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카는 화가 났다.
책임감 없는 막내 여동생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자신을 처넣은 큰 누이도, 상황을 알면서 방치한 아버지도.
……무엇보다 이 차림을 하고 이곳에 온 자신에게 가장 화가 났다.
“아가씨. 그러지 말고 우리랑 한잔하자니까.”
“무슨 옷을 그리 곱게 차려입었어. 얼굴 좀 보자. 그것 좀 벗어봐.”
“역시 술은 여자가 따라줘야 제 맛이지. 이리 와보라니까.”
각 부족에서 축하 사절단과 선물을 보내온 터라 마을 뒤쪽에는 말과 나귀, 크게는 기조와 코끼리까지 각종 탈 수 있는 동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당연히 그 탈것들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딸려오기 마련이다. 그들끼리 술판이 거하게 벌어졌을 상황쯤은 예상할 수 있었을 텐데, 이리케를 찾겠다는 일념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진 것이다.
싯카는 얼른 몸을 돌려서 오던 길로 다시 걸었다. 하지만 이미 술에 거나하게 취한 사내들에게 곱게 옷을 차려입은 여자는 도저히 그냥 보낼 수 없는 매혹적인 존재였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시냐니까. 응?”
“잠깐만 앉아 있다가 가면 되잖아.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수염을 지저분하게 기른 남자가 싯카의 손목을 잡아챘다. 싯카는 단호하게 손을 뿌리쳤다.
“어쭈. 제법 힘이 센데? 이렇게 가늘어서 말이야!”
이번에는 멧돼지 같이 뾰족한 이빨을 가진 남자가 싯카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그 바람에 싯카는 그림자 대역이라는 자신의 본분을 잊고 주먹을 날릴 뻔했다. 그는 있는 힘껏 멧돼지 이빨을 한 남자를 밀어내고 옷을 털어냈다. 강력한 거부의 표시였다.
술에 취한 남자들은 싯카를 둘러싸고 포악한 술주정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뭐야. 우리는 지금 더럽다 이거야?”
“계집년이 지금 우리를 무시해? 우리가 누군 줄 알아? 자크네 족의 전사들이라고. 건방 떨지 마. 한갓 약해빠진 쟈뉴아족의 계집주제에!”
싯카는 고민했다. 혼례고 나발이고 이놈들을 다 때려눕히고 자존심을 회복할 것이냐. 아니면 악귀처럼 무서운 큰 누이를 생각해 한번만 더 참아줄 것이냐.
“그 베일부터 벗으라고! 이 건방진 계집아!”
지저분하게 수염을 기른 남자가 손을 치켜들었다. 베일이 벗겨지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싯카는 차라리 모든 것이 밝혀져 이놈들과 화끈하게 한판 붙고 싶었다. 사란토야에게는 정말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는 변명을 늘어놓아야 했으니, 한대 맞고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잠깐만, 잠깐.”
너덜너덜한 가죽 옷을 걸쳐 입은 사내가 비틀거리며 일어서 남자들의 횡포를 막았다. 생긴 것은 개중 제일 고약하게 생긴 놈이 그래도 양심은 있구나 하고, 싯카는 안도했다.
그러나 그 얄팍한 안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지 말고 저 천막 안으로 끌고 가는 게 어때. 오랜만에 재미 좀 보자고. 먼 길 오느라 다들 아랫도리가 굶었을 거 아니야.”
가죽옷을 입은 남자가 누런 이를 드러내어 웃으며 자신의 사타구니를 주물럭거렸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이 남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한이 있더라고 싯카는 일단 이 상황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난……!”
싯카가 입을 열어 제대로 된 말을 하기도 전에, 수염을 기른 남자가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남자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싯카의 팔다리를 움켜잡았다. 싯카는 소리를 지르려고 발버둥을 쳐봤지만 여러 명의 남자를 감당해내기엔 벅찼다.
“고거 엄청 파닥거리네.”
“하하하. 조금만 기다려라. 잊지 못할 밤을 만들어줄 테니까.”
이 빌어먹을 것들아! 충분히 잊지 못할 밤이니까 이제 그만하고 놓으라고!
발버둥치는 와중에 베일이 벗겨졌다. 싯카는 얼른 이 미친놈들이 자신이 남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떨어져 나가주길 바랐다. 그러나 불빛이 어두운데다 워낙 싯카의 외모가 곱상한 편이라 그들은 털끝만큼도 그가 남자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젠장, 힘이 엄청나네. 조이는 맛도 죽이겠다. 얼른 끌고 가자고.”
“흐흐흐. 오랜만에 몸보신 좀 하겠어.”
이런 빌어먹을 자식들을 대체 누가 초대한 거야!
싯카는 분노로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았다. 당장 소리를 지르고 싶어도 입이 틀어 막혀 있어 그럴 수도 없었다.
차라리 지금 남자라는 사실을 밝히는 편이 나았다. 옷을 벗겨놓은 상태에서 남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수치는 아마 지금과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때 갑자기 묶여있던 말들이 앞발을 구르며 푸르르 거리기 시작했다. 예민한 말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는 것은 근처에 경계를 할 무엇인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사내들도 일제히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수풀 근처에서 들려왔다. 사냥을 자주하진 않지만 싯카조차 저 소리의 주인공이 위험한 육식동물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나가는 늑대인가. 그냥 빨리 해버리자고. 누가 오기 전에.”
가죽옷의 사내가 얼른 천막 안으로 들어가자는 손짓을 했다. 차라리 저 수풀 안에서 세 발톱의 적색용이라도 나와 이놈들을 죄다 갈기갈기 찢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싯카는 진지하게 기도했다.
그러나 그런 싯카의 간절한 바람을 무시하고 나타난 것은 나블이었다. 나블은 사막 범의 한 종류였다. 몸통은 보통의 범보다 두세 배는 큰데다 날개까지 달려있는 이 맹수는 주특기가 마을을 급습해 키우는 양과 염소를 사냥해가는 것이었다. 나블이 마을 근처에 모습을 드러내면 사람들은 혼비백산이 되어 집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나블이 사냥하는 것은 양과 염소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 고기에 한번 맛 들리면 그 마을에 어린아이가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끈질기게 나타난다는 얘기가 있을 만큼 나블은 악명 높은 괴수였다.
“나, 나블이다.”
“젠장. 왜 이런 곳에 나블이…….”
“당장 무기 들고 정신 차려. 나블의 안주거리가 되고 싶지 않으면.”
사내들은 잡히는 대로 무기를 손에 쥐었다. 나블을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처음 보는 싯카도 잔뜩 긴장했다. 하지만 바로 달려들어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댈 것이라 생각했던 나블은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뭐지? 왜 저러고 있는 거지?”
“저놈이 지금 누굴 잡아먹어야 할까 고민하고 있겠지.”
“어라. 저거 고삐가 매어져 있지 않나?”
가죽옷의 사내가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정말 고삐가 매어진 나블이 커다란 앞발을 움직이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믿을 수 없게도 나블의 위에는 장신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설마……, 나블을 타고 다니는 정신 빠진 놈들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그걸 보게 될 줄이야.”
“그러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