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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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맙습니다."

     상당히 민망했지만, 그래도 동방예의지국에 살고있는 국민으로서 또박또박 인사를 전했는데, 뭐가 불만인 건지 살짝 인상까지 쓰는게... 영 찝찝함을 불러일으킨다. 그야 내가 생각해도 참 바보같이, '버스를 타고 가다 바닥에 널브러져 쪽실림을 당함!'이라는 사태를 만들 뻔한 사람따위, 그닥 좋은 이미지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대놓고 이런 시선을 받으니 약간 기분이 상하는 것도 사실. 게다가 '고맙습니다'에 이어서 나올 법한 '괜찮아요' 내지는 '별거 아녜요'의 사교성 멘트는 저 멀리 히말라야 산 꼭대기에 얼려버리고 왔는지, 그저 묵묵히 한참을 쳐다보다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진지하게 벙어리가 아닐까? 라는 고민을 하게 만들 정도로.

     "그럼 전... 이만."

     그래도 애써, 머리통으로나마 인사를 받았다는 사실에 중점을 두며 귀에 이어폰을 꽂고 걸음을 옮기는데 뭔 볼일이 남았다고 작지도 않은 커다란 덩치가 등 뒤를 따라 걷기 시작한다. 처음에야, 그냥 가는 길이 비슷한가보다 했지만, 나보다 훨씬 큰 키를 해 가지고서는-당연히 다리도 더 길게 아닌가!0끝까지 박자를 맞추듯 내 뒤를 졸래졸래 쫓아걷는 게- 졸래졸래라고 하기에는 어감상 문제가 있을지 모르지만;-여간 신경쓰이는 게 아니었다. 결국 참다못해, 뒤를 휙 돌아보자... 멀뚱히 마주치는 시선. 그리고 그것뿐이었다. 결국 다시 고개를 돌리고 조금 더 속도를 높여 걷기 시작한 건 내 쪽. 처음에는 좀 빠르게 걷는 것뿐이었지만 5분이 지나도 10분이 지나도 계속되는 뒤에서 쫓아오는 속도가 분명히 '고의'라고 느껴질 무렵에서는 완전히 경보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오기까지 발동하고... 그렇게 얼마간을 거의 뛰다시피 걸었을까 드디어 고지가 눈앞에! 학교 정문이 보인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헐레벌떡 교문 안으로 뛰어들어가는데... 터억 틀어 잡히는 어깨. 깜짝 놀라 뒤를 휙 돌아보자... 아까의 그 덩치.

     그래, 그럼 그렇지 뭔가 할 말이 있었으니 날 따라온 거겠지! 제발 할말 빨리 하고 사라져줘! 의 눈빛을 강렬히 내쏘며, 빠안히 들여다보자 뭔가를 수북히 내 앞으로 내민다. 신종 앵벌이? 물건을 사달라는 건가? 만약 그런거라면 그쪽 업종을 상당히 잘못 택한 거 같지않아? 차라리 칼 하나 들고, 아니아니, 그냥 분위기 굳히고 침만 찍 뱉어도, 다들 알아서 자진 납세하지 않겠냐 이거지. 물론 그렇게되면 법이라는 정의 아래 쇠고랑을 차게 되는 건가. 음 그렇다고 해도 강매도, 불법이긴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무슨 일이시죠?"

     스윽 생각들을 정리하며, 요란한 기타 연주가 흘러나오는 이어폰 한쪽을 빼자, 조금쯤 입가에 웃음이 달리는 것도 같고... 뭐야? 이사람. 게다가 내 질문에 그저 손 안에 든 물건들을 스윽 다시 한번 앞으로 내밀 뿐. 천천히 시선을 그 손 위의 가득 올려진 물건들로 옮기자, 우선 에... 책이랑 열쇠... 손수건... 에, 또... 지갑... 으으으음???

     "어!!!"

     그리고 뭔가 참 낯익다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마자, 입에서 외마디 탄성이 내질러지고, 휙 등에 들쳐맸던 가방을 재빨리 앞으로 돌려보니... 젠장! 열렸다! 바보가 입을 헤~ 벌린 것처럼, 휙 열려있는 가방은 몇 권의 노트와 맨 밑바닥에 깔린 펜 몇 자루가 전부... 지갑도. 오늘 필요한 책도 물통도 없다!

     "불렀는데."

     그리고, 처음으로 들어본 -당연하지만- 눈 앞의 남자의 목소리는, 참으로 간단명료한 거라... 하지만 그 짧은 말 하나에 모든 상황이 판단되고... 진짜 쪽팔려서 머리가 다 쭈뼛 설 정도였다. 

     빠른 걸음으로 힘차게 걸으면서 길마다 코너마다 후둑후둑 가방 안의 물건들을 뱉어냈을 테니, 뒤에서 그 물건 주워 들며 쫓아온 사람은 얼마나 웃겼을까... 쓰블 정말로 아스팔트 갈라서 그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싶다. 황급히 도망가려는 이성을 붙잡고 죽어도 같이 죽자!! 라는 생각으로 상대의 손에 들린 잡다한 내 물건을 받아서 쑤셔넣듯 가방에 집어넣자, 내 하는 양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가볍게 헛웃음을 날린다. 여기에 완전히 참패. 뭐라 말도 못하고, 그저 다시 한번 십 몇분 전 했던 대사를 다시 할 수 밖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뒤도 안 돌아보고, 그대로 힘차게 달려 버렸다.

     사실 이 쪽팔림의 시작은 간단(?) 했다. 어제 술독에 잠깐 빠졌다가 나오는 바람에 오늘 아침의 나는 무지하게 피곤했던 것! 학교로 오는 버스 안에서 그만 깜박 잠이 들었다... 그것도 선잠이 아니라, 완전 '숙면'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내려야 할 곳도 지나쳐버린 채로 쿨쿨 잘도 자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급정거한 버스. 여기서 문제. 급하게 완전히 사선으로 돌아가 버릴 정도로 훼까닥 한 버스 안에서 온몸에 힘들 다 뺀 채 자고 있던 사람은 어찌 되띾요? 참고로 앉아있던 자리는 옆의 팔걸이도 없는 옆이 뚫린 의자였음. 

     당연히, 나도 버스가 휘익 돌아가는 그 순간에, 정신이 번쩍 들었고 '자빠지겠다!'라는 생각이 전광석화처럼 머리를 스쳤었다...만! 중요한건 여기에서 강조되는 '만'이다. '만!' 확 옆으로 쏠린 내 몸이 바닥과 스킨십을 갖기 전에 그대로 터억 장렬하게 들이받힌 곳은 그나마 바닥보다는 덜 쪽팔리고 바닥보다는 덜 아픈... 웬 남자의 품 안이었다. 이렇게 말하니, 영 이상한 뉘앙스지만, 정확히는 내 옆에 서 있던 남자의 몸에 온 몸무게를 다 담고 그대로 들이 박았다고 할 수 있는 거다. 그리고나서 버스에서 내려서 '삐리리 삐리리. 삐이이이잇---'하고 싸워대는 운전기사 아저씨를 쳐다보다 학교에서 세 정거장쯤 지나쳐 와버렸단 사실을 알아챘고, 급하게 가방을 등에 들쳐업고 날 바쳐준 고마운(?) 사람에게 인사도 제대로  못한채, 버스를 내렸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남자 또한 같은 곳에서 내리게 되었고 그 다음은 위와 같았다. 한마디로 개 쪽의 도미노였달까... 하아 젠장. 정말이지 일 한번 안 풀린다. 어제오늘 연짱으로.

    ***

     "그래서?"

     거, 눈 좀 빛내지 마십쇼. 사람 민망하게. 아주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깔깔거리며 박수까지 치다니.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에요. 감사합니다 하고 냅다 뛰었지."

     "진짜 황당했겠다."

     "말도 말아요, 어찌나 민망하던지."

     "너말고 그 사람."

     으음?

     "생각을 해봐라. 네 말대로 그럼 근 세정거장을 니가 흘린 물건들을 모두 주워담고서, 널 쫓아왔다는 소리잖아. 그런데 꼴랑 감사합니다가 땡이야?"

     그...그런가? 하지만, 그럼 나를 부르던지...음...맞다! 나 이어폰 꽂고 있었지. 불렀어도 백발백중 못들었을테고 게다가 혼자서 '저기요' '저기요' 하면서 길에서 따라붙는 것도 어찌보면 민망한 일인지도 모르고 말야. 덧붙이자면 아까 말하는 거 들어보니 뒤에서 날 몇 번 불렀던 거 같기도 하고...

     "그럼 뛰어와서 날 잡고 흔들던가."

     "뭐, 그거야."

     게다가 혹시 알아? 그냥 이쪽으로 오던...은 아니겠군. 생각을 해봐라. 나야 자느라고 정류장을 지나쳤으니, 세 정거장이나 되돌아왔다지만 그 사람은 그럴 하등의 필요가 없었을 텐데. 혹시 서서 졸았나?

     "여튼간 그럴 땐 밥이라도 사야 하는 거라고."

     "쪽팔려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만."

     그래그래, 진짜 얼굴에서 화르르르륵 소리가 들렸단 말이다. 피가 부글부글 끓고 말이지. 게다가 그 상대란 작자가 말야, 애초에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해줬거나,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었으면 덜했을 텐데 무표정한 얼굴에 비릿하게 입가에 하나 걸쳐지는 웃음이라니 어디로보나 따악! 비웃는 거였다고. 물론 비웃음 당해도 쌀만한 일을 연짱으로 두번이나 저질렀으니까 할 말은 없다고 치더라도!

     "그런데 생기기는 어땠어?"

     음... 생긴거? 흘끗 올려다봤을 때 느낀 거지만, 존재감이 있다고 할까? 그리고 꽤나, 단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말야... 쪽 실려서 자세히 들여다보지는 못했지만 흘낏봐도 '혹'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그러고보니.

     "뭐.. 그냥저냥. 그럭저럭."

     "무슨 말이 그래."

     "에~ 몰라요! 여튼 나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까!"

     "흐음."

     "그나저나, 진희 형은 언제 와요?"

     "아? 아마 조금 있다가 올텐데. 왜 진희 기다려?"

     그게 아니면, 내 발목을 칭칭 감고있는 이 동방에 왜 와 있겠습니까. 제가. 생각해보면 어제 일도 억울하고, 단숨에 노트북 한대값의 빚이 생겼는데...오늘 일까지... 하느님도 참 너무 하시지.

     "노트북 값의 빚이 생겨서요, 돈 좀 아끼게 얻어먹으려고."

     진심을 토로한 말인데.. 웃지마세요. 승희 누나도 내 상황이 되어봐요. 빈대 근성이 나오나 안나오나. 그런 의미로 어제 오랜만에 만난 동창들과의 술자리에서도 내 상황 이야기하자, 다들 안됐다! 라는 표정을 열심히 날려주며 '넌 술값에서 제외시켜주마'라고 사나이 자존심을 긁었었답니다. 젠장.

     "점심?"

     "네."

     "진희 털어봤자 별거 안나올 텐데?"

     그래도 나오는게 어딥니까. 아예 안나오거나 내 쌩돈 나가는 거 보다야 낫겠죠.

     "아주 잘 짤짤 흔들어봐야 1300원짜리 학교식당 밥이 다라는데 만원 거마."

     에이~ 그건 내기의 조건이 성립되지 않죠. 저도 그쪽 배팅인데. 누가 몰라서 진희 형 잡고 흔든답니까? 아는 선배라곤 진희 형 하나에, 어제 악연으로 만난 당신네들뿐이구만. 그렇다고 지금 붙임성 좋게 '누나 누나'하며 말한다고 해도 대뜸 '밥 사주세요~'할만큼 나 경우 없는 편도 아니고. 그야 앞으로 더 친해지면 모르겠지만 말이지.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흐응, 배고픈 자로구만."

     "돈 고픈자죠."

     씨익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자, 뭐가 그리 재밌는지 작게 웃음을 터트린다.

     "그럼 내가 밥 사줄까?"

     엇? 진짜? 정말로? 나 기대도 안했는데... 에, 혹시 그쪽도 800원짜리 라면인거 아냐?

     "학교 앞에 사거리에서 가다보면 '체어'라고 있는데 알아?"

     음... 지나가다 몇 번 본 거 같은데, 거기. 한 끼에 기본 7~8천원쯤으로 들어서 안 갔었다. 학교 주변에 널린 게 3~4천원대 밥집이구만, 그 두배나 주고 밥 사먹을 능력도 없고. 쩝.

     "이름만."

     "거기 돈까스 정식 맛있는데."

     음? 정말로 나 밥 사주게? 그냥 학교 식당 밥이 아닌 걸로도 전 만족할 수 있습니다만?

     "대신, 나 뭐 좀 도와주라."

     .....에헤라디야~ 그럼 그렇지. 괜히 한 끼에 7천원씩 쏟아부으며, 어제 만난 후배 놈 밥 사줄 일이 있겠습니까요.

     "뭐요? 정신노동? 육체노동?"

     "어느 쪽을 선호하시는데요?"

     글쎄, 어느 쪽이라고 해도 분야에 따라 다르죠. 가볍게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쪽이라면 몸을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고... 관심분야의 일이라면 머리를 쓰는 쪽도 좋을 수 있고.

     "그냥, 도서관에서 책 좀 찾아다줘. 내가 지금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거든."

     그러고보니 과방 들어왔을 때부터 컴퓨터 앞에 붙잡혀서, 상당히 많은 리포트들과 씨름하고 있었지...

     "많아요?"

     "쪼금."

     "몇 권이나?"

     "에이, 너 지금 일 가리냐?"

     설마~ 그래도 알고 가는 게 낫겠다 싶어서 그러지; 그리고 아무리 나라고해도-밥이 얻어먹고 싶어도- 단번에 몇십권씩되는 책을 옮겨나르는 거라면 사양이라고. 물론 그 정도까지 되지 않을 걸 알지만.

     "그럴리가. 여튼 뭐뭐 찾아야 하는데요?"

     "잠깐만."

     음~ 정리 좀 하지. 승희누나 생각보다 일할 때 어지럽히는 타입이었군. 뭐 나도 그다지 깔끔한 상태에서 일 보는 건 아니지만 말이지, 그래도 이거 꽤나 복잡한데... 일이 많아서 그런가?

     "여기 있다! 여기 적힌거 다."

     한참만에 부시럭부시럭 종이 사이를 들추고 고개를 숙이고 한다싶더니, 메모 해둔 종이를 찾았는지 꼬깃꼬깃한 쪽지를 건넨다.

     보자보자~ 그러니까, 에... AS 바이어트의 소유, 공리주의에..관한..거랑 심리학 책이 두권, 영문학의 이해. 에~ 대략 한 7~8권이구만.

     "이것만 있음 되요?"

     "우선은."

     우선은 이라니; 그럼 나중에 더 시키겠다는 거야? 한 끼당 한번이라구요.

     "걱정마셔. 부탁할 때마다 그에 맞는 대가를 치를 테니."

     내 표정을 알아챘는지 장난스레 쿠욱 볼펜 뒤 꼭지로 볼을 꾹 찌르며 '다 알고있다~' 표정으로 웃는 걸 보자 괜히 나도 웃음이 나온다.

     "경우 바른 분이시군요~"

     "어허, 당연하지."

     "그런데, 이 중에 책 없는 거 있음 어떻해요?"

     "음, 그럼 그건 빼놓고. 아차차! 이왕 부탁하는 거 하나만 더 들어줄래?"

     "뭐요? 나 꽤 비싸요~"

     "그래그래~ 7천원에 노가다를 자부하는 도련님. 꽤 비싸십니다그려~"

     땅 파봐요. 7천원이 나오나. 게다가 지금 이 몸은 빚을 지고 있다니까? 한 푼 한 푼 아껴서 빨리빨리 돈을 모아야죠. 물론 코 껴서 원치않은 일도 좀 해야겠지만.

     "이거 이 파일, 그 외국인 교수님들 교수실 있지? 쭈욱 가다보면 왼쪽에서 세번째 방에, Megan Taylor라고 명패 있을 거야. 거기 들어가서 좀 뚱뚱한 여자 분께 이거 드리면 돼."

     "...외..국인..."

     "왜?"

     "무서워서."

     "풉, 귀엽긴. 이거까지면 내가 후식으로 커피까지 쏜다! 어때?"

     두말하면 입 아프죠. 당연히 해야죠! 파일만 주면 되는 건데. 여차하면 안되는 콩글리쉬를 사용해도 되고.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척 경례 표시까지 하며 씨익 웃자, 살랑살랑 손을 흔든다. 이로서 밥 한 끼는 해결되었구나.

    ***

     "도서관 사서들은 대체 뭐하나 몰라. 아니면 어떤 버릇없는 새 끼가 이리 해 둔 건가."

     빠르게 눈으로 책을 훑어가면서 투덜투덜 작게 불만을 터트렸다. 종이에 적혀있는 책은 도서관에 다 있긴 있는 거였다. 문제는 그게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그렇지. 분명히! '대여'가 아닌 '보유'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책이 어디 꽂혀있는지 위치까지 파악하고 제대로 찾았음에도, 멀쩡히 한 자리에 그 책이 꽂혀져있지가 않았다. 여기저기 숨박꼭질이라도 하듯 이러지리 흩어져있거나, 아예 눈 씻고 찾아봐도 안 보이거나. 여튼 이래서 세상일 쉬운 거 하나도 없다고 했었던건가. 쪼그마한 동네 책방도 아니고 몇 층씩 나눠져 있는 중도(중앙도서관)라 왔다갔다 하기에도 다리 아프고. 거기에 요즘 리포트를 내는 시즌인 건지, 아니면 다들 학구열에 불타서 그런 건지 자료 찾는 사람은 어찌나 많은지... 더 찾아야 할 책은 많은데 겨우 손에 들려있는 건 '소유' 딸랑 하나. 그것도 어이없게 한국 고전 쪽 끄트머리에서 찾아낸 거니 말 다했다. 여튼간 이러저리 둘러보며 속으로 열심히 '공리주의', '공리주의'를 외치는데, 공리의 '공'자도 안보이니... 바짝바짝 속이 탈 지경이다. 얼마를 그렇게 보이지도 않는 책과 숨박꼭질을 했을까?! 드디어 공리주의의 이해라는 책을 발견하고 기쁨에 겨워 환하게 미소를 띄었는데... 스윽. 커다란 손이 등 뒤에서 뻗어나와 나의 공리 씨를... 강탈해 가 버렸다. 저 한 권을 찾겠다고 미친 듯이 쪽지를 입에 물고 팔 한쪽 옆구리에 두 권짜리 소유를 끼고 파닥파닥 온갖 책꽂이를 뒤졌었는데... 억울함에 눈물이 다 고이려고 한다. 씨이. 물론, 책 앞에 두고 냉큼 뽑지않고 묵념하듯 서 있었던 내 실수도 있지만, 내게도 감동이라든지 감격이라든지 해야 할 시간을 좀 줘야하는 게 아니냐 이 말이다!

     30여분. 진짜 30분 동안, 저것만 찾았는데! 너무 쉽게(?) 스윽이라니! 억울해! 게다가! 무엇보다 그 책은 내 7천원짜리 밥이 달린 책인데...

     휙 고개를 돌리자, 내 공리 씨를 강탈한 사람은 이미 다른 칸으로 넘어가고 있다. 쫓아가서 따지고 싶은 마음이 236%이었지만, 그러기에 시간이 촉박해서 공리주의의 이해에 빨간 줄 두개를 찍찍 머릿속으로 그은 뒤에, 심리학이라는 키워드를 머릿속에 살짝 던져 올렸다.

     그러니까 분명히 심리학은... 에... 저쪽에...

     마가 낀 건가? 또 다시 눈 앞에서 반짝이던 심리학책을 '찾았다!'라고 외치며 장렬하게 뽑아가버리는 웬 여자에게 뺏기고 나자 가슴 한 켠이 썰렁해지기까지 했다. 이번에는 앞에서 묵념도 하지 않고 감격도 하지않고 제대로 손을 뻗히고 있었는데! 허함과 동시에, 두번째로 닥친 일에 슬슬 짜증도 치밀어 오르고 꽤나 억울한 심정까지 들었따.

     나는 빚도 있고, 이상한 써클에 가입도 해버렸고 오늘 아침에 쪽팔리는 일까지 당했는데... 라는, 사실 책과는 전혀 상관없는 생각까지 치닫아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자, 참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와서 잠시 책꽂이에 머리를 대고 발로 아랫부분을 까며 울화를 참아야 했다. 그리고 참을 인자를 한 32개쯤 씹어 삼켰을 때야 겨우 '회복되었습니다'하는 마음의 외침에 따라 '영문학의 이해'를 찾아 나섰다.

     이번에야말로! 라고 속으로 외치면서...

     하필이면, 맨 위에 아슬아슬하게 꽂혀있을 건 뭐냐. 게다가, 발 받침대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도 않고... 어쩔수 없지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고 옆 선반에 소유와 리포트를 살며시 내린 뒤에 팔을 힘차게 뻗었다. 아슬아슬하니 손가락 끝이 책에 닿고, 어찌 힘을 내서 조금만 더 하면 뽑힐 수도 있을 법한데... 계속 번쩍 쳐들고있는 팔과 높이 꽂혀진 책을 보느라 뒤로 젖혀진 목이 잠시 뻣뻣하다, 싶어서 몸을 풀고 어깨를 몇 번 두드리는데... 또냐!!! 라는 소리가 목구멍 바로 위까지 차 오르게 하는 건, 너무 쉽게 스윽 [영문학의 이해]란 책을 뽑아가는 손. 그 순간 화악 치받이는 감정이 저도 모르게 입을 통해 나왔으니... 

     "이건 절대 안돼!"

     그와 동시에 휙 고개를 돌려서 그 책을 멀뚱히 집고 선 사람의 손에서 화악 뺏아버렸다. 그리고 바로 찾아오는 침묵.

     "......."

     "......."

     흥분했다. 내가. 인정한다. 하지만 연 세 번이나 눈 앞에서 책을 뺏기는 건 정말 슬픈 일인거다.

     그래도 묘하게 찾아온 긴 침묵과, 내 손에 들린 겉 표지가 약간 낡은 영문학의 이해. 동시에 이유없이 책을 뺏겨버린 사람은 말이 없다. 도저히 얼굴을 들고 볼 수가 없어서, 그대로 도망치듯 책 하나를 가슴에 안고 그 자리를 빠져나와 버렸다. 뒤에서 욕을 하던 어이없어하던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체념성 생각까지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그래도 나름대로 책 하나는 사수했잖는가!라고 스스로 서글픈 칭찬을 해주고 다음 책을 찾기위해 쪽지를... 펼치려고 하는데... 없다!...그리고 소유도 승희 누나의 리포트도... 오로지 손에 들린 건 쪽팔림을 무릅쓰고 사수한 '영문학의 이해'뿐. 그제서야 책 뽑으려 아둥바둥 거리다가, 옆 선반에 둔 게 생각나 후다닥 원래의 자리로 돌아 갔지만... 텅 빈 선반. 다리에 힘이 풀리고, 머리가 멍해졌다. 정말 안 풀리려고 작정을 한 날인건지... 정말이지 가끔 이런 날 있다. 뭘 해도 안되고 자꾸만 일이 꼬이고, 결국 감정은 감정대로 피곤함으로 소모되고 남는 건 없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리에 힘이 풀려 그냥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책이야 미친 척하고 다시 찾으면 어디서 발견 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지만, 쪽지야 누나한테 다시 받으면 된다지만... 리포트는... 백업본이 없다고 하면...

     "하아아아~"

     절로 터지는 한숨. 눈물까지 핑 도는 마당에 한숨이 뭐 대수겠냐만은, 책 몇 권에 완전히 진이 빠져버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희 형한테 1300원짜리 식당 밥이나 얻어먹는건데... 후회해봤자 때는 늦었지만...

     "저."

     그때였다. 낮은 음성이 머리 위에서 울린다 싶더니 불쑥 쭈그리고 앉아 팔뚝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싶어져버린 내 앞에 '소유'라는 제목이 찍힌 책과 '리포트'가 내밀어진 건. 벌떡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눈을 휘둥그레하게 뜰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거 그쪽 거 맞죠?"

     깔끔하게 생긴 얼굴, 커다란 키. 낮은 음성. 그리고 어디서 본 듯한 생김이... 아아아앗! 그러고보니 아침에 그 녀석이잖아! 설마 우리 학교 학생이었어?! 책 주려고 우리 학교 앞까지 따라 온 줄 알았더니! 이런, 우스운 일이!

     젠장! 젠장! 속으로 열심히 외치다 '핫!'하고 정신을 차리고 쭈그리고 앚아있던 자리에서 일어서자, 다시 한번 내 앞으로 리포트와 책을 내민다.

     "그..."

     이번에마저 '감사합니다'라고 하기에는 정말 민망해서 말도 못하고 버벅거리자 피식하고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영문학의 이해 뽑아주려고 한 거였습니다."

     더불어, 이런 황당한 소리까지!... 그럼 아까 강탈하듯 책을 낚아채냈던 손의 주인공이 이 사람...? 어쩌자고 나는 그런 실수를 한거냐앗!!

     뭐라 말 할 기운도 아니나서 푸욱 고개만 다시 숙이자, 머리 위에서 날 내려다보는 게 느껴지는데... 뭐야, 뭐 빨리 가라 가! 쪽팔리게 뭘 그렇게 쳐다봐?

     그렇다고 등돌리고 먼저 휙 와버리자니 그건 또 경우가 아닌거 같아서 뻘쭘하게 서 있었는데, 한참만에 천천히 머리 위로 떨어진 목소리.

     "그런데.. 혹시 그쪽 26대 미스 보명 아닌가요?"

     쾅! 소리가 들렸다. 귓가는 폭주하고 머리는 띵해지고 심 봉사 눈 뜨듯 시야가 확 밝아지는 느낌. 귀를 파고 '다시 말해봐요!'라고 할 만큼 다급한 상태로 침을 꼴깍 삼키고 인상을 쓰며 얼굴을 팍 들었더니, 어디로보나 한 '외모 빨' 하는 얼굴이 무표정하니 날 요리조리 살핀다 싶더니... 급기야 확답을 내리듯...

     "맞군."

     이라고 중얼거리는게!!!

     당...당신 뭐야? 뭔데 내 정체...아니 내... 내 그 기억에서 파내다 못해 삼등분하고도 다져서 바다에 흘려보내고 싶은 과거를 아는거야!

     "저... 그게 무슨 소리인지?"

     "나름대로 눈썰미는 정확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

     시치미 따악 떼고 눈 내리깔고 모르는 척 고개를 휙 돌린 채 괜스레 발끝만 쏘아봤다. 정말이지, 이런 식으로 한번씩 가슴을 후벼파이듯 이 문제가 화제로 떠오를 때면, 등에서 식은땀이 쪼르륵이 다 뭐냐. 아예 한강수를 만들다 못해 넘쳐흐르게 한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나 권지인. 어디 가서도 외모 빠진단 소리 못 들어봤고, 그러한 연유로 길거리에 한 시간만 서있어도 말을 거는 여자들이 뻥 좀 보태서 서울 길바닥에 붙어있는 껌딱지보다 많다.

     거기에, 성격 좋고 머리 나쁘지않고 운동 꽤 하고. 이러니, 나의 하늘을 치솟다 못해 구름 위에 사는 선녀랑 쎄쎄쎄 할 만큼 높은 인기는 어디를 가나 식을지 몰랐는데... 그게 불운을 부르기도 했다.

     정확히 작년 가을에! 우리 모교인 보명고는 축제가 많기로 유명했다. 체육대회를 비롯해서, 시화전, 미술전, 음악 대회 등... 학교 녀석들도 꽤나 활동성 강한 놈들도 많았고... 그렇다고 공부를 못하는 학교도 아니었다. 다방면으로 좀 유능한 나름의 좋은 학교였던 거 같다. 음.

     그런 우리 학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보명제 普明祭]라는 학교 공식 축제였는데, 그 중에서 단연 모든 이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건, 미스 보명 미스터 보명으로... 예상했겠다시피 성별을 바꾼 채로 학교 최고의 미남 미녀를 뽑는 거였다. 물론 여타 다른 학교와 같이, 고3인 우리에게 '축제'란 저 하늘 멀리 우주에서 반짝이는 별과 같은 것이었지만 마지막에 객/기로 정말! 정말! 객기로 친구 녀석 몇명이서 내기를 해서 지는 놈이 추억도 만들 겸 이 '보명 미스&미스터 콘테스트'에 나가기로 결정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고3의 스트레스가 발화된 게 아닐까 싶었지만, 그땐 뭔 깡이었는지 절대 나만큼은 아니 걸릴 거라는 근거없는 신념(?)이랄까 믿음(?)같은 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대 참패. 가위바위보에서 연속 다섯 번을 지는 불행을 초래했으니.. 결국 울며 겨자먹기에 더해서 울며 와사비 입에 짜 넣듯이 축제 마지막 행사요 하이라이트! 모든 이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그 콘테스트에 나가서 요란한 휘파람 소리와 박수를 받으며 당당하게 '26대 미스 보명'이 되어버렸다. 그 후의 학교생활은 정말 말 할 것도 없이 암담. 들어오는 선생님마다 '이 반에 미스 보명이 있다며? 어디 얼굴 좀 보자~'에서 '오호~ 꽤나 미인이네. 나중에 좋은데~ 시집가겠다'까지 놀리는 레퍼토리도 다양했따. 게다가 문제는 그 잊어버리고 싶은 장면을 꽤나 기억하는 사람이 많았던 건지 대학 오티때에도 '야아! 너 미스 보명 아냐?' 라는 소리를 듣고 그 인간 입을 막느라, 무던히도 애썼다.

     그랬던 것을. 지금 이 생판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미스 보명?'하고 알아 봤으니... 게다가 오늘 하루종일 칠칠찮은 모습만 보여놓고는!

     "아닌가? 꽤나 인상 깊어서 기억하고 있는데. 왜 드레스 자락 휘날리면서 발차기하던 거."

     쿨럭!!! 결국 나왔다. 이럴 줄 알았지, 알았어. 내가 그 씹어먹을 '미스 보명'인 걸 기억하면, 그 장면을 잊을 수야 없겠지!

     하필이면 무대에 올랐더니 사회자 놈이 '장기'를 보이라고 했고, 딴 놈들이 상금(?)을 노리고 박자에 맞춰 율동까지 해가며 노래와 안무를 선보일 때 뒤에서 토악질을 하던 나였으니... 말 다했다.

     사실 생각해봐라. 덩치는 산만한 것들이 몸에 꼬옥 낑기는 주화액 분홍색 꽃띠 옷을 입고 살랑살랑거리는 걸. 진짜 못 봐준다. 차라리 여자애들이 하는 남장은 나름대로 얄쌍한 맛의 흔히 말하는 미소년틱한 거라도 있었지! 여하간 죽어도 입이 찢어져도 홍홍거리면서 그 많은 사람 앞에서~ '기호 몇 번 권지인이에용~ 예쁘게 봐 주세용♡' 할 수가 없었던 나는 한 큐에 예선 탈락을 해버리려고 '자! 장기를 보여주세요!'하는 순간에 무릎까지 오던 스커트 자락을 손으로 쥐고는 그대로 앞발 차기를 해버렸다. 기합까지 넣어가며... 그.런.데. 세상에는 변태들이 꽤 많은 모양인지 박수와 함께 당당하게 본선 진출. 그리고 차지해버린 거다. 미스 보명을.

     나중에 전해들은 말에 의하면, 발을 들어올린 순간 적나라하게 나의 사각 팬티가 드러났다고 하더만! 대체 그런 날 뭘 보고 미스 보명에 앉힌 거냐? 물론 내 미모 빨이 거기 나와 있는 놈들 모두 다 합해놔도 못 따라 올 만큼 출중하다는 걸 알지만!

     "맞죠, 그때."

     "저... 사람 잘못 보신 것 같은데..."

     "맞지않나? 맞는 거 같은데."

     거! 더럽게 따지네! 아니라면 아닌 줄 알지 맞는 거 같다니~ 맞으면 어쩔 거고 아니면 어쩔건데?!

     "왜 그때 좀 옅은색에 무릎까지 오는 스커트 입고서.. 까만색 긴 가발 쓰고. 맞지 않습니까?"

     그래, 니 기억력 열라 좋다. 그렇다고 지금 그걸 하나하나 까발려서 뭐 어쩌려고? 놀리기라도 하게. 더 이상 팔릴 쪽도 없다.

     "왠만하면 기억에서 잊어주세요. 어찌 알고 계신건지 몰라도."

     결국 자포자기하듯 부탁조 반 애원조 반 또 협박성 음성까지 추가해서 말하며 얼굴을 살짝 찌푸리는데, 이 무표정한 남자. 사람 속을 완전히 홀라당 뒤집기로 작정했는지 어깨를 으쓱이며 한다는 말이...

     "나름대로 좋은 추억 아닙니까?"

     하! 허! 후! 보는 놈들이나 즐거운 추억이지! 보는 놈들이나! 웃으면서 박수치고 깔깔거린 인간들이나 떠올리면 웃기고 즐겁고 재미있지. 당사자들은 얼마나 쪽팔리는 줄 알아? 물론 상금노리고 의도적으로 올라온 놈이면 몰라도, 나처럼 친구들하고 한 내기에서 져 와사비 입에 짜넣은 심정으로 올라온 인간이나, 써클 선배 협박에 못이겨 소 도살장 끌려가듯 올라온 놈이나, 반의 운명 공동체 희생정신이라는 얼토당토 않는 말에 휩쓸려 말 그대로 '희생'된 놈들에게는 쥐뿔도 재미없다 이거야.

     "구경한 사람들이나 재미있겠죠. 직접 한 사람들은 재미 하나도 없어요."

     "나름대로, 즐겁던데요?"

     "그러니까, 직접 안 해본 사람은..."

     "참가자였습니다만?"

     ...........싸아아아아아아........

     "네?"

     이번에는 기필코 잘못 들었으리라, 진짜 잘못 들었으리라. 해서 눈을 댕그랗게 뜨고 올려다보자 여전히 표정 변화가 없는 미미한 얼굴. 

     "학교 후배였다니 반갑군요."

     그..그게 아니라 방금 뭐라 했는지 리바이벌~ 리바이버얼~

     "보...명...출신?"

     "네."

     "...미...미스 보명 출연?"

     "당선자였는데."

     "거짓마알!!!!!"

     저도 모르게 큰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게다가 상대를 향해 손가락질까지 멋대로 했지만 묵묵히 내 얼굴을 쳐다보던 남잔, 스윽 한층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여기는 도서관입니다. 조용히 해야죠."

     여하튼 말도 안돼엣!!!!!!!!

    ***

     그러니까, 그게 어디에 있떠라. 아! 여기있네. 역시 안 버렸어. 보자. 보자. 뭐랬더라. 분명 못믿겠다는 듯이 오만상 찌푸리고 인상 팍팍 쓴 내게 21대 미스 보명이라고 아주 당당하게 말한....

     음음 18대... 19대.. 웩 이 얼굴로도 어떻게 당선된겨? 그리고 20...에...다음이 21대!!!! 커헉!! 다...닮았다!! 닮았어! 닮았지만!! 뭔가 달라앗! 이건! 우와, 진짜 진짜!! 그 사람이...

     정말 사람 일이란 건 예측할 수 없는 거라지만 이건 심하다고 생각한다. 미스 보명 출신들에게만 주는 역대 족보 팜플렛에서, 오늘의 그 한 덩치 빨하던 사람의 얼굴을 찾다니!

     "허! 1학년때 당선이네. 키가, 177?! 나만하잖아! 하긴... 이건 아직 고1때니까 뭐. 아까보니 열라 크더만."

     그래그래, 구라는 아니었구나. 하지만 정말 어디로보나 사교성이나 애교따위는 없을 거 같은 무뚝뚝한 인상이던데, 어떻게 이런데 나갈 생각을 했던 걸까? 역시 나처럼 끌려갔나? 허 참.

     "이연우라...."

     아래에 작게 각 대회 미스 보명에 대한 소개가 적혀있는걸 보자, 새삼 한숨이 나온다. 언제고 내 후배들도, 나처럼 이걸 들척이며 '이 사람이 26대 미스보명이야'할지 알게 뭐냐고. 무섭단 말이지 그런건. 절대 절대!

     "형 뭐해? 엄마가 내려오...엇?!"

     "야!! 넌 노크도 모르냐!"

     "우와! 우와!! 그거 형 족보?!"

     "야야! 내놧!!"

     "으하하하하. 형 어딨지 어딨~~악!"

     뭘 채가는 거냐! 뭘!

     "왜 때려!"

     "맞을 짓을 했으니 때리지."

     "사진 좀 보겠다는 게 그렇게 중죄야?"

     암... 이게 보통 사진이 박힌 책자냐? 내 인생에서 파내고 싶은게 떠억하니 찍혀있는 건데.

     "암. 중죄지."

     "뭘~ 망신당한 것도 아니라 나가서 당당히 우승까지 하셨...으악!!!! 안할게! 안할게에~"

     꼭 매를 벌어요. 매를! 여하간 정말 쇼크에 쇼크다. 그렇게 멀쩡하게... 아니 그렇게 잘생기고 한 덩치빨하는 사람도 고등학교 때는 나랑 같은 미스...보명... 풉. 이거 어이없지만 한편 생각하니 웃기네?

     "뭘 실실 웃어? 미쳤어? 아항~ 형 여장 모습보고 새삼 반했구나 아아아악!!!!!!"

     곱게 넘어가는 법이 없지, 곱게. 그나저나 뭐 다시 마주칠 일은 없겠지만, 보더라도 피해야지 이거 원. 같은 미스 보명 출신의 선후배라니. 대학 생활 내내 놀림거리 되는 건 사절이라고!

    ***

     "권지인 씨. 일이다!"

     타앙. 소리와 함께 내 앞으로 놓여진 파일들을 보며 살포시 인상을 쓰자, 최진희... 이 인간 아주 사악하게 웃는 게...

     "일?"

     "일."

     "이~일?"

     "일. 너 니가 여기 왜 들어왔는지 잊었냐?"

     잊었을 리가 있나! 정말 운명의 장난으로 노트북 하나 박살내고 그 길로 코 껴서 들어왔지!

     "쓰읍~ 어디서 그런 반항적인 눈을!"

     "뭐야 여튼 그래서 오늘 불러낸 거야?"

     "그럼 내가 너 밥이라도 사줄까 불러냈을까봐?"

     치사하게 사촌 동생 밥 한번 자진해서 사줄 수도 있는거지 '절대 그럴 일 없을거다!'란 표정을 그렇게 장렬하게 눈 빛내면서 말 할건 또 뭐야.

     "권지인~ 니가 아직 인생을 덜 살았다. 바랄 놈한테 바래야지."

     자랑이다~ 그래.

     "여튼 잘 훑어봐봐. 우선은... 세 커플만 하자."

     "세엣?!"

     "일일이 놀랄래?"

     "아, 진짜 내가 하우..."

     "걱정하지마. 사실 우리도 정당한 일 아니면 안해."

     정당? 정다앙? 작당이겠지! 이미 이 일 하고 있는 거 자체가 비양심이라니까 글쎄?!

     "우선 봐봐."

     팔락 눈앞에 든 종이를 흔들자, 정말 이건 무슨 체계적인 범죄인지, 신상명세에 학번 주소, 취미, 심지어 시간표까지 줄줄이다. 사진도 떠억하니 붙여져있고.

     "대체 이런 건 다 어디서 입수하는거야?"

     "여기저기. 짭짤하게. 흐흐."

     "여기저기이?"

     "뭐 의뢰인이 직접 말해올 때도 있고 말이지~ 자자 그런 건 신경쓰지 마시고~"

     신경 안 쓰게 됐어? 이 일이 말이야~ ㅎ여. 사앙당히 사람 못 믿게 만든다?

     이거 결국 개인정보노출에 가장이바지한 건 의.뢰.인. 즉 원래 친구관계였던 사람이란 소리 아냐? 이야... 이래서야 뭐 믿고 사람 사귀겠어?

     "하 진짜. 내가 노트북 값만 아니면."

     "너무 그러지마라. 임마. 우리라고 좋아서 이러겠냐?"

     "그럼 안 좋아서 이 일해?"

     따지듯 눈 치켜뜨고 묻자, 머쓱했는지 괜히 입맛만 몇 번 다시더니 내 등을 툭툭 쳐온다.

     "그런 거 신경쓰지 말고. 이거나 봐. 이번에는 이쪽이 뺏은거라니까. 야~ 고등학교 때부터 5년 사겼단다. 5년. 그런데, 하루 아침에 친구가 홀랑 뺏아갔대. 이런 커플 둘이 행복해야겠냐? 응?"

     ...뭐, 그 말은 좀 동정심이 가지만서도.

     "게다가, 이쪽 남자 뺏은 여자 이상형이 좀 과묵한 스타일보다, 깔끔하고 귀여운 쪽이란다. 좋잖아."

     "뭐..."

     "딱 너잖냐, 임마. 첫 일이니까 잘해보라고."

     "내가 정말 돈 아니면 이런 일 안하지만, 말야... 후, 뭐야... 이건, 음, 화요일. 2시에 학생회관에서 밥... 이런 것도 다 알아봐?!"

     "그럼 어디서 자연스럽게 만나느냐가 중요한건데. 체크 포인트지! 알아들었으면 출발이다!"

     "뭐?!"

     "못 들었냐, 출발! 지금 1시 40분이다. 가봐야않겠냐?"

     "오늘부터?!"

     "쇠뿔도 단숨에,라는 속담도 모르냐?"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정말 밥 사준다는 줄 알고 기뻐라 나온 사촌 동생한테, 지금 가서 영 모르는 여자한테 작업걸라는 소리가 쉬이 나와?

     "안 가냐?"

     "인간적으로 너무한 거 알지, 형."

     "무스은~"

     "게다가 나 알고 있기로는! 원조금 나온다며?"

     그래, 승희 누나가 그랬다고. 여자 꼬실 때의 식비며 뭐며, 얼마정도 나온다고. 아주 이 소리 듣고 학을 뗐다는 거 아니겠어. 인간이 차암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커플 하나 깨트릴 수 있구나 해서.

     "시끄러. 넌 그 돈까지 모두 모아서 빨리 노트북 값 갚아야 안하겠냐?"

     허! 허! 뭐야!! 그럼 썡판 관심도 없는 여자 꼬시면서 내 돈까지 갖다 바쳐야 한다는 거야?

     "늦겠다, 어서가~ 훠이~ 훠이."

     아니!! 으아 밀지마! 밀지 말라니깐? 정말 이건 사촌이 아니라 웬수아냐?! 남 시간표 빤히 알면서 일찍나오라고 할 때부터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후우! 당하고도 믿는 내가 병신이지! 내가!

     "형! 정말 난 이런 일은!!!"

     "어서 가!"

     정말, 이거 너무하는 거 아냐?! 아휴! 앓느니 내가 죽는다, 죽어! 젠장 돈 없는 게 죄도 아니고 말야. 망할! 정말 이 일은 내가 원해서 하는 게 아니라고! 내 양심에 걸고 말이지. 이런 일로 내 인간성을 의심하는 사람이 나오면 섭하다고, 훌쩍. 제길.

    ***

     예전에, 재미로했던 적성도(직업) 테스트에서 내 성격과 잘 맞는 직업 중 하나로 '서비스업'이 나왔는지 조금쯤 납득이 되어서 가슴이 아프다. 그게 의미하는 바가 '호스트'였다면...

     "저, 여기 자리 있습니까?"

     표정 좋고, 목소리 톤 좋고. 미소 좋고! 10점 만점에 플러스 3점!

     "어머~ 네."

     '뭐야?'하는 인상에서 내 얼굴 한번 확인하고 사르르 넘어가는 앞의 여자를 보곤 속으로 웃음을 한번 삼켰다.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던가! 나의 매력이 뭔지도 알고 요 앞의 여자에 관한 거야 아까 자료로 웬만한건 다 습득하였으니, 말 그래도 다 잡은 새를 요리하는 심정이라 이거지, 나는!

     우선은 관심없는 척 무심히, 밥을 먹는다! 사실, 지금 다른 널린 자리도 많은데 굳이 꼭 찍어! 요 자리! 그것도 언베퉈 임자있는 자린지 아닌지 신경썼다고 '자리 있습니까?' 라고 물었겠냐. 눈치 빠른 여자라면 착 알아들었겠지. 이거야말로 '나 그쪽한테 관심있어요'가 아니고 뭐겠어. 앞에 여자도 눈치가 곰은 아닌 거 같은데, 벌써부터 젓가락질이 다소곳해지고, 입가가 살짝 풀어졌다.

     그런데 애인까지 있는거 확실하면서 슬쩍 한번 찔러봤다고 이렇게 실실 감정 수습 못하다니... 원, 이래서야 진짜 원래 애인 뺏긴 여자가 억울할 만도 하겠어. 하긴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겠냐만은 그냥 나는 일만 하면 된다, 일! 자 그럼 슬슬 작전에 돌입해 볼까~

     "저 혹시... 저번 음악제에서 피아노... 치시지 않았나요?"

     밥을 열심히 먹다말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혹시이~'하는 듯한 표정으로! 연기력 좋고.

     "네? 맞...는데... 어떻게..."

     어떻게는. 자료에 적혀있더만. 우선은 상대의 일을 우연찮게 알고있다는 티를 낸 뒤, 그 화제를 얼마나 부풀리느냐가 중요!

     "아~! 맞구나. 그때 lake louise 치셨었죠?"

     "어머, 네~"

     자자, 눈이 반짝반짝이는군요~ 세료리따~ 아 그런데 그나저나 이 여자 나한테 정말 너무 쏘옥 빠져서 나 좋다고 쫓아다니면 어쩌나. 그래, 에라 모르겠다. 그땐 그때 일이고...

     "와~ 가까이서 보니까 더 예쁘시네요."

     "넷? 오호호, 아녜요, 그게 무슨."

     라면서 얼굴은 왜 만져? 게다가 생긋생긋 미소 남발인게...

     "몇학년이세요?"

     "저요?"

     "네."

     "1학년이요."

     "1학녀언? 그럼 07학번?"

     "그쪽은 선배시죠?"

     "어머, 네."

     다행이군. 연하라 싫은 눈치가 아니라 이건 땡! 잡았단 표정이다.

     "전, 피아노 잘 치는 사람 너무 부러워요. 제가 음악적인 건 영 꽝이라... 특히 피아노 치는 여자 분들 너무 우아하고 예뻐요."

     "그래요? 호호홋, 고마워요."

     웩. 예전에 피아노 독주회 갔다가 웬 아줌마가 장장 2시간동안 피아노 치는 거 보다 질려서 기절할 뻔했던 이 몸이다. 난생 처음 듣는 지리한 음악. 거기다가 아줌마가 입었던 뽕드레스는 어찌나 웃기던지. 여튼 한 시간은 그냥저냥 듣고 한 시간은 자다가 왔지.

     "언제 또 연주 안하세요?"

     "아, 글쎄요. 가을 축제때나 아마..."

     "아, 정말요? 이야, 그때까진 여자친구 만들어서 같이 들으러 가야겠네요."

     이건, 고정적인 멘트. 나 애인 없시다~ 하는 걸 들어내는 거랄까? 자자 미끼를 던졌으면 덥썩 잡아야지 뭘 재고 있나 누님~

     "어머? 애인 없어요?"

     "에? 네... 뭐... 아 말 놓으세요!"

     만난지 몇분만에 말 놓기! 원래 말이라는 건 편하게 주고받기 시작하면서, 사람 사이도 친밀해지는 거라고.

     "초면에 어떻게... 그래도 되나?"

     "그럼요."

    에 플러스 화사하게 한번 웃어주기.

     "정말 여자친구 없어?"

     "없어요."

     "귀엽게 생겼는데, 여자애들이 많이 좋아할 타입인걸..."

     "전... 좀 어른스러운 스타일 좋아하거든요."

     "그래? 그럼 연상?"

     "연상이 좋은데... 전. 음, 연상이 절 싫어하죠."

     "어머어머 왜?"

     마치 이해가 안간다는 듯이 더 정확히는 '나라면 좋을텐데'라는 표정을 역력히 드러내며 얼굴을 앞으로 들이미는 여자. 으, 가까이서 보니까 쌍커풀 수술한거 너무 티난다; 그래서 눈화장이 진했구만!

     "좀... 믿음직스럽지 못하나 보죠."

     으, 스스로 말하니까 좀 가슴아프군. 하지만 보기랑 달리 나, 꽤나 싸움 대장이었다고. 자랑은 아니지만. 워낙에 인기가 하늘을 치솟다보니, 끝내주는 사교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적도 꽤 있었다.

     특히 상황판단 못하는 중딩 때, 고딩 때는 애초에 분란을 만들기 싫어서 잘 알아서 조절해갔지만, 중3때가 거의 절정이었지. 지금이야, 그래도 평균치에 달하는 키지만, 중3때까지만해도 167. 벌써 그때 컸던 놈들은 170이 훌쩍이었으니까. 뭐 여튼 키도 좀 작고, 얄쌍하게 생긴 게 보면 한대 콱 쥐어박고 싶었나보다. 그래서 슬슬 싸움 걸어오는 놈들도 꽤 있었고, 악으로 이기고나면, 또 다시 싸움에서 진 걸 핑계로 툭툭 건드려오고. 여하튼간에 그러다보니 싸움에도 도가 튼 몸이다, 나는! 에헴!

     "어머~ 그게 뭐 외모로 판단될 일인가~ 덩치 좋고 그래도 믿음직스럽지 못한 사람도 많아."

     "뭐...그런데.. 누나..라고 해야하나, 초면에... 참."

     슬쩍 말끝을 흐리며 눈치를 보자 금방 화색이 돈다, 아주.

     "누나라고 해, 누나.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인데..."

     인연은 무슨~ 운명의 장난이요, 시나리오 위에 완성된 계획이지.

     "네, 누나는 애인 있죠?"

     "왜? 있어 보여?"

     "누나처럼 예쁜 사람이 애인없음 그게 더 이상하죠."

     "어머~ 호호호호. 너 능숙하다, 얘~?"

     내가 능숙한 걸 알아챈 당신도 능숙하네. 이런걸 두고 선수대 선수의 만남이라고 하지? 그래도 예의상 전혀 모른다는 듯한 태도는 위선이 아니라 예의(?)다! 예의.

     "어? 뭐가요?"

     "그래도 기분은 좋네."

     "여튼 애인 있...죠?"

     여기서는 살짝 말끝을 흐려주는 걸 잊지 않으시고 다음에는 살짝 고개만 숙인 자세로 얼굴 올려다보기! 누가 그랬더라? 희정이었나? 나는 새촘하게 눈 치켜뜨는 게 너무 예쁘다고. 그때는 남자한테 새촘에다가 예쁜 게 뭐냐고 투덜거렸지만, 이게 또 연상한테는 직빵 아니겠어?

     "애..인...아니..없어. 애인."

     아싸! 지화자. 아 정말 이 일하고 싶어서 하는 건 아니지만, 또 내 매력이 이렇게 먹혀들어가는 걸 직접 느끼니까, 성취감까지 생긴다, 이거.

     "정말요? 정말에 진짜?"

     "으응, 왜에?"

     여기서는 다음을 도모하면서, '그냥요...'하고 연락처나, 이름 그리고... 어떻게 일을 진행시킬까 머릿속에서 시나리오를 쭉쭉 써 나가는데...

     "그......."

     "여기 빈자리입니까?"

     흥분에 겨워 가슴 콩닥거리며 준비된 대사를 치려고 하는 순간... 뭐시여! 내 머리 위에서 울리는 낮은 목소리는! 젠장, 젠장 내가 작업 걸고 있는 거 안 보이냐? 치사하게 남이 찍어둔 떢에 침 바르면 안된다아!!! 살짝 기분이 상해 스윽 인상 긋고 위를 올려다보자, 식판을 잡고 앞의 여자가 아닌 날 내려다보는 얼굴.

     가만... 가만... 이건... 이 사람은!!! 21대! 미스 보명!!!!!!

     "헉!"

     "안녕하세요."

     깜짝. 나...나?? 나 말야?! 손가락으로 저도 모르게 날 가리키며 눈을 동그랗게 뜨자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오는게... 후아후아 우선은 다행이다. 그러니까, 자리 있냐고 물어본 것도 나한테고 인사를 한 것도 나한테! 내 계획에는 차질이 없겠지.

     "네, 안녕..하세요."

     "자리 있는 겁니까?"

     확! '자리 있으니까 저리 가!' 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치솟는 찰나, 

     "어머~ 그럼요, 앉으세요."

     ........왜 대답은 영 엉뚱한 곳에서 나오는 거야!

     휙 시선을 돌리자, 이런...젠장! 개미 똥구멍에서 콩나물 나오는 경우가!

     맛이갔다. 어디로 보나. 뿅뿅! 아까 날 보던 때완 그 차가 더한... 누가 프로필에! 이상형이 깔끔에 귀여운이라고 적은겨! 으와 이거 진짜!

     "두 분 아는 사이?"

     봐라, 봐! 질문하면서도 지금 눈이 어디 가 있는지!

     "에?...네..뭐."

     안다면 아는 사이겠지만. 이거 뭐야! 넓은 자리 다 놔두고 왜 내 옆에 와 앉아서 밥을 먹는 건데? 왜 왜 왜?!!

     "어머, 그렇구나. 오호호호. 어떻게 아는 사이?"

     씨뎅 졸라 쪽팔림 당할 뻔한 날 번번히 도와준 사람. 이라고 말하리.

     "미스 보명 선후배요."

     "네?"

     "풉!"

     ......웃었다, 웃었어. 아주 자포자기로 툭 내뱉고 났더니, 이 이연운지 하는 사람 관심 없는 척 하더니만, 고개 돌리고 웃는다. 아 제길, 정말.

     "저기, 그런데 저 그쪽 성함 이연우 씨..맞죠?"

     속으로 툴툴거리며 이 상황을 어찌 타결할까 고민하는데... 불쑥 여자 입에서 나온 소리는 '그쪽 이연우?'하는 아는체 성 발언. 대체 어떻게 이름까지 알고있어? 사실대로 불어라. 당신도 리스트 뽑아서 사람 꼬시는 그런 타입이지?

     "그런데요."

     "오호호, 맞구나. 제가 어떻게 이름 알고있나 안 궁금하세요?"

     씨뎅, 여우여우여우! 아우 이제 난 완전히 꿔다 논 보릿자루다 이거지! 이야 여자 마음 간사하다고 하지만, 그래 금세 다른 사람한테 눈 넘어가다니! 자존심 와장창 깨지는 소리와 더불어 희희낙락거릴 21대 미스 보명과 여자를 생각해 속이 쓰려오는데... 순간 귓가를 쎄리는 홈런 소리!

     "별로 안 궁금합니다만."

     눈이 번쩍 뜨였다! 그리고 동시에 '나이스! 잘한다, 21대 미스 보명!' 하는 소리가 가슴 속에서부터 퍼져 나갔으니. 아주 칼같이 바로 나온 대답 멋져부러! 그런데 지금 이 상황에서 나야 상황이 상황인만큼 속 시워하다만, 21대 보명 씨 당신 원래 성격 생겨 먹은 게 그런 거면 문제 좀 있다? 요런 상황에선 안 궁금해도 궁금한 척 해줘야 팬 관리가 되는 거거든. 보아하니 여자 꽤나... 아니 무진장 많이 따르게 생겼구만.

     "농담도 잘 하시네요~"

     속 시원함에 속으로 티 안나게 킬킬거리는데, 이 여자도 강적이다. 저렇게 대놓고 '관심사절'표어를 내 붙이는데, 어떻게 그걸 단번에 '농담'으로 치부하고 다시 접근하냐? 그래? 별로 내 눈엔 농담으로 안 보였는데 말이지. 여하튼 이 일은 텄다, 텄어. 된장 바를. 따악 지금 이 여자 관심이 내게서 떠난 게 보이잖아. 여기서 매달렸다간 꼴만 우습게 되지. 게다가 보아하니 이런 타입은 말야, 굳이 누가 옆에서 툭툭 건드리지 않아도 자멸해서 커플 관계가 곧 깨질 타입이다. 딱 보니 한 남자로 만족 못하는 스타일 같은데 뭐~!

     "어머어머, 젓가락질 진짜 잘한다!"

     뭐야, 또 뭔데 어머어머 코맹맹이 소리야? 잠시도 딴 생각할 틈을 안 주는구만~ 아주.

     전의상실에 밥만 무심히 퍽퍽 퍼먹다, 째지듯 들리는 음성에 흘낏 옆을 보니... 그래 잘하네, 뭐... 그래 난 젓가락질 못한다! 체, 그래도 따지고 보면 젓가락질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다구! 뭐 자랑은 아니지만서도...

     흐음... 보니, 밥도 꽤나 깔끔히 먹고 말야. 식사예절 따지는 우리 할아버지가 봤음 엄청 좋아할 타입이네. 음식 집었다가 놓는 법도 없고 흘리는 법도 없고, 입가에 묻히지도 않고, 쩝쩝 소리도 안 나고 수저 젓가락 따로 들고...

     "진짜 잘하네요."

     불쑥 한마디 던지자, 스윽 쳐다 봐 온다. 그리고 시선이 내 손 끝에...

     "전 젓가락질 잘 못해서..."

     친구들이 진짜 특이하다고 노래를 불렀던 젓가락질이다. 세번째와 네번째에 젓가락을 모두 넣고 젓가락질하기. 하긴 내 친구들 뿐이야? 우리 할아버지가 뭐라뭐라 엄청 잔소리했던 젓가락질이기도 하지! 난 무지 편한데 말야...

     "그렇게도...집혀요?"

     아, 또 나의 신기에 가까운 젓가락질을 무시하네?

     "그럼요."

     대답하며 휙 반찬 하나를 집어들자 '호오?'하는 눈초리로 살핀다.

     "그거 그렇게 쥐면 옆으로 많이 벌려지지도 않잖아요."

     그럴리가. 이걸로, 180도로도 펼칠 수 있다!

     "안 그래요, 봐요."

     증명하듯 젓가락을 쫘악 벌리자, 신기한듯 쳐다보더니 쿡쿡 웃는다.

     "나름대로 귀엽네요."

     ".......놀려요?"

     "진심."

     별로, 남자한테 진심으로 젓가락질 귀여다는 소리 듣고 기뻐할 변태가 아닌지라 별 말없이 밥을 묵묵히 먹는데...

     "저도... 젓가락질이 서툴러요~"

     오징어가 초장으로 혼자 펄쩍 뛰어드는 꼴이네, 이거. 그딴 걸로까지 어필하고 싶냐? 주책아? 어이없음에 한숨 푹 내쉬고 앞을 바라보자 아까까지만해도 어설프게나마 제대로 쥐고있던 젓가락 모야이 영 이상하게 손에 들려있다. 아주 황급히 손을 바꾼 듯 말이지.

     "20여년 이렇게 쥐고오다보니 습관이 됬지만..."

     "별로 자랑할 일이 못됩니다."

     투욱 집어올리던 오뎅이 아래로 떨어졌따. 그리고 확인하듯 옆으로 고개를 삭 돌리자 묵묵히 국을 떠먹는 말끔한 얼굴. 그리고 앞을 보자, 젓가락에 엉성하게 김치를 쥐고 부들부들 떨리는 얼굴로 안면 표정 유지하는 여자의...모습이... 푸흐... 이거 진짜!!!......웃기잖아??? 아 배 땡겨. 참아야 하느니라 권지인! 여기서 웃으면 진짜 칼침 맞는다앗... 풉!

     "그럼, 먼저 일어서겠어요."

     아, 이거 참 좀 더 버텨보시지, 푸흡. 으하하하핫! 미치겠다. 지금까지 오고가는 공방전을 피부로 몸소 느끼다가 정말로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나! 30분. 밥 먹는 내내, 질문하고 무시당하고 샐샐 웃으면, 무뚝뚝한 얼굴로 응수당하고. 진짜 불쌍했다. 저 여자! 비록 내 꼬시러 와서, 느닷없이 끼어든 이 21대 미스 보명탓에 실패했지만서도... 이렇게 웃기는 상황을 보여주다니. 풉, 당신 거 꽤나 마음에 들어?

     "쿡쿡... 푸하하, 웃음 참느라고 혼났네. 하하하하."

     씨근거리는 얼굴로 여자가 자리를 뜬 후 참았다가 터지는 웃음에 식탁 위로 얼굴을 박고 미친듯이 웃자, 뭔가가 툭툭 어꺠를 두드려온다. 응? 해서 위를 쳐다봤더니... 풉!! 이 심각한 얼굴이라니!

     "어디...불편한?"

     "푸흡...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정말이지 웃겼다. 웃겼다고! 필사적으로 자기를 어필하려는 여자와 정말 지독하게도 모르는 척하는 21대 미스 보명.

     "후와, 싫은 여자 떨어내는 방법도 가지가지군요. 그러다가 물세례 받기에 딱 좋겠지만."

     웃음을 간신히 멈추고 빙긋 웃으며 올려다보자... 흐음, 표정이 뭐 이래?

     "물...세례? 싫은 여자?"

     음? 시치미는?

     "방금 그 여자, 자기 이름에 신상명세까지 쭈욱 읉다가 간!"

     "...아... 별로 싫은 여자고 말 것도 없는데."

     "엑?"

     뭐야? 싫은 게 아니었어? 난 행동에 얼음이 아주 뚝뚝 떨어지길래, 뭔가 굉장히 마음에 안 드는게 있구나, 했지!

     "싫은 게 아니었는데 그렇게 굴어요?"

     "...그렇게..라니?"

     진짜 모른다는 얼굴이다, 이건. 들어봐라. 이 사람이 여지껏 한 행동. 모든 질문에는 진짜 심한 단답형. 여자가 뭘 흘려도 모른 척. 뭔가 달라는 뉘앙스를 풍겨도 모른 척. 급기야 자존심 다 굽히고 신상명세 읊듯이 쭉쭉 말할 때에는 빈 컵에 물 채운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게다가, 내 잔도 함께 들고! 나는 절대 절대로 저 여자가 뭔가 이 사람한테 실수했거나, 잘못 했구나! 라고 생각했다고.

     아니, 사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떤 남자가 여자의 댓쉬에 그토록 냉랭하게 굴어? 막말로 열 여자 마다하는 남자 없고 하반신 동물이라 일컬어지는 수컷이?!

     "말하는 거 다 무시했잖아요?"

     "언제?"

     "좀 전에."

     "...그런 적 없는데."

     없기는! 사기칠 걸 쳐야지, 이렇게 증인이 눈 똑바로 뜨고 본 걸 말하는데 없어? 없다고?

     "설마, 몰라요?"

     "뭘?"

     "방금 그 여자 그쪽한테 과감하게 댓쉬했다가 차여서 열받아 간 거잖아요."

     "나...한테?"

     "그쪽한테."

     "다른 생각 하느라..."

     강적이군!

     "그쪽 덕분에 난 완전히 꿔다 논 보릿자루였는데... 둔하네요."

     "음?"

     못 알아들었으면 말아라, 말아. 여튼 재미있네. 이 사람. 참 빠릿빠릿하게 생겨서는 말이지.

     "그런데..."

     ".......?"

     "저 여자가 목적이 아니었음 남아도는 저 넓은 자리들 두고 왜 하필 여기 앉은 거에요?"

     그래! 나 확실히 착각했단 말이다. 넓은 자리 다 두고 이리로 접근하길래, 내가 찍은 떡에 같이 침 발랐구나! 하고... 물론 그러고나서 바로 하는 행동이나 말투보고 그게 아니군~! 했지만... 그런데 여튼 그 여자를 찍었다하는 가능성을 빼고 나니까 대체 왜 하필 내 옆, 더 정확히는 아까 그 여자 앞에... 앉았는가! 가 궁금해지는 거다.

     "아...음."

     또릿또릿하게 눈 뜨고 대답 나오길 기다렸떠니 묵묵히 남은 밥을 깨끗이 비우더니, 마지막으로 물 한 모금을 삼킨다. 그러고보니 아까도 잠깐 언급했지만, 이 사람 밥 먹는 태도 예절이 아주 끝내줬다. 웬만한 여자들은 밥 먹는 모습 하나에도 혹 할 정도로.

     "밥도 무지 깔끔하게 먹던데요?"

     아까 그 여자가 그렇게 울그락불그락해진 얼굴로 간 게 다시금 떠올라 조금쯤 업된 기분으로 투욱하니 별 영양가 없는 말을 던지자, 컵을 내려놓으며 날 빠안히 쳐다보더니 내 식판 또한 한번 들여다본다.

     "그쪽도... 깔끔하게 먹네요."

     음? 으으음? 아! 밥... 아니 나야, 밥을 안 남기고 먹는 거고. 내가 말한 건 태돈데...

     "젓가락질 말이에요. 수저 쓰는 것도 그렇고. 어른들이 좋아하시죠?"

     정말로 드물단말이다, 요새는. 잘 지켜봐라 주위 사람들. 제대로 젓가락질하는 사람 없는 거에서부터 의외로 깨작깨작거리고 먹는 타입, 질질 흘리는 타입. 가지각색이라고. 나야 젓가락질만 족므 그렇고 나름대로 단정하게 식사하지만 말이지.

     "별로."

     "집이 식사 예절이 엄해요?"

     "그런 건 아니지만, 가게를 하니까 아무래도 그런 걸까..."

     마지막에는 자기도 내 질문에 빠진 듯 고개를 갸웃하더니 휙 나를 쳐다보는게... 뭐야, 뭘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봐? 괜히 머쓱해지게 만드는 시선이라 고개를 슬그머니 돌리자, 식판을 들고 일어선다. 그리고 가만히 날 기다리는게... 아아? 같이 가자는 건가? 에... 또 이렇게 몇 마디 대화하고나서 모른척 휙 가버리는 것도 좀 그럴지 몰라도.. 말이지. 나 며칠 전에 결심했단 말이다. 절대로 이 사람과는 얽히지 않겠다고.

     "다 먹었으면 일어나죠."

     "아? 넷."

     '역시 기다린 거군;'라고 생각하며 딱히 거절하고 따로 갈 이유도 찾을 수 없어 식판을 들고 주춤주춤 일어서자, 가만히 나 하는 양을 지켜보더니 식판 반납하는 곳까지 보폭을 맞춰서 걷는다.

     이쯤되면 '그럼 이만~'하고 갈 때도 되었건만.. '뭔가 볼일이 있는 건가?' 라는 생각이 소록소록 드는게... 하지만 털어봤자 나한테 볼일이 있을리 만무. 괜히 비척비척 따라 걷다가 눈치 한번 보고 다시 따라 걷다가 눈치 한번 보고... 그렇게 슬금슬금 걸음을 옮기는데... 낄낄거리면서 대학생씩이나 쳐먹은 놈이 식당에서 예의도 없이 달린다 싶더니, 타악!! 그대로 장렬하게 날 들이받는 게 아닌가!!! 그대로 몸은 균형을 잡아 좀 휘청하다 말았지만 손 안에 들려있는 식판이 그대로 기우뚱하며 벌인 행각이란.... 정말이지...

     "헉!"

     "앗!"

     "......."

     "이런!!!"

     "죄...죄송합니다!!!"

     어어어엇? 이 이!! 망할 자식아!! 죄송하다고 하고나서 튀면 어떻게 해!! 으아!! 뭐... 뭐냐고!! 이게!!

     처참하게... 깡깡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구르다 멈춘 식판은 그렇다고 치자, 그  바람에 내 청바지에 살짝 음식물이 묻은 건 그렇다고 치자고!! 하지마안... 흰색 티에 선명한 자국을 나타낸 뻘건 김치물이란... 그것도 내 티가 아닌!! 21대 미스 보명! 이연우 티에!

     순간, 모 씨에프에서 아들이 케찹을 티셔츠에 쏟자 애 엄마가 아이를 혼내는 대신 '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며 이순신 장군 흉내를 낸거랑, 채시라가 나오는 씨에프에서, 잔 들고 가던 웨이터가 흰 티에 음료를 쏟자, 그걸 무늬삼아 당당하게 걸어가는 모습 등등이 떠올랐지만... 씨이뎅... 중요한 건 그건 어디까지나!!! 씨에프라는 거지! 광고!

     "묻었네..."

     아니, 아니 지금 그렇게 멍하게 중얼거릴 떄야? 으아 으아, 나 정말!

     "죄...죄송해요."

     "...그쪽이 죄송할 건 없잖아요?"

     물론 뭐 길게 따져보면 그렇지만, 그래도 여튼 그 흰 티 위에 선명하게 자국을 남긴 건 내 식판에서 비롯된 건데...

     "정말...이거..."

     "그보다 묻었네."

     "네넷?"

     "바지에...음.."

     내 꺼야 청바지고 워낙 살짝 묻었으니 티도 안 나는데, 그걸 잘도 알아채는 당신이 신기한 겁니다!!

     "그 티 어떻게 해요..."

     "버려야죠. 김치 물은 빠지지도 않는데..."

     윽. 그래도 선명하니 polo 마크가 박힌 티구만... 끄응. 몇 천원짜리 시장품도 아니고.

     "우선, 제가 옷 값은..."

     아우, 거지인 내가 이제 별 걸...다...그래도 어쪄!

     "됐습니다. 그쪽 잘못도 아닌데."

     그래도. 어떻게 모른척 해. 결국 내 책임도 좀 있는 건데!"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그냥 넘기기에는 마음에 걸려서, 다시금 말꼬리를 늘이는데,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 입을 다물고 있던 이연우가 불쑥 말을 건낸다.

     "그럼, 옷 같이 골라 줄래요? 아무래도 이 꼴로 다니기는 좀 그렇고..."

     "에...?"

     멍청하니 반문하는 내게 피식 웃는 얼굴.

     "농담입니다. 됐어요."

     아니, 그러니까 지금 나한테 옷 사러 같이 가자는 소리? 게다가 그럴 줄 알았다는-옷 고르러 같이 가자고 하면 안 갈줄 알았다-듯한 표정을 지으면 말이지, 어떻게 사람 눈 앞에서 거절해서 실없는 인간이 될 수 있었어! 이 사람 의외로 고단수 아냐? 이거?? 젠장, 오늘 수업 짼다, 째!

     휘릭. 몇 분 걸리지도 않았다. 가게 안에 들어서자마자, 옅은 초록빛의 셔츠를 사고, 계산하고 갈아입는데까지. 골라주긴 뭘 골라 줘! 여기까지 대체 날 왜 데리고 온 건지도 의심스러운 찰나구만.

     "어울려요?"

     뭐... 옷 감상을 원한 거면 못 해줄 것도 없지만서도.

     "네."

     어울리기는 잘 어울린다. 여자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몸매. 그러니까, 가슴 빵빵 허리 잘록하니 자기들이 원하는 몸매 말고 자기 애인이 가졌으면 하는 이상적인 몸매라 이거다. 적당히 붙은 근육에, 반듯한 자세. 스마트하고 단정한 분위기까지. 더해서 얼굴로 치자면 'cool'이라는 느낌에 따악 보면 '멋진 남자' 타입이랄까? 게다가 지금 새로 사서 입은 옅은 녹색 계열 티셔츠에 물이 잘 빠진 구제진만으로도 뭔가 패션쇼장에 서 있는 모델 같은 맛이... 은은하면서도 묘하게 눈을 잡아끄는 화려함이 있다. 내 가슴에 비수꽂는 격이지만 아까 식당에서 그 여자가 휙 목표를 바꾸었던게 억울할 정도로 이해가 될 정도로...

     "별로인가?"

     "잘 어울린다니까요."

     "표정이 아닌데?"

     그럼 무슨 표정을 지어야하리? 벙긋벙긋 웃으면서 '진짜~ 잘 어울린다, 멋있어요! 캡이에요!'를 해야해?

     "푸... 그냥 해본 말이에요."

     그냥 해본 말은. 아까 그 여자가 말 걸때는 죽어라고 입을 꾸욱~ 다물고 있더니만. 속으로 작게 중얼거리며 먼저 가게를 나오자, 착 옆에 다가와 서는게... 이제는 학교로 가도 되지 않으려나?

     "고마워서 그러는데 차 한 잔 사도 될까요?"

     ....갈수록 점점. 이해가 안 가네?

     뭐가 고마운 건데? 김치물 쏟은 것도 나건만... 뭐 비록 의도한 바는 아니었고, 어쩔 수 없는 상황때문이었다고 치더라도.

     "아뇨, 어차피 제 실수였는데..."

     게다가 사실 차를 사도 사야하는 건 나다. 며칠 전에 벌였떤 실수하며... 음~ 그러고보니 나 너무 경우 없었떤 건가? 여태껏 가만보니 폐만 끼쳤던 거잖아... 이 사람한테. 아 찝찝하네. 앞으로 서로 모른 척하고 지낸다고 하더라도... 이런 상태라면 어쩌다 얼굴 마주치게되면 괜히 빚 하나 지고 안 갚은거 같고 말야...

     "그러지말고!"

     "네?"

     "차는 제가 살게요."

     나름대로 비장하게 말하자, '으음?'하는 표정이 금세 씨익 웃음을 보인다. 휘유~ 웃는 걸 보아하니 여자 여럿 울렸겠다. 아주...

     "그래요, 그럼."

     시원스레 대답하고 마치, 계획이라도 잡았다는 듯이 앞서 전진해서 걷는게... 에이 아무렴 어때. 나야 빚만 털어내면 그만인걸!

     "아이스 카페라떼. 그쪽은?"

     벌써 정했나? 잽싸기도 하지. 으으. 나는 나느은... 음 뭘 먹지? 뭔가 새로운 게 먹고 싶은데 말이지... 으음. 으음? 레몬 밤이라? 뭔가 이거 달달한 느낌 아냐? 레몬처럼 새콤하면서도 밤처럼 고소한 맛이 도는...

     "전 레몬밤이요."

     "네. 카페라떼 한잔하고 레몬밤 맞으시죠?"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생긋 웃으면서 살짝 자리를 뜨는 알바생을 보다가 스윽 시선을 돌리니, 조금 웃는 듯 마는 듯 분간하기 어려운 푲어으로 앉아있는 21대 미스 보명이 보인다.

     "그러고보니 우리 아직 통성명도 안했네요."

     전에 본 미스 보명 족보를 통해 알고있지만, 그래도 괜히 궁금해서 찾아봤다는 소리하기가 뭣해서 슬쩍 말을 흘리자, 좀 더 웃는 거 같기도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권지인. 07학번. 국문과 아닌가요?"

     엥? 뭐야? 어떻게 알고있어? 이쪽도 설마 뒷조사파?!

     "어...떻게..."

     "그날.. 왜 책 다 흘리고 갔떤 날에 주워가면서 봤습니다."

     읏! 그 쪽팔린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끄응.

     "그...러셨구나."

     "04학번 이연우라고 합니다."

     "네에..."

     알고있었지... 이...연우... 으으으음! 그런데 04학번이면 나보다!! 3살이나 연상이잖아? 게다가 이 사람 내 학번도 알고있었으면서 여지껏 깍듯이 존댓말쓴거야? 히에...

     "저 선배시네요."

     "뭐."

     "말...놓으세요..."

     그렇잖아. 지금부터 차를 앉아 먹어도 30분정도는 될텐데 계속 나보다 빤히 3살 많은 거 알면서 존댓말 쓰게 하는거... 나중에 싸가지없는 후배라고 소문나고 싶지는 않다고.

     "그래도...괜찮나...?"

     뭐 안 괜찮으면 어쩌겠어. 당신은 선.배.님.이요, 나는 후.배.놈. 인데... 그래도 '짜식', '임마'는 귀엽게 봐줄테니 '씨발'에다 '존만아'까지는 참아달라고. 정말로 분별없는 인간들이 넘쳐나서 말이지. 이번 오티때도 말야, 어떤 씹어먹고 믹서기에 갈아넣을 새끼가 툭하면 '야~ 너. 쨔샤'에서 모자라 '어쭈 불만이냐? 조또. 새꺄, 불만이면 말해.'까지 가서 정말 하마터면 '썅 학번떼고 붙을래?' 소리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게 했었다. 게다가 나중에 알게된 후담이지만 그, 망할 놈의 새끼 생일이 빨라서 우리랑 같은 나이더만? 2월 말일 생. 진짜 미치는 줄 알았다지?

     "괜찮죠."

     "그럼 말 놓는다."

     하. 깔끔하게 어색해 하는 것도 없이 바로....그냥.

     "그쪽도 말 놔, 그럼."

     "초면에 어떻게 그래요."

     한번은 튕긴다. 예의 아니겠냐, 예의.

     "싫음 말고."

     .....넌 삼세번도 모르냐? 우리나라 어린 아 새끼들이 왜 집에 손님 왔을때 용돈주면 냉큼 안받는지도 몰라? 참 나도 어릴 때 아주 많이 했었지. 아주 용돈 받으려면 당연한  절찬줄 알았다. 결국 받을거...

     '옛다, 용돈 써라.'라고 하면 우선 엄마가 냉큼 '아유~ 아니에요! 어린애한테...'라고 나서고 뒤에서 내가 도리질을 치지. 그럼 다시 한 번 손님이 '어허~ 그러지말아요. 내가 주는 건 괜찮다니까. 어서 받아?' 라고 하고 엄마는 다시 '글쎄~ 그러지 말라니까.'.....완전 핑퐁 게임이다. 나중엔 결국 엄마는 못이기는 척, 아저씨는 흡족한 척 내 손에 만원짜리를 꽂아주고 나는 머리 수그려 '감사합니다'라고 말한 뒤, 지리한 공방전이 끝난 거에 감사하곤 했다; 여하간! 이렇게 우리나라는 나름의 거절(?)의 미덕을 갖추고 있건만 어째 한번만에 무 자르듯 쏠랑 '싫음말고!'라고 하냐! 튕기는 것도 구별 못해?....

     "푸흐... 말 놔. 그냥 해본 말이니까..."

     뭐냐? 이 다 알고있다 식의 표정은? 설마 나 놀린거야? 하~ 나 이거... 성격 아주 좋시다?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말 놓죠, 뭐."

     이번에도 안 한다고 거절할까 했지만, 그랬다가 정말 나 혼자 깍듯이 존대 써야할 상황이 벌어질까 냉큼 대답하고 말을 툭 놓자 씨익 웃는다.

     적어도 3살차 짬밥이 있으니 친구나 진희 형에게 하듯 '뭐뭐 했어?'의 반토막 말은 못해도 적어도 깍듯반듯 경어 쓸 일은 없을 거 아냐.

     "그런데... 그쪽...이라고 해야하나... 선배님??"

     "형."

     OK. 접수했음. 형이라... 에헤 낯간지럽네, 거.

     "형은 무슨 과에요?"

     "....흐음, 무슨 과일 것 같은데?"

     글쎄에, 깔끔한 분위기로 봐서는 체대(?)는 아닐테고. 의대생이면 솔직히 이리 널널하려고? 그리고 예대라고 하기에도 좀 아닌게... 법대쪽 삘이 좀 나긴 한다만?

     "제가 점쟁이에요?"

     "국문과야."

     "푸흡? 국문?!!"

     국문? 국문과아~~? 그럼 나랑 같은?

     "진짜요?!"

     설마, 그럼 나 여지껏! 같은 과 선배한테 그 실수를 해댄거야? 이런 개망신이! 젠장! 하지만, 이 정도 얼굴을 오티때 못 봤다는 건 좀 말이 안되는데? 국문과라는 말 나 놀리려고 하는 거 아닐까? 응? 그런 가능성도 있잖아?!

     "응."

     "오티 떄 못 봤는데?"

     "안갔으니까."

     아니, 물론 안왔으니 못 봤겠지... 뭐 그렇지만. 진짜 국국?

     "안 어울려!"

     저도 모르게 진심이 튀어나가 버렸다. 아니 딱히 어느 과에 어울리고 아니고 하는 얼굴은 없지만 말이지... 까놓고 나도 그닥 국문에 어울린다는 말은 별로 들어보지 못했지만!!!

     "마찬가진데."

     ".......그렇겠죠;"

     괜히 한방 먹고 목소리가 수그러들었다. 제길 정말 피해야 할 대상 아니냐, 이거. 같은 과에 미스 보명 출신이 둘이라니. 어후, 미쳐 내가.

     "그러고보니 인연이네."

     "에...?"

     "같은 고교 선후배로 보자라서...미스 보..."

     "스톱!!! 형은 그거 쪽팔리지도 않습니까?"

     절대로 나는 같은 미스 보명 선후배따위 반갑지 않다고! 혼자 다녀도 망신인걸 둘이 함께! 라면 얼마나 더 웃기겠어! 생각을 해봐. 생각을.

     "그러고보니 그거 굉장히 말하는거 싫어하는 거 같던데..."

     암, 싫지! 싫고말고. 제대로 정신박힌 놈이라면 누구나 다 싫어한다고! 사내새끼가 여장하고서 당당하게 퀸 먹었는데, 누가 좋아해?

     "별로 원해서 나간 거 아니었으니까."

     "그럼 왜?"

     "가위바위보 졌거든요, 그때."

     정말 운명의 주먹이요 가위요, 보였다! 쓰으, 그 세개 중 선택만 잘 했어도 낄낄거리며 추억할 수 있는 꺼리가 느는 거였는데...

     "형은.. 왜요?"

     "응? 재미있을 거 같아서."

     .....뭣?

     "상금을 모린게 아니라?"

     "별로."

     "그냥 자발적으로?!"

     "뭐 반 녀석들이 좀 나가보라고 한 것도 있었지만, 결국은 내 의지가 중요한 거였겠지."

     미쳤구나!!! 안나가도 되는 걸 의지로 나갔다 이거 아냐! 지금.

     "왜요?!"

     "그냥 좋은 추억이잖아."

     ".....특이...하네요."

     "흐음."

     뭐가 흐음이냐, 뭐가! 진짜 특이한거지! 이건. 이야, 참 거기 나가는 놈들 중에 돈 아니면 좋아서 나가는 사람 누가있겠냐 싶었지만, 이렇게 눈 앞에 두고 만나니 느낌이 묘하네 그래~

     "차 나왔습니다. 카페라떼가 어느 분이시죠?"

     "이쪽."

     "맛있게 드세요."

     생긋 웃으며 셋팅을 끝낸 알바생이 사라지고 나자, 내 앞에 남은 건, 레몬티와 비슷하게 색을 낼 줄 알았건만... 그게 전혀 아닌, 어떤 것.

     "이게... 레몬 밤?"

     슬쩍 인상을 찌푸리고 우선 따로 내어져 온 컵에 조르르륵 한 잔을 따라 냄새를 맡아봤지만... 레몬 향이 나는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같고...

     흐음, 맛은... 어디어디....으읍??!!!

     "이게 무슨 레몬 밤이야! 으와."

     황당함에 인상을 찌푸리고 '웩!'하는 얼굴을 하자 카페라떼를 마시고 있던 미스 보명... 아니아니, 그래 이연우라고 하자. 이연우가, 무슨 일이냐는 듯 날 쳐다본다.

     "마셔봐요."

     투욱 내가 마시던 잔을 앞으로 들이밀자, '흐음~'하는 표정으로 한 모금 삼켜본다. 거봐거봐~ 당신도 이상하지? 그치? 여엉 아니다~ 싶지?

     "레몬밤 맞는데..."

     뭐야! 뭐가 레몬밤이 맞아?

     "레몬 맛 안 나는데!"

     그래 이름 앞에 당당하게 '레몬'이라는 명칭이 붙었으면 적어도 상큼발랄(?)새콤한 맛은 나줘야 하는 거 아냐? 풀떼기 우려낸 물맛이라니!!

     "원래...이래. 허브 티잖아."

     "허...허브?? 그 풀??"

     "모르고...시킨 것? 설마 이름에 혹해서 레몬 맛이려니...해서 시킨 건 아니겠지?"

     정곡이다! 제기. 그래 나 이름에 혹했다! 으으, 하지만 이렇게 크게 이름과 맛 차이를 내다니!

     "lemon balm. 밤도 우리가 먹는 그 밤과는 아무 상관 없어."

     .....들켰니?? 그래 나 '밤'이라는 말에도 혹했다! 제기. 맛없어라. 

     "멜리사(Melissa)라고도 불리지. 레몬과 유사한 향이 나고..."

     어디가? 전혀 모르겠구만!

     "그 향이 감정을 진정시켜주고, 심장박동이랑 혈압을 낮춰준다는데."

     나 지금 혈압올라 방방 뛰는 거 안 보여서 하는 말?

     "요리에도 쓰이고 기분을 상쾌하게 할 떄도 마신다던데."

     상쾌는 무슨! 우! 많이도 줬네.

     "바꿔... 마실래?"

     불쑥 물어온다 싶어서 가만히 이연우가 시킨 잔을 들여다보다 고개를 저었따.

     "아뇨."

     "왜? 맛없다며."

     "커피 못 마셔요."

     "....뭐?"

     "향만 좋아하고 커피 잘 안 마셔요."

     어째서인지 커피를 마시고나면 심장이 두근두근거리고 밤에 마시면 작살이지, 그대로 눈 말똥말똥.

     "그렇구나. 그럼 다른 거 하나 더 시킬까?"

     ...됐시다. 돈도 없구만. 시키긴 뭘 더 시켜. 억지로라도 마시면 되지. 죽는 것도 아닌데...

     "아뇨, 괜찮아요. 그냥 마시죠, 뭐."

     거절을 하고서 후르륵 다시 한번 삼켜보니, 뭐 못 마실 맛은 아니다. 그래도, 자극적이지도 않은게... 흐음 그런데 그나저나 눈앞의 이 남자 이연우. 분위기가 있다. 생긴거로 보는 외모말고, 사람 혹하게 하는 분위기.

     조용히 앉아서 차를 마시는 걸 보니... 정말 여자 여럿 잡았을 타입. 점잖고 고상한 맛이 풍기는게...

     "인기 많죠?"

     "응?"

     뜬금없이 무슨 소리 하냐는 듯 쳐다보는 얼굴.

     "여자들한테 인기 많죠?"

     "아니."

     ".....아니이?"

     이야, 무슨 구라를 그렇게... 혹시 튕기는 거라면 내 앞에서 그럴 필요가 있나. 같은 남자끼리.

     "모르겠는데."

     에라라? 쌈박한 대답이네? 이거? 진짜로 없는거야? 모르는 거야?

     우리 옆쪽 테이블에서도 흘낏흘낏 시선이 넘어오는 게 느껴지는구만. 인기가 없다니-게다가 모른다니 말이 돼?-정말 인기없는 인간이 들으면 펄쩍펄쩍 뛸만한 이야기를 술술 하네?

     "거짓말."

     "거짓말 아닌데."

     "흐음...?"

     "거짓말해서 뭐하게?"

     "그 정도 생겨서 좋다는 여자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에요."

     성격에 커다란 장애가 없지 않는 한. 아니 하긴, 이쯤되는 외모 레벨이면 성격에 한두 개 장애가 있어도 '그게 매력'이라거나 '외모 값'으로 치부하고 들러붙는 여자는 꼭 있기 마련인데...말야?

     "그 정도??'

     "으으으음. 나 떠보는 거에요?"

     "뭘?"

     내 입으로 그러니까 그쪽 열라리 끝발날리게 잘 생겼수다. 이 소리가 듣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라 이거지?

     "잘생겼잖아요."

     "너?"

     ...아니...뭐... 그렇게 납득하겠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 끄덕이면서 나를 가리킬 건... 아니 그야 나도 빠지는 외모는 아니지, 에헴. 하지만...뭔가 다르잖아 그쪽하고 나는. 아, 스스로 이런 말 하려니까 또 무지하게 쪾팔리네. 그러니까, 내가 좀 풋ㅍ수한 맛이 돈다면 저쪽은 어디로보나 원숙미라고 할까나? 여튼 그런게 있다.

     "...단박에 그 '잘생긴'에서 절 지목해준 게 고맙긴 한데요...나 말고 형."

     "형...이라..."

     묘하게 기분 좋은 듯한 얼굴을 합니다? 그래?

     "역시 선배보다는 이쪽이 좋구나."

     "뭐가요?"

     "형,이라는 호칭."

     "...으으음?"

     "위로 나는 형만 셋이라."

     "세엣!"

     "아..응."

     셋? 셋이라고? 이야 요즘같은 핵가족 시대에 위로, 형만 셋? 장난이 아니잖아. 아니 그야 우리집도 삼남매로 요즘 보기 드물어! 하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삼남매는 어디가서도 '으음, 그렇구나.'하고 만다지만 아들만 줄줄이 '넷!'이라는 건...

     아니아니, 그보다 우선 잠깐!! 위로 형.만. 셋! 이라는 건...말이지!

     "형! 막내에요?"

     거짓말! 사기! 라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눈을 크게 뜨는 거에서 감정을 추스리고 따지듯 묻지 너무 편안하게 고개를 끄덕이는게.. 아니, 아니!! 보통 막내라는 건, 어딘지 모르게 그래도 좀 귀엽거나, 그 막내 특유의 삘이 나지않아? 덩치가 크던 작던! 하지만 이쪽은 전혀 그런 거 없던데?

     "아...응. 막낸데."

     "안 어울려!"

     "다른 사람은 막내 같다던데."

     다른 사람 누구? 누구-우! 누가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해? 눈을 뒷통수에 달고 다닌대? 당신보고 막내 같다고 하게?

     "누가요?"

     못 믿어. 절대 이런건 확인해야 한다고!

     "외숙모나... 작은아버지나..."

     가족 말고옷!

     "관둬요...관둬."

     이제보니 이 사람 은근히 눈치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태평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핀트에 어긋난 말만 하다니...

     "이상한가?"

     "뭐가요."

     "말이."

     "무슨 말이."

     "내 말이."

     스무고개 해? 똑바로 말해야지. 왜 죄다 단답형이야.

     "저기요, 형. 초면에 이런 말은 실례란 걸 알겠는데요. 말을 좀 더 정확히 해주세요."

     그래, 이건 말야, 정말 대화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할 수 있는 거라구요. 이연우씨. 혹시! 여자들도 다 이런 점에 질려서 나가떨어지는 거 아냐? 아까 그 식당 걸만 해도 말이지. 말하다가 KO패로 씨근거리다가 간 거 아냐.

     "그런 말 가끔 들어."

     "어떤 말?"

     "모르겠다는 소리."

     "...으으음?"

     "안 어울린다는 소리도."

     안 어울린다는 소리는 뭔지 아직 못 들어봤으니 그렇다고치고 모르겠다는 소리는 확실하네. 이 사람 어딘지 일반 코드가 남들과는 다른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그게 나쁜 건 아니지만... 여하튼 참을성이 부족한 사람이면 대화 절대 길게 못할 거 같은데?

     "그래요?"

     "응."

     그래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니까, 처음에 완전히 무뚝뚝했던 인상과는 조금 달라보이는 거 같기도 하고.

     "형 친구 많아요?"

     "기준은...?"

     "...기준... 에...기준이라."

     하긴, 친구가 많다적다는 기준이라는게 별로 없잖아. 자기 생각하기 나름이니까. 이쪽 저쪽 온 동네방네 이름 안나고 모르는 사람없는 인간도 자기가 '친구없다' 생각하면 그런거고... 남들이 다 왕따시키고 있음에도 자기 혼자 즐거워서 '친구많다'생각하면 또 그건 나름대로 친구가 많은 거고 말이지.

     "마음 터놓고 진솔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이라고 해두죠.

     "...그런 경우엔 다른 사람도 적지않아? 기본적으로 마음을 터놓고, 라는 부분에서."

     그...런가? 하기사 인생에서 자기 목숨보다 귀한 친구를 셋만 사귀면 인생이 성공한 거라고는 하더만. 까놓고 자기 목숨보다 남 목숨 귀하기가 쉽냔 말이지.

     "그런데 이 질문은 갑자기 왜?"

     "에...? 아뇨. 뭐..."

     "지인...이는.."

     웁?! 지인이...? 으아, 지금 분명히 저 얼굴로 지인이라고 했지? 의외로 이거 닭살일세? 보통 친구들 사이에서 불리울때는 '권지인'이 보통이고 '야', '쨔사'가 통상적이니까.. 뭔가 그래, 이름으로 이렇게 부드럽게 '지인아'하고 불려본 적은 거의 없구나!

     "형제가 어떻게 되?"

     "누나 하나에 남동생 하나요."

     "둘째?"

     "네. 치이고 사는 둘째."

     "그래."

     웃는다, 웃어. 뭐가 재미있지? 내 말에 무슨 웃음 바이러스라도?...으으으음. 그런데 말이지. 차암, 지금 이 시점이 의문스럽단 말야. 나야, 빚 하나 덜어내는 셈 치고, 차 한 잔 사주는 거지만, 이 이연우라는 사람은 도통 무슨 생각인 걸까? 아까 식당에서도 그렇고 말이지...

     "그런데요,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요?"

     "응?"

     "...보통 피하지 않아요?"

     "뭘?"

     그러니까, 뭐라 말해야하나. 서로 불편한 사이? 에... 좋은 감정으로 친해졌다기 보다는 실수로 얼굴 익히게 되고.. 뭐 그런 사이는 어쩌다가 마주쳐도 서로 민망해서 얼굴 돌리잖아. 그런데 먼저 아는 척 해오고 말야.

     "에, 음. 불편한 사이는."

     "불편한...사이?"

     끄덕.끄덕.

     "누구랑 누가 불편한 사이?"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물어오는 얼굴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여기서 '그쪽과 저요.'했다가는 '그렇게 생각했어?'하고 나올테고, 아니, 뭐 이렇게 안 나오는거 자체가 이상한 거 아냐? 그럼 자기랑 나랑 나름대로 불편한 사이지. 아니란 말야? 으으, 이거 어렵네.

     "에...음..."

     쉽게 말을 못하고 괜히 버벅거리자,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러다가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는 듯 싶더니만, 불쑥 한다는 말이...

     "미안."

     여전히 이해 못할 말이라...

     "뭐가요?"

     나한테 이 사람이 뭐 실수한 게 있나 싶어 기억을 곰곰히 되짚어봤지만, 그런건 없다. 오히려 내가 실수한 것만 잔뜩이지.

     "글쎄."

     글쎄...라니 글쎄! 라니. 아니, 자기가 미안해놓고 '글쎄' 한 마디만 하면 다야? 정말이지 이런 말버릇을 가진 사람이라니... 우우 같이 살다가 답답함에 돌아가시겠다, 이거.

     "글쎄라뇨. 갑자기 사과해놓고는.."

     "잘 안맞는다는 소리를 들어서."

     "언제요?"

     진짜 스무고개다 이건! 말 하나하나에 질문하고 되물어야 하다니. 내가 언어공부를 잘못한 게 아니라면 이연우가 쓰는 말에 상당한 문제가 있다는 거다. 이 사람 말할 때 보면, 중요한 걸 먼저 말하고 부수적인 설명을 뒤늦게 한다. 그것도 상대가 되물었을때만! 진짜 그렇게 안 생겨서 멍하게 말이지.

     "전에. 자주 종종..."

     "누구한테?"

     나 이거야 원... 동물을 길들이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여러 사람한테."

     저기저기 그러니까, 나 잘 못알아 듣겠어. 그래그래! 내 뇌가 이상한 겡 ㅏ니라면 말이지!! 끄응, 뭐라는 거야. 그래서 '미안'과 '글쎄'가 의미하는 게 대체 뭔데. 게다가 누가 뭘 어떻게 말했다는 거야. 속이 타는 느낌에 적절히 식어가는 레몬 밤을 벌컥벌컥 마셨더니, 이연우도 뭔가 느끼는 게 있는지 한참을 말이 없다. 그러더니...

     "그러니까, 나는 친구들한테 종종 내가 하는 말을 이해 못하거나, 내가 하는 행동들이 핀트에 어긋낫다는 소리를 듣거든. 그런데 아까 네가 불편한 관계라고 했잖아. 그게 너랑 나를 말하는 거 맞겠지? 사실 난 그렇게 생각 안했는데, 너 혼자 그렇게 느끼고 있다면 분명히 내가 뭔가를 실수했다는 거잖아. 그래서 미안이라고 사과한거고. 그런데... 사실 내가 뭔가 실수했구나, 라는 자각은 있지만 무엇을 확실하게 실수했는지 알지 못해서. 글쎄, 라고 한거야. 그것 때문에 신경쓰였다면 미안하다."

     ...입이 떡 벌어졌다. 단답형에... 애매모호한 말만 하더니, 아주 장문으로 줄줄줄 입을 열어서 말하고는 다시 입을 다무는게... 이정도면 사람 놀리는 수준이다! 이건.

     "...하? 형 원래 그래요?"

     "응?"

     "원래 이렇게 말 몰아서 해요?"

     "생각이 많은 편인데... 그걸 다 말로 잘 못해."

     말로 못하긴!! 못하기인. 아니아니, 아니지~ 그럼 요 잠깐의 텀 동안, 입 꾹 다물고 있었던건 말하려는 내용을 정리했었기 때문이라는 거야? 진짜 특이하잖아! 이거.

     나 말이지. 어릴 때부터 말야, 특이한 거 좋아한다는 소리 꽤나 들었지만, 그래서 이것저것 해보고 싶었던 것도 많았지만... 그게 제대로 들어먹혔던 적은 없다고. -반쯤은 날 충동질했던 진희형 때문이기도 했고.-

     그래도... 흥미가 생긴다. 피해야해! 라고 울부짖고 있었는데 말야, 가만히 들여다보니 이 사람 흥미있어. 재미있다고. 나 소설 쓰는 거 좋아한단 말야. 나름대로 끄적끄적, 캐릭터 설정해두고.

     부끄러워서 말 못했지만, 다들 '어째서 네가 국문과?!'라고 경악하지만, 뭔가 캐릭터라는 걸 잡아서 그걸 관찰하듯 글 쓴다는 거 즐겁지 않아? 그런데... 지금 이 눈앞의 사람. 처음에는 무조건 피해야해! 라는 생각이 주어졌지만, 들여다보니, 이렇게 흥미가 발생하는 존재도 드물다. 암, 드물지.

     "나 형 마음에 들라고 해요."

     "응?"

     "좋은 선후배 사이가 됬음 좋겠어요."

     스트레이트다. 이리저리 돌려말하는 거 재미없고 이 사람 분명 돌려말하면, '에? 뭐가? 무엇이? 왜?' 라고 나올 거 같으니까.

     "아, 당연히."

     "계속 이상하게 형한테 폐만 끼쳐대서 별로 마음에 안 들지도 모르지만."

     "아냐."

     딱 잘라 부정해주니까 고맙네.

     "괜찮아요? 그럼?"

     "매우."

     매우,라... 호오...매우씩이야?

     "26대 미스 보명 콘테스트 나갔을 때부터 마음에 들었어."

     .....뭐야...그건 또오!

     "발차기하는 미스 보명은 드물잖아? 특이하다,라고 생각했지."

     어이... 이봐요~ 이연우씨...

     "그러는 형은 뭐 했는데요?"

     "응? 나?"

     "네."

     "송판 격파."

     .....젠장, 당신이 더 특이해!

     "와하하하, 그래서요?"

     정말 나 지금 물건 하나 건진 기분이다. 까끌까끌한 돌멩이인 줄 알고 슬금슬금 피했다가, 뭔가 좀 반짝반짝거리는 게 있는가 싶어 주웠더니 알고보니 다이아몬드더라! 하는 걸까나?

     "그래서 도망쳤지."

     진짜, 얼마만에 사람과의 대화에서 이렇게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는지 모르겠다. 차를 마시면서 잠깐 대화를 한다는 게 너무 웃겨서 한참을 듣다가 다시 묻고 하다보니 시간이 정말 잘 흘러간다. 처음에는 30분 예상하던 게 1시간, 그리고 지금은 두시간 반 째.

     뭐가 그렇게 재미있냐 하면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라는 점일까? 실험실 털어서 알코올 램프에 고기 구워먹는 거 까지야 그렇다고치지만, 걸리고 나서, 비계에 대한 실험 중이었다고 둘러대는 건... 푸흡.

     "잘 웃네."

     "웃기잖아요."

     "별로 재미없어들 하니까."

     "그럴리가."

     뭘 몰라서 하는 말이다, 그건. 이 사람, 이연우! 진짜 골때리게 어이없고 웃긴다. 생긴 거는 쿨에다 이지적으로 생겨서는.... 그 행동의 갭 차이가 저절로 웃음 터져나올 만큼인거다.

     "그래도 공부는 못하는 편이 아니었으니까."

     "으음, 형 그거 정말 천만다행으로 알아야해요."

     암암, 그렇게 사고치고 다니는데다가, 공부까지 못했으면 부모님한테 살아남지 못했을걸? 푸흡. 학교에서도 어느정도 공부했으니까, 그런 일이 있어도 적당히 눈 감아 준 걸테고.

     "아아, 하지만 나름대로 공부도 즐거우니까."

     에...또 그건 아니지만 말이죠. 여튼간.

     "그래서 성적은 어느 정도?"

     "응? 과 톱."

     "뭐요!"

     "이번에는 잘 모르겠지만, 저번에는 과 톱이었는데."

     "헉! 장난 아니잖아요!"

     "으음?"

     으음, 이라니! 그 정도면 뻐겨도 된다구요! '난 과 톱이다!'하고. 하긴 만약 그런 성격이면 이렇게 재미있는 캐릭터가 안나오지. 요 몇 시간동안 관찰한 결과, 이 사람은 요런 핀트에 어긋난 맹한 점이 재미있는 거라고!

     "혹시 형... 그럼 족보같은 거 있어요?"

     "족보...? 미스 보명?"

     제발, 그건 좀 잊으라니까앗! 그걸 그렇게 족족 떠올리고 싶수? 날 봐, 애저녁에 저 멀리 태평양 한가운데 바위 매달아서 던졌잖아. 행여 그 소리하는 사람 있으면 애초에 경계하고!

     "거 말고. 시험."

     "노트?"

     "네."

     "권당, 2천원."

     치사하다!!!

     "수입 많았겠네요. 그런 식으로 했으면."

     과 톱의 노트란 자고로 인기 아니겠어?

     "못 벌었어, 한 푼도."

     "한...푼도?"

     "응."

     "왜?"

     "빌려달라는 사람이 없던걸?"

     .....그래, 이해한다. 뭔가 너무 많이 이해가 가! 행여나 물어봤겠어? 저렇게 얼굴에 구별이 없으면. 혹시나 물었다가도 '2천원'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잘못 들었나? 해서 귀 한번 파보고, 혹은 '빌려주기 싫은가 보군'하고 다 떠났을 거라고. 그게 말로 퍼져서 소문으로 돌면 이렇게 되는거지.

     '우리 과 과 톱, 노트 빌려달라면 얼토당토 않는 소리로 거절한다며?'

     ...라고.

     "무슨 수업 듣는데?"

     "고전 문학의 이해랑... 왜! 그 김필순, 할머니 꺼. 죽을 뻔 했어요, 나!"

     "음, 하지만 그거 시험은 쉬워."

     "구라!"

     "진짜."

     "진짜?? 진짜야? 열라 깐깐해요. 리포트 낼 때도 그렇고. 특히 출석 칼이던데요?"

     "응, 그런데 시험은 쉬워. 정말 기초."

     에헤... 이거 정보 얻기 아주 좋잖아?

     "그럼 그거 박정운 교수 꺼."

     "이분은 자기 생각보다, 그걸 더 중요하게 봐. 얼마만큼 제대로 된 자료인지."

     그렇구나, 자료, 자료.

     "고마워요."

     "별로."

     역시 다이아몬드 맞아! 다이아몬드. 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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