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2권) (6/19)

### 챕터 5

-그냥 눈, 코, 입 제대로 달려 있는 인간이라는 생각밖에 안 드는데?

-리엔. 다시 생각해 봐. 정말 감상이 그거밖에 안 된다고?

-딱히… 쟤들 얼굴을 보는데 다른 감상이 더 필요해?

순수한 의문을 담은 질문에 나오의 귀가 축 늘어졌다. 늘 쫑긋하던 묘족 수행원의 귀가 자기 때문에 축 처진 것을 본 리엔은 괜한 죄책감을 느끼며 슬쩍 덧붙였다.

-아니, 그러니까… 난 나오가 말하는 후광인지 뭔지 그런 건 전혀 모르겠거든. 음, 아마 내가 그쪽으로 좀 둔감해서 그럴 수는 있을지도….

-아냐, 그게 아니라아~ 아아,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루 할아버지! 할아버지도 할머니 처음 만났을 때 뭔가 파앗! 하고 빛이 났다고 했었잖아요!

-허허~ 나도 그랬던 시절이 있었지~.

루까지 긍정하며 허허 할아버지처럼 웃는 모습에 리엔은 더 혼란에 빠졌다.

-그러니까 리엔! 뭔가, 아름다운 것을 보면 뒤에서 빛이 나는 것 같은 느낌이야! 실제 나는 건 아니고, 시각적 정신적 충격이 합쳐져서 발생하는 효과랬어! 인간은 그런 게 없나?

리엔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하자, 가만히 듣고 있던 에밀리가 끼어들었다.

-나도 비슷한 건 있어. 나오처럼 외적인 부분은 아니지만, 신력이 강하거나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을 보면 은은한 빛이 느껴져. 육안으로 구분하기보단 내가 가진 신앙심이나 신력으로 구분하는 느낌이야.

에밀리의 말에 나오가 비슷한 것 같다며 끄덕였다.

-맞아! 사람마다 다 달라! 다 다른데! 뭔가 있다구!

귀가 다시 쫑긋해진 나오가 흥분하니, 일라나드의 품에 안겨 있던 유사도 끼어들었다.

-유사도 알아! 아빠가 가르쳐 줘떠! 인간마다 가진 기운이 있는데, 그걸 기(氣)라고 한대써!

일라나드가 오구오구 그랬어요~ 대답해 주며 아기 여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유사는 일라나드의 손길을 충분히 느낀 후에 말을 이었다.

-그리구 이찌! 기는 사람마다 달라! 어어, 어… 음. 아 마따! 안개! 사람마다 안개 같은 게 붙어 있어! 근데 색도 다 다르구! 느낌도 달라! 가끔 엄청 기분 나쁜 기를 가진 녀석도 있는데! 아빠는 그런 존재를 보면 꼭 도망치라구 해떠! 유사는 아직 꼬리 하나뿐인 아기니까 그런 거구, 나중에 크면 도망치지 않아도 돼! 지금은 아기라서 그런 거야! 알찌?

절대 자기가 약해서가 아니라고 은근히 덧붙인 유사는 연신 쏟아지는 일라나드의 손길에 꺄항~ 웃으며 배를 까고 누웠다.

이쯤 되니 리엔은 진심으로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다들 뭔가 보인다고들 하는데, 내가 뭔가 놓치고 살았던 건가? 싶어 갸웃하자 지팡이 손질을 마친 루가 흠흠. 헛기침하며 짐짓 근엄하게 말했다.

-허허허, 걱정하지 말게. 자네가 문제 있는 것은 아니니. 알다시피 우리 묘족은 번식 욕구가 강한 종족이야. 그래서 제 짝이라 느껴지는 이를 만나면 여기. 바로 여기서 신호를 보낸다네.

루가 작은 손으로 제 머리를 톡톡 두드리는 모습에 리엔은 더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 나오는 체스와 카르와 크리시를 다 자기 짝으로….

-아니아니. 저 녀석은 그냥 얼굴을 밝힐 뿐이야. 자기 기준에 심미적 충족을 준다 싶으면 머리가 반응하는 거지. 내버려 두게. 원래 묘족은 번식 욕구가 강한 만큼 좋은 씨를 남기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어. 좋은 씨란 각각 개인의 기준에 따라 다 다르지만, 나오의 경우 외모가 우선이고, 나의 경우엔 기백과 강함이 우선이었지. 내 반려자는 굉장히 강하다네. 나보다도 더. 그러니 내가 우리 영토를 맡기고 이렇게 서대륙에 온 것 아니겠나. 그리고 혹시 아나. 자네도 언젠가 진정한 인연을 만난다면 반응이 올지도 모르지. 두근거림이라든지 또는 어떤 형태로든.

리엔은 가장 최근 자신이 느꼈던 두근거림에 대해 떠올리다 이마를 짚었다. 작년 체스터로부터 왕족 식탁에나 오르는 최상품 스테이크를 받았을 때. 그때 말고는 딱히 두근거렸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숲의 마법사 5권 359~360페이지 中

***

주디의 이야기에 이비의 눈이 동그래졌다.

‘기도회라면 미사나 예배 같은 거 아냐? 기도회에 왜 티켓이 필요하지?’

딱 봐도 왜 티켓이 필요한지 의문 품은 얼굴로 갸웃하는 모습에 주디가 알아서 설명을 덧붙였다.

“인기가 워낙 많은데, 좌석은 한정되어 있어서 기도회에 참석할 수 있는 티켓을 따로 판매해요. 티켓 판매는 1주일 전 에벨루스 신전 앞에서 하는데요, 판매 날엔 아침부터 광장까지 줄이 어마어마해요! 그땐 워낙 긴 시간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다 보니, 평소에 못 보던 노점상도 많이 몰려와서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해요~.”

‘와~ 평소 없던 노점상까지! 평소에도 많은 것 같던데 그거보다 더 많이 몰린다는 건가? 어떻게 보면 일종의 축제나 마찬가지네!’

진심으로 놀란 이비가 입을 쩍 벌리자 잔뜩 고양된 주디가 더 열정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실 티켓을 판매하는 것보단 패키지를 판매한다고 해야 맞겠네요. 1인당 1개만 구매할 수 있는데, 그 안에 티켓이 있을지 없을지는 아무도 몰라요.”

“!?!?”

맙소사! 딱 그렇게 쓰인 얼굴로 놀란 이비가 경악하는 모습에, 카르젠이 쓰게 웃으며 말을 얹었다.

“참고로 난 내 친우가 진행하는 기도회니, 좌석 하나 정도는 구해 줄 수 있다고 이미 말해 주었어. 주디가 소중한 휴일에 패키지에 들어 있는 상품 때문에 긴 시간 줄을 서서 고생하는 게 신경 쓰였거든. 패키지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주디가 거절했지만… 아쉽게도 패키지는 크리시도 따로 뺄 수 없다더라고. 가만 보면 에벨루스 신전이 돈을 참 잘 모아.”

에벨루스 교단은 루아인의 국교도 아니면서 많은 교단을 제치고 유일하게 수도 중앙 광장에 신전을 세웠다.

이는 다 에벨루스 교단의 어마어마한 자금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놓고 신전을 저격하는 말이었지만, 주디는 조금 다르게 긍정했다.

“그럼요! 다 좋은데 쓰이는 돈인 걸요! 패키지 판매 수익은 패키지 제작비랑 행사, 아니. 기도회 진행 비용만 제외하고 모두 에벨루스 신전에서 좋은 일에 쓰고 있어요! 저번엔 옆 영지에 난민들을 위한 시설도 지었고요~. 그러니 티켓이 없다면 실망스럽긴 하겠지만, 내 돈이 좋은 데 쓰인다는 것을 아니까 괜찮아요! 게다가 패키지에 들어 있는 상품은 매번 조금씩 달라요! 아! 이게 제가 저번 패키지 사고 받은 건데요!”

이비는 주디가 자신의 가방에서 무언가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하자, 상체를 그녀 쪽으로 기울이며 집중했다. 주디가 꺼낸 것은 아주 작은 유리병과 수첩 사이에 껴 둔 작은 그림이 그려진 카드였다.

“이건 프리스트 크리시 님께서 직접 축복하신 성수가 들어 있는 유리병이에요. 몇 방울 안 들어서 사실 효력을 기대하기보다 그냥 행운의 증표처럼 지니고 다니는 성수라고 보면 돼요. 병 디자인도 예쁘니까 보고 있으면 그냥 기분 좋아지는 용도지만요.”

끄덕끄덕

이비는 그런 용도를 충분히 이해한다는 얼굴로 격하게 끄덕였다.

‘그치. 그런 것들이 있지. 동생도 향수는 쓰는 것만 쓰면서 병이 예쁘다는 이유로 온갖 향수를 샀었으니까. 자기 입으로 예쁜 쓰레기라고 부르며 쓰레기 컬렉션 구역에 모아 뒀었지. 근데 이런 예쁜 쓰레기는 윤택한 삶을 위해 꼭 필요해.’

이비가 진심으로 공감하며 경청하는 모습을 본 주디가 카드 몇 장을 넘겨 주며 제일 앞엣것을 먼저 보여 주었다.

“그리고 이게 저번 패키지에 들어 있던 한정 그림 카드예요. 나머지는 저번 패키지 카드들이고요.”

작은 카드엔 블랙드래곤과 함께 석양을 바라보는 크리시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보급형 마법 공학으로 발달한 인쇄술로 찍어 낸 카드는 퀄리티가 상당했는데, 각도에 따라 약간씩 그림이 달라 보이는 특별한 인쇄법을 사용했다며 주디가 카드를 요리조리 돌려 보여 주었다.

카드를 정면으로 보면 크리시와 블랙드래곤이 석양을 보고 있지만, 조금 기울여 보면 서로 고개를 돌려 마주 보고 있는 그림으로 변해 이비는 소리 없는 탄성을 질렀다.

‘와! 대박! 홀로그램? 아니 좀 느낌이 다른데? 어쨌든 이 세계에서 상상도 못 한 인쇄 기술인데, 대단하다. 얼마나 발전한 거야?’

게다가 매번 패키지마다 들어 있는 카드 그림이 다 다르다는 말에 이비는 진심으로 놀라워했고, 카르젠과 율리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저 둘이 크리시에 대해 뜨거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율리는 오늘 저녁 재단사 방문 일정에 대해 카르젠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각자 대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을 때 새로운 차와 디저트가 등장했다.

이비는 무려 3단 트레이에 등장한 디저트를 보고 귀를 쫑긋 세웠다. 층층별로 접시마다 온갖 케이크와 빵과 과일 디저트가 인원수대로 예쁘게 담겨 있었다.

주디와 율리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카르젠이 주문해 준 과일 무스와 케이크 한 조각을 해치운 이비였지만, 새로운 디저트를 보니 지금까지 먹었던 모든 것이 리셋된 기분을 느꼈다.

‘진짜 맛있겠다!’

이비는 손에 쥐고 감상하던 크리시 카드를 다시 주디에게 돌려주고 처음 보는 과일이 올라간 과자를 집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르젠은 묘하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물었다.

“이건 순수한 궁금증인데. 이렇게 단 음식을 잔뜩 먹으면 나중에 속이 느끼하지 않아?”

도리도리

이비의 즉시 부정에 이어 율리와 주디도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이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대답한 세 사람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했는지 카르젠을 향해 한마디씩 덧붙였다.

“디저트는 아무리 먹어도 느끼하지 않던데요? 게다가 이 카페 디저트는 과일도 많이 들어가서 오히려 상큼해요~.”

“율리 말대로 여기 디저트는 다 상큼한 편이에요. 그리고 느끼한 음식이라면 저는 오히려 고기가 더 느끼한 것 같아요. 고기는 많이 먹지 못하겠지만, 디저트는 아마 포슬포슬해서 그런지 위에서 금방 녹아 사라지나 봐요~.”

끄덕끄덕

‘역시 디저트는 금방 녹아 사라지는 게 맞나봐.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이비가 확신을 얻고 끄덕이는 모습에 카르젠이 작게 웃었다. 그리곤 자긴 오늘 디저트는 이미 다 먹은 것 같으니 세 사람이 알아서 해치우라고 말해 주었다.

카르젠의 디저트 포기 선언에 세 사람의 얼굴이 어째 더 밝아졌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네 사람 모두 즐거운 오후의 티타임 이었다.

***

‘아… 진짜 재미있다. 돈 쓰는 거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 같아….’

거대한 문구 전문점에서 문구 용품을 고르던 이비는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이 역시 카르젠이 고용인들에게 전부 제공해 주는 것으로 세 사람은 필요한 문구를 마음껏 고를 수 있었다.

게다가 카르젠의 방문이어서 그런지 아예 전담 직원이 바구니를 직접 들어 주며 쇼핑 내내 옆에서 자세히 설명해 준 덕분에 무엇이 좋은지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물론, 비싸고 최신상 위주로 판매하려는 속셈이 보였지만, 그래도 최소한 성능이 좋은 것만 추천해 주고 있었기에 카르젠은 잠자코 가벼운 미소를 머금은 채 세 사람의 뒤에 서서 같이 구경했다.

“아직까지 공식 서류를 작성할 땐 깃펜을 선호하는 분들이 많으시지만, 최근 젊은 귀족분들은 이런 잉크 내장형 펜을 선호하시죠. 이전에 나온 모델은 한 번 쓰면 버려야 했던 것과 달리 이 잉크 내장 펜은 이렇게, 여기 뚜껑이 완전히 밀착됩니다. 틀어서 열고 안에 잉크를 넣어서~ 자. 이렇게 뚜껑을 꽉 닫으면 새지 않고 쓸 수 있는 펜이 된답니다. 당연히 리필도 가능합니다. 압력에 따라 굵기도 달라져요. 여기 종이에 테스트해 보시겠어요?”

“와아….”

“와… 진짜 부드럽다… 도련님. 이건 도련님께 필요한 물품 같은데요? 요즘 서류 작업 많이 하시잖아요.”

“이비 님도 이게 있으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목탄은 아무래도 잘못 보관하면 가방이 지저분해질 수 있으니까.”

“어이쿠, 그럼 이 잉크 펜이 최고죠. 깃펜을 들고 다니긴 어렵고, 말씀해 주신 것처럼 목탄은 잘못 보관하면 으스러지고 지저분해질 수 있으니까요.”

이비는 지구로 치면 만년필이라 생각하며 직원이 갑자기 내민 펜을 반사적으로 받아 들었다.

‘있으면 확실히 편하긴 했지만… 비싸…! 6만 클로라니…! 우리 아까 카페에서 그렇게 많이 먹고도 2만 클로 정도 나왔던 것 같은데….’

이비가 망설이는 모습에 카르젠이 가장 좋은 모델로 다섯 개를 달라고 했다.

가장 좋은 모델이라는 말에 직원은 이비에게 쥐어 준 것보다 가격대가 더 높은 제품으로 5개를 꺼내 왔다. 고급스러운 나무 케이스에 들어 있는 펜과 리필용 잉크 세트였다.

“이 리필형 제품이 방금 보여 드린 것의 상위 버전으로, 이번에 막 나왔습니다. 그저께 유통되기 시작했고, 벌써 동대륙 쪽에서 주문 폭주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저희 가게도 아주 어렵게 구비해 둘 수 있었죠.”

정말 몇 개 없는 귀한 제품이라는 설명에 이비는 소리 없는 탄성을, 율리와 주디는 순수하게 와아아~ 탄성을 질렀다.

카르젠은 동일 모델을 카운터 밑에 꽤 많이 숨겨 두었을 거란 확신을 가졌지만, 세 사람의 순수한 감탄을 지켜 주기 위해 “오늘 우리가 타이밍이 좋았군.” 정도로 반응해 주었다.

이후에도 전담 쇼퍼의 혹하게 만드는 말발 덕분에 이비와 주디와 율리는 내내 감탄했고, 카르젠은 심하지 않은 선이라면 어느 정도 맞춰 주었다.

‘진짜 재미있다. 이렇게 직접 문구 쇼핑하는 것도 초등학교 때 이후 처음인 것 같아.’

이비는 지금, 이 순간을 순수하게 즐거워하고 있었다.

지난 생에선 발병 전엔 친구들과 큰 대형 서점의 팬시점에 자주 가기도 했었다.

당시에 다 쓰지도 못할 노트나 펜을 왜 그리도 많이 샀는지 모르겠지만, 신기하게도 문구 쇼핑은 어린 시절 큰 즐거움을 주었었다.

‘여기도 예쁜 노트나 수첩이 많네. 이런 거 좋아했는데. 와, 이 꽃무늬도 예쁘다. 이 하늘 그림도. 이 하트 무늬도… 응?’

다양한 디자인의 수첩을 구경하던 이비는 하트 무늬 수첩을 보고 멈칫했다.

‘어어…? 하트? 하트가 왜… 여기에? 분명 서재에서….’

-이 도형은 무슨 뜻인지 궁금한데. 특별한 의미라도 있는 거야?-

‘…어?’

이비의 시선이 머문 곳을 지켜보던 쇼퍼가 예리하게 하트 무늬 표지의 수첩을 바로 집어 들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역시 센스가 좋으시군요. 유행을 딱 알아보시니. 여기 이 무늬에 있는 문양은 하트라고 합니다. 최근 유행하기 시작한 도형이죠. 이 하트의 의미는….”

“아!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다는 심장의 모양과 닮은 하트!”

율리가 끼어들다 미안하다며 멋쩍게 웃었고, 쇼퍼는 오히려 알아봐 줘서 기쁘다는 듯이 매우 호탕하게 웃었다.

“한 유명 작가의 책에 나왔던 구절이죠. 이건 내 심장이야. 당신을 영원히 사랑한다는 뜻이지. 당신에게 줄게. 크~.”

“아, 이비 님. 저것도 머니마니 달러스 작가의 책에 나와요. 읽고 펑펑 울었던 장면이었어요. 스토리가 의외로 탄탄하거든요~.”

율리가 슬쩍 이비에게 속삭여 주었다. 이비는 이마를 짚을 뻔했으나 애써 신기하다는 듯이 경청하며 슬쩍 카르젠의 눈치를 살폈다.

카르젠은 이비를 보고 있었는데, 눈이 마주치자 여상스레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미소에 이비는 슬쩍 눈을 가늘게 뜨며 입술로 말했다.

[어디서 본 것 같았는데, 유행하는 도형이었네요.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에요.]

‘내가 카르젠에게 왜 굳이 이런 해명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해명해야 할 것 같단 말이지. 어휴~ 머니마니 달러스. 당신 덕분에 방심할 수가 없네요….’

거짓말을 했다는 죄책감이 있었지만, 카르젠이 이 도형을 알고 자기에게 물어봤던 거라면 이런 해명이라도 해 둬야 할 것 같았다.

이비의 입술을 읽은 카르젠이 평소보다 한층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최근 유행하기 시작한 도형들이라 이비는 모를 수밖에 없었을 거야. 공식적인 문서에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니 딱히 몰라도 상관은 없지만… 저 하트 문양만큼은 나 정도로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 아무에게나 쓰면 곤란해지거나 오해가 생길 수 있으니 기억해 둬.”

이비는 ‘아무에게나’ 라는 부분에 어쩐지 조금 힘이 들어간 것처럼 느껴졌지만, 아무에게나 보다 ‘나 정도로 가까운 사람’이 더 신경 쓰였다.

그래서 카르젠을 향해 저도 모르게 애잔한 미소를 지어 버렸다.

‘훗. 카르젠도 아직 잘 모르는구나? 하트는 그럴 때 쓰는 거 아닌데~ 이제 내가 카르젠의 보좌관이니까! 혹시나 카르젠이 실수하지 않도록 잘 케어해 줘야지!’

차마 하트의 진정한 의미를 잘못 알고 있다고 정정해 줄 수 없는 이비는 언젠가 카르젠이 하트 관련으로 실수하지 않기만을 바랐다.

***

수많은 초가 은은하게 반짝이는 에벨루스 신전의 중앙 로비는 언제나 많은 이들로 북적였다.

기도를 하러 오는 이들도 있었고, 로비 입구 근처 기념품 샵에서 판매하는 에벨루스 신전 물품을 구매하러 오는 이들도 많았다.

물론 가끔 축복을 위해, 또는 봉사 활동이나 기부 관련으로 방문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생각 없이 입구 쪽을 바라보며 계단을 내려오던 크리시는 익숙한 모습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솟아 있는 탓에 제 오랜 친우를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다만 그와 동행하고 있는 세 사람이 있는 위치가 크리시의 미간을 움찔거리게 만들었다.

‘카르 저택의 시종과 이비군….’

크리시는 난간에 기댄 채 계단 중앙에 멈춰 섰다. 그는 기념품 판매대 앞에서 무언가 구매하는 시종보다 이비에게 시선을 두고 살폈다.

‘흠… 뭐, 지금은 괜찮은가 보군. 그게 더 안 보이는 걸 보니….’

크리시는 광장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던 이비를, 그리고 제 사무실 소파에 앉아 카르젠에게 겁먹고 벌벌 떨던 이비를 떠올렸다.

당시 사무실 내에 다른 이들은 보지 못 하고 느끼지 못 했던 것에 대해 떠올린 크리시는 이비를 조금 더 살피다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지금 나가면 분명 마주칠 테니, 들어가서 조금 더 쉬어야겠군. 이건 내일 보내야겠어.’

평소라면 모를까. ‘이걸’ 지닌 채로 저들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크리시는 손에 쥐고 있는 상자를 꽉 잡아 누른 채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사무실 층의 어둑어둑한 복도를 걸어 불 꺼진 제 사무실로 돌아온 그는 책상에 상자를 내려 두고 뚜껑을 열어 보았다.

상자 안엔 사무실을 나서기 전에 몇 번이고 확인했던 큰 수정이 있었다. 평소 카르젠에게서 슬픔을 추출할 때 쓰는 것보다 훨씬 큰 수정이었다.

수정 속을 가득 채운 시커멓게 꾸물거리는 정체 모를 것이 빠져나오려는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 움직임이 퍽 위협적이었으나 크리시는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게 난리 치지 않아도 곧 꺼내 줄 거다. 널 꺼내면 낱낱이 파헤쳐 가며 살펴봐 줄 테니 기다려.”

말을 알아듣는 것인지 단순한 우연인지 시커먼 존재가 수정안에서 위협적으로 크리시를 향해 달려들 듯이 움직였지만, 강한 신력으로 봉인된 수정은 다행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크리시는 이 시커먼 것이 광장과 제 사무실에서 이비의 작은 몸을 타고 오르며 귓가에 무언가 속삭이던 것을 떠올리곤 극심한 불쾌감을 느꼈다.

이전에도 이런 것과 비슷한 형질은 몇 번 봤는데, 저가 알고 있던 것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존재였다. 심지어 이게 뭔지 위에서조차 크리시에게 힌트를 주지 않았다.

‘다른 힌트가 없는 걸 보면, 어쩌면 위에서도 모르는 건가….’

잠시 그리 생각한 크리시가 도리질했다.

제 사무실에서 카르젠이 이비에게 조금 화가 나 있었을 당시, 이제 화 풀라며 일부러 과장되게 손사래 치는 시늉으로 이비의 몸에서 이걸 잡아 뜯어낸 순간이나, 수정에 가둬 두었던 때에 에벨루스가 강한 신력으로 도와주었던 것을 보면 아마 에벨루스는 이게 뭔지 알고 있다고 확신이 들었다.

“이유가 있으니 말씀 못 해 주시는 거겠죠. 그래도 전 이게 뭔지 알아야겠으니 도와주시죠. 그들에게 가져가는 것 외에 다른 힌트는 없습니까?”

크리시는 제 사무실 천장을 올려다봤다. 정확히는 더 위를.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이게 뭔지 모르지만. 제 추측이 맞을 경우… 그땐 에벨루스 님도. 그리고 다른 신들도 전부 우리를. 이 세계를 지켜 주셔야 합니다.”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따스한 기운이 크리시의 전신을 감쌌다.

크리시는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이 픽 웃으며 상자 뚜껑을 닫았다.

***

체스터의 집무실 소파 위 쿠션에 몸을 말고 있는 작은 아기 여우의 눈이 스르르 감기기 시작했다.

“유사. 자?”

꾸벅꾸벅 졸던 유사는 대답 대신 귀를 파닥이더니 이내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지금 자려고?”

유사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제 꼬리를 끌어안으며 작은 주둥이를 풍성한 꼬리털에 파묻었다.

저 귀여운 자세가 의미하는 바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체스터가 깃펜을 멈추고 타이르듯 말했다.

“유사. 지금 자면 있다 새벽에 깰 텐데, 조금만 참아 봐.”

“우웅… 그치만… 그치마안… 쪼끔만 잘래….”

아직 초저녁인데 어지간히 졸렸는지 찡찡대는 모습에 체스터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저 아기 여우를 자게 놔둔다면, 새벽에 깨서 쌩쌩한 여우와 놀아 주느라 고생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처리해야 할 일은 산처럼 쌓여 있는 상태였고 평균 수면 시간은 하루 세 시간도 채우지 못한 지 오래였다.

‘어제 확인만 하고 헤어졌으면 될 것을, 굳이 반나절을 그렇게 날린 내 탓이지….’

마침 체스터도 며칠 사이 사교계에 소문난 이가 궁금했던 차였다.

제 친우 카르젠을 두고 온갖 루머가 쏟아졌고, 그중 몇몇 루머는 그럴싸하게 포장된 상태라 체스터 역시 귀가 솔깃해질 만한 이야기들이 있었다.

하지만 체스터가 가장 궁금했던 것은 루머의 확인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친우가 직속 보고까지 미룰 정도로 영향을 끼친 이가 누구였는지가 궁금했고, 직접 보고 싶었다.

‘의외의 타입이라 놀라긴 했지만.’

체스터는 저도 모르게 귀와 꼬리를 발현시킨 후 놀라 휘둥그레지던 이비의 모습이 떠올라 픽 웃음이 났다.

그러다 눈앞에 유사가 하품하더니 본격적으로 자세를 편히 잡는 모습에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사. 조금만 더 견뎌. 이따 밤에 자.”

“아우웅….”

자지 말라며 장난스럽게 꽉 끌어안으니 낑낑대는 소리가 들렸다.

귀를 잔뜩 늘어뜨리며 도리질하는 모습이 사랑스러웠지만, 아직은 재울 수 없었다.

오늘은 체스터도 무조건 5시간은 잘 계획이었다. 그 계획엔 새벽에 일어나 놀아 달라며 침대 위에서 방방 뛰는 아기 여우는 당연히 없었다.

일어나 놀아 줄 때까지 꼬리로 얼굴을 때리는 아기 여우 역시 계획에 없던 체스터는 졸음에 취한 유사를 어떻게 쌩쌩하게 만들지 고민했다.

‘아니면 크리시한테 딱 이틀만 맡길까… 그 브로커도 조사 들어갔을 거고. 마침 그쪽 구역에서 캔디 유통되는 것도 확인했으니 유통 가게나 다른 증거라도 찾는다면 지금보다 더 바빠질 텐데….’

크리시의 의사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진지하게 고려하던 체스터의 시선이 유사의 귀에서 멈췄다.

여우 귀가 쫑긋거리더니 곧 고개를 들고 문을 바라보는 모습에 누군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유사의 큰 꼬리가 살랑거리며 체스터의 얼굴을 쳐 대는 것을 보니, 곧 문을 열고 들어올 이가 꽤 반가운 대상일 거라고 생각했다.

‘마이어인가? 마이어라면 반나절만 유사랑 놀아 주라고 해야겠군.’

나름의 기대를 품은 체스터가 문을 바라보고 있을 때. 밖에서 기사들이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각 잡고 인사하는 소리를 보아하니, 마이어일 확률이 더 커졌다. 아기 여우의 체력을 소진시켜 줄 누군가의 등장에 미소 짓던 체스터는, 문이 열리자 반가움과 동시에 일말의 슬픔을 느꼈다.

‘마이어가 아니군….’

하지만 슬픔은 스쳤을 뿐, 격한 반가움과 기쁨이 더 컸기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체스터의 집무실에 들어온다는 말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올 수 있는 이는 단 세 명뿐이었고, 그중 하나는 자신의 품에 안겨 있었다.

나머지 하나는 제 연약한 토끼 손님을 챙기느라 정신 팔려 있을 테니 여기에 올 리가 없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리엔! 리엔 와떠!? 이제 안 바빠?”

바로 제 2기사단 단장 샤이나 리엔이었다.

체스터는 평소보다 훨씬 피곤해 보이는 리엔에게 다가가 생긋 미소 지어 보이며 인사했다.

“리엔. 어서 와. 그렇지 않아도 곧 부르려 했….”

“뒷골목에서 잡아 온 남자. 살해당했어.”

“뭐?”

“핫?”

갑작스런 보고에 체스터의 눈이 커졌지만, 리엔은 그의 당황한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놀란 아기 여우의 꼬리가 펑! 커진 바람에 체스터의 얼굴을 전부 가렸기 때문이었다.

유사의 주둥이가 살짝 벌어진 것을 본 리엔이 반사적으로 작은 아기 여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미안해, 유사. 유사가 들어서 좋을 거 없는 이야긴데, 내가 너무 급하게 말 꺼냈네… 일단 지금 복도에 마이어 있거든? 마이어랑 잠시 놀고 있을래?”

“시더. 유사도 같이 들을래. 유사는 갱차나. 유사가 찾아낸 그 지지한 아저씨 죽어써?”

아기 여우의 귀여운 고집에 리엔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 마냥 아기처럼 보여도, 은근히 철든 요괴라는 것을 알기에 그럼 알겠다며 유사를 체스터의 품에서 받아 안으며 말했다.

“오늘 아침에 취해서 술병을 깨고 제 얼굴을 자해하며 8구역 경비대원들에게 난동 부린 남자를 구금시켰는데. 그가 유치장에서 유사가 찾은 브로커를 죽이고 자살했어.”

“하?”

체스터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리엔은 제 목덜미에 정수리를 비비며 체취를 묻히는 아기 여우를 방치한 채 보고를 이었다.

“난동 부린 남자는 신원을 확인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어. 깨진 병으로 자해해서 얼굴도 심하게 망가져 알아보기가 힘들고. 신분을 증명할 물품도 없었어. 게다가 팔엔 문신이 있었는데 가리려고 일부러 불로 지진 것 같아.”

“…….”

체스터는 순식간에 피곤함을 느끼며 소파에 무너져 앉았다. 리엔은 그런 체스터를 향해 나지막하게 말했다.

“체스. 뭔가 이상해.”

“그러네. 아주 이상하네….”

유사는 얌전히 리엔의 품에 안겨 이마 짚는 체스터를 내려다봤다.

깊은 한숨을 내쉰 그가 도리질하며 말했다.

“어떻게든 조직을 재생해서 맞춰 보려 했지만, 화상 정도가 심한데다가 이미 죽어서 재생도 불가능해. 그 인간, 처음부터 그 브로커 죽이려고 일부러 난동 부리고 잡혀 들어온 거였어.”

“생각보다 꽤 거물이 연관된 것 같군….”

불법 캔디 유통에 대한 조사가 어느 정도 진전이 되면 늘 이런 식이었다.

증거가 될 만한 것을 찾으면 훼손이 됐고, 겨우 유통에 대해 실마리를 잡나 했더니, 이젠 유치장까지 들어와 살인을 저지르는 지경이었다.

“생각보다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자가 연관됐다고 생각해.”

“…….”

“고의로 8구역 경비대 초소에서 난동 부린 것 같아. 거기서 말썽 부리다 잡히면 어디 유치장에 갇히는지 알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고… 그건 브로커가 어디에 있는지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일 수도 있겠지. 물론 물증은 없지만.”

“아니. 나도 리엔 네 의견에 동감해. 이 정도면 알고 저지른 짓이겠지. 신원 확인될 만한 것들도 지울 정도였으니… 자살은 어떻게 했어?”

“어떻게 들키지 않고 숨겨 들어간 건지 모르겠지만, 사망 원인은 독약이야. 덕분에 상처로 독이 끓어 나와서 안면이 꽤 녹았어… 유치장에 갇힌 후, 오간 인원은 없었고.”

“…….”

결론적으로 난동 부린 인간의 신원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보고를 마친 리엔은 체스터의 맞은편 소파에 앉아 유사를 제 무릎에 올려 두었다.

체스터는 이마를 짚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그의 피로함이 안타깝게 느껴진 리엔이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이미 냄새는 흩어져서 유사가 다시 추적하긴 어려울 것 같고. 증인이 있다고 했지? 지금 카르가 보호하고 있는 사람.”

“…….”

“그 사람이 브로커에게 어디까지 끌려갔었는지 대략적인 위치라도 알아야 할 것 같아. 지금 저쪽 사람들은 죄다 숨어 있는 상태고 누구도 나오지 않으려 해. 돈 주고 정보를 사려 해도 뭐에 겁먹었는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고 있어.”

“하….”

체스터가 침음하며 고개를 들었다. 극심한 피로감이 그를 덮친 상태였으나, 리엔 역시 만만치 않은 상태였다.

짧게 자른 붉은 머리카락은 오랫동안 방치했는지 부스스한 상태였고, 눈 밑에 다크서클도 체스터보다 진하면 진했지, 연하진 않았다.

리엔의 피곤함이 고스란히 배어 나온 얼굴이 걱정되었는지, 오늘따라 유사도 얌전하게 안겨 있었다.

“일단 신중해야할 것 같아. 목격자 증언 요청은 카르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어.”

“카르 허락이 필요한 일이라면 내가 직접 찾아가서 협조 요청 할게.”

“리엔. 카르가 보호하고 있는 그는 굉장히 심약한 사람이야. 지금 건강 상태도 좋지 못하고. 가뜩이나 그 일로 놀랐을 텐데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불쑥 찾아가서 그날 끌려갔던 곳으로 안내하라고 하면 더 놀라 움츠러들 수 있어. 게다가 그 일로 치밀하게 살인까지 저지를 정도라면, 증언보단 그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게 우선순위야. 일단 카르에게 알리긴 해야겠어.”

“당연히 내가 동행한다는 조건이야. 내가 곁에 있는데 그가 위험해질 일은 절대 없어.”

체스터는 지금 리엔이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치장까지 들어와 살인을 저지를 정도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 작고 연약한 사람이 증인으로 주목받게 될 경우 위험해질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체스터가 쉽게 결정하지 못하자 틈을 노린 리엔이 더 강하게 제 의견을 피력하려 했지만, 유사가 먼저 끼어들었다.

“리엔, 이찌. 이비는, 이비는 이찌. 엄청 작아. 리엔보다 훨씬 작아. 그리구 이찌. 작아서 다 약한 건 아니라구 했지만, 이비는 진짜 약해. 그래서 리엔이 이케이케 톡 치면 이비는 아파서 울지도 몰라… 그리구 이비 엄청 아파. 막 이로케 몸을 떨어.”

유사가 바르르 떠는 시늉을 보이자 리엔의 얼굴에도 난감함이 서렸다. 리엔을 누구보다 잘 아는 체스터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마디 던졌다.

“내가 봐도 그는 꽤 병약해 보였어.”

“이비 많이 아파… 귀도 쪼그매….”

“귀가 작다고? 인간이라고 들었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보네.”

“토끼 묘족이랑 뭔가 섞이긴 했어. 확실히 해 두려고 하렌델에게 검사하라고 해 둔 상태고. 머리카락 몇 개 가져오긴 했는데, 그거로 안 되면 이계인들에게 혈청이라도 보내 봐야겠지.”

리엔은 카르가 보호하고 있다는 사람에 대해 궁성 의원에게 검사를 지시했다는 말을 듣고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조사하라 시켰는데?”

리엔의 날카로운 눈빛에도 체스터는 여상스레 대답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가 카르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고 있거든.”

***

리엔은 알고 있었다. 지그하르트가 순간 망설였다는 것을.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나서지 않았다. 지그하르트의 탓은 아니지만, 결국 휩쓸려 간 난민 중 일부는 구할 수 없었다. 리엔은 다른 이를 해치라는 것도 아니고, 구하는 데 함께 힘을 보태 달라고 했는데 어째서 그가 망설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리엔의 주먹이 떨리는 것을 지켜보던 루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섭섭해하지 말게. 본디, 별에 가까운 존재들은 대부분 그런 존재니.

-…

-블랙드래곤인 그도 이제야 인간을 알아 가는 중이니. 시간을 줘야 하네.

-드래곤인데도요?

-드래곤이라고 하여 다 아는 것은 아니지.

리엔은 드래곤은 언제나 전지전능한 존재라 들었다. 실제 저가 만난 지그하르트 역시 가끔 이상한 행동을 해서 그렇지, 그가 가진 힘은 끝을 알 수 없었다.

그런 그가 크리시를 마음에 들어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들의 여정에 함께하게 되었다 보니 리엔의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지그하르트는 크리시 외에 다른 인간은 안중에도 없었다. 충분히 그럴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죽음을 직면한 이들을 구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루는 리엔이 주먹을 틀어쥐는 모습을 지켜보다 곰방대를 꺼내 담뱃잎을 탈탈 털어 넣으며 물었다.

-리엔. 쉽게 생각해 보게. 오늘 자네가 이 산을 넘으며 밟아 죽인 벌레가 몇 마리일까?

-밟아 죽였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신경 쓰지 않아서, 전혀 모르겠어요.

-그렇지. 자넨 이 산에 사는 벌레를 신경 쓰지 않았어. 자네는 목적을 가지고 힘겹게 산을 올랐을 뿐이야. 그런 자네가 발아래 무엇이 있는지 일일이 살피며 걷지 않았다고 해서 그게 과연 자네의 잘못일까?

-아뇨… 아마도….

리엔이 아닌 것 같다며 대답하자 루가 물었다.

-그렇다면 만약 자네가 산을 오르는데, 갑자기 발아래서 벌레의 목소리가 들린다면 어쩌겠나. 살려 달라고. 자길 밟지 말아 달라고 말이야.

-….

-그럼 자네는 한 번쯤은 벌레를 주의 깊게 살펴보겠지. 밟아 죽일지 말지는 자네의 선택이지만, 어쨌든 자네는 그 순간 이후로 벌레를 신경 쓰게 될 것이라네. 한번 그 벌레의 존재를 인식한 이후 자네가 원하든 아니든 간에 말일세.

-….

-자네가 만약 자애로운 존재라 벌레의 말을 기억해 준다면, 벌레가 죽지 않도록 다른 곳을 디디며 걷겠지. 그리고 벌레를 신경 쓰기 시작했다면 이제 자네는 앞이 아닌 땅을 보고 걷게 될 걸세. 벌레가 어찌 되든 상관없다면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자네는 앞만 보고 걸을 것이고. 어디까지나 자네의 선택이 되겠지.

리엔의 얼굴이 복잡해지기 시작하자 루가 껄껄 웃으며 곰방대에 불을 붙였다. 오동통한 볼이 부풀었다 쪼그라드는 것을 몇 번 지켜보고 있자니, 곧 불씨가 굵어지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루는 약초 향 머금은 연기를 후우~ 뱉어 낸 후 말을 이었다.

-우리 동대륙의 용이란 존재는 그런 존재라네. 이곳 서대륙의 드래곤도 비슷한 것 같군.

-….

-자연을 지배하는 이들이 하찮은 미물에게 관심을 주고 사랑을 주게 되면, 언젠가는 필히 변하게 된다네. 지금 저 블랙드래곤은 아직 결정하지 못했어.

-루의 말을 빗대어 보자면, 앞으로 땅만 보고 걷게 될까 봐요?

리엔의 질문에 루는 인자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비슷하지. 지금까지의 자신과 다른 존재로 변화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네. 그러니 그에게 시간을 주게나.

숲의 마법사 6권 31~32페이지 中

***

카르젠을 건강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는 말에 리엔의 눈이 가늘어진 반면, 유사의 눈은 동그래졌다. 체스터는 둘의 반응은 신경 쓰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참고로 이유는 나도 몰라. 그냥 함께 있으면 컨디션이 확실히 나아진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어. 대외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그날 보니 카르는 그 사람에 대해 알아보는 것에 적극적이지 않은 것 같더라고. 그러니 나라도 알아봐야지.”

즉. 이 검사는 카르젠도, 그리고 그가 보호하는 이비도 모른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었다.

리엔의 표정이 점점 구겨지는 것을 본 체스터가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나도 생각 없이 지시한 건 아냐. 뭔가 이상했거든.”

“이상했다고?”

그 물음에 체스터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다리를 꼬고 소파에 등을 파묻으며 편하게 기대앉았다.

유사 역시 리엔의 무릎 위에 누워 눈을 말똥말똥 뜨고 꼬리로 소파를 탁탁 치며 체스터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생각을 고른 체스터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 아닌 대답을 내놓았다.

“왜 지금 이런 시기에 갑자기 카르에게 도움이 되는 능력을 가진, 기억 잃은 정체불명의 존재가 나타났을까? 그것도 그 경계선 숲에서. 그는 숲에서 대체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체스터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리엔은 체스터가 지금 질문이 아닌 자문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곤 의아함을 느꼈다.

분명 경계선 숲은 위험한 곳은 맞지만, 카르젠이 올린 보고서에는 ‘숲 초입 부근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해 구해 왔다’고 적혀 있었다.

“…그 사람, 초입에서 발견한 게 아니었구나.”

“응. 카르가 따로 이야기해 주었어. 그를 발견한 건 바로 경계선 부근이었다고. 지금껏 숲 경계선에서 살아 돌아온 이는 없었어. 모두 감쪽같이 사라졌지. 이상하지 않아?”

“…….”

“내가 카르라면 당연히 궁금했을 텐데, 카르는 그 부분엔 전혀 의문도 가지고 있지 않더라고. 아니,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지도 않았어. 맹목적으로 그를 믿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 우리가 아는 카르가 그럴 녀석이 아니잖아?”

“…확실히 그렇긴 한데. 그럼 그가 정신계 마법을 쓸 확률도 있다는 거야?”

“모르지. 아는 게 없는데 어떻게 확신하겠어. 일단 토끼족과 뭐가 섞였는지 확인하고 나서 고민해도 늦지 않겠지.”

리엔의 낯빛이 어두워지려는 기미를 파악한 체스터가 바로 덧붙였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보다 크리시가 먼저 그를 만났는데 별다른 말은 없었으니 일단 괜찮다는 뜻이겠지. 그 녀석, 다른 건 몰라도 사람 보는 눈은 누구보다 정확하잖아.”

그 말에 걱정이 들기 시작하던 리엔이 바로 안도했다. 확실히 크리시는 어려서부터 사람 보는 눈 하나만큼은 기가 막혔다.

“그래. 무서울 정도로 정확하지….”

리엔은 아직 카르젠이 구조한 이를 만나 보지 못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크리시가 별다른 언질을 해 주지 않았다면 카르젠의 곁에 둬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체스터의 단독 행동이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체스. 그럼 굳이 몰래 알아볼 필요까진 없지 않을까?”

“크리시가 별다른 말이 없다고 해도, 그가 누군지 아는 데에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까 겸사겸사하는 거야. 그리고 아무런 능력도 없는 사람이 카르를 편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 리는 없으니까. 정확한 원인을 알게 되면 카르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잖아. 다른 건 몰라도 카르의 건강에 도움이 된다면 그건 내가 나설 일이야.”

리엔은 체스터가 말은 저렇게 해도 사실은 카르젠의 보호를 받고 있는 그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전쟁과 긴 여정 끝에 저들이 받아들여야 했던 현실을 떠올려 보면 체스터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리엔은 체스터의 방식에 동의하고 싶진 않았다.

“체스. 이미 벌어진 일이니 일단 카르에게 말하진 않을게. 하지만 내가 침묵하는 것도 결국은 카르를 속이고 네 행동에 동의하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것 알아 줘. 앞으로는 내 친구에게 말하지 못할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아.”

“응. 나도 알고 있어. 미안해. 이건 순전히 카르를 위해서야. 정확하게 무언가 밝혀낼 때까지만 함구해 줘. 그땐 내가 카르에게 말할 테니까. 유사 너도 그때까진 비밀이다?”

“우우웅… 그치만, 이비는. 착한 사람 같았는데….”

내내 둘의 대화를 얌전히 듣고 있던 유사의 귀가 축 늘어져 있었다. 연이어 “이비, 좋은 사람 같은데….” 웅얼거리는 유사에게 체스터가 달래 주듯 대답했다.

“이비가 나쁜 사람이라는 게 아냐.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니까 정확하게 알아보고자 하는 거지. 그리고 이비가 카르에게 도움 되는 원인을 알게 되면, 최종적으로 카르에게 좋은 일이니까 이해해 줘.”

“그치만… 그치만 모른다고 의심부터 하는 건 나쁜 거래떠….”

체스터와 리엔은 저 말을 유사에게 들려 주었던 이가 누군지 알고 있기에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둘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 챈 유사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자신의 첫 인간 친구가 해 주었던 ‘인간이라는 종족의 나쁜 버릇’에 대해 말을 이었다.

“이찌, 인간들은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한다구 해써. 그래서 전쟁이 나지두 않는데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전쟁 걱정 때무네 막 무기부터 만든다구… 그치만 이비는 착한 사람이니까, 이비가 나중에 만약 나쁜 일을 하면, 그럼 그때 때찌하고 혼내 주면 앙 대?”

아기 여우의 말에 어쩐지 뼈가 시림을 느낀 체스터가 쿡쿡 웃으며 끄덕였다.

“하하. 그러네. 유사 말대로 의심부터 하면 안 되는 건데. 그렇지? 알았어. 그렇게 하자. 그에 대해서는 나도 유사의 말대로 믿어 볼게.”

“그치? 유사가 맞아찌? 히힛~.”

리엔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다정하게 거짓말하는 체스터를 보면서도 침묵했다. 체스터의 말이 마음에 남았기 때문이었다.

왜 지금, 이 시기에.

신비한 능력을 가진 정체불명의 종족이.

그 경계선 숲에서 발견되었을까.

리엔은 체스터의 말대로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 의문에 적절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리고 점점 더 카르젠이 보호하고 있다는 사람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일지 궁금하네. 캔디 건이 아니라도 한 번쯤은 나도 만나 봐야겠어.’

***

같은 시각.

리엔이 궁금해하는 이비는 서재에 카르젠을 남겨 두고 제 방으로 돌아와 주변을 살폈다.

방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했지만, 혹시나 지나가는 신이 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조심스레 가방을 끌어안고 침대로 향했다.

침대에 올라앉아 이불을 뒤집어쓰고 최소한의 빛만 들어오게 숨구멍을 열어 둔 이비는 슬쩍 가방에서 종이봉투를 꺼냈다.

작은 봉투를 열자 더 작은 봉투가 들어 있는 게 보였다. 이비는 최종적으로 남은 작은 봉투를 꺼내 조심조심 뜯었다. 봉투 안에서 빳빳한 카드 한 장이 나왔다.

“…….”

침을 꼴깍 삼킨 이비가 카드를 뒤집었다.

카드엔 굉장히 중후한 중년 남성이 그려져 있었는데, 초상화 밑엔 멋진 필체로 <프리스트 나이젤>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

쫑긋했던 짧은 귀가 추욱 처졌다. 덕분에 머리에서 아주 조금 떠 있던 이불이 정수리를 완전히 덮었다.

잠시간 그대로 앉아 있던 이비는 조용히 카드를 가방에 넣고 이불을 들췄다.

‘괜찮아. 세상일은 원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

세상의 이치를 상기한 이비는 축 늘어진 토끼 귀를 손으로 잡아 올려 꼿꼿하게 세웠다.

그리곤 오늘 밤은 꼭 카르젠을 혼자 재우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

카르젠은 귀를 잔뜩 늘어뜨린 채 서재로 돌아온 이비를 보곤 웃음을 참았다.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을 소중하게 끌어안고 방으로 가더니, 다 두고 터덜터덜 돌아온 모습을 보자니 결과가 뻔히 보였다.

‘크리시가 아니었나 보군. 저렇게 풀 죽을 줄 알았으면 한 세트 사 줄걸 그랬나….’

오후에 주디가 에벨루스 신전에서 새로 발매된 미니 초상화 세트를 구매했을 때.

기념품 샵 직원이 신규 초상화 세트를 구매하면 지난 시즌 발매했던 초상화 중 1개를 무료로 준다는 이야기를 했었고, 주디는 지난 시즌은 이미 다 모았다며 흔쾌히 이비에게 양보했었다.

덕분에 이비는 카르젠이 그간 봐 왔던 표정 중 가장 비장한 얼굴로 바구니에 가득 담긴 봉투를 하나 골랐었다. 당시 표정이 너무나 진중하여 카르젠은 차마 웃지도 못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작게 밀봉된 손바닥보다 작은 봉투를 받고 행복하게 웃고 있었는데, 지금은 저렇게 귀를 늘어뜨리고 침울한 얼굴로 소파에 털푸덕 앉는 걸 보고 있자니 귀엽기도 하고 짠하기도 했다.

소파에 앉은 이비는 카르젠과 눈이 마주치자 살풋 웃어 보이곤 책상 위의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짧은 귀가 애처롭게 늘어진 모습을 지켜보던 카르젠은 자꾸 씰룩거리려는 제 입매를 만졌다.

‘마법 공학 기술로 대량 인쇄해 만든 초상화가 뭐 그리 대수라고 저리도 실망스러울까? 게다가 크리시는 직접 만나 봤으면서 굳이 그 녀석의 초상화를 왜 가지고 싶어 하는 건지… 초상화도 아주 가관이었고.’

이비가 무언가에 관심을 보였을 때 그게 뭐든 일단 사 주려는 카르젠이었지만, 어쩐지 그 초상화 세트만큼은 먼저 사 주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었다. 아니, 사 주고 싶지 않았다.

랜덤이라는 핑계로 안에 어떤 프리스트가 그려져 있을지 모르는 사행성 기념품은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고, 또 평소 저런 유혹에 면역이 없을 것 같은 이비가 사행성을 부추기는 물건에 중독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래. 다른 이유는 없어. 그런 돈을 끌어모으기 위해 신도들의 순수한 신앙심을 이용하는 기념품은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해 사 주지 않았을 뿐이야.’

멀리 볼 것 없이 제 저택에서 열심히 일하는 주디만 봐도 고생이 많았다.

기도회 티켓이 들어 있는지 아닌지도 모를 패키지를 사려고 소중한 휴일을 쓰고, 아침 일찍부터 나가 줄을 선다고 늘 고생하지 않는가.

테라스 카페에서 주디의 말에 눈을 빛내던 이비를 떠올린 카르젠은 어쩐지 다음 주 패키지 판매 날에 이비도 광장을 가득 채운 긴 줄 어딘가에 서 있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비가 만약 주디를 따라가겠다고 하면 곤란해지겠어. 가뜩이나 몸도 안 좋은데, 줄도 오래 서야 하고. 그렇다고 패키지 구성품이 좋은 것도 아니고 말이지.’

패키지도 패키지였지만, 기념품 샵에서 판매하는 사행성 미니 초상화만큼은 자신의 저택에 두고 싶지 않았다.

마치 못다 핀 꽃봉오리처럼 가녀리고 청초한 표정을 짓고 있는 크리시의 미화된 초상화가 제 저택 어딘가에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주먹에 힘이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대체 어떤 화가가 그렸는지 모르지만, 크리시를 잘 모르거나 자신만의 시선으로 신봉하는 자가 아니고서야… 아니, 아니지. 그만 생각하자. 곧 저녁 식사 시간인데 기억에서 지우고 싶군.’

판매대에 샘플로 걸려 있던 초상화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것 같았지만, 이비가 저렇게 시무룩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신경 쓰였다.

‘그러고 보니 이비는 처음부터 크리시에게 꽤 호감을 가진 것처럼 보였지.’

카르젠은 이비가 에벨루스 신전이 궁금하다고 했던 날을 떠올렸다. 크리시를 처음 소개해 주었을 때 이비는 잘게 떠는 손을 기도하듯 꼭 잡고, 입술을 말아 넣고 있었다.

내색하지 않으려는 듯이 보였지만, 눈빛은 마치 굉장히 반가운 사람을 만난 듯 기뻐 보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크리시가 카르젠의 몸에서 슬픔을 뽑아내는 동안 이비는 틈만 나면 크리시의 얼굴을 조심스레 흘끔거렸었다.

‘그래도 크리시에게 실눈 뜨거나 시선을 피하진 않았지.’

카르젠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은근한 고양감이 피어나려는데, 크리시가 이비의 양 볼을 잡고 치료해 주던 순간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눈을 감긴 했군. 크리시 얼굴도 눈부셨나? 내가 웃어 줄 때 이비가 어떤 표정이 되더라?’

요 며칠간 자주 봤음에도, 막상 자세히 기억해 보려 하니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크리시에게 양쪽 볼을 잡힌 채 놀란 얼굴로 바라보다 눈을 질끈 감는 표정만 기억났다.

‘확인하는 방법은 하나지.’

굳이 이걸 왜 확인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카르젠은 제 궁금증에 의아함 따위는 느끼지 못했다. 지금은 그저 크리시를 향한 이비의 반응이 달랐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카르젠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비가 앉아 있는 소파로 다가갔다.

이비는 낮은 테이블 위에 있는 <나를 찾아와 줘> 책과 <에벨루스 신과 함께하는 삶 – 프리스트 크리시 자서전>책 표지를 바라보다 반사적으로 제 옆에 앉은 카르젠을 바라봤다.

“이비. 잠시만 날 봐 줘.”

“?”

잠시 봐 달라는 말에, 끄덕인 이비가 카르젠을 향해 몸을 조금 돌려 앉았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냐는 듯이 갸웃하는 모습은 일말의 경계심도 담고 있지 않았다.

카르젠은 순수하게 저를 신뢰하는 눈망울을 잠시간 마주하다 말했다.

“지금부터 10초만 시선을 피하지 말아 줘.”

“?”

10초라는 말에 이비는 의아해하면서도 일단 끄덕였다.

카르젠은 이비의 시선이 완벽하게 제 얼굴에 고정된 순간,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

이비의 눈이 움찔했지만, 아직 실눈이 된 건 아니었다.

주의 깊게 반응을 살핀 카르젠이 이번엔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우….”

눈을 잘게 뜬 이비가 입술을 슬쩍 말아 넣었지만, 용케도 아직 시선을 피하진 않았다. 하지만 눈두덩은 파르르 떨렸고, 실눈 뜬 채 슬쩍 고개를 돌리려는 듯이 보였다.

“이비. 조금만 더 버텨 봐.”

“읏….”

카르젠은 고개가 거의 절반쯤 돌아간 이비에게 보다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니까, 보통 사교계 모임 등 체스터의 옆에서 대외적으로나 보여 줄 법한 그런 미소를 말이다.

“!!!”

카르젠이 피하지 말라고 했기에 어떻게든 버티던 이비가 결국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지금 이비의 찡그린 표정이 크리시를 향했던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제대로 확인한 카르젠은 나름 만족감을 느꼈다.

반면 난데없이 갑자기 웃는 낯 공격을 당한 이비는 당황해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질끈 감고 있던 눈을 조금 뜬 이비가 슬쩍 카르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저를 보고 있었다.

‘뭐, 뭔데? 카르젠 뭔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이비는 제 웃는 얼굴이 가진 파급력을 다 아는 카르젠이 이러는 이유를 몰라 실눈을 유지한 채 그의 손을 잡아 끌었다.

의도를 눈치 챈 카르젠이 자연스레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내밀어 주자, 이비는 카르젠의 얼굴을 피해 고개 숙인 채 큰 손바닥에 글씨를 썼다.

-갑자기 왜 웃어요?-

그리 웃긴 질문도 아니었을 텐데 머리 위에서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비가 고개 들지 않고 대답을 기다리자, 잠시간 웃던 카르젠이 여전히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일종의 특훈이라고 생각해.”

‘특훈?’

여전히 숙인 채 고개를 살짝 갸웃거린 이비가 웬 특훈이냐며 다시 손바닥에 글씨를 썼고, 질문을 이해한 카르젠이 바로 대답했다.

“보좌관으로 행사에 동행하게 되면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내가 웃는 얼굴을 많이 보게 될 텐데, 그때마다 시선을 피하거나 찡그릴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이것도 일종의 특훈이라고 하자.”

“!”

급조된 변명이라는 것을 알 리가 없는 이비의 귀가 쫑긋해졌다.

‘아아~ 맞네! 혹시나 귀족들이 모이거나 공적인 자리에서 체스터를 만나거나 했을 때 보좌관으로서 실수하면 곤란해지겠지. 그것도 모르고 난….’

아주 잠시나마, 혹시나 그가 자신을 놀리려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던 이비는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들었다.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카르젠을 마주한 이비는 여전한 눈부심에 실눈으로 끄덕이며 입술로 말했다.

[다시 해요. 참아 볼게요.]

입술을 읽어 낸 카르젠은 조금 놀란 듯이 이비를 바라보다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괜찮겠어?”

끄덕끄덕

‘이번엔 최대한 참아 보겠어.’

힘차게 끄덕인 이비가 비장한 얼굴로 카르젠을 바라봤다. 물론 고작 실눈을 유지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특훈이라는 생각에 의욕이 활활 타올랐다.

[다시 웃어 주세요.]

옥안이라 불러도 부족하지 않을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한 이비의 눈두덩이 파르르 떨렸다.

‘이번엔 고개 돌리지 말고 최대한 버텨 봐야지.’

저를 내려다보는 카르젠의 눈빛에 장난기가 서려 있었지만, 진지한 이비는 눈치채지 못하고 눈에 힘을 빡 줬다.

비장한 얼굴의 양 볼을 꽉 잡아 고정한 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르젠은 그만 진심으로 웃어 버렸고, 그 순간….

번쩍!

‘허억!’

이비는 어떻게든 카르젠의 얼굴을 피하지 않으려 했지만, 좀 전보다 훨씬 눈부신 빛 때문에 코끝이 찡함을 느꼈다.

어떻게든 견디려고 꾹 다물었던 입술이 어느샌가 벌어져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익숙한 감각이 갑자기 훅! 치고 올라왔다.

“흐에….”

‘아, 안 돼. 잠깐, 카르젠, 내 얼굴 좀…!’

눈부신 빛에 코가 찡하게 울린 이비는, 제 손을 올려 입을 가릴 새도 없이….

“흐엣취!!!”

“!”

‘…아….’

“…….”

“…….”

‘…아… 아아….’

카르젠의 얼굴을 촉촉하게 만들어 버렸다.

***

별들이 펼쳐진 깊은 밤.

이비의 방에 딸린 욕실에서 찹찹- 차차찹- 작은 소리가 울렸다.

부끄러움을 희석하기 위해 나름 전투적으로 세수를 마치고, 크림까지 바른 이비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다 울컥해 입술을 삐죽였다.

‘하… 난 여러모로 아직 멀었어. 이런 당연한 일 하나도 제대로 못 해서야….’

서재에서 이뤄진 특훈 결과는 아주 처참했다.

김현서였을 적에는 그런 적이 없었는데, 이곳에선 이비의 체질 탓인지 눈부신 빛을 보면 코가 간질거린 적이 더러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설마 눈부시다고 재채기가 나올까 싶었는데….’

나왔다.

그것도 정말 시원하게 나왔다.

토끼 귀와 꼬리털에서 펑 하며 털이 날릴 정도로.

‘하아… 죽고 싶, 아니아니. 잊고 싶다. 후우~.’

이후 침착하게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던 카르젠에게 너무 과한 빛을 보면 재채기가 나오는 체질도 있다는 설명을 들었지만, 부끄러움은 도통 사그라들지 않았다.

“끄응… 흐으윽… 끅….”

수치심에 끙끙대며 욕실을 빠져나온 이비는 깔끔하게 정리된 침대맡에 털푸덕 앉아 그대로 쓰러지듯 누웠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또 카르젠이 진심으로 웃음을 터뜨렸던 순간이 떠올랐다.

버둥버둥 버둥버둥

발작적으로 허공에 발차기를 몇 번 날린 이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입술을 삐죽였다.

‘아니, 그땐 평소보다 훨씬 더 눈부셨다고… 흔히 소설에서 말하는 시야가 점멸한다는 게 이런 거였나? 상황은 다르지만, 어쨌든 그 사람들도 황홀해서 시야가 점멸했을 거 아냐.’

물론 소설에서 저런 표현이 나올 때와는 꽤 동떨어진 상황이었지만, 이비는 카르젠이 진심으로 웃었을 때 시야가 점멸한다는 것이 뭔지 제대로 난생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눈이 멀어 버리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가히 폭발적인 빛이었다.

‘하아~ 진정하자. 이미 벌어진 일이야. 되돌릴 수 없어.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괜찮다고 자기 최면을 걸던 이비는, 수치심에 조금 몸부림쳤다고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어느 정도 진정한 후에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그래. 카르젠 얼굴이 대단하긴 하지만, 눈부시다고 매번 찌푸릴 수는 없어. 내일 특훈은 더 열심히 해야겠다. 오늘은 일단 자러 가자.’

침대에서 일어난 이비는, 가장 좋아하는 거대한 베개를 집어 들고 카르젠의 방으로 향했다.

카르젠의 방에 도착해 막 노크를 하려던 이비는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문을 두드리지 못했다.

대화 내용이 들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카르젠의 목소리가 심각한 것 같았다. 그리고 카르젠과 대화를 나누던 여성의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상대편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것을 보니, 통신용 수정으로 대화하는 것 같다고 판단한 이비가 문에서 조금 떨어졌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심각해 보이네.’

그때 카르젠의 목소리가 조금씩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이비는 그가 방문으로 다가온 줄 알았지만, 곧 자신이 청각에 집중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지만 어쩐지 내키지 않네. 크리시에게 물어보는 건 어때?”

대화 내용이 어느 정도 선명하게 들린 순간, 제 청력에 놀란 이비가 토끼 귀와 꼬리를 감췄다. 그러자 카르젠의 목소리가 더는 내용을 알 수 없는 울림으로 변했다.

‘깜짝이야… 이렇게까지 잘 들린 건 처음이네. 묘족은 대단하구나.’

이비는 묘족의 신체적 특성에 감탄하면서도 의도치 않게 카르젠의 대화를 엿들을 뻔했다는 사실이 미안해 문에서 더 떨어졌다.

그대로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며 카르젠이 보였다. 은은한 하늘색 빛이 맴도는 수정을 손에 쥔 그가 이비에게 들어오라며 손짓하며 말했다.

“그럼 마이어 편으로 보내 줘. 너무 크지 않고 얌전한 아이로.”

이비는 카르젠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그를 지나쳤다. 가져온 베개를 침대에 내려놓고 꾹꾹 눌러 솜을 고르게 펴고 있을 때, 수정구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최대한 좋은 녀석으로 구해서 보낼게.

“고마워.”

카르젠이 고맙다고 말하자마자 소리가 단절됐다. 상대가 누군지 몰라도 그냥 끊어 버린 모양이었고, 카르젠은 익숙하다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수정을 협탁 위에 올려 두었다.

“미안해 이비. 급한 일이어서 기다리게 해 버렸네.”

카르젠의 사과에 이비는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침대에 올라 누웠다.

“늦었으니 오늘은 바로 자자.”

고개를 끄덕여 보인 이비는 무의식중에 수정 램프를 끄는 카르젠을 지켜봤다. 그의 긴 손가락이 수정 표면을 살짝 건드리자 빛이 소멸하며 순식간에 방이 어두워졌다.

생활 마법으로 가공된 수정은 누구라도 표면을 건드리면 켜고 끌 수 있었는데, 이비는 이세계의 터치 인식이 신기해 제 방의 수정을 몇 번이고 껐다 켰다 반복했었다.

‘근데 오늘은 유독 어둡네? 날이 흐린가?’

평소라면 창밖에서 쏟아지는 별빛 덕분에 금세 어둠에 익숙해졌을 텐데, 오늘은 구름이 많은지 별이 보이지 않았다.

카르젠을 향해 옆으로 누운 이비는 그의 윤곽만 겨우 구분할 수 있었지만, 하프엘프인 그가 자신을 보는 데 무리 없음을 알기에 입술로 물었다.

[날이 흐린가 봐요.]

입술로 말해 놓고 혹시나 그가 다른 곳을 보고 있거나, 눈 감고 있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바로 대답이 들렸다.

“평소보다 구름이 많아서 그래. 올해는 겨울이 더 빨리 올 것 같아.”

카르젠의 말에 이비는 작게 끄덕이면서도 그의 예상이 틀리길 바랐다. 몸이 약한 이들에게 겨울은 고통스러운 계절이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비의 몸은 김현서였을 적에 비교하면 매우 만족스러웠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건강하진 않은 것 같았고 추위도 많이 타는 것 같았다.

[루아인의 겨울은 길다고 했죠?]

“응. 여름과 가을이 짧고 겨울이 꽤 긴 편이야.”

[눈도 많이 내려요?]

“많이 내리는 편이야. 연말 마지막 일주일 동안은 광장에서 눈사람 만들기 대회도 해.”

눈사람이라는 말에 이비는 어린 시절, 형과 동생과 셋이 눈사람을 만들던 날을 떠올렸다.

어떤 눈사람이었는지, 장소가 어디였는지 전혀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기억이었지만, 당시의 즐거움은 분명 가슴 속에 남아 있었다.

지금은 눈사람에 대한 선명한 추억이 없다는 것을 인지한 이비가 입술로 말했다.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면, 저도 만들어 보고 싶어요. 눈사람.]

예전의 이비라면, 김현서라면 절대 미래를 그리는 말을 먼저 꺼내지 않았을 텐데, 지금은 어쩐지 그래도 될 것 같았다. 사람 일은 어찌 될지 모르는 거지만, 그래도 지금 저가 이 말을 카르젠에게 한다고 해서 지키지 못할 약속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 눈이 내리면 같이 만들어 보자.”

이비는 여전히 카르젠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목소리에 잔잔한 미소가 스며든 것을 느끼곤 저 역시 배시시 미소 지으며 작게 끄덕였다.

눈덩이를 굴리며 눈사람을 만드는 카르젠의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어쩐지 카르젠이라면 뭐든 다 능숙하게 만들 것 같다는 믿음이 있었다.

‘겨울이 싫다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올 거면 빨리 왔으면 좋겠다. 눈사람 만들게.’

이비는 이 저택의 마당에서 카르젠과 저택 사람들과 함께 눈사람을 만들며 즐겁게 웃는, 멀지 않은 미래를 학수고대하며 눈을 감았다.

***

‘자기 전에 눈사람 이야기를 해서 그런가?’

눈밭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 이비는, 여기가 꿈속이라는 것을 바로 눈치챘다.

일단 맨발로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이 시리지 않았고, 공원 숲 너머로 빌딩들이 늘어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낯익은 공원을 둘러보던 이비의 시야에 세 아이와 한 부부가 들어왔다.

‘또 이 꿈이구나.’

이비는 장소만 달랐지, 결국 내용은 똑같은 꿈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가족에게 다가가 보니, 똑같은 옷을 입은 쌍둥이가 고개 숙인 채 눈을 뭉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부부와 조금 큰 아이는 쌍둥이를 내려다보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모두 즐거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비는 이게 꿈이라는 것을 계속 상기했지만, 동시에 제게서 등을 돌린 채 스마트폰으로 쌍둥이들을 촬영하는 소년과 대화하고 싶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현우 형….”

꿈이니 당연히 목소리도 나왔다. 오랜만에 듣는 자신의, 김현서의 목소리였다.

저를 돌아보지 않는 소년을 향해 손을 뻗은 이비는 마르고 버석한 제 손을 보곤 흠칫했다. 주삿바늘과 멍 자국이 수두룩한 손은 소년에게 닿지 못한 채 허공에 멈췄다.

이건 꿈이라는 것을 재차 상기한 이비가 손을 거두었다.

꿈속의 환영에게 사과해 봤자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이미 김현서였을 적 수백 번 경험했기에 그대로 몸을 돌렸다.

‘깨어나고 싶어….’

이비는 김현서의 악몽인 이 꿈의 결말을 알고 있었다. 나타나는 장소는 달라도 늘 같은 패턴으로 시작되며 같은 결말로 끝나는 악몽이었다.

꿈을 인지한 이후, 형에게 사과하고 싶어서 형을 부르거나 붙잡으면 늘 그는 사라졌다.

그냥 사라지는 것도 아닌, 저가 보는 앞에서 돌처럼 굳어 부서지거나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형을 그대로 놓쳐 버리는 결말은 김현서가 가장 무서워하는 장면이었고, 이비인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나 좀 깨워 줘….’

깨고 싶다고 중얼거리고 있을 때 다리 사이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다가온 이가 어깨를 톡톡 쳤다. 이비는 평소와 다른 패턴에 고개를 들었다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얼굴에 눈, 코, 입이 없는 마네킹 같은 가족들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려움에 얼굴을 가리고 싶었지만 몸이 바짝 굳어 버렸다.

그들이 허리를 숙이며 아무것도 없는 얼굴을 불쑥 들이민 순간 이비는 비명을 질렀다. 도망치고 싶었는데 몸이 말을 안 들었다.

얼굴 없는 사람들이 더 가까이 숙이자, 이비의 몸에 감각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꿈이 깨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버지의 모습을 한 얼굴 없는 남자가 제게 손을 뻗은 찰나, 이비는 그의 얼굴을 있는 힘껏 후려쳤다.

철썩! 소리 날 정도로 세게 때리는 데 성공한 이비는 뿌듯함을 느꼈다. 꿈에서 누군가를 때린 것은 처음이었다.

“큽!”

남자의 신음도 진짜 같았다. 늘 때리려고 팔을 휘둘러도 엉뚱한 곳에 헛스윙을 하거나 다리가 꼬여 넘어지곤 했는데, 오늘은 제대로 때려 준 게 느껴졌다. 손바닥에 닿는 감촉이 매우 찰졌다. 한 대 더 때리고 싶을 정도로.

‘해냈어! 내가 해냈어! 내가… 어…?’

이비는 얼얼한 제 손바닥을 바라봤다. 아팠다. 많이 아팠다. 손에서 불이라도 난 것처럼 아팠다.

뭔가 잘못됐음을 느끼고 도리질하던 이비는 제 볼을 보듬어 주는 축축한 손길에 흠칫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가 돌아오며 카르젠이 보였다.

[카르젠…?]

‘님’을 빼먹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지만, 개의치 않은 카르젠이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괜찮아. 이비. 꿈이야. 괜찮아. 진정해. 다 꿈이야.”

“…….”

그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이비는 아직 꿈에 잠겨 있는 의식이 강제로 끄집어내진 기분을 느꼈다. 정신이 또렷해지니 숨 쉬기가 힘들다는 것을 인지했는데, 그 이유가 울어서 코가 꽉 막혔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흑… 으흑….”

아직 잠이 덜 깼지만 악몽에서 깨게 해 줘서 고맙다고 표현하려던 이비는, 무언가 발견하곤 눈을 가늘게 떴다.

흐릿한 눈을 찌푸리며 초점을 맞춰 보니, 잠옷 앞섶이 풀어져 훤히 드러난 카르젠의 가슴에 손바닥 자국이 보였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도 윤곽이 또렷이 보일 정도로 진한 손바닥 자국이.

“…….”

훌쩍훌쩍 멍하니 손자국 난 가슴을 바라보던 이비는, 지금도 꿈이 분명하다고 믿으며 카르젠의 앞섶을 여며 주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눈을 감고 흐느꼈다.

이비는 아직 꿈속에 있었다.

***

…-노래를 들으며 끄덕였다.

지그하르트는 호기심에 방문했던 동대륙에서 유사의 친부 구미호 수장을 만난 일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했다. 그리고 그의 곁을 지키고 서 있던 동대륙의 하늘을 다스린다는 <천룡>이라는 존재도.

저보다 훨씬 젊은 동대륙 용의 기세가 어찌나 사나운지, 지금 생각해도 꽤 황당하고 즐거운 기억이었다.

다가오지 말라는 듯이 힘을 개방한 채 노려보던 젊은 동방의 용과, 저보다 훨씬 위에 있는 존재의 어깨를 두드리며 진정시키던 아름다운 구미호 수장을 떠올린 지그하르트가 말을 이었다.

-천금산의 구미호를 보고 납득했지. 동대륙에서 여우라는 존재가 사람을 홀린다는 오명을 쓴 이유를 말이야.

그 말에 유사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유사는 고개를 바짝 뒤로 꺾어 들며 저를 품에 안고 보듬어 주는 일라나드를 향해 외쳤다.

-이라나드! 유사는 사람 안 홀려! 그러니까 이라나드 오래 살아야 해! 내일 주그면 앙 대. 알찌?

일라나드는 아무리 인간이라도 그렇게까지 빨리 죽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오늘도 아기 여우의 배를 도닥여 주었고, 유사는 만족스러운 듯 의기양양한 얼굴이 되어 모두를 둘러보며 끄덕였다.

드래곤과 아기 여우의 이야기를 듣던 일행들은 유사가 갑자기 왜 의기양양해졌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귀여우니 됐다는 의미로 같이 끄덕여 주었다.

숲의 마법사 6권 333페이지 中

***

‘설마 했는데, 꿈이 아니었어… 아아! 아아, 진짜아!’

이비는 평소와 달리 꽤 흐트러진 모습으로 잠든 카르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의 가슴을. 더 정확히는 그의 가슴에 남은 작은 손자국을 보는 중이었다.

이비는 거의 벗겨진 것과 다름없는 카르젠의 앞섶을 여며 주려 손을 뻗었다가, 그가 갑자기 뒤척이는 바람에 식겁하며 거두었다.

이비를 향해 옆으로 누워 있던 카르젠이 똑바로 누우며 한쪽 팔을 머리 위로 올리자 앞섶이 더 벌어졌다.

덕분에 너른 가슴 한편에 남아 있는 단풍잎 같은 자국뿐만 아니라 훌륭한 복근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킨 이비는 그의 가슴에서 복근으로 시선을 내리다 흠칫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무의식중이었다고 해도 다른 이의 몸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보다니, 해선 안 될 일이었다.

카르젠에게 미안함을 느낀 이비는 조심스레 이불을 끌어 올려 그의 쇄골 위까지 살포시 덮어 주었다.

다행히 카르젠은 일어나지 않았고, 아주 천천히 침대에서 나온 이비는 그가 깨지 않게 배려하며 침실을 나섰다.

***

찰방- 찰방-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손을 주무르던 이비는 슬쩍 물 밖으로 손을 들어 봤다. 여전히 간헐적으로 잘게 떨리긴 했지만 어제처럼 바들바들 떨리진 않아 안도했다.

‘확실히 어제보단 덜 떨리네. 역시 혈액 순환이 문제인가?’

이비는 평소 제 몸이 떨리거나 기운이 쭉 빠져 휘청거리는 원인은 알 수 없었지만, 역시 혈액 순환도 무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고 보니 옛날에도 물에서 재활했었지.’

이비는 김현서였을 적에 근육이 너무 빠져 진행했던 재활 훈련을 떠올렸다.

몸이 너무 약해진 상태라 일반적인 운동을 할 수 없었기에 병원 내에 치료용 풀장에서 따뜻한 물속을 천천히 걷는 훈련이었다.

‘어쩌면 이 몸에 근육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어. 운동을 좀 해 볼까?’

당시 재활 훈련을 떠올려 본 이비는 제 몸을 쭉 훑어봤다. 마르고 가녀린, 근육이 없는 몸이었다. 살도 말랑말랑하고 평소 경험으로 볼 때 힘도 약한 편인 것 같았다.

‘아니, 힘은 센가…? 얼마나 힘껏 후려쳐야 손자국이 그렇게 선명하게 남지?’

카르젠의 가슴에 남긴 자국이 떠오른 이비는 물에 고개를 처박았다 들었다.

잠결에 벌어진 일이라 자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도 악몽을 꾸는 자신을 카르젠이 깨워 주고 달래 주었던 것 같았다.

이렇게 다른 기억은 다 흐릿했는데, 카르젠의 가슴에 손자국을 보고도 모른 척 앞섶을 여며 주고 능청스럽게 다시 잠든 기억만큼은 선명했다.

이비는 간밤에 저지른 양심 없는 행동에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안면에 재채기하고 가슴팍에 싸대기까지….’

아무리 잠결이라도 그렇지. 사람을 때려 놓고 모른 척하고 자다니, 저가 생각해도 너무 파렴치했다.

‘실수라고 해도 세게 때렸으니 자국이 남은 거겠지. 그리고 솔직히 손도 아팠고… 하아~ 이따 아침 먹기 전에 사과해야지. 어차피 카르젠은 괜찮다며 웃어넘기겠지만….’

평소 카르젠은 이비가 어떤 실수를 저질러도 웃어넘겼었다. 물론 몸을 때리는 것처럼 큰 실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모든 면에서 관대한 편이었다.

***

‘그래서 크게 걱정하지 않았는데….’

“가슴이 아파서 일어날 수가 없어. 어쩌지?”

“…….”

침대 옆에 서 있던 이비는 카르젠을 내려다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목욕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자마자 다시 찾아왔더니 한다는 말이 일어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이유는 방금 말했다시피 가슴이 아파서였다. 이비는 제 얼굴에 열이 확 오른 것을 느꼈지만 애써 입술을 움직였다.

[카르젠 님. 새벽에 때려서 죄송합니다. 잠결에 그랬어요.]

입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르젠은 손바닥을 위로 향해 내밀었다. 이비는 아무 의심 없이 침대 맡에 앉아 그의 너른 손바닥에 입술로 했던 사과를 글로 써 주었다.

제 손바닥을 간질이는 이비의 손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르젠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잠결에 그럴 수 있지. 나도 종종 실수하곤 해. 격한 잠꼬대로 수정 램프를 부순 게 몇 번인지 몰라.”

“…….”

말로는 괜찮다고 하면서 여전히 일어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게다가 이젠 아예 어깨까지 드러낸 상태로 이비에게 훌륭한 몸을 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이비는 그의 가슴에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는 손자국을 보며 입술을 말아 넣고 손가락을 쓱쓱 움직였다.

-아침 식사 하셔야죠.

“말했다시피, 지금은 일어날 힘이 없어. 가슴이 너무 아프거든. 욱신거리는 것 같은데.”

“…….”

카르젠이 종종 은근한 농담을 한 적은 있지만,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기에 당황스러웠던 이비는 잠시간 고민하다 다시 그의 손바닥에 글씨를 썼다.

-그럼 아침 식사는 방으로 가져올까요?-

나름 적절한 대안이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뿌듯해한 것도 잠시, 카르젠이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방에서 먹고 싶진 않아. 하지만 식당까지 갈 힘은 없어.”

“…….”

“이비가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힘이 날 것 같은데.”

“!?”

이비는 카르젠의 연기에 기가 찼지만, 불쌍한 표정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카르젠이 이러는 건 뭔가 이유가 있겠지.’

자연스레 납득이 됐다.

[부탁이요?]

부탁이라는 말에 이비가 입술로 물었다.

“응. 이비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부탁이면 당연히 들어드릴게요.]

“어려운 건 아니야. 모레 주디가 휴일인데, 주디가 차를 맛있게 잘 우리거든.”

끄덕끄덕

“주디에게 차 우리는 걸 배우고, 앞으로 주디가 없는 날엔 이비가 내 차를 담당해 줬으면 좋겠어. 할 수 있겠어?”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이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한마디로 차 우리는 걸 배우라는 거네? 그렇다는 건… 이제 슬슬 내게 일을 맡기려고?! 내가 부담 갖지 않게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해 준 건가? 하긴, 카르젠이 이유 없이 장난칠 사람은 아니지! 역시 배려가 과하네!’

카르젠은 이비가 감동한 얼굴로 끄덕인 순간 잠시 멈칫했지만, 곧바로 미소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럼, 내 부탁 들어주는 거야?”

끄덕끄덕

“좋아. 그럼 오늘 오후에는 주디에게 차 우리는 걸 배우도록 해. 내가 말해 둘게.”

카르젠의 지시에 이비는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해사하게 웃으며 힘차게 끄덕였다.

‘드디어! 드디어 나도 여기서 무언가 배우게 됐어!’

***

이비는 아침 식사 내내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의 행동을 하나하나 눈여겨봤다. 그중에 특히 주디가 카르젠의 식사 시중드는 모습에 집중했다.

식사 시간엔 차를 우리진 않았지만, 이비는 그녀가 식기를 치우는 모습이나 새로운 접시를 가져다주는 모습 등 하나하나 면밀하게 살피고 있었다.

‘내 직장 선배나 마찬가지니까 많이 보고 배워야지. 카르젠이 굳이 주디를 언급한 걸 보면 아마 주디에게 배울 점이 많다는 거겠지.’

평소처럼 음식에 집중하다가도 주디가 오면 눈여겨보는 모습에 식당 내에 있던 사용인들은 전부 이비가 왜 저렇게 주디를 주시하는지 신경 쓰기 시작했다.

주디 역시 이비가 식사 내내 자신을 선망의 대상이라도 되는 듯이 바라보는 저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뭐, 뭐지? 아까부터 왜 나를 계속 보는 거지?’

새로운 음식을 가져다준 주디가 뒤로 물러나 율리의 옆에 서서 대기하는 모습까지 눈여겨본 이비가 작게 끄덕였다.

영문 모를 시선을 계속 받던 주디는 카르젠과 이비의 식사가 끝난 후에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

“차 우리는 방법이요?”

당황한 주디에게 카르젠이 평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응. 이비에게 알려 줬으면 해서.”

“차는 저보다 율리가….”

“물론 율리가 우려 준 차도 훌륭해. 하지만 내 입맛엔 주디가 우려 주는 차가 조금 더 맞거든. 아, 율리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 줘. 둘 다 정말 맛있는 차를 우려 주니까. 다만 주디가 없는 날엔 율리가 바쁠 수 있으니, 그날은 이비에게 부탁하려고.”

그 말에 주디와 율리의 표정이 미묘해짐과 동시에 이비의 표정은 점점 더 의욕이 넘쳤다. 이비는 식사가 끝나자마자 급히 식당을 나가더니 수첩과 펜도 가져온 상태였다.

“으음… 딱히 제가 노하우가 있는 건 아니지만요… 앗, 그럼 제가 쉬는 날에 이비 님께서 차 담당 예정인 건가요?”

“응. 그렇게 하려고.”

카르젠이 대답하자 이비 역시 힘차게 끄덕였다. 저 반응에 주디가 말을 잇지 못하자, 옆에서 자꾸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매만진 율리가 말했다.

“그럼 내일까지는 알려 드려야겠네요. 주디가 모레부터 이틀간 휴일이거든요. 프리스트 크리시 님의 기도회 티켓 패키지 구매 때문에….”

툭-

카르젠은 이비가 놓친 펜이 떨어지기 전에 잽싸게 잡아 냈다. 그리고는 이비가 들고 있는 수첩에 펜을 꽂아 주며 말했다.

“그럼, 준비가 되면 알려 줘.”

“네.”

율리와 주디는 조심스럽게 이비의 눈치를 살폈다. 의욕 충만했던 눈빛은 온데간데없었고, 지금은 마치 모든 것을 다 잃은 사람처럼 보였다.

차마 이비의 처연한 얼굴을 더 지켜볼 자신이 없었던 주디는 준비가 되면 서재로 가겠다며 자리를 피했고, 율리 역시 뒷정리를 하겠다며 주디를 따라갔다.

“…….”

두 시종이 급히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카르젠은 이비를 향해 팔을 내밀며 말했다.

“오늘 업무 시작 전에, 잠시 산책이라도 할까?”

“…….”

이비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일단 끄덕이며 카르젠이 내민 팔을 살포시 잡았다.

꾹-

카르젠은 제 팔을 평소보다 강하게 잡아 쥐는 악력에 소리 없이 웃으며 에스코트했다.

***

베일리즈 영지 번화가의 <물망초 여관> 1층 식당.

야외석에 앉아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아침 식사를 마친 바론은 아까부터 자신을 흘긋거리는 두 남성을 의식하고 있었다.

둘 다 로브를 눌러쓰고 있는 상태라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적어도 한 명은 무장을 한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카르젠 도련님이 보낼 타입은 아니군.’

그들에게 관심 없는 척 차를 한 모금 마신 바론은 제 테이블을 훑었다. 아쉽게도 조금 전 차를 내온 직원이 포크와 나이프를 전부 가져가 버렸기에 무기 삼을 만한 게 없었다.

테이블에서 쓸 만한 게 없단 것을 파악한 순간, 두 남자가 동시에 일어나 바론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바론은 제 셔츠 소매 단추를 풀어 접으며 맞은편 식당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는 건장한 두 남자를 확인했다. 궁성 기사단 제복을 입은 기사들이었다.

난민 이동 계획 때문에 먼저 내려와 있는 터라 현재 근무 중인 상태였으니, 문제가 생긴다면 공권력을 사용할 수 있는 기사들이었다.

근접전은 바론의 특기였지만, 도련님의 심부름이 우선이었기에 베일리즈 영지에서 볼일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지내다 떠날 생각이었다.

그래서 두 남자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도 바론은 먼저 반응하지 않았다. 여상스레 행동하며 예리하게 그들의 기운을 살폈다.

딱히 살기는 느껴지지 않아 바론은 제게 드리워진 그림자의 주인을 향해 고개를 들기 직전, 중후한 목소리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살기가 없다는 건 파악했을 테니, 이제 반갑게 인사해 주지 않겠나?”

바론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단번에 알아채곤 반갑게 일어나 남자를 마주했다. 중년 남자가 로브 후드를 벗자 크림색 머리카락과 맑은 녹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세비어 남작님.”

“허허, 또 그런다. 또. 그 고집 나이 먹어도 어디 안 가는구먼. 공적인 자리도 아닌데, 페일리라고 부르래도. 아니면 예전처럼 돌팔이라고 불러도 좋아.”

바론은 돌팔이라는 말에 웃음을 터뜨리며 오랜만에 만난 세비어 페일리 남작과 악수를 나눴다. 그리고 자연스레 옆에 있는 청년을 향해 환하게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세비어 콜린 공자님. 평안하셨습니까.”

청년 역시 후드를 벗자, 페일리 남작처럼 크림색 머리에 녹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바론은 제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는 옛 동료의 장성한 막내아들을 대견하게 바라보며 주름 깊은 미소를 머금었다.

***

“심부름이라고? 하핫~ 바론, 자네는 겉만 집사지. 아직도 정보 관리청 소속 같아.”

“오랜만에 심부름 나오니 조금 그런 기분도 듭니다.”

“매번 몸에 구멍을 만들어 오던 자네를 치료해 주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세월이 이리 흘렀군. 이젠 그때처럼 무모하게 다니지 말게. 자네도 재생 능력이 많이 떨어졌어. 나이는 못 속여.”

페일리 남작의 농담을 기분 좋게 웃어넘긴 바론이 찻잔을 내려 두며 말했다.

“다 옛날 일이지요. 지금은 그저 도련님의 심부름으로 내려와 있을 뿐입니다. 그럼 이제 수도로 올라가실 계획입니까?”

“오늘 저녁에 출발할 예정이네. 출발 전에 저녁 식사라도 함께하고 싶은데, 아무래도 힘들겠어. 빨리 올라가야 3차 난민 이동에 맞출 수 있겠지.”

“3차 이동에 자원하셨습니까?”

바론도 처음 듣는다는 듯이 놀란 기색에 페일리 남작이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아직 못했네. 그러니 빨리 가서 자원해야지. 3차 이동은 노약자 위주 이동이라 의사가 많을수록 좋을 걸세. 신전 쪽에서도 지원을 좀 해 주면 좋겠는데, 여전히 꿈쩍도 안 한다지?”

“제가 알기로 3차 이동은 에벨루스 프리스트들이 그나마 자원을 좀 했다고 들었습니다. 덕분에 한시름 돌렸다고 합니다. 그러니 잠시라도 좀 쉬시는 게 어떨까요? 봄부터 전혀 쉬지 않으셨잖습니까. 콜린 공자님께서도 남작님을 좀 말려 주시지요. 이제 우린 오늘같이 흐린 날이면 삭신이 쑤실 나이란 말입니다.”

농담 아닌 진심이었지만, 콜린은 점잖게 웃어넘겼다. 그러면서도 역시 제 아버지가 걱정되는지 중간중간 페일리 남작을 살피는 모습에 바론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난민이 생겼고, 루아인 왕국 역시 전쟁의 후유증을 피하지 못했다.

눈앞의 작위 욕심 없는 일명 ‘말단 귀족’이자 ‘무료 진료소 의사’라고 불리는 세비어 페일리 남작은, 그 전쟁으로 장녀 일라나드를 잃었다.

하지만 그는 자식을 잃은 슬픔에 굴복하지 않고, 곧바로 저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먼저 남부 지방의 전염병을 막기 위해 최전방에 뛰어들고, 수도 아브델만큼 의료 시설이 많지 않은 작은 영지를 돌며 무료 봉사 활동을 하는 등 어려운 시기에 일선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원래도 의료 봉사 활동이나 서민 예방 접종 지원 등 다양한 방법으로 사회적 약자와 저소득 계층을 돌보던 이였으나, 전쟁으로 인한 난민 대책에는 누구 보다 의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얼굴에 피로가 겹겹이 쌓인 것이 보였다. 그럼에도 그는 여유 있게 말했다.

“지금은 쉴 때가 아닐세. 우리 자리를 물려줄 때가 가까워지고 있지 않은가. 내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자리를 물려줘야 하니 노인네가 더 바빠질 수밖에 없지.”

“바이스 가의 집사로서 언급하긴 조심스러우나, 세비어 가문의 고결함을 넘어설 수 있는 가문은 세상에 없을 겁니다.”

바론의 진심을 느낀 페일리 남작이 푸근하게 미소 지으며 화답하려 할 때, 식당가 옆 큰길이 소란스러워졌다.

시선을 돌려 보니 루아인 왕성 소속 엠블럼을 장착한 짐마차 행렬이 큰길로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짐마차 행렬을 살핀 바론은 예레스 영지로 가는 난민 구호 물품이라는 것을 알아봤다.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됐군요.”

구호 물품을 실은 마차가 먼저 지나가고, 뒤이어 개조한 큰 화물 마차에 탑승한 난민들이 보였다. 모두 새로운 보금자리로 간다는 기대와 두려움이 섞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될지 몰라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고, 어린아이들 역시 제 보호자의 품에 안겨 저들을 향한 시선에 눈치를 보고 있었다.

수많은 난민 행렬이 이어졌다. 마차가 끝도 없이 이어졌고, 그 긴 행렬을 지켜보던 페일리 남작이 혼잣말하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들은 일라나드가 내게 남긴 유산이지. 내 아이가 목숨 바쳐 지킨 유산을 보호하는 것이 아비의 몫이고. 그러니 나는 아직 쉴 수 없네.”

바론은 한결같이 청렴한 그를 향해 진심 어린 존경을 담아 끄덕였다.

그래서 바론은 제 아버지를 향한 콜린의 복잡해 보이는 눈빛과, 비통함을 감추기 위해 아프도록 틀어쥔 주먹을 눈치채지 못했다.

***

같은 시각.

제 3왕자 체스터의 집무실은 평소와는 조금 다른 풍경을 보이고 있었다.

우선, 아침 식사 후 자고 있어야 할 아기 여우가 인간 아이의 모습으로 깨어 있었고, 기사단 훈련을 감독해야 할 리엔은 테이블 위에 펼쳐 둔 최종 후보들의 프로필을 노려보고 있었다.

리엔과 함께 후보에 집중해야 할 체스터는 잠시 시선을 돌려 아기 여우가 종이에 쓰고 있는 글자를 읽었다.

유사 치스터 쿠리시 카르젠 리엔 미비

삐뚤삐뚤하게 쓰여진 글자를 바라보던 체스터가 쿡쿡 웃으며 푸른색 잉크 펜으로 옆에 올바른 철자로 고쳐 써 주었다.

“앗, 이거 틀려떠?”

“다 잘했는데, 아쉽게 조금 틀렸네. 이건 이대로 읽으면 치스터가 되는 글자야.”

“유사는 치스터도 좋아~.”

체스터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글자를 똑바로 고쳐 쓰는 유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어 크리시와 이비의 이름도 고쳐 준 후 다시 프로필에 집중했다.

리엔이 노려보는 프로필은 현재 막 훈련이 끝난, 아직 주인 없는 어린 말의 프로필이었다.

“어떤 아이가 좋을까. 그 사람 체격이 작다고 했으니 슈나이더는 어때?”

“슈나이더라… 순한 편이지? 마이어를 걷어찬 걸 빼면.”

“마이어가 차일 짓을 했을 거야.”

“그래도 전적이 있으니… 아니면 밀키는 어때?”

“밀키라~ 나쁘진 않은데, 밀키는 너무 기분파라 좀 까다로워.”

그 말에 귀를 쫑긋거린 유사가 종이에 ‘밀키’라고 적었다. 정확하게 적은 것을 확인한 체스터는 칭찬의 의미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다른 프로필을 가리켰다.

“반은? 가장 순하고 똑똑하지?”

“응. 역시 반이 좋겠지? 나도 반이 큰 것만 아니면 가장 추천하거든. 커도 순하니까 괜찮을지도 모르겠네.”

최종 후보가 좁혀지고 있을 때. 유사가 귀를 쫑긋거리며 말했다.

“이찌, 리엔! 이비한테 말 주러 가?”

“응. 내일이나 모레 갈 거야.”

“헛! 그럼 유사도 같이 갈래! 이비한테 그림 그려 져야지~!”

새 종이를 꺼낸 유사가 열정적으로 추상적인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잠시간 그 그림을 바라보던 리엔과 체스터는 반으로 최종 확정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승마 교육은 저택 내부에서만 하겠지?”

“그렇지 않을까? 아무래도 위험할 수 있으니 당분간 외출도 삼갈 예정이라고 했어.”

“하긴, 카르의 저택은 내 방 다음으로 아브델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지.”

카르젠의 저택은 블랙드래곤의 온갖 보호 마법과 함정 마법이 설치된 곳이었다. 한마디로 거의 마법 요새였으며, 지그하르트보다 나이 많은 드래곤이 아닌 이상 외부에서 침입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유치장 사건을 전해 들은 카르젠은 혹시나 이비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까 봐 각별히 신경 쓰고 있었다. 원래라면 이비가 타게 될 말도 함께 방문해 직접 고르려 했었지만, 마이어 편에 보내 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즉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는 외출 자체를 하지 않겠다고 밝힌 상태였기에, 난민 이주에 참여하게 된 마이어 대신 리엔이 방문하기로 했다.

카르젠의 칩거 소식 외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리엔이 생각났다는 듯이 덧붙였다.

“아, 체스. 곧 세비어 남작이 수도로 온다며?”

세비어 남작이라는 말에 유사의 귀가 쫑긋거렸다.

체스터는 유사가 그린 정체불명의 그림을 흘긋거리며 대답했다.

“응. 이러다간 남작이 쓰러질 것 같아서 올라오라고 했어. 세비어 남작은 좀 쉬어야 해.”

“어휴~ 진짜 아저씨 좀 쉬셔야 하는데, 쉬라고 해서 쉴 사람은 아니니… 아! 아니면 카르젠 저택에 그 사람 임시 주치의로 붙여 주는 건 어때? 안전한 곳에서 며칠 좀 쉬시라고. 종종 검진이 필요할 거 아냐.”

나름 괜찮은 제안이었지만, 체스터는 선뜻 찬성하지 못했다. 그 반응에 리엔이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체스터가 유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유사. 심부름 하나만 해 줄래?”

“우웅?”

유사가 고개 들고 바라보니 체스터가 허리를 숙이며 유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식당에 가서 쿠키 좀 받아 와. 오늘은 특별히 유사가 먹고 싶은 만큼 먹자.”

“핫! 져아! 유사가 쿠키 가져올게! 쪼꼼만 기다려!”

소파에서 폴짝 뛰어내린 유사가 우다다 문으로 달려갔다. 유사의 발소리를 들은 건지 문밖에 대기 중이던 시종장이 알아서 문을 열어 주었고, 체스터는 그에게 고갯짓으로 유사를 데려가게 했다.

까르르 아기 여우의 웃음소리가 멀어진 것을 확인한 체스터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좋은 생각이지만, 잘 모르겠어.”

미묘한 대답에 리엔은 질문 대신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체스터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나는 그 사람을… 이비를 처음 본 날, 찰나였지만 일라나드가 떠올랐어. 물론 전혀 닮지는 않았지만, 첫 느낌이 많이 비슷했지. 아,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이야. 크리시나 카르는 딱히 그런 이야기가 없었으니 나만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어.”

자신 없다는 듯이 덧붙인 이야기였지만, 리엔은 내심 공감했다.

크리시야 워낙 보편적인 사람들과 다른 타입이었고, 카르젠 역시 평소 사고방식은 엘프에 더 가까웠다. 단순히 외모만으로 누군가를 떠올린다 하더라도, 다른 이라는 것을 인지하면 분리해서 냉정하게 판단할 타입이었다.

‘그러니 두 녀석이 별다른 말이 없었던 건 그럴 수 있어. 하지만….’

사람을 가리는 유사가 처음 만난 이비를 저렇게 보고 싶어 하고, 그에게 선물로 줄 그림을 그리기까지 하는 것을 보면 체스터의 반응도 납득이 됐다.

리엔은 아마도 그 이비라는 사람이 생각보다 더, 저들이 떠나보낸 친구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굳이 만나게 해서 좋을 건 없겠네.”

“일단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가 카르의 보좌관으로 있다 보면 언젠가 공적인 자리에서 마주칠 일이야 있겠지만, 그전에 만나게 하고 싶진 않아.”

체스터의 나지막한 말에, 조금 전까지 소문의 주인공을 만날 생각에 들떠 있던 리엔의 기분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리엔의 가라앉은 시야에 유사가 그리다 만 그림이 들어왔다. 삐뚤삐뚤한 동그라미에 작대기 네 개가 붙어 있고, 머리엔 작은 뿔 두 개가 붙어 있었다.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엔이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유사가 문제네….”

“…….”

동대륙의 <요괴>라는 존재는 서대륙에 존재하는 <페어리>나 <엘프>와 비슷한 반 불멸의 존재였다.

그들은 죽음이라는 개념을 인간과는 조금 다르게 받아들였는데, 유사는 너무 어린 요괴였기에 죽음이 뭔지 잘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덕분에 유사는 자신의 첫 인간 친구의 죽음을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또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기다리다 보면, 그저 긴 세월을 기다리며 언젠가 꼬리가 갈라지고 구미호가 되면, 그때에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었다.

그래서 가끔은 언젠가 일라나드가 돌아오면 줄 거라며 디저트로 나온 쿠키나 젤리를 남겨 두기도 했다.

“지그하르트는 유사도 언젠가 깨달을 거라고 했지만, 슬슬 제대로 알려 줘야 할 것 같아.”

“…….”

“일라나드는 죽었고, 이미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

“죽음으로 떠나보낸 이는 어떤 방법으로도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걸.”

***

“물은 여기 구멍 바로 아래까지 담는 게 좋아요. 그래야 기울였을 때 쏟아지지 않거든요.”

끄덕끄덕

“그리고 잎 차는 보통 한 스푼 정도 넣으면 돼요. 꽃차는 크게 두 스푼 정도가 좋구요.”

주디의 설명에 이비는 끄덕이며 열심히 수첩에 메모했다.

<물은 주전자 물구멍 밑까지>

<잎 차 – 한 스푼 / 꽃차 – 크게 두 스푼>

“우리는 시간은 잎 차는 작은 모래시계로, 꽃차는 큰 모래시계로 확인하면 돼요.”

<잎 – 작은 모래시계 / 꽃 – 큰 거>

점점 짧아지는 이비의 메모를 본 주디가 쿡쿡 웃으며 찻잎이 담긴 병을 보여 주었다.

“카르젠 도련님은 잎 차에는 꿀이나 설탕을 넣지 않으시는데, 가끔 이 꽃차를 드실 때만 꿀을 넣으세요. 여기 이 두 가지인데요, 제가 따로 뚜껑에 표시해 뒀어요.”

이비는 주디가 뚜껑에 새겨 둔 글씨를 확인했다. 분홍색 말린 꽃이 들어 있는 병뚜껑엔 ‘꿀 한 스푼’이라고 쓰여 있었고, 보라색 말린 꽃이 들어 있는 병뚜껑엔 ‘꿀 두 스푼’이라고 쓰여 있었다.

‘카르젠은 꿀만 넣는구나? 설탕이랑 꿀이랑 차이가 있나 보네. 난 둘 다 좋지만!’

김현서였을 적, 마지막 몇 년을 미각 없이 살아야 했던 이비는 이 세계의 달고 짜고 느끼하고 상큼한 온갖 자극적인 맛이 전부 좋았다.

그중에서도 달콤한 음식을 좋아했는데, 카르젠의 저택 주방장의 실력이 보통이 아닌지 어떤 디저트를 먹어도 다 맛있었다.

이비가 꿀을 보고 침을 꼴깍 삼키는 모습을 지켜보던 주디가 슬쩍 몸을 기울이며 소곤소곤 말했다.

“차에 대해서는 더 알려 드릴 건 없는데, 주방 털러 갈까요?”

“!”

‘주방을 털다니!’

이 세계에서 들었던 말 중 가장 황홀한 제안이었다. 어떻게 터는 건진 몰라도 일단 끄덕인 이비는 수첩을 식탁에 올려 두고 주디와 함께 주방으로 향했다.

식당에 바로 붙어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니 주방이 나왔다. 들어가 보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요리하는 공간 외에 넓은 테이블이 있었고 그 위에 온갖 음식 재료들과 반죽이 보였다.

아마도 점심 식사 준비를 위해 따로 꺼내 놓은 재료들 같다고 생각하던 이비는, 사각사각 까득까득 소리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가 입을 쩍 벌렸다.

소리가 나는 곳은 벽면 나무 선반이었는데, 그중 한 칸에 다람쥐들이 쪼르륵 앉아 열심히 견과류를 까고 있었다.

‘헉? 무슨… 여기가 C의 초콜릿 공장이야!? 쟤네 설마 여기서 노동하는 거야!?’

동화 같은 장면에 놀란 이비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때, 주디가 혀를 차며 말했다.

“어휴. 저 귀여운 도둑들 오늘도 떼로 왔네. 무시하세요. 이비 님. 저 다람쥐들 매일 저렇게 와서 견과류를 축내고 가거든요. 원래는 한 마리만 왔었는데, 주방장 휘테커 아저씨가 동물을 좋아해서 그냥 봐주다 보니 이젠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저렇게 출근해요. 그래도 멀리서 보면 귀엽죠?”

‘아… 노동이 아니었구나.’

주디의 말이 사실인지 다람쥐들은 껍질은 마음대로 바닥에 버리고 알맹이는 열심히 볼에 욱여넣고 있었다.

어림잡아도 열 마리는 넘어 보였는데, 노동하는 것도 아니고 멋대로 먹는 것을 허락해 준다니, 다행이라 느낀 이비가 웃으며 끄덕였다.

기민하게 견과류를 까는 다람쥐를 구경하던 이비의 뒤에서 무언가 육중하게 울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려 보니 주디가 조금 떨어진 벽면의 철문을 열고 있었는데, 열린 문틈 사이로 냉기가 쏟아져 나왔다.

“이비 님~ 여기예요.”

이비는 주디에게 다가가 반쯤 열려 냉기가 쏟아지는 공간으로 들어섰다. 굳이 주디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용도를 알 수 있는 장소였다.

‘세상에, 엄청 춥잖아! 마법인가? 와, 진짜 크다. 여기서만 몇 년을 살아도 다 못 먹겠는데?’

안으로 들어서니 입김도 났다. 이 세계에 이런 거대한 냉동실이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 했던 이비는 감동받은 얼굴로 내부를 둘러봤다.

내부는 모든 벽면이 선반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각 선반엔 온갖 식재료와 빵과 고기와 야채. 그리고 미리 만들어 둔 디저트가 있었다.

주디는 언제 챙겨 온 건지 접시에 디저트 몇 개를 담으며 이비에게도 고르라고 했다.

‘마음대로 먹어도 되는 건가?’

이비의 걱정을 눈치챘는지 주디가 먼저 말했다.

“저쪽 벽면에 있는 음식만 빼고 뭐든 다 마음대로 먹을 수 있어요.”

“!”

다 먹을 수 있다면, 저쪽 벽면에 있는 건 왜 안 될까? 순수한 궁금증에 고개 돌린 이비는 단번에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주디가 말한 선반엔 날고기나 반죽 등이 정리된 공간이었다.

주디는 알아서 온갖 디저트를 접시에 담으며 비장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비 님. 사실 차를 우리는 것은 쉬워요. 하지만.”

끄덕

“차에 어울리는 디저트를 센스 있게 고르는 것은 어렵답니다.”

“!”

‘그렇구나! 늘 주는 대로 먹어서 아무 생각 없었는데!’

이비는 차에 어울리는 디저트는 생각도 하지 못한 부분이었기에 놀라 휘둥그레졌다. 주디는 엄격한 얼굴로 이비에게 접시를 내밀며 말했다.

“이건 저랑 율리의 다년간의 경험으로 익힌 노하우인데요. 각 차에 어울리는 디저트를 가장 빠르게 고르는 방법은.”

끄덕

“모든 차를 우려 놓고, 디저트를 종류별로 최대한 많이 먹어 보는 방법밖에 없어요.”

“!!!”

“자, 그럼 이 디저트가 녹을 때까지 잎 차 우리기부터 해 볼까요?”

이비는 양손에 접시를 들고 밝게 웃으며 힘차게 끄덕이곤 다짐했다.

이 공부를 세상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할 거라고 말이다.

***

…-의 대답을 들은 숲의 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왕세자를 살려 주는 대가로 그대는 내게 무엇을 줄 거지?

대가를 묻는 숲의 마법사의 시선이 리엔의 어깨 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리엔은 마법사의 시선이 닿은 곳에 누가 있는지 알기에 도리질하며 소리쳤다.

-마법사! 나와 거래해! 당신은 날 찾아온 거잖아!

-그대의 바람에 응한 것은 맞지만, 아쉽게도 그대에게는 받고 싶은 것이 없군. 저 아이에겐 있지만.

숲의 마법사의 서늘한 눈이 리엔의 어깨 너머 카르젠에게 닿았다. 카르젠은 자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사람을 위해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섰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드리겠습니다.

-착한 아이구나. 그렇다면 네 눈물을 다오.

-눈물, 그 자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다. 본디 눈물은 가슴속의 슬픔을 몸 밖으로 흘려보내기 위해 필요한 것. 이 거래를 맺게 되면, 그대는 긴 삶 속에서 겹겹이 쌓이는 슬픔을 지우지 못한 채 평생 안고 살아갈 것이다. 그래도 나와 거래하겠는가?

-좋습니다. 마법사님과 거래하겠습니다.

-카르! 제정신이야!?

-유감스럽게도 제정신이야.

-넌 반 불멸이야, 카르! 이건 너무 큰 대가라고! 불공평해! 마법사! 내 눈물을 줄게! 눈물 말고 다른 것도 얼마든지 줄 테니….

리엔은 저를 향해 돌아선 카르젠과 눈을 마주한 순간,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제 친우의 저 표정이 뜻하는 바를 아주 잘 알았다.

리엔의 눈동자가 떨렸다. 형편없이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고 주먹을 틀어쥐는 모습을 지켜보던 카르젠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리엔. 체스터였어도 나와 똑같이 했을 거야. 너도 그렇고. 그러니 괜찮아.

대화를 잘라 낸 카르젠이 다시 숲의 마법사를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위대한 숲의 마법사님. 체스터를 살려 주신다면, 제 눈물을 드리겠습니다.

카르젠이 동의하자 숲의 마법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거래 성립이었다.

숲의 마법사 7권 142~143페이지 中

***

“그러니까.”

점심시간이 가까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비가 돌아오지 않자 직접 찾으러 온 카르젠은, 식당의 긴 식탁에 종류별로 놓인 디저트와 차들을 쭉 훑어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 이비는.”

제 이름이 들리자 이비의 토끼 귀가 먼저 쫑긋 반응했다. 하지만 귀만 반응했을 뿐, 이비의 시선은 접시를 향해 있었다. 접시엔 주방장 휘테커가 주디와 이비를 위해 막 구워 준 과일 파이가 열을 식히는 중이었다.

“차와 어울리는 디저트를 공부 중이라는 거지?”

입에 있는 견과류 쿠키를 삼켜 낸 주디가 자랑스럽게 이비의 수첩을 카르젠에게 보여 주었다.

“네! 보세요! 이비님이 직접 드셔 보시고 정리한 거예요. 엄청 열심히 공부하셨어요.”

카르젠은 주디가 건네준 이비의 수첩으로 시선을 옮겼다. 잎 차와 꽃차에 어울리는 디저트를 자기 나름대로 정리해 둔 목록이 보였다.

<잎차>      <꽃차>

마카롱      에그 타르트

레몬 타르트    초코 푸딩

과일 잼 쿠키   견과 파이

크림 크레프    레몬 타르트

과일 파이     마카롱

초코 푸딩     소금 쿠키

미니 도너츠    과일 잼 쿠키

에그 타르트    크림 크레프

초코 컵케이크   버터 쿠키

버터 쿠키     초코 컵케이크

소금 쿠키     과일 파이

“…순서만 다르고 다 똑같은 메뉴잖아?”

카르젠의 말에 접시로 시선을 두고 있던 이비의 귀가 흠칫 떨렸지만, 입은 여전히 오물오물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저 작은 입에 얼마나 넣은 건지 볼이 다람쥐처럼 빵빵했고, 왼손에는 컵케이크를, 오른손에는 에그 타르트를 꼭 쥐고 있었다.

카르젠은 더 말하는 대신 이비를 지그시 바라봤다. 시선을 느낀 건지 동공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게 보였다.

저 정도로 눈치 볼 거면 한 번쯤 자기한테 시선을 줄 법도 한데, 여전히 접시만 보고 있는 모습에 의아함을 느낀 카르젠이 맞은편 의자를 빼고 앉으며 물었다.

“이비. 곧 점심 먹어야 하는데, 괜찮겠어?”

그제야 조심스레 시선을 든 이비가 카르젠을 살폈다. 카르젠은 이비가 왜 눈치를 보는지 모르겠지만, 안심하라는 의미로 자상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눈이 슬쩍 가늘어진 이비가 머뭇거리며 끄덕였다. 뭔가 말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입에 넣은 게 가득해서 입술로 말할 수 없다 보니 열심히 씹기만 했다. 이에 카르젠이 다정하게 말했다.

“괜찮으니 천천히 먹어.”

끄덕끄덕

카르젠은 저를 향해 끄덕이자마자 접시로 시선을 내리는 이비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꼈다.

‘지금 일부러 피한 건가?’

잠시간 이비를 살피던 카르젠은 곧 이비가 눈을 맞추지 않으려는 것을 눈치챘다.

‘역시… 아까 산책하면서 기분 풀렸다고 생각했는데, 많이 속상했나 보네.’

카르젠은 아침 식사 후 이비와의 산책을 떠올렸다.

주디의 휴일에 본인은 저택에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이비는 꽤 혼란해 보였다. 카르젠은 이비가 혼란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첫 수면 수당을 받으면 주디를 따라 기도회 패키지를 구매하러 갈 계획이 분명했으니까.

이전에 주디와 율리와 이비와 외출했던 날. 돌아오는 마차에서 주디가 다음에 기회가 되면 같이 가자고 했을 때 이비가 격하게 끄덕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첫 수면 수당을 받고 나름대로 이비만의 계획이 있었을 텐데, 자신의 부탁으로 그 계획이 틀어졌으니 속상해하는 게 당연하다 생각한 카르젠은 이비를 적당히 달래 주었다.

하지만 외출을 못 하게끔 유도한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카르젠이 이비의 외출을 일부러 미연에 방지한 것은 어젯밤 리엔과의 대화 때문이었다.

통신용 수정으로 연락이 왔을 때 리엔은 유치장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고, 당분간 저택에서 나오지 않는 게 좋겠다고 조언해 주었다. 카르젠은 이비에게 저 내용을 그대로 알려 주고 싶진 않았다.

너를 골목으로 끌고 갔던 남자가 지금 수사 중인 건이나 다른 무언가에 연관되어 살해당한 것 같다고, 당시 같이 있었던 이비가 무언가 봤다고 생각해 노리는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물론 그렇게 말하면 당연히 이비를 설득할 필요 없이 저택에 안전하게 둘 수 있겠지만, 카르젠은 이비가 겁먹고 움츠러드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비 본인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카르젠은 매일 악몽을 꾸며 우는 이비를 새벽마다 달래 주고 있었다. 오늘은 그래도 어느 정도 기억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평소 이비는 꿈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카르젠은 불안감이나 압박감, 또는 스트레스 등 온갖 이유로 매일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는 이비에게 어떤 일이든 심적으로 부담을 주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온실로 이비를 데려가 예쁜 꽃을 보여 주기도 하고. 당분간 함께 저택에서 공부하고, 다음에 같이 외출하자며 잘 달래 준 터였다.

내심 시무룩했던 이비였지만, 나중에 같이 외출하자는 말에 귀가 쫑긋해지고 다시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안심했던 게 잘못일까.

‘눈도 안 마주치려 하네. 나한테 많이 섭섭했나 보군. 이비의 기분을 풀어 줄 방법이 뭐가 있을까….’

카르젠의 고민을 눈치채지 못한 이비는 눈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과일 파이를 뚫어져라 보며 초조해하고 있었다.

‘밥 먹기 전에 간식 너무 많이 먹었다고 못 먹게 하면 어떡하지? 휘테커 아저씨가 저건 식자마자 살짝 따듯한 상태에서 먹는 게 가장 맛있다고 했는데…!’

***

각자 약간의 오해와 전혀 다른 고민을 품은 채 점심시간이 되었을 무렵. 이비는 식사에 최선을 다했고, 식후 디저트에도 최선을 다했다.

카르젠은 이비가 평소보다 더 열정적으로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며 평소 주디와 율리가 자주 언급했던 ‘디저트 배와 밥 배는 따로’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몰랐지만, 어쩌면 종족의 차이일 수도 있겠거니 싶었다.

점심 식사 후 카르젠은 부집사 할리스와 몇몇 연륜 있는 시종들을 불러 서재로 향했고, 이비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저녁 시간 전까진 다른 공부할 필요 없이 쉬라는 말에 이비는 침대에 베개와 쿠션을 정리해 편히 기대앉아 협탁에 두었던 얇은 책을 집었다.

<나를 찾아와 줘 – 머니마니 달러스>

머니마니 달러스의 다른 낯 뜨거운 내용의 두꺼운 책과 달리, 이 책은 소책자처럼 작고 얇았다. 양장본이 아닌 일반 종이로 제작된 표지를 넘기자 가장 첫 장엔 머니마니 달러스 필명과 제목이 쓰여 있었다.

한 장 더 넘기자 목차가 나왔다. 이비는 평소 목차와 소제목을 미리 읽는 편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목차를 먼저 쭉 보기 시작했다.

1. 알파3에 대하여.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다면.

3.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줘.

책이 얇은 편이라 그런지 딱 세 가지 소제목만 보였다. 이비는 책장을 다시 넘기고 본문 첫 페이지부터 정독하기 시작했다.

<이 책을 구매한 당신에게. 우선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이 책은 인쇄비를 제외한 수익금이 모두 루아인 왕국의 도움이 필요한 어린아이들을 위해 기부된다는 것을 밝히고 싶다. 당신의 구매 덕분에 한 아이의 하루 식사가, 또는 그 이상의 일상이 풍족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이 이해 못 할 헛소리로 가득하다고 하더라도 좋은 곳에 적선했다고 여기길 바란다.>

‘응? 시작부터 불안한데?’

영 불안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긴 이비는, 이 책이 머니마니 달러스 작가가 자신의 전생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이 책을 보고 있을 당신이 가장 궁금해할 이야기의 주인공의 이름은, 바로 머나먼 푸른 별에서 살았던 알파3이라는 남자다. 알파3은 루아인 왕국과 비유하자면 정보 관리청의 비밀 임무를 다루는 그림자들과 같은 일을 했다.(물론 정보 관리청은 그림자라는 그룹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하겠지만 말이다.) 알파3은 알파4, 찰리3, 브라보5와 동기였으며 자신이 속한 국가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훈련을 마친 애국자였다. 알파3은 국가의 심부름을 마치고 복귀하고 나서 동료들과 마시는 맥주를 가장 좋아했다. 그리고 알파3은 아무도 없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싫어했다. 독립한 후 아무도 없는 집에 돌아간 알파3은 더는 알파3이 아니게 되었다. 이웃들은 알파3을 향해 이렇게 인사했다.

‘여어~ 준. 출장 잘 다녀왔어?’

자신의 직업을 숨긴 알파3은 먼 지역을 오가는 상인 행세를 하며 살고 있었다. 만약 당신이 알파3이나 준이라는 이가 누군지 모른다면, 다른 이를 기대하고 나를 찾으려 했다면 분명 실망할 것이다. 당신에겐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겠지만, 그건 내 알 바가 아니다. 당신은 어쨌든 모종의 기대를 품고 돈을 주고 이 책을 샀을 것이고, 당신이 기대한 결말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읽을 것이다. 또는 이게 대체 무슨 헛소리인지 전혀 못 알아듣는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후자에 속하는 이라면, 당신의 소중한 시간을 아껴 주기 위해 미리 조언해 주겠다. 이 책은 도색 서적이 아니다. 당신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을 담은 것도 아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이 책을 벽난로 불쏘시개로 쓰거나 냄비 받침대로 쓰는 것을 추천하겠다. 반대로 전자에 속해 지금쯤 실망하고 있을 당신을 위해 말해 보자면. 조금만 더 인내를 갖고 읽어 보아라. 그 후에 냄비 받침으로 써도 충분하다.>

“…….”

꼼꼼하게 본문을 읽어 내려가던 이비는 책장을 넘길수록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게 대체 무슨 내용이야?’

<…-였고, 건조한 사막에 위치한 나름 큰 도시였다. 그리고 죽음의 불꽃이 하늘을 수놓는 날이기도 했다. 나는 그날도 어김없이 동료들과 함께 내가 속한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걸고 기밀 임무를 진행했다.

하지만 무언가 잘못됐고, 적이 우리를 포위했다. 사방에서 막강한 화력이 나와 내 동료들에게 쏟아졌지만, 우린 버텨 냈다. 언제나 그렇듯 우린 이 위기 또한 헤쳐 나갈 자신이 있었다.

전우와 등을 맞대고 적을 하나둘 제거하는 사이. 죽음을 온몸에 두른 적이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그가 몸에 두른 죽음으로 내 동료들을 갈기갈기 찢어 버릴 것을 알았기에 망설이지 않고 달려들었다. 상관의 명령에 불복하고 자리를 이탈해 내 몸을 방패 삼아 적을 막아 내는 데 성공했다.

가장 친했던 동기 찰리3이 내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던 모습이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하다. 괜찮다고, 이거로 됐다고 말하지 못한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나름 평온하게. 그렇게 나는 내 또 다른 가족이자 친구인 소중한 동료들을 구했으며, 의미 있는 죽음을 맞이했다.>

“…….”

해당 페이지까지 읽은 이비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아닐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비는 혹시나 했다. 어쩌면. 아니라는 것은 알면서도 아주 어쩌면, 머니마니 달러스가 어렸을 때 실종된 제 형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 그 기대는 전부 부질없게 되었다.

‘그래… 인생이 그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지. 게다가 서술된 내용만 보면 무슨 비밀 작전 같은 걸 수행하던 사람이었나 보네. 그런 사람이 10대 여자아이 몸에 들어갔다니… 하아~ 알파3, 당신도 참 고생 많았겠어요….’

이비는 책에서 앞서 말했던 두 가지 유형 중 ‘전자’에 속하는 이였다. 이 내용을 이해하고 누군가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실망했으면서도 이 소책자를 놓을 수 없는 부류였다. 그래서 다음 장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다면. >

애써 실망감을 감춘 이비는 2장의 이야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다는 말이 있다. 당신이 원한 결과는 아니었겠지만, 나 알파3은 당신이 너무 실망하지 않았길 바란다. 조금 더 쉽게 풀어 설명해 보자면, 이 세계에는 의외로 우리와 같은 고향 출신자들이 극소수지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당신이 찾는 이가 아니라고 해서 좌절하거나 실망하거나 우울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 아름다운 별이 노래하는 세계는 우리의 고향 푸른 별보다 넓은 것 같다. 즉, 저 먼 동방대륙과 그 외의 미지의 땅에 우리와 같은 고향 출신자가 몇이나 있는지 아직 파악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알파3은 푸른 별의 동향인 ‘김’을 만난 적이 있다. 그러니 적어도 이 서대륙에서 전자인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신은 생각보다 공평해지려 노력하고 있으니까.>

“…….”

다음 장으로 넘겨야 하는데, 어쩐지 수전증이 심해진 탓에 이비는 잠시 주먹을 그러쥐었다.

그렇게 네다섯 번 정도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한 이비가 책장을 넘겼다.

<-지 않을까?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같은 푸른 별 출신자들과 함께 모여 연말에 큰 조류를 구워 먹으며. 거대한 나무를 알록달록한 구슬로 장식하고. 나무 밑에 둔 선물을 다음 날 교환하는, 우리만의 행사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만약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다면, 힘들고 괴롭고 외롭다면, 그땐 나를 찾아와 줘.>

잠시 책에서 시선을 뗀 이비는 아까부터 요동치는 심장을 손으로 꾹 눌렀다.

‘푸른 별의 동향인 김….’

물론 아닐 수도 있겠지만, 이비는 책에 나온 ‘김’이 성씨 ‘김’을 의미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비는 어쩐지 형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기는 기분이 들었다.

‘한때는 희망을 놓지 못하는 내가 한심했지만… 어쩌면, 이 세계에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거잖아. 왜냐하면….’

김현서의 형 김현우는 세상에서 갑자기 증발해 버렸다. 말 그대로 증발이었다.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cctv가 지천에 널린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한 블록에 cctv가 최소 2~3대 있다는 서울 번화가에서 단 하나의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사라졌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비는 자신이 자는 줄 알고 병실에 앉아 통화하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윤 실장.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요. 그래도 난 포기 못 해요. 바보같이 미련 못 버리는 부모 같겠지만 이것만큼은 윤 실장이 틀렸어요. 난 그 아이가 느껴져요. 우리 현우는 살아 있어요. 그러니 리뉴얼 패키지엔 그 사진으로 실어요.’

수익의 일부를 기부하는 음료 패키지 뒷면엔 제 형인 현우의 사진이 실렸었다.

지금 나이면 이런 얼굴로 변했을 것이라며 전문가가 보정한 사진으로 매년 바꿔 실었고, 현서의 마지막 기억까지도 부모님은 절대 제 형을 포기하지 않았었다.

만약 누군가 이제 첫째를 보내 주어야 한다고 두 사람을 설득하려 하면, 늘 확신에 차 말했었다.

자식 잃은 부모가 포기하지 않고 오랜 세월을 계속 찾아다니는 이유는 단 하나라고. 제 아이가 살아 있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건 절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고. 오직 그 아이의 부모만이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엄마 아빠가 하는 말은 희망이 아니었어. 확신이었어.’

당시 김현서는 제 부모님들이 절대 확신을 쉽게 입에 담지 않는 분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어떤 일도 100%는 없다고. 이미 벌어진 과거의 일이 아닌 이상, 100%라는 것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고 했던 분들이었는데, 형에 대해서만큼은 늘 확신했었다.

그리고 이비는 지금도 제 부모님을 믿고 있었다.

‘만약 형도 나처럼, 머니마니 달러스 이 사람처럼 어쩌다 이 세계에 왔다면…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이비는 저도 모르게 <알파3은 푸른 별의 동향인 ‘김’을 만난 적이 있다.> 문장을 손가락으로 보듬으며 생각했다.

‘다시 만난다면 그땐 형에게 꼭 미안하다고… 내가 잘못했다고 사과하고 싶어.’

이비는 자상했던 형에게 자신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때문인지 속절없이 밀려오는 슬픔에 몸이 축 늘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갑작스러운 기복에 스스로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했지만, 자꾸만 제 마음을 파고드는 거대한 슬픔을 밀어낼 수가 없어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형을 만나지 못하면….’

이비는 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슬그머니 제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것 같은 징그러운 기분을 느꼈다.

‘만약 형이 나를 원망하고 있으면 어떡하지….’

여러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르며 또 마음이 어지러워짐을 느꼈지만,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내가 여기서 이렇게 행복하게 지내도 되는 걸까….’

갑자기 온갖 자책과 서러운 생각이 밀려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평소엔 분명 잘 참았는데, 갑자기 또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와중, 노크 소리에 화들짝 놀라 책을 덮어 두고 눈가를 비벼 닦았다.

옷소매로 얼굴을 거칠게 닦고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어 주자 율리가 보였다. 율리는 이비의 얼굴을 보고 잠시 동요했지만 곧 모른 척해 주며 몇 장의 전단을 보여 주었다.

“이비 님. 조금 이따 저와 부집사님이랑 같이 나가서 이것저것 사 올 예정인데요.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여기 리스트에 적어 주세요.”

이비는 율리가 내민 전단과 리스트를 받아 들고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둘은 방에 작은 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율리는 이비에게 전단을 하나하나 보여 주며 말했다.

“여기 목록은 배달이라 내일쯤 받아 볼 수 있는 것들이고요. 이쪽은 오늘 당장 받아 볼 수 있어요.”

이비는 전단을 쭉 훑어봐도 딱히 필요해 보이는 게 없어 대충 휙휙 넘겼다. 전부 저택 고용인들에게 주는 복지 혜택이라고 해도 카르젠의 돈으로 불필요한 물건을 사고 싶진 않았다.

앞에 잡화 부분을 다 넘긴 이비는 도서 페이지에 신간 베스트셀러 전단에서 멈칫했다.

[베스트셀러 1위 – 행복한 꿈]

이비는 저택 고용인들이 대부분 저 책을 다 체크한 것을 보고 의아해하며 바라봤다.

‘베스트셀러라서 그런가?’

카르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저 책에 표시를 한 상태였고, 이비가 갸웃하는 모습에 율리가 웃으며 말했다.

“요즘 엄청 유행하는 책이에요. 사실 책보단 부록으로 함께 주는 꿈 수정 때문에 그런 것 같지만요.”

꿈 수정이라는 말에 이비가 갸웃하자 율리가 덧붙여 설명했다.

“약한 마법이 걸린 수정인데요. 1~2회밖에 쓰지 못하지만, 그 수정을 지니고 자면 좋은 꿈을 꾸게 해 준대요. 꿈을 꾸지 않는 경우도 있긴 한데, 그럴 경우엔 굉장히 수면의 질이 좋아진대요. 그래서 불면증인 사람들 사이에서 원래 유행했던 건데 수정이 대량으로 개량되면서 나와서 엄청 인기가 많아요. 마침 오늘 대량 입고됐다고 해서 다들 궁금해서 신청해 봤는데, 이비 님도 신청해 보시겠어요?”

‘좋은 꿈을 꾸게 해 준다니, 신기하다. 마침 오늘은 카르젠과 따로 자는 날이니까 써 볼까?’

이비는 좋은 꿈을 꾸게 해 준다는 말에 끄덕이며 신청서에 이름을 적었다.

그 외에 전단도 쭉 둘러봤지만, 딱히 필요해 보이는 물품이 없었기에 이비는 책 하나만 부탁했다.

어쩐지 오늘은 꼭 좋은 꿈을 꾸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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