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그런 힘이 난 것인지 사내들은 남자의 입에서 마지막 숫자가 나오기 전에 일어나 후다닥 사라졌다.
결국 싯카는 남자와 단 둘이 남겨졌다. 바람이 불어 달 위에 걸려있던 구름을 걷어냈다. 만월이었다.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은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주위가 밝아졌다.
싯카는 마른침을 삼켰다. 베일을 쓰고 있지만 혹시 이놈이 자신을 알아보면 어쩌나하는 두려움이 든 것이다.
남자는 아직도 싯카의 손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싯카는 구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할지, 이 손을 좀 놓으라는 말부터 해야 할지, 아니면 자기를 죽이지 말라는 부탁부터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네가 나에게 돌을 던졌나?”
“…….”
아무래도 죽이지 말라는 부탁부터 시작해야 할 모양이다.
“어느 돌인지 기억해?”
싯카는 일부러 고개를 크게 내저었다.
“만져보면 기억할 수 있겠지.”
남자는 근처에 떨어진 돌 하나를 주워 싯카의 손에 쥐어 주었다.
“이 돌이 그 돌인가?”
“…….”
싯카는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이 돌인가.”
남자는 다른 돌을 쥐어주었다. 싯카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남자는 끈질기게 다른 돌을 주어다 싯카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 돌? 아니면 저 건가? 아니면 저 아래 있는 돌?”
싯카는 고개만 저었다.
“말을 못해?”
“…….”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되도록이면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될 수 있으면 얼굴 모르는 여자로 이 상황을 끝마치고 싶은 것이 싯카의 솔직한 욕심이었다.
남자는 갑자기 싯카의 베일을 반쯤 걷어 우악스럽게 입을 벌리게 했다. 그리고는 싯카의 입 안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혀를 확인 했다.
“멀쩡한데 왜 말을 못하지? 아까는 분명 소리를 낸 거 같은데.”
“…….”
빌어먹을 새끼. 나블이랑 붙어먹을 새끼.
“말은 못해도 어떤 돌인지는 골라낼 수 있겠지.”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싯카의 손을 잡아끌었다.
“자. 어서 골라.”
“…….”
싯카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대체 왜 이런 행동을 하느냐는 뜻이었다. 남자가 싯카의 의중을 알아차렸는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가 던진 돌로 네가 맞아야 정당하지 않겠어?”
“…….”
정당? 정당 좋아하시네. 이런 미친 새끼.
이놈은 실력만 비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사고방식까지 인간의 틀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싯카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쥐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잘못 걸려도 한참 잘못 걸린 것이다. 이건 정말 나블을 피하다 세발 용을 만난 격이었다. 차라리 아까 그 더러운 놈들이 백배쯤은 나았다. 그냥 수치를 무릅쓰고 자신의 치마 아래를 보여줬더라면 사태는 깨끗하게 끝낼 수 있었을 테니.
기회를 봐서 도망가야 겠다는 생각에 싯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남자의 살벌한 이죽임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도망가면 발부터 부러트린다.”
온갖 역병에 걸려 썩어 문드러질 놈!
싯카는 속으로 저주를 퍼부으며 남자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남자의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가 그의 눈에 들어온 것도 그와 동시였다.
“그거!”
싯카가 소리를 지르며 목걸이를 낚아채려 했다. ……하지만 남자의 반사 신경은 그런 행위를 용납지 않았다. 가볍게 싯카의 손을 벗어난 남자가 의아하다는 듯 눈썹을 치어 올렸다.
“말을 하는군?”
“그게 중요한게 아니잖아. 그거!”
싯카가 다시 목걸이를 향해 손을 뻗자 남자는 이번엔 매섭게 손을 내리쳤다.
“내가 건드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당연하지! 그게 어떤 물건인데!”
남자의 목에 걸린 것은 싯카가 포기하기 까지 3박 4일이 걸린 움직이는 돌로 만든 화살촉이었다. 눈썰미가 좋은 싯카는 그것이 자신이 만든 것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네 것이 아니다.”
싯카는 천불이 났다. 정말 어렵게, 기적처럼 주운 돌이었다. 움직이는 돌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렵다. 돌이 나는 곳도 찾기 힘들뿐더러 순수하게 그 돌만 뭉쳐있는 원석을 구하는 것이 또 어려웠다.
싯카는 눈에 불을 켜고 남자에게 달려들어 그 돌을 빼앗으려 했다. 하지만 남자는 싯카의 머리통을 손으로 밀어내며 그를 막았다.
“내 돌이라고!”
“뭐?”
“그거 내 돌이라고. 내가 잃어버린…….”
여기까지 말한 싯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죽기 살기로 베일을 뒤집어 쓴 자신의 노력이 무산된 순간이었다.
“이게 네 것이라고?”
남자가 자신의 목에 걸린 화살촉을 쥐며 물었다.
“……그게.”
“이게 네 것이냐고 묻잖아.”
“…….”
번민이 싯카의 머릿속을 휘둘렀다.
솔직히 말해 움직이는 돌을 돌려받을 것인가, 아니면 그때 숲에서 만난 남자다운 내가 지금 이 꼬라지를 하고 있는 것을 상대에게 들킬 것인가.
“이게 네 것이냐고, 물었다.”
그렇게 묻는 남자의 얼굴에 딱딱한 분노가 스미어 있었다.
남자와 지금 이것이 두 번째 만남이었지만 싯카는 그의 성격을 직감했다. 이놈은 엄마 뱃속에서 열 달을 채우지도 못하고 지발로 걸어 나왔을 게 분명하다. 지금까지 만나본 사람 중에 세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남자는 성격이 급했다. 그 세손가락 안에 자신의 가족 둘이 꼽히는 것도 싯카에겐 참으로 불행스런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이게 네 것인가?”
“……. …….”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하게 대답하는 것이 이 상황에 득이 될지 독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은 진실을 밝히자 싶었다.
“네가 이걸 만들었단 말이지.”
남자는 다행스럽게 싯카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러나 다행 뒤에 불행이 뒤따른다는 옛말에 어울리게 그는 이번엔 싯카의 양 어깨를 움켜쥐었다.
“――!”
싯카는 하마터면 비명을 내지를 뻔 했다. 아무리 옷 안의 자신이 남자라 할지라도 이 정도의 힘은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네가 이걸 만들었다고? 네가?”
남자가 이번에는 싯카의 어깨를 흔들어 대며 대답을 종용했다. 어깨를 짓누르는 고통에 머리가 흔들리는 불쾌함까지 더해져 싯카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으윽…….”
결국 싯카의 입에서 고통 어린 비명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남자가 흔드는 것을 멈추었다. 얼마나 세게 흔들었는지 쓰고 있던 베일이 발치를 뒹굴고 있었다.
남자가 흙바닥에서 엉망이 된 베일을 주워 다시 싯카의 머리 위에 씌어주었다. 싯카는 머리 위로 떨어지는 흙 알갱이를 퉤, 하고 뱉어내고 남자를 노려보았다.
“여자가 이런 걸 만들다니. 아니, 그럼 그건 뭐였지.”
혼란스러운 듯 남자는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머리를 긁적이기도 하고 턱을 만지작거리다가, 눈가를 가늘게 좁히고 결심했다는 듯이 그가 입을 열었다.
“어이, 여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