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19)
  • ### 챕터 4

    카르젠은 체스터가 서재 소파에 크리시처럼 널브러져 누워 있는 모습을 보고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익숙하다는 듯이 저도 편히 앉아 담담하게 그동안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이비를 구한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일들. 그리고 숲에서 찾은 불법 텔레포트 수정 조각과 수면제 등으로 이루어진 편도 패키지. 이비와 보낸 며칠 사이 제 몸에 생긴 변화 등… 짧은 이야기였음에도 체스터는 집중해서 들었다.

    “그래서 당분간 같이 지내 보려고 해. 내 예상이 맞는다면 굳이 신력이 없어도 그럭저럭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을 거야.”

    “뭐, 네 이론대로라면 그렇겠지. 그런데 만약 그가 떠나고 싶어 하면 그땐 어쩌려고?”

    “이비의 뜻에 맡겨야겠지.”

    “흠… 바론 혼자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바론에게 연락은 왔고?”

    “응. 아직 베일리즈 영지에 있고, 며칠 더 머무르겠다는 연락이 왔어. 그쪽으로 메시지를 보내 둔 상태야. 묘족 혼혈인 것을 알게 됐으니, 범위가 더 넓어지겠지. 찾는 데만 해도 꽤 오래 걸릴지도 몰라.”

    “바론이 정보관리청 출신이어도 혼자서는 무리일걸. 그 방면으로는 내가 몇 사람 지원해 줄 수 있어. 믿을 만한 녀석들로. 물론 카르 네가 필요하다면.”

    카르젠은 체스터의 권유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체스터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바론이 조사한 결과 만약 연고가 없고 신원불명이라면, 기억을 찾기 전까진 네가 데리고 있을 수 있겠네.”

    “…….”

    “기억을 찾는다고 해도 뭐든 그가 선택하겠지. 아까 보니 너랑 있는 걸 싫어하는 것 같지도 않고. 아니, 오히려 너와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았는데. 정말 내가 모르는 게 없는 거 맞아?”

    일부러 짓궂게 묻는 체스터에게 카르젠이 헛웃음을 흘렸다.

    “전혀. 이비는 지금 그저 혼란스럽고 두려운 거겠지. 깨어났는데 아무 기억도 없고, 몸도 아픈 상태에서 내가 자길 구해 줬다고 하니 본능적으로 의지하는 것뿐… 마치 알에서 깨어났는데 처음 본 대상에게 각인된 오리나 마찬가지야.”

    그런 이비의 상황을 이용하고 있다는 자책감이 녹아 있는 대답에, 체스터는 신전에서 이비를 처음 본 순간을 떠올렸다.

    카르젠을 보자마자 반가워하다가도 별 반응 없는 모습에 거의 울상이던 모습을. 그리고 돌아오는 내내 카르젠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살풋 웃어 주던 모습도.

    “흠… 내가 보기엔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다만… 하여간에. 중요한 건 직책이네.”

    “굳이 직책까지….”

    “아니지. 그래도 종일 곁에 데리고 다닐 거면 그럴싸한 명분도 필요해. 보는 눈이 많은데, 그냥 데리고 다녔다간 난리 날걸? 특히 네 아버지.”

    “…….”

    “생각해 둔 것부터 말해 봐. 새로운 직책 하나 만들어서 얼렁뚱땅 통과시키는 건 일도 아니니. 게다가 다른 것도 아니고, 네 몸에 도움이 된다는데, 그건 내가 도와야지.”

    체스터는 카르젠이 자기를 살리기 위해 숲의 마법사와 거래를 한 후로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시 카르젠은 아니라고 했지만, 자신이 큰 부상으로 정신을 잃고 사경을 헤맬 때 리엔과 카르젠과 또 다른 존재를 분명 보았다.

    그 존재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분명 모든 것을 초월한,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닌 것 같은 이였다.

    따뜻함이 몸을 감싸 안도감을 느끼며 혼절했다 깨어났을 때, 체스터는 자신의 몸이 모두 회복됐던 것을 기적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후 카르젠의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을 알게 되었고, 카르젠이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그 모든 것이 자신을 살리기 위한 숲의 마법사와의 거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흠… 뭐가 좋을까… 그럴싸한 직책 없나? 신력은 없는 것 같으니 성직자로 위장은 힘들 것 같고… 아? 아니면 굳이 새 직책을 만들지 않고, 그냥 네가 고용하면 어때? 카르 너 지금 보좌관도 없잖아?”

    “마이어가 있잖아.”

    “엄연히 다르지. 마이어는 기사단 부단장으로서 네 공석을 채우고 있는 거잖아. 네가 보좌관으로 그를 고용하면 앞으로 어딜 대동해도 다들 납득할 거고.”

    “…….”

    보통 내정에 관여하는 귀족들은 보좌관 둘 셋은 기본으로 두곤 했다.

    그에 비해 카르젠은 맡은 일은 많지만, 보좌관은 없었고 궁성의 기밀 서류를 전달해 주는 마이어 정도만이 있었다.

    기밀이 아닌 일반 업무라면 집사 바론을 통해 처리했지만, 지금 바론은 부재였다. 아마 꽤 오랜 기간 돌아오지 못할 것이었다.

    보좌관을 뽑는다고 해서 이를 수상히 여길 사람이 없을 상황이긴 했다.

    “보좌관이라. 나쁘진 않겠군.”

    카르젠은 그렇게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이비에게 보좌관이라는 직업을 권한다면, 게다가 급여까지 아주 두둑하게 준다고 하면 과연 어떤 반응이 나올지 기대됐다.

    ‘이비라면… 지금 자신을 증명하지 못해 불안해하고 있으니, 분명 기뻐하겠지. 빨리 말해 주고 싶군. 체스와 유사는 저녁 늦게 가겠다고 할 테니, 보내고 난 후에 둘이 산책이라도 하며 권해 볼까? 아니, 이비의 몸 상태에 따라 생각해 봐야겠군. 차를 마시며 이야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그것도 아니면 잠들기 전에 이야기하는 것도….’

    카르젠은 자신이 전해 줄 말을 듣고 필시 기뻐할 이비를 떠올리고 있자니 가슴 한편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비가 기뻐하며 저를 향해 환하게 웃어 주는 모습을 그리던 카르젠은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래서 맞은편 소파에 누워 제 표정을 보고 놀라 휘둥그레진 체스터의 시선도 눈치채지 못했다.

    “흠흠….”

    괜한 헛기침 소리에 카르젠이 체스터를 바라봤다. 체스터는 어째 뭔가 불편하다는 듯이 괜히 셔츠 단추 두어 개를 풀었다. 카르젠은 제 친우의 이유 모를 행동에 갸웃하다가도 잠시 잊고 있던 용건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묻고 싶은 게 있어. 아까 마이어에게 들었는데, 내 대신 일 몇 개를 처리해 주고 있다고.”

    “아아… 대부분 자잘한 것들이라 그냥 맡겼어.”

    “사형수 유족 청원은 뭐야?”

    그 말에 체스터가 한숨을 쉬었다. 카르젠은 저 반응을 보아하니 저한테 말만 안 했지 나름 체스터를 속 썩이는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이어가 알아서 잘 처리할 거야. 왜. 신경 쓰여?”

    “이상해서. 유가족과 협의도 없이 바로 화장했다는 게. 그리고 들어 보니 지금도 그렇게 진행하는 것 같던데. 전염병은 이미 끝난 거 아냐?”

    체스터는 카르젠에게서 시선을 돌려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너도 알겠지만 애초에 전염병이 수도까지 올라오지 않았던 건 오델림 영지와 튜르카 영지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교류를 봉쇄했기 때문이었잖아.”

    “응.”

    “당시 튜르카 영지에 세비어 남작이 내려가 있었어.”

    세비어 남작이라는 말에 카르젠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세비어 페일리 남작. 그는 수도에서 가까운 스트라우 영지에서 조용히 지내는 욕심 없는 귀족이자 훌륭한 의사였다.

    그리고 저들과의 험난한 여정에서 숨을 거둔 친구이자 듬직한 동료였던 정령사 일라나드의 아버지였다.

    “그러고 보니 요즘엔 따로 연락드리질 못했네….”

    카르젠은 다른 귀족처럼 제 재산 불리기보다, 의사로서 아픈 이들을 대가 없이 치료해 주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하는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었다.

    이번뿐만 아니라 10년 전 다른 전염병 소식에 가장 먼저 나섰던 귀족도 세비어 남작이었다. 덕분에 아버지를 따라 수도로 올라온 일라나드를 알게 됐었다.

    잠시 세상을 떠난 친우와의 만남을 떠올린 카르젠이 현실로 돌아와 물었다.

    “그럼 이번 여름 전염병 창궐 때 내려간 거야?”

    “응. 세비어 남작은 일라나드 일로 남 돕는 일에만 매진하고 있으니까. 하여간에, 세비어 남작이 올린 보고서를 보면 전염병이 감옥에서 처음 퍼져서 초기 대응이 빨랐어. 당시 보고서를 보면 증상은 발열과 호흡 곤란 호소나 폐렴 증세가 있었다고 해. 환청을 듣는 죄수들도 있었고. 간수장이 제출한 보고서도 확인해 봤는데, 전염성이 높다고 판단해 바로 감옥을 폐쇄하고 간수들을 최대한 멀리 물리고 세비어 남작 혼자서 죄수들을 치료했다고 했어.”

    “…….”

    “그 과정에서 영지민들이 많이 불안해했지만 철저하게 검역한 덕분에 영지민 피해는 거의 없었어. 영지민이 증상이 보인다 싶으면 다른 의사들이 초반부터 격리해서 치료했고. 문제는 튜르카 영지에 증상이 없는 죄수들을 가장 가까운 오델림 영지로 이송하다가 발생했지.”

    “잠복기였던 자가 있었던 거군….”

    “맞아. 뒤늦게 증상자가 나와서 오델림 영지 쪽도 한바탕 난리가 났었어. 영지민들 사이에 폭동이 있었거든. 죄수를 치료할 약으로 영지민을 치료하라며 시위하던 자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약을 훔쳐 갔어. 덕분에 오델림 감옥에 갇혀 있던 죄수들이 많이 사망했고… 영지민 사망은 셋에서 그쳤어. 피해를 최소화하긴 했지만 타격이 없진 않았지.”

    “…….”

    “세비어 남작은 뒤늦게 오델림 영지에 가서 영지 의사들과 어떻게든 방역에 성공했다고 해.”

    “그런 것치고 수도에서는 조용하네. 세비어 남작은 또 남모르게 큰 공을 세웠군. 일라나드가 자랑스러워할 거야.”

    카르젠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생사를 함께한 친우의 아버지인 세비어 남작은 누가 봐도 청렴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이번에 전염병 사태로 보여 준 그의 용기는 칭찬받아 마땅했다. 체스터 역시 “그래. 자랑스러워하고 있겠지.” 맞장구쳐 주며 덧붙였다.

    “참고로 세비어 남작은 이번에도 작위를 거절했어. 다른 귀족들도 그를 보고 반만 배웠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그러게. 후우… 체스. 이제 곧 겨울이 올 거야. 전염병이 없어졌다면 이젠 바로 화장해 버릴 필요는 없지 않을까? 아무리 사형수라고 해도 유족은 죄가 없어. 마지막 장례 정도는 제대로 하게 해 줘야지.”

    카르젠은 체스터가 당연히 제 의견에 긍정할 거라 믿었지만, 그의 표정을 보니 의견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얌전히 대답을 기다리자 일어나 앉은 체스터가 대충 소매를 잡아당겨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말했다.

    “페일리 남작 말로는 당분간은 화장 상태를 유지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해. 기존 치료제가 듣긴 했지만 아직 병에 대해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고, 잠복기가 생각보다 길어서 미증상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게 그의 의학적 소견이야. 그래서 청원서 관련해선 마이어와 자원자들을 함께 보내 유족들을 위로하고 도의적인 차원에서 적절하게 보상해 주는 방안을 마련해 보기로 했어.”

    “…….”

    이제 전염병 증상자가 보이지 않는다면 너무 과한 조치라고 생각했지만, 카르젠은 페일리 남작의 뜻이라는 말에 제 뜻을 굽히기로 했다.

    그는 훌륭한 의사였다. 그가 체스터에게 직접 보고하고 요청한 일이라면 불가피하게 필요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더는 고민할 것이 없어졌다.

    ***

    저택의 다른 이들은 모를 소소한 소동(작은 몸으로 이비를 욕조 밖으로 끌어당기는 데 실패한 유사가 그 자리에 서서 이비가 죽을지도 모른다며 앙앙 울기 시작했던 일)을 겪은 이비는, 저 때문에 잔뜩 토라져 꼬리를 끌어안은 채 방구석을 보고 서 있는 유사를 달래 주고 있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고 표현하고 싶어 유사의 등에 글씨를 써 보았지만, 아직 글을 모르는지 반응이 없었다.

    가끔 귀를 파닥거리긴 했지만, 여전히 벽 모퉁이만 보고 서서 해바라기 씨를 가득 머금은 햄스터처럼 볼을 부풀리고 있었다.

    ‘으아아~ 이 모습도 귀여워!!! 하, 유사 정말, 정말 너무 귀여워…!!!’

    이비는 이 세계에 휴대폰이나 카메라가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특히 목욕 도중 이비랑 특별히 친구 해 줄 테니 말 편하게 하라며 짐짓 왕족 말투를 흉내 내던 모습이나, 지금처럼 제 큼지막한 꼬리를 앞으로 당겨 끌어안고 벽을 보고 서 있는 뒷모습은 정말 너무 사랑스러웠다.

    이 장면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은 기분이 들다가도, 토라진 아기 여우의 기분을 풀어 주는 게 우선이라 판단한 이비가 슬쩍 벽에 기대앉았다.

    유사는 제 옆에 앉은 이비를 흘긋 돌아보더니 다시 꼬리에 고개를 파묻었다. 이비가 유사 쪽으로 살짝 고개를 기울이자, 작고 뾰족한 여우 귀가 쫑긋거렸다.

    유사가 제게 관심을 숨기지 않는 것을 파악한 이비는 이번엔 슬쩍 엉덩이를 끌어 가까이 다가가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저도 모르게 살랑거린 꼬리 탓에 움찔한 유사가 짧은 팔에 힘주었다. 저런 작은 반응 하나하나가 전부 사랑스러워 쿡쿡 웃으니, 흘긋. 작은 머리통이 이비를 향했다.

    ***

    철컥- 철커덩-

    일라나드의 정령이 도와준 덕에 구속술이 깃든 족쇄에서 상처 없이 풀려난 아기 여우 요괴는 서대륙 사람들이 신기하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바라봤다.

    2.5등신밖에 안 되는 작은 반인반요의 몸. 쫑긋한 여우 귀와 제 몸보다 훨씬 크고 풍성한 꼬리를 살랑거리던 아기 여우 요괴가 어설픈 서대륙 공용어로 물었다.

    -너는 잉간?

    일라나드는 아기 여우 앞에 쭈그리고 앉아 대답했다.

    -응. 난 인간이고, 일라나드라고 해. 족쇄를 풀어 준 이 아이는 바람의 정령이야. 움직일 수 있겠니?

    아기 여우가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자, 일라나드의 뒤를 지키고 있던 리엔은 여우의 상태를 살피며 경계했다.

    동대륙에서 잡혀 온 <요괴>라는 존재는 겉보기엔 작고 어려 보이지만 속은 어떨지 모르는 미지의 존재였다.

    마족들이 굳이 동대륙에서부터 생포해 끌고 왔을 정도라면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마족에겐 득이 되고 저들에게 실이 될, 반갑지 않을 것이 분명한 목적이.

    리엔의 걱정을 모르는 아기 여우는 순수한 눈망울로 족쇄를 풀어 준 일라나드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눈 천금산 구미호 수장의 아홉 번째 아이 유사다. 이라나드, 착한 인간. 고맙다.

    아기 여우가 배시시 웃었다.

    숲의 마법사 5권 91페이지 中

    ***

    이비는 여전히 볼 빵빵한 유사와 눈 마주친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입술을 움직였다.

    [미안해. 놀라게 하려던 게 아닌데. 많이 놀랐어?]

    유사는 이비의 입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슬쩍 눈동자를 굴려 다시 눈을 맞췄다. 그러다 작은 앵두 같은 입술을 오물오물 움직이며 대답했다.

    “쪼끔. 아주 쪼끔 놀라떠. 이비, 아파?”

    [아니. 안 아파.]

    “…징짜?”

    끄덕끄덕

    “그치만….”

    말끝을 흐린 유사의 눈동자가 무릎 위에 올려 둔 이비의 손으로 향했다.

    이비는 여전히 잘게 떠는 제 손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아기 여우를 안심시키려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어 주었다.

    평소보다 훨씬 안 떨리는 축에 속했는데, 알 리가 없는 유사가 걱정할까 봐 최대한 밝게 웃어 보였다.

    “우웅?”

    유사의 눈동자가 다시 이비의 입술로 향했다. 작은 입술이 천천히 벙긋거렸다.

    [손이 떨리긴 하지만, 괜찮아. 아프지 않아.]

    아프지 않다는 말에 안심한 유사가 슬쩍 몸을 돌리더니 이비의 옆에 털푸덕 앉았다. 그리곤 잠시간 이비를 바라보다 꼬리를 놓고 이비처럼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아주 작은 단풍잎 같은 손을 제 무릎 위에 착 올려 둔 유사는 이비를 올려다봤다.

    이비는 작은 아기 여우가 자기와 똑같은 자세로 앉아 올려다보는 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씰룩거렸다. 당장 끌어안고 바닥을 뒹굴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어마어마한 인내력으로 겨우 참아 내고 있었다.

    유사는 이비가 자기를 내려다보는 저 표정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유사가 귀여워 죽겠다는 눈빛.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고,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사랑스러움을 느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저 얼굴은 유사가 너무너무 좋아했던 어떤 인간 친구를 닮아 있었다. 옅은 크림색 머리카락도 맑은 녹색 눈동자도 그 인간 친구를 떠올리게 했다.

    유사는 자신에게 호감을 가감 없이 드러낸 이비를 향해 에헤헹~ 활짝 웃어 주었고, 그 결과 이비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채 전신을 바르르 떨었다.

    덕분에 막 방으로 돌아온 율리의 눈에 처음 들어온 것은, 침대와 의자를 놔두고 방구석 바닥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고개를 파묻고 바들바들 떠는 이비였다.

    “이, 이비 님!? 왜 그러세요!? 괜찮으세요?!”

    ‘으응!?’

    갑작스런 외침에 고개를 든 이비는, 필사적으로 참느라 피가 몰려 새빨개진 얼굴로 율리를 바라봤다.

    “세상에, 이비 님! 또 열나나 봐요, 얼굴이 새빨개요!”

    ‘아냐! 오해야! 누가 들으면 어떻게 하려고, 오해라고요!’

    그 외침에 저택에 누군가가 들을까 싶어 식겁한 이비가 열나는 게 아니라고 해명하려 했지만, 방 밖에서 카르젠의 외침이 들려왔다.

    “이비?!”

    ‘아아악! 하필 카르젠이 들어 버렸어!!!’

    복도 끝에서 모퉁이를 막 돌아오던 카르젠은 기함하며 이비의 방으로 들어간 율리를 보곤, 저 역시 이비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다. 물론 체스터도 함께였다.

    “이비, 괜찮아!?”

    일순 가까워진 카르젠이 무릎을 굽히고 앉더니 이비의 새빨개진 볼과 이마를 짚어 보곤 근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열이 심하네. 역시 오늘 너무 무리해서….”

    ‘아냐! 아니라고! 카르젠! 아니라구요! 열 아냐!’

    이비가 안 아프다고, 열나는 게 아니라고 입술을 벙긋거렸지만, 카르젠의 시선은 이비보다 그 옆에 유사를 향해 있었다.

    카르젠의 눈동자가 살짝 떨린 것을 확인한 이비는 불안함에 제 옆에 아기 여우를 흘긋거렸다. 순식간에 귀가 잔뜩 처진 유사는 충격받은 얼굴로 이비를 향해 말했다.

    “이비, 유사한테는 안 아푸다구 해쨔나… 이비 아픈 거야? 우… 우우… 아프면 앙 대! 카르! 체스! 이비 쪼꼼 아까 목욕하다가 막 이케, 이케 해떠!”

    갑자기 벌떡 일어난 유사가 두 사람에게 보란 듯이 바닥에 철푸덕 엎어져 끙끙대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을 본 카르젠은 이비의 볼에 자신의 손등을 한 번 더 댔다. 볼이 아주 뜨끈했다.

    “역시 열이 있어.”

    “마침 통신 수정 가져왔으니, 궁성 의원을 부를게. 내 친우의 손님인데 그 정도는 해 줘야지.”

    ‘아냐!!! 제발 궁성 의원 부르지 마세요!!! 안 돼! 나 이제 겨우 씹을 만한 거 먹기 시작했단 말이야!’

    이비의 얼굴에 걱정이 번진 것을 본 율리는 후다닥 침대 이불을 들쳤다.

    이어 카르젠이 이비의 몸을 번쩍 안아 올려 침대에 눕혔고, 유사 역시 발딱 일어나 요만한 손으로 낑낑대며 율리가 이불을 잘 덮어 주는 것을 도왔다.

    카르젠의 크고 차가운 손이 눕혀진 이비의 이마를 짚었다. 이비는 필사적으로 자신이 괜찮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입술을 벙긋거렸지만, 카르젠의 시선은 체스터의 통신 수정에 고정된 상태였다.

    이비는 카르젠의 손이 너무 차가워서 더 오해가 생긴 것 같다는 생각에 슬쩍 그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그제야 카르젠이 자신을 내려다보자 이비가 입술을 움직였다.

    [저 안 아파요. 괜찮아요. 열나는 것도 아니고, 카르젠 님의 손이 너무 차서….]

    “이비, 지금 열이 상당해. 얼굴도 이렇게나 붉고 목까지 붉어졌어.”

    카르젠은 붉어진 이비의 가느다란 목덜미를 손등으로 짚었다. 차가움에 놀란 이비가 흠칫 떠는 모습에 카르젠은 옷 아래 보이지 않는 부분 역시 저렇게 붉어져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아, 안 돼… 카르젠 얼굴이 또. 또 그 걱정하는 얼굴 나왔어! 아 어떡하지, 진짜 이러다 나 완전 병약한 인간으로 오해받겠어!’

    혼란해하는 이비를 파악한 카르젠은 짐짓 괜찮다는 얼굴로 이비의 뜨거운 볼을 보듬어 주며 다정히 말했다.

    “괜찮아, 이비. 걱정하지 마. 나도 함께 있을 테니.”

    ‘아니, 그게 아니라고! 으아아아!’

    어떻게든 오해를 풀기 위해 이비가 카르젠의 소매를 더 잡아당겼다.

    [카르젠 님, 저 정말로 하나도 아프지 않은….]

    이비의 입술이 말을 맺기도 전, 통신 수정이 연결되며 체스터가 카르젠의 집으로 당장 궁성 의원을 보내라 지시했다. 그것도 긴급 시에만 사용하는 수도 내 텔레포트 시스템까지 허가하는 말에 이비는 내가 지금 뭘 들은 건가 싶어 눈을 깜빡였다.

    카르젠은 체스터의 배려에 한결 나아진 얼굴로 가장 가까운 텔레포트 좌표를 알려 주었다. 이비가 끙끙대며 나 좀 봐 달라는 듯이 잡아당기자, 아예 이비의 손을 맞잡아 주며 안심시키려는 듯 나지막이 말했다.

    “곧 도착할 거야. 마음 편하게 있어.”

    ‘아… 아아… 으아아! 정마아알! 궁성 의원이면 실력 좋을 텐데! 그럼 내가 열나지 않는다는 거 알고 꾀병이라고 하는 거 아냐!? 나, 난 분명 말했어! 꾀병 부린 거 아냐! 안 아프다고 말했으니까 궁성 의원이 꾀병이라고 하면 체스터랑 카르젠이 커버 쳐 주겠지?’

    이비는 궁성 의원의 얼굴도 모르면서, 벌써 궁성 의원이 지어 보일 어처구니없어하는 표정이 떠올라 수치심에 젖어 끙끙대기 시작했고, 그런 이비를 보던 유사의 귀가 더 추욱 늘어졌다.

    자포자기한 이비는 유사가 울먹이는 모습에 괜찮다고 입술로 말해 주었다. 하지만 유사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다.

    [진짜야. 아픈 거 아냐. 정말이야. 괜찮아.]

    입술을 가만히 읽던 유사는 울음을 참으려는 듯이 입술을 꾹 깨물더니 흐윽, 히잉, 니잉… 딸꾹질하며 어깨를 떨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체스터는 몸을 숙여 유사를 품에 안았다.

    퐁-!

    체스터의 품에서 여우로 변한 유사는 훌쩍이며 이비를 보지 않았다. 체스터는 그런 유사를 보듬어 주며 말했다.

    “유사. 뚝. 네 새 친구는 괜찮을 거야. 원래 인간은 몸에 피로가 쌓이거나 정신적으로 힘든 일을 겪으면 열이 나기도 해. 괜찮아. 괜찮아.”

    “훌쩍… 훌쩍….”

    체스터가 다정하게 어르고 달래 주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비는, 오늘 처음 만난 자신이 아프다는 이유로 유사가 저렇게까지 슬퍼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유사… 일라나드가 생각났나 보구나….’

    이비는 숲의 마법사에서 유사와 항상 함께했던 정령사 일라나드를 떠올렸다.

    작중 일라나드의 외모에 대한 묘사가 나올 때 <유사는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크림과 똑같은 색의 머리카락을 우물대곤 했다.>라는 부분이 있어 기억하고 있었다.

    ‘어쩌면 유사 눈엔 내가 일라나드와 닮아 보였을까? 하긴. 유사는 사람을 가리는데, 처음 본 내게 갑자기 친구가 되자고 하고, 이렇게 잘 따르는 것 자체가 신기하긴 했어….’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씁쓸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체스터의 품에 안겨 훌쩍이는 아기 여우를 보고 있자니, 안타까움에 가슴이 쿡쿡 아파 왔다.

    이비는 개인적으로 숲의 마법사에서 유사와 일라나드의 이야기를 가장 슬프게 기억하고 있었다. 연재분을 달리며 독자들과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이후로도 몇 번이고 숲의 마법사를 재탕하며 읽을 때마다 울었던 구간이고, 아마 지금 다시 본다 해도 둘의 이야기에서 나라 잃은 것처럼 오열할 것이 분명했다.

    오랜 시간 친구를 기다리는 아기 여우 요괴가 너무 안타까워서. 유사를 위해 그 친구 대신 자기가 나무 열매를 따 주고, 큰 눈사람을 만들어 주고, 함께 꽃놀이를 가 주고 싶다고. 그렇게 유사의 친구가 되어 주고 싶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이비는 아기 여우의 이야기를 안타깝게 기억하고 있었다.

    ‘유사가 많이 놀랐나 봐. 아 정말, 나는 왜 이렇게 얼굴이 잘 빨개지는 거야? 이것도 묘족 특성인가? 뭐든 간에 나중에 꼭 오해를 풀어야겠어. 그리고 이쪽도….’

    이비는 카르젠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는 이비의 손을 꼭 잡아 주며 중간중간 다른 손으로 이비의 이마와 볼에 손등을 대며 열을 체크했다.

    ‘이제 열은 가라앉았을 텐데….’

    그럼에도 카르젠의 표정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그가 계속 걱정하니, 좀 아까 유사가 너무 귀여워 혼자 끙끙대느라 피가 몰려서 그런 거라는 구차한 해명까지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의원이 도착했다며 부집사 할리스가 문을 열어 주었다.

    이비는 자신에게 잠깐의 부끄러움을 선사하고, 건강한 것을 확신시켜 줄 희망이자 구원자인 의원을 보자마자 반색했다.

    궁성 의원은 중년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이비는 그가 중년 여인이라 확신하지 않았다. 숲의 마법사는 항상 독자들의 허를 찔렀다. 누군가의 외모로 그 대상의 성별이나 종족이나 나이를 판단할 수 없는 세계였다.

    ‘심지어 나도 묘족 혼혈이라며! 딱 봐도 그냥 사람 같은데!’

    묘족의 특징인 귀도 꼬리도 없는데, 뭔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 억울함은 잠시 미뤄 두기로 했다. 이비는 지금 당장의 억울함을 해결하는 게 더 급했다.

    ‘빨리 내가 건강하다고 진단해 주세요. 의원님.’

    의원은 이비의 머리를 짚어 보더니, 가방에서 이것저것 꺼내 이비를 검진하기 시작했다.

    딱 봐도 간단한 검진같이 보였다. 카르젠이 심각한 얼굴로 여전히 손을 꼭 잡은 채 앉아 있어 중병 환자처럼 보이긴 했지만, 의원은 침착했다.

    차분하게 검진을 마친 의원이 이비를 바라보자 카르젠이 대신 말했다.

    “하렌델. 지금 이비는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고 말을 할 수 없으니 대신 말하죠. 얼마 전 고블린 독에 당해 아직 전신에 떨림도 있고, 며칠 내내 고열에 시달렸습니다. 어제오늘 양일간 외출하기도 했고, 잡배의 무력에 넘어져 다치기도 했습니다. 그 부분은 크리시가 치료해 주긴 했지만, 피로가 쌓인 것까진 해결해 주지 못하니 그런 걸까요? 아, 그리고 오늘 좀 이것저것 많이 먹기도 했습니다. 일단 당류도 많이 섭취한 것 같고….”

    ‘당류가 무슨 상관이야! 그건 말하지 마! 말하지 말라구! 당류는 열나는 거랑 관계없어!’

    혹시나 단 걸 못 먹게 할까 봐 기겁한 이비가 당황해 카르젠과 맞잡은 손에 힘을 주고 당겼다. 물론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카르젠이 알아서 술술 읊어 준 이야기에 이비는 끼어들 수 없었다. 적어도 카르젠은 사실만 말하고 있었다. 물론 자기가 아프지 않다고 했던 말은 보지도 못한 건지, 쏙 빠진 상태였지만.

    하렌델이라 불린 의원은 이미 카르젠과 잘 아는 사이인지 으휴… 한숨 쉬며 말했다.

    “나 원 참… 그래. 카르젠, 자네 말대로네. 피로가 쌓여서 미열이 난 것 같군. 딱히 다른 증세는 없어. 뭐 그리 놀라서 나까지 부르라고 한 게야? 것도 텔레포트까지 시켜 가며, 멀미 나 죽겠구먼.”

    ‘응…? 열이 있긴 했나 봐?’

    자긴 절대 열이 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당황한 이비는, 카르젠의 반응에 더 눈이 커졌다.

    카르젠은 불경한 눈빛으로 하렌델을 보고 있었다. 마치 제대로 진찰한 게 맞냐는 듯이 추궁하는 기색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물론 둘이 꽤 친하기에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던 거였지만, 그걸 모르는 이비는 카르젠도 저런 표정을 지을 줄 아는구나… 싶어 놀라웠다.

    하렌델은 카르젠의 불경한 눈빛에 투덜대며 가방을 뒤져 작은 약병을 하나 팩 집어 던졌다. 당연히도 카르젠은 그걸 멋지게 받아 냈다.

    “해열제입니까? 이비가 지금 먹는 약이 있긴 한데, 근육 사이에 파고든 독성을 제거하려고 먹는 약이 있습니다. 같이 먹여도 될까요? 아, 약을 보여 드릴까요?”

    “됐어. 됐어. 이 해열제는 다른 약이랑 같이 먹여도 돼. 술하고만 같이 먹지 마.”

    “알겠습니다. 그런데 벌써 가시려고요? 아직 다른 곳은 살펴보시지도….”

    “어허. 거참! 미열이라니까. 정 걱정되면 귀랑 꼬리 발현시켜서 열 좀 빼면 돼. 묘족은 원래 작은 스트레스에도 열이 올라. 혼혈도 마찬가지지. 그럴 땐 현현해서 느긋하게 쉬면 나아져.”

    ‘귀랑 꼬리? 발현? 현현? 그게 뭐야? 그런 내용은 없었는데? 귀랑 꼬리가 자기 마음대로 넣었다 뺐다 할 수 있는 거였어? 유사나 루처럼 그냥 달려 있는 게 아니라?’

    전혀 알아듣지 못한 이비가 갸웃하는 모습에 하렌델은 이비를 흘긋 바라보다 얘 뭐냐는 듯한 표정으로 카르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황당함 어린 시선에 카르젠은 아… 탄식하며 이비 대신 말했다.

    “하렌델. 이비는 고블린의 습격 당시 부상으로 기억을 잃었습니다. 자신이 묘족 혼혈인 것도 어제 막 알았습니다. 그동안 발현한 적은 없었고요.”

    “하? 그럼 아직 발현할 줄 모른다는 건가?”

    “아마도… 그리고 쿼터 정도로 예상 중이라, 어쩌면 발현 자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주 드문 케이스긴 하지만, 쿼터 중 발현이 안 되는 이들도 있긴 한데. 이 친구는 골격으로 보면… 흠. 자세한 건 분석해 봐야 알겠지만 내 생각엔 하프에 가까울 것 같은데? 그럼 발현하지 못할 일이 없는데?”

    이비는 그녀가 자신의 골격만 보고 묘족 혼혈임을 한 번에 알아본 것이 신기했다. 역시 궁성 의원의 실력은 대단하다며 감탄하다가도 순수한 궁금증이 생겼다.

    ‘그럼 나도 귀와 꼬리가 나올 수도 있다는 건가? 어떻게 해야 하지? 아니 근데 꼬리가 생기면 옷에 구멍 뚫어야 하잖아? 그냥 이대로 지내는 게 나을지도….’

    당장 걱정하지 않아도 될 문제들이 걱정되는 것을 보니, 이비는 역시 지금 자신은 덜 아픈 거라며 기분이 좋아졌다.

    게다가 미열이라며 하찮은 증세 취급해 준 하렌델 덕분에, 가장 걱정스러웠던 제 식단이 바뀔 일도 없을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꼬리랑 귀가 정말 궁금하네….’

    이비는 내심, 김현서일 적에 빙의가 된다면 인간이 아닌 타 종족이 됐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이왕이면 먼치킨이면 좋겠다는 상상을 자주 했었다.

    ‘먼치킨은 틀린 것 같고… 그래도 다른 종족으로 살면 좋을 것 같은데, 사실 지금도 그냥 좀 왜소한 인간 같을 뿐이고. 꼬리랑 귀는 어떻게 해야 나오는 걸까… 뭔가 몸에 기운을 머리랑 엉덩이에 집중해야 한다거나 그런 건가? 흠… 아니면 나와라 귀! 나와라 꼬리! 뭐 이런… 건 아니겠지, 당연히.’

    골똘히 생각하던 이비는 갑자기 훅 드는 이질감에 당황해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뭔가….’

    갑자기 엉덩이 쪽에 뭔가 눌리는 기분이 든 이비는 불편해하며 몸을 살짝 옆으로 틀려다 멈칫했다.

    방 안의 모두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이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하렌델만 제외하고.

    하렌델은 “거봐. 안 될 리가 없다니까?” 정도의 말을 하며 여상스레 가방을 챙겼다.

    이비는 그녀의 반응에 슬쩍 한 손을 뻗어 제 머리를 만져 봤다. 솜털같이 포근한 무언가가 손에 닿자 쫑긋거림과 동시에 정수리가 알싸해졌다.

    “???”

    ‘서, 설마… 방금 그거로 됐다고?’

    슬쩍 만져지는 것을 따라 손을 쭉 올려 보니, 생각보단 짧았지만, 그래도 분명히 귀가 솟아 있었다.

    당황한 이비가 카르젠을 바라봤다. 그 역시 놀란 얼굴로 이비의 귀를 보고 있었다.

    ‘응? 카르젠은 동료 중 묘족도 많았는데, 왜 저리 놀라지? 뭔가 잘못됐나?’

    그런 생각이 먼저 들 때쯤. 카르젠의 뒤에 유사를 안고 있던 체스터가 말했다.

    “와… 혼혈이라 그런가, 지금까지 본 묘족 중에 가장….”

    “체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다는 듯이 카르젠이 체스터의 말을 막았다.

    하지만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유사가 자유로운 입으로 두 사람이 느낀 감상을 고스란히 외쳤다.

    “이비, 귀 징짜 짧아! 토끼 안 같아! 귀 완전 쪼그매!”

    “!?!?”

    쿠궁-

    이비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자 카르젠이 급히 수습하려 표정을 갈무리하기 시작했다.

    ‘뭐!? 그렇게까지 작아!? 난 뭐 다 작은 거야? 이젠 하다 하다 귀도 작고?’

    눈에 띄게 실망하는 모습에, 카르젠은 맞잡은 이비의 손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며 감미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비. 제대로 잘 발현했어. 다행이야. 내가 본 귀중에 가장 귀여운 귀야. 정말 놀랄 정도로 사랑스러워.”

    ‘그러니까… 그거 놀랄 정도로 작다는 뜻이지?’

    언제 놀랐냐는 듯이, 표정을 싹 지우고 해사하게 웃으며 말하는 그를 보고, 이비는 또 슬쩍 실눈을 뜨며 시선을 돌렸다.

    유감스럽게도, 이번만큼은 저 아름다운 미소가 위안이 되어 주진 못했다.

    물론 제대로 보지 못할 만큼 눈부시긴 했지만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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