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2/19)

### 챕터 1

“일주일 정도는 못 일어날 거라 예상했는데, 벌써 몸을 가눌 수 있게 됐다니. 회복이 생각보다 빨라 다행입니다. 독은 일단 어느 정도 해독된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 것도 기적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군요.”

의원의 말에 벌벌 떠는 손으로 시선을 옮긴 카르젠의 눈빛이 안타까움으로 물들었다.

아침에 가짜 두통 소동 이후 지금까지 카르젠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김현서는 본의 아니게 카르젠을 속인 것이 미안했지만, 전부 꾀병이라 하기엔 이상하리만큼 몸이 떨리는 상태였기에 죄책감을 절반 정도는 덜어 낸 기분이었다.

그나마 정신 차린 후 아침과 점심 식사로 건더기 없는 수프를 먹고 나서 좀 진정되나 싶었지만, 조금 아까부터 또 수전증이 심해져 볼품없이 떨고 있었다.

잘게 떠는 김현서를 지켜보던 의원이 안경을 벗어 가슴 주머니에 끼우며 말했다.

“말씀드린 것처럼 당분간 여러 증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식사는 가급적이면 자극이 덜한 것으로 하는 것이 좋고. 심신의 안정이 필요합니다. 뭐든 무리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김현서는 진지하게 끄덕이는 카르젠을 향해 말하고 싶었다.

‘나 하나도 안 아파요. 손이 떨리긴 하는데, 이거랑 별개로 건강한 것 같아요. 그러니 제발….’

“그럼 안정과 식사에 신경 쓰도록 해야겠군. 소화 잘 되는 음식이 좋겠지?”

“예. 맑은 수프가 몸에서 받아들이기에 좋을 겁니다.”

‘으아아!’

의원의 말을 들은 김현서는 좌절감에 큰 베개 위로 풀썩 쓰러져 누웠다.

‘안 돼! 수프 말고 다른 거! 고기 먹고 싶어! 삼시 세끼 수프만 먹어야 한다니! 물론 끝내주게 맛있었지만!’

머리로는 알지만 저녁도 건더기 없는 수프로 결정된 것이 못내 속상해 엎드려 베개를 꽉 쥐어 잡자 카르젠이 다가왔다.

카르젠은 부드러운 손길로 잘게 떠는 손을 잡아떼 주며 여린 몸을 부축해 앉혔다. 그리곤 등 뒤에 쿠션도 신경 써서 잘 정돈해 주었다.

“괜찮아? 혹시 어지러워? 눕고 싶어?”

그의 걱정 가득한 모습에 김현서는 차마 고기라는 단어를 입술로 옮길 수 없었다.

‘하긴, 공짜로 치료받고 얻어먹는 주제에 염치없이 고기는 무슨… 게다가 수프도 충분히 맛있고….’

제 처지를 납득한 김현서가 작은 입술을 움직여 [괜찮아요]라고 대답했다.

그리곤 시선을 내려 카르젠의 큰 손 위에 얹어진 채, 파르르 떠는 제 작은 손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카르젠의 낯빛이 더 어두워졌다.

‘이놈의 손만 안 떨렸어도 의사 선생님이 저렇게 심각하게 진단하지 않을 것 같은데! 이놈의 손!’

김현서는 고기에 대한 갈망을 잠시 미뤘다. 평생 못 먹는 것도 아니니 괜찮다며 긍정적인 마인드를 펼쳤다.

생각해 보니 마지막으로 고기를 먹었던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최소한 그가 기억하는 최근 2~3년 내에는 없었다.

긴 병상 생활 중 최근 2~3년간은 미각을 거의 잃어 뭘 먹어도 먹는 즐거움을 느낄 수 없었다. 오직 삶을 연명하기 위해 아무 맛도 나지 않는 종이 맛 죽을 씹어 삼키는 나날이었다.

그렇다 보니 꽤 오랜 시간 동안 김현서에게 먹는 즐거움이란 것은 없었다. 그가 아무 맛도 나지 않는 병원식을 입에 넣고 씹고 삼키는 행위는 오직 제 가족을 위해서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리도리

김현서는 슬프거나 힘들었던 순간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다. 억지로라도 지금 이 삶에 집중하고 싶었다.

이전과 달리 지금은 맛을 느낄 수 있는 게 어디냐고 위안하며 풍미 깊은 수프를 떠올렸다.

카르젠이 먹여 준 수프는 다 맛있었다. 처음 한 입 받아먹은 순간 온갖 풍미가 입 안에서 폭죽을 터뜨려 댔다.

꽤 오랫동안 맛을 모르고 살았는데 다시 미각을 되찾은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했다.

게다가 주방장이 솜씨가 좋은지 맛도 기가 막혔다. 도가 지나치게 맛있어서 눈물이 펑펑 쏟아질 정도로 행복한 순간이었다. 덕분에 또 두통이 심해진 거냐며 카르젠이 걱정하는 작은 소동이 있었지만 먹는 순간만큼은 너무나도 행복했었다.

‘오늘도 분명 맛있겠지. 그래, 고기는 다음에 말해 보자….’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데 카르젠이 잘게 떠는 작은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잡았다.

“?”

반사적으로 고개를 드니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초조해하지 마. 회복되고 있으니 곧 괜찮아질 거야.”

끄덕

‘초조하지 않은데, 이 지나치게 친절한 남자가 또 걱정하는 것 같으니 일단….’

[저 정말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걱정해 줘서 고맙지만 정말 괜찮다는 의미를 담아 김현서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자 카르젠은 더 어두워지려는 제 표정을 급히 갈무리했다.

진료 도구를 챙기던 의원은 애써 의젓하게 구는 환자를 바라보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기억도 잃고. 독 후유증으로 온몸에 고통이 상당할 텐데. 마음은 답답하고 몸은 제멋대로 떨릴 만큼 아프고, 지금 속이 말이 아니겠지….’

안타까워하는 의원의 속내를 알 리가 없는 김현서는, 이번엔 의원과 눈이 마주치자 또 밝게 웃었다.

오랜 병상 생활의 경험으로 사람은 웃을 때 그나마 건강해 보인다는 것을 알기에 나온 일종의 습관이었다.

‘계속 무리해서 웃고 있군. 불안한 건가? 조금 더 편하게 지내도록 안심시켜 줘야겠어.’

애써 미소 짓는 김현서를 바라보던 카르젠은 그와 맞잡은 손에 조금 힘을 주었다. 그리곤 다른 손으로 안심하란 듯이 가녀린 어깨를 보듬어 주었다.

‘앞으로 저 아이가 잘 회복하도록 나도 최선을 다해야겠군.’

의원 역시 제 환자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김현서를 향해 미소 지었다. 내일 또 방문할 테니 푹 쉬고 몸조리 잘하라 인사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좋아. 푹 쉬고 의사 선생님한테 내일은 고기 먹어도 되냐고 물어봐야지.’

김현서를 포함한 방안의 세 남자가 각각 다른 다짐을 했다.

***

‘눈동자는 녹색이네.’

어제에 이어 오늘 아침도 수프로 식사를 마친 김현서는 식후 카르젠이 가져다준 거울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이보리 빛 크림색의 복슬복슬한 곱슬머리. 동글동글한 눈매와 맑은 에메랄드빛 녹색 눈동자. 오뚝한 코와 작지만 살짝 도톰한 입술. 카르젠처럼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미형이었다.

그간 꽤 오래 거울을 보지 않고 살았던 저가 볼 땐 지금의 모습이 그저 좋았다. 김현서는 자신의 얼굴에 살짝 감탄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렇게 감상할 때가 아니지! 떠올려 보자. 크림색 머리에 녹색 눈이라. 으음… 정령사 일라나드 말고는 기억나는 등장인물이 전혀 없는데? 일라나드일 리는 없고. 몇 살일까? 꽤 어려 보이는데. 많아 봤자 20살?’

겉보기엔 많아 봤자 10대 후반~20세 사이로 보였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숲의 마법사는 온갖 다양한 종족이 공존하는 세계였다.

대표적으로 주인공 일행 중 겉모습은 소년인데, 200년을 넘게 살아온 토끼족 전(前) 장로가 있었고, 20대 중반의 외모를 유지하며 무려 600살이 넘은 엘프도 있었다.

‘내 체격이 작은 게 종족 특성인지, 원래 그냥 작은 인간인지도 모르겠고….’

이 몸의 주인이 원래 마른 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골격이 작은 데다 수척해지기까지 해 더 왜소해 보였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어려 보이는 것도 같았다.

‘난 대체 누굴까… 보통 빙의하면 그래도 자기가 누군지는 알고 시작하던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소설에서 이런 외형을 가진 캐릭터가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말을 못 하는 캐릭터라니, 그런 캐릭터가 있었다면 분명히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음~ 뭐. 어때. 말 못하는 거 빼고 나머진 다 괜찮은 것 같으니.’

비록 수전증이 심하고 아직 제대로 걷지 못하지만 사지는 멀쩡했다.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서 그렇지 다행히 발가락은 잘 움직였다. 상체는 확실히 어제보다 훨씬 움직일 만했다.

의원 말로는 몬스터에게 습격당했을 당시 상처로 독이 스며들어 근육이 마비된 상태였을 거라고 했었다.

아직 몸에 독이 잔류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 해독 중이라고 했다.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치료 기간이 얼마나 걸릴지 파악하긴 어렵다는 말도 덧붙였었다.

‘이 정도로 독에 당하고 살아 있는 인간을 처음 봤다고 했으니….’

의원으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신이 도운 것이 분명하다고도 했었다.

‘신이라… 으, 으음~ 정말 제 패악을 듣고 도와주신 거라면, 그땐 죄송했고요… 어, 음… 그리고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님.’

살고 싶다고, 이거 너무한 거 아니냐고, 지금 나랑 장난하냐고 고래고래 악쓰는 패악질에 가까운 기도였는데, 만약 지나가던 신이 그것도 기도라고 듣고 도와준 거라면 김현서 입장에선 정말 감사할 일이었다.

‘그런데 신님… 만약 듣고 계신다면 제가 누군지도 좀 알려 주시면 안 될까요?’

원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 그래도 이 정도 욕심부리는 건 소박한 편이지 않냐며, 김현서는 속으로 자기 합리화를 했다. 그때 창밖으로 작은 소음이 들려왔다.

‘카르젠이 돌아왔나?’

아침에 김현서와 함께 식사를 마치고 잠시 다녀올 곳이 있다며 서둘러 외출했던 그였다.

김현서는 카르젠이 귀가한 건지 확인하기 위해 끙끙대며 힘겹게 침대에서 내려섰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한 걸음 딛는 것도 일이었다.

가느다란 두 다리는 마치 갓 태어난 새끼 짐승처럼 바들바들 떨렸다. 넘어지지 않도록 신중하게 한 걸음씩 딛다 보니, 드디어 창가 발코니에 도착했다.

발코니 너머로 큰 흑마를 타고 넓은 정원을 가로질러 오는 카르젠과 그를 맞이하러 나간 사용인들, 그리고 집사가 보였다.

카르젠이 거대한 흑마에서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던 김현서는 저도 모르게 감탄하며 소리 없이 입술로 중얼거렸다.

‘흑마 탄 왕자네.’

김현서는 의식이 돌아온 이후 카르젠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신기하게도 심신이 안정되는 기분을 느꼈다. 이유는 모르지만, 아마 그가 비현실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 여겼다.

저도 모르게 황홀해진 기분으로 창밖을 내려다보던 김현서는 갑자기 고개 든 카르젠과 눈이 마주쳤다.

“!”

발코니에 기대 서 있는 김현서를 발견한 그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순간 김현서는 저를 향한 후광 번쩍이는 미소가 눈부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일순 창밖이 부산스러워졌지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우와~ 사람을 미소 하나로 이렇게 휘청거리게 만들다니, 정말이지 카르젠 저 사람은… 응? 잠깐! 미소로 사람을 휘청거리게 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 혹시 카르젠이 신인 건 아닐까? 알고 보니 막 얼굴의 신 이런 거 아냐?’

김현서는 제 추측이 꽤 일리 있다고 생각했다. 일단 <숲의 마법사> 세계인 필리스에는 온갖 능력을 가진 다양한 신이 있었다.

그중 인간인 척하며 중간계에서 살아가는 중급 신도 있었고, 자신이 신인 줄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서야 각성한 하급 신도 있었다.

카르젠은 인간형 캐릭터 중엔 왕세자 남주와 제2기사 단장 여주를 제외하면 작중 가장 강한 먼치킨이었다.

평소 묘사된 카르젠은 만인에게 상냥했고, 그가 강함을 드러내는 것은 전장뿐이었다.

가끔은 그의 상냥함이 지나쳐 여주 리엔이 넌 호구라며 카르젠의 등짝을 철썩철썩 때리는 장면도 자주 나왔다.

‘한낱 인간이 저렇게 강하고 자애롭기까지 하다고? 정말 인간일까?’

아무리 친절한 사람이라도 낯선 사람을 경계해야 맞는 법이었다. 그런데 경계는커녕, 이름도 정체도 모를 인간을 주워다가 직접 극진히 보살펴 주는 걸 보면 보통 자애로운 게 아니었다.

어쩌면 카르젠도 아직 자각하지 못한 신일지도 모른다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복도가 어수선해지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고개 돌린 김현서는 저를 향해 달려오는 카르젠의 눈부신 얼굴을 실눈을 뜨고 바라보며 근거 없이 확신했다.

‘그치… 저 얼굴로 만약 카르젠이 신이 아니라면, 최소 신급일 거야….’

급하게 다가온 카르젠은 김현서가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바들바들 떨고 있는 몸을 가볍게 안아 들었다. 그리곤 김현서가 힘겹게 비실비실 걸어왔던 침대까지 단 몇 걸음 만에 도달했다.

김현서를 매우 조심스럽게 침대에 내려 준 카르젠은 아직 잘게 떠는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확실히 아침보단 떨림이 덜해 보였고 혼자 일어나 창가까지 걸어갔던 걸 보면 나아진 것이라 여겼지만, 조금 전 그가 눈을 질끈 감으며 비틀거리는 것을 분명 봤기에 방심할 수 없었다.

“혹시 두통이 있어?”

[아뇨.]

“잠시….”

아니라고 즉시 대답했음에도 걱정됐는지, 카르젠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김현서의 이마를 짚었다. 날이 차서 그런지 그의 손이 평소보다 차가웠다.

‘카르젠 손 진짜 크고 시원하다….’

잠시간 김현서의 이마를 짚어 본 그가 안도한 얼굴로 손을 떼며 말했다.

“다행히 열은 떨어진 것 같네. 머리는 정말 괜찮아?”

[괜찮아요. 하나도 안 아파요.]

‘내일의 메뉴는 내가 바꾼다!’

김현서는 자신이 매우 건강하다고 열심히 어필했지만, 그의 표정에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것이 못내 신경 쓰여 조금 더 적극적으로 어필해야겠다고 판단했다.

[이거 봐요.]

입술로 말하고 보란 듯이 양팔을 앞으로 쭉 뻗고 손을 살짝 주먹 쥐었다 폈다.

“음?”

카르젠이 갸웃하는 모습에 김현서는 아침보다 덜 떨리는 이 손을 어서 보란 듯이 살짝 주먹 쥐고 펴 보였다.

“…….”

카르젠은 잠시간 말없이 그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열심히 손을 꼼질거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입술로 말해도 되는데 굳이 손으로 뭐가 말하고 싶은 걸까 주의 깊게 살펴봤지만, 저 앙증맞은 손짓이 도통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카르젠은 그가 놀라지 않게 오른쪽 손목을 조심스레 잡았다.

“?”

직전까진 의기양양하더니, 이젠 갸웃하는 얼굴이 귀여워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그 손을 끌어다 제 다른 손 손바닥에 올렸다.

“미안해. 못 알아듣겠어. 글을 쓸 수 있다면 글로 써 주겠어?”

카르젠의 말에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나름 내색하지 않으려는 것 같았지만, 순식간에 몹시 실망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이런… 어려워도 조금 더 지켜볼 걸 그랬나….’

카르젠은 저 실망한 얼굴조차 귀엽게 보여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손바닥을 폈다.

큰 손바닥을 바라보던 김현서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음… 손바닥에 쓰라는 건, 역시 입술만으론 읽는 게 힘들어서 그런가!? 만약 그런 거라면 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했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어.’

그래서 저를 중환자 다루듯 대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김현서가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이 세계에 들어오며 다행히 언어나 문자는 자동 습득된 것 같았지만, 혹시나 그가 제대로 못 알아볼까 봐 한 자 한 자 힘줘서 천천히 썼다.

-몸에 힘이 없어서 가누기 힘들지만, 아프지 않아요.-

아프지 않다는 말에 카르젠이 갸웃했지만, 일단 써 보라는 듯 가만히 다음 글을 기다렸다.

-몸이 제멋대로 떨리긴 하는데, 통증은 없어요.-

손바닥에 또박또박 적어 준 글을 읽어 내다 통증이 없다는 부분을 이해한 카르젠이 화사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야.”

김현서는 그의 뒤로 금가루와 은가루가 날리며 황금 장미의 개화가 보이는 것 같아 슬쩍 눈을 가늘게 떴다.

‘아악 눈부셔! 이름도 모르는 인간이 아프지 않다는 말에 저렇게 기뻐해 주다니, 역시 자애로움이 신급 같은데?’

김현서가 이 정도면 심증이 아니라 물증이지 않겠냐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가 들고 온 가방을 보여 주며 말을 이었다.

“아. 그래. 나도 좋은 소식을 하나 알려 줘야겠네. 그때 미처 수습하지 못했던 소지품을 찾아왔어.”

가죽 사이로 살짝 보이는 물건들은 피와 흙이 잔뜩 눌어붙어 지저분해 보였다.

“깨끗하게 닦아 돌려줄게. 우선 급한 대로 이것만 닦아서 가져왔어.”

카르젠은 제 주머니에서 무언가 꺼내 김현서의 손에 쥐여 주었다. 돌아오자마자 건네줄 생각으로 물가의 몬스터들과 기 싸움을 하며 씻어 온 끊어진 목걸이였다.

조심스레 목걸이를 살펴보던 김현서는, 납작한 메달에 음각으로 새겨진 문구를 발견했다.

<이비에게. 19살의 생일을 축하해. 레인이.>

‘이비….’

메달에 새겨진 이름을 손가락으로 쓸어 내자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비. 그게 네 이름인 것 같아.”

잠시 멍해 있던 김현서가 고개를 들었다.

카르젠의 목소리가 멋져서일까. 이상하리만큼 그가 불러 준 이비라는 이름이 듣기 좋았다.

“이비. 좋은 이름이네.”

김현서는, 아니. 이비는 자신의 이름이 꽤 마음에 들었다.

***

<이비>

자신의 이름이 꽤나 마음에 든 이비가 밝게 웃었다.

카르젠은 이비의 저 환한 미소가 드디어 자신이 누군지 알게 된 기쁨에서 우러나왔다고 느꼈다. 그는 복잡한 마음을 애써 추스르며 이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곧 깨끗하게 닦아서 보여 줄게. 기다려.”

끄덕끄덕

가방을 챙겨 침실을 나선 카르젠은 문밖에서 대기하던 집사 바론을 향해 말했다.

“이건 내가 직접 처리하도록 하지.”

다른 사용인이었다면 자신이 하겠다고 한사코 말렸겠지만, 바론은 1대에 이어 2대째 제 주인을 모시고 있는 노련한 집사였다.

그는 저가 봐선 안 될 것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곤 아무런 의문도 표하지 않았다.

카르젠은 긴 복도를 지나 제 방으로 향했다.

방문을 닫고 방 안에 딸린 욕실로 들어간 카르젠은 거울 앞 수납장 위에 큰 수건을 꺼내 펼치고 가방 속 물건을 조심스레 꺼내기 시작했다.

소지품은 금이 간 작은 유리병. 헝겊 주머니에 남아 있는 바스러진 약초 찌꺼기. 깨져 버린 일회성 편도 텔레포트 수정. 그리고 곱게 접힌 손수건이 전부였다.

손수건에서 느껴지는 부피감에 펼쳐 보니, 꼭꼭 접은 쪽지가 보였다. 그다지 질이 좋지 못한 종이였고, 조심스레 펼쳐 내용을 읽은 카르젠의 미간이 구겨졌다.

‘역시….’

숲에서 물건을 수습할 때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밝은 곳에서 살펴보니 익히 알고 있는 구성이었다.

금 간 유리병의 내용물은 없었다. 흐른 자국도 없었고, 보랏빛 액체가 담겼던 얼룩만 남아 있었다. 즉 깨지기 전부터 안은 비어 있었다는 것을 뜻했다.

헝겊에서 나온 바스러진 약초 찌꺼기의 향을 맡아 본 카르젠은 살짝 인상 쓰며 고개를 돌렸다. 환각을 일으키고 중독성이 강해 대륙에서 금기시하는 마약성 약초 향이 분명했다.

이걸 사용하는 경우는 더 손을 쓸 방도가 없는 환자의 고통을 덜어 주는 경우뿐이었다. 명이 얼마 남지 않은 자가 고통 없이 떠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용도 외엔 절대 금지되고 있는 약초로, 개인이 재배하는 것조차 불법이었다.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내용물이 없어도 유리병이 담고 있었던 액체가 뭔지 추측 가능했다.

‘수면제였겠지.’

텔레포트 수정도 마법사 협회에서 정식으로 인증받아 가공된 수정이 아닌 조잡한 수정이었다.

몬스터가 득실대고, 오래 머무르면 모든 방향 장치가 고장 나 현재로서 진입이 금지된 경계선 숲의 좌표가 등록된 편도 텔레포트 수정.

강력한 환각 약초와 수면제. 그리고….

<레인, 기다려. 곧 만나러 갈게. 우리의 바다에서 다시 만나자. 이비가.>

조잡한 종이에 쓰인 내용.

‘죽으려고 했던 거였어….’

***

리엔은 이미 여러 번 겪은 일이라는 듯 땅에 떨어진 빵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베어 먹어 지켜보던 체스터와 카르젠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당황해 아무 말도 못 하는 둘을 향해 리엔이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3초 안에 주워 먹으면 괜찮아. 그것도 몰라?

-…그… 그럴 리가 없잖아….

드물게 카르젠이 타인의 의견을 부정했다. 리엔은 카르젠의 반응이 퍽 즐거운 듯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숲의 마법사 1권 264페이지 中

***

카르젠이 이비를 발견한 경계선 숲의 또 다른 이름은 자살 숲이었다.

숲 내부의 검은 안개가 피어오르는 경계선 너머로 건너간 사람 중 그 누구도 살아 돌아온 이가 없었고, 시체 또한 발견되지 않았기에 세상에서 사라지기에 안성맞춤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이비의 소지품은 일명 암시장에서 ‘편도 패키지’라는 이름으로 판매되는 것과 구성이 동일했다.

암시장에서도 은밀한 뒷거래를 통해서만 구할 수 있는 자살 패키지. 쉽게 구할 수 없는 불법 텔레포트 수정 때문에 값은 꽤 비싼 편이었다.

즉 이 편도 패키지는 삶을 포기하고 싶은 자들 중 대부분이 전 재산을 털어 생애 마지막으로 사는 물건이었다.

“…….”

카르젠은 수건 위 나열한 물건들을 쭉 둘러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날, 카르젠이 숲에 갔던 이유는 평소와 같았다. 제 몸에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였다. 그날따라 유독 제게 달려드는 몬스터의 수가 적고 숲이 조용한 날이었다.

스트레스를 풀러 왔는데 도리어 쌓이게 생겨 경계선 방향으로 걷다 보니 둥그렇게 모여 춤추는 숲 고블린 떼가 보였고, 숲 고블린 사이로 보이는 하얀 손을 발견한 순간 카르젠의 몸이 먼저 움직였었다.

어쩌면 그가 돌아온 것인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숲 고블린을 썰어 댔고, 저가 발견한 인간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이가 아니라는 것을 한눈에 알고 실망했었다.

하지만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걸 본 카르젠은 망설이지 않았다. 생명이 꺼져 가는 게 보일 정도로 심각한 상처를 입은 몸을 안아 들며 안심시켜 주려 애썼다.

“이제 괜찮습니다. 정신 잃지 말고 조금만 견디십시오. 꼭 구해 드리겠습니다.”

이 남자는 카르젠이 숲을 드나들기 시작한 후로 처음 발견한 사람이었다.

그것도 산 사람.

이 빌어먹을 숲에서 발견된 생존자라는 존재는 카르젠에게 의미가 남달랐다.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구해야 할 터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날 제 가방을 말에 얹어 두고 숲에 들어갔었다. 그 가방엔 최상급 포션이 들어 있었다.

혹시나 숲에서 살아 있는 누군가를 발견할 것을 대비해서 가지고 다녔던 것이었는데, 오랜 실패를 거듭하며 더는 무엇도 발견할 수 없을 거라 여기고, 아마도 결코 쓸 일이 없을 거란 생각에 두고 왔던 날이었다.

예기치 못하게 처음으로 생존자를 발견한 카르젠은 오랜만에 제힘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달렸다. 덕분에 늦기 전에 응급처치를 할 수 있었다.

내장이 손상되면 포션으로도 소용없기에 걸리적거리는 너덜너덜한 옷을 급히 찢어 내고 상처부터 확인했던 카르젠은 세상 존재하는 모든 신에게 감사하다고 외치고 싶었다. 물론 상처는 굉장히 컸지만, 다행히 내장은 손상되지 않은 상태였다.

아낌없이 최상급 포션을 뿌리니 기절했던 그가 깨어나 전신을 떨며 울었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인지 제대로 몸부림치지도 못했다.

벌어진 상처를 급히 아물게 만드는 최상급 포션의 효력은 강력했고, 그만큼 고통스럽다는 것을 아는 카르젠은 작은 몸을 달래며 치료해야 했다.

조금만 참으라고, 거의 다 끝났다고. 이제 시작했으면서 뻔한 거짓말로 그를 안심시켰었다.

체내 회복을 위해 포션을 먹이려 했지만 스스로 삼키지 못해 콜록대며 뱉어 냈다. 결국 카르젠이 포션을 머금고 억지로 입으로 넘겨주어 삼키게 해야 했다.

그렇게 반복하며 몇 모금 겨우 먹인 후, 아직 벌어져 있는 상처에 또 다른 포션을 뿌리니 그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카르젠은 그제야 그의 입 모양을 읽을 수 있었다.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남자는 살고 싶다고 애원하고 있었다. 정말 간절히 살고 싶다고 소리 없이 외치며 오열하고 있었다.

카르젠은 겁먹은 그에게 약속해 주었다. 꼭 살려 주겠다고. 안심하라고. 꼭 구해 주겠다고. 그러니 제발 포기하지 말아 달라고. 호소력 있는 말에 안심한 건지 남자는 기꺼이 기절했었다.

겨우 숨 붙여 구조해 왔지만, 그 이후 치료도 쉽지 않았다. 하필 제 친구이자 강한 치유력을 가진 신관이 부재인 터라 치유력이 약한 힐러들과 의원을 불러 치료해야 했다.

남자는 며칠 동안 이어진 치료 내내 고통스러워했다. 깨어 있으면 괴로워 울고 살려 달라는 애원의 반복이었다. 치유의 힘이 없는 카르젠은 그의 손을 잡고 안심시켜 주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찌나 상처가 깊은지, 고통에 힘겨워하다 까무룩 기절하기를 반복했다. 가끔 정신을 차렸을 땐 카르젠이나 부집사를 보고 횡설수설 알 수 없는 말을 입술로 전하기도 했다.

같은 방식으로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 짧은 대화도 나눴지만, 그가 마지막 기절 후 깨어났을 땐 자신이 왜 숲에 있었는지, 또 자신이 누군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후우….”

이비와의 첫 만남을 떠올린 카르젠은 눈앞의 소지품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비는 심신이 약한 상태였다. 자신이 누군지, 어쩌다 숲에 들어가게 됐는지, 사는 곳은 어디인지 그 어떤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비에게. 그렇게 살고 싶다고, 살려 달라고 울던 이비에게….

‘이건 말 못 하지….’

카르젠은 지금의 이비를 보면 절대 죽고 싶어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억이 돌아와도 똑같을까?’

애초에 카르젠은 이비라는 사람을 잘 몰랐다. 잘 안다 해도 확신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지금 그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비가 살고 싶어 한다는 것 하나였다.

과거의 경험으로 카르젠은 사람이 죽음을 결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우울과 상처와 고통이 켜켜이 쌓이는지, 그 많은 고통 때문에 죽음을 원하는 이의 눈빛이 어떤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스스로를 포기한 사람의 공허한 눈동자가 다시 이채를 띠는 순간은, 오직 자신의 결심을 실행하기 직전뿐이었다.

카르젠은 오래전 제게 소중했던 이가 목걸이를 걸어 주던 순간이 떠올라 눈을 질끈 감았다. 그날은 오랜 시간 공허해 보였던 그의 눈이 평소와 다르게 생기 있는 날이었다.

그간 찾아가도 만나 주지 않았으면서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날은 먼저 찾아와 자신이 가장 아끼는 목걸이도 선물로 주고, 네가 곁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며 감사의 인사까지 해 주었다.

어린 카르젠은 확신했었다. 드디어 그가 앓고 있던 마음의 병이 나은 거라고. 여느 때처럼 해사하게 웃어 주며 이제 모든 것이 괜찮아질 거라는 그의 말에 카르젠 역시 기뻐 환하게 웃었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카르젠은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었다. 아무도 그를 구원할 수 없었고, 그건 어린 카르젠 역시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이비의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군….’

이비는 그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살고 싶어 했고 카르젠은 그 욕구를 꺾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꼭 살려 주겠다고, 구해 주겠다고 굳게 약속했던 말은 자기 자신에게 한 약속과도 같았다.

그래서 카르젠은 쪽지를 고이 접어 바지 주머니에 넣고 나머지 물건들을 닦기 시작했다. 이비가 기억을 찾는다면 어쩔 수 없이 털어놓겠지만, 절대 카르젠이 먼저 말할 생각은 없었다.

‘나중에 이비가 기억을 찾으면. 그땐 날 경멸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비는 카르젠이 절망 가득한 숲에서 구해 온 첫 사람이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비는 카르젠에게 있어 이미 중요한 사람이었다.

카르젠은 제 이기심 때문에, 어찌 보면 자신에게 속아 본인의 의지와 달리 새 삶을 살아갈 이비에 대한 속죄로, 어떻게든 그가 행복할 수 있도록 도울 생각이었다.

***

카르젠이 나간 후 이비는 계속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하도 뜯어봐서 이제 목걸이에선 더 볼 것이 없는데도 놓을 수가 없었다.

목걸이를 손에 쥔 이비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내밀었다. 집중할 때 저도 모르게 나오는 습관이었다.

삐죽 오리 입을 한 채 아무리 생각해도 이비와 레인이라는 이름은 <숲의 마법사>에서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작가님이 작중 엑스트라까지 이름까지 붙여 주진 않았으니… 그럼 난 책에서 이름 나올 일 없던 엑스트라거나, 출연조차 하지 않은 마을 사람 A 정도인가? 으음~ 아니면 혹시 스핀오프 BL에서 나오는 건가? 스핀오프 시리즈는 초반에만 보다 말았으니….’

긴 병상 생활에 읽을 책은 한정되어 있었고 딱히 장르를 가린 것은 아니었기에, 김현서일 적 BL 장르 소설도 취향이 맞으면 종종 읽곤 했었다.

BL의 경우엔 주로 쌍둥이 여동생이 추천해 주는 것들로 봤는데, 동생의 취향은 일명 ‘광공’ ‘후회공’이라 불리는 캐릭터들이 9할을 차지했었다. 덕분에 추천작들이 대부분 내키지 않았던 경우가 많았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후회할 짓 말고 처음부터 상냥하고 친절하게 잘 대해 줘야지. 왜 광기를 보여 줘….’

피폐한 내용으로 주인공이 구르고, 후회하는 남자 주인공을 좋아했던 동생과 달리, 이비는 달달하고 행복한 이야기를 좋아했다.

특히 엔딩은 아주 꽉 막힌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이야기를 좋아했다. 모두가 행복한 이야기를.

동생이 듣는다면 펄쩍 뛰겠지만, 좋아하는 사람에겐 상냥하고 친절하고 솔직하게 대해 주며 아껴 주어야 한다는 게 김현서로서의 생각이었고 그 생각은 지금도 그대로였다.

이비와 레인이라는 인물에 대한 생각이 어쩌다 보니 BL과 광공으로 흘러간 것을 자각한 이비가 도리질했다.

‘악! 집중! 다시! 다시 생각해 보자. 어쩌면 조연일 수도 있어.’

이비는 숲의 마법사 소설 내용을 아예 처음부터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아카데미 시절 이전 극 초반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숲의 마법사> 소설은 여자 주인공 샤이나 리엔이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으며 내용이 시작된다.

붉은 머리의 금빛 눈동자를 가진 평민 출신의 리엔은 변방 마을에서 부모님과 풍족하진 않아도 화목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리고 흔히 판타지 소설 도입부가 그렇듯 리엔의 평화로운 마을에도 시련이 찾아오는데, 바로 식량을 노린 몬스터들의 습격이었다.

어린 리엔은 마을 근위병이었던 아버지가 자신과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마을이 초토화되기 직전, 꼭 판타지 소설마다 나오는 마을 외곽에 혼자 사는 성격 괴팍한 은둔 고수 할아버지가 등장해 몬스터를 쓸어 버려 목숨을 구하게 된다.

뒤늦게 등장한 은둔 고수 덕분에 리엔과 어머니는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리엔의 아버지는 가족의 품에서 숨을 거둔다.

그날 이후 리엔은 끈질기게 할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제자로 삼아 달라고 졸라 댔다. 까칠한 은둔 고수는 당연히 처음엔 밀어내는 척하다 결국 어린 소녀를 제자로 받아 준다.

13살까지 리엔은 그의 제자로 지내며 검과 온갖 무술을 익혔고, 은둔 고수 할아버지가 챙겨 준 용돈과 그가 써 준 추천장을 가지고 수도 아브델로 상경해 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대단한 고수였는지 그의 추천장 하나로 리엔은 입학 허가를 받고, 이후 기사가 되기 위한 아카데미 생활을 한다.

그러다 우연히 정체불명의 귀족으로 추정되는 얼굴 천재 캐릭터인 체스터(가명 체스)를 만난다. 여기서 만난 루아인 체스터가 메인 남자 주인공이고, 금발의 보석 같은 푸른 눈을 가진 전형적인 왕세자 캐릭터였다.

체스터는 그동안 자신이 살면서 봤던 여자들과 전혀 다른 씩씩하고 털털한 리엔에게 반해 정체를 숨기고 종종 성을 빠져나와 함께 어울렸다. 그리고 그 어울림엔 체스터의 친구인 바이스 카르젠이 늘 동행했다.

리엔은 자신을 허물없이 대해 주는 둘을 역시 편하게 대했고, 세 사람은 그렇게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냈다.

어린 나이에 만난 셋은 언제나 함께였고. 크고 작은 사고를 치며 성장했다. 리엔은 훌륭한 성적으로 궁성 직속 기사가 되었고, 입단식에서 처음 왕세자 체스터의 정체를 알게 된다.

물론 이후에도 셋은 함께였고, 마족들이 붉은 달을 훔쳐 가 세계의 중심이 무너질 위기에 처해 붉은 달을 되찾기 위한 모험을 떠나게 된다.

모험 중 큰 사고를 당했을 때 숲의 마법사를 만나 모종의 거래를 하고 나선 더욱 돈독해졌고, 세계를 구하게 된 모험에서도 셋은 늘 함께였다. 그 내용을 차근차근 짚어 보던 이비는 낑낑대며 베개를 물어뜯었다.

‘으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일단 아카데미 시절 친구 엑스트라도 아니고. 아카데미 시절 내용이 재미있어서 재탕 많이 했으니 그땐 아냐. 그럼 모험 이후일 텐데….’

문제는 모험 이후에 신규 캐릭터가 너무 많았다. 완결 후 몇 번이나 재탕할 정도로 팬이었던 이비는 주조연급의 이름은 당연히 외우고 있었지만, 지나가는 엑스트라의 이름까진 외우진 않았다.

그래도 캐릭터마다 특성은 대부분 기억하고 있었다.

‘으음~ 숲의 마법사가 데리고 있는 쌍둥이 소년이 말이 없긴 했지만. 말수가 적은 거였지.’

숲의 마법사가 데리고 다니는 쌍둥이들은 실크 리본으로 안대처럼 눈을 가려 묶고, 말수가 적은 캐릭터였다. 즉 이비처럼 목소리 자체를 내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비는 큰 베개를 끌어안고 그대로 풀썩 쓰러져 누웠다.

‘일단 말을 못하는 캐릭터는 없었던 게 분명한데. 으음~ 아 모르겠다. 당장 생각 안 나는 걸 떠올릴 순 없으니, 앞으로의 일이나 생각해야겠네… 이제 난 어떻게 하지?’

말 그대로 미래가 걱정이었다. 지금 당장은 회복할 때까지 카르젠이 돌봐 주겠다고 했으니 괜찮았지만, 문제는 회복 이후부터였다.

‘카르젠 성격에 매정하게 내쫓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아무 명분 없이 여기서 지낼 수도 없고….’

이쯤 되니 슬슬 진심으로 걱정되기 시작했다.

책이나 게임에 빙의하는 장르를 보면 보통 주인공 버프는 받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꽤나 돈 많은 귀족이거나, 황실의 후계자거나, 또는 끔살당할 예정이라도 자신이 누군지 알고 아무도 모르는 치트키를 써서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그런 버프 말이다.

빙의 대상자 주변의 인간관계나 어느 정도 그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팁을 가지고 시작하거나, 미래의 내용을 알고 있다 보니 특수 광물이 발견될 예정인 광산을 선점하거나 또는 미리 떡상할 주식을 알고 금전적으로 이득을 취하며 시작하는 게 보통이었다.

‘카르젠 말로는 올겨울 종전 기념 1주년 행사와 추모식이 있다고 했지? 그럼 적어도 책 완결 내용 이후로 1년은 흘렀다는 거네. 어휴… 난 뭐 치트키도 없는 것 같은데….’

치트키는 고사하고 최소한 자신처럼 이미 책의 내용이 끝난 후의 시점에서, 이름도 모를 캐릭터에 빙의된 경우는 본 적이 없었다.

‘지금 걱정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네. 돌아갈 곳이 있나? 가족은? 돈은?’

고민의 꼬리를 물고 엄청나게 현실적인 걱정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만약 가족이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고, 없으면 없는 대로 문제일 것 같았다.

이비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그 사람들을 평생 속이며 살아야 할 텐데, 속일 자신도 없었고 매일 거짓말과 기만이 쌓인다면 죄책감이 어마어마할 것 같았다.

반대로 만약 돌아갈 곳도 없고 가족도 없다면 앞으로 혼자 살아가야 한다는 건데, 혼자 이 세계에서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일단 난 취직해 본 적 없고….’

초등학생 때 발병한 후, 어려서부터 죽을 때까지 거의 반평생을 병원에서 보냈으니 당연히 그 흔한 아르바이트도 해 본 적 없었다.

먹고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지만,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데 밥벌이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점점 깊어지는 고민에 이비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카르젠이라면 분명 목걸이의 이름을 단서로 가족을 찾아 주려 하겠지? 하지만, 만약에 아무것도 찾지 못한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할까….’

***

같은 시간.

소지품 세척을 마친 카르젠은 이비의 예상대로 제 사람 중 가장 노련한 집사 바론에게 직접 신변 조사를 맡기는 중이었다.

평소 같으면 필요한 정보가 있을 경우 빠르고 신속하게 알아 오라 명했겠지만, 이번엔 달랐다. 시간이 얼마나 걸려도 좋으니 꼼꼼한 조사를 지시했다.

집사 바론은 카르젠을 향해 예의 바르게 인사하며 잠시간의 이별을 고했다.

“도련님. 휴가는 최대한 빠르게 다녀오겠습니다.”

“말했다시피 급할 것 없어. 오래 걸려도 상관없으니 느긋하게 다녀와. 뭔가 확인되면 바로 연락 주고.”

“예. 도련님.”

카르젠의 명을 받은 바론이 휴가를 가장한 임무를 나설 때쯤, 얌전히 누워 있던 이비는 고민하는 것을 미뤄 두기로 결심했다.

‘당장 고민해 봤자 해결되는 것도 없으니, 카르젠이 먼저 말 꺼냈을 때 상담해 봐야지.’

이비는 카르젠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있었다. 그는 이비가 알던 것처럼 상냥하고 자상했으며 자비로운 사람이었다. 카르젠이 자신을 갑자기 내쫓아 굶어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는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미 많은 신세를 졌지만 자립할 수 있도록 조금만 더 도와달라고, 꼭 은혜 갚겠다고 하면 갚을 필요 없다며 뭐든 들어줄 사람이었다.

물론 이비는 카르젠의 착한 심성을 이용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받은 만큼은 무조건 돌려줄 생각이었고, 그가 만약 거절해도 어떻게든 은혜를 갚을 생각이었다.

훗날, 그의 주머니에 몰래 소매넣기를 해서라도 말이다.

***

방에서 단둘이 식사하던 카르젠은, 맞은편에 담요를 두르고 앉아 팔자 눈썹으로 눈을 꼭 감고 있는 이비를 향해 물었다.

“맛있어?”

끄덕끄덕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누가 봐도 이비는 맛있게 먹고 있었다.

수프 그릇을 소중하게 끌어안고 한 스푼 입에 넣고는 작은 입을 앙다물고 오물오물 음미하며 먹는 모습은 보는 사람마저 배부른 기분이 들게 했다.

‘진짜 행복한 얼굴로 먹네.’

카르젠은 이비가 잘 먹는 모습에 안도하며 빵을 집어 반으로 쪼개다 멈칫했다.

이비의 시선이 제 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손에 들고 있는 빵에 고정되어 있었다.

‘빵을 왜 저렇게 노려보지?’

‘큽… 나도 빵 먹고 싶다! 빵 냄새 엄청 고소하고 좋은데! 아직 따뜻해 보이는데! 나 속 괜찮은데! 완전 괜찮은데! 중환자도 아닌데!’

‘혹시 빵을 싫어하나?’

‘으… 으허어엉, 나도 빵 먹고 싶어엉!’

이글이글하다 못해 거의 빵을 태울 만큼 강렬한 눈빛이었다.

카르젠은 슬그머니 들고 있던 빵을 다른 손으로 옮겨 잡았다. 이비의 눈동자가 그대로 빵을 따라 움직이는 게 보였다. 이번엔 빵을 접시에 내려 두니 이비의 시선이 접시로 떨어졌다.

저 강렬한 표정을 살피던 카르젠은 보았다. 빵을 접시에 내려 두었을 때 달싹이는 작은 입술을. 저도 모르게 꼴깍 군침 삼키는 모습을….

“…….”

“이비… 혹시 빵이 먹고 싶어?”

“!”

조용한 물음에 이비가 고개를 들었다.

정곡이었는지 당황한 얼굴이 홧홧 붉어지기 시작하더니, 머뭇거리면서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젠은 그렇게 대놓고 노려봤으면서 심중을 들킨 게 부끄럽다는 듯한 이비의 행동에 다소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애써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일단 소화가 편한 부드러운 음식으로 먹는 게 좋다고 하긴 했는데….”

기대한 말이 아니었는지 이비는 몹시 실망한 듯, 마치 수프 그릇 뺏긴 사람처럼 일순 시무룩해졌다.

‘빵도 부드러운데….’

의원의 진단도 진단이지만, 자신이 너무 염치없이 요구하는 것 같다 느낀 이비가 작게 끄덕였다.

‘아냐. 괜찮아! 카르젠이 빵이 아까워서 안 주는 게 아니라 다 내 생각해서 그러는 거잖아. 나랑 같이 먹느라 카르젠도 빵에 수프만 먹고 있는데… 아쉽지만 다음에 먹어야지.’

카르젠은 실망한 얼굴에서 바로 납득한 얼굴로 바뀌는 이비를 보며 애써 웃음을 참았다. 굳이 알려 주지 않아도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보이는 게 재미있었다.

납득했으면서도 아쉬운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삐죽 내미는 모습이 귀여웠다. 작은 웃음을 참아 낸 카르젠이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이비. 혹시 모르니 속에 부담 가지 않게 부드러운 부분만 잘라 줄게. 대신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야 해.”

“!”

일순 밝아진 얼굴로 세차게 끄덕인 이비의 시선이 다시 빵으로 떨어졌다.

카르젠은 저 열렬한 눈빛에 주저 없이 버터나이프를 집어 들고, 빵의 바삭한 부분 안쪽으로 찔러 넣었다. 과일 속을 파내듯 삭삭 부드러운 속살만 발라 이비에게 내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양손으로 넙죽 받았다.

보들보들한 빵을 반으로 찢어 한입 베어 문 이비는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씹으며 음미했다. 나머지 반쪽도 파내던 카르젠은 행복해 보이는 이비의 얼굴을 보며 미소 지었다.

‘밤까지 별문제 없으면 내일부터는 조금 더 식사다운 메뉴로 준비해도 되겠어.’

빵 덕분인지 이비의 얼굴이 헤실헤실 풀어졌다.

카르젠은 꾸밈없이 행복하게 먹는 이비를 보고 있자니, 뭐든 맛있게 먹던 동료들이 떠올랐다. 고된 여정이었지만, 모닥불에 다 함께 둘러앉아 스튜 한 그릇과 빵 한 조각만으로도 행복해지는 나날이었다.

영원할 것 같았던 기나긴 여정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온 카르젠은 대부분 식사를 혼자 했다.

누군가와 식사를 한다 해도 격식 차리는 자리가 대부분이었고 딱히 즐겁지 않았는데, 빵 한 입에 행복해 다리를 구르다 흠칫하고 다시 자세를 바로잡는 이비를 보고 있자니 순수하게 즐거워 미소가 번졌다.

‘오랜만에 즐거운 식사군.’

식사 중 저와 눈 마주친 이비가 급히 고개 돌려 실눈을 뜨고 숨을 고르는 모습에 놀란 순간도 있었지만, 카르젠에겐 실로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

사박사박

천천히 저택 뒷마당을 걷던 이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카르젠의 저택에 온 이후 첫, 아니. 전생과 현생을 합쳐 계산해 봐도 거의 2년 만의 산책이었다.

이후의 산책이라면 몸이 급격하게 악화되어 제 다리로 걷지 못하고, 동생의 도움으로 휠체어에 앉아 잠시 병원 앞에서 바람을 쐬는 정도였다.

‘빵의 기운인가? 걸을 만하네.’

손은 여전히 잘게 떨렸지만, 빵의 힘 덕분인지 낮처럼 다리가 후들거리진 않았다.

물론 가끔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리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카르젠이 옆에서 잡아 주었기에 넘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카르젠이 내밀어 준 팔을 잡고 있어 훨씬 걸음이 편했다. 느려도 자신의 두 다리로 걷는 산책이 만족스러웠다.

날도 좋아 밤바람은 시원했고, 하늘엔 별이 가득했다. 이렇게 많은 별이 떠 있는 것도 신기한데, 중간중간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도 선명하게 보여 소리 없는 감탄을 했다.

‘와… 별똥별 처음 봐… 엄청 많이 떨어지는데 소원이나 빌어 볼까?’

소원을 떠올리자 바로 또 하나의 유성이 긴 꼬리를 달고 떨어졌다.

이비는 재빨리 소원을 빌었다.

‘이 세계에서 무사히 취직하게 해 주세요.’

소원을 빌자마자 또 다른 유성이 떨어졌다.

‘카르젠에게 은혜 갚게 적당히 많이 벌게 해 주세요.’

이번엔 두 개의 유성이 동시에 떨어졌지만, 어째서인지 이비는 바로 소원을 빌 수 없었다. 빌고 싶은 소원은 있는데 아직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비는 슬쩍 고개를 돌려 카르젠을 올려다봤다. 언제부터인지 그도 하늘을 보며 걷고 있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카르젠이 고개 숙이며 이비와 눈을 맞춘 순간.

이비는 제 소원을 정의했다.

‘내가 여기에 더 머물 이유가 없어서 카르젠의 저택을 떠난 후에도 가능하다면… 흐억!’

“이비!”

일순 다리에 힘이 풀려 고꾸라질 뻔한 이비의 허리를 그가 잽싸게 받쳤다.

다행히 넘어지지 않았지만, 얼떨결에 뒤로 반쯤 드러누운 자세로 카르젠을 올려다보게 된 이비는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아름다운 카르젠의 어깨 너머로 무수히 많은 유성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놀라 그대로 굳어 있으니 바람에 흘러내린 그의 머리카락이 이비의 뺨을 간질였다.

“이비, 괜찮아?”

걱정스런 물음에 멍하니 카르젠을 바라보던 이비가 겨우 정신 차리고 끄덕였다.

부축받아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카르젠과 마주 서게 된 이비는 그를 올려다보며 홀린 듯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넘겨 주었다.

이비의 손길에 카르젠은 놀란 기색 없이 허리를 살짝 숙여 키를 맞춰 주었다.

넘어지기 전에 잡아 다행이라며 부드럽게 미소 짓는 그의 어깨너머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준 이비는 쏟아지는 유성우보다 카르젠의 눈을 마주 보며 소원을 마저 빌었다.

‘…가능하다면 카르젠과 친구가 되고 싶어요.’

***

‘스스로 밥도 먹고. 빵도 먹었고. 산책도 하고! 회복력이 빠른가? 어쩌면 진짜 건강한 몸일지도 몰라!’

이날은 이비가 이곳에 와서 가장 많은 것을 한 날이었다.

그리고 지금 또 새로운 일을 하고 있었다.

“이비. 춥지는 않아?”

끄덕끄덕

“더 보고 싶은 책이 있거나 방으로 돌아가고 싶어지면 알려 줘.”

입술로 고맙다고 말한 이비가 생긋 웃었다.

카르젠 역시 이비에게 살풋 미소 지어 보이곤 책상에 앉아 둘둘 말린 서류들을 펼쳤다.

지금 이비는 짧은 산책 후 카르젠과 함께 서재에서 밤을 보내는 중이었다. 구조된 후 계속 방에만 있었기에 오늘 처음 와 본 서재가 퍽 신기하게 느껴졌다.

카르젠의 책상 뒤로 보이는 아치형 창문 너머엔 여전히 무수히 많은 별이 떠 있었다. 문과 창문이 있는 벽면을 제외한 양쪽 벽은 책장이었다.

서재가 넓은 편은 아니었지만, 양쪽 벽면 전체가 책장으로 제작된지라 상당히 많은 양의 책이 보였다.

중앙엔 긴 소파 두 개가 낮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었고, 이비는 그중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카르젠이 준 담요를 덮은 이비는 고개 들어 천장 중앙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수정을 바라보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공중에 어떻게 혼자 떠 있는 거지? 신기하다. 그리고 저렇게 밝게 빛나는 수정은 엄청 비싸다고 했는데….’

작중 미궁에서 헤매던 에피소드 중, 작은 수정을 꺼내며 생색내던 드워프가 떠올랐다.

눈에 보이는 것과 책 내용으로 습득해 아는 것들을 떠올리던 이비는 책상으로 시선을 돌려 카르젠을 바라봤다.

꽤 긴 서류를 꼼꼼히 읽은 카르젠이 깃펜을 쥐고 잉크에 담그는 모습은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는 바로 서명하지 않고 다른 서류와 몇 번이고 비교한 후에 서명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집중하는지 이비가 저를 보고 있는 것도 인식하지 못한 것 같았다.

‘카르젠이 이 시기에 하는 일이면, 아마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의 쉼터 마련과 학교 설립 때문이겠지?’

이비는 카르젠이 본가를 나와 이 저택에서 혼자 지내기 시작한 때를 떠올리며 짚어 보기 시작했다.

작중 카르젠은 모든 여정이 끝나고 대부분의 포상을 거절했다.

심지어 제 가문인 바이스 백작가의 모든 것을 동생이 이어 가도록 요청하고 여름의 끝자락에 출가한다.

대외적으로는 나라 하나도 아니고 대륙을 구한 영웅의 핵심 인물이었음에도, 그가 요구한 것은 기사 단장직에서 물러나는 것과 행정 구역에서 멀지 않은 수도 외곽의 소박한 개인 저택이었다.

물론 체스터 왕세자는 수도엔 소박한 저택이 없다는 핑계로 호화로운 저택을 내려 주었다. 지금 이비가 머무는 이 저택이었다.

또 카르젠의 바람대로 기사단장직을 물러나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무기한 휴직 처리를 해 주었다. 언제든 제 사람인 카르젠이 돌아올 자리를 비워 두겠다는 뜻이었다.

휴직 이후 카르젠은 복귀에 대한 기약을 남기지 않은 채 본격적으로 난민을 돕기 시작한다.

대륙을 할퀴고 지나간 큰 전쟁으로 삶의 터전을 잃거나 고아가 된 아이들이 많았다. 그런 이들을 돕고자 처음으로 왕세자의 곁을 떠났다는 것이 카르젠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었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지만… 쭉 그랬던 것처럼 카르젠은 자신을 위해 살지는 않았을 것 같아….’

카르젠은 그런 남자였다. 늘 제 주변 사람을 보살피고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기꺼이 내주었다.

이비는 카르젠이 소중한 이를 지키기 위해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 또 지금 카르젠이 어떤 상태인지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기에 앞으로라도 그에게 슬플 일이 없었으면 했다.

그래서 이비는 어떻게든 카르젠에게 꼭 은혜를 갚겠다고 재차 다짐했다.

그러려면 우선 건강해져야 했고, 자신이 누군지 확실히 알아봐야 했다. 이비는 무릎 위에 올려 둔 책을 펼쳤다.

<빛이 잠들지 않는 도시, 아브델의 명소들>

01p-50p 꼭 들려야 할 아브델의 명소

51p-83p 당신의 입맛을 사로잡을 수도의 레스토랑과 디저트 카페

84p-92p 아브델의 다양한 공예품과 토산품들이 모여 있는 시장 완벽 정리

93p-102p 도움이 필요할 때 알아 두면 좋을 시설과 기관들

103p-110p 연인과 함께 특별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상천외한 가게들

111p-130p 저렴한 여관부터 고급스러운 여관까지 모든 숙소 정보

목차를 살핀 이비는 93페이지로 책을 넘겼다.

***

…-보단 덜 뚱한 얼굴로 아카데미 온실에 나란히 앉은 리엔은 카르젠의 검은 머리카락과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을 땋기 시작했다.

선명하게 다른 두 색이 교차하며 하나로 엮이는 모습을 바라보던 카르젠은 슬쩍 회중시계를 꺼내 봤다.

이미 4교시 체술의 이론 수업이 시작했을 시간이었지만, 리엔의 이글이글한 눈빛에 재빨리 주머니에 시계를 넣은 카르젠은 리엔의 기분이 풀릴 때까지 자신의 머리카락을 기꺼이 내주었다.

바이스 카르젠 14살 인생에 첫 땡땡이였다.

숲의 마법사 2권 237페이지 中

***

도움이 필요할 때 알아 두면 좋을 시설과 기관들의 첫 페이지엔 수도 내에 위치한 크고 작은 병원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다음 페이지엔 각 병원 지도가 보였다.

다음 장으로 넘기니 마찬가지로 치안을 담당하는 경비대 초소 목록과 분실물 센터 지도가 자세히 그려져 있었고, 한 장 더 넘기니 신전과 수도 관리국 행정 건물 설명이 보였다.

이비는 수도 관리국의 지도를 꼼꼼히 살펴봤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여기에 가면 시민 명부를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신전 바로 옆이니 찾기도 쉽겠네.’

이비가 만약 수도에서 살고 있었다면 여기서 시작해도 좋을 것 같았다.

‘지도가 전부 광장 중심으로 그려져 있네. 이 저택이 광장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모르겠고. 어쩌지? 카르젠이 혹시 외출할 일이 있으면 나도 광장까지만 데려다주라고 부탁해 볼까?’

카르젠의 저택 위치를 모르니 괜한 지도만 부리부리하게 보며 고민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카르젠 도련님. 차와 다과를 준비했습니다.”

“들어와.”

문이 열리자 동글동글한 얼굴의 통통한 시종이 수레를 끌고 들어왔다. 그녀는 카르젠의 책상 옆에 차와 작은 샌드위치나 쿠키 등이 담긴 접시를 올려 두었다.

늘 일하며 먹었던 것인지 책상 빈 곳에 야무지게 세팅하고는, 이비의 앞에도 차와 다과를 준비해 주었다.

‘내 것도 있어!’

제 몫을 보고 놀란 이비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녀는 작은 스푼까지 세팅해 준 후, 카르젠 도련님께서 특별히 부탁하셨던 것이라며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소화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차와 부드럽고 담백하게 드실 수 있는 것들로 준비했습니다.”

이비는 저도 모르게 꾸벅 인사하다 이 세계에서 이렇게 인사해도 되나 싶어 당황했다. 그래서 최대한 고마움을 담은 얼굴로 느릿하게 [고맙습니다]하고 입술을 움직였다.

그녀는 입술을 읽진 못하지만, 정황상 알아들은 듯 살풋 미소 지어 보이곤 카르젠과 이비에게 물러나겠다고 인사했다.

이비는 카르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가 잔잔한 미소를 띠며 바라보는 모습에 눈이 부셨지만, 용케 피하지 않고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입술을 정확히 읽은 카르젠이 천천히 먹으라며 보다 환하게 웃었고, 결국 이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악! 역시 눈부셔…!’

이비는 고개 돌린 채, 저 환한 미소의 파괴력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자 심장 부근을 꾹 눌렀다.

‘아이고, 내 심장….’

그 순간.

“이비? 괜찮아?”

걱정스런 물음이 가까이서 들렸다.

놀라 고개 드니 바로 앞에 다가온 카르젠이 옆자리에 앉으며 이비를 살폈다.

“혹시 여기가 아픈 거야? 여기 이 부근?”

다소 급하게 물으며 이비가 누르고 있던 가슴께를 가리키는 모습에 당황한 이비가 도리질하며 손사래 쳤다.

“이비.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아니 그게….’

이비의 얼굴이 당혹감에 물들었다. 그 얼굴을 본 카르젠은 저도 모르게 이비가 누르고 있던 위치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누르고 있던 곳이 여기지? 만약 이 부근이 아프다면 검진이 필요해. 욱신거렸어? 아니면 따끔거렸어?”

도리도리

“그럼? 혹시 누가 꼬집는 것처럼 콱 조였어?”

도리도리

‘어헉, 미치겠네! 이번엔 심장병으로 오해하면 안 되는데! 그래도 어떻게 말해 이걸! 으아악! 어떡하지!?’

카르젠은 제 앞의 이비가 입술은 달싹이는데 말은 못 하고 초조해하고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아 걱정이 깊어졌다.

‘설마 그동안 심장이 계속 아팠는데 참았던 건가? 아니면 새로운 증상인가?’

게다가 제 손바닥 아래 느껴지는 이비의 심장 고동이 점점 크게 느껴졌다. 불규칙하게 쿵쾅대는 심장을 느낀 카르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비. 많이 안 좋으면 야간 진료 가능한….”

도리도리 도리도리

기겁하며 도리질하는 모습에 카르젠이 말을 멈췄다.

새빨개져 고개를 푹 숙인 이비가 머뭇거리며 제 가슴을 짚고 있는 카르젠의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곤 무언가 내려놓은 얼굴로 그 큰 손을 자신의 허벅지 위에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올려 두었다.

뭔가 쓰려는 듯 어렵게 손 뻗는 모습을 지켜보던 카르젠은 아까보다 더 떨리는 이비의 손을 보자 마음이 안 좋았다.

‘괜히 무리하게 산책을 했나. 일찍 쉬게 해야 했는데, 늦은 시간까지 깨어 있어서….’

쓱- 쓱-

이비가 뭔가 쓰기 시작하자 카르젠은 생각을 멈추고 손바닥에 집중했다.

쓱- 쓱쓱- …쓱… 쓰윽….

“…….”

쓱쓱. 쓱쓱쓱… 쓱- 쓱- 쓱- 쓱쓱- 쓱….

얌전히 이비의 손길에 따라 손바닥에 머뭇머뭇 쓰여지는 글자를 인식하던 카르젠이 갸웃했다.

자신이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지, 맞게 알아들었다면 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비. 미안한데, 다시 알려 줘. 제대로 못 알아들은 것 같아.”

“…….”

이비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이젠 얼굴뿐만 아니라 귀랑 목부터 쇄골 부근까지 새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순식간에 사과가 된 이비를 지켜보던 카르젠은 방금 자기가 이해한 게 맞나? 싶어 다시 손바닥에 집중했다.

어째 더 긴장한 듯 재차 꾹꾹 눌러쓰는 내용은 조금 전보다 더 솔직했고 자세했으며, 어떻게 보면 자포자기스러운 내용이었다.

제 손바닥을 간질이는 이비의 손가락을 집중해 보던 카르젠은 그 내용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이비의 손가락이 멈추고 바들바들 떠는 것을 본 순간 안심했다.

“그러니까 이비는….”

움찔

카르젠은 이비가 들려 준 이야기를 이해하면 할수록 자꾸 웃음이 날 것 같아 애써 꾹- 참으며 말했다.

“절대 심장이 아픈 게 아니고.”

끄덕

‘악! 아악!’

“그동안 내 시선을 피했던 이유가… 내가 웃을 때마다. 눈부셔서 보기 힘들어서 그랬던 거라고?”

끄, 끄덕

‘끄아악!’

“내가 웃으면, 찬란하게 빛이 난다고? 눈이 부실 정도로?”

파르르

‘악! 악! 악! 그걸 굳이! 왜 말해! 그걸 굳이 왜 말하는 거야! 대체 왜! 악! 아악! 아아악! 이해했잖아! 이해했잖아!’

다행히 카르젠은 말로 더 확인하는 대신 침묵했다.

이비의 얼굴은 이제 펑 터져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열이 올랐다.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은데, 카르젠이 갑자기 아무 말도 없으니 오히려 더 긴장됐다. 바로 옆에 앉아 있는데,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너무 조용했다.

‘어흑… 역시 어처구니없겠지? 근데 너무 조용한 거 아니냐고오, 아악! 악! 악! 너무 부끄러워! 으악!’

그가 오해하고 병원에 데려갈까 봐 기겁해 솔직하게 털어놓긴 했는데, 아무 말이 없으니 불안하고 괜히 더 부끄러워졌다.

뭐라도 발로 뻥뻥 차며 버둥거려야 이 부끄러움이 아주 조금 해소될 것 같은 심정이었다.

대체 왜 이렇게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진 건가 싶어 조심스레 고개를 든 이비는 순식간에 울고 싶어졌다.

‘차라리 그냥 숙이고 있을걸….’

입술을 말아 넣은 카르젠이 다른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이미 터졌는데, 어떻게든 안 웃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모습마저 멋져 보이는 게 문제였다. 카르젠의 입술 새로 큽…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아….’

그가 입술을 더 세게 말아 넣으며 어깨를 잘게 떨었다. 이비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제 허벅지 위에 놓인 카르젠의 손바닥에 손가락을 올렸다.

쓱- 쓱쓱- 쓱-… 쓱… 쓱쓱….

-웃어도 괜찮아요….-

뜻을 이해한 카르젠은 허락받은 대로 더 참지 않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비는 허리를 반쯤 접고 이마를 짚은 채 들썩이며 웃는 그를 보고 있자니, 오히려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해탈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저 때문에 저렇게 웃는 모습을 보는 것도 신선했다.

‘아니 그래도… 너무 웃잖아!’

마치 세상에 웃을 일 하나 없던 사람이 몇 년치를 몰아서 웃는 것 같았다.

저렇게 웃으면 나중에 복근 아플 텐데. 생각이 들 정도로 웃어 댔고, 이비는 그런 카르젠을 바라보다 입술을 삐죽거리며 다시 손바닥에 쓱쓱 글자를 썼다.

-이제 그만 웃어요.-

끝에 마침표까지 꾹- 힘주어 써 준 뜻을 이해한 카르젠이 웃음을 참기 시작했지만, 5초도 지나지 않아 오히려 더 크게 터져 버렸다.

스스로도 진정하기 힘든지 어깨를 들썩이며 웃던 그가 미안하다 사과했다.

“미, 미안, 크흡. 아하하. 흡. 이런. 이유일 거라고는… 하하핫!”

“…….”

새빨개진 이비의 입술이 더 삐죽 나왔다.

웃지 말라고 입을 막을 수도 없고. 새빨개져 쉬익쉬익 카르젠의 손바닥에 다시 손가락을 대자 그가 이비의 손을 감싸 잡았다.

반사적으로 그를 향해 고개 돌린 이비는 더 입술을 삐죽일 수 없었다.

여전히 이마 짚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그대로 방치한 채, 저를 보며 가늘게 휜 눈으로 웃고 있는 카르젠을 마주한 순간.

‘세상에, 신이시여….’

이비는 카르젠의 저 미소가 지금껏 봤던 그 어떤 미소보다 눈부셔서 저도 모르게 신을 찾았다. 그 와중에 여기서 또 눈을 감으면 분명 더 웃을 것 같아 카르젠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차라리 보지 않으련다….’

눈 가리고 끙끙대는 이비의 모습에 결국 카르젠의 허리가 꺾였다.

***

다음 날.

꽤 이른 아침에 방문한 의원이 이비의 몸을 진찰했다.

진찰 내내 곁에 있던 카르젠은 의원에게 어제 이비가 먹은 음식을 모두 말해 주었다. 물론 섭취 후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는 말도 덧붙여 주었다.

덕분에 이비는 너무 자극적인 음식만 아니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진단을 받고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하게 웃었다.

단, 아직 수전증이 가시지 않았고, 무리하면 근육 수축이 발생할 수 있으니 시간 날 때마다 종아리와 허벅지 근육을 마사지해 주는 게 좋다고 했다.

해독 약초가 들어간 물약을 꺼내며 잠은 잘 잤는지, 간밤에 아프거나 식은땀이 난 적은 없는지 묻는 의원에게 이비가 힘차게 끄덕여 보였다.

잠들기 직전 서재에서의 일이 떠올라 이불을 걷어차고 헉헉대며 침대에서 버둥거리긴 했지만, 잠든 후엔 꿈도 꾸지 않고 푹 잤다.

어떻게든 자신이 지금 매우 건강한 상태라는 것을 어필하고 싶었던 이비는 의원의 물음에 전부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진료와 이틀치 약 처방을 마친 의원은 별다른 증상이 없다면 다른 진료는 불필요할 것으로 보인다며 새로 약을 지어 다시 방문하거나 배달로 보내 주겠다고 했다.

회복력이 굉장히 좋은 것으로 볼 때 앞으로 약을 꾸준히 먹고 가벼운 산책부터 시작하면 금세 괜찮아질 것 같다는 긍정적인 말도 덧붙여 주었다.

그 말에 이비는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고, 카르젠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이비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아 주었다.

그렇게 모두가 만족스러운 오전 진료가 끝나고 컨디션이 꽤 좋아진 이비는 자신의 방이 아닌 저택 식당에서 카르젠과 둘이 아침 식사를 했다.

아침 메뉴는 건더기가 푸짐한 스튜와 갓 구운 보들보들한 빵, 그리고 신선한 야채와 과일 샐러드였다.

‘아, 빵 엄청 부드럽고 고소하고 맛있어. 샐러드도 엄청 상큼하네. 진짜 꾀병 부리고 여기서 살고 싶을 정도로 맛있다….’

할 수만 있다면 매일 먹고 싶을 정도로 맛있었다. 과일 주스조차 너무 신선하고 맛있어서 한 모금 머금고 다리를 구를 뻔했다.

최대한 얌전하게 먹으려 했지만, 먹을 때마다 입안에 퍼지는 온갖 풍미에 미소가 번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카르젠은 행복한 얼굴로 식사하는 이비를 지켜보며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누가 봐도 너무 맛있어서 행복하다는 티가 팍팍 나는 모습이었다.

어찌나 맛있게 먹는지, 부족한 게 없나 슬쩍 살피러 나온 메인 주방장도 이비를 보곤 싱글벙글 웃으며 주방으로 돌아갔을 정도였다.

카르젠과 이비가 어느 정도 식사를 거의 끝낸 기미가 보이자 시종이 디저트를 가져왔다. 이비는 제 앞에 놓인 푸딩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그 모습에 카르젠이 건드리지도 않은 자신의 푸딩을 쓱 밀어 주며 말했다.

“괜찮다면 이것도 이비가 먹어 줘.”

“!”

세상에, 아무리 배불러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맛있는 걸 안 먹을 수 있냐고 쓰여 있는 얼굴에 카르젠이 쿡쿡 웃었다.

이비는 카르젠이 왜 웃는지 모르겠지만 또 눈이 부시려 해 가늘게 뜬 눈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고맙습니다.]

입술을 읽은 카르젠이 싱긋 미소 지었다. 그러자 이비의 눈이 더 가늘어지더니 시선을 푸딩으로 떨어뜨렸다.

‘이 정도로 웃는 것도 신경 쓰이나 보군.’

카르젠은 순식간에 침침해진 이비의 눈빛에 애써 웃음을 참았다. 어젯밤 일이 떠오르기도 했고, 눈부시다는 말이 진심이었는지 저렇게 꾸준히 반응하는 것이 재미있기도 했다.

두 번째 푸딩을 순식간에 해치운 이비를 확인한 카르젠은 시종에게 서재로 차를 가져다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먼저 일어나 이비에게 손을 내밀었고, 이비는 익숙하게 카르젠이 내민 손을 잡고 천천히 일어났다.

첫걸음에 살짝 비틀거리긴 했지만, 문제없이 걷는 이비를 보며 카르젠은 안도했다.

식당을 나와 복도를 걸으며 서재에 도착할 때까지 카르젠은 이비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

“일단 수습한 건 이게 전부야. 최대한 깨끗하게 닦고 세탁했어.”

이비는 카르젠이 서재 낮은 테이블에 올려 둔 자신의 소지품을 바라봤다. 세척 후 잘 말려 둔 깨지기 직전인 작은 유리병과 헝겊 주머니, 아마도 수정으로 보이는 깨진 조각들과 손수건. 그리고 질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 가죽으로 만들어진 크로스백이었다.

‘역시나 별거 없네.’

이비가 이게 뭔지 궁금하다는 듯 깨진 수정 조각을 들어 보이자 카르젠이 설명했다.

“수정 조각이야. 어떤 용도인지는 깨져서 알아볼 수가 없었어. 지금은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조각에 불과하지만, 보여 줘야 할 것 같아서.”

물론 거짓말이었다. 안에 남아 있던 불법 텔레포트 좌표 흔적은 카르젠이 자신의 마력으로 깨끗하게 지운 후였다.

손수건에 싸여 있던 쪽지에 대해선 당연하게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비가 기억을 찾는다면 모를까, 그전까진 절대 보여 줄 생각이 없었다.

이비는 자신의 소지품들을 바라보다 곧 시무룩해졌다.

‘아니, 어찌 된 게 돈이 한 푼도 없어!’

카르젠이 돈을 가져갔을 리는 절대 없으니, 애초에 한 푼도 없었다는 것을 뜻하는 구성이었다.

동전 한 닢 없는 소지품을 보자니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애써 한숨을 참은 이비가 맞은편 소파에 앉은 카르젠을 향해 입술로 말했다.

[카르젠님, 고맙습니다.]

“고맙긴. 그리고 이비만 괜찮으면 깨진 수정조각과 유리병은 버려도 괜찮을까? 만약 간직하고 싶다면 다치지 않게 담아 줄게.”

도리도리

어차피 내용물 없이 금이 쫙쫙 간 유리병과 날카로운 조각들이었다. 굳이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이비가 가죽 가방을 열고 손수건과 헝겊 주머니만 넣었다.

“아. 그리고 바론을 통해 이비에 대해 알아보라고 심부름 보냈어. 여기 아브델부터 시작해서 주변 영지도 쭉 알아볼 거지만, 목걸이에 적힌 이름뿐이라 조사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릴 테니 그동안 다른 걱정하지 말고 여기서 편하게 지내도록 해.”

“!”

그 말에 놀란 이비가 먼저 고맙다고 입술로 대답하곤 상념에 잠겼다.

‘그럼 내가 굳이 수도 관리국에 갈 필요는 없겠네? 만약 내게 돌아갈 곳이 있다면, 아브델이 아닌 다른 영지라면 카르젠을 볼 수 없겠지? 볼 수 있다고 해도 딱히 만날 명분이 없으니…. 친구가 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생각해 보니 여기 귀족 사회잖아…. 카르젠이 아무리 사람을 허물없이 대한다고 해도 친구가 되는 건 무리한 바람이겠지….’

아직 아무것도 밝혀진 바가 없는데, 어쩐지 곧 이별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마음이 찌무룩해졌다.

카르젠은 이비의 표정이 미묘한 것을 눈치채고 다정히 물었다.

“뭔가 걱정이 있는 것 같네. 혹시 지내면서 불편한 점이라도 있어?”

저 물음에 절대 아니라는 듯이 이비가 격하게 도리질했다.

카르젠은 그런 이비가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듯이 평소보다 훨씬 더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이비. 지금은 물론 아무 기억도 없고 이래저래 많이 혼란스러울 거야. 고민이 있다면 나에게 말해 줬으면 좋겠어. 물론 이비만 괜찮다면 말이지.”

‘허…. 진짜 어떻게 해야 사람이 저렇게까지 다정한지 모르겠네. 음… 역시 그냥 지금 물어볼까? 어차피 곧 말하긴 해야 하는 문제긴 한데….’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모습에 카르젠은 편히 앉으며 기다려 주었다.

재촉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열심히 머릿속을 정리한 이비가 머뭇거리며 입술로 말하려다 멈칫했다.

입술로 말하기엔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카르젠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손바닥에 써 줘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이비의 고민을 간파한 듯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에서 무언가 챙겼다.

그리곤 앉아 있던 맞은편이 아닌 이비의 옆자리에 앉아 가져온 것을 건네주었다.

반질반질한 종이로 만들어진 수첩과 천을 돌돌 말아 끝부분만 심이 나오게 묶어 둔 얇은 목탄이었다.

이비는 딱 봐도 엄청나게 질 좋은 종이인 게 티가 나서 최대한 아껴 쓰겠다는 의지로 종이 구석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카르젠은 이비의 깨알 같은 글씨들이 하나의 문장으로 이어지는 것을 지켜보며 대답했다.

“음… 돌아갈 곳이 없을 경우라…. 이 부분은 어차피 이비도 곧 알게 될 테니 지금 말할게.”

이비가 뭐냐는 듯 긴장한 얼굴로 바라보니 카르젠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목걸이에 성 없이 이름만 쓰인 부분이 조금 신경 쓰이긴 했어.”

[왜요?]

“적어도 루아인 왕국에선 누군가에게 이름이 새겨진 장신구를 선물을 줄 때 성을 같이 적거든. 성이 없다면 성직자이거나 부모가 누군지 모르는 고아 출신일 수 있어. 전자라면 찾기가 수월하겠지만 만약 후자일 경우도 배제할 수 없겠지….”

‘아? 그런 거였어? 그러고 보니, 내 최애도 성직자가 되면서 가문의 성을 버렸다고 했었지… 그럼 내가 성직자이거나 고아 출신일 수도 있다는 거구나.’

이비의 안색을 살핀 카르젠이 일부러 한층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비. 최선을 다해서 찾아 줄게. 만약 돌아갈 곳을 찾지 못한다고 해도 걱정하지 마. 처음부터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바론을 보낸 거고, 아무것도 찾지 못할 경우엔 이비의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지내 달라고 권할 생각이었으니.”

“?!”

파격적인 제안에 이비가 휘둥그레져 바라보니 카르젠이 잔잔한 미소를 띠며 물었다.

“설마 내가 아무 준비도 안 된 상태로 내보낼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카르젠이 그냥 매정하게 내쫓을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문제는 내 기억이 돌아올 리가 없다는 건데….’

카르젠이 저렇게 말해 주니 안심되고 기쁘기도 했지만, 문제는 절대 돌아올 리가 없는 기억이었다.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핑계로 계속 신세 진다면 그건 카르젠에 대한 기만이라고 생각한 이비가 다시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카르젠은 이비가 적어 내리는 질문을 읽고 바로 대답했다.

“음? 하하, 무슨 소리야. 돈으로 갚을 필요 없어. 대가를 바라고 구해 준 게 아니니까. 이비가 내게 신세 졌다고 생각하면 그걸 갚을 방법은 하나야.”

“?”

“이비가 건강해지는 것. 그거면 돼.”

“…으어…?”

이비의 입이 쩍 벌어졌다. 다소 경악스런 표정을 마주한 카르젠이 갸웃하며 물었다.

“왜?”

도리도리

‘으아니! 카르젠 진짜아! 이러니 리엔한테 매일 걸어 다니는 호구라며 얻어맞았지! 안 되겠어! 만약 아무 흔적도 찾지 못해서 내가 여기서 지낼 수 있게 된다면, 카르젠 옆에 날파리가 꼬이지 않도록 지켜봐야겠어! 음… 물론, 지금 나도 도움 안 되는 날파리 같은 존재지만… 어, 어쨌든! 이렇게 된 이상 무조건 나중에 꼭 다 갚아 준다!’

그가 갚을 필요 없다고 했지만, 이비는 돈이 아닌 다른 수단으로라도 카르젠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뭔가 비장해 보이는 표정의 이비를 지켜보던 카르젠이 당부하듯 말했다.

“이비는 다른 걱정하지 말고 편하게 지내면 돼. 알았지? 그리고 뭐든 필요한 게 있으면 편하게 말해 줘. 내가 없으면 부집사 할리스에게 말하고. 혹시 지금 바로 필요한 건 없어?”

‘지금 바로 필요한 거… 있긴 한데….’

카르젠의 권유에 이비가 입술로 말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염치없지만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이비는 제 감사 인사에 부드럽게 번진 카르젠의 아름다운 미소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 바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하고 싶었던 부탁을 사각사각 적기 시작했다.

“아. 그래. 그동안 힘들었지? 목욕물을 준비하라고 일러둘게.”

그 말에 이비가 환하게 웃었다. 현기증이 나면 위험해질 수 있다는 이유로, 그동안 매일 아침저녁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이비는 이 세계에 오기 전 병원에서 늘 그런 식으로 몸을 닦아야 했다. 그조차 스스로 닦을 수 없었고, 늘 간병인이나 부모님이나 동생이 닦아 주었다.

이전 삶의 일이 하나가 떠오르면 온갖 상념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기에, 이비는 가능하다면 더는 수건으로 몸을 닦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사치스러운 부탁일 수 있지만, 용기 내서 말했는데 카르젠이 흔쾌히 서재 밖에 대기 중인 부집사에게 목욕 준비를 지시해 주자 기분이 좋아졌다.

수첩과 목탄을 테이블에 내려 둔 이비는 차가 조금 담긴 찻잔을 들었다.

여전히 수전증이 남아 있어 손 떨다 차가 넘칠까 봐, 카르젠이 조금만 따라 준 차는 마시기 딱 좋게 식은 상태였다.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머금으니 입 안에 달콤하고 향긋한 꽃향기가 퍼졌다.

‘와… 맛은 부드러운데 향기는 달콤하네.’

달달하고 향긋한 차에 기분 좋아진 이비가 싱긋 미소 짓는 모습에, 카르젠의 입술 역시 호선을 그렸다.

이비가 차를 마시는 동안 카르젠은 수첩 사이에 목탄을 잘 끼워 넣고 가지고 다니면서 사용하라며 가죽 가방에 넣어 주었다.

이비는 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언젠가 전부 다 갚아 줄 생각이었기에 지금은 그저 고맙다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이비는 카르젠과 함께 차를 마시고 그의 손바닥을 간질이며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가 즐겁다고 생각했다.

여러 걱정거리가 있긴 했지만, 그와 별개로 이곳에서 지내는 것이 즐겁고 시간이 빠르게 간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비의 소박한 즐거움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욕실로 안내받은 순간 이비의 얼굴이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이… 이게 무슨….’

“응? 이비, 왜 그래? 아, 혹시 너무 뜨거워 보여서 그래? 괜찮아. 김이 펄펄 나긴 하지만 적당히 뜨거운 물이니까 겁낼 필요 없어.”

‘아니! 그게 아니라! 당신은 왜 벗는 거야! 같이 목욕하는 거였냐고!’

셔츠를 훌렁 벗어 제끼는 카르젠을 향해 진짜 같이 목욕하는 거냐고 물으려던 이비는, 그의 상체가 드러나자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바라봤다.

‘아, 아니, 아니, 무슨 몸이… 몸이… 무슨… 어, 어떻게 저런 몸이… 허어….’

생각조차 정리되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도 아름다운 몸이었다. 셔츠에 조끼까지 갖춰 입었을 땐 다소 말라 보여서 의외로 늘씬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옷을 벗으니 완전 딴판이었다.

특히 저 가슴! 저 가슴은 이비가 사람의 몸을 통해 생전 처음 느껴보는 훌륭함을 담고 있었다. 작중 주인공 리엔이 카르젠의 호구짓에 자주 싸대기를 날렸다는 넓은 가슴은, 책을 읽으며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아름다웠다.

단순히 멋지다는 말로 표현하기 죄스러워지는 가슴 아래로 조각한 것처럼 음각을 뽐내는 복근도 너무나도 훌륭했다.

굳어 버린 이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은 카르젠이 하의도 한꺼번에 벗은 순간, 이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세상에!’

아주 짧은 0.5초 정도 찰나의 순간이었는데도 이비는 카르젠의 웅장함을 보았다.

가히, 작중 캐릭터 설명대로 그는 ‘부족함 없이 모든 것이 완벽한 사람’이었다.

그것도 지나치게 완벽했다. 부족한 게 없는 정도가 아니라 철철 넘치게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사람.

분명 같은 남자인데도 전혀 다른 존재 같았다. 그의 환한 미소를 마주했을 때만큼 눈부셨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고 웅장함을 느끼게 하는 훌륭한 몸 때문에 이비는 차마 벗을 수가 없었다. 어쩐지 부끄러웠다.

단순히 마르고 작은 몸이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마치 신 앞에서 벌거벗는 불경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비의 기분을 알 리가 없는 카르젠은 제게 등 돌리고 선 이비를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매듭이 뒤에 있었구나. 금방 벗겨 줄게.”

“?!”

‘아냐! 벗겨 달라는 게 아니었어! 그거 아니라고!’

기겁한 이비가 돌아서려 했지만, 카르젠의 손이 등에 닿은 순간 그대로 몸이 굳어 버렸다.

그의 손이 부드럽게 이비의 뒷목 아래쯤 묶인 리본을 풀어 냈다. 매듭이 풀리고 순식간에 벌어진 셔츠 덕에 어깨가 살짝 드러났다.

춥지도 않은데 오소소 싸늘한 느낌에 움찔하자, 마치 어르고 달래는 듯한 상냥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이비. 팔 들어.”

카르젠의 다정한 지시에, 이비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어쩌다 보니 카르젠의 손에 훌렁훌렁 탈의하게 된 이비는 당황해 잔뜩 움츠린 채 그를 향해 돌아섰다.

입술로 말하기 위해서였는데, 제 눈앞에 보인 훌륭한 가슴에 새빨개져서 하찮은 손길로 그의 팔을 잡고 옆으로 밀었다.

너무 미약한 힘으로 낑낑대는 이비가 뭘 원하는지 몰라 지켜보던 카르젠은, 그가 자신을 돌려세우려는 것을 알고 슬쩍 돌아섰다.

‘혹시 부끄러워서 그러나?’

같은 남자끼리니 별생각 없었던 카르젠은 제 등에 닿은 손가락에 잠시 생각을 접고 집중했다.

-같이 목욕해요?-

“응. 놀랐어?”

-같이 할 줄 몰라서 조금 놀랐어요.-

“아아. 그랬구나. 놀라게 해서 미안해. 내 배려가 부족했어. 루아인에선 대중목욕 문화가 발달해서 동성끼린 편하게 같이 목욕하는 편이거든. 게다가 아직 이비가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니라 현기증이라도 나면 위험하니까 같이 하는 게 좋을 것 같았어. 혼자 하고 싶어?”

‘아… 그러고 보니 소설에서도 유독 동료들끼리 목욕하는 장면이 많긴 했지. 드워프 멀린이랑 처음 만난 날에도 남자들끼리 목욕으로 긴장을 풀기도 했고. 덕분에 동생이 그런 장면에서 나오는 대사 하나하나에 집착하며 온갖 커플 만들기를 좋아했지….’

자연스러운 행위에 혼자 동요한 것 같아 괜히 민망해진 이비는 카르젠의 너른 등 위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제가 몰라서 놀랐어요. 괜찮으니 같이 해요.-

“그래. 나도 앞으로 이비가 놀라지 않게 더 조심할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한 카르젠이 돌아섰다. 어깨쯤 시선을 두고 있던 이비는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고개를 들고 그의 턱 부근을 보는 것을 택했다.

카르젠은 평소와 같은 자상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이비는 카르젠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욕조로 들어갔다.

꽃향기 나는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니 긴장했던 몸이 순식간에 풀어지기 시작했다. 카르젠 역시 들어와 앉자, 어깨까지 오던 물이 조금 더 차올랐다.

목욕물은 입욕제를 풀어 살짝 탁했지만, 바닥까지 전부 보이는 상태였다.

조금 전 반응으로 볼 때 이비가 몸 보이는 것을 신경 쓰는 것 같다고 판단한 카르젠은 맞은편이 아닌 이비의 바로 옆에 앉았다. 정답이었는지 이비가 덜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이후 카르젠이 먼저 이런저런 말을 걸어 주니 금세 평소처럼 대화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카르젠을 보며 말하는 것은 아직 쑥스러운지, 세우고 앉은 무릎에 카르젠의 손바닥을 올려 두고 글씨를 쓰며 의사소통을 했다.

둘은 느긋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 사용한 입욕제가 정신적인 피로를 풀어 주는 데 좋다는 이야기나, 아브델의 가을은 빠르게 지나가니 단풍 구경 시즌이 짧다는 등 일상적인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카르젠은 오늘 오후부터 저택을 비운다고 이야기했고 이비는 그가 어디 가는지 궁금했지만, 자신이 물어봐도 될지 몰라 일단 끄덕였다.

“식사는 할리스가 담당해 줄 거고, 필요한 게 있으면 누구에게든 말하면 알아서 준비해 줄 거야. 부담 갖지 말고 편히 요청해.”

-많이 늦어요?-

“늦지는 않아. 에벨루스 신전에 신관 친구를 보러 가야 하거든. 아마 저녁 전에 돌아올 것 같아.”

에벨루스 신전이라는 말에 이비의 눈이 동그래졌다.

‘카르젠의 친구이자 에벨루스 신관이라면, 내 최애잖아!’

***

-난 강해질 거야. 그러니까 그까짓 귀족 놈들 때문에 울면 안 돼.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입술을 꽉 깨물고 참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체스터는 그런 리엔에게 위로 대신 아직 따뜻한 종이봉투를 건넸다.

훌쩍이며 봉투를 연 리엔은 훅 끼쳐 오는 달콤한 향에 눈이 동그래져 물었다.

-이거 콥스 아저씨네 타르트야?

잔뜩 목멘 소리가 체스터의 가슴을 울렁이게 했다.

‘지금이라도 그놈들 조질까? 아냐. 그러다 내 정체를 들키기라도 하면….’

애써 꾹꾹 참은 체스터가 겨우 말했다.

-그거 먹고 힘내서 너 울린 녀석들 다 패고 다녀.

-안 울었어.

-뭐… 그런 거로 쳐줄 테니, 빨리 먹고 패러… 아니, 기숙사로 돌아가.

숲의 마법사 3권 34페이지 中

***

이비는 소설 속 자신의 최애를 떠올렸다.

매그위드 후작가의 삼남이지만 형제들과 권력 싸움을 원치 않았고, 제 가문에 질려 매그위드 성을 버리고 푸른달의 신 에벨루스를 모시는 신관이 된 프리스트 크리시를.

작중 주인공 왕세자 체스터와 카르젠과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냈으며, 카르젠과 나란히 서도 유이하게 안면 디버프를 받지 않는 캐릭터였다. 물론 나머지 하나는 체스터였고.

‘크리시도 인기 많았지. 인기투표 3위였으니.’

남자 캐릭터 인기투표 1위 카르젠 2위 체스터 3위 크리시 순이었던 게 기억났다. 작중 미남 3인의 금, 은, 동 석권이었다.

미남이라는 설정도 한몫했지만, 평소엔 까칠하면서도 제 동료를 끔찍이 생각하는 성격 탓에 인기가 매우 많았다. 그리고 신을 향해 투정 부리는 패기까지….

‘동료가 크게 다쳤을 땐 위험을 예고해 주지 않은 신 에벨루스에게 토라져서 에벨루스의 말을 전부 무시하고 행동하던 모습도 귀여웠지… 나도 보고 싶다….’

카르젠은 무의식중에 손가락으로 제 손바닥을 꾹 누르고 있는 이비를 보며 물었다.

“이비. 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

놀라 손가락을 뗀 이비가 카르젠을 바라봤다.

‘나도… 나도 가고 싶어! 신전 가고 싶어! 같이 가자고 해도 될까?’

고민하는 얼굴을 본 카르젠은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려 주었다. 잠시 망설이던 이비는 결심했는지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저도 신전 가 보고 싶어요.-

“신전에?”

이비가 덧붙여 썼다.

-카르젠 님만 괜찮다면 저도 가고 싶어요. 책에서 봤어요. 멋진 곳이라고.-

카르젠은 저를 향한 이비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곤 입술이 씰룩거리려는 것을 참았다. 뭔가 간절히 바라는 소동물의 눈빛 같아 저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충동을 꾹 참고 대답했다.

“그래. 같이 가자. 그 대신 이비.”

“?”

“나가서 혹시 몸이 안 좋거나 하면 바로 말해 줘야 해. 알았지?”

동행해도 된다는 말에 이비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많이 기뻤는지 격하게 끄덕이던 이비는 살짝 어지러움이 느껴져 비틀거렸다.

찰나를 놓치지 않은 카르젠이 놀라 어깨를 잡아 주며 괜찮은지 물으려 했으나, 이비의 입술이 더 빨리 열렸다.

[저 괜찮아요! 빨리 씻고 나가요!]

그 어느 때보다 초롱초롱해진 이비의 눈망울을 본 카르젠은 뭔가 얼떨떨했지만, 이내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머리 감겨 줄게.”

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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