빠진 것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고양이는 곧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처럼 헐떡댔지만, 반짝이는 웅덩이에 닿은 순간 조금씩 숨을 고르게 쉬기 시작했다.
고양이의 얼굴에 안도감이 퍼진 것을 확인한 김현서가 헤헤 웃었다. 일순 흠칫 눈을 크게 뜬 고양이가 김현서를 살피곤 바르르 떨기 시작했다.
자신 덕분에 고양이가 나아졌다고 생각한 어린 김현서의 손엔 조금 전 고양이의 몸을 감싸고 있던 시커먼 진액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고양이의 떨리는 눈동자가 김현서의 얼굴로 향했다. 그 순간, 이비는 저 시커먼 것이 어린 김현서의 몸에 흡수되며 파고드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
“으악! 저게 뭐야!? 이런 건 기억에 전혀…….”
“현서야. 여기서 뭐 해?”
“형아, 이 고양이 아픈 것 같아서 내가…… 앗, 야옹아 어디 가!”
고양이는 비틀거리며 어떻게든 형제들에게서 멀어지려 했다.
김현서가 치료해 주겠다며 수풀에서 끌어내려 했지만 손길을 피해 절뚝절뚝 수풀 사이로 들어가 버렸다. 안으로 따라 들어가지 못하는 김현서가 침울해하며 말했다.
“형아, 여기에 고양이 있었는데, 엄청 아파 보였는데 방금 저기로 들어갔어…….”
“고양이?”
“응. 숨도 막 제대로 못 쉬고 진짜 아파 보였는데…….”
“으음~ 고양이면 괜찮을 거야. 고양이가 혼자 걸어갈 수 있으면 괜찮은 거랬어.”
“진짜?”
“응. 동물은 정말 너무 아프면 못 움직인댔어. 사람하고 똑같다고.”
“어, 진짜? 그럼 다행인데…….”
어린 동생을 안심시키려는 선의의 거짓말이었지만, 김현서는 그 말을 철썩같이 믿었다. 제 형의 말이라면 무조건 다 옳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으니까.
“가자. 근처에 갈치구이 집에 간대.”
“헉, 갈치? 나는 갈치 싫은데…….”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모습에 현우가 쿡쿡 웃으며 말했다.
“다른 데 보고 있으면 형이 살 발라 줄게.”
현우는 제 동생이 생선을 무서워하는 걸 알기에 안심하라며 손을 내밀었다. 다정한 형의 미소를 멀뚱하게 바라보던 김현서는 방긋 웃으며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이비는 이 감동적인 추억에서 오직 시커먼 존재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린 몸속에 흡수되지 않고 손에 남아 있던 잔여물이 맞잡은 제 형의 손을 타고 흡수되는 것을 지켜본 이비는 입을 틀어막았다.
불쾌했다.
저게 뭔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불쾌했다.
“이게… 이게 대체 뭐야? 이런 건 기억에 없었는데…….”
이비는 멀어져 가는 저와 형의 모습에 점점 방 안이 어두워지는 것을 느끼곤 두리번거리다 흠칫했다. 나무 위에 올라간 고양이가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김현서가 아닌 이비를.
“…….”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고양이와 눈이 마주친 이비는, 저 눈동자에 담긴 무게를 파악할 수 없어 아찔해졌다.
단순한 동물이 지닐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까마득할 정도로 억겁의 시간이 느껴지는 무게감이었다.
이비는 제 몸을 짓누르는 세월의 무게에 휘청거리는 와중에도 고양이를 향해 물었다.
“누구세요?”
어쩐지 존댓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고양이는 잠시간 이비를 측은하게 바라보다 주둥이를 열었다.
그 순간 방이 암전됐다.
“안 돼!”
이비는 암전된 방 안에서 소리쳤다. 중요한 무언가를 놓친 것 같았다. 저가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기억에 이비는 방을 뛰쳐나가 문을 닫고 심호흡했다.
문을 닫고 도어록이 잠기는 소리가 들린 후 다시 손을 대자 삐리릭-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하지만 방 안엔 아무것도 없었다.
“아, 안 돼… 안 돼, 이건… 다시, 다시 봐야 해. 다시…….”
문을 닫고 도어록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자, 이비는 다시 손을 댔다.
삐리릭-
철컥-
문이 열렸지만 여전히 안엔 아무것도 없이 오로지 암흑만이 존재했다.
“…….”
이비는 문 앞에 주저앉았다.
자신이 본 것이 뭔지 정리할 필요가 있었지만, 머리가 어지러웠다.
‘한 번 본 기억은 다시 못 보는 건가?’
이비는 제 무릎을 끌어안다 문득 손에 시선을 두었다. 가늘고 버석하고 주사 자국이 잔뜩 나 있는 손이었다. 입고 있는 두툼한 환자복의 소매에는 병원 이름이 세로로 쓰여 있었다.
“…….”
거울이 없어도 알 수 있었다. 이비는 이비였지만, 꿈속에선 온전히 김현서였다.
“속 알맹이는 그대로라는 거지…….”
저가 본 게 뭔지 제대로 정의를 내리지 못한 이비는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다 일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좋은 꿈을 꾸게 해 준다더니, 순 사기야…….”
물론 마냥 좋았던 건 사실이었다. 제주도 여행 기억을 보기 전까진 말이다.
이비는 제 얼굴이 축축하게 젖어 드는 것을 느꼈다. 현실에서도 울고 있는 것 같았다. 훌쩍이며 마른 손으로 볼을 비벼 닦고 있을 때, 여기서 들리면 안 되는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비.”
“!”
순간 기겁한 이비가 고개 들고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니, 복도 처음 시작 부분에 서 있는 카르젠이 보였다.
“…카…르젠……?”
당황해 그의 이름을 부른 순간. 카르젠이 이비에게 다가왔다. 이비는 지금 제 모습이 어떤지 잘 알기에 놀라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도리질했다.
‘뭐야? 이것도 꿈이야?’
“…….”
‘왜… 왜 카르젠이 여기에…….’
“…….”
하지만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했다. 이비는 슬쩍 실눈을 뜨고 다시 제 손과 발을 봤다. 김현서의 손과 발이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비는, 김현서는 지금 카르젠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차마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을 때. 그가 제 옆에 털썩 앉는 소리가 들렸다.
“…….”
여전히 무릎에 고개를 파묻은 이비는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하고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자 부드러운 손길이 제 손등에 닿았다. 꿈이라기엔 너무나도 선명하고, 따뜻하면서도 다정한 손길이었다.
“이비. 일어날 시간이야.”
“…카…르젠……? 이건 꿈인가요?”
“응. 괜찮아. 이건 다 꿈이야.”
“정말? 정말로 다 꿈이에요?”
“응.”
“그럼 왜…… 왜 카르젠이 여기에 있어요?”
“이비를 깨우러 왔어.”
“…….”
“이비.”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였다. 이비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고 눈물범벅인 얼굴로 카르젠을 마주했다. 카르젠은 잠시간 이비를 바라보다 곧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이비가 걱정할 건 하나도 없어. 꿈에서 나가자. 그럼 다 잊을 거야.”
“……잊어요?”
“응.”
“그럼… 그럼…… 이건 다 꿈인 거죠?”
“응. 꿈속이야.”
“그럼… 나가면…… 난 그대로인 거죠?”
질문이 이상했지만, 카르젠은 이비의 질문의 뜻을 눈치채고 끄덕여 주었다.
“이비는 이비야. 그러니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상냥하면서도 단호한 말에 이비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꿈이라니 다행이었다. 카르젠에게 제 본래의 모습을 보인 게 아니라니, 다행이라 생각하며 엉엉 울었다.
카르젠은 우는 이비의 몸을 안아 들고 복도 끝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제 꿈에서 나가자.”
온 세상이 빛으로 변했다. 눈부셔서 눈을 깜빡일 때마다 복도와 수많은 문이 전부 흐려지고 빛으로 물들었다.
강렬한 빛에 결국 눈을 꾹 감았다 뜬 이비는 익숙한 천장이 보이자 숨을 헐떡였다.
“이비 님!”
“깨어나셨군요!”
율리와 주디의 목소리가 차례차례 고막을 때렸다. 몸을 뒤척이며 일어난 이비는 제 옆에 누워 있는 카르젠을 보고 갸웃했다.
‘카르젠이 왜 내 침대에 있지?’
게다가 카르젠은 이비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이비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한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율리와 주디는 거의 울상이었고, 뒤에 서 있는 할리스는 무언가 크게 안도한 듯이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이전에 만났던 궁성 의원 하렌델이 보였다. 이비는 이 구성원들이 왜 제 방에 있는지 파악하지 못해 멀뚱히 앉아 있었다.
그때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을 느끼곤 고개 숙여 보니, 카르젠이 눈을 떴다.
“음…… 아. 일어났구나, 이비.”
“?”
‘뭐지?’
이비는 방금 전까지 꿨던 꿈을 떠올렸다. 꽤 많은 꿈을 꿨는데, 그중 제주도에 대한 기억을 마지막으로 이후 기억들이 흐렸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고 물으려던 찰나, 반대편 손이 욱신거림을 느꼈다. 누군가 꽉 잡은 손길에 찌푸리며 바라본 이비는 제 옆에 누워 있는 또 다른 남자를 발견하곤 기겁했다.
‘크리시?!’
옆에서 오만상을 구기며 일어난 크리시가 끙… 소리를 내며 말했다.
“어우, 죽겠네. 드디어 깨어났군요. 카르젠이 잠도 안 재우고 일만 시킵니까?”
“?”
‘드디어 깼다고? 대체 내가 얼마나 잔 거야?’
이비의 동공이 형편없이 떨리는 것을 지켜보던 크리시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쉽군요. 여섯 시간만 더 버티면 나흘 채우는 건데.”
“……?”
‘나흘이요?’
카르젠과 크리시가 제 양옆에 누워 손을 잡고 있었던 것도 놀라웠지만, 나흘이라는 말에 이비의 입이 쩍 벌어졌다.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자니, 입 벌린 김에 물 좀 마시라며 율리가 물컵을 입술에 대 주었다. 천천히 물을 받아 마신 이비는 조금 멍한 상태로 생각했다.
‘나흘? 그렇게 오래 잤다니…… 아, 오래 자서 그런가? 몸이 엄청 가벼운데? 손도 안 떨리네?’
거의 나흘을 내리 자서 그런지 몸 상태가 최고였다. 반대로 정신 상태는 몽롱했다. 마치 아직도 꿈의 연장선에 있는 기분이었다.
정신이 맑진 않았지만 이비는 제 몸이 가뿐해진 것에 순수한 기쁨을 느꼈다. 이 세계에 와서, 아니. 이곳 필리스에 오기 전 김현서일 적까지 포함해도 최근 10년간 이렇게 몸 상태가 좋은 적이 없었기에 감동적이었다.
몽롱한 상태에서도 선명하게 느껴질 정도로 가뿐한 몸이 기꺼웠으나, 모두가 걱정하는 얼굴로 저를 보고 있어 대놓고 감탄하진 못했다.
‘너무 많이 구경했다는 생각은 있었는데, 설마 현실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흘렀을 줄은…… 본의 아니게 이렇게 걱정을 끼쳤네.’
이비는 선명한 자각몽 속에서 자신이 꽤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현실 시간이 얼마나 빠르게 흘러가는지 전혀 체감하지 못했다.
그저 생생한 꿈이 신기해 즐겼던 기억밖에 없었다. 꿈이라기보단 마치 VR체험을 하는 것 같았다.
온전한 공간에 자신만 동떨어진 존재로 자유롭게 걸어 다니며, 그동안 잊고 있었거나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던 추억을 보는 것은 즐겁고 행복했다. 평생 그 공간에 있고 싶을 정도로 이비는 자신의 꿈속이 좋았다.
‘아무리 그래도 나흘이나 자다니…… 다음엔 조심해야겠어.’
다음에 수정을 사용할 땐 꼭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하던 이비는 일순 기시감을 느꼈다.
‘어? 그런데 꿈에서 카르젠을 본 것 같은데…… 착각인가? 제주도 여행도 기억이 잘 나지 않고. 제주도는 형이랑 갔던 마지막 여행이니까 다시 보고 싶은데, 다음 꿈에서 다시 봐야겠네…….’
아쉽지만 모레쯤엔 꿈을 적당히 봐야겠다고 다짐하던 이비는 제 목뒤에 닿은 타인의 손길에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당황해 놀란 얼굴로 카르젠을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손의 주인은 카르젠이 아닌 반대편의 크리시였다. 크리시는 볼품없이 후덜덜 떠는 손으로 이비의 목에 걸린 수정 목걸이 매듭을 풀어내며 말했다.
“이건 압수입니다.”
“아!?”
대놓고 기겁한 반응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크리시가 수정 목걸이를 카르젠에게 건넸다.
카르젠은 묵묵히 목걸이를 받아 제 옷 주머니에 넣었다. 별다른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목걸이를 넣는 모습에 단호함이 느껴졌다. 덕분에 이비는 돌려 달라고 입술을 벙긋하지도 못했다.
‘나흘이나 자 버렸으니 당연히 엄청 걱정하겠지… 아니 그보다…….’
쭉 몽롱하다 이제야 슬슬 잠이 깨기 시작한 이비는 카르젠을 향해 살짝 허리를 틀었다. 몸을 튼 것만으로 카르젠은 벌써 이비의 입술로 시선을 옮겼다.
[카르젠 님. 많이 걱정하셨을 텐데 죄송해요. 처음 사용해 본 거라, 제가 조절이 미숙했어요. 저도 그렇게 오래 잠들 줄은 몰랐어요.]
입술을 읽은 카르젠은 괜찮다는 말 대신 작게 끄덕였다. 그리곤 이비가 아닌 주디와 율리를 향해 말했다.
“주디. 속에 무리 가지 않을 음식으로 가져다줘. 율리는 손님 맞을 준비 마무리해 주고.”
각자 일을 부여받은 주디와 율리가 방을 나서자 할리스 역시 눈치껏 하렌델을 배웅하겠다고 했다.
카르젠은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하렌델을 향해 직접 배웅하지 못해 미안하다 사과했다. 하렌델은 당연히 신경 쓰지 않는다며 푹 쉬라는 말과 함께 할리스와 방을 나섰다.
이비는 혹시 자신 때문이라면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려 했으나, 크리시가 먼저 말했다.
“지금 카르젠과 제가 당신 몸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천천히 누우시죠.”
‘내 몸을 지탱한다고?’
당황한 이비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바라봤다. 그러자 크리시는 같은 답을 두 번 말하지 않겠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그 말과 동시에 이비는 순식간에 몸이 확 무거워짐을 느꼈다. 정확히는 엄청나게 두꺼운 젖은 이불이 제 몸을 덮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평소의 몸 상태로 돌아온 이비는 저도 모르게 허억 숨을 들이켰다. 멀쩡했던 몸이 짓눌리듯 무거워지며 손이 볼품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손뿐만 아니라 몸도 잘게 떨리는 것이 딱 봐도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그저 원래 몸 상태로 돌아왔을 뿐인데, 가슴이 눌린 듯 숨 쉬는 것조차 무겁게 느껴졌다. 당황해 굳은 이비의 몸을 조심스럽게 눕혀 준 카르젠이 크리시를 향해 미안한 얼굴로 부탁했다.
“크리시. 이제 됐잖아. 조금만 더 부탁해.”
짜증스레 혀를 찬 크리시가 이비의 이마에 톡 손을 댔다. 이비는 제 시야를 일부 가린 그의 손이 은은하게 빛나는 것을 지켜보다 몸이 다시 편해진 것을 느꼈다.
방금 전처럼 아주 좋은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평소 이비의 몸 상태보다 약간은 더 가뿐해진 느낌이었다.
크리시는 형편없이 떨기 시작한 제 손을 들어 보며 혀를 찼다. 크리시의 상태를 보아하니 <숲의 마법사>에서 봤던 상대의 고통을 전이하는 신의 권능을 쓴 것 같았다.
‘크리시 굉장하다…… 과연 에벨루스 신에게 전이시키고 지그하르트에게 엉덩이를 내줄 만한 실력이야.’
일순 크리시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이비는 그가 찌푸린 얼굴이 수전증 때문에 짜증이 나서라고 여겨 미안함을 느꼈다.
‘그간 수전증이 심하거나 자주 피곤해져도 이 정도면 건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전 생에 비해 괜찮았던 거였나 봐. 이렇게 가뿐함을 느낄 수 있는 몸이었구나…….’
이비는 다시 몽롱해진 와중에도 이 은혜를 기억하겠다고 다짐하며 크리시를 향해 입술로 말했다.
[크리시. 저 때문에 시간 내주신 것 같은데 정말 고맙습니다. 제가 처음 써 보는 거라 실수했나 봐요.]
‘그러니 제발 수정 쓰지 말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지금은 카르젠에게 얌전히 내준 상태였지만, 이비는 기회를 봐서 저걸 다시 받을 생각이었다. 다른 꿈은 제법 선명하게 기억났지만, 마지막에 봤던 제주도에서의 꿈만 뭉탱이로 잘려 나간 듯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게다가 정확히 표현할 순 없어도 뭔가 찜찜했던 느낌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다시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이비가 찜찜해하고 있을 때 크리시가 대답했다.
“예, 뭐. 시간 낸 건 맞지만 카르젠이 후하게 기부할 테니 괜찮습니다. 덕분에 당분간 기도회를 짼다고 해서 위에서 절 쪼는 일은 없겠죠. 아, 그리고 참고로 저 수정은 폐기할 겁니다.”
“!?”
기도회를 짼다는 내용도 충격이었지만, 수정을 폐기한다는 말에 더 충격받은 이비가 저도 모르게 카르젠을 향해 급히 고개를 돌렸다.
카르젠은 한 손으론 이비가 덮은 이불을 정돈해 주고, 다른 손은 침대 헤드에 올려 머리를 괸 채 말했다.
“강제로 깨워서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겠지만, 뭐라도 먹어야 하니까 조금만 버텨 줘. 이비가 자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거든. 그리고 이번엔 정말 좀 혼나야겠어. 이비.”
“!”
언제부터 나와 있던 건지, 혼난다는 말에 이비의 토끼 꼬리와 귀에 털이 펑 하고 곤두섰다. 바짝 긴장한 이비는 크리시가 제 옆에 털썩 누웠을 뿐인데도 깜짝 놀라 흠칫했다.
“어우, 이런 쓰레……, 연약한 몸으로 어떻게 일상생활이 가능한 겁니까? 앉아 있기도 힘드니, 잠시 누워 있겠습니다. 그러니 전 신경 쓰지 말고 혼나시죠.”
혼나란 말에 이비의 얼굴은 거의 울상이 되었다. 슬슬 머리가 맑아져서 거의 맨정신으로 돌아온 덕분에 카르젠이 엄격한 표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걱정 많이 했을 텐데, 카르젠이 화나는 것도 당연해…….’
물론 저가 일부러 말썽을 부린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카르젠을 포함한 여러 사람들을 걱정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었기에 절로 숙연해졌다.
카르젠은 잔뜩 움츠러든 이비의 얼굴을 파악하곤 표정을 부드럽게 지으려 했지만, 바로 옆에서 크리시가 부리부리하게 바라보는 바람에 짐짓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비. 물론 모르고 그런 거겠지만, 검증되지 않은 수정을 마음대로 구입해서 쓰면 안 돼. 이건 굉장히 위험한 행동이야. 앞으로 절대 그런 일은 없어야 해.”
‘어? 검증되지 않았다고? 서점에서 정식으로 판매하길래 당연히 안전하게 개량된 수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비는 검증된 수정이 아니라는 것을 전혀 몰랐지만, 일단 끄덕였다. 그리고 슬쩍 입술을 움직였다.
[정말 몰랐어요. 죄송해요. 앞으로 조심할게요.]
“나도 이비가 알고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 하지만 이비, 꼭 기억해. 수정은 위험한 물건이야. 분명 편리하지만, 제대로 검증된 수정이 아니면 쉽게 만지거나 소지해선 안 돼. 가공된 수정이 괜히 비싼 게 아냐.”
‘하긴… 원작에서도 수정이 늘 비싸다고 했는데…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닐 텐데, 내가 너무 안일했어… 카르젠에게 먼저 물어봤어야 했는데…….’
물론 저택 사람들 모두 같은 책을 주문한다고 했기에 더 안도한 부분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이 신중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었다.
자책감에 잔뜩 시무룩해진 이비가 힘없이 끄덕였다. 축 늘어진 작은 토끼 귀를 본 카르젠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지만, 옆자리 크리시의 미간이 팍 찌그러지는 바람에 흠흠. 다시 엄격한 얼굴로 돌아와 말을 이었다.
“이비는 아직 뭐가 옳고 그른지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이니까, 앞으로 뭔가 새로운 것을 보면 무조건 내게 물어봐. 특히 수정 관련된 것이나 고수익 일자리 같은 것도. 또 길에서 누가 주는 간식 같은 것도 절대 받아먹지 말고.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도 말고.”
어린아이를 혼내는 듯한 내용이었으나, 오늘을 포함해 이미 전적이 있기에 이비는 얌전히 끄덕였다. 전부 다 제 업보였다.
카르젠은 시무룩해진 이비의 머리를 저도 모르게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그렇게 침울해하지 마. 몰라서 실수한 부분이니 괜찮아. 이제부터 조심하면 돼. 알았지?”
대번 다정한 음성으로 돌아온 카르젠 덕에 이비는 괜히 눈물이 핑 돌 것 같아 입술을 말아 넣고 힘차게 끄덕였다.
눈가가 촉촉하게 젖은 이비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카르젠은 흉흉한 크리시의 시선을 일부러 피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일부터 당분간 저택에 손님이 머물 예정이야. 어쩌면 이비가 반가워할 손님일 수도 있겠어.”
‘내가 반가워할 손님?’
이비는 저가 반가워할 수도 있는 손님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유사가 오나?’
유사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어 고민하고 있을 때 크리시가 힘없이 말했다.
“프란제르 후작 부인이 날 보면 기겁할 테니, 아침 일찍 돌아가야겠군.”
‘머니마니 달러스!? 알파3이 온다고!?’
저도 모르게 소리 없이 환호할 뻔한 이비가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었다. 카르젠은 갑자기 구겨질 듯 말 듯 움찔거리는 이비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이비가 요즘 그녀가 필명으로 낸 책을 열심히 읽더라고. 크리시 너도 며칠 더 묵으며 예전처럼 잘 지내 보는 건 어때? 나름 사이좋았잖아.”
“내가 멀리하는 게 아니라 그녀가 일방적으로 날 피하는 거야.”
카르젠의 권유에 크리시는 혀를 찼다. 이비는 두 사람의 대화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며칠 자고 일어났더니 행운이 넝쿨째 굴러온 기분이었다.
프란제르 후작 부인인 아리스가 방문한다는 것은, 이비가 머니마니 달러스를 만나기 위해 남들은 알아듣지 못할 내용을 에둘러 써서 편지를 보낼 필요도, 또 긴 시간을 허비할 필요도 없다는 뜻이었다.
후작 부인을 남몰래 만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 분명했고, 당연히 장기 프로젝트가 될 거라고 여겼던 일이 쉽게 해결되자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꼈다.
게다가 크리시는 내일 아침 돌아간다고 했다. 최애와 하룻밤(?)을 함께 보낼 수 있다니, 이보다 좋을 순 없었다.
‘크리시도 자고 가고! 아아! 에벨루스 님 감사합니다!’
이비는 에벨루스 신자도 아니면서 마음속으로 에벨루스에게 감사하다 외쳤다. 크리시 기준으로 아직 덜 혼난 상태였지만, 벌써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이비는 자신이 거의 나흘을 꼬박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에 돌연 심각해졌다. 카르젠은 이비의 표정이 시시각각 바뀌는 것을 지켜보다 갑자기 망연자실해진 모습에 걱정스레 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다.
하지만 이비는 카르젠의 걱정을 눈치채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나흘이면… 그동안 거의 열두 끼를 못 먹었다는 거잖아…….’
“크흡! 쿠, 쿨럭!”
기침에 놀란 이비가 고개를 돌렸다. 크리시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입을 가리곤 등을 돌렸다.
계속 잔기침하는 그를 바라보던 이비는 이불에서 손을 꺼내 크리시의 등을 통통 두드려 주었다.
***
이비는 침대에서 주디가 차려 준 수프와 부드러운 빵, 그리고 소화에 도움을 주는 야채와 과일주스를 순식간에 해치웠다.
이비가 식사를 마친 것을 확인한 카르젠은 크리시와 둘이 할 이야기가 있다며 잠시 방을 비우겠다고 했다.
여전히 이비의 몸 상태를 전이받던 크리시는 못 움직이겠다며 엄살을 부렸고, 그 결과 카르젠이 크리시를 어깨에 짐짝처럼 멨다.
퍽 안정적인 짐짝이 된 크리시는 이비에게 어디 가지 말고 꼭 침대에 누워 있으라는 말을 남겨둔 채 들려 나갔다.
‘되게 멍하네. 밥 먹어서 그런가?’
막 일어났을 때보다는 정신이 훨씬 맑아졌지만, 은근한 몽롱함은 여전했다.
‘마취에서 깬 후 풀리기 직전의 느낌이네. 정신을 강제로 흔들어 깨운 거라 조금 어지럽거나 힘들 수 있다고 했지. 이건 신체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이라 전이가 안 된다고…….’
카르젠과 크리시의 말로는 며칠간 이비를 깨우기 위해 노력했다고 했다.
크리시의 신성력으로 꿈에 개입한 후 이비를 강제로 깨우는 데 성공했지만, 크리시도 카르젠도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던지라 매끄럽지 못하게 마무리된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아마 꿈에서 봤던 어떤 기억의 일부가 상실됐을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정신적인 문제가 아니라 단지 꿈을 잊은 것뿐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도 덧붙여 주었었다.
<꿈에 개입>이라는 말에 이비가 걱정했지만 카르젠이 바로 안심시켜 주었다.
-개입이라는 게 이비의 꿈을 훔쳐봤다는 의미는 아냐. 이비의 꿈과 현실 사이에 어떤 벽이 있는데, 그 벽에 노크했다고 생각하면 돼. 한마디로 이비를 꿈이 아닌 현실에 집중하게 만들어서 강제로 깨운 거야.-
이비는 카르젠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일단 저가 꿨던 꿈, 그리고 제 머릿속에 있는 세계를 본 것은 아닌 것 같아 안도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카르젠에게 보여 주거나 털어놓을 수 없다는 생각에 씁쓸함을 느꼈다.
‘카르젠은 나를 믿고 받아들여 줬는데, 난 카르젠에게 평생 진정한 자신을 숨겨야겠지…….’
그 점이 못내 신경 쓰였지만 이비는 고개를 저었다. 누가 들으면 이기적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이비는 자신이 선택해서 이곳에 온 게 아니었다.
물론 2회차 인생을 꿈꿨던 것은 사실이지만, 당연히 그 꿈이 실현될 줄 몰랐다.
모든 것이 제 의사와 관계없이 벌어진 일이었고, 생존해야 했으니 받아들인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해 봐도 마음은 편해지지 않아 답답함을 느낀 이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각한다고 달라지는 것도 아니니 그만 생각하자. 그래도 딱 한 번만 더 보면 좋을 텐데…… 뭔가 자꾸 기억이 날 듯 말 듯해서 답답해.’
평소라면 가볍게 넘겼을 텐데, 이비는 이상하게 자꾸만 제주도 여행의 꿈이 신경 쓰였다. 뭔가 잊어선 안 될 중요한 것을 잊은 기분이었다.
조심할 테니 수정을 한 번만 더 쓰면 안 되겠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식사 도중 저 수정 때문에 수도가 발칵 뒤집혔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카르젠의 말로는 현재 잠에서 깨지 못한 사람은 이비뿐만이 아니라고 했다.
물론 수정을 사용한 모두가 깨어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보통 하루 이틀 만에 깨어나는 경우가 대다수였지만, 문제는 수정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팔려 나갔다는 점이었다.
그나마 자력으로 깨지 못하는 이들 중 여력이 되는 집안은 신전에 꽤 큰 금액을 기부하고 프리스트를 데려오거나, 비슷한 방식으로 마탑에 후원해 마법사를 동원하여 강제로 깨우는 중이라고 했다.
즉, 프리스트나 마법사에게 의뢰할 형편이 안 되는 이들이 스스로 깨어나지 못하는 경우 그대로 아사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에 이비는 착잡함을 느꼈다. 아마도 그들 중 꽤 많은 이들이 깨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 꿈은 너무나도 달콤했으니까.
‘나도 가능하다면 거기서 살고 싶었고…….’
선명한 자각몽으로 이루어진 꿈은 참 포근하고 행복한 공간이었다. 신기하게도 좋은 기억만 남아 있었으며, 그동안 잊고 살았던 기억의 파편을 하나하나 수집하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랐었다.
꿈속에선 배도 고프지 않았고, 졸리거나 지치거나 아프지도 않았기에 이비는 꿈에서 깨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내내 했었다.
-마탑에서 조사 중이지만, 일종의 강한 환각을 일으키는 수정인 것 같아. 알고 보니 인증서도 다 위조품이었고. 판매된 양이 어마어마해서 다시 회수하는 데 애를 먹고 있는 중이야.-
카르젠의 설명만 들어도 바깥 상황이 어떨지 예상이 됐다. 현시점에 루아인은 여러모로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난민 문제에 수정 문제까지…… 체스터도 카르젠도 더 바빠지겠네.’
특히 루아인은 자국 내에서 발생한 난민뿐만 아니라 인접국 마르카의 난민까지 함께 떠안은 상태라 나라가 혼란했다.
마족과의 전쟁으로 인해 큰 피해를 받은 것은 루아인 왕국에 밀접한 마르카 왕국이었다. 하필 ‘마계’라고 불리는 차원의 틈새와 인접한 국가였기에 제대로 된 방어선도 구축하지 못한 채 순식간에 몰락해 버렸다.
마르카 국민들은 주변 3국 중 루아인으로 가장 많이 왔다. 이는 주변국 중에 체스터가 가장 먼저 국경을 개방하고 난민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인접한 국가인 만큼 마르카엔 상업적인 이유나 유학을 목적으로 머무는 루아인 국민이 많았다.
애초에 체스터는 자국민을 우선으로 피신시키기 위해 신속하게 인력을 파견했으나, 왕권이 무너져 버린 마르카의 국민들은 루아인 왕가의 문장을 의지하며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예상치 못한 난민 대이동이 시작되었고, 많은 마르카 국민들이 국경 근처에 머무르게 되었다.
아무것도 없이 급하게 피난길에 오른 이들에게 바깥 생활은 너무 혹독했다. 체스터는 삶의 터전을 잃었을 뿐인 죄 없는 이들을 외면하지 못했고, 결국 주변 3국 중 루아인이 가장 먼저 국경을 개방해 그들을 품어 주었다.
‘난민 문제는 차근차근 풀어 가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 어려운 상황일 텐데… 나는 옆에서 카르젠을 도와줘도 부족한 판국에 방해나 하고, 크리시도 나 때문에 하루 더 있다 가고…….’
수도 상황이 이런 터라 당장 프리스트를 요청하는 곳이 많은 상태였다. 크리시도 원래라면 이비가 깨어나면 밤늦게라도 돌아가려 했지만, 이비의 몸 상태를 전이받아 보곤 이건 그냥 두고 못 가겠다며 내일까지 머무르겠다고 한 터였다.
‘최애가 날 걱정해 주는 건 신기하고 기쁘지만, 그게 내 어리석은 행동 때문인 건 너무 부끄러워…….’
이비는 지금 현 상황을 다 들었음에도, 자꾸 수정을 다시 써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미웠다. 꿈이 달아도 너무 달아서 다시 맛보고 싶었다.
“…….”
또 무의식중에 따스했던 꿈을 떠올린 이비는 손을 들어 올려 제 양쪽 볼을 동시에 짝- 때렸다.
그래도 부족하다 생각했는지 연달아 두 대를 더 짝짝 때렸다. 손이 떨어져 나가자 볼에 얼얼한 열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정신 차려, 김현서. 사람을 현혹하는 나쁜 수정이라잖아. 생각하지 마. 이번 생에는 그래도 사람 구실은 해야지. 열심히 일해서 카르젠에게 은혜 갚아도 모자란데 정신 차려. 잊어야 해. 전부 다 꿈일 뿐이야.’
스스로에게 계속 다짐하던 이비는, 선명해져 버린 김현서의 추억이 자꾸만 제 마음을 어지럽힌다는 생각에 또 양 볼을 때렸다. 찔끔 눈물이 났다.
***
“하아…….”
서재 바닥을 꺼지게 할 듯한 카르젠의 깊은 한숨에도 크리시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쭉 태연한 척했던 카르젠은 제 생각을 정리하기 바빴고, 크리시는 카르젠이 던져둔 상태 그대로 소파에 늘어져 있었다.
크리시는 카르젠의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기다려 주며 저들이 꿈에서 이비를 찾기 위해 헤집고 다녔던 꿈을 떠올렸다.
‘꽤 발전한 문명이었지.’
고개를 한껏 젖혀야 제대로 눈에 담을 수 있을 만큼 거대한 건물들. 금속으로 된 말 없이 달리는 마차. 신기한 복식을 걸친 저들보다 뭐든 다 작아 보이는 사람들.
그건 다시 떠올려 봐도 경이롭다고 할 수밖에 없는 문명이었다.
‘하지만 가장 뇌리에 박힌 건…….’
크리시는 병원인 것이 분명한 건물로 들어섰을 때 발견한 검은 머리의 소년이 누군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앞에서 연신 한숨을 내쉬는 카르젠 역시 마찬가지였다.
***
-이, 이라나드, 이거 징짜 갱차나?
수건 한 장에 폭 싸인 유사는 잔뜩 긴장해 일라나드를 향해 물었다. 일라나드는 유사의 앞에 가위를 들고 서서 비장한 눈빛으로 끄덕였다.
-그럼. 내 동생들 앞머리는 전부 내가 잘라 줬어.
-그치만, 이라나드. 유사는 머리카락이 눈 찌르는 것두 나쁘지 않다구 생각해. 이찌, 유사는 사실 긴 머리가 좋은 것 같아.
파르르 떠는 아기 여우를 지켜보던 체스터와 리엔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부들부들 떨었고, 카르젠 역시 입술을 말아 넣었다.
-자, 가만히~ 눈 감고~.
사각-
-꺄앙!
훅 잘려 나간 앞머리에 놀란 유사가 눈을 꾹 감았다. 일라나드는 이때다 싶어 재빠르게 가위를 샥샥 움직였다.
사각사각- 샥- 샥샥-
빠르게 앞머리를 다듬는 일라나드의 눈빛은 퍽 진지해 보였다. 그녀의 동생들이 만족했는지는 모르지만, 자주 잘라 주었다는 게 사실이었는지 나름 익숙하고 기민한 움직임이었다.
현란한 가위질을 지켜보던 리엔은 터질 뻔한 웃음을 애써 참았다. 슬쩍 실눈 뜬 유사가 리엔의 얼굴을 보곤 흔들리는 눈망울로 물었다.
-리엔 왜 웃어? 유사 머리 이상해?
-아, 아니. 크흡. 머리 다 자르고 안아 줘도 될까? 우리 유사가 너무 귀여워서 꼬옥 안아 줘야겠는데?!
귀엽다는 말에, 그리고 안아 줘도 되냐는 질문에 일순 기분 좋아진 유사가 눈썹 위로 올라온 일자 앞머리를 찰랑거리며 앙! 힘차게 대답했다.
유사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체스터가 은근슬쩍 리엔의 뒤에 섰다. 그리고 카르젠 역시 체스터의 뒤에 줄을 섰다.
귀여운 자신을 안아 주기 위해 줄까지 서는 모습에 기분이 좋아진 유사가 꼬리를 살랑거리던 순간. 방문이 열리며 크리시가 들어섰다.
일라나드를 포함한 모두가 크리시를 향해 급히 눈치를 주려 했지만, 크리시의 시선은 이미 유사의 앞머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뭐야? 유사 너 왜 냄비를 뒤집어썼냐?
여관 지붕 위에 앉아 아기 여우 요괴의 통곡과 누군가 매질당하는 소리를 동시에 듣던 루는, 곰방대를 입에 물고 푸른 하늘을 올려봤다. 평온한 시간이었다.
숲의 마법사 9권 19~20페이지 中
***
“후우….”
연신 들리는 한숨에도 크리시는 천장만 바라봤다. 카르젠 역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온갖 잡생각이 머리를 헤집고 있었다.
마음이 복잡하다 못해 송두리째 탈탈 털린 것 같았다. 이마를 짚고 있던 카르젠은 저가 던진 대로 앞에 널브러져 있는 크리시를 향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에벨루스 님께서 그때 이후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어?”
“돌아갈 길을 잃은 가엾은 토끼. 그게 전부야. 그것도 내가 해석한 거지만.”
“…….”
“말했잖아. 우리처럼 말로 설명해 주는 분은 아니라고.”
제 머리를 쓸어 넘긴 카르젠은 꿈에서 이비를 찾기 위해 헤맸던 공간을 떠올렸다.
이비에게 이어진 기억의 실을 잡고 따라가는 내내 두 사람은 꽤 발달한 문명의 세계를 걸었다.
그 세계에는 마탑보다 훨씬 높은 건물이 빼곡하게 많았으며, 금속으로 만들어진 마차는 말이 없이 저들이 모르는 에너지만으로 굴러갔다. 길은 잘 다듬어져 있었고 공기는 탁했다.
그 어디에서도 마나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이 깔린 세계였다. 아무리 둘러봐도 인간 외의 다른 종족은 없었다.
기억의 실을 잡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며 본 것은 똑같이 지쳐 보이는 표정의 인간들이었다. 거의 치사량의 음울함에 젖은 인간들은 각자 손에 든 어떤 장치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그게 없으면 안 되는 사람들처럼.
전혀 다른 문명을 목격하고 혼란한 와중에도 카르젠은 자신이 마주친 소년을 떠올리고 있었다. 검은 머리에, 짙은 갈색 눈동자를 가진 생명력이 거의 다한 소년을.
“이비는…….”
카르젠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이비의 몸이 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친 상태로 구조했으니 당연히 약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후에도 이비의 건강 상태는 그리 나아지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이비는 언제나 괜찮다며 웃었다. 자긴 아프지 않다고. 손이 떨려서 그렇지, 아무렇지 않다고. 자기는 괜찮다고 오히려 카르젠을 안심시키려 노력했다.
처음엔 이비의 그런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혹시나 건강 문제 때문에 자신을 버릴까 봐 무서워서 그러나 싶어 일부러 더 편하게 대하고 안심시켜 주기 위해 노력했었다. 무료 진료도 직원 복지라고 굳이 생색내듯 밝혀 가며 말이다.
“일부러 아프지 않은 척을 한 게 아니었어.”
기억의 실을 따라 들어선 큰 건물. 그 건물의 복도에서 마주친 소년은 그 작은 몸으로는 차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품고 있었다. 곁에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그의 꿈에 침범한 것만으로도 카르젠은 극한의 통증을 느꼈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쑤시고 아팠으며, 심장 주변 근육이 수축하려는 듯이 숨통을 조여 왔다. 아마 크리시가 그 모든 고통을 나눠 받지 않았다면 복도 저편의 소년에게 기어갔을지도 모를 만큼 강한 통증이었다.
그리고 꿈에서 나와 이비의 허약해진 몸이 쓰러지지 않게 크리시와 고통을 나눠 전이받던 카르젠은 확신했다.
“그동안 너무 고통스럽게 살아서, 거기에 익숙해져서 자기가 지금 아픈지도 몰랐던 거야…….”
“…….”
지금 이비의 몸의 상태는 꿈의 주인이었을 때보다 확실히 나았지만, 형편없이 약한 상태였다. 크리시가 작게 욕을 내뱉을 정도로.
크리시 역시 꿈의 주인이었던 소년의 고통을 생경하게 기억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전이받고 있는 이 미미한 통증들 역시 정상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전신이 무언가에 눌린 듯 무겁고 호흡도 힘들었다. 심지어 한숨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답답함에 한숨을 내뱉으려 하면, 속에 있는 숨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시원하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려 할수록 오히려 더 답답하기만 했다. 무언가 가슴을 꾹 누르고 안에 있는 숨을 제대로 뱉지 못하게 막는 기분이었다. 카르젠이 연신 한숨을 쉬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 분명했다.
“확실히 그런 고통 속에서 살아왔다면 이 정도는 건강하다고 착각할 수도 있겠네. 그런데, 이거 병은 아냐.”
병이 아니라는 말에 카르젠이 크리시를 바라봤다. 크리시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네가 같잖게 혼낼 때 시도해 봤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어. 그럼 이 통증은 병 때문이 아니라는 거지.”
“그렇다면 종족이 문제일 수도 있겠군.”
“그럴 수도 있지. 묘족이랑 뭐가 섞였는지 찾아야 해. 몸을 이렇게까지 압박하는 환경적 요인이 뭔지 알아내야 제대로 된 생활이 가능하겠지. 이대로 두면 곧…….”
크리시는 뒷말을 굳이 입에 담지 않았다. 이건 축적이었다. 지금 이비가 있어선 안 될 환경에 있기 때문에 쌓이고 쌓인 고통. 저 연약한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른 듯이 느껴졌다.
그 말은 이비가 묘족 외에 어떤 종족 사이에서 태어났는지 알아야 한다는 뜻이었고, 적어도 어떤 환경에 있어야 건강해지는지 찾아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 그리고 하나 더.”
크리시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덧붙였다.
“말하지 못하는 것도 병은 아냐.”
“하…….”
크리시가 다방면으로 시도해 봤던 결과를 들려 줄수록 카르젠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지금까지 이비가 곁에 있어 준 덕분에 자신의 몸은 많이 나아졌다. 그러나 지금은 그에 만족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 말은 정신계 문제일 수도 있다는 거지?”
크리시는 대답 대신 작게 끄덕임으로 긍정했다. 원인을 몰라도 병은 아니었다.
“……고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는 거군.”
“희망적으로 본다면 그럴 확률도 없지 않아 있겠지.”
어중간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카르젠은 현 상황을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급한 것부터 하나하나 해결하다 보면 언젠가는 이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냥 초조하지만은 않았다.
카르젠은 크리시만큼은 아니지만 몸에 긴장을 풀고 편히 앉았다.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다 보니 그동안 이비가 보인 반응들이 이해가 됐다.
혹시나 저를 어딘가로 보낼까 싶어 은연중에 걱정하던 모습. 연고를 찾기도 전에 굳이 일자리부터 찾으려던 모습. 집사 바론을 보내 알아보고 있다고 했을 때에도 그다지 기뻐 보이지 않았던 모습이나, 만약 가족을 찾아도 여기에 있어도 되냐고 조심스럽게 묻던 모습 등등 하나하나 다 맞춰지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 구해 왔을 당시 이비는 며칠간 의식이 온전치 않아 가끔 깨어나 있으면 형을 계속 찾으며 울곤 했었다.
카르젠은 독 때문에 일시적으로 시력이 손상되어 사리 분별을 못 하는 이비가 내민 손을 잡아 주고, 이비의 형인 척하며 안심시켜 주었던 순간을 떠올리다 깔끔하게 결론을 내렸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적어도 이비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이비였어.’
생각을 정리한 카르젠은 이비의 건강 상태 말고는 문제 될 것이 없다고 결론 내렸다. 덕분에 내내 짓눌린 듯이 답답했던 속이 조금은 편해진 것 같았다.
***
카르젠과 크리시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한결 가뿐한 몸으로 침대와 하나가 된 이비는 퍽 난감한 상황에 봉착해 있었다.
“훌쩍… 정말, 못, 흑, 흐윽, 훌쩍. 못 깨어나시면… 흡, 어쩌나 하고… 흐윽…….”
이비가 깨어난 후 율리는 카르젠의 명으로 손님방 점검을 급하게 마치고 돌아와 사과 중이었다. 애초에 율리의 잘못도 아니었고, 저택 사람들 모두 몰랐던 건데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장문을 적어 보여 주어도 율리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하렌델을 배웅해 주고 돌아온 부집사 할리스에게 들은 저택 바깥 상황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원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지는 ‘소문’이었다.
수도에 퍼진 소문은 여러 가지였다. 이틀이 지나도록 깨어나지 못하면 영영 꿈에 갇히게 된다느니, 시체 안치소에 자리가 부족하다느니, 루아인으로 유입된 난민이 많아져서 누군가 일부러 계획한 일이라느니, 서점과 계약했던 출판사 직원이 시체로 발견되었다느니 온갖 이야기가 돌고 있다고 했다.
물론 왕실 직속 수사 기관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모두 확인되지 않은 소문일 뿐이니 과도하게 공포에 떨 필요 없다고 공식적으로 성명 발표를 했지만, 허위 사실을 밝혀 줄 증거를 보이지 못한 탓에 소문은 더 불어나는 중이라고 했다.
이비는 사람들이 패닉에 빠졌을 때 얼마나 쉽게 선동당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전 세계에서도 sns나 여러 언론 매체를 통해 근거는 없지만 그럴싸하게 퍼진 소문 때문에 특정 집단, 또는 국민 전체가 패닉에 빠지는 경우를 본 적이 있었다.
하물며 필리스와 같이 통신이 발달하지 못한 세상에서 소문이 가지는 위력은 훨씬 클 것이다. 그 소문을 접한 사람에게 주는 공포심도 더 클 것이었다.
그러니 율리가 저렇게 두려워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율리 입장에선 거의 나흘이나 깨지 못하는 자신을 보고 온갖 생각을 다 했을 테니까.
게다가 식사하며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려 보면, 크리시와 카르젠이 처음부터 이비의 꿈에 간섭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고 했다. 꿈으로 진입을 시도했지만 좀처럼 성공하지 못했고, 또 운 좋게 겨우 꿈에 진입해도 이비를 깨우지 못하고 나온 경우가 허다했다고 했다.
이비는 거의 나흘간 물도 마시지 못하는 자신에게 저택 고용인들이 돌아가며 엘릭서를 한 방울씩 꾸준히 먹여 주었다는 이야기에 미안함을 느꼈다.
‘다들 많이 걱정했겠네…… 나중에 돌아가며 전부 사과하고 고맙다고 인사해야지.’
저택 사람들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낀 이비는 수첩에 글을 적어 보여 주었다. 할리스는 이비가 적은 글을 읽더니 환하게 미소 지으며 끄덕였다.
“예. 저택 사람들은 모두 무사합니다. 주방장 휘테커 아저씨가 사용하긴 했지만, 수정 체질이 아닌지 효과가 없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다행이지요.”
이비 역시 안도하며 끄덕였다. 율리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톡톡 두드려 닦으며 말했다.
“제가, 으흑, 제가 앞으로. 흑, 흐윽, 더 조심할게요, 이비 님. 저도 수정을 직접 사 보는 건 처음이라… 훌쩍. 도련님께 여쭤보기라도 했어야 했는데, 훌쩍…….”
할리스는 울음을 참으려다 딸꾹질까지 하는 율리에게 손수건을 건네주며 말했다.
“자, 율리. 이비 님이 괜찮다고 하시잖아. 이제 진정하고 마저 준비하러 가야지. 이비 님은 쉬셔야 해.”
“흑…… 으흑, 네. 그럼, 이비 님. 필요하시면 꼭 불러 주세요.”
율리는 이비의 침대까지 길이를 늘려 둔 설렁줄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비는 끄덕이며 어서 가 보라는 듯이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율리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머뭇머뭇 떠난 후. 이비는 궁금했던 것을 적어 할리스에게 보여 주었다.
-프란제르 후작 부인은 갑자기 어떤 일로 방문하시는 건가요? 그냥 개인적으로 궁금해서요.-
“아… 프란제르 후작 부인께서는…….”
잠시 머뭇거린 할리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미 이야기가 돌고 있으니,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괴한이 프란제르 후작 부인을 납치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북부 영지는 현재 계엄령이 내려졌습니다.”
“!?”
이비의 입이 쩍 벌어졌다. 할리스는 이비가 입을 벌린 김에 슬쩍 협탁에 둔 물컵을 들이밀었다. 수분 보충이 절실한 상태였기에 이비는 일단 얌전히 물을 한 모금 받아 마시고 다시 수첩에 글을 휘갈겨 썼다.
-범인은 잡혔나요?-
“아직 소식이 없지만, 실력 좋은 마법사들이 추격 중입니다.”
“!?”
-납치를 시도한 사람이 마법사였나요?-
빠르게 휘갈겨진 내용을 읽은 할리스가 긍정했다.
“목격자들 말로는 굉장한 수준의 마법사라고 했습니다. 화이트 드래곤의 보호 마법이 깃든 로브가 아니었다면 납치당했을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안전을 위해 범인이 잡힐 때까진 이곳에서 잠시 머무실 예정입니다. 아! 이비 님께서 걱정하실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저택은 블랙드래곤 지그하르트 님께서 직접 보호 마법을 몇 겹이고 둘러 주셨기 때문에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지그하르트 님보다 나이가 많은 드래곤이 아니라면 깰 수 없는 아주 강한 보호 마법이지요.”
이비의 얼굴이 허옇게 질린 것을 본 할리스가 급하게 덧붙였지만, 이비의 걱정은 그게 아니었다.
‘미쳤다고 프란제르 후작의 부인을 납치하려는 마법사가 세상에 있을까! 리치가 아니고서야!’
***
“체스~ 유사랑 노올자아~.”
“미안해, 유사. 저녁까진 놀기 힘들 것 같아.”
체스터의 허벅지에 매달려 있던 유사의 입술이 삐죽 나왔다. 어지간하면 조금이라도 놀아 주는 체스터였는데, 오늘따라 훨씬 바쁜 모습에 유사도 더 투정 부리지 못했다.
결국 포기한 유사는 체스터의 다리에서 떨어져 소파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소파 앞 낮은 테이블엔 온갖 다양한 색의 색연필과 추상적인 그림이 널려 있었다. 전부 유사의 작품이었다.
유사는 오전 내내 그림을 많이 그려 잠시 창작 활동을 쉬려 했지만, 체스터가 바쁘니 어쩔 수 없이 다시 종이를 펼쳤다.
체스터는 검토 후 결재한 서류를 옆에 내려 두고 소파로 시선을 옮겼다. 아기 여우의 귀가 잔뜩 늘어진 게 눈에 밟혔다. 평소라면 유사와 가깝게 지내던 리엔이나 마이어에게 잠시 맡겼을 텐데, 하필이면 둘 다 부재중이었다.
리엔은 며칠간 내린 폭우로 무너진 제방을 복구하기 위해 제 2기사단을 이끌고 어제 출궁해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리엔 다음으로 유사와 잘 놀아 주는 제1기사단 부단장 마이어는 며칠 전 난민 이주를 마쳤으나 바로 복귀하지 않고 남부로 내려갈 예정이었다. 사형수 유가족 건으로 왕실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체스터는 어전 회의에서 저 안건을 꺼냈을 당시를 떠올리며 한숨을 삼켰다. 남부 영지까지 내려가 사형수의 가족들을 직접 만나 위로를 건네고, 현 방식을 고수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일을 맡겠다고 선뜻 나서는 귀족은 없었다.
가만히 있으면 절반이라도 갔을 텐데, 몇몇 귀족들이 체스터의 심기를 거스르는 말을 꺼냈다. 의료 봉사 도중 체스터의 명으로 이제 막 수도로 올라오고 있는 세비어 페일리 남작을 다시 남부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이었다.
애초에 형 집행 후 화장을 유지하는 건 다 세비어 페일리 남작의 의견 때문이 아니냐는 이야기였다. 몇몇 귀족들이 동조의 눈빛을 띠려 할 때, 체스터는 그의 이름을 입에 담은 가신을 신랄한 말로 비판했다. 체스터의 가시 돋친 혀에 당한 가신은 정신적으로 너덜너덜해진 후에야 입을 다물었다.
귀족들은 은연중에 고귀한 세비어 남작가를 무시하고, 동시에 질투하고 있었다. 체스터는 그들에게 더 일침을 놓고 싶었지만 남작을 생각해 참았다. 남작은 이런 구제 불능 귀족들과 붙어 이길 수 있는 성정이 아니었다.
자존심 상하고 상처 받는 말을 들어도 허허 웃어넘길 것이 뻔했다. 아니, 애초에 귀족들과 모일 시간에 도움이 필요한 이는 없는지 굳이 제 발로 찾아다닐 사람이었다.
체스터는 진심으로 세비어 페일리 남작을 존경했다. 자신은 왕세자라는 위치에 책임을 지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반면 그 가문 사람들은 태생이 선인이었다. 제 친구 일라나드도 그랬고 말이다.
‘남작 같은 사람이 한 명만 더 있어도 소원이 없겠어.’
마이어와 함께 남부로 딸려 보낸 귀족에겐 그 어떤 기대도 없었다. 지금 체스터에게 위안을 주는 것은 오늘 저녁 세비어 페일리 남작과 드디어 만난다는 것뿐이었다.
그가 남부로 내려간 후 도통 올라오지 않고 무리하는 탓에 과로사 소식이라도 들을까 싶어 직접 부른 터였다. 이번엔 그가 거부해도 무조건 영지 하나라도 쥐어 주리라 다짐하고 있을 때, 소파에서 내려온 유사가 총총총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체스. 오늘, 오늘 이찌. 유사두 이라나드 아빠 만나두 대?”
머뭇머뭇 묻는 모습에 체스터는 당연하다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유사는 일라나드의 친구잖아. 페일리 남작도 유사를 만나고 싶어 할 거야. 그리고 오늘 페일리 남작과 그의 아들 콜린도 올 거야. 콜린은 일라나드의 남동생이야.”
“핫! 이라나드가 머리 이로케 잘라 준 남동생?”
유사가 자신의 앞머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유사는 오래전 일라나드가 눈썹 위로 한참 올라오는 일자 앞머리로 이발을 해 준 이후 쭉 저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었다. 체스터는 유사의 귀여운 앞머리를 손으로 정리해 주며 끄덕였다.
“그럼 이찌! 유사가 이라나드 아빠랑 동생한테 그림 선물해 줄래!”
“좋은 생각인데?”
체스터는 심심한 아기 여우가 집중할 일이 생겨 반색했다. 유사는 다시 소파로 총총 달려가 색연필을 고르며 물었다.
“체스~ 이찌~ 이라나드 아빠랑 동생도 동물 져아할까?”
“응. 분명 좋아할 거야.”
“그럼 이찌, 여우도 져아할까?”
조심스러운 물음에 체스터는 제 소중한 친구의 가족을 떠올리다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일라나드가 유사를 많이 좋아했으니까, 일라나드의 가족도 유사를 많이 좋아할 거야.”
체스터의 대답에 기분이 좋아진 유사는 꼬리를 살랑거리며 작은 손으로 크림색과 연두색과 갈색 색연필을 골랐다. 그리곤 새하얀 종이에 그리운 친구의 가족에게 줄 선물을 그리기 시작했다.
***
크리시가 보여 줄 것이 있다며 서재를 나간 후, 혼자가 된 카르젠은 내내 이비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이비에 대해 떠올리다 보니 마치 영상 수정을 사용한 것처럼 이비를 만난 이래로 있었던 모든 일들이 순차적으로 떠올랐다. 그중 카르젠의 뇌리에 가장 깊게 박힌 추억은 이비와 처음 밤 산책을 했던 날이었다.
넘어질 뻔한 이비를 부축해 주었을 때, 카르젠은 저를 올려다보던 이비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비의 눈동자엔 별이 가득했다.
아름다운 밤하늘을 머금은 눈동자가 온전히 저만을 향했을 때의 기억을 곱씹던 카르젠은 어째서 그날의 기억이 이렇게 진하게 각인되듯 남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매일 함께 지내는데도, 이렇게나 떠올릴 것이 많다니.’
카르젠은 자신이 왜 이비를 자주 생각하고 떠올리는지에 대해 고민하다 보니 ‘재미있어서.’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직접 내린 결론대로, 카르젠은 이비를 생각하는 것이 퍽 즐거웠다. 이비라는 존재는 무료한 카르젠의 일상에 갑자기 찾아든 희극과도 같았다.
카르젠은 평소 이비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재미를 느꼈다. 가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거나, 예상을 뛰어넘는 반응을 보여 줄 때에도 그랬다.
특히 서재에서 자신이 웃을 때 눈이 부시다고 머뭇머뭇 손가락으로 힘겹게 알려 주던 모습을 떠올리고 나니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복잡한 마음을 다스리고자 조금 더 즐거웠던 기억을 상기하고 싶었지만, 이를 훼방하는 발소리가 들렸다. 어찌나 급하게 걷는지 보폭 큰 발소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지더니 벌컥 문이 열렸다.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온 크리시가 맞은편 소파로 향하더니 가져온 물건을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은빛의 천으로 대충 싸 둔 네모난 물건이었다.
“이걸 한번 보여 주려고.”
카르젠은 저 은빛 천이 신전에서 봉인함을 포장할 때 사용하는 신성력이 깃든 물건임을 알아보곤 대놓고 미간을 찌푸렸다.
“크리시. 설마 내 저택에 위험한 걸 들고 온 건 아니지?”
“꼼꼼하게 봉인했으니 괜찮아.”
“그래도…….”
“위에서 도와줬어. 걱정하지 마.”
크리시가 말하는 <위>는 두 가지가 있었다. 보편적으론 크리시 위의 대신관들을 뜻했고, 또 다른 뜻으로는 푸른 달의 에벨루스 신을 뜻했다. 후자라는 것을 눈치챈 카르젠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에벨루스 님의 힘이 닿았다면, 위험하다는 거잖아.”
“그보단 기분 나쁜 거라는 게 맞는 표현일 것 같은데.”
신성력이 깃든 천을 풀어 헤치자 견고해 보이는 나무 상자가 나왔다. 상자의 잠금장치를 풀고 뚜껑을 열자 빈 수정이 보였다. 카르젠의 몸에서 슬픔을 추출할 때 쓰는 것보다 큰 수정이었다.
카르젠은 지금 셔츠를 벗어야 할 타이밍인가 생각했고, 크리시는 카르젠이 행동으로 옮기기 전 다급하게 상자를 밀어 주며 물었다.
“안에 있는 거 보이냐?”
“…….”
그 물음에 수정을 향한 눈이 가늘어졌다. 집요한 시선으로 수정을 뜯어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카르젠의 눈엔 그저 텅 빈 수정이었다.
“빈 수정밖에 안 보여.”
“뭐 느껴지는 것도 없고?”
“전혀. 넌 뭐가 보이는데?”
그 물음에 수정으로 시선을 내린 크리시가 한쪽 입꼬리를 묘하게 비틀며 답했다.
“아주 기분 나쁜 거.”
크리시는 다시 상자 뚜껑을 덮고 잠금장치를 철컥 채우며 말을 이었다.
“시커멓고, 악질적이고, 사악하고, 난폭한데, 음울하기도 해. 그런데 신력으로 지울 수 있는 부정한 존재는 아니야. 다른 신관들과 함께 봤는데, 나이젤 대신관님만 나와 같은 것을 보셨어. 그런데 대신관님도 이게 뭔지는 모르겠다고 하셨고.”
“그건 에벨루스 님과 강하게 이어진 사람만 볼 수 있다는 뜻이야?”
“아마도 그런 것 같아. 다른 사제들은 미약하게나마 불쾌함을 느끼긴 했지만 눈으로 보진 못했으니까. 이게 뭔지 알아보려고 했는데, 요즘 자꾸 이상한 일이 터지는 바람에 진전이 없었거든.”
“다른 신전은?”
“가져가 보긴 해야겠지. 위에서도 이게 뭔지 안 알려 주니 발품 파는 수밖에.”
자신이 들은 것을 머릿속으로 정리한 카르젠은 크리시가 굳이 이걸 자신에게 보여 준 이유를 대번 파악했다.
“이비와 관련 있는 거지?”
고개를 끄덕인 크리시가 천으로 다시 상자를 잘 포장해 묶으며 덧붙였다.
“정확히는, 저번에 그의 몸에서 떼어 낸 거야.”
“……몸에서?”
크리시는 꼼꼼하게 천을 묶으며 카르젠에게 짧고 간결하게 설명해 주었다. 골목으로 끌려간 이비를 구했던 날 자신이 봤던 것을. 그리고 이게 형태를 보였을 때 이비가 보였던 비정상적인 반응도.
온갖 이야기를 들은 카르젠의 표정이 굳었지만, 크리시의 얼굴이 훨씬 더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카르젠은 크리시가 저런 얼굴을 할 때면 뭔가 중대한 것을 결심했을 때라는 것을 알기에 얌전히 제 친우의 말을 기다렸다.
대체 무슨 결심을 했기에 저렇게까지 오만상을 구기고 있는지 의아함이 들 때쯤, 크리시가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일.”
“응.”
“아리스를 보고 가야겠어.”
“…….”
카르젠은 내심 저 결심이 의아하면서도 기꺼웠다. 어느 순간 갑자기 사이가 멀어지다 못해 크리시만 보면 주먹부터 쥐는 아리스를 보면서도 카르젠은 간섭할 수 없었다.
왜 사이가 멀어졌는지 둘 다 함구하고 있었지만 카르젠은 은연중에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자신의 예상을 먼저 입에 담진 않았다.
아무리 서로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도 아리스와 크리시의 문제는 두 사람이 해결해야 할 문제였고, 카르젠이 낄 영역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카르젠은 크리시가 아직 자신의 입으로 직접 밝히지 않은 것에 대해 저가 먼저 눈치챘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제 추측이 맞다면 지금 저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크리시는 이미 알고 있겠지만 말이다.
잠시 말이 없던 크리시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얻어맞기 싫으니 최대한 떨어져서 봐야겠지만.”
“내가 중간에 막아 주진 못하겠지만, 어쨌든 최대한 말려 볼게.”
“빈말이라도 막아 준다고 해 줘. 아리스 주먹 아프다고.”
크리시는 그녀와 사이가 틀어졌던 날, 아리스에게 맞았던 부근이 또 욱신거리는 기분이 들어 슬그머니 명치로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만나려는 이유는 이것 때문이야. 아리스에게도 한번 보여 주려고.”
카르젠은 신성력이 전혀 없는 아리스에게 이걸 왜 보여 주려는 건지 의아했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크리시가 종종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해도 그게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최종적으로 크리시가 해결하려는 것은 이비를 위한 일이 될 것이었기에 카르젠은 거기에 의구심을 갖지 않았다.
제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기분 나쁜 것이라고 했고. 당시 상황을 들어 봤을 때 이비의 정신 상태를 어지럽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존재였다.
저게 대체 뭔지 몰라도 빠르게 파악할수록 이비에게 이로울 게 분명했다. 상자에서 시선을 뗀 카르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비가 관련된 일이라면 내가 앞장서야 하는데, 자꾸 신세 져서 미안해. 뭐든 필요한 게 있으면 꼭 알려 줘.”
“오냐. 이건 내가 알아볼 테니까 넌 잊고 있어. 네가 신경 쓴다고 딱히 달라질 것도 아니니까. 당분간은 그 사람이 겁먹는 일 생기지 않게 잘 챙겨. 뭔가에 정신 팔린 것 같으면 흔들어서라도 네게 집중시키고. 뭐, 웃어 주기라도 하든가.”
이비가 겁먹지 않도록 신경 쓰라고 강조한 크리시가 다시 소파에 드러누웠다.
원래도 눕는 걸 좋아했지만, 이비와 연결되어 전이받는 상태다 보니 평소보다 세 배는 더 피곤해 보였다. 크리시는 힘없이 제 손을 들어 올렸다. 수전증이 조금 잦아들었나 싶었는데, 또 눈에 띄게 벌벌 떨렸다.
“하아…… 아무래도 내일 떠나기 직전까진 전이를 유지해야겠어. 하루 만에 나아지긴 힘들겠지만, 깨어나자마자 이 상태로 있으라고 하면 더 무리가 가겠지.”
“아무래도 그럴 것 같아서 걱정이었어. 배려해 줘서 정말 고마워. 크리시.”
“너도 같이 짊어지고 있으면서, 뭘. 아리스는 내일 언제쯤 도착한대?”
“늦어도 점심시간 전엔 도착할 예정이라고 했으니 만나는 김에 식사도 하고 가. 드디어 유명한 아리스네 주방장의 실력을 볼 수 있게 됐거든.”
“주방장도 같이 온대?”
“응. 안전이 보장될 때까지 꽤 오래 머물 테니까 어쩔 수 없지. 아리스가 믿을 만한 사람만 소수로 데려오라고 했어. 그리고 아리스가 그 주방장이 해 주는 특정한 음식이 없으면 식사를 잘 못 한다더라고.”
“참나~ 엄살은. 그 주방장 데려오기 전에도 잘만 먹고 살았으면서.”
크리시의 단호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카르젠은 궁금증을 숨길 수가 없었다. 아리스가 주방장을 납치, 아니, 섭외한 일화는 수도에서도 유명했다.
빈민가에서 모포를 나눠 주다 일꾼들이 먹는 도시락을 보고, 도시락을 만든 이를 찾으려 혈안이 됐었다는 이야기는 사교계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의아한 것은 아리스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묘한 냄새 탓에 질색하고 입에 대지도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모두가 공략을 실패했다고 전해져 오는 소문의 음식에 모험심까지 느꼈다.
대체 무슨 맛일까 생각하던 카르젠은 문득 미지의 음식을 마주한 이비의 반응이 궁금해졌다.
‘이비는 뭘 줘도 맛있게 먹으니 반응이 기대되네. 아니, 어쩌면 처음으로 이비가 못 먹는 음식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겠어. 혹시 모르니 휘테커에게 다른 메뉴도 준비해 두라고 해야겠군. 그래도 이비가 맛있게 먹어 준다면 좋을 텐데…… 슬슬 이비에게 가 봐야겠어.’
크리시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걱정으로 죽상이었으면서, 이젠 잔잔하게 미소 짓는 카르젠을 보며 혀를 찼다. 어째 세상의 모든 고난을 저 혼자 짊어진 기분이었다.
***
하늘이 검붉게 물들 무렵.
수도에서 귀족들에게 가장 인기 많은 의상실 앞에 서 있던 청년은 수정 가로등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날이 저물기 시작하니 아침부터 지금까지 햇살을 머금어 둔 수정 가로등이 하나씩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크림색 머리에 에메랄드 빛 눈동자를 가진 처연한 미청년이 은은하게 맴도는 빛을 바라보고 있을 때, 마차 한 대가 속도를 줄이며 다가오더니 의상실 앞에 멈춰 섰다.
무의식중에 시선을 옮긴 청년은 마차의 인장을 알아봤다.
‘아슬란 백작가군.’
매너 있게 마차에서 조금 떨어져 서니, 마부가 내리기도 전 마차 문이 열렸다. 마부가 허둥지둥 내려 간이 계단을 꺼내 대 주자, 희끗희끗한 갈색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빗어 넘기고 어두운 로브로 온몸을 덮은 중년 남자가 내렸다.
청년은 마차에서 내린 이가 저가 예상한 이가 아니었음에 놀랐고, 동시에 아는 인물이라 더 크게 놀랐다.
최종 목적지가 여기가 아니었는지 당황한 마부가 정말 괜찮으시겠냐며 물었다. 남자는 마부를 향해 인자한 얼굴로 끄덕여 주었다.
“여기서부터 걸어가겠습니다.”
마부가 꾸벅 인사하자 이번엔 마차에서 또 다른 이가 내렸다. 머리에 솟은 긴 토끼 귀까지 포함해 남자의 허리 부근까지 오는 어린 묘족 소녀였다. 소녀는 중년 남자의 로브 자락을 꾹 잡으며 물었다.
“나이젤 대신관님. 바로 신전에 안 가는 거예요?”
내심 어딘가 들렀다 가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한 물음이었다. 나이젤은 인자한 얼굴로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시선은 청년에게 둔 채 말했다.
“하하하. 여기서부터 걸어가자꾸나. 중간에 안나가 좋아하는 과자 가게도 들르면 좋겠구나. 그러니 잠시만 기다려 주겠니? 오랜만에 반가운 이를 만났구나.”
반가운 이라 칭해진 청년이 나이젤을 향해 다가와 먼저 정중하게 인사했다.
“나이젤 대신관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평안하셨습니까.”
“세비어 콜린 공자께 에벨루스 님의 축복이 있길. 아니, 콜린 공자님. 이게 얼마 만입니까. 드디어 남작님과 수도로 올라온 겁니까?”
“예. 막 도착했습니다. 당분간 수도에서 머무를 예정입니다.”
콜린은 최대한 점잖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이젤은 그런 콜린에게 주름 깊이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허허, 그것 참 잘됐군요. 마침 남부 지역 이야기가 궁금하던 참인데. 따로 일정이 없다면 저녁이라도 함께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물론 맛없는 신전 밥이 아닌, 개인적인 자리로 말입니다. 최근 신전 근처에 새롭게 연 식당이 젊은 사제들 사이에서 꽤 인기가 좋더군요. 참고로 공자님이 걱정할 만한 채식 식당은 아닙니다.”
그가 코를 찡긋하며 뒷말을 강조하자, 로브 자락을 잡고 있던 안나의 눈이 커졌다. 콜린은 나이젤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대신관님께서 친히 권해 주셨는데 죄송합니다. 안타깝게도 지금부터 입궁 예정입니다.”
체스터가 따로 불렀음을 대번 인지한 나이젤이 껄껄 웃으며 콜린의 어깨를 부드러이 두드렸다.
“그럼 내일은 어떻습니까. 이 늙은이가 너무 재촉하는 것 같지만, 세비어 남작님을 뵙고 싶어 줄 선 사람이 많을 테니 말입니다.”
콜린은 저를 향해 있던 나이젤의 시선이 제 뒤로 옮겨진 것을 확인하곤 몸을 돌렸다. 심플한 듯하지만, 은근히 화려하고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새 옷을 입고 가게를 나선 세비어 페일리 남작이 다가왔다.
“나이젤 대신관님. 평안하셨습니까.”
“에벨루스 님의 축복이 있기를. 세비어 페일리 남작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통 소식이 없어 이 늙은이가 많이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잠시 공자님을 괴롭히고 있었지요.”
나이젤이 껄껄 웃으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 페일리 역시 반가움을 숨기지 않은 얼굴로 손을 맞잡고 마저 인사를 나눴다.
인상 좋은 중년 남자 둘이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어서인지, 어딘지 처연한 느낌의 선이 고운 미청년 때문인지, 지나가던 사람들 대부분이 세 남자를 흘끔거렸다.
나이젤의 로브 자락을 잡고 있던 안나 역시 세 남자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다 마지막으로 시선을 콜린에게 고정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콜린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훈훈해지고 마음이 절로 편안해졌다. 매일 보고 싶은 얼굴이었다.
“남작님께서 이 의상실을 개인적으로 이용하신 것은 아닐 테고. 왕세자님의 선물이었겠군요.”
“예. 체스터 왕세자님께서 이 가게에서 직접 주문해 주신 대로 입지 않으면 출궁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덕분에 저희 부자가 이리 멀끔해졌습니다. 하하하.”
보통은 입궁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을 텐데, 출궁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다니. 체스터 왕세자가 세비어 남작을 얼마나 귀히 여기는지 알 수 있는 협박 섞인 농담이었다.
“듣고 싶은 남부 소식이 많습니다.”
“예. 그럼 내일 저녁은 어떠신지요. 사실은 대신관님께 개인적으로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먼저 찾아뵙고자 했는데, 이렇게 만나다니. 에벨루스 님께서 저희 부자를 굽어살펴 주셨나 봅니다.”
나이젤은 부탁이라는 말에 의문을 숨기지 않고 페일리를 바라봤다.
“부탁이요?”
“예. 남부 문제를 포함해 여러 건으로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이젤은 페일리 남작이 <부탁>이라는 말을 입에 담았던 과거를 떠올려 보았다. 다른 귀족과 다르게 그의 부탁은 늘 타인을 돕기 위한 아쉬운 소리였다.
나이젤은 이 선인이 또 어디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 리스트를 잔뜩 적어 왔구나 싶어 껄껄 웃으며 호탕하게 끄덕였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남작님의 부탁은 지나칠 수 없죠. 그럼 내일 저녁은 어떻습니까? 아. 크리시도 내일 돌아올 텐데, 같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어떻습니까?”
크리시의 이름이 언급되자 페일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하지만, 일라나드의 친구들은 나중에 따로 만나 볼 예정입니다. 그리고 내일 저녁 자리가 젊은 친구에게 그리 즐겁진 않을 것이 뻔해서 말입니다.”
덧붙인 말에 껄껄 웃어 준 나이젤은 더 권하지 않고 끄덕였다. 그리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부쩍 야위고 곧 쓰러질 것처럼 피곤해 보이는 남작이 안쓰러워, 내일 저녁에 신전으로 와서 찾아 달라 말하며 조심스럽게 제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그의 성정에 대신관이 사적으로 신력을 사용한 것을 알면 부담스러워할 것이 뻔하니, 그가 모르게 신성력을 흘려보내던 나이젤은 순간 이상함을 느꼈다.
마치 그의 몸에서 거부하듯, 흡수되지 못한 신성력이 증발하고 있었다. 몇 번 더 시도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아주 약간의 신성력도 그의 몸에 흡수되지 않았다.
일순 당황했지만 노련한 대신관답게 내색하지 않고 지그시 맞잡고 있던 페일리 남작의 손등을 두어 번 두드려 준 후 여상하게 말했다.
“그럼 내일 저녁을 학수고대하겠습니다. 어둠을 밝히는 푸른 월광이 그대를 비추어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길.”
페일리는 그 말이 에벨루스의 프리스트들이 신의 가호를 담아 축복하는 인사임을 알고 예를 갖춰 화답했다.
“그 인도 끝에 마주한 빛 앞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안식할 수 있기를.”
***
‘아아, 행복해. 맛있어. 너무 맛있어.’
저녁은 식당에서 먹고 싶다는 이비의 요청에 주방장 휘테커는 소화가 잘되면서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다양한 음식을 내왔다.
야채는 모두 쪄서 푹 익혔고, 혹시나 탈이 날까 싶어 고기는 기름기를 쫙 뺐다. 굽는 대신 비린 맛을 잡아 주는 허브 찻물에 쪄서 혀와 잇몸으로만 먹을 수 있을 만큼 연하게 요리했다.
모든 요리에 곁들인 소스는 자극적이지 않게 야채 육수 약간에 산성이 없는 과일즙을 이용했다. 전부 입에 넣기만 해도 사르르 녹을 정도로 푹 익혀 낸 음식 덕분에 이비는 부담 없이 저녁을 즐길 수 있었다.
이비의 맞은편에 앉아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크리시는 조금 전 포크를 내려 둔 상태였다. 처음엔 별생각이 없었는데, 지금은 이비가 먹는 모습만 봐도 제 배가 부른 착각이 들었다.
‘전에도 느꼈지만, 어떻게 저렇게까지 맛있게 먹지?’
크리시는 이비가 먹는 웜 샐러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제 앞에도 있는 음식인데, 그냥 푹 익힌 샐러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비가 먹는 것을 보고 있자니 세상에서 가장 대단한 산해진미를 먹는 표정이었다.
크리시는 주방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신장이 2.5m나 되는 거대한 휘테커가 온몸을 쏙 빼고, 고개는 반만 내민 상태로 이비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보통 고개만 내밀지 않아?’
누가 봐도 몸을 다 내놓고 보고 있으면서 또 고개는 주방 안쪽으로 숨기려 하는 것이, 그냥 이리 와서 보지 왜 구석에서 저러고 있나 싶을 정도였다.
크리시 역시 이비가 먹는 음식을 지켜봤다. 조금 전엔 푸딩처럼 부드럽게 찐 달걀을 두 스푼 만에 먹더니, 이젠 또 웜 샐러드의 토마토를 입에 넣고 음미하고 있었다. 이비를 따라 토마토를 먹은 크리시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냥 익힌 토마토인데…… 신선하긴 하지만.’
카르젠 역시 익힌 토마토를 먹고 있었다. 눈을 감은 채 입을 앙다물고 오물오물 토마토를 씹던 이비는 음식을 삼키고 눈뜨자마자 송아지 고기를 썰었다. 꽤 큼지막하게 썰어 한입에 넣은 다음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 두고 또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이윽고 양 눈썹 끝이 축 처짐과 동시에 입꼬리는 올라갔다. 그 모습을 확인한 휘테커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주방으로 들어갔다.
내내 이비를 관찰하던 크리시는 송아지 고기를 작게 썰어 먹었다. 입에 넣자마자 녹을 정도로 맛있었다. 그런데 ‘저렇게 천상을 오가는 표정으로 먹을 정도인가’라고 묻는다면, 솔직히 아니라고 할 것 같았다.
카르젠 역시 송아지 고기를 잘라 먹었다. 그리고 크리시와 똑같은 생각을 하며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크리시는 아까부터 이비가 먹는 음식을 그대로 따라 먹는 카르젠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문득 저가 먹은 음식을 떠올려 보곤 “크흠. 흠흠.”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
‘갑자기 숙제가 늘었어!’
정신 차려 보니 카르젠의 손에 이끌려 침대에 눕게 된 이비는 조금 전 제 수첩에 적은 <내 몸 파악하기> 항목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물론 그 위로 춤 배우기, 귀족 예법 익히기, 왕성 예절 배우기, 바론 집사님이 돌아오면 보좌관 업무 수업 받기도 쭉 훑어봤다.
침대 맡에 앉아 수첩을 함께 보던 카르젠이 이비의 손에 펜을 가져갔다. 그리곤 위에 춤 배우기부터 보좌관 업무 수업까지 적힌 목록에 전부 X표시를 했다.
“!?”
놀란 이비가 왜 지우냐는 듯이 바라보자 카르젠은 제일 밑에 <내 몸 파악하기> 부분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다른 건 나중에 해도 돼. 지금은 이게 가장 중요해.”
저녁 식사 후. 카르젠과 크리시에게 들은 이야기는 이비도 걱정했던 부분이었다. 바로 이비의 종족 파악하기.
크리시의 부연 설명을 들은 이비는 제 몸이 아픈 게 병이 아니라는 점에서 우선 안도했다. 종족을 파악하면 나아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으니까.
이비는 카르젠이 손가락으로 짚어 준 <내 몸 파악하기> 부분에 동그라미 치고 밑에 무언가 적기 시작했다. 카르젠이 가까이 보기 위해 허리를 살짝 기울이자 그의 긴 머리카락이 이비의 손등을 간질였다.
이비는 카르젠의 머리카락이 제 손을 간질이게 놔두었다. 보통 인간의 머리카락과 다르게 엘프의 머리카락은 마치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가는 고운 모래 같았다. 닿으면 간질간질하면서도 묘한 기분이 들었는데, 은근히 중독성 있는 간지러움이었다.
의자를 빼고 앉아 있던 크리시는 시력 좋은 하프엘프가 굳이 몸을 기울이는 모습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이비의 수첩으로 시선을 내렸다.
-확실한 건 아닌데 뜨거운 물에 목욕하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아요. 어쩌면 목욕하면서 혈액 순환이 잘돼서 괜찮아지는 것 같기도 해요.-
마찬가지로 크리시보다 가까이에서 수첩에 적힌 글을 읽은 카르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 혹시 음식에 특정한 반응이 있으면 그것도 알려 줘. 나중에 떠올리려면 잘 기억나지 않을 테니 매일 식사 후 상태를 보자. 휘테커에겐 따로 식단마다 상세 재료를 적어 두라고 할게. 뭔가 먹고 특별히 컨디션이 좋아졌다거나 했던 기억이 있어?”
그 말에 이비가 고민 없이 수첩에 <레몬 마카롱>이라고 쓰기 시작했다. 크리시와 카르젠은 이비가 마카롱이라는 단어를 다 쓰기도 전에 동시에 부정했다.
“기분 탓이 아닐까요.”
“지금 이비가 먹고 싶은 거 말고…….”
이비의 얼굴이 대번 억울함으로 물들었다. 옆에서 크리시가 마카롱 먹고 상태가 좋아질 리가 있냐며 혀를 차는 모습에 이비의 손이 더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냥 마카롱 아니고 레몬 마카롱이요. 지금 시험해 보면 어때요? 테스트 해 봐야죠.-
오늘은 식사 후에 케이크나 디저트를 먹지 못한 터였다. 기껏 소화가 잘되는 음식 위주로 먹어 놓고 갑자기 설탕과 버터가 많이 들어간 음식을 먹으면 안 좋을 수 있다는 휘테커의 배려였다. 덕분에 매일 쌓아 두고 먹던 마카롱을 보지도 못했다.
“시도는 좋았어. 이비. 그래도 오늘은 안 돼.”
카르젠이 거절하자 이비는 <테스트 해 봐야죠.> 글자 옆에 동그라미를 그리더니, 그 안에 ㅠㅅㅠ를 그려 넣었다. 우는 표정인가 골똘히 추측하던 카르젠이 잠시 멈칫했다. 틈을 놓치지 않은 이비가 최대한 간절함을 담은 눈빛으로 카르젠을 올려다봤다.
“…….”
애절한 눈빛에 당황한 카르젠이 시선을 피하려는 찰나, 이비가 그의 셔츠 자락을 잡아당겼다. 카르젠은 제 셔츠를 잡은 이비의 작고 하얀 손을 흘긋 보곤 다시 이비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잔뜩 늘어뜨린 눈썹과 삐죽 내민 입술, 그리고 쭉 내려간 입꼬리를 보고 있자니…….
“그… 마카롱은… 나중에…….”
카르젠이 헛기침하며 고개 돌리니, 다시 셔츠를 잡은 손에 꾹- 힘이 들어갔다. 카르젠이 조금 흔들리려는 모습을 보일 때, 크리시가 딱 자르며 끼어들었다.
“안 됩니다. 아무리 엘릭서로 체력을 유지했다고 해도, 당신의 내장은 나흘간 일을 안 했단 말입니다. 하루 정도는 쉬게 해야죠. 말 나온 김에 엘릭서 드세요. 자. 여기.”
크리시가 엘릭서 병뚜껑을 열고 컵에 조금 따라 내밀었다. 코를 훅 찌르는 묘한 냄새에 이비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말아 넣고 카르젠에게 슬쩍 붙었다.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반응에 크리시가 컵을 더 들이밀며 말했다.
“이거 다른 귀족들은 없어서 못 먹는 겁니다. 체스터한테 뜯, 받아 온 최상급 엘릭서인 만큼 효력도 좋으니 입 벌리세요. 자. 아.”
이비는 제 최애가 저를 위해 약을 먹여 준다는데도 선뜻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저녁 식사 전에 할리스가 엘릭서를 입에 넣어 줬는데, 정말이지 엄청나게 맛이 없었다. 대체 저런 걸 먹고도 어떻게 깨지 않을 수 있었나 싶을 정도로.
‘지금 너무 배불러서 저거 먹으면 토할 것 같은데…….’
진심으로 토해 버리진 않을까 걱정될 정도의 맛이었다. 떫은 감을 손질 안 한 민물 생선과 항아리에 몇 달 삭히면 저런 맛이 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굉장히 맛이 없었다.
“물론 맛은 별로지만, 그만큼 몸에 좋습니다.”
크리시가 컵을 내민 만큼 이비는 카르젠에게 더 붙었다. 거의 제 품에 안기기 직전인 이비를 바라보던 카르젠은 크리시에게서 컵을 가져왔다.
‘강제로 먹이진 않겠지? 지금 먹으면 진짜 토할지도 모르는데!’
몸을 흠칫 떤 이비가 머뭇거리며 카르젠을 바라봤다. 카르젠은 답지 않게 잔뜩 찌푸린 얼굴로 엘릭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비. 내일 저녁까지 이걸 꾸준히 다 마시면.”
‘1리터는 족히 되는 것 같은데, 저걸 어떻게 내일까지 다 마셔…….’
마카롱을 준다고 해도 절대 마시고 싶지 않았다. 정말 토할 것 같았으니까. 꼭 마셔야 하면 차라리 빈속에 마시겠다고 메모하기 직전, 카르젠이 목에 칼이 들어온 것보다 더 비통한 얼굴로 말했다.
“에벨루스 프리스트 초상화 사 줄게. 세트로.”
“!!!”
“…….”
***
-잠시.
지그하르트가 팔을 뻗어 일행들을 멈춰 세웠다. 리엔은 길을 막고 있는 노인을 보며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런 깊은 숲속에 노인이라니? 게다가 이렇게 추운데 맨발이라니?
그때 뒤에서 낑낑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엔이 고개 돌리자, 겁에 질린 유사가 일라나드의 품에 안겨 꼬리를 말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유사, 괜찮아. 괜찮아. 왜 그래, 응?
당황한 일라나드가 유사를 달래 주기 시작했다. 유사는 일라나드의 품에 안겨 슬쩍 고개 돌려 노인을 보더니 다시 히야아악! 기겁하며 품에 얼굴을 묻었다.
-이라나드! 유사 저거 시러! 저거 치워 죠!
-저, 저거라니… 어르신에게…….
-저거 이상해! 무서워! 시커먼 안개가 이떠! 아빠가 시커먼 안개 보면 도망가라구 해떠!
겁에 질린 유사의 말에 리엔이 검을 뽑아 들자, 루가 혀를 차며 말했다.
-안타깝구먼. 이미 혼을 잃었어. 저 육신을 채운 걸 서대륙에서 뭐라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좋은 건 아닐세.
-동대륙에선 뭐라고 부르는데요?
리엔이 긴장하며 묻자, 루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동대륙에선 저런 걸 보고 보통은 <잡귀>라고 하네. 한이 많아서, 죽어서도 이 땅을 떠나지 못해 돌아다니다 혼이 나간 몸뚱이를 발견하면 냅다 차지하는 욕심 많은 존재지.
-…….
-어디든 욕심 많은 종족이 사는 곳은 다 똑같구먼. 허허허.
노인이 일행을 돌아본 순간, 리엔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는 텅 빈 공허한 눈으로 검은 진액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 눈물을 본 지그하르트의 눈이 가늘어지고, 반대로 루의 눈이 커졌다. 루는 자신의 말을 정정하겠다는 듯이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이런, 한낱 잡귀가 아니군.
-그럼…….
리엔이 질문을 하기도 전, 루가 소리쳤다.
-모두! 정신 바짝 차리게! 저 악랄한 것이 하는 말에 귀 기울이지 말고, 절대 대답하지 말게!
루의 말이 끝나자마자 노인이 몸을 돌려 리엔을 향해 섰다. 노인은 중후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로 말했다.
-잘… 커 주었구나… 렌…….
-이게… 무슨…….
리엔은 저 목소리를 알았다. 너무도 그리운 목소리. 죽을 때까지 들을 수 없는 그리운 목소리였다. 게다가 ‘렌’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불러 주던 애칭이었다. 리엔이 아빠……? 작게 부르며 입을 틀어막은 순간 루가 다시 소리쳤다.
-리엔! 정신 차리게! 현혹되면 안 돼! 악귀의 질문에 절대 대답해선 안 되네! 저건 자네 아버지가 아니야!
-잠시만…… 잠시만요, 루. 나를 렌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빠와 엄마밖에 없어요.
-악귀는 자네의 기억을 투영하여 꾀어내는 악랄한 존재야! 저것에게 대답할수록 더 많은 기억을 빼앗길 걸세!
루는 크리시와 에밀리에게 다급히 자신을 도우라 외치며 지팡이로 흙바닥에 술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유사는 저것을 빨리 치워 달라며 오열했고, 노인은 이번엔 카르젠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어린 소년의 목소리로 말했다.
-카르. 왜 눈치채지 못했어? 그날 왜 나를 말리지 않았어? 그때 카르가 내게 조금 더 신경 써 주었다면… 그러면 난 지금 살아 있을 수도 있는데…….
-…….
-카르… 여긴 너무 추워… 나 좀 도와줘, 응? 카르… 여기서 나가게 도와줘…….
카르젠의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체스터는 저 사악한 존재가 지금 감히 누구를 흉내 내는지 눈치채고 카르젠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카르. 듣지 마. 악귀인지 뭔지 아주 질이 나쁜 녀석이군.
카르젠 앞에 선 체스터와 눈이 마주친 노인의 입꼬리가 비정상적으로 찢어지며 올라갔다. 히죽히죽 기괴하게 웃는 얼굴이 된 그가 체스터를 향해 소년의 목소리를 유지하며 반갑게 외쳤다.
-형님!
숲의 마법사 9권 408~409페이지 中
***
“마이어 경. 통증은 좀 나아졌습니까?”
주점이 시끌벅적한 탓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연신 맥주를 마신 마이어는 제 앞에 마주 앉은 청년을 향해 점잖게 웃으며 답했다.
“아, 예. 괜찮습니다. 로이스 공자님.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일 아침이면 싹 가라앉을 겁니다.”
괜찮다고 말했지만 유약해 보이는 청년은 마이어의 눈가에 난 상처를 보며 신경 쓰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을 감싸다 입은 상처였으니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마이어는 로이스에게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맥주를 마셨다.
‘아슬란 로이스…… 그 아슬란 백작의 아들답지 않게 유약하군.’
맥주잔을 잡고 있는 로이스는 손을 잘게 떨고 있었다. 오래 검을 쥔 마이어의 거칠고 투박한 손과 달리 귀족답게 새하얗고 깨끗한 손이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로이스였다. 그는 식당을 둘러보곤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며 말했다.
“마이어 경. 아브델에 돌아가면, 꼭 좋은 술을 선물해 드리겠습니다.”
“하하하, 이 맥주면 충분합니다. 공자님. 그리고 아시다시피 궁성 기사는 외부로부터 선물을 받을 수 없으니까요.”
궁성 기사들을 포함한 왕성 고용인들은 모두 일정 금액 이상의 선물을 받아선 안 됐다. 로이스는 시신 화장 문제로 잔뜩 흥분한 사형수 유족들의 거센 항의 속에서 저를 감싸다 얼굴에 상처를 입은 마이어에게 제대로 보답하고 싶었지만, 그 말을 듣고 씁쓸하게 끄덕였다.
마이어는 이 주점에서 파는 통밀 맥주를 정말 좋아해서 일부러 오델림 영지에 들를 정도니 개의치 말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자타 공인 왕성 최고 애주가인 마이어의 말이 거짓은 아닌지, 고급 와인에 길들여진 로이스의 입에도 이곳 맥주는 굉장히 맛있었다.
이후 그다지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을 때, 주점 입구가 소란스러워졌다. 입구를 보니 웬 어린아이들이 식당 주인에게 떼를 쓰고 있었다. 빈민가 아이들이라는 것을 눈치챈 마이어가 은근히 입구에 시선을 두니, 로이스 역시 식당 입구를 흘긋거리며 말했다.
“어린아이들인데, 이렇게 늦은 시간에 술 파는 곳을 기웃거리면 위험하진 않을지…….”
마이어는 로이스의 반응이 의외라고 생각하면서도 아이들의 입에서 나온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저씨. 세비어 남작님은 오늘도 안 계세요?”
“세비어 남작님 오늘도 못 만나요?”
“예끼 이 녀석들. 남작님은 수도로 돌아가신 지 오래라니까. 언제 오는지 나도 몰라.”
“히잉~.”
익숙한 이름을 들은 마이어는 로이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입구로 향했다.
아이들은 거구의 마이어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놀라 흠칫했지만, 곧 그의 가슴에 달린 왕실 기사단의 증표를 보곤 입을 쩍 벌렸다.
주점 주인은 마이어가 소란 때문에 왔다고 생각했는지 굽신거리며 바로 사과했다.
“아이고, 손님. 이거 참 죄송합니다. 이 녀석들이 시끄러웠지요. 빨리 보내겠습니다. 이 녀석들. 빨리 집에 들어가. 이제 곧 밤이다! 가서 자야지!”
주인장의 축객에도 아이들은 마이어의 가슴의 증표를 뚫어지게 봤다. 이 나이 또래라면 꼭 한 번은 꿈꾸는 왕실 기사를 마주해 놀라워하긴 했지만 거구의 마이어에게 선뜻 말을 걸진 못했다. 이런 반응에 익숙한 마이어는 허리를 거의 접다시피 숙인 후 아이들과 눈을 맞추며 씩 웃어 보였다.
“얘들아, 안녕. 난 왕실 제 1기사단 부단장 마이어라고 한단다. 세비어 페일리 남작님은 왜 찾는 거니? 혹시 도움이 필요하니?”
얼굴의 상처가 자아내는 곰 같은 인상과는 다르게 다정하고 상냥한 말투였다. 아이들은 조금씩 경계를 풀며 끄덕였고, 개중 가장 큰 아이가 나섰다.
“남작님께 드릴 것이 있어요. 꼭 돌아오신다고 하셨는데 아직 만날 수가 없어서…… 세비어 남작님을 아세요?”
“응. 세비어 페일리 남작님과 아는 사이야. 그런데 얘들아. 남작님은 지금 아브델에 가셨어. 다시 돌아오시려면 꽤 오래 걸릴 거야.”
그 말에 아이들의 얼굴이 대번 어두워졌다. 잔뜩 실망한 아이가 울상이 되어 손에 든 종이를 내밀며 말했다.
“기사 아저씨, 그럼 이거 남작님께 전해 주시면 안 돼요?”
마이어는 아이가 내민 종이를 반사적으로 받아들었다. 조잡하고 질 낮은 종이엔 유사가 자주 그리는 것처럼 추상적인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아이는 마이어에게 제 그림을 설명했다.
“이건 제가 그렸어요! 공자님이 나쁜 아저씨들 때려 준 거예요!”
“전 남작님이 저랑 동생 치료해 주셔서 편지 썼어요!”
“저는 매일매일 남작님이 주시는 빵을 잘 먹고 있다고 감사드리고 싶어서 그렸어요!”
그러고 보니 아이들은 전부 빵 봉투를 소중하게 안고 있었다. 꽤 큰 봉투였는데, 봉투 밖으로 삐져나올 만큼 큰 바게트가 들어 있었고, 열린 봉투 사이로 사과와 우유병도 보였다. 주점 주인은 어떻게든 아이들을 빨리 보내려고 편지와 그림을 직접 걷으며 설명했다.
“남작님께서 무료 급식소를 지원해 주셔서 감사 인사 드리겠다고 매일같이 찾아오고 있습니다요. 남작님이 오델림에 머무시는 동안 이 건물 여관에 묵으셨거든요.”
마이어는 주점 주인이 걷은 편지와 그림들을 저가 받으며 말했다.
“이건 아저씨가 수도로 돌아가면 남작님께 전해 드릴게. 이제 곧 밤인데, 위험하니 돌아가렴.”
마이어의 말에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우리 마을 이제 안 위험해요!”
“나쁜 아저씨들 다 사라져서 밤에도 놀 수 있어요!”
“맞아! 공자님이 나쁜 아저씨들 다 혼내 줬어요!”
“세비어 콜린 공자님 말이니?”
마이어가 되묻자 아이들이 흥분해 말했다.
“네! 예쁜 오빠, 아니, 예쁜 공자님이요!”
마이어는 아이들이 칭한 예쁜 공자를 떠올렸다. 세비어 페일리 남작의 아들 세비어 콜린. 제 부친의 성정을 쏙 닮은 선인이었다. 한데, 마이어의 기억 속의 콜린 공자는 지금 저와 동행 중인 로이스만큼이나 유약한 청년이었다.
검술 실력도 평균 미만이었고, 그렇다고 체술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불량배들을 쫓아냈다는 아이들의 무용담은 꽤 부풀려진 것이라 판단하며 웃어넘겼다.
아이들의 무용담이 길어질 기미가 보이자, 주점 주인은 수완 좋게 빨리 돌아가서 자지 않으면 내일 아침 무료 배급 빵을 못 받을 수도 있다며 돌려보내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마이어를 향해 꼭 남작님께 전달해 달라고 재차 부탁하곤 마지못해 돌아섰다. 우르르 몰려왔던 아이들이 드디어 돌아가자 주점 주인이 사과했다.
“아이고, 마을 꼬마들 응석을 너그러이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런데 저 아이들, 이 시간에 돌아다녀도 정말 위험하진 않습니까?”
마이어는 수도와 달리 어둑한 골목이 신경 쓰여 물었지만, 주점 주인은 의외로 별걱정 없다는 듯이 끄덕였다.
“예전 같으면 위험했을 텐데, 요즘 치안이 굉장히 좋아졌습니다. 사실 이 주변 상가에 자릿세 걷으러 오는 불량배들이 있는데 요즘은 안 보이더군요. 징글징글한 놈들. 다른 영지로 갔다는 말이 있는데, 이대로 영영 안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마이어는 자릿세 명목으로 크지 않은 상점가에서 돈을 뜯어 가는 불량배들의 특성을 잘 알았다. 그 잡배들은 무리 지어 다니며 단속을 피해 주기적으로 마을을 옮겨 다니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 놈들은 영지도 자주 옮겨 다니니 안 보인 지 꽤 됐다면 아마 당분간 조용할 겁니다. 혹시 모르니 영주님께 말씀드려야겠군요. 그리고 이건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조잡하지만 정성 가득한 그림과 편지를 모아 쥔 마이어는 흐뭇하게 웃었다. 너른 가슴에 훈훈하고 따뜻한 기운이 퍼졌다. 세비어 남작 부자 덕분에 요 며칠 고생한 것에 대한 보답이라도 받은 기분이었다.
***
카르젠 저택 제 전용 침실에 누워 있던 크리시는 피곤해 기절하기 직전임에도 자꾸만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영상 수정을 챙겨 왔어야 했어…….’
크리시는 조금 전, 에벨루스 프리스트 초상화 세트 이야기에 기겁한 이비가 저도 모르게 카르젠의 가슴을 철썩 때리던 모습을 떠올렸다.
이어 자신이 저지른 짓을 인지한 이비가 기함하며 때린 부위를 손바닥으로 문질러 주던 모습도. 식겁해 때린 곳을 손으로 비비며 미안함에 끙끙대던 모습은 세상에 다신 없을 명장면이었다.
카르젠 역시 조금은 당황한 듯했지만, “괜찮아. 이비. 처음도 아닌데 뭘.”라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해 이비를 더 당황하게 만들었다.
‘둘이 참 잘 노네.’
크리시는 며칠 내내 제대로 자지 못해 피곤한 와중에 하도 웃어서 당기는 복근을 문질렀다. 배에 올려 둔 손은 아까보다 심하게 떨렸다.
‘오늘 밤엔 힌트라도 좀 주셨으면 좋겠는데…….’
내심 바라면서도 신은 한 사람만 굽어살피는 존재가 아니기에 크게 기대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크리시는 천장을, 아니 그 너머를 바라보며 은근히 압박했다.
‘조금만 더 도와주시죠. 저 둘 살리는 셈 치고.’
크리시는 이 방으로 오기 직전에 카르젠 몸에서 슬픔이 거의 추출되지 않는 것을 보고 확신했다.
앞으로 이비가 제 친구의 곁에 있으면 카르젠은 괜찮을 것이라는 것을. 문제는 이비가 반 불멸인 하프엘프만큼 건강하게 오래 살아 줘야 한다는 것이지만.
‘나머지 문제는 저희가 알아서 해결해 보겠습니다. 그러니 종족만이라도 알려 주시죠.’
은근히 압박한 크리시는 자세를 편히 하며 꿈을 기약했다. 눈을 감고 몸에 긴장을 푸니 며칠간 쌓인 피로 덕분에 순식간에 잠들어 꿈으로 진입했다.
주변은 온통 안개뿐이었다. 아직 온전한 형태가 갖춰지지 않은 꿈에 도달한 크리시는 늘 그렇듯 푸른 달이 드리우길 기다리며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시야를 가린 안개가 걷히며 꿈의 형태가 선명해지더니, 파도 소리가 들렸다. 크리시는 앉은 상태로 파도치는 바다를 보며 눈을 찌푸렸다.
“이건 내 꿈이 아니군…….”
물이 참 더러웠다. 이렇게까지 오염된 바다라니, 끔찍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제 곁을 지나쳐 바다로 뛰어갔다. 실용적인 옷을 입은 인간들이었다.
“설마 저 물에 들어……가네. 피부병 생기겠는데?”
경악을 담은 혼잣말에 등 뒤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그래서 난 안 들어가려고.”
“너도 왔냐?”
옆에 다가온 카르젠이 크리시와 나란히 앉으며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수정의 힘은 아닐 텐데.”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잘 모르겠지만, 위에서 장난친 것 같아. 그 사람은?”
“내 생각엔, 아마도…….”
카르젠이 크리시의 왼쪽 방향을 눈짓했다. 자연스레 그 시선을 따라가 보니, 검은 머리의 왜소한 소년이 보였다. 얼마 전, 병원 건물에서 마주했을 때보단 조금 더 나이 먹은 모습이었다.
두 사람과 눈이 마주친 소년은 깜짝 놀라더니, 이내 시선을 흐리며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둘을 외면하는 와중에도 소년은 빨간 소스를 바른 방망이같이 생긴 빵을 열심히 먹고 있었다.
“……그 사람 맞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