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자기 입으로 얘기를 했으면 지켜야지. 그걸 어떻게 바로 뒤집냐고, 바로!”
쉴 새 없이 투덜거리는 싯카를 내려다보며 라다크는 이걸 아까 그 계곡 위에 다시 버려두고 올까하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남자는 신의가 있어야 해. 우리 마르케 사람들은 자신이 한 약속은 절대로 지켜. 그게 남자지. 암, 사나이야.”
라다크는 로아히의 고삐를 잡아당겨 널찍한 바위 위에 멈추게 했다. 자신을 사나이라고 칭한 싯카는 오늘도 땅에 내리자마자 나무를 붙들고 속을 게워냈다.
라다크는 오늘도 계곡의 바위틈에 매달려 있는 싯카를 발견하고 로아히의 등 위에 태웠다. 오늘도 그 이상한 기구를 가지고 실험을 한 모양이었다. 오늘은 그래도 숲을 지나 제법 먼 곳에 걸려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싯카의 날개가 발전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머리로 사람들의 농담도 거르지 못한다는 것이 라다크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 죽겠다.”
싯카가 비틀거리며 걸어왔다. 하얀 얼굴이 한층 창백해 보였다.
“오늘은 무슨 훈련을 시키는 거야?”
싯카가 물었다.
라다크는 로아히의 몸에 매어져 있던 고삐를 풀어주며 대답했다.
“수중 훈련.”
“수중? 나블이 물 속에 들어간다고?”
육지와 공중을 넘다드는 나블은 유난히 물에 약했다. 나블을 쫓으려면 물을 뿌리라는 얘기도 떠돌았다.
“나블 몸에 물 닿으면 죽는 거 아니야?”
라다크는 대답대신 로아히를 물에 밀어 넣어 보였다. 로아히가 크르릉, 하는 울음소리를 내며 몸서리를 쳤다.
“싫어하는 것뿐이야.”
로아히의 회색 털이 금세 물에 젖었다. 라다크는 몇 번이나 손으로 로아히의 몸에 직접 물을 끼얹어 주었다.
“……설마 그게 수중 훈련은 아니겠지?”
“맞아.”
“…….”
“어린 나블에게 물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려줘야 해. 편견을 버리도록.”
“아…….”
참 독특한 훈련방법이라 생각하며 싯카는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로아히는 몸에 물이 닿을 때마다 사납게 날뛰었다. 라다크는 다정하게 로아히를 안정시키며 깊은 물로 조금씩 끌어들였다.
“……싫어하긴 하나보다.”
싯카는 로아히의 귀가 뒤로 잔뜩 젖혀진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싫어하는 모습이 귀엽긴 하지.”
“…….”
라다크가 로아히의 등을 토닥여주며 말했다.
“싫어해도 괜찮아. 무서워하지만 마.”
다정한 눈빛이었다.
감정을 내비치지 않던 호박색의 눈동자에서 벌꿀처럼 달콤한 감정이 흘러내렸다. 로아히도 그런 라다크의 진심을 읽었는지 점점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로아히가 그렇게 좋아?”
“응.”
지체 없는 대답에 싯카는 조금 놀랐다. 라다크가 뭔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그렇게 솔직히 인정할 거라 생각은 못한 것이다.
“……왜?”
“내 것이니까.”
강해서, 혹은 귀여워서라는 대답이 돌아오리라 생각했던 싯카는 응? 하고 반문했다.
“내 것이니까. 이건 내 것이잖아.”
라다크가 로아히의 콧잔등을 손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기분이 좋은지 로아히가 그르렁거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면 넌 니 침상, 니 신발, 니 옷이랑 그런 것들한테도 설마 애정을 느끼는…….”
라다크가 싯카를 흘깃 바라보았다. 그 짧은 눈빛에서 싯카는 상대가 자신을 바보취급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네 것이라 좋다며, 그래서 물어본 거지.”
스스로 생각해도 멍청한 질문이라 생각이 들었다. 싯카는 얼굴이 화끈거려 손으로 부채질을 파닥거렸다.
“살아있는 내 것. 그래……, 여동생은 언제쯤 만날 수 있는 거지?”
“어? 뭐?”
“여동생. 곧, 내 것이 될 사람.”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이리케가 자신의 것이 될 거란 라다크의 말에 싯카는 잠시 잊고 있었던 분노가 치밀었다.
“소개가 곧 혼례로 이어지는 건 아니지. 그리고 맞아. 아까 하던 얘기인데, 너는 그렇게 여자 만날 생각이면서 왜 나는 안 되냐? 나도 여자 만나야 한다고!”
라다크가 피식 웃었다.
“비웃어? 야, 너 그 얘기 모르지?”
싯카가 대단한 것을 아는 사람처럼 으스대며 말을 이었다.
“거기를 안 쓰면, 썩어서 떨어진대.”
“…….”
“썩어버린다고.”
싯카가 자신의 다리 사이를 가리키며 한 번 더 말한다.
라다크의 눈이 크게 벌어진다.
아직도 저걸 믿고 있다니. 아직도 하밧이 사실 정정을 해주지 않은 모양이군. ……저걸 잠시라도 마르케 최고의 인재라고 여겨 갖고 싶다고 생각한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싯카는 라다크가 놀라는 기색을 보더니 콧대가 높아져 우쭐거렸다. 그리고 열심히 자신의 무덤을 파기 시작했다.
“너한테 아직 아무도 말 안 해줬지?”
“…….”
라다크의 표정이 싹 구겨지자 싯카가 혹시, 하는 생각에 라다크의 다리 사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너 몇 살이었지? 스무 살이 넘었나? 하하하.”
“…….”
“설마 썩어 없어진 건……?”
“…….”
로아히의 몸에 물을 끼얹어주던 손동작이 우뚝, 멈추었다. 바위 위에 앉아있던 싯카는 분위기가 심상찮음을 느꼈다.
“……어, 미안. 실례되는 질문이었나.”
라다크가 로아히를 물에 두고 싯카가 앉아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첨벙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나는……, 좋은 정보를 알려주려는 차원에서…….”
그가 싯카의 손목을 잡아채 일으켜 세웠다. 바위 옆에 있던 나무에 싯카를 거칠게 던진 후에 그는 자신의 바지를 끌러 내렸다.
“뭐, 뭐하는 거야!”
“봐.”
“뭘 보라고……힉.”
무심코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가 싯카는 기겁할 그 무엇을 보고 말았다.
“……. ……. …….”
신세계였다.
친구들과 같이 목욕을 하고 수영을 하면서 수많은 물건들을 봐왔지만, 맹세코, 리리스 신을 걸고 맹세하건데, 아니 이런데 리리스 신을 걸면 안 되겠지만, ……여하튼 몹시 컸다.
아직 힘을 받지도 않은 상태인데도 엄청난 크기의 물건이 라다크의 다리 사이에 늘어져 있었다.
“그, 그래. ……무사하다니 다행이다.”
말을 하면서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싯카는 라다크의 다리 사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 봤어?”
“어? ……응.”
“내 것을 봤으면 네 것도 보여줘야지.”
“뭐?”
싯카가 어떤 반응을 하기도 전에 라다크가 싯카의 목을 한손으로 누르고 다른 한손으로 그의 바지를 끌어 내렸다. 속옷까지 모두 벗겨져 다리 사이의 치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뭐, 뭐하는 짓이야!”
“공평하게 해야지.”
라다크가 무심한 얼굴로 싯카의 다리사이를 힐끗 보며 대답했다. 싯카는 이놈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공평이란 단어가 대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졌다.
“넌 아래 털도 이색이군.”
라다크가 싯카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다, 당연하잖아. 원래……. 너도, 아마…….”
“그런가.”
라다크가 자신의 바지 안을 들여다보며 흐음, 하고 생각에 빠졌다. 싯카는 얼굴이 활활 달아올랐다.
남자들끼리 같이 목욕을 할 때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호수나 냇가에 뛰어들기 때문에 알몸을 보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건 아무래도 이상한 기분이었다. 바지를 내린 채, 서로의 것을 보고 있는 상황이라니.
“너야말로 다 봤음 비켜.”
싯카가 라다크를 밀어내고 자신의 바지를 올렸다. 그리고 주절주절 되는대로 말을 늘어놓았다.
“아, 아무튼 나는 나의 안녕을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고.”
“그러든가.”
싯카는 아무래도 정말 이십년 동안 그걸 사용하지 않으면 썩어 없어진다는 말을 철썩 같이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밧이 널 속인 것이라고 말해주려던 라다크는 왠지 그대로 둬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젠장. 대체 어디에 가서 여자를 구해. 올해가 가기 전에 혼례를 치러야 하는데.”
“아무나 자빠트려.”
라다크가 본인 한정으로만 현실적인, 싯카에게는 비현실적이기 짝이 없는 조언을 해주었다.
“뭐? 누굴 자빠트려.”
“여자.”
“…….”
“임신시켜라. 그리고 혼례를 치르면 되지. 내키지 않으면 다른 여자를 다시 자빠트려도 되고.”
“……쟈뉴아 사람들은 여자를 매우 아끼고 존중해주는 부족이라고 들었는데.”
“그러든가 말든가.”
라다크는 털을 잔뜩 세우고 으르렁거리고 있는 로아히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정성스럽게 다시 로아히의 몸에 물을 끼얹어 주었다.
“너 설마 내 동생을 만나자마자 자빠트릴 생각은 아니지?”
“왜?”
“뭐?”
싯카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벌어졌다.
“그러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미쳤어? 서로 합의를 해야지. 네가 짐승도 아니고!”
“내 씨를 잉태하는 것은 여자에게도 좋은 일이다.”
“그건 네 생각이잖아!”
“글쎄.”
라다크가 싯카를 바라보았다.
한손으로 로아히의 목덜미를 만져주며 호수 안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남자의 모습에 싯카는 반론의 말을 찾으려다 입술만 달싹거렸다. 여자들은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남자를 원했다. 그것은 신체적인 조건과도 직결되었다. 라다크는 그러한 신체적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키가 크고, 몸이 곧았으며, 힘이 세고, ……거기는 컸다.
사냥 솜씨 또한 최고였다. 그가 얼마나 강한지는 직접 싯카는 직접 자신의 눈으로 목격해 알고 있었다. 쟈뉴아 부족장의 아들로서 테난과 함께 유력한 후계자로 지목되고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너, 너는 그쪽 취향이 독특하잖아.”
간신히 찾아낸 핑계거리를 싯카는 들이댔다. 라다크는 헛웃음을 삼키며 로아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싯카는 쳇, 하고 혀를 찼다. 저놈의 수중 훈련이라는 것이 대체 언제쯤 끝날지 몰라 무료함을 달랠 방법을 찾아야 했다.
바위에 걸터앉아 물에 발을 담갔다. 물장구를 첨벙거리다 싯카는 아예 옷을 웃옷을 벗어버렸다. 그리고는 호수 안으로 뛰어들었다. 갑작스러운 싯카의 행동에 라다크는 물론 로아히까지 놀랐다.
싯카는 한참동안 물속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로아히가 그르렁 거렸다.
“왜? 걱정 돼?”
로아히가 콧김을 내뿜으며 이를 드러냈다.
축축한 인간 놈을 태우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나블이 물을 싫어하는 이유는 물의 차가운 감촉 때문이기도 했지만 특유의 물비린내가 가장 큰 이유였다. 이대로 가다간 싯카를 태우지 않겠다고 로아히가 버틸 수도 있었다.
라다크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
라다크가 싯카를 불렀다. 물 안에서 유유히 유영을 하던 싯카가 그 소리를 듣지 못하자, 그는 다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싯카!”
그러자 싯카가 로아히의 바로 앞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불렀어?”
덕분에 로아히는 원치 않게 물벼락을 맞아야 했다. 로아히의 검은 눈 위에 투명한 막이 씌어졌다. 이제 로아히의 입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런 전조를 알 리 없는 싯카는 제 딴에는 로아히에게 친한 척 한답시고 물이 뚝뚝 흐르는 손으로 로아히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야, 너도 보다보니까 정이 좀 드는……, 아직 정은 안 들었지만 그냥 이젠 안 무섭다.”
“손 떼.”
“왜? 나 얘하고 친……, 으악!”
싯카는 방금 자신의 옆으로 아슬아슬하게 지나간 불을 피하며 괴성을 질렀다.
“얘 갑자기 왜 이래. 끄악!”
로아히가 다시 불을 뿜었다. 싯카가 비명을 지르며 불을 피했다. 라다크는 말릴까하다 그냥 두었다. 어차피 로아히가 죽을 마음만 있었으면 첫발에 싯카를 통구이로 만들어버렸을 것이다. 로아히는 그저 싯카를 놀려줄 심산인 셈이었다.
“로, 로아히! 악, 뭐야! 왜 이래?! 잡아봐! 쟤 입 좀 막아!”
라다크가 팔짱만 끼고 방관하는 모습에 싯카가 분노해 소리쳤다. 싯카가 조그만 몸뚱이로 요리조리 피하는 모습을 보던 로아히가 끼끽거리는 웃음소리를 냈다.
라다크는 처음 보았다. 로아히가 소리 내어 웃는 모습을.
“그만해! 이 나블 놈아! 악! 나블님, 잘못했어! 그만 하라고!”
싯카가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빌면서 외칠 때마다 로아히의 불길은 거세어졌다. 검은 눈동자 위에 드리워져 있던 투명한 막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어떻게 좀 해줘!”
싯카가 이번에는 라다크에게 간청했다. 겁을 집어먹은 푸른 눈동자가 울먹거렸다. 순간 라다크는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꽃향기를 느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에도 꽃은 피어있지 않았다.
“야! 이 인정머리 없는 쟈뉴아 놈아! 니 나블 좀 잡으라고!”
싯카가 호수 위를 소금쟁이처럼 첨벙첨벙 뛰어다니며 외쳤다. 그만해도 되겠다 싶어 라다크가 로아히의 갈기를 손으로 움켜잡았다.
“그만 해. 로아히.”
로아히의 목에서 거칠게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직 성에 차지 않았다는 뜻이다.
“나중에 아꼈다 해. 너무 하면 닳는다.”
아기 나블에게 재화의 유한성에 대해 설명하는 자상한 라다크였다. 물론 닳는 상대는 싯카였다.
나블의 공격이 멈추자 싯카는 헉헉거리며 땀을 닦아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쁜 쟈뉴아 놈.”
싯카는 마르케 언어로 라다크와 그의 나블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때 라다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싯카!”
“왜?”
“뒤!”
싯카는 기겁을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로아히가 끽끽거리는 소리를 내며 좋아했다. 라다크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없이 로아히의 등을 닦아 주었다.
“야, 이……, ……동물이랑 붙어먹는 주제에.”
싯카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절대로 저 비겁한 쟈뉴아 놈에게 이리케를 소개시켜주지 말자고 다짐하며 그는 바위에 걸쳐 놓았던 웃옷을 입었다.
“싯카!!!”
라다크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싯카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한번 속지, 두 번 속냐. 내가 얼마나 똑똑한지 네가 제대로 알면 날 이렇게 다루지는 못할 거다. 이 쟈뉴아 놈아.
“싯카! 숙여!”
“똑같은 장난에……, 으악!”
싯카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검에 놀라서 반사적으로 몸을 숙였다. 등 뒤에서 소름끼치는 동물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뮈닉스!”
거기에는 피를 흘리며 몸부림치는 뮈닉스가 서 있었다.
“뀌에어어억―!”
뮈닉스는 커다란 설치류였다. 나무 사이에서 서식하며 지나가는 인간을 덮쳐 머리부터 먹는 걸 좋아하는 식인 쥐였다.
“뛰어!”
라다크가 외쳤다. 싯카는 뮈닉스의 반대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바로 등 뒤로 뮈닉스가 달려오고 있었다.
일단 몸을 숨겨야 했다. 뮈닉스는 밤눈이 어두워 주로 낮에 활동을 했다. 이런 밤에 뮈닉스가 나타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끼애애액!”
뮈닉스의 울음소리가 가까워졌다. 싯카는 나무 사이의 틈을 발견하고 재빨리 그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싯카는 몸을 웅크리고 뮈닉스가 자신을 지나치길 간절히 기도했다.
바로 옆으로 뮈닉스가 코를 킁킁거리며 지나갔다.
제발, 제발――, 제발.
싯카는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고 기도했다. 잠시간 정적이 흐르고 뮈닉스의 거친 숨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싯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틈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뮈닉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다.”
싯카는 틈 사이에서 몸을 내밀어 빠져나왔다. 뭔가가 그의 얼굴 위로 똑, 하고 떨어졌다.
“뭐지?”
싯카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닦아냈다. 물이었다. 비가 오는 건가싶어 고개를 들었던 싯카는 그 자리에서 기절할 뻔했다. 뮈닉스가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싯카를 향해 앞발을 뻗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떨어진 것은 뮈닉스의 침이었다.
“으악!”
싯카는 되는대로 주먹을 휘둘러 뮈닉스를 막아내려 했다. 그러나 성난 뮈닉스의 힘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뮈닉스가 앞발로 싯카의 몸통을 쥐고 움직임을 봉쇄했다. 그리고는 날카로운 이빨로 싯카의 어깨에 박아 넣으려고 고개를 힘껏 젖혔다.
싯카는 인생의 마지막 장면이 뮈닉스의 더러운 이빨이라는 것이 서글펐다.
우직, 하고 날카로운 것이 살갗을 뚫는 소리가 선연하게 귀를 파고들었다. 그러나 어떤 고통도 전해지지 않았다.
“――?”
“전사는 끝까지 눈을 감으면 안 돼!”
라다크였다. 라다크가 뮈닉스의 이빨을 잡고 그대로 부러트려버렸다. 뮈닉스가 발광을 하며 앞발을 휘둘렀다. 싯카는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뮈닉스의 몸에 휘둘렀다. 몸통을 얻어맞은 뮈닉스가 눈에 불을 켜고 싯카에게 달려들었다.
라다크가 뮈닉스의 앞발을 움켜잡아 그대로 잡아 뜯었다. 생살이 뜯겨져 나가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그 다음에는 로아히의 몫이었다. 로아히가 가뿐하게 뮈닉스를 제압해 식사를 시작했다.
“뮈닉스 하나 당해내지 못하다니.”
라다크가 싯카를 일으켜 세우며 혀를 찼다. 재주가 아무리 좋아도 자기 한 몸 지킬 힘이 없으면 안 된다. 평화의 시대에는 상관없어도 지금은 적으로부터 자신을 구해낼 힘이 필요했다.
이런 비리비리한 몸으로는 전투를 하기는커녕, 야트렌의 침입에서 살아남기도 힘들었다.
“넌 내일부터 나한테…….”
“피!”
싯카가 라다크의 손을 부여잡고 외쳤다. 손바닥을 내려다보니 뮈닉스의 이빨이 살갗을 뚫어놓은 모양이었다.
라다크는 무료한 표정으로 피가 철철 흐르고 있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누가 얘기해주기 전에는 알아차리지도 못할 상처였다.
“잠깐만.”
싯카가 자신의 옷을 벗어 이로 찢어냈다. 옷의 일부로 일단 라다크의 손바닥에 감아 지혈했다. 그는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키다리 풀이 있었다. 싯카는 키다리 풀을 꺾어 입안에 넣고 씹었다. 입 안 전체에 칼을 넣고 씹는 것처럼 쓴맛이 번져나갔다. 그러나 싯카는 풀을 모두 잘게 씹은 다음 뱉어냈다.
“뭐야, 그건.”
오만상을 쓰며 풀을 씹는 싯카를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던 라다크가 물었다.
“약이야. 가만히 있어봐.”
싯카가 그의 손바닥 위에 풀을 씹은 것을 붙이고 다시 천으로 감았다.
“괜찮아?”
싯카가 물었다.
“안 아파.”
“센 척 좀 그만해. 안 아프긴 어떻게 이게…….……진짜 안 아파?”
“그래.”
선홍빛 속살이 드러난 만큼 큰 상처인데도 라다크는 눈썹 하나 꼼짝하지 않았다.
“……너 설마 아픔을 못 느껴?”
라다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싯카는 언젠가 쟈뉴아 사람들이 말했던 라다크의 병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언제부터?”
“태어났을 때부터.”
라다크의 특이한 체질 때문에 쟈뉴아 사이에서도 말이 많았다. 저주받은 아이다. 귀신이 들렸다. 악귀에게 혼을 판 아이다, 등등.
워로드는 오히려 라다크가 신의 가호를 받은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아이를 그렇게 키웠다. 하지만 라다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늘 께름칙함이 묻어났다.
라다크는 신의 가호와 사람들의 기탄 속에서 자라났다.
“정말 아프지 않아?”
싯카가 확인하듯 다시 물었다.
라다크가 짧게 그래, 하고 대답했다. 자신이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두려워하거나, 아님 부러워하거나.
“너 조심해.”
“뭐?”
“더 조심하라고. 네가 다친 것도 모를 거 아니야. 아, 그래서 그날 내 뒤를 쫓아올 수 있었던 거구나. ……참나. 나는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능력이라도 있나 했네.”
싯카는 중얼 중얼거리며 다시 피가 베어나지 않도록 남은 천으로 상처를 조심조심 감아주었다.
“그럴 필요 없어. 꽉 감아도 된다.”
“내가 아파, 내가.”
라다크가 눈을 치뜨고 싯카를 바라보았다.
“보는 내가 아프다. ……으으.”
싯카는 조심스럽게 감은 천의 매듭을 지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푸른색 꽃물을 짓이겨놓은 듯한 눈동자 위에 긴 속눈썹이 드리워졌다. 만져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으악!”
싯카가 눈을 움켜쥐고 비명을 질렀다.
“왜 그래! 왜! 왜 남의 눈을 찔러!”
눈물을 질질 흘리며 싯카가 라다크에게 원망의 눈길을 보냈다.
라다크는 대답하지 않고 로아히에게 휘파람을 불었다. 로아히가 그르릉, 거리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어이, 너. 내일도 매달려 있을 거지?”
라다크가 물었다.
“내일은 내 발로 착지할 예정인데?”
싯카가 자신의 비행이 성공에 대한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무장해. 한밤의 숲은 위험하니까.”
그렇게 말한 라다크가 로아히의 등 위에 올라탔다. 로아히가 회색 날개를 펼쳤다. 흉포하기 그지없는 나블 위에 탄 라다크의 모습이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였다. 싯카는 생각했다.
어쩌면 숲에서 가장 위험한 동물은 바로 이것일 거라고.
“타.”
이 숲에서 가장 위험한 동물이 싯카를 향해 손짓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