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19)

### 챕터 3

함께 상점가를 구경했을 당시 카르젠은 이비가 게시판이나 구인 광고 전단에 관심을 두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이비가 바닥에 떨어진 시급 높은 광고지를 보고 놀라 주우려던 것도 알면서 모른 척하며 방향을 틀기도 했고, 저 케이크 가게도 괜찮아 보이지 않냐고 물으며 넌지시 관심을 돌리게 만들었다.

그렇게 함께 걷는 내내 카르젠은 게시판이나 전단지 코너에 시선도 주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이비를 이끌었었다.

카르젠은 이비가 왜 자꾸 구인 광고지에 관심을 두는지는 몰랐지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자신이 다 해 줄 것이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차라리 모른 척하지 말고 제대로 말해 볼 걸 그랬어.’

이비가 말만 하면 뭐든 구해 줄 생각이었다. 그래서 신경 쓰지 않고 가볍게 여겼던 게 화근이었을까….

“그러니까. 자네 말은….”

카르젠은 저와 체스터와 아르릉거리는 유사 앞에 주저앉은 남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납치하려던 것은 아니고. 그냥 골목 구경을 시켜 주려던 거였다. 이건가?”

“그, 그게… 가, 가게… 취직할 가게를 찾고 있다고 해서… 저희 가게 전단지를 가지고 있기에, 그래서….”

“그래서. 싫다고 말도 못 하는 사람을 여기까지 강제로 끌고 왔나?”

마이어와 몇몇 기사단원을 데리고 유사를 따라 도착한 곳은 아주 으슥한 골목이었다.

그것도 홍등가 중에서도 악명 높은 가게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화려한 수도와 상반되게 얼마나 폐쇄적인 곳인지,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눈동자들은 카르젠과 체스터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그들 눈에 들어온 것이라고는 두 사람의 비싸 보이는 옷과 흔치 않은 반려동물이었다.

어마어마한 귀족이라고 생각했는지 망설이는 이들이 보였다. 어떻게든 그들에게 자신을 팔고 싶었음에도, 감히 다가갈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나서는 이가 없었다.

그런 이들의 시선을 눈치챈 카르젠은 이곳을 찾는 다른 이들과 다른 방법으로 그들을 샀다.

카르젠은 질문을 했고. 그들은 대답을 했다. 가치 있는 대답을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돈에 죽고 사는 이들이 저마다 구체적인 목격담을 이야기했고, 덕분에 카르젠은 어렵지 않게 브로커의 끄나풀을 찾을 수 있었다.

문제는 이 인간이 말도 안 되는 소리만 늘어놓고 있다는 거였다. 예쁘고 순진해 보이는 소년에 말도 못 하면 특등급 상품이라느니, 그래서 욕심부렸다느니, 그런데 웬 기생오라비 같은 미친 양아치가 나타나 자길 두드려 패고 그 소년을 납치해 갔다느니 따위의 소리 말이다.

남자가 입을 놀릴수록 카르젠의 표정은 더 안 좋아졌고. 체스터는 자신과 카르젠을 알아보지 못하는 남자를 노려보며 유사에게 물었다.

“체취가 여기서 끊겼다고 했지?”

“앙. 근데 카르, 이찌. 이찌 뭔가 이상해.”

“뭐가?”

“우웅… 냄새가, 누군가 일부러 막은 것 같아. 마치 여기서 더 맡지 못하게 하려고 냄새를 감춘 것 같아.”

그 말에 체스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흔적을 지울 정도의 실력자라… 이런 곳에 그 정도 실력자가 있을 것 같진 않고. 근처에 감금했을 확률도 없지 않겠어. 이봐. 네가 납치한 사람은 여기 이 친구의 소중한 사람이거든? 그러니 오늘까지 살고 싶은 게 아니라면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아, 아닙니다! 진짜 안 데려갔습니다! 진짜입니다! 나으리! 제발 살려 주십시오! 진짜로, 진짜로 웬 양아치가 갑자기 나타나 저를 패고 저쪽, 저쪽 큰길로 데려갔단 말입니다!”

“조금 전엔 납치라고 하지 않았나?”

“나, 납치지요! 갑자기 저를 패고 그 작은 녀석을 질질 끌고 갔으니 그게 납치지요! 그 양아치 완전 미친 인간 같았습니다! 혼잣말을 계속 중얼거리질 않나, 확실히 취한 사람 같았습니다! 힘은 또 어찌나 센지, 정말입니다! 제가 오죽하면 저 살겠다고 도망갔겠습니까!”

피떡이 된 남자가 엎드린 채 벌벌 떨며 제발 살려 달라 구걸했다.

그 한심한 모습을 내려다보던 카르젠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짜증 섞인 깊은 한숨에 놀란 남자가 흠칫 떨었다.

카르젠은 조금 전 이 남자 때문에 걷은 소매를 내리고, 빼 두었던 커프스를 다시 끼우며 물었다.

“네가 말하는 그 미친 인간은 어떻게 생겼지?”

“와, 완전 기생오라비처럼 생겼답니다! 머리는 산발을 해 가지고 혼자 풀린 눈으로 중얼거려서 그냥 근처 가게에서 일하는 놈이라 생각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자세히 설명해 봐. 연령대나 머리 색이나 드러난 복식이나. 문신은 있었나?”

“…어… 그… 문신은 못 봤지만….”

남자는 필사적으로 갑자기 튀어나와 자신을 몬스터 잡듯 팼던 남자를 떠올리며 더듬더듬 말했다.

“그, 그게… 주변이 어두워서 잘 보진 못했지만 머리는 으, 은색? 회색 같기도 했습니다. 눈동자는 파란색? 아니. 보라색인 것 같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계속 웅얼웅얼 혼잣말도 하고… 머리는 산발이었는데 좀 젊어 보였고… 기생오라비같이 생겨서 재수 없었고, 또… 음… 어….”

남자가 더듬더듬 말하니 체스터와 카르젠은 뭔가 감이 오긴 했는데, 일단 들었다.

“그, 그리고 어… 아! 그래! 그놈 아마 헛소리하다 신전에서 쫓겨난 놈일 수도 있습니다!”

“신전? 왜 그렇게 생각하지?”

카르젠이 눈살을 찌푸리며 묻자, 그는 마치 이 한마디가 자신을 구원해 줄 거라 확신하듯이 흉측하게 웃으며 말했다.

“환청이라도 들리는지 에벨루스 신에게 알았으니 이제 좀 그만 닦달하라고, 조용히 좀 하라며 불경한 욕을 하고 있었거든요! 자기가 에벨루스 신과 대화한다고 착각한 미친놈 같았습니다!”

“…….”

“…….”

카르젠과 체스터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점점 더 표정이 안 좋아지자, 체스터의 품에 안겨 있던 유사가 “헛!!!” 귀를 쫑긋하며 고개를 치켜들고 외쳤다.

“이찌! 이찌! 인간이 말하는 미친 양아치, 유사는 그게 누군지 알 것 같아!”

“…….”

“…….”

꼬리를 파닥거리는 아기 여우의 말에, 두 사람은 자기들도 그게 누군지 알 것 같다고 말하는 대신 입술을 말아 넣고 웃음을 참는 마이어에게 남자를 넘겼다.

카르젠은 당장 이 자를 끌고 가 불법 영업인지, 직원 고용 절차가 합법했는지 관련 조사로 탈탈 털라는 지시를 남기고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체스터 역시 유사를 안고 카르젠을 따랐다.

“돌아가 보지 그래. 저 녀석 꽤 여럿 거느린 녀석 밑에서 일하는 브로커 같은데.”

“구금해 두고 조지면 되니 급할 거 없어. 그보다 더 중한 용무가 있어서 말이야.”

체스터가 능글맞게 말하니 카르젠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깐 시간 없어서 해명하지 못했는데. 이비와 나는 소문대로의 사이는 아냐.”

“소문이 뭐가 중요한가? 난 그저 내 친우가 직속 보고하러 오는 것도 빼먹고 번화가에서 데이트를 즐긴 상대가 누군지 궁금한 것뿐이야.”

“…….”

“오랜만에 직속 보고였는데, 갑자기 마이어를 보내라니… 나도 그렇지만, 유사가 얼마나 슬퍼했는지 알아? 어제 유사는 젤리를 아홉 개밖에 먹지 못했어. 완전 몸져누운 상태였다고.”

“아홉 개라고? 대체 평소에 얼마나 먹이는 거야?”

“흥. 카르가 약속 안 지켜떠. 그래서 이찌, 그래서 유사는 너무 슬퍼서, 젤리 쪼~금 밖에 못 먹어떠.”

카르젠은 토라진 얼굴로 꼬리를 마구 흔드는 유사를 도닥여 주며 말했다.

“미안해 유사. 어젠 갑자기 계획이 변경된 거라 그랬어. 다음엔 약속 꼭 지킬게. 용서해 줘.”

“후웅~ 어쩔 수 업찌! 유사는 마음이 크니까 용서해 주께!”

유사가 귀를 쫑긋거리며 꺄항~ 웃자 카르젠 역시 생긋 웃어 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체스터가 촉촉한 눈빛으로 카르젠을 바라봤다.

“카르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 체스터도 속상….”

“그만. 내가 잘못했다.”

***

‘크리시 자나…?’

이비에게서 등 돌린 채 누워 있는 크리시의 숨소리는 느리고 규칙적이었다.

무릎을 세우고 다리를 끌어안고 앉아 있던 이비는 고개를 기울이며 제 무릎에 볼을 꾹- 눌렀다.

‘크리시 자나? 진짜 자나? 몰래 도둑이라도 들어오면 어쩌려고! 아니, 그보다 내가 사실은 엄청나게 나쁜 사람이면 어쩌려고 저렇게 맘 놓고 잔대!? 자는 얼굴 몰래 훔쳐보고, 아까 꼬집힌 복수 하거나 뭐 훔쳐 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렇게 생각한 이비는 지금도 뒷모습이지만 크리시를 계속 관찰하고 있던 게 뜨끔해 슬쩍 시선을 흐렸다.

‘이제 겨우 세 시네… 심심하다. 크리시는 진짜 자나 봐. 크리시랑 더 친해지고 싶었는데… 하긴. 어제 처음 만났으면서 갑자기 친한 척하는 것도 좀 그렇겠지?’

크리시가 던져 준 시계를 테이블 위에 두고 바라보던 이비는 최애와 단둘이 있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입술이 삐죽 나왔다.

‘전이나 지금이나 친구 사귀기 참 어렵다. 여긴 sns 같은 것도 없을 텐데. 아까 친구 찾기 전단지라도 가져올 걸 그랬나. 펜팔 비슷한 시스템 같던데. 일자리에 신경 쓰느라 그쪽은 전혀 보지 못했어. 편지로 비밀 친구 찾기라… 나름 이 세계의 sns 같은 건가? 편지로 친구 사귀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

“하아아….”

갑자기 신전 바닥 꺼지는 한숨을 내쉰 크리시가 갑자기 몸을 돌려 누웠다.

내내 크리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비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너무 빤히 봤나….’

실례되는 일을 저질렀다는 생각에 속으로 반성하던 찰나, 크리시가 피곤에 찌든 목소리로 말했다.

“피곤하시면 한숨 주무시죠. 4시 전에 깨워 드리겠습니다.”

“…….”

이비는 작게 도리질했다. 물론 긴장이 풀려서인지 많이 피곤한 상태였지만 딱히 잠이 올 것 같진 않았다.

“그럼 말동무라도 해 주시겠습니까. 오늘따라 피곤한데 잠은 안 오는군요.”

“!”

‘말동무!’

바로 고개 들고 바라보는 모습에 크리시가 일어나 앉았다. 이비는 반짝반짝한 눈망울로 크리시를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

…-의 존재가 너무 까마득해 얼굴을 올려다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목이 꺾일 지경에 이르러서야 밤하늘의 유난히 밝게 빛나는 별 한 쌍을 발견했다. 블랙드래곤의 눈이었다.

-두려운가?

절대적인 존재의 물음에 무릎이 휘청거렸지만, 겨우 견뎌 낸 리엔이 검을 고쳐 쥐며 끄덕였다.

-두렵습니다.

마찬가지로 두려움을 직면한 카르젠은 검을 쥐는 대신 통신 수정을 쥐고 입술에 대며 속삭였다.

-각 조 마법 단장. 후방 일반 병사들이라도 퇴각 매뉴얼 실행 가능하겠습니까.

수정구가 울리며 각 위치의 마법 단장들의 답변이 들려왔다.

=인원이 너무 많습니다.

=전부는 무리입니다. 위험 부담이 큽니다.

=모든 스펠을 지우고 텔레포트에 집중한다면 일부 전송 가능할 수는 있겠지만….

그 속삭임을 듣지 못할 리가 없던 블랙드래곤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하! 재미있구나. 인간과 엘프의 아이여. 퇴각 매뉴얼이라. 내 앞에서 대규모 텔레포트라도 벌이겠다는 것인가?

천지를 뒤흔드는 웃음소리였다.

크리시는 뒤를 돌아봤다. 정예 기사단원들은 이미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그 뒤로 일반 병사들은 겁에 질려 있었지만, 이 협곡에 묻히겠다는 각오로 무기를 부여잡고 있었다.

드래곤 앞에서 마법을 쓴다니, 숲의 마법사 정도가 되거나 혹은 오랜 연구로 미쳐 버린 마법사가 아니고서야 제정신으로 캐스팅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카르젠도 알고 있었지만, 시도라도 해야 했다. 세 개의 기사단 뒤로 있는 병사들은 오로지 저들이 지켜야 할 국가와 가족을 생각해 자원한 이들이었다.

지금은 볼품없이 덜덜 떨며 무기를 쥐고 있지만, 원래라면 그들 손엔 농기구가 쥐어져 있어야 했다.

병사들은 수정을 통해 들려온 마법 단장들과 카르젠의 침통한 음성에 이미 상황을 받아들인 듯했다.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의 적막이 찾아왔을 때, 한 젊은 병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루아인의 영광을 위하여!

울컥한 병사들이 따라 외치려 들자 크리시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순간, 블랙드래곤과 최악의 상성을 가진 푸른달의 신 에벨루스의 사랑을 받는 그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에벨루스의 아이 크리시가 블랙드래곤께 간청 드립니다. 협곡을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

-호오… 에벨루스의 간섭이 느껴질 정도로 사랑받는 이가 내게 무엇을 제안할지 궁금하구나.

-길을 허락해 주신다면 에벨루스의 엉덩이를 걷어차실 수 있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

이를 꽉 문 리엔이 검을 고쳐 잡았다.

-이런 기회 흔치 않습니다만.

체스터가 침음하며 힘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카르젠 역시 수정구를 집어넣고 검을 뽑았다. 체스터와 마찬가지로 힘을 개방하려는 찰나, 블랙드래곤이 물었다.

-최근 400년 이내 들어본 것 중 가장 흥미로운 제안이군. 헌데, 그대가 어떻게 이뤄 준단 말이지?

결사 항전을 외치려던 체스터가 멈칫하며 드래곤을 바라봤다.

블랙드래곤은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숙이기까지 했다.

그의 관심에 크리시가 답지 않게 해사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키진 않지만 에벨루스 신과 강하게 이어져 있는 제 엉덩이를 걷어차시면 됩니다. 에벨루스는 제가 비명횡사하는 걸 원치 않으시니 분명 충격을 흡수해 주실 겁니다. 그럼 제 고통은 위에 계신 분께 전이될 것이고, 드래곤께서 신의 엉덩이를 걷어차신 것이나 마찬가지겠지요. 물론 폴리모프는 하셔야겠지만요.

블랙드래곤을 포함한 협곡의 모든 생물과 푸른 달이 경악했다.

숲의 마법사 5권 10~11페이지 中

***

‘말동무라니! 크리시랑 말동무라니! 크리시가! 크리시가! 크리시가 나한테 말동무해 달라니! 크리시가!!! 어, 어쩌지? 무슨 말 하지? 오늘 뭐 먹었냐고 물어볼까? 아니. 아니지. 이쪽 세계에서 밥에 관심 갖는 건 자연스럽지 않을 수도 있어. 뭘 물어보지? 혹시 남은 네 대는 어떻게 됐냐고 물어볼까? 아냐. 이건 크리시에게 민감한 문제일 수 있어. 요즘 지그하르트는 어디에 있냐고… 아냐. 너무 캐묻는 것 같을 수 있어. 아, 어쩌지!? 결국 유사가 선택한 게 누구였냐고… 아냐. 이것도 내가 알 수 없고. 으아아! 아아~ 어떡하지,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아아, 묻고 싶은 거 진짜 많은데! 다 쉽게 묻기 힘든 것뿐이잖아!’

“…….”

이비가 완전히 흥분한 상태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크리시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이비는 보지 못했지만 ‘남은 네 대’를 생각할 때쯤 미간이 슬쩍 좁아졌다.

크리시의 표정을 전혀 살피지 못한 이비는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무릎에 턱을 대고 미간을 찌푸린 채 입술을 삐죽 내밀고, 심각한 얼굴로 무의식중에 크리시의 명치 부근을 노려보고 있었다.

‘음~ 크리시에게 묻고 싶은 것. 내가 알고 싶으면서도 물어봐도 이상하지 않은 게 뭐가 있을까….’

“…….”

‘아으아아! 크리시가 기다리잖아! 으… 음….’

열심히 머리 굴리던 이비는 숲의 마법사에서 나오지 않았던, 자신이 알고 싶었던 이야기를 고민하다 고개를 치켜들고 입술을 움직였다.

[카르젠이랑 어떻게 친해졌어요? 언제부터 친구였어요?]

“카르랑….”

크리시가 미간을 찌푸린 채 고민하는 모습에, 이비는 곤란한 걸 질문했나 싶어 내심 당황했다.

‘어… 혹시 괜한 걸 물었나? 이것도 너무 개인적이었나?’

혹시 곤란했다면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입술로 의사 표현 하려던 이비는, 갑자기 들려온 답에 저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물었다.

“글쎄요. 생각나지 않는군요. 그냥 정신 차려 보니 어느샌가 친해져 있었습니다.”

“!”

“가문끼리 친해서 어려서부터 자주 만나다 보니 자연스레 친해진 것 같군요.”

‘그렇구나! 크리시도 귀족이었으니 가문끼리 친해서 자연스레 친해졌구나!’

이비가 입을 꾹 다문 채 끄덕이며 경청하자 크리시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이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다 끝냈는데 뭔가 뒷이야기를 격하게 기다리는 초롱초롱한 눈빛이 크리시를 당황하게 했다.

저 무언의 조름을 담은 눈망울에 크리시는 뭐라도 쥐어짜기 시작했다.

“딱히 특별한 게 있었던 건 아니지만… 양가 모친끼리 친했던 터라 어려서도 카르와는 조용히 놀곤 했습니다. 보통은 서재에서 책을 읽고… 방에서도 책을 읽고… 정원에서 티 타임을 가지며 책을 읽고… 둘만의 독서 모임을 가지기도 했군요.”

“!!!”

‘둘만의 독서 모임!!! 어려서부터 둘이 책을 많이 읽었구나… 귀엽다. 책 읽는 두 사람의 어린 시절 분명 귀여웠겠지. 아니, 카르젠은 그때부터 조숙했을까… 어린 시절의 카르젠이라니, 상상도 안 되네… 아카데미 시절의 카르젠도 항상 어른스러웠고….’

눈을 반짝인 이비가 집중하며 들으니, 크리시는 팔걸이에 턱을 괴고 말을 이었다.

“카르는 나름 활동적인 편이었지만, 저 때문에 아마 강제로 책을 읽기도 했을 겁니다. 제가 땀 나는 걸 극도로 싫어했으니까요. 솔직히 어린 시절 카르는 책과 친한 편은 아니었습니다.”

“!”

‘책과 친하진 않지만 땀 나는 게 싫은 크리시랑 같이 놀고 싶어서 얌전히 같이 책 읽는 어린 카르젠…! 으아아! 진짜 귀엽다! 아아 너무 귀엽겠다아아!!! 작가님은 왜 이런 이야기를 안 써 준 거야!!!’

두근두근해하며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크리시가 갑자기 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응? 누가 왔나?’

이비 역시 갸웃하며 고개를 돌린 순간. 대충 두드리다 만 형식적인 노크와 동시에 문이 열렸다.

‘어…?’

이비는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봤다.

절약을 위해 최대한 빛을 아낀 복도와, 암막 커튼 때문에 어둑한 방에서도 반짝이듯 화려한 백금발의 머리카락. 그리고 마치 보석같이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

‘세상에! 체스터잖아?’

갑작스러운 원작 남주의 등장에 놀란 이비는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작은 아기 여우를 보고 입을 틀어막을 뻔했다.

‘설마…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 아기 여우가 맞나? 긴가민가하고 있을 때. 아기 여우가 주둥이를 벌리고 크리시를 향해 인사했다.

“크리시 안냥! 유사 와떠!”

“오냐.”

“크리시 안녕! 체스터도 왔어.”

“하지 마라. 왜 왔냐. 안 바쁘냐?”

왕세자를 대한다고는 믿기지 않는 말투였지만, 이비는 저 둘의 대화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악! 역시 유사가 맞았어! 유사다! 유사다!!! 국민 손자!!!’

<숲의 마법사> 인물 중에 일명 인기투표 0위를 차지한 캐릭터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이 사랑스러운 아기 여우 유사였다.

유사는 작중 모든 투표수를 포함했을 때 일명 넘을 수 없는 투표의 수를 획득한 캐릭터였고, 만인의 사랑을 받는, 일명 국민 손자 캐릭터였다.

모두가 유사 앞에 랜선 할미 할배가 되었다. 이비 역시 굉장히 좋아했던 유사를 실물로 보고 나니 심장이 크게 뛰었다.

실물 체스터와 유사를 보고 반가움과 놀라움으로 두근거리던 이비는 바로 뒤에 들어온 이를 보고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카르젠? 카르젠이 왜 여기에? 성에서 온 사람과 회의 중인 거 아니었나? 아, 회의가 이미 끝났나? 그런데….’

평소라면 벌떡 일어나 그에게 먼저 다가갔을 이비는, 카르젠의 무표정한 얼굴을 본 순간 소파에서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어쩐지 화난 것 같기도 하고, 그답지 않게 차가움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카르젠은 이비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평소처럼 웃어 주지 않고 저벅저벅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온 그의 시선이 이비의 뺨에 머물렀다. 그리곤 내려가 무릎을 안고 있는 가느다란 손목을 지그시 바라봤다.

저도 모르게 그 시선을 따라 내린 이비는 제 손목을 보고 놀라 소매를 잡아당겼다. 가느다란 손목이 붉게 멍들어 퉁퉁 부어 있었다.

이제야 자신의 손목 상태를 제대로 확인한 이비는 깜짝 놀랐다.

‘뭐지? 손목이 왜 이렇게 부었지? 아깐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이전까진 조금 불편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상태를 확인하고 나니 뒤늦게 통증이 피어올랐다.

당황한 이비는 어째 평소보다 더 떨리는 손으로 소매를 잡아당기며 조심스레 카르젠을 올려다보다 급히 시선을 떨구었다.

‘기분 탓이 아니라 카르젠 진짜 화난 것 같은데? 왜 화났지? 제대로 말하지 않고 나와서 화났나?’

카르젠을 보고 긴장해 얼어붙은 이비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크리시가 비척비척 일어나더니 카르젠을 툭툭 치며 옆으로 밀었다.

그리곤 테이블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이비의 손목을 잡고 신력으로 치유를 시작했다.

“앉아. 정신 사납다. 체스터 너도.”

그 말에 체스터는 앉는 대신 유사만 소파에 내려 주곤 창가로 향했다.

카르젠은 이비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손목을 살피며 물었다.

“많이 부었는데, 진작 치료해 주지 그랬어.”

가감 없이 탓하는 말에 이비가 움찔하자 크리시는 순순히 제 탓임을 인정했다.

“아까 급하게 다리부터 치료했거든. 돌아와서 마저 봐준다는 걸 깜빡했어. 미안합니다. 아팠을 텐데.”

크리시의 사과에 놀란 이비가 도리질했고, 카르젠은 이비의 하체를 살폈다.

이비의 무릎 부근에 핏자국으로 추정되는 얼룩이 보였다.

창가로 향한 체스터는 크리시에게 어두컴컴하게 있으면 눈이 침침해진다는 잔소리를 하며 커튼을 걷었다.

순식간에 밝아진 방과 상반되게 카르젠의 얼굴은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후우….”

카르젠이 짜증을 꾹 눌러 담은 느낌이 역력한 한숨을 내쉬었다.

무릎뿐만 아니라 이비의 옷 여기저기가 꽤 더러워져 있었다. 딱 봐도 심하게 구른 모양새였다.

한숨 쉰 카르젠이 별다른 말이 없어 더 긴장한 이비는, 슬쩍 그를 돌아봤다가 바로 후회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으… 어쩌지? 진짜 어쩌지이… 카르젠이 늘 웃어 줘서 몰랐는데, 무표정하니까 차가워 보여. 아니, 그보다 진짜 화난 것 같은데, 설마 다 알고 있나?’

이비는 순전히 실수긴 하지만 불법 업소에서 일하려고 했다는 것을 그가 알았다면, 분명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카르젠의 입장이 난처해질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귀족 사회다 보니 체면이나 품위 유지 뭐 그런 것도 있을 거고… 혹시 나 때문에 카르젠에게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거나 하면… 최악의 경우 혹시 더 보호해 줄 수 없다고 하면… 아냐! 자꾸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안 돼! 카르젠이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혼자 지레 겁먹고, 혼자 삽질하고!’

이비는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카르젠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 점점 흐려지는 멍을 봤다.

크리시의 신력으로 멍이 사라지고 부기가 가라앉자 자연스레 손목 통증도 사그라들었다.

시무룩한 와중에도 입술로 고맙다고 말하려 할 때, 크리시가 손을 뻗어 이비의 양 볼을 감쌌다.

“!”

갑자기 제 얼굴을 감싸는 손길에 놀라 눈이 동그래진 이비는 크리시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는 이비의 볼을 지그시 바라보며 신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얼굴이 너무 가깝게 느껴진 이비는 시선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몰라 살포시 눈을 감았다.

카르젠은 두 사람을 지켜보다 시선을 돌렸고, 체스터는 카르젠의 맞은편에 앉아 무릎에 올라온 유사를 안아 주며 흥미로운 얼굴로 이비를 관찰했다.

세 사람과 아기 여우 한 마리가 있는 공간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짧은 치료였지만 부었던 볼이 순식간에 가라앉자 크리시가 손을 뗐다.

“또 안 좋은 곳이 있으면 알려 줘요.”

살포시 눈 뜬 이비는 작게 도리질하며 입술로 말했다.

[괜찮아요. 고마워요, 프리스트 크리시 님.]

“그냥 크리시라고 불러요.”

대충 대답한 크리시는 이비의 몸에 다른 상처가 있는지 살피기 시작했다.

그가 눈으로 훑는 모습을 지켜보던 유사는 크리시에게 가고 싶은 눈치였지만, 체스터가 꼭 안고 놔주지 않아 낑낑대며 꼬리를 흔들었다.

‘하… 유사 엄청 귀여워. 진짜 작다. 여우라고 했는데, 사막여우같이 생겼네. 진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고 귀엽다. 어으으, 인사하고 잔뜩 귀여워해 주고 싶은데… 그런데….’

맘 같아선 체스터와 유사와 인사하고 싶었다. 그런데 옆에 카르젠이 쭉 아무 말도 없으니 괜히 눈치가 보였다.

이비는 용기를 내 카르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잠시 다른 곳을 보던 카르젠은 이비의 시선에 고개 돌려 눈을 맞추며 지그시 바라봤다.

다행히 외면하진 않았지만, 여전히 무표정하고 말 없는 그는 어쩐지 평소처럼 대하기가 어려웠다.

‘치, 침착해. 침착해. 따지고 보면 카르젠이 내 외출로 화낼 이유가 없잖아.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을 알 방법도 없고. 내가 말없이 외출해서 걱정했던 걸까? 역시 이게 가장 신빙성 있지? 뭐라 말 걸지… 자연스럽게 신전엔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까?’

뭐라 말 걸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이비의 입술이 달싹였다.

카르젠은 파르르 떨고 있는 작은 입술을 응시했고, 그의 시선에 더 긴장해 버린 이비는 입술을 말아 넣었다.

‘어으… 누구라도 좋으니 뭔가 말 좀 해 줬으면… 체스터는 왜 또 조용한 건데? 왜 저렇게 노골적으로 구경하는 건데…!’

말 그대로였다. 체스터는 노골적이다 싶을 정도로 이비에게 흥미를 감추지 않았고, 분위기가 이상함을 감지한 유사 역시 꼬리만 살랑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구라도 좋으니까 제발 말 좀….’

평소와 달라도 너무 다른 카르젠 때문에 긴장한 이비가 거의 쪼그라들기 직전이 되어서야 크리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너희들. 연락도 없이 왜 왔냐? 카르 넌 2주 후에 오라고 했잖아.”

‘조, 좋은 질문! 진짜 좋은 질문! 크리시 나이스!’

크리시의 질문에 힘입은 이비가 그렇지 않아도 궁금했다는 얼굴로 카르젠을 바라보니, 엉뚱하게 유사가 대답했다.

“이찌! 카르가 유사 찾아와써! 유사의 도움이 필요하다구 해서 유사가 사람 찾기 도와줘써!”

‘응? 사람 찾기?’

이비가 갸웃하니, 주목받아 신난 유사가 귀를 쫑긋거리며 말했다.

“카르가 저 작은 인간 옷 가져와써! 그래서 이찌! 유사가 열심히 냄새 맡아서 쫓아가기 해서 지지하구 깜깜한 곳까지 용감하게 가써! 거기서 어떤 인간 만났는데, 그 인간이 카르가 찾는 사람 크리시가 데려갔다구 해써!”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느라 신난 유사가 꼬리를 붕방방 흔들며 두서없이 말했다. 체스터는 제 무릎에 앉아 털을 뿜어 대는 유사를 보듬어 주며 덧붙였다.

“아아. 카르가 급히 찾을 사람이 있다고 해서 유사의 힘으로 추적했더니, 불법 업소 브로커 끄나풀을 만났거든. 근데 그 녀석이 크리시 널 제대로 지목해 줘서 덕분에 헛고생 안 하고 여기로 바로 왔지.”

뭐라 지목했는지 듣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크리시의 미간이 더 구겨짐과 동시에 이비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불법 업소 브로커 끄나풀이라니? 설마 아까 그 남자? 잠깐, 그럼 진짜 카르젠이 날 찾아다닌 건가? 그, 그럼 내가 어떤 가게에 가려고 했는지 다 알게 됐고… 진짜 그래서 화난 거야?’

이비는 양손에서 피가 싸아아-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오해라고, 정말 뭐 하는 곳인지 몰랐다고 말해야 하는데, 대체 뭐라 해명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거의 울상으로 카르젠을 향해 입술을 벙긋거렸다.

[미안해요.]

“…….”

입술을 다 읽은 카르젠이 여전히 대답 없자, 이번에도 유사가 말했다.

“카르! 작은 인간이 미안하대!”

이비는 체스터가 픽 웃는 것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자신의 무지함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카르젠이 알게 됐다는 사실이 그저 혼란했다.

게다가 그는 이비가 그곳이 뭐 하는 가게인지 몰랐다는 것을 아마 모를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내가… 내가 거기가 어떤 곳인지 알면서 일하려 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래서 대답도 안 해 주고… 이제 나랑 말도 섞기 싫은 걸까…?’

격하게 밀려오는 불안함에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바로 한두 시간 전만 해도 카르젠이 자신을 미워하면 어쩌나, 실망하면 어쩌나 상상만으로도 무섭고 속이 답답해져 눈물을 펑펑 쏟았는데, 막상 이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차가운 얼굴의 그를 보고 있자니 서서히 늪에 잠기는 기분이 들었다.

버둥거려도 헤어 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극도의 갑갑함이 전신을 죄기 시작했다. 이비는 저도 모르게 떨리는 눈꺼풀을 내리뜨며 제 발목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없는데, 무언가 제 발목과 다리를 타고 몸으로 기어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아주 끔찍한 기분이었고, 어깨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불안함은 점점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되어 이비의 마음을 어지럽히려 들었다.

‘카르젠은… 나한테 실망해서… 내가… 내가 잘못해서… 그래서 혹시 내가 싫어져서… 내가 필요 없어져ㅅ….’

“걱정한 건 알겠는데, 적당히 사과 받아 주지 그래.”

싹둑-

크리시가 손사래 치며 툭 던진 한마디에, 이비는 전신을 서서히 덮어 오던 불길한 압박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을 느꼈다.

마치 젖은 이불이 온몸을 덮고 숨 막히게 만드는 기분이었는데, 누군가 그걸 확 걷어 낸 것처럼 갑자기 사라진 기분이었다.

심지어 정수리와 쇄골 언저리까지 시원하고도 청량한 기운이 퍼지는 것 같았다.

‘…방금… 뭐였지?’

몸을 옥죄며 비집고 들어오려는 좋지 않은 무언가가 깔끔하게 떨어져 나간 느낌이었다.

혼란했던 머리가 맑아지고 불안감이 사라지자 마음이 안정되며 차분해졌다.

그러자 이비는 제 앞의 카르젠이 조금은 다르게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이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카르젠은 내내 이런 얼굴이었는데….’

이비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왜 카르젠의 걱정을 느끼지 못했는지, 대체 뭐가 그리 무섭게 느껴졌는지, 왜 그가 자신에게 화났다고 생각하며 겁먹었는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혼자 지레 겁먹고 순식간에 좌절감을 느끼고 안 좋은 생각이 꼬리를 물던 의식의 흐름이 지금은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여전히 웃음기 없고 차가워 보여도 분명 저를 향한 카르젠의 걱정을 읽은 이비는 차분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카르젠 님. 제가 잘 몰라서 그랬어요.]

입술을 읽은 카르젠이 여전히 대답 없자 또 유사가 말했다.

“카르! 잘 몰라서 그랬대!”

체스터가 칭찬하듯 유사의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어 주었다. 이어질 입술의 움직임을 읽으려는 유사의 눈이 부리부리해졌다.

이비가 다시 입술을 벙긋하려는 찰나에 카르젠이 손을 내밀었다.

“?”

갸웃한 이비는 손바닥을 바라보다 아! 하며 끄덕였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손에 써 달라는 건가?’

입술을 읽을 수 있을 텐데, 굳이 손을 내민 것을 본 이비는 그의 의도가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거라 해석했다.

‘전에도 길게 말을 했을 때 다 못 읽어서 손에 써달라고 했으니까….’

카르젠은 이비가 오해하는 걸 눈치챘지만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그저 은근히 손을 내민 채 기다렸다.

유사와 체스터는 과연 저게 무슨 행위인가 싶어 집중했다. 이비는 과도한 집중이 부담됐지만 카르젠의 손바닥을 자신의 허벅지에 올려 두고 손가락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무슨 행위인지 파악한 유사는 글을 읽지 못해 불만스레 꼬리를 탁탁 치며 털을 뿜어 대기 시작해 크리시가 더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작은 아기 여우가 불퉁해진 채 파닥거리고, 아직 자신을 소개하지 않은 왕세자가 대놓고 관찰하는 와중에도 이비는 온전히 카르젠에게 집중했다.

이비는 그의 큰 손에 최선을 다해 천천히 또박또박 자신의 시점으로 겪은 일을 적어 내려갔다.

카르젠은 제 손바닥을 간질이며 이어지는 느린 이야기를 정독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표정이 풀어졌다.

이비는 꽤 오래 구구절절 입장문을 썼다. 물론 중간중간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걱정해 줘서 고맙고 미안하고, 놀라게 할 생각 없었다며 해명도 틈틈이 넣었다.

내내 고개 숙인 채 작은 오해도 생기지 않게 차분히 설명을 마친 이비는 조금 긴장해 카르젠을 올려다봤다.

‘전부 다 제대로 이해했을까?’

저를 바라보던 카르젠의 눈매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아… 다행이다. 잘 전해졌나 봐….’

안도한 이비가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으니, 카르젠 역시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이젠 평소대로 돌아온 그에게 다시 한번 입술로 사과하고, 찾으러 와 줘서 고맙다고 하려는 찰나. “쯧.”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카르젠과 이비가 동시에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고개 돌리니, 세상 불경한 표정의 크리시가 보였다.

지금 그의 얼굴은 누가 봐도 <아주 놀고들 있네.>라고 쓰여 있었다.

저 엄청난 표정에 당황한 이비가 휘둥그레지자, 그는 아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나가. 다 나가. 피곤하다. 체스 너도. 유사도 나중에 놀러 와. 일단 다 나가.”

“니잉….”

크리시에게 축객당한 카르젠은 이비를 데리고 바로 저택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예상대로 체스터와 유사가 그리 두지 않았다.

유사는 새로운 인간이 궁금하다며 계속 이비에 대해 질문하려 들었고, 체스터는 자기 대신 품에 안긴 아기 여우가 알아서 붙잡아 주니 점잖은 척 사람 좋은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유사. 미안하지만 곧 마차가 도착할 거야. 그러니 다음에….”

“그럼, 유사는 오랜만에 카르 집에 놀러 갈래!”

“체스터도 놀러 갈래.”

카르젠은 아까부터 유사의 말투를 흉내 내는 체스터에게 대놓고 눈살을 찌푸리다가도, 제 옆에서 입을 가리고 풉- 웃는 이비를 보며 갈등했다. 갑자기 놀러 오겠다고 말하는 둘에게 불편함보단 흥미를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이비는 사람 사귀는 걸 좋아하는 타입인가? 그러고 보니 어제도….’

카르젠은 어제 크리시와 셋이 만났던 자리에서도 이비가 크리시를 관심 있게 지켜봤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도 유사와 체스터를 처음 만났으면서, 낯가리거나 곤란해하긴커녕 오히려 반가워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생각해 보면 깨어나 내내 저택에 있었으니….’

상황만 놓고 보면 어느 날 깨어났더니 모르는 곳이고, 기억을 잃어 제 가족이나 친구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로 지냈을 이비였다.

그나마 자주 본 사람이라면 카르젠 본인과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들뿐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금 체스터와 유사를 저택에 들이면 분명 피곤해질 것이 분명했다. 이비도 제대로 쉬지 못할 거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하는 눈빛이네.’

이비는 카르젠이 차마 단호하게 거절하기 어려울 정도로 체스터와 유사가 함께했으면 좋겠다는 얼굴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얼마나 간절히 바라는지 저도 모르게 작은 입술을 앙다물고, 카르젠의 옷깃을 잡아당길 정도였다.

‘체스터에게 들을 것도 있으니….’

이비의 반응을 본 카르젠은 어쩔 수 없이 둘의 방문을 수락했다.

어차피 저가 수락하지 않아도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따라왔을 거라는 것을 알아서기도 했지만, 다른 이유로는 유사가 새로운 사람에게 관심을 두는 것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관심을 두는 정도가 아니라….

“체스, 체스. 나 저 인간한테 갈래.”

“저 인간이라니. 이비라고 해. 제대로 이름 불러 줘.”

“아라써! 이비! 날 안아!”

당돌한 명령에 이비는 망설임 없이 바로 팔을 벌렸다.

체스터가 다가가 유사를 안겨 주니 이비의 얼굴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이비는 동물을 좋아하나 보군….’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누가 보면 자신이 낳은 아이를 처음 안아 본 사람처럼 행복해 보였다.

이비가 저를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로 보고 있으니, 한층 더 의기양양해진 유사가 꼬리를 살랑이며 물었다.

“인간! 아니, 이비! 넌 어디 살아?”

이비가 천천히 입술을 벙긋했다.

[지금은 카르젠 님 저택에서 살아요.]

대답을 읽은 아기 여우는 귀를 쫑긋거리며 다시 물었다.

“지금은 카르 집에서 살아? 그럼 나중엔 어디서 살아?”

이비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그 잠깐의 머뭇거림 사이로 카르젠이 끼어들었다.

“이비는 계속 내 저택에서 지낼 거야.”

“징짜?”

“!?”

놀란 이비가 유사에게서 시선을 떼고 카르젠을 올려다봤다. 카르젠은 그런 이비를 향해, 조금 전 신전에서 자신이 혼자 결정한 것을 들려 주기 시작했다.

“응. 이비는 내 곁에 있을 거야.”

유사는 물론이고, 이비 본인조차 저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같은 각도로 고개를 기울인 유사와 이비를 본 체스터는, 어쩐지 저 둘이 꽤 닮아 보여 픽 웃었다.

“이비가 카르 곁에? 핫! 카르 그럼, 혹시! 혹시 리엔이 말했던….”

“아니. 이비는 지금 내 손님이고 요양 중이지만. 이비가 완전히 회복하면 내가 도움을 받아야 할 일이 있어서 일자리를 제안할 생각이거든.”

“오! 그러쿠나! 이비가 카르를 돕는구나! 그럼 이비는 엄청! 엄~청 나게 대단한 인간이구나!”

유사는 카르젠이 힘을 개방했을 때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 잘 알았다.

엄청나게 강한 카르가 도움을 받는다니! 작은 인간은 굉장한 인간인가 보다! 아기 여우 방식대로 해석한 유사가 눈을 빛냈다.

순식간에 <엄청나게 대단한 인간 타이틀>을 획득한 이비는 혼란한 얼굴로 무슨 말이냐는 듯이 카르젠을 올려봤지만, 그는 대답 대신 자세한 이야기는 저녁에 둘이 하자며 화사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무방비한 상태로 카르젠의 아름다운 미소를 마주한 이비는 눈부신 후광에 눈을 찌푸리며 급히 고개를 돌렸다.

고작 반나절 만이지만 무표정한 그 때문에 내내 긴장했던 탓인지, 저 미소가 굉장히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그만큼 더 눈부셨다.

유사는 안겨 있어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정면에서 이비의 반응을 본 체스터는 꽤 놀라 카르젠을 흘긋 살폈다.

슬쩍 제 친우의 표정을 살핀 체스터의 감정은 놀라움에서 의아함으로 바뀌었다. 대체 뭐가 그리 좋은지, 카르젠은 저를 외면하는 중인 이비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것도 꽤 즐겁다는 듯이….

***

군데군데 연륜이 스며 있는 희끗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중년 남자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한숨을 삼켰다.

이전 영지도 만만치 않았지만, 어째 베일리즈 영지 기록사의 글씨는 한층 더 악필이었다. 덕분에 명부를 조사하던 중년 남자의 눈은 금세 침침해졌다.

어떤 페이지는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지렁이 같은 글씨로 쓰여 있어 뒷목이 당기는 기분마저 느끼게 했다.

“하아….”

중년 남자는 결국 한숨을 참지 못했고, 곁에 있던 직원에게 한 페이지를 보여 주며 물었다.

“자꾸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이 페이지에 이름들을 좀 읽어 주겠소.”

아까부터 몇 번이고 이런 일이 있었지만, 옆에 있던 직원은 짜증 대신 상냥한 미소로 읽어 주기 시작했다.

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알아서 찾아보라 했을지도 모르지만, 상대는 바이스 백작가의 신분패를 가져온 남자였다.

다른 귀족 나부랭이도 아닌 대륙을 구한 영웅 중 한 명인 카르젠을 모시는 집사에게 친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직원이 또박또박 읽어 주는 이름에 집중하던 집사 바론은, 그의 입에서 찾아야 할 이름이 나오지 않아 실망했지만 고맙다고 인사한 후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수도에서 가장 가까운 스트라우 영지에서는 아무 소득도 없었고, 아무래도 이곳 베일리즈 영지에서도 소득이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저 오래 살아온 남자의 좋지 못한 감이었지만, 그 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하지만 카르젠의 명령이었고 무엇보다 확실히 해 둬야 했기에 남은 명부를 훑기 시작했다.

바론이 찾는 이름은 이비. 그리고 레인. 우선은 인간 또는 인간과 타 종족의 혼혈이라는 가정하에 찾고 있었고, 연령대는 대략 10대 중반부터 40대 후반까지 훑고 있었다.

그렇게 명부를 살펴보던 바론은 세상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는다는 것을 다시 실감하고 있었다. 게다가 전쟁으로 인해 실종 처리된 이들도 많았고 사망 처리된 이들도 많았다.

이비만 찾는다면 생존자와 최근 실종자 명부만 보면 되겠지만, 공교롭게도 바론은 모든 명부를 살펴봐야 했다.

-…우형…? 형이야…? 형… 살아 있었어…?

카르젠이 숲에서 생존자를 구조해 온 첫날.

사경을 헤매던 소년이 피 묻은 옷을 치우던 부집사 할리스를 초점 없는 눈동자에 담았을 때, 힘겹게 움직인 입술의 뜻을 카르젠도 바론도 분명히 읽었었다.

약에 취해 의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터라, 앞에 이름을 제대로 읽진 못했지만 분명 형이냐고 물었으며 살아 있었냐고 물었었다.

처음엔 할리스가 외적으로 닮아서 그런가 싶었지만, 이후 치료와 기절을 반복하는 사이 무의식중에 곁을 지키던 카르젠에게 몇 번 형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했다.

횡설수설에 가까워 읽기 힘들고 사실상 도움 될 만한 내용은 없었지만, 카르젠에게 전해 들은 말로 미루어 볼 때, 이비의 형은 실종된 지 오래였던 것 같았다.

덕분에 주변에선 사망으로 생각했지만 이비만큼은 제 형이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거라고 믿었던 것 같다고 했었다. 조금이라도 더 이야기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건질 만한 대화는 그게 전부였다.

이후 치료로 며칠간 기절해 있더니, 어느 정도 회복해 깨어났을 때 이비는 자신이 누군지 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덕분에 바론이 의존할 것이라고는 외형과 카르젠이 숲에서 수습해 온 물품에 적힌 이비와 레인이라는 성이 없는 이름뿐이었다.

그나마 레인은 이름뿐이니 못 찾으면 어쩔 수 없다며 넘어가겠지만, 사실상 문제는 제 주인과 함께 있는 이비였다.

연한 갈색과 크림색이 섞인 머리카락에 맑은 녹색 눈동자. 인간이라면 남성에 10대 후반~20대 초반 추정이지만, 체격이 작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타 종족이 섞여 있을 확률이 높았다.

성별 또한 겉보기엔 소년처럼 보일 수 있지만, 만약 요정계나 수인계가 섞였다면 모를 일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생식 구조가 남성체에 가깝다고 해도 번식력이 강한 수인계 혼혈이라면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기관이 존재할 확률도 있었기에 성별도 남성뿐만 아니라 양성등록자까지 살펴봐야 했다.

즉 타 종족이 섞였다면 연령 추정 자체가 어려울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명부를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이래저래 골이 아팠다.

현재로서 이비라는 존재는 너무 많은 변수가 존재했다.

***

-블랙드래곤에게 엉덩이를 바쳐 모두를 구한 에벨루스의 편애받는 아이, 프리스트 크리시. 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실릴 거야. 분명. 내기해도 좋아.

리엔이 말했다.

-한 번도 아니고. 다섯 번 바치기로 했다는 내용도 대서특필되겠지.

체스터가 호응했다.

-에벨루스 님께는… 내가 회개 기도 드리고 싶은 심정이야….

에밀리는 같은 성직자로서 상상도 못한 방식으로 구원받았다며 이마를 짚었다.

그 반응에 엎드린 크리시의 엉덩이에 젖은 수건을 교체해 주던 카르젠이 모두를 향해 말했다.

-리엔, 체스터. 그만 놀려. 우린 엄연히 크리시 덕분에 살아남은 거야. 크리시, 좀 어때. 감각이 돌아왔어?

그 물음에 크리시는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아… 앞으로 네 대나 남았는데, 맞을 때마다 저럴 건가? 다 필요 없으니 제발 내 엉덩이 찬양 좀 그만하라고 해.

막사 밖에선 모두가 에벨루스와 크리시의 엉덩이를 찬양하며 노래를 부르고 살아남은 밤을 즐기고 있었다. 그야말로 축제였다.

숲의 마법사 5권 30페이지 中

***

‘만약 타국 출신이면 더 골치 아파지겠군.’

소지품 중 장신구에 성이 없었기에 성직자나 고아였을 확률에 중점을 두고 있긴 하지만, 루아인 왕국이 아닌 다른 국가 태생 이민자라면 장신구에 성을 적지 않았다고 해서 고아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다른 국가 중에는 귀족 외에 평민은 성이 없는 곳도 있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왕국 내 신전엔 카르젠이 체스터 왕세자를 통해 성명을 보내 둔 상태였기에 신관 명부까진 찾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이 많고 많은 명부의 산에 파묻힌 바론에게, 오직 저 사실 하나만이 위안을 주고 있었다. 바론은 옆에 펼쳐 보지도 못한 명부들을 보고 있자니 급격하게 늙는 기분을 느꼈다.

다른 영지에도 성명을 보내 조사하게 하면 좋으련만. 그러지 않는 이유를 짐작했기에 바론은 불평할 수 없었다.

신전들은 대가를 지급한 만큼의 비밀을 지켜 주겠지만, 다른 귀족들이나 인간들은 당연히 그렇지 않았다. 그것이 노련한 집사가 은밀하게 움직이는 이유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도련님이 하필 그 숲에서 구조한 사람이니….’

제 도련님이 태어난 날부터 모셔 온 바론은 경계선 숲이 카르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어린 도련님이 제 품에 안겨 서럽게 울던 날 역시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경계선 숲 초입에서 당시 궁성 1기사단 단장이었던 바이스 칸 백작이 수색에 실패해 국왕에게 어렵게 보고를 올리던 모습도, 그 뒤로 궁성 기사들이 일제히 무릎 꿇은 채 흐느끼던 모습도 전부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꽤 오랜 삶을 살아온 바론에게 있어서 그날의 일은 그만큼 충격이었다.

왕의 손을 잡고 내내 의젓하게 서 있던 제 3왕자 체스터는 전적으로 신뢰했던 제 1기사단 단장조차 숲으로 사라진 동생을 찾지 못했다는 소식에 울음을 터뜨렸었다.

체스터는 왕자의 체통이고 뭐고 집어던진 채 오열하며 외쳤다. 그럴 리가 없다고, 다시 찾아보라고, 분명 동생은 오늘 괜찮았다고, 어쩜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한 번만 더 찾아보자고 울며 카르젠의 아버지인 바이스 칸 백작에게 매달렸었다.

이날 바론은 오랫동안 방황하던 제 아이를 결국 잃었음을 인정한 아버지의 눈빛을 보았다. 저도 눈물이 날 것 같아 이를 악물고 흐느끼는 도련님을 꼬옥 안아 주었던 감각이 선했다.

평생의 사랑을 바친 반려를 잃고 1년도 지나지 않아 아끼던 4왕자의 상실을 인정한 그의 눈은 더없이 처연했으며, 평생 공감하고 싶지 않은 슬픔을 담고 있었다.

켜켜이 쌓인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지우지 못한 제 4왕자가 불법 텔레포트 수정으로 도달한 경계선 숲에서 사라졌던 날….

그 이후 바론은 꽤 오랜 기간 밤마다 제 4왕자에게 선물받은 목걸이를 쥐고 우는 도련님을 재우느라 고생했고, 몇 년 후엔 수련을 핑계로 숲에 들어가 몬스터를 썰어 대다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한 도련님을 모시고 돌아오느라 고생했다.

바론은 그저 오래 살아왔다는 자만심으로 어린아이의 상처는 금세 지워진다고 단언했던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어린 시절 첫사랑을 잃은 카르젠의 상처는 나이를 먹으며 점점 흐려졌지만, 상실로 비어 버린 공간을 채운 분노는 날로 불어만 갔다. 그래서 바론은 숲으로 향하는 도련님을 말릴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나면 나아질까 싶었지만, 대륙의 영웅이 되어 돌아온 카르젠은 이전과는 다른 이유로 숲을 찾았다.

바론에게조차 정확한 이유를 말해 주진 않았지만. 제대로 살아가려면, 그리고 버티려면 가야 한다고 대답해 줄 뿐이었다.

이젠 털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또 바랐지만, 결국 저가 모르는 이유로 제 도련님과 그 빌어먹을 숲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고 말았다.

그런 숲에서 그가 처음으로 생존자를 데려왔을 때. 바론은 신에게 감사했다. 어쩌면. 어쩌면 저 소년을 계기로 제 도련님의 마음에 남아 있는 상실을 지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은 철저하게 카르젠의 손으로 이뤄져야 했다. 이비를 구조한 순간부터, 이비가 회복해 자립하는 날까지. 그 모든 것이 다른 기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오직 제 주인의 손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고 말이다.

바론에게 있어선 이비가 제 도련님의 유일한 구원이나 마찬가지로 느껴졌다. 그렇기에 이비에 대한 것을 철저히 조사하겠지만, 그 결과는 오직 제 주인에게만 들려줄 생각이었다.

‘이비라는 소년에겐 미안한 생각이지만… 돌아갈 곳 따위는 찾지 못하면 좋겠군.’

충성스러운 집사는 저가 모시는 주인에게 서사를 안겨 주기 위해 다시 악필로 빼곡한 명부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

‘의외네, 체스.’

평온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어 겉보기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지만, 카르젠은 나름 놀란 상태였다.

웬만해서 제 정체를 바로 말하지 않는 체스터가 마차 안에서 자신이 왕세자라는 것을 밝혔기 때문이었다.

이비가 왕족에겐 어떻게 인사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카르젠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도, 친우와 함께하는 자리에서 그럴 필요 없다며 편하게 대해 달라 먼저 권했다.

마차가 달리는 내내 품에 유사를 안고 있던 이비는 체스터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어색하게 웃으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크리시를 바라보던 모습과 상반되는 반응이었다.

‘크리시는 괜찮고, 체스에게는 낯을 가리는 건가? 음… 혹시 수줍어하는 건가?’

카르젠은 크리시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이비가, 체스터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을 눈여겨봤다.

시선은 피하면서도 은근슬쩍 체스터를 흘긋대는 것을 보면 관심이 없지는 않은 것 같이 느껴져 더 의아했다.

물론 카르젠은 이비의 속마음을 몰랐으니 낯가리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사실 이비는 지금 굉장히 흥분한 상태였다.

내심 체스터가 크리시의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인사해 주기만 기다리고 있었던 차였는데,

‘편하게 대하라니! 편하게 대하라니이이! 아니, 물론 체스터가 모험하면서 다양한 종족과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과 어울렸고, 써야 할 때가 아니면 왕족의 권위를 내세운 적도 없긴 하지만… 그래도 명색에 왕자인데, 편하게 대하라니! 진짜 관대함의 끝이네~.’

지금 이비는 체스터가 살갑게 대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상대가 왕족이다 보니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긴 했지만, 설렘 가득한 두근거림을 느끼고 있었다.

‘체스터 눈이 진짜 보석같이 예쁘다. 최근 나온 판타지 중 보석안 캐릭터가 많긴 했지만, 체스터는 보석안 설정도 아니었던 거로 아는데 진짜 반짝반짝하네. 머리도 반짝거리는 백금발이고. 이래서 남주인가? 뭔가 느낌이 확실히 달라! 솔직히 체스터는 왕족이니 친구까진 무리겠지만, 그래도 지인 정도로라도 알고 지내면 엄청 좋겠다아~ 앞으로 친구 많이 사귀어야지. 꼭 친구 많이 사귀어서 같이 놀러 다니기도 하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으러 다니고 꼭 그렇게 살아야지. 남들처럼 평범하게.’

이비는 단 두 번의 외출이었을 뿐인데 새로운 인연이 생긴 것이 기뻤다. 그렇게 행복함을 만끽하는 중에도 품에 안은 유사를 쓰다듬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유사는 이비의 손길이 퍽 맘에 들었는지 눈을 살포시 감고 있었다.

꽤 달렸다 싶은 기분이 들 때쯤, 승차감 좋은 마차가 점점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이비는 창밖으로 슬슬 보이기 시작한 카르젠의 저택을 보고 있자니 묘한 기분을 느꼈다.

반나절 동안 많은 일이 생겨서일까, 왜 이렇게 오래 떠나 있던 것 같은 기분이 드는지 모를 일이라 생각하며 유사를 꼬옥 안았다.

***

저택에 도착한 이비가 카르젠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린 것을 본 시종들은 그 품에 유사나, 예정 없이 방문한 왕세자도 아닌 반나절 만에 너덜너덜해진 이비를 보고 경악했다.

특히 무릎에 핏자국까지 발견한 율리는 카르젠과 체스터에게 먼저 예를 갖춰 인사한 후, 이비를 자신이 보필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갑작스러운 체스터의 방문보다 이쪽이 더 급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비는 아무리 카르젠의 친우라도 왕세자가 왔는데 자길 먼저 살피고 신경 써 주는 모습에 이래도 되는 건가 싶어 긴장했지만, 카르젠은 당연하다는 듯이 허락해 주었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율리는 이비를 데리고 자리를 떴다. 덕분에 품에 안겨 있던 유사까지 얼떨결에 이비의 침실로 동행했다.

의자를 끌어다 이비를 앉혀 둔 율리는 조심스레 핏자국이 묻은 바지를 걷어 올리기 시작했다. 아침만 해도 도시락 싸 들고 신나서 팔랑팔랑 외출하더니, 진창에라도 구른 건지 흙투성이에 핏자국에 너덜너덜해진 꼴로 돌아와 충격이었는데, 다행히 아무 상처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율리! 이비 다리는 크리시가 치료해 줬어!”

유사는 평소 카르젠의 집에 자주 놀러 왔는지 율리의 이름도 알고 있었다. 율리 역시 익숙한 듯이 유사에게 가볍게 웃어 보인 후 이비를 올려다보며 재차 확인했다.

“휴~ 다행이네요, 이비 님. 그럼 치료가 필요한 상처는 없는 거죠?”

끄덕끄덕

이비의 긍정에 한시름 놓은 율리가 오히려 더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 이비가 쓰던 방의 개인 욕실로 들어가 물을 받기 시작했고, 지저분해진 겉옷을 벗겨 주고 새로 입을 옷도 챙겨왔다.

졸지에 속에 입는 끈 나시 같은 실크 상의와 속바지를 빼고 모든 옷이 벗겨진 이비는 율리가 혹시나 제 목욕 시중까지 들어 주겠다고 할까 봐 긴장했지만, 다행히 욕조 앞 파티션에 갈아입을 속옷과 셔츠와 바지를 차례차례 걸어 주며 말했다.

“이비님. 전 금방 다시 돌아올게요. 그럼 유사 님은….”

영웅들의 여정 이후, 나름 기사 작위를 받은 아기 여우를 슬쩍 말끝을 흐리며 바라보자, 유사가 당돌하게 대답했다.

“유사는 이비랑 놀래!”

절대 같이 목욕하겠다고 하지는 않고, 같이 놀겠다는 말에 율리는 알았다며 방 욕실에 둘을 남겨 놓고 나갔다.

***

“그래서, 이찌. 유사가 멀린 아저씨한테~ 유사는 동그란 수도꼭지 모양보다 쿠키 모양 수도꼭지가 더 좋다고 말해써! 유사는 쿠키 져아해! 이비도 쿠키 져아해?”

끄덕끄덕

욕조에 들어가 앉아 인간화한 유사의 말을 경청해 주던 이비는 저도 모르게 웃음꽃 만개한 얼굴로 끄덕여 주었다.

인간화한 유사는 소매통이 큰 동양풍 옷을 입고 있었는데, 원작의 표현대로 2.5등신 정도 되는 작은 꼬마였고 둥근 머리통 위로 여우 귀가 솟아 있었다.

그리고 독자들이 작가님, 우리도 알겠으니 제발 그만 좀 쓰시라고, 유사 꼬리 귀여운 거 이제 전 세계가 다 알겠다는 댓글이 베스트로 올라갈 정도로 자주 나왔던 <오동통하고 풍성한 큰 꼬리>를 실물로 보니, 작가가 왜 그렇게 자주 언급했는지 이해됐다.

유사의 몸을 다 합친 것보다도 큰 꼬리는 정말 폭신폭신해 보였다.

“유사는 쿠키가 좋다구 말했더니~ 멀린 아저씨가, 유사가 쓰는 욕조엔 쿠키 모양 수도꼭지를 만들어 줘써!”

‘쿠키 모양의 수도꼭지라니… 그게 대체 어떻게 생긴 건데?’

이비는 유사의 욕실에 있다는 그 수도꼭지가 대체 무슨 모양인지 전혀 연상되지 않았다.

단순히 1차원적으로 초코칩이 박힌 납작한 쿠키 모형이 수도꼭지 위에 올려져 있는 모습 정도만 떠올랐다.

“그리구 이찌~ 이 수도꼭지도 멀린 아저씨가 만든 거다? 카르가 살 집이니까 아저씨가 만들겠다구 해써. 그래서 여기에 욕실도 전~부 멀린 아저씨가 만들어써. 갱장하지?”

끄덕끄덕

‘그렇구나… 카르젠의 집도 멀린이 만들어 준 건가? 아니면 욕실만? 드워프 건축이 대단하다고 듣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제대로 하는구나.’

이비는 유사를 통해 원작 소설에선 읽지 못했던, 판타지 세계에 상수도 시설이 존재하는 이유를 알게 되고 진심으로 감탄했다.

대륙을 구하는 여정에 난쟁이 종족 대표로 함께했던 드워프 장로 멀린은 손재주가 뛰어난 건축가였다.

그런 그가 모든 여정이 끝난 후, 루아인 왕국 수도인 이곳 아브델에 남아 건축 전문가 드워프들을 불러다 단기간에 수도시설을 확장해 주었다는 이야기는 실로 놀라웠다.

“그래서, 카르가 말해떠. 카르 집만 하지 말구, 전부 다~ 하자구! 근데 수도공사 하는 건 힘드니까, 수도로 도망친 사람들이랑 같이 만들자고! 그 사람들은 집도 없구 먹을 것두 없어서 힘드니까, 수도공사 같이하면 돈이랑 빵도 주고 그래떠! 아! 카르가 큰 건물 사서 재워 주기도 해써! 빵은 크리시가 줘떠!”

유사는 어설프게나마 자신이 인지한 지식을 동원해 카르젠의 업적 중 하나인 난민 구제 대책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대규모 수도 공사에 참여한 난민들은 카르젠으로부터 공동 숙소를, 왕성으로부터 일당을, 에벨루스 신전으로부터 식량을 공급받은 덕분에 수도에서 어떻게든 생활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대충 알아들은 이비는 격하게 끄덕이며 그건 정말 대단하고 멋진 계획인 것 같다고 입술로 말해 주었다.

이비의 입술을 읽은 유사가 헤헹~ 웃으며 샌드위치를 내밀었다. 아까 이비가 도시락으로 받았던 샌드위치였다.

존재 자체를 잊고 있었는데, 한 입 베어 무니 아침에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야채는 아삭했고, 짭짤한 햄과 고소한 달걀이 어우러져 굉장히 맛있었다.

‘와아, 진짜 맛있다. 밖에서 먹으면 더 맛있었을까? 모처럼 도시락으로 만들어 준 건데, 아까 분수대에서 먹을걸. 집으로 가져와서 먹게 됐네… 그래도 이것도 재미있다. 목욕하면서 뭔가 먹는 것도 처음이고.’

의도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귀여운 유사와 함께 샌드위치를 먹으며 목욕하는 시간은 새롭고 즐겁게만 느껴졌다.

유사는 욕조 앞에 끌어다 둔 의자에 앉아 고사리만 한 손으로 샌드위치를 들고 먹었다. 앙냠냠 와구와구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비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유사 진짜 귀여워… 왜 일행들이 다 인간화해 달라고 애원했는지 알 것 같아. 여우일 때도 귀엽지만, 지금 이 모습은 정말 너무 귀여워. 유사는 원래 사람 엄청나게 가리는 것 같았는데, 이렇게 같이 있어 주는 거 보면 그렇지도 않은가? 귀여워. 아 정말 귀엽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자기를 꿀 떨어지는 얼굴로 보는 이비와 눈이 마주친 유사는 이비의 크림색 머리카락을 흘긋거리더니, 다시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그리곤 다시 이비를 흘긋거리다 눈 마주치니 헤헤 웃으며 꼬리를 살랑거렸다.

‘아… 아아!!! 너무… 너무 귀여워어어어!!!’

털썩

치사량의 귀여움에 욕조 위에 엎드려 버린 이비를 본 유사가 당황해 외쳤다.

“헉! 이비! 왜 구래?! 어지러어!? 이비! 어지러우면 나와! 여기 옆에 앉아서 샌드이치 빨리 머거! 머거야 힘이 나!”

이비는 아직 한 입밖에 먹지 못한 샌드위치를 손에 쥔 채 욕조에 엎드려 바르르 떨었다.

원작에서 유사를 데리고 다니던 정령사 일라나드의 대사대로 정말이지, 귀여워 죽을 것 같았다.

그런 이비의 마음을 모를 유사는 급히 남은 샌드위치를 입에 욱여넣었다.

그리곤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려 이비의 가느다란 팔을 잡아당기며 욕조 밖으로 끌어내려 낑낑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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