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8)
  • 4

     슬슬 여름이 지는 시기라, 잠이 녹녹하게 온다.

     이대로 눈 감고 누우면 잠들 것만 같은 기분에 잠겨있는데 누군가 등을 팡!!하고 때렸다.

     "엽~ 권지인!!! 오랜만이다!"

     "아, 선배..."

     격동의(?) 여름 방학이 지나고, 수업이다 다른 일이다 해서 처음 만나는 선배였다. 여름동안 꽤 잘 지낸 모양인지... 아니아니, 뭐 이 선배는 원래부터 좌절을 모르는 개그 캐릭터이긴 했지.

     "뭐하고 지냈냐?"

     "그냥 뭐 이런 거 저런 거..."

     어떻게 지냈냐고 물으신다면 대답해드리는 것이 인지상정. 연우 형하고 놀았다. 정말 여름 방학 내내 가족보다 더 많이 얼굴을 본 것이 연우 형인 것 같다.

     조금만 걸어도 땀 뻘뻘나는 한여름 덕택에 시원한 학교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빙자한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거의 아지트로 변해버린 연우 형네에서 뒹굴뒹굴거리다가 마침 TV에 '깨끗하고 즐거운 롯~데월~드~~'라는 선전을 하길래 롯데월드 가고 싶다... 한마디 했더니 바로 떨어지는 연우 형의 가자, 라는 한 마디. 그래서 오랜만에 롯데월드도 가보고... 아, 물 맑고 공기 좋은 명지산에 배낭싸들고 여행도 다녀왔다. 계곡 쪽으로 해서 말이지... 이끼 낀 바위 사이로 흐르는 물의 운치가 얼마나 좋던지~

     "선배는요?"

     왜... 왜 그리 물끄러미 쳐다보십니까?;

     "흑... 묻지마라. 싸나이 가슴 찢어진다!!!"

     알만...하다. 여름방학 전부터 요번 여름에는 해변에서 쭉쭉빵빵의 미녀와 만리장성을 쌓는다 노래노래를 부르더니... 파토났음이 분명하지.

     "그나저나 너 요즘 불이 붙었다? 여름방학 끝나고부터 벌써 네 커플째다."

     엑, 왜 갑자기 화제가 거기로 넘어갑니까.

     "상기시키지 좀 말아요."

     "일 할 땐 잘 하더니만, 왜 해결하고 나면 난리야?"

     "잊은거유? 나 이 일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란거."

     "웃기네에~"

     "뭐가 웃겨!"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져버린 동방. 토익토플의 나름의 공부하는 동아리라고 동방까지 큰 걸로 준 학교측의 배려에 무색하게시리, 사실 이곳은 악의 소굴... 커플 깨기 클럽 'C.C.C.C'

     그리고 이곳에 노트북때문에 발목잡혀 원하던 원치않던 유력하게 커플 사이를 갈라놓는 권지인 나는... 정말 불쌍한 놈.

     "너 게다가 요즘 아주 물이 올랐다? 인기 많지?"

     "그래요, 나 인기 많아요."

     "아쭈쭈? 귀염성 없는 놈. 누가 진희 동생 아니랄까봐. 놀리는 재미가 그렇게 없냐?"

     귀염성 없긴. 내가 귀엽다는 소리 얼마나 자주 듣는데... 체, 어제도 말야, 내가 날계란하고 삶은 계란하고 구별 못해서 후라이 한답시고 삶은 계란 들고 깼을 때도 연우형이 귀엽다고 머리 토닥토닥했다구. 암암.

     "그나저나, 너 요상한 소문 들리더라?"

     "요상한?"

     "게이...라던가, 말이지."

     "푸흡?!!!"

     "아니, 뭐 믿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당연히 믿지말아야지! 아니 대체 소문이 어디서 어떻게하면 그리 날 수가 있어? 게이라니. 당당한 성적 관심과, 취향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을 어떻게 게이로 몰아?

     "그냥 너 애인없고 하니까 그런가보지. 워낙에 미모빨이 출중한 우리들은 구설수에 오르내리기 마련이거든."

     아, 정말 이제는 이런 자뻑 멘트에 익숙해져가는 스스로가 느껴진다, 느껴져. 아니, 그런데 그보다! 나만 애인없나? 여기 C.C.C.C.인간들 다 애인 없으면서!

     "임마~ 다르잖아. 우리는 애인이 없어도, 있는 척. 관심없어도 슬쩍슬쩍 찔러도주고."

     독심술까지 배웠수? 말 안해도 아주 척척이야?

     "넌 그런데, 영 아니라며."

     "아니긴?"

     "내 후배 하나가 국문과걸랑. 너랑 같은 수업듣는데. 정혜라고 아냐?"

     "...누구?"

     "왜 머리 주황색으로 염색해서."

     아아아! 맨날 그 끈나시 입고 오는 애? 말 나왔으니 말인데 그거 머리 좀 어떻게 안 된대요? 진짜 어색해, 주황색. 상큼발랄이 아니라, 눈 아파.

     "걔가 그러더라. 너 안다니까 '게이'냐고 혹시."

     "...뭐요?"

     "여자 애들이 관심 보여도 너 임마 눈길 한 번 안 준다며?"

     "관심받은 기억이 없는데?"

     "시간과 기회를 줘야지. 관심을 좀 더 체계적으로 쏟아부었을 거 아냐. 대체 넌 뭐가 바빠서, 시간 땡하면 친구 놈들 내버려두고 튄다냐?"

     그야, 연우 형하고는 학년이 다르니까, 자주 못 보는걸. 그러다보니까 남는 시간 있음 같이 보내려고... 흐음. 그게 이상한 건가?

     진짜 재미있다니까, 이 사람. 늘 느끼는 거지만, 날이 갈수록 흥미진진하고 웃을 때 또 얼마나 귀여운지. 나 그 얼굴로 귀엽다! 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감격했잖수.

     정말, 막상 친해지고 나니까 나랑 비슷한 부분도 많고, 의지가 되는 부분도... 왜 전에 처음으로 연우 형 집에 가게 된 것도 정식 초대가 아니라, 친구 놈들하고 술 푸다가 정말로 오지게 마셔서 필름나가고, 뭐 발광하다가 핸드폰으로 전화해서 뭐라뭐라 떠들었었나보더라. 새벽바람 맞으면서 좀 길거리에 앉아있다보니 정신도 약간 돌아오고... 뭐 그래서 자리에서 스윽 일어서는데, 그 새벽에... 연우 형이 찾아와서는, 나 챙기고 집까지 데리고 와서 재우고... 다음날에 꿀물까지 타다줘서... 진짜, 찌잉했다고. 아! 형이란 이런 거구나! 하고. 진희 형 같았어봐. 혹은 우리집 누나거나. '이 새끼 저 새끼'는 기본이고, 나오긴 뭘 나와. 그냥 알아서 해결하고 집에 들어오면 죽을 줄 알라고 길길이 날뛰었겠지.

     "그냥."

     "그냥은~ 사실대로 불어라. 너 말할 때도 '형,형'하고 입에 달고 산다며? 설마 그 형이 진희 놈은 아닐테고.'

     당연하지!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내가 뭘?"

     깜짝이야. 양반은 못되지, 양반은. 어느새 들어왔는지 퀭한 얼굴로 동방 문을 열어제친 최진희.

     "호랑이냐? 새끼, 절라 애 떨어질 뻔했네."

     "니가 애를 가질 수나 있냐? 혹시 그런 거라면 말만해라. 팔아넘기게."

     "에이~ 그건 아니지, 형. 애를 갖게해서, 그 출산의 모습을 보여서...돈을 벌어야..."

     "....니들 피가 통하긴 하는구나!"

     "당연하지~"

     "뭔 뜼이야!"

     "오호, 권지인~ 이 형님과 피가 통한다는 사실이 그렇게 절규할 만큼 기쁘냐?"

     "아니, 뭐... 그렇지... 뭐."

     "킬킬킬."

     "그런데 찌니~ 너 왜 이렇게 표정이 구려?"

     "앙? 아아아. 마귀할멈이 리포트 다시 내란다. 중간 고사 대체 리포트가 왜 그리 엉망이냐고."

     "아아~

     "너도 잘 알다시피, 그 기간에 내가 열라 쪼였잖냐."

     응, 그랬지. 커플 깨다가 잘못 걸려서, 완전히 코너에 몰렸었다. 그래도 나중에 잘 해결되고 사과까지 받았지만, 그 기간에 완전히 시나리오 하나 뽑느라고 저 인간 리포트도 못했다. 게다가 리포트도 미리미리 안해둬서...쯧.

     "그러게 미리 해두지."

     "시꺼, 삐약이. 그러는 넌 중간 잘 봤냐?"

     "나름대로."

     있지, 신기하게 말야, 연우 형이 찝어준 부분에서 아주 쏘옥 나오지 않았겠구? 글 쓰는 것도 정리해준 핵심대로였고.

     "오오오오~ 나름대로라. 하긴 삐약이 때 학고먹는 게 더 어려운 일이지, 뭐. 출석만 잘 채우면 말이지."

     "그렇지도 않다던데?"

     "누가."

     "형이."

     ".........형이? 형이 말이냐? 내가 언제?"

     ...진희 형 말고.

     "그래 그러고보니 삐약삐약 권지인. 너, 요새 이상한 소문 돌더라?"

     아니, 우리 학교가 이렇게 소문에 민감한거야? 아니면 내가 너무 뜨고 있는거야?

     "대체 다들 이상한 소문은 어디서 주워들어?"

     "원래 우리 동아리가 소머즈에 천리안을 가지셨다. 게다가 찍기의 명수 아니겠냐. 너 애인 생겼지? 형이라는 사람은 단순히 진실을 은폐하기 위한 핑계아냐?"

     ...찍기의 명수 좋아하네.

     "모르셔도 됩니다요."

     "임마, 너 애인만들면 배신배반! 알지?"

     "알기는 개뿔을!"

     "너 진짜 애인 생겼냐?"

     어느새 목소리 톤까지 바꿔가며 얼굴 앞으로 들이밀고 진지하게 묻는 게... 여기서 생겼다고하면 어떻게 되는거야, 대체?

     "아냐."

     "흐음... 그럼 뭐야?"

     "아니... 뭐... 그게. 참, 지금 몇 시야?"

     "앙? 12시 되어간다? 왜? 말 돌리지 말고."

     "아! 나 점심 약속 있어."

     "너야 요즘 맨날 약속 있었지. 새삼!"

     "와하하, 여하튼."

     "아! 참참. 지인이 너한테 이제 슬슬 진짜 중요 업무를 임명할까하는데 말야."

     "중요 업무?"

     그게 뭐야? 이 C.C.C.C에 커플 깨는 거 말고 더 중요 업무가 있어? 사기 이런 거면 진짜 곤란해!

     "너 여기 처음 들 때 약속 까먹었냐?"

     "응?"

     "잊었지, 잊었어, 이게~"

     "뭐얼!"

     "승호 형이 내건 조건."

     조건! 음, 노트북 값을 갚는다. 여기서 일하면서! 잘하고 있건만! 뭘 잊었다는거야?

     "붕어냐? 니 기억력은?"

     "내가 뭐얼!"

     "우리 학교 공식 커플을 깨라."

     "........."

     그래...그러고보니 그런 조건이 있었던 것도 같고...

     "이제 그걸 슬슬 너에게 넘기마."

     "그런데 그거 형 말대로 삐약이인 나한테 넘겨도 되는거야?"

     "뭐, 사실 우리는 다 한번씩 실패 경험이 있어서 말이다. 그냥 재미로 널 붙여보는거지."

     "뭐엇! 다 한번씩 실패?"

     "그래."

     "대체 얼만큼 잘난 놈이길래?"

     "직접 보면 알겠지. 그래서 내가 파일을 준비해...오....야!"

     알았어, 알았어. 우선 그거야, 그렇다하고.

     "나 나중에 볼게."

     "나중은 무슨! 보고 가!"

     "약속 있다니까."

     "야야!"

     그거야, 어떻게든 나중에 하면되는 문제고-되던 말던- 지금 형이 기다린다니까! 이 사람 꼬옥 15분씩 일찍 나온단 말야. 그래서 오늘은 내가 먼저 기다려보려고 하는 건데...

     "나 간다~"

     "임마! 그럼 이따 들려!"

     "안될걸! 내일 들릴게."

     "야! 권지인! 쨔샤! 너 죽을래? 야!"

    ***

     "아싸, 20분 낙찰."

     시계를 흘끗 보면서 좋아라, 하고 학교 내에 잇는 로즈버드 앞으로 달렸다. 오늘은 기필코 내가 먼저 기다려야지! 하는 의지까지 마구 샘솟아서... 히죽히죽 웃음까지 얼굴에 자연스럽게 나타나려고 하는데... 그대로 코너를 돌면서 눈 안에 들어온 건. 어라라, 이건 뭐야? 라는 소리가 나올 법한 광경.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훤칠한 키에 바른 스타일... 거기에 외모빨 죽이는 사람은 당연히 연우 형이지만, 그 옆에 여자는... 뭐랄까, 확실히... 이전까지 연우 형에게 한번 접근시도를 하려던 여자들과는 다른게...

     옷맵시도 빼어나고, 요란스럽지도 않고 외모도 고상하고 무엇보다, 연우 형이... 대화를 하고 있다.

     후다닥 괜히 뭔가 놀라서 벽 뒤에 숨어 살피자, 연우 형 작게 웃고있다. 게다가 여자랑은 꽤나 친한 사이인 듯 태도들이 편안해보이는게... 뭐야... 나 왜 지금 화가 나는 거지??

     "아 왔어?"

     "네..."

     늦었다. 그래 20분씩이나 일찍 와 놓고선. 벽 뒤에 숨어서 형과 그 이름모를 여자가 대화하는 걸 다 지켜보고, 그 여자가 가고 난 뒤에도 유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뽑으면서 자리를 지켰다.

     애인이 없다고 했다. 내가 몇 번이나 확인을 했을때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애인과 여자친구는 뉘앙스가 다를 수도 있는 문제였고... 거기까지 생각하다보니 묘하게 속이 꼬이는 기분이라, 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고 있다가 약속 시간에서 10분이 지난 뒤에 감정을 정리하고 형 앞에 나셨다.

     "기다렸죠?"

     "아니, 나도 방금 왔어."

     거짓말. 좀 전까지 웬 여자랑 시시덕거렸으면서. 아, 궁금하다. 누구냐고 물어보면... 아니지, 왜 숨어서 봤냐고 그럼 뭐라고해... 그래도, 역시 신경쓰인다. 뭔가 찝찝한 기분.

     "오늘 책 살 거 있다고 했었지?"

     "에...네?"

     "응?"

     이상하다는 듯 나를 돌아보는 얼굴. 아까 이 얼굴로 웃으면서...그 여자랑...

     "지인아?"

     "넷?"

     "네가 아니고, 왜 그래?"

     "뭐가요?"

     "얼이 빠졌는데?"

     라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살짝 내 얼굴을 살피는 게...

     "아, 아뇨. 아무것도. 그냥 좀 신경쓰이는 일이 있어서..."

     "신경쓰이는 일?"

     "뭐..."

     "뭐냐고 물어봐도 돼?"

     그건 내가 할 말이에요. 연우 형 나 그 여자 누구냐고 물어봐도 되는거유? 그냥 가볍게 웃으면서, '그 여자 누구였어요?'해도 되는 문제지만... 아 진짜.

     "물으면 안되는 거니?"

     뭐가...? 아! 신경 쓰이는 일.

     "그게...저... 그냥 별 거 아녜요. 이번에있는 가을 축제 때, 우리 동아리에서 뭘할까 생각하다가..."

     둘러대자.

     "아, 그 토익토플?"

     표면상으로는.

     "뭐 몇가지 대안은 있는 거야?"

     파전부치고, 한다고 하던데... 그건 다른 과나 동아리에서도 많이 하지않나?

     "뭐, 남들 다 생각하는 그런거요. 형은 축제 때 뭐 해요?"

     설마 아까의 그 여자랑 데이트으?

     "음, 우리 동아리에선 이번에 캐리커처 그려주기 한다던데?"

     뭐어어어? 지금 동아리라고...? 형 동아리 든 거 있었어요? 뭐야? 그런걸 왜 지금 말해?

     "형 동아리 든 거 있었어요?!"

     "응."

     "왜 그럼 말 안했어요!"

     "네가..."

     내가?

     "안 물어봤잖아."

     악! 그걸 말이라고 해? 나야 연우 형이 한번도 동아리 어쩌고 이야기 안하고 내가 우리 동아리 인간들 이야기 할 때도, 별 말없이 들어만 주길래 당연히 프리프리~인줄 알았지! 게다가 사실, 이연우와 동아리라니 어딘지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따고! 그야 물론 친해지고나면, 이렇게 재미있는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할 만큼 좋지만, 왜 그 처음에 친해지기 어려운 이미지잖아...

     "그렇다고 그걸 이제야 말해요?!"

     "...궁금했어?"

     궁금하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잖아. 뭐, 무슨 동아리에 들었을까 궁금해할만한 실마리라도 줬어? 지금 그렇게 조금쯤 미안하네~ 하는 표정으로 웃으면 단 줄알아? 쳇쳇, 자기는 맨날 내가 이야기하는 거 다 들어놓고는! 나도 궁금하단 말이다!

     "그럴 겨를이나 줬어요?"

     웃기는~!

     "대체 무슨 동아리에요?"

     "K-대 동아리."

     "......누가 그걸 몰라서......"

     잠깐, 음음, K-대 동아리라... 어디서 들었던 것 같은데.. 이거, 이거, 혹시...

     "그 학교 동아리?!"

     "알아?"

     "왜 전에 말한 열라 이상한 우리 사촌 형이 말해줬었어요."

     분명히 말야 거기 있는 인간들 다 독종이라고... 독종... 독조옹. 하긴 이연우씨가 좀 특이하긴 하지.

     "그래?"

     "네, 거기 수재 모임이라면서요?"

     "그렇지도 않아."

     그렇지도 않긴요, 과톱 씨.

     "왜, 작년엔가 찾아가는 사람들한테 다짜고짜 영어로 질문했다면서요?"

     "별 말 안했는데.."

     아무렴 그랬겠지. 그랬다고 믿어드려야죠.

     "그런데, 이번에는 웬 캐리커처에요?"

     "응? 재미있잖아."

     이 사람, 가만보면 참 진중하고 의젓하게 보이면서, 가끔 어떤 행동의 이유를 '재미' 내지는 '흥미'로 치부하며 빙긋 웃을 때면 그 이미지의 갭의 차이가 엄청나다, 아주.

     "뭐, 그렇겠죠."

     "응."

     '응'이 아니잖아요, '응'이. 여튼 비아냥도 구별 못하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그러는 건지, 원.

     "그런데 무슨 책 사게? 교보 문고로 갈 거야?"

     "네, 그런데 형 바쁘면 꼭 같이 안가도..."

     으으으음?; 뭐야? 왜 얼굴을 굳히고 그래?!

     "내가 같이 가는 게 불편해?"

     ...뭐라냐, 이 사람이 또.

     가끔 느끼는 거지만, 연우 형 한번씩 영 엉뚱한 곳에서 핀트 못맞추고 나가는 거보면 신기하다, 아주.

     기억할라나 모르겠지만 책사러 가니까, 같이 가요~ 라고 일방적으로 졸랐던 사람은 나라고 나. 그런데 이제와서 '형하고 같이 가는 거 불편해!'라고 할리가 없잖아. 그러함에도 진지한 얼굴로 '나랑 같이 가면 불편해?'라는 반문이라니... 놀리려고 한 말인건지, 아니면 정말로 너무 사람 대하는데 있어 신중한건지...

     "그럴리가 없잖아요. 책 사러 가자고 한 거 나 혼자 조른 거라서 형 시간 방해하는 거라면..."

     "아냐."

     말 끝나기도 전의 대답이라. 이렇게 확실하게 잘라 말해주니 기쁘기는 하지만 나 뭔가 떠오르는 게 있는데 말이지...

     "가만 그러고보니, 맨날 내가 어디 가자고 하네."

     "응?"

     응응! 그러고보니, 그래. 도서관을 가자고 하는 것도 나고, 영활 보러 가자는 것도 나고, 책을 사러 가자는 것도 나. 여지껏 형과 어디를 갈 때에, 권한 건 나였다. 물론 거절당하거나, 싫은 내색을 받아본 적은 없지만... 아니 그렇기 때문에 이 부분을 내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던건가? 사실 알게 뭐냐고. 지금도 가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무표정하게 있을 때가 있는 사람인데... 아아악! 그럼 나 여지껏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껏 민폐를 끼쳐버린 걸까나? 아니야, 그래도 형도 늘 언제나 즐거워하는 표정... 이었던가? 으으읏.

     "지인아?"

     잠깐만요, 나 지금 머리 굴리고 있으니까 스톱 부탁해요. 따져보자고, 건지인. 정말로 여지껏 형이 내게 어디를 가자고 한 건 손에 꼽히지. 반면 내가 가자고 한건... 많다! 하물며 뭐 먹어요, 뭐 사요~ 하는 것도 내 의견이 90%이상. 악! 나 너무 제멋대로였던걸까나? 응응?! 그래도 나 어디가서 한번도 '너 너무 멋대로야'라는 말, 들은 적 없다고. 아니, 다들 그렇게 생각했는데 대놓고 말하기 뭣한 부분이라서 말 안했던 걸까? 그런걸까나?

     "형!"

     "응?"

     "사실대로 말해봐요."

     "....?"

     "나 너무 멋대로에요?"

     "뭐?"

     나 그러니까, 남의 의견같은 거 안 살피고 사정 무시하고 나 하고픈대로 하는 그런 스타일? 아아아! 정말 싫다고 생각했떤 그런 인간 타입이 설마 나인거야? 으으으으! 만약 그렇다고 해도, 좀 돌려말해줘요~ 안그러면 무지하게 나 상처받을 거 같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너무 멋대로 나 혼자 휘두르고 다니는..."

     "지인아."

     "네.."

     "왜그래, 갑자기?"

     왜..그래 갑자기... 평소에는 신경도 안 쓰고 잘 지내다가 새삼, 왜 그러냐는 걸까? 이건 너무 비약이 심한가... 아니 심하긴 뭐가 심해!

     "알아버렸어요."

     "뭘?"

     "나 여지껏 형한테 뭐해요,뭐해요~ 하고 조르기만 한거."

     "그게 뭐."

     "그게 뭐라뇨. 형은 한번도 나한테 그런 말한 적 없잖아요. 그러니까, 여지껏 불편해하면서도..."

     "권지인."

     ...아...왜...그렇게 웃어?; 상당히 비틀린 웃음인데 그거? 나 그런 표정 나오게 할 만큼 멋대로였어요?

     "이제보니, 망상이 심하네."

     컥!

     "내가 싫어하는 일을 싫어하는 사람이랑 같이 할 만큼 성격이 좋아보여?"

     ..........아니..그게... 그러니까아... 지금 표정이 말이지이.

     "난 그렇게 못해."

     네...네... 묘하게 설득력 있으십니다. 그렇군요, 남들이 그런 말 했다면 '뭐ㅕ야~ 그게.'라고 했을 법한 대답이건만, 연우 형이 말하자 '그렇군!'이라는 확신이 마구마구 넘쳐흐르는게...

     "게다가, 내가 너한테 뭔가를 하자고 안 한건 내가 하고싶은 일들 네가 다 하자고 말해주니까."

     정말? 거짓말~ 우리가 무슨 일심동체도 아닌데.. 완벽하게 맞을리가 없잖아. 커피만해도 그래. 형은 커피 좋아하지만, 난 아니고...

     형은 달걀 반숙을 먹지만, 나는 완숙 아니면 안 먹는다고! ....음 이런 문제는 아니지만.

     "내일쯤 영화를 보러가자고 해볼까 하면 네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형 표 예매했는데 영화 보러가요.'라고 하고 날이 좋아서, 어디 놀러라도 갈까 하면 '대공원 가죠!'라고 말하고, 그래서 처음에는..."

     똘...망...똘망이라... 똘망한 눈이라니; 내가 그런 눈을 했다고? 아니 우선 이건 다음에 따질 문제고... 그러니까 처음에는? 처음에는 뭐?

     "네가 독심술을 하는게 아닐까 생각했어."

     ......어이, 이봐요. 그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이런 웃긴 이야기해도 되?;

     "그래서 시험도 해봤지."

     뭣!!

     "무슨...시험..?"

     고개 돌리지말고! 이연우씨 특이한 건 알았지만, 독심술을 의심! 시험까지?! 이거 너무 재미있는 소스잖아. 풀어봐요~~ 에이, 치사하게 숨기지말고~

     "커피를 타준다고 한 적있잖아. 네가."

     음음?...아!! 전에 형네 집에 갔을 때 매번 형이 차 타주는 거 미안해서, 커피정도라면... 하고 생각해서... 음음 그런데 그때 왜? 나 커피 타는 동안 뒤에서 무한한 전파라도 보내고 있었던거야?

     "속으로 생각했어."

     "뭘?"

     "설탕은 빼고. 설탕은 빼고."

     풉!!!푸흐흐흡...으하하하하, 그게 뭐야!!!

     "그런데, 엄청 단 커피를 만들어 오더군."

     "다..달았어요?"

     아니, 커피 그 쓴 걸말이지... 설탕도 없이 어떻게 마셔. 향이라면 몰라도 커피를 코로 마시는 것도 아닌데...

     "매우."

     그때 한 마디도 안해 놓고선. 정말 맛있다는 듯이 마셔두고. 뒤에서 이런 말 하다니 이건 반칙!

     "그래도 좋았어."

     "좋긴요. 달았따면서."

     "단 거 싫어하지않아."

     "설탕은 빼고 라고 주문 넣었다며."

     "그건 블랙이 마시고 싶었던 게 아니라, 단순한 실험."

     장하십니다그래.

     "여튼 그래서 아닌 거 알고, 아..독심술 하는 게 아니었구나, 라고 생각했지."

     ....이봐요...;; 독심술 할 줄 알면, 내가 지금 이렇게 노트북 값 때문에 질질질거리면서 대학 다니겠수? 랜디 찾아가서 초능력으로 상금 거머쥐고 방송타고 유유자적 생활하지.

     "그리고나서 기뻤어."

     으으음?

     "독심술을 하는 것도 아닌데 이만큼이나 기호가, 코드가 같구나하고."

     코드가...같다니. 그럼 나도 괴짜라고? 그건 좀 빼주지~

     "설령, 네가 보자고 한 영화가 내가 끔찍해하는, 스릴러물임에도."

     "...스...릴러 싫어해요?"

     "별로 즐기지 않아."

     말했어야지!! 어쩐지!! 그날 유난히 표정이 굳어있더라!

     "이쯤되면, 코드가 같다는 소리는 나오지 말아야죠!"

     "그래도 너랑 보니까 재미있떤데..."

     "......하.."

     "여튼 내가 싫어하는 일이라고 해도, 그다지 내켜않는 일이라도, 네가 하자고, 같이 보자고하면 좋거든."

     아이는 그렇게 키우면 버릇나빠집니다, 학부모님.

     "그래도 나 알게모르게 폐 많이 끼쳤구나. 열라 단 커피에 싫어하는 스릴러물까지."

     "뭐 들었어?"

     "뭐가요."

     맞잖아. 결국 나 그래도 민폐끼쳤다는 거잖아.

     "그러함에도 즐거웠다라고 말하는 거잖아."

     "그래도 폐는 폐."

     "정 견딜 수 없는 정도면 내가 말해. 하지만 여지껏 그랬던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리광을 너무 받아준다거나?"

     "귀여운 동생이 부리는 어리광이라면 얼마든지."

     ......귀여운..동생이라..

     "자꾸 그럼 나 더 제멋대로가 될지도 모르는데?"

     "지금도 충분하잖아? 여기서 더?"

     놀리듯 웃으며 슥슥 머리를 부비는게.,.. 아 이 행동도 처음에는 슬슬 피했지만, 이제는 익숙해져버렸다.

     "제멋대로인 동생이 좋다면서."

     "푸후, 그래. 그러니까, 그런부분에 대해서 싱경 쓸 필요가 전혀 없다고."

     "응, 고마워요. 역시 형이란 존재는 좋구나~"

     "응?"

     그래그래, 나도 반성해야겠다. 친형도 아닌데, 이렇게나 잘 해주잖아. 나는 지훈이가 내 CDP망가트렸다고 열라 구박하고... 음, 하지만! 난 적어도 뭐 연우 형 물건 망가트리진 않았다?!

     설거지한답시고 접시 몇 장 깨 먹기는 했지만...

     "여튼 형, 가요. 그럼."

     "그래."

     기분 좋다. 역시 이 사람하고 있으면 뭐랄까.. 잔뜩 웅크리고 있던.. 가시 삐죽이 세우고 있던 부분이 누그러진다고 할까? 그래 저번에도 교수한테 좀 치이고 잔뜩 골나서 퉁퉁거리면서 찾아갔더니 묘하게 부드러운 얼굴로 다독거려줘서... 곧 풀어졌었다. 봍오 나 골내면, 끝없고 주위 사람 피곤하게 만든다고 할 정도로 틱틱거리는 편이라던데...진희 형 말로는.

     "왜?"

     "좋아서."

     ".........음."

     "내가 형 굉장히 좋아하는 거 알죠?"

     "아...응...."

     "뭐야, 형 안 반가워요? 우와, 나의 이 무한한 사랑을 받는 사람은 흔치않는데? 형, 형~ 왜 고개를 돌리고 그래요?"

     "아니..."

     "설마 거부? 응? 얼굴 좀 보여줘봐요~~~"

     "빠..빨리 가자."

     얼레? 말까지 더듬어? 와하하, 재미있다~...아, 그런데 나... 뭔가 하나를 까먹은 거 같은데... 그게 뭐지? 으으으음.

     "으앗! 같이 가요~~"

    ***

     유려한 곡선을 이루는 청기와, 단단한 나무로 짜여진 입구에 적힌 '선거유지(仙居幽址)'라는 문구, 그리고 그 양 대문 옆으로 곱게 달린, 초롱 등까지... 이건 어디로보나 옛날의 으리으리한 기와집, 그 자체다. 게다가 가게 주위로 세워진 차들은... 에쿠스에... 저건 아우디... 또 사브... 대체 여기에 버스타고 쫄래쫄래 왜 온거야!

     "형, 여기는 왜요?"

     "배고프다며?"

     아니, 그게 아니라앗!

     "여기 말이에요..혹시."

     "응? 우리 가게."

     역시!!! 으으으! 정말이지 이 사람 생각이 있는거야 없는거야?

     우리 꼴을 보라고, 특히 나! 찢어진 구제 청바지에, 티 하나 걸치고 손에는 오늘 산 책꾸러미 들고 선 내 모습이 아니보여?

     이래가지고 저 우아하고 고상한 분위기에 가게로 들어자가고? 응?!

     "그러니까 여기를 왜 왔냐구요!"

     "한식이 먹고싶다고 했잖아?"

     ......그래, 그랬지! 그랬어. 책 한참 고르고 형하고 좀 구경하다가, 슬슬 배가 고파져서 밥 좀 먹자고 했다. 형이 근처에 스파게티 맛있게 하는데 안다고 가자길래, 오늘은 좀 밥이 땡기는 날이라 '나 오늘은 밥 먹고 싶은데...'라고 했더니 다짜고짜 '그럼 괜찮은 한식집가자.'고 사기(?)를 치고 이리로 데려온 것. 오는 내내에도 설마설마 했지만...

     "그랬지만, 여기는..."

     "왜? 싫어?"

     싫어? 가 아니잖아! 싫어가!

     "내 꼴을 보고 말해요."

     "응?"

     내 말에 휘휘 나를 살피는 눈. 그러더니...

     "그러고보니까.."

     그래요, 이젠 좀 알겠수? 이런 차림으로 저런 분위기의 가게를 어찌 찾아가?!

     "청바지 예쁘다. 물 잘 빠졌네. 바지 직접 찢은 거야?"

     .....관둡시다...

     "여튼 못 들어가요."

     "저번부터 한번 같이 오고 싶었어. 너 한식 좋아한다며. 우리 집 나름대로 맛 괜찮아."

     누가 그걸 몰라서 그래? 최고의 맛집하면서 유명세 톡톡히 보이는 '연하각'이면서 어련하려구! 그런 집이 누가 싫어서 안 들어간대? 진짜 몰라서 이래?

     "혀엉."

     "내가... 괜한 일 한거야?"

     .....아니... 또 그렇게 자책하는 얼굴을 할건...

     "그게 아니라아..."

     "그냥..다른 데 가래?"

     아!! 씨..정말...으으으으!!!

     "들어가면 되잖아요! 들어가면!"

     "잘생각했어."

     ...바로 웃기는! 이거 계획이지? 정말 자기는 단정하게 입어놓고. 아니 뭐, 형이야 찢어진 바지를 입어도 어딘지 단아한 자세가 나오는 그런 품위가 느껴지지만 말이지.... 으앗! 손 잡아끌지마욧!

     가게 앞 정문으로 돌담길처럼 꾸며둔 길을 밟으며 나름대로 티 한번 더 보고 가방 한번 고쳐매고 심호흡을 두 번 했다. 남이 들으면 '유난떤다'고 할지 모르지만, 사실 정말로 이런 털털하고 가벼운 분위기로 들어가기가, 묘하게 망설여지는 가게라 이거지. 이곳이...

     "어서오세요."

     가게 안을 드어서자마자 머리를 싸악 틀어올린 예쁜 여자가 다소곳이 손을 모으고 인사를 해온다. 옷도 계량한복식의 밀감색으로 은은하고. 과연 종업원마저 품위가 느껴져서 괜히 내 발끝만 한 번 더 쳐다봤다.

     "예약하고 오신건가요?"

     생긋생긋 웃으면서 나긋나긋하게 물어오는 음성.

     "아니요."

     "몇 분이 오신 건가요?"

     "둘 입니다...만... 사장님 계신가요?"

     "네?...아, 사장님 손님이세요?"

     "손님은 아니지만, 어디 계신가요?"

     "지금 청회루 쪽에, 아는 분이 오셨다고 해서... 들어가 계신데."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아, 예. 저기 그럼 일반실로 모시겠어요. 예약석이 다들 차서. 괜찮으신가요?"

     "네."

     "이리로 오세요."

     사뿐히 먼저 앞길을 터서 걷는 여자의 뒷모습만 보다가 숨을 한번 내 셨다. 

     "왜?"

     작게 툭 나를 치며 물어오는 음성.

     "아...뇨. 좀 긴장해서."

     "밥 먹으러 와서?"

     "형같아 봐요."

     "뭘?"

     모르면 맙시다. 말해봤자 내 입만 아프지.

     "일반실이라는게 여기?"

     "응. 좀 작지?"

     작아? 작기는! 방 하나잖아. 거기에 주변에 걸린 그림이나, 이 은은한 향까지. 그러고보니, 가게 안에 들어서면서부터 뭐랄까, 묘하게 동양적인 은은하면서도 마음이 차분해지는 향이 흘렀다. 글너ㅣ까, 음... 복숭아향 비슷하면서도 꽃내음같기도 한.

     "좋은데!"

     "그래?"

     아니, 대체... 그럼 일반석이 이럼 다른 건 어떻다는거야. 아니, 그보다 역시 방이 등급별로 나눠져있나?

     "그런데, 이거 향 좋다."

     "응?"

     "방향제...쓰는 건가요?"

     "아? 아아, 아니. 꽃잎같은 거 말리거나, 과일로 천연 향을 제조한 거야. 은은하고... 괜찮지?"

     "네."

     역시 대문에 적혀있는 '선거유지'라 이건가...신선이 머무는 향기로운(그윽한) 곳.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며 가게 분위기에 빠져있는데 치리링... 작고 가늘지만 맑게 퍼지는 종소리가 들린다싶더니, 스르륵 방의 문이 열린다. 그리고 들어선 사람은 옥색의 한복을 곱게 입고 머리를 고상하게 틀어올린... 중년의 여자... 아아앗... 저 얼굴 낯설지가 않은게! 으아! 선배랑 똑같잖아!!!

     "아, 어머니."

     역시!!!

     "어머, 연우 너였니?"

     "저, 안녕하세요."

     벌떡 일어서서 꾸벅 인사를 하자, 이번에는 정말 놀랐다는 듯이 눈이 동그래지시는게... 아 역시 이런 차림으로 와서 그런걸까. 아씨! 선배는 정말. 이래서 내가 안 들어온다고 한건데...

     "누구...? 설마 우리 연우랑 같이...온?"

     "네? 네넷."

     "어머, 반가워요."

     앗...웃으신다. 다행이다. 흐아, 내 옷보고 뭐라 하실까 가슴이 조마조마하는데, 생긋 웃으시며 살짝 인사를 하시는게... 정말 고운 느낌.

     "별일이네요. 우리 연우가 가게를 찾아온 것도 그렇지만 손님을..."

     "아...예.,"

     "우리 둘째 녀석처럼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오는 것도 그렇지만, 이 녀석은 정말 토옹 찾아오지를 않아서, 게다가.....친구...?"

     "후배요."

     "아...후배까지 같이...후훗..."

     "네에..."

     "맛있게 먹고가요. 연우 너도 좀 자주 찾아오고. 아들 얼굴 잊어버리겠다."

     "....왔잖아요."

     "밥 먹으러 오는 거 말고 집에. 요새는 연락도 없고 말이지."

     "........."

     "그리고 다 먹고 가기 전에, 나보고...가.......아니다. 오늘은 손님도 있으니, 다음번에 다시 들려. 후우~ 잘 먹고 가고, 다음에 또 와요."

     에에엣? 저...저요. 네...넷...

     "예..."

     "식사는 들어가면서 내가 알아서 말해줄 테니까 괜찮겠지? 괜찮죠?"

     아들에게 한번 그리고 잊지않고 날 돌아보면서 웃는 얼굴로 말하는 모습에 무조건 고개를 끄덕끄덕. 제가 무슨 말을 하겠사옵니까!!!

     "그럼 이만..."

     다시금 생긋 웃으시며 한복 자락을 고쳐쥐시고, 창호지 문을 스르륵 닫고 나가는 모습에 '하~'하고 한숨이 한번 나왔다. 정말이지, 우아하고 고상한 분위기지만 어딘지 박력이 있다고 해야할까... 뭐라고 해야하나...

     "...뭘 그렇게 긴장하고 있어?"

     ...아니, 긴장 안 하게 생겼어? 친구 집에 놀러가면 늘 볼 수 있는 우리 엄마와 비슷한 느낌의 아줌마! 가 아니라, 뭔가 정말 이건 사장님, 어딘지 범접하기 어려운 그런 기분이었다고!

     "미인...이시네요."

     "응? 아아."

     "형하고 많이 닮았어요."

     "응? 어디가?"

     "표정이라던가, 분위기라던가."

     물론 어머님이 더 잘 웃으시지만, 여튼 그 묘한 분위기가 똑 닮았다. 몸에서 흐르는 느낌도 그렇고.

     "그런데, 어머님이 형이 손님 데리고 왔다니까 ㄴ ㅗㄹ라시던 눈치인데?"

     "응? ...응."

     "...잘 안 데리고 와요?"

     "혼자서도 잘... 오지않아. 여기에."

     "아?"

     혹시 뭐 사이 안 좋아거나...

     "푸...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고."

     ...웁. 표정에 보였습니까?;;

     "그냥, 같이 올 사람도 없고."

     오고싶어하는 사람은 많았겠지!! 그래도, 이거 영광인데...? 여하튼 여기 데리고 온 정말 몇 안되는 사람 중에 하나라는 거 아냐? 어머님이 손님데리고 왔다니까 놀랄 정도였으니. 어쩐지 이거 정말 기분 좋잖아. 특.별.이라는 기분일까나?

     "그나저나 어머님한테 책잡히는거 아닌가 몰라요, 나."

     "왜?"

     "아까부터 말했지만 내 옷차림을 봐요."

     "좋은데, 잘 어울려."

     잘 어울리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라....

     "여기에 안 어울리잖아요."

     "너한테 어울리면 되는거야."

     "...그런가?"

     "응."

     "뭐, 형이 그렇다면야..."

     그런거겠지~

     정말 맛있다. 한식이라는게 정말 이렇게 맛있다고는...

     늘 먹는 그런 맛이 아니라고 이건 감동이다. 이 수많은 나물 반찬이며, 고기전하며...하아.

     "맛있다, 진짜 맛있다."

     "그래?"

     "네!"

     "다행이네."

     옷때문에 나 여기 안왔음 억울해서 어쩔 뻔했냐. 아 물론, 이 맛도 몰랐으니, 그다지 억울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여하튼간에!

     "맛있어요, 진짜로."

     감탄사를 내지르며 밥을 먹자 형이 빙긋빙긋 웃으며 자기 앞의 그릇들을 내 앞으로 살짝 가까이 밀어준다.

     "형도 먹어요."

     "사람들이 보는 것만으로도 배부르다는 소리하는데, 그게 뭔 뜻인지 알겠다."

     "네??"

     뭐라고 중얼거린겨? 음음, 이것도 맛있네. 무슨 나물이지? 오호, 이건 죽순! 정말이지, 사기그릇들에 담겨나온 반찬 가짓수에도 놀랐지만, 맛은 더 죽음인게...

     "많이 먹어."

     "안그래도 많이 먹고있어요."

     "응."

     자고로 금강산도 식후경이니, 식도락이니, 먹는 것이 인생에 있어 정말 큰 행복이라느니 하는 말이 있듯, 정말 맛있는걸 먹는다는 건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왜, 여자들 중에-남자들도 있지만-스트레스 받으면 먹는 걸로 푸는 사람들. 그거 이해가 간다니까. 여튼 맛있으면 행복♡한 기분이 되니까. 특히나 이런 분위기 나는 곳에서 밥을 먹는다면 더욱 플러스가 되고. 아, 그나저나 그러고보니 우리 엄마아빠 치사하잖아. 이렇게 맛있는 집에 두분이서만... 아무리 금액이 있다고 해도 그렇.. 아! 그러고보니 이거 식비는?!! 으으으! 식비는 어떻게 되는거지? 대체 얼만거야? 메뉴판을 봤어야 알지.

     가격이 장난이 아니라고 하던데. 우웃, 그러고보니 나온 음식들로만 봐도 송이에 죽순에 더덕에... 인삼, 당기, 쇠고기... 다 비싼거고 말야. 아무리 형이 이리로 오자고 했어도 모든 계산, 형이 해요! 하는 건 말도 안되고. 그렇다고 싸악 먹고만 나가야 하는 건가? 으으읏.

     "왜?"

     "아?"

     "뭐 생각해?"

     "...이런거 물어봐서 좀 그럴지 모르겠는데요."

     "아?"

     "형...대체 이거 한끼에 얼마인거에요?"

     그래, 돈을 얼마를 내느냐하는 것도 궁금하지만, 정말 갑자기 순수한 의미로 얼마나 드는지 궁금해졌다.

     "음...돈 내고 먹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

     그..런...건가요?;; 하긴 자식한테 밥값 받는 부모야 없겠지만서도.

     "그래도 대충."

     "그런 거 신경쓰지말고 많이 먹기나 하세요, 권지인 씨."

     ....으으으음. 그래그래, 돈이야 어찌 되었던 먹고 보자~!

     "진짜 잘 먹었다."

     마지막으로 얼음이 살짝 도는 식혜로 마무리를 하고나자 정말로 포오옥 행복해지는 기분. 상 위에 느긋하게 뺨을 묻고 배를 두드리자, 연우 형이 빙긋 웃는게 보인다.

     "맛있었어?"

     "먹는내내 내뱉은 감탄사로는 부족할만큼요."

     "다행이다, 다음에 또 오자."

     "자주 안 온다면서요?"

     "맛있었다며."

     "비싸잖아요."

     "괜찮아."

     "제가 안 괜찮네요 뭐~"

     "공짜잖아."

     형이야, 부모자식 관계니까 그렇지 나는...

     "어머니가.."

     "네?"

     "너 마음에 들어하시더라."

     "에엑? 언제 그런 소리..."

     아.. 아까 혹시 형이 화장실 간다고 하면서 나갔을 때...?

     "자주 좀 데려와서 많이 먹이래."

     혀엉;;

     "너 말랐다고."

     "에?"

     나 그다지 안 말랐는데... 옷 입으면 좀 더 말라보이긴해도 말이지.

     "손목이 한 손에 다 잡히잖아."

     형; 그건 비만만 아니면 다 잡혀요.

     "내 손으로 잡으면 남고."

     "그건 형 손이 커서 그렇죠."

     그래, 말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연우 형 손이 크다...라기 보다는 손가락이 길다. 그것도 남자 손 같지 않고... 아니 그렇다고 여자 손 같다는 것도 아니지만, 정말 손가락이 예쁘다고 할까. 휘어지지도 않았고, 정갈하고, 손톱도 늘 깨끗하게 깎고 다니고, 남자 손에 한둘씩 훈장처럼 있는 상처같은 것도 전혀 없는게... 내 손가락을 잘 보면 엄지있는데 희미하지만, 예전에 꼬맨 자국이 있어서... 손가락끼리 살짝 문지르면 오톨하니 올라온 게 느껴진다. 바늘자국, 그러니까, 어릴 때 양 옆으로 펼쳐지는 칼을 가지고 놀다가, 확 베었지...음.

     "넌 좀 더 쪄도 돼."

     "...으음."

     "저번에 안아보니까 가볍더라."

     "엑!!"

     그...그건 또 무슨 소리야??

     "키에 비해서."

     날 언제 안아...봐...???!!!!

     "아, 너 전에 술 취해서 나한테 전화한 날."

     아! 그 온갖 추태 다 보이던. 그러고보니 나 다리에 힘이 풀려서,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었으니... 그리고 형네 집에 가서도 바닥에 자빠져 그대로... 아아... 맞아 눈떴더니 침대였었지.

     "으으... 때려서라도 깨우지 그랬어요. 그걸 안아 옮겨요?"

     "너무 피곤하게 자길래."

     "그래도..."

     "처음에는 몇 번 깨웠는데.. 지인아...지인아하고."

     그랬더니?

     "그랬더니, 짜증내더라고. 칭얼칭얼거리다가 잔뜩 얼굴 찌푸리고 내 손 탁탁 쳐내고 말야."

     우우우우우웃!!!!!

     "쿡쿡."

     "수...술취해서 그런거에요. 평소에는 깨우면 잘 일어나요!"

     "그래그래."

     "씨이, 억울햇! 나도 언젠가 형 취한 거 볼겁니다, 뭐."

     "아, 안돼."

     "안돼?? 뭐가요?"

     "나 알콜에 약해."

     으에에에엣? 진짜? 정말?

     "뭐 그리 놀란 얼굴을 해?"

     "말술일거라고 예상했는데?"

     "어디로 봐서?"

     어디로 보긴 전체적으로 봐서 그렇지. 무표정하고, 평소에 다른 사람한테 대하는거 보면 거리감이 확 느껴질만큼 깍듯하고... 이런 타입 술에 강하잖아. 들이부어도, 들이부어도 밑빠진 독! 그래서 술 마셔도 정신 강하게 차릴 거같은 스타일이었단 말야~!

     그런데 술에 약하다니... 거짓말~

     "정말 술에 약해요?"

     "응."

     "주량이 얼만데?"

     "으음, 왜?"

     그냥, 그렇게 말하니까 먹여보고 싶잖아. 언제고 날 잡아서 싫다고해도 입 억지로 벌리고... 아 이렇게 하면 탈나나? 끄응. 그건 좀 곤란하지.

     "궁금해서. 얼맙니까?"

     "3병."

     "엥? 맥주?!"

     "어? 맥주 물어본거야? 맥주는 한 7,8병이면..."

     "그럼...3병이라는건?"

     "소주."

     뭐야!! 이 인간 소주 3병에! 맥주 7,8병?! 장난해? 그걸 그렇게 마시면서...뭐? 술에 약해? 이 사람이~ 누굴 놀리나!

     "넌?"

     "맥주는 4병. 소주는 한 병 반이면 가요."

     "뭐!??"

     "...뭘 놀래요. 형이야말로."

     "너 그럼 그날에 취했던 날 궤짝으로 마신 거 아니야?"

     속에 구멍 뚫일 일 있어! 소주를 궤짝으로 두고 마시게!

     "형...대체 형보고 술 약하다고 한 사람이 누구에요? 다른 사람하고 술 안마셔봤어요?"

     "마시지만 늘 내가 먼저 손 들어버리니까 말이지."

     ....누구야 대체 그 사람!

     "누구랑 마시는데?"

     "우리 형이랑, 친구들일아 마실 때.. 소주는 기본이 세 병이고, 즐기면 5병... 더 가면, 그 이상도 들어가던 걸."

     ".....주변 사람들이 막강하군요."

     그런 연유였군. 세 병씩이나 마시면서 '술 약해'라는 얼토당토않는 소리를 하게된 경위가 말야.

     "형 취할 때까지 마셔본 적 있어요?"

     "아아, 처음 술 배울 때."

     "그때가 언제인데?"

     "중학교 1학년?"

     ....이렇게 '올바르게 살고 있습니다!'하는 얼굴로 정말 할건 다 했다니까.

     "누구한테 배웠어요?"

     "우리 둘째 형."

     잘 돌아가는 집이었군. 난 고등학교 때 '정말로 술을 마신다~' 라는 기분으로 마시기 시작했는데... 중학교 때야 친구들하고 가끔 맥주 한 캔들고 폼 재는 게 다였고 말이지.

     "그렇군요. 그런데 형 어디가서 형 술 약하단 소리 말아요."

     "아?"

     "욕먹어요."

     "다들 믿던데?"

     당연히 믿겠지. 진짜 진지한 얼굴 해 가지고선 '술 약해. 잘 못마셔.'같은 소리하면... 누가 같이 술 마시자고 하겠어. 그냥 그 말 믿고 말지. 나도 깜빡 속을 뻔했잖아~

     "아무렴요. 형한테 반박하려고 맘먹는 인간이 있따면 그 인간이 비정상이죠."

     "꼬였다?"

     느껴지긴 하슈? 여튼 소주 3병에 튕기듯 '술 약해~'가 아닌, 진짜 3병이면 술에 약한거지! 하는 사람은 이 사람이 또 처음이네...

     "여튼 이제 슬슬 일어나자."

     "배가 무거워서 못 일어나겠어요."

     "....으으음...엉덩이가 아니라."

     그건 아줌마들 대사고!

     "그런 말 좀 진지하게 안하면 안되요?"

     "뭐?"

     "....관둡시다요. 형을 두고 내가 뭔 말을 하겠습니까."

     "꼬였다니까 너~?"

     "애정 표현입니다~"

     ".....삐뚤어진?"

     "아마도."

     "올바른 애정 표현이 듣고 싶은데."

     "...나가죠."

     "방금 무지 피곤하다는 듯한 표정 연.기."

     "연기가 아니라, 무의식중의 진심이었겠죠."

     "푸후..."

     "참 정말 그나저나, 이거 식사비 어떻게 해요?"

     "뭐가?"

     "뭐가라니. 갑자기 찾아와서..."

     "아아~ 식구가 초대한 손님에게 돈을 받는 경우는 없지."

     초대한 손님이기는... 어거지로 끌고 온 거면서. 말만 좋다~

     "그래도..."

     "그래도는 무슨. 자 일어나."

     일어나기는 하겠지만... 아아, 정말 배부르고-그것도 맛있는 걸로 채워진- 하루종일 돌아다녀서 그런지 몸이 좀 나른한게 잠이 소록소록 오는걸...

     "정말 인간은 욕구에 충실한 동물."

     "왜?"

     "배부르니까 졸려서요."

     "쿡."

     웃을 일이 아니라고. 정말 지금 이 기분 상태로라면 어디가서 배 깔고 따악 누워버리면 바랄 게 없겠다~ 라는 기분인걸.

     "정말 잘 대접받아서... 이건 부담스러울 정도..."

     가게를 나서기 전 출입구에서 다음에 또 오라며 생긋 웃는 연우 형의 어머니를 보고 꾸벅 다시 인사를 하자,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해 주셨다. 거기에, 연하각이라는 이름과 문양이 새겨진 봉투를 하나 내미시기에...

     '뭐죠?'

     라고 물었더니... 해사하게 웃으시며,

     '우리집 잣죽을 좋아한다고해서 하나 준비했어요. 위에 얹어진 건 전복죽이고.'

     라고 말씀하시기에 그대로 히껍하며 연우형을 돌아보자, 전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더니 나중에는 어머니 손 부끄럽게 하지말고 받아라....라고 말해서...

     "날 뭐로 생각하시겠어요."

     "귀엽다고 말씀하셨다니까."

     "그거야, 그냥 하시는 말씀이고. 얻어먹은 주제에, 나 이런거 까지 받아서."

     "먹는건데 나눠 먹으면 좀 어때."

     이게 이웃 간에 서로 반찬 조금씩 나눠먹는 수준이야?!

     들어보니 묵질하더니만! 한두 개 그릇이 아니었단 말야!

     "네가 마음에 든 모양이시라니까."

     믿을 수 없어, 끄응.

     "너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야하지?"

     "아...네."

     "안 바래다줘도 괜찮겠어?"

     "장난해요?"

     "쿡쿡. 잘 들어가고. 내일 학교에서 보자."

     씨익 웃으며 한쪽 손을 가볍게 흔드는 모습을 보다가 그저 한숨 한 번 내뱉을 뿐.

     "아, 저 내려요."

     "그래, 잘 가."

     끝까지 손을 흔들며 버스에서 내리자 창 밖으로 다시금 웃는 게 보여서 나도 모르게 피시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친구도 아니고 그렇다고 애인은 더더욱 아닌. 그런데도 같이 있으면 즐겁다. 어떤 녀석들하고 있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편하고, 다른 웬만한 여자들과 노는 것보다 몇 배는 재미있다... 역시 이래서 '형'이라는 존재가 좋은 걸지도....

    ***

     "여어, 오늘은 왠일로 일찍이셔?"

     집 문 열자마자 이따위 말투라니. 피 한 방울 안 섞인 형동생도 더 살가운데, 우리는 피가 섞인 형제란 말이다. 쨔사, 좀 더 부드럽고 나긋나긋하게 말 못하겠냐?

     "지훈이가 열어주니까 더 좋네."

     "형, 미쳤어? 드디어!!!"

     "......아하하, 농담도. 부모님은?"

     내가 너한테 뭘 바라겠냐. 새로운 도전을 꿈꾼 내 잘못이다. 암, 내 잘못이고 말고...

     "안방에."

     ....근데 내다보시지도 않으신다냐?

     "누나는?"

     "야근."

     "그래?"

     "근데 형 손에 든 게 뭐야? 어? 어어엇? 연하각?!! 여기 죽맛 죽이는! 거기 아냐? 형 어디서 꽁돈 생겼어?!"

     그 집 아들하고 형동생 한다만?

     "엄마!!! 아빠!!! 형이 먹을거 사왔어요~!!!"

     ....나보다 그게 더 반갑냐? 야, 서지훈. 말해봐, 형 상처 입었다. 너 나 볼때만해도 얼굴에 그렇게 화색도는게 아니더만.

     "먹을거? 밥 먹은지 몇시간이나 됬다고."

     "그 연하각 있잖아! 왜 엄마랑 아빠랑, 결혼기념일날 갔던! 형 맞지?"

     "그래..."

     아주 피곤이 몰려온다.

     "뭣?!!!"

     "돈이 어디있어서?"

     ...거기에 벌컥 열리는 안방 문에, 부모님이 반긴 건 내가 아닌 손 안에 봉투...

     "출출한 참에 잘 됬네."

     "당신은 몸 관리 좀 해야하는데. 요새 배가 나와서."

     "연하각 음식은 그렇게 살찌는 거 없잖아."

     나는 꿔다논 보릿자루~♪

     "엄마, 아들은 보이지도 않수?"

     "어머, 그래그래. 그러고보니 너 이거 어디서 난거야? 응? 설마 네 돈주고 샀어?"

     "그냥 생겼어."

     피곤한 듯 신발을 벗으며-이때까지 난리통에 문턱에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잽싸게 내 손에서, 봉투를 뺏아가 테이블 위에 올려두는 엄마. 진짜 아들보다 밥이 더 좋다는거유?!

     "어머, 전복죽이잖아!"

     ....전복죽...!

     "우와우와, 이것봐! 엄마 이건 호박죽이다! 이건 팥죽."

     "잣죽은? 역시 난 잣죽이..."

     .....아무래도 연우 형에게 전화를... 잣죽 한 개가 아니었잖아!!

     물론 무게로 봤을 때, 잣죽 한 그릇치고는 꽤나 묵질하다 했지만, 이렇게까지 종류별일줄이야.

     "지인아, 너~ 이거 다 어디서 난거야? 그냥 생긴게 아니잖아~"

     설마 훔쳤으려고?

     "그냥..."

     "넌 안 먹냐? 역시 맛있군, 음."

     "여보!! 손가락으로 찍어먹으면 어떻게요!!!"

     "아니...그게...맛 좀."

     "그래도! 지인아 너 이거 어디서 났냐니까?"

     "형 안 먹어?"

     "지훈아, 누나 것좀 챙겨라."

     "나 밥 먹었어."

     "어디서.... 설마!! 저 연하각에서 밥 먹었니?! 지인아, 너 돈 주웠어?! 얘!!"

     형한테 전화나 하자...

     -아하하, 좋아하셔?

     "나보다 더 좋아해요."

     -쿡쿡...잘됬네.

     "형 알았죠?"

     -뭘?

     "어머님이 죽 종류별로 다 싸신 거 알았죠?"

     -전부 싸지는 않으셨어.

     "아니!! 그래도 그렇죠. 종류로만 보니까 거의 대여섯개는 되던데!"

     -너 혼자 밥 먹고 들어가기 그렇잖아. 그래서 좀 더 넣어달라고 그랬어.

     그래도 그렇지! 나 혼자 밥 먹었다는 것도 공짜였는데.... 죽까지.

     -그것 때문에 전화한거야?

     "네."

     -안부 인사는 아니고?

     "형이 앱니까~ 안부는 무슨.

     -난 전화하려고 했는데.

     "그건 심심해서고.

     -푸후....여튼 맛있게 드시면 다행이지.

     "그렇긴한데... 여튼 고마워요."

     -그래.

     "그럼 잘자고, 내일 봐요."

     -응, 너도 잘 자.

     삑. 종료 버튼을 누르고 멍하니 침대에 걸터앉아있는데, 순간 빼꼼히 열리는 문. 그리고 고개를 들이민 건...

     "서지훈, 뭐야?"

     "들어가도 돼?"

     "너야말로 미쳤냐? 언제부터 그런 거 따졌다고?"

     "그냐앙."

     ...이게 말꼬리를 끄네. 뭐야? 또 뭣때문에 그래? 정말 우리집은 누나랑 이 녀석의 성격이 완전히 뒤집혀서, 누나는 당당 솔직 화통 화끈이라면, 서지훈 이놈은 사내새끼 주제에 완전히 여우다, 하는 짓이. 막내라서 그런가? .....연우형은 안 그런거 같던데..

     "형, 오늘 주욱."

     "죽 뭐?"

     "맛있더라."

     "그래, 맛있지."

     "누나는 호박죽 좋아하잖아. 그래서 그거 남겨뒀찌. 형 것도 남겼어."

     "할 말이 그거냐?"

     "사실대로 말해봐라, 형."

     "뭘?"

     "먹고 죽을래야 없고 거지 똥구멍에서 콩나물 뽑아먹을 정도의 형이..."

     ....이 새끼가!!!! 뭔 똥...에서... 뭘..뽑아먹..?? 씨뎅, 맛난거 처먹고 그따위 소리가 나오냐?!!! 것도 웃는 얼굴로!

     "똥구멍이 뭐야! 임마!"

     "거지 항문도 웃기기는 마찬가지야."

     "...여하튼! 비유를 해도... 니 형이 그렇게 궁상이냐!"

     "에이 형 말대로 비유지, 비유. 여하튼 연하각에서 밥 살 돈은 없잖아. 저번에 엄마 아빠 든 돈 보니까, 진짜 비싸던데."

     "그래서?"

     "누구야?"

     "....뭐가."

     "나 방금 형 통화하는 거 얼핏 들었는데 누가 사준거 같던데?"

     "제대로 말해라, 서지훈."

     실실 눈웃음치면서 꼬리를 흔드냐~ 그러다가 방심하면 간이고 쓸개고 쏠랑쏠랑 뽑아갈 거 모르냐? 너랑 같이 산지도 짬밥수 18년이다. 어디서 같잖은 술수를...

     "형수 될 사람이 능력 좋나봐?"

     "푸흡? 뭐!!! 혀....형수?"

     "...연상이지?"

     아니, 그 연상은 맞다만!! 이게 무슨 자다말고 남의 다리 긁는 소리야?!

     "형, 내 눈을 속이려고 들지마라."

     "뭔 헛소리야!"

     "아냐? 형 애인이 이거 사준 거잖아! 가족들 먹으라고 밥까지 챙겨줄 정도면 깊은 사이 아냐?"

     "...서지훈. 너 커서 뭐 될래? 그따위 진부한 설정은 소설에서도 안나온다 새꺄!"

     "안나오긴!!! 잘만 나오던데. 이치로만 봐도 내 말이 틀린 거 있어?"

     "......"

     "절대로절대로 내 이름 걸고 하는 말이지만, 형 이거 형 쌩돈 주고 사 먹을 인간 아냐. 내 말이 틀려?"

     그래, 징글징글 맞은 놈아. 너도 헛으로 나랑 18년 산 건 아니구나.

     "분명히. 형 애인이야."

     "헛다리."

     "그것도 연상."

     ....그건 틀린 말 아니지만...

     "나이많고 돈 많고 능력있는 여자."

     "........야."

     "그래도 나이 차이가 10살 이상은 좀 참아주라 형. 나야, 이런데 편견이 없다지만, 그래도 형 우리집 장남인데..."

     이런거 까지 생각하니까, 기특하지? 라는 말을 하는 듯한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는게... 아주 이뻐서 볼따구를 막 늘려주고 싶다! 그래!

     "죽을래?"

     "그럼 뭐야~"

     "진짜! 그 연하각 가게 아들이 내가 아는 형이다! 됐냐?"

     "...뭐엇? 구라~"

     "구라같은 소리하네! 진짜. 내가 내 인간관계까지 니한테 나불나불 다 떨어줘야 하냐?"

     "에헤... 진짜야?"

     "진짜지 그럼!"

     "그럼 더 이상하잖아."

     "뭐가?!"

     "뭐가 더 이상해, 이상하긴!"

     "진짜 형동생?"

     "그럼. 그러엄! 남자 둘이서 애인 관계라도 하리?"

     "보통 동생한테 밥 한끼 사주는 거야 안 이상하다해도, 그렇게 비싼 집 가서... 아니, 뭐 그거야 자기 가게니까 그렇다고해도 아는 동생 가족들 먹으라고 이렇게 바리바리 먹을거 챙겨?"

     "그게 뭐."

     "게다가, 잘자요~ 따위의 전화를 단순히 형.동생.끼리 누가해?"

     "너랑나랑 하.....지않지...그래."

     "...형하고 나랑 일.부.러. 잘자~ 같은 인사는 저녁 꼬맹이 때 졸업한 일로 알고있습니다만?"

     "....그냥...에이, 이 형하고는 정말 이상적인 형제랄까? 그런거야 임마."

     "형, 뭔가 착각하는 거 아냐?"

     인상을 쓰기는 왜 써 임마? 얼굴 들이밀지마라. 닭살이다, 우엑.

     "어디 천지에 진.짜. 형.동생이 '잘자요~' '고마워요~'따위를 하며 그 동생 가족 밥 챙겨줘? 주기를! 야 이 새끼야, 개새야~! 는 기본이고, 치고받는건 애교지."

     그러니까...이성적인...이라고 했잖아.

     "형 가끔 이렇게 핀트 나가는 행동할 때는 진짜 어딘지 이상한 거 알아?"

     "뭐가."

     "그렇지 않으니까, '이상'이라고 하지. 형 국문과 맞아? 이상 뜻 몰라? 읊어줘? 기다려."

     야! 뭔 국어사전을 뒤져? 그걸 가지고!!

     "여깄네! 이상(理想).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가장 완벽하다고 여겨지는 상태."

     "그래 형하고 내가..."

     "아니, 정말 진짜 피 섞인 형제들도 못하는 그걸! 남하고 그럴 수 있다고 봐? 진짜? 이상은 이상일 뿐이라니까."

     ".......야! 세상에는 예외도..."

     "형!"

     묘하게 박력있는 음성으로 부르길래 움찔해서 올려다보니, 어딘지 먼 눈으로 다른 곳을 응시하는게...

     "난, 형을 이해할 수 있어."

     "뭘."

     "형이 게이가 된다고 해도 말이지..."

     "헉!! 뭐? 뭐가 어째? 게....뭐? 게이!!!"

     "....이해한다니까."

     "야!! 서지훈. 너 정말 내일의 태양이 안보고 잡냐?!!!"

     "뭐, 나름대로 밥 챙기는 거 보니 자상하고, 연하각 아들내미면 집에 돈 좀 있겠네." 

     "이 새끼가 진짜!! 나가! 안나갓!!!!!!"

     "나가!! 나간다고! 으와! 어디서 사전을 집어던지려고 하냐! 그거 맞으면 골로 가!!!"

     "나가앗!!!!!!"

     "나간다! 남이 걱정해주니까!"

     그게 걱정이냐?! 속을 박박 긁는거지! 어디서...게...게이!!! 으으으 연우 형하고 내가 어디로 봐서!! 진짜!

     쾅! 장렬하게 닫히는 문소리를 들으며 손안에 들려있던 사전을 내려놓고 씨근거리는 숨을 돌리자, 거실에서 쟁쟁하게 들려오는 말소리들이라니...

     "형 훔친 거 아니래요~"

     "난 또 돈 주웠나 했네... 그럼 어디서 낫다니?"

     "연하각 아들내미가 우리 형이랑 나는 사이라는데?"

     "어머! 정말? 그럼 뭐 할인 혜택같은 거 안준다니?"

     ....정말이지 내가 몬 산다!!!!

    ***

     "그러니까, 우리는 겉포장이 토익토플인 만큼..."

     "에이, 그런데 그럼 사람 못 끈다니까 그러네?"

     "그렇긴해도..."

     "파전은 너무 진부하지않아?"

     "그럼 좀 특이하게 홍보를 하면...?"

     "특이? 남들이 하는 거는 별로 효과 없어."

     가끔 느끼는 거지만, 우리 동아리 인간들 아주 돈독이 올랐다. 이 C.C.C.C를 하는 것도 반쯤의 이유가 '돈'때문인데 아주 축제에도 목숨 걸었다. 목표 100만원이라니...원. 차라리 나가서 노가다를 뛰어라. 게다가 축제가 다가와서 그런지 우리 동아리에 의뢰 횟수도 마구 느는게... 아무래도 축제 마지막 전야제때 '댄스타임'에서 파트너가 없으면 쪽팔린다거나 하는 이유일 거다. 축제는 원래 솔로들에게 가혹한 법이니까.

     "여장 어때?"

     움찔. 묘하게 귀를 자극하는 소리에, 늘어져라 남의 일처럼 쇼파에 비비적거리고 있던 몸을 일으키자, 번쩍 안경을 고쳐쓰며 씨익 웃고있는... 최진희. 뭔가 이거 불길한데 말야!!

     "여장? 다른 애들도 많이 할텐데."

     그래그래; 웬만하면 그런 의견은 기각시키라고! 기각!

     "진부하다 하지만, 그만큼 눈길을 많이 끄는 것도 사실이지 뭘 그래?"

     "그거야 그렇지만.."

     앗! 승희누나, 동조하지 맙시다!!

     "하긴, 작년에도 그런 쪽 인기 많았지."

     "게다가 우리 동방 인간들 어디가서는 외모 안 빠지잖아."

     자뻑까지!! 커헉이다! 커헉.

     "그리고 말야..."

     지..진희 형!! 지금!! 뭐하려고!!

     "우리에게는 말이지..."

     "와아앗!!!"

     "헉?"

     "엑?"

     "왜 그래, 권지인? 눈뜨고 가위 눌렸나?"

     "푸흐~~ 으하하하."

     웃지마!! 최진희 이게 누구 때문이냐?!!!

     "얼레? 뭐야? 이거 뭔가 있는데~"

     강주 형 우리 파고들지 맙시다. 세상에는 비밀로 있기에 아름다운 일들도 많습니다요!

     "불어라~ 최진희 뭐냐?"

     "으하하~ 말해도 되나 몰라~"

     "말하지마!"

     "그게 말이지이~"

     "뭐야? 뭔데??"

     이봐! 그 말도 몰라? 호기심은 지구 멸망의 지름길이다!! 그렇게 궁금증과 호기심이 증발하면 코끼리 코에 난 주름이 몇 개인지나 궁금해하라고옷!

     "혀엉!!!!"

     "우리 이쁜 사촌 동생 씨가~"

     "지인이가?" 

     "권지인이 뭐?"

     "야야! 기다리게 하지마라!"

     이 인간이 진짜앗! 그 말 해봐! 끝이야, 끝! 내가 그거 얼마나 싫어하는 줄 알면서!!

     "고등학교 때 지네 학교 퀸 먹었다는 거 아니냐!! 크하하하하."

     "최진희잇!!!!!!!"

     "엇! 하늘같은 선배 이름을 막 부르네~?"

     "자기는!! 지하철에서 앵벌이하다가 걸렸으면서!"

     "얌마! 그거야 인생경험. 사회경험."

     "푸하하하하하! 미치겠다. 아주 쌍으로 웃기네."

     "너 치사하게~"

     "내가 뭘! 누가 그 이야기 꺼내래!"

     "그냥 나는 여장하면 우리 전력에 도움이 될 거라는 말이셨지!!!!"

     "그게 어디가앗!"

     "낄낄, 진짜 재미있다. 하긴 그래그래. 지인이 정도면 짱 먹을만 하지!"

     "푸흐흐흐흐흐~~~"

     "화내지마세용. 26대 미스 보명~"

     "혀엉!"

     "와하하, 고마해라! 지인이 운다, 울어~!"

     "내가 여장 죽어도 하나봐!!"

     "에이~ 우리 이대로 여장으로 밀자. 퀸도 있는데 뭐가 겁나~"

     "그렇지이!"

     이 인간들이 정말!!

     "그래, 지인이말야, 어딘지 중성적인게 딱 좋다니까."

     "그러게. 피부도 깨끗한 편이고. 화장 잘 먹히겠다!"

     "안 해엣!"

     "안하는 게 어딨어. 선배의 명령은 하나님의 음성과 동격. 그 당연한 진리도 모르냐?"

     "우리집 무교에요!"

     "어허! 빼지말아라!"

     "안한다니까!"

     "그러고보니 지인이 체모도 적은게 드레스말고 짧은 미니는 어때? 좋지 않아?"

     "아! 색은 노랑색이나 연두색으로 좀 화사한걸로 말야."

     이 인간들이 내 말은 껌이냐!! 껌이야?!!!

     "내가 죽어도 하나봐!"

     버럭 소리를 지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동방 문을 열고 달리는데 뒤에서 다급히 날 부르는 소리.

     싹싹 빌어봐라! 내가 쉽게 용서해주나! 그렇게 싫어하는 말인 줄 알면서 말야! 제기, 형이 아니라 웬수야, 웬수웃!!!

    ***

     "아, 여기 있었어?"

     "아? 연우 형.. 어떻게 알고."

     "핸드폰 안 받길래."

     "안 울렸는...맞다. 여기 핸드폰 안 터지죠, 가끔."

     대체, 학교 내에서 핸드폰이 안 터진다는게 말이 돼? 정말 아까 동아리 밖에서 잔뜩 골이나서 연우 형을 찾으려고 했는데, 보니까 수업있을 시간이라서 혼자서 포장 팥빙수 사들고 학교 내 영화관으로 와버렸다. 상영중이던 영화는 'K2'. 열기 식혀주기는 정말 딱이라는 느낌. 먹는건 팥빙수이고 피부에 와 닿는건 서늘한 에어컨의 냉기. 거기에 눈으로 보이는건 얼음이라. 한참을 팥빙수를 퍽퍽 파먹으며 팔에 약간 토로로 닭살이 일때쯤이었다. 지금 막.

     "응, 그래서 감으로 찾았지."

     "푸후, 왜요. 후각으로 찾았다고 해보죠?"

     "나가자."

     "왜요? 나 열기를 좀 식힐 필요가 있어요."

     "어? 무슨 일?"

     "여러 일."

     "지금 우리 동방 비었는데 그리로 갈래?"

     "남의 동방에.. 어떻게.....가죠."

     "푸, 참, 밥 먹었어?"

     "아뇨."

     "동방가서 시켜먹자."

     "네."

     고분고분 대답하고 자리에서 스윽 일어서자, 먼저 앞장서서 걷는다. 보라고, 형이라면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지. 정말이지, 최진희 그 인간은 형도 아니다! 주엔장할!

     "그래서 말이에요!! 그런거라구요!"

     "응."

     뭐야! 응이 다야? 응이? 으으으으! 연우 형. 나 형 참 좋아하지만 정말 가끔 이렇게 단답식으로 짧은 대답 나오면 속 뒤집힌다구요. 그거 알아요 몰라요?

     "'응'이 다에요?"

     "응?"

     됐시다. 됐어요. 나의 이 서럽고 억울한 일을 들었는데도 '응'이 다란 말이죠! 그것도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끼리. 아! 하긴 형은 그 일을 '좋은 추억'이라고 할 정도니 말 다한거지만 말야. 난 그 일이 결정적으로 연우 형과 친해지지 말아야지! 하고 결심하게 만든 계기까지 됬었는데. 이미 지난 일이긴 해도!

     "으음... 무슨 말을 원했던 거야?"

     그걸 이제 와서 말함 뭐해요! 옆구리 찔러 절받기지.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걸 말하면 싫어할지도 몰라서."

     "더 이상 열 받을 것도 없는데요, 뭐."

     "난."

     형은?

     "괜찮을 거 같은데."

    ..........

     "안녕히 계세요."

     "지인아;"

     "짜장 많이 드세요. 단무지도 다 드시고 춘장에 양파까지 찍어서 마아니~ 드세요."

     "양파 안 먹어."

     그게 아니잖아!!! 아아악 썩을! 지금 동갑이었다면 한 대 갈겼을 겁니다! 그거 알아요?!

     "형, 내가 얼마나 그 여장이라는 걸 싫어하는지 알아요 몰라요! 누누이 말했잖아요. 그 사건은 그 일은 아주 내 기억에서 싸그리 몰아내버리고 싶은 그런 거라니까요~!"

     "음.. 지인아 네 입에 짜장 묻었다."

     "........쓰읍, 형!!!"

     "휴지 줄까?"

     "연우 혀엉! 지금 나 놀려요? 속 뒤집히게 하려고 그러죠?"

     말 해봐! 말 해봐아! 말 해봐아!!!!

     "아니, 그냥."

     "그냥은 무슨!! 그냥!"

     "그러게 말 안한다니까."

     관둡시다, 관둬요. 까먹었지. 내가 이연우가 어떤 사람인거 잊은 내가 잘못이지.

     "짜장 먹자구요. 다 불겠네♡"

     "지인이, 열 받았다."

     그건 알아봅니까? 장하네요. 아주 용습니다. 용해요.

     "그냥, 나는 내 생각을 말한 거 뿐이야. 잘 어울릴 거 같다고. 네가 싫은데도 억지로 하란 소리가 아니라. 네가 싫다면 당연히 난 안했으면 좋겠어."

     "......진작에 그렇게 말해야죠."

     "응."

     웃기는. 쳇, 하지만 문제는 이런 이성적인 말이 그 '돈'이라는거 앞에 묶인 노예들에게 들어먹히겠냐지만...

     "역시 여깄었...어라?"

     짜장에 젓가락을 꽂고 휘적휘적 젓다가, 나오는 한숨을 참으려고 입술을 꾸욱 깨문 순간, 벌컥 열려진 동방 문과 날아들어오는 목소리. 그와 동시에 휙 마주친 시선 끝에... 스물스물 무언가 몸에 전율을 느끼게하며 퍼진 것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사실, 하나.

     어제 봤던 그. 여.자.

     "어라라? 못 보던 얼굴인데..."

     "아는 동생."

     "그런거야?"

     "응."

     "..안녕하세요."

     어색하게 인사를 하자, 마주보며 인사를 하는게.. 어딘지 날 탐색하는 눈비이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손바닥을 타악 치면서 내뱉은 말이란...

     "26대 미스 보명!"

     .....쓰벌. 하나님이 인간에게 왜 '망각'이라는 편리한 기능을 준 건지에 대해 생각해봐라, 아가씨. 그렇게 대놓고, 손가락질하면서 '미스보명!'이라니.

     "맞죠?"

     "사람 잘못 보셨는데요."

     "에이, 맞는데요, 뭘. 그치? 연우야. 맞지않아? 왜 우리 그때 같이 보러 갔었잖아? 깔깔. 나 투표 때 그쪽 찍었어요."

     "........."

     그러니까, 당신도 날 그런 끔찍한 감투를 쓰게한 것에 대해 일부의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 이거지?

     "그때 연우도 그쪽 찍었을걸요~"

     뭐이! 어쩌고저째?! 투표까지 참여했었단 말야! 대학생이 그리 할 일 없대?! 형 시선 피하지말아요! 그런 소리 절대 한마디도 안하더니!

     "어떻게 전에, 연우한테 잠깐 26대 미스 보명이 이 학교 들어왔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여튼 만나서 반가워요."

     나는 하나도 안 반가워, 이 여자야!

     "참, 그나저나 연우야."

     ...살갑게도 부르네~ '연우야~'라니. 어제 둘 분위기도 좋아보였고. 무슨 사이지, 대체?

     "응?"

     "나 오늘 밥 좀 사주라."

     "돈이 어딨어."

     "가게에서. 너희 어머님 뵌 지도 좀 되었고."

     "...어제 갔어."

     "뭐엇? 니가 혼자?"

     뭐야? 뭐엇! 나야말로 뭐어!다.

     가게라고하면 연하각이라는 소리겠지? 어머님을 뵌지 오래되었다, 라는 소리는 전에도 뵌 적이 있다는 거고. 어제의 상황과 이야기를 유추하자면, 가게에는 웬만해선 사람 잘 안데리고 간다는거 아냐, 연우 형. 그런데... 저 여자의 말투를 들어보면, 어딘지 살갑고 친숙하고 연하각에도 많이 간거 같이 말하고!!!

     "아니, 어제 지인이랑."

     "지인...? 아! 이쪽...?"

     뭘 그렇게 놀란 눈을 해? 아주 눈 빠지겠네. 왜 내가 가면 그 집 기왓장들이 일렬로 서서 탭댄스라도 춘대?

     "그렇구나... 정말, 여튼 나 밥 좀 사줘. 배고파."

     "혼자 가."

     "나 혼자 어떻게 가아~"

     "왜 못가. 애야?"

     잘한다, 연우 형! 그렇게 무뚝뚝한 얼굴로 응수해!

     "같이 가자아~"

     ...어이! 가면 가는 거지 팔짱은 왜 껴? 어?! 나도 한번도 못해...본..이 아니라!! 아, 씨. 흥분하니까 말도 헛으로 나오네!

     "안 가. 나 지금 밥 먹는거 안보여?"

     "그럼 같이만 가고, 넌 먹지마."

     "푸.. 그게 말이 되?"

     형 웃기는 왜 웃어! 그럴땐 딱 잘라서 '너 혼자 가!'라고 하면 되는거라고!

     "가자, 갑시다. 가시죵~ 아이이잉."

     아이이잉? 아이이잉? 코 막혔냐? 그럼 뚫어뻥으로 뚫던지! 어디와서 되도않는 콧소리냐! 연우 형이 그런데 넘어갈...갈...? 뭐야, 형, 왜 날 쳐다봐?

     "지인이도 갈래?"

     가겠다는겁니까? 지금!!

     "아싸! 오늘은 포식이다, 포식. 어머님께 갓김치도 좀 싸달라고해야겠다."

     "...민폐야, 너. 매번."

     "맛있는 걸 어째~ 저번에 주신 오이소박이도 진짜 잘 먹었다고."

     저번에...준 오이소박..이... 게다가, 이번에는 갓김치이이?

     "전 어제 갔는데.. 뭘 가요. 그리고 지금 밥도 먹고 있고."

     "역시, 여기서 서초동까지면 좀."

     거리가 문제가 아니라고!

     "가자, 가자. 지금 가야지. 아, 나 지인씨.. 지인씨라고 불러도 되나?"

     이미 불러놓고선 뭐가 '되나?'냐, 뭐가!!

     "마음대로 하세요."

     "여튼 지인 씨 뭐 크게 볼일 있었던 건 아니죠? 연우랑."

     ...그래, 짜장 같이 먹는 정도는 큰 볼일이 아니긴 하다만. 똑같이 밥 먹으러 가자고 하는 일에 뺏길(?)만한 것도 아니라고 본다.

     "괜찮겠어?"

     형은 여기서 또 뭘 괜찮겠어! 라고 물어요. 내 표정이 지금 괜찮아보여요? 괜찮아 보이냐고! 

     "...네."

     씨뎅. 주둥이가 주인 머리를 배반하고 멋대로 지껄이네?

     "그럼... 나.. 일어설게."

     가라, 가! 먹다남은 짜장 두 그릇과 함께 날 버려두고 연하각으로 가서 밥 먹어라!

     "근데.. 진짜 괜찮겠어?"

     "...괜찮아요."

     확인 사살해? 가려면 그냥 가지. 괜찮겠어? 는 또 뭐야!! 어쩐지 은근히 치받는 짜증에 짜장 그릇을 정리하는데...

     "그런데 지인아.."

     또 뭐! 뭐!

     "나갈 때 동방 문 잠그고 나가줘."

     .....연우형... 여지껏 만난 중에 오늘이 제일 싫습니다!!!!!!

    ***

     "싸랑하는 동생."

     ...얹힌 거 같다. 속이 좀 미식거리는게... 으으, 짜장을 급하게 먹어서 그런가? 아니면 열받은 탓에, 연우 형이 남긴 짬뽕까지 먹은 탓인가...

     "서지이인."

     여하튼 윽... 슈퍼에 가서 콜라를.. 아니 그보단ㄴ 소화제가 더 나은가?

     "동생 동생. 딸랑딸랑딸랑. 저는 동생의 종이여요~ 시키시는대로..."

     "가서 죽어."

     "야야;;"

     아 짜증나. 속은 미식미식하고 말이지.

     "아아아아악!!!!!!"

     "야.. 쨔샤 아까는 좀 내가 과하ㅏ게 놀려서 미안.. 하지만 임마 그겄때문에 아직도 꽁해져있음..."

     뭐? 미스 보명? 훗, 그 정도야.

     "야, 권지인."

     "왜! 왜! 왜! 왜 자꾸 불러!"

     "...왜 승질이야? 진짜 아까 그것 땜에 그래?"

     "아냐."

     "그럼 왜 그래?"

     "그냥, 몰라. 젠장. 그냥 좀 짜증나."

     "....흐으으음. 그날이구나."

    퍽!

     "야! 너, 형을 쳤어?"

     "이런 때 그런 농담이 나와?"

     "이런 때가 어느 땐데?"

     그야!! 연우 형이 나랑 같이 밥 먹다말고 웬 여자랑... 둘이...둘이......울컥.... 정말 열 받네 이거?! 여자 앞에서는 동생이고 뭐고 없다 이거지?

     "휴우~ 얼굴 표정이 장난이 아니네?"

     "몰라."

     "모르긴 임마. 얼굴에 나 골났음하고 써있네."

     "속이 안 좋아서 그래."

     "왜?"

     "체했어."

     "약 사먹어."

     누가 그걸 몰라! 제기, 전에 한번 체했을떄는 연우 형이 등 두드려주고 손 따준다고 하고 약까지 직접 챙겨다 줬는데..

     "그보다, 자."

     "뭐야, 이게?"

     "너 어제 내가 한 말 들었냐? 먹었냐?"

     한강에 가서 빠트렸다, 왜?

     "우리 학교 퀸카 킹카 자료다. 축제를 앞두고 있더니, 아주 폭발적으로 이 두 명에 의뢰가 쏟아지더만. 아까도 올 때보니 둘이서 아주 다정하게 팔짱 끼고 가더라. 한번 보고, 여지껏 잘했으니까, 뭐... 잘 할 수 있겠지. 큰 기대는 안 해요~ 왜냐 이 형도 덤볐다가 보기좋게 실패한 경험이 있으시... 아 이건 잊어라."

     퀸카 킹카라... 아까 그 여자도 예쁘더만. 그래그래, 호리호리하고 체형좋고. 어제 멀리서 봤을 때도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보니까 더.. 형 머리 긴 여자 좋아하나? 역시 같은 남자니까 말야.. 확실히 짧은 쪽보다는 긴 머리 쪽이...

     "접근이라도 해둬. 접근. 기회를 만들라 이거지. 급하게 생각하지말고."

     "시끄러, 실패했던 주제에."

     "야!! 누군 실패하고 싶어했냐? 뭔 관심을 가져줘야 일을 하지."

     능력 부족이지. 딴소리는...

     "비웃냐? 넌 얼마나 잘 하나 보자 쨔샤. 못하기만 해봐."

     "다짜고짜 여자한테 먼저 접근하니 그렇지. 장수를 잡으려면 말부터 쏴야한다 몰라?"

     "이게 어디서 또 헛소리야. 누가 그걸 모르냐? 그런데 그 킹카가 핫바지냐? 뭔가 다가갈 구실을 줘야 접근을 하지."

     "시꺼시꺼. 그래 어디 한번 구경이나 하자."

     분노하듯 큰 소리로 버럭버럭 지르는 진희 형 손에서 A4파일 묶음을 낚아채듯 가져오자, 인상을 쓰는게...

     그래 얼마나 잘났기에 퀸카 킹카냐..

     속으로 스타일을 잠깐 상상하며, 첫번째 파일을 사락 넘겨서 맨 위에 붙여진 사진을 보는데...

     !!!!!! 이건.. 이 사람!!!

     "강수빈?!!!"

     "뭐야? 너 왜 그래?"

     분명..분명히 이 얼굴!!! 아까 그 여자 아냐?!

     "이 여자가 우리 학교 퀸카야?!"

     "아..응. 왜? 알아? 아는 사이야?"

     퀸카..킹카..커플...잠깐. 그럼... 우리 학교 킹카가...

     구기듯 강수빈의 파일을 형에게 넘기고 나머지 다른 파일을 넘기자.. 이런... 이런 말도 안되는!!!

     "연우 형이잖아!!!!!"

     "뭐뭣? 너 국국의 이연우랑 아는 사이? 으와? 수업 때 만났냐? 아니아니, 너 수업 같은거 없지않아?"

     그래!! 그러고보니까!! 정말이지 그 얼굴, 킹카 먹어도 될만한 게 아니라아! 연우 형보다 잘난 사람 나 못봤단 말야!! 집 괜찮게 살아, 머리 좋아! 얼굴 잘 생겨! 뭐야! 뭐! 나 왜 한번도 의심 못한거냐!!!

     "둘이 사겨? 사귄다고?!!!"

     나한테 애인 없다고 했단 말야! 몇번이나 물었지만, 그때마다 없다고! 없다고오 했어!!!!

     "야!! 얼굴 들이밀면서 말하지마. 둘이 사겨. 잘난 인간들끼리. 사귄다, 이거지~ 그런데 너 이연우랑 강수빈알아? 아는 사인거야?"

     씨발... 그래, 그런거군. 둘이 사귀는 사이. 그러니까 아까 날 두고 쏠랑 나가버리지. 젠장, 젠장!! 여자친구 없다고 할땐 언제고! 이렇게 뒤통수를 쳐? 내가 그렇게 웃겨보였어? 바보같아 보인거야?

     "야, 권지인?"

     "확실하게 깨버릴꺼야!"

     양심의 가책 느낄 필요도 없지. 그래 강수빈정도면 이쁘지. 꼬신다, 내가 꼬시고 말거야. 어짜피. 연우 형, 아니 이연우! 애인 아니라며. 사귀는 사람 없다며? 그러니까, 내가 강수빈을 꼬시든말든 상관없는거겠지!

     "오~ 의지가 불타는데!! 그래 잘 해봐라!!"

     "젠장!"

     정말... 단단히 체한게 분명하다....속이 뒤집히면서 울렁거리는걸 보니...

    ***

     태어나서 단 한번도 마음먹고 여자를 꼬셨던 적은 없다. 물론 여자랑 사귄 적도 있었고.. 뭐 영 쑥맥은 아니었지만 기본적으로 감정은 흐르는대로가 모토였기 때문에, 마음에 들어서 순수하게 좋아하면 사귀는거고 아니면 끝인 그런... 연애관이었다, 나는. 그러니까, 뭐랄까... 요는 여자에 대해, 정확히는 여자를 꼬시는데에 서툴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뭐라고?"

     "여자들은 어떤 남자를 좋아하냐고."

     "흐으음. 별일이다 너?"

     "뭐가?"

     "너 한번도 그런거 물은 적 없잖아."

     "물어볼만한 질문이야?

     "아니, 여자친구 사귄 적도 있으면서... 그 흔한 여자들은 무슨 선물 좋아해? 도 안물어보더니. 지금 다짜고짜..."

     "그래서! 말해줄거야 안해줄거야?"

     "...말이야 해주겠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적 견해차가 있거든."

     "평균점에서 말해줘. 누나에게 맞추지 말고."

     이상하다는 듯 나를 위 아래로 살피던 누나는 예쁘게 푸르고있던 머리를 질끈 고무줄 하나로 묶더니 아무렇게 틀어올려버린다. 게다가 아까까지만해도 세련된 투피스 차림에서 이제는 아직도 안버리고 있는 겨자색 고등학교 체육복 차림.

     "누나, 그전에 누나가 집에서 이렇다는거 경우 형도 알아?"

     "모르지."

     불쌍하다, 미래의 매형.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거나."

     "뭐?"

     "좋은 남자... 그러니까 여자의 입장에서 좋은 남자란, 여자의 허물을 숨기고 싶은 부분을 보여도 모른 척해주는 남자라 이거야."

     ...흐으으으음.

     "화장이 번졌어도, 모른 척. 물론 망신당하기 전에 스리슬쩍 알려주는 건 센스고."

     "끄응."

     "맨 처음 접근할 때 부담스러운 느낌을 주면 좋지않아.

     ...아니, 그건 걱정마. 절대 그쪽에서 날 부담스러워 할 일은 없을걸. 가슴 쓰리게도.

     "처음에는 친근하게 다가서는거지. 첫인상이 좋아야하거든."

     첫...인상이라. 드레스 자락 나풀거렸던 앳된 고딩 때. 더 최악은 그녀의 곁에 이미 대학생인 연.우.형. 얼마나 비교되었을까. 둘이서 얼마나.. 얼마나 웃었을까, 아 속쓰려.

     "첫 인상이라..."

     "넌 잘만 웃으면, 그래도 반은 먹고 들어가니까."

     "그래?"

     "내 동생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 집 식구들 그래도 어디가서 빠진단 소리 안 드는다, 너."

     "오늘 무슨 소리 들었어?"

     "아, 쓰벌. 과장 새끼가!! 야야... 관두자, 관둬. 그래, 한살이라도 어린 영계가 좋기야 하겠지. 그래도 사람을!! 아, 젠장.."

     ...아무래도 그 영계밝힌다는 누나네 부서 과장이 속 좀 긁었나보다, 쩝.

     "여하튼간, 그래. 너 학교 다닐 때도 내 친구뇬들이 소개 시켜달라고..."

     "뭣?"

     그런 일이 있었어? 있었어어?? 뭐야 나한테는 아무 말도 안하고!

     "그냥 옛날 이야, 옛날 일."

     아무리 옛날 일이어도 그렇지. 그런건 진작에 말해주면 좋잖아. 입 싸악 닦고. 제에기.

     "그나저나, 누나 친구들이라면 나한테도 당연히 연상인데.. 연하도 괜찮대?"

     그러고보니 강수빈 그 여자도 나한테 연상 아냐.

     "어리면 좋지 뭘 그래. 결혼할 때는 글쎄.. 뭐 여튼 결혼 상대로는 몰라도 사귈 때 연하 사귄다면 능력있다고 하는 시대니까."

     응, 그래 요즘은 여자들이 남자 찍어서 넘겨버리는 그런 시대니까, 가 아니라! 왜 자꾸 삼천포 여행을 하려고 하냐!

     "그럼 처음 접근은 친근한게.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거야. 적절히 맞장구도 치면서."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맞장구라..

     "사람이면 다 그렇지만, 서로 통하는게 있는 사람 좋아하잖아. 특히 여자는 자기 이야기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 좋아해. 그런면에 있어서 우리 경우 씨는 정말 좋지. 내가 말야, 저번에..."

     됐습니다, 됐어요. 그러니까, 공통된 화제와 함께 이야기를 잘 들어주라, 이거지? 첫단계 첫단계! 내 반드시 승리하리라.

     "그런데, 너 뭐 관심있는 여자 생겼냐?"

     "아?"

     "그렇지? 그런 거지이~ 흐으응."

     "그게 아니라 단지..."

     "단지? 단지 뭐?"

     눈을 가늘게 뜨고 '딱 걸렸어'하는 표정으로 슬금슬금 다가오는 누나. 거기에 맞춰 점점 몸을 뒤로 빼는데 순식간에 다가와 휙 내 손목을 낚아챈다.

     "으악, 놀랐잖아!"

     "여자 친구 생겼어? 그런거지?"

     "정말, 정말 그런 거 아니래두."

     "그럼 뭐야? 뭔데, 권지인이 친히 누님에게 여자 꼬시는 법을 전수 받으려고 하냐?"

     "그냥, 그러니까, 궁금해졌다니까."

     "흐으응, 지인아 여기서 열대 맞고 불래? 아니면 그냥 불래?"

     "누나, 어제, 저녁에 들어와서 야식으로 호박죽 먹었지?"

     "응? 응."

     "그거 내가 사온 거야, 맛있지?"

     "들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아니, 그게 뇌물이랄까나. 이쯤되면 그냥 놔주는게 어떠실런지...

     "혹시 그 가게에 아는 사람 있다더니, 그 집 딸이야?"

     "엄한데 가져다 찍지마."

     "그럼 뭐야?"

     "누나, 누나가 나한테 여자가 좋아하는 남자에 대해 말해줬으니 나도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를 말해주겠는데, 남자는 끈질긴 여자 싫어해."

     "놀고있네~ 니가 남자냐?"

     ...허? 또 자존심 글네.

     "왜 이래! 나도 잘 나가는 남자야!"

     "그거야, 코찔찔이일 때나 그렇지. 여잔 듬직한 스타일 좋아하거든."

     뭐야! 아까는 그런 말 없더니. 아니아니, 그것보다 지금 그 말은 내가 안 듬직하다 뭐 이런 소리야?

     "사실, 봐서 넌 연애 타입으론 혹할지 몰라도, 장래를 생각하면 조옴~"

     "그러는 경우 형은 잘도 결혼 대상 타입이다! 어디로보나 나랑 하는 짓이 삐까먹더만!"

     28살 먹어서 수영장가서 튜브타고 노는 사람을...

     "깔깔 경우 씨야 귀여운거고."

     "나도 어디가면 귀엽다는 소리 많이 들어!"

     "지랄. 그게 자랑이냐? 경우 씨는 나한테만 귀여움이 보여지는 거고, 일할 때 보면 얼마나 카리스마가 넘치는데... 그런데! 너 왜 자꾸 딴 소리야? 거기다가 경우 씨는 왜 끌고 들어가? 앙? 죽을래!"

     관둬요~ 내참, 짝 없는 사람 어디 서러워서 살겠어?

     "여하튼 누나 다른 거 다 참아도 말이다아~ 싸가지 없는 애는 안된다. 내가 어떤 스타일 싫어하는지 알지?"

     "아니, 내가 사귀는 사람도 누나 허락 맡아야하나?"

     "아무렴, 당연하지."

     "당연하기는!"

     "누나로서 그 정도 권리는 있다고 본다만? 너 결혼할 때 내가 반대하면 뭐 쏠쏠히 편할 줄 아냐?"

     그래서... 반대하겠다는거야 뭐야? 지금.

     "그러니까, 자주자주 누나한테 잘 보여라 이거야. 임마, 어제 죽맛있더라. 친구라고 했었냐?"

     형이야, 형.

     "자주 챙겨와라, 응~?"

     .....됐네. 이 마녀야.

     "여튼 오늘은 그냥 넘어가지만, 다음에 제대로 불어 너."

     "제대로 불 건덕지도 없어."

     "누나가 애들 푸르랴?"

     "풀긴 뭘 풀어!"

     "너희 학교에도 충분히 내 귀와 눈이 되어줄 심복들이 널렸다?"

     "...자랑이유."

     "인덕이지."

     "관둬."

     "낄낄. 여튼 잘해봐. 일 되어가는대로 누님한테 보고하고. 편한 이미지, 든든한 모습. 가끔 옵션이 되는 애교, 잊지마라? 참참, 웃는 거 중요한거 알지? 스마이일. 오죽하면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라는 속담이 생겨났겠냐. 아! 혹시 꼬시는 애가 웃는 얼굴에 대고 침 뱉는 인간이면, 일찌감치 정리해라. 그런 애들치고 성격 제대로 박힌 인간이 없어요. 알았냐, 꼬맹이?"

     "알았어, 걱정마. 설마 웃는 얼굴에 침 뱉겠어? 그럴 사람은 아니겠지."

     일장 연설하듯 줄줄이 말하는 말을 심드렁히 듣다가, 피식 웃으며 대답하는데... 뭐야, 저 표정은? 눈썹 한쪽이 찌익 올라가고, 입술이 비틀려있는 게...

     "이래도, 여자 생긴게 아냐? 니가아~ 감히 날 속여?"

     헉~!!! 유...유도심문이라니!! 치사해!!!

     "으악! 누나, 손 놔! 놔!"

     "불어~ 불어 쨔샤! 어떤 애냐? 응? 응?"

     씨뎅!! 내가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왜 이 찐득이를 붙들었을까아! 으아아악. 놔앗!!! 무서워, 무서워~ 비틀린 입술로 웃지 말라니깟!

    ***

     "지인아~"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다른 때라면 그 음성에 얼씨구나해서 뒤를 돌아보며 해사하지는 못해도 '미소'라는 걸 날려줬겠지만...

     이 평소라면 반가운 목소리가, 묘하게 오늘은 신경을 긁는게... 웃음은 고사하고 얼굴이라도 마주치면 대뜸 '그래 어제 재미있었습니까?'라는 속틀린 소리 나올까 걸음을 빨리했다.

     "지인아, 권지인."

     다시금 들리는 음성. 부르긴 왜 불러. 어제 내버려두고 갔으면 그만이지. 아, 또 어쩐지 열받으려고하네, 이거.

     "지인아! 무슨 걸음이 그리 빨라. 안 들렸어?"

     헉! 제길, 계산 못했다. 컴파스-다리길이- 차이. 젠장, 그래 이연우씨 당신 키 크고 다리 길어요, 그래.

     "아, 형."

     아아~ 장하다, 권지인. 그래도 'C.C.C.C'들어서 나아진 연기력을 이런 때 발휘하다니. 마치, 놀랐다는 듯 돌아보는 이 완벽하고 자연스러운 연기력.

     "다른 생각 했어?"

     "에, 뭐.. 네."

     "사람 부르는 걸 못들을 정도로?"

     비꼽니까? 지금.

     "네."

     "...음, 무슨 생각?"

     개구리 반찬 생각했다, 어쩔래. 정말, 어딘지 울컥울컥하네 이거. 

     "별거 아녜요."

     "어제, 잘 들어갔어?"

     "형은요?"

     "응?"

     "어제 그분하고 잘 들어갔어요?"

     "아... 수빈이."

     수빈이이~? 아주 다정하게도 부릅니다, 거?

     "이쁘던데요, 그 분."

     "응?

     뭘, 그렇게 눈을 크게 뜨고 돌아봐?

     "이...뻐? 아, 그래 예쁘지."

     뭐야? 자기 애인, 남이 예쁘다고 하니까 꼬와? 그래?

     "인기 많겠더라구요."

     "아."

     "성격도 활발해보이고."

     "이상형?"

     뭐? 난 그런 타입 싫어. 다짜고짜 미스 보명 어쩌고.. 아, 그리고보니, 형도 처음에 나한테 미스 보명 운운했지. 뭐야, 커플은 이래서 닮는다 인가...

     "이상형이라... 한 번보고 어떻게 알아요."

     "음."

     "주변에 그렇게 예쁜 분있다고 왜 말 안했어요?"

     이건 조금쯤 꼬아버렸다. 티 났으려나?

     "아...."

     눈치 못 채는군. 이 사람 가끔 눈치가 빠른건지 느린건지.. 도통 감이 안 온다니까.

     "나중에 제대로 소개시켜줘요."

     "왜?"

     아항, 자기 애인이니까, 관심갖지마라, 이거야? 친한 동생, 좋아하는 동생, 해놓고는 이러면 섭하지.

     "음? 그냥요. 어제 너무 웃긴 상황으로 만났잖아요."

     "웃겨?"

     "왜, 짜장 냄새 폴폴 풍기는 동방에서... 짜장먹다 말고."

     "안 웃겼어."

     뭐,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기는 하지만...

     "여하튼요, 기회가 닿으면."

     "별로 과도 다르고..."

     과 다르다고 못만나나. 자기랑 나는, 학번 달라도 매일 같이 보면서...

     "동방에는 자주 올 거 아녜요."

     "........"

     대답도 안 하네. 그렇게 싫어? 나랑 그 사람 만나는 거? 얼굴 살짝 굳히고 대답도 피할만큼...? 실망이다, 이거.

     "나 동방 놀러가도 되죠?"

     "...수빈이... 마음에 드니?"

     직구군. 똑바로 쳐다보면서 묻다니... 사실 마음에 안 든다. 솔직히 어제 그렇게 형하고 나랑 있는데, 멋대로 사람 데리고 가 버리는 것도 그렇고. 무론 예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이성적인 의미로 마음에 든다는건 아니지만.

     "그렇...다면요?"

     "......."

     왜, 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그래.

     "왜요?"

     "마음에 들어?"

     "남자라면, 예쁜 여자 좋아하니까."

     "그렇지..."

     그렇지. 그런거지. 그런 거라고. 그래서 형도 좋아하는 거야? 아니면 제 눈에 안경?

     "지인아..."

     "네."

     불러놓고 왜 아무 말 없어?

     "나..."

     "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살짝 인상을 찌푸리곤 말을 고르는지 손으로 머리를 한번 쓸어올리더니, 괜히 헛기침을 한다. 

     차라리 말해버려라. 그래, '걔는 내 애인이니까, 네가 관심갖는거 싫다.'라든지. 아, 그래도 이건 좀 심하잖아. 평소에는 형입네, 이러고 있다가 애인 문제 걸고서 '싫다' 소리 바로 나오면...

     "말해요."

     ".........난."

     그러니까, 적당히 타협선보고 '사실은 수빈이 내 애인이야.'정도를 해도... 아 그래도 짜증나는건 마찬가지잖아.

     "어! 연우야."

     양반은 못 되는군, 정말. 그동안은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어떻게 이렇게 삼일을 연짱으로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거지?

     "어머, 지인 씨도 있네."

     "안녕하세요."

     "네."

     "저기, 그런데 말씀 낮추세요. 제가 더 어린데."

     "에이~ 그래놓고 말놓으면 기분 나빠하려고?"

     어떻게 알았대?

     "그러리가요~"

     "거짓말."

     "진짜에요~"

     야아, 내가 지훈이 놈보고 여우라고 했지만 나도 여우과다. 인정, 인정. 어쩌면 이렇게 술술 웃으면서 말이 나온대냐? 권지인 너 난놈이다, 난놈. 그냥 전과해서 연영과나 정외과로 옮기자. 그래, 내가 연기 안 한다는건 정말 인재 손실이다, 이제보니.

     "그럼 편하게 지인아? 하고?"

     "네, 그럼 저도 누나라고 부를게요."

     "어머, 나야 좋지."

     바로 말 놓는군.

     "저도 예쁜 누나 생기면 좋죠."

     "예쁜? 깔깔, 내가 한 이쁨해."

     ....사실이라서 그런지 더 재수다, 이 여자야.

     "그런데, 연우 너 표정이 왜 그래?"

     ...응? 연우 형 표정..? .........헉, 좀 전보다 더 심해졌다. 더 심해졌어. 하긴 눈 앞에서 자기 애인한테 작업들어가는데 누가 좋아하겠어. 나라도 눈 뒤집히지.

     "안 좋은 일 있어?"

     "별로."

     ...진짜 기분 안 좋은가보지. 연우 형 버릇이다. 기분 나쁘거나, 뭐 안 좋으면 '별로' '괜찮아', '아니'로 점철되는 말버릇. 그것도 확연히 굳은 얼굴로.

     "에에, 별로,라고 하는 거 보니, 진짜 안 좋은 일 있나본데?"

     과연 애인이라 이거지. 하긴, 나보다 만나도 더 만났을텐데 잘 알고있겠지. C.C.C.C 인간들이 다 덤벼서도 안 깨진 커플인데 오죽 하겠어?

     "지인아, 연우 왜 이런지 알아?"

     "글쎄요..."

     알아도 난 모르는거지. 하지만, 정말이지.. 그렇게 그런 표정을 짓고 있다니. 사람 양심 찔리게. 제길, 누구는 좋아서 이러는줄 아쇼? 노트북 값만 아니면 나도 안 해, 이런 짓. 이렇게 형한테 미움받는....아... 아아아아아! 그러고보니, 나 정말 둘 사이 갈라두고 나면, 완전히 나쁜 놈 되는거 아냐-의도한 바는 아닐지라도- 연우 형이 이렇게 좋아하는 티 내는데.. 그걸 친한 동생이란 놈이, 가로채버리면... 하지만 하지마안.

     "정말 어디 안 좋아?"

     슬그머니 연우 형 이마에 손을 대며 고개를 갸웃 젓는 수빈이라는 여자를 보자... 뭔가 좀 기분이, 아니 상당히 많이 나빠지는게... 어쩜 나는 이 수빈이라는 여자랑 상성이 안 맞는걸지도 모르겠다.

     "열은 없는데."

     "됬어."

     "상당히 안 좋아보여, 너."

     나 때문이라니까. 젠장, 그래 내가 사라진다, 내가!

     "저 먼저 올라가 볼게요."

     "왜?"

     "응?"

     연우 형 뭐야. 내가 빨리 없어져줬으면 하는 거 아니었어?

     "연우 형, 하려던 말은 나중에 해요. 나 갑자기 일찍 가봐야할 게 생각나서 먼저 올라갈게요."

     "지인아."

     뭐라 말하기도 전에 휙 걸음을 옮기며 빨리 걷자, 연우 형 따라오지도 다시 부르지도 않는다. 정말 서글퍼진다.

    ***

     "뭐냐? 그 얼굴은."

     내버려둬.

     "어이 찌그러진 세숫대야. 너 표정이 왜 그래?"

     축 처지는 기분에, 가뜩이나 꿀꿀하니 쇼파에 누워있었건만, 투욱투욱 등을 건드리는 손길...아니 발길.

     "더럽게!"

     "더럽기는 니 표정이 더 드으럽다."

     ".....하아..."

     "아쭈쭈? 한숨까지? 우리 삐약이가 왜 이러실까?"

     "형."

     "왜."

     "형같으면 애인하고 동생 중에 누굴 택하겠어?"

     "뭐?"

     "그러니까, 형이 진짜진짜 좋아하는 애인을, 동생이 가로챘다거나,"

     "거나?"

     "반대한다면..."

     "그걸 가만두냐! 전자의 경우라면 한강 물을 토할 때까지 먹이고, 토한 거 다시 먹인다!"

     .....그 정도야?; 하지마안, 역시 비교대상이 잘못된 걸지도. 저쪽은 이연우고 여기는 최진희잖아. 전혀 안 맞지. 응, 조금이라도 비슷한 성격을 찾아야...

     "뭐냐~ 너? 물아봐놓고 그런 심드렁한 표정이라니. 그런데 왜? 너 애인 생겼어? 근데 지훈이가 넘봐?"

     "아냐."

     "아닌데 그런걸 왜 물어? 원래, 사랑 앞에선 핏줄이고 뭐고 없는거야 쨔샤. 생각을 해봐라. 사랑 앞에 눈 휙돌고 몸바쳐 마음바쳐 간쓸개, 뿐이냐? 심장, 뇌 다 가져다 줬는데, 딴게 보이겠냐고. 거기서 방해하면 다 사랑의 훼방꾼이요, 운명의 걸림돌 취급이지."

     하아... 역시 그런걸까? 하긴 연우 형 나 만나고 한번도 그런 표정 지은 적 없었는데 말야. 그 수빈인지 뭔지하는 여자가 등장 후부터는, 정확히 내가 관심있는 티를 내고부터는 표정이 싸악 바뀌어서는 말이지... 좋아하는 동생이라고 해놓고는 어쩜 그럴 수가 있냐.

     "사랑 앞에는 그래 형제고 뭐고 필요없다 이거지."

     "당연한 말을."

     당연이라.. 당연. 당연히 나보다는 그 여자가 먼저... 그럼 나중에 일이 제대로 되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되는 걸까, 연우 형과 난. 지금처럼 지내는건 아무래도 무리려나. 아니, 지금처럼은 아니더라도 얼굴보면 인사를 할 수 있긴 할까? 아무리 내가 몰랐었다, 형이 애인없다 하지않았냐, 라고 한들... 머리는 이해해도 감정적으로 해결이 안되는 문제가 있는거다. 그래... 그런 거다.

     더욱이 정말정말 연우 형과 내가 친형제 사이였다면, 그 당시는 감정이 격해졌던 싸우고 치고받던,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유대 관계가 남아있고 핏줄이 있다지만, 냉정하게 돌아보자면... 사실 형과 나는 아무것도 아닌 '남'이니까. 친구도 아니고 가족도 아닌...

     차라리, 포기해버릴까? 이런 상태로라도 그 수빈인지 하는 여자가 마음에 안 들더라도... 그냥 내버려두고 연우 형과 지금처럼 지낸다거나.. 아... 하지만, 왜 이것마저도 스스로 용납이 안되냐는거다.

     "그런데, 너 슬슬 작업 들어가고 있냐?"

     "응? 무슨 작업?"

     "무슨 작어업?"

     "뭐?"

     "까먹었어? 이연우, 강수빈. 이 두 명."

     아, 굳이 상기시켜주지 않아도 충분히 자각하고 있으니까, 형 마저 그러지마라. 가뜩이나 이 두사람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데...

     "알아."

     "사실, 별 기대는 안한다. 이 둘 엄청 잘 어울리고.. 진짜 친한 거 같으니까, 허물업성 보이고. 원래 이런 사이가 깨기 어렵잖냐."

     아주, 하나하나 가슴에 비수를 꽂는구만. 대체 누구랑 누가 잘 어울린다는거야?

     "뭐가 잘 어울려. 별로 어울리지도 않더구만."

     "인간이 뭐래, 그 정도면 딱이지."

     딱은 얼어죽을. 형 그 여자 자세히 봤어? 연우 형 키가 얼만데. 둘이 서면, 어깨까지밖에 안 와요. 게다가 보니까, 나서기 좋아하는 성격 같더라. 나한테 대놓고 미스 보명 어쩌고저쩌고. 거기에 변죽도 좋아서 처음보는 사람한테 대뜸 '지인 씨'운운. 거기에 말 놓으라니까 단숨에 '지인아'. 사람이 말야, 뚝심이 있어야지. 난 그런 타입 딱 알아본다고. 말많고 참견하기 좋아하고, 제멋대로고!

     "에에~ 알았다. 너 질투하는구나!"

     .........!!!!!!! 뭐뭐뭣?

     "뭐?!"

     질투? 질투우? 내..내가!! 왜 그 여자한테 질투를 해!! 그야, 형이 나보다 그 여자를 먼저하는 거 같아서 그게 좀 짜증이 나긴 했지만, 그 여자가 너무 다정스레 '연우야'하고 부르고 형이 '수빈아'라고 불러서 화가 나긴 했지만!! 어제 그 여자가 같이 가잔다고 훌쩍 나 두고 가버리는 형 뒷모습에 서글퍼지기는 했지만!! 내..내...내가!!! 그 여자한테 질투할 리 없잖아!!...

     "에이~ 맞지? 그렇지?"

     "아! 아냐!"

     "당황한다~ 당황. 왜 첫눈에 반했냐?"

     반...반하긴! 처음 만났을 때 얼마나 무뚝뚞해보이고 어이없었는데. 첫 인상으로만 치면 최악일지도. 그야 잘생겼다... 생각은 했어도.

     "아냐!"

     "에에~ 안그러고서야 이렇게 날 세울 필요가 있어?"

     아니라니까! 그야 좋은 형으로 정이 들긴했지만 그렇지마안.

     "그냥 나는 좋은..."

     "좋은 뭐? 너, 사람이 사람 대할 때, 그게 그냥 감정인지 그 이상인지 어떻게 아는지 알아?"

     "......."

     "라이벌 등장이다."

     "라이벌이라니!"

     나는 특별히 라이벌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

     "애인이 있구나, 내지는 생겼구나, 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진심으로 축하가 가능하다면 순수한 감정이고, 안절부절초조불안, 거기에 상대에 대한 알 듯 모를 듯 타오르는 질투. 이건 이거어언~ 따악 애정이다."

     .............!!!!!!!!!

     아니...그..저, 형 나는.. 하지마안. 연우 형도 나도 나..남자...라구!! 그런 애정이니, 뭐니가..

     "하지만, 포기해라."

     "뭐..?"

     "상대가 상대여야지."

     아니...형...그래도, 아니아니 그래도가 아니라, 나는 그런 감정이...

     "킹카 아니냐, 킹카. 이연우. 너도 봤지? 솔직한 말로다가, 상대가 되어야지. 쩝, 짜식. 하필이면 또 한 눈에 가버릴 건 뭐냐."

     "어?"

     "남자대 남자로 봐도 멋있잖냐, 외형은. 속이야 어쩔지 몰라도. 그렇게 둘이서 꿋꿋이 좋아하는데.. 아니 둘이 헤어진다 치더라도, 강수빈 눈에 웬만한 남자가 차겠냐?"

     ....그러니까...그러니까... 지금 연우 형 이야기가 아니라, 그 여자 이야기였... 그러니까아! 내가 지금 그 여잘 좋아한다고 말한 거였어?! 하..? 나는 연우 형이라고 생각을...음......으으으음.

     그러고보니까, 나 왜 어째서 연우 형이라고 생각했던거지? 질투의 대상으로 왜 그 강수빈을 떠올렸으며, 좋아한다에서는 연우 형이 생각난 거냐고!!!

     '너 게이라는 소문있던데?'

     '형, 나는 이해할 수 있어.'

     '친형제끼리 누가 그러냐!'

     ........!!!!!!!!!..........잠깐...잠깐마안!! 뭐야!! 지금 이게 뭐냐고옷!!!!!

     "야? 권지인? 권찐~? 왜 그래?"

     "내가..좋..아한다고?"

     "뭐 이해한다. 걔가 좀 이쁘냐. 게다가 수빈이 니 취향이잖아."

     "뭐?"

     "활발하고 사교성있고, 인덕있고, 잘 웃는."

     "내가 언제?!"

     "언제는? 너 오리발이야 왜?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이잖아. 내숭파보다는 솔직솔직하고, 사람 잘 사귀고 잘 웃고 편안한... 수빈이가 딱 그거잖아."

     솔직? 편안? 인덕?이라고? 뻔뻔하고, 제멋대로에 눈치없는,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볼 때 그런 거냐고! 내 눈에만 곱게 안보인거야?

     "권찐? 왜 그래?"

     "...하. 하아??"

     퍼즐맞추듯 들어맞는 감정이란. 그러니까, 지금 내가 이다지도 불쾌했던 이유가.. 그 강수빈이라는... 주위에서 퀸카라고 할 만큼 이쁘고 성격까지 좋은 여자가 내 눈에는 그렇게 밉게 보였던 이유가, '질투'라 이거야? 그것도! 연우 형 때문에? 그토록 연우 형이 아깝게 보이는 이유가...

     "말도 안돼."

     "...권찐? 너 진짜야? 진짜 좋아해? 한눈에 뻑?"

     "......말도 안된다고, 이건."

     편안하고 옆에 있으면 좋고, 여자 소개시켜준다는 친구들 이야기가 귓등으로도 안들어왔던 이유가.. 그게... 내가 연우 형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일하고 감정하고 흔들리지 말아라.'

     라고 진희 형이 무슨 드라마 대사같은 소리를 하고 동방을 나간 이후로, 냉정하게 정말 제 3자라도 된 마냥 내 감정과 내가 생각하는 연우 형에 대해 생각해봤다. 그리고, 조금쯤 인정해버릴 수 밖에 없었던 사실은... 내가 연우 형에게 지금 느끼고 기대하고있는 것들이, 지훈이의 말처럼 '친형제'로서는 아니라는 것, 친형제로서는 가질 수 없는 감정이라는 것, 내가 연우 형을... 너무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것, 소소한 것들까지 깊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

     형과의 대화들이, 흥미가 없었던 부분들의 이야기마저 귀를 활짝 열고 열심히 들었던 것이... '관심'의 일종이고, 학년이 달라 매번 시간이 뒤틀리면서도 그 사이 시간을 쪼개고 휴일을 모두 함께 하려고 매달렸던건... 함께 있고 싶었던건... 정확히는 형의 모든 그 남은 시간을 공유하고 싶었던 독점욕.

     혼자 생각하면서도 얼굴이 붉어져왔다. 생각해보니, 나란 놈이 사람을 좋아하게되면 얼마나 매달리는 성격인지에 대해 어쩐지 적나라하게 되짚어본 것 같아서... 그리고, 서글퍼졌다. 감정을 알게되자마자, 실연. 거기다가 상대는 전혀 가망성이 없는... 같은 남자. 그것도 '형형'학 따랐고 상대는 '동생'으로서 날 좋아하던...

     "심하네."

     차라리... 몰랐더라면 좋았을텐데. 차라리 몰랐으면, 그냥 유치한 핑계를 가져다붙이면서 둘 사이를 깨놨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하아.

     "엉망이잖아."

     천천히 물이 흘러넘치듯 차올랐던 감정. 너무 서서히, 너무 편안하게 젖어왔던거라, 누군가가 '너 옷이 젖었어'라고 말해주기 전까지는 깨닫지도 못했던.. 그런...감정. 익숙해져버린... 그런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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