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8)
  • 5.

     자각(自覺)이란게... 이토록 선명한 걸줄은 몰랐다.

     그래, 멀리서 봤을 때도 뭔가 달라서, 마주 대하면 이리 될 줄 알고 피해다닌다고 다닌게 고작 이틀째. 하지만 내가 움직이는 패턴을 다 알고있는 사람에게는 소용 없는걸지도...

     "말 좀 해."

     그러니까, 눈앞에서 이토록 얼굴 굳히고 무서울 정도로 쳐다봐오는 사람에게도... '다정'도 아니고 '부드러움'도 아닌데... 두근두근한다는건.. 으으, 나 어쩌면 M끼가 있다거나, 변태인 가능성이... 물론 몰랐던 '내 안의 나'가.. 이런 류라면 거절하고 싶지만.

     "...형... 나 수업이..."

     "시간표 새로 짰어? 다음 공강이잖아."

     ....그렇게 내 일을 기억해주는 건 기쁘지만. 아! 그러고보니 형은 이번에 수업있지 않아요? 수업, 그거 왜 '깐깐찡어'라는 별명을 가진 교수라고, 전에 한참 말했잖아요. 왜 리포트 완벽, 출석 완벽, 발표 완벽, 해도 뭔 꼬장인지 'B'도 안주기로 아주 유명하다는... 대출도 안된다면서 이 시간!

     "형, 수업."

     "대화."

     아... 화났어요? 화 난건가? 왜? 아니, 나 때문인 건 알겠는데.. 그렇게, 화낼만한...

     "여기서 말할까."

     "장소가..."

     형이 우리학교 명실공히 자타가 인정하는 킹카라는 사실을 몰랐을때도, 형하고 다니면 사람들이 많이 쳐다본다, 쯤은 알았지만,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 아니 눈에 보이고 들어온달까. 여기저기 지나가면서 힐끗힐끗 쳐다보고 말하는 모습들이. 그래, 초기에 왜 나 게이 아닐까하는 작은 소문났을 때도... 내 행동에 문제가 있긴 했지만 그보다는 이연우라는 영향력이 더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그 게이 소문이 크게 안 번진건 다들, 이연우는 사귀는 여자, 강수빈이 있다는걸 알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우리 집으로 가자."

     으, 길게 말할 생각? 아, 심장에 무리가 조금 오려고하니까, 짧게 해줘요, 짧게.

     "그게, 그냥..."

     "싫어?"

     "아...니요."

     형 집이야 학교에서 20분이니까(걸어서) 가는데야 문제없어도.. 아, 눈 마주쳤다, 눈. 으으읏. 이런, 피해버리면 어쩌냐, 권지인!! 연우 형 열받았다.

     "왜 피해."

     "네?"

     뭐가요?; 라고 천연덕스러운 표정 연기를 해주려고 했는데.. 음성 자체가 떨려나오는게.. 실패다.

     "........"

     "........"

     "지인아."

     "네?"

     ".....아냐, 가서 말하자."

     으으... 손잡아 끌지마요. 으아앗, 놓으라니까; 쳐...쳐다보잖아! 아니 남이 보는거야! 둘째치고 나나... 어쩐지... 이거이거... 너무너무..혀엉... 그러니까, 그렇게 안 해도 나 안 도망가니까! 혀엉... 연우 형...

    파앗!!!

     깜짝. 으아... 으아아앗!! 내가 무... 무슨 짓을. 연우 형이 놀랐따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날 돌아보는게.. 장담하지만요! 형! 내..가 놀라도 지금 형보다 27배하고도 3배는 더 놀랐을 거라구요! 갑자기 손을 있는 힘껏 빼버리다니... 나는... 하지만 나는!!! 자꾸 잡힌 손목이 화끈거리고 더욱이 얼굴도 화끈거리고 가슴도... 그래서...

     "혀..엉."

     "미안하다, 놓을게."

     삐...삐졌다! 아니 화났다. 진짜 화났다. 내 얼굴 안보고 옆으로 시선 돌리고 숨 한번 들이삼키는거... 정말... 나, 일부러... 싫어서 그런거 아니란 말야!!

     "자가."

     형... 혀엉!! 가..같이 가요. 으와앗, 제기랄.. 심장이 뛰는걸 어쩌라고! 심장 박동수 폭주로 나 죽으면 좋아요? 좋냐구웃!

     여전히 깨끗한 집. 평소와 다른게 있다면, 테이블 위에 널려진 머그 컵과 커피 잔들... 그리고 희미하게 집안을 떠도는 커피 향.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줘."

     솔..직하게?

     "내가 너한테 실수한 거 있어?"

     "아뇨."

     "오늘로 4일째야. 며칠 전 아침에 수빈이랑 너랑 만나고나서부터로 치면."

     "......."

     "늘 점심시간에 나오는 곳에도 안 나오고, 전화하면 안 받고, 다시 걸면 꺼두고. 컴퓨터는 안 들어오고. 다니던 곳은 아예 안 나타나고. 피한거야?"

     "........"

     피...했다. 보면,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갑자기 깨달은 감정이라, 그것도 시작이 아닌 꽤나 깊이 진척된 감정이라는걸 하루가 지날수록 또 하루가 갈수록 선명해져서 스스로 곤란할 정도라... 그래서 그랬던건데...

     "피한거구나."

     "그게....."

     "할말있어?"

     ..........없다. 있어도 없다고! 있어도 난 말 못한다고.

     "그냥 조금 바빴어요."

     "내야할 리포트도 다 제출하고, 그렇다고 친구들 만난 것도 아니고, 집에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뭐가?"

     "......그게 축제 준비."

     "동방에 갔었다."

     .....형...

     "첫날은, 정말 일이 있겠거니, 했어. 둘째날은 아픈가 했고. 셋째날은, 기다려보자 했지."

     "..........."

     "그런데, 피하고 있다, 라는 거 밖에 안 떠오르더군. 내가 잘못 생각한거냐?"

     "형."

     "내가 실수한 거야? 지인아, 그런거면..."

     "형이 잘못한거 하나도 없어요."

     다 내 잘못이지! 아니 좋아하는건 잘못이 아니라지만, 원래 '사랑'은 죄가 아니라잖아. 아아! 그래도 내가 형을 좋아하는건 잘못된.. 여하튼 내가 다 잘못한거니까...

     "그럼 뭐야."

     "그냥 정말로 바빴어요."

     "권지인."

     "........"

     "누굴 바보로 알아?"

     "형..."

     "여지껏 너 바쁘다고 나한테 연락 안 한적 있어?"

     없다. 바쁘면 바쁘다고 짬짬이 시간날 때마다 전화걸어 징징거렸으니까...

     "신경 못 썼어요." 

     "그래?"

     ".........."

     "나랑 말하기 싫지, 너."

     "아니에요!"

     내가 형하고 말하는걸 얼마나 좋아하는데... 이것저것 쓸데없는 소리라도, 사소한 말이라도 얼마나 좋아하는데...

     "지인아.. 나 너랑 잘 지내고 싶어."

     나도! 나도, 형하고 정말 잘 지내고 싶어요. 그런데... 그런데에!

     "난... 동생 너무 갖고싶었고... 너랑 알게되서 정말 반갑고... 그래, 말 한적 있지. 너랑은 뭘 하던 즐거워서, 기분 좋다고..."

     형이 갖고 싶다고... 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연우 형이랑 알게되고나서, 정말로 연우 형이라면 이상적인 형이라고.. 형이 있어서, 좋다고 생각했지만... 이건 아니다. 그걸로는 모자른... 내가 연우 형에게 가진 감정은 그 훨씬 이상인...

     "형..."

     "........."

     "정말, 나 형 피한거 아니에요. 상황이, 좀 그래서 그랬는데.. 진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정리할게 좀 있어서."

     "........."

     "진짜~ 그런거니까, 신경쓸 부분이 아니에요."

     .....하지만, 이런 내 감정이 연우 형에게 받아들여질리가 없다. 그렇다면, 깨끗하게 포기하고 동생으로서만... 지내야..겠.......으면 좋겠지! 하지만... 그래 그렇지만! 새삼 생각되어진건.. 나 성격 정말 더럽구나... 이런 상황에서도, 자포자기로 절대로 절대로 받아들여질리가 없고, 연우 형의 '연인'이라는 위치에 내가 있을 수가 없다면, 조금쯤 그 특권을.. 가져버린 사람에게 심술부려도 상관없겠지, 라는 마음이 들었다는 것. 그리고... 연우 형에게도.. 동생이라는 위치로 마구마구 귀찮게 굴어버리고. 그러다가 형이 나한테 질려서 뻥 차버리면 포기하는 거고. 그렇지않다면, 혼자서 질질질 감정끌고 유치빤스 계획들을 세우다가 혼자 상처받고 하는거지. 아아~ 어느 쪽이던 좋은 방향은 하나도 없구나.

     "이것때문에 신경쓰게 한 거라면 죄송해요."

     "....정말...이야?"

     약간 미심쩍다는듯 마주 봐오는 얼굴.

     "사기 칠 리가 없잖아요." 

    "...그 정리라는거 감정정리?"

     "...뭐 이를테면."

     애매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자, 잠시 생각하는 얼굴이 되더니, 형이 이내 슥슥 머리를 문질러 오는게.. 아 기분 조금 풀렸나 보다 이 사람.

     "화내서 미안하다."

     "괜찮아요, 오해하게한 제 잘못이죠."

     "...피한다고 생각하니까, 화가 났어." 

     "........."

     "감정적이었다, 미안."

     아니, 오히려 형한테 민폐 잔뜩 끼치고 못된 짓 벌이려고 하고있는건 난걸.. 그정도쯤이야. 나라면.. 나였다면 형이 내 전화는 안받고 핸드폰은 꺼버리고 일부러 피하는게 느껴졌따면, 아마 더 화가 나서 길길이 날뛰었거나, 수업시간에 쳐들어갔을지도...

     "괜찮다니까요. 그보다... 형 정말 오늘 수업 째버려서 어떻게 해요?"

     "음.........."

     이제와서 고민해봤자 늦었어요, 형.;

     "밥은 먹었어?"

     화제 돌리기는.. 체.

     "아뇨, 나 그러고보니까 배고파요. 맛있는거 사줘요."

     "그럴래?"

     웃는다. 아주 희미하지만...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고. 캐치캐치. 평소엔 쿨하면서 이럴 때보면 영락없는 대여섯살짜리 꼬맹이같은 느낌이 드는건.. 젠장 진짜 좋잖아. 그래그래, 평소에도 말야, 형이 웃으면 혼자 '우와~ 웃음은 전염된다' 하면서 같이 웃었지만... 이제는 아예 넋을 잃겠다. 우... 잘났다, 잘났어. 이연우. 그래 권지인 병신만들고, 혼자 그렇게 멋있게 웃어라, 웃어.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형은?"

     ".........그닥."

     "먹는 거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 이거 테이블 위에 웬 커피 잔이 이리 많아요?"

     아, 이건 커피가 아니라... 킁킁, 코코아? 킁, 이건 레몬 티... 으으음...

     "그게... 그냥 요 며칠 생각 좀 하느라고."

     그거 생각이라는거 내 문제? 내 문제겠지? 으으, 그럼 요 며칠 우리는 서로 생각만 한건가? 어쩐지 이거 은근히 기분 좋네. 같은 시간에 서로를 생각. 아.. 하긴 그럼 뭐해. 나야 혼자서 형과의 일 하나하나 떠올리며, 의외로 남자를 좋아한다! 는 사실에 별 타격없이 화끈화끈거렸지만, 형은 이를 갈았을텐데.. '권지인 이 자식 뭐야!'라면서... 이건 조금 서글프네.

     "잠도 못 잤겠네요. 커피를 이쯤 마시면."

     "응... 계속."

     으으음? 그러고보니 이제야, 형 얼굴이 확 눈에 들어오는게 어딘지 깨칠해보이기도!

     "형, 계속이라니. 설마 요 며칠 계속 안 잤다는 소리에요?"

     "아아, 그래도 몇 시간씩 잠깐 눈은 좀 붙였는..."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으음."

     "밥보다 지금 잠이 더 고픈거 아녜요?!"

     "그러고보니까.. 좀."

     "혀엉!"

     "잠이 별로 안 왔어."

     커피를 저리 들이부었으면 당연히 자고싶어도 눈이 떠졌겠지!

     "무슨 생각이에요!"

     "........."

     그렇게 야단맞은 어린애같은 표정 지으면 답니까?! 자요!! 자라고! 지금 밥이 문제야?

     "자요!"

     "넌?"

     "....학교 가야죠."

     "그럼 나도."

     "형은 어차피 지금 짼 거 이후로 없잖아요."

     "........으음."

     "자라니까."

     "너 밥은?"

     "...내가 한두살 먹은 애에요?"

     "....그래도."

     "그래도는 무슨. 안 자요?"

     "너 간다며?"

     "안 가요, 그럼. 됬어요?"

     "나 자면 뭐하게?"

     "...혼자 놀게요."

     "안 잘래."

     "......자요."

     "너 심심하잖아."

     "형 깨어있다고해서 안 심심할 것도 없어요."

     이건 거짓말이지만...

     "그럼, 한 시간만... 나 눈 붙일테니까 한 시간 후에 깨워줘."

     알았습니다. 알았으니까...

     대답대신 형 등을 밀며 침실로 들여보내자 흘끔흘끔 자꾸만 쳐다보는게... 억지로 침대에 앉혀두고 방문까지 닫아주고 거실로 나와 앉자, 한숨이 나온다. 확실히 다르다. 아니, 행동에 있어서는 평상시와 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음 심장이 쿵쿵 뛰고.. 아아... 정말이지, 새삼 느끼지만 정말 멋있잖아. 게다가 은근히 감동스럽기도 한게... 형 그러니까, 내가 피하는 줄알고-사실 피한건 사실이지만- 커피 마시며 잠도 못 자고 밤새 고민하고 기다렸다는거 아냐. 내 연락이 오기만을.. 이정도면 순애.. 아.. 뭔 소리냐. 삼천포로 빠지지말자, 권지인. 흐음.. 그런데 이 집. 그 여자도 와 봤을까? 음.. 강수빈. 아아, 형한테 어차피 내 맘 받아들여질수 없으니, 티 안내기로 했지만, 속으로야 어때! 아무도 모르는 거. 그래그래, 강수빈인지 뭔지 말야, 여기 와 봤겠지? 와서 뭐 했을까? 내가 앉아있는 이 쇼파에도 앉아봤을테고.. 형하고 식탁에서 밥도 먹었으거고.. 또, 형이 지금 자고있는 침대에서... 울컥.. 열 받네!! 그래 다 큰 성인 남녀가, 그런 일이 없으리라는 법은 없지만, 아니 그러던말던 나 만나기 전 일이고, 엄연히 따지면 내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지만.. 아니지마안!!!! 화난다. 키스는 했겠지? 가슴은... 만져봤.......아아아아아악.

     "지인아?"

     "헉! 혀엉;"

     "...역시.. 안 좋은 일 있어?" 

     "에...?"

     아, 내 표정. 이런...

     "그게 아니라, 좀.. 그런데 자라니까 왜 나왔어요."

     "쇼파에서 자게."

     "시끄럽잖아요."

     "별로."

     ....흐음 그런데 형 그 폼 참 재미있네요. 약간 졸린지 살짝 감긴 눈에, 얇은 이불 하나에 베개 챙겨들고 선 모습이라니... 마치 밤에 엄마아빠 침대로 여행오는 꼬맹이 차림. 그거랑 딱이잖아.

     "...푸후."

     "왜 웃어?" 

     귀여워서. 아, 제기. 정말이지 나 형한테 반한 이유야 너무 많겠지만, 그래도 그 얼굴과 안 맞는, 언발란스한 귀여움이 단단히 한 몫했으리라 봅니다, 거.

     "그럼 여기서 자게요?"

     탁탁 손으로 쇼파를 두드리자,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교파에 남은 자리로 파고들어 몸을 웅크리는게...

     "다리 펴요. 안 불편해요? 나 내려앉을까?"

     "아니 괜찮아. 텔레비전 보려면 봐."

     "별로, 텔레비전보고싶지 않아요."

     텔레비전보는 거보다 형 쳐다보는게 배는 재미있을거같은데.. 비록 심장 박동수랑 체온은 좀 올라가고 안절부절못하는 태도가 옵션으로 붙겠지만.

     "그럼 뭐하게?"

     "음... 책 볼게요. 난 신경쓰찌말고 형은 잠이나 자라니까요."

     다시금 재촉하자, 못 이기는척 눈을 감는다 싶더니... 몇 분 지났을까... 낮은 숨소리가 전해져오는게.. 휙휙 손을 들어, 형 눈앞을 지나쳐봐도.. 잠잠.. 이렇게 금방 자버리는 걸 보니, 정말 피곤했던 모양인데.. 푸후, 잘 잔다. 입은 꼭 다물고... 손은 머리 위로해서 살짝 말아쥔 모습이.. 아...음. 이거 어딘지 애기같지 않아?; 아아~ 키가 180이 훌쩍 넘는 남자도 갓난아이 특유의 그 귀여움이 보이다니. 어디어디, 찔러 볼까? 아, 관두자. 지금 깨면 괜히 곤란할테니까... 그래도 나중에는 한 번 해보고 싶은데. 왜 자면서 툭툭치면 사람 반응 가지각색이잖아. 나 옛날에 우리 지훈이 놈 잘 때 툭툭 건드려주거나 머리 쓸어올려주면, 자면서도 사르르 웃는 거 보고 얼마나 놀랬다고. 누나는 거기에 재미들려서 지훈이 잘 때를 기다렸다가 건드리기도 했고... 뭐 하긴 그것도 어릴 때 이야기긴 했다. 예전에야 '사르르'였는데 요새는 '씨익~'이라서 어딘지 징그럽기까지... 음음 하긴 자는 놈 건드리는 누나나 나도 그닥.. 좋은 취미는 아니지만... 그러고보니, 나 연우 형한테 해봐야할 일 많다. 우선 술도 먹여봐야학-술버릇 보고싶어서- 잠잘 때 건드려도 봐야하고... 응, 사실 내가 모르는 부분들이 속속히 다 알고싶지만... 우선은 순번을 정하자면 말이지... 그런데 난 이렇게 형에 대해 알고싶은 거 투성이건만, 연우 형은 어떨까?... 좋은동생. 역시 그 이상은 기대하기 무리인거겠지...

     농담안하고 형 자는 걸, 거의 한 시간쯤은 들여다본 거 같다. 연우 형이 한 시간 지나면 깨우라고 했지만, 처음에는 몇 번 뒤치락거리기도 하더니, 후에는 완전히 죽은 듯 원래 자세 그대로 자는 형을 보고 정말 피곤하구나 싶어서 가만히 뒀따. 그리고나서 시선이 옮겨진 곳은 테이블 위에 예닐곱 개는 꺼내져 있는 컵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서서, 유리컵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안 나게 들고 부엌에서 씻으면 행여나, 형이 깰까 욕실까지 들어가서 물도 작게 틀어놓고 컵을 씻고선 부엌에 옮겨뒀다. 그리고나서 형을 위해 저녁식사나 준비해볼까 했지만... 워낙에 깔끔하게 챙겨져있는 밑반찬들과, 여엉 요리는 그저 그런 내 실력 탓에 부엌 식탁에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사실 나는 정말 평범한 대한민국 남자로.. 대다수가 그렇듯 요리하고는 그닥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다. 물론 내 친구 놈처럼 중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라면을 끓여보고, 고등학교 와서 짜파게티를 끓일 수 있게 되었다! 하는 막가파는 아니지만.. 여하튼간. 내가 한 요리를 맛있게 먹을 수 있냐고 묻는다면 단호하게 'NO'라고 말할 가능성이 더 높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자고 일어난 연우 형에게 나도 뭔가를... 해주고 싶은 그런 기분이다. 왜 로망이잖는가. 한숨 푸욱 자고 일어났더니 식탁에는 맛있는 요리가!... 음.. 그게 행복이지. 아, 생각할수록 나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 몽글몽글 솟아오르는게...

     참, 요리하니까 생각났는데.. 전에 연우 형이 계란 후라이할 때, 타악 한 손으로 요령좋게 계란 깨서 얹는거 보고는 감탄했었다. 꼭 내가 후라이하면 한번쯤은 입안에서 '야그작'하고 계란 껍질이 씹히는지라.. 거기에 흰자는 늘 끈적하게 손에 묻어서 후라이팬에 계란 올리고 손 씻어야하고... 그런데 연우 형은 그런게 없었지... 여하튼 한 손으로 계란깨는 거 보고 '우와~ 또 해봐요.'라며 나는 눈을 빛내고... 형은 다시 웃으면서 계란 하나를 더 그렇게 하고... 나는 또 감탄.. 음... 그러다가 계란 후라이 다섯 개가 된 걸복 형도 나도 잠시 벙쪘다가 웃었었다. 남이 봣음 그대로 덤&더머였겠지만.

     그보다, 있는 반찬 그대로 내놓는거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요리는 뭐가 있을까나?

     "맛있겠죠?"

     ....그래, 나도 뻔뻔한거 알겠다. 그래도, 민망하잖아.

     "응."

     차라리 놀리지; 그렇게 쌈박하게 '응'이 뭐야.

     "사실은 나도 뭐 해보려고 했는데..."

     있는 나물 반찬넣고 고추장이랑 들기름 넣어서 비비는게 고작이었다. 그래도 아까 한 입 먹어보니까, 맛있더라... 물론 그건 내 실력이 아니라, 반찬하고 장이 맛있는 탓이겠지만...

     "맛있겠다."

     아직 잠에서 덜 깼는지, 가볍게 눈을 부비며 내가 차려둔(?) 상을 보며 베시시 웃는 모습에서 저도 모르게, 끌어안고 머리를 토닥이고 싶어지는 모성...아니 부성애가...

     "죄송해요, 별 실력이 없어서."

     "응, 아냐."

     ...앞 뒷말이 안맞잖아. 응이라는거야, 아니라는 거야?;

     "근데, 나 자는 동안 뭐 했어?"

     "심심함에 몸부림치다가, 어떻게하면 밥 맛있게 비빌까 고민했어요."

     "으음, 일찍 깨우지."

     너무 곤히 자던걸. 그걸 어떻게 깨워. 사실... 자는 얼굴 구경하는 재미도 아주 쏠쏠했고.

     "먹자."

     "아, 계란 먹다가 껍질 씹힐지도 몰라요."

     "으음, 기대할게."

     웃기는~

     "그런데 형 자는거 보니까, 정말 막내같던데요."

     "아?"

     "천진난만. 아아~ 이연우씨 얼굴에서 그런 표정이... 나 감동했어요."

     "놀리는..거지?"

     "어떻게 알았어요?"

     자리에 앉으면서 가볍게 농을 걸었더니 다시 빙긋.

     "형, 그런데 진짜 이렇게 잘 웃으면서 처음에는 왜 그렇게 낯을 가려요?"

     "응?"

     "무뚝뚝한 얼굴로, 삐죽이 뿔 하나 난 거 같은 그런..."

     "내가?"

     "형이."

     "음."

     "나, 그래서 처음에 형 무지무지 무뚝뚝하거나, 엄청 재미없는 사람일 줄 알았어요."

     하지만, 기대 이상이라는 말이 이토록 큰 차이를 보일 줄이야.

     "긴장해서 그랬던거겠지."

     "긴장?"

     "...그럼 간장이라고 했겠어?"

     "...설마 방금 개그에요?"

     "흐음, 맛있게 비볐다."

     진짜야? 긴장...간장.. 어우! 그거 언젯적 개그야! 그거 아무리 연우 형한테 반한 나라지만, 주춤하게 만드는거 알아요? 어디가서 그런 개그 하지말아요. 사람들이 왕따시킬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밥 먹고 갈거야?"

     "왜요? 가길 바래요?"

     사실 나 지금 문제있어. 평온을 가장하고있지만, 심장이 두두두~ 다다닷. 챙! 드럼 연주 한다니까. 눈이 마주칠 때마다, 손끝이 스칠 때마다 어찌나 화들짝화들짝 하는지 알아? 그거 티 안나게 하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정말, 전에는 어떻게 아무렇지도않게 만지고 눈 마주치고 했는지 스스로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을만큼.

     "아니, 벌써 7시인데, 나는 자고가라는 소리하려고."

     ...감사하긴하지만, 패스. 정말 나 그랬다가는, 심장폭파로 죽을지도 몰라요. 내일 아침 신문에 [K대 대학생 권모군(20)은 선배인 이모군(23)의 집에서 잠을 자다가 돌연 심장 과다폭주로...]하는 말이 뜨는거 사양하고 싶다구요.

     "그래도 가야죠. 게다가 7시에 무슨 '벌써'씩이나 붙여요."

     "밥 먹고 바로 갈거야?"

     나도 더 있고싶어요. 더 있고싶은데.. 상황이 여의치않네.

     "좀 더 있다가지."

     "으음."

     "밥 먹고 바로 가는거 그렇잖아. 아, 키위 있는데 키위 먹고 가. 키위 좋아하지?"

     그래요! 있습시다. 있어요. 심장이 설마 정말 뛰다가 터지겠어요? 심정적으로 불안하긴하지만.

     "알았어요. 대신 설거지는 형이 해요."

     "응."

     웃지 말라니까. 거 참 예쁘게 웃네. 사진 한 장만 달라고 할까? 아.. 이건 역시 이상하겠지. 형 동생 관계면서 사진 가지고 다닌다면.. 끄응. 하지만 역시나 자꾸자꾸 들여다보고 싶어지는걸.. 아! 그러고보니 내게는 문명의 이기! 핸드폰이.. 그것도 카메라와 동영상이 가능한.. 아아, 역시 비싼 돈 들여 좋은거 사길 잘했지. -대학 입학 선물로 받은거지만;-그래그래, 이따가 기회 봐서 몰래 녹화해야지. 남의 사생활... 어쩌고 하지만, 안걸리면 그만아냐!

     "음... 왜 기분나쁘게 웃어?"

     "기분...나쁘게..라니이~! 너무하잖아요."

     "...하지만, 정말 히죽...하고..."

     "......밥이나 먹어요."

     "음..."

     "뭐해요?"

     한참을 뒤를 돌아 꼼지락 꼼지락. 정확히는 손을 움직인다 싶었다. 그래도 보여주겠지 싶어서 키위 하나를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는데도 여전히 꾸물꾸물. 결국 궁금해서 살짝 고개를 내밀고 물어보자, 불쑥 주먹을 내 앞으로 내미는게....

     "때리게?"

     농담인데.... 그리 격렬히 고개를 저을 필요는...

     "학."

     딱 한마디하고 스윽 쥐고있던 주먹을 펼치는데.... 우와, 우와!! 작다. 보통 학 종이로 접는 학보다 한 반은 작은게... 설마 뒤돌아 앉아서 이걸 접고 있었어?

     "학 접었어요?!"

     "응."

     "작다."

     "응."

     우와, 우와. 그러니까, 지금... 이 크기의 차이를 보라고! 이 학! 과 형의 손! 손가락 한마디보다 작은 이 학을 저 커다란 손으로 꼼지락거리면서!! 푸! 어떻게 접은거야. 이거봐. 이거 학의 입 모양도 쏘옥 너무 예쁘게 잡아뒀잖아~ 흰종이 보이는 부분도 없이.

     "접어봐요, 다시."

     궁금해. 궁금해에~ 난 학 접을줄 모른단 말이지. 예전에 지훈이가 접는걸 잠깐 본적은 있지만... 아! 그때 지훈이도 상당히 고군분투했었다. 종이 좀 여러번 구기고, 학 양쪽 날개는 짝짝이이고. 그래놓고 놀리니까 '학 종이가 작아서 잘 안된단 말야! 손이 가야 접지.'라고 했는데... 지훈아, 앞으로 그런 소리 하지마라. 여기 연우 형 봐봐. 저 커다란 손을 해가지고 보통 학 종이보다 작은 걸 들고 이리 앙증스러운걸 만들어내지 않았겠냐?!

     내 말에, 다시 종이를 꺼내들어 뒤돌아앉는 연우 형.

     "보여줘야죠! 접는 거."

     뒤돌아 앉으면 무슨 소용.

     "...음... 안 할래."

     "치사하게! 좀 보여줘요."

     "...웃기다고 했는데."

     "........누가?"

     그야, 이 커다란 덩치로 학 접는 모습을 보면, 그냥 좀 웃음이 나올 것도 같지만...

     "........."

     왜 대답을 안해...? 아아~ 강수빈...

     "수빈..누나?"

     "뭐..."

     아, 역시 나는 찍기 천재. 하지만 맞혀놓고도 기분이 별로네. 형도 그런 거 같고. 그래 형이야, 내가 자기 여자 친구 넘본다는 생각에 그런 거겠지만... 생각해보니, 나 정말 불쌍하네. 좋아하는 사람 앞에 빤히 두고 그 사람 여자친구 좋아하는 척이나 해야하다니... 게다가 그 일로 좋아하는 사람한테, 불편한 감정까지 끼치면서...

     "수빈 누나 말이에요."

     "........"

     대답없이, 학을 접는 연우 형의 손. 음.. 의외로 섬세하게 움직이네. 하긴 과일도 잘 깎고 칼질도 잘하긴 하더만... 하지만, 그런 거랑 종이접기 같은건 좀 다르지 않은가?

     "애인 있어요?"

     .......멈췄다. 뭐라 그러나 두고 볼까? 여기서 있다고하면... 연우 형 본인이라고 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하나.

     "있...어."

     "누구?"

     괜히 심술이 피어올라버렸다. 여기서 묻지말고 그냥 평화로운 분위기를 유지해야해, 라고 마음 한구석에서 외치고 있긴하지만, 그걸 꾹꾹 밟으며 마구마구 가슴 안을 휘젓는건... 질투.

     "잘 몰라."

     "한번도 본 적 없어요?"

     ".........왜?"

     종이에서 눈을 떼고 날 쳐다보는 연우 형의 얼굴. 괜히 한 번 더 심장이 떨려서 최대한 웃어보이려고하는데 마음대로 안된다. 이게...

     "왜긴요. 남자가 여자한테 관심...보이면 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 거'라고 했지 '좋아해서'라고는 안 했다, 나.

     "...마음에 드니?"

     전혀.

     "괜찮잖아요."

     "........"

     "댓쉬하면 나한테도 기회가 올까?"

     "........"

     그렇게 인상 쓰지 마쇼. 나도 기분 더럽게 안 좋고 감정 무지 상했으니까. 형 속보다 까고보면 내 속이 더 까말거다, 진짜. 형은 내가 지금 이렇게 아래 쳐다보면서 살풋 보일락말락 인상쓰는 형보면서 어떤 기분인지 죽었다 깨놔도 모를걸. 알려줄 수도 없겠지만...

     "하긴, 그렇게 예쁜 여자가 나 같은걸 상대냐 하겠느냐만."

     "아냐."

     ".......뭐가?"

     "너 괜찮다."

     "괜찮아요? 뭐가?"

     "...다."

     ......지금 자기 여자친구 뺏겠다고하는 뉘앙스를 풍기는 사람한테 그렇게 진지한 얼굴로 자신감 심어줘서 뭐 어쩌겠다고. 게다가 너무 그렇게 진솔한 표정으로 '너 괜찮아'라니... 심장 떨리잖아!

     "그..래요? 그럼 한번 댓...쉬해볼까?"

     ".........."

     대답은 바로 안 하는군.

     그래도 연우 형 성격 좋은 편이지. 그래, 나 같았어봐. 애초에 애인없다고도 안했겠지만... 후배 놈이 내 애인 넘본다면 그걸 가만두겠냐. 뭐, 지금 상황이 좀 애매하긴 하지만...

     "형이, 도와줄거죠?"

     움찔. 지금 형 동요했다. 그만하자, 권지인. 여기서 더 찔러봤자 나올 것도 없으니까. 괜한 곳에 힘 쓰지 말자고. 

     "싫...으세요?"

     젠장, 멈춰라! 주둥이. 어쩌자고 지금 열심히 연우 혀여 옆구리 찌르면서 난리야. 더 미움 받고 싶어? 응?

     "남의... 애정사에..."

     "형하고 저하고 남이에요? 난 진짜 친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만해! 형 얼굴 굳었다.

     "...알았어, 그래."

     .........형, 사람 좋은 것도 정도가 있는 거에요. 정말.. 이건. 이럴 때는 따끔하게 한 마디 해야한다구요. '수빈이 내 애인이다'하고. 그렇게 자꾸, 나한테 말미를 주면 지금 이 삐딱한 상황에서 점점 이상해져버릴지 모르니까... 엉망이다, 정말.

     "고맙네요."

     ".....수빈이... 좋은 녀석이야."

     하아? 지금 그걸 말이라고... 혹시 형 요즘 그 여자랑 사이 안좋아요? 어쩔수 없이 만나고 있다든지? 진짜 그런거? 그래서 이 참에 나한테 맡겨서 떨궈내고 싶어한다거나...

     "형이야말로 좋은 사람이에요."

     "....아냐."

     "아니기는."

     "정말 아냐."

     "...형?"

     "지인아."

     "...네?"

     마주치는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상한 공기, 이상한 분위기. 그건 내 감정을 알아버려서인지.. 그게 아니라면 다른 무엇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슴 한쪽이 답답해져왔다.

     "아니다."

     한참만에 결국 시선을 돌리고 손 안에든 종이를 만지작만지작거리며 연우 형이 말했다. '아니다'라고. 견디기 힘든 침묵. 지금이라도 '수빈이라는 여자 일 없던걸로 할게요. 사실 형하고 연인 사이인거 알아요.'라고 한다면 이 어색한 분위기는 이 무거운 분위기는 사라지겠지만, 그래 난 있는대로 성격 꼬인 놈이다.

     나 못 먹는거 남 주기도 싫고, 억울하고 아깝고 그래서 곱게는 못 물러나겠다.

     "저 이제 갈게요."

     그래도... 그렇다고해도 연우 형이 저렇게 말없이 무거운 분위기를 고수하고있는건 또 보기 싫어서 가방을 챙겨들어 자리에서 일어서자, 따라일어서는게...

     "나오실 필요 없어요."

     "버스 정류장까지 바래다줄게."

     "여잡니까."

     그런건, 수빈인지하는 여자 오면 하라구요. 사람 속 쓰리게 하지말고. 아아... 정정. 그 여자한테도 하지 말아줬음하는게 솔직한 심정이지만.

     "내일 학교에서 봐요, 형."

     "그래."

     "형."

     "...응?"

     "....형은 좀 독하게 세상을 살 필요가 있어요."

     "뭐?"

     "저 가요..."

     "지인아??"

     조금쯤 형과 둘이 있느라고 살짝 들떴던 기분이..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고 아래층으로 내려올수록 같이 떨어져갔다.

     지금 알게된 감정이 너무 깊어서, 너무 소중하고 좋아서 손안에서 놓고싶지않다. 그리고.. 가질 수 없는거라면 깨버리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전부.

    ***

     "뭘 그렇게 열심히 봐?"

    헉!

     "아? 왔음 인기척을 내야지!"

     "뭔 헛소리야? 동방 문 닫고 얼마나 바스락거렸는데. 지가 핸드폰에 정신 팔려있었음서."

     "..음.."

     "뭐 보는 거 같던데?"

     "아무 것도 아냐."

     "진지한 표정 지었다가 실실 웃었다.. 정신 나간 줄 알았다?"

     그랬..냐?

     "뭘 그렇게 봤어? 좋은 거면 같이 보자."

     네가 봐 봤자 좋을 건 하나도 없을텐데?...연우 형.. 그것도 뒷모습만 잔뜩 잡힌 동영상이니까...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닌데 뭘 그리 숨기려고 들어?"

     "내가 언제?"

     "...흐으으음. 그렇게 숨길껴?"

     "됐어~"

     급히 핸드폰을 사수하며 뒤로 숨겼건만, 끈질기게 뻗어오는 손.

     "보자!! 좀 보면 어때?"

     "싫다니까! 야야, 떨어져. 안 떨어져?"

     "새끼! 졸라 치사스럽게구나!"

     "졸라 치사고 열라 치사고. 뭘 그렇게 보려고해!"

     "숨기니까 보고싶잖아!"

     ...젠장, 이놈의 C.C.C.C 인간들은 하나같이 제대로 된 사람이 없다. 선배들이야, 그렇다쳐도, 같은 07인 이 녀석까지. 끈질기기로 치자면 살모사 새끼 저리가라고, 독하기로 하면 거의 짱먹고, 철판 깐 걸로 하면 특수 제작 합금판이다, 아주.

     "보려고하니까 더 보여주기 싫다!"

     게다가, 보여줬다가 무슨 소리 들으려고! 정말이지 어제 변태처럼 말야, 핸드폰 들고 각도 맞춰가며 연우 형 설거지하는 뒷모습 잡으면서...-잠깐 돌아보기도 했고- 얼마나 흐뭇하게 웃었는지... 아 이쯤이면 정말 중증이지. 쩝.

     "독한 놈."

     "니가 할 소리냐!"

     "권지인 넌."

     "내가 뭘?"

     "뭐긴 뭐냐, 넌 뭐 안 독하냐?"

     "댁들보다 덜 하네~"

     "댁들?"

     "C.C.C.C 여기 인간들."

     "이게 또 간밤에 맛이 갔나? 넌 C.C.C.C 아니냐?"

     주섬주섬 냉장고 안에서 가영 누나가 숨겨둔 얼린 요구르트를 재주좋게 찾아내서 껍질을 뜯는 녀석을 보고 피식 웃음을 날려줬다. 경우가 다르잖는가, 경우가! 현식이 저 놈이야, 지가 좋아서 자발적으로 여기 들어온거고, 나는 그 뭣이냐, 운명의 장난으로 이리된거고. 갖다 붙일 걸 붙여야지.

     "너랑 나랑은 다르지이~"

     "다른 거 좋아하고 앉았네."

     "생각해봐! 내가 노트북만 아니며언!"

     "...논다, 놀아. 그건 핑계에 지나지 않는거 안다. 너 싫다싫다하는거 치고 무섭게 적응하고 있는거 알지?"

     ".......야."

     "진짜 싫은 놈이라면, 벌써 노가다판 가서 돈 모아 노트북 값 갚고 여기서 나갔다. 동방도 제 집 안방마냥 들락날락하는게 말은~"

     "...그거언.."

     "그건 또 뭐?"

     얄밉게도 얼은 요구르트를 갉아먹으며 눈을 가늘게 뜨고 '변명할 거 있음 해봐라~'라는 식으로 쳐다보는 녀석.

     그래... 사실 막말로 여기 'C.C.C.C'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 사람들도 재미있고... 물론 가끔 엄청 깨서 그렇지, 노는 걸로만 치면 이곳 사람들보다 웃긴 인간들 없다고 내 장담한다, 아주. 게다가 이 동방은 거의 보물창고같은 곳이라서 말 그대로 없는 게 없다. 지난 시험 족보부터, 냉장고에 쇼파-잠잘 곳-, 휴대용 버너, 냄비... 뒤지면 쏠쏠히 나오는 먹을거에... 비상금. 더하면 구급약품까지. 자연히 여기와서 뒹구는 시간이 많아지고... 그러다보니 익숙해져가고 있는 거다.

     "관두자. 너랑 뭔 말을 하겠냐."

     "야, 너 그보다 그것 어떻게 됐냐?"

     "뭘?"

     "이연우 강수빈. 커플."

     ...얘까지 왜 또 그 이야기야.

     "사실, 지금 우리 동방이 그 이야기로 한참 꽃 아니냐."

     "왜, 돈이라도 걸지?"

     "엇? 어떻게 알았어?"

     뭐?! 진짜 걸었어?

     "뭐야? 걸었어?!!!"

     "...............아아니이~"

     "...죽을래? 불어!"

     "야야, 도끼눈 뜨기는. 그래, 심심해서 좀 걸었다. 판돈도 별로 안돼."

     ...이 사기에 야바위꾼 집단 같으니. 나중에는 단체로 자해 공갈당 결성하는거 아닌가 몰라!

     "얼마야?"

     "한 장."

     "만원?"

     "쫀쫀하게! 십만원!"

     "뭐엇!!! 진짜 그건 도박 수준이잖아!"

     "그러니까, 건투를 빈다!"

     진짜 진지한 얼굴을 보이며 내 어깨까지 툭툭 두드려오는 게...

     "넌 어디다 걸었는데..."

     "내가 친구를 또 믿잖아~!"

     "....으으음."

     "당연히 실패한다에 걸었지!"

     "....야!"

     이게 진짜!

     "낄낄, 열심히해, 열심히. 내 잠깐 본 바로도 그렇고, 선배들한테 들어보니까, 이연우인지 그 사람 졸라 잘났다며. 좀 힘들긴 하겠다만, 너랑 친분 있담서. 뒤통수를 후려쳐. 아, 혹시 사이 좋냐? 그럼 좀 그렇긴 하겠다만."

     .......사이좋은거고 아니고를 떠나서, 지금 목하 짝사랑 중이시다. 그분께... 이 권지인이가.

     "거기에 그 강수빈이란 여자 이쁘다며? 난 전에 멀리서 한번 봐서... 얼굴은 기억 잘 안나고 몸매는 죽이던데. 쭉쭉빵빵. 허리 가늘고, 가슴 촤악. 어깨 좁고."

     "너, 여자 볼 때 얼굴보다 몸매?"

     "음? 응. 못생긴건 참아도 몸매 나쁜건 절대 안돼. 어찌 아셨수?"

     씨뎅, 멀리서 한 번봐서 얼굴 모른다면서 몸매는 꿰고 있음 빤하지.

     "야, 그래도 몸이야 살을 빼거나 찌우면 그만이지만, 얼굴은 돈이 들잖아. 게다가 얼굴에 손 절대 안돼! 파여봐..."

     "얘가 또 뭘 모르네. 너 사람 몸매 이쁜게 무슨 날씬하고 아니고의 문제인줄 아냐?"

     "...그럼?"

     "이 형님이 또 한참 인체에 빠져있지 않았겠냐? 이 형님은 옷으로 아무리 커버를 하셔도 딱 보면 투시가 되셔요."

     자알났다, 변태새끼;

     "아아, 쟤는 다리가 짧구나. 오호 저쪽은 허리가 통짜네. 아~! 엉덩이가 처지셨군, 하고. 모조리 잡아내지."

     "하아?"

     "한때 이걸 조절 못했을때 말이다. 옷 입은 여자를 봐도 벌떡벌떡 서고는 했다는거 아니겠어?"

     "....허어?"

     "너 사람 몸이 어때야 잘 빠졌다고 하는지 알아?"

     "뭐가?"

     "키가 크고 아니고, 이런걸 떠나서 말이지, 황금 비율 말야. 흔히들 비너스 몸매라고 하는거."

     "그거 어차피 취향 아냐?"

     "그래도 통상적인게 있잖냐. 38-26-38, 얼굴의 비가, 몸으로 재서 1:8."

     "흐으음?"

     "그런데 여기서도 변수가 있어요."

     "변수?"

     "초짜는 말이다. 옷 입은 것만 봐서, 아아, 얼굴로 봐서 몸이 8등신! 하는데 간혹 벗기고 보면, 다리가 허리에 비해 무지하게 짧은 경우가 있걸랑."

     "푸흡."

     "그걸 교묘하게 옷으로 가리고 다녀서 엄한 남자애들 눈에서 눈물을 빼는 거지."

     여하튼간 별걸 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 울 학교 퀸카는 아니더라 이 말씀."

     "하아?"

     "딱이야. 자고로 가슴 큰 여자를 좋아한다고 하는데, 물론 없는 거보다야 있는게 낫겠지. 그래도, 생각을 해봐라. 너무 큰 것도 문제걸랑."

     "뭘 말하고 싶은 거냐?"

     "따악 손에 잡았을 때에... 손 안에서 조금 넘칠 거 같은....."

     "......그거 손에 따라 다르지 않아?"

     ...연우 형 손 크단 말.....아아아아악!! 지금 제기 내가 뭔 상상을 한 거냐!!

     "쓸데없는 소리 마!"

     "왜 성질이야?! 말 나온 김에, 남자로서 이상적인 몸매는.. 음 그래, 제규형 몸이나 이연우? 그 사람 몸매."

     아, 역시...? 옷 입으면 태가 잘 난다고 생각했는데, 몸매가 좋았던거야. 확실히. 게다가 연우 형, 자세도 바르고.

     "제규 형은 뭐랄까 몸매는 좋은데, 얼굴이...흐흐흐. 그래도 그 몸매면 그 정도는 커버가 될 걸?"

     "승호 형은? 승호 형도 몸 좋잖아."

     "야야~ 몸 좋은 거랑 몸매가 좋은 거랑 같냐? 승호 형은 뭐랄까, 진짜 근육맨이고. 여자가 좋아할 타입은 아니지. 남자 놈들이 오오옷 할지는 몰라도. 아아, 이연우 그 사람도 말야, 벗겨놓으면 훨 몸 좋을걸."

     "으으음?"

     "키도 상당하고. 아, 그 인간은 다리도 길대? 어깨선부터 엉덩이까지, 후우. 부럽더라."

     ".....너, 뭘 보고 다니는 거냐?!"

     그래, 동영상에도 담겨 있지만, 우리 연우 형 몸매 좋지; 움직임도 깨끗하고 시원시원한게.. 그치만, 그렇다고해서 너처럼 변태 눈에 샅샅이 훑음을 당하고 싶겠냐!

     "몸매♡"

     관두자. 이놈하고 무슨 소리를 더 하리.

     "남 몸매 관찰하기 전에 니 몸이나 신경 써라. 요즘 야식 꼬박꼬박 챙기냐? 배 나왔다."

     꾸욱 손으로 쫄티 밖으로 살짝 튀어나온 배를-그래봤짜 남들에 비하면 날씬한 거지만- 눌러주자, 움찔 굳어서 머리를 쥐어뜯는 녀석.

     "그러지마. 안그래도 스트레스 열라 받으셨어. 야!~ 그래도 낄낄, 그 바람에 좋은 일 하나 있었다?"

     배 나와서 좋은 일? 누가 뱃살과 인덕은 비례하는 거라는 시대착오적 발언이라도 하면서 칭찬하디?

    짝짝짝

     뭐야? 박수는 왜 쳐?

     "당첨 축하해, 권찐~"

     뭐야? 뭔데 이래. 똑바로 말해.

     "다음주 월요일부터 4일간 있으실 우리 학교 축제 동아리 파전 가게에서 당당히 미스가 될 것을 위임 받으셨어~ 당신이."

     찡긋 윙크까지 해오며, 느긋하게 내 옆에 앉는 현식이를 쳐다보다 살짝 귀를 후볐다. 방금 뭐가 어떻다는 소리를 잠시 들은 것도 같은데 말이지...

     "뭐라?"

     "당신이 여장할 기회를 다시 한번 임명 받으셨다고."

     "하아아?"

     "막판에 선배들이, 열라리 고민했다는거 아니겠어? 나와 너를 두고. 이거 시키면 지인이 놈 성질 낸다고 끝까지 보류보류 했는데, 아 글쎄! 내가 살이 찌시지 않았겠냐? 그래서 빌리기로한 여자 옷이 안 맞아요."

     "그래서어?"

     "당신이 하시게 되었다구웅. 진희 형이 아직 말 안 하디?"

     ...이런!!! 젠장에 된장 넣고 쌈장까지 바를 일이!

     "왜 내가 해야해!!"

     "그렇다고 승호 형을 시키겠냐. 니가 낫지. 게다가 너 경력자라며."

     뭐가 어쩌고 저째?

     "고등학교 때 너어~"

     "한마디만 더 하면 니 입에 자물쇠 달고 한강에 넣고서 태평양까지 흘려보낸다!"

     "..........새끼 성질은."

     씹탱 니가 내 입장 돼 봐! 승질이 나나 안 나나! 며칠동안 동방에 안 들린 사이에 그래, 내 의견은 쏠랑 무시하고 멋대로 이런 일을!! 아아 혈압 올라!!

     "아, 나 수업 있어서 들어간다. 참고로, 네가 입을 옷 미니 드레스더라? 야아~ 기대된다!"

     "죽을래! 새꺄!"

     "오홍홍, 찐씨이~ 확실하게 보여줘요~ 당신의 각선미를 우! 내 투시에도 너 몸 이쁘다~ 으하하, 허리 28 안 넘지?"

     저...저게!!

     "기대하마!!!"

     "야앗~!!!!!!!"

     재빠르게 책 집어던지기 전 문을 닫고 나가버리는 현식이의 뒷모습을 보다가 숨이 차 올라, 씩씩거리기를 몇 분. 도저히 가라앉혀지지않는 열기에 팔락팔락 손 부채질을 하다가 들여다본 건 핸드폰. 정말이지..끄응. 동영상이나 보자. 휴우, 음음, 형이 돌아본다.

     아아.~

     -뭘 그렇게 열심히 해?

     ...목소리도 잘 녹음되었고...

     -아, 문...자요.-

     권지인 목소리 떨렸다. 쪽팔리게; 그나저나 정말 이거 효과 좋잖아. 앞으로 흥분할 때마다 안정을 시키던지 해야지... 원. 그나저나, 나 정말 드레스 입어야 하는 거야?!

    ***

     "어머~ 지인아."

     ...낯설은 목소리. 그렇지만, 분명히 어디서 들어본 듯한. 휙 뒤를 돌아보자, 화사하게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드는건 강.수.빈.

     "아...아... 수빈... 누나."

     차암, 변죽도 좋다. 만난지 얼마나 됬다고 벌써부터 지인아~ 지인아~ 누가 들으면 동네 개 이름인 줄 알겠네.

     "여기서 뭐해?"

     여름용 끈 나시와 하얀색 치마, 그리고 까만 샌들에 포인트를 준 흰색 꽃무늬. 시원하면서도 천박스러워보이지 않은 옷차림. 거기에 드러난 팔뚝이나 다리 발가락까지... 예쁘다. 그래, 현식이 놈 말처럼 잘 빠진 몸매다. 가슴도 너무 작지도 크지도 않은게 속옷 모델들 가슴 같은게...

     "더워서..."

     손 안에 든 키위 주스는 폼이냐? 뭘 하기는 뭘 해. 보면 빤히 아는 거.

     "아아~ 오늘 좀 덥지?"

     "네, 좀 덥네요."

     아~ 의지 반비율적인 표정이여. 안면 근육이란 건 역시 감정과 상관없이 조절 가능한 거였어. 암, 그렇고말고.

     "내일 모레부터 축젠데 지인이 네는 뭐해?"

     조옷같은 여장, 파전 가게.

     "그냥...저냥. 이것저것."

     "응? 그게 뭔데?"

     "에.. 에헤, 뭐."

     참, 나 지금 연우 만나러 갈건데. 시간있음 같이 갈래?"

     뭐?! 연우 형? 오늘 점심에 약속 있다더니 이 여자랑 있는 약속이었어? 우와, 정말 나 이거 배신감 느껴. 어쩐지 말을 얼버부리더라니. 정말 이래도 돼?!

     "괜...찮겠어요?"

     "응? 아아~ 내가 일방적으로 연우 귀찮게 하는 거거든. 너 있음 짜증 덜 낼거 아냐."

     웃기네, 일방적이긴. 일방적으로 귀찮음 당하는 사람이, 그래 다른 사람이 행여 알까 쉬쉬하면서 사람 만나냐? 젠장 기분 더럽네, 정말.

     "그래도... 됐어요."

     그래, 가서 무슨 눈초리를 받으려고. 나 쫓아오는거 싫어서 말도 안하고 피한 사람인데...

     "왜에~ 점심 먹을 건데, 아직이지?"

     "에? 네에."

     "같이 가자. 게다가 너 있으면 연우 무지 착해지거든?"

     ....으음?

     "연우 형 원래 착하잖아요?"

     암, 자기 여자친구 넘보는 놈한테 잘해보라고 할 만큼. 아, 이건 착하다기보다는 거의 바보에 가깝지만... 나는 또 그런게 좋단 말이지. 그런 점까지. 정말... 나 푹 빠져있구나.

     "에엣? 뭔 그런 썰렁한 농담을 해?"

     한껏 눈썹을 모으고 얼굴을 찌푸리며 손을 휘휘 젓는 강수빈. 뭐야? 이 격렬한 반발은...

     "형, 굉장히 이해심 많고..."

     "이해시임? 푸하! 뭐야, 그 녀석 네 앞에서 그랬단 말야?"

     "그래에~ 좋아하는 동생 앞이라서 그랬단 말이지. 이거 차이가 너무 하잖아."

     "차이가 너무?"

     "권지인 군, 생각해봐. 물론 잘 보이고 싶은 상대와 이도저도 아무 상관없어, 하는 인물이 있따지만, 정도가 너무 심하면 주위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고 생각 안해?"

     "에?"

     그러니까, 이 여자가 지금 뭐라는거냐.

     "오늘 약속은 장렬하게 바람을 맞추겠다!"

     "에엣?"

     "너 지금부터 시간 있어?"

     "네??"

     "나 무지하게 궁금해졌다?"

     "뭐..가요?"

     "대체 권지인이 알고있는 이연우란 누구인가!"

     "..으으으음?"

     "이거 제대로 알아가면, 아주 두고두고 재미있겠다. 하긴 내가 알았다고 반응이나 보일 상대면 귀엽겠지만."

     저기, 이봐요 강수빈 씨? 강수빈 양? 강수빈...니임?

     "시간 있어, 없어."

     "그러니까 두어 시간쯤이라면..."

     "좋았어, 결정. 가자!!"

     아니, 이봐요~ 이보쇼오! 자고로 학교 퀸이라고 할라치면, 얼굴 뿐만 아니라 여왕님에 걸맞은 다른 이를 향한 배려나아~ 으아아악, 끌지마앗!!!

     "그래서?"

     "그게 다에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뭐가요?"

     "왜 이연우가 학교를 세정거장이나 지나쳤을까?"

     마치, 셜록 홈즈쯤 된 포즈로 테이블 위에 가늘고 흰 팔을 내려놓더니 이내 타악 그 위를 두드리는 손길.

     "역시 그 이유지."

     ...혼자 말하지 말고 설명을 좀 하는 건 어떨런지?

     "너 때문이지 뭐."

     "뭐가요."

     내가, 연우 형 세 정거장 지나쳧라~ 지나쳐라~ 고사라도 빌었답니까?

     "으음! 위태위태하게 자고 있었으니까. 그거 바쳐줄려고한 거 아냐~"

     그럴 바에야 차라리 깨우지.

     "게다가 깨우기에는 왜인지 몰라도 너무 곤하게 자고있었다~ 하는 단서가 붙으면 말이지."

     거 앞에 놓인 아이스티 좀 마시고 진정하죠? 스스로 이야기라 차암 민망스럽게 그지없지만, 장담하건데 그 날 내 포즈는 '곤하게 자다~'쯤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고 봅니다.

     "그래그래, 그랬던거야. 그런데 진짜 놀랍다."

     "뭐가요?"

     "천하의 이연우가 말야.. 그 안하무인에 자기 고집대로고 성격 더어러운."

     "...누나."

     그러니까, 말이지. '이연우'란 누구인가, 라는 문제를 두고 날 억지로 끌고오다시피해서 까페에 앉은거까지는 좋다. 그런데 강수빈, 이 여자 아무리 견해의 차요 시각의 차라지만, 좀 심하다싶을 정도로 내가 생각하는 '연우' 형을 반박하는데... 정말 '애인 맞아요?'하는 소리가 목구멍을 치고 올라올 정돈거다.

     "그런 얼굴 하덜마. 나는 그 놈이 니 앞에서 그런 깜찍스럽다 못해 끔찍스러운 연기를 했다는 거 자체가 신기할 따름이다."

     "...연우 형을 그렇게 깎는 이유가 뭔지 참..."

     "깎다니, 깎다니~ 얘 좀 봐? 나 증인도 될 수있다?"

     여기 산 증인 있습니다. 연우 형이 나한테 얼마나 잘 해줬는지는 나도 안다. 밖에 나가서 뭘 할때고, 사람을 대할 때 하는 행동들을 봐도, 얼마나 남을 배려하는 사람인지 다정다감하고 그래.. 덩치에 안 맞게 애교가 있는지.. 다 봐 온 난데... 지금 하는 말들이 얼마나 가소로운지.. 그러니까, 강수빈 씨. 대체 왜 그러는거야?

     "우와, 이 불신의 눈빛."

     "불신의 눈빛."

     "너 안 믿고 있잖아?"

     "누가 완전히 안 믿는데요?"

     그냥 반반해서 좀 부풀려서 말한다 싶은 거지.

     "너, 이연우가 어떤 인간인줄 알아? 응? 고등학교 때 수업 받다가 화학 선생이 뭐 하나 잘못 설명하니까, 그 예의 무뚝뚝한 얼굴로 '화학 기호가 틀리셨습니다' 라고 말해서 완전히 찍혔다. 뿐이냐? 더 대박은 시상식 때. 그때 전교생이 다 모인 운동장 교단에 올라가서, '교장 선생님 가발 삐뚤어지셨습니다'라고 했잖아. 그때 애들 미친듯이 뒤집어지고..."

     아! 혹시 그 유명한 '가발 사건'이 연우 형이 만든 거야? 에에에? 설마! 그거 진짜일까 했던 일인데. 우와우와.

     "너... 지금 이 상황에서 감탄했다는 표정이 나오면 어떻게 해?"

     "그럼요?"

     "됐다, 관두자."

     삐진 듯 새침한 표정으로 아이스 티가 담긴 잔을 앞으로 끌어당겨 쪼르륵 쪼르륵 마시는 폼이... 확실히, 그래 이쁘기는 하다. 어느모로 보나 객관적인 사실로만 따지자면.

     이지적으로 보이는 눈이나, 조그마한 입술. 연우 형이 좋아할 만한.. 그런데, 이 사람 애인 주제에 정말 왜 이리 형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일까? 가만... 가마안~ 그러고보니까 말야 정말로 연우 형이 '잘해봐라'-이리 직접적으로 까진 말 안 했지만-라는 뉘앙스의 말을 팍팍 풍겼던건, 이제 둘 사이가 소원해졌기 때문? 그런 이중적으로 내게 복 날라들어오는 일이 생긴겨?

     "저기...누나..."

     "앙?"

     "그럼 이제 내가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며 슬쩍 찔러보자 살짝 얼굴을 찡그려 보이는게... 

     "뭔데? 그렇게 조심스레 물어? 아 신체 사이즈 공개는 거부야."

     뭐얼~ 그 정도 몸매면 자랑스레 밝혀도 되겠구만. 아... 이게 아니지.

     "누나, 요즘 연우 형하고 사이 안 좋아요?"

     "으으으음?"

     "그러니까, 뭐.. 사이가 멀어졌다...거나."

     응? 그런거야? 그런거면 속 시원히 말해보라고. 이러다가 나 궁금해서 배낭 매고 남극 달릴지도 몰라~

     "에?"

     "음?"

     "무슨 소리야? 그게."

     "누나가 지금 말하는거나..에 또오..."

     "아아아아~! 지금. 깔깔깔, 원래 이래. 우리."

     ...뭐야? 그럼 지금 자랑한거였어? 우리는 이렇게 허물없이 말 주고받는 사이에요~ 하고?

    벌컥벌컥

     "야~ 안 셔??"

    아득아득

     "이 상한다. 얼음을 뭘 그렇게 씹어? 내 거 더 줄까?"

     내가 미쳤다고 여기에 끌려와서 그딴 소리나 듣고 있었지.

     뭐야, 그러니까 요는 '네가 알고있는 연우보다 내가 알고있는 연우가 더 다양해~' 라는 거야? 진짜 사람 속 염장지르네. 강수빈 양 이거 모르고 한거면, 진짜 당신 악의없이 사람 찌를 타입이고, 알고한거면 원산폭격하고 군화 입에 물어야할 정도로 중죄야!

     "근데, 정말 신기하다."

     "뭐가요."

     불퉁불퉁. 아, 말이 곱게 안나가네. 이러니저러니해도 꼬셔야할 상대건만, 이렇게 이미지 팍팍 깎아놓으면 내 손핸데... 이성보다 감성이 앞지른다. 역시 인간은 어쩔 수 없는 동물.

     "이연우가 너 같은 사람 만났다는거."

     무슨 뜻이야, 그게? 연우 형 같은 사람한테 나라는 놈은 안 맞는다는 거야? 아니, 물론 연우 형 잘났지. 학교 킹카라는 소리는 괜히 듣겠어? 인물 안 빠져 머리 안빠져, 매너 좋아, 거기에 집도 꽤 잘 살아... 어디로보나 괜찮은 남자지만, 나도 어디 내놔서 빠진다는 소리 안 듣는다니까? 다름대로 샤프한 얼굴에, 가끔 신경질적으로 보인다는 소리도 들었지만, 그것보다는 말 한 두마디 하고 나면 곧 '오오옷~ 성격 마음에 드는데?' 하고서 사람 붙는 성격 미남이기도 하고! 솔직히 이만한 대학 들어올 정도면 공부도 꽤 했는데? 

     물론 연우 형처럼 과톱을 안 놓치고 사는 괴물은 아니지만서도. 뿐만이야? 나도 마음먹고 덤빈 여자한테는 기똥차게 매너 지킨다고!

     "아라라- 표정이 왜그래?"

     "나 그렇게 형편 없어요?"

     "에엣? 이건 또 무슨 소리."

     신기하다며?! 연우 형이 나 같은 놈 만난게.

     "푸하, 오해를 해도 어떻게 그런 오해를 해?"

     "....오해?"

     "지인아, 너 여자의 눈으로 봐도 일대일 사람 대 사람으로 봐도 괜찮은 타입이야. 여잔말야, 예민해서 그런게 있어. 딱 보면 아~ 이 사람 어떻다 하는 거."

     "전 어떤데요?"

     "너? 너야 느낌 좋지. 사람은 말이다, 첫인상이 진짜 중요하거든. 필이란게 따악 오는. 그 첫인상이 그대로 가는 사람 참 많아. 네가 그런 타입 같아."

     음? 지금 꼬시는 거? 이거 작업들어온 거지? 아무래도 요상해. 정말 연우 형하고 아무 문제도 없었어?

     "고맙네요."

     "연우도 그대로잖아, 좀."

     "....좀?"

     아니, 그보다 뭐가 그대로? 첫인상이? 웩, 아닌데? 진짜 많이 변했는데. 난 사기당했다고까지 생각했는데!

     "무뚝뚝하고, 말 좀 살벌하게하고, 마이페이스에... 따악 막내근성 그대로야."

     "어디가!"

     "...관두자. 너랑은 절대 이연우에 관한 타협점을 찾을 수 없을 거 같으니까. 그리고 말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아까 신기하다고 한 건 그렇게 지만 알고사는 이연우가 이렇게 살살거리면서까지,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을 만나니, 신기하네! 라는 말이었고."

     아니, 생각해봐요. 나 잘 때까지 토닥토닥 챙겨주고 이불 끌어올리고 꿀물 타다주고 하는 게, 단순히 연기만으로 가능하다고 봐요? 자기만 안다는 사람이 내가 슬슬 피하는거 알면서도 4일 내내 상황 기다려주는게 가능하겠냐고. 게다가, 왜 그때!! 그래그래 그때에!

     "누나가 동방와서 밥 같이 먹으러 가자고 했을 때도 순순히 따라갔잖아요."

     "하아? 너 그 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몰라서 그렇지. 얼마나 쪼아댔는지 알아? 나 밥먹다가 얹히는 줄 알았다? 게다가 그 놈이 대뜸 나랑 같이 나와서 제일 먼저 나한테 한 말이 뭔지 알아?"

     모르지, 당연히.

     "뭔데요?"

     "관두자, 불쌍한 어린 양. 여하튼간 난 이연우가 너한테 한 행동들이 모조리 웃겨 죽겠으니까. 아아, 유쾌상쾌통쾌다 아주."

     "...하실 말씀 다 끝난 거에요?"

     "왜? 바빠?"

     바쁘다기 보다는, 아직 감정정리가 덜되서 맘먹고 덤벼서 꼬시기가 좀 그러네...

     "바빠도 좀만 기다려. 니가 그리 좋아하는 연우 오니까."

     ...두근... 그리 좋아하는 일나ㅣ. 웃, 정말. 말을 골라도.

     "언제 연락했어요?"

     "응. 아까 화장실 가면서."

     "에헤."

     "성질이던데?"

     ...아...? 아아아! 그러고보니 그렇잖아! 애인이 자기 바람맞추고 친한 동생 놈이랑 있다는데 성질이 안 나면 그게 사람이야?!

     "나랑 같이 있다니까, 아주 쏟살같이 전화 탁 끊어버리더라? 아주."

     ...헉!! 화났나. 아, 정말이지. 그래 아무리 어제 말을 그리했다 하더라도, 감정적으로 보면 그게 아니지. 으으으, 아, 젠장. 어차피 앞으로 부딪쳐야할 상황 예제같은거라고 치고 한번 겪어볼까? 하지만, 화난 연우 형은 별로 보고싶지않은걸.

     "좋겠어, 이쁨받으시고."

     그럼 뭐해. 동생으로 이뻐하는거. 게다가, 지금 이 상황에서 이쁨 받는다는 소리가 가당키나해? 오히려 그쪽을-강수빈을- 절절히 좋아한다, 라는 느낌이지. 

     "뭐야? 왜 심술난 표정이야?"

     "아녜요."

     "아니긴. 뭔가 이거 상당히 나 불만있어요, 하는 얼굴인데?"

     그래서? 내 불만 말소 시켜줄 묘책이라도 있어? 하긴 사실을 알고나면 묘책은 커녕 뒤로 넘어가는거 붙잡아야할지도 모르니까.

     "아~ 저기 온다. 야, 급히도 들어오네."

     어? 어디... 아, 진짜. 아아? 형 정말 너무 급하게... 아, 음. 눈 마주쳤다. 우! 이거 확실히 노려본다... 쯤이지? 내가 꼬신 거 아닌데. 누나가 멋대로 끌고 온 건데...

     "여어, 빨리 왔네. 거기서 시간 좀 걸릴텐데?"

     "......."

     "형, 뭐 마실래요? 더워보이는..."

     "뭐야."

     ....움질. 다짜고짜 앉지도 않고서 내뱉은 말이 '뭐야'라니... 그것도 내가 아닌, 강수빈을 쳐다보며.

     "멋대로 약속 잡더니 또 멋대로 취소하고 너 지금...."

     "지인이 있다."

     에에? 나?! 나 있으면 안되는 자리인거야? 그...그런가?

     "......너......."

     아, 형 말 멈췄다. 역시 나 있으면 안되는거야? 그런건가. 내가 눈치없이 끼어앉아있덨다거나.

     "앉아. 서있지말고. 올려다보려니까 목아프네."

     "......."

    털썩

     자연스레, 수빈 누나 옆에 앉는구나. 정말 뭔가 너무 당연하다는 듯.

     "뭐 마실래?"

     "됐어."

     어딘지 형 답지않게 불퉁한 음성이라, 괜히 긴장해버렸다. 확실히 기분 나쁘다는게 명확히 드러나는 음성. 정말정말, 오늘은 수빈 누나 꼬시려고 한 거 아닌데... 앞으로야 그럴 계획이 있지만, 오늘은 억울해... 아니, 그런데 앞으로도 내가 수빈 누나 꼬실 때마다, 연우 형 저런 눈빛을 받아야한다는 거야? 그런건가. 아, 이건 좀... 심장이 따끔따끔하고 감정히 격해지는게.... 곤란할지도.

     "지인아...."

     "아? 네넷?;"

     "뭘... 그렇게 긴장해?"

     아, 그러니까 상상해버렸다. 마구마구 나에게 화를 내는 연우 형을... 뭔가, 지금 느낀건데, 나 여지껏 연우 형이 내게 너무 잘해줬으니 안이하게 생각한 걸지도 모른다. 왜, 내가 수빈 누나와 형의 사이를 갈라놓았을 때... 의 경우. 그냥 형과 인연이 끊긴다, 정도로 생각했는데.... 물론 미움 받을지도 모른다.. 쯤은 각오했고. 그런데 막상 제대로 상상하고 나니까, 뭔가 참을 수 없을 만큼 서글퍼졌다. 내게 화내고 따지고, 욕을 하는... 까지 상상하다가, 왈칵 눈물이 솟아서 목이 막혀 올 만큼.

     "지인아?"

     재차 부르는 다정한 음성.

     "예..."

     "왜 그래?"

     "네?"

     "너... 수빈이한테 뭔가 들은거야?!"

     "에...?"

     "강수빈! 너."

     연우 형 소리 높였다. 따지듯 눈 꼬리가 올라가면서 휙 수빈 누나를 돌아보는게...

     "내가 뭘? 난 사실대로 말한 죄 밖에 없어. 너 성격 드으럽다고. 그쯤은 너의 사랑하는 동생도 알아야한다고 보지않아?"

     "누가 너한테 그런 쓸데없는 참견 하랬냐."

     "형?"

     뭔가, 평사시와는 달리, 신랄한 어조로 뱉어내는 말투. 움찔해서 조심스레 연우 형을 부르자, 돌아보는 눈빛이 '아차'하는 듯 싶더니, 금세 얼굴이 부드럽게 변한다.

     "지인아,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러니까, 아니야. 그런 게."

     응? 그야.. 당연히 믿지않지. 수빈 누나가 한 말을 믿을 리가 없잖아. 제멋대로에 안하무인 이연우라니. 정말 언발란스구만.

     "아...네."

     "정말...인데. 그러니까, 혹시 오해해서 지금..."

     아? 아아... 내 태도. 수빈 누나 말 듣고 그런가보다 하는 구나. 그게 아닌데...

     "알아요."

     "응?"

     "형이 이기적인데다가, 마이웨이라니 농담이 심하다고 생각했죠."

     "....뭐야...그런 말 했어?"

     "했다, 했어~ 권지인. 그거 진짜라니까."

     "....그렇지 않아요."

     "이야, 아주 눈물이 나서 박수라도 쳐주고 싶네. 이 무한한 믿음이라니. 너 진짜 연기 잘했구나?"

     약간 비아냥거리는 듯한 음성.

     "연기 아냐."

     "흐으음."

     "그보다, 둘이서 무슨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던 거야?"

     에...음. 이연우의 실체와 본질...이랄까?

     "별 말 안했어요. 그냥저냥. 이런저런."

     "네놈이 친 사기 행각에 대해서 쫘르르륵 읊었지. 내가 어느정도 예상은 했지만, 아주우 독하더라, 이연우?"

     "누나, 중상모략은 듣지 않는다니까요."

     "모랴악? 니가 모략이라고 했냐? 여지껏 내가 한 말을 뭘로 들었다니? 야야~ 이연우 너도 어서 양의 탈을 집어 던지지 그래?"

     정말 억울하다는 듯이 가슴까지 치며 날 향해 눈을 빛냈다가, 그게 안 먹히자 언성까지 높이며 연우 형을 꾹꾹 찌르는게...

     "왜 이래."

     "왜...이래래. 우와와, 평소같으면 '건드리지마'일텐데. '왜 이래'라니."

     아주 천지가 개벽이라도 한 듯 화들짝 손을 떼는 액션을 취해보이며, 이내 다시금 입가에 고소를 머물게 하는게...

     "사람 하나 병신 만드는거 쉽다더니."

     뭐야? 그럼 내가 병신이라는거야 지금?! 그거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발언인걸?!

     "뭐에요? 그럼 내가 병신이란 거에요?"

     "진실을 보지 못하는 눈을 가졌으니 눈 병신이요, 말해줘도 못 알아먹는 귀를 가졌으니 귀 병신이지."

     아예 막 가네?!

     "말 좀 심하다?"

     "답답해서 그런다, 왜?"

     "뭐가."

     "넌 어쩜 그래, 그리 사랑하는 후배한테 사기를 치냐? 치길. 사람이란 자고로 진솔하게 다가가야 하는 거 아냐?"

     "내가 어쨌다는거야?"

     "어쨌다는...하!"

     "만약, 네 말이 맞다고해도, 그건 네가 관여할 일이 아니지."

     "...우와와~ 이게 왜 내가 관여 할 일이 아냐? 너 예전에 니가 한 일 잊었냐? 잊었어?"

     뭐야? 뭐! 왜 둘이서 또 둘만 아는 이야기로 넘어가는 건데?

     "저기.."

     "시꺼! 너 가만히 있어봐."

     이봐요, 강수빈 씨. 자기가 데려와 놓고 지금 날 꿔다 논 보릿자루 취급하겠다는거야?

     "너 예전에 그랬어, 안 그랬어?!"

     "내가 뭘." 

     "뭘 이라니!! 봐봐, 권지인. 이연우가 이런 인간이라니까?!"

     그렇게 싫으면 헤어지던가.

     "정말 너와 나의 이 뗄레야 뗄 수 없는 운명이 지긋지긋하다."

     빠직,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멋대로 마음대로 험담하고 다 툴툴거려놓고도,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한마디 덧붙이면 끝이야? 아니, 그게 아니면 뭐야. 나한테 우리는 이런 사이라고 자랑하려고 불렀어?

     "저 갈래요."

     좀 더러워지는 기분에 가방 챙겨 자리에서 일어서자, 둘 다 동시에 날 돌아보는게.. 그래 커플이라 박자도 짝짝이라 이거지?

     "벌써, 가게? 수업 좀 남았잖아. 밥 안 먹었지?"

     "...야, 이연우 너 나한테 좀 그래봐라."

     "지인아, 왜 혹시 몸 안좋아?"

     그런게 아니라 그냥 좀 입맛이 써지는 기분.

     "그건 아닌데."

     "여기, 새우 볶음밥 맛있는데. 아직 식사 전이지? 먹고 가."

     ..으으으! 젠장, 뭘 믿고 그리 다정하게 군대요? 그러다가 나중엔 내가 나 좋아해달라고 들러붙으면 어쩌려고? 책임질수있어요? 그렇게 베실베실 풀린 미소에 사람 좋은 인심 팍팍 쏟아붓고 그리고나서 나 몰라라 도망가면 그만일 줄 알아요?

     "지인아?"

     아, 한심해. 멋대로 남이 베푼 호의를 혼자 사랑으로 담아 둔 주제에 뭔 할 말이 많아서. 권지인 관두자, 관둬.

     "별로 먹고 싶지 않은데."

     "입맛 없어? 혹시 더위타니?"

     아니.. 더위는 그리 안 타는데.. 음, 추위는 좀 타도.

     "그래, 야 먹고 가라 먹고 가. 이렇게 목을 메는데 눈 앞에 앉아서 사주는 밥 하나 못 먹니?"

     사람 기분 다 잡쳐놓고-본의는 아닐지라도- 우아한 자태로 주홍색으로 칠한 손톱을 호호 불며 날 바라보는 강수빈.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하지, 아주. 댁이 입 다물고 가만히 있음 밥 한끼가 아니라 두끼 세끼도 먹겠수다.

     "네...."

     결국 자리에 다시 털썩 앉자, 슥 손을 들어 알바생을 부르는 연우 형. 뭘 해도 폼나는 저 자태는 과히 따라올 자가 없다, 아주.

     "네."

     여기 알바생. 분명히 우리 학교 학생이다. 연우 형이 손 들자마자, 알바생 둘이서 한참을 서로 속닥거리고 밀치고 하더니, 격전 끝에 아까완 다른 알바생이 다가온 것이...

     "필요한 거 있으세요?"

     미소도 레벨 업. 상냥함도 음성도 쑥쑥 플러스 점수지만, 어쩌지? 나한테는 아주우 눈꼴시려운게... 다신 여기 오기 싫은데?

     "새우 볶음밥 두개..."

     "랑! 참치 볶음밥이요~"

     "........"

     "어머 왜 그런 눈으로 봐? 그럼 난 밥 안 먹을줄 알았냐? 치사하게."

     "....그래."

     "그래는 무슨. 새우 두개랑 참치 하나요. 아! 그리고 아이스 티 한 잔만 더 주시겠어요? 아! 지인이 너도 더 마실래? 어차피 돈은 자아알나신 이연우 씨가 내실 거니까, 시켜 드세요."

     ....막 가네. 지금 이거 내 애인 돈은 곧 내 돈이다~ 하는 거지? 얄미움의 극치.

     "아뇨, 전 됐어요."

     "왜에? 빼지마. 얻어먹을 수 있을 때 얻어먹어야지."

     "...별로... 늘 신세지고 있고."

     그래, 연우 형과 둘이 다니면 연우 형 자기가 형이라고 나 돈 잘 못쓰게 한단 말야.

     "뭐어?"

     뭘 그리 놀래?

     "하? 신세에?"

     "네?"

     "관두자. 더 듣다가는 쓰러질테니~"

     뭐야? 대체???

     "파하하, 그래서 그때는 어땠는지 알아?"

     "......."

     "........."

     "글쎄에~ 완전히 그 사람 떡 되선 말야~ 깔깔."

     밥이랑 새우랑 아주 입에서 따로 놀면서 헤엄을 친다. 연우 형이 맛있다고한 집은 정말 늘 맛있는데.. 음식 맛 따윈 느낄 겨를도 없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생방송으로 보려니까... 가슴 한 쪽이 버거운게..

     연신 과거의 일들을 들추어내며 퍽퍽 연우 형을 두드리고 활발하게 웃는 강수빈이나... 그 옆에서 그만하라며 인상 찌푸리는 연우 형이나.. 정말 편하고 자연스러워 보여서... 은근히 화까지 치밀어 올랐다. 내가 정말 뭔 뻘짓을 한다고.. 여기 일어고 앉아있었을까, 에서부터 강수빈 이 여자는 대체 처음부터 뭣땜에 날 불렀는지, 그리고 연우 형은 밥 먹고 가라며 왜 날 붙들었을까, 까지 차암 다양ㅇ한 물음표들이 둥둥 떠다녀서 멀미까지 나려한다, 이제.

     "여튼, 그랬다는거 아니냐. 에효, 너무 웃었더니 얼굴 근육이 다 땡긴다. 그러고 보니까아~"

     "강수빈!"

     움찔. 낮은 목소리로 그리고 혀 차는 소리와 함께, 강수빈의 말을 끊은 건 연우 형. 마치 뭐라도 씹은 양 반듯한 이마는 살포시 금이 가 있고 음성조차... 화난 기색이 묻어나는게...

     물론 형도 짜증나겠지. 그래 자기 애인 노린다는 후배 앞에두고서 자기 애인이 자신과의 관계가 드러날만한 일들을 자꾸만 말한다는건 듣고만있어도 불안스러운거니까...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내면, 내 입장은 뭐가 돼?

     게다가, 들어보니까, 이 두사람 한 두해 사귀어온 게 아니다. 어릴 적 이야기까지, 들은게 아닌 본 일을 바탕으로 말하는게... 정말 나와 형의 요 몇달간의 일은 별거 아닌거 같아서...

     "지인아?"

     빨리 먹고 자리를 뜨자. 그게 최선이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심장이 펑 터져서 죽어버릴거같으니까.....빨리 먹자.

     늘 형하고 밥 먹을 때는 이런일 저런일 이야기 나누고, 웃고 떠드느라, 느긋하게 먹는 편이었는데, 입닥치고 귀만 열어두니 이리 빠른 스피드를 낼 수 있는 것을.

     "맛...있네요."

     "지인아."

     "자...잘먹었습니다."

     먹었다기보다 거의 밀어넣다 수준으로 식사를 끝내고 이제나저제나 이 불편한 자리를 뜰까 고민하는데...

     "참, 그런데 너 무용과 여재애가 사귀자고 했다며?"

     느긋하니 숟가락을 놀리다 불쑥 기억났다는 듯이 화제를 꺼내는 강수빈. 게다가 이 여자가 입에 달고 나온 건 나 역시 상당히 반갑지 않은 문제라서...

     "아."

     "아는 무슨. 아, 요새는 좀 잠잠하다 싶더니, 니가 그렇게 풀린 얼굴을 하고 다니니까, 주제도 모르고 덤비는 거 아냐? 처신 똑바로 해야지.

     주제도 모르고... 덤....

     "여하튼 예전부터 니가 조금만 웃어주면 그저 자기 좋아하는 줄 알고."

     ...그래서... 마음대로 그런 상상도 하면 안된다는거야? 못 먹는 감 상상 속에서라도 한번 생각해보면 안돼? 고백했다니, 용기가 가상하잖아 그 아가씨!

     "게다가 걔... 전에 네가 성격 털털하고 괜찮다고 좀 잘해준 녀석 아냐? 그러니 그러지. 그러니, 막판에는 아주 달라붙듯이 그래서 부담스럽다고 했잖아. 기억해?"

     "글쎄...."

     부담스러운.. 달라붙듯이. 마치 내 이야기를 하는거 같아서, 도둑이 제발 저린다는 심정이 따악 어떤건지 알아버렸다.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움찔움찔. 온 신경이 곤두서는게....

     "기억 안나."

     "과연. 이연우. 기억 안나로 단칼에 자르냐?"

     "내가 뭘."

     아, 연우 형 얼굴 살짝 찌푸린다. 꽤나 싫은 화제 같은데? 그만하지 강수빈~

     "참, 지인아, 축제 때 우리 동아리 놀러와. 캐리커처 그리거든. 그려줄게."

     들었수다. 능력 좋은 동아리씨. 그런더ㅔ.. 사실 난 캐리커처 싫어하는데, 어딘지 말야 특징만 많이 오버된 거 같아서 보고 있으면 차암 민망스럽다는 생각이 든다고 할까나...

     "캐리커처말고 초상화를 그려줘요."

     "오지마!"

     쳇, 놀러갈거다. 누가 당신 보러 가는지 알아?

     "형 동아리에서는 특별히 이벤트 같은거 안해요?"

     우리는 파전 가게를 하면서 '여장'을 하지.

     "음, 이번에는 별 다른거 없어."

     하기는 형같은 얼굴 마담이 버티고 서있는데 뭐가 문제겠어. 아, 또 웃으시기는. 그래도, 형 웃는 얼굴 보니 괜시리 전염이라도 되듯 나까지 기분 좋아져서 싱긋 웃자, 챙챙 숟가락으로 밥그릇을 두드리는 강수빈. 

     "야야, 눈꼴셔. 아프니? 헤죽거리게."

     정말, 이 여자 많이 깬다. 그냥 딱 보기엔 지적이다, 라는 느낌이건만 하는 말투며 행동들은 따악 우리 큰누나랑 똑 닮은게... 연우 형은 이 여자의 어디가 좋은거야?

     "아, 그런데 오늘 진짜 덥지? 완전 여름이야 여름. 밖에 나가기 싫어. 입맛도 없구."

     아이스 티 두 잔에, 밥 한 그릇을 뚝딱한 분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니라고 봅니다만.... 저봐, 아주 깨끗이도 비웠어. 쌀 한 톨 안 남았잖아? 저래놓고 입맛이 어째?

     "지인아, 뭘 보니."

     "아니요, 누나 밥 깨끗하게 드시네요."

     "응? 아아, 응. 우리집 식사 예절이 좀 엄해. 그치, 연우야~"

     뭐야, 집에 가서 밥까지 같이 먹었던 사이야? 미래 사윗감으로?

     "그런가." 

     "하긴, 너한테 물은 내 잘못이지. 식사예절 바르신 이연우 씨가 뭐 불편한게 있겠어."

     그 말은 동감. 정말정말 예쁘게 먹는다니까 연우 형.

     "그나저나, 이런 날은 말이지. 소면에 매콤새콤한 양념장 얹고 오이 총총총 썰어서 올리고 계란 반으로 쪽 쪼개서 꾸욱 면 위에 올린 뒤에 시원한 배 한 조각이면, 끄읕내주는데..."

     구체적이십니다, 그래, 체. 그런데 듣고보니 먹고싶네. 비빔 냉면.

     "연우야아~ 헤헷."

     뭐야? 국수 이야기하다말고, 왜 연우 형을 돌아보며 그렇게 간사하게 웃어?

     "나 비빔 국수 먹고 잡으다."

     뭐냐, 뭐! 저 되도않는 코맹맹이 소리. 차악 팔짱까지 끼고 간사를 떠는게...

     "사먹어."

     "야아~ 밤에 너희 집에서 응? 응? 뜨끈한 육수랑 해서 매콤하게~ 너희 집 장도 맛있잖아."

     ........뭐야, 그래서 밤에 연우 형네 놀러가겠다는거야!!! 은근히 사람 열받게하는데 재주있다. 이여자. 물론, 지금 내 감정의 문제로 이토록 영 아니게 보이는 걸 수도 있겠지만, 연우야야앙 에서부터 '응? 응~' 하며 새촘하게 눈뜨고 올려다보는거 까지...

     "너가 해주는게 젤 맛있더라, 나는."

     ...거기에, 연우 형이 직접 해주기까지 한 거였어?! 진짜 부러운 짓만 골라 하잖아! 

     "연우 형이 비빔국수 잘해요?"

     "으음? 응. 진짜 잘해."

     그렇구나. 비빔 국수 잘한다, 라... 기억하자.

     "왜? 비빔 국수 좋아해?"

     아? 으음. 좋다 싫다 라기 보다는 오늘은 좀 땡기네. 저 여자의 자세하기도 한 설명을 들어서 그런가.

     "네, 오늘은 좀 먹고싶어지긴 하네요."

     "그럼 저녁 때 와."

     으으응? 으응?

     "아...?"

     "우와 해주시게! 이연우가 웬일이야. 일주일하고 삼일을 더 졸라서, 짜증내며 해줄까말까더니."

     "....내가 언제."

     연우 형이 만든 비빔 국수.

     "왜 바쁘니?"

     그럴리가!! 아...음. 하지만 연우 형은 정말 사람이 좋아도 정도가 있지. 아니지, 아까 사실 강수빈 만날 약속 있었을 때는 따돌리려고 했으면서 이번에는 왜 또 붙여놓으려고 그래? 이해할수가 없네.

     "에..."

     "시간 안돼?"

     "지인아, 튕기지 마라. 이런 날이 흔한 줄 알아?"

     당신은 잠자코 있어. 남의 깊은 속도 모르고 말야.

     "바쁘면... 다음에..."

     "아녜요. 먹고 싶었어요. 해주시면 좋죠."

     "그래."

     씨이이익 이라니. 너무 좋잖아. 아 부럽다. 강수빈. 먹고 싶은거 있을 때 해달라고 마구 조를 수도 있고. 뭔가 이런 부분에서까지 질투를 느끼는 자신이 초라하지만... 그래도 나, 아직은 형에게 '좋은 동생'인 모양이니까, 만족해야지. 여기서 더 욕심부리지말고. 더 바라지말고...

     "그런데~ 연우야앙."

     하.지.만! 눈앞에서, 저렇게 찰싹 붙어서 간사떠는걸 보자니 뒤집히는건 속이고 타오르는건 맹렬한 질투. 아... 정말이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고 남의 떡이 더 커보이고-비유가 좀 이상한가?-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도저히 웃으면서 '두분이서 행복하세요'는 안되는게... 그래 내 성격에 문제가 있다, 있어.

     "지인이도 좋지?"

     "에?? 아아?"

     뭐랬어? 딴 생각하느라고 못 들었는데...

     "에...예에."

     "그럼, 지인아, 안주로 뭐 먹고 싶은거 있어?"

     뭐야, 뭐시여. 뭔 소리가 오갔는데, 그새 연우 형 얼굴 해상도가 더 올라간 거야?? 응?

     "안주요?? 에.. 골뱅이."

     "그래, 그럼. 이따 장봐야 하는데.. 마트 같이 갈래?"

     "나도!"

     "넌 오후 수업 있잖아."

     "그렇다고 치사하게..."

     뭐냐고?!!!! 퍼즐 맞추기 하지마! 으으 무슨 소리인지 못 들었다고 할까? 뭔 이야기를 한겨!

     술.술.술. 이거였군. '오늘 밤 새 마시자.' 아침에 까페에서 한 이야기란... 이상하게 형하고는 지금까지 지내면서 술을 마실 기회가 없어서, 차일피일 미루어졋는데, 이렇게 또 보게 되네, 그래.

     "넌 조금만 마시고, 집에 가."

     "뭐야."

     "걱정하신다, 집에서."

     "야야, 말이 되냐? 내가 다른 사람 집에 있는 것도 아니고."

     챠그락. 다 마신 맥주 캔이 손 안에서... 우겨진다. 술맛 떨어지는 이야기 또 나오지 또. 아~ 정말이지 오늘 연우 형하고 같이 장보면서 어딘지 연인같아, 라고 혼자 두근거리고 또 멋있게 요리하는 형을 숨어서 변태라도 된 양 핸드폰으로 촬영하고... 음식은 너무 맛있었고, 한숨 돌리고 갖게된 술자리의 연속까지 너무 행복하다만......단지 여기에 걸리는게 한가지 있다면...

     역시나...

     "마셔, 마셔."

     이 여자겠지. 물론, 엄밀히 따지면 연인 사이에 낀 내가 불청객이요, 내가 초대받지 못할 손님이지만.... 아무렴 어때! 나한텐 당신이 방해자야, 방해. 형이 가라면 갈것이지... 뭘 얻어먹을게 있다고.... 그래, 형이 만든 골뱅이 무침이 좀 맛있고, 감자튀김이 끝내준다고 해도! 가라면 가라!

     "오늘 밤 마시자아~"

     ...진짜 안 가게? 좀 가지이??

     "...누나 자요?"

     "응."

     부어라 마셔라를 하더니, 그래도 의외로 술은 좀 약했는지(?) 소주 두 병에 나가떨어져서 안방 행이 된 강수빈. 그것도 연우 형 침대를 떡하니 차지하고....

     "우린 더 마실래?"

     앗? 당연히. 이제야 시끄럽게 구는 여자 없이 오붓하게 마실 수 있는데... 거절할 리가 없잖아.

     "네."

     "안주 뭐 더 필요해?"

     "아뇨아뇨."

     난 형만 있으면 됩니다, 네네... 아, 말하고보니 꽤나 민망한 대사네, 이거.

     "오늘 식사 괜찮았니?"

     응, 매우, 몹시. 우리 엄마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엄마가 해주는 것보다...훨씬.

     "형 좋은 신부가 되겠어요."

     툭 웃자고 던진 농담.

     "장가올래?"

     ....두근!!! 크으읏, 아무 것도 모르면서 그런 얼굴로 그런 말은 범죄에요, 형. 하아, 그런데 좋다. 조용하게 새벽에 찾아온 거실에서 둘이 앉아, 술잔을 나누다니.... 뭐 비록 저 건너 방에 색색 숨 잘 내쉬고 자고 있을 연우 형의 애인이 있다 손 치더라도...

     "그럼 형이 신부에요?"

     "으으음. 웨딩드레스를 입으라고만 안 한다면."

     "푸흐흐, 왜요. 나름대로 잘 어울릴지도."

     가볍게 응수하며 비워진 형의 잔에 쪼르르륵 맑게 떨어지는 소주를 따르자, 금세 내 손에서 병을 가져가 내 잔에도 채워준다.

     정말로 사이좋게 주거니 받거니. 이미 비워진 술병들은 한 두병이 아니라, 조금 후끈하고 알딸딸한 기분이 도는게, 부웅 공중에 떠있는 부유감도 느껴지고 말이지... 굉장히 꽤나 좋은 느낌이다. 이 순간, 형은 멀쩡해 보이지만...

     "얼굴이 풀렸다."

     응? 홀짝 소주가 담긴 잔을 입안에 털어넣으며 골뱅이 하나를 입에 넣고 씹는데, 피시식 웃으며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는 연우 형. 뭔가 소주잔과 골뱅이 무침을 앞에 두고 잡을 무드는 아니라지만,-그것도 나 혼자 일방적인- 어딘지 평소와는 다르게 심장이 빨리 뜀박질을 준비하는 것이...

     "얼굴이 풀려요?"

     괜히 민망함을 감추려고 오버하며 물었더니 씨익 웃는 얼굴을 하더니 기다란 손가락으로 내 입가를 툭 건드려 오는게...

     "잘 웃네."

     아아, 술 마시면 안면 근육 조절이 잘 안된다. 평소에는 그래도 꽤나 스스로 감정 컨트롤 잘 하는 편인데... 술만 들어가면, 기분 나쁘면 기분 나쁜대로 좋으면 좋은대로 너무 화악 드러나버려서....

     아마, 그렇다면 지금 얼굴이 풀렸다는건... 연우 형과 함께여서 겠지.

     "웃는 사람에게는 복이 온대잖아요."

     "응."

     사실은 연우 형이 눈 앞에 있어서지만, 그 사실 하나로 가슴 안쪽까지 뭉글뭉글하게 솟아오르는 만족감이 빚어낸 결과지만, 괜한 복타령을 하며 넘어가본다.

     "한잔 더 받아라."

     "아, 형도..."

     그렇게 주거나 받거니하기를 몇 차례.... 형이 내 잔에 채우는 건 술이겠지만, 형 잔에 내가 채우는건 애정일지도...라는 참으로 말로 통해 들으면 낯간지럽다못해 팔을 벅벅 긁을 생각을 하며 얼마나 마셨을까... 왔다갔다 앞뒤로 흔들리는 걸로도 모자라서 붕 뜬 거 같은 몸의 감각. 마치 하늘을 나는 것도 같고 물 속에 둥둥 떠다니는 것도 같은, 아 뭔가 알콜의 힘이 대단하잖아! 라고 생각되는 초절정의 감각에 웃음만 자꾸 새어나오는데...

     "이제 자야 겠다."

     라며 스윽스윽 내 머리를 두어번 쓰다듬어주는 연우 형. 뭔가 그 얼굴에 사알짝 걸린게 미소라는게 느껴지자 괜시리 더 기분이 좋아져버렸다.

     한숨... 그래, 내가 취하긴 취했나보다.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형이 상 치우는 것만 쳐다보고...

     "기분 좋아?"

     마지막으로 술상이 있단 자리를 정돈하고 얇은 이불 하나와 퐁퐁 누르면 부드럽게 올라오는 베개를 가지고 돌아온 연우 형이 날 향해 묻는다. 흔들흔들... 두 명이 되었다가 한 명도 되고 한 명이 되었다가 세 명도 되는 형을 쳐다보며 신기해서 손을 뻗었더니, 스윽 뒤로 몸을 물러서는게... 그게 또 어딘지 서러워서 얼굴을 찡그렸더니 조심스레 뻗은 팔을 잡아오는 커다란 손. 그리고 한껏 부드러운 얼굴로 웃으며 조금 끌어당긴다 싶더니.. 두근거릴 사이도 없이... 자리 잡아둔 쇼파 위에 달랑 안아서 눕혀준다. 폭신폭신. 그리고 가물가물한 감각.

     "자야지."

     "....자야지."

     목소리 울림이 너무 좋아서, 나지막이 성대모사라도 하듯 따라 말했더니 쿡쿡 웃는게...

     "취했구나."

     "...취...했구나..."

     "지인아..."

     "지인아아..."

     아아, 내 목소리 치고는 좀 늘어지는데... 마치 놀아달라고 애교부리는 아이처럼 칭얼거림이 조금 섞인..... 그런 음성. 뱉어놓고도 민망스러워져 살짝 목을 움츠리자.. '괜찮아' 혹은 '착하다' 라고 말하듯 두어번 가슴께를 토닥이는 손이, 그 눈이 음성이 포근해서 이내 나는 잠이 들어버렸던거 같다. 이마를 덮어오는 그 부드러운 무언가를 받아내며....

     참아야한다, 참아야한다아.. 하지만... 배가 터질 거 같아!! 으윽.

     번쩍. 정말 반짝도 아니고 번쩍 눈을 뜨자, 눈을 감고 있는 것과 다름없는 새까만 암흑이 몰려온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참고 참고 참았던... 오줌이 마려워서. 아랫배를 강타하는 압박감. 술 마시는 건 좋은데... 늘 이렇게 새벽에 깨서 말이지... 아, 그러고보니 나 어쩌다가 잠이 들었다냐? 아니아니, 무엇보다 화장실, 화장시일~~ 속으로 간절히 외치며 발을 아래로 탁, 떼는 순간 뭔가 발끝에 느껴지는 불컹함? 히껍함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아래를 내려다보자, 온통 까만 가운데 뭔가 있는 것 같기도...

     "아..."

     저도 모르게 소리가 새어나와서 황급히 입을 닫았다. 내가 잠든 쇼파 아래 나란히 맨 바닥에 등을 대고 곤히 잠들어있는 누군가....가 연우 형이란 걸 알아차리자... 그렇게 황급하게 잠 속에서 현실로 끄집어 낼 만큼 급했던 생리현상이... 사라지진 않았다!! ....우선은 화장실이다!!!

     시원하게 뽑고 와서 쇼파 위에 누웠지만 어쩐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한번 깬 후에 잠에 잘 빠질 수 없는 체질도 아니건만, '자야지' 하고 누웠음에도 말똥말똥 뜨여진 눈은 감길 줄 모르고 온통 신경이 쇼파 바닥으로 쏠려진게.. 결국은.. 배 위에 얹어졌던 손을 슬금슬금 아래로 이동 시켰다. 이제 조금씩 눈에 익은 어둠이라, 희끄므리 하게 주위가 살펴지는 가운데, 손만 내려 아래에 있는 사람을 더듬으려니... 뭔가 이상한 기분이지만, 그 이상으로 두근거리는 감정.

     아....가슴...인가..

     스으으윽...

     단단한 어딘가에 닿은 손끝을 따라 슬금슬금 대이동 시작. 탐험가라도 된 듯 여기는 어디 여기는 또 어디. 감촉을 살며시 즐겨보고 눌러보고, 형이 깰 기미가 없자 조금씩 옮겨지던 손이 급기야는 형의 얼굴에 닿았다. 턱... 입술. 뺨... 이마... 그리고... 결국 참을 수 없는 충동에 누워있던 몸을 벌떡 일으키고 쇼파 위에 가만히 앉아, 자고 있는 형을 내려다보니... 심장 박동수가 빨라진다. 잘 보이지 않는 얼굴. 그래도 최대한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양미간에 힘을 주고 눈을 깜빡깜빡. 급기야 거실 베란다로 나가는 통유리에 쳐진 커튼까지 슬그머니 제쳐두고 돌아오자, 창밖에서 쏟아져오는 은은한 불빛에 확연히 드러나는 연우 형의 얼굴. 행여나 깰까봐 노심초사했지만, 꽤나 깊이 잠들었는지 색색 바른 숨소리만 나온다.

     쇼파 위에 앉아서, 그러다가 다시 누워서... 결국은 엎드린 채로 반듯이도 자는 형을 관찰. 손끝으로 툭 건드리면 무심코 잠결에 살풋 표정을 찌푸리기도 하는데... 그게 그렇게 귀엽고 신기해서, 몇번인가 쿡쿡 찔러서 깨울 뻔하기까지했다. 뭐...

     '으으음' 

     소리를 내고 뒤척이다가 이내 다시 바른 자세로 돌아왔지만...

     "연우 형..."

     충동적으로 불러본 이름... 어쩌다가 이렇게 좋아지게 되었을까?

     격렬하게 심장이 뛴 것도 아니었고 가만 들여다보고 있다고 뺨이 빨갛게 되지도 않았는데, 한순간의 계기, 한순간의 깨달음. 그 이후로 이토록이나 진정되지 않는 감정이라니... 이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는데.. 그것노 내가. 한번도 상상해볼수도 없었던 남자를 상대로. 거기에 아무런 고민 없이, 좋아한다, 라는 감정을 그렇게 쉽게 인정해버릴 수 있었다니... 차암....

     "형...."

     뭔가 애틋하게 차오르는 감정에 다시금 낮게 중얼거리자, 뭔가 반응이라도 보이듯 움찔하면서 낮은 숨소리를 내뱉는게... 괜스레 안타까워져버렸다.

     "연우 형..." 

     "...으응...."

     자면서 나오는 잠꼬대인지, 아니면 나른한 신음인지 알 수 없지만, 부름에 희미하게 흘러나온 음성. 그것만으로도 감정이 폭주할 것 같다.

     "나.. 형 좋아해요.."

     .....응... 좋아한다. 이게 사랑인지 아닌지 어떤 감정인지 사실은 뭐라 명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지금 현재 그리고 예전에도 형만큼 편하고 같이 있고 싶고 신경쓰였던 상대는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만...

     "예쁜 얼굴."

     말을 걸 듯 다시금 중얼중얼거렸지만, 이번에는 답이 없다. 그래도 나름대로 만족. 정말 얼마나 그렇게 자는 형을 보고 낮고 작게 말을 걸었을까...? 갑작스레, 형의 입에 입을 맞추고 싶어졌다. 성욕이라 하기에도 그렇고, 뭐랄까, 너무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는 기분? 어떻게든 꼬옥 끌어안고 부비적거리고 햝아올리고 싶을만큼 그런 달달함이 가슴 안쪽에서 차오르자... 참을 수가 없었다.

     "....뽀뽀해도 되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지만... 쇼파에 엎드린 상태로 팔만 내려 바닥을 짚고 거기에 몸의 무게를 지탱하고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행여나 형이 깰까, 무서워하면서도 나쁜 짓을 하는 아이처럼... 두근두근하면서도, 마치 새장 속에 있는 예쁜 잉꼬새를 꺼내주듯 그런 작은 설렘이 도는 건 어쩔수 없었다.

     가볍게..... 닿은 입술. 내가 해놓고도 놀라고 열이 오르는 그 감각에 화들짝, 입술을 떼고 쇼파에 바로 누워버렸다.

     두근.두근.두근. 알콜 냄새가 날거라고 생각했던 입술과 낮은 숨결은, 자기 전에 샤워라도 한건지.. 좋은 비누 향이 떠돌고, 술에 취한 상태로 화장실을 다녀와서 멋대로 입술을 훔쳐버린 내 무드없는 마음이 원망스러워져버렸다. 게다가 자는 사람을 상대로 멋대로....라는 생각이 들자, 어딘지 자기 혐오감까지... '하지말자'고 다짐한 순간, 쇼파 아래에서 작게 들리는 음성...

     '...인아......지인.....후우...'

     아파트 아래로 심장과... 양심따위는 던져졌다. 더 가까이 들으려고 저도 모르게 귀를 바짝 가져다 댔지만, 형은 다시금 조용... 그래도 내가 들었던 것이 잘못된 건 아니라는 확신. 아마 꿈이었을테고, 별 의미도 없는 내용이었겠지만, 눈물이 날 것같은 반가움이란 바로 이런거겠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아아, 정말 자면서도 이렇게 멋지고 사람 감동주는 행동을 하다니.... 그렇게 찌이이잉. 가슴을 울리는 감동 뒤에 내가 한 짓이란....

     '하지말자'라는 다짐따위 저 멀리 우주로 쏘아보낸채, 다시금 뽀뽀시도...라는 것.

    촉......

     이번에는 아까보다 길게. 당연히 심장의 두근거림은 가속도. 그리고 혼자서 감동해서 쇼파에 누워 부르르르 떨기. 후에 다시 

    촉..촉...

     이번엔 연속 찍기. 뭉글뭉글... 올라오는 애틋야릇한 감정. 

     그렇게 촉촉, 쪽쪽거리기 몇번... 살며시... 살그머니... 머리는 텅 빈 채 형의 입술 안에... 살짝... 혀를 넣어봤다. 마른듯한 입술 사이로 부드럽고 습기를 머금은 내 혀가 갈라져 들어가는 그 느낌... 그 생경한 감각에 몸이 저릿한다, 싶었던 순간 알 수 없는 수치감과, 부끄러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각이 온 몸을 덮쳐, 그대로 쇼파 위에 반듯하게 누워버렸다. 그리고..나서야 깨닫고 만 사실은...

     난, 명백하게... 발기 중이었다........

     "편하게 잤니? 쇼파라서 불편했지."

     화아아아악. 온갖 신경이 눈이 입술에 붙어버렸다. 권지인. 권지이인. 정신차리자. 아침부터 안되잖아. 응? 새벽 일을 잊은거야? 발기한 상태로, 미친 듯이 그거 식힌다고 속으로 애국가 열창한걸 까먹었냐고옷! 자각하지 말자아앗!

     "괘...괜찮았어요. 형이야말로 바닥이라... 안 불편했어요?"

     "난 괜찮았는데... 아 속은 괜찮니?"

     오후 수업이라고, 더 늘어지게 잔다며 절대 깨어나지않는 강수빈을 내버려두고 나란히 연우 형과 집을 나서서 학교로 향하는 길이 굉장히 낯부끄러워져버렸다. 마치, 그 신혼부부의 느낌?

     아, 신혼 부부는 '잘 다녀오세요 여보~ 쪽!'하고 배웅하는 거에서 끝인가? 으음, 아무렴 어때. 요즘은 맞벌이 부부도 많으니까....

     "지인아?"

     "에??"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해?"

     "그, 아뇨 이틀 후면 축제구나 하는 생각."

     "아아..."

     어딘지 형 얼굴에 웃음이 떠오른다. 축제를 혹시 좋아하는 건가? 사실 떠들썩한 분위기라던가, 시끌시끌하고 혈기 넘치는 그런 느낌을 싫어하는 건 아닌데... 이번만큼은 예외다 이거지. 작년에 그 끔찍한 '여장'이라는 짓을 했건만 내가 뭔 죄가 있다고 이번에도! 란 말인가.. 정말 먼 산이지, 먼산.

     "지인이는 축제 좋아해?"

     "에... 음, 뭐 싫어하는 편은 아닌데... 그 거대한 열기가 절 집어삼킬때는 무섭죠."

     마치, 무슨 대사라도 읊듯 과장하며 말했건만, 이해한다는 듯 진지하게 고개까지 끄덕여주는 연우 형.

     "그나저나 속은 괜찮아?"

     내 속...? 아아 어제 술.

     "괜찮아요. 저 원래 숙취 없는 편이고.. 형이 고생하셨죠...뭐."

     "나?"

     "어제 뒷정리 혼자 다 하고.. 죄송해요."

     "괜찮아."

     부드럽게 웃으며 머리를 헝클어트리는게... 역시 나는 이 사람의 이런 분위기를 좋아한다. 무표정해보였다가도 순간순간 드러나는 이 햇살처럼 따뜻한 느낌. 휘어지는 눈꼬리와 내 어 어깨나 머리카락을 만져오는 손이라던가... 너무 익숙하고 너무 부드럽게....

     "다음에는 제가 꼭 도와드릴게요. 에... 또 이런 기회가 오면."

     너무 속 보이는 말인가해서 끝에 살짝 '또'라는 말을 붙였지만 이것조차... 너무 '형네 집에 또! 갈래요' 하는 거 같아서 슬쩍 민망해졌다.

     "그래."

     물론, 연우 형은 전혀 눈치 못 챈 듯 하지만....

     "참 이따 점심 때, 해장국 먹으러 갈래?"

     "아?"

     "잘 하는 집 아는데..."

     "잘 하는 집...?"

     "괜찮아?"

     "괜찮아요! 당연히."

     "그럼 4교시 수업 끝나고 우리 동방으로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

     아, 형은 4교시 수업이 어디더라... 으으음, 내가 가는게 빠르겠네.

     "제가 갈게요."

     기분 좋게 웃는다. 아침부터 이렇게 함께라니... 뭔가 애인있는, 임자 있는 떡! 이라는 꼬리표가 정말 떠억하니 붙어있는 사람이라지만, 그의 집에는 지금 여자친구께서 취침 중이시라지만.... 하루에도 수십번 좋았다, 불안했다, 두근거렸다, 서러워졌다 하는 심정은... 결국은 '너무 좋잖아, 젠장'이 되어버리고 만다. 내 팔자야.... 정말 요 며칠 미치도록 심해진 감정 굴곡과 변화에 정말 진지하고 객관적으로 따져보기까지 했다. 내가 왜 이연우를 좋아하는가!에 대해. 뭐, 결론은 전혀 모르겠어서 결국 답을 알 수가 없었지만, 혹은 너무 하나하나 마음에 드는 점들 때문에....

     "형은 좋겠다, 학교랑 집이랑 가까워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 어느새 학교 정문, 따악 산보나 잠시 잠깐 걷는다 라는 기분이면 학교 도착이니... 매일 아침 한 시간씩이나 걸리는 나의, 등하교에 비하면 정말 천국이지.

     "음?"

     "나는 아침마다, 휴우 말도 마요. 지겨워죽겠어."

     "힘들어?"

     힘들다기보다야, 좀 지겨운 감이 없잖아 있지. 게다가... 등굣길도 등굣길이지만.

     "그렇게 학교 도착해서, 우리 학교 이쭈욱 뻗은 길 보며 보면 숨이 턱턱 막힌다니까요?"

     남들은 운치가 있네 어쩌네 하지만, 이걸 매일같이 이 길을! 가봐라. 

     "푸..."

     "문과대는 또 어찌나 멀리 있는지. 형 웃을 일이에요, 이게?"

     ".....흐음, 코끼리 열차 같은 거 운행하면 좋지 않을까?"

     "에??"

     지금 방금 이연우가 뭐라고한거야. 이렇게 쭈욱 뚫린 가로수길 보면서 코끼리....열차?

     "코끼리...열차요?"

     "왜, 놀이공원가면 어린애들이 타고가는..."

     그 화려한 색채와 기차 앞에 코끼리 아저씨가 그려져있는?

     "진심?"

     "좋잖아."

     "....농담치고는 과한데?"

     "왜 재미있을텐데."

     아니, 뭐 그야 안될 것도 없겠지. 오히려 지각생들한테는 도움이 될지도 몰라. 그래, 학교나와서 문과대까지 기어올라가느라, 늦었던게 몇 번이야! 그런데 학교에 코끼리 기차가 있다면 말이지. 아 돈을 얼마나 줘야하나. 아니 이런건 학생한테는 무료로 해야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좀 웃기기는 하겠네. 아침마다 귀차니즘에 빠진 대학생들이 줄을 서서 코끼리 기차를 타고 손을 흔들며(?) 목적지를 간다는건... 방송국에서 취재나올지도 모를 일이지. 그래도 이거 꽤나 괜찮지 않나?

     "풉."

     음?

     "그런거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는거 아냐? 쿡쿡."

     ......뭐야!!

     "형이 말해놓고!"

     "나야, 농담이었는데."

     "..........우와, 너무해."

     "진지하게 생각할지 몰랐지."

     거 미안합니다. 진지하게 생각해서.

     "쿡쿡, 그런데 그 코끼리 열차 이야기 원래 꺼냈던 사람 내가 아냐."

     그럼? 이연우말고 그런 황당무계한 소릴 한 사람이 또 있단 말야?

     "음, 내 사촌 형이자, 선배."

     "아?"

     "우리 학교 출신이거든. 졸업했지만."

     "그렇군요."

     "학교 오르막길 이야기했떠니, 자기 다닐 땐 코끼리 열차가 운행했다고 하는거야. 한 두달간."

     "...뭐엇?"

     그게 말이 돼? 진짜 그랬다고??

     "운영비랑 수지타산이 안 맞아서 금방 사라지긴 했지만..."

     "진짜요?"

     "뻥이지."

     "........"

     뭐...뭐야?!!

     "처음에는 안 믿었는데 너무 진지하게 색상에서부터, 차비까지 말하는데 너무 현실적이라, 잠깐 믿었다 엄청 비웃음 당했었지."

     "그...게...."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초록색, 회색 이 다섯 대가 운행되었는데 하나는 문과대쪽으로 운영하고 하나는 중앙광장 쪽으로 가고... 또 하나는 ...해서... 코스 별로..."

     "....하아?"

     "그런데 수지타산이 안 맞고, 버스 기사 아저씨들의 파업 문제로 없어졌다는거야."

     "그게 말이 되요?"

     "진지하게 말하는데 뭐가 있는 사람이라... 믿고 난 후에 엄청 바보 취급당했어. 이중으로."

     "이중으로?"

     "아, 형 아는 동생. 동생이라기보다는 거의 친군데...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그 말에 속냐고."

     ".....에헤?"

     "사이 좋아요?"

     "응?"

     "그 형이란 사람하고..."

     "성격이 가장 잘 맞아."

     "오호?"

     "사실, 우리 둘째 형하고 제일 친해 그 형은."

     "그렇구나."

     연우 형과 성격이 잘 맞고 친한 사람이라면, 어떤 느낌일까? 부드러울 거 같은데... 그래도 저런 시덥잖은 장난을 칠 정도면 좀 재미있는 사람? 음, 형하고 사촌 지간이라니까 별 상관도 없는 사람까지 다 궁금해지네... 음, 강수빈은 만나봤으려나...?

     "어떻게 생겼어요?"

     "음... 잘생겼지. 인기 많아."

     "에헤?"

     역시 피는 못 속인다, 인가.

     "궁금하다."

     "응?"

     "그 사촌 형이라는 사람."

     "......."

     뭘 그렇게 쳐다봐요? 아, 영 쌩뚱맞은 사이인데 궁금하다고 해서?

     "형도 저번에 내 남동생 보고싶다고 했잖아요."

     "으음."

     "그런 거랑 같은거에요."

     "달라."

     그래, 사실 다르지. 형은 정말 순수하게 궁금한거고, 나는 좋아하는 사람과 관계된 일이라 흑심품어 그렇고... 그런데, 이걸 어찌 알았대?

     "달라요?"

     "네가 생각하는 것과 내가 생각하는것."

     으으으음? 뭐야? 무슨 소리. 으으읏, 알아듣게 말해달라고. 단순히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 있는 생각과 견해의 차를 말하는거야? 그게 아니면 말 안에 들어있는 뉘앙스가 다르다는 거야?

     "아, 난 여기서 이쪽으로. 넌 더 올라가지?"

     "에? ...아 예.."

     "그럼 이따가 보자."

     너무 청결하게 웃으며 한 걸음 옆으로 빠지는게... 아아, 심장이 두근두근이다. 매일이 오늘만 같으면 좋을 텐데....

    ***

     수업이 조금 일찍 끝나는 바람에 동방을 갈까 했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가면 축제 준비로 눈 뻘개진 귀신들에게 잡힐까봐, 연우 형네 동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뭐, 다른 사람이 있으면 사정 이야기하고 앉아서 기다리던가... 그게 아니면 어디 적당한 곳 찾아서 형을 기다리던가 하면 되니까.

     아, 다 왔다. 흠흠. 왠만하면 사람이 별로 없기를 바라지만... 말이지... 

     텅텅. 철제문이라 꽤나 크게 울리는 소리를 듣고 대답을 기다렸지만, 잠잠한게... 아무도 없는 건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잡이를 돌리자 문이 열린다. 잠시 다들 자리를 비운 건가 싶어서 천천히 안으로 들어선 순간.

     "누구?"

     ...날 향해 똑바로 물어오는 음성은, 쿨하고.. 낮은..

     화들짝 놀라 앞을 바라보자, 가볍게 입가에 웃음을 달고 있는 사람이 한 명 서있다.

     "에, 저는 저기 볼일이 있어서 찾아왔는데..."

     "아, 나랑 같군."

     씨익 입꼬리를 말려 웃는 얼굴이, 묘하게 움찔거리게 만들어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자 이내 부드럽게 변하는 표정.

     "볼일 있다면서?"

     "아, 에 그게."

     "들어와서 기다리지. 마침 나도 심심했거든."

     뭔가 묘하게 어려운 분위기라 차라리 나가서 기다릴까 했건만, 친히 다가오라고까지 하는데 뒤로 뺄 수가 없어 쭈뼛쭈뼛 남자가 서 있는 쇼파 앞까지 다가서자, 가뜩이나 훤해보였던 인물이 눈 안에 쏙 들어온다. 이지적으로 생긴 얼굴, 묘하게 차분하고 자알생긴. 뭐랄까, 날카롭고 화려하게 뻗은 외모다. 정말 이쪽도 사람 여럿 울렸을 것 같은... 티 하나에 청바지 하나건만, 묘하게 섹시하고 잘 어울려서.. 같은 남자로서 부담스러움까지...

     "앉아."

     거기에 익숙한 명령조. 그게 거슬리지도 않고, 무척이나 자연스럽다. 아주 태도와 말투에 밴 것처럼.

     "여기는 무슨 볼일?"

     웃음은 사교적인 습관인듯 별 말아닌데도 입꼬리에 따라 붙어있는게...

     "에, 누구를 기다리려고."

     "으음."

     "......."

     그러는 댁은 누구쇼? 라는 질문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묘하게 물어보면 안될 것만같은 묘한 감각이 질문을 꾸욱 잡아둔다.

     "아, 차라도 한 잔 마실래?"

     "넷?"

     예상치 못한 말에 움찔 어깨를 떨며 쳐다보자,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서 동방 한쪽에 있는 진열장을 뒤지는게... 볼일이 있어 여기에 있는다고 하는 걸 보니, 이 동아리 회원은 아닌 거 같건만, 하는 행동들이 아주 능숙하다.

     "저..."

     결국은 호기심에 입을 열자 샤악 돌아보는 얼굴. 어딘지 낯익은 것도 같은데....

     "그쪽은 누구세요?"

     "......."

     헉, 대답이 없다. 너무 건방졌나? 아니, 하지만 뭐 물어볼 수도 있는 거잖아.

     "예전에 여기 동아리 회원."

     "에??"

     "지금은 이 학교를 졸업했거든. 아, 그쪽한테도 선배가 되겠네."

     "아아~"

     저도 모르게 다시 한번 꾸벅 고개를 숙이자 큭큭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오는게 어딘지 놀리는 듯한 분위기라 괜시리 민망해진다.

     "이야, 많이도 구비되어있군. 들어오는 돈이 짭짤한가?"

     뭐 저쪽은 나 따위는 신경도 안 쓴다는 듯 자기 궁금한 건 다 뒤적여보고 있지만...

     "그런데, 볼일이라면 무슨 볼일..? 아 이런 질문은 실례인가?"

     ...실례인줄 알면 묻지 않는 것이 예의입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학교까지 졸업한 대선배라 그럴 수도 없어 입을 열었다.

     "에, 아는 사람 좀 만나려고..."

     "누구?"

     정말 궁금해서 묻는건지, 아니면 그저 대화를 시도하기 위한 건지 구별이 안간다. 좀 전까지 차가 들어있었던 거 같은 서랍을 뒤지더니 이제는 그 아랫칸의 파일들. 그리고 묘하게 싱긋싱긋거리는게... 재미있는거라도 발견한 건가?

     "...에... 이연우라고..."

     뭘보는데 저렇게 웃지? 라는 생각을 하며 무심코 연우 형의 이름을 내뱉는 순간... 아라라?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휙 날 돌아보는 얼굴이, 뭐랄까 이쪽이 진짜 표정? 하고 묻게 만드는.. 솔직한 감정 표현? 아까까지 빙긋빙긋 웃는 게 사교적이고 대회적인 거라면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눈썹 한쪽을 올린채 삐딱한 웃음 하나를 입가에 걸고 있는 건...

     "이연우?"

     되묻는 음성.

     "에...저기."

     "이연우를 왜?"

     ".....에에??"

     혹시 연우 형을 알고있는 사람? 그런 건가?

     "점심 같이 먹으려고... 아, 그런데 연우 형 아세요?"

     "알다마다."

     파앗 손 안에 들려있던 파일을 떨구듯 서랍장 안에 박아 넣고 척척 걸어와 다시금 내 앞에 풀썩 앉는게... 묘하게 박력이 넘친다.

     그리고 이내, 반짝반짝이는거 같은 눈을 가늘게 접으며 씨이이익 웃음을 보이는게... 뭔가 나 발을 잘못 들여놓은거 같지??

     "이연우랑은 무슨 사이?"

     "...무..무슨?"

     질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어 침 한번 삼키고 다시 쳐다보자, 이번에는 팔을 꼬고 머리를 한번 가윳하더니만 고개를 슬쩍 끄덕이곤 위아래로 나를 쭈우욱 살피는게...

     "저기..."

     "아하~"

     ????

     "연우의 그 후배?"

     "...네??"

     "그렇구나, 쿡쿡. 만나서 반가워."

     "예?"

     뭐라는거냐, 이 사람. 말하는 걸 들어서는 연우 형과 아는 사이인 거 같고, 어딘지 나도 알고 있는 거 같지만 말이지. 난 분명히 이 남자를 오늘 처음 봤다고. 길에서 스쳤다고 해도, 그래서 언핏 본게 다일 뿐이라고 해 도, 이렇게까지 생긴 사람을 잊을 거 같지는 않고 말이지....

     "연우 형이랑 아는 사이?"

     고개를 끄덕이는게... 그렇구나. 그럼 연우 형에게서 내 이야기를 들은걸까? 에, 뭐라고 말했을까나. 나에 대해? 연우 형은 우리집에서 종종 연하각 아들네미로 불리우고 있다지만, 덧붙여 끊임없이 친구 가족은 할인 혜택 없냐는 소리까지하면서...

     "그래, 연하각에 밥까지 같이 먹으러 갔다는 후배가 있어서 궁금했는데 말야."

     으으음, 그 소리까지 들었어? 뭐 연우 형이 거기에는 웬만한 사람들 잘 안데려간다는 말은 들었지만, 아 그거 생각하니까 기분 좋아지네. 그런데 이 사람은 뭐야? 왜 웃어??

     "연우랑 지내기 힘들지?"

     "....에?"

     아, 이번에는 완벽하게 이해하기 힘들다. 연우 형과 지내기 힘드냐니? 혹시 너무 좋아서 라던가...? 물론 이 사람이 알리는 없겠지만 말이지.

     "뭐가요?"

     "마이페이스잖아."

     "누가?"

     "음?"

     "....?"

     뭐라는거야, 이사람. 누가 누구랑 지내기 힘들고 또 누가 마이 페이스라는건데?

     "....하아?"

     "저기.."

     "이연우 말야, 연우. 마이 페이스잖아?"

     "에, 설마요."

     "뭐야, 이거 혹시 굉장히 잘해준다거나?"

     혹시라니, 실례잖아.

     "그런데요."

     저도 모르게, 어딘지 불퉁한 음성으로 말을 내뱉자, 알았다는 듯 고개를 두어번 끄덕이는게 살짝 툭툭 자기 팔을 두드리고 하고 말이지... 뭐야, 정말 기분 나쁘게. 사람 앞에 두고 관찰하는 분위기더만, 혼자 골똘히 생각까지 하고 말이지.

     "연우가... 잘 해주지?"

     "...네? 네에..뭐."

     "남 의견 잘 들어주고."

     그렇지. 형이야말로 정말 배려하면 끝내준다는거 아니겠어?

     "그렇죠."

     "의지가 되기도하고 귀찮은 일 떠맡겨도, 다 들어주고."

     "네."

     "혹시.... 잘 웃기도 하지?"

     말이 꼬였습니다, 그쪽. '혹시 잘 웃어?'도 아니고 '혹시... 잘 웃기도 하지?'라니. 마치 가설 세우거나 스무고개라도 하듯 말야.

     "네, 그렇기는 한데... 왜 물으시는건지."

     "푸하하하."

     깜작! 뭐야, 뭐!! 뭔데 이렇게 큰 소리로 웃어?

     "쿡쿡, 으하하. 잘 웃고. 푸흐흐흣."

     "저기요."

     "아무래도 그쪽이 생각하는 이연우와 내가 아는 이연우가 여엉 다른 인물인가본데.....푸흡."

     "예?"

     머리 안을 뛰어다니는 물음표투성이를 종잡지 못해서 머엉하니 되묻자, 툭툭 테이블을 두드리는 손길. 그리고 다시 씨익 웃는게...

     "내가 아는 이연우는 방금 말한 것과는 180도 반대라서."

     거기에, 얼토당토 않는 소리까지 해오니...

     "에엣?"

     "완전한 마이페이스에, 제멋대로 무뚝뚝하기 그지없고, 손해보는 일 죽어도 안하고 말이지."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려고 입을 여는데 한껏 쇼파 위에 편히 기대며 나른하게 날 쳐다보는 잘생긴 얼굴에 침만 꿀꺽 삼켰다. 마치 재미있어 죽겠고 흥미롭다는 듯 그런 여유로운 표정이... 참...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게...

     "내기할래?"

     "이보세요!"

     "적어도 내가 그쪽보다 이연우에 대해 더 많이 알고있다고 보는데?"

     ...재수없다. 잘생긴 얼굴로 저렇게 웃음 하나 달고 빈정거리듯 말하면 이토록 재수 없는 거구나! 새삼 깨달으며 어이가 없어 뭐라고 한마디 톡 쏘아붙이려고 하는데... 나보다 먼저 선수를 쳐서 입을 연 눈 앞의 남자.

     "못 믿겠다는거 알겠지만, 사실인데 어떻게 해?"

     "뭐가 사시링라는 겁니까."

     "아, 인상 썼네. 마음에 안 들어?"

     몹시도, 매우! 멋대로 그렇게 떠들어대는 당신 대체 누구야?

     "그래도 주위에서 그렇게 말하면 한번쯤 의심해 보거나 자알 살펴봐야하는거 아냐? 그게 스스로한테도 더 좋고."

     들을만한 가치도 없는 말이니까 그렇지!

     "쿡쿡, 미안미안. 화났나보네. 꽤나 연우를 따르나봐?"

     "...저기요!"

     "왜?"

     "저한테 이러시는 이유가 뭔지 궁금한데요."

     "그냥 궁금하잖아. 절대적으로 믿었던 신뢰가 깨지면 어떻게 되나. 확신할 수 있어? 여지껏 알고있던 네가 아는 이연우가 그 녀석의 전체고 원래의 모습이라고?"

     "네!"

     "이야, 씩씩한 대답. 하지만 원래 현실은 잔혹한 법이거든. 눈뜨고 코 베어가는 세상에, 사기 하나 둘 쯤은."

     "사기라뇨!"

     "뭐, 그냥 그쪽 반응보면 이연우가 여지껏 한 행동이 사기 수준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말이지?"

     못 참겠다!! 저렇게 함부로 말하다니!! 자기가 연우 형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안다고! 더 있다가는 싸움이라도 날 거 같아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자, 여유롭게 웃는 포즈가...

     "한번만 더 그런 실없는 소리하면 화낼겁니다."

     "아아~"

     ....아아? 아아?? 하! 진짜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자기가 연우 형이랑 친하면 친한 거고 아는 사이면 아는 사이인거고 그런거지 왜 사람 없는 곳에서 뒷말을 해?!

     "가게?"

     "그쪽하고 같이 있고 싶지 않습니다만!"

     ".....흐으으응. 틀린 말 한 것도 없는데?"

     "이봐요! 말이 너무 심한거 아닙니까? 그쪾이야말로 제멋대로 라는거 알기나 해요?"

     더 이상 참기 힘들어 크게 한마디 외치고 앞으로 나서는 순간, 벌컥 열린 문... 그리고 뒤돌아본 내가 반가움에 웃기도 전 '어라?'하는 표정으로 변한.. 연우 형.

     "형!"

     "지인아, 벌써 와 있었네... 아..."

     "여어."

     그리고 연우 형을 향해 빙긋 웃음을 날리며 한쪽 손을 들어보이는 그 싸가지! 내가 다 말해버릴테다!! 치사하다고해도 할 수 없지! 형 앞에서는 절라 사람 좋은 척하고 뒤에서는 씹겠다는거야 뭐야! 왜 웃어? 웃기는!!

     "형..."

     "푸후후, 이연우. 너 아주 재미있는 짓을 했더라?"

     "...혀엉..."

     뭐야? 무슨 소리야? 왜 연우 형 그런 낭패했다 라는 표정을??? 불안함에 슬쩍 옷깃을 잡고 올려다보자, 곤혹스러운 얼굴이 되더니만, 스윽 한걸음 앞으로 나서는게... 

     "간만에 와서 재미있는 구경하게 됐다. 나? 너 요즘 얼굴 풀렸다더니 이 이유냐?"

     "형..."

     "뭐에요? 연우 형? 어떻게 아는 사람이에요?"

     뭐냐고! 나만 빼고 말하지마! 저 이상한 인간하고 무슨 사이야? 답답함에 인상을 족므 쓰고 다시금 연우 형의 옷깃을 당기자, 이번에는 확실히 쓰게 웃는 표정이...

     "아까 말한.. 그..사람. 코끼리 열차."

     뭐?!!! 그 얼토당토않은 어이없는 사촌? 황당함에 눈을 크게 뜨고 다시금 그 남자 쪽을 바라보자, 빙긋빙긋 웃는 얼굴이... 이내 입을 열어 킥킥 웃음을 토해내곤 말을 내뱉는다.

     "소개가 늦었다. 연우 놈 사촌 형인 이원하, 라고 한다."

     ...씨발.......망했다!!

     "미안하다."

     "괜찮아요..."

     전혀 안 괜찮지만! 억지로 말을 하고 웃어보이자, 연우 형이 쓰게 웃더니 내 머리를 두어번 토닥거린다.

     정말 어이없게도 동방에서 만난 그 사람이 아까 연우 형과 마음이 잘. 맞.는.다.는 사촌이라니, 믿을 수 없지만, 나름대로 사정이 있고 노는 방식이 있겠지 싶어 입을 다물었는데... 묘하게 빙글빙글거리던 이원하인지 뭔지가 나보고 자리를 비켜달라고 했다. 자기가 뭐라고!! .....그야 물론, 사촌 관계고 혈연 관계니까, 나보다 더 친하겠지만.... 그래도 점심 약속은 어쩌고! 씨이.

     "미안해."

     "정말 괜찮아요."

     그래도 연우 형 마음 쓸까 빙긋 웃고 돌아서려는데....

     "야아~ 둘 다 여기서 뭐해?"

     ....밤새 술 마시고 늘어지게 잤음에도 뽀샤시한 얼굴을 들이밀고 나타난건 강수빈. 하아, 정말 오늘 일진이 왜 이러냐. 아침까지만해도 기분 좋았는데~

     "뭐해? 안 들어가고 어정쩡하게."

     "...그게."

     "응?"

     "원하 형...왔어."

     뭐야? 이 여자도 그 사람에 대해 알아? 아니, 물론 오래 사겼으면 친인척 관계를 다 알 수도 있다지만...

     "정말?!! 원하 오빠가? 웬일이래. 오빠~~"

     너무 친한 척 깡총깡총 뛰면서 동방 안으로 쏘옥 들어가 버리는... 강수빈이라니. 어쩐지 울컥 치밀어 오르는게.

     "미안, 이따가 연락할게."

     ....화가 난다. 강수빈은 동방 안으로 들어가버리고 나는 밖에 남고. 연우 형도 그렇게 미안하면, 나랑 있어주면 되지. 아아, 젠장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그래도!

     "네에."

     힘차게 대답해주려고 했는데 말꼬리가 처지는건 어쩔 수가 없는 듯. 힘없이 웃으며 손을 저어주자, 형도 쓰게 웃고는, 내가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갈 때까지 묵묵히 지켜보는게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타앙, 하고 철제문이 닫히는 소리를 기점으로 입 밖으로 꾸욱 눌러참은 욕을 뱉어내버렸다.

     "씨팔씨팔. 씨팔..."

     화가 나는 건, 내 자신에게... 혹시나... 하는 의문이 드는 내 자신에게다. 생각해보니, 연우 형에 대해 강수빈도 이원하인지 하는 사람이 한 말도 둘의 의견은 들어맞고 있는거다.

     그러다보니, 혹시 어쩌면..하는 생각이 드는건 어쩔 수가 없는 일. 누구보다 가까운, 연우 형의혈연지간 사이와 여자친구. 어쩌면 그들이 연우 형이 이기적이고 마이 페이스라고 하는 건 정말 허물없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버린거다. 우울하게도. 그러니까, 내게 보인 모습들은 정말 지극히 일부일거라는... 남이기에... 보이는 그런 배려일지도 모른다는... 하아...

     정말이지 이런거 생각해서 뭐 어쩌겠다는거냐, 난. 아아, 모르겠다. 적당히 딴 곳에서 비비적거리다가 수업이나 들으러 가자, 가.

     그래그래, 연우 형이... 이런 사람이면 어떻고 저런 사람이면 어떻냐... 난 내게 보여지는 연우 형을 믿으면 되는거고, 그런 형을 좋아하는 건데... 기운 내자!!

    ***

     "핸드폰에 꿀 발랐냐?"

     투욱 머리를 치고 지나가는 친구 놈.

     "오늘은 어째서 수업이 끝났는데도 잽싸게 안 튀냐?"

     빈정빈정 목소리를 놀리지만, 악의는 없다는 걸 안다. 지금 놀리는 이유도 수업이 끝난 강의실 책상에 머리를 박아버리고 한숨을 연속적으로 뱉어내기 때문일테고...

     "얼굴마담, 말 좀 해라. 야."

     누가 얼굴 마담이냐, 누가. 물론 이 몸이 좀 잘나고 잘 빠지시기는 했지만... 아아, 형은 이따가 전화한다더니, 왜 연락이 없는거야!

     "권지인, 웬 버림받은 멍멍이 마냥, 그러고 있어? 그러다 멍멍탕 집에 끌려간다?"

     "시끄러."

     벌써 시간이 꽤나 많이 흘렀는데 아직 이야기 중?

     "너, 시간 남으면 우리랑 같이 놀러가자. 오늘 재호가 다리놔서 여자애들 만나는데.... 안 갈래?"

     이 몸은 바쁘시다. 그러니까 너희들끼리 가던지...

    -딩동-

     아! 문자다. 황급히 몸을 벌떡 일으켜세우고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폴더를 열자...

     [미안 아무래도 오늘은 못 볼 거 같은데... 미안해.]

     라는 메시지가...

     "우와, 이 급격한 표정 변화를 봐? 고기 발견한 거 마냥 헥헥거리다가 바로 꼬리 내리는데."

     시끄러워, 니들. 기분도 정말 꾸리꾸리한데. 수업 들으면서 내내 형한테 연락오기를 기다렸건만. 만나면 몇 가지 물어보고 저녁도 같이 먹자고 하려고 했는데... 하아. 억지로 괜찮다는 답문을 보내고 나자 기분이 더더욱 처진다.

     "야야, 그런 얼굴 하지말고, 같이 나가자. 응?"

     "싫어."

     기분이 이런데 뭘 나가, 나가긴. 그냥 집에 가서 콕 꼬꾸라질래.

     "야야, 월요일이 축제다. 따악 이틀 남았는데, 뭔가 화려한 로맨스를 만들어야지."

     로맨스고 나발이고, 연우 형은 지금 뭘 하길래, 나랑 못 만난다는걸까. 아까 그 형이랑 같이 있나? 그럼 강수빈도? 대체 강수빈은 괜찮으면서 나는 안되는 이유가 뭐야? 강수빈은 애인이라서? 이런거 저런거 다 알려줘도 괜찮기 때문에? 그야, 나도 형한테 말 할수 없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역시 그래도 서운하다 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멋대로 좋아해놓고 또 멋대로 서운해하다니, 최악.

     "권지인. 그러니까 나가자? 야야, 일어서. 일어서."

     "하아아아."

     "한숨은. 나라가 무너졌냐!"

     "나의 가슴이 무너졌다."

     "이게 왜 또 헛소리 탱탱이래?"

     "니들이 사랑을 알겠냐..."

     쓰다, 달다, 시다... 사랑의 맛은 오묘하다. 쨔샤들아....

    ***

     아무래도 강수빈이 이쁘긴 이뻤던 모양이고 우리 동아리 여자들이 잘 빠지긴 했던 모양이다. 신경써서 왔다, 하는 건 보이는데 그렇게 파악 가슴 안쪽을 치고 오는 매력이 없다, 매력이.

     "준우 친구? 그런데 왜 한번도 못 봤지?"

     심드렁 심드렁. 몸은 나른하고 정신은 딴데 팔려있고 하지만 직업정신(?)인지 말만은 늘 유창하게 얼굴은 스마일 업!

     "내가 좀 바쁜 몸이었거든~"

     "정말? 무슨 일 하는거야?"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여태껏 내 일이라고는 연우 형만나고 연우 형하고 이야기하고 연우 형이랑 놀고....

     "뭐 이런 저런..."

     "야야, 너무 지인이한테만 관심 보이지말고 우리한테도 좀 말 좀 걸어주라."

     "푸후후."

     "에이, 그러면 지인이만큼 생기던가."

     오오, 아주 털털한 아가씨네? 마음에 들었어. 하늘색 나시 티. 그런데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야야~ 서럽다."

     "사실, 지인이 꽤 인기 있어~"

     응? 아아, 고등학교 때 한 인기 하기는 했지. 그런데 대학 와서는 어째 좀 잠잠했단 말야. 나름대로 고딩 때는 하루걸러 하루 고백하는...은 아니었어도 심심찮게 사귀자에서부터, 접근하는 애들이 수두룩 했는데 말이지.

     "뭘 찬밥 신세던데? 말 거는 애들도 거의 없고."

     "에에~ 그거야! 네가 얼음 가루 뿌리고 다니니까 그렇지."

     오, 이번에는 하늘색 나시 티에서 흰색 쫄티로. 그런데 나는 얼음 가루 뿌리고 다닌 적 없는걸?

     "왜 말 한번 걸어보려고하면 슈욱 사라지고. 그...누구지, 키 큰 사람. 무지 유명하던데."

     아아아?? 연우 형? 혹시.

     "연우...형?"

     "그래 이연우! 그 사람하고만 다녔잖아."

     "맞다맞다, 말 나온김에 말야, 내가 아는 언니가 그거보고 엄청 히껍했었다잖아."

     "응?"

     "여지껏 그 사람이 그렇게 누구랑 붙어다닌 적 없대."

     "에헤?"

     "나도 멀리 한번 봤는데 잘생기기는 무지 잘생겼더라."

     "응. 그런데 성격이 그렇게 꽝이라며?"

     ...뭐야, 이것들? 잘나가다가 왜 삼천포 똥통에 빠찌는 소리를 해?

     "지인아, 진짜 그래?"

     어쭈쭈 게다가 나한테 되묻기까지?

     "뭐가?"

     "그 사람. 다른 사람 무시하기로 캡이라던데? 그런데 잘 지내는 거 같더라?"

     "왜 학기 초에 미영이 알지? 걔가 그 사람한테 뻑가서 고백했다가 아주 호되게 차였다는데, 미안한 표정도 없이 '관심없습니다' 이러고 끝냈대잖아."

     "야~ 우리 앞에 두고 딴 남자 이야기만 그리 할거냐?"

     "질투하니~?"

     "깔깔, 걱정마. 난 얼굴은 못생겨도 성격 좋은 남자가 최고니까."

     "뭐야, 그 소리는 우리가 못생겼다는 거냐?"

     "지인이는 빼줄게."

     ".........."

     뭔데 이렇게 함부로 떠들어대는거냐. 연우 형이 어쨌다고, 정말...

     "지인아, 어디 아파? 안색이 나쁘다."

     "아..아니. 연우 형 소문이... 그래?"

     "소문? 아아~ 쿠울. 싸가지없기로 소문났다는데."

     "사람을 사람 취급 안하기로 유명하대."

     "진짜? 난 자기 잘났다고 그러는 인간들 참 싫더라."

     "지인이는 성격이 좋은가봐?"

     한참을 더 계속되는 소문에~ 들은 바에 의하면...

     그래서 니들이 직접 봤냐? 보지도 않아놓고 이따위로 소문 퍼트리고 다니는 사람 싫다. 연우 형이 뭘 어쨌다는 거냐, 뭘.

     "뭘로 드시겠어요?"

     "까페 모카."

     "블루 마운틴."

     "헤이즐럿."

     "...아이스 티요!"

     "야아~ 권지인 너 뭐야!"

     "내가 뭘?"

     "내가 뭐얼? 니가 지금 내가 뭘이라고 했냐?! 좋았던 분위기 파토내고 나서도 그런 소리가 나와."

     "별로였잔항."

     "별로기는! 그 정도 수준 높기가 쉬운 줄 알아?"

     애초에 애들을 만날 때, 정했던 약속. 상대가 마음에 들면 음료를 시킬 때 커피 류를 시킨다.아니라면... 다른 거. 결국 다른 놈들은 다 커피를 시켰는데 혼자, 장렬하게 아이스 티! 를 외치는 바람에, 좋았던 분위기가 점차 다운되더니.. 그대로 뿔뿔이 흩어져버린 것.

     "니야, 그래 자알 났으니 여기저기서 고른다지만 임마 우리는!"

     "뭐야, 뭐가 꼴려서 그랬냐."

     "됐다. 말해야 니들이 알겠냐."

     "야아! 권지인."

     "나 간다..."

     휘적휘적 손을 두어번 들어 흔들어주고 발걸음을 옮기자, 아주 축축 처지는 기분이다. 문자라도 하나 더 들어올까, 핸드폰만 손안에 만지작만지작. 혹여 내가 벨소리를 못 들었나. 부재중 통화가 없을까 확인하고 또 확인해도.. 냉장고인지, 아주 얼었다.

     "너무 한다."

     말로 내뱉고 나자, 또 서러워져서 기분은 die. 오늘은 금요일인데 오늘 연락이 안 닿으면 이틀 간 또 형 얼굴 볼 수도 없을테고 나는 그저 멍하니 수백 번 본 동영상을 다시 돌려보고 돌려보고 할텐데... 좋아한다는건 감정 소모가 너무 큰 거 같다. 형은 알 수 없겠지. 내가 얼마나 이렇게 많이 생각하고, 좋아하고 보고싶어한다는걸. 처음에야 그저 재미있고 좋아서 쫓아다니면서 시간을 나눴지만, 이후에는 일부러 꼬옥 같이 있고싶어서 시간 쪼개고 맞추고... 커피는 잘 마시지도 않지만, 형에게서 나는 커피 향이 좋아서, 괜히 커피 전문점 앞에서는 발길을 멈춰 쳐다보고... 서점에 갈 때도... 아 이건 형이 잘 읽는 소설들이다, 아니다. 생각하고... 음악을 들을 때도... 심지어 밥상머리 앞에서도 남이 하는 젓가락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연우 형은 더 잘하는데, 아 연우 형이라면 이렇게 했을텐데 따위를 일일이 비교하고... 하루종일 정말, 연우 형을 생각 안하는 시간이 얼마일까...를 계산하면... 거의 그런 시간은 없다고 할 정도고...

     그야, 같은 남자끼리 이상하잖아! 하고 생각 안 해본건 아니지만, 그런 걸로 나눠지기 이전에, '성별'이 문제가 되기 이전에 좋아한다라는 감정이 훨씬 커서...

     "하아..."

     다시 한번의 한숨. 차라리, 핸드폰의 밧데리가 다 나가버렸다면, 집에 가서 핸드폰 충전을 하면 메시지가 들어와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라도 가질 텐데... 빽빽하게 세 칸 모두 들어찬 밧데리 표시. 많이 바쁜 건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하루에 두 번 씩이나 '이연우가 이런이런 인간이다.'라는 소리를 들어서.. 자꾸 신경이 쓰이는 걸지도..

     후우, 그래그래 신경 끄자. 이러다가 노이로제라도 걸리겠다고. 의처증 의부증 가진 사람들 욕할 게 못된다. 정말 이러다가 도착증이나, 스토커가 되지나 않을까 심각하게 걱정까지 하게되니 말 다한거지만... 뭐... 오늘 안으로... 연락이 오겠지... 기다리자. 나름대로 그것 또한 두근두근한 일일테니...

     "얼굴 좀 펴라. 축제 준비 하나도 안 도와주고 쏠랑 지금 얼굴만 들이민 주제에 표정이 왜 똥 씹은 표정이야?"

     "그래! 게다가 니가 그렇게 거부하던 드레스도 아니잖아~"

     ...집 전화로 내 핸드폰 번호를 친히 눌려서, 혹시 고장이 아닌가 확인까지 해보셨다. 이 내가. 누나가 웬 뻘짓이냐고 구박할 정도로 금, 토, 일. 이 삼일간, 연우 형에게 온 연락은 딱 하나. 오늘은 만날 수 없을 거 같다는... 그거 달랑 한 개. 집에 가서도 손에서 핸드폰을 놓지 않고 심지어 샤워할 때도 수납장 안에 넣고 종종 벨소리 못 들을까 샤워기의 물까지 줄여보곤 했지만, 요지부동 핸드폰은 울리지 않았다. 금요일은... 그래, 오랜만에 사촌 형도 만났고 하니 바쁘겠지, 라고 이해하고 넘어가고 토요일은 밀린 일이라도 있나보다 했지만 일요일이 되어서는 초조해져버렸다. 형이 나를 만나고 한번이라도 연락을 안했던 적이 있었던가... 한다면.... '없다'라는 게 정답.

     인터넷에서도, 핸드폰으로도 아무런 연락이 없는 연우 형. 답답해서 정말 궁금해서 몇 번이나 전화를 먼저 하려고 했지만, 문득 들어버린 생각은 내가 형의 휴일을 너무 방해하는 거 아닌가 하는거... 생각해보니, 강수빈하고 같이 오붓하게 시간을 보낸다고해도 전혀 이상할게 없고 오히려 여지껏 주말마다, 쉬는 날 마다 나랑 놀러다녔던 일이 더 기적(?)에 가까웠던 거라는 걸 벼로 알고싶지않은 형태고 자각해버린거다. 게다가 오늘 월요일. 신경질나고 답답해서 잠을 설치고 버스를 타고오다 졸아서 한 번 자빠질 뻔하면서, 연우 형과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리고, 학교에서 쭉뻗은 가로수길 걸으며, 연우 형이 말한 코끼리 열차가 생각나자, 더욱 울컥울컥에 서러움이 증가. 게다가 이런 나의 심정은 아랑곳하지않고 학교는 오늘부터 4일간 가을 축제. 아주 정문에서부터 '즐겁소이다!'하는 오라가 분출하는 거 같아서 영 심기가 불편했는데... 동방에 도착하자마자 날 반긴 건 기다렸다는 듯이 눈이 시뻘게진 채 날 향해 달려드는 개떼...가 아니라, 인간 한 무더기. 그리고 입으라고 강요당한 옷은...다행히도, 미니 드레스는 아니었지만.. 웬 백작 풍의... 중세복이냐 싶어서... 한숨만 뻑뻑 내뱉었더니.... 지금 이 난리다.

     "정말, 어깨선을 넓힌다는게 어휴 원통해!"

     아무래도 허리는 어찌 맞는 옷이었다고 해도, 남자 어깨와 여자 넓이의 차이가 있었던 건지 윗부분에서 자크가 안 올라가는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모의 실험 결과- 덕분에 나는 좋지만, 꽤나 누나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인듯...

     "그러니까,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잘해! 니가 그리 거부하던 드레스가 아니니까!"

     "그래그래!"

     잔소리도 꽤나 한몫하고 있고... 하아아, 정말 그래도 기운이 처진다. 드레스고 뭐고 말야, 어째서 형은 연락이 없는 걸까?

     "권지인! 그런 얼빠진 얼굴 집어치우고! 자아!"

     "...응?"

     "그거 손수 만드신 노가다의 증거인 쿠폰이다. 이거 받고 오면 DC된다고 해!"

     ....삐끼구만, 내가 아주.

     "화이팅!"

     "무슨 파이팅?;"

     "지금부터 우리는 천막치러 가거든? 그러니까, 열심히 넌 돌고와!!"

     아니, 밀지마! 저저저. 좀 쉴 시간을 줘야지!!!!! 으아앗, 내 기분도 좀 생각해 달라고!!!

     "자알 어울린다."

     놀리는거지? 이거.

     "역시 몸매가 좋아서 그런가."

     "놀리냐?"

     "설마, 따악 호스트같다."

     "야!"

     같은 삐끼(?) 한 조인 재영이 녀석이 툭툭 어깨를 두드리며 히죽히죽 웃는게... 나도 안다. 지금 내 꼴이 꽤나 상당히 웃기다는 거. 그야 드레스 차림보다 더하겠냐 싶지만....

     "양복 주제에 다리에 너무 들러붙는다."

     "각선미 드러나고 좋구만, 뭘."

     진심으로 말하고 싶냐, 그걸?;

     "아 나는 광장 쪽에서, 나눠줄게. 넌?"

     "나는... 학생 회관 쪽."

     "오케이, 오케이. 건투를 빈다."

     "뭔 건투?"

     "혹시 알아, 이거 하다가~ 한 명 낚일지?"

     캠퍼스 커플 컷팅 클럽의 한 명인 니가 할 소리는 아닌 거 같다만?

     "여튼 잘해라!!"

     힘차게 손을 흔들고 먼저 뛰어가버린 녀석을 바라보고 손 안에 한뭉텅이 들린 쿠폰을 빙자한 종이 조각을 바라보다 심란해져버렸다. 사실 축제고 뭐고 오늘 학교 나온 이유는 연우 형을 만나려고 인데... 이런 상태라면 사실 좀 만나기 어려운 걸까? 아, 하긴 이런 웃긴 꼴로 만나는 것도 좀 그렇지만... 정말 잘도 요상한 옷들을 구해지. 이건 어디로보나 양복이라기보다는, 역시 드라큘라 코스플레이, 라는 느낌인걸. 펄럭이는 망토도 그렇고. 하긴 송곳니 모조 틀니까지 안 끼라고 한 게 어디냐.. 그나저나, 정말 이러고서 쿠폰을 나눠주면 맷아이 오른대? 사실 애초에 파전 한 장에 9천원, 하고 저한 주제에 말야, 원가 만원에서 천 원 빼드립니다, 하는 사기성 쿠폰을....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파전이 그래... 어떻게 9천원씩이나 하냐. 아무리 한철이고 파는 상대는 돈튀고 배고프고 그런 녀석들이겠지만, 물론 교수님들한테도... 그래도 나같으면 손가락 빠는 한이 있어도 부추만 들어간 9천원짜리 파전 안 먹고 말지. 솔직히 어설픈, 쿠폰 주는 것도 웃기고 말이지. 똑똑한 애들이라면 이런거 안 받고 만다, 안 받고!

     ....라고 생각했는데..... 우리학교에 파전에 미친 애들이 많은 걸까? 아니면 파전이 9천원이면 싸다고 생각하는 걸까?

     "파전 위치가 어떻게 된다구요? 자알..."

     벌써 세번째야 아가씨.

     "그러니까 이리로 쭈욱 내려가셔서요..... 혹시 우리 학교 학생 아니세요?"

     "오호호호, 그런데 가격이 얼마요?"

     쿠폰에 적혀있잖아! 정말 큰맘먹고 미친 짓한다 생각하고 지나가는 여자한테 '파전 드시러 오세요'하고 쿠폰을 준 이후로, 슬슬 지나가던 여자들이 모인다 싶더니 이내 내 주위에 빼앵 둘러서서 받은 쿠폰을 들고 갈 생각은 아니하고, 주변에 서서 쨍알쨍알 거리는게....

     "저기 그쪽은 파전 안 부쳐요?"

     왜? 쿠폰 주지말로 파전이나 부치고 서 있으라고?

     "아뇨, 저는...이거 나눠주기만..."

     "혹시, 이거 몇 시에 끝나요?"

     으음, 글쎄. 쿠폰 다 나눠주고 나서일까?"

     "글쎄요, 매상이 오른만큼 오르면, 우리 마녀누님이 놓아주려나?"

     "마녀누님?"

     가영이 누나, 미안... 아주 입에 뱄다. 마. 녀.

     "있어요, 그런 사람."

     "그런데, 몇 학년이에요?"

     아니, 파전 먹는데 그게 그렇게 중요해? 그냥 가서 한 장 퍼뜩 사먹지 왜 옆에서 줄줄줄줄 따라오고 그래?

     "1학년인데요."

     "어머머머 신입생?"

     "네."

     "어쩐지 귀여운 맛이 있더라니~"

     ....뭐냐, 이 여자. 그래, 그쪽은 꽤나 삭은 맛이 있긴하네.

     "여자 친구 있어?"

     "에이~ 있겠지."

     "여자 친구 있으면 이런데서 쿠폰 나눠주겠니?"

     뭐야, 갑자기 존대에서 왜 말이 반 토막으로 하향 곡선을 그려? 내가 언제 말 놓으라고 했어? 원...

     "저기, 저 좀..."

     급기야 날 가운데 두고 떠들어대는 수다에 질려서, 한발자국 움직이려고 하는데...

     "어~ 지인아!"

     등뒤에서 울리는 명쾌한 음성. 휙 돌아보자... 차라리 이 여자들이 낫지, 강수빈이냐...

     "어머~ 옷 잘어울린다, 얘~"

     놀리는 발언이라면 사양이고 진실이라고 해도, 거부하는 바입니다만?

     "나도 한 장 줘."

     그래도 군계일학이라고 했던가. 이 빼앵 날 두르고 있는 여자 무리들 얼굴을 다 합쳐도 저만한 미모가 아니 나오지, 암.

     "파전 드시게요?"

     "응."

     웬만하면 와서 염장 지르지말고 그냥 곱게 가지. 하긴 강수빈이 오면 우리 동아리 남자들도 여자들도 난리나긴 하겠지. 좋아서 라기 보다는... 뭐랄까, 드디어 이 권지인이가, 착실하게 작업에 몰두하고 있구나! 라는 필을 받을테니...

     "여기요."

     내키지않아 하면서도 쿠폰 한 장을 내밀자, 받아 챙기면서 생긋생긋 웃는게 주변 여자들 말이 없다. 아마 상대적으로 잘난 인간이 서 있을 경우에 느껴지는 위축감 때문인가? 그게 아니라면 아는 사람들끼리 말할 때는 조용히 해준다는 예의를 갖춘 모습을 보여주는걸까? 물론 나는 단연 전자 쪽이라고 확신하지만!

     "저, 그런데... 연우 형은?"

     솔직히 강수빈한테 연우 형이 바빴어요? 지금 어디있어요? 하고 물어보는거 배알꼴리지만, 궁금한건 궁금한 거라 조심스레 운을 띄우는데.... 뭐라 강수빈이 대답하기 찰라, 시선에 들어온 것은, 내가 서 있는 위치에서 조금 덜어진 곳. 거기에 서서 분명히 이쪾을 쳐다보는... 연우 형! 저도 모르게 반가움에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는데... 당연히 웃으며 다가오거나, 마주 손을 흔들어 인사 해올거라 생각했던.. 연우 형이... 잠시 날 한번 더 쳐다보더니 그대로 몸을 휙 돌려버렸다.

     "연우야, 지금 우리 동아리 애들 있는 곳에... 뭐하니?"

     "에? 저쪽에 누구 있어요?"

     "뭐야? 아무도 없네? 왜 갑자기 손을 들어 흔들어?"

     벙쪄버렸다. 반가움에 들었던 손을 아래로 내리면서 그대로 머엉... 방금 일어난 일이 뭐였을까.

     잘못 본 건가, 하는 생각을 해봤지만. 이 내가, 하루에도 수십번씩 형의 동영상을 돌려보고 멀리 가는 뒷모습만 봐도 단박에 형을 알아볼 수 있는 내가, 정면으로 사람을 마주보고도 못 알아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러니까, 분명 방금 내가 마주 본 사람은 이연우! 가 맞다는건데.. 그렇다면, 역시 피할 수 없느 ㄴ사실 하나는 형이 날 보고도 그냥... 가버렸다, 라는 건가?!

     "지인아?"

     "..아....저...저는... 이거 마저 나눠주러 갈게요."

     멍청하니 여자들 틈새를 빠져나오며 어딘지 멍청해진 기분으로 타박타박 걸음을 옮겼다. 손 안에 들고있던 쿠폰은 꾸깃꾸깃하게 접혀져버리고..... 뭔가 알 수 없는 기분이 가슴 안쪽을 가득 채우는게.. 뭘까, 형이 왜 날 보고도 그냥 지나쳤을까? 하는 의문만 새록새록 솟아오른다. 나를 못 본 건 아닐까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분명히 시선이 부딪쳤다. 너무 바빠서 그냥 간 건 아닐까 싶지만, 인사에 응하지도 못 할 정도로 바쁘다는건...

     "뭐야!"

     울컥, 샘솟는 서러움과 짜증. 나는 요 삼일간 무슨 일이 있었나, 궁금하고 궁금해서 초조하고 그랬는데, 마주치자마자, 아니 보자마자 반가워서 손을 흔든 날 무시하고... 가버리다니... 젠장!!

     "받아요."

     "뭐...뭐야?"

     휙,휙. 멍하게 걸으면서 옆을 스쳐지나가는 사람들한테 한 장씩 쿠폰을 마구마구 줘버렸다. 어떻게든 이 답답한 오해를 풀어버리고 싶다. 분명 형을 만나면 그럴만한 해명을 들려줄테고... 그러고나면 이 답답한 가슴도 풀리겠지.

     "여기요."

     "으응?"

     "파전 쿠폰이요."

     "저기요~"

     ....어쨋든 쿠폰을 빨리 없애고 형한테 가서 삼일간 바빴냐고... 아까 나 못 봤냐고 물어봐야겠다.

     새삼 부끄럽다는건 이런걸까. 학교 캠퍼스 한 켠에 자리를 잡고있는 형네 동아리를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뭔가 괜시리 나서는게 부끄러워져 버렸다.

     그냥 편안하게 '연우 형 만나러 왔는데.'라고 해도 되는데 어쩐지 조금은 변태가 된 심정으로 숨어서 지켜보기를 약 15분. 처음에는 아까 본 게 역시 연우 형이 맞았어! 하고 울컥거렸다가 나 아닌 다른 사람하고 저렇게 지내는 연우 형을 본 적 없구나 하는 깨달음에 관찰 모드에 돌입한 게 중간 쯤... 그리고 지금 한가지 나 깨달아 버린건...

     그렇게 잘 웃는 연우 형이... 전혀 웃지 않는다는 것. 누군가 말을 걸어도 무표정, 무뚝뚝. 마치 처음 버스에서 나를 만났을 때처럼, 그런 정감없는 표정이...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라서... 괜시리 걱정까지 되어버렸다.

     봐라, 지금도 웬 여자애가 생긋생긋 웃으면서 음료수를 건네는데, 저런 딱딱한 얼굴이라니. 크읏... 물론 이런 것도 이리보니 쿨하고 분위기 있어! 라고 멋대로 심장이 뛰고 있지만... 아아, 이대로 더 보다가는 심장 터지겠다. 슬슬 형한테 가볼까 싶어 찰싹 벽면에 들러붙어있던 몸을 떼는데...

     "요즘 선배 소문 재미있던데요?"

     낭랑하게 울리는 여자의 목소리. 거기에 흠칫한건... '소문'이라는 단어. 가뜩이나 요즘 '이연우는 이런 인간'이라는 소문에 민감하고, 또 내가 모르는 무슨 소문이 있는 건가 싶은 호기심에, 옮기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차악 다시 숨어버렸는데...

     "뭐가."

     참, 냉정하게도 잘라 말하며 음료수만 마시는 연우 형. 말 건 여자애가 민망하겠다. 에이~ 여자한테는 좀 더 부드럽게 해줘야지. 아무래도 오늘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왜, 그 국문과 후배."

     응? 국문과 후배...라면 나??

     "...지인이?"

     두근, 형 목소리로 '지인이'라고 불리면 요즘에는 그것만으로도 심장이 쿵쿵이다. 하긴... 형 말이라면 요샌 이름 뿐 아니라 '밥 먹을래?' 마저 반응을 보이는데 말 다했지.

     "그래도, 권지인이던가?"

     "......흠...."

     "꽤나 잘생겼던데?"

     어이, 아가씨 보는 눈 있습니다. 그래, 하긴 내가 한 인물하지. 우리 누나는 결혼감은 아니라고 맨날 구박하지만! 근데 그게 형 소문하고 무슨 상관? 점차 이는 호기심에 귀를 쫑긋 세우고 최대한 자세히 들으려고 신경을 집중하는데...

     "그래서?"

     .....뭔가, 형.... 목소리가 껄끄러워졌다. 귀찮다는 듯, 무슨 상관이냐는 듯 그렇게 냉랭하고 잘라 말하는...

     "선배 좀 부드럽게 말해줘요."

     "이야기의 요점이 뭐야."

     "장난 아니냐는..."

     "너 무슨 소리가 하고싶은 거야."

     ....심장이 툭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장난'이라니... 소문이라니...? 무슨 소리야?!

     "선배, 걔한테 대하는 태도만 다르다면서요? 그러니까 그런 소문이 나지."

     "그런데."

     무슨 소리야? 이게? 대하는 태도가 달라? 거기에 형이 '그런데' 라고 말한 건 인정한다는 뜻?? 뭔가 재수없는 생각과 여태껏 들었던 말들이 귓가를 마구 지나가는게...

     "여튼 뭐 그런건 둘째치고 나 소개 좀 시켜줘요."

     ".....뭐?"

     "속이야 어쨌든 겉.으.론. 친한 후배라면서요? 아, 동생이라던가? 여하튼 권지인 얼굴이 제 취향이던데? 다리 좀 놔주세요."

     ".........."

     말이 없다. 두근두근. 심장과 귓가를 두드리는 맥박 소리. 혼란스레 접해지는 모습들, 소리들. 정리가 잘 안 되는걸 최대한 신경을 끌어당겨 머릿속에서 말들을... 그 많은 말들을 구별하기 시작했다.

     강수빈이 내게 했던 말. 이원하라는 사람이 내게 한 말. 며칠 전 만났던 여자들이 들려줬던 이연우라는 사람의 소문. 믿지않고 콧웃음 쳐버렸던... 그 말들이, 어쩐지 지금 '사실'이고 '진실'이라고 알게 되어버린 거 같아서... 더욱이 내게 보여줬던 연우 형의 행동들이 '장난'이고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들이밀어진 거 같아서 머리가 혼란스러워져 버렸다. 머리 한 켠이 하얘지는 기분.

     그렇게 어쩌지도 못하고 눈만 크게 뜬 채 멍해진 내 귓가로 결정타를 날리는 형의 음성이 쏟아져들어왔다...

     "후배 같은 거... 친한 동생 따위 아냐."

     ...쿵. 가슴 안에 있던 빈 공간으로 여지껏의 믿음이, 감정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친한 동생이니까', '동생이 가지고 싶었다.'라던 형의 말들이,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행동들이, 그 다정했던 말들이 '거짓', '장난'으로 찍혀서 떨어졌다.

     "에! 역시 선배 그러면 장난인 거에요? 그러면 안돼요. 하긴 이상하다싶긴 했어. 선배가 그렇게 한 사람한테..."

     다른 곳으로 멀어져가며 이름 모를 여자가 연우 형에게 시끄러운 말들을 떠들어댄다. 그리고 연우 형은 그 어떤 반박도 하지 않는다. '긍정' 그것으로 밖에 받아들일 수 없는....

     "심심했어요? 그렇다고 그런 애를 놀리면 안되죠. 여튼 선배 특이한 건 알아준다니까."

     가슴이... 너무 아프다. 다정하게 웃는 모습이 좋았고, 부드럽게 '지인아' 하고 부르는 음성이 좋았다. 하나하나 친절하게 대해주는 태도가, 신경쓰듯 돌아보는 눈매가... 처음 만났던 그 무뚝뚝하고 딱딱한 모습따위 저 멀리 날려보냈을 정도로, 기억조차 못했을 정도로 빠져버렸고 그 태도 하나하나에 사랑스러움을 느꼈다. 그런데... 그런 이연우는 모든 사람이 아는 진짜 이연우가 아니라고 지금 누군가가 말한다. 내게 했던 모든 일들은 특이하고 남 감정따위 생각 안하는 '이연우'라는 사람이 단순히 자기 좋다고 쫓았던 '형형' 하고 따랐던 어떤 어린 녀석에게 친 '장난'밖에 안된다고...말하고 있는거다.

     '후배나, 동생 따위 아냐."

     ........그럼... 나는... 당신한테 뭐였지?........

     "연우 형."

     눈이... 빨갛게 안 보이려고 화장실에서 몇 번이나 찬물로 눈을 식혔는지 모른다. 목소리가 막혀들리지 않게 하려고 '아아~'하는 음성을 몇 번이고 내뱉었는지...

     최대한 웃으려고 아무 생각 안 하려고 입꼬리를 끌어당기는지 형은 모르겠지. 

     "아! 지인아..."

     돌아보는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간다. 아까 날보고도 그냥 지나쳐버렸던 건 이제 슬슬 이런 장난들이 지겨워졌기 때문? 묻고싶은 말이 산더미였지만, 그렇게 하나하나 묻기 시작하다가는 다시 눈물이 솟을 거 같아서 꾸욱 참고 웃으려 애썼다. 더 이상 질질 짜기 싫다. 어차피 내가 좋아한 사람이 좋아했던 모습들이 '가짜' 였다면 내가 가졌던 감정도 '가짜'. 거기에 연연할 필요가 없는 걸테니까...

     나는 내가 지금 하려는 행동에 어떠한 가책을 받을 필요가 없는거다.

     "바빠요?"

     "아...음..."

     "왜 전화 안했어요. 바빴나봐요, 형?"

     "아... 조금."

     어색하게 웃는 거. 거짓이지? 아까.. 봤다. 한시간 내내 그 이상 지켜보면서, 형이 사람을 향해 웃는거 한번도 못봤어.

     "나, 형한테 상담할게있어서."

     "....뭐?"

     "나, 오늘 수빈 누나한테 사귀자고 하려고."

     "...........어?"

     그래, 또 한가지 알게 된 게 있지. 내가 왜 자기 여자친구한테 마음있다고 하는데도 잘 해보라는 둥 했던 이유. 날 배려한게 아니라 책해서가 아니라 '재미'있어서 였겠지. 그렇게 친한 사이, 절대 갈라놓을 수 없다는 그런 믿음이 있었던 것 아닌가.

     "뭐...라고?"

     "오늘 수빈 누나한테 말하려고."

     "하아... 그 전에 지인아... 나... 너한테 할말이..."

     왜 이제는 지겨워져서, 놀이 그만 끝내려고? 누구 맘대로? 멋대로 사람 감정 다 휘둘러놓고 이제와서 발 빼겠다면 그만이야?

     "나중에 말하면 안될까요? 나 좀 바빠서..."

     "지인아..?"

     왜 이상한 거 알겠어? 형 말이라면 뭐든 헤실헤실 웃으면서 따르던 녀석이 이렇게 거절하니까 이상해? 우스워?

     왜 상처 하나 더 줘볼까? 자기 즐거우라고, 좋으라고, 사람 감정 멋대로 휘두른게... 그렇게 휘둘림 당했다는 걸 알았을 때감정이 어떤 건지?... 아 왜 그런 표정을 짓는거야? 잘못한 건 당신이면서. 이연우, 너면서!

     "정말 난 운이 좋지 뭐에요."

     "......."

     "연우 형이 수빈 누나랑 사이가 좋아서, 같이 있을 시간 많이 만들어줘서 고마웠어요."

     당신 까윈 안중에도 없었다는 듯이, 형이고 뭐고 나한테는 그 여자와 있었던 시간이 중요했다는 듯이 이런 말.... 어때? 들으니까?

     "........지인아."

     "저 갈게요."

     "저!"

     "앞으로 만나기 힘들겠네요. 수빈 누나가 오케이만 해주면. 만약 차이면 더 괜찮은 여자 소개 시켜주세요. 형 주변에... 많죠?"

     아무 사심없다는 듯 싱긋 웃으면서 던져 내놓는, 마음에도 없는 말.

     "형하고 다니면 우쭐해서 좋아요. 여자들도 다 돌아보고. 하지만, 이제는 그런 것도 정리해야죠. 재미있었어요."

     뒷통수를 맞았다는 듯 혹은 그 이상 아무 말 없이 그대로 표정이 굳어서 가만히 한 자리에 서 있는 이연우. 모습 하나하나 태도 하나하나 좋아했떤 사람. 성별 따위 아무래도 좋아, 라면서 그냥... 마냥 좋았던 사람. 그 모든 내 눈을 통해 내 감정을 통해 봐왔던 것들이 느꼈던 것들이... 거짓임을 안 지금이도... 저... 꾸며진 표정에.... 또 다시 가슴 저미는... 그런 사람...

    ***

     -난데..-

     "죄송해요, 형 저 지금 바쁘거든요. 나중에 다시 통화해요."

     타악, 폴더를 닫아버렸다. 눈 앞에서 소주를 입 안에 털어넣던 진희 형이 슬쩍 인상을 찌푸리는 게...

     "야, 기운 없어서 축축 쳐졌던 녀석이 무슨 전화를 그렇게 쌩쌩하고 매몰차게 받아?"

     "별 거 아냐."

     .....거의... 근 한달. 오기로 고백했던 수빈 누나에겐 거절당하고-이런 거 따위 상관없지만- 축제와 그 열기도 지나가버린지 오래. 나는 연우 형을 피하고 있다. 걸려오는 전화도, 수업이 끝날 때까지 강의실 밖에서 기다린 모습도... 모두. 만나면 만나게 되서 얼굴을 마주하면 더 이상 견디지 못하는 감정이 폭발해서, 내가 좋아했었다고 당신이 나 놀리려고 했던 모든 모습들에 빠졌었다고 말해버릴 거 같아서... 만날 수도 없었다.

     "야야, 이모가 너 무슨 일 있었냐고 나한테 전화 할 정도면... 대체 정말 뭐냐?"

     힘들다는 거. 이 근래 힌들었던 건... 이연우가 내게 했던 거짓말들이, 거짓되노 모습들이... 거기에 상처받아서가 아니다. 그것보다 더욱 숨을 조르는건... 그 모습들을 연우 형을 앞으로 볼 수가 없다는 것. 끊어내야지, 이제는 아니지, 하고 마음 속으로 다짐해도, 자꾸만 보고싶어지는 약한 마음. 그냥 동생으로도 좋다고. 여지껏의 거짓된 모습으로 대해준다고 해도... 좋다는 나약한 내 마음.

     "너... 설마 강수빈한테 차인 것 때문에 그래?"

     "...뭐가?"

     "너 전에 왜 그 여자 좋다는 분위기 풍겼잖아."

     정확히는 강수빈이 아니라 이연우였지. 이도저도 끝장났지만.

     "그러게 내가 일하고 감정하고 흔들리지 말랬잖아."

     "피식..."

     "뭐가 웃겨? 우습냐? 짜식이. 형님이 말씀하시는데."

     "감정이란게 그렇더라 형. 눈치 못 채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정신 차리니까 젖어있더라는..."

     "뭐 그렇지. 그렇게 젖어버린 걸 해결하는 방법은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 젖어버린 걸."

     "푸후."

     "뭐야? 왜 웃어?"

     "형답지 않은 말이라."

     "이 짜식이~"

     "그런데 그 감정이 마르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글쎄... 얼마큼 젖어있느냐에 따라 다르지 않나?"

     "형..."

     "응?"

     "그런데.. 세상에는 멈추지 않는 비도 있어..."

     "장마철이냐?"

     "푸후후, 그런 거 처럼."

     그래, 이미 이 비가 정말 비가 아닌, 눈속임 위에 거짓된 비라고해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쏟아지는 거처럼...

     "그런 게 어딨냐. 비는 언젠가 멈춘다."

     "그런가..."

     "다만.."

     "다만?"

     "그렇게 비가 멈추고나서 무지개가 뜬다는거 아니냐."

     "...하아?"

     "...진짜 좋아하는건 그런거겠지."

     "진짜 좋아하는 것?"

     "비오는 감정에 젖고 무지개가 뜬 풍경에 감동받고, 맑게 개인 날에는 기쁘고. 뭐가 됐던 이뻐보이고 좋겠지."

     ........그래. 그 말이 맞는 거 같다. 비가 멈추고 나서도 옷이 마른 후에도 나는 종종 옷에 배인 햇빛 내음에 또 그 사람을 생각하고... 하늘에 무지개라도 걸린 날에는 눈물 날 거처럼 슬퍼도 다시 보고싶어할테지.

     "정 포기 못하면."

     "....?"

     "다시 댓쉬해봐."

     "됐어."

     뭘 어떻게 말해. 나 형 좋아해요. 형이 날 놀리고 데리고 장난쳤다는거 알지만, 역시나 좋아해요. 라고?

     "요새 그 둘 여엉 아니던데 혹시 아냐. 지금 댓쉬하면 성공할지. 쩝, 우리 동아리가 컷팅 클럽이기는 하지만, 그 전에 넌 내 사촌 동생이고...."

     응?? 무슨 소리야?

     "둘이 여엉 아니라니?"

     "...어? 몰랐냐? 너 이연우랑 친하다면서 것도 모르냐."

     "뭐야! 무슨 소리야!"

     "둘이 파경설."

     "파경...설?"

     "이연우 요새 학교 안 나오잖아."

     "...하아?"

     "몰랐어?"

     몰랐다. 피해다녔으니까, 일부러 형이 기다릴만한 수업은 도중에 출석 체크만하고 나가고... 형이랑 함께 가던 곳 피해다닌다고 애먹고... 전화 오면 끊고. 덩달아, 강수빈 그 여자도 피했으니... 알 리가 만무하다.

     "강수빈도 분위기 여엉 아니고."

     "정말?"

     "응, 들은 바에 의하면 왜 그 독종 이연우가 술 취해서, 학교 벤치에 멍하니 앉아있었다는 거 본 인간도 있고."

     ...나...때문인가? 설마, 나... 때문에??

     "나름대로 너 성공한걸지도 모른다고, 말 많다. 야~ 요즘 너도 분위기가 여엉 아니라서 애들이 말 못해서 그렇지."

     기뻐해야지, 권지인. 이연우가... 날아 똒같이 상처받았다는데... 즐거워야지... 왜....왜 자꾸 가슴이 아프냐... 왜.

     "연우..형 본 적 있어?"

     "음? 에 나도 한... 열흘 전 쯤에 잠깐. 동방에 너 찾으러 온 것만 봤다. 그 새끼 맨날... 뻔뻔한 얼굴 해가지고 다니더니 기가 좀 죽었던데?"

     ....왜? 왜에? 당신 그렇게 잘난 인간이었다며. 사람한테 감정 안주고, 친해지지 않으려고 하고. 혼자 멋대로 다니는 마이 페이스라며. 나한테 왜 그러는데? 재미있게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멋대로 사라지니까 심심해? 그래서 생각날 때마다 전화하고 찾아오는 거야? 왜 자꾸만 그래...

     "술이나 한 잔 더 따라줘."

     "이게 형님한테. 으휴, 관두자, 관둬. 쨔샤, 마시고 풀어 임마."

     시간이 너무 남아서 그런데... 머릿속을 휘몰아치는 잡념들은... 생각할 시간이 남은 탓... 깨끗하게 몰아내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마시고 2차 가자! 형님이 쏜다!!"

     아니... 깨끗하게 몰아낼 수나 있을까?

     "체리코크라잖아. 레모네이드를 가져다주면 어쩌니."

     몇 번째 실수인지 모르겠다. 멍한 걸 벗어나려고, 쓸데없는 생각 좀 날려보려고 학교 근처 까페에서, 알바를 시작한 게 일주일 째. 이 일주일 사이에 얼마나 많은 실수를 했는지는... 차마 말로 다 못한다.

     그나마 까페 주인 아주머니가-누나라고 부르라고했지만- 성격이 털털해서, 별 말 안하고 있지만... 스스로 행동에 기가 막혀지는 것. 뭐 대체로 손님들도 실수를 한다손치더라도 '이거 바뀌었는데 바꿔주세요' 정도니까... 가끔 까다로운 손님 걸리면 다다다닷거리지만, 그런건 지금까지 두 번이었고, 오히려 주인 아줌마는 나 나오고 매상올랐다고 좋아하시니까...

     "아 9번 테이블 손님 왔다, 가봐."

     벨을 누르면 번호판에서 몇 번 손님이 왔는지 뜨는 시스템이라, 멍하니 전광판(?)을 보다 메뉴판과 물잔을 들고 9번 테이블로 향했다.

     "더치페이."

     "싫어, 니가 내! 기본적으로 들어오자고 한 사람이 내는거야." 

     ".....흐으으음, 누가 그래?"

     "우와, 치사하다!"

     시끄럽다. 누가 이렇게 떠들래? 더치페이를 하던 한 놈이 몰아내던 조용히 좀 해라.

     "뭐 시키시겠습니까?"

     정중히 물으며 물컵을 탁탁 놓고 고개를 들었는데...

     "어라?"

     "아아?"

     아... 이 사람... 하아.. 이원하라고 했던가? 이 화려하게 생긴 얼굴.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지... 어떻게 여기서 또 만나지...

     "아아~ 권지인 군?"

     왜 멋대로 군이야.

     "뭐야, 아는 사람이야?"

     게다가 그 앞에 앉아있는 남자는 고양이 같은 눈을 해가지고 요리조리 나를 살피는게... 분명 나보다 나이는 있어보이는데 묘하게 어려보이는 분위기. 이 남자랑 같이 앉아있어 그런가?

     "아아, 그때... 연우."

     설명하듯 남자를 향해 짤막하게 말을 뱉은 이원하였던가 그 사람이 날 다시 쳐다본다. 연우... 다른 사람 입을 통해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릿해지는 이름.

     "연우? 연우 뭐? 아아아아!!! 연우를 술에다 수장시킨?"

     .....뭐야, 이 사람?

     "쿡쿡, 무슨 말이 그래?"

     "틀린 말 아닌데. 술독에 빠져 살지."

     ...뭐야? 무슨 소리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살며시 인상을 찡그리고 다시 한번 주문을 뭘로 하냐고 물으려는데, 이미 관심이 없는 건지 자기들끼리 떠들어대는게...

     "그러고보니, 너희 집 식구들 나중에 연우랑 수빈이 졸업하면 동문회라도 해야하는 거 아냐?"

     "아?"

     "사촌 셋이서 나란히잖아."

     .......타앙. 머리 안에서 마치 총을 쏘듯 스쳐가는 소리. 방금... 무슨 말?

     "사촌... 셋?"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말끝을 받은 눈앞의 남자.. 살짝 인상을 찌푸리는게...

     "하필 좋아해도 수빈이를 좋아할 건 뭐야? 사촌끼리 사이 틀어지게."

     그러더니 멋대로 중얼거리곤 나를 올려다보는 눈이... 방금 그게 무슨 말이야? 사촌 셋이라니? 한 명은 이 남자랑 연우 형이란 걸 알겠는데...?

     "저, 그게 무슨 말?"

     "....무슨 말요?"

     "사촌이 셋이라니?"

     "아?"

     이번에는 이원하 쪽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러더니 슬쩍 인상을 쓰면서 오히려 되물어오는게...

     "수빈이랑 연우... 사촌 관계인 거... 몰랐다거나....?"

     "사귀는 사이... 아니었어요?!!!"

     말도 안돼... 말도 안된다고!! 무슨 소리야? 그게 둘이 사촌 사이라니?

     "뭐? 사귀는?"

     "뭐야? 그럼 이쪽이 둘이 사귄다는 거 알면서도... 수빈이한테 고백 한 것? 너무 하잖아."

     ....아...아니야. 그런 게.. 나는... 둘이... 그러니까... 물론 그러려고 했지만, 결론적으로....

     "연우는 그쪽때문에 술독에 빠져서 사는데..."

     너무한다는 듯 눈을 새초롬히 올려뜨고 노려봐오는 작은 얼굴에 마른 침이 넘어갔따.

     "그만해, 우리가 상관할 일 아니지."

     "하지만, 아아~ 관두자. 나는 파르페."

     "..........."

     머릿속이 터엉 비어버렸다. 분명히 애초에 잘못한 건 연우 형 쪾이지만, 그래서 만약 술에 빠져사는게, 강수빈 그 여자와 틀어진 이유 때문이라고 하면 말이 되지만... 사촌이래잖아! 그럼 뭐야? 왜 학교에 모습을 안 드러내고... 왜... 그러고 있는 건데?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갑자기 잘 지내다가, 그렇게 돌아서버리면... 연우는 ㅅ아처 안 받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불쑥 물어오는 음성에 멍하니 쳐다만봤다. 상처...라..... 형은 어차피 내게 장난이었으니까... 그랬으니까..

     "그..쪽 말이 맞았어요. 형이.. 나한테.. 거짓말 했다는 거... 내게 보여준게 형의 본 모습이 아니라는..."

     더듬더듬 정리해왔던 생각들을 내뱉자, 한숨을 파악 쉬는 작은 얼굴...

     "그게 뭐야? 결국 그런거 성격 다 버릴만큼 그쪽한테 마음있었던거 아닌가? 연우는?"

     ........쿵.쿵.쿵. 가슴 안쪾으로 떨어지는 감정들.

     한번도 그렇게 생각 안해봤다. 당연히 형이... 내게 한 행동들이 거짓일 거라고.. 하지만.. 그렇지만!!! 동생이 아니라고 했다. 후배가 아니라고... 그럼 나는... 난...

     "아닙니다, 그런 거."

     "..흐으음."

     "........뭐가 되었던... 우리가 관여할 건 아니지만... 여튼 난 복숭아 티."

     "안 어울려, 이원하;"

     "아이스크림이라도 시키리?"

     "......파르페랑, 복숭아 티요."

     ......눈 앞에서 떠들어대는 모습들이 음성들이 모두 한쪽으로 벗어나고 있다. 머엉하니, 아득하게... 어떤 진짜고 어느 게 진실이고 형이 왜 그랬는지 더 알 수가 없어져 버렸다. 내게 한 행동들이 그래, 만약 진실이었다면 본래의 성격따위 안 내비쳐질 정도로 내게 호감이 있어 그랬다면, 그때는 왜 동생이 아니라는 소리를 했던 걸까? 왜 그렇게 아픈 말을 했던거지...? 왜?

    ***

     "형? 나, 들어가도 돼?"

     ...새삼 방문을 두드리고 고개를 내미는 지훈이를 보다가 피식 웃어버렸다. 언제부터... 그런 거 신경 썼다고.

     "들어와. 언제는 니가 물어보고 들어왔어?"

     "요즘 형 분위기가 여엉~ 이잖아. 신경쓰느라 그런 거지!"

     .....그런 건가... 배려라는 건.. 신경을 쓴다...라..

     "놀리느라고 하는 게 아니고?"

     "미쳤어? 그게 얼마나 피곤한 짓인데. 아, 여깄다. 화이트 좀 빌리자."

     "아, 그래... 음... 지훈아."

     "어?"

     "친구들하고 장난 많이 치잖아."

     "응?"

     뭇느 소리를 하고 싶은 거냐는 듯 돌아보는 얼굴. 아까 까페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완벽하게 들러붙어서 자꾸 의문점만 들춰내는..

     "거짓말 같은 것도 그렇고.. 일부러 놀리려고 하는 거라면... 얼마나 가능할까? 그게?"

     "시간?"

     "아...음."

     "에, 뭐 그런 건 오래가지 못하잖아. 이쪽도 감정 소모가 심하니까..."

     "그런가?"

     "그렇지."

     ".........."

     "왜? 누구랑 싸웠어?"

     "아니, 그냥 좀 모르겠는게 있어서."

     아무리 생각하고 다시 생각하고 정리해도, 아귀가 맞지않고 뒤틀려버린다. 어떻게 혼자서는 손을 못쓰겠는... 안보고 안 들으면 멀어지겠거니 했지만, 날마다 커져만가는 감정.

     "에, 그런건 혼자서 고민해봤자 소용없잖아. 제대로 물어보는 수 밖에."

     "...아?"

     "당연하지. 혼자서 무슨 수가 나. 그럴 때는 상대 찾아가서 똑바로 묻는 수 밖에 없다니까."

     "응... 그래. 그렇구나."

     "뭔지 모르지만 형님 힘내라."

     "...푸후... 그래."

     타앙... 방문이 닫히고.. 조용한 방 안. 진지하게 생각에 빠지는데... 귓가를 날라오는 소리들..

     "무슨 일이래니?"

     "친구랑 싸웠나봐!"

     "그래서 맨날 우거지상이래? 괜히 걱정했네!"

     "그러게 별일 아닐거라니까~"

     .....고민도... 마음대로 못하는구나. 그래도 나때문에 쓸데없는 걱정들을 끼쳐버렸다. 아무리 웃으려고 해도, 자꾸만 가슴 속에 박힌 가시는... 그렇게 돌아서던 날 연우 형의 표정. 피하던 순간순간의 얼굴들. 핸드폰을... 열어... 한동안 보지 않았떤 동영상을 재생한다. 삭제하지  못했던... 영상들. 움직이는 뒷모습, 말투, 음성. 그리고 날 돌아보며 웃는 얼굴. 거짓이라 하기에는 티없고, 너무 부드러운... 지인아... 하고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 알고싶어졌다. 덮고 넘어가버리면 되는 문제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너무 궁금해져버렸다. 따지고 싶어졌다. 좀 울어보고 싶어졌다. 왜 나한테 그랬냐고. 왜 사람을 놀렸냐고. 그게 아니라면... 왜... 왜...

     옷을 챙겨 입었따. 한번 터진 감정은 둑을 흘러 넘치는 강물가탕서, 물길을 잡을 수가 없다. 이 한달 간, 생각하고 정리했던 문제들이 결국은 혼자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는 거라는 결론이 나자... 발길이 빨라진다. 알고싶다. 왜 그랬는지.. 물어보고 싶다. 지금 당장!!!

    ***

    -딩동...딩동...-

     초조하게.. 쿡쿡... 발끝으로 벽면을 차기를 몇 번. 급한 마음에 택시를 잡아타고 형네 집 앞 까지 와서, 그 문 앞까지 와서 벨을 누를 수가 없어 마음을 다스리기 한 시간째... 시간이 너무 늦어서.. 차라리 돌아가 버릴까 했지만, 결국 독하게 마음을 다잡고 벨을 누른 시간은 이미 밤 1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덜덜 떨리는 손. 도망쳐버리고 싶은 다리. 뭐라고 확인하고 싶은 걸까. 뭘 물어야 할까. 첫마디를 어떻게 해야할까.. '오랜만이네요?', '잘 지냈어요?' 아니. 그 말을 꺼내기도 전에 형이 문을 닫아버리면...?

     온갖 생각이 교차하는 가운데 몇 번 울리던 벨 소리가 덧없이 꺼져버렸다. 다시 한번

    -딩동...딩동...-

     ...하지만 역시 묵묵부답. 마치 나인걸 알아서 피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자 오기가 생겨버렸다. 몇 번이나 다시 누르고 다시 누르고... 그리고 한참만에 들려온 음성은... 늘 언제나 듣던 그 다정한 목소리가 아니라서... 목이 메여왔다.

    -누구세요.

     ...뭐라 말해야 하나..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서 간신히 쥐어짜내듯 흘러나온 말은...

     "지인인데요..."

     ....그리고 서로 아무 말이 없이.. 있다가 순간이었다. 스르륵 문이 열리고... 그리고 '들어와'라든지 '오랜만이네'라든지 하는 목소리 대신, 마치 무언가 귀신이라도 보는 듯 말도 안되는 환영을 확인하는 듯 살짝 그 틈새로 얼굴을 내민... 연우 형이... 그 못 본 사이에 약간 까칠해진 얼굴이.... 순간, 알아버렸따. 깨달았다. 내가 지금 여기에 온 건 사실이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 궁금증을 풀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 사람이 이 눈 앞의 사람이 너무 보고 싶어서라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라는 걸...

     손을 뻗어 만지고 '좋아한다'고 너무 좋아해서... 그래서 아프고 그래서 슬퍼서 볼 수 없었던 거라고. 감정을 처리하기에 너무 커져서 그랬던 거라고 말하고 싶어졌다.

     "...지인아..."

     조심스레 마치 큰소리라도 내면 사라질까 조심스러워하는 것처럼 형의 입에서 작은 소리로 내 이름이 나왔다.

     "밤 늦게 미안해요."

     "아니... 아... 들어와!"

     급하게 내가 어디로 도망이라도 갈 듯 손을 잡아 채여 안으로 끌어당기는게... 얼떨결에 안으로 들어가자, 후에는 급하게 손을 놓아버린다. 그리고 한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마치 뭔가 실수를 한 아이처럼 허둥거리는 모습이.... 처음본다 이런 이연우는... 이것도.. 여기? 잤던건 아닌거 같은데, 실내는 어둡고, 늘 커피 향이 떠돌던 형의 집 답지않게 코끝을 스치는 건 알콜 내음들...

     "술 마시고 있었어요?"

     "...아....."

     "나, 물어볼 거 있어서 왔어요."

     "......물어...볼 거?"

     "...괜찮아요?"

     "아, 불 킬게."

     "아뇨!"

     ...싫다. 불켜면 어색해질 거 같아서 너무 속속들이 잘 들여다보이는 얼굴에... 두근거리고 가슴 아플 거 같아서... 이쯤이 좋다. 적당히 거리감이 느껴지고 적당히 표정을 숨길 수 있는.

     "이대로가 좋은데..."

     "아... 그래.. 앉아."

     마치 처음 만나는 사람들처럼 쭈볏쭈볏 쇼파로 다가가자, 테이블 위와 쇼파 위를 그득 메운.. 술병들. 뭐가 이렇게 형을 힘들게 했을까? 뭐가...

     "지저분하지?"

     "술병이네요 다."

     "......."

     "그동안 꽤 못만났죠? 우리?"

     "...바빴니...?"

     아니, 바빠지려고 노력했지. 이연우 소리 안들어보고 안 보려고.

     "아뇨."

     "......."

     "피했어요, 내가."

     "......."

     "연우 형을."

     "...지인아..."

     "왜 그랬는지 궁금해요?"

     "아니,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너도 나름대로 일이 있었을테고... 그러니까.. 하지만..."

     들어보니 형 말 잘한다면서요? 누구 앞에서라도 어떤 상황이라도 자기가 하고싶은 말 다 하는 그런 성격이라면서요? 그런데 왜 이리 더듬거려요?

     "형 안 만나려고... 일부러 피했어요."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한 모양이구나. 미안하다. 나는... 그렇지만 그렇다고해도 일부러는 아니었을거야... 모르고 한 실수일거야."

     "나 형이 수빈 누나랑, 사귀는 사이라고 알고있었어요. 학교에 소문이 그렇게 낫 듯."

     ".......아.."

     "그런데도 보아란 듯이 수빈 누나한테 댓쉬하겠다고 했죠."

     "...지인아."

     "그런데 왜 잘 해보라고 했어요?"

     "지인아, 그건!"

     "사촌이라면서요? 그래서 그랬어요?"

     "너 어떻게... 수빈이한테 들었니?"

     "그런거 별로 중요한게 아니니까 넘어가죠. 말하지 그랬어요, 그때. 수빈 누나랑 사촌지간이라고 왜 말 안했어요?"

     "......."

     말을 하면 할 수록 생각하던 말들이 범람했다. 묻고 싶었던 것들이 차 올랐다. 계속해서 입 밖으로 터져나오는... 감정.

     "왜 그랬어요?"

     "지인아..."

     "왜 나한테 잘 해줬어요? 형.. 원래 그런 사람 아니라면서요? 그렇게 나한테 동생아니라고 후배 아니라고 딱 잘라 부정할 정도면 그렇게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었으면 왜 그리 잘해줬어요? 왜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요? 왜 나만 병신을 만들어요. 다른 사람들이 이연우가 이렇다 저렇다 말 할 때, 나는 아니라고 형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아느냐고... 말하고, 형을 정말로 좋아했는데... 나는 그랬는데... 왜 그랬어요. 사람 가지고 노는 것도 정도가 있지. 뭣모르는게 형이 하는대로 감동해서 쭐래쭐래 쫓아다니니까 재미있었어요?!"

     터져나와버린 가슴 속에 응어리.. 그래도 끝내 못한 말은, 그러함에도 형이 이렇게 굴었음에도 나는 당신을 좋아한다는.. 좋아하고 있다는 말... 격렬하게 뱉어내 버리고 거기에 숨이 차서 감정이 격해져 고개를 떨궜다. 한참만에 침묵. 그리고... 나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 때....

     "....아!! 연우 형!!!"

     무표정하게, 아무런 표정 없이 눈만 크게 뜨고 눈물을 뚝뚝 떨구는....... 이연우...

     마치 거짓말처럼 멋대로 그림에 장난을 쳐둔 거 처럼 미간을 찌푸리지도 입을 일그러트리지도 않은 채, 그저 뺨을 따라 흘렀다 턱 아래로 떨어지는 눈물방울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천천히 벌어지는 입. 그리고 애써 말을 찾는 듯 헤매던 형의 음성은 결국 아슬아슬하게 어딘가에 걸린 듯 맺히기 시작했다.

     "난.... 나는... 지인아..."

     "......혀엉..."

     "무서웠어."

     ".....!"

     나 같은걸.. 네가.. 좋아해줄까.. 했어. 장난..같은거 아니야.. 거짓말이었던...나는...."

     말 중간중간 끊어지며 울음을 삼키듯 뱉어지는 음성이 숨소리가, 급기야 줄어드는 말이... 가슴이 아팠다. 상처받은건 나라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훨씬 더 지독하게 아프다는 목소리로 말을 하는 연우 형이...

     "왜!! 울어요! 울고 싶은건 난데! 난데..."

     "나는... 너를... 좋아해."

     한참만에 숨을 고르듯 천천히 나온 말투. 울음기가 섞인 음성에 그대로 주먹이 꾸욱 쥐어졌다.

     "너한테.. 한 태도들 모두 거짓 아냐. 절대....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너한테 내가 그럴 수 없잖아... 널 좋아해."

     "나도 형 좋아했어요!"

     아니 사실은 지금도 좋아해. 당신이 하는 좋아해의 의미가 아닌 다른 의미로 말하는 애정의 무게.

     "그게 아냐...... 그게 아냐... 지인아."

     뚝뚝 떨어지는 음성이 눈물 방울이 멈추지 않고 있다. 저게 연기 일까? 저것마저 나를 놀리려는 걸까?

     "나는, 너를 동생으로 후배같은 걸로... 좋아한게 아냐."

     ".......!!"

     귓가를 파고든 음성. 믿을 수 없는 말. 갑자기 가슴이 아려왔다.

     "역시.... 거짓말... 하고 있어..."

     날뛰기 시작한 심장과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는다.

     "사촌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건... 말미를 두고싶어서였어. 어딘가에서 그래도 네가 나와 수빈이가 학교 커플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을까 그렇다면 날 생각해서 네가 포기하지않을까...라는 제멋대로의 생각... 형편...없지?"

     "형..."

     "학교 합격자 발표 날에... 너 처음 봤어."

     "........"

     "눈 오는 날에 깡총거리고 합격이라고 외치다가... 넘어지면서도 웃는 거.... 그게 그렇게.. 귀여워 보였어. 처음이라서 그런 느낌이... 처음이라서.. 놀랬다. 그리고..나서 학교 안에서 종종 널 봤어. 잘 웃고 잘 떠들고... 그리고 버스에서 만났던 날에.... 아슬아슬하게 자고 있는 널 보다가... 넘어질까봐 걱정하다가..."

     ....세 정거장이나 지나쳤지...

     "......나... 너한테 한 행동들에 하나도 거짓 없어. 정말이야. 다른 사람한테.. 워낙에 소리들을 들어서... 성격 나쁘다는 둥.. 안 좋은 일도 있었고, 그래서 그런 거 알게 되면 날 싫어하게 될까봐 더 조심했던 일은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난..."

     이내 입을 다물고 계속 뚝뚝 눈물을 흘린다. 포커페이스에 할말 다 하고, 무서운 거 없고 혼자서 뭐든 알아서 한다는 이 이연우가.. 내게만은 진심이었다고 내가 웃고 말하고... 지금 이 우는 모습 또한 사실이라고 내게 고백하고 있다. 거짓이던 진실이던.. 그런 것과 상관없이.. 가슴 한쪽이 아릿하게 아파왔다. 그리고나서 치솟는 감정.

     사랑스러워서 저렇게 커다란 덩치를 해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손을 뻗지않고 견딜 수가 없었다. 끌어안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형의 머리를 가슴 안에 끌어안아 버렸다. 움찔 굳어버린 형의 몸. 이건... 거짓이 아니다. 당황스레 날 밀어내려던 팔이... 이내 내 허리를 끌어안고 그렇게 숨을 죽이고 운다.

     "미안해요... 몰랐어요. 형이 나 좋아한다는 거... 몰랐어요."

     ".....그냥... 좋아하는게 아니라... 동생으로 좋아하는게 아니라서... 미안...하다."

     울먹이며 사과하는 음성에... 오해가 풀려버린 이 상황에.. 웃음이 흘러나올 뻔 했다.

     "형...형이 솔직하게 말했으니까... 나도 하나 고백할게요."

     "......."

     "나...형을 좋아해요."

     ".......뭐?"

     "말 못해서 나도 미안해요."

     "...무슨 소리야? 그게?"

     놀랬는지 눈물이 뚝 끊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표정이... 아, 정말 어쩜 이런 얼굴로 이런 사랑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걸까?

     "....나 형한테 몰래 키스 할 정도로 형을 좋아해요."

     "....뭐...?"

     미친척하고 놀라서 나를 올려다보는 형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쥐고 형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그래도 입술만 부딪치고 있는 상태에서도 두근두근 뛰기 시작한 심장은 멈출 줄 모른다. 그리고 그대로 살며시 입술을 뗀 채로 고백.

     "사실은 형하고 수빈 누나랑 사귄다는거 질투나서... 갈라놓으려고 한 거였는데..."

     우습게 되어버렸죠? 라고 말하며 생긋 웃자, 그제서야 늘 내게 웃어주는 표정 그대로 입꼬리를 올린 채 부드럽게 웃는 연우 형.

     그리고 천천히 더 꼬옥 내 허리를 끌어안고 마치 어린아이가 그러듯 가슴에 머리를 부빈다.

     그리고 마치 주문이라도 외우듯 낮게 중얼거리는 다정한 음성.

     "지인아, 좋아해. 정말... 좋아한다."

     얼마나 형을 끌어안은 채로 그리고 끌어안긴 채로 시간이 흘렀을까? 공기 중에 흐르는 희미한 알콜 향과 완전히 어둑해져버린 방 안. 그 안에서 흘러가는 숨쉬는 소리.

     "키스해도 될까?"

     그 분위기에 젖은 듯 낮은 음성으로 조심스레 내 가슴에서 머리를 들어 날 올려다보는 형의 얼굴. 그저 싱긋 웃어버렸다. 키스하고 싶다. 형의 입술에 나의 입술을 포개고... 사랑을 속삭이듯 입을 맞추고 싶다. 그 바램을... 지금 나누자고 형이 말하고 있다. 거절할 이유가 없는 거다.

     천천히 맞물리는 입술. 조금 마른 듯한 두 입술이 부딪치고 몇번이나 인사를 하듯 서로 가볍게 쪼듯이 닿았다가 떨어지기 수 차례, 점차 부딪치고 당겨지는 씨름 끝에 똑똑 입술의 가장자리를 노크해 온 건, 촉촉하게 젖은 형의 혀. 머뭇머뭇거리면서도 조심스레 입을 열자, 낯선 혀가 안으로 들어온다. 그 느낌에 몸이 떨려왔다. 눈을 뜨고 있자, 가늘게 눈을 들어 날 확인하는 형과 마주쳐서 그 부끄러움에 두 눈을 모두 꼬옥 감아버렸다. 그러자 더욱 선명하게 느껴지는 키스의 감각. 그저 입맞춤이 아닌, 마치 섹스같은 키스라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혀끝과 혀끝이 만나고 목구멍 깊숙히 들어왔다 나가고, 그리고 치아 하나하나에 인사를 하듯 건드리고, 잠시 숨을 돌릴 때에도 아랫입술과 윗 입술을 형의 입술 사이에 물고 자근자근 깨물다가 한숨같은 신음 소리가 흘러나오면 다시금 참을 수 없다는 듯 안으로 들어오는... 그 감각.

     뭉클하고 부드럽고... 뜨겁다.

     키스만으로도 온몸이 저릿저릿하고 등꼴이 오싹하다는, 머리가 텅 빈다는 느낌이 어떤 건지 알아버렸다. 추웁-츱. 하는 질퍽한 소리. 배와 그 아래까지 뻐근하게 퍼지는 달콤한 통증.

     혀끝끼리 미끌거리며 부딪치다 엇갈리듯 서로의 입 안으로 들어가버리는.. 그 기분. 어쩐지 눈물이 고이는 감각에 먼저 손을 들어버린건 내 쪽.

     "잠깐... 하아...읍...만요."

     타임 신청을 하듯 형의 어깨를 밀어내고 바닥에 스르륵 풀린 다리를 편히 내리자, 베란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에 반사된 형의 얼굴이 쓴웃음을 짓고 있다는 걸 알아버렸다.

     "역시.. 싫어?"

     ....그리고 마치, '이 약이 써?'라고 물어보는 듯한 어린 아이처럼 조심스레 물어오는게.. 정말로 풋-하고 웃어버렸다.

     생리적 혐오를 말하는 걸까? 남자와 남자가 한다는 것에 대해? 그럴 리가 없는데.. 그렇다면 이렇게 격렬하고 애틋하게 반응할 리가 없잖아?

     "좋아서.. 그래요."

     "...응?"

     "...너무 빠져버릴까봐 무서워서."

     "좋은.. 거야?"

     "너무."

     희미하게 웃는게 느껴진다.

     "다시 해도 돼?"

     "심장이 터져버릴지도 모르는데."

     바닥에 쪼그려 앉아서 쇼파 의자에 앉아 있는 형을 올려다보며 곤란한 듯 말하자, 연우 형이 쿡쿡 웃어버린다. 그리고 부드럽게 내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는 모습.

     "몇 번을 해도 모자라."

     "......음."

     "이마에 눈꺼풀 위에, 콧등에 뺨에 귀에 입술에... 목덜미에. 팔에 어깨에 가슴에.. 배꼽 위에... 다리에... 모조리 키스를 해도 입을 맞추어도 모자라, 나는."

     "......해요..."

     "...터질 거 같다며?"

     "좋아서."

     내 말에 연우 형이 더 환하게 웃는다. 그리고 털썩 앉아있는 날 일으켜 세우더니 그대로 한번 꼬옥 안고 잡아 끌 듯 침대로 향하는게.. 심장이 두근두근. 귓가를 때리는 멍한 울림. 오로지 바라봐지는건, 형의 얼굴. 들리는 건, 형의 음성.. 그리고 느껴지는 건, 형의 온기 뿐. 정말 이대로 있다가는 형 안에서 질식해버릴지도 모른다는 망상까지 머릿속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치 보물이라도 모셔두듯 나를 침대 위에 앉힌 형이 한 행동은... 멋대로 뻗어둔 내 손을 잡고 그 손등 위에 입을 맞춘 것. 그리고 다시 손바닥 안에, 손가락 하나하나에, 맥박이 뛰는 그 위에. 그 감각에 움찔해서 손가락을 오므리려하자 사악 손가락 사이를 혀로 햝아내린다.

     "웃."

     간지럽다와는 또 다른 감각. 그것에 움찔한채 입을 타고 나온 음성에 몸을 움츠리는데.. 내 손 위에 가만히 이마를 대고 움직이지 않는 연우 형.

     "...혀엉?"

     조심스레 부르자, 그대로 말을 하는 음성이 바닥에 울려 공기 중으로 퍼져간다. 

     "꿈이.. 아닌가 생각 중이야."

     "꾸움?"

     "아까 문을 열었을 때부터, 나는 네가 사라질까봐 자꾸만 두려워. 다시 내 연락을 피하고 아예 없었던 사람철머 그렇게 가 버릴까봐... 너무... 무서워."

     "...형...."

     "내가 너한테 많이 모자라서..."

     아니야! 넘쳐. 넘친다고!"

     "...그래서 네가 나를 싫어하게 되지 않도록..."

     "혀엉!"

     "노력하고 노력할거야, 나는. 맹세할게."

     눈물이 쏟아지려고 했다. 이렇게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에게.. 이렇게 나를 사랑한다고 온몸을 바쳐 말해주는 사람에게 내가 한 행동이란...

     "미안해요."

     "뭐가."

     "모두."

     모두 다 내가 미안해. 내가 고민하고 내가 상처받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다 형에게는 진심이었고 더 아팠다는거... 난 왜 몰랐을까.

     "괜찮아. 네가 한 건 다 이해해. 다 용서해."

     그리고 다시 천천히 입을 맞추어오는 연우 형. 입가에서 맴돌던 촉촉한 느낌이 몇 번이고 입술을 덧그리고 입 안을 침범하고 그렇게 한참을 입술을 나눴을까 한숨같은 탄식과 함께 이번에는 형이 먼저 내게서 떨어져나갔다. 그리고 내 어깨를 밀어 거리감을 두고는 곤란한듯 고개를 돌리는게...

     "형?"

     좀 더 입맞추고 싶다. 좀더 서로 좋아한다는걸 느끼고 싶은데...

     "지인아, 늦었지만.... 지금 택시 타면..."

     "형?"

     왜 갑자기 영 다른 소리를...? 게다가 벌떡 일어서서 방을 나서려는게...

     "형... 왜 이래요??"

     팔을 덥썩 잡고 올려다보자, 어둠 속에서도 형이 내 눈을 피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나 지금 뭔가 실수했어요?"

     "그게... 아냐..."

     "그럼?"

     초조해졌다. 이렇게 달게 키스하고선 등을 돌리다니... 설마 또 놀린 거야?

     "...느껴."

     ".....에?"

     "....곤란하잖아..."

     뭐가? 누가? 무엇이?

     "반응해."

     "아?"

     "...나는 너한테 반응한다고."

     "형....?"

     슬금슬금 어두워서 보이지는 않지만 시선이 자연스레 아래로 떨어졌다. 내가 생각한 그 의미가 틀리지 않다면.... 그렇다면... 조심스레.. 손을 뻗어 형의... 그곳에 살짝 가져다대자, 명확하게 모양을 그리고 있는 형의 중심이...

     "웃."

     잠시 닿았을 뿐인데 불에 대인 것처럼 뒤로 화들짝 놀라서 물러서는게... 정말? 진짜 나랑 키스해서? 아, 그러고보니 나도 아까부터 뻐근한게...... 슬쩍 남은 손으로 내걸 더듬어..... 볼 필요도 없이... 섰다.

     "아...음... 형. 그러니까 ... 남자랑은 싫어요?"

     "....뭐?"

     "...저기, 나도 곤란한거 같은데..."

     남자들끼리 어떻게 한다는 건 알고있지만, 실전이 있었을 리는 없다. 서투르다면 서투를테고 실수 할 수도 있지만... 그런거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나는.. 형을 원한다. 내가 형에게 할 수도, 형을 받아들일 수도... 어느 쪽이어도 좋을 만큼

     "아...."

     "형 나한테... 하고 싶은 것?"

     말하면서도 얼굴에 불이 날 거같은 감각.

     "...응."

     "나도 좋아요..."

     "지인아..."

     "....해도 되요. 아니, 내가 하고싶어요."

     원한다. 입맞추는게 아니라, 좀더 몸과 몸을 마주 대고 바짝 밀착시키고 틈새하나 없이 그렇게 붙어있기를... 이 타는 거 같은 갈증을 같이 풀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지인아...."

     꽈악, 숨이 막힐 정도로 끌어 안겨졌다. 그리고 아래쪽에서 스친... 그 감각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형도 곧 그걸 느꼈는지 쓰게 웃으며 내뱉은 말은...

     "미안하지만, 샤워할 여유가 없을 거 같아."

     ...라는, 최고로 달콤한 유혹.

     "....좋아해요."

     그리고 곧 입술에서부터 형에게 잠식해 들어가는 감각... 등 뒤에 닿아오는 침대의 쿠션감을 느끼며 몸 위를 덮어오는 무게감을 인식하며 손을 들어 등을 끌어안았다. 좀 더 가까운 온기를 위해...

     "하아... 형..."

     정중하다. 아니 그 이상이다. 일부러 애를 태우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느릿하고 천천히 그리고 세밀하게 형은 내 모든 곳에 입을 맞춰왔다. 입에서부터 시작된 키스는 긴 행렬로 턱선.... 귓볼과 귓바퀴를 따라 움직이더니 이내 목덜미에 숨결과 타액을 묻히며 입 안으로 빨아들여져 아릿한 통증과 함께 자국을 새기고 있다.

     목 부분까지 말아올려진 티셔츠. 그릐고 천천히 다시 고개를 아래로 내린 형. 맨가슴이 공기와 부딪쳐.. 그리고 형의 숨결과 뒤섞여 몸을 뒤틀어 엎드리고 싶어질 만큼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밀어내듯 뻗었던 내 팔을 오히려 형의 셔츠를 움켜쥐고 형은 천천히 혀끝으로 부드럽게 내 가슴과 유두 위를 덧그리듯 지나갔다. 그 선명하면서도 몽롱한 감각. 천천히 형이 입으로 유두를 덮고 입안으로 빨아들이기까지.. 눈 앞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입과 가슴 사이의 공간이 생길 때마다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들려오는 마찰음과, 질척임. 입안으로 들어가 굴리어지는 유두의 반대편은 형의 손가락 사이에 집혀 비벼지고 달구어져간다. 마치 몸을 달아오르게 하는 스위치같은 느낌.

     그저 내가 하는 건 형이 하는대로 그 감각을 몸으로 받아내고 헐떡이는 것 뿐. 숨이 차 오는 감각이었다. 이것만으로도... 하지만 형은 아직 멀었다는 듯 아주 섬세히 공을 들여 입술을 움직여나갈 뿐이었다. 한참을 가슴을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느낄 정도로 오롯하게 유두를 세워두고, 아직 팔에 걸려있는 셔츠를 그대로 벗겨내더니... 

     형도 아직 채 못 벗은 옷을 벗어던졌다. 패팅을 하는 태도가 느긋하다고 생각했건만, 침착하지 못하게 옷을 벗어 아래에 떨구는 태도에 어딘지 그마저 사랑스러워졌다.

     그리고 맨가슴끼리 닿은 감각. 추워서도 아니고 무서워서도 아닌, 쾌감만으로 몸에 닭살이 살짝 일 정도였다. 그렇게 맨살을 닿은채로 다시 한번 진한 키스...

     "괜찮아?"

     "........"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작게 웃으며 귀여워.... 라고 내 귓가에 속삭이는 음성.

     천천히, 내 얼굴을 쓰다듬고 손을 아래로 내려간다. 움찔... 뭘 하려는지 깨닫는 순간, 몸이 바르르 떨려왔다. 바지 버클을 한 손으로 힘겹게 푸르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형의 손길. 이미 곧추선 나의 그곳ㅇ느 형의 손길에 움찔 고통치며 반응을 해보였다.

     "기쁜걸."

     마치, 형의 손길에 느꼈다는걸 알아차렸다는 듯이 그렇게 웃음기 어린 모습으로 중얼거리면서,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중심부 아래에 있는 두개의 구슬까지 부드럽게 쥐었다 문질렀다. 애무를 하던 손길에 흐느끼듯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부끄럽다던가.. 창피하다던가 하는 감각보다는 쾌감이 더 컸따. 입술을 깨물며 참아보려고 해도, 강하게 혹은 조물거리듯 건드려오는 형의 손길엔 속수무책.

     입술로는 내 상반신을 멋대로 건드리며 도장을 찍고, 손으로는 아래의 중심을 만져오는데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한참 숨이 거칠어져서 끝을 바랄 때쯤 손을 떼어버리는 연우 형. 조르듯 자연스레 흔들리는 허리에, 그대로 웃으며 스윽 골반께에 걸친 바지를 벗기더니.. 드러난 허벅지 안쪽에 혀를 가져다 댄다. 이미 민감해진 몸은 움찔움찔 떨리며 반응을 보이지만 형은 한참을 피부의 감촉이라도 즐기듯 허벅지에서부터 종아리 그리고 뒤꿈치까지 혀를 굴릴 뿐. 뱀처럼 굽이치는 혀의 움직임이 처음에는 촉촉하다.. 점점 빡빡해지며 물기를 잃어가자, 그 느낌이 또 달랐다.

     타액이 묻어있을 때가 스무스하게 부드럽다면, 물기가 없어진 혀는 마치 좀더 생생하게 몸을 건드리는 것처럼.

     "혀엉... 하아, 연우 형."

     결국 출렁이는 음성으로 이름을 부르자, 거기에 응답하듯. 발목 근처를 자근자근 물어오는 형의 이.

     "나.. 뭔가.. 참을 수 없을 거 같은.. 하..."

     나른하게 처지는 음성으로 그렇게 조르듯 팔을 뻗어 형을 원하자 그런 내 손을 가만히 잡아온다. 그리고 아직, 팬티 안에 감싸여진 나의 페니스를 그대로.. 입으로 물어오는... 감각. 몸이 튀고 등이 움찔거려졌다. 축축하게 천이 젖으면서 오히려 천에 쓸리는 감각과, 그 위에 덧그려지는 혀의 행태에, 결국 고였던 눈물이 또르르륵 뺨 옆으로 흘러졌다.

     머리 부분은 이미 팬티 바깥으로 나와 이슬이 맺혔다는건 보지않아도 안다. 하지만 어쩐지, 형은 최후는 주지않으면서 그 쾌감의 근원인 아래의 구슬에만 공을 들이듯 한쪽씩 입에 넣었다가 뱉어내는게.. 몸이 달뜨고 쾌감에 미칠 지경이라는게 어떤 건지 알게 되었다.

     "혀엉... 빨리..."

     뭐라 제대로 말 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게 형과 조금만 맞닿아 있는게 참을 수가 없어졌다. 좀더 힘껏 만져지고 비벼지고 느끼고 싶다.

     "혀엉... 나아... 하아...."

     ".....지인아......."

     "형..."

     울먹울먹 아예 떨리면서 흘러나오는 목소리. 한 손으로는 침대의 시트를 움켜쥐며 허리를 뒤틀자, 형이 할 수 없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내 팬티를 내려간다. 이제 전부 다 벗은 몸을 내놓은 상태.. 가릴 것도 없이, 숨기는 것도 없이.... 이 맨몸 하나로 형을 원한다.

     "아프게 하고싶지 않아, 지인아."

     아파도 좋다. 더 강하게 닿고 싶을 뿐.

     "혀엉.. 괜찮아요, 나는."

     겨우 더듬더듬 의사 표시를 하고 차오르는 숨에 빠알갛게 달아오른 뺨 때문에 눈을 감았다. 그러자.. 천천히.. 다시 내려간 형의 입술이... 귀두에서 선단에서 그리고 고환까지 흘러 내려갔을 때, 그 전기라도 통한 감각에 몸을 뒤틀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절대 닿을리 없다고 생각했던 그곳에... 형의... 입술이.. 맞닿아서... 수치심보다는 미안함에 울컥하고 가슴 안에 있던 울음덩어리가 몰아쳤다.

     "혀엉. 흐윽... 흑... 나....나는."

     두 팔로 형의 머리를 밀어내며 정말 꼴사납게 울먹이는 음성을 뱉자, 황급히 머리를 들어 날 살피는 연우 형.

     "미안, 난.... 젤도 없고... 아플까봐, 지인아."

     "그런 곳... 흑."

     "미안해. 싫었어? 부끄러웠어?"

     그런게 아니다. 그런게 아니라...

     "나, 나 샤워도 안 했는데... 혀엉. 너무...흑..미안..."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후우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토닥여주는 손길에... 안심이 되어 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괜찮아, 지인아. 다 예뻐. 다 좋아."

     "그래..도 싫어..요. 흑....으흑..."

     도리질치며 형이 달래는데도 듣지 않자 할 수 없다는 듯 쿡쿡 웃어버리는 형... 하지만 이내 정말 곤란하다는 듯이 작게 내 귓가에 소근거리는 음성이.

     "하지만... 난 지인이가 아픈건 더 싫어."

     난 형이... 형이.... 씻지도 않은.... 거기에 그러는게 더... 싫어. 미안하고... 나도 예쁜 것만 보여주고 싶고 깨끗하고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은데.. 그런데.

     "그래도 싫어요, 훌쩍."

     멈춰가는 눈물을 참으려고 애써 얼굴을 찡그리며 훌쩍이자 어쩔 수 없다는 듯 형이 손을 들더니, 잠깐만 하고 일어서선 선반 위에 놓여있던... 로션 병을 들고 온다.

     "이걸로 괜찮아?"

     ".....응?"

     "젤만큼은 아니지만..."

     ".........아."

     뚜껑을 열자 코끝을 스치는 건 언제나 연우 형에게서 나는 로션 향. 얼굴에 화끈 열기가 달아올랐다. 어딘지 좀 더 연우 형에게 안기고 있다! 라는 현실이 부각되는거 같아서..

     "괜찮니?"

     다시금 물어오는 음성에 고개를 끄덕이자 탁탁 손 안에 털어서, 잘 문지르더니... 부드럽게 손을 움직여.. 내 가슴 위에, 배 위에, 발라나간다. 공기 중에 퍼지는 시원한 향. 매끈매끈 조금은 단단하고 커다란 형의 손을 따라 퍼져나가는.. 유두에서 잠깐..걸리고, 다시금 옆구리에서 갈비뼈. 그리고 팔꿈치까지 옮겨갔다가, 원래의 위치로 돌아와 배 위를 움직이고... 양 허벅지를 돈다 싶더니 이내 천천히.. 내 흥분의 상징 위를 돈다. 훑는 것만으로도 사정해버릴 거 같아서 입술을 꾸욱 깨물고 참았다. 그리고 이윽고, 조금 더 발라진 미끈하고 시원한 로션이.. 천천히 엉덩이 사이를 가르고 그 낯설고 두근거리는 감각에 최대한 얼굴을 침대 사이에 묻었다. 살과 살 사이에 침투하는 미끈함. 그리고 빡빡하게 조여진 항문에 발라지는... 그 느낌이란...

     그리고 최대한 부드럽게 형의 손가락이 원을 그리듯 몇번이고 몇번이고 그곳을 확인하듯 꾸욱꾸욱 눌러오기 시작했다.

     형과 좋은 섹스를 하고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긴장을 풀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직 울음기가 가시지 않았지만, 최대한 공포심을 줄이고 지금 나를 만지고 있는건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이연우라고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들려줬다. 그러자.. 가슴 안에 퍼지는 달콤함이..... 나도 모르는 사이, 몸을 부웅 뜨게 했다.

     "괜찮아? 이상하지않아?"

     속살거리듯 내게 물어오는 연우 형.

     "괜..찮아요."

     안심시키듯 대답하고 숨을 들이키는데, 그 순간... 무언가가... 안으로 조금 밀려들어왔다. 꾸욱... 그게 형의 손가락이란 걸 알았을 때 머리 한쪽으로 피가 쏠리는 느낌. 허윽하고 올라오는 신음을 간신히 참으며 이를 앙 물었다. 아프다기 보다는... 이물질이 들어왔다는 느낌에 약간의 거부감이 없는건 아니었지만, 형과 하나가 되기 위한 준비라고 생각하자, 그 감각마저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얼마나 수차례 로션을 묻혀가며 내 그곳을 연우 형이 풀어줬을까... 천천히 떨어지는 손길과 내 목덜미 사이로 고개를 묻어온 연우 형.

     그리고,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이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미안...더해주고싶은데.. 좀 무리인 거 같아."

     눈물이 고이고, 그 어떤 행위보다 몸을 떨게 만드는 짜릿한 말.

     "들어와요..."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주고 손을 내밀자, 조금 서두른다싶은 자세로 형이.. 바지를 내린다. 마치 첫 자위를 하는 어린아이같은 그런 느낌. 사랑스럽다. 몇 번을 말해도 모자를 만큼.

     천천히 연우 형이 내 두 다리를 들어올려 자신의 어깨에.. 얹는다. 엉덩이가 들린 묘한 느낌이라, 부끄러움에 팔로 얼굴을 가리자 손을 들어 치우게 하는게...

     "보고싶다...

     "....하지만..."

     "예뻐, 지인아."

     주문을 외우듯 마법을 걸어주듯 그렇게 작게 되뇌이는 말...

     거짓이라도 사실이 아닐지라도 연우 형이 말한다면 그건 사실.

     "응..."

     작게 대답하고 최대한 웃어보이려고 했지만, 쿠웃하고 내 항문 끝에 닿아온 형의 중심이... 조금 얼굴을 굳게 만들었다.

     "지인아, 아프면 말해."

     몇 번이나 그렇게 말하며 조금씩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감각. 

     거칠지 않고 정중하며 사랑스럽다.

     "우웃... 윽."

     꾹꾹 밀고 들어오는 감각에 몸이 밀리지만, 이내 완전히 애쓰던 것이 안으로 다 들어차자, 마치 형의 모든  걸 내가 소유한 것같은 그런 가슴 벅찬 감각이 쏟아져서... 눈물이 나왔다.

     "형....."

     울먹이는 음성으로 부르자, 내게 넣은 자세 그대로 허리를 숙여 이마에 입을 맞추는게... 안에서 생생하게 느껴지는 감각에 두 다리가 허공에서 떨었다.

     "지인아.. 지인아..."

     마치 열락에 겨워 어찌할 도리가 없이, 다른 말은 잊어버린 듯 중얼거려지는 내 이름. 거기에 맞춰 울먹이며 대답하는 내 음성.

     그리고 천천히 형의 허리가 움직였다. 안으로 뒤로 피스톤 운동을 하며 치고 빠져나가는 감각이, 처음에는 그 굵기와 느낌까지 느껴질 정도로 생생하게... 그리고는 점차, 안으로 밀려온다는 감각만 있을 정도로 빠르게... 그렇게 몇 번이고 앞뒤로 움직이며 들썩이는 감각에 정신이 빠져가는 순간, 어느 한 부분에서 파앗, 하고 머릿속에 벼락이 내려지듯 가슴이 아릿하고 중심이 뻐근해지는 감각이 쏟아졌다.

     "하악- 헉... 형... 형..."

     마치 어디론가 혼자 가버릴 거 같은 묘한 감각.

     "지인아.. 하아.... 느껴?"

     "혀엉. 아... 아아앗...형...으으읏...하아...흑...나아..."

     그 부분만을 확실하게 찌르고 들어오며 반복되는 일렬 행동을 하는 연우 형.... 좀 천천히 가라고 그러다가, 정말 심장이 터질 거 같다고 말하려고 입을 열려는 순간, 끝까지 빠져나가는 듯한 형의 그곳이... 단숨에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푸우우욱. 마치 단어라도 되어서 귓가에 떨어지는 듯한 느낌과 흔들리는 몸. 거기에 쇼크를 받아 덜덜 떨리는 몸. 그것만으로도 미칠 듯한 쾌감이었건만, 마지막 순간 앞에서 흔들리던 내 중심을 잡은 형의 손 안에서 나는... 자지러지듯 마지막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건 내 어깨에 형의 얼굴을 묻고 형 또한 부르르 가볍게 몸을 털어내고 있다는 것 뿐... 사랑한다는 몇 번의 중얼거림과 함께...

    ***

     "일어났어?"

     멍하니 옆을 한번 바라보다가, 넘쳐흐르는 미소에 그대로 형의 가슴 안으로 얼굴을 묻고 뺨을 부비작거렸다. 부끄럽고 민망스러웠지만, 나와 마찬가지라는 듯 연우 형 뺨 위에 깔린 붉은 기가 날 더 행복하게 만들었다.

     "응."

     어느덧... 자연스레 말을 놓아버렸지만, 형도 나도 신경쓰지 않는다.

     "언제 일어났어요?"

     "안 잤어."

     "...뭐엇?"

     "잠을 자고 일어나면 꿈일까봐 못 잤어."

     아... 음.. 아, 얼굴 빨개지려고해.

     "지인아..."

     "응..."

     "지인아..."

     "네...?"

     "쿡쿡, 한가지로만 말해. 존대를 하던 반말을 하던."

     "내... 마음이에요, 뭐."

     "사랑해."

     "응..."

     "본의아니게 상처준거 미안해."

     "나도..."

     좀더 꼬옥 형의 가슴을 끌어안으며 머리를 박자, 부드럽게 머리를 쓸어올려준다.

     "혀엉..."

     "응?"

     "나 형이 다른사람한테 잘해주는거 질투할지도 몰라요."

     형이... 제멋대로에 마이 페이스라고 했지만, 나한테만 그렇지 않다면 난 오히려 그게 좋다. 솔직한게 뭐가 나빠.

     "나... 못됐다는 소리 많이 들어서."

     "나한테만 웃어주면 되요."

     "나도...싫어."

     "응?"

     "네가.. 다른 사람한테 웃어주는거."

     "푸하... 그건 어쩔 수 없는데."

     "아, 불공평해."

     "그래도 걱정마요. 제일 멋진 미소는 형을 위해 남겨둘테니..."

     "그래... 가장 많이 화난 모습도.."

     에?? ...에이 그런건....

     "그리고 가장 많이 우는 모습도..."

     "그런건 조옴~"

     "가장 많이 예쁜 모습, 화난 모습, 미운 모습도... 내가 제일 많이 보게 해줘."

     살짝 올려다 본 형의 얼굴은... 어딘지 진지한 눈을 하고 있어서 가슴이 뛰었다.

     "그건 무리일텐데... 여지껏 우리 가족이 제일 많이 봤죠."

     그래서 장난치듯 가볍게 말을 받아쳤는데...

     "괜찮아. 앞으로는 내가 가장 많이 볼테니까."

     ...라며 싱긋 웃는 모습에, 가슴이 찌잉-해졌다. 프로포즈. 앞으로 가장 나와 함께 오래 있고 싶다는...

     "응, 그럴게요."

      몇 번이고 대답하며 가슴 안으로 파고들자, 조용히 머리 위에 입술을 대고 형이 내 등을 안아온다. 가장 따스하고, 가장 다정한, 다른 사람들은 절대 알 수 없는 나만 아는 '이연우'라는 모습으로...

    ***

     "여어, 권지인. 왜 그렇게 방긋방긋거려?"

     "아~ 진희 형 안녕. 가영 누나 안녕."

     "....뭐야? 너 요새 약먹은 병아리처럼 힘없이 다니더니? 뭔데 그래?"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다가오는 형들에게 빙긋이 웃어줬다. 그래 이 C.C.C.C 사람들이 한번도 해내지 못한 걸 내가 했다는거 아니겠어?

     "이연우랑 강수빈. 헤어졌어요."

     "뭐엇?"

     "말도 안돼!!! 진짜?"

     연우 형에게 들은 사건의 전말은... 애초에 대학 입학할 때 수빈 누나와 짠 거라고 하더라. 서로 귀찮게 구는 상대 없애려고. 그리고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는 사실을 말하자고 했는데, 연우 형은.. 질투때문에 나한테 둘이 사촌이라는 소리 못했던거고.

     "이야! 정말이냐?"

     "거짓말하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강수빈을 꼬셨냐? 응?"

     사실은... 이연우..씨를;; 꼬신(?) 거지만, 때로는 모르는게 약이 되는 법.

     "쿡쿡, 글쎄요. 거,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던가."

     "야! 사람 궁금하게!"

     "저 바빠서 먼저 갑니다! 얼굴 보려고 들렸어요. 아 그리고 왜 의뢰하는 사람 중에 이연우 노리고 의뢰하는 사람 많죠?"

     "에? 그야 그렇지?"

     "이연우 씨, 정말 미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어서 그렇게 냉랭한거라니까, 포기해요."

     "뭐엇? 진짜? 너 뭘 알고 있는 거냐? 그 상대가 강수빈 아냐?"

     "야앗, 권지인 불고 가!!!"

     "비밀입니다 그려~"

     발악하며 외쳐대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문을 탕 닫고 나오자, 계단 끝 쪽에서 웃으며 손을 흔드는 연우 형. 빙긋 마주 웃으며 다가가자 천천히 내게로 걸어온다. 영원히 나와 손을 잡고 걸어갈 사람. 내게만 웃어줄.. 그런 사람.

     입가에 퍼져가는 건 미소. 그리고 가슴 안쪽을 채운건 행복의 무게.

     "무슨 이야기했어?"

     "으으음... 우리 써클이래, 처음으로 목표물(?)과 사랑에 빠졌다는 이야기 일까나?"

     "아아아??"

     뭇느 소리야? 라고 물어보는 듯 살짝 가늘어진 눈매.

     거기에 다시 새록새록 웃음이 피어오르는 나. 아아.. 정말로 콩깍지가 씌여도 단단히 쓰인거겠지.

     "좋아해요."

     뜬금없이 참을 수 없음에.. 그저 가슴 안에만 담고 있기에는 부족해 입 밖으로 속살거리는 감정들.

     "응."

     그리고 늘 언제나 내 옆에는 웃으며 받아주는.. 형.

     "나도.. 좋아해."

     부드럽게 귓가에 마찬가지라고 속삭여주는 것도 잊지 않으며....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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