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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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챕터 2

목욕 후 시종의 도움으로 외출복을 입은 이비의 기분은 최고조였다.

카르젠 덕에 편하게 목욕을 마치고, 언제 준비한 것인지 딱 맞는 사이즈의 옷과 구두도 선물받았다.

깔끔한 디자인에 고급 원단으로 만든 게 분명한 옷이었다. 구두도 처음 신는 것인데 굉장히 편했다.

어째 점점 카르젠에게 지는 빚이 늘어나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꼭 갚을 생각으로 마음속 은혜 리스트에 킵해 두었다.

잠시 후 외출 준비를 마친 카르젠이 방으로 찾아왔다. 이비는 그가 비교적 수수한 옷을 입었음에도 눈부시다 생각했다.

‘역시 패션의 완성은 얼굴….’

시공간을 초월하는 진리를 다시금 깨우친 이비는 자신에게 내밀어진 팔을 익숙하게 잡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이 세계에서의 첫 외출이었다.

***

‘우와….’

이비는 유리창에 딱 붙어 마차 밖으로 보이는 온갖 서양식 건축물을 구경하고 있었다.

살면서 처음 본 이국적인 풍경에 눈동자가 쉼 없이 움직였다.

거리엔 이비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다양한 종족이 보였고, 수도 중심에 가까워질수록 다양한 가게가 눈길을 끌었다.

거대한 햄과 소시지가 주렁주렁 달린 가게. 만화에서나 나올 법하게 생긴 빵이 잔뜩 쌓인 빵집. 온갖 반짝이는 액세서리가 진열된 상점. 테라스가 있는 찻집. 모든 것이 자신이 알던 현실과 달랐다.

‘와아아~ 저 가게는 손님이 엄청 많네. 카페인가? 건물 진짜 예쁘다! 케이크도 맛있어 보이고!’

케이크와 차를 파는 카페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고개가 꺾일 때까지 보는 모습을 지켜보던 카르젠은, 돌아가는 길에 카페에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창밖 구경 중인 이비를 바라보던 카르젠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짓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채곤 입가를 매만졌다.

이비를 구조하고 며칠간 계속 이랬다. 정신 차려 보면 늘 이렇게 웃고 있었다. 안면 근육이 살짝 땅길 정도로.

카르젠은 이비를 처음 만난 날부터 품고 있던 작은 의구심을 다시 떠올렸다.

‘아직은 섣부른 판단 같지만. 어쩌면 내 예상이 맞을지도 모르겠군.’

그때 창밖 구경에 집중하던 이비가 카르젠을 향해 고개 돌렸다.

서로 눈이 마주친 순간 카르젠은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이비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이비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곧 입술을 앙다물었기 때문이었다.

실눈으로 은근슬쩍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이비가 귀여워 쿡쿡 웃으며 물었다.

“돌아가는 길에 카페에 들를까?”

“!”

이비는 여전히 실눈 상태로 카르젠을 향해 슬쩍 고개 돌리더니 입술로 물었다.

[그래도 괜찮아요?]

“응. 이비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자.”

카르젠의 대답에 이비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실눈으로 돌아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덕분에 카르젠은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일지 또 한 번 실감하며 실소했고, 그 웃음소리에 이비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

마차가 멈추고 마부가 문을 열어 주자 카르젠이 먼저 내려 이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비는 카르젠의 손을 잡고 높은 마차에서 조심스럽게 내렸다. 수도 중심에 위치한 신전은 웅장하기 그지없었다.

푸르스름한 돌로 만들어진 거대한 건축물을 보고 순수하게 감탄한 이비는, 저 때문에 카르젠이 멈춰 있는 것을 느껴 그의 팔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신전 안으로 들어가자 넓은 홀에 신관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있었다. 홀엔 생각보다 다양한 시설이 있었다.

포션을 판매하는 신전 공식 판매처도 있었고, 에벨루스의 표식이 새겨진 팔찌나 목걸이 등을 판매하는 기념품 판매대도 있었다.

‘원래 신전에서 기념품을 파나?’

신기해하며 두리번거릴 때 수많은 초가 놓인 제단이 보였다.

이비는 저 제단을 알아볼 수 있었다. 모험을 떠나기 전, 리엔과 체스터와 카르젠과 크리시가 저곳에 큰 초를 올리고 기도했었다. 물론 초는 신전에서 유료로 판매했고, 체스터가 계산했었다.

‘우와, 생각해 보니 에벨루스 신도들 상술 대단하네….’

신전 구석구석 정신없이 구경하던 이비는, 계단 조심하라는 카르젠의 목소리에 정신 차리고 앞을 봤다. 나선형 계단을 올라 2층에 도착하니 1층 홀과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여긴 전혀 신전 같지 않네?’

복도 내부만 봤을 때 오피스텔처럼 문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카르젠은 익숙한 듯이 벽에 붙은 안내도엔 시선도 주지 않고 미로 같은 복도를 걸었다.

‘여긴 사무실 같은 곳인가?’

카르젠만 따라 걷던 이비는 멈춰선 문 옆에 붙은 <프리스트 크리시> 명패를 보자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여기구나!’

똑똑-

카르젠의 노크에 이비는 안에서 들려올 목소리를 상상하며 귀를 쫑긋 세우고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런데 기다려도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

갸웃하는 이비와 달리 카르젠은 익숙한 듯 문을 벌컥 열었다.

어둑한 내부는 카르젠의 서재처럼 정면으로 큰 창문 앞에 책상이 있었고, 책상과 문 사이에 낮은 테이블과 양 사이드로 긴 소파가 있었다.

낮은 테이블 옆 색 바랜 소파 중 하나엔 안대를 쓴 남자가 널브러져 있었다.

‘엇? 저 사람이 크리시인가?’

카르젠을 따라 들어선 이비는 저도 모르게 소파의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카르젠은 알아서 문을 닫더니 이비를 맞은편 소파에 앉혔다. 그리곤 남자에게 다가가 안대를 벗기며 말했다.

“크리시. 정신 차려. 또 과음했어?”

“으음… 늘 말하지만 내 정신은 언제나 말짱해.”

뭔가에 짓눌린 듯, 힘겹게 대답한 남자를 보던 이비는 크리시! 입술로 말하다 놀라 입을 가렸다.

그 반응에 침대에 늘어져 누워 있던 남자의 느른한 시선이 이비를 향했다.

‘크리시다! 진짜 크리시다! 은발에 푸른빛이 섞인 보라색 눈동자! 잘생긴 얼굴이지만 피곤해 보이는 인상! 크리시가 맞아! 글이 아닌 실물 크리시다!’

최애를 실물로 영접한 이비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공포의 주둥아리라고 해서 일명 ‘공주’ 캐릭터로 불렸던 크리시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피곤해 보이고 짜증 섞인 얼굴이었다.

온 세상 피로를 다 짊어진 얼굴을 글이 아닌 실제 눈으로 보니 가슴이 쿵쾅거렸다.

‘저 얼굴로 동료를 위해 신에게 쌍욕을 퍼부어 댔다니. 아아, 그 장면을 실제로 못 보는 게 너무 아쉽다….’

힘들어 죽겠으니 당장 내게 신력을 퍼부으라고, 지금 날 돕지 않으면 개종해 버린다며 신을 협박(?)하던 전투 장면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뭐지? 이비가 크리시를 아나? 책에서 봤나? 아니, 내 서재에 크리시 관련 책은 없을 텐데? 봤다 해도 왜 저렇게 기쁜 듯이….’

의아함을 느낀 카르젠은 이비의 시선을 따라 옮겼고, 그 끝이 크리시의 얼굴에 닿은 것을 확인했다.

‘아… 얼굴인가….’

이비의 열렬한 시선에 미묘함을 느끼고 있을 때, 크리시의 입이 열렸다.

“동행이 있다는 말은 안 했잖아? 누구야?”

“내 동행은 이비라고 해. 이비, 여긴 에벨루스의 프리스트 크리시. 내 오랜 친구지. 이비는 며칠 전에 경계선 숲에서 구조했고 사고로 기억을 잃어서 보호 중이야. 바론을 통해 연고를 알아보는 중이고.”

간단한 소개를 들은 이비는 크리시를 향해 꾸벅 인사했고, 크리시는 여전히 누워 말했다.

“카르가 소개한 대로, 프리스트 크리시입니다.”

이비를 살피는 크리시의 시선이 미묘한 것을 감지한 카르젠은 최소한 일어나 앉아 인사하라며 어깨를 두드렸다.

크리시는 카르젠의 손길에 억지로 몸을 일으켜 투덜대면서도 계속 이비를 살폈다.

“흠….”

‘뭐, 뭐지. 엄청나게 관찰하는데?’

“오호. 이거 재미있네.”

“뭐가?”

크리시가 묘한 미소를 띤 순간. 이비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서, 설마! 내가 기억 상실이 아닌 걸 눈치챈 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크리시가 원작에서 자주 언급됐던 <무언가 꾸미는 듯한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으아악! 내가 너무 안일했어! 신과 강하게 연결된 프리스트인데, 신이 말해 줬으면 어떡하지?’

이비는 최애를 본다는 생각에 들떠서 하필 제 최애가 강력한 신과 연결됐다는 것은 예상치 못했던 자신을 탓했다.

‘카르젠이 알게 되면 어떡하지?’

밀려오는 불안함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흐리고 있을 때, 갑자기 안절부절못하는 이비를 지켜보던 크리시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 카르. 너 진짜 별의별 거 다 줍고 다니더니, 이번엔 기억 잃은 토끼냐?”

“토끼?”

‘응? 토끼?’

<토끼>라는 말에 카르젠과 이비가 반응하기 전, 크리시가 말을 이었다.

“토끼이긴 한데 조금 흐린 것 같네. 이 정도면 하프는 아닐 거고. 쿼터 정도 될 것 같은데. 하프라면 인간이 아닌 다른 종이랑 섞였을 수도 있을 것 같고….”

“묘족이 확실해?”

“흐리지만 위에서 준 힌트니, 묘족이 섞인 건 확실해.”

“뭐라고 하셨는데?”

‘위에서 준 힌트….’

힌트를 준 대상이 에벨루스 신을 지칭하는 것을 눈치챈 이비가 침을 꼴깍 삼켰다.

크리시는 눈에 띄게 긴장한 토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별거 아니라며 대답했다.

“그냥 ‘돌아갈 길을 잃은 가엽고 사랑스러운 토끼구나.’라고만 했어. 별다른 말이 더 없는 거 봐선 이상은 알려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힌트를 주려면 좀 제대로 줄 것이지.”

“하하, 충분해. 오늘은 이비가 저택에만 있어 답답할까 봐 같이 외출한 거였어. 기대한 것도 아닌데 의외의 소득이군.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벨루스 님.”

카르젠은 제 앞의 프리스트보다 훨씬 정중하게 신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했다.

어쩌다 자신의 종족을 알게 된 이비는 얼떨떨했지만, 그보다 안도감이 더 컸다.

‘후아~ 내가 이 세계 사람이 아닌 건 들키지 않았나 봐. 저도 감사합니다. 에벨루스 님. 어쩌다 카르젠을 속이는 상황이 됐지만, 그치만 제가 카르젠에게 받은 은혜는 꼭 다 갚을게요! 그러니 제발 비밀로 해 주세요! 저 진짜 착하게 살게요!’

안도하며 마음으로 기도한 이비는 맞은편에 크리시를 흘긋 바라봤다.

그는 다리를 꼬고 소파 팔걸이에 턱을 괸 채, 이비의 옆자리에 앉은 카르젠을 향해 말했다.

“그래도 신경 쓰인다는 얼굴이네.”

“…….”

“돌아갈 길을 잃었다는 것 때문에 그러는 거지?”

카르젠을 잘 아는 크리시였다. 정곡이었는지 카르젠은 대답이 없었고, 세 사람 사이에 정적이 찾아왔다.

‘그럼… 말 그대로 내가 돌아갈 곳이 없다는 뜻일까….’

돌아갈 곳이 없다면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몸이 회복된 후에는 이 세계에서 혼자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현실이 와 닿았다.

이비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 탓인지 손이 더 떨려 주먹을 꽉 쥐었다. 점점 수전증이 심해져 주먹을 쥐고 입술을 깨문 순간. 카르젠의 큰 손이 이비의 두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

“이비. 너무 걱정하지 마. 말했잖아. 만약 이비가 돌아갈 곳이 없다면 그땐 이비가 머무를 곳을 마련해 줄 거니까. 물론 말했던 대로 기억을 찾은 후에. 그전까진 이대로 편하게 지내. 다 괜찮아질 거야.”

“…….”

제 걱정을 다 파악한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티가 났던 것인지 모르지만, 불안함을 정확하게 달래 주는 그의 넘치는 상냥함에 이비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이렇게 다정한 사람인데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이 듦과 동시에 안도감도 들었다.

안도했다는 사실에 자괴감을 느꼈지만, 그래도 이비는 공짜로 카르젠의 등골을 뽑아 먹을 생각은 절대 없었다.

‘돌아갈 곳이 없다면… 카르젠의 저택에서 일하게 해 달라고 말해 볼까? 혼자 완전 독립해서 사는 건 역시 자신 없는데… 음… 차라리 시종으로 취직시켜 달라고 하고, 그렇게 조금씩 갚으면 되지 않을까?’

다른 이라면 모르지만, 카르젠이라면 받아 줄 것이다.

동정에 기대선 안 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카르젠 곁에서 있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이 세계에서 난 카르젠밖에 모르니까… 친구가 된다면 더 좋겠지만, 어려울 것 같고. 그래도 시종이라도 된다면 자주 볼 수 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혼자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이비는 “쯧.” 혀 차는 소리에 흠칫했다. 화들짝 놀란 이비를 본 카르젠은 크리시를 흘겨봤고, 크리시는 그런 둘의 반응에 하이고… 탄식하며 말했다.

“뭐. 카르 말대로. 사람 하나 어디 안착시켜 주는 건 어렵지 않으니 너무 걱정 안 해도 될 겁니다. 그리고 지금 그게 문제가 아냐. 카르, 빨리 까라. 시작하자.”

“아아. 그래. 이비 잠시만 기다려 줘. 금방 끝날 거야.”

끄덕끄덕

‘그러고 보니 카르젠은 볼일이 있어서 온 건데 나 때문에 시간… 우앗!’

카르젠이 갑자기 상의를 벗기 시작하니 놀란 이비가 소파 구석으로 떨어져 앉았다.

“아, 또 놀라게 했구나. 미안해. 이비.”

카르젠이 즉시 사과하자 이비는 도리질하며 최대한 자연스러운 시선으로 카르젠을 흘긋 봤다.

신전에서 저 완벽한 몸을 보고 있자니 불현듯 또 자신만의 추론이 떠올랐다.

‘아무리 봐도 카르젠이 신 같은데… 미의 신이 아닐까… 박물관에 세워 둬도 동상인 줄 알고 그냥 지나칠 것 같아.’

이비의 반응을 눈여겨보던 크리시가 픽 웃으며 일어났다.

서랍장 제일 위 칸을 열어 천으로 둘둘 말아 둔 투명한 수정을 꺼내 돌아보니, 상의를 벗고 맞은편 소파로 옮겨 가 편히 누운 카르젠과 입을 가린 채 실눈을 뜨고 보는 이비가 보였다.

뻔히 다 보이는데 굳이 저렇게 실눈 뜨고 보는 걸 보니, 구멍에 머리만 파묻고 완벽하게 은신했다고 착각하는 토끼가 떠올랐다.

‘카르 저놈은 재미있는 녀석을 주웠네. 토끼랑 뭐가 섞인 건진 모르겠지만… 딱히 위험해 보이진 않으니 일단 위협은 안 될 것 같고.’

자기 방식대로 이비를 대충 파악한 크리시는 카르젠에게 다가가 수정을 그의 심장 부근에 올려 두었다. 그리곤 소파 옆 낮은 테이블에 걸터앉아 손바닥으로 수정을 덮었다.

“시작한다.”

“그래.”

카르젠의 대답을 들은 그가 기도를 시작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작게 속삭이며 기도하는 크리시의 손에 은은한 빛이 맴돌기 시작했다.

이비는 얌전히 숨까지 죽이며 편안한 얼굴로 누워 있는 카르젠을 지켜봤다. 아주 은은하고 잔잔한 빛인데도 보고 있자니 눈이 부셔서 이비는 다시 실눈을 떴다.

‘저게 신력인가… 카르젠이 웃어 줄 때 눈부신 거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다른 것 같기도 하고….’

크리시의 기도는 일정하게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에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손에서 아른거리던 빛이 너른 가슴으로 스며든 순간 카르젠이 살짝 찌푸렸지만, 크리시는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카르젠, 어디 아픈 걸까? 혹시 숲의 마법사와 거래 때문에?’

아마도 떠올린 이유가 맞을 것 같지만, 원래라면 이비가 절대 알 수 없는 일이었기에 물어볼 순 없었다.

이비는 진심 어린 걱정을 담아 카르젠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냐고 묻고 싶지만 어쩐지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체감상 대략 5분 정도 지났을 무렵, 크리시가 기도를 끝내고 손을 뗐다. 가슴 위에 올려 두었던 투명한 수정 속엔 시커먼 연기가 넘실거리고 있었고, 크리시는 그 수정을 들고 천으로 잘 싸 서랍에 넣어 두며 말했다.

“이번엔 늦게 왔는데도 양이 평소보다 적은데? 카르, 너 설마 약 기준치보다 많이 먹은 건 아니지?”

“약은 오히려 남아 있어.”

“뭣? 일주일이나 지체됐는데? 너 설마 내가 준 거 말고 다른 거 먹냐?”

“그런 거 아냐.”

“그럼 뭔데?”

크리시가 팔짱 낀 채 찌푸리며 바라보니 그가 셔츠를 입으며 대답했다.

“짐작 가는 게 있긴 한데. 확실해지면 말할게. 아직은 확실하지 않아서.”

“…….”

잠시간 카르젠을 응시하던 크리시의 시선이 이비를 향했다.

이비는 카르젠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셔츠를 다 입고 조끼와 재킷까지 챙겨 입자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나 쪼르르 다가가 슬쩍 그의 옷 소매를 잡았다.

카르젠은 익숙하게 이비에게 잡힌 손을 들어 올려 손바닥을 내주었다.

크리시는 둘이 무슨 짓을 하는 건지 궁금하다는 얼굴로 지켜봤고, 이비는 크리시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채 카르젠에게 집중하며 손가락으로 글씨를 썼다.

잠시 동안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집중한 카르젠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아, 괜찮아. 아픈 거 아냐.”

이비가 뭔가 또 열심히 쓰자 카르젠이 덧붙였다.

“응. 진짜. 전혀 아프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 말에 배시시 웃는 이비를 지켜보던 크리시는 서랍장 제일 아래 칸을 열고 투명한 액체가 가득 찬 유리병을 꺼내 내밀었다.

“용량 지켜서 마셔라. 상황 봐서 괜찮다 싶으면 2주 후에 와.”

“그래.”

“그리고 짐작 간다는 거 확실해지면 나한테도 바로 알려 주고. 긴가민가해도 알려 줘.”

“하하, 알았으니 걱정하지 마. 오늘도 고마웠어, 크리시.”

“뭘… 이제 가라.”

[안녕히 계세요.]

“예. 다음에 또 뵙죠.”

이비에게도 살짝 인사한 크리시는 다시 소파에 누웠다. 그리곤 둘이 나가지도 않았는데 안대를 끼고 늘어졌다.

카르젠은 문을 열고 이비 먼저 내보낸 후 다시 인사했다.

“갈게. 푹 쉬어.”

크리시는 이번엔 대답 대신 손을 대충 흔들어 보였다.

탁-

문이 닫히고 복도에 울리는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가만히 누워 있던 크리시는 슬쩍 안대를 올려 천장을 봤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위의 존재를 향한 시선이었다.

잠시간 천장을 뚫어지게 봐도 아무 반응이 없자 다시 안대를 끼고 최대한 편한 자세로 고쳐 누웠다.

‘그냥 지켜보라고 해서 일단 모른 척했습니다만… 보증할 수 있습니까?’

역시 반응이 없었다.

‘흠… 뭐, 됐습니다. 카르에게 해가 되는 게 아니라면 상관없지만, 만약 해가 된다면 그땐 제 손으로 처리하고 정말로 개종할 겁니다.’

누군가 파르르 떠는 것 같은 기운을 느낀 크리시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퍽 만족스러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

‘체, 체스 녀석이 왜 저기에 있어?’

제 3왕자의 자리에 서 있는 남자를 알아본 리엔의 눈이 커졌다. 그 역시 리엔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둘의 눈이 마주친 순간. 왕세자가 싱긋 웃어 보였다.

‘아, 리엔. 이쪽은 체ㅅ…’

‘체스라고 해. 반가워. 카르젠과 아주 먼 친척이야.’

처음 만났던 날처럼 장난스러운 표정에 울컥한 리엔이 제 옆의 카르젠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카르젠은 리엔의 이글이글한 시선을 무시한 채 앞만 보고 있었다. 살고 싶다면 지금 저 눈을 마주쳐선 안 될 것이다. 입단식이 끝나는 즉시 도망친다. 그게 카르젠의 계획이었다.

-야. 카르…

이 악문 목소리에 카르젠이 흠칫했다. 자세가 흐트러졌지만 이내 다시 고쳐 잡으며 왕의 연설을 듣는 척했고. 삐질거리는 카르젠을 노려보던 리엔이 씨근거리며 말했다.

-느그들… 드 즈긋쓰…

숲의 마법사 4권 42페이지 中

***

카르젠은 마치 도리질하듯 정신없이 휙휙 돌아가는 이비의 머리를 내려다보며 쿡쿡 웃었다.

식당가 골목에 들어선 순간부터 이비는 저도 모르게 카르젠의 팔을 꽉 끌어안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꽤 지난 터였지만 가게마다 손님이 어느 정도 차 있었고, 덕분에 온갖 맛있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아….”

훅 끼쳐 오는 고기 냄새를 따라 이비의 고개가 다시 돌아갔다.

‘햄버그스테이크인가? 으아, 다 맛있어 보여. 하지만 역시 첫 외식은 거기지!’

아까부터 가게를 고르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이비는 작중 카르젠과 리엔과 체스터가 자주 갔던 <콥스 아저씨의 레스토랑>을 찾고 있었다.

다양한 레스토랑의 유혹을 물리치며 식당가 중앙쯤 들어서자, 멀리 사람이 바글바글한 곳이 보였다.

테라스에 앉은 손님은 대부분 아카데미 교복으로 추정되는 옷을 입고 있는 청소년들이었고, 안쪽도 테이블이 꽤 찬 것 같았다.

카르젠은 이비의 시선이 머문 곳이 콥스 아저씨의 레스토랑인 것을 확인하곤 내심 반가워했다.

[여기 가 보고 싶어요!]

“그래. 점심은 여기로 하자.”

카르젠이 들어서자 아카데미 학생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아까부터 은근히 여기저기서 시선을 받고 있었지만, 어린 학생들이라 그런지 시선을 꾸밀 줄 모르는 모습이 귀여웠다.

이비는 다시금 카르젠의 인기를 실감했다. 모두가 그를 황홀해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저들의 대선배이자 대륙을 구한 영웅 중 하나인 그를 보는 시선은 동경과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테라스를 지나 식당 내부로 들어서자 웅성거림이 더 잘 들렸다.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사이사이 카르젠의 이름이 들렸다.

카르젠은 늘 있는 일이라 신경 쓰지 않고, 눈이 마주치는 학생이 있으면 부드럽게 미소 지어 주었다.

이비는 혹시나 그가 불편해하면 다른 곳에 가자고 하려 했는데 개의치 않는 여유 있는 모습을 보며 안도했다.

그가 불편해하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빈자리를 찾던 이비는 카르젠이 갑자기 멈추는 바람에 같이 멈췄다.

‘카르젠?’

그를 올려다본 이비는 여유 넘치던 카르젠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대체 뭐가 그를 이렇게까지 놀라게 했을까 의아해 시선을 따라가 보니 구석진 테이블이 보였다.

그 테이블을 본 순간 이비는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구석 테이블엔 의자 세 개가 있었는데, 각각 의자에 카르젠과 리엔과 체스터의 등신대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매우 공교롭게도 내부에 빈 좌석은 저 등신대 바로 옆 테이블뿐이었다.

***

어쩌다 보니 희비가 교차하는 점심 식사였다.

이비는 카르젠과 리엔과 체스터가 10대 시절 자주 방문했던 식당에서 똑같은 메뉴를 먹을 수 있어서 행복한 한편, 카르젠은 자신과 똑같은 사이즈의 등신대 옆에 앉아 평정심을 유지해야 했다.

게다가 주방에서 뛰쳐나온 콥스가 오랜만에 방문한 카르젠을 격하게 반기며 <삼총사 영웅 세트>를 만들어 주겠다고 호들갑을 떨어 더 주목을 받기도 했다.

삼총사 영웅 세트는 당연하게도, 세 사람이 10대 시절에 자주 먹었던 음식들로 구성된 세트 메뉴였다.

이비는 두말할 것 없이 저게 좋다며 끄덕였고, 주문을 마친 카르젠은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고 침음하며 말했다.

“콥스 아저씨가 여러모로 장사를 잘하시긴 하지….”

중얼거리는 그의 귀가 살짝 붉어져 있었다.

이비는 생각도 못한 등신대 진열과 좌석 배치로 인해 카르젠이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신선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그래도 자꾸만 웃음이 나려 해 일부러 음식에 몰두했다.

다행스럽게도 식전 빵부터 입에 잘 맞아 온전히 식사에 집중할 수 있었다. 버터 향 가득한 빵과 건더기 없는 크림수프는 어쩐지 그리운 맛을 느끼게 했고, 작중 리엔이 즐겨 먹었던 토마토 해물 그라탕은 비린내도 없고 굉장히 고소했다.

두 번째로 나온 요리는 남주 체스터가 선호했던 메뉴로, 온갖 야채와 소고기를 잘게 다져 얇은 피에 넣고 길쭉하게 말아 튀긴 음식이었는데 굉장히 만족스럽게 먹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카르젠이 제일 좋아했다는 닭고기와 큼지막한 야채가 듬뿍 들어간 매운 볶음 요리는 이비에게 무리였다.

꽤 매운 요리다 보니 처음부터 카르젠이 말렸지만, 이비는 카르젠의 선호 메뉴도 먹어 보고 싶다며 고집스럽게 한 입 크게 떠먹었다.

그 결과 말 안 들어서 미안하다고, 내가 잘못했다고, 너무 맵다고 딸꾹질하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

매워서 고생한 것만 빼면, 이비에게 있어서 만족스러운 첫 외식이었다.

***

점심 식사 후 콥스 아저씨의 배웅을 받으며 레스토랑을 나온 둘은 식당가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카르젠을 알아본 이들의 시선이 은근하게 쏟아져 신경 쓰일 법도 한데, 이비는 진열대에 케이크를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다.

처음 보는 과일이 듬뿍 올라간 파이와 생크림을 아끼지 않은 다양한 토핑의 쇼트케이크, 타르트부터 팬케이크와 다양한 쿠키까지… 눈에 닿는 곳마다 전부 맛있어 보이는 탓에 좀처럼 결정하지 못했다.

‘와… 전부 맛있어 보여. 하나씩 다 먹어 보고 싶다. 그러고 보니 케이크 못 먹은 지도 오래됐지….’

김현서일 적 건강상의 문제도 있었지만, 최근 2년간은 미각을 상실해 생일에도 케이크는 사지 않았었다.

쌍둥이 동생도 같은 날 생일이다 보니 김현서가 먼저 케이크를 사자고 했지만, 동생 쪽에서 거절했었다. 이비는 지금까지도 그 점이 못내 미안했다.

‘딸기 케이크는 안 보이네….’

딸기 케이크.

아직 미각이 남아 있던 시기에 가장 마지막으로 먹었던 케이크라서 더 기억에 남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비에게 있어 케이크 이미지는 딸기가 올라간 쇼트케이크였다.

‘그때 현아가 사 왔던 케이크, 딸기 진짜 많이 들어 있었는데….’

동생이 한 대학가의 유명한 가게에서 사 온 미니 홀 케이크였다.

겉은 새하얀 생크림과 딸기가 올라가 있었고, 속은 얇은 스펀지케이크 사이로 생크림 층과 커스터드 크림 층이 교차로 아낌없이 들어 있었다.

크림 층 사이사이로 슬라이스 딸기도 잔뜩 들어 있어 한 입 먹어 보곤 왜 유명한지 알 것 같다며, 동생과 한 판을 다 먹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게 거기서 제일 인기 많은 케이크야. 어때? 맛있지?

순식간에 이비의 눈이 가라앉았다.

무의식중에 생각의 꼬리를 물고, 케이크 너머에 앉아 씩 웃던 동생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자신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 그리움을 머금은 눈동자는 어느새 진열대가 아닌 바닥으로 향해 있었다.

이비는 바로 직전까지 디저트에 정신이 팔려 두근두근했던 가슴이 묵직하게 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애써 마음을 다스리고자 일부러 다시 진열장을 바라봤지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아는데, 지금은 그저….

“이비?”

나지막한 부름에, 울고 싶은 기분을 꾹 누른 이비가 카르젠을 올려다봤다. 자신을 향한 그의 눈빛이 걱정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괜찮아?”

한결같이 다정한 물음에 이비는 습관대로 살풋 웃어 보였다.

자기를 염려하는 이들에게 늘 그랬던 것처럼, 지금 카르젠에게 자신이 괜찮다는 것을 보여 줘야 했다.

[괜찮아요.]

카르젠의 시선이 벙긋거린 입술에 머물렀다.

이비는 제 대답을 이해한 그가 또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다행이라 말해 줄 거란 생각에 슬쩍 실눈 뜰 준비를 했다.

하지만 카르젠은 웃어 주지 않았다.

[카르젠 님?]

의아함에 이비는 저도 모르게 카르젠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시선이 이비의 입술에서 눈동자로 옮겨 왔다. 짧게 이비를 살핀 카르젠이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이비는 카르젠의 팔을 잡고 따라 걸으며 눈치를 살폈다.

‘어디 가는 거지?’

그를 따라 걷던 이비는 그제야 주변의 시선을 느꼈다.

카르젠을 알아본 이들이 동행인 자신을 궁금해하고 있었다.

‘갑자기 왜 이렇게 부담스럽지….’

주변의 시선은 아까부터 받고 있었는데, 왜 이제야 신경 쓰이는지 모를 일이라 생각한 이비는 애써 담담하게 굴었다.

카르젠은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 번화가를 등지고 섰다. 덕분에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게 된 이비는 안도하면서도 걱정했다.

카르젠이 여전히 웃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만 마주치면 웃어 주던 사람이, 지금은 그저 처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비는 아마도 그가 알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지금 자신이 괜찮지 않다는 것을.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야 했다. 기억 상실에 걸린 사람이, 온전히 가져올 수 없어 가슴에 묻어 둔 추억 때문에 잠시 슬퍼졌다고 솔직하게 대답할 수 없었으니까 괜찮다며 웃어야 했다.

“이비.”

어떻게 해야 괜찮게 보일지 고민하던 이비는, 조용한 부름에 다시금 그의 눈을 마주했다.

그리곤 자신을 걱정하는 것을 숨기지 않는 그의 모습에 담담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잠시 다른 생각해서, 그래서 그래요. 저 진짜 괜찮아요.]

입술을 읽은 카르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네 얼굴이 어떤지 보여 주고 싶네….”

이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렇게 억지로 웃지 않아도 돼. 괜찮지 않으면 솔직하게 괜찮지 않다고 해도 돼.”

“…….”

나지막한 말의 뜻을 인지한 이비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까부터 억지로 꾹꾹 눌러 밟았던 것이 발끝부터 스멀스멀 제 몸을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뭔지 모를 저것이 몸에 스미지 못하게 하려고 어떻게든 내리누르려는데, 카르젠이 말을 이었다.

“누구든 항상 괜찮을 수는 없어. 그러니 괜찮지 않은 감정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여야 해.”

“…….”

카르젠의 잔잔한 목소리를 듣던 이비의 눈앞에 딸기 케이크 너머에서 환하게 웃고 있던 동생의 모습이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저가 케이크 먹는 모습을 지켜보며 저 몰래 입술을 말아 넣고 어떻게든 웃으려고 노력하던 동생의 모습이 연이어 아른거렸다.

“힘들겠지만 괜찮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인 후에 몸에서 내보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마음에 병이 생기게 될 거야. 그러니 억지로 참으면 안 돼.”

“…….”

억지로 의연하게 웃던 동생의 모습과 케이크가 흐려지며 카르젠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비는 계속 무시하려 했던 것이 점점 제 몸에 스며들어 빠르게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다시 손이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고 가슴은 답답해졌다. 목이 메었다. 눈가가 시큰시큰 아파 오기 시작했다.

결국 빈틈으로 훅 파고들어 온 감정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애써 다른 생각을 하려 하니, 카르젠이 제 떨리는 손을 맞잡아 주었다.

“…….”

“이비.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 울고 싶을 땐 울면 돼. 울어서 눈물로 흘려보내 버려.”

‘아….’

순간 이비는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카르젠의 말 때문이 아니라. 선명하게 떠오른 숲의 마법사의 구절 때문이었다.

<이 거래를 통해 그대는 지금 이 순간부터 슬픔을 간직하게 되고, 흘려보내지 못해 잊지 못하게 될 것이다. 긴 삶 속에서 겹겹이 쌓이는 슬픔을 평생 안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비는 카르젠이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한 거래에서 숲의 마법사에게 빼앗긴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눈물』

본디 눈물은 슬픔이 쌓여 독이 되지 않게끔 몸 밖으로 흘려보내기 위한 방어 기제인데, 그걸 빼앗긴 카르젠은 평생 슬픔을 지녀야 하는 몸이 되었다.

흘려보내지 못한 슬픔은 흐려지지 않고 선명하게 존재해 그의 마음을 갉아먹게 될 것이라는 구절을 떠올린 이비의 눈가가 뿌옇게 변했다.

카르젠은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자신에게 울어도 괜찮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다른 이유가 아닌, 이비라는 사람을 위해.

‘내가 울면, 주변 사람들이 슬퍼해….’

그런 이유로 늘 괜찮다고 해야 했다. 그런데 울어도 된다는 말을 들으니 제 의지와 관계없이 이비의 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이비는 이 세계에 온 순간부터 생각하고 싶지 않아 일부러 무시하고 꾹꾹 밟았던 그리움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한번 길을 튼 눈물은 쉼 없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카르젠은 여전히 담담하게 이비를 바라보고 있었고, 이비는 그런 카르젠을 향해 힘겹게 입술을 움직였다.

[집에… 돌아가고 싶어요.]

입술을 읽은 카르젠은 잔잔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집으로 돌아가자.”

물론 지금 이비가 그리워하는 집은 다신 돌아갈 수 없는 곳이었다.

상실의 아픔에 눈물이 쏟아졌지만, 카르젠이 함께 돌아가자고 말해 준 순간 이비는 자신에게 새로운 돌아갈 장소가 생겼다는 것을 알고 끄덕였다.

복받치는 슬픔 속에서도 안도감을 느낀 이비는 눈물을 참지 않았다.

오랫동안 꾹 참았던 울음이 터진 순간 카르젠은 맞잡았던 손을 놓고 이비를 살포시 당겨 안았다.

이비는 그의 너른 가슴에 안겨 숨이 차오를 만큼, 소리 없이 크게 울었다.

카르젠의 말대로 이비는 받아들이기 두려웠던 감정을 인정하고 품었다.

그리고 그 슬픔을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

‘부끄러워… 골목이라고는 하지만 길거리에서 펑펑 울다니. 그것도 카르젠 품에 안겨서… 아니, 지금도 안겨 있지만….’

카르젠은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세수하고 겨우 진정한 이비에게 기분 좋아지는 방법을 알고 있으니 기다리라고 말해 주었다.

이비는 얌전히 자신의 침실에서 기다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르젠이 직접 수레를 밀고 들어왔다. 수레 위 칸엔 차와 온갖 디저트가 있었고 아래 칸엔 몇 권의 책과 향초가 있었다.

그는 알아서 침대 옆 협탁에 음식들을 올려 두고. 책도 올려 두었다.

향초는 창가 쪽 테이블에 켜 두고 침대로 다가왔다.

그는 이비가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실례하겠다며 이비의 몸을 번쩍 안아 들었다. 그대로 침대 중앙에 눕히더니 이불로 이비의 몸을 차곡차곡 말았다.

“아, 아우?”

당황한 이비가 이게 뭐냐는 듯이 웅얼거리자 그는 이불을 둘둘 말며 말했다.

“옛날에 친구가 알려 준 거야. 행복한 부리또라고 하더군. 기분 좋아지게 만드는 방법 중 하나지.”

“…….”

이불 끝자락을 틈새에 꽂아 넣은 카르젠이 침대 헤드에 기대앉았다. 그리곤 잘 말아 둔 이비맛 부리또를 안아 제 무릎에 앉혔다.

정신없이 카르젠이 하는 대로 가만히 있던 이비는 정신 차려 보니 또 그의 품에 안긴 상태였다.

‘이런 건 또 처음이네….’

이불에 폭 싸인 몸이 포근했다. 게다가 카르젠은 안아 주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안락함마저 느끼게 해 주는 그의 품에 이비는 편하게 기댔다.

카르젠은 한입에 먹기 편하게 잘라 온 작은 디저트 중 하나를 콕 찍어 이비의 입에 댔다. 이비는 살짝 입술을 벌려 디저트를 받아먹었다.

초콜릿 맛 크림을 품은 바삭한 동그란 과자였다. 고급스러운 맛 홈○볼 같다고 느낀 이비가 쿡쿡 웃자 카르젠 역시 미소 지었다.

이비는 자신을 내려다보며 웃는 카르젠을 보니 문득 궁금해졌다. 아니, 사실 처음 이 저택에 와서부터 궁금했던 부분이었는데 어쩐지 물으면 안 될 것 같아 묻지 못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래. 집으로 돌아가자.’

카르젠이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해 주었다. 어쩐지 지금은 물어도 될 것 같았다.

답을 들어도 두렵지 않을 것 같은 확신에 이비가 입술을 움직였다.

[궁금한 게 있어요.]

“어떤 거?”

[저한테 왜 이렇게까지 잘해 주세요?]

“…….”

물론 카르젠이 기본적으로 상냥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작중에서도 늘 구제 불능 호구라며 리엔에게 자주 가슴 싸대기를, 체스터에겐 등짝을 맞는 장면이 유독 많았고, 나중엔 참다 터진 크리시에게 멱까지 잡혔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아무리 기본적으로 상냥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지나치지 못하는 그라고 해도, 이비에겐 넘칠 정도로 잘해 주고 있었다.

이비 입장에서 그는 생명의 은인이자 머무를 곳을 기꺼이 내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비는 카르젠에게 준 것이 없었다. 그래서 궁금했다. 그가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인지.

만약 제게 바라는 게 있다면, 그게 뭐든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그에게 주고 싶었다.

이비는 카르젠의 대답을 기다리며 똘망한 눈망울로 그를 바라봤고, 그 눈빛을 마주한 카르젠은 그러게… 작게 중얼거리며 말했다.

“으음…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까….”

“…….”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카르젠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간 생각을 정리하던 그는 자신이 고민하는 동안 이비의 입에 다른 디저트를 넣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번엔 슈크림이었다. 이비가 천천히 오물오물 꼭꼭 씹어 삼킬 때쯤 카르젠이 나지막이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의 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이비가 필요한 상황이야. 이에 대해서는 조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게 될 것 같은데. 괜찮아?”

끄덕끄덕

바로 끄덕이는 이비와 달리 잠시 망설인 카르젠이 말을 이었다.

“질문에 먼저 답하자면. 이비의 건강 상태를 고려해서 전반적으로 신경 쓰긴 했지만, 거기엔 다른 이유는 없어. 이비가 하루빨리 건강해졌으면 했고. 이비가 뭐든 맛있게 먹는 게 보기 좋아서 이것저것 더 먹여 주고 싶었어.”

이비가 느끼기엔 의아할 정도로 과하게 잘해 주고 있었지만, 저 카르젠이라면 그럴 수 있다는 생각에 일단 끄덕였다.

이비가 얌전히 듣자 또 잠시간 뒷말을 고민한 그가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다만, 저것과는 별개로 내가 이비와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의도한 부분도 있어. 그리고 여기엔 나름의 이유가 있는데….”

‘응? 일부러 나랑 시간을 보내려고 했다고?’

이비가 갸웃하자 그는 초코 크림이 들어 있는 홈○볼 같은 과자를 하나 더 입에 쏙 넣어 줬다.

“우선 내 몸 상태에 대해 설명을 해야겠네. 아까 신전에서 크리시가 내 몸에서 뽑아냈던 건 이비도 봤지?”

오물오물 냠냠 끄덕끄덕

열심히 과자를 씹던 이비는 그것이 아마도 눈물을 잃은 카르젠의 몸에 쌓인 <슬픔>일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현 상황에서 이비가 알 수 없는 부분이었기에 그에게 직접 듣고 싶었다.

카르젠은 오물거리던 이비의 입이 멈추자 이번엔 포도 한 알을 입에 넣어 주며 말했다.

“몇 년 전에 사고가 있었어. 그 사고 이후 후유증으로 난 눈물을 흘릴 수 없게 됐어.”

이어진 카르젠의 이야기는 사실을 말하면서도 이비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이야기였다.

모든 것을 초월한 존재와의 조우와 거래도, 소중한 이를 지키기 위한 숭고한 희생도, 기적적으로 지켜 낸 것에 대한 이야기도 없는 매우 함축된 사실이었다.

마치 가벼운 사고로 인한 후유증이라는 듯이 축약한 과거를 서술하는 카르젠은 평온해 보였다.

그래서 이비도 무거운 이야기임이 분명한 그의 과거를 다소 편안하게 들을 수 있었다.

“감정을 가진 생물의 몸은 신기하게도, 눈물을 흘려야 가슴에 쌓인 상처를 흘려보낼 수 있다고 해.”

끄덕끄덕

“시적인 표현 같지만 사실이야. 사고 이후로 내 몸은 슬픔을 흘려보낼 수 없게 됐고, 덕분에 부정적인 기억들을 자력으로 잊을 수 없게 됐어. 그게 쌓이고 쌓이다 보니 이비가 본 것이 내 안에 생기기 시작했어. 그건… 음, 일종의 독 같은 거라고 비유하면 될 것 같네. 진짜 독은 아니지만 가지고 있어서 좋은 건 절대 아닌 그런 것. 아까 이비에게 했던 말도 그래서 그런 거였어.”

끄덕

-힘들어도 괜찮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인 후에 몸에서 내보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마음에 병이 생기게 될 거야. 그러니 억지로 참으면 안 돼.

-이비. 울고 싶을 땐 울면 돼. 울어서 눈물로 흘려보내 버려.

골목에서 카르젠이 했던 말을 떠올린 이비는 가장 걱정됐던 부분을 입술로 벙긋거리며 물었다.

[계속 참아서 마음속에 쌓이면… 아파요?]

“제때 중화하지 않으면 여러 증상이 나타나는데 늘 아픈 건 아냐. 어떤 날은 그냥 피곤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감기 기운이 있는 것처럼 조금 아프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속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아, 이비.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신전에서 만든 해독 포션으로 일상생활은 가능하니까.”

다양한 증상을 들은 이비의 표정이 눈에 띄게 안 좋아졌다.

카르젠은 마치 가벼운 중독 정도로 말하고 있지만, 눈물로 흘려보내지 못해 몸에 쌓인 독이 얼마나 몸에 안 좋은지 예상할 수 있었다.

한국만 해도 오만 감정을 배출하지 못하고 꾹 참다 참다 생기는 화병이 있지 않은가.

그렇게만 생각해도 큰 병을 가지고 있는 거나 다름없는데, 이비가 볼 때 카르젠이 가진 슬픔은 보통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슬픔이 아니었다.

그는 전쟁을 이겨 낸 영웅이었다. 즉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많은 좌절을 겪고, 그 과정에서 함께했던 소중한 이들이 떠나는 것을 지켜봤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괜찮다고 말하는 카르젠을 보며 이비는 격한 안타까움을 느꼈다. 카르젠은 분명 이비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팠을 것이다.

이비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몸이 아픈 게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큰 무력감을 느끼는지. 그리고 아픈 건 본인이면서 괜찮다고 말하는 게 어떤 건지도 너무 잘 알았다.

‘카르젠도 아프면서 다른 이들에겐 늘 괜찮다고 말해 왔겠지… 그러니 나에게 그런 조언을 해 줄 수 있었던 거야….’

이비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지니 카르젠이 급하게 덧붙였다.

“크리시 덕분에 주기적으로 뽑아내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약이나 신력이 아니라도 도움이 되는 완화 방법도 있어. 스스로 마음의 평화를 찾는 거라고 해야 할까?”

[마음의 평화요?]

“응. 일종의 스트레스 해소야. 스트레스가 쌓일 땐 숲 경계선 근처까지 가서 몬스터를 토벌하며 풀곤 하거든. 그렇게 쌓인 걸 풀어내면 증상 완화에 꽤 도움이 돼.”

‘허… 몬스터 토벌이 스트레스 해소라니, 그럼 그날도 몬스터 때려잡으러 숲에 들어갔다가 날 발견한 거구나… 진짜 신이 도운 타이밍이었나 봐….’

온화하다고만 생각했던 카르젠의 은밀한 스트레스 해소법을 알게 된 이비는 퍽 당황했다.

그런 이비의 표정을 잘못 해석한 것인지 카르젠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 주듯 말했다.

“무거운 이야기로 이비를 걱정하게 했으니 빨리 좋은 이야기도 해야겠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비와 있으면 내 컨디션이 좋아지는 것 같아.”

“아우?”

진심으로 놀라 벙긋거린 이비에게 차근차근 말을 이었다.

“그날 숲에서 이비를 구조하고 이비가 깨어날 때까지 쭉 곁에 있었어. 그리고 그동안 나는 매일 네 번씩 마셔야 하는 해독 포션을 전혀 마시지 않았어.”

“!?”

이비의 입이 쩍 벌어졌다. 당황해 뭐라 말하지 못하고 있을 때 벌어진 입으로 이름 모를 과일이 쏙 들어왔다.

일단 넣어 주니 열심히 씹어 삼키려 했지만 알이 너무 컸다. 그 잠깐 새를 참지 못한 이비가 꼼질꼼질 팔 한쪽을 빼 카르젠의 쇄골 아래에 슥슥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며 물었다.

-그럼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맞아. 안 되지. 그런데 이비의 곁에 있을 땐 마치 사고를 당하기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어. 항상 내 안에 있던 묵직한 덩어리가 느껴지지 않았어.”

“…….”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이비는 혼란스러웠다. 혹시 우연의 일치로 갑자기 완치된 건 아닐까 싶었지만, 오늘만 해도 그의 몸에서 추출된 슬픔을 보았다.

“처음엔 단순히 최초로 생존자를 발견해 흥분하고 정신없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래도 종일 포션을 마시지 않고도 괜찮은 건 처음이라 일부러 더 버텨 봤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이비와 있을 땐 정말 괜찮았어. 어느 정도 확신이 든 것은 내가 잠자리에 들 때와 숲에 소지품을 수습하러 다녀왔을 때야. 이비와 떨어지고 시간이 흐르니 확연하게 느껴졌어. 내 안의 시커먼 존재가….”

“…….”

왜 자신과 있을 땐 괜찮은 건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은 이비는 슬쩍 팔을 넣고 입술로 말했다.

[전 아무 힘도 없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걸까요?]

“그건 나도 모르겠어.”

[어쩌면 우연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지. 그래서 오늘 외출하며 다시 한번 시험해 보려고 했었고.”

‘시험?’

순간 이비는 자신이 같이 외출하고 싶다고 말하기 전, 카르젠이 홀로 외출해 저녁까진 돌아오겠다고 했던 게 떠올라 경악했다.

[그럼 오늘 혼자 외출 하셔야 했는데 저 때무ㄴ… 읍!]

벌어진 입으로 또 과일 조각이 쏙 들어왔다.

오물오물

카르젠은 넣어 주는 대로 잘 먹는 이비를 향해 걱정 말라며 살풋 웃었다.

“괜찮아. 아까 크리시가 그랬잖아. 양이 줄었다고.”

“…!”

“크리시가 이상하게 느낄 정도면 정말 많이 줄었다고 보면 돼. 평소엔 수정이 새카맣게 변할 정도로 뽑아내거든.”

“…….”

“확 줄어든 양을 보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었어. 어쩌면 정말로 이비와 함께 있어서 괜찮아지는 게 아닐까 하고.”

“…….”

이비에겐 퍽 혼란스러운 이야기였다.

카르젠의 가설이 사실이라면 다행이지만, 만약 우연이거나 일시적인 현상이라면 자긴 아무 도움도 안 될 거라는 생각에 괜스레 시무룩해졌다.

카르젠은 그런 이비의 표정을 살피더니 슬쩍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한테 많이 실망했어?”

“읏?”

‘대체 무슨 소리야? 실망이라니? 내가? 카르젠한테?’

당황한 이비가 어버버 바라보고 있으니 카르젠이 쓰게 웃으며 덧붙였다.

“지금 이런 말 하기도 그렇지만… 내 추론에 대해 확신이 필요해 일부러 이비와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했던 거지, 절대 일방적으로 이비를 이용하려고 잘해 준 건 아니야. 정말 별개야.”

이비는 카르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멍하니 바라보다, 흠칫했다.

<저한테 왜 이렇게까지 잘해 주세요?>

어쩌다 이런 긴 이야기가 나왔는지 떠올린 이비는 당황한 나머지 급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절대로! 진짜로!]

격한 반응에 안도한 카르젠이 옅게 웃었지만, 다소 힘없는 미소였다. 카르젠의 처연한 얼굴에 충격받은 이비가 덧붙여 입술을 벙긋했다.

[저를 돌봐 주시는 상황인데다가 억지로 머물게 하신 것도 아니잖아요. 카르젠 님이 아프지 않을 수 있으면 저도 좋아요. 그리고 어차피 카르젠 님이 구해 주지 않았다면….]

잔뜩 흥분해서 저도 모르게 우다다 입술을 움직이던 이비가 멈칫했다.

이렇게 많은 말을 빠르게 전달한 건 처음이기에, 혹시 카르젠이 다 알아듣지 못했을까 봐 다시 꼬물꼬물 팔을 꺼냈다.

쓱쓱- 꾹꾹-

쓱쓱쓱-

카르젠은 이비의 입술을 전부 읽었지만, 당황해 허둥지둥 제 가슴에 꾹꾹 또박또박 써 주는 모습이 귀여워 애써 처연한 표정을 유지하며 읽었다.

-그날 카르젠 님이 구해주지 않았다면 난 분명 숲에서 죽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카르젠 님께 도움이 된다면 뭐든 하고 싶어요.-

이비는 여전히 의기소침한 카르젠의 얼굴을 살피며 긴 메시지를 천천히 이어 나갔다.

스슥-

쓱- 쓱쓱-

-다만 일시적인 효과였거나, 단순한 우연이었다면 제가 카르젠 님에게 도움이 안 될까 봐 그게 걱정돼서 그래요. 진짜라면 좋을 텐데….-

‘내가 뭐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저 가설이 진짜라면 좋을 텐데….’

이비의 얼굴을 살피던 카르젠은 저러다 울겠다 싶어 처연한 표정을 싹 지우며 말했다.

“일시적이거나 우연이라 해도 상관없어. 난 이비가 건강을 회복하고 잘 먹고 웃는 모습만 봐도 기뻐. 그것만으로도 이비는 이미 내게 큰 도움을 주고 있는 거야.”

카르젠의 진심이었다. 카르젠에게 있어 이비는 실로 큰 업적이었으니까.

어린 시절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슬픔과 절망을 안겨 주었던 경계선 숲에서 처음으로 구해 낸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큰 위안이었다.

카르젠의 말에 이비는 조금은 놀란 것 같은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또 입술 삐죽 내밀고 있네. 귀여워라.’

며칠간 지켜본 결과, 이비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할 때 저렇게 입술을 삐죽 내밀고 살짝 찌푸린다는 걸 파악한 카르젠은 묘한 기대감이 들었다.

모르긴 몰라도 어쩐지 대담한 발언을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얌전히 기다렸다.

짧게 생각을 마친 이비는 잠시 망설였지만, 곧 카르젠의 너른 가슴에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쓱쓱-

쓱- 쓰슥-

“음?”

쓱쓱-

쓱-…

“흐음….”

가슴에 새겨진 말을 이해한 카르젠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이비의 제안에 답했다.

“괜찮을 것 같네. 그럼 오늘부터 같이 잘까?”

끄덕끄덕

카르젠은 제 품에서 비장한 얼굴로 끄덕이는 부리또를 보고 있자니 입술이 씰룩거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비는 카르젠을 즐겁게 해 주고 있었다.

***

<밤을 철저하게 방해하는 별들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숲의 마법사 소설에서 자주 나오는 표현이었다. 하늘을 수놓은 별이 일상인 곳. 모든 별이 각자의 노래를 하는 숲의 마법사의 세계 필리스.

당시 김현서는 별의 노래라는 말이 참 낭만적이라고 생각했었다. 대체 얼마나 많은 별이 떠 있기에 밤을 방해한다는 표현까지 나왔을까?

물론 별이 가득한 밤이라면 김현서도 알고 있었다. 사진과 영화 기타 등등으로 간접 경험했을 뿐이지만 말이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난 전혀 모르고 있었어.’

이 세계를 글로만 알던 김현서의 기억을 떠올린 이비는 창밖의 별을 구경하며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

자다 깨 버린 후, 잠 때를 놓쳐 다시 잠드는 것을 포기한 상태였다.

오늘도 별이 밝은 밤이었다. 단순히 밝은 정도가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 검은 실크 위에 큐빅 한 포대를 쏟아부어 둔 것 같았다.

반짝이는 별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 주고 싶어 하는 것처럼 빛났다.

그 반짝임을 한참 동안 감상하던 이비는 제 옆의 남자를 향해 흘긋 시선을 돌렸다.

조용히 잠든 카르젠은 CG 덩어리 같았다.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것 같았다.

‘아무리 하프엘프라도 어떻게 이렇게 잘생겼지?’

엘프와 인간의 혼혈이라고 해도, 보면 볼수록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며칠 내내 봤으면 익숙해질 법도 한데, 이비는 아직도 그가 환하게 웃으면 후광에 눈이 부셨다.

지금도 그랬다. 그저 잠들었을 뿐인데 지금 이비에겐 창밖의 별보다 카르젠이 더 빛나 보였다.

신기하게도 보면 볼수록 하염없이 바라보고 싶었다.

‘이 세계엔 온갖 신이 다 있으니 카르젠도 신일지도 몰라. 얼굴의 신.’

이비는 아직 저 가설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필리스는 태초부터 신이었던 몇몇 존재들을 비롯해 나중에 신력이 생겨 각성하는 하급부터 상급 신까지 온갖 신이 다 있는 세계관이니 충분히 가능성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대상을 신이라 믿는 신도가 있고 개화의 자질을 가진 자라면 미미하지만, 신력을 가질 수 있게 된다고 했다.

물론 신력을 가져도 신으로 각성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꽤 많은 다양한 하~중급 신들이 나온 걸 봐선 불가능해 보이진 않았다.

‘설정대로라면 내가 계속 카르젠을 얼굴의 신이라고 믿는다면, 언젠가 각성하지 않을까? 신력이 생겨서 스스로 슬픔을 뽑아낼 수 있다면 최곤데! 신도를 많이 모으긴 해야겠지만, 카르젠 얼굴이면 금방 모일 것 같고….’

이비의 생각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카르젠은 숙면 중이었다.

잠시간 편안하게 잠든 얼굴을 바라보던 이비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아직 깊은 새벽이니 다시 잠들어야 했다.

이비는 이렇게 밤새도록 카르젠과 함께 있어 준 후, 혼자 외출했다가 저녁 전에 돌아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저택에서 지내게 해 준다고 했으니, 나도 나름대로 일자리를 알아봐야겠지.’

콥스 아저씨의 레스토랑이 있던 곳은 온갖 가게가 몰려 있는 곳이었고, 그런 밀집 지역엔 큰 게시판이나 전단지가 비치된 곳이 많았다.

카르젠과 함께 구경하느라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게시판에 구인 광고가 생각보다 꽤 많았다.

비치된 광고지 중 일부는 귀퉁이에 큰 글씨로 [쉬운 일/초보자 가능] [짧은 근무 시간 내 고수입 가능] [처음도 환영! 성실하기만 하면 합격] 등의 문구로 강조된 구인 광고도 분명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라도 조금씩 해 봐야지. 처음부터 배우는 자세로 한다고 하면 싼값에라도 일할 수 있지 않을까?’

이비는 자신이 가진 핸디캡을 잘 알고 있었다.

상대가 입술을 읽을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언어적 소통이 불가능하니, 대화가 많이 필요한 일은 힘들 거란 생각에 조금 시무룩해졌다.

‘으음~ 그래도 두 다리로 걷고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건 굉장한 거니까! 천천히 걸으면 괜찮고. 그러고 보니 오래 서 있어 본 적이 없네. 가능할까?’

수전증도 아직 남아 있었다. 가끔 뭐가 문제인지 몸이 잘게 떨리기도 했고 통증은 없지만 여러 증상이 이비의 몸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래도 이비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노력했다.

꼭 대화 없이, 또 오래 서 있지 않아도 분명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으려 노력했다.

만약 없다면 시간을 줄여 일하면 된다. 계속 찾아보면 된다. 할 수 있을지 없을지 아직 모르니 해 보고 고민하면 된다며 스스로를 도닥였다.

지금은 그저 두 다리로 스스로 걸을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이비는 자신이 가진 행복으로 걱정을 감싸 안으며 다시 잠에 빠지기 시작했다.

근거 없는 희망일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이비는 기분 좋게 다시 잠들 수 있었다.

***

카르젠과 단둘이 아침 식사를 마친 이비는 외출한다고 말하려 했지만, 때를 놓쳐 버렸다.

식사 중엔 카르젠이 묻는 이야기에 답하거나, 그가 저를 향해 웃어 줄 때 시선을 흐리느라 말하는 것을 깜빡했기 때문이었다.

식사 후엔 카르젠에게 손님이 찾아와 서재로 간 바람에 꽤 오랜 시간 기다렸지만 도통 나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야기가 길어지는지, 시종들이 다과와 새로 우린 찻주전자 수레를 끌고 들어간 게 벌써 세 번째였다.

‘성에서 온 손님이라고 했지. 체스터가 보낸 걸까? 나라에 중요한 일이면 더 늦을 수도 있을 거고. 어쩌지. 부집사 할리스에게 이야기하고 나가야 하나?’

고민하며 슬쩍 식당으로 들어선 이비는 삼삼오오 앉아 쉬며 과자를 먹던 시종들과 눈이 마주쳤다.

카르젠의 손님으로 머무는 중인 이비를 본 시종들이 일어나 인사하려 하자 이비는 손사래 치며 도리질했다.

이비는 요청사항을 미리 적어 둔 수첩을 가지고 총총 다가가 낯익은 시종에게 머뭇거리며 내밀었다.

그녀는 이비가 보여 준 수첩의 내용을 보더니 아! 하며 끄덕였다.

“빵과 물 말씀이시군요. 바로 준비해 드릴게요. 방으로 가져다드릴까요?”

도리도리

이비가 식탁에 수첩을 올려 두고 목탄으로 다시 깨알같이 글씨를 쓰기 시작하니 시종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이게 뭐라고 괜히 긴장해 손이 살짝 떨렸지만, 열심히 글을 써 보였고 시종들은 내용을 꼼꼼히 읽었다.

“외출이요? 그럼 도시락처럼 포장해 드리면 될까요? 카르젠 도련님과 함께 외출하시는 거죠?”

갈색 단발머리의 동글동글 통통한 시종이 갸웃하며 물었다.

아니라고 도리질하기 전에 옆에 있던 긴 머리를 단정하게 땋은 시종이 미소 지으며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샌드위치로 만들어 드릴게요. 마침 좋은 햄이 들어왔거든요.”

‘아니 그냥 빵이면 되는데!’

“차도 따로 담아 드려야겠네요! 율리, 차는 내가 준비할게.”

‘아니, 진짜 빵만 줘도 되는데!’

“응! 그럼 주디는 차를 준비해 줘. 이비 님,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곧 준비해 드릴… 에?”

당황한 이비가 또 무언가 마구 적자 율리와 주디를 포함한 몇몇 시종들의 얼굴이 더 수첩으로 기울어졌다.

“아, 혼자 외출하세요?”

“카르젠 도련님과 동행이 아니시고요?”

시종들이 의아해하며 되묻는 모습에 이비 역시 의아해하며 끄덕였다.

‘혼자 외출하면 안 되나…?’

딱히 그런 이야긴 듣지 못했기에 당황하며 머뭇거리자, 시종들 역시 조금 망설였지만 이내 끄덕였다.

“그럼 방에서 기다려 주시면 이비님 몫만 만들어서 바로 가져다드릴게요.”

다행히 외출을 막지 않아 안도한 이비는 방긋 웃으며 고맙다고 입술로 인사했다. 그리곤 총총 식당을 나섰다.

어쩐지 신난 모습으로 식당을 나선 이비를 지켜보던 시종들은 문이 닫히자마자 서로 마주 봤다.

“아직은 혼자 거동이 어려우시지 않아? 혼자 외출하셔도 괜찮으실지 모르겠는데….”

“오늘은 혼자 잘 걸으시니 괜찮지 않을까?”

“우리가 판단할 일은 아니잖아. 도련님은 아직 서재에서 안 나오셨지?”

그 물음에 마지막으로 차를 날랐던 율리가 대답했다.

“응. 앞으로 차는 새로 가져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어. 중요한 이야기 중이시거나 아님 반대로 금방 끝날 예정이시겠지.”

시종들은 잠시 고민했지만 뭐, 손님이시고 목적지도 있으신 것 같으니 괜찮으시겠지. 정도로 마무리 짓고 각자 도시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

방에서 기다리던 이비는 잔뜩 설렘을 안고 외출에 가져갈 것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우선 카르젠이 준 수첩과 목탄을 챙기고, 카르젠이 직접 세탁해 준 제 손수건도 챙겼다.

애초에 가진 것이 별로 없어 외출 준비가 간소했지만 괜히 신이 났다.

가방을 싸고 있으니 아까 율리라고 불린 긴 머리를 단정하게 땋은 시종이 노크하고 들어섰다.

“이비님. 여기 샌드위치랑 차도 준비했어요. 음식이 상할 수 있어 차는 미지근하게 우렸는데 괜찮으세요?”

끄덕끄덕

이비는 격하게 끄덕이며 입술로 고맙다고 인사했다.

율리는 새하얀 천으로 싸 온 도시락을 이비의 가죽 가방에 직접 챙겨 넣어 주며 말했다.

“저, 이비님. 마차가 필요하시면 준비해 드릴까요?”

이비는 자기가 마음대로 카르젠의 마차를 사용해도 될지 몰라 머뭇거렸다.

그 머뭇거림을 눈치챈 듯 율리가 말을 이었다.

“목적지와 마지막으로 머무르실 장소를 알려 주시면, 돌아오실 때 맞춰서 다시 모시러 가게끔 준비할게요. 이비 님은 카르젠 도련님의 손님이시고, 도련님께서 직접 이비 님께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준비해 드리라고 하셨어요.”

이비는 저를 배려해 주는 율리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수첩에 목적지와 돌아올 시간을 적어 보여 주었다.

“에벨루스 신전 근처 번화가 말씀이시군요.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해 달라고 할게요. 외출 준비가 끝나시면 중앙 현관으로 오시면 돼요.”

끄덕끄덕

율리는 이비에게 상냥하게 웃어 준 후 방을 나섰다.

‘내 또래인가? 카르젠의 저택 사람들은 다 상냥하네….’

이비는 저택 시종들이 자신을 극진히 대해 주는 것은 고맙지만, 아직은 그런 대접이 어색하고 조금은 미안했다.

카르젠의 슬픔에 자신이 정말 효과가 있다면, 그 가설이 맞는다면 자신이 이 저택에서 일하는 것은 분명 나쁘지 않은 선택지같이 느껴졌다.

‘진짜 내가 도움이 된다면 카르젠 곁에 있으면서 저택에서 일하면 되지 않을까?’

카르젠의 가설을 들은 후로 이미 몇 번이고 생각했던 부분이었지만, 먼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고민했다.

‘으으… 지금 고민해 봤자 해결될 일도 아니고. 나중에 이야기가 나오면 그때 물어봐야겠다. 일단은 무일푼 신세를 벗어나기 위해 단기라도 일자리 찾는 게 중요해!’

이런저런 생각 끝에 나름의 결심을 하고 조용히 앉아 기다리자 창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창가로 다가간 이비는 마차에 올라앉은 마부가 율리와 이야기 중인 것을 보곤 바로 방을 나섰다.

혼자 하는 첫 외출에 이비는 마치 모험을 떠나는 기분으로 카르젠의 저택을 나섰다.

***

…-하니 잡배들은 신관 나부랭이가 겁먹었다며 킬킬댔다. 조롱을 무시한 채 기도를 끝마친 크리시가 천천히 눈을 떴다.

-뒤지면 좋은 곳으로 가게 해 달라고 기도했나 보지?

크리시는 이 상황이 그저 귀찮고 상당히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대꾸조차 하기 싫다는 얼굴이었지만,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언질을 주는 것 정도는 나쁘지 않다고 판단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도 부족한 제가 아둔한 자들을 품지 못하고 죽기 직전까지 팬 것에 대해 회개했습니다.

-하?

-무슨 헛소… 커헉!

킬킬대던 남자들은 갑자기 날아가 털썩 쓰러져 버린 동료를 보곤 당황해 입을 쩍 벌렸다. 쓰러진 남자는 눈을 까뒤집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의기양양했던 이들이 동시에 얼빠진 얼굴로 신관을 바라봤다. 부쩍 피곤해 보이는 크리시가 번뜩거리는 모닝스타를 고쳐 쥐며 말했다.

-원래 회개란 사고 치기 전에 미리 밑밥 까는 용도로 하는 겁니다. 그리고 위에 계신 분께서는 제 기도를 잘 들어주시는 편이지요. 공교롭게도 편애받고 있거든요.

숲의 마법사 4권 103페이지 中

***

“그럼 물자 건은 처리되는 대로 알려 줘. 예레스 영지는 드디어 복구됐군.”

“예, 단장님. 예레스는 어제 마무리됐고, 다음 주부터 예정대로 아브델과 스트라우 영지 임시 거처에서 지내는 난민 이동이 있을 계획입니다.”

“그래. 산사태로 가는 길이 험할 테니 기사단 인원을 조금 늘리는 게 좋겠어.”

“예. 우선 1차 이동은 2기사단 중 일부가 먼저 출발할 예정이며, 3기사단과 1기사단에서 차출해서 다음 날 남은 난민들과 이동 계획입니다. 저도 난민들과 함께 갈 예정이고요. 2차 이동은 거동이 불편한 난민들과 이동 시설 위주로 천천히 움직일 예정입니다.”

“수고 많았어. 마이어. 이대로 보고하면 되겠어.”

카르젠은 왕세자 체스터에게 최종적으로 올릴 결재 서류에 하나하나 서명하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리엔이 인계받아 처리 중인 캔디 건은 어떻게 됐지?”

“아… 유포자는 일부 잡아들였는데 별다른 도움은 되지 않았습니다. 제작자에 대해 계속 조사 중이지만, 면밀한 것 같더군요. 이미 시장에 워낙 많이 퍼진 상태라 회수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카르젠은 홍등가에서부터 퍼지기 시작한 <캔디> 제작자가 아직 잡히지 않았다는 것에 미간을 찌푸렸다.

저 캔디는 일반적인 캔디가 아닌, 알 수 없는 성분이 들어간 마약류 캔디였다. 섭취하면 비정상적으로 성적 흥분을 일으키는 약이었고, 섭취 시 체질에 따라 과민 반응으로 심정지가 와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성행하는 이유는 섭취할 경우 성행위 지속 시간을 늘려 준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물론 대부분 저 효과를 보긴 했지만 부작용 역시 만만치 않았다.

자진해서 먹고 부작용으로 죽어 버린다면 안타까워도 자초한 일이라며 넘길 수 있겠지만, 문제는 아무것도 모르고 받아먹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범죄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었고 캔디가 무슨 용도인지 알고 먹는 이들도 있었다. 알고 먹는 경우는 대부분 정신적인 고통을 줄이고자 자발적으로 먹는 이들이었고, 이런 성범죄 피해자는 대부분이 생계를 위협받는 난민들이나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종족들이었다.

“신경 쓰이지만, 리엔이 맡게 됐으니 곧 해결하겠지. 마이어 자네도 조심해. 모르는 사람이 주는 음식은 함부로 받아먹지 말고.”

“다, 단장님. 제가 아이도 아니고….”

“자넨 공짜 술이라면 마다하지 않잖아. 캔디 형태로만 유포된다고 보기 어려우니 하는 소리야. 녹인다면 음료에도 충분히 응용 가능할 거고.”

“세상에! 소름 돋네요!”

마이어가 과장되게 부르르 떨었다.

카르젠은 서명한 잉크가 마른 것을 확인하고 서류를 돌돌 말아 3등급 보안 리본으로 묶으며 말했다.

“원래 나쁜 것은 형태를 바꿔 쉽게 접근하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그렇죠… 그래도 공짜 술 거부하긴 역시 힘들 것 같으니. 매일 미리미리 독 중화 포션을 마셔 둬야겠습니다.”

“…….”

카르젠은 뭔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저렇게라도 대비하면 뭐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직접 뽑은 제 1기사단 부단장 마이어였다. 경박해 보여도 책임감 있고 성실한 녀석이니 근무 중에 음주하진….

“마이어. 근무 중엔 절대 마시지 마.”

“단장님… 저 정말 철들었다고요… 자꾸 그러시면 저 울면서 나갈 겁니다?”

“이 저택에서 자네가 운다고 신경 쓸 사람 없어.”

정말 너무한다며 눈썹을 늘어뜨리던 마이어는 카르젠이 서류를 다 묶어 주자 받아 가방에 넣으며 넌지시 물었다.

“저, 단장님. 개인적으로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무슨 질문일지 예상한 카르젠은 말해 보라는 듯이 소파에 편히 기대앉으며 바라봤고, 마이어는 머뭇거리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 단장님께서 구조한 분에 대해 소문이 무성합니다.”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무성한가?”

“예, 뭐. 이 바닥이 그렇잖습니까. 아직 저택에 머물고 계신다고 하던데. 혹시….”

“혹시 뭐.”

“어, 음, 그러니까.”

카르젠이 이어질 말을 기다리니 마이어가 시선을 흐리며 말했다.

“그, 음. 크흠. 혹시… 곧 발표하실 건 없으신지?”

“발표는 무슨. 자네들이 생각하는 그런 건 아냐. 괜한 소리 나오지 않게 단속 잘 해 줬으면 좋겠군. 특히 리엔에과 체스터에게 전해. 궁금하면 직접 방문하라고.”

“쿨럭! 쿠, 쿨럭! 크흠. 아, 아닙니다. 이건 그냥 제가 궁금해서 여쭤본….”

“사정이 있어서 보호 중인 것뿐이야. 리엔과 체스터에겐 그렇게 전해.”

“예에….”

대답하면서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어제 카르젠이 굉장히 사랑스러운 사람과 데이트를 했다는 목격담이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리엔이나 크리시나 체스터를 제외하면 사적인 자리에서 절대 단둘이 식사를 하는 일이 없던 카르젠이 누군가와 보란 듯이 평범한 데이트를 즐기고, 게다가 골목에서 끌어안고 키스한 것을 봤다는 목격자도 있었다.

목격자는 기사단원의 먼 친척이자 아카데미에 다니는 학생의 같은 클래스 친구 아무개라고 했던 것 같았다.

멀리 돌아 들려온 이야기였지만, 소문의 주인공이 스캔들 하나 없었던 카르젠이다 보니 이미 궁성은 후끈 달아올라 있는 상태였다.

심지어 체스터 왕세자까지도 기사단원들의 이야기에 가던 길을 멈추고 경청했다는 말도 있었다.

귀족 사이에서, 그리고 성 내에서 소문이 어떻게 퍼지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카르젠은 말을 아끼고 있었지만, 조만간 리엔이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침음하며 말했다.

“자네들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해서 미안하군. 사적인 부분이니 말할 수는 없지만, 그는 날 도와주고 있어.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라고 볼 수 있지.”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라는 말에 마이어의 눈빛이 빛났다. 카르젠은 급히 덧붙였다.

“마이어. 제발. 자네가 뭘 생각했든 그건 아냐. 이상하게 해석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크흠. 흠흠. 아니, 단장님. 제가 뭐 매일 이상한 것만 생각하는 줄 아시나 봅니다. 전 그저 모든 면에서 완벽한 단장님께서 타인에게 도움받으실 일이 뭐가 있을지 궁금했을 뿐입니다.”

“입에 기름칠해도 나오는 거 없으니 그만하고 차나 마셔. 자네 차 좋아하잖아. 가져오는 족족 다 마셔 댈 정도로.”

“쿨럭! 그, 그, 그, 그렇죠? 제가 차를 또 엄청나게 좋아하죠.”

모유 대신 맥주를 마시고 자랐다는 말을 들을 만큼 술 외에 다른 음료는 입에 대지도 않는 그 마이어가 차를 좋아한다니. 누가 들으면 기함할 말이었다.

“언젠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차를 다 마셔 보는 게 목표입니다. 그래서 단장님 댁의 차부터 섭렵해 보려 합니다.”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늘어놓은 마이어는 카르젠의 무반응에 민망해하며 차를 마셨다.

쓴 차를 홀짝이는 그의 귀가 살짝 붉어져 있었다. 마이어는 카르젠이 일부러 저렇게 말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제 직속상관은 자신이 차를 좋아하지 않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물보다 술을 좋아하는 자신이 왜 여기만 오면 혀를 데어 가면서까지 급하게 차를 비워 대는지 이미 간파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마이어는 카르젠의 언급에 확신을 느꼈다. 그래서 어차피 들킨 김에 뻔뻔해지기로 했다.

“그… 단장님. 크흠. 그… 음… 그… 주, 주디 말입니다. 호, 혹시… 마, 만나는 사람이….”

“주디에게 직접 물어봐.”

“혹시 그녀의 이상형이라도….”

“직접 알아내. 난 모르니까.”

“그러시군요….”

마이어가 눈에 띄게 의기소침해졌다.

오늘 차와 다과는 처음엔 주디가 가져왔지만 이후론 쭉 율리가 담당했다.

서재 문이 열릴 때마다 마이어의 표정이 점점 시무룩해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지켜봤던 카르젠이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마이어. 자네는 늘 상상 이상의 대범함을 보였는데, 이상한 데서 소극적이군.”

“저도 이런 제가 조금 신기합니다. 단장님. 직원들 복지는 잘해 주고 계시죠? 휴일 보장이라든가….”

“당연하지.”

“그럼… 음… 그… 혹시 휴일이 언제인지….”

“직접 물어봐.”

“물어볼 기회가 없잖습니까아아…!”

“…….”

“제발 도와주십시오. 단장님! 제가 단장님 대신 칼 맞았던 거 잊으신 거 아니죠?”

“꼬마 아이의 장난감 칼 말이지. 기사단이 꿈인 어린아이를 놀라게 해서 울렸던….”

“크흠! 가끔 변신 마법으로 어린아이처럼 위장하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그땐 다행히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전 단장님을 위해 칼 맞을 각오도 되어 있다는 겁니다!”

말이나 못 하면… 딱 그렇게 쓰인 눈빛이었지만. 그것이 자신을 향한 카르젠의 깊은 애정이라 해석한 마이어가 밝게 웃으며 두 손을 꼭 모아 잡으며 말했다.

“단장님! 제가 잘돼야 단장님도 마음이 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딱히? 지금보다 더 잘될 필요가 있을까…?”

“!!!”

당연히 제 부하를 놀리고자 던진 말이었지만, 너무 진지하게 대답해서인지 마이어의 반응이 격해졌다.

“단장님께서 부재라 제가 얼마나 고생 중인지 아십니까아아! 위에선 닦달하지! 밑에 녀석들은 치고 올라오려 하지! 죽겠단 말입니다! 제가 구차하게 이런 것까지 말씀드리지 않으려 했는데, 단장님의 휴식에 방해될까 봐 단장님 선까지 올라가려는 문제 몇 개는 제가 도맡아 처리 중이란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단장님을 생각하는데….”

“나 대신? 뭘 처리 중인데?”

딱 자르고 묻는 말에 마이어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입술을 삐죽이며 보고하기 시작했다.

“뭐, 대부분 캔디 관련 목격자 진술 확보나, 언데드 공격을 주장하는 사망 사건의 흔적 추적이나 근처 몇몇 영지에 곧 형이 집행될 사형수의 시신을 화장하지 말고 돌려달라는 사형수 가족들의 청원서나 뭐 그런 것들뿐이지만요.”

줄줄이 읊는 이야기만 봐도 작은 일들이 아닌 것은 분명했기에 카르젠은 제 부하를 다시 보면서도 마지막 말에 신경이 쓰였다.

“시신을 화장하지 말고 돌려달라고 요청했다니? 지금까지 형 집행 후에 유가족에게 시신을 인계하지 않았단 말인가?”

“아브델은 아니고 남쪽 지방 영지에서 올라온 청원서인데, 아마 요즘 이래저래 시기가 안 좋다 보니 그랬던 것 같습니다.”

“대체 시기가 어떻게 안 좋아야 그런 처우를 하는 거지?”

카르젠 입장에선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만, 마이어는 여상스레 설명했다.

“다른 지역은 몰라도 남쪽은 올여름에 전염병도 돌았잖습니까. 그래서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사형을 집행하자마자 바로 화장해 버리는 추세였다고 합니다.”

“맙소사….”

카르젠이 탄식했다. 마이어는 자애로운 제 주인이 경악하는 모습에 어떻게든 안심시키고자 빠르게 말을 이었다.

“소문의 근원은 사형수 유가족들이었습니다. 몇몇 유가족이 형 집행 후 시신 확인도 못하고 바로 뼛가루만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소문이 퍼졌다고 합니다. 그렇다 보니 아직 형 집행이 남은 사형수의 가족들 사이에서 말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만요. 꽤 많은 청원서가 모여서 일단 확인은 해 볼 생각입니다.”

“체스터는 이 부분에 대해 별말 없었나?”

“왕세자님께서도 꽤 고심하신 것 같습니다. 오늘 중으로 어떻게 처리할지 지침을 정하시겠다고 하셨고요. 확정되면 아마 난민 이주 원정을 돕고 전 바로 남쪽으로 내려가게 될 것 같습니다.”

마이어의 보고에 카르젠의 눈이 동그래졌다. 저 정도 규모의 이야기라면 분명 제 귀에도 들어왔어야 했을 텐데, 지금 이 자리에서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유가족과 협의 없이 화장을 했다? 아무리 전염병이 있었다고 해도 따로 그런 공문을 내린 적은 없을 텐데? 대체 어느 영지에서 그렇게 대처하고 있지?”

“청원서 출처를 봤을 때 대부분 튜르카 영지랑 오델림 영지에서 청원이 모인 상태고. 스트라우 영지에서도 말이 나오는 것 같더군요.”

“…….”

카르젠이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빠지려던 찰나, 마이어가 덧붙였다.

“단장님.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여론은 전염병이 창궐한 영지였던 튜르카와 오델림에서 이런 세세한 것까지 대처를 잘했기 때문에 더 큰 확산을 막았다는 의견이 대부분입니다. 유가족들과 협의 없이 화장한 것은 확실히 윤리적이지 못하긴 합니다만… 사실 당시 상황을 고려해 보면 발 빠른 대처였다고 생각합니다.”

마이어는 말끝을 흐리며 이어질 말을 삼켰다. 사실상 마이어는 사형을 선고받을 정도로 큰 잘못을 저지른 사형수의 시신을 어떻게 처리하든 알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물론 유가족들의 상실감은 별개였고 그들은 죄가 없지만, 다소 과한 감이 있다 해도 두 영지의 전염병 관련 대처는 적절했다고 평가하는 쪽이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수도 아브델까지 전염병이 올라오지 않을 수 있었다. 카르젠은 평소부터 내심 죄수들은 사람 취급 하지 않았던 마이어의 견해와는 별개로 이상함을 느끼며 물었다.

“마이어. 자네가 혼자 처리할 수 있겠어?”

“혼자는 아니죠. 왕세자님께서 원로회의 후 남쪽 영지에 파견단을 꾸려 주실 겁니다. 제게 맡기시는 것만 봐도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니 정말 단장님께서 염려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잘 처리하겠습니다.”

그저 저가 관심 있는 대상의 휴일을 알려 달라며 조르고자 꺼낸 이야기에 제 상관이 진지하게 반응하는 것을 본 마이어는 후회하기 시작했다.

물론 마이어가 자신의 직책에 비해 많은 일을 떠맡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충성심에서 나온 부분이었고, 휴직 중이면서도 온갖 일을 떠맡은 제 상관을 위해서였다.

덩치 큰 제 직속 부하의 어깨가 점점 늘어지는 것을 본 카르젠이 한숨을 참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카르젠은 제 말 한마디에 저리 솔직하게 반응하는 대형견 같은 그를 꽤 아꼈다.

“일단 알겠어. 자네가 고생이 많았군. 마지막 건은 신경 쓰이니 내게도 중간중간 보고해 줘.”

“옙!”

카르젠은 조끼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봤다.

벌써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빨리 마이어를 치우지 않으면 분명 점심도 먹고 가겠다고 할 것이 분명했다.

밥 정도 먹이는 건 문제가 안 되지만, 이비와 마주치게 했다가 성에 퍼질 소문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아 결국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리고… 주디에게 잡화 심부름이라도 시킬 테니. 성에 가는 길에 같이 마차 타고 가.”

“!”

“자네 말은 여기에 두고 나중에 알아서 찾아가든 말든 하….”

“예! 나중에 찾으러 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역시 단장님이 최고임다!”

카르젠은 제 말도 끊고 목청 터져라 단장님 최고를 외치려는 그를 저지하며 덧붙였다.

“단, 이런 자리 마련해 주는 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그리고 주디가 곤란하지 않게 잘 처신해. 조금이라도 꺼리는 기미가 보이면 바로 물러나고. 기사의 명예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도록.”

“당연히 곤란하게 하지 않습니다아! 아 진짜 단장님, 저에 대한 평가가 너무 박하십니다!”

카르젠은 마이어와 고작 두 시간 정도 함께했을 뿐인데 피로감이 밀려오는 걸 느끼며 도리질했다. 벌써 이비가 그리운 기분이었다.

“할리스. 들어와.”

서재 문이 열리며 밖에서 대기 중이던 부집사 할리스가 들어섰다.

“마차를 준비해 줘. 이 녀석 성까지 태워다 주는 김에 주디에게 심부름 보낼 일이 있어.”

“저, 도련님….”

할리스의 표정이 살짝 난처해 보였다. 어지간한 일로 저런 표정을 지을 부집사가 아닌 것을 알기에 카르젠이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그게, 지금 막 전해 들었습니다. 이비님께서….”

“이비? 이비가 왜?”

카르젠이 바로 묻자 이비라는 이름에 마이어 역시 시선이 돌아갔다.

할리스는 그 시선을 눈치챘음에도 급한 사항이라 판단해 나지막하게 말했다.

“도시락을 가지고 홀로 외출하셨다고 합니다….”

“뭐? 언제?”

“한 시간 정도 지났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저도 지금 막 전해 들은 터라….”

“목적지는?”

“어제 방문했던 상점가 근처에서 내리셨다고 하셨다고 합니다.”

***

쏴아아아- 아름다운 조각들 사이로 시원한 물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수도 번화가에서 만남의 장소로 가장 많이 꼽히는 거대 분수대에는 다양한 종족이 몰려 있었다.

각 상점가 입구마다 있는 게시판을 확인하고 전단지를 모으고 다니느라 지친 이비 역시 인파에 섞여 있었다.

‘와… 분수 진짜 크다! 트레비 분수 같아! 트레비 분수를 실제로 본 건 아니지만….’

선대 영웅들의 조각이 새겨진 분수대는 규모가 대단히 컸다. 덕분에 분수대 가장자리도 넓어 앉을 자리가 넉넉했다.

이비는 분수대 가장 구석에 걸터앉아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많은 이들이 분수대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다.

약속 장소로 잡고 일행을 기다리는 이들도 있었고, 분수대 근처 노점을 구경하는 이들도 있었다.

아카데미 교복을 입은 학생들도 많이 보였고, 귀족 영애로 보이는 소녀와 곁에 호위 기사로 보이는 이도 있었다.

머리 위로 뾰족한 귀와 바지 구멍 밖으로는 긴 꼬리가 솟아 있는 반인반수 종족들도 보였고, 에벨루스 신전이 근처에 있어서인지 소매통이 큰 신관 복을 펄럭이며 다니는 이들도 가끔 보였다.

이비는 다양한 이들이 한데 어우러진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느꼈다.

잠시 쉬며 광장을 구경하다 보니 간식을 파는 노점들도 꽤 보였다. 그중 가장 가까운 노점은 처음 보는 과일을 쌓아 두고 파는 주스 가게였다.

‘와, 저건 과일을 바로 짜서 만들어 주네? 엄청 맛있겠다!’

주스를 보니 지쳐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갈증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주스 맛있겠다….’

하지만 이비는 무일푼이었다. 말 그대로 땡전 한 푼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비는 슬퍼하지 않았다.

‘후후, 이럴 줄 알고 준비했지.’

의기양양하게 가방을 열고 마개가 꽉 닫힌 물병을 꺼내 뽁! 뚜껑을 뽑았다.

꼴깍꼴깍

향긋한 차를 몇 모금 마시자 절로 햐아아~ 소리 없는 감탄이 흘렀다.

갈증을 해소하고 나니 기분이 좋았다. 시원한 가을바람도 좋았고 앞에 주스 노점에서 풍기는 상큼한 과일 향도 좋았다.

‘하~ 날이 참 좋다. 오늘 뭔가 되는 날인가 봐! 이제 일자리를 찾아볼까!’

병을 다시 잘 막아 가방에 넣은 이비는 슬슬 골라 온 전단지를 보기 시작했다.

‘그래야 나도 밥값을 하겠지. 일단 이건 서빙이네? 흠, 서빙….’

<앙드레의 스테이크 하우스 홀 서빙 모집. 연령 무관. 종족 무관. 시급 8천 클로.>

8천 클로면 한국 돈으로 8천 원이나 마찬가지인 화폐단위였다.

숲의 마법사 작가가 단위 환산이 귀찮아 책정을 저렇게 했을 거라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다행히 이비에겐 큰 도움이 됐다.

‘8천 클로 괜찮네. 그런데 지금 몸으로는 서빙은 무리일지도 모르겠네. 그래도 시급이 좋으니 일단 킵해 두자.’

이비는 홀 서빙 알바 전단지를 꼭꼭 접어 가방에 넣고 다음 전단지를 읽었다.

<봉봉 과일 가게 납품 배달하실…>

다 읽지도 않은 이비는 아무래도 이 몸으로 배달은 무리라며 바로 다음 장으로 넘겼다.

<목조 건물 건축 일손…>

역시 넘겼다.

<물자 운송용 짐마차 개조…>

<올랜도 주점 주방 보조 경력자 구…>

<광부 모집. 수정 광산 경력…>

<육두마차 마부…>

<경력 조각사 모집…>

팔랑 팔랑 팔랑 연속으로 넘긴 이비는 다음 전단지를 눈여겨봤다.

<초대장 등 간단한 메시지 대량 대필 단기 근무자 모집. 연령 제한 없음. 대륙 공용어 외 사용 가능 언어 있을 경우 우대. 초대장 한 세트당 2000 클로 지급. 보통 장당 2~3줄 간단한 문구.>

‘어? 이건 괜찮을지도? 근데 한 세트가 10장? 음. 으음~ 초대장 같은 거면 길진 않겠지? 짧으면 나쁘진 않은데에… 내 글씨도 괜찮을까? 수전증만 심해지지 않으면 될 것 같기도 하고… 일단 이것도 킵!’

꼭꼭 접어 킵 쪽에 내려 둔 후 다음 전단지를 읽었다.

<간단한 의상 수선. 꼼꼼한 성격이신 분. 수선 건당 차등 지급. 자세한 조건은 협의.>

‘음… 아무래도 이렇게 수전증 심한 손으로 바느질은 어렵겠지….’

아쉽지만 넘긴 후 다음 전단지를 읽기 시작한 이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판타스틱 하우스에서 가족같이 지낼 직원 모집! 타인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고 상냥한 마음을 가진 직원 구합니다! 종족 및 성별 무관. 용모단정한 성인식 지난 이만 가능. 시간당 2만 클로.>

‘진짜 시급이 2만 클로라고!?!?’

확 와닿는 금액에 잘못 봤나 싶어 다시 살펴봐도 2만 클로라고 쓰여 있었다. 이비는 눈을 반짝이며 상세 조건을 읽기 시작했다.

<원하는 시간 지정 근무 가능. 중식 제공. 초보자 가능. 단기 가능. 직원끼리 사이 좋음. 가족 같은 분위기. 친구와 함께 근무 가능. 원할 경우 숙식할 수 있으나 면접 때 협의 필요. 실적에 따라 추가 지급 가능. 어렵지 않은 일. 손님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기만 하면 되는 아주 쉬운 업무.>

‘우와…! 단기 근무도 가능하고, 근무 시간 지정도 가능하네!? 게다가 손님이 하는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된다고? 이거 완전 나를 위한 조건이잖아! 또 지나가던 신님이 도와주셨나! 신전 근처니까 혹시 에벨루스 님인가!?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좋아. 이런 좋은 조건이라면 빨리 선점해야 해! 가게 약도가, 음… 여기가 어디지? 으음….’

전단지의 약도가 너무 조잡해 요리조리 돌려보며 위치를 파악하던 이비는 갑자기 제 앞에 드리운 그림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어…?’

바로 앞에 다가온 남자는 이비가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전단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보수 좋은 일자리 찾나 봐요? 여기 내가 일하는 가게 옆이라 잘 아는데 괜찮아요. 직원들도 친절한 편이고. 마침 근처 가는 김에 데려다줄까요?”

그의 친절한 제안에 이비는 역시 오늘은 운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다.

뭐든 잘될 것 같은 그런 날.

이비는 망설임 없이 끄덕이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

사각사각.

사각.

쓱쓱.

사각사각.

소파 위 포근한 방석에 몸을 말고 누워 있던 아기 여우의 귀가 쫑긋거렸다.

작은 아기 여우는 깃펜 움직이는 소리가 듣기 좋았는지, 사각사각 소리에 맞춰 꼬리를 살랑거렸다.

큰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따스한 햇볕과 한낮의 여유로움은 아기 여우에게 만족감을 주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창밖이 조용했다. 청각에 귀 기울여 보니 조금 전까지 연무장에서 울려 퍼지던 궁성 기사단원들의 기합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오전 훈련이 끝날 시간. 즉 점심시간이 됐음을 인지한 아기 여우는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작은 동물의 움직임을 포착한 남자가 살짝 고개 들어 부드럽게 미소 지어 주었다.

아기 여우는 수려한 용모의 남자를 바라봤다. 햇살을 머금은 백금발 머리카락이 은은히 빛났다. 가볍게 내리뜬 눈은 보석같이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를 담고 있었다.

후아앙 하품한 아기여우는 저를 바라보는 다정한 시선을 새침하게 마주하며 소파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작은 발로 총총 책상으로 다가가 가늘게 뜬 눈으로 도도하게 남자를 올려다봤다. 귀엽게도 도도한 얼굴과 상반되게 꼬리는 양껏 살랑대고 있었다.

“올라올래?”

나지막한 물음에 아기 여우는 대답 대신 그의 다리에 몸을 비비며 뀨뀨 소리를 냈다.

최고급 원단으로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제작된 바지에 털을 뿜뿜 묻히고 나서야 만족스럽다는 듯이 뀨~ 웃는다.

이것만 봐도 시종장이 기겁하며 달려들 사항이었는데, 아예 한술 더 떠 발톱을 세우고 남자의 바지를 푹푹 찍어 오르기 시작했다.

“아파, 이 녀석아.”

등반을 마친 아기 여우는 남자의 허벅지에 꼬리를 말고 앉아 옷 위로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훌륭한 복근에 몸을 기댔다.

익숙하게 아기 여우를 무릎에 앉힌 남자는 다시 깃펜으로 글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움직이는 깃펜을 지켜보던 아기 여우의 귀가 쫑긋거리더니 앞발을 슬쩍 책상 위로 올리려 했다.

“이 서류는 중요해서 발도장 찍으면 안 돼.”

“꾸웅….”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서일 경우 종종 귀퉁이에 발도장을 찍게 해 주었는데, 지금은 안 된다는 말에 앞발을 내린 아기 여우가 불만스레 남자의 바지를 뜯기 시작했다. 투정 섞인 앞발질에 남자가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어 주며 달래 주었다.

“유사. 착하지. 조금만 더 참아. 금방 끝내고 맛있는 거 먹고 산책 가자.”

“뀨.”

며칠째 성 밖에 나가지 못했던 유사는 산책이라는 말에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한껏 치켜들었다. 불신 섞인 의심의 눈초리에 남자가 쿡쿡 웃었다.

“진짜야. 오늘은 꼭 산책하러 간다고 약속할게.”

“후웅.”

두고 보겠다는 듯이 여전히 눈을 가늘게 뜬 유사가 얌전히 엎드렸다. 남자는 유사의 작은 몸을 토닥여 주며 깃펜을 잉크병에 담갔다 뺐다.

그렇게 종이에 다시 새로운 열을 추가하려는 때, 마나의 파동이 느껴졌다. 공기의 흐름이 바뀐 것을 느낀 유사가 벌떡 일어나더니 집무실 창가를 바라보며 아르릉거렸다.

남자는 유사를 안고 일어나 마나와 공간이 뒤틀리기 시작한 지점을 점잖게 바라보았다.

몇 초 지나지 않아 그와 아기 여우의 시선이 닿은 바닥에 빛나는 문양이 나타났다.

문양의 주인을 알아본 유사는 아르릉거리는 대신 꼬리를 격하게 흔들기 시작했고, 남자는 아기 여우에게 약간의 배신감을 느꼈다.

“너무하네. 유사… 내가 이렇게 극진히 모시고 있는데….”

“뀨!”

유사는 벌써 남자의 품에서 뛰어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작은 엉덩이가 들썩였는데, 그 움직임에 맞춰 풍성한 꼬리가 남자의 양 볼을 왕복하며 철썩철썩 때렸다.

바닥의 문양이 빛을 발하며 슈와앗- 작은 소음을 내며 빛을 발했다.

테두리부터 타들어 가듯 문양이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동시에 빛줄기가 가늘어지며 한 남자의 인영이 나타났다.

실루엣만 보고도 누군지 알아본 아기 여우는 꼬리를 파닥거리며 외쳤다.

“카르! 카르!”

빛이 소멸한 자리에 완전히 나타난 카르젠을 반갑게 부르며 달려간 유사는, 깡충깡충 뛰며 안아 달라 애교를 부리다 심각한 표정을 보고 멈칫했다.

“카르?”

“유사….”

짐짓 심각한 표정에 반가움을 애써 억누른 유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카르젠이 무언가 들고 왔는데, 그게 자신을 위한 선물은 아닌 것 같았다.

카르젠은 제 발 앞의 작은 아기 여우를 안아 들며 인사했다.

“유사. 안녕. 체스터, 미안하다. 급한 일이라 연락 없이 왔어.”

놀랄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블랙드래곤의 마법으로 보호받는 성에 무단으로 들어올 수 있는 이는 없었다.

특히나 왕세자의 집무실이라면 그가 허락한 단 네 명만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럼에도 저 고지식한 왕세자의 오랜 친우는 굳이 사과했다. 체스터는 손사래 치며 말했다.

“됐고. 무슨 일이야?”

“유사의 도움이 필요해.”

유사는 이미 카르젠이 손에 쥐고 있는 셔츠에 코를 박고 킁킁대고 있었다.

모르는 냄새였다. 그런데 카르젠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누굴까? 갸웃하며 킁킁대는 모습에 체스터가 흥미롭다는 듯이 물었다.

“소문의 그?”

“그래.”

“가면서 설명해 줘.”

“유사랑 둘이….”

“내 친우의 정인이 위험에 처한 것 같은데, 뭐라도 거들어야 내 마음이 편하지 않겠어?”

정인이 아니라고 말하려던 카르젠은, 지금은 그럴 시간도 아깝다고 판단했다.

“고마워. 유사. 가자.”

“앙! 카르랑 산책 져아!”

아기 여우가 힘차게 대답하며 방긋 웃는 모습에 체스터가 처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참 섭섭해. 섭섭하다고….”

***

그래서 카르젠은 아예 고개를 쳐들고 별을 세기 시작했다. 차라리 그게 나은 선택이었다.

일행들의 반응을 하나하나 살핀 루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대들은 늘 인간의 기준으로만 생각하는군. 지금도 그래. 인간의 기준으로 날 그렇게 귀여워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다시 말하지만 나는 묘족 중에서도 아주 근엄한 장로였다네.

쫑긋한 귀까지 포함해도, 제 가슴께에 미치지 못하는 루의 말에 리엔이 입술을 말아 넣었다.

어떻게든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체스터는 일부러 루의 귀 끝부분을 보며 대화하고 있었다. 정면으로 마주한다면 200살 이상 연상인 전직 묘족 장로를 마구 귀여워할 것 같았다.

숲의 마법사 4권 211페이지 中

***

한 손엔 크림빵이 잔뜩 들어 있는 봉투를, 다른 손엔 생과일주스를 들고 있는 이비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보였다.

본래의 목적을 잊고 그를 따라다니며 광장 근처 유명한 가게 투어를 하게 된 이비는 물고 있던 막대 사탕을 잠시 빼고 그의 곁에 섰다.

그가 뭐 더 갖고 싶은 건 없냐며 내려다보자 빵이랑 주스, 그리고 기념품 가게에서 사 준 엽서도 고맙다고. 나중에 꼭 다 갚겠다고 방긋 웃으며 입술로 말했다.

작은 입술의 느릿한 움직임을 읽어낸 남자는 붉게 부어오른 이비의 뺨과 손목의 멍 자국을 보며 쯧. 혀를 찼다.

“뭘… 얼마 하지도 않는 거. 갚을 필요 없습니다.”

그가 오만상 쓰며 사양했지만, 이비는 오늘 그가 사 준 것들을 전부 기억해 두겠다고 다짐했다.

손에 든 게 많아 불편해 다시 사탕을 입에 물자 볼이 얼얼하게 아팠다.

볼 안쪽까지 욱신거렸지만 참을만했고, 무엇보다 조금 전에 먹은 크림빵이 너무 맛있어서 크게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이비는 저에게 고통과 달콤함을 동시에 선사한 남자를 평소보다 훨씬 후하게 평가하고 있었다.

‘역시 상냥해. 엄청 신경 써 주기도 하고. 아까 까칠해 보였던 건 그냥 피곤해서였나 봐!’

누군가 본다면 지금도 충분히 까칠해 보일 터였지만, 이비는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며 해석했다.

남자는 이제 슬슬 가자며 앞장서 걸었다. 그러다 거리가 벌어지면 느린 이비의 걸음에 맞춰 멈춰서 기다려 주기도 했고, 이비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며 동행했다.

그런 모습 하나하나에 감동한 이비는 역시 상냥한 사람이라 결론지으며 얌전히 그를 따라 걸었다.

계속 그의 등만 보며 걷다 보니 어느덧 실내에 들어서 굽이굽이 뻗은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리고 좋게 말하면 소박한 느낌의, 보통 사람들이 본다면 허름한 느낌이 드는 컴컴한 방에 도착했다.

남자의 안내를 받은 이비는 이미 한번 앉아 봤던 낡은 소파에 편히 앉았다.

바로 앞 낮은 테이블 위에 빵 봉투와 주스를 내려 두고, 가방을 풀어 옆에 둔 이비는 맞은편 소파에 털썩 누운 남자를 바라봤다.

어째 첫 만남보다 더 피곤해 보이는 남자를 보니 당분이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 빵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남자가 흘긋 이비를 바라봤다.

[크리시도 빵 드세요.]

“됐습니다. 많이 드시죠.”

“…….”

‘이렇게 맛있는데, 크리시는 단 거 싫어하나? 아닌데. 크리시 단 거 좋아하는데? 이거 진짜 맛있는데… 이미 많이 먹어 봐서 그런가? 더 권하면 좀 그러려나… 근데 이거 진짜 매일 먹고 싶을 정도로 맛있는데.’

순식간에 시무룩해진 이비를 외면하려다 실패한 크리시는 결국 크림빵을 받아 입에 물었다.

‘아, 받아 줬다! 다행이다~ 이따 카르젠도 줘야지. 근데 크리시 누워서 먹어도 괜찮나? 체하지 않나? 난 누워서 먹으면 무조건 체하는데. 크리시는 건강해서 괜찮나?’

순수한 궁금증을 느낀 이비는 크림빵을 먹고 있는 최애를 실례되지 않을 선에서 감상했다.

눈이 마주칠 것 같으면 슬쩍 시선을 흐리며 사탕을 혀로 굴렸다. 그러다 다시 흘긋 크리시를 바라봤다.

‘신기해. 크리시랑 바로 이렇게 또 만나고. 같이 광장도 구경하고. 유명한 크림빵도 먹고. 기념품도 선물받고. 주스도 마셨고! 아 사탕! 사탕 세트도 받았지! 이것도 크리시 은혜 리스트에 적어 두자. 잊지 말아야지.’

오늘은 이비의 기준으로 정말 운수 좋은 날이었다.

물론, 주점으로 위장한 불법 유흥업소에 사람을 꼬드겨 데려가는 일명 <브로커>에게 걸려 큰일 날 뻔한 일도 있었지만 나름 무사히 넘겼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광장에서 구인 광고를 보고 접근한 이름 모를 남자는 친절하고 자상했다. 이비의 보폭에 맞춰 걸으며 골목을 굽이굽이 안내해 주었다.

초반엔 재미있는 가게들도 많았고, 사람도 많았다. 그렇게 안심하고 남자를 따라 걷던 이비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어쩐지 음산한 길엔 점점 사람이 보이지 않았고, 한낮인데도 오픈하지 않은 가게들이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골목이 좁고 가게들이 3~4층 건물로 전부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인지 정오인데도 어두컴컴했다.

이비는 어두컴컴한 문 닫은 상점가가 풍기는 미묘한 분위기에 위축됨을 느꼈었다. 뭔지 모르게 꿉꿉하고 안 좋은 기운이 맴도는 지역에 들어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게들은 1층이 하나같이 큰 통유리로 되어 있고 커튼이 쳐져 있었다.

간판엔 글씨가 없었고 술잔 모양이나 알 수 없는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아니면 아예 뭘 파는지 적혀 있지 않은 메뉴판에 가격만 쓰여 있는 곳도 있었다.

골목 사이에 가끔 보이는 사람들도 광장에서 본 사람들과 전혀 달랐다. 그들의 얼굴엔 짙은 그늘이 드리워 있었고, 이비를 보는 눈동자는 마치 생기를 잃은 것 같았다.

아무리 세상 물정 모르고 살아온 이비라도 진입이 꺼려질 만큼 이질적인 곳이었다. 범상치 않은 곳이란 것을 확신한 이비가 죄송하다고, 친구랑 약속이 있어서 돌아가야 할 것 같다며 뒷걸음질 친 순간, 내내 친절했던 남자가 돌변했다.

그는 거의 다 왔으니 들렀다 가라며 이비의 손목을 억지로 잡아끌고 걷기 시작했다. 기겁한 이비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꿈쩍도 하지 않고 계속 이비를 끌고 갔다.

여기까지만 봐도 절대 운수 좋은 날이 아니지만, 이비의 생각은 달랐다. 에벨루스의 가호 덕분인지 골목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크리시 덕분에 이비는 위기를 넘겼다.

물론 흔치 않은 ‘상품’이라며 이비를 포기할 줄 모르는 브로커 덕분에 골목에서 한바탕 몸싸움이 있었고, 그가 비겁하게 주머니칼을 꺼내든 순간 놀란 이비가 크리시를 감싸려다 오히려 밀쳐져서 나동그라지고 다치긴 했지만….

‘가만히 있을 걸, 괜히 끼어들려고 해서… 크리시가 잘 싸우는 건 알았지만….’

덕분에 어딜 나서냐고, 방해되니 구석에 찌그러져 있으라고 버럭버럭하는 최애에게 내던져지며 혼난 것도 꽤 신선한 경험이라 생각했다.

최애가 브로커를 두드려 패는 것을 보며 그의 전투 능력치를 재평가한 이비는 말 그대로 방해되지 않게 골목 구석에 얌전히 구겨져 있었다.

거의 일방적으로 쳐맞던 브로커가 줄행랑친 후 크리시는 저가 밀친 이비를 일으켜 주고, 무려 신력으로 피가 철철 흐르는 무릎을 치료해 주었다.

‘약간 사고가 있긴 했지만, 나만 구르고 끝났으니 운 좋았어. 게다가 크리시한테 치료도 받아 보고! 최애한테 꼬집혀 보기도 했잖아? 이거저거 선물도 받고. 오, 이게 성덕이라는 건가.’

아까 일을 떠올려 보면 나름 운 좋은 하루였단 생각에 사탕을 쫍쫍 빨던 이비는, 저를 향한 크리시의 표정에 갸웃했다.

크리시는 세상 기가 차다는 듯한 얼굴로 이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순식간에 더 피곤해진 얼굴로 말을 말자며 빵을 우걱우걱 먹었다.

‘응? 왜 그러지? 크리시 표정이 여전히 안 좋네… 역시 화났나….’

뚱한 표정에 아까 버럭버럭하던 크리시가 떠올랐다.

그의 도움으로 무사히 골목을 빠져나온 이비는 왜 저런 놈을 따라갔냐는 질문에, 오돌오돌 떨며 전단지를 보여 줬었다.

돈을 벌고 싶어서 면접 보려고 했다고, 저런 곳인지 몰랐다고 수첩에 깨작깨작 적어 나름 항변을 해 보았지만, 돌아온 것은 크리시의 팍 구겨진 미간과 에벨루스의 가호가 담긴 손으로 양 볼을 꼬집히는 형벌이었다.

이비는 볼이 뜯겨져 나가는 고통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크리시에게 저런 가게가 뭐 하는 곳인지 적나라한 정신 교육을 받아야 했다.

-따라 합니다. 고소득 구인 광고는 절대 믿지 않는다.

어버버

-세상에 돈을 막 퍼 주는 등신 같은 업주는 없다.

으어버버버

-가족 같은 분위기는 무조건 거른다.

아브어버버버

-단시간에 돈을 많이 주는 일 중 안전하고 합법적인 일은 없다.

하브아으아어어어어

-카르젠이 그런 것도 안 알려 줬습니까?

소리 없는 복명복창을 마치고 나서야 겨우 해방돼 얼얼한 볼을 문지르던 이비는, 크리시의 마지막 말에 질겁했었다.

카르젠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내가 혼자 외출한 거라고 해명했지만 그는 이비가 내밀었던 전단지를 접어 품에 넣으며 조소했었다.

-그럼 제가 카르젠에게 직접 알려 줘야겠군요. 자기 손님 하나 제대로 보호 못 해서 당신에게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카르젠에게 말한다고!?’

식겁한 이비가 제발 카르젠에겐 말하지 말아 달라고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부탁했지만, 크리시는 완강했다.

‘크리시가 카르젠에게 말하면… 카르젠은….’

이비는 오늘 일을 카르젠이 알면 어쩐지 자신에게 실망할까 봐 덜컥 겁났다. 카르젠이 자신에게 실망하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극도의 두려움을 느꼈다.

만약 그가 쉽게 돈 벌 생각으로 일부러 그런 가게를 찾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나, 아니면 그런 것도 모르는 바보 같은 녀석을 괜히 구해 주었다고 후회하면 어떡하나 두려웠다.

이비는 크리시가 떠난 자리에 굳은 채 가방끈을 꼭 잡고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카르젠이 날 싫어하게 되면 어쩌지….’

오직 그 생각 하나가 이비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었고, 자신을 외면하는 카르젠을 상상한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프고 호흡이 흐트러졌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온갖 부정적인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아 무서워서 꼼짝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시야가 좁아지며 눈가가 찡하게 아파 옴과 동시에, 말로 표현 못 할 불쾌한 감각이 전신을 덮쳤다.

그 불쾌한 감각은 마치 늪에 삼켜지는 기분 같기도 했고,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발끝부터 허벅지와 등허리를 타고 올라 온몸을 기어 다니는 것 같은 끔찍한 기분이 들었었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시야가 흐려졌다.

‘그건 싫어….’

앞서가다 돌아본 크리시는 이비가 오도카니 서서 굳어 있는 모습에 크게 당황했었다.

그리곤 그답지 않게 급하게 달려와 팔을 휘적거렸다. 마치 어딘가 고장이라도 난 듯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삐걱거리던 크리시는 계속 이비를 불러 댔었다.

그가 몇 번이나 제 이름을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이비는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었다. 그만큼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온몸을 잠식하기 시작한 불쾌한 감각과 거대한 공포심에 눈물을 뚝뚝 흘리며 흐느끼던 이비가 정신 차렸을 땐, 품에는 크리시가 사 준 크림빵이 잔뜩 들은 봉투를 소중히 안고, 입엔 사탕을 물고 있었다.

심신을 안정시켜 주는 달콤한 맛에 겨우 정신 차린 이비가 상황을 파악했을 때 보인 것은, 제 가방에 기념품 가게에서 계산한 엽서를 쑤셔 넣어 주고 있는 크리시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사 준 생과일주스를 받았을 땐 울음을 그치고 정신도 맑아진 상태였다.

“우우….”

바로 전의 일을 떠올리며 집중하다 보니, 미간을 찌푸리고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던 이비는 의아함을 느꼈다.

지금 생각해보면 카르젠이 자신에게 실망해 외면할지도 모른다는 부정적인 상상만으로, 길거리에서 눈물을 뚝뚝 흘릴 정도로 겁에 질려 있었던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카르젠이 그런 이유로 사람을 싫어할 사람이 아닌데. 난 왜 그렇게 겁먹었던 거지? 카르젠은 내가 실수했다고 해서 싫어할 사람이 아니라는 거 잘 아는데… 아니 그리고. 난 왜 길에서 그렇게 또 우는 건데? 아 부끄러워 진짜…! 어린아이도 그렇게 울진 않겠다! 크리시가 이상한 애라고 생각할 것 같아. 으아아아! 아악 부끄러워! 아악!’

허공에 발차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을 꾹 참아 낸 이비가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주스 진짜 맛있네.’

미칠 만큼 부끄러운 와중에도 주스는 맛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부끄러운 기분이 가시지 않아 한 모금 더 마시고 심호흡했다.

“후아아~”

진정하고 생각해 봐도 아까의 제 행동은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내가 원래 그렇게 잘 우는 사람이 아닌데… 진짜 아닌데….’

듣는 이도 없는데 허공에 해명해 댔다.

실제로 이비는 김현서일 적에도 남들 앞에서 절대 울지 않았다. 정확히는 15살 이후로는 말이다.

저가 울게 되면 제 가족에게 끼치는 영향이 너무 크다는 것을 알았기에, 늘 혼자 숨죽여 울면 울었지 의료진이나 가족 앞에서 울진 않았다.

물론 육체적 고통으로 인한 생리적인 눈물은 어쩔 수 없었지만, 마음 앓이로 인한 눈물은 절대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상담사 선생님은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늘 말씀해 주셨지만 김현서는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이 마음을 표현하면 늘 크고 작은 대가가 따랐다.

제 눈물은 소중한 이들의 마음을 좀먹었고, 제 눈물로 인해 그들의 마음에 새겨진 상처는 절대 깨끗하게 아물지 못했다. 늘 흉터를 남겼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늘 웃어 보였다.

난 괜찮다고 되뇌며 능숙하게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왔던 지난 삶을 떠올린 이비는 이렇게 제 감정 하나 제어 못 하는 현실이 낯설었다.

별것도 아닌 일. 심지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지레 겁먹고 울기까지 한 것이 부끄러우면서도 혼란했다.

‘그래도….’

분명 부끄러워 이불이라도 걷어차야 할 것 같은데도.

‘그래도 당황한 크리시는 처음이라 좀 신선했지. 크리시가 말문이 막힐 때도 있다니. 히힛~’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고. 최애의 의외의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운수 좋은 날이라며 기적의 논리를 펼친 이비는 자꾸 씰룩거리려는 입술을 말아 넣었다.

어째 크리시의 미간이 조금씩 더 구겨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원작에서 자주 언급됐던 ‘잘생겼지만, 항상 짜증 나 있는 얼굴’이겠거니 생각하며 주스를 쪽쪽 마셨다.

‘햐~ 대체 무슨 과일인지 모르겠지만 진짜 맛있다~ 나중에 과일 이름 물어봐야겠어.’

신선한 주스를 절반 정도 마신 이비는 크리시에게 작게 손짓했다. 크리시가 흘긋 바라보자 입술로 말했다.

[지금 몇 시예요?]

크리시는 대답 대신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이비에게 휙 던져 주었다.

화들짝 놀라 얼떨결에 시계를 받는 데 성공한 이비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시간을 체크했다.

아직 오후 2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대략 두 시간 정도 남았네.’

마차가 4시까지 신전 근처 시계탑으로 오기로 했다는 말에, 크리시가 그동안 자신의 사무실에서 기다리라며 이비를 데려와 준 터였다.

아직 넉넉하게 남은 시간 동안 이비는 크리시와 뭔가 대화라도 하고 싶었지만, 연체동물마냥 늘어져 누운 모습이 퍽 피곤해 보였다.

눈 밑에 다크서클은 어찌나 심한지, 말 거는 것조차 그를 방해하는 기분이 들었다.

‘심심해.’

뭔가 할 게 없나 생각하던 이비는 조용히 가방을 열고 꼬깃꼬깃 접어 둔 전단지를 꺼냈다.

힘없이 늘어진 채 슬쩍슬쩍 이비를 지켜보던 크리시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돈을 벌려고 하는 겁니까? 아직 몸도 안 좋다고 들었는데.”

“…!”

크리시의 갑작스런 관심에 이비는 아 어 음 하며 뻐끔거렸다. 크리시는 차분히 이비의 대답을 기다려 주었고, 잠시 말을 고른 이비가 입술을 움직였다.

[살아가려면 돈이 있어야 하잖아요?]

크리시는 이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의 무반응에 이비는 자신의 대답이 부족했다고 느꼈는지 조금 더 덧붙여 입술을 움직였다.

[돈 벌어서 문제없이 자립하고 싶고. 또 신세 진 사람들에게 보답하고 싶어요.]

신세 진 사람은 당연히 카르젠이었다.

그리고 오늘 일로 크리시도 포함된 이야기였지만, 굳이 이름을 언급하진 않았다. 아까 갚을 필요 없으니 그냥 받으라며 찌푸리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기꺼이 도와준 이에 대한 보답. 그건 이비에게 있어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다.

지난 생에 이비는 김현서를 사랑해 주었던 이들에게 아무것도 보답하지 못하고 죽었다.

하다못해 가족이 지켜보는 앞에서 눈을 감지도 못했다.

‘언제나 곁에 있어 주었는데, 마지막 정도는 힘내서 인사하고 싶었는데….’

남겨진 이들에게 자신이 어떤 형태로 남았을지 떠올리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그들에게 자신의 좋은 기억만 남겠지만, 그래도 꽤 긴 시간을 슬퍼하고 후회할 것이다.

특히 가족들은 아무 잘못이 없음에도 끝까지 곁에 있어 주지 못했던 것, 그리고 그동안 해 주지 못했던 것만 떠올리며 자책하고 슬퍼할 것이 눈에 선했다.

이비는 자신이 두고 온 소중한 이들에게 괜찮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자긴 정말 괜찮다고. 이미 충분히 많이 받았다고.

‘…어쩔 수 없어. 그만 생각하자.’

또 무의식중에 두고 온 것에 대해 떠올리던 이비는 애써 현재를 반영해 크리시의 질문을 구체화했다.

결론적으로 이비가 돈을 벌고 싶었던 이유는 다른 이들처럼 평범하게 살아 보고 싶어서였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아닌,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존재.

‘의욕이 앞서서 아까 같은 일이 생기긴 했지만… 앞으로 더 조심하면 돼. 괜찮아.’

이비는 애써 생각을 정리하고 추스르며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그리고 돈 벌면 맛있는 것도 사 먹고. 갖고 싶은 것도 사고 싶어요.]

“갖고 싶은 거요?”

끄덕이던 이비는 크리시가 혹시 그게 뭐냐고 물어볼까 봐 슬쩍 시선을 피했다.

‘신전 기념품 코너에서 파는 크리시 미니 초상화라고 본인에게 어떻게 말해….’

카르젠과 방문 당시 스쳐봤던 신전 기념품 코너에선 프리스트들의 초상화를 판매하고 있었는데, 수익금은 좋은 곳에 투명하게 쓰인다는 문구가 있었다.

좋은 취지에서 나온 에벨루스 신전의 대표 기념품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초상화가 누가 나올지 모르는 랜덤 뽑기라는 게 문제지만. 돈 많이 벌어서 한 세트 전부 살 거야. 전부 사서! 크리시만 빼고 나머진 다 팔아 버릴 테다! 그리고 카르젠 초상화도 사고 싶어. 광장 어딘가의 기념품 가게에서 판다고 들었는데, 설마 그것도 랜덤인가? 아니겠지? 유사 모양의 여우 인형도 판다고 들었는데… 아아아, 그치만 산다면 카르젠에게 들키면 좀 그러니, 침대 밑에 숨겨 둘까?’

아직 무일푼이면서 벌써 소비할 기대감과 즐거움에 이비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크리시는 자꾸만 피식거리려는 입술을 손등으로 가렸다.

‘그러고 보니 수도 장난감 가게 중에 블랙드래곤에 올라탄 크리시 인형도 있다고 책에서 했는데, 그건 꼭 사야지! 꼭 살 거야!’

“쿨럭! 쿠울럭! 쿨럭!”

“!?”

사레라도 들렸는지, 갑자기 크리시가 격하게 기침하기 시작했다.

폐를 토해 낼 듯한 기침에 화들짝 놀란 이비가 뽀로로 다가가 크리시의 등을 통통 두드렸다.

크리시는 저 연약하고 하찮은 손길에 애써 기침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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