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롤로그(1권) (1/19)
  • ### 프롤로그

    …-로 전해졌다.

    문제는 누구도 숲의 마법사가 어떻게 자신을 찾아왔는지, 어떻게 거래를 하게 됐는지,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하는 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저 거래에서 빼앗긴 것. 그리고 대가로 받은 것만 간직할 수 있었다.

    소년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안타까웠다.

    소년은 자신의 형을 살려 주게 될 은인이자 아름다운 이 마법사를 잊고 싶지 않았다.

    숲의 마법사 1권 프롤로그 5페이지 中

    ***

    눈 떠보니 내가 마지막으로 읽은 소설 속이었다.

    -라는 전개를 최근 몇 년 동안 많이 봤었다.

    주로 주인공 주변의 가까운 인물인 악역, 친구, 형제, 동네 망나니, 서브 주인공 등에 빙의되는 그런 소설들 말이다.

    뜻하지 않게 메인 스토리와 얽혀 세계를 구하거나, 예정된 죽음을 피하기 위해 착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거나, 조용히 살고 싶었지만 원치 않게 전설의 영웅이 되는 빙의/차원 이동 장르가 넘쳐났고 나 또한 꽤 즐겨 봤었다.

    유행을 타고 우후죽순 쏟아진 빙의 장르 소설을 보며 병상 생활을 해서일까…?

    예상일보다 조금 일렀던 어느 깊은 새벽. 얕게 자던 나는 불현듯 남아 있는 숨이 다한 것을 느꼈다.

    이미 끝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정리한 상태였기에 미련은 없었다. 다만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마지막 순간에 혼자라는 것이었다. 하필 부모님과 동생이 자리를 비운 날에 이렇게 떠나다니 미안했다.

    그리고, 우습게도… 다 정리했으면서, 이제 미련 없다고 생각했으면서 삶을 갈구했다.

    나 자신을 속일 정도로 태연하게 괜찮은 척했으면서, 사실은 책에 빙의해서라도 살고 싶어 하고 있었다는 게 스스로도 충격이었다. 이미 준비하고 많은 정리를 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온갖 가지 후회가 밀려왔다.

    조금 더 다정하게 말해 줄걸.

    나름 노력했지만, 그래도 더 많이 사랑한다고 말해 줄걸.

    더 자주 고마웠다고 말해 줄걸.

    이제 괜찮다고. 정말로 남은 미련 따위 없다며 입버릇처럼 말했는데, 종국엔 삶에 대한 후회와 미련이 가득했다.

    나는 마지막 숨을 힘겹게 머금었다.

    그리곤 그 숨을 뱉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이렇게 죽어 사라지면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되는 걸까?

    누군가 죽음은 결국 끝이 평온하다고 했는데, 난 너무 외롭고 두려웠다.

    간절하게,

    죽고 싶지 않다고, 살고 싶다고 간절히 바란 덕분인 걸까?

    마지막 순간에 아주 미련이 철철 넘쳐서 그랬을까? 눈을 떠 보니, 흐릿하지만 푸른 달과 저 멀리 붉은 달이 보였다.

    ‘저거 달 맞지? 두 개의 달… 붉은 달과 푸른 달… 그럼…!’

    선명하진 않지만 분명 밤하늘에 떠있는 저 두 개의 달을 보니 확신이 섰다.

    여긴 내가 몇 번이고 읽었던 [숲의 마법사]라는 소설 속이었다.

    모든 것이 소멸하던 순간에, 그렇게 바랐던 대로 진짜 빙의에 성공한 것이었다!

    흐릿하지만 숲의 마법사의 상징인 붉은 달과 푸른 달 덕분에 눈을 뜨자마자 장르를 파악하긴 했는데….

    ‘어…?’

    어째… 이놈의 몸뚱이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온몸이 바위에 짓눌린 것 같은 압박이 느껴져 꼼짝할 수 없었다.

    “으… 읏….”

    끙끙대며 힘겹게 눈알을 굴려 보니, 흐릿한 시야에 오르락내리락하는 판판한 가슴이 보였다.

    ‘어라? 나 지금 뭔가… 몸이 좀 아픈 것 같은데?’

    희미하게 느껴지는 통증과 질척이는 느낌에 눈에 힘을 주고 초점을 맞춰 보니, 가슴이 피투성이였다.

    그것도 아주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출혈량이 파악된 건 아니지만, 꽤 많았는지 온몸에 힘이 없고 어지러웠다.

    시야가 다시 흐려졌다.

    ‘이, 이게 뭐야! 가늘고 길게 살 건강한 몸이면 된다고, 그렇게 소박하게 소원했는데! 으아악! 젠자아앙!’

    몸이 아픈 정도가 아니라 출혈이 꽤 됐는지 감각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환장 포인트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 으… 우…! 우우!”

    아무래도….

    “우! 아우우!! 아아!!!”

    아무래도 비명은커녕, 목소리를 자유롭게 내지 못하는 몸에 빙의한 것 같았다. 게다가 2차 환장 포인트는, 아직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여기가 어딘지 파악도 못 했는데,

    -키릭!

    -캬르르륵!

    -큐르릅?

    기괴하게 고개를 까딱거리는 몬스터들이 날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1M도 안 되는 작은 몬스터들이 조잡한 도끼와 창을 들고 각기 춤을 추듯 몸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우와악! 머리가 360도로 돌았어!’

    너무 끔찍하고 기괴한 존재였다. 어떻게든 손을 움직여 보려 했지만, 몸에 힘이 다 빠져 꿈틀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어쩌다 새로 얻은 2회차 인생이….

    ‘1분 만에 끝나면 진짜 너무한 거 아냐!?’

    억울했다. 이건 억울해도 너무 억울했다.

    입 모양으로 아무도 듣지 못할 에어 욕설을 내뱉고 있으니, 개중 큰 녀석이 제 몸통보다 큰 도끼를 치켜들었다. 달빛에 반사된 번뜩이는 날이 시야에 들어왔다.

    ‘흐아악! 진짜 도끼잖아!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심지어 흐릿한 시야임에도 불구하고 날이 무딘 게 보일 정도로 조잡한 도끼였다. 저런 무딘 날이라면 죽어도 한방에 못 죽고, 고통스럽게 썰리다 죽을 것이 분명했다.

    ‘사람 살려! 이게 뭐야! 너무 불공평하잖아! 이건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니냐고! 사람 살려! 누가 좀 살려 줘요, 어허어어엉!’

    “아으아! 아으으아아아!!!”

    공기 중에 소리 없이 욕설을 내뱉는 것밖에 할 수 없어 두려움과 설움에 눈물이 터져 나왔다. 엉엉 우는 내 머리 위로 도끼날이 내리 찍힌 순간,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때.

    채애앵!

    일순 맑은 충돌음이 퍼지고,

    -캬랴략!?

    -키라라락!!!

    -크햐악!

    사방에서 키릭 거리던 몬스터들의 단말마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쐐애액-

    서걱-

    스삭-

    샤아아-

    촤앗-

    퍽-

    챠아악-

    썰고 자르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주위를 한바탕 훑더니, 단시간에 기괴한 울음소리가 끊겼다.

    구사일생으로 누군가 구해 주러 온 것 같은데,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몸이 파르르 떨렸다.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떨고 있는 내 몸을 단단한 팔이 안아 드는 게 느껴졌다.

    “정신을 잃지 말고 조금만 견디십시오. 꼭 구해 드리겠습니다.”

    저음의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에게 제발 살려 주세요. 소리 내어 말하고 싶었다. 나는 살고 싶었다. 정말 살고 싶었다.

    이 남자가 제발 저 말을 지켜 주길 바라며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고개가 힘없이 뒤로 꺾인 채 안긴 터라 그를 보기 위해 눈동자를 아래로 한껏 내려 떠야 했다.

    시야에 어렴풋이 밤하늘과 같은 짙은 흑발의 긴 생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나를 향한 맑고 푸른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의 얼굴을 살펴볼 새도 없이 의식이 멀어짐을 느꼈다.

    어쩌면 이번엔 영영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나는 세상 모든 신에게 제발 살려 달라고 빌기 시작했다.

    이건 좀 너무하지 않냐고. 살려 준 김에 한 번만 제대로 살려 달라고. 이번 생엔 타인에게 상처도 안 주고 평생 착하게 살겠다고, 그러니 제발 살려 달라고… 한 번만 평범하게 살아 보게 해 달라고….

    ‘부탁이니까, 정말 착하게 살 테니까… 제발 살려 주세요… 살고 싶어요….’

    누가 들어줄지 모를 바람을 투정 섞어 애원하며, 나는 정신을 잃었다.

    ***

    그리고 아주 다행스럽게도 난 다시 눈을 뜰 수 있었다.

    어지럽고 시야가 또렷하지 않고 아무런 제어가 되지 않았다. 마치 수술 이후 마취에서 깨어나기 직전의 느낌 같았다.

    희미한 빛이 맴도는 어둑한 공간이 시야에 들어왔지만, 모든 것이 뿌예서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눈앞에 움직이는 인영이 하나둘 보였지만 그마저도 흐릿했다.

    ‘여긴 어디지… 꿈… 인가….’

    그 인영 중 하나가 나를 향해 몸을 기울이며 무언가 뻗어 왔다.

    눈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누군가 내 머리를 쓸어 넘겨 주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어쩐지 익숙함이 느껴지는 손길이었다. 아주 오래전 부드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그리운 이가 떠오르는 그런 포근한 느낌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혹시나 싶어 너무나도 보고 싶었던 그 이름을 불러 보아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귀는 웅웅 울리고 시야는 여전히 뿌옜다.

    곁에 있는 이가 누군지 자세히 보고 싶어 눈에 힘을 주려 했지만,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어 누군가의 목소리가 아주 먼 곳에서 들려왔다.

    “괜찮아.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괜찮을 거야.”

    ‘저 목소리는….’

    안타깝게도 내가 떠올린 이가 아니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어차피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괜찮아.”

    ‘음… 신인가…? 그럼 여긴 천국인가? 하여간에 목소리 진짜 끝내준다. 하… 아무래도 난 또 죽었나 보네… 아, 기분 진짜 이상하다. 정말 마취 깨기 전 같네….’

    깨어나려고 아등바등 노력해야 하는 정말 싫은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신이 저렇게 멋진 목소리로 괜찮다고 말해 주는 걸 보니 정말 괜찮은 상황인가보다.

    안심하고 있으니 다시 성스러움이 느껴지는 은은한 빛이 주변을 감싸며 시야가 암전됐다.

    이런… 아무래도 또 잠드는 것 같다.

    다시 또….

    ***

    …-렇다 보니 리엔의 어머니도 딸의 고집을 꺾진 못했다. 드디어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 낸 리엔이 목검을 들고 향한 곳은 마을 외곽 대장간이었다.

    쾅쾅! 형식적인 노크 후 문을 벌컥 연 리엔이 구부정한 노인을 향해 소리쳤다.

    -할배! 허락받았어요!

    구부정하게 앉아 있던 노인이 결국 설득했구먼. 짧게 투덜거리며 일어났다. 웅크리고 있던 어깨가 넓게 펴지고 등이 곧아져 순식간에 거대해진 노인을 마주한 리엔이 씩 웃으며 가져온 봉투를 내밀었다.

    -오늘 수련비는 빵 두 개!

    -다 늙은 노인네를 아주 날로 부려 먹는구먼?

    노인은 세상 억울하다는 듯이 투덜거리면서도, 꽤 즐거운 듯 목검을 들었다.

    숲의 마법사 1권 51페이지 中

    ***

    부스스 눈을 떴을 땐 주변이 환했다.

    꽤 긴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그리웠던 누군가를 만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꿈… 인가? 어라? 꿈? 무슨 꿈이었지?’

    분명 무언가 꿈을 꾼 것 같았는데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 꾸었을 꿈이 흐려져 증발함과 동시에 의식이 또렷해졌다.

    뿌옇고 흐릿한 시야에 눈을 몇 번 깜빡이고 가늘게 뜨니, 흔히 소설 도입부에 단골로 등장하는 낯선 천장이 보였다.

    잠들어 있는 동안 희미했지만 편안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는 나무와 풀 냄새를 어렴풋이 느꼈었다. 그래서 당연히 나무로 만들어진 그런 오두막을 상상했는데….

    ‘…대리석?’

    대리석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반질한 돌을 깎아 반듯하게 대 놓은 천장이 보였다.

    슬쩍 눈알만 굴려 보니, 유럽풍이라고 부르면 딱 어울릴 법한 가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반쯤 열린 세로로 긴 아치형 창문엔 얇은 커튼이 나부끼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보려 했는데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움직이는 것을 포기하고 창가 반대편으로 눈알을 굴려 보니,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팔짱 낀 채 고개를 푹 숙인 남자가 보였다.

    남자는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종종 샴푸 광고를 보면 모발이 비단결 같다는 표현을 쓰던데, 이 남자와 어울리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살짝 흘러내린 짙은 흑발은 정말 고와 보였다. 보고 있자니 황홀할 정도라 만져 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당연히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일단….

    ‘손을 들 수가 없어….’

    몸이 무거웠다. 슬쩍 손끝에 힘을 줘 봤는데, 다행히 감각은 있었다. 다만 움직일 힘이 없었다.

    ‘이 사람이 옆에서 간호해 준 건가? 근데 저러고 자면 목 아플 텐데….’

    종종 병원에서 아버지가 저렇게 주무시곤 했었는데, 다음 날이면 늘 담이 왔다며 목을 주무르곤 하셨다.

    그에게 내가 일어났다는 걸 알리고 싶어 입을 열었다.

    “아… 아우….”

    ‘목소리는 여전히 안 나오네. 나 정말 다른 사람 몸에 빙의했나 보구나…. 분명 붉은 달이랑 푸른 달이 동시에 떠 있는 걸 봤는데, 그럼 역시 숲의 마법사 소설이겠지.’

    <숲의 마법사>는 붉은 달과 푸른 달. 두 개의 달이 존재하는 가상의 세계 <필리스>를 배경으로 한 서양풍 로맨스 판타지 소설이었다.

    인어공주의 마녀처럼 대가를 지불하면 소원을 단 한 번 들어주는 숲의 마법사라는 신비한 존재를 통해 많은 등장인물이 엮이는데, 주연인 기사 여주캐릭터 ‘리엔’이 특히 인기 많았다.

    또 조연들도 각자 개성이 넘쳤고, 독자들의 뒤통수를 얼얼하게 만드는 반전까지 있었다. 로맨스보단 판타지 자체에 주를 이룬 이야기를 탄탄하게 엮어 낸 소설이었다.

    어찌나 인기가 많았는지 연재 기간 내내 로맨스 판타지 소설 1위를 유지했고, 완결 후엔 웹툰도 나왔다.

    주인공과 더불어 인기 많았던 조연들 위주 스핀오프로 BL도 따로 연재 중이었다.

    로맨스 판타지인 원작의 경우, 대외적으로는 붉은 달을 훔친 마족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 왕국은 평화를 찾았다.

    이후 중간계의 종족들이 어우러져 해피 엔딩을 맞은 내용으로, 앞으로 남은 것은 평화로운 왕국과 번영뿐이었다.

    ‘만약 엔딩 전 시점이라고 해도 어차피 중간계가 이기니 괜찮을 거고. 일단 지금 상황 파악부터 해야 할 것 같은데. 옆에 이 사람은 누굴까?’

    “아우….”

    ‘음. 역시 목소리는 안 나오네. 어쩔 수 없지.’

    몸은 짓눌린 듯이 무거웠고, 재차 목 상태를 확인한 나는 남자를 깨우는 것을 포기했다.

    생각해 보면 언젠가는 일어날 것이기에 굳이 잠든 사람을 깨울 필요는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기다리지 뭐.’

    느긋하게 생각하자 모든 것이 편해진 나는 포근한 침대와 이불 사이에 파묻힌 채 눈을 굴려 방을 구경했다. 그러다 시야에 한계를 느껴 다시 남자를 바라봤다.

    ‘와~ 진짜 잘생겼네….’

    사람이 이렇게 몸도 못 가누는 와중에 잘생겼다는 게 확 느껴질 정도면 진짜 잘생긴 거다.

    아니, 그냥 잘생겼다는 표현으로는 저 남자의 미모를 표현할 수 없었다. 아름답다는 말조차도 부족했다.

    같은 남자인 내가 봐도 부정할 수 없는 아름다운 얼굴엔 약간의 피곤함이 서려 있었다. 느리게 호흡하는 남자를 보고 있자니 박물관 조각상이 숨 쉬는 것 같았다.

    나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말을 못한다는 핑계로 가만히 누워 저 잘생긴 얼굴을 관찰했다.

    ‘귀가 살짝 길고 뾰족한 걸 보니 엘프인가? 아니, 엘프치곤 짧은데. 저 정도면 하프엘프인가? 어라… 하프엘프?’

    하프엘프라는 종족을 의식하고 나서 저 수려한 외모와 흑발 긴 생머리를 보고 있자니 한 캐릭터가 바로 떠올랐다.

    ‘헐? 설마?’

    진짜 그일까 싶어 요목조목 짚어 보려는데 밖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기척에 남자의 눈꺼풀이 살짝 떨린 걸 본 나는 훔쳐보고 있던 걸 들키기가 민망해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내내 느리게 호흡하던 남자가 숨을 크게 들이마신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들어와.”

    ‘목소리도 멋지다….’

    부드러우면서도 낮은 저음의, 일명 동굴 목소리였다. 이어 작게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카르젠 도련님. 식사는 방으로 내올까요?”

    ‘역시! 역시 카르젠이었어! 숲의 마법사에서 메인 남주를 제치고 인기투표 1위를 했던 그 서브 남주 바이스 카르젠!’

    그는 내가 작중 두 번째로 좋아하는 차애였다. 차애를 만나 반가운 마음에 자는 척하던 것도 잊고 눈을 번쩍 뜰 뻔했다.

    ‘진정해라. 진정해라 나. 하아, 그래도 눈 뜨자마자 카르젠이라니….’

    작중 카르젠은 여주가 땋아 준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다녔다고 묘사됐었다. 이후로도 종종 여주가 원할 때 머리카락을 내주었다는 내용이 떠올랐다.

    ‘그저 새카만 흑발을 상상했었는데, 저렇게 흑진주 같은 윤기가 있는 머리였구나….’

    카르젠이라는 반가운 이름에 괜히 손끝이 움찔거렸다. 어떻게 눈을 떠야 자연스러울까 고민하기 시작하는데,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고막을 간질였다.

    “그래. 간단하게 부탁하지. 그리고 소화에 부담 없는 맑은 수프도 부탁해.”

    “예.”

    목소리의 주인공이 대답 후 바로 방을 나갔다. 괜시리 긴장해 눈 뜰 각만 재고 있을 때 카르젠이 말했다.

    “의식이 돌아왔으니 이제 맑은 수프 정도는 먹을 수 있겠지?”

    “…….”

    ‘진작 눈치챘구나….’

    민망함에 천천히 눈을 떴다.

    카르젠은 여전히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눈동자는 투명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맑은 푸른색이었다. 그는 긴 손가락으로 제 무릎을 두드리며 물었다.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

    “우으… 아….”

    ‘아 참. 나 목소리 안 나왔지.’

    홀린 듯이 대답하려던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려 했지만 그마저도 시원찮았다. 어떻게든 살짝이라도 고개 젓는 데 성공한 나를 본 카르젠이 혼잣말처럼 작게 말했다.

    “역시 말을 못 하는 건가….”

    이번에도 나는 힘겹게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일단 듣는 데는 문제가 없는 것 같고.”

    끄덕끄덕

    “이름이 뭐지? 난 입술을 읽을 수 있으니 말해 봐.”

    ‘저도 제가 누군지 모르겠는데요….’

    순간 나는 뭔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김현서…는 아니잖아….’

    내 이름… 이젠 더 불러 줄 사람이 없는 이름을 말할 수 없어 머뭇거리자 그가 되물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건가?”

    ‘아니, 그건 아닌데….’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으니, 그는 긍정이라 생각했는지 “과연…”이라고 작게 말하며 끄덕였다.

    “그럼, 어제부터 사흘 전의 일도 전혀 기억이 없고?”

    ‘응? 사흘 전? 어제 날 구해 준 게 아니었나?’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멀뚱멀뚱 바라보니 카르젠이 또 혼자 결론을 내렸다.

    “그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지. 그래도 깨어나서 다행이야. 며칠 동안 제대로 의식을 찾지 못해서 걱정하고 있었던 참이었어. 그대는 머리와 몸에 큰 상처를 입었어. 의원 말로는 제대로 의식을 찾았을 때 충격에 의한 단기 기억 상실 증상을 보일 수도 있다고 했었고. 혹시 두통이 생기면 꼭 진료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혹시 머리가 아픈가?”

    두통이고 뭐고 모든 감각이 둔감해진 상태 같았다. 수술 이후 마취가 덜 풀린 채 강력한 진통제를 맞는 기분과 비슷했다. 일단 통증이 없기에 작게 도리질하는 것으로 대답했다.

    ‘내가 며칠이나 의식을 찾지 못했다고!? 아니, 근데 나 기억 상실은 아닌데요….’

    이 상황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혼란스러워 잠시 고민하고 있으니, 내 표정을 잘못 해석한 그가 나를 위로했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일단 몸의 회복이 우선이야. 몸부터 회복하며 내 저택에서 지내도록 해. 아픈 사람을 내쫓진 않으니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돼.”

    “아우….”

    ‘와아, 진짜 인기투표 1위에 빛나는 인성답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한 치의 의심 없이 보살펴 준다는 말에 감동한 나는, 카르젠을 향해 입술을 움직여 말했다.

    [고맙습니다.]

    입술을 읽어 낸 그의 눈이 부드럽게 살포시 휘었다. 옅은 미소를 지었을 뿐인데 그 얼굴이 너무 눈부셨다.

    그러니까, 그냥 말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정말로 눈이 부셨다.

    ‘세상에, 사람이 얼마나 잘생겨야 저렇게 빛이 나는 거야?’

    그의 얼굴 주변으로 은은하게 번지는 빛에 눈부심을 참지 못한 나는 결국 눈을 감아 버렸다.

    “괜찮아?”

    ‘괜찮아요. 당신이 너무 잘생겨서 눈부신 것 빼면….’

    차마 그렇게 말할 수가 없어 눈 감은 채 끄덕이니 걱정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의원 말대로 두통이 생긴 것 같군.”

    ‘뭐? 두통?’

    “잠시 기다려. 의원을 불러오도록 하지.”

    ‘응? 아, 아니! 아닌데! 아닌데요!’

    놀라 바로 눈을 뜨고 카르젠에게 입술로 말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일어나 방문을 열어 제끼고 있었다.

    중환자도 아니고 심지어 두통도 없는데 저리 바삐 나가는 게 미안해 말리려 했지만, 손 뻗을 힘도 그의 이름을 부를 힘도 없는 탓에 나는….

    “으….”

    그가 의원을 데리고 돌아올 쯤엔 눈을 꾹 감고 필사적으로 두통에 시달리는 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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