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Arashi
Part 3. 애인이 생기다.
조금 뒤에야 다시 정신이 들었다. 나는 그대로 욕실로 달려가 거칠게 문을 밀어제꼈다.
쾅!
요란한 소리가 울린다. 그와 동시에 막 젖은 윗도리를 벗고 있던 다현이 뒤를 돌아보았다.
"헉…!"
녀석의 벗은 상체에 나도 모르게 주춤거리고 말았다.
뭐, 뭐냐, 정지후! 뭘 당황하고 그래…!
나는 순간 당황해버린 자신을 질책하며 당당하게 두 다리를 땅에 버티고 섰다. 그리고 아직도 놀란 표정 그대로 굳어서 돌아오지 않는 얼굴을 애써 화나 보이게 만들려고 애쓰며 녀석을 향해 물었다.
"너 뭐… 뭐야, 방금…?"
"……."
"방금 뭐냐구… 뭐한 거야…?!"
"……."
더듬더듬 물어본 내 질문에도 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물고는, 묘하게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로 날 바라봤을 뿐이다.
그러고 있던 녀석은 잠시 후 등을 돌리더니 팔에 걸쳐진 셔츠를 한쪽에 포개어 놓으며 입을 열었다.
"……소개팅해준 건… 잘 됐어?"
"엉?"
웬 소개팅??
나도 모르게 녀석의 등 근육이 실룩 거리는 걸 보고 있다가 깜짝 놀랐다.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되물어보자 녀석이 대답을 요구하는 듯한 표정으로 다시 나를 쳐다본다.
아, 맞다… 낮에 녀석이 소개팅을 해줬었지. 그, 그런데 여기서 소개팅 얘기가 왜 나오는 건데…?
"그, 그냥… 그럭저럭."
그래도 혹시 잘 안됐다고 하면 화를 낼까 싶어 대충 얼버무려 버렸다.
이 놈아. 너 때문에 소개팅이고 뭐고 제대로 하지도 못했다. 자기가 해준다고 하고선 심술이란 심술은 다 부려놓곤….
내 대답을 들은 녀석은 다시 나를 조용히 응시했다. 나는 왠지 모를 압박감에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안절부절 못해야 했다.
제길! 내가 지금 왜 눈치를 봐야 하는 거야!! 그러고 보니 이 녀석, 혹시 실수해놓고 민망하니까 내 약점잡고 늘어지는 거 아냐?
"…그럭저럭?"
아무래도 그런가 보다!!
이런, 비겁한 정다렁…!
"그보다 너…!"
"하늘이,"
응?
다시 따지려고 했던 나는 난데없이 열린 녀석의 입에 또 한번 멈칫거리고 말았다.
흑흑, 서러워…… 가 아니고, 하늘이?!
그 이름에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녀석을 보는데 녀석은 내 시선을 회피하며 중얼거렸다.
"포기하지 마."
뭐라고……?
내가 지금 잘못 들었나? 하핫.
"뭐…?"
"하늘이 포기하지 말라고."
순간 내 귀를 의심하며 다시 한번 물어보려 하는데 녀석이 이번엔 부정할 여지도 없이 또박또박 끊어 말했다. 나는 그래도 믿을 수가 없었다.
뭐라고? 다현아, 너 지금 무슨…….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거야. 하늘이 좋아해도 돼. 허락할게. 그러니까 아까 그 여자애랑은 억지로 사귀지 마."
"……."
나는 잠시 상황에 적응하지 못해 멍하니 서 있고 말았다.
이게 난데없이 뭔말이야?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하늘이는 절대 안 된다고 그렇게 난리난리 치더니. 이제와서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이 녀석 변덕 심한 건 진작에 알았지만 이번엔 좀 정도가 심했다.
나보고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추라는 거냐. 게다가 허락한다니, 나는 사랑도 너한테 허락받고 해야 하는 거야?
"생각해봤는데……"
황당한 표정으로 녀석을 보고 있었더니 녀석은 여전히 시선을 피한 채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또 그 놈의 생각. 그만 좀 해라. 넌 생각을 좀 줄일 필요가 있어, 정다렁.
"하늘이가 남자라는 이유로 내가 너무 무턱대고 반대하기만 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
그랬나? 그것보다는 하늘이가 꾼이라는 데서 더 반대한 것처럼 들렸는데, 나는…….
"…그런데 남자들끼리 하는 키스도 생각만큼 그렇게 불쾌하거나 기분 나쁘진 않은 거 같아."
"!!"
뭐라고?!! 그럼 아까 했던 키스가 전부 그것 때문이었단 말야?!!
이젠 기가 막힘을 넘어서 뒷골이 당겼다. 나는 완전히 흥분해서 제대로 된 말도 못 하고 어버버 거리다가 녀석에게 냅다 뛰어가 그대로 어깨를 후려쳐 버렸다. 맨살이 손에 닿아 찰싹 소리가 울린다. 생각해보면 지금에 와서야 가능한 정말 대담무쌍한 행동이었다…….
다현이 난데없는 내 폭력에 조금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이 자식이!! 그럼 진작 말을 하고 하던가!! 아니, 그리고 뭘 또 그렇게 진하게 하고 그래?! 사람 놀라게!"
"……."
흥분해서 씩씩 거리고 있는 나를 다현은 조용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한참만에 조심스럽게 묻는다.
"…기분 나빴어?"
헉. 답지않게 눈치보는 저 표정이라니. 귀, 귀엽잖아.
"그, 그럴리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넌데 내가 기분 나쁠 리가 있겠어?! 다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놀랐다, 이 말이지… 흠흠."
내 말에 다현이는 기뻐하는 표정을 감추려하는 모습이 역력했지만 조금도 감춰지지 않았다.
얼굴 일그러트려 봤자다, 다렁아. 입꼬리가 완전 올라갔잖아.
귀, 귀여운 놈….
"…그럼 갑작스럽지 않으면 돼?"
엥?
"갑작스럽지 않으면 되냐고."
"어, 어… 그래… 갑작스러지만 않으면야, 뭐……"
……가 아닌데.
뭘 갑작스럽지만 않으면 돼?!! 그럼 또 하겠다는 거야?!!
떨떠름하게 대답하다가 뒤늦게 경악에 차서 녀석을 보는데, 녀석은 어느새 만족한 표정을 짓고는 바지를 벗고 있었다.
허, 허억!!
"형도 샤워하려고?"
"아, 아니!! 난 됐다!! 그, 그럼 잘 씻어라!!"
나는 급히 둘러대고는 재빨리 욕실 안을 빠져나왔다.
탕.
새벽의 정적 속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린다. 나는 잠시 그대로 등을 기대고 선 채 달아오른 얼굴을 진정시키려 애써야 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그…… 키스…했을 때…
녀석의 입술 끝이 미묘하게 떨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착각이었나…….
─28/39
나는 멍하니 눈앞에 써 있는 숫자를 바라보았다.
뭐야, 이게…? 내가 잘못 본 건가?
나는 주먹으로 슥슥 눈을 문지른 후 다시 앞을 보았다. 그래도 눈앞에 써 있는 숫자는 변하지 않는다.
에? 그럴리가. 그럼 혹시 다른 사람 성적표가 나한테 온 건가?
나는 재빨리 맨 윗줄에 써져있는 이름을 확인했다. 2학년 10반 39번 정지후… 뭐야. 내 거 맞는데?
그래도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아, 그럼 혹시 기말고사 성적표가 아닌 건가? 이번엔 종이의 제목을 확인했다. 기말고사 성적표. 맞다. 그렇다면……
"!!!"
맙소사, 28등!!
이럴수가! 하느님! 이게 진정 내 등수가 맞단 말입니까?!!
나는 눈앞에 써져있는 숫자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성적표를 쥔 두 손이 부르르 떨려온다. 이거 혹시 잘못 나온 거 아냐? 학교 측에서 성적 처리 할 때 실수로 다른 애랑 내 등수를 헷깔렸다던지…….
"흑…"
울음 소리가 입술을 비집고 흘러 나왔다.
"흐흑…"
"왜 그래? 성적이 많이 안 좋아?"
성적표를 손에 꾹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문득 뒤에서 걱정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온 건지 다현이가 미간을 찌푸린 채 이쪽을 보고 서 있었다. 나는 그 얼굴을 보자 한층 더 울음이 북받쳐 올라왔다.
"다렁아아아……."
"얼마나 못 나왔길래 그래?"
"이거, 아무래도 내 눈이 이상한 거 같다. 니가 한번 봐볼래?"
"……줘 봐."
나는 흑…! 하고 반대편으로 얼굴을 돌리며 성적표를 쥔 팔을 녀석 쪽으로 내밀었다. 녀석이 조용히 내 성적표를 받아드는 게 느껴진다. 슬쩍 곁눈질로 녀석을 보자, 녀석은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얼굴로 가만히 내 성적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참 뒤 다현은 내 성적표를 곧게(…) 접어서 나에게 건넸다.
"…음, 뭐 어때. 다음에 잘하면 되지."
"뭐라고 써 있었어?!!"
"응? 아, 저기… 시험은 여러가지로 변수가 있을 수도 있는 거고…… 그날 그날 기분에 따라 차이가 많이 벌어지기도 하니까……"
"아니, 니가 보기엔 뭐라고 써 있었냐구?!! 내 등수 말야!!"
"…28등."
"진짜? 진짜 28등?! 니가 보기에도 확실히 28등?!!"
"…응. 아니, 하지만 형……"
"만세─!!!"
다현이의 '응'이란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그대로 양팔을 치켜올리며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 말을 건네려던 녀석이 움찔 놀라며 뒤로 물러나는게 보인다. 그러거나 말거나 흥분이 최고조에 이른 나는 그대로 양팔을 치켜 올린 채 교실 뒤쪽을 마구 뛰어다녔다.
"만세, 만세, 만세!! 30등 안에 들었다! 이럴수가! 도저히 믿을 수 없어!! 내 평생 그 안엔 못 들어보고 졸업할 줄 알았는데!! 내 뒤에 11명이나 있다니, 이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냐구!! 어머니!! 제가 드디어 해냈어요~!!!"
"……."
나는 감격에 차서 미친듯이 교실 안을 뛰어다녔다. 그래도 도저히 흥분이 진정되지 않는다. 어떡해! 28등이래! 28등! 앞에 숫자가 2야, 2…! 도저히 믿을 수 없어…!
나는 그대로 칠판이 있는 앞까지 전력질주했다. 그리고 다시 옆으로 뛰고, 1, 2분단 사이를 가로질러서 뒤로 뛰어왔다. 몇몇 교실에 남아있던 녀석들이 움찔움찔 놀라며 옆으로 피하는게 보인다. 하하! 고맙다, 자식들아! 너희들도 나의 흥분 상태를 가로막긴 싫은가 보구나! 내 그 마음을 고맙게 받아, 딱 3바퀴만 더 돌고 멈춰주마!
나는 기쁨에 가득차서 다시 3, 4분단 사이를 전력으로 뛰어가려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누군가가 갑자기 턱 하고 내 뒷덜미가 붙잡아왔다.
누구야! 감히 달려가는 28등의 뒷덜미를 잡아채는 녀석은!
"바보짓 좀 그만하고 집에 가자."
만약 28등 미만이면 죽을 줄 알아!
라고 분노를 담아 휙 돌아보자 내 뒷덜미를 붙잡은 녀석은 다름아닌 다현이었다. 아…하하. 다렁이 너였냐.
"어어, 참! 다렁아!! 고맙다!! 이게 다 니 덕분이야!!"
"……뭐가?"
"너랑 시험 전에 매일같이 도서관에 갔었잖아! 그게 꽤 도움이 컸던 것 같아. 정말 고맙다!! 넌 매우 훌륭한 지도자야!!"
"……."
여전히 감격을 금치못하고 흥분해서 외치자, 다현은 어색하게 서 있다가 휙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가방을 고쳐매며 교실 뒷문을 나간다. 어엇! 자식, 부끄러워 하기는. 나도 같이 가!
나는 헤헤 웃으며 녀석의 옆에 가서 섰다. 녀석이 다시 어색하게 얼굴을 돌린다. 흐흐, 귀여운 다렁이. 나는 싱글싱글 웃으며 힘차게 복도를 걸었다.
그때 다현이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 그러고 보니 너네 반… 현재 결석이 다섯명이지 않아?"
"응?"
"아… 아니다. 아무것도 아냐."
"……."
아니긴 뭐가 아무 것도 아니냐, 다렁아!!!!!!!
난 이미 다 들어버렸는데!!
흑…….
그럼 그렇지. 웬일로 이렇게 성적이 올랐나 했어. 그러고 보니 신정섭 패거리가 그 날 이후로 쭈욱 결석이었지. 쳇.
괜히 좋다 말았다. 최고조로 올랐던 기분이 급속도로 하강을 시작했다.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걸었다. 무심코 중얼거린 다현이 좀 미안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래도 등수는 안 변해."
"……."
미안하지만 별로 위로가 안 돼, 다현아.
"하아아…"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잠깐동안의 달콤한 꿈이었다. 만약 다섯명이 결석 중이란 걸 몰랐으면 지금도 계속 꾸고 있었을 텐데.
…아, 아니. 아니지. 그게 무슨 소리야, 정지후…! 그럼 사실을 알려준 다현이를 탓하겠다는 거냐? 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등수에 신경썼다고.
그보다는 다른 즐거운 일에나 신경쓰는게 더 현명한 처사였다. 그래, 이를테면 오늘부터 신나는 여름방학에 들어간 거라든지.
여름방학…….
그러고 보니 제일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맞아, 어떻게 그걸 잊고 있었지! 나는 스스로에게 경악하며 금방 기운을 되찾았다.
그러고 보니 내일부터는 학교에 안 가도 된다! 내일부터는 늦잠 잘 수 있어!
그러한 사실들을 떠오르자 저절로 입가가 헤벌쭉 해졌다. 나는 다시 싱글싱글 웃으며 걸었다.
순식간에 밝아진 내 모습에 다현이는 조금 어리둥절한 것 같았다. 그러다가 뭔가 떠오르는 게 있었는지 거봐 하는 표정이 되어서는 묻는다.
"어쨌든 등수는 올랐으니 좋지?"
음, 아무래도 조금 전에 했던 자신의 위로가 통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어, 어… 그래. 다섯명이 결석했든 말든 어쨌든 난 28등이지! 하핫."
녀석의 반짝 하는 표정에 대충 맞장구를 쳐줬다. 저렇게 철통같이 자신의 위로가 통했다고 믿고 있는 얼굴을 하고 있는데 거기다 대고 '아니, 사실은 그게 아니라…' 라는 말을 할 순 없지.
내 대답에 다현은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었지만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좋냐, 다렁아…. 그래, 이 형님도 기쁘다. 그렇게 급속한 감정의 변화를 느끼며 역까지 걸어왔을 때였다. 하늘색 셔츠의 교복을 입은 무리들이 역 주위에 모여있는게 보였다.
뭐야? 왜 저렇게 길을 막고 서 있어?
라고 생각하던 나는 곧, 그 교복이 하늘이네 학교 교복이라는 걸 깨달았다.
호, 혹시?!
나는 바로 그 중심에 있는 사람을 찾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바이크에 기대앉아 싱글거리며 웃고 있는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하늘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막 그 이름을 부르려고 하는데, 하늘이 먼저 이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여어, 집에 가냐?"
하늘이는 별달리 놀란 기색도 없이 여유롭게 웃으며 물었다.
아, 역시… 여전히 멋지구나. 그 동안 얼굴 보기가 힘들었는데.
나는 감격스러운 기분으로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전에는 다현이 일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다. 그 편의점 사건 이후, 처음으로 하늘이를 다시 만났었다는 걸. 그때는 워낙 정신이 없어서 깨닫지 못했는데 하늘이는 평소랑 똑같은 태도로 나를 대했었다.
혹시 눈치채지 못한 건가?
……아니,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때 날 바라보던 하늘이는 분명히 뭔가를 깨달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연애 경험이 많다면 그런 것도 다른 사람보다 몇배는 더 민감하게 알아채지 않을까?
……그럼 뭐야? 일부러 모르는 척 하는 거야?
나는 조금 심란한 기분으로 하늘이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띠우고 있던 하늘이 내 시선을 느꼈는지 '응?' 하는 얼굴로 마주봐온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표정…….
능청스러운 그 표정을 보자 갑자기 안에서 오기가 치밀었다.
"여기 모여서 뭐해? 다 같이 어디 놀러라도 가는 거냐?"
나는 투쟁심에 불타 물었다.
그렇게 시침 떼고 있는 것도 지금 뿐이야, 하늘아. 모른 척 하지 못하게 해줄 테니까.
이제 다현이도 허락했다. 더 이상 문제될 건 없었다. 내 질문에 답한 것은 하늘이 옆에 있던 녀석이었다.
"아, 우리 학교 오늘 방학했거든요. 지금 뒷풀이 가려는 중이에요."
"방학? 우리 학교도 오늘 방학했는데."
"네? 아, 그렇죠… 일천고도 오늘 방학했지요."
"응. 그러니까…"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다현이랑 나도 같이 가자. 우리도 뒷풀이 할란다. 괜찮지?"
"네…?"
일순 녀석들은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뭐야? 뒷풀이 같이 가자는 말이 그렇게 황당해할 일이야?
나는 넋이 나간 녀석들의 표정을 보며 내가 뭔가 말을 잘못했나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한 말은 뒷풀이 같이 가자는 말이 다였다. 그게 그렇게 이상한 말인가?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하면 되잖아.
점점 불쾌한 기분이 되고 있는데 문득 풋 하는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뭐야, 하늘아…. 왜 웃냐. 이 상황에서 웃을 일이 뭐가 있는데?
큭큭 거리며 웃던 하늘이 내 시선을 느꼈는지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아… 뭐 나는 아무래도 상관 없긴 하지만……"
상관 없긴 하지만? 무슨 대답이 그래? 상관이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아니면 상관이 없긴 한데 그거 말고 또 다른 문제가 있다는 건가?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하늘이의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하늘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애매모호해 보이는 얼굴로 웃으며 이쪽을 보고 있을 뿐이다.
아, 그러고 보니 혹시 다른 녀석들 얘긴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나는 휙 하늘이의 후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여태껏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던 녀석들이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황급히 대답한다.
"사, 상관 없어요. 저희도."
"아니, 저… 그런데 정말 다현 선배님도 같이 가는 거예요?"
응? …아아. 이 녀석들도 중학교 때부터 후배인 건가.
녀석들의 말에 나는 내 옆에 서 있는 다현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우리 다렁이의 의사를 안 물어봤었다.
혹시 이런데 어울리는 거 싫어하려나?
"같이 갈 거…지?"
그제야 나는 슬쩍 녀석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때까지 얼굴을 찡그리고 있던 다현이 내 질문에 조용히 한숨을 내쉬더니 말한다.
"술집 갈 거야, 이 녀석들."
"엉?"
웬 술집?!
"못 들어가잖아?!"
"하하,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뚫어논 호프집만 세개가 넘는데."
내 말에 하늘이의 후배 하나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듣고 더 미궁 속에 빠졌다. 뚫다니 뭘?! 설마 호프집 벽을 뚫어서 몰래 들어가는 거냐?!
……일 리는 없고.
"어, 어쨌든 술집이 뭐? 나 술 잘 마셔!"
"…웃기는 소리 그만하고. 집에 가자. 맛있는 거 해줄게."
마, 맛있는 거…?
일전에 다현이 해줬던 진수성찬을 떠올린 나는 그만 혹 해버리고 말았다.
크흑… 그러고 보니 엄마가 돌아오고 나서는 녀석의 요리를 먹어볼 기회가 좀처럼 없었는데. 어, 어떡하지? 그냥 집에 갈까?
아, 아니… 안 되지, 안돼. 뭐야, 정지후…! 이게 웬 약한 모습이냐? 조금 전 하늘이가 내 감정을 모른 척 하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그 굳은 의지는 대체 어디로 간 거야!
나는 약해지던 스스로를 질책하며 애써 다렁이가 만든 진수성찬의 유혹을 떨쳐냈다.
"가, 가기 싫으면 다현이 넌 먼저 가. 나, 난 좀 놀다 갈란다."
"……."
그 말에 다현이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히익. 뭐, 뭐야. 왜 갑자기 표정은 굳히고 그러냐, 다렁아.
"에, 에이이~ 너도 사실은 가고 싶었지?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해야 알지~! 이 솔직하지 못한 다렁아! 같이 가자, 다렁아~ 너 없으면 나 심심해서 어떡 하냐. 엉? 같이 가자~ 엉? 기분 풀어~"
"……."
"다렁님, 제발 같이 가주세요~ 네? 네? 네?"
"……알았으니까 그만 해."
한참을 어르고 달래자 녀석은 간신히 표정을 풀며 말했다. 표정을 풀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미간 사이엔 주름이 잡혀있었지만.
헉, 헉… 아, 다렁이 기분 맞춰주는 건 너무 힘들구나.
나는 괜히 나지도 않는 땀을 닦는 시늉을 하며 녀석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일동, 이번엔 완전히 혼이 나간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다. 응? 뭐야, 왜 다들 그런 괴상망측한 표정을…….
"푸하하핫!!! 얘들 좀 적당히 놀래켜, 지후야~~ 크큭."
그 가운데서 작렬이 웃음을 터트린 사람은 역시 하늘이었다.
그렇게 하늘이는 웃고, 그 후배들은 혼이 빠져 나가고. 다렁이는 아직도 약간은 삐진 상태. 나는 매우 복잡하고 심란한 기분.
아마도 우리 형제에게 있어선, 평생 잊지 못할 그 해의 여름 방학은……
그렇게 시작부터 제각각 흩어진 감정으로 첫막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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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구석 자리 보이죠? 칸막이 처진 곳. 저기가 우리 전용 자리예요. 단속 뜨면 옆에 있는 문으로 잽싸게 도망가면 돼요."
술집에 들어오고 하늘이의 후배 하나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나는 어쩐지 발을 들여놓아선 안 될 곳에 온 것 같은 기분에 잔뜩 움츠러들어 있다가 완전히 넋이 나가고 말았다.
술집에 들어오자마자 하늘이 카운터를 보고 밝게 웃으며 '오랜만이에요, 형.' 했던 것이다.
형이라니?!
나는 화들짝 놀라 하늘이의 시선을 따라가보았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놀란 얼굴을 하고 이쪽으로 다가온다.
"하늘이냐?! 진짜 오랜만이다, 이 녀석아. 그동안 왜 이렇게 안 보였어?"
"왜 안 보이긴요. 학생이 허구헌날 음주하게 생겼어요? 공부하느라 바빠요, 요새."
"니가? 푸하하하! 웃기려고 한 소리지?"
"아, 형까지 그러기예요? 왜 내가 공부한다고 그러면 아무도 안 믿어주는 거야~"
…과연. 뚫는다는 게 이런 의미였냐?
나는 거의 감탄에 차서 하늘이를 바라보았다. 하늘이는 한쪽 팔을 카운터에 걸치고는 가게 주인과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 사이에 대충 앉을 자리를 설명해준 후배가 먼저 가서 앉자고 팔을 끌었다.
"하늘이 형이 호프 가게 주인 형들하고 좀 친해요~"
"……."
마치 자기가 해낸 일처럼 자랑하는 후배를 보며 나는 기가 막혔다. 허허, 그래도 교복까지 입고 있는데 출입이 가능하다니. 날라리와 평민은 노는 수준이 다르구나.
새삼 감탄하는 사이 칸막이가 처진 구석 자리에 도달했다. 아무 생각 없이 자리에 들어가려던 나는 조금 멈칫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하늘이는 마지막에 올테니 제일 바깥 쪽 자리에 앉을텐데. 내가 안쪽에 앉으면 하늘이랑 자리가 너무 멀지 않나?
"뭐해? 안 들어가고."
그때까지 아무 말 없던 다현이 자리로 들어가려다만 나를 보며 물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옆으로 비켜섰다.
"우리는 좀 있다 들어가자. 너네들 먼저 들어가라~"
"……뒤에 사람들한테 민폐야. 그냥 들어가 앉아."
헉,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밀다니!
옆으로 비켜섰던 나는 다현이의 손에 거의 떠밀리다시피 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흑흑. 남의 속도 몰라주는 다렁이같으니. 결국은 구석 자리에 앉게 되었다. 나는 서글프게 옆에 놓인 벽을 바라봤다.
"……."
하지만 다현이는 아까부터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보였으므로 뭐라고 항의할 수도 없었다. 왜 저렇게 기분이 다운되어 있는 걸까? 먼저 집에 가라고 한 게 그렇게 충격이었나?
술집에 들어오기 전,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 오락실이나 음식점을 전전하며 시간을 때웠었다. 하지만 다현이는 그때도 한발짝 떨어진 곳에 서서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처럼.
아, 다렁이가 이러니까 나도 자꾸 눈치만 보게 되잖아……. 오늘 나는 하늘이에게 적극 대쉬를 해야한다는 강한 사명감이 있는데.
"왜 그렇게 기분이 안 좋아?"
결국 참지 못하고 묻고 말았다. 조용히 녀석에게만 들릴 정도로 중얼거리자 힐끔 나를 쳐다보고는 중얼거린다.
"별로."
"……혹시 그거…때문에 그래? 이제 괜찮다고 했잖아."
"……."
조심스럽게 물어본 내 질문에 다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치겠네. 긍정이야, 부정이야? 대답을 해라, 다렁아.
"뭐하냐? 얼른 얼른 시키고들 있어야지~"
그러고 있는 사이 하늘이가 자리로 왔다. 아, 역시 바깥 쪽에 앉는구나. 멀다……. 흑.
"골뱅이 소면."
"감자튀김!"
"참치김치찌개~"
인원이 많다보니 금방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되었다. 여기저기서 메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알바생이 바쁘게 받아적는 가운데 하늘이 문득 내 쪽을 쳐다보았다. 핫……. 그때까지 하늘이를 바라보며 한탄을 하고 있던 나는 갑자기 눈이 마주쳐서 깜짝 놀랐다.
다행히 하늘이는 별다른 눈치는 못 챈 거 같았다. 아…… 다, 다행이 아닌 건가.
"지후도 뭐 하나 시켜야지~ 뭐 먹을 거냐?"
……하늘이는 자상하기도 하지.
"아… 나는 아, 아무거나."
당황해서 대충 말하고 말았다. 하늘이는 내 대답에 장난스럽게 웃더니, '그럼 내가 좋아하는 두부김치 하나 더 추가네~' 라고 말했다. 허허. 귀, 귀여워라….
아, 그러고 보니 우리 다렁이는?!
"다현이 너도 두부김치지?!"
막 다현이에게 물어보려는 사이, 하늘이가 다시 한번 발랄한 목소리로 외쳤다.
다현이는 별 관심없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맘대로 해."
"하하! 그럼 하나 더 추가~"
하, 하늘아…. 두부김치를 많이 좋아하는구나.
나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생각했다. 어, 어쨌든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하늘이는 알바생이 한번 더 수첩에 체크하는 걸 확인하고는 테이블을 둘러보며 말했다.
"술은 당연히 소주로 통일이지?"
"칵테일 소주."
당연하다는 듯 주억거리는 분위기 속에서 문득 조용한, 그러나 무게감 있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로 내 옆에서.
공기가 한순간 싸늘 해졌다. 모두 놀란 표정으로 다현이를 쳐다본다.
"카, 칵테일 소주요? 그런 맛 없는 걸…"
"그건 술이 아니라 음료수…
"여자 애들이나 좋아하는…"
아니, 왜 다 말끝은 흐리고 그러시나…?
"거기 쉿! 다현이가 시키겠다잖냐! 다현아, 무슨 맛?"
하늘이는 어쩐지 재미있어 하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헤에, 어찌됐든 우리 다렁이는 칵테일 소주를 좋아하는 구나.
"무슨 맛 먹을래?"
"어?"
……나??
멍하니 있던 나는 난데없이 물어온 다현이의 질문에 당황하고 말았다. 아, 아니, 그걸 왜 나하테 묻냐.
"아, 아무거나."
"레몬으로 시킬까?"
"그, 그래라…."
어쨌든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주문이 끝났다.
다현이는 그 후로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나는 아는 사람이 다현이랑 하늘이 밖에 없었으므로 뻘쭘하게 앉아있을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끼어들 수 없는 대화가 즐겁게 오가는 가운데 주문한 메뉴들이 나왔다.
와, 드디어 술이다! 좋아… 전에 봤더니 나는 술이 좀 들어가면 솔직해지는 것 같았어. 일단 많이 마시고 보자. 그리고 오늘의 임무를 완수해야지.
나는 신이 나서 가운데 앉은 후배가 따라주는 소주를 받으려 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투명한 병이 날아와 쪼르륵 노란 액체를 따랐다. 응?
"……."
……다, 다렁아. 왜 니가 시킨 칵테일 소주를 내 잔에 따르는 거냐.
"나, 난 소주 마실 건데?"
"또 그때처럼 취해서 비틀거리려고?"
"뭐, 뭐 어떠냐. 내일부터 방학인데."
"너 못 걸으면 버리고 갈 거니까 알아서 해."
헉…….
다, 다렁이가 나한테 저런 매정한 말을 하다니.
"푸훗."
그때 문득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역시나… 하늘이다.
"둘이 뭘 그렇게 사이좋게 놀고 있냐? 야, 비켜봐봐~ 나도 안으로 들어가게."
하늘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순식간에 틈 사이를 비집어 내 앞자리까지 들어왔다.
헛. 하늘이다! 하늘이가 내 앞자리에…!
"자, 첫잔은 다같이 건배하자~"
감격에 겨워할 시간도 없이 하늘이 술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멍하니 있던 나는 황급히 술잔을 들어올렸다. 그런데 문득 옆에 있는 다현이 술잔이 보여서 봤더니 소주(!)다. 이 자식!!
"넌 왜 소주 마셔?!"
나는 분노에 가득차서 외……치고 싶었으나, 일단은 건배하고 술까지 다 마신 다음에 다현이를 향해 외칠 수 있었다. 가볍게 소주를 입 안에 털어넣은 다현이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난 잘 걸어 다니니까 괜찮아."
"……."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다현이가 술이 좀 세."
다시 크큭 거리며 웃고 있던 하늘이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쳇, 둘이 친구라고 편 들어준다 이거지.
"나도 술 세다, 하늘아. 그러니까 거기 옆에 소주 좀 따라줄래?"
"글쎄… 난 따라주고 싶은데 말이지~"
완벽한 다현이의 아군인 하늘이는 방글방글 웃으며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제길! 왠지 왕따 당하는 것 같잖아! 결국 다현이를 설득할 수 밖에 없는 것인가!
"내 사랑스런 동생, 다렁아? 형님 소주 좀 따라줘라."
"……."
쪼르륵-
다시 잔을 가득 채우는 건 노란 액체.
아, 서러워…….
"모처럼 방학했는데… 모처럼 술집까지 왔는데… 맛없는 레몬 주스나 마시고 있어야 하다니…흐흑!"
"……."
나는 최대한 불쌍함을 연출하려 애쓰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다현이는 쳐다도 안 보고는, 다시 자기 잔에 소주를 따라 입 안에 털어넣었다.
헉, 이렇게 불쌍해 보이는 날 무시하다니! 이 독한 녀석!
"한두잔 정도는 주지 그러냐? 설마 그거 마시고도 취하겠어? 그리고 취해도 집이 같은데 뭐 어때."
하늘이에겐 통했구나! 아, 역시 자상한 하늘이~!
"하늘이 잔 비었구나? 내가 따라주마~"
"어, 고맙다, 지후야~"
"……."
쪼르륵-
하늘이 잔에 가득 소주를 따르고 있으려니, 문득 옆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뭐, 뭘 봐, 정다렁?
"…내 잔도 비었어."
"……."
넌 니 혼자 잘 따라 먹잖아.
……하면 또 삐지겠지?
"소주."
"안돼."
"……."
슬쩍 말해보자 단칼에 끊어낸다. 나는 조금 서러움에 가득 차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다현은 조금 망설이는 싶더니 한참 뒤에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조금만 마셔, 그럼."
어엇? 진짜? 야호~!
나는 신이 나서 다현이 잔에 술을 따라넣었다. 다현이는 조금 심란한 표정으로 내가 따라주는 술을 받는다.
걱정마라, 다렁아~ 이 형, 조금만 마실게~!
아, 춥다…. 추워! 젠장, 왜 이렇게 추운 거야? 벌써 겨울이 왔나?
몸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나는 필사적으로 옆에 있는 온기를 파고들었다. 스르륵 옆에 있던 온기를 팔로 감고 얼굴을 푹 파묻자 어쩐지 처음보다 딱딱하게 굳는 느낌이 든다. 뭐야, 베개가 아닌가?
"허허, 네잔에 갔구나."
"……."
응? 이 목소리는 하늘이 목소리……. 그러고 보니 나 뭔가 목적이 있었던 거 같은데. 에이, 모르겠다. 춥고 졸려~
"외투나 담요 같은 거 없어? 추워하는 거 같은데."
아, 이번엔 다렁이 목소리다…….
그런데 왜 머리 위에서 들려올까? 그런 의문이 들고 있는데 문득 머리 위로 따뜻한 손길이 느껴지더니 귀 뒤를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갔다. 오, 기분 좋다…….
"밖에 또 비 오나 보다. 쌀쌀하네~ 기다려봐, 내가 우산이랑 외투 빌려다 줄 테니까 넌 지후 데리고 먼저 들어가라."
"응, 고맙다."
그리고 뭔가 어수선한 느낌이 났다. 나는 머리는 천근만근 무겁고 몸은 너무 추워서 눈앞에 놓인 온기에 더욱더 파고들었다. 흠칫 굳는 듯 싶던 온기가 문득 꿀밤을 때린다. 헉…….
"그러니까 적당히 마시랬지."
이, 이상한 온기다……. 사람을 막 때리는데다 잔소리도 해. 흥, 그런다고 내가 떨어질 것 같으냐!
"다현아, 여기. 나중에 집으로 놀러갈테니 기다리고 있어라~"
"…안 와도 돼."
"크큭. 그럼 잘 들어가."
조금 뒤 다시 하늘이 목소리가 들려오고 어깨 위로 따뜻한 천이 덮어졌다. 아, 이제 좀 살겠네… 그런데 그때였다. 온기가 갑자기 내 팔을 붙잡더니 날 떼어내려 했다!
"헉…! 아, 안대, 온기야…! 날 버리지마!"
"무슨 말이야? 업을 테니까 좀 놔봐."
"푸하하하!! 너보고 온기래잖냐, 다현아. 야, 정온기, 지후는 왜 버리려 하고 그러냐?"
"……웃지 좀 말고 와서 도와."
아, 싫어! 싫다니까…. 온기야아아아…….
나는 필사적으로 온기에 매달렸지만 여럿이서 무지막지한 힘으로 끌어내는 걸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온기와 나는 생이별을 해야 했다. 흑흑.
서글퍼 하고 있는데 문득 몸이 억지로 일으켜지더니 누군가의 몸에 업혔다. 아, 누군가가 아니다. 온기야, 너였구나! 다시 만나서 기뻐! 나는 이번엔 조금 더 세게 온기를 꽉 끌어안았다.
"……정지렁. 목 조르지 마."
"이야, 너한테 붙어선 아예 떨어지려고 하질 않는구나. 거봐~ 지후는 나보다 널 더 좋아한다니까?"
"……갈게."
"크큭. 그래, 잘 가라~~"
온기야, 우리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쏴아아아-
빗줄기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아까부터 몸이 위아래로 흔들거리는 느낌이 든다. 나는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떴다. 그리고 평소보다 시야가 조금 높다는 걸 깨달았다.
따뜻한 체온. 익숙한 스킨 향. 널찍한 등.
"……."
다현이…….
아, 내가 다현이 등에 업혀있구나.
'너 못 걸으면 버리고 갈 거니까 알아서 해.'
문득 아까 녀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풋. 나는 녀석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내 미세한 움직임에 다현이 뒤를 돌아본다.
"깼어?"
"아니."
"…깼네."
"아냐, 아직 안 깼다니까? 계속 업고 가~"
"……."
내 말에 다현이는 조금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려놓지는 않았다. 크큭. 아, 편하다~. 속이 조금 울렁거리긴 하지만.
나는 왠지 감회에 젖어서 눈앞에 놓인 다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무표정하게 앞만 보고 가고 있다.
"…아까 왜 기분 안 좋았어?"
"……."
"대답하기 싫어?"
"그냥… 사람 많은 거 별로 안 좋아해."
"헛… 그럼 나땜에 억지로 있은 거냐? 미, 미안하다."
"…그래도 미안한 줄은 아는군."
"뭐야~! 임마, 이럴 땐 예의상 괜찮다고 말해야지."
"……."
"큭……."
왠지 모르게 웃음이 흘러 나왔다. 녀석의 저 틱틱대는 입하고는 반대되게 다정한 행동들이 너무 좋다. 하여간에 솔직하지 못한 성격이라니까. 후훗.
"그러고 보니 우리 다렁이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
"……."
"다렁이랑 사귀는 여자들은 되게 좋겠다. 형인 나한테도 이렇게 잘 해주니까, 우리 다렁이는……. 틀림없이 여자 친구 생기면 매일 같이 맛있는 것도 해주고, 공부도 가르쳐주고, 술에 취하면 업어주고…… 엄청, 엄~청 챙겨주겠지…?"
"……."
"하아, 되게 부럽다……. 근데 그렇게 되면 나는 조금, 아니 많이 쓸쓸해질 것 같아. 하핫."
"……."
"너도 내가 하늘이 좋아한다고 했을 때 이런 기분이었어……? 음, 아니다… 넌 아니겠지. 아마 나만 그런 걸 거야. 하핫…. 어쨌든 너도 나중에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나한테 꼭 말해야 된다? 내가 보고 괜찮은지 아닌지 판단해줄 테니까. 알았지?"
"……."
"다현아? 다현아, 대답 좀 해~"
"……."
다현이는 내 부름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까부터 묘하게 조용하다.
설마 업혀있는 건 내 쪽인데 잠들었을 리는 없고… 술 취해서 실 없는 소리 한다고 무시하는 건가?
쳇…….
왠지 혼자서 횡설수설 해댄 것 같은 기분에 귓불이 뜨거워졌다. 난 역시 술 마시면 안 되나 보다. 이상한 소리나 해대고.
나는 다현이의 어깨에 푹 고개를 파묻었다.
하지만…… 하지만 술김에 내뱉은 소리는 아닌데…….
나 너한테 여자 친구가 생기면 정말 쓸쓸할 것 같단 말이다, 다렁아.
당분간은 여자 친구 같은 거…… 만들지 말아라. 알았지?
언젠가는 괜찮겠지만 당분간은 안돼.
당분간은…… 지금처럼 나한테 제일 잘해줘야 된다. 내가 조금만 더 독점할게. 내가 조금만 더 독점하고…… 나중에 너한테 정말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때 양보할 테니까……
지금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다현아.
괜찮겠지……?
우리 이제 막 형제처럼 된 거잖아.
그 순간 왠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나는 다현이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심한 갈증을 느껴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희미하게 눈을 떴다. 창밖으로 어슴푸레한 빛이 새어들어오고 있다. 아직 새벽인 모양이었다.
끙… 그러고 보니 나, 언제 집에 들어온 거지? 녀석의 등에 업혀있었던 것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후로 기억이 끊겨 있었다. 아무래도 그 상태 그대로 다시 잠들어 버렸나 보다.
깨질 것 같은 머리를 손으로 붙잡으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몸에 덮여있던 이불이 뭔가에 턱 하고 걸려 잘 걷어지지 않았다. 뭐지…? 나는 의아함을 느끼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헉!!"
그리고 바로 헛숨을 삼키며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쿵, 과장된 몸짓으로 인해 중심을 잡지 못한 몸이 침대 밑으로 떨어졌다. 몸에 말려있던 이불이 주욱 하고 당겨지며 밑으로 내려온다. 내 옆에서 단정하게 잠들어있던 녀석이 그 기척에 잠에서 깨었는지 나른하게 눈을 떴다.
"……."
왜, 왜 다렁이가 내 옆에서 자고 있는 거냐…….
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녀석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헛, 하지만 제대로 놀라고 있을 틈도 없이 머리가 깨질 듯한 고통을 호소했다. 으아아, 전이랑은 비교가 안 된다! 뇌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아! 나는 순간적으로 얼굴을 확 찌푸리며 머리를 붙잡았다. 그러자 부스스하게 몸을 일으킨 녀석이 놀란 얼굴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머리 아파?"
"엉… 헉! 깨, 깨질 것 같다, 다렁아… 으아악, 속도 엄청 울렁거려…"
"그러니까 내가 소주 마시지 말랬지."
"……."
머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내게 돌아온 것은 지나치게 냉랭한 대답이었다. 흑… 그래… 죄인이 무슨 할말이 있겠소. 그저 이를 악물고 조용히 고통을 삭힐 수 밖에.
"잠깐 기다려 봐."
그렇게 엎드려서 끙끙거리고 있는데 다현이 조용히 중얼거리고는 방에서 나갔다. 응? 나, 날 두고 어디 가냐, 다렁아…! 나는 이불을 몸에 휘감은 채 녀석을 따라가려 열심히 기었다. 하지만 지독한 숙취로 인해 얼마 못 가서 금방 지치고 말았다. 헥헥… 아이고, 속이야……. 거의 문까지 다 왔을 때 닫혔던 문이 다시 열리고 다현이 들어왔다.
"뭐해?"
"……."
그렇게 적나라하게 물어보면 내 할말이 없지.
하하…….
고통스러운 상태에서도 어색하게 웃어보이자 녀석은 잠시 할말을 잃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괘, 괜히 기어왔다. 녀석이 나가니까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그만……. 차라리 그냥 침대에 누울 걸 그랬나.
뒤늦은 후회를 하고 있는데 녀석이 손에 들고 있던 뭔가를 치익 돌려 따더니 나에게 건넸다. 나는 멍하니 눈앞에 내밀어진 그걸 바라봤다. 이, 이건…! 마, 말로만 듣던 견디셔(=컨디션)!!
"어제 오는 길에 샀는데 자고 있길래 그냥 안 깨웠어."
"고, 고맙다! 다렁아!!"
이, 이런 세심한 짜식!
나는 완전히 감동에 젖어 녀석을 그대로 푹 안아버렸다. 녀석이 흘린다며 다급한 목소리로 투덜거린다. 아하하, 귀여운 우리 다렁이. 부끄러워하기는! ……이 아니라 녀석의 손이 닿아있던 등쪽이 좀 축축해져왔다. 음, 흘렸구나.
나는 민망해져서 금방 손을 놓고 녀석이 내미는 숙취 음료를 받아마셨다. 꿀꺽꿀꺽, 안 그래도 갈증이 나는 참이었기에 쉬지않고 한번에 넘겨버렸다.
"푸아─."
생명수가 따로 없구만!
다 마시고 나니 한결 속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아, 방금 마셨는데도 어째 이제 다 나은 것 같은 걸? 우리 다렁이의 사랑이 담겨있어서 그런가!
"잘 마셨다, 다렁아~~ 헤헤."
나는 싱글싱글 웃으며 다 마신 병을 녀석에게 건넸다. 응? 그런데 녀석은 그때까지도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뭐, 뭐지? 왜 그렇게 쳐다봐? 다…렁아?
잠시 잊고 있었던 비 오던 날의 그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와 비슷한 패턴이다……라고 생각한 순간, 녀석의 손이 천천히 올라와 머리카락을 쓸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닿을 듯 말듯 귀 뒤쪽을 쓸고 지나간 손가락에 흠칫 몸이 떨려왔다. 그때까지도 녀석은 뚫어지게 나를 보고 있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그때처럼 격렬한 움직임은 아니었다.
"미리 예고하면……상관 없다 그랬지……?"
녀석이 문득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다시 한번 눈을 크게 떴다. 녀석이 내 표정을 살피듯 보고 있었다. 두근두근. 심장 박동이 한층 더 빨라졌다.
미리 예고하면 상관 없다 그랬다고……? 그럼 설마, 너…… 지금 나한테 키스하려고…….
나는 혼란을 느꼈다. 거부하려면 지금 충분히 거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귀 뒤쪽을 쓸던 손가락이 천천히 머리 뒤로 넘어가 작게 당겨진 순간, 스르륵 하고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
입술이 닿았다. 부드럽고 따뜻했다. 살짝 부딪치듯 맞닿은 입술은 그러나 금방 떨어져나갔다. 나는 희미하게 눈을 떴다. 녀석의 반쯤 감겨진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몽롱한 정신으로 그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니 다시 스르륵 하고 녀석의 눈이 감기며 입술이 겹쳐져왔다.
"으, 음……."
어쩐지 당황스러워 작게 소리를 내면서도 손으로는 녀석의 팔을 꽉 붙잡고 있었다. 천천히 겹쳐진 입술 사이로 녀석의 따뜻한 혀와 타액이 얽혀들었다. 부드럽게 애무하듯 혀 아래를 쓸고 잇몸을 더듬던 녀석의 혀가 내 혀 끝을 조심스럽게 건드렸다. 흠칫 하고 나도 모르게 물러났다가 다시 녀석의 혀를 찾아 더듬거리자, 그에 응하듯 녀석이 천천히 나를 당겨 안으며 혀를 감았다. 나는 어색함을 느끼면서도 감겨진 녀석의 혀를 조심스럽게 빨아들였다. 축축하고 따스하고…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어느 샌가 완전히 이성을 놓아버리고 녀석의 혀를 정신없이 빨고 있는데, 문득 천천히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아, 잠깐, 아직…… 아쉬움이 들어 나도 모르게 조르듯 혀를 당기려다 확 정신이 들었다. 헉, 내가 지금 무슨 짓을…!
눈을 번쩍 떴다. 다현이 조용히 내 얼굴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으아아아…… 정지후, 니가 드디어 미쳤구나! 확 하고 모든 열이 얼굴로 몰렸다. 나는 필사적으로 할말을 찾으려 애썼다.
"아, 저기…"
─꼬르륵.
그러나 그때 타이밍 좋게도 배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윽, 창피하게 하필 이럴 때…! 그 소리에 다현의 관찰하는 듯 싶던 조용한 표정이 일순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녀석이 피식 웃으며 묻는다.
"배고파?"
"……."
……묻지마라. 쬐끔, 쬐~~끔이지만 자기혐오가 생기려고 하니까.
"뭐 간단한 거라도 만들어줄게. 나와 봐."
민망함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더니 다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헛, 그거야 듣던 중 반가운 소리긴 하지만…… 잠깐, 이번에도 또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저, 저기… 다렁아… 우, 우린 형젠데 이러는 거 이상하지 않냐…?"
"……."
간신히 목구멍에서 막혀있던 소리를 내뱉어냈다. 같이 응해놓고 이러는 것도 웃기지만 역시 이건 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내 말에 문밖을 빠져나가려던 다현이 멈칫 굳는게 느껴졌다. 나는 왠지 죄 지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바닥을 쳐다보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그, 그러니까 저기… 너랑 그, 그러는게 기분 나쁜 건 아닌데…… 아니, 오히려 굉장히 조, 좋지만…! 그래도 우리는 일단 혀, 형제잖아……? 형제끼리 키스하는 건 좀……."
"……."
"응? 다렁아, 대답 좀 해봐. ……왜 나한테 키스 하냐?"
두근두근.
심장이 뛴다. 녀석이 뭐라고 대답할지 알 수 없었다. 다현은 문고리를 잡은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길지 않은 그 정적이 숨막힐 듯 나를 짓눌렀다. 한참만에, 녀석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니까."
…에?
들릴 듯 말듯 작게 속삭인 소리는 발음조차 불명확했다.
"뭐라고…?"
나는 얼굴을 들고 녀석을 쳐다보며 물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심하게 두근거린다. 마주친 녀석의 눈동자가 좌우로 불안하게 흔들렸다.
녀석은 휙 고개를 돌리더니,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너도 하니까. 너도 심심하면 덥석덥석 끌어안으면서 뭘 그래?"
일순 맥이 탁 풀렸다. 나는 기가 막혀 항변했다.
"그거랑 이게 같냐. 난 말이지, 애정의 표현으로……."
"나도 그거야."
"엉?"
망설임없이 흘러나온 녀석의 대답에 다시 얼이 빠지고 말았다. 나는 멍하니 일어나있는 녀석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녀석은 여전히 고개를 돌리고 있는 채였다.
"나도 그거라고. 애정 표현."
"……."
헉…….
하, 할말을 잃었다.
"애, 애정 표현으로 키스하는 사람이 어딨어…?"
"뭐 어때. 난 안는 것 보다 키스하는 게 더 좋으니까 그렇지. 싫으면 관둬."
"……."
자, 잠깐 다렁아…….
녀석은 거기까지 말하고 휙 방을 빠져나갔다. 어쩐지 화난 것 같은 분위기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급히 녀석을 따라나갔다.
"자, 잠깐… 다렁아! 내가 언제 싫대?"
부엌에 들어가려던 녀석이 내 말에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본다.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어쩐지 사정없이 부끄러워져서 나는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그, 그냥 좀 이상한 것 같아서 그러지……. 그래, 형제끼리면 뭐 어때! 해, 해라, 애정 표현…! 서로 좋으면 장땡이지! 나, 나도 적극 환영이라구!"
"……."
거기까지 말하고 나는 휙 방으로 들어와버렸다. 해가 뜨고 있는지 방안이 주황빛으로 가득하다. 나는 주황색으로 물든 방안에 혼자 서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얼굴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다…….
"지후야, 밥 먹으렴!"
노크 소리와 함께 들려온 엄마의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눈을 떴다. 새하얀 천장이 보인다. 아, 어느새 잠든 거지? 잠깐 누워있는다는 것이 그만…….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눈을 부볐다. 숙취 음료를 마시고 잔 덕분인지 속은 말끔했다.
그렇게 밍기적 거리고 있자 엄마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얼른 나와봐~! 오늘 밥은 다현이가 했거든?! 너 자길래 안 깨우려고 했는데, 다현이가 깨워오라고 하더라! 아버지도 아직 나가시기 전이니까 오랜만에 다같이 아침 먹자."
다현이가…….
그 말을 듣자 몽롱했던 정신이 확 달아났다. 나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부엌으로 나갔다.
부엌으로 가자 식탁에 앉아계시는 아버지와 막 가스렌지에서 찌개를 들어올리고 있는 다현이 보였다.
"……."
눈이 마주쳤다. 나는 어색하게 자리에 앉았다. 다현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식탁에 냄비를 내려놓았다.
"허허, 웬 북어국이냐? 안 그래도 어제 거래처 사람들이랑 술을 한잔 하고 와서 속이 안 좋았는데. 마침 잘 됐구나. 잘 먹으마."
"……."
다현이는 대답없이 조용히 아버지를 쳐다보더니 내 옆에 와서 앉았다. 나는 어색하게 수저를 들어올렸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다현이는 아직도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는다.
저 무심해 보이는 시선이 호의를 가진 상대와 그렇지 않은 상대를 바라볼 때의 차이를 나는 알고 있다. 하물며 적의를 품는다면 더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다현이는 아직도 아버지를 미워한다. 처음 봤을 때와 조금의 차이도 없이.
녀석이 저런 표정을 짓고 있으면 나는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된다. 마치 가슴 밑바닥까지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그런 표정 짓지 마, 다현아……. 그런 표정 짓지 마라.
"다현아."
문득 다정한 목소리가 귀를 감싸, 나는 얼굴을 들었다. 엄마가 다현이를 보며 웃고 있었다.
"반찬 좀 먹어."
밑반찬을 다현이의 밥그릇에 올려주며 엄마가 말했다. 다현이는 어색하게 멈춰있다가 곧 수저로 엄마가 올려준 반찬을 먹었다. 엄마는 찌잉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다시 반찬을 집어 녀석의 그릇에 올려줬다. 다현은 멈칫 하더니 고개를 들어 엄마를 보았다.
"제가 먹을 수 있어요."
"응. 그, 그래……. 저, 여기여기 계란말이도 좀 먹고! 콩자반도 먹고 멸치볶음도 먹으렴! 참, 김도 먹어야지. 소화가 잘 돼서 좋단다!"
"……."
어, 엄마 너무 신나셨군요…….
손 놀리는 걸 멈추게 하자, 정신없이 횡설수설 하기 시작하는 엄마를 다현은 잠시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한숨을 쉬더니 숟가락을 들어올리며 나에게 말했다.
"너도 얼른 먹어."
"어… 그, 그래……."
그러고 보니 모처럼 다렁이가 해준 밥인데 잠시 다른데 정신이 팔려 넋을 놓고 있었어!
나는 곧 눈앞에 놓인 밥 먹는 일에 열중했다. 오! 오늘도 진수성찬! 맛도 최고! 죄송하지만 불효자는 엄마가 한 밥보다 다렁이가 한 밥이 더 좋군요, 어머니…… 흐흑. 진정 환상의 맛이야. 즐거워하며 밥을 퍼먹고 있는데 문득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커피숍 하나를 받게 됐는데…… 당신이 해보면 어때? 아직 양도할 사람을 안 구했는데."
"네?"
우리는 모두 아버지에게 시선을 모았다.
"이게 자리가 상당히 좋아서 팔기는 아깝거든. 하지만 딱히 맡길만한 사람도 없으니…… 당신도 집에서 살림만 하고 있으면 지루하지 않아? 가게 일 많이 해봤으니까 특별히 어렵진 않을 거 아냐. 어때?"
"하하, 당신은. 하고 싶긴 하지만 제가 일하러 다니면 살림은 누가 하라구요? 안돼요~ 다른 사람 알아보세요."
"제가 할게요."
그때 문득 어머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익숙한 저음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모두 눈을 크게 뜨고 소리가 난 쪽을 보았다. 다현이 무심한 손동작으로 밥을 뜨고 있었다.
"괜찮은 일 같은데, 한번 해보세요. 집안일은 제가 하면 되니까."
헉…….
우리는 모두 홀린듯이 다현이를 쳐다보았다.
무, 물론 다현이가 엄마와 나를 가족으로 받아들여주긴 했다. 하지만 엄마는 말 그대로 '가족'으로 받아들여준 거지 '어머니'로 받아들여준 것은 아니었다. 무슨 소리냐하면 다현이는 나는 형이라 불러도 엄마를 어머니라 부른 적은 한번도 없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새어머니라고 부르느냐? 그것도 아니다. 처음부터 아예 호칭 쓸 일을 만들지 않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래서 녀석이 엄마에게는 아직 거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의 카페를 맡아보라는 말에 반대하기는커녕 적극 권유를 하다니!
녀석의 너그러움에 모두 놀라고 있는데 다현이 다시 말을 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집안일을 해와서 꽤 익숙합니다. 특별히 걱정할 만큼 못하진 않을 거예요."
"아, 아니, 걱정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너한테, 다현아……"
"그리고 힘들면 형이랑 같이 하면 되니까요. 그렇지…?"
엉?
다현이 갑자기 툭 하고 팔을 쳐와서 나는 화들짝 놀랐다. 다현이 대답을 요구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니, 나야 당연히 다렁이가 안 힘들어해도 돕겠지만…… 내, 내가 도움이 되려나…….
"무, 물론이지! 하하…!"
"지후는 별로 쓸모가 없을 텐데……"
어, 엄마. 어떻게 아들한테 그런 말을!
"어쨌든 집안일은 형이랑 제가 맡을테니 걱정말고 가게라도 한번 보고 오세요."
다현이 다시 적극 권장하는 투로 말했다. 어째 이제 거절하기도 힘든 분위기가 풍긴다. 엄마는 결국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어, 어… 그렇게까지 말해주니 한번 보고 올게… 고맙다, 다현아……"
"다현이가 벌써 철이 다 들었구나. 허허허…"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마저도 떨떠름해보이는 표정이었다. 그 와중에 다현은 밥을 다 먹었는지 '먼저 일어날게요'라고 말하며 빈그릇을 개수대에 헹구고 나갔다.
"……."
"……."
그렇게 모처럼만에 이뤄진 이른 아침의 가족 식사는, 떨떠름한 분위기 가운데 끝이 났다…….
여름방학이 시작됐다.
엄마는 결국 가게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다현이와 나의 본격 주부 생활(?)도 시작됐다.
"다렁아! 우리 초밥도 사자, 초밥도! 저기 초밥도 판다."
저녁 찬거리를 사러 다현이와 장을 보러 온 나는 꽤 들떠 있었다. 오오, 초밥을 하나하나 포장해서도 파네! 정말 먹을 거 투성이구만! 기쁜 마음에 얼른 다현이가 밀고 있는 카트를 그쪽으로 끌어당기며 외치자 녀석이 한심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한다.
"밥 먹을 건데 무슨 초밥이야. 그리고 이런데서 파는 건 맛이 없어."
어허허… 이런 어른스러운 동생 같으니. 형인 날 훈계하는군.
열심히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다렁이는 가볍게 무시하고는 반대편으로 카트를 끌었다. 어엇, 같이 가야지!
"……."
방학하고 일주일. 사실 나는 요즘 나름대로의 고민에 빠져 있다. 그건 바로 다현이가 나를 형으로 전혀 안 본다는 것이다.
무, 물론 나도 내 주제에 형 대접 받길 바란 건 아니다. 솔직히 내가 좀 많이 형 안 같긴 하지. 나도 인정해. 나이 차가 거의 안 나기도 하고.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다렁이 너 말이다.
"넌 이거 들어."
왜 날 이제 형이라고 안 불러주는 거냐! 흑…!
내 몫으로 훨씬 가벼워 보이는 봉지를 내민 다현이를 보면서 나는 다시 한번 스스로의 신세를 한탄했다.
아무래도 내가 그간 너무 어른스럽지 않은 모습만 보인 것 같다. 그래서 우리 착한 다렁이도 차마 형으로 부르기가 한심스러워진 거다……. 옛날엔 그래도 지나가는 식으로 부를 때는 꼭 형이라고 불러줬는데.
"왜 그래? 무슨 고민 있어?"
뒤로 처져서 잠시 생각에 잠겨있자 녀석이 돌연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저런 점은 여전하다.
별로 나한테 마음을 닫은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형’이라 불린 것을 시작으로 녀석과 급속도로 가까워졌던 나는, 자연히 이 별거 아닐지도 모를 변화가 신경 쓰였다.
"아니, 니가 든 게 너무 무거워 보여서…… 이리 줘라. 이 형이 들어주마!"
그래, 앞으론 좀 더 형 다운 모습을 보여줘야지! 좀 미더운 모습을 보여주면 녀석도 날 다시 형이라고 불러줄 날이 올 거야!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결심하며 녀석을 향해 밝게 말했다.
"……별로 안 무거운데."
"어허! 안 무겁긴…! 지금 니 손 떨리는 거 다 보인다, 동생아. 걱정말고 이 형님한테 맡겨라. 자자, 우리 동생님은 편하게 빈손으로 걸어가세요~"
"……."
앗. 너 방금 ‘또 왜 이래' 라는 표정 지었지. 내가 못 알아볼 줄 아냐!
나는 재빨리 녀석에게 뛰어가 양손에 든 두 비닐봉지를 빼앗아 들었다. 헉…! 무게가 장난이 아니네! 진짜 무겁다!
생각을 훨씬 넘어가는 무게에 힘 조절에 실패한 나는 그만 봉지를 놓아버리고 말았다.
파삭 소리와 함께 떼구르르 굴러가는 간장통, 쥬스통, 과일 등등…….
입을 떡 벌리고 그 자리에 서서 돌이 되자 다현이 기가 막힌 표정으로 쳐다본다.
"미, 미안하다…."
"얼른 줍기나 해."
"……."
아, 또 실수해버렸다…….
난 이렇게 가벼운 거 줘놓고 지는 저렇게 무거운 거를 두개나 들었을지 알았냐고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열심히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담고 에스컬레이터에 타기까지, 나는 완전히 의기소침해져서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결국 봉지는 다렁이의 양손에 곱게 들려 있다.
"내, 내가 많이 못 미덥지?"
"?"
나는 녀석의 무표정한 옆 얼굴을 자괴감에 빠져 지켜보다가 중얼거렸다. 그 말에 녀석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전혀 형 같지도 않고… 맨날 실수만 하고…"
"누가 그래?"
"어, 어? 누, 누가 그런 건 아니지만."
"방금 그 일 때문에 그래? 신경 쓰지 마. 넌 확실히 덜렁거리긴 하지만 다른 사람한테 미움 받을 정도는 아니니까. 그리고 사람마다 다 장단점이 있는 거지, 뭐."
"……."
음. 열심히 위로해주려고 노력하는 건 매우 잘 느껴지는데 말이다, 다렁아……. 난 너의 그 ‘넌'이 매우 신경 쓰이는 거거든? 흑흑.
내가 아직도 풀이 죽어있자 다현이는 자신의 위로가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더 열심히 말했다.
"대신 넌 솔직하잖아. 그렇게 속에 있는 감정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대단하다고 생각해, 나는. 그리고 뭐랄까…… 넌 무슨 일을 하든 악의가 전혀 없고, 같이 있는 사람들 마음을 참 따스하게 만들고……"
"……."
쑥스러워하는 듯 시선을 옆으로 돌린 채 횡설수설 하는 녀석을 나는 잠시 감격에 차서 바라보았다.
다, 다렁이가 이렇게 열심히 말해주다니!
솔직하긴 누가 솔직하다는 거냐, 다렁아?! 니가 훨씬 더 솔직하구만! 너 이제 이런 말도 할 수 있게 되었구나!
난 찡 해서 녀석을 보았다. 녀석은 아직도 내 장점을 찾아서 필사적으로 횡설수설 하고 있었다. 으아아, 어떡하지?! 온몸이 근질근질 거린다! 갑자기 저 녀석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 나는 어떻게든 이 감격을 표현해야 할 것만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뭐 어때. 난 안는 것 보다 키스하는 게 더 좋으니까 그렇지.'
그때 문득 떠오른 게 녀석이 일전에 했던 말이었다. 나는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우리 외에 에스컬레이터에 타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급히 녀석의 입술에 내 입술을 부딪쳤다.
"?!"
아, 나도 앞으론 안는 것보다 키스하는 게 더 좋아질지도 모르겠다……. 녀석의 부드러운 입술에 닿는 순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녀석과 입술을 맞댄 채 나는 어떻게 할까 하다가, 차마 이런 곳에서 혀까지 넣을 수는 없어서 가볍게 입술을 빨았다 놓는 것으로 아쉬움을 뒤로 했다.
"흐흐… 알아들었어. 고맙다, 다렁아."
나는 녀석의 입술에서 내 입술을 떼어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씨익 웃으며 녀석의 표정을 살피는데, 천천히 시야에 들어온 다현은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응? 뭐야… 너 뭘 그렇게 놀라있는……. 라고 생각했을 때였을 거다. 후두둑 하고 뭔가가 요란하게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어…?"
나는 당황해서 고개를 돌려 그것을 쳐다보았다. 곧이어 파삭 하고 뭔가가 터지는 소리가 뒤따랐다.
헉…! 다렁아! 갑자기 봉지를 놓아버리면 어떡하냐!
에스컬레이터 위에 시꺼먼 간장 국물이 번졌다. 그 위를 사과와 오렌지가 옷을 바꿔 입으며 굴러간다. 금세 에스컬레이터 위는 난장판이 되었다.
"……."
나는 할말을 잃었다. 기가 막혀 다시 다현이 쪽을 쳐다보자 녀석은 아직도 넋을 잃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
뒤늦게 정신이 돌아온 녀석이 짧은 탄성을 흘렸다. 그리고는 당황한 표정으로 난장판이 된 에스컬레이터를 본다. 녀석은 잠시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하는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중얼거렸다.
"…이런."
"……."
할말이 그게 다냐, 다렁아.
기가 막혀 녀석을 쳐다보는 사이, 에스컬레이터는 1층에 도착했다. 곧 직원이 몰려오고 주변은 더러워진 바닥을 치우기 위해 분주해졌다. 죄송하다고 몇번이나 직원에게 사과하고 집에 가기 위해 녀석 쪽을 보자, 아직도 멍한 표정이다.
"거봐라. 너도 갑작스럽게 당하니까 놀랍지?"
나는 일전의 일이 생각나서 실실 웃으며 녀석에게 말했다. 멍하니 있던 다현은 그제야 기척을 느꼈는지 움찔 놀라며 내쪽을 봤다.
뭐야…… 그런데 너 왜 그런 표정이냐?
다현은 어쩐지 할말을 잃은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한참 뒤에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집에 가자."
뭐야, 그 못말리는 어린애를 대하는 듯한 태도는?
너 또 민망하니까 괜히 나한테 그러는 거지? 엉?!
결국 아까의 대참사로 인하여 저녁 메뉴는 김치볶음밥이 되었다.
김치볶음밥이면 어떠하리. 우리 다렁이가 해주는 음식인데. 우리 다렁이의 손을 거치면 일개 인스턴트 라면이라 해도 환상의 요리가 된다. 김치볶음밥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요리 시작부터 냄새로 유혹하던 김치 볶음밥이 간신히 완성되고, 식탁 위의 세팅이 끝나 한입 입에 넣는 순간.
나는, 천국을 보았다.
아, 어떡해……. 너무 맛있어! 다렁이가 해주는 음식이라면 난 맨날김치볶음밥만 먹어도 살 수 있을 거 같아!
"안 먹고 뭐해?"
그렇게 혼자서 천국의 세계를 넘나들며 감격에 빠져 있는데 문득 다현이 목소리가 불쑥 쳐들어와 환상을 깨트렸다.
"쉿. 지금 음미 중인 거 안 보여?"
"……."
너의 그 표정에는 내 이미 단련되어 있지. 음하하……가 아니라, 참! 나 이제 형 다운 모습을 많이 보여줘야 하는데!
"나, 난 신경쓰지 말고 많이 먹어, 다현아. 응? 많이 먹어라."
"……."
최대한 어른스러운 말투를 유지하려 애쓰며 다현이에게 말해보이자, 녀석은 조금 미심쩍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별말 없이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바, 방금 그건 좀 괜찮았지?
내가 생각해도 정말 형다운 말이었다. 많이 먹어라, 다현아. 라니. 후후…… 좋아, 앞으로 이렇게 하나하나 쌓아가면 되는 거야. 나는 굳게 결심을 다지며 다시 눈앞의 볶음밥을 떠먹었다.
아, 너무 맛있잖아, 제길…… 찌잉은 좀 나중에 하자.
밥을 다 먹고 부득불 우겨 설거지는 내가 끝냈다. 이제 설거지 정도는 그럭저럭 실수 없이 할 수 있게 되었다.
휴우, 좋아. 미션 클리어.
평소보다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배로 심혈을 기울인 나는 조금 지쳐서 거실에 나왔다. 늘 그렇듯이 다현이는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나도 늘 그렇듯 TV를 켜며 그 옆에 앉으려는데, 문득 전화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따르르릉!
이 시간에 누구지?
나는 의아해하며 테이블에 놓여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지후니?"
아, 엄마다.
"네, 엄마. 무슨 일이에요?"
"밥은 먹었어?"
"네, 오늘 아버지는 늦으시는 것 같아서 다현이랑 먼저 먹었어요."
"아, 그게 말인데, 아버지 지금 엄마 가게에 와 계시거든? 가게에 일이 좀 생겨서 도와주러 오셨어. 아무래도 많이 늦어질 것 같구나. 먼저들 자고 있으렴."
"네, 알겠어요."
─찰칵.
짧게 통화를 끝내고 다시 자리에 앉는데 책을 읽고 있던 다현이 힐끔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늦으신대?"
"엉."
나는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며 대답했다. 다현이는 잠시 책에서 눈을 떼고 내쪽을 보고 있다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순전히 드라마나 다큐 프로그램들 뿐이구만. 평일엔 재밌는 게 안해.
나는 무료하게 이 채널 저 채널 돌리다가 옆에 앉아있는 다현이를 힐끔 보았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책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꼼짝할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재밌어?"
"뭐 그냥…… 티비 안 봐?"
"재밌는 게 안 한다. 아, 심심해 죽겠네~ 그러고 보니 오늘 부모님들도 늦으신다는데 우리 비디오나 빌려볼까?"
"흠…"
다현이는 별다른 대답없이 그렇게만 내뱉고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게 대체 긍정이냐 부정이냐, 다렁아…….
"에잇, 책 좀 그만 봐라, 다렁아. 나 심심하잖냐."
"비디오 본다며?"
"같이 안 가?"
"아…… 그래."
그제야 다렁이는 책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저러지? 묘하게 멍한 것 같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앞서 걸어가는 다현이를 따라나섰다.
"우와, 새로운 거 되게 많이 나왔네. 그러고 보니 영화 안 본 지 한참 됐다."
비디오 대여점에 들어온 나는 금방 흥분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이 집에 들어오고 여러가지 일이 겹쳐서 영화볼 생각을 못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연히 대여점에는 미처 못 본 신작들이 넘쳐났다.
"오, 이것도 재밌을 것 같고, 저것도 재밌을 거 같고… 미치겠네. 오늘 영화 보다 날새는 거 아냐?"
"……니가 고른 거 다 빌리면 날새게 봐도 다 못 볼 걸."
정신없이 이것저것 뽑아들며 갈등의 늪에 빠져 있는 나에게 다현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허허, 다렁아. 뭘 그렇게 냉소적으로 말하고 그러냐. 그리고 니가 아니라 형이다, 형.
"넌 뭐 보고 싶은 거 없어? 너도 좀 골라 봐."
"난 별로…."
다현이는 한발짝 떨어진 곳에 서서 관심없다는 듯 말했다. 아, 혼자 흥분하려니까 영 흥이 안 나네.
"영화 안 좋아해?"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뭐야, 그럼 좀 같이 골……"
라고 말하며 다현이 쪽을 보던 나는, 문득 그 뒤로 자리잡은 칸에 시선이 고정되고 말았다.
저, 저것은…! 한눈에 봐도 알 수 있는 어른 비디오……!
그 강렬한 빨간색들의 향연에 잠시 넋을 잃고 있는데, 다현이 의아함을 느꼈는지 내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18세의 매우 건강한 소년, 정지후. 성에 관해 호기심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한층 더 내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저 얼음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냉혈인간 정다렁에게도, 성에 관한 호기심이 있느냐 하는 것.
물론 없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도저히 상상이 안 갔다.
나는 다현이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너, 너도 저런 거 본 적 있냐, 다렁아……"
"……."
그 말에 다렁이는 잠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대답했다.
"당연하지."
"헉… 진짜? 진짜진짜진짜? 너도 저런 걸 본단 말야?"
"……왜 그렇게 놀라는데. 설마 이 나이되도록 안 봤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뭐랄까. 넌 왠지 금욕적이랄까, 그렇게 보여서…… 저런 건 안 좋아할 것 같았거든."
"……."
그, 그렇구나. 다, 다렁이도 빨간 비디오를 보는 구나…….
왠지 충격이었다. 다렁이는 어쩐지 그런 것들하고는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하긴, 저 녀석 키스하는 것만 봐도…….
"…!"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문득 엄청난 추측에 도달했다.
서, 설마 경험도 있는 건 아니겠지?
나는 힐끔 다렁이의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무표정하게 앞을 보고 있는 얼굴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키스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는데……. 겨, 경험도 있는 거 아냐? 요즘은 다들 빨리 경험한다고 하잖아. 비록 지금은 여자 친구가 없지만 일전에 소개팅 해준 거 보면 여자가 없어서 못 사귀는 건 아닌 거 같고…… 잘 모르지만 솔직히 다렁이 정도면 인기도 많을 거 같고…….
갑자기 미칠듯한 궁금증이 일었다. 어, 어떡하지? 물어볼까? 그런데 불쾌하게 생각하면 어떡하지. 혹시라도 사생활 침해라고 생각한다면…….
"……볼래?"
"어, 어, 어?!"
너무 깊이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갑자기 들려온 다렁이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이쿠, 깜짝이야! 눈에 띄게 당황하며 다현이를 보자, 녀석은 조용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모님도 늦게 오신다고 하시고……"
"아……."
"……."
"……."
대답을 해야하는데 목소리가 안 나왔다. 그…… 조, 좋지, 나도! 내가 빨간 비디오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게다가 영화 못 본 만큼 빨간 비디오 못 본지도 얼마나 오래됐는데!
그, 그런데 왜 입이 안 떨어지는 거냐……. 왜, 왜 다렁이랑 본다고 생각하니까 이렇게 긴장되는 거지…….
"……그, 그런데 19금인데 빌려갈 수는 있어?"
한참 뒤에 간신히 입이 떨어졌다. 말해놓고 보니 너무 적절한 말이었다. 맞아, 그러고 보니 그렇잖아! 어떻게 빌려가려고?
"응."
헉…….
서, 설마 너도 하늘이처럼 뚫어논 건 아니겠지?
"…뭐 볼래?"
미심쩍은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다현이 물었다. 앗, 난 아직 대답 안 했는데……. 어느새 분위기는 빌려가는 쪽으로 결정이 나 있었다.
나는 비디오 제목들을 열심히 훑고 있는 다현이를 쳐다보다가 정신이 들었다.
내, 내가 왜 이렇게 긴장하고 그러지? 다렁이랑 보면 좀 어떻다고! 저, 정신 차리자, 정지후! 야한 비디오 속에 싹트는 우정! 모르냐? ……아, 다렁이랑 나는 우애라고 해야하나? 하, 하여튼!
스스로에게 열심히 외쳐대고 있는 사이, 다렁이는 어느새 비디오를 뽑아들고 있었다.
"이게 괜찮을 것 같은데…… 어때?"
"조, 좋아. 하하하……"
지, 진정하자, 정지후! 진정해…!
***
비디오는 허무할 만큼 쉽게 빌릴 수 있었다. 주인이 아예 신분증 검사조차 안 한 것이다. 허허, 좋은 가게네. 앞으로 자주 이용해야겠다.
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조금이라도 더 긴장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아, 나는 왜 이렇게 긴장하는 거야. 이제 좀 진정할 때도 됐지 않았어?
문득 일전의 그 화장실 사건이 떠올랐다. 그때도 왜 이렇게 긴장이 되던지. 난 다렁이를 정말로 편하게 생각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역시 아직은 같이 지낸 시간이 오래 되지 않아서 좀 어색한가봐…….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난 지금 너무 긴장하고 있었다.
대체 왜 그러냐, 정지후……. 처음 본 녀석이랑, 아니 여자애랑 같이 야한 비디오를 본다고 해도 이 정도는 아니겠다.
결국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게 집에 도착했다.
"부, 불은 끄고 보는 게 낫겠지?"
"…그래."
어색한 분위기가 싫어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니 다현이도 아까부터 묘하게 말이 없었다. 그러나 분위기를 쇄신해보려는 내 노력은, 한박자 느리게 나온 녀석의 대답에 더 썰렁한 분위기가 되는 결과를 맞고 말았다.
"……."
"……."
미치겠다. 왜 이렇게 어색한 거야?
나는 허공을 향해 독백하는 포즈로 마구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다렁아, 넌 또 왜 이렇게 조용한거냐……가 아니라 원래 조용하지. 그래도 뭐라고 말 좀 해봐!
"뭐, 뭐 마실래?"
결국 억지로 말을 쥐어 짜냈다.
"…아니."
그러나 역시 결과는 아까랑 똑같은 분위기.
결국 애써 기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부엌에 가서 물 한잔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때 다현이는 기계에 테잎을 넣고 있었다.
나는 어색하게 서 있다가, 소파 끄트머리에 정말 어정쩡한 자세로 앉았다. 지, 진정해라 정지후. 이성이랑 보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러는 거냐…….
테잎을 넣고 재생 버튼을 누른 다현은 한사람 정도의 빈 공간을 두고 내 옆에 앉았다. 나는 더욱더 경직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화면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앗!……하아……"
화면 속에 등장한 여자가 옷을 벗고 침대에 드러눕기까지,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어두운 방안의 유일한 빛인 화면은 금세 살색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
나는 그때까지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았다. 까딱할 수가 없었다. 침조차 삼킬 수 없다. 이상하게 몸이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아! 하응……아아…! 하아, 헉……"
여자가 점점 음란하게 교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탁탁 하고 들려오는 성기 마찰하는 소리가 참을 수 없을 만큼 자극적이다. 이런, 벌써 아랫도리에서 반응이 오기 시작하는데…….
다, 다렁이는 괜찮으려나?
나는 힐끔 옆으로 시선을 주었다. 다현이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여, 역시 냉혈 인간…! 그렇군! 안 보는 건 아니지만 봐도 별 반응이 없는 거였군! 묘하게 납득하는 사이, 화면 속에 엉킨 두 사람은 체위를 바꾸고 있었다.
"아! 아…! 하읏, 아아……!"
"……."
미치겠다…….
너무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옆의 다렁이를 의식해서 그런지, 평소보다 흥분되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 벌써 아랫도리가 아플 정도로 당겨오고 있었다. 모, 못참겠어……. 애, 애국가라도 불러볼까? 동해물과 백……으윽…! 아, 미치겠네…… 어, 어떡해?
팬티 끝이 점점 축축하게 젖어들어가는게 느껴졌다.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여서 최대한 불룩해진 그 부분을 가리려고 노력했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다. 그런데 다렁이는 왜 이렇게 침착한 거야? 인간 맞아? 나는 왠지 원망스런 기분으로 다시 다현이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
그리고 바로 심장 떨어질 뻔 했다.
다현이가 내쪽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
"……."
완전히 흥분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해서 눈을 마주하려니 민망하기 그지 없었다. 다현이의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다. 조용히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다현이의 시선이 힐끔 내 밑으로 가는 게 느껴졌다.
윽……!
"나, 난 아무래도 더 이상 못 참겠, 허억… 다렁아, 나, 잠시, 화장실, 좀!"
거의 필사적으로 내뱉은 나는 그대로 화장실로 뛰어가려했다. 그런데 갑자기 일어서려는 내 팔을 다현이가 확 붙잡았다.
"…!"
으악, 이게 무슨 짓이냐 다렁아…!
막 몸을 일으키려던 나는 그대로 파묻히다시피 다시 소파에 앉고 말았다. 헉, 아랫도리가 참을 수 없는 고통을 호소한다. 어쩔 줄 몰라하며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는데 그런 나에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다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제끼린데 뭐 어때. 여기서 해."
"……."
……지금 나보고 너 있는데서 감히 그 민망한 짓거리를 하라는 거냐.
하지만 길게 생각할 사이가 없었다. 터질듯이 부풀어오른 하체가 사정의 욕구를 강하게 호소하고 있었다. 아, 어떡해… 난 잘 못 참는단 말이야. 젠장…… 미치겠네.
거의 울고 싶은 심정으로 나는 밑으로 손을 가져갔다. 나중에 쪽팔려서 뒈질지도 모르지만 당장에 죽겠는데 어떡하냐.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힘겹게 바지 속으로 집어넣었다. 잔뜩 성날대로 성난 내 분신이 왜 이제야 왔냐고 마구 호통을 쳤다.
"아……후우……"
그래그래,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나는 위아래로 천천히 그것을 어루만지며 달랬다. 옆에 다현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손을 멈출 수가 없다. 아, 아… 어떡해…… 호흡이 점점 거칠어진다. 더 이상 하면 민망한 소리가 나올 것 같아 질끈 입술을 깨물었을 때,
"……내가 도와줄까, 형?"
…라는 다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쯤 쾌감에 절어있던 나는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직 달아오른 얼굴로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가 싶어 다현이 쪽을 쳐다봤을 때, 녀석은 어느새 내 앞에 다가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그런데 너 혹시 방금 형……이라고……
"다, 다렁……앗…!"
깊게 생각할 틈도 없이 녀석의 손가락이 그 부분에 닿았다. 거의 펄쩍 뛸듯이 놀라며 녀석을 보는데, 녀석은 그대로 행동을 멈춘 채 내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엄청 부끄러웠지만 싫은 느낌은 아니었다. 가장 민감한 부위에 타인의 손이 닿았는데도 전혀 싫지 않다. ……아니, 타인이 아니라서 그런가.
"너, 너 잘 해?"
나름대로 도와준다는 말에 그래달라는 의사를 표현하려고 했는데 좀 이상한 말이 튀어나가고 말았다.
바지 지퍼를 내리고 있던 다현이 그 말에 멈칫하며 내 얼굴을 본다. 민망해서 그대로 증발해버리고 싶었다.
"글쎄, 판단은 형이 해야지."
"……."
그렇게 말하며 다현은 불쑥 내 팬티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으아아…….
나는 뛸듯이 놀라며 내 앞에 무릎 꿇고 앉은 다현이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다른 사람의 손이 여기에 닿을지는 몰랐다. 아, 아니 물론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면 언젠가 닿을 날이 오리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분명 그랬긴 하지만……
"아, 헉… 으… 다, 다렁아……"
팬티 안을 불쑥 헤집고 들어온 손이 내 손을 걷어내고 천천히 애무를 시작했다. 음낭을 가볍게 움켜쥐었다가 놓고 뜨겁게 달아오른 그것을 천천히 위아래로 쓰다듬는다.
그런데…….
정말 희한하게도 그 별 거 아닌 간단한 동작 하나로도 갈 것 같았다. 내, 내가 왜 이러지? 지, 진짜 완전 쌓였었나?
"아, 으… 자, 잠깐… 다, 다렁…아… 아. 아. 헉…"
움찔움찔 하고 튕기는 허리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도저히 숨 가쁘게 터지는 소리를 참을 수가 없다. 그때 문득, 천천히 쓰다듬던 손길이 멎었다. 아…? 쾌감에 젖어 반쯤 감긴 눈으로 녀석을 보자, 녀석은 힐끔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계속 할까?"
"어…… 어! 어! 계, 계속 해……. 해줘…. 아, 나, 나 어떡하냐, 다렁아… 나, 나…너무 좋다…으……."
다현이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짓는 것 같았다. 아, 내가 너무 밝히는 것 같이 굴었나? 그냥 응이라고만 할 걸…. 뒤늦게 후회하고 있는데, 멎었던 녀석의 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둥을 붙잡고 천천히 위아래로 쓸어내리다가, 어느 순간, 리듬을 타며 점점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으… 후… 헉, 아, 미치겠…… 아! 아아. 다, 다렁…헉…!"
강약을 절묘하게 조화한 그 움직임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머리에 새하얗게 스파크가 튀고 허리가 연신 움찔움찔 떨린다.
거의 절정의 순간이 다가왔다고 느낀 순간, 허벅지에 따뜻한 입술이 닿는 느낌이 났다.
"형…."
"…!"
"……지후야."
"!!"
파악-
지독한 오르가즘의 절정이었다. 요란하게 사정한 애액이 튀는 소리가 났다.
"헉, 헉…"
사정하고 난 뒤에도 나는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만큼 흥분했다. 이런 적은 정말 처음이었다.
크게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 내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던 다현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기절할 듯 놀랐다. 다현이의 오른쪽 뺨 위로 하얀 액체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으아아…! 미, 미안… 미안하다, 다렁아. 이, 이를 어째!"
얼른 일어나서 휴지를 가져다 닦아주고 싶었지만…… 무릎까지 벗겨져 내려간 바지 탓에 어정쩡한 자세로 일어났다 도로 앉아버리고 말았다. 으아아, 내가 미쳐…! 이, 일단 바지부터 입고 보자! 급하게 지퍼를 채우는데 문득 다현이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으니까 앉아있어."
"아…"
나는 바지 지퍼를 채우던 어정쩡한 자세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다현이를 돌아보았다. 어, 근데……
"……."
다, 다렁이 아랫도리가 유난히 불룩해져있는 것 같았는데 내 착각인가…….
티슈를 가지고 돌아온 다현이는 다시 내 바지를 벗기고 꼼꼼이 닦아주었다. 나는 민망해하면서도 가만히 있었다. 시, 싫지 않았다……가 아니라 너무 좋았다. 젠장. 또 한번 설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얌전하게 앉아있는 척 하면서 사실은 다현이의 다리 사이로 모든 집중력을 쏟아붓고 있었다. 교묘하게 셔츠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아냐, 근데 분명히… 얼핏얼핏 보이는 저것은 분명, 일어나 있는 그것의 모양……
"……."
그럼에도 내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건 다현이의 표정이 너무나 평온했기 때문이다. 무표정하게 내 다리 사이를 닦고 바지 지퍼까지 채워준 다현이는 평소 때랑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춥……"
바야흐로 비디오의 두 남녀는 소히 말하는 오랄섹스를 시작했다.
힐끔 화면에 시선을 주고 있는데 문득 다현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다시 다현이를 쳐다보자 녀석은 휙 등을 돌린 채 말했다.
"난 그만 들어가서 잘게. 넌 계속 볼거면 더 보다가 자…"
"……."
다시 너로 돌아왔네. ……가 아니지.
"자, 잠깐, 다렁아!"
"…?"
"너, 너 안 힘드냐?"
"……."
움찔, 하고 순간 녀석의 어깨가 떨리는 게 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등은 돌리지 않는다.
"나, 난 그거 서면 아파 죽을 것 같던데… 진짜 대단하네. 첨엔 깜빡 속았잖아. 어디 가냐? 설마 그러고 자려고?"
"……."
"일로 와봐. 나도 해줄게. 나, 난 별로 잘하진 못 하지만…… 아, 설마 그래서 그냥 가려는 건가? 넌 남이 해주는 거 싫어?"
다시 한번 녀석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천천히 녀석이 고개를 돌린다. 조금 전의 무표정한 얼굴은 어디가고 어딘지 갈등하는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리고 한참 뒤에 대답했다.
그 말에 왠지 가슴이 뛰었다. 녀석이 싫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여, 여기 앉아 봐! 응?"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녀석은 어딘지 경직된 것 같은 동작으로 소파 위에 앉았다.
두근두근.
심장이 심하게 맥박쳤다. 녀석의 다리 사이로 꼿꼿하게 일어선 그것은, 여태껏 눈치 못챘던 게 이상할 정도로 적나라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녀석의 바지 지퍼를 내렸다. 지익, 하고 내려가는 소리가 지나치게 선정적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드러난 팬티까지 벗겼을 때,
"……."
나는 조금 기가 죽고 말았다.
커, 컸다.
진짜 컸다…….
히야, 난 포르노 볼 때마다 대체 저런 거시기를 가진 남자는 지구상 어디에 존재하고 있을까, 하고 늘 의구심에 가득 찼는데.
이,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을 줄이야…….
꿀꺽, 하고 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다렁아, 넌 좋겠다. 거시기가 커서……가 아니라. 지, 집중을 해야지.
나는 손을 뻗어 천천히 그것을 움켜쥐었다. 난 그냥 맨날 열심히 당기고 어루만지는 게 다 였는데, 대체 조금 전의 다렁이처럼 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못 한다고 화내면 어떡하지. 조금 걱정이 들려는 순간, 위에서 하아- 하고 거칠게 숨을 뱉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조, 조금 놀랐다. 너무 섹시했다.
젠장… 다렁이 넌 대체 못난 게 뭐냐…….
널 데려갈 여자가 진짜, 진짜 부럽다.
또 한번 실없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녀석의 중심을 위아래로 쓰다듬었다.내가 생각하기엔 어설프기 그지없는그 동작에, 녀석의 입에서는 연신 거친 숨결이 토해져 나왔다. 머리 위로 들리는 그 소리가 지나치게 섹시하다. 더 듣고 싶었다. 더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녀석을 더 기분 좋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
어설프게 녀석의 중심을 붙잡고 만지작 거리고만 있던 나는 문득, 나도 모르게 혀를 갖다대고 말았다. 녀석의 몸이 튈듯이 놀라는 게 느껴진다. 아, 하고 이번엔 제대로 된 소리가 나왔다. 그 반응 하나에 나도 완전히 흥분하고 말았다. 그대로, 녀석의 그것을 입에 물어버렸다. 더욱더 모양을 크게하는 물건에 턱턱 하고 숨이 막혀왔다.
"아, 형, 형… 지후야…"
"…!"
여태껏 비디오로 보았던 지식을 총동원해서 열심히 빨아들이자, 녀석의 입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듣는 것 하나만으로도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심장이 미친듯이 뛴다.
그러다 어느 순간, 녀석이 갑자기 내 이마를 붙잡고 확 밀어냈다. 거친 그 동작에 나는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
놀라서 녀석을 올려다 보자, 휴지로 거기를 닦고 있었다.
아…….
나도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어느 사이엔가 바지 위가 축축해져있다는 것을.
"……."
으아아, 나 미쳤나 봐. 믿을 수가없었다.
눈을 크게 뜬 채 움직일 생각을 못 하고 있는데, 어느새 다 닦고 바지를 입은 다현이 그제야 내쪽을 보았다. 녀석은 조금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다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미안… 갑자기 밀어서."
"어, 어… 아, 아니…"
나는 차마 녀석의 손을 잡지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일어났다. 끈적끈적한 아래의 느낌이 참기 힘들었다.
"자, 잔다, 난. 너도 얼른 자라!"
나는 후다닥 말하고 그대로 방으로 돌아와버렸다.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거칠게 숨만 고르다가, 문득 바지를 내리고 팬티 위를 확인했다.
어둠 속에서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 여실한 사정의 흔적을.
'형, 형…'
'지후야……'
아, 어떡해…… 나 정말 미쳤나 보다…….
나는 그날밤 잠들 수 없었다.
몇번이나 녀석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자위했다.
***
그래, 한창 끓을 나이지.
다음 날. 평소보다 훨씬 이른 아침에 일어난 나는 애써 샤워를 하며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그건 그렇고 다렁이 녀석. 지후야, 라니. 왜 하필이면 그 순간에 날 이름으로 부르고 그래. 사람 심장 떨리게시리.
그런가 하면 오랜만에 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사실 녀석은 별 생각 없는데, 나 혼자만 지나치게 호칭에 신경 쓰고 있는 건가?
나는 샤워 꼭지를 꾹 잠그다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것에 일일이 신경 쓰는 내가 바보 같았다. 형이면 어떻고 지후면 어때. 맞먹어으려면 맞먹으라지. ……뭐,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썩 나쁘지 않던 걸.
'지후야…'
오, 노… 스, 스톱!
아침부터 불건전한 상상은 이제 그만.
그렇게 간신히 샤워를 끝내고 수건을 머리에 뒤집어 쓴 채 밖으로 나오는데,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다, 다렁이…! 벌써 일어난 건가?
나는 후다닥 욕실 바로 옆에 있는 내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런데 그보다 녀석의 목소리가 더 빨랐다.
"일찍 일어났네."
"……."
나는 문을 열려던 동작 그대로 돌이 되었다.
하하… 난 아직 녀석을 마주 볼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는데.
하지만 이미 들켜버린 걸 어쩔 수는 없었다. 나는 최대한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려 애쓰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 그래. 굿~모닝, 동생?"
"……."
너, 너무 오바했나?
내 인사에 다현이 잠시 침묵했다. 그 반응에 왠지 뻘쭘해진 내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다시 인사를 하려는 순간,
"잘들 잤니? 지후는 웬일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타이밍 좋게도 엄마가 방에서 나오며 말하셨다.
어, 엄마…! 나이스 타이밍!
"아, 안녕히 주무셨어요!"
나는 후다닥 엄마에게 주의를 돌리며 인사했다. 사실은 아직도 계단에 서 있는 다렁이에게로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지만, 어저께의 일이 자꾸만 생각나서 녀석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계단 위에서 엄마에게 인사하는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왠지 한층 낮게 가라앉은 듯한 목소리가, 어젯밤 녀석이 흘린 그 섹시한 음성을 떠오르게 한다. 으아아아… 내, 내가 왜 이러지? 지, 진정해라, 정지후! 더 이상의 상상은 그만!
"응, 그래. 아버지도 벌써 일어나셨단다. 아침 먹자."
"네, 밥 먹어요, 밥!"
나는 일부러 평소보다 한층 더 발랄하게 외쳤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오바하고 있다고 생각되긴 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아까부터 묘하게 뒤통수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고 있었다.
다, 다렁아……. 그만 좀 쳐다 봐라. 안 그래도 의식돼 죽겠구만.
"아, 오늘 아침은 내가 차릴게. 다현이는 지후랑 놀고 있어."
밥 먹자는 말에 계단에서 내려와 부엌으로 향하려는 다현이를 말리며 엄마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더 뜨끔하고 말았다.
어, 엄마… 왜 하필 이럴 때…!
"어제 늦게 들어오셨잖아요. 피곤하실 테니 쉬고 계세요."
"어, 어머나… 괜찮은데."
예의 바르게 말하는 다현이를 보며 엄마는 얼굴을 붉혔다. 내가 봐도 정말 이상적인 아들상이다.
예전에 그렇게 냉정하게 굴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게 거짓말 같았다. 다렁이는 정말 엄하게 교육을 받고 자라왔나 봐…….
"그, 그럼 이번에도 염치불구 하고 다현이가 차려주는 밥 좀 먹어볼까? 사실 내가 만든 것보다 다현이가 해주는 밥이 더 맛있거든. 호호…"
"예. 쉬고 계세요."
엄마의 말에 다현이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미소에 왠지 가슴이 조금 뛰었다. 아, 내 동생이지만 진짜 멋있는 녀석.
넋을 잃고 있는 사이, 엄마가 어느새 옆에 와 있었다.
"……너 혹시 다현이랑 싸웠니?"
"네?!"
뜬금 없는 말에 깜짝 놀라 되물었다. 내 박력에 엄마는 잠시 움찔거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아니, 평소랑 분위기가 좀 다른 것 같아서……"
"싸, 싸우긴요. 저 녀석이랑 제가 싸울 일이 뭐가 있어요."
오히려 너무 친해서 탈이죠…… 그런 짓까지 해주고.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는데 엄마가 '그렇지?'라고 안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괜히 한번 물어봤어. 방금 전만 해도 다현이가 부엌 들어가면 바로 따라 들어갈 녀석이 멍하니 서 있길래."
"아… 아하하. 저도 가끔 귀찮을 때가 있어요."
귀찮은 게 아니라 마주보기 어색한 거지만.
다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나에게 엄마가 조금 뜸을 뒀다가 말했다.
"다현이랑은 둘이 지낼만 하니? 뭐 불편한 건 없지?"
"그럼요. 다렁이가 다 알아서 해줘서 전 엄청 편해요."
"뭐라고? 이 녀석이. 집안 일도 너무 다현이한테만 맡기지 말고 너도 좀 도와주렴."
"저, 저도 노력하고 있어요……"
그렇게 엄마랑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다현이의 식사 준비가 끝나고 우리는 나란히 식탁에 앉게 되었다. 다현이는 그 뒤 내게 별 다른 말 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덕분에 나도 입을 다물고 눈 앞에 놓인 밥을 떠먹을 수 밖에 없었다.
아, 그렇게 맛있던 밥인데…… 오늘은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다.
옆에 앉아있는 다현이가 매우 의식되어 나는 식사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식사 도중 아버지도 놀란 얼굴로 둘이 혹시 싸웠냐고 물었다. 아, 싸운 게 아니라니깐요… 우린 너무 친한 게 탈이란 말이에요……. 내가 얼른 해명 하려고 하는데, 그보다 한템포 빠르게 옆에서 '아니오.'라는 낮은 대답이 돌아왔다.
아…….
왠지 방금 또 찌잉했다.
그렇게 어색함 속에서 아침 식사를 끝냈다. 곧 이어 아버지가 출근하시고, 오후가 된 뒤 엄마도 나가셨다.
"……."
"…….
마침내 다렁이랑 둘만 남아있게 된 것이다…….
탕-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나는 멍하니 엄마가 나가고 닫힌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아, 이제 어떡하지……. 더 이상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하다. 마주 서 있던 다현이 힐끗 이쪽을 보는 게 느껴졌다.
"형."
헉…….
조금 놀랐다. 녀석이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형이라고 불러주는 게 대체 얼마 만이더냐.
"응, 응?"
나는 어색하게 녀석 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물었다. 다현은 그런 내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가, 시선을 회피하고 중얼거렸다.
"어제……"
드디어 올게 왔구나!
나는 긴장하고 녀석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윽고 터져나온 녀석의 말은, 내 맥을 완전히 탁 풀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과일 먹을래?"
"엉?"
뜬금없이 웬 과일?
조금 벙찐 표정으로 쳐다보자, 녀석이 변명하는 말투로 중얼거린다.
"어제 과일 사온 거 있잖아……."
"……."
아, 그래…… 그랬지. 참.
그런데 방금 말 돌린 거 같이 느껴졌는데, 내 착각인가?
"그, 그래. 먹자."
떨떠름하게 대답하자 다현이는 곧 부엌으로 들어갔다. 난 잠시 그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곧 머리를 긁적이며 따라 들어갔다.
끙…… 이놈의 오렌지 껍데기. 왜 이렇게 안 까져.
거실에 앉아 녀석과 과일을 먹기 시작한 나는 금방 어제 일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눈앞에 놓인 오렌지와의 혈투가 당장 더 급했던 것이다. 끙끙거리며 온 힘을 다해 벗겨내고 있는데 문득, 깨끗하게 잘 까여진 오렌지의 속알이 불쑥 눈앞으로 내밀어졌다.
"어? 나 먹으라고?"
놀라서 쳐다보자 다현이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리고는 내 손에 들려진 오렌지를 가져가 다시 혈투를 벌인다.
허허… 이런 마음 넓은 녀석을 보았나.
난 잠시 찌잉해서 녀석을 쳐다보다가 오렌지를 반 갈라서 입에 넣었다. 입안으로 퍼지는 시큼하고 달콤한 맛이 또 다시 천국을 느끼게 했다. 우리 다렁이가 까줘서 그런가? 오렌지도 평소보다 훨 맛있네. 행복해하던 나는 남은 반쪽을 녀석에게 주기 위해서 고개를 돌렸다.
"형…"
"엉?"
그때, 고개를 숙이고 오렌지 까기에 여념이 없던 녀석이 문득 입을 열었다.
"어제……"
"……."
"어제 일은……."
"아, 아! 어, 어제 말이지? 너, 너무 좋았지?!"
묘하게 뜸을 들이며 다음 말을 못 잇는 녀석을 참지 못하고 내가 외쳐버렸다. 아, 근데 내가 뭐라고 말한 거지? 순간적으로 외친 거라 본심이 나가고 말았다! 스스로 말해놓고도 놀라서 눈을 크게 뜨는데, 오렌지를 까던 다현이 문득 손을 멈추고 내쪽을 보았다. 매우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아, 저기 그러니까…… 나, 난 좋았는데! 너, 너, 넌?!"
"……."
"아, 그러니까 말이야. 다른 사람이 해주니까 어, 엄청 좋더라고……! 너, 넌 싫었냐?"
"……."
으… 대답 좀 해라, 다렁아.
다현이는 혼자 시간이 멈춰버린 사람처럼 그대로 굳은 채 말이 없었다. 굉장히 놀란 표정을 하고는 횡설수설하는 내 얼굴만 빤히 바라보고 있다. 대, 대답 좀 해, 이 놈아…… 시, 싫었구나. 나는 쥐구멍에 숨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하, 하긴. 내가 좀 못 하지…?"
나는 완전히 의기소침해져서 중얼거렸다.
"……."
다현이는 여전히 대답이 없다. 나는 푹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힐끗 옆쪽을 보았다. 다현이는 어느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눈앞에 놓인 오렌지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만에 다현이 입을 열었다.
"…그럼 또 할래?"
"어, 어, 어?!"
그런데 한참만에 나온 대답이 왜 그렇게 선정적이냐, 다렁아…!
나는 화들짝 놀라서 세번이나 되묻고 말았다. 다현이는 여전히 내 쪽은 보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못 하면 연습하면 되지."
"……."
"내가 가르쳐 줄게."
"……."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멍하니 다렁이 얼굴만 쳐다보았다. 썰렁한 침묵이 이어진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입을 나는 힘겹게 열었다.
"지, 지금?!"
……그런데 또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왜 이 모양이야.
그 말에 다현이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또 놀란 표정이었다.
"꼭 지금이 아니라도……"
"……."
"형이 원할 때……."
"……."
두근두근.
묘하게 내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르는 게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또, 또 하자는 건 너도 좋았단 이야기지, 다렁아? 그, 그렇지?
"그, 그래. 또, 또 하자! 조, 좋네. 형제가 있으면. 이럴 때 참 좋구나!"
쑥스러워 미치겠다. 오바해서 밝게 말하며 으하하하 웃어보이자 옆으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다, 다렁아. 뭘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그러냐.
"…그럼 제대로 해볼래?"
"……."
제, 제대로?! 뭘 제대로?!
나는 끼기긱 고개를 돌려 다현이를 쳐다보았다. 다현이는 특유의 무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형, 하늘이 좋아하잖아."
"……."
여기서 왜 하늘이 얘기가…….
라고 생각하던 나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하늘이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어떻게 하늘이를 잊을 수가 있지……! 나 하늘이를 좋아하는 게 맞긴 맞는 건가?
스스로 매우 충격받고 있는데 내 정신 사정은 전혀 고려해주지 않는 다현이 다시 말을 이었다.
"……하늘이랑 할 때…… 서툴면 싫어할 텐데."
하, 하늘이랑 해? 뭐, 뭘?!
그대로 녀석을 바라보며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는데, 힘겹게 입을 열던 녀석이 어느 순간 쾅 하고 테이블을 내리쳤다. 으, 으메…! 까, 깜짝이야! 다, 다렁아. 왜 죄 없는 테이블은 내려치고 그러냐?
다현이는 갑자기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싸맸다. 왜, 왜 저러지? 걱정되서 말을 걸려고 하는데 녀석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덕분에 나는 또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아무 것도 아니야."
"……."
"…못 들은 걸로 해."
"……."
그렇게 말하고 다현이는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한 번도 내려오지 않았다.
두근두근…….
나는 그날 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오늘 오후에 들은 다현이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또 할래?'
'이번엔 제대로……'
'지후야……'
으아아, 내가 왜 이러지. 끓어도 너무 끓는가 보다. 이러다 정말 변태 되겠다.
나는 이불을 푹 뒤집어 쓰고 다른 생각을 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오늘 낮에 들은 녀석의 말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더불어 그 섹시한 목소리도.
자, 잠을 자자, 지후야. 제발 자자.
"……."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가슴 속 밑바닥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호기심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제대로 하면 어떤 기분일까? 그냥 만져주는 것만 해도 기분이 좋았는데 그것보다 훨씬 더 좋을까?
아, 아무래도 그렇겠지? 다렁이랑 해서 뭐 기분 나빴던 적이 있었어야 말이지…….
'지후야……'
녀석의 목소리를 떠올리자 다시 가슴이 술렁거렸다.
다렁이는 그런 목소리를 낼 때 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또 할래?'
'형이 원할 때…….'
"…!"
나는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충격에 가득 차 눈 앞에 놓인 방문을 쳐다보았다.
정신이 들어보니 나는 어느새 다현이의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미, 미쳤어, 정지후…!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올라온 거야? 니가 드디어 정신이 나갔구나!
나는 당황하여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뒤늦게 돌아온 이성에 그대로 머리를 찧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내, 내가 왜 이러지? 아무래도 요즘 너무 욕구불만이었나 보다. 이러다 정말 큰일나겠어. 어, 얼른 내려 가자.
나는 휙 몸을 돌리고 재빨리 계단을 내려가려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달칵, 하고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허억─!"
나는 몸을 돌리고 걸어가려던 자세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쿵, 하고 요란한 소리가 울린다. 동시에 엉덩이에서 따끔한 충격이 일었다.
으으… 아프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얼굴을 들었다. 방문을 열고 나온 녀석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아하하하……. 나도 이젠 모르겠다…….
"하, 하자. 다렁아."
나는 어설프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
다현은 문을 열고 나오려던 자세 그대로 굳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녀석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으…… 이제 그만 무슨 반응이든 해줘라, 다렁아. 나 얼굴에서 경련 일어난단 말이다.
민망함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대로 벌떡 일어나서 계단을 뛰쳐내려가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다.
아,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하지? 뭐 다른 말로 바꿀 말이 없을까? 음, '뭘 그렇게 놀라고 그러냐? 운동하자고' ……라고 하기엔 시간이 너무 늦고. 청소하자? 공부하자? 으아아! 아무리 해도 적당한 말이 떠오르질 않는다! 어떻게 얼버무려도 눈치챌 것 같았다.
그렇게 참기 힘든 침묵 속에서 점점 이 사태를 어떻게 해야한다는 압박감만이 가중되고 있을 때였을 거다. 밑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소리가 들려와, 우리 사이에 존재하던 팽팽한 공기를 갈랐다.
"지후야? 무슨 일이니?"
어, 엄마…! 나이스 타이밍! 오늘 아침에 이어 저를 두 번 구하시는군요!
진정 그 순간 만큼은 엄마의 목소리가 천사가 내는 구원의 목소리로 들렸다.
"이 시간까지 안 자고 뭐해? 넘어졌니? 왜 다현이 방에서 그러고 있어?"
계단 밑으로 모습을 드러낸 엄마가 우리를 발견하곤 놀라 물었다. 나는 엄마에게 대충 상황을 꾸며 설명하고 이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내가 막 엄마를 향해 입을 열려 했을 때,
"요즘 형이랑 같이 숙제를 하고 있거든요."
……꽤나 침착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흘러나왔다.
응?
나는 화들짝 놀라 옆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느새 평소 때의 표정으로 돌아온 다현이 무덤덤하게 엄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모르는 거 있으면 제가 언제든지 물어보러 오라고 했는데, 아마 형이 막 노크를 하려던 참에 제가 문을 열어서 놀란 것 같습니다. 별일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주무세요."
"어, 그래? 이 시간까지 열심히 하는 구나. 뭐 간식거리라도 갖다줄까?"
"괜찮습니다. 내일 일 나가시려면 일찍 주무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응…… 그럼 잘들 자렴."
"안녕히 주무세요."
"……."
나는 그때까지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녀석의 화려한 언변에 놀라 넋이 나가있었다. 아니, 다렁아. 사정을 아는 내가 들어도 꼭 진짠 줄 알겠다. 너 너무 능숙한 거 아니냐?
그렇게 나는 입까지 헤벌리고 녀석의 옆 얼굴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마침내 방으로 돌아간 엄마가 탁 하고 문을 닫는 소리가 들린다. 그때까지도 조용히 앞만 보고 있던 다현이 드디어 내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들어가자."
그렇게 말하며 불쑥 손을 뻗는다.
"아, 응…"
나는 어색하게 대답하며 그 손을 쥐고 일어났다. 다렁이의 손은, 조금 찼다. 나는 그제야 상황을 무마시키고 도망가려던 나의 계획이 무산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그러면 정말 녀석과 하게 되는 건가? 지, 진짜로?
두근두근. 심장이 심하게 요동친다. 다현이의 손에 이끌려 방에 들어가고 나자 탁 하고 문이 닫혔다. 동시에 철컥 하고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린다.
"……."
그제야 묘하게 현실감이 느껴졌다. ……아니, 전혀 현실감이 없는 것도 같이도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다현이의 방에 들어온 건 이번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은 놀라울 정도로 깔끔하고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과연 다렁이의 방이다……. 여자애 방에 들어온다고 해도 이 정도는 아니겠어. 새삼 감탄하고 있는데 문득 다현이 내 옆에 가만히 선 채로 미동도 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
왜 저러지? 다, 다렁이도 긴장하고 있는 건가?
풋…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래, 짜식. 겉으로는 능숙한 척 해도 속으론 많이 긴장하고 있다 이거지. 그래그래. 그렇담 이 형이 먼저 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어주마.
"저, 일단 씻, …!!"
그러나 나는 말을 다 끝맺지 못했다. 다현이 다짜고짜 입술을 부딪쳐왔던 것이다.
"잠, …흐읍."
나는 매우 당황해 그대로 한발짝 물러났다. 그러자 꽉 하고 허리를 끌어안는 힘이 느껴진다. 놀라서 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아플 만큼 입술이 빨리고 혀가 엉켰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녀석의 눈동자가 바로 코 앞에서 묘하게 짙은 색을 하고 내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
나는 민망함에 시선을 피했다. 그 순간, 한쪽 다리가 걸리고 뒤로 중심이 쏠렸다.
"…!"
놀라서 눈을 질끈 감는 것과 동시에 풀썩 소리가 났다. 머리 위로 푹신한 감촉이 닿는다. 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녀석의 혀가 정신없이 내 입안을 헤집고 있었다.
문득 한쪽 손이 셔츠 안으로 불쑥 들어와 가슴 위를 더듬거렸다.
"아…! 다, 다렁아, 자, 잠깐만…!"
녀석의 입술이 귓불로 옮겨간 사이 나는 급히 외쳤다. 하지만 다현이는 나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전혀 멈출 기색이 없었다. 귓속으로 혀를 집어넣고 굴리다 다시 귓불을 빨고, 가슴 위를 더듬던 손이 유두를 꼬집는다.
"흐…!"
나도 모르게 거친 숨결이 터져나왔다. 그러자 녀석은 잠시 멈칫하더니, 셔츠 끝을 잡고 가슴 위까지 확 걷어올렸다. 그러고는 손으로 잡지 않은 반대쪽 유두를 입에 물고 마구 빨기 시작한다.
"다, 다렁…… 하앗! …임마! 처, 천천히 좀……."
간신히 제대로 된 말을 내뱉었나 했는데 녀석은 속도를 늦추기는 커녕, 더 성급하게 바지를 벗겨버렸다. 이윽고 팬티를 발목까지 끌어내리고 반쯤 일어서 있는 내 중심을 움켜잡는다.
"…!!"
그 지나치게 빠른 전개에 나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다, 다렁아…… 너 엄청 쌓였었구나…….
난 온몸으로 부딪쳐오는 녀석 때문에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녀석의 손의 움직임을 제대로 따라가는 것만 해도 벅차다.
다렁아, 뭐가 이렇게 급하냐? 엉? 나 가르쳐 준다며? 이렇게 빨라서야 내가 어디 제대로 배울 수나 있겠어?
속으로 조금 투덜거리는데 내 중심을 잡은 녀석의 손이 위아래로 빠르게 훑어내렸다. 금방 터질 듯이 발기한 하체가 녀석의 능수능란한 손놀림에 얼마가지 못하고 사정한다.
"아…… 후우……."
그래도 기분은 좋다……응…….
나는 고개를 젖히고 사정의 여운에 젖으려 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감상에 빠져있을 새도 없이 엉덩이 사이에 미끌미끌한 감촉이 닿았다. 에? 고개를 들고 밑을 쳐다보자 다현이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 뭔가 열심히 하고 있었다.
"다, …헉!"
의아함에 녀석의 이름을 부르려던 나는 곧 입을 틀어막으며 숨을 삼키고 말았다. 엉덩이 사이로 낯선 이물감이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아, 으… 자, 잠깐만!"
나는 재빨리 상체를 일으켜 녀석을 만류하려 했지만 무리였다. 오늘따라 다렁이가 내 말을 들은 척도 안 한다. 이 녀석이 완전히 퓨즈가 나갔나. 왜 이래!
"다, 다렁아…! 좀 천천히 해!"
"……."
대답도 없고. 흑.
엉덩이 안에 들어온 낯선 이물감은 몇번 이리저리 안을 긁어대더니 빠져나갔다. 아, 드디어 다렁이가 내 말을 들어주려나보다……. 그러나 그 순간 엉덩이 사이로 뜨거운 게 닿았다.
"…!"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눈치챈 내가 하얗게 질렸을 때, 녀석은 무작정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악…! 윽… 아, 아파…! 다현아!"
무작정 밀어붙이는 게 가히 속수무책이다. 너무 아팠다. 더 이상 무리일 것 같은데도 자꾸만, 자꾸만 안으로 밀고 들어온다. 나는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갑자기 녀석의 손이 뻗어와 내 입을 꽉 틀어막았다. 나는 너무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다현이를 보았다. 다현이는 내 얼굴을 보고 있지 않았다.
"너무 큰 소리 내면 밑에 층에 들려."
녀석은 고개를 돌린 채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삽입을 시도했다. 나는 눈만 크게 뜬 채 영문을 몰라하다가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다시 몸부림을 쳤다. 왜 이러지, 다렁이…… 뭐 화가 나는 일이 있었나……?
"으, 다, 다현아, 좀만 천천히…"
"하아, 헉…"
녀석도 고통스러운지 거친 신음을 뱉어냈다. 반 정도 삽입된 녀석의 성기가 더 이상 밀고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다현이는 내 위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입술을 질끈 깨물고 동작을 멈췄다. 가슴 위로 땀이 뚝뚝 떨어져 내린다. 그 섹시한 얼굴을 정면에서 바라본 탓인지, 아니면 한숨 돌릴 기회가 생긴 탓인지, 나는 조금씩 흥분이 일기 시작했다. 축 늘어져있던 성기가 다시 고개를 든다.
그러자 반쯤 감겨있던 다현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녀석은 어쩐지 굉장히 괴로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형…"
"!!"
"지후야…"
"!!"
그와 동시에 반 정도 삽입되어 있던 녀석의 성기가 끝까지 밀어져 들어왔다. 투둑, 하고 뭔가가 찢어지는 소리가 난다. 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눈을 부릅 떴다. 너무 아팠다. 아파서 죽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내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현이 위아래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 다현…! 응, 아…!"
위아래로 오르락 내리락 하던 녀석의 성기가 문득 어느 지점을 건드렸을 때, 척추를 타고 찌르르하는 쾌감이 올라왔다. 아, 너무 혼자만 밀어붙이는 것 같아서 조금 얄미워지려고 하고 있었는데…….
"아, 아, 아… 응……앗……!"
녀석의 피스톤 운동이 점점 빨라졌다. 나는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기 위해, 녀석의 움직임에 내 움직임을 맞추려 애썼다. 쾌감점에 닿았다 말았다 하는 움직임이 안타까워 미칠 것 같은 기분을 갖게 만들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헉헉 하고 신음을 흘리던 녀석이 제길, 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
아……?
나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때, 녀석이 양손으로 내 다리를 꽉 붙잡으며 뿌리 끝까지 강하게 삽입해왔다.
"…!"
나는 다시 눈을 부릅 떴다. 한번 더 뭔가가 찢어지는 소리가 난다. 고통으로 허리를 퉁기는 내 어깨 위로 녀석이 얼굴을 묻었다.
"제길, 제기…랄, 빌어먹을…!"
"……?"
다…현……아……?
욕설 자체보다는 물기 가득한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나는 고통 속에서도 힘겹게 고개를 들어 녀석의 얼굴을 보려 했다. 하지만 녀석이 워낙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다현아…… 너 설마 우냐……? 우는 거야?
왜…….
라고 생각한 순간, 한번 더 뿌리 끝까지 삽입이 되며 뜨거운 액체가 내부를 가득채웠다.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새벽녘에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나는 희미하게 눈을 떴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 위로 낯익은 뒷모습이 보인다. 다현이었다.
다현이…… 안 자고 뭐하고 있는 거지…….
몽롱한 의식 속에서도 의아한 생각이 들어 나는 멍하니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다현이는 침대 끝에 앉아서 조용히 얼굴을 숙이고 있었다. 혹시 저 상태로 잠든 건가?
"……현, 다현아……."
나는 힘겹게 녀석을 불렀다. 탁 하고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나온다. 내 부름에 녀석이 움찔 몸을 떨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 역시 자는 건 아니었구나…….
"뭐…해…? 안 자…?"
"……."
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린 채 가만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딘지 눈가가 붉어보인다. 괴로운 듯 미간에 주름을 만들고 날 바라보는 시선이 왠지 모르게 굉장히 애처로워보였다.
뭔가를 강하게 호소하는 것 같은 눈빛.
그러나 입은 열지 않는다.
왜 그래, 다현아……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아, 잠들면 안 되는데…….
나는 다시 쏟아지는 잠을 참지 못 하고 의식의 끈을 놓았다.
***
눈을 뜨자마자 아래 쪽에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
윽……. 진짜 아프다. 화끈거려 미칠 것 같아.
나는 끙끙 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뭔가가 어깨를 강하게 누르고 있어 몸이 일으켜지지가 않았다.
"…?"
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무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 다렁이구나…….
바로 정면에 있는 녀석의 얼굴에 흠칫 놀랐던 나는 금방 웃음 짓고 말았다. 녀석이 내 어깨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마치 어리광을 부리듯 내 한쪽 어깨로 이마를 푹 파묻은 다현은 앞머리가 헝클어져 있어 평소보다 조금 풀어진 모습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웃으면서 지켜보다가 문득 어젯밤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다렁이…… 어제 좀 이상했는데…….
몽롱한 기억이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꿈인지가 모호하다. 무언가를 호소하듯 날 바라보던 눈동자. 물기 가득한 목소리.
다렁아, 무슨 일이 있는 거냐?
갑자기 녀석에 대한 걱정과 함께 미안한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넌 고민이 있어 말도 못 하고 끙끙 앓는데, 내가 그걸 몰라주고 너무 철없이 굴었나 보구나. 이런……. 미안하다, 다렁아. 그래서 네가 어제 그렇게 화가 났었구나.
그래도 고민이 있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그럼 난 진지하게 들어줬을 텐데.
왠지 찡한 느낌이 들어 나는 녀석의 헝클어진 앞머리를 쓸어주려 했다. 하지만 손이 닿기 직전에 녀석이 눈을 번쩍 뜨며 일어났다.
"아……."
녀석은 날 보고 조금 당황한 모습으로 몸을 일으켰다.
"잘 잤어?"
"……."
일부러 한층 밝게 건네본 내 인사에도 대답이 없다. 녀석은 조금 놀란 듯한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있더니, 한참 뒤에 간신히 입을 열었다.
"괜…찮아?"
"……."
……아니. 괜찮을 리가, 다렁아. 하나도 안 괜찮다.
솔직히 말하면 너무 아파서 죽을 것 같지만…… 녀석 성격에 그렇게 말하면 엄청 미안해하겠지……?
"엉. 괜찮다, 다렁아…! 이 정도야 변비를 심하게 앓았을 때보다 덜 하지! 핫! 핫! 핫!"
"……."
내 말에 녀석은 다시 당황한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아이고, 식은땀 난다. 거짓말 하려니까 말이 오바해서 나오네. 무슨 변비 두 번 걸리면 송장을 치르겠다.
"……안, 형……."
"응?"
녀석은 멍한 표정으로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더니 문득 괴로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해……."
"……."
아니, 니가 왜 사과를 하고 그러냐, 다렁아?
녀석의 그 모습에 이번엔 내쪽이 더 당황해 버렸다.
"뭐가 미안해?"
"……."
"우리 둘이 같이 하기로 하고 그런 거잖아. 그런데 뭐가 미안해?"
"……."
하지만 다현이는 대답이 없었다. 괴로운듯 양미간을 찡그린 채 바닥만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다. 다, 다렁아. 왜 그러냐. 니가 미안해할 건 하나도 없다니까.
난 녀석의 그런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외쳤다.
"그…… 괘, 괜찮다니까, 다렁아! 접때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괜찮았어!"
당황해서 외치자 다시 녀석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본다. 그 모습에 왠지 민망해져서 나는 되는 대로 중얼거렸다.
"그, 그런데 너야말로 연습 좀 해야겠더라? 조, 좀 아팠다."
"……."
……아무래도 난 그냥 입 다물고 있는 게 낫겠어.
할말을 잃은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보는 다현이를 보며 난 결국 그렇게 결론 지었다. 샤워나 하자, 샤워나. 땀을 많이 흘려서 그런지 온몸이 찝찝하구만.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도저히 하반신에 힘이 들어가지가 않았다.
"…!"
결국 몇발짝 걷지 못하고 넘어지고 말았다.
바닥에 털썩 하고 무릎을 찍는 순간, 아래 쪽에서 주르륵 하고 뭔가가 쏟아지는 느낌이 났다. 갑자기 배가 참을 수 없는 복통을 호소해와 나는 이를 악물며 고개를 숙였다.
"…! 왜 그래?"
배를 잡고 웅크리고 있자, 다현이 급히 내 옆으로 뛰어와서 물었다.
크, 큰일났다. 다현이가 또 미안해할 텐데…….
난 녀석을 향해 힘겹게 웃어보이려 했다. 하지만 도저히 웃어지지가 않았다. 엄청난 통증 탓에 입가가 절로 경련이 일어난다. 식은땀이 얼굴 가득 배이는 것 같았다.
"배, 배가 너무 아파, 다렁아……."
결국 나는 솔직하게 말해버렸다.
다현은 굉장히 당황한 것 같은 표정으로 안절부절 못 했다. 녀석은 웅크리고 있는 내 어깨를 꽉 붙잡은 채 한동안 방황하더니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잠깐 기다리고 있어 봐."
"응?"
다, 다렁아? 어, 어디 가? 나 혼자만 두고 가지 마. 다렁아……!
고통 속에 제대로 소리도 못 내고 있는 사이 탁 하고 방문이 닫혔다. 나는 텅빈 방에서 홀로 끙끙 대다가 그대로 실신했다.
아래 쪽에서 뭔가가 불쑥 들어오는 느낌에 정신이 들었다.
아, 뭐야…… 이상한 느낌… 하지마…….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희미하게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로 하얀색 타일과 주황색 불빛이 눈에 들어온다. 뭐야, 욕실인가? 그래도 어떻게 들어왔네…… 라고 멍하니 생각하던 나는, 문득 정신이 번쩍 들고 말았다.
으아아아! 지금 뭐 하는 거냐, 다렁아?!
"형?! 정신이 들었어? 괜찮아?"
나는 당황해서 녀석을 밀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녀석이 너무 무서운 기세로 물어와서 그럴 수가 없었다. 거, 걱정했구나, 다렁아. 결국 나는 떨떠름하게 대답하며 녀석을 밀어내려던 손을 놓았다.
"아, 으, 응…… 괘, 괜찮아."
이 손가락만 빼주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지금 이 상황을 인지해보려고 노력했다.
왜 내가 다 벗고 욕조 턱에 앉아서 다현이의 품에 안겨있는 걸까? 아까 방바닥에서 쓰러졌던 것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아니, 뭐. 그래, 여기까진 그렇다 치자. 여기까지는 별 문제 없다.
그런데…….
"뭐, 뭐하는 거야?"
엉덩이 안을 헤집는 이 야시꾸리한 감각은 도대체 뭐란 말이냐…….
난 참지 못하고 다현이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다현이는 동작을 멈출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더 열심히 헤집으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해야 편해진대."
편해진다고……? 누, 누가 그래?
타인의 말을 전하는 듯한 그 말이 신경쓰였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꿀럭꿀럭 하고 자꾸 밑에서 뭐가 빠지는 소리가 난다. 으, 민망해라. 차라리 귀를 막아버리고 싶다.
"다 됐어."
한참을 헤집던 녀석이 중얼거렸다. 나는 대답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왠지 이 상황이 지독하게 부끄러웠다.
"…씻을래?"
잠시 내 눈치를 살피고 있던 녀석이 중얼거렸다.
"엉…."
내가 대답하자 조심스럽게 나를 안아들더니 욕조에 앉힌다. 녀석은 위에 걸려있던 샤워기를 빼들고 자신의 손바닥을 향하게 한 채 수도꼭지를 틀었다. 아마 온도를 맞추는 것 같다.
"……."
나는 욕조에 앉아서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팔뚝까지 걷어 올라간 셔츠 위로 보이는 단단한 팔뚝이 묘하게 시선을 끈다. 진지하게 물 온도를 맞춰보는 표정이 가슴을 두근리게 만들었다.
내, 내가 왜 이러지…….
나는 시선을 내리고 고개를 숙였다. 왠지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 지, 진정하자, 정지후. 진정해…….
스스로에게 몇번이나 되뇌고 있는 사이 샤워기가 내 몸을 향했다. 물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미지근하지만 적당히 시원한 물. 그 물 온도에 담겨진 엄청난 배려에 나는 가슴이 먹먹해져오는 것을 느꼈다.
다렁아…… 난 니가 내 동생이라서 너무 기뻐. 이건 진짜야.
평생 너하고 둘이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어.
혼자서 감격에 차 있는데 문득 샤워솜에 거품을 내고 있던 녀석이 나를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녀석을 올려다 보았다.
"왜…?"
내 물음에 녀석은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다시 다물었다. 뭐지? 말하기 힘든 건가? 나는 조용히 녀석의 입으로 주의를 집중했다. 녀석은 몇번이나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한참만에 비로소 힘겹게 중얼거렸다.
"우리……말자."
응?
하지만 소리가 너무 작아서 듣지 못했다.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녀석을 보았다. 녀석은 다시 한번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하지 말자……."
"……?"
"앞으로 이런 건, 하지 말자고."
"…!"
나는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 머리가 띵하고 울리는 것 같았다. 하지 말자고? 이런 거라고? 그 말이 왠지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가슴이 지끈하고 고통을 호소했다.
"왜… 시, 싫었냐?"
나는 한참 뒤에 간신히 입을 열었다. 녀석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볼 수가 없어 고개를 푹 숙인 채 였다. 난 좋았는데. 아팠지만 그래도 꽤 좋았는데…….
내 질문에 녀석은 잠시 뜸을 둔 뒤 대답했다.
"…형이 전에 그랬잖아. 형제끼리 이러는 건 이상하다고."
"……."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
아, 그래. 그랬지. 물론 그랬지만…….
뭔가 말하려고 하는데 녀석이 다시 내뱉듯 입을 열었다.
"그동안…… 미안했어. …형."
"?"
……그 동안 미안했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뭔가 이상한 뉘앙스가 느껴지는 말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녀석을 보았다. 하지만 녀석은 내 얼굴을 보고 있지 않았다. 어느새 시선을 내리고 내 몸을 닦는데 열중하고 있다.
뭐야, 다렁아…… 너 어디 먼데라도 떠나는 거야? 그런 건 아니지?
나는 충격으로 굳은 채 녀석이 내 몸을 닦는 내내 움직이지 않았다. 왠지 가슴이 쥐어짜는 것 처럼 아팠다.
그래서 녀석에게 물어볼 말이 정말 많았는데도……
나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죄책감이라도 느낀 걸까.
그러고 보니 어제 녀석의 행동이 이상했던 게 떠오른다. 잠결에 눈을 떴을 때 보였던 그 슬픈 표정. 그건 뭔가를 결심한 것 같이도 보이는 표정이었다.
나는 다현이 침대에 멍하니 누워 생각에 잠겨 있었다. 결국 목욕이 끝날 때까지 녀석과는 별다른 대화를 하지 못 했다. 내내 흐르던 썰렁한 분위기 속에서 목욕이 끝나고, 다현이는 밥을 가져온다며 부엌으로 내려갔다.
그동안 미안했다는 말은 그 키스 사건부터를 가리키는 거지? 응, 다현아…?
그렇다면 미안해할 게 하나도 없는데. 나는 한번도 기분 나빴던 적이 없었으니.
여하간 녀석이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지는 몰랐다.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형제끼리 이런 짓까지 하는 건 너무 심하지. 앞으로는 다현이 말대로 하지 않는 게 더 좋겠다. 그냥 녀석이랑은 같이 있기만 해도 좋으니까.
아, 그러고 보니 다렁이에게 무슨 고민이 있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아직 못 물어봤구나. 이따 올라오면 물어봐야겠다.
나는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얌전히 누워 다현이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어서 올라와라, 다렁아. 빨리 와봐. 네가 힘들어하고 있는 걸 몰라줘서 미안해…….
그렇게 방안에 홀로 누워서 녀석에게 어떻게 말을 꺼낼 지만 계속 반복해서 생각하고 있을 때 였을 거다. 달칵, 하고 마침내 문이 열렸다.
아…….
나는 밝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안녕, 지후야. 잘 지냈어?"
그러나 문을 열고 방안에 들어온 인물은 전혀 뜻밖의 인물이었다.
나는 놀라움으로 눈을 크게 떴다. 잠깐 못 본 사이에 머리를 짧게 깎은 녀석은 이 더운 여름 안에서 혼자 시원해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늘아…?"
왜 하늘이가 여기에.
나는 망연자실해서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
하늘이는 문가에 팔을 기대고 선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지금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 입만 헤 벌리고 그런 하늘이를 봤다.
하늘이? 하늘이가 난데없이 어디서 나타난 거지?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인물 출현에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마치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 듯이 멍하니 앉아있는 나에게 하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프다면서?"
헉.
난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으, 응? 그, 그런가? 아, 그렇다. 하하."
젠장! 이렇게 우스운 대답이라니! 정말 지레 찔려 나 '껄끄러운 게 있소'라고 광고하는 꼴이잖아!
나는 스스로의 바보스러움을 한탄하며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진다.
"지나가는 길에 들렸어. 갑자기 나타나서 놀랐지?"
하지만 하늘이는 내 이상한 대답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 내 앞까지 걸어오며 말했다.
그야 물론이지, 하늘아. 네가 동에 번쩍하고 서에 번쩍하는 거야 진작 알고 있었지만 이번엔 좀 많이 놀랐다.
나는 열심히 정신을 수습하고 힐끔 곁눈질로 하늘이를 쳐다보았다. 헉! 그러나 바로 당황하며 눈을 돌리고 말았다. 하늘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어색함에 웅얼웅얼 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기, 다현이는?"
"……성질 좀 죽이라니까."
"응?"
"아, 아무것도 아냐. 다현이? 다현이는 부엌에서 밥 하던데."
방금 뭐라고 참 의미심장한 말을 중얼거린 것 같은데, 하늘아.
내가 미심쩍은 시선으로 쳐다보는 걸 느꼈는지 하늘이는 슬쩍 말을 돌렸다.
"내려가자, 지후야. 안 그래도 너데리고 내려오라고 해서 올라온 거거든? 스파게티 했는데 냄새가 아주 끝내주더라구."
하지만 나는 그 말 돌리기에 멋지게 넘어가고 말았다. 스파게티라고? 오오, 그것도 우리
다렁 각시가 한 스파게티란 말이지! 그렇담 내 당장 내려가야지!
"으악!"
하지만 나는 침대에서 벗어나기가 무섭게 바로 넘어지고 말았다. 다리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풀썩 하고 꺾인 무릎이 그대로 바닥에 찍혀 너무 아팠다. 으아아, 제기랄. 이거 내 다리 맞아? 확 잘라내버리고 싶네! 답답함에 조금 잔인한 충동까지 일려는데, 문득 무릎 아래로 손이 들어왔다. 어라? 라고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둥실 몸이 떴다.
"!!"
으아아아! 하늘아, 이게 무슨 짓이야?
나는 매우 당황했으나, 본능적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하늘이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그런 나를 보며 하늘이는 싱긋 웃었다.
"좋지?"
"……."
아니. 쪽팔려 죽겠다.
하지만 나는 별 반항은 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걸어갈 힘이 하나도 없었다. 대신 많이 쪽팔렸으므로, 하늘이랑 눈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서 녀석의 어깨에 턱을 걸쳤다. 자연히 노란 머리카락이 시야를 서성였다. 그러고 보니 색이 더 옅어진 것 같네.
"머리 바뀌었네?"
"엉. 여름을 맞이하여 스타일 좀 바꿔봤다. 이게 바로 요즘 유행하는 샤기컷이란 거지. 어울려?"
"풋. 더 양아치다워 졌다."
"허허. 죽을래, 지렁아? 이 녀석이 미를 몰라요."
하늘이의 투덜거림에 난 그대로 넘어갈 뻔 했다.
"푸하하하, 하늘아! 지렁이는 언제 배웠어?"
"늬들 대화하는 거 보면 안 배우고 싶어도 배우게 되어 있……지."
하늘이가 뒷말을 묘하게 끌어서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 어느새 부엌에 도착했나 보다. 식탁에 접시를 내려놓고 있던 다현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데려왔어."
하늘이는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슬그머니 녀석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내렸다. 왠지 모르게 다현이 앞에서 하늘이랑 같이 있는 건 껄끄럽다. 잠시 이쪽을 조용히 응시하는 듯 싶던 다현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대답했다.
"앉아."
"엉."
하늘이는 나를 의자에 내려놓고는 정면에 가서 앉았다. 어? 그러고 보니 접시가 왜 두개지? 의아해하고 있는데 다현이 우리 앞으로 와서 스파게티를 덜어주었다. 나는 힐끔 곁눈질로 녀석을 쳐다봤다.
"……."
당최 저 얼굴에서 생각을 읽는다는 게 가능할 리가 없지. 내가 너무 헛된 시도를 했다.
슥슥 무심한 얼굴로 스파게티를 덜고 있는 다현이에게 난 결국 참지 못하고 물어봤다.
"니 껀?"
멈칫.
내 말에 녀석의 손이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나 녀석은 곧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말했다.
"…난 볼일이 있어서 나갈 거야."
나간다구? 지금?
"어디 가는데?"
"…그냥, 잠깐."
그냥 잠깐이 대체 어디냐, 다렁아?
왠지 얼버무리는 듯한 대답에 미간을 모으고 있는 사이, 녀석은 스파게티 덜어내는 작업을 모두 마친 듯 했다.
"저기, 다렁아."
난 어느새 앞치마를 벗어서 차곡차곡 개고 있는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등만 보이고 있던 녀석이 다시 멈칫한다. 녀석은 왠지 모르게 한동안 뜸을 두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왜?"
"어, 아니, 저기… 너 무슨……"
고민있냐?
까지 말하려던 나는 뒷말을 삼켰다. 그러고 보니 앞에 앉은 하늘이가 신경 쓰였다.
……뭐, 하늘이라면 괜찮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역시 이런 얘기는 다른 사람 앞에서 물어보기가 좀 그렇다. 물어본다고 해서 솔직한 대답도 안 나올 것 같고.
아무래도 이따가 둘이 있을 때 분위기 잡아서 물어보는 게 낫겠어……. 거기까지 판단한 나는 손을 휘휘 저었다.
"아, 아무 것도 아냐. 잘 다녀와."
"……."
그런데 그 말에 다현이 잠시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어?
"형……."
"으, 응?"
"…아냐. 갈게."
"……."
설마 방금 그거 복수한 거야? 조금 전 내가 했던 말에 대한?
잠시 벙쪄 있는 사이 녀석은 그대로 부엌 안을 빠져나갔다. 나는 멍하니 녀석이 나간 자리를 보고 있다가 앞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안 먹어?"
아, 참……. 하늘이가 있었지.
나는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럴리가.' 라고 대답하며 포크를 집어들다가 내심 놀랐다. 그러고 보니 지금 이 집에는 하늘이랑 나, 둘밖에 안 남아 있었다.
다렁이 이 녀석은…… 얼마나 급한 볼일이길래 손님이 왔는데 나가고 그래.
조금, 아니 많이 섭섭한 감정이 가슴을 치고 올라왔다. 오늘은 왠지 평소 때처럼 너랑 둘이 있고 싶었어. 솔직히 얘기하면 난데없는 하늘이의 방문이 반갑지 않았을 정도야.
……그런데 날 이렇게 하늘이한테덜렁 맡겨놓는 식으로 버리고 나가버리다니. 꼭 일부러 나간 것 처럼.
'형이 전에 그랬잖아. 형제끼리 이러는 건 이상하다고.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그동안…… 미안했어.'
문득 조금 전에 녀석이 욕실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이 매우 신경 쓰였다.
설마 그 일 때문에 내가 불편해진 거냐, 다렁아? 그래서 날 피하려는 거야?
그때, 하늘이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정말 잘 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응?"
나는 시선을 돌려 하늘이를 보았다. 하늘이는 포크에 걸린 면가닥 몇개를 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몇 번 빙글빙글 돌리다가 문득 작게 한숨을 내쉰다. 왜 저러지? 의아해하고 있는데 하늘이 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난 조금 놀랐다. 하늘이의 시선이 평소보다 한층 더 짙은 빛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은 입을 열었다.
"나랑 사귈래? 지후야."
뭐……?
나는 할말을 잃었다.
뭐라……고?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나는 너무 놀라서 포크까지 떨어뜨렸다. 탁 하고 식탁에 한번 부딪친 포크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나는 너무 놀라서 그런 곳에 신경쓰고 있을 여유도 없었다. 그저 눈만 크게 뜬 채 포크를 떨어뜨린 자세 그대로 하늘이를 보고 있었을 뿐이다. 조용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하늘이 갑자기 빙긋 웃었다.
"심하게 놀라네. 그렇게 갑작스러웠나?"
"아, 저…… 그……"
이건 심하게 놀랐단 말로 표현할 정도가 아니다, 하늘아! 난 완전 혼이 빠져나가는 줄 알았단 말이다!
으아악! 하늘이 나보고 사귀재! 하늘이! 믿을 수 있어?! 하늘이라고?!
-라고 하늘(…)을 보며 절규하고 싶은 심정이 이는 걸 나는 필사적으로 참았다.
음, 말 장난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고. 어쨌든 그렇게 한참을 혼란 속에서 떠돌고 나서야,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왜?"
헉…….
그런데 한참만에 말이 되어 나간 게 이런 말이라니. 말해놓고 나도 놀랐다. 내가 하늘이가 사귀자는 말에 이런 말을 할 줄이야!
스스로가 한 말에 놀라 눈을 크게 있는데, 역시 마찬가지로 내가 한 말에 놀랐는지 하늘이도 눈을 크게 떴다. 녀석은 잠시 떨떠름하게 날 쳐다보더니, 식탁에 팔을 받치고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완전 정곡이네."
그 목소리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그런데 정곡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의아한 생각이 들고 있는 사이, 하늘이는 어느새 턱에서 손을 떼어내고 날 보고 있었다. 헉, 놀라라. 동작이 아주 휙휙 변하네. 녀석은 잠시 뭐라고 말해야할지 고민하는 듯 시선을 위로 향하더니 다시 날 보았다. 그리고 방금 전의 목소리와 조금도 다름 없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날 좋아하지, 지후야."
"!!"
그런데 그 말이 너무 직설적이었다…….
난 몹시 놀랐다. 너무 과하게 놀라서 심장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허, 헉. 이러다 정말 심장마비 걸리겠어. 이거야말로 완전 정곡이네. 혹시 아까 중얼거린 정곡이네, 라는 말이 혼자서 생각해보고 중얼거린 감탄사였던 건가? 그래! 그런가 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그건 곧 내 정곡을 찌르겠다는 예고편!
그 짧은 순간에도 별의 별 생각이 다 들고 있는데, 자칫 사람을 심장마비로 죽일 뻔 했을 수도(…)있던 하늘이는 태연자약한 얼굴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난 그 모습에 조금 원망이 밀려와 소리쳤다.
"여, 역시 알고 있었던 거지?!"
알고 있었으면서 어떻게 그럴수가! 그간 내가 얼마나 방황했는데!
그 편의점 사건 이후로 나를 피해다니기만 했던 하늘이었다. 간신히 다시 마주쳤을 땐 아예 모른 척 시침을 뗐었고.
그래서 난 그 시침을 떼지 못하게 해주리라 마음 먹고 술자리까지 따라갔었지. 그랬는데…… 그랬는데…….
"……."
그러나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좀 당황하고 말았다. 그 다음에 연결할 말이 없었다.
……나, 난 그래놓고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지. 아, 난 왜 이렇게머리가 나쁜 걸까.
뜻하지 않은 허무개그에 스스로에 대한 한탄감만 몰려오는데 하늘이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지금 내가 알고 있었다는 건 중요한 게 아니야, 지후야."
"?"
"중요한 건 네 대답이지."
"……."
그 말에 묘한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나는 긴장하고 눈앞에 있는 하늘이를 바라보았다.
─하늘이랑 사귀게 된다.
꿈 같은 얘기다. 시작할 때부터 짝사랑으로 끝날 거라고만 생각했던 사랑이었다. 그러니까 난 그냥 녀석 옆에서 보통 친구처럼 지낼 수만 있어도 좋다고, 많은 건 안 바라니까 그냥 그렇게만 지낼 수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런 하늘이가 나한테 사귀자고 한다. 나는 뛸듯이 기뻐해야함이 옳았다.
그런데 뭐지, 이 감정은……? 뭔가 자꾸 걸리는 것 같은 느낌.
누군가의 얼굴이 계속 켕기듯 가슴 속에 떠오른다.
'…하늘이가 그렇게 좋아?'
그리고 마침내 그것은 형상을 가지고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래……. 녀석이 쓸쓸해할지도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문득 망설여졌다. 그 녀석을 쓸쓸하게 만들긴 싫다. 그 녀석이 외로워하는 것은 싫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실은 내가 싫었다. 다른 사람을 사귐으로써 녀석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형이 전에 그랬잖아. 형제끼리 이러는 건 이상하다고.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뒤 이은 녀석의 말이 떠올라, 나는 정신을 차렸다.
그래, 맞아. 녀석은 부담스러워하고 있었어. 형제끼리 그런 관계까지 간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있어.
그렇다면…….
녀석도 나도 빨리 서로에게 졸업을 해야한다. 언제까지고 둘이 함께 지낸다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인 것이다.
미안해, 다현아……. 그래도 난 형이니까, 내가 먼저 졸업을 해도 괜찮지? 그래도 넌 용서해 줄거지?
난 굳게 결심하고 하늘이를 보았다. 하늘이는 생각에 잠겨있는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 보고 있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조, 좋아. 사귀자"
하늘이는 내 대답에 푹 웃었다. 어쩐지 묘한 분위기가 풍기는 웃음이었다.
나는 그날, 하늘이라는 멋진 애인이 생겼다.
그날 밤, 다현이는 밤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기다리다 지쳐 전화를 걸어보았다. 한참 신호가 가고, 안 받는가 싶어 수화기를 내려놓으려는 순간 녀석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쩐지 전화를 받는 목소리 마저도 한템포 느린 느낌이 든다. 나는 급히 물었다.
"어디 있어? 안 들어와?"
"…늦을 거야."
"어딘데?"
"……."
쿵쿵.
대답하지 않는 녀석의 수화기 건너편으로 음악소리가 들렸다. 음질은 멀게 느껴지지만 꽤나 시끄러울 것 같은 소리다. 뭔가가 울리는 진동이 요란했다. 뭐야, 어디에 있는 거야?
"먼저 자."
다시 물어보려고 할 때 녀석이 말했다. 나는 갑자기 말문이 막히는 바람에 멍하니 있다가 녀석에게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 해야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꼭 오늘 해야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빨리 녀석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다.
"언제 들어올 건데? 나 너한테 할말이 있어."
"지금 해."
"어?"
"지금 하라고. 길어?"
"……."
왠지 대답이 공격적이다. 왜 그러지? 뭐 기분 상한 일이 있었나? 나는 덕분에 조금 움츠러들고 말았다.
아, 어떡하지. 뭐라고 말해야 하나. 대뜸 '나 하늘이랑 사귀게 되었어'? 아냐, 그건 좀 그렇다. 일단 말로는 괜찮다고 했어도 내가 하늘이를 좋아하는 걸 별로 달가워하지 않던 녀석이다. 녀석이 어떻게 기분 상하지 않도록 잘 우회해서 말해야 할 텐데…….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사귄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갑작스러웠으므로 녀석을 잘 이해시킬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할말 없음 끊어."
라는 냉랭한 소리가 수화기 반대편에서 들려왔다. 나는 깜짝 놀랐다. 어, 아니, 다렁아…! 왜 그래?
"저, 저기, 다렁아……."
"……."
"나, 나, 나, 나말이다."
"……."
"하, 하, 하…… 윽, 하늘이랑 사귀기로 했어…!"
말했다!
너무 긴장했는지 그 짧은 사이에 숨결이 거칠어졌을 정도였다. 헉헉, 하고 숨을 몰아내쉬려 애쓰며 나는 녀석의 대답을 기다렸다. 수화기 반대편은 잠시 쥐죽은 듯 조용했다. ……는 아니군. 뭔지 모를 음악 소리는 계속 들려오고 있으니.
"…응."
그러나 한참만에 녀석이 대답한 말은 그게 다였다. 난 문득 굉장히 허무해졌다. 뭐야, 대답이 그게 다야?
그리고 내가 다시 뭐라고 말하려 했을 때였을 거다. 다현아, 라고 수화기 저쪽에서 녀석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여자 목소리였다.
「안 들어와?」
음질은 멀지만 여자가 하는 말이 선명하게 내쪽까지 들려왔다. 그 말에 다현이 잠깐만, 이라고 대답하는 소리도 들린다. 나는 수화기를 붙잡은 상태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럼 먼저 끊을게."
뚝-
그리고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전화기는 끊어졌다.
나는 왜인지 강하게 충격을 받아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
뚜뚜뚜뚜- 하고 울리는 신호음에 정신이 들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얼른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아, 놀라라. 웬 여자 목소리가…… 다현이 이 녀석, 지금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나는 복잡한 심정이 되어 방으로 돌아왔다. 왠지 큰 실망감이 느껴졌다. 녀석이 좀 더 엄청난 반응을 보여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뭐야, 이렇게 되면 하늘이가 가고 녀석에게 어떻게 말할지에 대해서만 고민한 내가 너무 바보같지 않은가.
‘…응.’
이라니. 할말이 정말 그게 다냐, 다렁아? 축하해, 라고 말해주진 않더라도 좀 더 무슨 반응을 보여줘야 될 것 아니야. ……뭐야, 그 관심 없다는 듯한 대답은. 완전 남 얘기 들은 것 처럼.
난 심란해서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 마지막에 들린 여자 목소리도 신경 쓰인다. 이 시간에 대체 여자랑 같이 뭐 하는 걸까? 이상한 음악 소리까지 들리고. 게다가 그 공격적인 말투…… 다렁아, 니가 무슨 탈선기 청소년인 줄 아냐?
슬슬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애초에 먼저 하자고 한 건 너였잖아. 왜 이제 와서 날 그렇게 껄끄럽게 대하는 건데? 대체 뭐가 문제야!
악─! 하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에 머리를 쥐어 싸매고 있는데 문득 현관 쪽에서 달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몇 시지? 얼른 시계를 확인해 보니 새벽 2시다. 맙소사.
나는 후다닥 현관으로 나갔다. ……라고 해도 아직 몸 상태가 온전한 건 아니었으니 썩 빠른 스피드는 아니었다.
그렇게 현관까지 도착한 나는 좀 놀라고 말았다. 다현이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조용히 현관 문에 기대 서 있었던 것이다. 뭐야, 안 들어오고 거기서 뭐하는 거야? 혼자 영화 촬영 하나?
……라는 생각이 들 만큼 녀석은 매우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뒤돌아서 문을 닫은 자세 그대로 등을 기댄 채 미동도 하지 않는다. 얼굴은 푹 숙이고 있어서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완전히 시선을 빼앗겨서 녀석을 부를 생각도 못 했다.
물론 내가 그랬다는 걸 눈치 챈 것도 녀석이 천천히 얼굴을 들었을 때였다. 고개를 든 녀석은 그 앞에 멀뚱히 서 있는 날 발견하곤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뻘쭘해져서 얼른 입을 열었다.
“어, 아, 저기. 와, 왔냐?”
“…….”
“왜 이렇게 늦었……!”
까지 말하던 나는 잠시 숨을 멈추고 말았다. 천천히 내 쪽으로 걸어오는 듯 싶던 녀석이 갑자기 다리를 휘청이더니 나에게 쓰러지듯 안긴 것이다. 어엇! 나는 매우 당황하여 얼른 녀석을 받쳐 안았다. 순간, 술 냄새가 훅 하고 끼쳐왔다.
“임마, 다렁아. 정신 좀 차려 봐! 술 마셨어?”
녀석을 똑바로 세우려 애쓰며 말해봤지만 역부족이었다. 아, 완전 정신을 못 차리네. 일단 방으로 데려가야 겠다. 그렇게 판단한 나는 녀석의 축 늘어져 있는 팔을 내 어깨에 둘렀다. 그리고 힘겹게 한발한발 내딛는데…… 후아, 금세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왔다.
“다렁아, 나 안 그래도 지금 힘이 하나도 없단 말이다……. 응? 정신 좀 차려 봐. 어? 우리 이러지 말자.”
대답도 없는 녀석을 향해서 혼자서 중얼중얼 거리고 있는데, 그때 참 다행스럽게도 엄마가 방에서 나왔다. 거실에서 축 늘어지는 다렁이를 힘겹게 끌고 가고 있는 날 발견한 엄마는 매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나! 무슨 술을 이렇게 많이 마셨어?”
“그러게 말이에요… 좀 와서 도와주세요, 엄마.”
엄마는 후다닥 뛰어와서 내 어깨에 걸쳐져 있지 않은 다현이의 반대편 팔을 붙잡았다. 아까보단 상황이 좀 나아졌지만 그래도 역시 다현이가 질질 끌리다시피 이동된다는 건 변함 없었다. 계단을 올라가려던 엄마는 멈칫하며 말했다.
“지후야, 아무래도 니 방에서 재워야겠다. 이 상태로 계단을 올라가는 건 도저히 무리구나.”
“…….”
“넌 다 큰 애가 왜 이렇게 힘이 없어? 응? 다현이는 너 취했을 때 가뿐히 업고 들어오더구만.”
“…….”
엄마, 그건 그럴 만한 사정이…… 흑흑. 하지만 말하면 놀라 기절하시겠지.
그렇게 우리는 행로를 내 방으로 바꿔 간신히 녀석을 침대에 눕히는데 성공했다. 휴우. 땀이 다 나네. 크게 숨을 몰아쉬며 서 있는 내 옆으로 별반 다를 바 없는 상태로 서 있던 엄마가 문득 중얼거렸다.
“지후 니가 이러는 건 전에 좀 봤지만 다현이가 이러는 건 처음 보는 구나.”
“저도 첨 봐요, 엄마.”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엄마는 근심 가득한 얼굴로 다현이를 바라보다가 내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말하셨다.
“잘 돌봐주렴. 그래도 니가 형이잖아.”
“네……”
그렇게 말하고 나는 방을 나가려는 엄마를 배웅하기 위해 몸을 돌리려 했다. 그런데 순간 뭔가가 옷깃을 붙잡는 듯한 느낌에 발을 멈췄다. 어라? 어라라? 느낌만이 아니다. 확실히 뭔가가 내 옷깃을 당기고 있었다. 난 뒤를 돌아보았다.
“아.”
그리고 좀 놀랐다. 눈을 감고 있는 다현이의 손이 내 상의 끝을 붙잡고 있었다. 순간 가슴이 뭉클하고 울렸다. 그 안타까울 정도로 미약한 힘.
“어머나……”
나를 따라 같이 뒤를 돌아본 엄마가 감탄한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다현이가 너한테 어리광을 다 부리네. 푸후… 나오지 말고 같이 자려무나. 좋은 꿈 꿔.”
“네, 엄마도 좋은 꿈 꾸세요.”
난 엄마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하곤 다시 다현이를 보았다. 눈을 굳게 감고는 들릴락 말락한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다. 이런, 엉망으로 취해도 단정한 녀석을 보았나.
“지후야, 불 끌게. 자렴.”
“네. 안녕히 주무세요.”
그때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급히 대답하며 침대에 누웠다.
탁,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정적이 찾아온다. 나는 한동안 잠이 오지 않아 어둠 속에서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었다.
맞닿은 팔로 서늘한 체온이 느껴진다. 여름인데도 왜 이렇게 체온이 낮은 걸까. 나는 힐끔 눈을 돌려 녀석을 보았다. 어느새 어둠에 눈이 익은 것인지 조용히 잠들어 있는 녀석의 얼굴이 보였다.
“…….”
나는 녀석 쪽으로 몸을 조금 가까이 했다. 아… 좀 만 더 가까이 가도 될까? 조금만 더. 슬슬 그렇게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답답함을 느껴 그냥 확 돌아누워 버렸다. 그리고 녀석의 어깨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아, 나도 너한테 어리광 부리고 싶어, 다렁아.
가슴이 벅찰 만큼 뛴다.
나한테 어리광을 부린다는 건, 너도 그만큼 날 좋아한단 얘기지? 응, 그렇지, 다렁아?
기뻐…… 너무 기쁘다.
널 알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야.
니가 날 형으로 인정해줘서, 니가 날 좋아해줘서 정말 다행이야…….
나는 한번 더 뒤척여, 녀석의 품에 안기듯 파고들었다.
그러니까 나한테 너무 쌀쌀맞게 굴지 마라, 다렁아. 껄끄럽게 대하지도 마.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렇게 혼자서 중얼중얼 거리다 보니 어느새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눈을 떴을 때 내 옆 자리는 비어 있었다. 나는 몸을 뒤척이다가 옆이 휑한 느낌에 바로 잠에서 깨어났다. 아, 하여간 부지런하다니까. 그렇게 취했던 녀석이.
하지만 밖에 나와도 다현이는 보이지 않았다. 늘 거실에 앉아 있거나 부엌에 있거나 했는데……. 혹시 방에 들어가서 자고 있는 건가? 나는 녀석의 방까지 올라가 노크를 해보았다.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실례를 무릅쓰고 문까지 벌컥 열어보자 텅 빈 방만 눈에 들어온다. 이런. 화장실에 있는 걸지도.
그러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2층에서 내려오는 날 발견한 엄마가 다현이는 방금 전에 나갔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황당함에 벙찐 얼굴을 하고 물었다.
“어디 갔는데요?”
“글쎄… 볼일이 있다던데?”
볼일? 또 그 놈의 볼일이냐?! 아침 댓바람 부터 볼일은 무슨 볼일이야!
순간적으로 신경질이 확 치밀었으나 따져야 할 대상은 이미 없었다. 나는 답답함에 하루종일 집안을 서성거리며 돌아다녔다. 무슨 일을 해도 1분을 넘게 집중할 수가 없다. 혼자서 집을 지키는 게 이렇게 생소하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이건 아무래도 나를 피하는 거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데.
왜? 왜? 대체 왜? 내가 뭘 잘못했는데! 너랑 잘 지내고 싶어서 일부러 애인까지 만들었는데!
그렇게 한참을 절규 속에 빠져있을 때 핸드폰 벨이 울렸다. 아,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하늘이도 제 말 하면 연락하는 구나. 하늘이었다.
“여보세…”
“집이야?”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묻는다.
“어, 엉. 집인데…”
“응, 그럼 잠깐 밖에 좀 내다봐 봐.”
밖에?
나는 의아해하며 거실 창가로 갔다. 뭘 내다보라는 거지?
“여기여기.”
다시 수화기에서 녀석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 말에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자 철창 대문 사이로 누군가가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설마 하늘이?!
당연한 얘기지만 그 설마가 맞았다. 그 누군가는 내 시선이 자신에게 닿자마자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헉, 대체 언제 온 거야?!”
당황한 내가 외치자 수화기 저편으로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 하늘아……. 그런 목소리로 웃지 마. 넌 정말 죄 많은 남자야.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 대사를 속으로 한번 읊어주고 있을 때, 하늘이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지후야. 나랑 데이트 해야지.”
데이트…….
맞아, 우리 이제부터 사귀는 사이지.
그 단어를 듣고 나자 비로소 실감이 들었다. 나는 후다닥 밖으로 뛰어나가 대문을 열어주었다. 여름의 쏟아지는 햇빛 아래서 하늘이는 핸드폰을 손에 쥔 채 밝게 웃고 있었다.
“아, 안녕.”
나는 왠지 새삼 쑥스러워져서 인사했다. 하늘이는 그런 나를 보며 싱긋 웃는다. 아, 멋지다. 저 여유있는 모습. 어떻게 웃는 얼굴 하나로 저런 느낌을 풍길 수가 있는 걸까? 나도 나중에 한번 연습해볼까?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하늘이 문득 자신의 머리에 쓰고 있던 빵모자(빵모자라니! 귀여운 하늘이!)를 벗더니 내 머리에 씌워주었다. 내가 놀라 쳐다보자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한다.
“오늘 햇빛이 뜨겁거든. 하루만 빌려줄게.”
“으, 응…….”
“자, 이제 어디 갈까? 영화보러 갈까?”
하늘이는 그렇게 말하며 내 팔을 끌었다. 응? 이대로 가자구? 저, 저기 아무리 그래도 나도 뭔가 꾸며야…….
하지만 원래 하늘이가 이렇게 한 번 끌고 가기 시작하면 게임 끝인 법이다. 이런 점에서는 처음부터 몹시 마이페이스셨지. 결국 나는 거절도 못 하고, 집에서 뒹굴던 후줄근한 차림에 빵모자 하나를 덜렁 쓴 기이한 차림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어? 그러고 보니 하늘이 너 오토바이는?”
“응. 오늘은 안 가지고 나왔어. 택시 타고 가자.”
“에? 왜?”
“글쎄… 니가 별로 안 타고 싶을 것 같아서.”
하늘이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곤 다시 빨리 가자며 내 팔을 끈다.
“…….”
난 그런 하늘이의 뒤통수를 희한한 기분이 되어 쳐다보았다.
내가 별로 안 타고 싶어할 것 같아서……?
무슨 대답이 그러지. 타는 걸 안 좋아하는 것 같아서도 아니고. 그리고 난 바이크 타는 거 싫어한 적 없는데.
물론 내가 지금 앉을 때 엉덩이에 힘이 집중되는 바이크를 탈 몸 상태가 아니라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흠칫 놀랐다.
설마 하늘이가 그걸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
그때 갑자기 하늘이 뒤를 돌아봐 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헉…! 까, 깜짝이야. 화들짝 놀라며 한발짝 물러나는데, 하늘이는 그런 내 쪽은 신경 쓰지도 않고 혼자만의 고뇌에 빠져 있었다.
“지후야, 우리 영화 끝나고 밥 뭐 먹을까? 난 두부 들어간 게 좋은데. 두부전골요리 먹을까? ……아, 근데 좀 더우려나.”
“…….”
음. 하늘아.
두부가 그렇게 좋아? 응?
“영화 재밌었어?”
영화관 안을 빠져나오며 하늘이 물었다. 나는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정말 재미있었다. 마지막에 반전이 아주 끝내줬어!
“이야, 난 완전 혼이 화면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줄 알았어. 진짜 기대 이상이네. 이렇게 재밌는 줄 알았으면 다현이도 같이……”
까지 말하다가 잠깐 말을 멈췄다. 아, 이건 데이트니까 다현이가 같이 오면 안 되는 건가? 혹 하늘이가 불쾌해 할까 싶어 슬쩍 눈치를 살피는데, 하늘이는 웃는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다현이도 이런 장르를 좋아하지.”
“진짜? 아, 아쉽네. 이 녀석이 아침부터 무슨 볼일이 있는지 나가고 없더라구……”
“참, 팝콘 남은 거 어떻게 할까? 버릴까?”
안타까움에 머리를 벅벅 긁고 있는데 하늘이 물었다. 난 아직도 반이나 남은 팝콘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영화관에 들어오고 표를 사려는데, 카운터 직원이 하늘이에게 아는 척을 해와서 좀 많이 놀랐지. 뿐만 인가. 팝콘을 파는 여직원은 얼굴을 붉히며 도저히 두 사람이 먹을 수 없는 양의 팝콘을 가득가득 담아주기까지 했다. 대체 하늘 아래, 하늘이가 모르는 가게 직원은 누굴까? 괜히 또 속으로 말 장난을 해보며 나는 말했다.
“버려버려. 더 이상은 도저히 못 먹겠어…”
“크큭. 그래. 그럼 이제 밥 먹으러 가야지~”
그렇게 하늘이는 다시 내 손을 끌었고, 우리는 식사를 하기 위해 장소를 이동했다. 결국 밥은 하늘이가 먹고 싶다던 두부전골요리를 먹게 되었다. 그래, 하늘이를 누가 말려…… 나도 꽤 맛있게 먹긴 했지만.
“후아, 덥다.”
식사를 마치고 잠시 걷다보니 금세 땀이 주륵주륵 흘러 내렸다. 참지 못한 내가 잠시 모자를 벗으며 중얼거리자, 바로 따가울 정도로 강한 햇빛이 얼굴을 때린다. 오우, 오늘 정말 햇빛이 장난 아닌데. 만약 하늘이가 모자를 빌려주지 않았더라면 정말 괴로울 뻔 했어. 나는 고마운 생각과 미안한 생각이 겹쳐 옆에서 걷고 있는 하늘이를 힐끔 쳐다보았다. 하지만 하늘이는 별로 힘들어하는 기색 없이 걷고 있었다.
“덥지? 커피숍이라도 들어갈까?”
헉헉 거리며 땀을 닦고 있는 나를 하늘이 애처롭게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동조를 표현했다. 아, 요즘 집에만 있었더니 더 적응이 안 되네. 땀이 수습 안 되게 나오는 구만.
“하늘아, 손수건 없냐, 손수건?”
“아쉽지만 그런 건 안 키우는데.”
아, 맞다. 이 시대에 그런 거 키우는 건 다렁이 하나 뿐이지. 흑흑. 장 보다가 내가 땀 때문에 괴로워할라 치면 슬쩍 손수건을 꺼내주던 우리 다렁이가 매우 그립구나.
다행히 커피숍 안에 휴지가 있어 땀은 어떻게 해결될 수 있었다. 아, 살 것 같다. 빵빵하게 틀어진 에어콘에 금방 흐물흐물해진 내가 소파에 축 늘어져 있는 사이, 가게 알바생이 와서 메뉴판과 재떨이를 갖다주었다.
“아.”
하늘이는 자연스럽게 뒷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가 짧은 감탄사를 내었다.
“흠. 됐어요, 누나. 재떨이는 필요 없으니까 그냥 가지고 가세요.”
“응? 웬일이야? 하늘이 너 금연하니?”
……진짜 모르는 직원이 누구야.
“아뇨, 그건 아니지만…… 아, 빨리요, 누나. 눈 앞에 재떨이가 있으니까 무의식 중에 자꾸 손이 가잖아요.”
“이런, 쬐끄만 게! 담배 좀 끊어!”
“네네~”
설마 나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겠지? 하늘이랑 잠시 실랑이를 벌이던 알바생 누나가 가고, 나는 소파에 파묻었던 몸을 일으켰다.
“…나 때문이라면 펴도 되는데.”
“아냐, 감히 앤 앞에서 담배를 필 수야 없지. 자, 뭐 먹을래?”
“…….”
찌잉.
난 잠시 감동에 차서 하늘이를 바라보았다. 전부터 느꼈지만 하늘이는 사람이 어떻게 하면 감동을 받는지 그 코드를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정작 본인은 별 생각없이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워낙 대시해오는 녀석들이 많아서……’
문득 다현이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 누가 이런 녀석을 가만히 내버려 두겠어? 그냥 사람대사람으로서라도 반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 누구에게나 냉정하던 다현이조차 하늘이에겐 호의적이었으니까.
새삼 눈 앞에서 열심히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있는 녀석이 대단해보였다. 그리고 이런 녀석이랑 사귀게 된 나도 신기하다. 하늘이는 왜 나랑 사귀자고 한 걸까? 날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가볍게 놀다가 끝낼 정도라면……’
다시 다현이의 말이 떠올랐다. 그때, 하늘이 메뉴판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난 콜라. 지후 넌?”
“아, 난 레모네이드.”
곧 이어 주문을 하고 레모네이드가 나왔다. 몹시 갈증이 나던 참에 시큼한 레모네이드를 마시고 있자니 너무 황홀하다. 아, 그러고 보니 우리 다렁이는 늘 마트에서 돌아오고 나면 레모네이드를 해줬지. 그게 어찌나 맛있던지! 난 곧 흥분해서 중얼거렸다.
“참, 그런데 하늘이 넌 우리 다렁이가 만들어주는 레모네이드 먹어본 적 있어? 그 녀석이 레모네이드도 할 줄 아는데 말이야, 그게 얼마나 맛있냐면……”
난 한참을 흥분해서 침까지 튀겨가며 말하다가 정신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다현이 얘기만 줄창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와, 이 정도면 친구여도 기분 나쁘겠다. 하루종일 동생 자랑하면서 말 꺼낼 틈도 안 주다니. 왠지 찔끔 하는 기분에 시선만 들어 슬쩍 하늘이의 눈치를 살피자, 하늘이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그런 나를 보고 있었다. 그게 굉장히 어른스러워 보여서 난 깜짝 놀랐다.
하늘이는 눈 앞에 놓인 콜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중얼거렸다.
“글쎄, 난 아직 레모네이드는 안 먹어봤는데. 뭐 그 녀석이 만든 거라면 다 맛있겠지.”
아, 그 말을 들으며 또 엄청 기뻐하는 나는 천상 브라콤인가 보다.
다렁아, 이를 어째…….
“잘 들어가, 지후야.”
하늘이는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내가 밤거리가 무서운 여자인 것도 아니고 부담스러워서 원. 다음엔 내가 널 데려다주마! 이렇게 말하니까 막 웃는다. 방금 내 말이 어디가 그렇게 웃겼니, 하늘아.
“또 연락할게.”
하늘이는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손을 들어보이곤 등을 돌려 걸었다. 나는 잠시 그 등을 멍하니 쳐다보며 감상에 빠졌다.
그렇군, 이런 게 데이트란 거구나.
꽤 재미있었던 것 같다. 하늘이는 사귀면 더 다정해지는 타입인가 보다. 하루종일 이것저것 세심하게 챙겨줘서 굉장히 편하게 놀다올 수 있었다. 정말 꾼돌이(…)라는 점만 빼면 최고의 연인일 터인데. ……하긴, 원래 예로부터 꾼들이 매너가 좋은가.
어, 그러고 보니 그런 것치곤 굉장히 건전하게 놀다왔네.
나는 멍하니 생각하다가 내 머리를 한대 퍽 때렸다. 내가 요즘 머리가 아주 음란해졌어! 그렇게 휘휘 고개를 저으며 집에 들어가려고 발을 돌린 순간, 거실 불이 환하게 켜진 걸 보았다. 어, 아직 부모님이 오실 시간은 아니고…… 다렁이구나!
나는 잽싸게 집으로 뛰어갔다. 쿠당! 하고 잠겨있지 않은 현관문을 힘차게 열어젖히고 거실 안에 들어서자, 소파 위로 툭 튀어나와있는 익숙한 뒤통수가 보인다.
“이 자식, 아침부터 어딜 갔었어~”
나는 반가운 마음에 얼른 녀석의 뒤로 뛰어가 목을 꽉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그런데 그 순간, 팍 하고 거세게 몸이 밀쳐졌다. 그 힘이 어찌나 셌는지 나는 그만 중심을 잡지 못 하고 넘어지고 말았다.
쿵-
하고 엉덩방아를 찧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나는 망연자실해서 녀석을 올려다 보았다.
“…….”
다현이는 자신이 밀어놓고도 당황한 것 같은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녀석은 곧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중얼거렸다.
“미안… 앞으로 내 몸에 손대지 마.”
응? ……응?
다, 다렁아? 다렁아, 잠깐만…!
녀석은 넋이 나가 있는 날 내버려둔 채, 그대로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
대체 뭣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난 걸까……?
그날 심란한 기분으로 방에 돌아와 하루종일 고민해봤지만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녀석이 그렇게 화를 낼 이유가 없다.
난 정말 모르겠다, 다렁아. 네가 뭐 때문에 그러는지. 안 그래도 날 피한다는 느낌은 받고 있었지만, 그게 화가 나서 그런 줄은 몰랐어. 혹시 나도 모르는 새에 너에게 뭔가 잘못한 거냐?
머리를 끙끙 거리며 고민해봤지만 결국 답은 찾을 수 없었다.
다음 날, 나는 여전히 엉망인 기분으로 눈을 떴다. 잠을 뒤척여서 그런지 눈을 떴을 땐 점심 때가 한참 지나 있었다. 아… 큰일이다. 늦잠을 자버렸다. 이 녀석, 또 어디 나간 거 아냐? 오늘 날이 밝으면 직접 물어보려고 했는데. 나는 근심에 가득 차 문을 열었다.
“헛…!”
그리고 바로 놀라고 말았다. 녀석이 거실 소파에 앉아있었던 것이다. 아니, 물론 예전엔 이렇게 나오자마자 딱 마주치는 경우가 많긴 했지만…… 설마 날 피한다고 생각되는 이 때에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될 줄은 몰랐지! 아직 결심을 제대로 다지지도 않았는데!
음… 잠시 방으로 돌아가서 심호흡 몇 번만 하고 나올까?
라고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데, 그런 내 고민을 비웃기라도 하듯 다현이 입을 열었다.
“왜 거기 가만히 서 있어?”
핫…… 내, 내가 나온 걸 알고 있었구나.
난 찔끔하며 녀석이 앉아있는 소파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녀석은 TV를 틀어놓고 소파에 깊숙히 앉아 있었다. 분명 나에게 말을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쪽은 보고 있지도 않다.
여, 역시 화났어. 화가 난 거야.
나는 1인용 소파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때까지 여전히 TV화면만 보고 있는 녀석. 아,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까? 어떻게 첫 마디를 꺼내지? 죽어라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녀석이 갑자기 리모콘을 들더니 채널을 바꿨다. 녀석 쪽으로 온 신경이 쏠려잇던 나는 그 작은 동작에도 움찔 하고 놀라고 말았다.
“…!”
아이고… 이런, 바보같은 나.
내 큰 움직임에 다현이 의아함을 느꼈는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야 내 쪽을 봐주는 구나. 하지만 왜 하필 이럴 때냐구. 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가, 갑자기 왜 리모콘을 들고 그러냐? 사람 놀라게. 하하하.”
내가 말해놓고도 웃기는 말이다. 이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더냐.
'넌 왜 웃고 그러냐? 사람 역하게.'
'넌 왜 살고 그러냐? 사람 불쾌하게.'
이런 말도 안 되는 탓하기하고 다를 게 뭐가 있냐고……. 속으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최대한 멀쩡한 척 웃으려고 노력하는데, 가만히 날 바라보고 있던 다현이 다시 채널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미안.”
응? 미안하다고?
아니, 여기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 안 되지, 다렁아…!
다시 뭐라고 말하려는데, 녀석이 먼저 말했다.
“어제, 화풀이한 거야. 좀 기분 나쁜 일이 있어서. 신경 쓰지 마.”
굉장히 빠르게 그 세 마디 만을 뱉어낸 다현이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나는 잠깐 벙쪄서 녀석을 쳐다보았다.
말 꺼낼 틈을 안 주네. 아, 아니 그보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럼 나한테 화난 게 아니었다고?
“아, 그, 그러냐? 뭐야, 난 괜히 걱정했잖아. 나한테 뭐 화난 거라도 있는 줄 알고…… 그런 거 아니지?”
“…그래.”
다현이는 잠깐 뜸을 들였다가 대답했다.
아니, 다렁아. 대답 좀 빨리 해줘라. 난 또 그 짧은 사이에 혼자 '역시 그랬구나!' 하면서 번뇌의 시간을 한번 여행갔다 왔잖냐. 하여간 사람 긴장시키는데 뭐 있다니까. 휴.
“그, 그럼, 손 대도 되지?”
“…뭐?”
슬쩍 눈치를 살피며 묻자 녀석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돌아보았다.난 찔끔 기가 죽어 말했다.
“어, 어제 손 대지 말라며. 그것도 홧김에 한 말… 아냐?”
“…….”
녀석은 잠시 입을 다물고 날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한참만에 시선을 돌리더니,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 그래도 이제 그렇게 갑자기 끌어안진 마.”
“어라… 왜? 아. 갑자기 끌어안아서 놀랐냐?”
“…형, 이제 하늘이랑 사귀잖아.”
“엉?”
뜬금없이 나온 말에 맥이 빠지고 말았다. 아니,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이해를 못해 자신을 멀뚱히 쳐다보는 나를 무시하고, 녀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 잠깐…! 하늘이랑 내가 사귀는 게 무슨 상관인데?”
부엌으로 향하던 녀석이 내 말에 움찔하고 움직임을 멈췄다.
“넌 내 동생이잖아. 내 동생 내가 좋아서 끌어안겠다는데 누가 뭐라 그래? 엉?”
“…….”
“니가 싫어서 그렇다면 이해를 하겠지만…… 뭐야, 하늘이도 그런 건 신경도 안 쓸 거야.”
“…….”
다현이는 등을 돌린 채 말이 없었다. 한참동안 그렇게 가만히 있더니, 굉장히 싸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싫어.”
헉?
다, 다렁아, 너 역시 뭔가…….
그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을 거다. 갑자기 딩동, 하고 초인종이 울려 우리 사이에 존재하던 팽팽한 공기를 깨트렸다. 나는 당황하여 현관문을 쳐다보았다. 그때까지도 다현이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 움직임이 없었다.
딩동.
초인종이 기다림을 참지 못한 듯 다시 한번 울렸다.
나는 허둥지둥 현관으로 뛰어나갔다.
“네, 누구세요?”
인터폰을 켜며 묻자, 곧 반대편에서 발랄하고 톤이 높은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여기, 혹시 정다현이라고 있나요?”
어……어라……. 나는 화들짝놀라서 다현이를 돌아보았다. 다현이는 어느새 고개를 돌린 것인지 내 쪽을 보고 있었다. 난 어색하게 인터폰을 가리키며 말했다.
“웨, 웬 여자분이 널 찾는데?”
그 말에 다현은 얼굴을 조금 찌푸리더니 내가 있는 쪽까지 걸어왔다. 녀석은 엉거주춤 서 있는 나에게서 인터폰을 받아들었다.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
귀찮음이 가득한 그 목소리.
우와…… 왜, 왠지 멋지다. 역시 우리 다렁이는 여성에게 인기가 많구나.
“…들어오지 마. 내가 나갈게. 그래.”
감탄에 차서 바라보는데 녀석은 그렇게 말하고는 인터폰을 끊었다. 그리고 나갈 채비를 할 생각인지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아니, 다렁아. 아무리 그래도 여성 분을 이런 땡볕에 가만히 세워두다니…….
난 당황해서 얼른 인터폰을 켜고 말했다.
“다현이 잠깐 준비하러 갔는데… 더우니까 들어와서 기다려요.”
그리고 대문을 열자 '그럼 실례할게요.'란 소리와 함께 패셔너블한 여성이 정원 안으로 들어왔다. 우와, 몹시 화려하구나. 꼭 잡지에 나오는 여자 같다. 잠시 유리창 너머를 감탄하며 쳐다보고 있는데 다현이 2층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그때 그 여자 분도 열어놓은 현관문 안으로 들어섰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여자 분 왠지 목소리가 낯이 익은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냥 그렇게 가버리는 법이 어딨어?”
그리고 나는 마침내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며칠 전에 다현이와 통화할 때 들었던 그 여자 목소리였다.
다현이는 잠시 집안에 들어와 있는 그녀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서 있었다. 하지만 곧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나는 찔끔해서 시선을 피했다. 내, 내가 뭔가 실수한 건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는데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얼마나 찾았는 줄 알아?”
“…나가서 얘기 하자.”
“잠깐, 나 이 더위에 여기까지 찾아오느라 정말 힘들었단 말이야. 손님 대접은 안 해줘도 좋으니까 마실 거 한잔 정도는 줘야 되는 거 아냐?”
“그러니까 누가 멋대로,”
으아아…! 소리 치려는 다현이를 눈치채고 나는 후다닥 끼여들었다.
“그, 그래… 나 신경 쓰지 말고 그냥 편하게 얘기 해. 드, 들어오세요.”
“어머, 그래도 돼요? 아, 혹시 다현이 동생이니? 귀엽게 생겼다~”
“아…하하…아하하…”
그녀는 어색하게 웃는 나를 지나쳐 소파 위에 앉았다. 그리곤 엄청 더웠는지 심하게 파인 가슴 위로 탁탁 손부채질을 한다. 으메… 얼굴이 화끈거리는 구나. 나는 급히 시선을 돌렸다. ……가 바로 앞에 있는 다현이와 눈이 마주쳤다.
“…!”
심장이 철렁했다. 녀석은 왠지 굉장히 화가 난 듯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여, 역시 내가 뭔가 잘못한 건가?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데 녀석은 그대로 부엌으로 휙 들어가버렸다.
“왜, 왜 그래? 나 실수했어?”
나는 후다닥 녀석을 따라가서 물어보았다. 하지만 녀석은 화가 난 게 역력한 동작으로 소리나게 컵을 내려놓고는, 주스를 철철 따를 뿐 대답은 하지 않는다.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호, 혹시 너 귀찮게 하는 여자야? 다시 나가라고 할까?”
쾅!
아이고, 다렁아! 갑자기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려치면 어떡하냐!
심장이 오그라드는 줄 알았다. 화들짝 놀라며 한발짝 물러나자, 녀석은 화를 삭히는 듯 잠시 그 동작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한참만에 녀석은 이를 악문 목소리로 내뱉었다.
“난 너한테……”
“?”
“너한테……”
나한테……?
그러고 보니 오랜만에 들어보는 반말이다. 어라? 그러고 보니 녀석이 언제부터 나를 다시 형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더라? 그 와중에도 쓸데없는 의문이 들고 있는데 녀석이 천천히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난 다시 한번 심장이 철렁 내려 앉았다. 녀석이 타는 듯한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야, 왜 그런 표정을…….
녀석에게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쉽사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저 입만 열었다 닫았다를 무의미하게 반복하고 있는데, 그런 나를 조용히 노려보고 있던 녀석이 문득 시선을 내리더니 중얼거렸다.
“…미안. 아무 것도 아냐.”
에……?
그리고 녀석은 그대로 나를 지나쳐 거실로 나가버렸다.
뭐, 뭐였지, 방금…….
나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도저히 방금 전의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화를 내는가 싶더니 아무 것도 아니라고?
뭐야, 도대체…… 전부터 변덕이 심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번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그날…일리는 없을 테고, 혹시 뒤늦은 사춘긴가?
나는 크게 숨을 몰아쉬며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정말 그 짧은 사이에 심장이 몇 번을 뛰었는지 모르겠다. 날 이렇게 심하게 놀래키다니. 흑흑. 다렁아. 난 네가 순간 날 죽이려나 했다고.
그렇게 식탁에 손까지 짚어가며 열심히 정신을 차리려 애쓰고 있는데, 문득 그런 내 시야로 주스가 담긴 컵이 들어왔다.
어, 저거 안 가지고 나갔네……가 아니라 혹시 일부러 안 가지고 나간 건가?
나는 또 이걸 가지고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에 대해서 엄청난 고민에 휩싸여야 했다. 만약 일부러 안 가지고 나간 거라면, 내가 이걸 들고 나갔을 경우 또 엄청 화를 내겠지? 그, 그래. 그냥 나가자. 필요하면 다시 가지러 오겠지, 뭐.
그렇게 결정을 내린 나는 부엌에서 나왔다……가 엄청 놀라고 말았다.
“……!”
나는 숨을 삼키며 그대로 발을 멈췄다. 주스를 가지고 나오지 않아서 다행이다. 가지고 나왔다면 너무 놀라서 그대로 손을 놓아버렸을 거 같으니까.
나는 왜 이 와중에도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소파에 두 사람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깊게 몸을 파묻고 앉아있는 여자의 얼굴 위로 내가 잘 아는 익숙한 뒤통수가 겹쳐져 있었다. 다현이다.
두근두근.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언뜻언뜻 희미하게 질척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여자의 가느다란 팔이 서서히 올라오더니 다현이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
그때까지도 나는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뭔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타는 듯한감정이, 가슴 속에서 맹렬하게 들끓어 오른다.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다현아, 하지 마…….
“동생이 놀랐나 본데.”
그때,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와 혼란 속에 빠진 나를 현실로 이끌었다.
나는 핫 하고 정신이 들었다. 여자가 여전히 다현이의 목을 끌어안은 채로 나를 보고 있었다. 다현이는 조금 몸을 일으켰을 뿐 얼굴을 돌리지는 않는다.
“방으로 올라갈까?”
“…그래.”
뭐……? 방으로 올라간다고……?
나는 머리를 한대 얻어맞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대로 눈만 튀어나올 듯이 크게 뜨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유유히 몸을 일으킨 다현과 여자가 계단으로 올라갔다. 나는 왠지 모르게 엄청 급박해졌다. 자, 잡아야 돼. 하지만 다현이를 직접 부를 수는 없었다.
아, 어,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다현이를 붙잡을 수 있지?
그때 바로 눈에 띈게 바로 옆에 있던 꽃병이었다. 나는 급한대로 그걸 붙잡고 확 바닥에 떨어트려 버렸다. 챙, 채챙- 엄청나게 요란한 소리가 터지며 발 바로 앞에서 깨진 유리 파편이 흩날린다. 유리조각 몇 개가 맨발에 와서 박혔다. 피가 서서히 배어나왔다.
“어머나! 어떡해, 다쳤나 봐!”
“…….”
그제야 계단 위로 올라가던 그들이 나를 돌아보았다. 다현이 놀란 얼굴을 하고 이쪽을 본다.
“아, 아야… 아이고…”
나는 바닥에 웅크리고 주저앉았다.
난 알아…… 넌 이러면 날 그냥 지나치지 못할 거야…….
눈물이 날 것 같다.
나도 내가 이렇게 얍삽한 녀석인지 몰랐어…….
스스로에 대한 깊은 혐오감이 일었다.
왜 이러지…… 내가 왜 이러지? 왜 이렇게 화가 나지? 왜 다현이를 뺏긴 거 같은 기분이 들지?
“TV 바로 아래 두번째 서랍에 구급상자 있어.”
“…!”
그때 조용한 다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웅크리고 발을 잡은 자세 그대로 눈을 크게 떴다.
“어머, 많이 다친 것 같은데… 가서 유리 치우는 거랑 좀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
“…….”
다현이의 대답은 없었다. 탁 하고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긴 정적 속에서 나는 그대로 발을 잡은 채 앉아있었다.
참을 수 없는 비참함에 눈물이 기어코 바닥에 뚝뚝 하고 떨어진다.
내가 왜 이러지, 다현아…… 왜 이렇게 이기적이지…….
왜 널 독점하고 싶은 걸까. 넌 내 동생인데.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한번 슥 훔치고 열심히 유리조각을 그러모았다.
<38>
정말 뻘짓했다. 무슨 관심은 끌어보겠다고 꽃병은 깨트려가지고……. 아, 아파 죽겠네.
나는 끙끙 거리며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가져와서 열심히 유리조각을 주워담았다. 물론 그 와중에 이번엔 일부러가 아니라 진짜로 유리조각을 밟는 실수를 저질러 버려서, 홀로 소리없는 비명을 삼켜야 했지만. 으악! 정말 이럴 땐 내가 싫어지려고 한다!
방바닥은 내가 움직인 선을 따라 뚝뚝 피가 떨어져 있어 보기에 매우 처참했다. 누가 보면 무슨 살인 사건난 줄 알겠다……까지는 너무 과장인가.
그렇게 한숨을 쉬며 거실의 처참한 광경을 새삼 감상하고 있는데, 딩동딩동 하고 초인종이 울렸다. 아, 또 누구야? 오늘 정말 손님 많이 오네. 나는 이번엔 유리조각을 밟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기울여 간신히 현관 앞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누구세요?"
"나."
하늘이다!
인터폰 반대편에서 들려온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에 나는 바로 그 상대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하여간 타이밍 하나는 죽이게 잘 맞춘다니까!
"뭐해? 지후야. 나랑 놀자~ 빨리 준비하고 나와."
"나, 나 지금 나가기 좀 곤란한데."
"응? 왜? 바쁘냐?"
"바, 바쁜 건 아닌데…… 조, 좀 다쳤거든."
"다쳤다고? 잠깐 문 열어 봐."
우물쭈물 거리며 대답하자 하늘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아, 아니 지금 이 광경을 보면 좀 놀랄 텐데. 이걸 어째야 하나. 별 거 아니라고 해야하나? 조금 망설이다가 '얼른 열라니까?'라는 하늘이의 말에 놀라 황급히 문을 열었다. 곧 하늘이 현관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으아, 피 봐. 괜찮냐?"
거실의 광경을 본 하늘이는 놀라 물었다. 이런, 하늘아. 넌 이게 괜찮아 보이냐?
나는 최대한 하늘이에게 안 괜찮다는 표정을 짓기 위해 애쓰며 실실 웃어보였다. 윽, 이게 꽤 고난위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구나.
"조심 좀 해."
네……. 흑흑.
"밴드랑 연고 있냐? 상처부터 치료할 것이지 뭔 유리조각 먼저 치우고 있어?"
하늘이는 그렇게 말하며 신발을 벗고 거실 안으로 들어왔다. 난 조금 전에 다현이에게 들었던 정보를 알려주었다. 하늘이는 곧 내가 말해준 장소에서 구급 상자를 꺼내들더니, 소파 위를 두들기며 말했다.
"자자, 얼른 일루와 봐라. 내 사랑의 치료를 받아야지."
사랑의 치료…….
조금, 아니 하늘이에게 미안하지만 사실 많이 닭살 돋아 하며 그가 두들기는 소파 위에 앉았다. 하늘이는 구급상자를 탁자 위에 올려두고 쓸만한 재료들을 골라 빼내더니 씨익 웃었다.
"내가 타이밍 하난 죽이게 잘 맞췄지?"
"큭… 응."
나도 모르게 큭 하고 웃으며 대답하자, 내가 한때는 타이밍의 하늘이라고도 불렸지, 라고 이상한 명칭을 뻐기며 말하길래 결국 막 웃어버렸다. 그런데 솜에 소독약을 뿌리고 있던 하늘이 갑자기 위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나도 하늘이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계단 난간 위에 다현이가 이쪽을 보며 서 있었다.
"집에 있었냐?"
"……."
다현이는 하늘이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서 있다가 조용히 계단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그대로 우리를 지나쳐 부엌으로 들어가 버린다.
핫… 괘, 괜히 내가 무안해졌다.
"다, 다렁이가 오늘 기분이 안 좋은가 봐."
하늘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다현이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나는 민망해져서 얼른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하늘이 인사를 무시하다니…… 어지간히 기분이 안 좋은가 봐. 그래, 그럼 특별히 나한테 화난 건 아니었다는 그 말이 맞나 보구나. 한시름 놓고 있는데 내 말에 하늘이 내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런데 어째 좀 얼빠진 표정이다.
"지후야."
"응?"
"후…… 아니다. 아무 것도 아냐."
어라, 왜 한숨을…….
의아해하고 있는 사이 다현이 다시 부엌에서 나왔다. 다현은 손에 주스 두잔을 바친 쟁반을 들고는 부엌에서 나오다 이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아, 좀전에 안 가지고 갔던 음료수 가지러 나온 거였군. 녀석의 시선에 난 어설프게 씨익 웃어보였다. 하지만 다현은 내가 웃기가 무섭게 바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헉, 민망하게!
"힘들면 관둬라."
어라?
순간 너무 무미건조한 톤의 목소리가 흘러나와서 누가 말한 것인지에 대해 나는 깊은 고민에 휩싸여야 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분명 내 앞쪽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하늘이를 보았다. 하늘이는 내 상처를 치료하기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뭐야, 누구한테 말한 거지?
나는 이번엔 다현이 쪽을 보았다.
다현이는 잠시 계단 턱 위에 조용히 서 있다가 다시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아까 그게 무슨 말이야?"
상처 치료를 끝내고 유리조각도 전부 정리한 뒤에 하늘이의 본래 목적을 따라 바이크에 올라탔다.
언제 갖고 온 것인지 평소엔 안 보이던 헬맷을 내 머리에 씌우려 하기에 나는 좀전부터 마음에 걸리던 것을 물어보았다.
"응? 무슨 말?"
"아까 다렁이한테 한 말. 역시 다렁이, 무슨 일이 있는 건가? 하늘이 넌 왜 그런지 아냐?"
"……흐음, 글쎄. 그건 그냥 나 혼자 중얼거린 건데?"
"아냐, 아무래도 얼마 전부터…… 그래, 하늘이 니가 찾아온 날 이후로 이상해졌단 말이야. 빨리 말해 봐. 넌 알지?"
"……."
하늘이는 잠시 할말을 잃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야, 왜 또 그런 표정이야? 제대로 설명을 하란 말이야! 버럭 화를 내려는데 하늘이는 씨익 웃더니 나에게 강제로 헬맷을 씌워주며 말했다.
"그래그래, 그 정도면 꽤 많이 왔어. 좀만 더 깊이 생각해 봐."
"?"
"니가 좀만 더 힘내야 돼, 지후야. 그 녀석, 보기에 너무 위태롭다구."
부아아아앙-
마지막 말은 바이크 소리에 가려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날도 하늘이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놀았다. 밥을 먹고 오락실에 가고 이곳저곳을 구경하다가 막판에는 노래방까지 끌려갔다. 하늘이는 노래방에서도 굉장히 수준급(!)의 노래를 보여줌으로써, 나를 또 한번 놀래키는데 성공했다. 으아, 정말…… 내가 이러니까 꾼돌이라고 안 부를 수가 없다. 대체 못 하는 게 뭐야? ……가 아니라, 있구나. 공부.
나는 음 감각은 별로 뛰어나게 발달하지 못한 몸이지만, 이 방에 노래를 부를 사람이 하늘이와 나 밖에 없었으므로 열심히, 정말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덕분에 하늘이를 무척 재미있게 만들어주는데 성공했다. 음. 하늘아, 재밌냐? 나도 나의 노고를 충분히 깨닫고 있으니 이제 그만 웃거라. 흑.
"그러고 보니 하늘이 넌 다현이랑 노래방 와본 적 있냐?"
"엉. 중학교 때 뿐이지만 몇 번."
"오오, 그 녀석 노래 잘 해? 그러고 보니 맨날 집에만 있었지, 같이 어딜 다녀본 적이 없구만."
아쉽다. 다현이랑도 여기저기 같이 다니면 좋으련만.
하지만 요즘 그 녀석은 좀 많이 이상하고…… 집에서 예전처럼 지내는 것도 무리인 지금, 어딜 같이 돌아다닌다거나 하는 건 꿈 같은 얘기겠지.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문득 하늘이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아서라, 아서. 다현이 그 자식은 노래하면 안돼. 버터를 통째로 씹어먹은 것 같은 목소리가 나온다니까? 오죽하면 별명이 빠다현이었다, 빠다현."
빠다현…….
"푸하하하! 빠다, 히끅! 빠다현…… 푸하하하! 누가 지은 거야?"
"글쎄, 후배 하나가 지은 건데 그날 맞아죽을 뻔 했지. 쉿. 이 이름으로 부르면 살아남기 힘들다구."
"뭐, 어때~ 그럼 난 빠다렁이라고 불러야지! 무려 복합어다! 으하하!"
"뭐?"
하늘이는 내 말에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곧 같이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끼이이익-
마지막엔 결국 바이크를 가진 하늘이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나도 바이크까지 가지고 있는 하늘이를 집에 데려다준다고 하기도 뭐 하고 해서 별 부담없이 얻어타고 집에 돌아왔다. 집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엔 한두방울씩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점차적으로 굵어지기 시작하는 빗줄기에 나는 얼른 헬멧을 벗으며 말했다.
"기다려 봐. 집에서 우산 가져다 줄게."
"됐어. 나보고 우산 쓰고 바이크 몰라는 건 아니겠지?"
앗. 그러고 보니 그렇네. 바이크 때문에 우산을 쓸 수가 없구나.
하늘이 말에 나는 힘겹게 바이크를 몰면서 우산을 쓰고 있는 하늘이를 상상하곤 풋 하고 웃어버렸다.
"그럼 잠깐 들어왔다 갈래? 아니면 오늘은 바이크 여기다 놓고 갔다가 내일……"
"괜찮으니까 이거나 쓰고 들어가라."
하늘이는 그렇게 말하며 입고 있던 상의를 벗어 내 머리에 던졌다. 펄럭이며 시야를 가린 그것은 모자가 달린 크림색 반팔 가디건이었다. 하늘이 방금 전까지 입고 있던 옷이다. 나는 굉장히 당황하여 뭐라고 말하려 했다.
"머리에 비 맞으면 비듬 생겨~"
그런 나에게 하늘이 재빨리 말했다. 싱글 거리며 여유롭게 웃는 얼굴이었지만, 상의는 지금 날씨엔 굉장히 추워보이는 나시티 차림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하늘이의 말에 잠시 감격하려던 것도 잊고 반박하고 말았다.
"……하늘아, 그럼 여태 머리에 비 맞은 넌 어쩌냐."
"괜찮아, 난 머리 감을 거니까! 음하하!"
"……."
난 그럼 뭐 머리 안 감냐…….
소심한 A형의 기질이 발휘되려는 순간, 하늘이의 오토바이가 부르릉 하고 시동 거는 소리를 냈다.
"그럼 난 간다~ 안녕."
부아아아앙---!
그리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오토바이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
나는 멍하니 하늘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다가, 뒤늦게 손에 쥐어진 천의 정체를 깨달았다. 헉! 나도 모르게 받아버리고 말았다. 다시 돌려줄 생각이었는데!
매우 당황해서 잠시 우왕좌왕 거려봤지만, 하늘이의 오토바이는 이미 출발한지 오래였다. 후우. 어쩌겠어. 그저 감사히 쓰는 수 밖에.
나는 머리에 하늘이의 가디건을 뒤집어 썼다. 그리고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헉!"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바로 앞에 우산을 든 다현이 서 있었다.
"……."
쏴아아아-
빗줄기가 점점 강해졌다. 쏟아지는 빗줄기 안에서 우산을 든 다현은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나는 어색한 분위기에 먼저 입을 열었다.
"무, 무슨 일이야?"
설마 비가 와서 날 마중 나온 건 아니겠지?
조금 기대감에 차서 물어보자 다현은 조용히 내 앞으로 걸어오더니 우산을 씌워주었다. 가슴이 쿵쾅쿵쾅 뛴다. 너무 기뻤다. 저절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다현을 쳐다보자 녀석은 시선을 피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
"?"
녀석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가? 뭔말이지? 어딜 가라는 얘긴가? 의아해서 쳐다보고 있는데 그게 아니었던 듯 다현은 다시 입을 열어 남은 문장을 완성시켰다.
"……간장 떨어져서 사러 가려고."
"……."
아……. 그, 그래. 그랬군. 나가는 중이었구나.
나는 어색하게 하하 웃었다. 만약 세상에 생각을 읽는 기계 따위가 있었다면 정말 큰일날 뻔 했다. 다렁이가 방금 나의 헛된 기대를 알았다면 얼마나 비웃었을까! 흑흑.
잠시 헛된 기대를 가졌던 스스로를 엄청 쪽팔려 하고 있는데, 다현이는 어째서인지 인상을 지긋이 쓰고 날 보고 있었다. 왜 저러지? 아, 내가 너무 오래 붙잡아뒀구나!
"어, 어, 그럼 얼른 사와라."
"……."
나는 후다닥 녀석의 우산에서 빠져나오며 말했다. 차가운 빗줄기가 다시 몸을 때린다. 그런데 다렁이는 조금 전보다 더 험악해진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왜 그래? 말을 해, 말을! 대체 뭐가 불만이야? 아, 혹시 같이 안 가줘서 그런가?
"같이 갈래?"
결국 슬쩍 말을 꺼내보자 다현이는 잠깐 입을 다물고 날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오늘따라 매우 과묵하시군. 그래도 다렁이랑 간만에 하는 외출이다! 나는 금방 신이 나서 뒤집어 쓰고 있던 하늘이의 가디건을 급하게 껴입으며 녀석의 우산 속으로 뛰어들었다.
"……."
지익, 지퍼를 올리고 있는데 옆쪽으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응?"
"……가자."
의아한 목소리를 내자 다현은 조용히 중얼거리며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도 그래서 별말 없이 녀석을 따라 걷게 되었다.
"……."
"……."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툭, 툭툭 하고 빗물이 우산에 맞아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습기가 가득한 팔이 이따금씩 옆에서 우산을 쥐고 있는 다현이의 팔과 스쳤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흠칫흠칫 놀라 몸을 움츠리게 되었다. 이상하게 어색하다.
무슨 말이든 꺼내야 할 텐데…….
어쩐지 요즘 다현이는 대하기가 어렵다. 내가 뭘 잘못했는진 모르겠지만 갑자기 화를 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선뜻 말을 꺼내기가 망설여졌다. 또 잘못 말했다가 막 화내면 어떡해.
아, 그보다 나한테 아직 화난 상태 아니었나……?
나는 힐끔 다현이를 쳐다보았다. 다현이는 조용히 정면을 보며 걷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 시선은 전혀 눈치채지 못 하고 있다. 나는 조금 안심하며 녀석의 얼굴을 좀 더 노골적으로 곁눈질했다.
날카로운 선의 얼굴. 짙은 눈동자. 오똑한 코. 얇고 부드러운 입술……. 입술, 입술, 입술…….
"!"
내가 왜 이러지? 나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쏴아아아-
우산 밖으로 빗소리가 요란하다. 이런 날이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스스로를 향해 열심히 중얼거렸다. 정신차려, 정신차려, 정신차려. 다렁이가 싫어한다구!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게 오늘 낮의 기억이었다. 갑자기 가슴이 묵직한 고통을 호소해왔다. 오늘 낮의 그 여자…… 사귀는 사이인 걸까? 그렇다면 왜 나한테 말을 안 했지?
"……하늘이가, 잘 해줘?"
"?!"
그 여자에 대해서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옆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다현이를 쳐다봤다. 별 표정 변화 없이 나를 보고 있……는 걸까, 내가 입은 옷을 보고 있다. 나는 어쩐지 어색한 느낌에 옷을 감싸며 중얼거렸다.
"응, 뭐. 하핫."
그래봤자 가려질 턱이 없는데도. 아니, 그런데 내가 옷은 왜 가리려 하는 거지? 나는 스스로 한심함을 느끼며 얼른 손을 내렸다. 다현이는 그래, 라고 한마디 중얼거리더니 다시 입을 다물었다.
"……."
"……."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나도 물어볼까? 그 여자 누구야? 사귀는 사이야? 그 여자 좋아해?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머릿속으로 여러가지 질문을 굴려보고 있는데 다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발."
"응?"
난 이번에도 화들짝 놀라 쳐다보았다.
"괜찮아?"
"아? 아…… 아아! 응! 하, 하나도 안 아파! 걱정마라."
"……."
다현이는 대답 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어느새 골목 끝에 있는 마트에 도착해 있었다. 다현이는 우산을 접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조금 감격에 차서 쳐다보다가 뒤따라 들어갔다.
걱정하고 있었구나……. 무시한 게 아니었어.
나도 모르게 헤벌쭉 입가가 찢어졌다. 다행히 다현이가 등을 돌리고 있어 마음 놓고 웃을 수 있었다.
'발, 괜찮아?'
'발, 괜찮아?'
낮고 속삭이는 듯 하던 그 목소리. 그 작은 목소리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비록 다현이는 등을 돌리고 있지만, 가게 아저씨는 내 얼굴이 아주 잘 보이는 상황이라는 사실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 나는 혼자서 계속 실실 웃었다.
근 삼일만에 다렁이가 해주는 밥을 먹었다. 아, 맛있다. 오랜만에 먹으니까 왜 이렇게 맛있냐. 정말 밖에서 사먹는 밥은 비교가 안 돼! 나는 거의 무아지경에 빠져 허겁지겁 밥을 먹어치웠다. 환상적인 맛의 갈비탕, 한쪽 접시에 살을 다 발라놓은 간장 게장, 짭쪼름한 조기구이…… 정말 서두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게 눈 깜짝할 새에 밥 한그릇을 다 비웠을 때쯤, 이마 위로 박히는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뒤늦게 고개를 들어보니 다현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 이런, 내가 너무 게걸스럽게 먹었나?
"하하. 넌 안 먹어?"
"……."
그제야 다현은 다시 조용히 손을 놀렸다. 밥은 처음 형태를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입맛이 없나? 정말 요즘 무슨 고민이 있는 건가? 나는 안쓰러운 기분에 젓가락으로 반찬을 들어 녀석의 수저 위에 올려주었다. 녀석이 흠칫 하며 나를 쳐다본다. 하하, 나도 엄마 흉내다. 나는 씨익 웃어 보였다.
"……."
다현은 시선을 내리고 내가 반찬을 올려준 상태 그대로 밥을 떠서 먹었다. 으윽. 왠지 그때 엄마가 그렇게 횡설수설 한 이유를 알 것 같은데? 하지만 여기서 더 하면 분명 귀찮아하면서 '혼자 먹을 수 있어.' 하겠지. 오바하지 말고 이쯤에서 참자, 참아. 나는 옆에 놓인 물을 마셨다. 꿀꺽꿀꺽, 한번에 원샷하고 입가를 닦으며 컵을 내려놓는데 다현이 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잉?
안 먹냐, 라고 말하려 하는데 녀석의 숟가락엔 밥이 퍼져 있었다.
"……."
설마…….
난 미심쩍은 눈으로 다현이를 보았다. 다현이는 내 시선을 받더니 다시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난 여전히 미심쩍은 눈으로 그런 녀석을 쳐다보다가, 눈앞에 놓인 부추튀김을 집어 녀석의 그릇에 올려보았다. 다현은 잠시 손을 멈칫 하더니 내가 올려준 부추튀김을 떠먹었다.
귀……
귀여워 죽겠네.
나는 젓가락을 들지 않은 다른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웃으면 안돼! 웃으면 거기서 끝이야! 이번엔 조깃살을 올려보았다. 얌전히 한숫갈을 떠놓고 기다리고 있던 녀석은 이번에도 별말 없이 밥을 먹었다. 그 다음엔 감자조림, 그 다음엔 버섯구이……
녀석은, 그렇게 밥 한그릇을 다 비웠다.
'다현이가 너한테 어리광을 다 부리네.'
며칠 전에 엄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만족감에 젖어 거실 소파에 앉아있었다. 녀석이 나한테 어리광을 부렸으니 나도 조금쯤 어리광을 부려도 되겠단 생각에, '아, 레모네이드 먹고 싶다. 못 먹어본 지 꽤 오래 됐네.'라고 중얼거렸더니 다현이는 힐끔 나를 쳐다보곤 냉장고에서 사이다를 꺼내왔다. 아, 어떡하지. 확 끌어안아버리고 싶다. 하지만 앞으론 그러지 말랬으니 참아야지. 나는 인내하며 거실로 돌아왔다. 얼마 안 있어 다현이는 완성된 레모네이드 두 잔을 들고와 내 옆쪽 소파에 앉았다.
"흐흐, 고맙다."
"……."
다현이는 그냥 고개를 끄덕하곤 자기 몫의 컵을 집었다. 나도 내 몫의 컵을 들고 조용히 레모네이드를 마시다가, 오늘 낮에 바로 여기에서 봤던 그 광경을 떠올렸다. 다시 좋았던 기분이 가라앉는다. 나는 초조하게 목을 축이다가 다현이 쪽을 쳐다보지 못 하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까 낮에 그 여자 말이야……."
"……."
옆으로 녀석의 움직임이 살짝 경직되는 게 느껴진다.
"사귀는 사이야?"
"……."
탁, 녀석이 테이블에 컵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습기 가득한 컵을 꾸욱 움켜쥐며 초조한 기분을 달래려 애썼다. 왜 이래, 왜 이래, 정지후. 진정해.
한참만에 녀석이 대답했다.
"…응."
쿵, 이라고 해야할까. 하아, 라고 해야할까. 어쩐지 충격인 것도 같고 힘이 빠지는 것도 같다. 그렇구나. 사귀는 사이였구나. 그럼 아까 그렇게 기분이 안 좋았던 것도 그 아가씨랑 잘 안 되고 있어서 그런 거였나?
"언제부터?"
나는 할 수 없이 별로 묻고 싶지 않은 질문을 했다. 다현은 또 한참만에 대답했다.
"좀…… 됐어."
좀이 얼만데? 얼마나 오래 된 건데?
꾹, 손에 더 힘이 들어간다. 방금 전까지 굉장히 유쾌하던 기분이 금방 바닥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내 호기심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 아가씨…… 좋아하냐? 많이 좋아해?"
"…응."
"!"
이번엔 좀 충격이다. 직격탄을 맞아버린 것 같았다. 띵 하고 울리는 머리를 바로 가누려 애쓰며 나는 다음 질문을 꺼냈다.
"어디가 그렇게 좋아?"
"……."
이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질문이다. 하핫. 난 자조적인 웃음이 흘러나오려는 걸 애써 참았다. 다현은 생각에 잠겨 있는 건지 대답하기 싫은 건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여태까지 질문 중에서 가장 오래 뜸을 들이는 것 같다. 대답하기 싫은 건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하는데 녀석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어디가 좋은지는 잘 모르겠어. 멋대로 뛰어들어와서 손을 뻗고, 친한 척 하고, 이상한…… 그래, 이상한 여자라고 무시하려고 하면 꼭 사람 신경 쓰이게 만드는 일을 벌이지. 하는 짓은 엄청 멍청하고 둔해빠진데다가 같이 있으면 나까지 바보가 되는 기분이야. 그런데……"
난 잠시 입을 쩍 벌렸다. 내가 정신이 없는 나머지 질문을 잘못 했나? 아, 아니, 난 분명히 어디가 그렇게 좋냐고 질문한 것 같은데. 욕하라고 하지 않았다고!
조금 당황스러운 기분에 옆에 앉은 다현이를 쳐다보고 있는데 녀석은 거기까지 다다닥 뱉어놓고는 입을 다물었다. 싸, 쌓인 게 많았구나, 다렁아. 이런, 그 여자 내가 봐도 좀 제멋대로인 것 같더라! 그냥 헤어져 버려! 그때 문득 바닥을 바라보고 있던 녀석이 살짝 웃었다.
"!"
나는 순간적으로 눈을 의심했다. 이 녀석이 이렇게 부드러운 눈동자도 할 줄 알았던가?
"그런데 난…… 그 바보가 되는 기분이 좋아."
"……."
"내 안에서 늘 나를 괴롭히던 어둡고 습한 더러운 감정들이 그…… 여자랑 같이 있으면 없어져. 바보가 되고, 나쁜 생각은 전혀 나지 않고…… 마치 행복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야. 그…… 여자랑 같이 있으면."
다현이는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나는 강한 충격을 받아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진짜야…… 이 녀석은 진짜야.
내가 하늘이를 좋아하는 감정과는 차원이 틀려. 이 녀석은 진심으로 그 여자를 좋아하고 있어. 그 깊이를 짐작할 수도 없을 만큼.
'마치 행복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야.'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로맨틱한 고백.
그런 사랑을 받는 여자는 기분이 어떨까. 다렁이에게 그런 고백을 들을 수 있는 여자는 대체 어떤 기분일까.
가슴이 지끈지끈 울린다. 조금 전부터 다현이 조용히 나를 쳐다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애써 올라가지 않으려는 입가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 그런데 왜 나한테 말 안 했냐?"
"……."
"내가 전에 좋아하는 사람 있냐고 물어봤었잖아. 그때 왜 말 안 했냐? 난 그래서 여태 없는 줄 알았잖아. 조, 좀 섭섭하다? 난 너한테 바로바로 다 얘기했는데."
"……."
다현이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날 바라보기만 했다. 덕분에 난 매우 뻘쭘해졌다.
"그, 그런데 여, 여자 친구도 있으면서 나랑…… 음, 그래. 너도 연습 삼은 거냐? 마, 맞아. 너도 연습 좀 해야겠더라. 그, 그렇게 하면 그 소중한 여자 친구가 많이 섭섭해 할 거야. 얘, 얘가 날 싫어하나 할 걸?"
"……."
다현이는 여전히 말 없이 날 바라보기만 했다. 그 시선에서 왠지 압박스러운 느낌이 들어 나는 입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내가 뭐라고 떠드는지도 모르면서 열심히 떠들었다.
"나, 나중에 그 여자애랑 할 때는 말이야…… 조, 좀 천천히 부드럽게 해주라고. 그래야 그 여자애도 이 사람이 날 정말 좋아하는 구나, 하고 깨달을 거 아냐. 니가 속으로 암만 좋아하면 뭐해. 그렇게 니 욕구만 풀어내고 끝이라는 식으로 굴면……"
나는 말을 멈추고 말았다. 다현이가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런 얼굴을 뭐라고 표현해야 좋은 걸까? 어떻게 보면 화가 난 것 같고, 어떻게 보면 슬퍼하는 것도 같다. 나는 침도 삼키지 못 하고 녀석을 마주 보았다. 녀석은 그런 이상한 표정을 한 채로 말했다.
"그럼, 형이 한번만 더 도와 줘."
"……."
"이번엔…… 제대로 할 테니까."
"……."
나는 잠깐 말을 잊어버렸다. 이상하다. 원래 내가 말을 할줄 알았던가? 왜 생각나는 말이 하나도 없지? 알았다고 하는 대답이 뭐였더라……. 힘겹게 머리를 굴리던 나는 뒤늦게 고개를 끄덕이는 의사 표현이 있다는 것을 간신히 떠올렸다. 나는 천천히, 정말 느릿하게 녀석의 눈을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일이다.
녀석의 그 이상한 표정이 그 순간엔 슬픈 표정으로만 보였다.
<39>
철컥.
저번과 마찬가지로 다현은 방으로 들어옴과 동시에 문을 잠갔다.
"……."
일부러 그러지 않아도, 우리 엄마는 녀석의 방에 노크 없인 절대 들어오지 못할 텐데. 게다가 지금 집 안엔 녀석과 나 둘 뿐이다. 부모님은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잘 정돈된 녀석의 침대를 보았다. 전에 한번 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번에도 전처럼 아프면 어떡하지…….
아, 하지만 오늘은 내가 다현이를 도와주기로 한 거니까, 최대한 녀석에게 맞춰줘야겠지?
"…!"
나는 힐끔 다현이를 보았다……가 바로 놀라고 말았다. 아이고, 다렁아. 날 보고 있었냐. 나는 어색하게 씩 웃어보였다. 다현이는 별 반응 없이 내 얼굴을 본다. 아까부터 왠지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서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그런 내 사정을 알았는지 녀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침대로 가자."
네넵…… 그래야지요. 분부하신 대로.
나는 후다닥 침대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되게 어색하다. 그러고 보니 그때는 어색함을 막 느끼려던 찰나에 녀석이 맹돌진해 와서 그럴 사이가 없었는데. 원래는 이렇게 어색했어야 하는 거였군.
나는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야 하나, 다리를 쭉 펴고 앉아야 하나에 대해서 잠시 심각한 고민에 빠져야 했다. 결국 어정쩡하게 다리를 세워서 앉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다현이는 침대에 앉지 않고 그 앞에 멈춰 서더니 입고 있던 셔츠 단추를 하나씩 끄르기 시작했다.
으악, 이게 난데없이 웬 스트립쇼! 아, 아니 물론 하려면 옷을 벗어야하긴 하지만…… 하지만…… .
나는 확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천천히 드러나는 녀석의 가슴 근육을 보고 있는 것은 정신 건강에 그닥 좋지 않았다. 나, 나도 옷을 벗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재빨리 팔을 엑스자로 교차해 입고 있던 티셔츠를 머리 위로 한번에 걷어 올렸다. 그때 스르륵 하고 녀석의 웃옷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꿀꺽.
나도 모르게 침이 넘어간다.
난 매우 당황하며 팔에 걸쳐진 티셔츠를 빼낼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그때 끼이익 하며 한쪽 침대가 기울었다. 두근, 하고 심장이 울린다. 다현이 침대 위로 올라왔다.
"어, 어, 저기, 그러니까…… 오, 오늘은 너, 널 위해서 하는 거니까…… 제, 제대로 한번 연습해 봐. 나, 날 그 여자라고 생각하고……"
당황해서 횡설수설 하던 나는 그만 말을 멈추고 말았다.
다, 다렁아.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냐……. 사람 민망하게.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녀석의 손이 천천히 올라와 귀 뒤쪽을 쓸어내린다. 흠칫 하며 몸을 떠는 내 머리카락 선을 따라 부드럽게 움직이던 손가락이, 다시 올라와 볼을 감쌌다. 그때까지도 이마 위로는 따가운 시선이 박히고 있었다.
가, 감정 이입이라도 하는 건가.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시선만 힐끔 올려 녀석을 보았다. 녀석은 어쩐지 평소보다 유난히 까매 보이는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셔츠를 마저 벗어야 하는데.
나는 팔에 감긴 셔츠가 신경 쓰여 손을 꼼지락 거렸다. 그때, 녀석의 남은 손이 마저 올라와 내 반대편 볼을 감쌌다. 으아아. 얼굴이 달아오른다. 상당히 민망하게 녀석과 마주보는 자세가 되었다고 생각한 순간, 녀석의 그 까만 눈동자가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떨리는 눈꺼풀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눈을 감았다.
"……."
이마 위를 지그시 누르는 입술의 감촉. 그 감촉은 천천히 내려와 눈꺼풀 위를 눌렀다. 그리고 코 위를 누르고, 양 뺨을 누른 뒤, 더듬거리듯 내려와 마침내 입술을 덮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녀석을 보았다. 녀석은 어느새 눈을 감고 있다. 굳게 감겨져있는 속 쌍꺼풀.
눈을 감고 그 여자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는 걸까.
입술을 맞댄 녀석은 애가 탈 정도로 여러 번 아랫입술만 빨았다. 난 참지 못 하고 먼저 녀석의 입술을 열어 혀를 집어넣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오늘은, 내가 아니니까. 나랑 키스하는 게 아니니까. 나는 애가 타는 마음을 꾹꾹 억누르며 어서 녀석의 혀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한참 만에 천천히 입술이 겹쳐지며 타액이 섞였다. 나는 입안으로 조심스럽게 침투해 들어와 이곳저곳을 쓰다듬는 녀석의 미끈한 혀에 반응하며 천천히 몸의 중심을 뒤로 쏠리게 했다. 끼익, 침대가 기우는 소리가 들린다. 녀석도 내 볼을 감싸던 손을 내리고 내 옆의 침대를 짚어 체중을 실었다. 점점 끈적끈적해지는 키스. 완전히 누운 자세가 된 내가 침대에 머리를 대고 누우려 했을 때, 녀석이 천천히 손을 올려 내 머리를 받쳐주었다.
"……."
왜 이런 별 거 아닐지도 모를 배려가 사람을 이렇게 감동시키는 걸까.
난 눈을 뜨고 녀석을 보았다. 천천히 입술이 떨어져 나가며, 녀석도 나를 본다. 눈이 마주친 녀석은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두근.
이상해.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다. 내가 꼭, 그 여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녀석은 다시 몸을 숙여 내 귓불을 빨았다. 조금 전의 키스로 인해 축축하게 젖어있던 녀석의 혀가 귓가에 닿자, 나도 모르게 흠칫 소름이 돋는다. 녀석은 몸을 떠는 나를 달래듯 반대편 손으로 부드럽게 이마 위를 쓸어 넘겨주며 천천히, 공을 들이는 사람처럼 내 귓가를 핥았다. 가볍게 귓불을 빨고, 그 선을 타고 올라와 점점 안으로, 안으로 혀를 굴린다. 귓속에서 느껴지는 뜨끈한 혀의 감각이, 그리고 바로 옆에서 생생하게 들리는 질척이는 소리가, 참을 수 없을 만큼 소름이 돋게 만들었다. 벌써 아랫도리에서 묵직한 느낌이 온다. 허벅지가 덜덜 떨려왔다.
"……!…"
나도 모르게 애타는 신음이 흘러나오려는 걸 입술을 질끈 깨물어 참았다. 소, 소리 내면 안돼. 지금 난 녀석이 사랑하는 여자의 역할을 해주고 있는 거니까. 녀석이 좀 더 감정 이입을 할 수 있도록, 그 여자의 얼굴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도록, 소리가 나오려 해도 참자. 참아, 정지후.
스스로를 향해 열심히 되뇌고 있는 사이, 귓불을 핥던 녀석은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와 내 목덜미를 물었다. 그리곤 민망한 소리가 나도록 강하게 빨아들인다.
"…!"
아, 아파, 다현아. 점점 강해지는 힘에 나는 차마 소리를 지르지는 못 하고 몸만 꿈틀꿈틀 거렸다. 그러자 뒤늦게 녀석이 정신이 든 듯 내 목덜미에서 입술을 떼어내며 ‘미안……’이라고 중얼거렸다.
두근.
하고 가슴이 울렸다. 녀석은 잠시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호흡을 고르다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아직 다 벗어내지 못한 티셔츠가 내 손을 속박한 채 가슴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을 보고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벗겨낸다.
티셔츠를 빼내고 팔을 풀어, 맨 가슴이 된 내 위로 녀석의 혀가 닿았다. 정 가운데에 입술을 파묻고는 예민한 사이를 따라 간질이듯 혀로 핥는다. 참을 수 없는 그 느낌에 나는 심하게 허리를 뒤틀었다. 저절로 신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입을 막아 참아내자, 그런 나에게 대항이라도 듯 녀석은 유두 근처로 자리를 옮겨 더욱더 집요하게 빨기 시작했다.
"응… 아아."
나도 이젠 모르겠다. 도저히 못 참겠어…….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신음을 결국 참지 못하고 방치해버렸다. 유두를 깨물던 녀석이 내 목소리에 잠시 움직임을 멈춘다. 미안하다, 다렁아. 환상을 깨트려서. 그런데 나 도저히 못 참겠다……. 흑.
혹 녀석이 할 맛이 떨어졌으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렇진 않았던 모양인 듯 녀석은 다시 혀를 굴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보다 더욱 짙고 농염하게 유두를 입에 가득 물고 빨다가 혀를 굴리고 핥는다. 그와 함께 옆구리를 슬슬 쓰다듬는 감각이 머리가 하얗게 비어 나가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허리가 연신 움찔움찔 떨린다. 점점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르는 하체가 강하게 사정의 욕구를 호소했다.
"아, 다렁아…… 나, 나 못 참겠어…… 자, 잠깐만……"
나는 결국 녀석의 머리를 손으로 밀어내며 제지했다. 녀석이 의아한 시선을 하고 나를 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어색하게 웃었다.
"얘, 얘 좀 잠깐 가라앉히고 다시 하자."
바지 위로 꼿꼿이 일어선 내 중심을 가리키며 말하자 다현은 잠시 할말을 잃은 듯 입을 다물었다. 난 민망해졌다.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는데 이게 무슨 꼴이냐, 대체.
애꿎게도 괜히 녀석에게 원망스런 마음이 들었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정다렁……. 왜 이렇게 잘 하는 거야. 연습은 개뿔. 지금 이대로만 하면 아마 그 여자는 살살 녹을 걸.
이상하게 가라앉으려는 기분을 추스르며 나는 바지 지퍼를 내리고 팬티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안이 벌써 축축하게 젖어있다. 미치겠네. 내가 이렇게 음란하고 쾌락에 약한 녀석인지 나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구. 나는 천천히 중심을 쓰다듬으며 거칠어지는 숨을 뱉어냈다.
"후……."
"……."
녀석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진다. 빠, 빨리 빼내자. 아무리 볼 거 다 본 사이라지만 역시 남 앞에서 이런 짓을 해야 한다는 건 민망하기 그지없군.
"미, 미안…아, 좀만……기다……헉!"
점점 손의 움직임을 빨리 하며 달뜬 음성으로 내뱉던 나는 그만 숨을 훅 멈추고 말았다. 다현이 허리를 숙이고 내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은 것이다. 으아아, 자, 잠깐만, 다렁아…… 너의 그녀는 이런 게 달리지 않았……!
"흐,"
만류하려던 나는 이상한 바람 소리를 내며 허물어지고 말았다. 팬티 위로 녀석의 입술이 닿았다. 천을 사이에 두고는 천천히 키스하듯 입술을 댄다. 그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동작에 나는 띵 하고 머리가 울리고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생식 기관이 받아내기엔 부담스러울 만큼 경건한 키스였다. 민망함에 어쩔 줄 몰라 안에 넣고 있던 손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는데 녀석이 그런 내 팔을 붙잡아 손을 빼내게 했다. 그리고는 밑으로 팬티를 내린다.
"……."
아직 가라앉지 않은 중심이 하늘을 향해 꼿꼿이 존재를 알렸다. 나는 녀석의 시야 앞으로 적나라하게 노출된 성기의 모습에 민망해서 그대로 증발해버리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다현은 전혀 그런 기분을 느끼지 않는 듯 애액으로 번질거리는 내 중심을 가볍게 혀로 핥았다. 기둥을 따라서 천천히, 천천히 혀로 쓸어내린다. 금방이라도 사정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살덩이 위로 닿는 그 까끌까끌한 감각에, 나는 미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너무 좋아서. 너무 좋아서 이대로 미쳐버릴 것 같다.
"아…! 으…… 핫……! 허억…!"
몇 번이나 오르가즘을 느끼며 소리를 질렀다. 손으로 빠르게 위아래로 훑어 내리며 혀로 핥는 감각이 참을 수 없을 만큼의 쾌락을 자아낸다. 팍, 하고 머리에 강렬한 스파크가 일었다. 끝내 참지 못 하고 배출된 정액이 줄줄 흘러내리며 녀석의 손과 입술과 침대를 적신다.
"아… 헉, 헉헉……."
나는 사정하고 난 뒤에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정상까지 올랐다가 갑자기 곤두박질 쳐진 느낌이다. 급하게 숨을 몰아쉬며 이성을 차리려고 애쓰는데, 뒤늦게 다렁이에 대한 걱정이 더럭 밀려왔다. 아, 나는 왜 제때 맞춰서 녀석을 떨어뜨리지 못 하는 거야……! 마, 많이 불쾌했겠지? 나는 움직이지 않으려는 고개를 애써 들어올려 녀석을 보았다.
"헉…!"
그리고 기절할 듯이 놀라고 말았다. 녀석이 입술 가득 묻은 정액을 혀로 핥고 있었던 것이다. 으아아, 다, 다렁아! 뭐, 뭐하는…… 뭐하는 짓이냐……!
"하, 하지 마!"
"…?"
"다, 닦아. 빨리! 미, 미안해, 미안해."
나는 급히 밑에 깔려있던 침대 시트를 끌어올려 녀석의 입술을 닦았다. 앗, 그러고 보니 이것도 다렁이 껀데!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하얗게 질리는 나를 보며 녀석이 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녀석이 굉장히 따뜻한 눈동자를 하고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괜찮아."
그리곤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
어, 어떡해…… 나 어떡해…… 나 어떡하지, 다렁아…….
귓불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가슴이 쿵쾅쿵쾅 뛴다. 녀석은 다시 내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바지와 팬티를 벗겨내 침대 밖으로 던졌다. 그리고 자신이 입고 있던 옷도 마저 벗는다. 나는 그때까지 고개를 푹 숙인 채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다, 다현아, 나 어떡하지…… 나 착각할 것 같아…….
초조하게 뛰는 심장을 달래려 애쓰고 있는데 내 다리를 벌리고 그 앞에 앉던 녀석이 의아했는지 고개를 들었다.
"형, 왜 그래……?"
그래, 나는 녀석의 형.
"하기 싫어? 기분 나빠? 하지 말까?"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녀석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고 양 옆으로 세차게 흔들었다.
"……."
녀석이 잠시 주저하는 듯 나를 본다.
녀석이 좋아하는 건 내가 아냐. 녀석이 좋아하는 건 오늘 낮에 본 그 여자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는 그 여자. 그리고 나는 녀석의 형이다. 녀석의 소중한 여자와의 첫날밤을 위해서 잠깐 연습 상대가 되어주고 있는 녀석의 형.
그런데 왜 이러지…… 자꾸 착각할 것 같아……. 지금 널 보고 있으면, 꼭 내가 그 여자가 된 것 같아…….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가 된 것 같아…….
착각하면 안 된다.
"전에 그 기억 때문에 그러면……"
"아, 아냐. 괜찮아. 빠, 빨리 하자. 기왕 도와주기로 한 거, 확실히 도와 줘야지. 너도 날 그 여자라고 생각하고 잘 활용해봐……."
"……."
녀석은 잠시 입을 다물고 날 쳐다보았다. 난 그런 녀석을 향해 어서 하라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녀석은 한동안 가만히 나를 쳐다보다가, 한참만에야 내 다리 사이로 고개를 묻었다. 그리곤 곧 허벅지 위로 진한 키스를 퍼붓는다.
나는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에 몸을 뒤틀었다. 녀석은 달래듯 반대편 허벅지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내 다리를 벌리게 했다. 그리고 곧 내부 안으로 천천히 손가락을 밀어 넣는다. 아직은 생소한 그 이물감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탐색하듯 안을 파고 들어와 꾹꾹 누르는 낯선 느낌. 나도 모르게 인상을 쓰고 있는데 힐끗 고개를 든 녀석이 그런 내 얼굴을 본 모양이다. 녀석은 손가락을 빼내더니 잡고 있던 내 허벅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누워 봐…."
"……."
다정한 목소리. 나는 다시 침대 위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녀석이 또 몸을 일으켜 머리 뒤를 손으로 받쳐준다. 안 그래도 똑바로 누울 수 있는데. 괜스레 찌잉한 기분에 녀석을 쳐다보자, 녀석은 다시 한번 내 머리를 가볍게 쓸어주고는 옆에 있는 탁자에서 뭔가를 꺼냈다.
이것도 다 그 여자를 떠올리는 배려일까. 아니면 나를 위한 배려일까.
나랑 있을 때는…… 나랑 있을 때는 어땠어? 나랑 있을 때도 너 많이 웃었잖아.
나는 울 것 같은 기분으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자꾸 어린애 같은 생각이 들려고 해. 내가 왜 이러지.
다시 이물감이 안을 채우고 들어왔다. 이번에는 미끈거리며 조금 전보다 훨씬 수월한 느낌으로 들어온다.
"응, 아……"
천천히 안을 헤집던 녀석의 손가락이 어딘가를 스치자, 굉장히 간지러운 듯 하면서도 찌르르한 감각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나는 허리를 뒤틀며 달뜬 신음을 내뱉었다. 그러자 녀석이 조금 멈칫하는가 싶더니 조금 전에 스쳤던 그 부분을 손가락으로 꾹 누른다.
"아…!"
나는 다시 허리를 뒤틀며 듣기에도 민망한 소리를 내뱉었다.
녀석은 그 후로 인내심 있게 손가락을 늘리며 입구를 넓혔다. 그렇게 넓혀진 안이 마침내 손가락 네 개까지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을 때가 되었을 때, 녀석은 내 다리를 접어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나는 긴장으로 몸을 경직시켰다. 잠시 허리를 숙이고 뭔가를 부스럭거리던 녀석이 경직된 내 몸을 느꼈는지 무릎 위로 진하게 입을 맞추며 중얼거린다.
"긴장하지 마."
"……."
"그때처럼 아프진 않을 거야."
"……."
곧 녀석은 자신의 어깨 위로 내 다리를 들어올리며 천천히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뜨겁고 빡빡한 이물감이 천천히, 인내심 있게 안으로 밀고 들어온다. 그 생생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온몸에 힘을 주며 몸을 긴장시키자, 녀석은 부드럽게 내 옆구리를 쓰다듬어주었다.
"……."
왠지 굉장히 서러워졌다. 녀석의 행동이 다정하면 다정할수록 가슴 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게 치밀어 오른다.
너 전엔 안 그랬잖아. 굉장히 빠르게 니 욕구만 대충대충 채우고 빠져나갔잖아. 그때 운 건 그럼…… 그 여자에 대한 죄책감인가……. 그래서 나를 피했나…….
"후……"
녀석이 끝까지 들어왔다. 안에서 꿈틀거리는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천천히 숨을 몰아쉬고 있는 녀석을 나는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녀석은 그런 내 얼굴을 보더니 가볍게 미소 지으며 내 뺨에 입을 맞췄다.
"아파?"
"……."
그러지 마…… 착각할 것 같아……. 나 착각할 것 같아, 다렁아…….
"그 여자 이름."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녀석이 의아한 시선으로 나를 본다.
"네가 좋아하는 그 여자 이름 불러. 불러도 돼."
"……."
한참동안 말이 없는 녀석.
"거, 걱정 마. 나도 하늘이를 생각할 거니까."
"……."
"너도 니가 좋아하는 여자 이름을 불러……."
"……."
그래, 언제까지고 계속 이렇게 둘이 함께 지낼 순 없어. 그건 꿈같은 이야기야. 녀석도 나도 가능하다면 하루빨리 서로에게서 졸업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린 형제니까.
녀석이 먼저 나에게서 졸업을 하려한다면, 나는 웃으면서 녀석을 보내줘야 하는 것이 옳다. 내가 아직 녀석과 함께 계속 둘이서만 지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고 해도, 녀석이 아직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이 나를 못 견디게 괴롭게 만든다고 해도, 나는 녀석에게 부담을 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난 녀석이 항상 웃었으면 하니까. 난 녀석이 늘 행복한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으면 하니까.
지금은 어린애 같은 독점욕을 부릴 때가 아니야…….
한동안 말없이 가만히 있던 녀석이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야……."
녀석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나온다.
"……지……야……"
나는 잠시 내 귀를 의심했다.
설마…….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이 뛴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녀석의 성기가 점점 빠르게 리듬을 타며 움직인다. 조금 전에 손가락으로 찾아냈던 그 묘한 감각이 드는 부분을 계속해서 꾹꾹 누르며 찔러왔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싶었지만 점점 쾌락으로 인해 머리가 아득해져가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아, 아아… 응! 아아……다, 다현아……."
"……민……지……"
"!"
순간,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녀석이 절정을 맞이하는 듯 안쪽 깊숙한 곳까지 강하게 박아 넣으며 나를 꽉 끌어안았다.
나는 그대로 경직되었다. 녀석이 거칠게 숨을 몰아 내쉬며 그 여자의 이름을 부른다.
"……민……지……"
그 여자 이름이 민지였구나.
나는 나를 꼭 끌어안고 한동안 놓아주지 않는 녀석의 품에 안긴 채,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말도 안 되는 감정을 느꼈다.
나 어떡하지, 다현아.
나 아무래도 미친 거 같다.
<40>
마치 행위 내내 사랑의 고백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말도 안 되는 환청이 들릴 만큼.
나는 나를 끌어안은 채 잠이 든 녀석을 내버려두고 방에서 빠져나왔다. 심장이 몹시 불안하게 뛴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와 계단을 제대로 내려갈 수가 없었다. 결국 반 정도 내려왔을 때 발을 헛디뎌 그대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쿠당탕.
요란한 소리가 났지만 그래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몸에서 느껴지는 통증에도 무감각하다.
미쳤구나. 미쳤어, 정지후.
행위 내내 그 여자가…… 그 여자가 미치도록 부러웠다. 너무 부러워서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내가 그 여자였으면. 다현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였으면. 다현이가 그렇게 애틋할 만큼 사랑을 느끼는 상대가 나였으면……. 그런 말도 안 되는 바람을 가졌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욕심을 부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다현이는 내 동생이다. 피까지 섞인 동생이라구!
스스로를 향해서 열심히 중얼거려 보지만 혼란스러운 머리는 진정이 되지 않는다.
'……지……야……'
그때 만약 녀석이 부른 게 내 이름이었다면.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할 생각이었을까? 대체 뭘 기대했던 걸까.
상상하는 것조차 끔찍하다. 더 이상 생각을 진행시킬 수가 없었다. 나는 계단에서 넘어진 자세 그대로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머리를 감싸 쥐었다.
어, 어떡하지…… 내가 왜 이러지…… 이제 녀석 얼굴을 어떻게 봐…….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찍고 싶었다.
다렁아.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난 아무래도 미친놈인가 보다. 하늘이를 좋아한다는 걸 듣고도 그렇게 화를 내던 너였는데 만약 이런 내 감정을 알게 된다면 넌 뭐라고 할까. 날 용서해줄 수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시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힘겹게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이 집에서 나가야 한다. 녀석과 마주치는 것이 두려웠다. 녀석의 얼굴을 마주보고도 감정을 숨길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언제부터지? 대체 언제부터야?
다리를 직직 끌며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생각을 정리해선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런 건 잘 모르겠어……. 하나도 모르겠다. 그냥, 녀석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아프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옥죄이는 것처럼 지끈지끈하고 아려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눈에서 눈물이 미친 듯이 쏟아져 내렸다.
나 어떡하지, 다현아. 나 미쳤나 봐……. 나…… 널 좋아하나 봐…….
해선 안 되는 깨달음.
깨닫고 나니 도저히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미친 듯이 흘러넘치기 시작한 감정. 그 감정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난 그대로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쿵 하고 무릎이 찍히고 바닥에 이마가 닿는다. 나는 바닥에 엎어진 자세 그대로 한동안 소리 없이 오열했다.
다현아. 다른 여자를 좋아하지 마, 다현아……. 나랑 같이 있자. 평생 나랑 같이 있자. 다른 사람에게 잘해주지 마. 다른 사람을 나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하지 마. 그렇게 날 두고 다른 사람에게로 가버리지 마…….
다현아…… 어떡하지.
나…… 널 사랑하는 것 같아. 너무너무 사랑하는 것 같아…….
나는 눈물과 가슴이 녹아내릴 것 같은 고통 속에서, 그렇게 힘들게 녀석에 대한 감정을 인정했다.
집을 나왔다.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무작정 녀석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만약 녀석의 얼굴을 보고 내 감정이 들켜서, 또 녀석이 예전처럼 나를 대한다면…… 그렇게 경멸 어리고 혐오스런 눈동자로 나를 녀석이 본다면…… 나는, 나는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대로 확 죽어버리고 싶은 기분을 느낄 것 같다.
빨리 이 감정을 죽여야 해. 어떻게든. 얼굴을 보지 않는다면 들키지 않고 천천히 죽일 수 있을 거야. 다시 예전처럼 평온하고 안락하게 녀석과 한집에서 웃으면서 지낼 수 있는 날이 올 거야. 그날을 위해서 조금 힘든 것쯤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녀석을 영영 못 보게 되는 것보다야 훨씬 나을 것이다.
네온사인이 가득한 밤거리를 정신없이 걸으며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몇 번이나 위로했다. 눈물 자국이 가득한 내 얼굴을 알아본 몇몇 사람들이 희한하다는 눈빛을 보내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어디로 가지……. 어디로 갈까? 연락할 친척도 친구도 없다. 여관에 갈까? 일단 가서 잠부터 잘까? 아니면 계속 이대로 걸을까. 어떡하지…….
'정지후. 우울할 땐 알지?'
그때 문득 가슴 속을 깊게 파고드는 말이 있었다. 나는 그대로 걸음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덜덜. 주머니를 뒤지는 손이 떨린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핸드폰을 꺼내들고 통화 버튼을 누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하늘아, 내가 좋아하는 건 너지……. 너 맞지……. 날 좀 도와 줘, 하늘아. 내가 이상해. 내가 미친 거 같아. 내가 좋아하는 건 넌데. 틀림없이 넌데.
'사랑인 걸 사랑인 걸 지워 봐도 사랑인 걸♪'
"……."
이윽고 수화기 반대편에서 흘러나온 컬러링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하늘아, 컬러링이 왜 이러냐…….
상황을 딱 맞춘 거 같은 컬러링에 잠시 뜨악한 기분을 느꼈던 나는 애꿎은 하늘이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한때는 타이밍의 하늘이라고 불렸지, 스스로 중얼거리던 녀석의 말이 떠오른다. 오케이, 하늘아. 너 너무 타이밍 잘 맞춘다. 어찌나 잘 맞추는지 지금 내 사정을 알고 일부러 전화를 안 받는다고까지 생각될 정도구나.
나는 어쩐지 점점 우울하고 한심한 기분이 들어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비로소 그 빌어먹을 컬러링이 끊어지며 하늘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여……보세요……."
어……?
다 죽어가는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랐다. 평소 늘 들어왔던 발랄하고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아니라 힘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였다.
"여보세요? 하늘아?"
"응…… 지후야…… 왜……?"
"왜 그래? 어디 아파?"
"음…… 콜록, 그냥 감기 기운이 좀…… 너야…… 너야말로……"
"?"
"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냐……."
"……."
─무슨 일 있냐.
그 말 한 마디에 우습게도 다시 잊고 있던 감정이 미친 듯이 차고 올라왔다. 눈앞이 급속도로 뿌예진다. 콱, 하고 목구멍이 메어오는 느낌에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입을 열었다.
"하늘아……."
"응……."
"하늘아……."
"응……?"
그러나 그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할 수 없다. 어떡하지. 이런말도 안 되는 감정을 어떻게 말하면 좋지. 하늘아, 나 다현이를 좋아하는 것 같아. 그러면 안 되는데. 그러면 안 되는데 자꾸 확신이 들려고 한다.
니가 나 좀 어떻게 해줘, 하늘아. 널 좋아하는 게 맞다고 말해 줘. 널 계속 좋아하는 거라고 믿을 수 있게 해줘…….
나는 무릎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하늘아, 나 어떡해……. 나 어떡하냐. 나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나 정말……"
"왜 그…… 콜록, 왜 그래, 지후야……? 무슨 일 이야. 다현이는…… 다현이는 옆에 있냐……?"
왜 하필 이럴 때 그 녀석의 이름을 말하는 거야.
다현이 이름이 나오자 더 이상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흑, 하고듣기 싫은 소리가 새어나온다. 필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울음을 참아보려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흑…… 우훅…… 흐흐흑……"
"……."
하늘아, 나 다현이를 좋아해. 나 다현이를 좋아한다. 나랑 아버지가 같은 그 녀석을 좋아한다. 너무너무 좋아한다. 나 어떡하지.
"흑, 하늘아…… 나 어떡…… 흑, 어떡하냐……."
"……지금 어디야……지후야……."
"나 어떡, 흑…… 어떡하면……"
"콜록콜록! 어……디냐? 장소 말해봐라. 후배 보낼게. 일단 나 있는 데로…… 제길, 지금 본가에 와있는데…… 후, 일단 이리로 와라, 지후야……."
끼이익-
진정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눈 앞에 바이크가 하나 멈춰섰다. 나는 축 가라앉은 기분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곧 이어 바이크에 타고 있던 녀석이 헬멧을 벗으며 나를 본다.
"지후 형이죠?"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녀석은 어쩐지 어두운 내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하다가 곧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혹시 저 기억 하세요? 일전에 몇 번 봤었는데."
녀석의 그 말에 난 잠시 머리를 굴려보았다. 일전에 술집에서 이것저것 나에게 설명해줬던 그 녀석이었다.
"생각은 나는데 이름은……"
"승민이에요. 홍승민. 제가 하늘이 형이 젤 아끼는 후배예요. 기억해주세요."
"그래……."
나는 건성으로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이 다시 의아한 눈초리로 나를 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너무 피곤해서 다른 사람이랑 대화할 상태가 아니었다. 말없이 녀석의 뒤에 타려고 하는데 조용히 내 얼굴을 살피던 녀석이 묻는다.
"형이 지금 하늘이 형 애인이죠."
"……?"
이번엔 조금 반응하고 말았다. 이게 웬 난데없는 질문이지. 의아한 표정으로 녀석을 보자 어쩐지 가라앉은 눈동자를 하고 나를 보고 있다.
'형이 지금 하늘이 형 애인이죠.'
남자인데도 전혀 거리낌이 없는 질문. 거기다 저 수많은 애인이 거쳐갔다는 듯한 뉘앙스가 팍팍 풍기는 질문이라니. 하늘이에 관한 그 얘기들은 역시 전부 사실이었나 보다.
나는 잠시 사실대로 대답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에 대해서 고민했으나, 곧 귀찮은 기분을 느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지금은 하늘이랑 사귀고 있는 거 맞으니까. 게다가 저쪽도 다 알고 말하는 느낌이다.
하지만 내 대답에 녀석은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이 되더니 중얼거렸다.
"어? 진짜예요? 이상하다. 형, 분명 다현 선배 친형……아니었어요? 맞는데, 지후 형. 신정섭 밟으러 갔던 날 봤던 기억도 분명히 있는데."
에?
녀석의 말에 나는 잠시 희한한 기분을 느껴야했다. 다현 선배 친형 아니었냐고? 그 말이 여기서 왜 나오는 거지. 그럼 뭐 안 되나. 내가 동생인 다현이랑 사귀는 것도 아니고 그 친구인 하늘이랑 사귀는 건데.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머리가 복잡했던 나는 점점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데서 정곡을 찌른 지적이 나오니까 더더욱 그랬다.
"왜. ……그럼 안 되냐?"
난 결국 반발심을 가지고 물어봤다. 지레 찔려 하는 행동이란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네?"
녀석은 잠시 당황한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본다.
"난 하늘이 형이 아니라 다현이 형인데…… 하늘이랑 사귀면 뭐 안 되는 거라도 있냐."
차라리 하늘이 형이었으면 좋겠다…….
그런 어이없는 생각까지 들고 있는데 승민이란 그 하늘이 후배는 급히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엥? 아뇨, 아뇨. 그럴리가요. 그냥 좀 이상해서요……."
이상…하다니? 뭐가?
녀석은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내버려두고 혼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중얼거렸다.
"하늘이 형이 왜 다현 선배 형을…… 흠, 어쨌든 얼른 가봅시다."
그리고 말을 돌려오기에 나도 더 이상 물어볼 수가 없었다.
나는 어정쩡한 자세로 바이크 위에 올라탔다. 역시 아직 바이크를 타기엔 매우 무리가 많은 몸이었다. 고통으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데 부르릉 하고 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부아아아앙――!
바이크는 요란하게 밤거리를 질주했다.
"……."
이윽고 후배가 하늘이의 집이라고 내려준 그곳에서 나는 잠시 넋을 잃고 말았다.
벙-
잠시 입을 벌리고 눈앞의 건물을 바라보고 있는데, 하늘이의 후배가 그런 내 모습에 답답함을 느꼈는지 먼저 입을 열었다.
"놀라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얼른 들어가 보세요. 하늘이 형, 아픈 거 같았거든요.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응? 왜, 왜 벌써 가. 같이 안 들어가?"
"이 집엔 원래 다른 사람은 들어가면 안돼요. 하늘이 형 어머님이 굉장히 싫어하신다고 들었거든요. 형은 일단 하늘이 형이 부른 거니까 들어가 보세요, 참……"
아직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녀석은 뭔가를 부스럭거리더니 눈앞으로 불쑥 내밀어 왔다. 나는 어정쩡한 동작으로 그것을 받아들고 확인했다. 약 봉투다.
"이거 하늘이 형 주세요. 보나마나 안 챙겨먹고 있을 게 뻔해요. 휴…… 아플 때 혼자 있는 게 싫어서 본가에 들어올 정도면 우리한테 전화를 하라니까."
녀석은 투덜투덜 거리며 바이크에 올라탔다.
"그럼 이만 갑니다. 하늘이 형 좀 잘 부탁해요."
부아아아앙──!
그리고 후배를 태운 바이크는 떠났다.
나는 잠시 그 폐쇄적인 골목에 혼자 남겨져 멍하니 서 있었다. 뒤늦게 정신이 들어 천천히 옆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엔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죽을 만큼 높은 담벼락과 쇠창살로 이루어진 대문이 있었다.
하, 하늘아. 부잣집 도련님이었구나.
나는 내심 감탄하며 대문 위의 계단을 올랐다. 평소 돈 쓰는 일에 있어 부족함이 없어 보이고, 학생 신분으로는 사기 힘들 비싼 바이크를 몰고 다닌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 잘 사는 집 아들일 줄은 몰랐다.
나는 어쩐지 내밀어지지 않으려는 손을 힘겹게 움직여 초인종 버튼을 눌렀다.
딩동-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도 상당히 커다랗긴 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도저히 적응이 안 되는 걸.
나는 쇠창살 사이로 보이는 커다란 저택을 바라보며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곧 인터폰에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저, 저기, 음. 저는 그러니까, 하늘이……"
애인이라고 하면 큰일나겠지? 이런 상황에서도 머릿속으로 농담할 여유는 있구나. 나는 잠시 스스로에게 한심함을 느끼며 남은 말을 완성했다.
"음, 친군데요."
"하늘이 학생 친구라고? 잠시만 기다려라."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인 뒤에 들어오라며 대문을 열었다. 나는 더없이 어색한 동작으로 천천히 벌어지는 문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벼, 별로 들어가고 싶지가 않은데. 하늘이한테 괜히 연락했나.
하지만 이제 와서 안 들어가겠다고 물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곱게 깔린 잔디밭을 벗어나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일하는 아주머니인 듯한 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이 학생은 지금 방에 있단다. 데리고 들어오라는 구나."
"……."
나는 엄청 부담을 느끼며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정신적인 안정인데. 도피처로 찾아온 곳에서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나는 혼란을 느끼며 앞장 선 그녀를 따라 걸어갔다. 그녀는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방으로 나를 안내한 뒤에 말했다.
"여기란다. 허락없이 들어오는 거 싫어하니까 노크한 뒤에 들어가보렴."
"예… 감사합니다."
길을 안내해준 그녀가 떠나고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려 보았다. 똑똑. 노크 소리가 선명하게 울린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혹시 잠들었나? 내가 의아한 기분을 느끼며 다시 문을 두드리려고 했을 때 드르륵 하고 문이 열렸다.
"후……어서 와……."
열린 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하늘이 힘겹게 웃어보이며 말했다. 나는 한눈에 보기에도 많이 아파보이는 그 모습에 뭐라고 걱정의 말을 건네려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난간을 붙잡고 아슬아슬하게 서 있던 하늘이 갑자기 내쪽으로 팍 쓰러진 것이다. 후다닥 팔에 힘을 주며 녀석을 받쳐 안자, 마치 불덩이를 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늘아! 이런, 괜찮냐?"
"응……들어와라……."
그렇게 말하며 하늘이는 별 거 아니라는 듯 다시 몸을 일으켜 보였다. 하지만 방안으로 들어가는 걸음걸이가 상당히 위태롭다. 휘청휘청 거리며 힘겹게 걷는 그 모습에 나는 다시 녀석에게 뛰어가 팔을 부축해 주었다.
"아까 비 맞아서 그러지? 그러니까 우산 갖고 가라니까!"
"허허…… 괜찮다, 지후야…… 그보다 무슨 일……."
"……."
그 말에 난 잠시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솔직하게 털어놓아야 할까? 그냥 사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걸 깨달은 거라면 솔직하게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사그러뜨려야 할 말도 안 되는 감정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늘이랑 계속 이대로 지내자니 죄책감이 일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좋지…….
"넌……"
"?"
하늘이를 침대에 눕히며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녀석이 의아한 시선으로 나를 본다.
"넌 왜 나랑 사귀냐, 하늘아……."
"……."
네가 나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을 허락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면. 그렇다면 나는 다현이에게 그런 말도 안 되는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아니, 잘 모르겠지만 자신은 없다. 지금보다 죄책감이 몇 배 더 심해졌을 거라는 확신 밖에 들지 않는다.
내 말에 어쩐지 짙은 눈빛을 하고 나를 바라보는 듯 싶던 하늘이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글쎄……, 왜일까?"
"……."
또 말 돌리는 구나.
나는 어쩐지 실망스러운 기분으로 생각했다. 아마 아무리 물어도 제대로 된 대답은 해주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지금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생겼다고 헤어지자 그러면 하늘이는 뭐라 그럴까? ─그래? 지후 네가 그러자면 그러지, 뭐.
……윽, 상상이 너무 잘 되서 무서운데.
"참, 이거 승민이란 후배가 전해달라던데. 약이다."
나는 할 수 없이 일단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손에 들고 있던 하얀 봉투를 건네며 말하자 하늘이는 열로 벌건 얼굴을 하고는 씨익 웃는다.
"허허…… 콜록, 승민이 이 귀여운 자식……."
그때, 똑똑 하고 다급하게 느껴지는 노크 소리가 두번 울렸다. 하늘이는 침대에서 일어나 약봉투를 받아다가 의아한 시선을 하고 문쪽을 본다.
"무슨 일…… 이에요……?"
"하늘이 학생! 사모님 오셨어. 친구가 왔다는 걸 눈치 채신 것 같아. 어서 나가야할 것 같다."
잉? 난데없는 말에 난 당황했다.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쫓아내려는 건가?
"아, 젠장…… 하필 이럴 때……"
하늘이는 이마를 짚으며 골치 아프다는 듯 중얼거리더니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라라. 난 당황해서 비틀거리는 하늘이를 얼른 부축해주었다.
"기사 아저씨 좀…… 대기시켜주세요……"
"그래, 얼른 나와."
하늘이는 내 부축을 받으며 문 건너편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짧은 재촉과 함께 문가에 보이던 검은 그림자는 사라졌다.
"미안하다, 지후야…… 나가야겠다……"
하늘이는 땀이 가득 배인 얼굴로 미안한 듯 말했다.
"어, 아니, 괜찮다. 그런데 어머님이 많이 엄하신가 봐?"
별로 엄한 부모님 밑에서 자란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묻자 하늘이는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인다.
"엄하시다라…… 글쎄……."
그리고는 내 어깨에 척 팔을 둘러 더욱 본격적으로 기대오며 말했다.
"자, 얼른 나가자……"
"아, 아냐. 넌 아픈데 쉬어."
"나도…… 콜록, 나간다, 지후야…… 우리집으로 가는 거야…… 자, 얼른……."
하늘이는 그렇게 말하며 얼른 나가자고 날 재촉했다.
아니, 아픈 몸으로 어딜 가겠다고. 그냥 누워 있지. 그런데 여기가 집아니었던 건가?
그러한 의문으로 가득 찬 채 나는 하늘이를 부축해 거실로 나왔다. 거실로 나오자 화려한 옷에 비싸 보이는 보석으로 몸을 치장한 중년 여성이 계단 근처에 서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한눈에 이 분이 하늘이 어머니일 거라는 걸 짐작했다.
"저, 안녕하세요. 하늘이 친구 정지후라고 합니다."
엄한 부모님이라면 예의가 생명!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꾸벅 몸을 숙여 인사했다. 내 말에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뭐라고 얘기하고 있던 그녀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어라, 하늘이 어머님, 상당히 미인이신……
"합."
그때 난데없이 입을 틀어막는 손에 의해 내 생각은 절단되고 말았다.
"다, 다녀오셨어요…… 어머니. 하하……."
내 어깨에 기대 턱을 받치고 있던 하늘이 힘없이 웃으며 인사했다. 녀석의 어머니는 그런 우리들을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바라보고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이 마음에 안 드니?"
"아니오…… 하하,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럼 가정부가 마음에 안 드는 거냐?"
"매우 친절하시죠……"
입이 막힌 나는 눈만 굴려가며 그들의 뜬금없는 대화를 보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하늘이의 대답에 여전히 그 무심한 표정을 한 채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 자꾸 집에 들어오는 거니. 너 혼자 들어오는 것 까진 뭐라고 안하겠다만, 내가 집안에 외부인이 들어오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는 건 너도 잘 알 거라고 생각한다."
굉장히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헉……. 뭐라고? '왜 자꾸 집에 들어오는 거니' 라고? 그, 그게 아들한테 할 말인가? 게다가 지금 하늘이는 아픈데! 화들짝 놀라 하늘이를 쳐다보자 이쪽도 여전히 표정의 변화가 없다. 즉, 웃는 얼굴이다.
"죄송합니다…… 콜록, 앞으론 이런 일…… 절대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고열로 인해 호흡이 가쁜 상태에서 내뱉은 하늘이의 그 정중한 말은, 어쩐지 애처롭게까지 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녀석의 어머니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어떻게 보면 심드렁하게까지 보일 그 표정으로 녀석의 어머니는 중얼거렸다.
"다음주 수요일에 간단한 연회식이 있으니 그때 한번 집에 들어오너라."
"예……"
그리고 그녀는 인사말도 남기지 않은 채 그대로 등을 돌려 계단으로 올라가버렸다.
휘이잉-
거실에는 잠시 찬바람이 불었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어색하게 서 있었다. 그때 여전히 나에게 기대있던 상태인 하늘이 힘겹게 웃으며 말했다.
"갈까……?"
"으, 응! 그, 그래."
나는 급히 대답하며 다시 하늘이를 부축해 걸었다. 이 쓸데없이 넓은 집 때문에 우리는 밖에 나가기까지 상당히 많은 체력을 소모해야 했다. 간신히 밖에 대기해있던 차에 도착했을 때, 나는 완전히 녹초가 되었고 하늘이는 거의 실신할 지경이 되었다. 콜록콜록, 목이 긁히는 듯한 기침을 하며 조용히 좌석에 몸을 기대는 하늘이를 나는 심란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친엄마가 아닌 걸까?
남을 대하는 것처럼 어려워하던 그 태도.
문득 다현이를 처음 봤을 무렵이 떠올랐다. 결정적으로 녀석에게 관여하게 만들었던 그 외로워보이던 통화 장면.
그러고 보니 나는 하늘이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경 쓰지 마……"
그때, 좌석에 깊게 몸을 파묻은 채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하늘이 중얼거렸다. 나는 흠칫 놀라 녀석을 쳐다보았다.
"원래 우리 엄마가 날 좀 귀찮아하거든……."
엄마…….
나는 묘한 느낌으로 녀석의 그 말을 되풀이해보았다. 하늘이는 조금 전의 그 아줌마를, 과연 그렇게 불러봤던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을까?
"낳는 것도 귀찮아하셨거든……."
"?"
하늘이의 의미심장한 중얼거림과 함께 자동차는 출발했다.
끼이익, 한 오피스텔 앞에서 차는 멈춰섰다. 차가 멈췄을 때 하늘이는 거의 인사불성 상태가 되어 있었다. 나는 힘겹게 하늘이를 차에서 끌어내리며 말했다.
"하늘아! 하늘아, 괜찮냐? 정신 좀 차려 봐."
결국 기사 아저씨가 하늘이를 업었다. 내가 업고 싶었지만…… 음, 나는 왜 꼭 이런 날에만 힘을 써야할 일이 생기는 걸까. 하늘이를 엎으려다 다리를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나를 기사 아저씨는 답답하다는 듯 쳐다보다가 결국 휙 뺏다시피 해 업었다. 나는 그를 따라 급하게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띵-
엘리베이터가 멈춰서고 한 문 앞에서 삑- 하고 하늘이의 손가락을 갖다대자 문이 열렸다. 우와, 신기해라. 열쇠가 필요 없네. 그 짧은 사이에 감탄에 차서 현관문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기사 아저씨는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굉장히 넓고 깨끗했다. 들어가자마자 보인 커다란 창으로 널찍한 공원과 그에 딸린 호수가 보인다.
"난 이만 가볼 테니 학생이 우리 하늘이 학생 간호 좀 잘해 줘."
혼자 쓴다고 하기엔 좀 무리가 많은 킹 사이즈 침대에 하늘이를 눕힌 기사 아저씨가 나를 보며 말했다.
"아, 예… 안녕히 가세요."
나는 그를 배웅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하늘이는 식은땀을 잔뜩 흘리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아이고, 그러고 보니 약도 못 먹었네. 약, 약…… 이런, 그 집에 놓고 왔나? 젠장.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한참 방황하다가 뒤늦게 민간요법인 물수건을 떠올리고 후다닥 욕실로 달려갔다. 급한 대로 찬장을 뒤져 푹신한 수건을 하나 꺼내고 물에 적셨다. 그러나 정신없이 밖을 향해 달려 나가려던 나는 그만 문턱에 발이 걸리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철퍽, 너무나 적나라한 소리와 함께 그대로 안면이 바닥에 찍힌다. 허억─. 어떡해. 진짜 아파.
나는 끙끙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그날은 하늘이를 간호하다가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민지야……'
'민지야……'
다현이의 꿈을 꿨다. 그 여자와 함께 있는 다현이의 꿈을. 다현이는 그 여자의 이름을 굉장히 소중하다는 듯 부르며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여자도 방긋 웃는다.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조금 서러운 포지션의 꿈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눈을 뜨자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눈을 비비면서 조용히 낯선 주변을 살펴보던 나는 뒤늦게 이곳이 하늘이네 집이었다는 걸 떠올렸다. 그, 그러고 보니 하늘이는? 하늘이는 어디 있지? 몸은 괜찮은 건가? 나는 후다닥 거실로 나와 보았다.
"어, 일어났냐?"
거실로 나오자 바로 하늘이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하늘이는…… 맙소사, 바닥에 앉아 게임을 하고 있었다.
"이젠 다 나았냐?"
나는 기가 막혀 물어보았다. 게임기 쪽으로 다시 관심을 돌린 하늘이 입안에 있는 막대 사탕을 옆으로 옮기며 대답한다.
"엉."
"……."
너무 간단한 대답이다. 순간 허탈해졌다.
"참, 방금 일하는 아줌마 다녀가셨어. 부엌 식탁에 보면 아침밥 있다, 지후야. 먹어."
"……."
별로 밥 먹을 기분은 아닌데. 나는 힘없이 식탁에 가 앉았다. 그리고 그 위에 있는 덮개를 걷어내자 한 사람 분의 식사가 소담하게 차려져 있는 게 드러난다. 그래도 별로 손은 뻗어지지 않았다.
"후……."
나는 힐끔 게임을 하고 있는 하늘이의 등을 바라보았다. TV 화면에는 오토바이가 신나게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하여간 오토바이 되게 좋아하지.
나는 그런 하늘이의 신나는 질주를 바라보며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하늘이한테 다현이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하면 뭐라 그럴까. 하늘이도 날 이상하게 볼까? ……그럼 난 어떡하지.
혼자서 혼란으로 가득한 머리를 굴려보고 있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해줄까, 지후야?"
그때 조용한 하늘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에? 난 순간 내가 잘못 들었나했다. 왜냐하면 하늘이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TV 속 하늘이의 오토바이는 아무런 흔들림 없이 부드럽게 커브를 돌았다. 하지만 그 조용한 목소리는 분명 하늘이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난 좀 심술궂어서, 그렇게 알아달라는 식으로 바라보고 있으면 모르는 척 하고 싶은 습성이 있거든. 속마음이 확실히 보여도."
"……."
"말해 봐. 나한테 원하는 게 있으면 확실히 말해야 돼. 내가 뭘 어떻게 해줄까?"
"……."
난 잠시 입을 다물었다. 부다다당, TV 속 하늘이의 오토바이는 이번엔 화려한 윌리를 했다. 대단하네. 그걸 멍하니 쳐다보던 내가 한참 후 내뱉은 말은, 그러나 속마음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확실히 말해도 안 들어줄 때도 있잖아."
"엉?"
하늘이 당황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본다. 끼이익, 조작을 멈춘 TV 속 오토바이는 결국 구석지에 가 처박히고 말았다. 쾅. 콰광! GAME OVER.
"일전에 신정섭 사건 때 날 도와준 것도, 전부 다현이의 부탁 때문이었잖아. 하늘이 넌…… 항상 다현이 편이잖아."
그러니까 지금 내 속마음을 말한다 해도 들어주지 못할 것이다. 이건, 다현이와 관계된 일이니까.
하늘이는 내 말에 잠시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날 보았다. 하지만 곧 피식 하고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린다.
"그때랑 지금이랑 같냐."
"…?"
그때랑 지금이랑 같냐고?
"그럼 달라…?"
난 잔뜩 미심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하늘이는 내 말에 여전히 웃는 얼굴을 한 채로 날 바라본다. 하지만 어쩐지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해오는 시선에 난 결국 슬그머니 시선을 내리고 말았다. 하늘이 입을 열었다.
"만약 지금 그때랑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난, 지후야. 망설임 없이 널 구할 거야."
“…….”
굉장히 따뜻한 울림의 목소리.
다현이 얘기를 할 때의, 그 목소리다.
심정적으로 굉장히 불안한 상태였던 나는 그 목소리를 듣자 그만 마음의 경계가 많이 풀리고 말았다. 눈앞이 급속도로 흐려진다. 흑, 하고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그대로 어깨를 감싸 안으며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하늘아……."
"응."
"하늘아……."
"그래."
"나…… 다현이를 좋아하는 것 같아……."
"……."
"나 어떡하지…… 그 녀석은 내 동생인데, 나랑 피가 섞인 동생인데…… 그런데 왜 이렇게 그 녀석이 좋지…… 왜 이렇게 그 녀석이 다른 여자를 좋아한다니까 화가 나지…… “
나는 눈을 감았다. 필사적으로 억눌러왔던 감정이 다시 흘러넘친다.
“왜 이렇게…… 왜 이렇게 나는…… 그 녀석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지…… "
"……."
하늘이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나는 쥐어짜내듯 마지막 말을 중얼거렸다.
“나 그 녀석이 좋아, 하늘아…… 다현이를 좋아해. 좋아한다. 다현이가 좋아…….”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무 말 없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하늘이의 시선이 느껴진다. 나는 몸을 웅크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흘러넘치는 감정을 받아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그렇게 양어깨를 꽉 끌어안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참 만에 하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정지렁."
엥?
난 순간적으로 완전히 얼이 빠지고 말았다. 뭐야? 내가 헛걸 들었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이를 보았다. 하늘이는 굉장히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뭐야, 난 진지하게 얘기했는데 왜 그런 표정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점점 이상한 얼굴이 되고 있는 나에게, 하늘이는 딱 얼굴만큼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 알았냐?"
이제 알았냐고……?
난 얼빠진 표정으로 하늘이를 바라보았다. 하늘이는 싱글싱글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이리와 봐라, 지후야.”
응? 아직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는 나에게 하늘이 까딱까딱 손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뭐야, 왜……?
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 움직임에 본능적으로 슬금슬금 앞으로 기어가고 있었다. 제길, 본능이란 건 정말 무섭다.
“왜?”
난 녀석의 바로 앞에 앉으며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내 말에 하늘이 더욱더 짙게 웃어 보인다. 문득 머리 위로 턱 하고 커다란 손이 얹어졌다. 녀석은 내 머리를 강아지 쓰다듬듯 슬슬 문지르며 말했다.
“참 잘했어요.”
“잉?”
난데없는 칭찬에 이상한 표정을 짓는 나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역시나 우리의 하늘이는 제 할 말만 했다.
“역시 동생보단 형이 낫네.”
“?”
그게 무슨 말이야, 하늘아? 제대로 설명을 해, 설명을!
난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하늘이를 보았다. 하늘이는 혼자서 이제 끝까지 허세 부리는 그 바보는 어떻게 해줄까. 끝까지 솔직하지 못했던 게 얄미우니까 조금만 더 골려줄까. 등등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점점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안 좋은 표정이 되어가고 있는데, 그런 나를 뒤늦게 본 하늘이 풋 하고 웃으며 말했다.
“미안미안. 화났냐?”
“……저기. 난 지금 굉장히 진지한데, 하늘아.”
“그래. 안다, 지후야. 일단 눈물부터 닦아라.”
“…….”
하늘이는 그렇게 말하며 옆에 있던 티슈를 뽑아 내 눈물을 꼼꼼히 닦아주었다. 난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런 하늘이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안다고? 그런데 목소리가 왜 그렇게 발랄하냐, 하늘아. 아주 통통 튀는 구나.
“음?”
그때 눈물을 닦던 하늘이 문득 손을 멈추며 어느 한 지점을 바라보았다. 그 표정에 나도 의아함을 느끼며 녀석의 시선이 멈춘 자리를 따라가보았다. 뭐야, 어딜 보고 그러는…… 목? 뭐야, 내 목에 뭐가 묻었길, ……헉!
“으아아!”
나는 황급히 목을 손으로 가리며 뒤로 물러났다. 간밤의 기억이 떠오른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다현이가 어제 아프게 물었던 바로 그 부근이었다.
으아아, 부, 분명히 무슨 자국인지 눈치챘을 거야. 어떡하지? 뭐라고 변명할 말이……
“뭐야, 모기 물렸냐?”
그러나 하늘이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웃으며 그렇게 물어보았다. 그래서 나는 적잖이 당황해야 했다. 하, 하늘아. 너 의외로 순진했구나. 난 여태껏 네가 꾼이라고만 생각해서 분명 그쪽으로도 도가 텄을 거라고 생각했지. 다 겉모습을 보고 판단한 나의 오해였구나. 미안, 내가 색안경을 끼고 널 봤다. 나는 속으로 열심히 하늘이에 대한 오해를 사죄했다. 그때 문득 하늘이 지나가는 말투로 툭 내뱉었다.
“어제 많이 힘들었겠네.”
“…? 응, 나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내가 말이지, 어제 너 열 내리게하려고 수건가지고 몇 번을 화장실을 들락날락 거렸는 줄 아냐? 아주 안 그래도 다리에 힘이 없어 죽겠는데 말이지, 내가……”
거기까지 말한 나는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러다 내 입으로 다 불어버리겠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하늘이의 눈치를 살펴보고 있는데 하늘이는 뭐가 그렇게 웃긴지 혼자 크큭거리며 웃고 있었다.
“……하늘아. 아까도 말했지만 난,”
“알아. 진지하다고?”
“…….”
이런, 날 할말 없게 만들다니. 너무한 하늘이 같으니. 진짜 알긴 안 거냐? 나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하늘이를 노려보았다. 하늘이는 그런 내 표정을 마주 보며 싱긋 웃는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헤어지자.”
“?!”
그래서 난 그 말을 들었을 때 한동안 잘 이해하지 못했다. 허억─. 뭐지?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 뒤늦은 이해와 함께 엄청난 경악이 몰려왔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하늘이를 보았다. 하늘이는 그런 나를 보며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웃고 있었다.
나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아니, 저, 저, 하늘아…… 그렇게 갑자기……”
“다현이를 좋아한다며?”
“응, 그건 그렇지만 저기……”
“그럼 나랑은 헤어져야지.”
혹 이러다 눈알이 굴러 떨어지는 건 아닐까 염려될 정도로 눈을 부릅 뜨고 있는 나에게 하늘이는 너무나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마치 차근차근 수순을 따져나가듯이. 입가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다. 그래서 난 더 기가 막힌 심정이 되었다. 아니,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설마 그래도 진짜 그렇게 웃으면서 말할 줄은.
“넌 대체 왜 나랑 사귄 거냐, 하늘아…….”
난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물론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내가 하늘이한테 뭐라고 할 자격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뭔가 허무해졌다. 넌 날 조금이라도 좋아하긴 했던 거냐? 어차피 대답도 안 해주겠지. 기대도 안 하고 있는데 문득 하늘이 지나가는 말로 중얼거렸다.
“……글쎄, 어떤 바보가 꼭 누군가한테 뺏겨야 된다면 나한테 뺏기는 게 제일 안심이 된다더군.”
뭐…?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놀라움은 배로 컸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하늘이를 보았다. 하늘이는 옆으로 돌아앉아 한쪽 무릎 위에 팔을 얹은 채 천장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는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못마땅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안심이 너무 잘 되어서 그런가봐. 잘도 그러고 다니고.”
“그게 무슨…… 무슨 말이야?”
“글쎄 말이다.”
“바보라고? 뺏겨? 그게 누구야? 그 사람이 누군데 그 사람 때문에 나하고 사귀냐?”
“글쎄, 누굴까.”
“…….”
나는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어떤 질문을 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지금 하늘이의 대답으로 봐서는 아마 어떤 질문을 해도 제대로 된 대답을 해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혼란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날 꼭 누군가한테 뺏겨야 된다면 이라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내 주변에 그럴 만한 사람이 있을 리가……. 그때, 다시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하늘이 중얼거렸다.
“어차피 곧 알게 될 걸.”
“?”
“이 집에 계속 있어 봐. 그럼 제 풀에 지쳐 찾아올 테니까.”
그리고 하늘이는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그 바보에게도 솔직해질 기회를 주자구.”
설마 다현인가……?
나는 다시 게임삼매경에 빠진 하늘이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노려보며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짐 작가는 인물이 다현이 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렁이가 왜……. 내가 하늘이 좋아하는 걸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했던 녀석인데. 날 뺏기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구? 자기도 여자친구가 있으면서?
하긴, 그건 나도 그랬다. 하늘이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을 때도 그런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그때 난 깨닫지 못했을 뿐이지 이미 다현이를 좋아하고 있었는데…….
끙. 나는 두통을 느끼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머리가 굉장히 복잡했다. 명쾌한 해답을 눈앞에 두고도 계속 허우적 대는 느낌이다. 그러나 답을 알고 있는 하늘이는 정작 나의 고민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보였다.
“야야, 지후야. 그러지 말고 같이하자니까? 엉? 얼른 일루와.”
“…….”
하늘아. 정신 사납게 만들지 마라. 쉿.
“어차피 조금만 있으면 다 알게 된다니까 그러네? 뭐 하러 벌써부터 머리를 싸잡고 있어. 머리에 쥐나게. 자자, 얼른 일루와 봐라. 편하게 게임이나 즐기자구.”
“…….”
후…….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아, 날 제발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게 해줘. 난 지금 매우 심각하다니까! 정말 심각하다구!
“하늘아, 혹시……”
그 바보가 다현이냐…….
라고 물어보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딩동, 하고 초인종이 울렸다. 난 팟 하고 놀라서 현관문 을 바라보았다.
“……설마 벌써 왔나.”
하늘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나는 다시 하늘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늘이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 TV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상태였다. 조작을 멈췄는지 화면 속의 오토바이는 정지해 있다.
“예상보다 훨씬 빠른데.”
하늘이는 어쩐지 씁쓸함이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현관으로 나간다. 그 짧은 순간에도 초인종은 계속 딩동딩동 하고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두근두근.
난 가슴이 뛰었다. 설마 진짜…… 진짜 다현이면 어떡하지……. 그럼 어떡하지……. 나는 초조하게 뛰는 심장을 달래려 애쓰며 현관문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마침내 현관에 도착한 하늘이 '누구세요?'라고 물어보는 것과 동시에 문을 열었다.
“하늘이 형! 아프다면서요?”
“형, 괜찮아요?”
“아프면 전화 좀 해달라고 했잖습니까!”
“왜 이렇게 늦게 나와요?”
우르르-
순간 난 그런 효과음을 들은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아니아니. 날 뺏기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던 녀석들이 이렇게 많았단 말이야? 에휴, 이놈의 인기란.
“어, 다현 선배 형이다.”
“어라,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지후 형.”
내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녀석들은 날 발견했다. 그런데 어쩐지 전부 다 낯이 익는 것이 예전에 한번씩은 봤던 얼굴인 듯 하다. 나는 녀석들의 인사에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들어보였다.
“어, 그래……. 안녕?”
오, 방금 좀 연장자 답지 않았어? 이 여유로운 목소리. 그러나 후배들의 뒤에서 따라 들어오는 하늘이의 표정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하늘아, 볼 부풀리지 말고 그냥 웃어라.
“풋.”
……그런다고 진짜 웃다니.
잠시 크큭 거리며 웃고 있는 하늘이의 얼굴을 분노에 불타 노려보고 있자니 어제 봤던 그 승민이란 후배가 다가왔다. 응? 고개를 들고 쳐다보자 밝게 웃으며 내 옆에 앉는다.
“아직 계셨네요.”
“응? 아…… 응.”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픈 애를 내버려두고 집에 갔을까. 어색하게 앉아있는데 나머지 녀석들도 비집고 들어와 저마다 자리를 차지했다. 거실 안은 금방 시끌시끌 해졌다.
“늘이 형, 배고파요.”
“뭐 시켜 줘요.”
“음주, 음주!”
으악, 대낮부터 뭔 술이야. 이런 엽기적인 아이들을 보았나.
난 지금 심란해죽겠는데 상황이 도저히 나를 진지하게 만들어주질 않는구나.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때 다른 녀석들에 비해 비교적 조용히 앉아있던 승민이란 후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내가 나가서 사올게.”
“어? 그냥 시키지, 뭘 나갔다 오려고 그러냐.”
“어차피 술은 나가서 사와야 되잖아.”
녀석은 점잖게 그렇게 말하더니 하늘이를 보며 말했다.
“형, 돈.”
“……이 자식들이 진짜.”
하늘이는 험악하게 한번 으르렁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투덜투덜 거리며 방에 들어가 지갑을 꺼내온다.
“가끔은 선배를 사주는 정도의 센스를 발휘하지 못하겠냐?”
“에이, 형이야 말로. 형 아프다는 소식 듣고 부랴부랴 찾아온 귀여운 후배들에게 이 정도 해주시는 건 기본이죠.”
“넌 거울 좀 보고 살아, 임마. 야, 승민아. 대충 아무 거나 섞어서 사와라.”
하늘이는 승민이란 후배에게 만원짜리 몇 장을 건네며 말했다. 난 멀뚱멀뚱 앉아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엉뚱한 화살이 나에게로 날아왔다.
“지후 형, 같이 가요.”
엉? 나? 방금 나한테 한 얘기야? ……음, 이름까지 불렀으니 확실하겠지. 그래도 난 잠시 당황해서 일어날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하늘이 말했다.
“왜 지후를 데려가. 여기 널린 게 니 친구들인데.”
“에이, 지후 형이 심심해하시는 것 같아서 그러죠~ 형 같이 갈 거죠?”
“어, 엉…”
난 떨떠름하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렇게 말하는데 안 간다고 하기도 뭐하다. 사실 심심해하고 있던 거 맞기도 하고. 그러한 생각에 슬금슬금 일어나 녀석의 옆으로 가자 하늘이 미간에 주름을 만들며 날 보았다.
“……걷기 힘들지 않아?”
“응?”
“아~ 됐어요, 됐어, 형. 애인이라고 되게 챙기시네. 짐이고 뭐고 다 내가 들고 올 거니까 넘 걱정하지 말라구요.”
뜨아. 또 한번 눈깔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헥헥. 난 굉장히 당황해서 녀석과 하늘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늘이의 후배는 약간 부루퉁한 표정을 하고 있었고, 하늘이는 나와 마찬가지로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어? 뭐야, 그게 무슨 말이야. 하늘이 형, 지후 형하고 사귀는 겁니까?”
“그게 진짜예요?!”
곧 바닥에 앉아서 낄낄 거리며 웃고 있던 녀석들까지도 놀란 표정을 지으며 합세했다. 식은땀 난다. 그러고 보니 어제 사귀냐는 녀석의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했었지. 지금은 아닌데. 난 어쩔 줄 몰라하며 쩔쩔 맸다. 그러나 역시 나와는 반대로 금방 침착성을 되찾은 하늘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눈치챘었냐?”
“아니면 형이 그 상황에 절 더러 데려오라고 했겠습니까.”
“뭐, 좋아. 제대로 눈치 챈 건 맞는데, 지금은 아니다.”
“네?”
“아까 헤어졌거든.”
하늘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저 쌈박한 대답이라니. 잠시 당황했던 내가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다. 하늘이의 대답에 이번엔 승민이란 후배가 굉장히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녀석이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하늘이 먼저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너 안 갈 거냐?”
“네? 아, 아뇨. 가야죠.”
“그래, 그럼 얼른 다녀와라.”
그래서 하늘이의 후배와 나는 그 떨떠름한 분위기 가운데 집을 나서야 했다.
“내가 하늘이랑 사귄다니까 왜 다들 그렇게 놀라는 거야?”
난 결국 집을 나오고 녀석에게 어제부터 마음에 걸리던 것을 물어보았다.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앞만 보며 걷고 있던 승민이 내 말에 잠시 흠칫 놀라며 날 본다.
“네? 아…… 사실 별로 놀랄 건 없는 일이긴 한데요.”
녀석은 어색하게 머리를 한번 긁적이더니 말을 이었다.
“하늘이 형이 요즘 누굴 사귄지 꽤 오래됐거든요. 음, 그러니까…… 중학교 때부터 형을 보아온 제가 장담하건대 이건 굉장히 놀라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이 형, 고백을 받는 횟수가 장난이 아니거든요. 그럼 그걸 일일이 다 거절하고 있다는 얘긴데……”
그 말에 난 일전의 편의점 사건을 떠올려보았다. 음, 그래. 난 그 현장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었지.
“그래서 전 하늘이 형이 당분간 누굴 사귀거나 하는 일에 지친 줄 알았거든요. 왜냐하면 하늘이 형은…… 아, 형도 한번 사귀어봤으니까 알지 않아요? 그래서 헤어진 거 아닙니까?”
엥? 녀석의 말에 난 잠시 당황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헤어진 거 아니냐니? 하늘이한테 무슨 문제라도 있나?
“어? 아니에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는 표정을 지어보이자 녀석 역시 당황하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여러번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묻는다.
“어라, 이상하다……. 그럼 왜 헤어진 거예요?”
“그게……”
난 난감한 기분에 휩싸였다. 뭐라 그러지? 사실은 내가 다현이를 좋아해서? ……라고 쌈박하게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난 하늘이가 아니거든.
“아, 음. 사실 내가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여차저차…….”
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대충 얼버무렸다. 이렇게 말하니까 나 되게 나쁜 놈 같구나. 흑흑. 그러나 다행히 녀석은 자신이 굉장히 존경하는 선배를 두고 감히 바람을 핀 꼴이 된 나를 비난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럼 어제 기분이 안 좋아보였던 건 그 일 때문이었습니까?”
“음, 그렇지.”
별로 지금도 썩 기분이 좋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제 하늘이한테 털어놓고 났더니 좀 나아졌다. 녀석이 너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넘겨서 일까. 그러고 보니 난 지금 매우 심각하게 고민에 빠져 있어야 할 때인데.
“그렇구나. 전 어제 형 상태가 별로안 좋아보이길래 ‘아, 또 그 시기가 왔구나’ 했지요. 그런데 오늘 보니까 하늘이 형이랑 또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시길래…… 다시 괜찮아진 건가 싶어서 형이랑 한번 얘기 좀 해보려고 했습니다.”
“그 시기?”
“헤어지기 전이요.”
녀석은 그 말을 하고 어쩐지 우습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아니 결과적으로 헤어졌다는 건 똑같지만요.”
“?”
녀석의 얘기들은 너무 두서가 없었다. 그래서 난 그저 물음표를 한가득 떠올리며 녀석을 보아야 했다. 녀석은 내 표정을 보더니 조금 씁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음, 그러니까요. 하늘이 형은 여태껏 사귀었던 사람들이랑 깨끗하게 깨진 적이 없어요. 단 한번도.”
그렇게 말하고 녀석은 다시 생각났다는 듯 덧붙인다.
“아, 형이 예외라면 예외겠네요. 헤어지고 나서도 잘 지내시는 것 같으니까.”
“?”
깨끗하게 깨진 적이 없다고? 그게 그렇게 특이한 일인가? 난 여전히 이해가 안 되서 녀석을 쳐다보았다. 녀석은 내 의문을 눈치챈 듯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정확히는 상대쪽이요, 지쳐서 나가 떨어지는 느낌이랄까요?”
“지쳐서 나가 떨어진다고?”
“네. 굉장히 히스테릭해 지고 힘들어하다가…… 결국은 다 지쳐서 떨어져 나가요.”
왜? 난 그러한 의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늘이 정도면 거의 이상향에 가까운 연인이라고 줄곧 생각해왔는데.
“처음엔 말입니다. 다들 하늘이 형이랑 사귀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하죠. 음, 그러니까 하늘이 형이랑 사귀게 된 상대는 거의 사랑보다는 동경에 가까운 감정이거든요.”
나는 그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또 하늘이 형은 일단 사귀게 되면 굉장히 잘해주거든요. 거의 완벽에 가깝죠. 잘 생기고, 돈 많고, 쌈 잘하고, 재밌고, 다정하고. 처음엔 진짜 과장 조금 보태서 하늘이 형이랑 사귀는 상대의 눈이 하트로까지 보일 정도라니까요.”
“하하…”
난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녀석은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를 회상하고 있는 듯 하다. 잠시 후 녀석은 턱을 몇번 만지작 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해요. 뭐, 짧은 사람도 있고 긴 사람도 있고. 결과적으로 그게 사귀는 기간이 되지요. 한번 그런 마음이 들면 오래 못 버티니까.”
“그런 마음?”
내 질문에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독점욕이요.”
“…….”
난 입을 다물었다. 녀석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처음엔 사귀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뭐 그런 분위기지만…… 사랑이란 게 그런 게 아니잖아요. 계속 같이 지내고 함께 있다 보면 점점 욕심이 생기는 법이지요. 상대를 구속하고 싶어지고, 또 구속받고 싶어지고. 강도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어느 정도는 다 그런 기분을 느낀다고 생각해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듣고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하늘이 형은 그런 기분을 충족시켜주지 못해요. 전혀.”
“아……”
왠지 알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짧은 감탄사를 흘리자 녀석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말을 이었다.
“소유하려 들면 거기서 끝장이죠. 엄청 괴로워하고 망가지다가 결국은 지쳐서 떨어져 나가요. 뭐, 꼭 구속하려 드는 게 아니더라도…… 상대의 생활에 어느 정도는 자신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야 관계가 지속되든 말든 할 거 아닙니까? 그런데 하늘이 형은 전혀 안 그렇거든요. 이 사람에게 있어 나는 뭘까, 란 생각만 수시로 들도록 만들지요. 심지어는 저희들까지도 그런 점 때문에 형에게 야속한 감정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닌데 사귀는 상대야 오죽하겠습니까?”
하늘이랑 사귀면서도 하늘이에게 있어 내가 아무런 의미도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니,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건 아니겠지만 내가 없어져도 하늘이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아할 거라는 확신.
“중요한 건, 하늘이 형은 상대가 자신의 그런 점 때문에 괴로워하는 걸 안다는 거예요. 알면서도 아무 것도 해주지 않죠. 굉장히 다정한 것 같아 보이지만 정작 중요한 부분에선 엄청 무심한 사람이에요.”
“…….”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녀석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 하늘이 형을 꽤 가까운 곳에서 오랫동안 봐왔지만…… 아직도 어떤 사람인지 감이 잘 안 잡힐 때가 있어요. 굉장히 다정한 듯 하면서도 어떨 땐 너무하다 싶을 만큼 무심하고. 타인의 어려움에 쉽게 손을 뻗으면서도 자신의 어려움엔 절대 타인을 끌어들이지 않죠. 얼핏 보기엔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걸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 하늘이 형은 혼자 있는 걸 좋아해요.”
그 말에 난 굉장히 놀랐다. 하늘이가 혼자 있는 걸 좋아한다고?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내 표정을 본 녀석은 씁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굉장히 외로움을 타거든요, 형이.”
“…….”
난 할말을 잃었다. 이상한 기분이다. 저것과 비슷한 말을 난 예전에 들은 기억이 있다. 그것도 바로 그 외로움을 탄다는 본인에게서.
‘그 녀석, 안 그래 보여도 사실 엄청 외로움을 많이 타니까…… 니가 좀 잘해줘. 그 녀석 안 외롭게.’
‘타인의 어려움에 쉽게 손을 뻗으면서도 자신의 어려움엔 절대 타인을 끌어들이지 않죠.’
하늘이의 말과 방금 승민이 했던 말이 겹쳐서 떠올랐다. 난 점점 묘한 기분을 느꼈다. 하늘아……. 너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던 거냐? 난 너에 대해 점점 모르겠어. 네가 어떤 녀석인지 이제 감도 잡히지 않아.
‘신경 쓰지 마.’
차 안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중얼거리던 녀석의 얼굴도 떠오른다. 굉장히 쓸쓸하고 지쳐보이던 모습.
“다현이는?”
“네?”
“하늘이는 다현이한테도 약한 소리를 하지 않아?”
내 질문에 녀석은 잠시 짙은 눈빛을 하고 날 쳐다보았다.
“……그럴 걸요, 아마.”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그 두 사람의 관계는 좀 이상해요. 서로 굉장히 신뢰하고 있으면서도 결코 기대지는 않거든요.”
난 왠지 쓸쓸한 기분을 느껴 고개를 떨구었다. 그제야 전혀 다른 듯 보였던 두 사람이 사실은 지나치게 닮아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사실 그래서 처음에 형이 하늘이 형하고 사귄다고 했을 때 좀 놀랐던 것도 있습니다. 다현 선배가 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일전에 신정섭 사건 때 충분히 들었거든요. 그런데 하늘이 형이 상처줄 걸 알면서도 형하고 사귄다는 게 이상해서.”
그렇게 말하고 녀석은 잠시 날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사실 하늘이 형은, 형을 진심으로 좋아했던 게 아닐까요?”
하하. 난 그 말에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게 아니다. 하늘이는 단지 누군가의 부탁으로 나랑 사귀었을 뿐이니까.
나도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한결 명쾌해진 기분이었다.
난 하늘이랑 사귀면서 괴롭고 힘들었던 적은 한번도 없다. 왜냐하면…….
─난 하늘이를 소유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이 한번도 없으니까.
내가 하늘이에게 느꼈던 섭섭한 감정은 친구로서 느끼는 감정 외에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난 지금도 하늘이를 굉장히 좋아하고, 동경한다. 하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다.
다현아……. 보고 싶다, 다현아.
아직 하루 밖에 안됐는데.
녀석의 얼굴을 떠올리자 가슴 한쪽이 뻐근했다. 계속 이대로 도망쳐 있을 자신이 없다.
다현아, 나 이제 욕심 안 부릴 테니까…… 아니, 니 옆에서 나 혼자 욕심 부리고 나 혼자 참지 못할 독점욕에 시달려, 엉망으로 망가져버려도 좋으니까…… 그래도 절대, 절대 너에게 내 감정 강요해서 괴롭히는 일은 없을 테니까……
나 그냥 네 옆에서 계속 전처럼 함께 지내면 안 될까? 응?
형으로서라도 좋으니까.
나는 목구멍에서 치미는 뜨거운 걸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지금 여기서 뭐하는 걸까.
나는 핑 도는 머리를 붙잡으며 생각했다. 거실 안은 여름의 열기와 피 끓는 젊은이(?)들의 혈기로 인해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비어있는 내 잔을 본 한 녀석이 술병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지후 형, 잔 받아요."
"엉, 그래……."
아이고, 이제 어지러운데. 초점이 불명확하다. 나는 손을 더듬어 간신히 술잔을 들어올렸다. 곧 이어 쪼르륵 소리가 들린다. 나는 다시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크…"
어째 이건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나네. 목 말라 죽겠다.
"갈증 나…."
난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렸다. 얼굴이 너무 무거워서 제대로 들고 있기 힘들었다. 그때 문득 눈앞으로 불쑥 물컵이 들이밀어졌다.
"응?"
고개를 돌리자, 하늘이다. 하늘이는 아까부터 꽤 많은 양을 비웠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싱글싱글 웃는 얼굴이었다.
"아, 고맙다."
난 가볍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잔을 받아들었다. 벌컥벌컥 하고 한번에 원샷하자 그나마 좀 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도 여전히 갈증은 멈추지 않았지만. 고개를 확 뒤로 젖힌 탓인지 다시금 머리가 핑글 하고 돌아와 나는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그런데 생각보다 바닥이 푹신한 걸.
"앗, 지후 형 뻗었다."
"크큭. 전에도 봤지만 술 진짜 약하네요."
아니, 지금 내가 쓰러졌다고 흉보는 거야? 난 쓰러진 채로 팔만 들어올려 허공을 향해 휘적휘적 저었다.
"아직 안 취해따. 잠깐 쉬는 거야."
"풋. 혀 꼬였는데요?"
"안 취했다니까~"
아이고, 그런데 팔이 너무 무겁다. 나는 스르륵 들어올렸던 팔을 다시 밑으로 내렸다. 그런데 팔이 바닥에 닿는 순간 뭔가가 쓰러지는 느낌이 나며 축축한 감촉이 손을 타고 올라온다. 으잉, 이게 뭐야. 기분 나빠.
"큭."
문득 위에서 웃음기 가득한 소리가 들렸다.
"승민아, 거기 옆에 있는 휴지 좀 줘라."
음, 이건 하늘이 목소린데. 왜 머리 바로 위에서 들려오는 걸까? 의아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지면이 크게 흔들렸다. 헉, 뭐야. 지진인가? 공포에 질린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바닥에 깊게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납작하게 몸을 웅크리고 덜덜 떨고 있는데,
"……하늘이 형, 너무 야해요."
라는 이상한 말이 들려왔다. 엉? 하늘아, 넌 이 긴급한 와중에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냐.
"……."
잠시 짧은 정적이 흘렀다. 지면은 더 이상 큰 움직임이 없었다. 휴우. 지진이 멎은 건가?
"……방에 데리고 가서 재워야겠다."
문득 낮은 중얼거림과 함께 몸이 공중에 붕 떴다. 난 깜짝 놀라 얼른 옆에 있던 기둥 비스무리한 것을 꽉 끌어안았다.
"되게 귀여우시네."
"괜히 그 녀석이 애지중지 하는 게 아니지."
그 녀석? 그 녀석이 누구야. 몽롱한 의식 가운데서도 의문을 느끼고 있는데 기둥이 척척 앞으로 움직였다.
"다현 선배 말입니까? 하긴, 엄청 아끼시더군요. 보고 있으면 완전 여자친구에게 하듯이……"
"늬들 이제 안 가냐?"
나는 희미하게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하늘이 얼굴이 보인다. 눈이 마주치자 하늘은 엷게 웃어보였다. 그리고 등으로 푹신한 감촉이 전해지며, 따뜻한 손이 이마를 한번 훑고 지나갔다.
"자라, 지후야."
그러고 보니 잠이 쏟아져 내려와 나는 눈을 감았다.
"형, 그러고 보니 신정섭은 어떻게 됐습니까?"
"엉? 신정섭?"
"그 자식 퇴원한지 좀 됐잖아요. 이대로 가만 있을 놈은 아닌 것 같은데. 아직까지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습니까?"
"글쎄, 씹정섭이 뭘 하든 말든 내가 알게 뭐야. 알아서 잘 살겠지."
신정섭이라니, 참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다. 나는 잠의 나락 속으로 빠져 들어가며 생각했다. 그런데 씹정섭은 좀 심했다, 하늘아.
어느 순간 난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방안은 캄캄하고 어둡다. 모든 사물이 흑백으로 보였다.
여기가 어디지? 난 언제 잠들었던 걸까?
나는 멍한 머리로 그러한 의문을 떠올리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방안의 풍경은 지나치게 낯설었고 머릿속은 멍했다. 어디선가 희미한 담배향이 풍겨왔다.
방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바닥으로 형광등의 새하얀 불빛이 어둠 속에 길게 선을 그리고, 벌어진 틈으로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하늘이. 아, 그렇다. 나는 하늘이 집에 와 있었다.
그제야 간신히 낮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음, 그래. 나 술 마시다 잠들었지. 그래서 몸이 이렇게 나른하고 무거웠구나. 어쩐지 사고 회로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나는 아직도 멍한 머리로 멀뚱히 문 틈 사이의 하늘이를 바라보았다. 하늘이는 소파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담배를 피고 있었다. 다른 녀석들은 전부 돌아간 모양인지, 희미하게 들리는 TV 소리와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만이 이 정적 속에 들리는 소음의 전부였다.
나는 묘한 이질감 같은 것을 느꼈다.
이상하다. 뭔가 굉장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내가 느낀 이 기분이 뭘까에 대해 한참동안 고민했다. 머리가 둔해져 있어 그런지 그 간단한 것을 깨닫는데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참 만에 나는 하늘이가 무표정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닌데. 오히려 혼자 있을 때도 실실 웃고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이의 무표정은 굉장히 이상하게 보였다. 나는 뒤늦게 내가 하늘이의 무표정한 얼굴을 본 적이 드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늘이는 늘 희미하게나마 입가와 눈가에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무표정하니까 저렇게 인상이 차가워 보이는 구나.
그 갭은 놀라울 정도였다. 아니, 평소에 늘 웃는 얼굴만 봐왔기 때문에 더 그렇게 보이는 건가? 그러나 내가 떠올리기로, 일전에 조용히 생각에 잠긴 표정을 봤을 때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신기한 기분에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하늘이를 보고 있었다. 하늘이는 톡톡 앞에 있는 맥주 캔에 재를 털어 넣고 옆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생각에 잠긴 모양인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나도 멍하니 누워서 그런 하늘이를 바라보았다.
그때 갑자기 요란한 벨소리가 울리며 정적을 깨트렸다.
하늘이는 들고 있던 담배를 비벼 끄고 옆에 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액정을 보고는 희미하게 웃는다. 어쩐지 씁쓸함과 다정함이 함께 묻어나오는 묘한 표정이었다. 하늘이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냐?"
밝은 목소리. 보통 때의 하늘이로 돌아왔다.
"엉? 없어지긴 뭘 없어져. 지금 우리집에 있는데? 어제 왔다."
어? 내 얘긴가?
"연락 안 하고 온 거였냐? 글쎄, 내가 뭘 아나. 난 그냥 왔길래 재웠지."
설마 다현인가.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나는 뚫어져라 통화하는 하늘이를 바라보았다.
"지금 내 방에서 자고 있는데, 깨워주랴?"
헉. 난 그 말에 재빨리 눈을 감으며 이불을 목 위까지 끌어다 덮었다. 그리고 뒤척이는 척을 하며 고개를 옆으로 휙 돌려버렸다. 음, 나도 모르게 자는 척을 하고 말았군. 나는 떨리는 심장을 달래려 애쓰며 하늘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래. 그럼 내가 나중에 너한테 전화왔었다고 알려주지, 뭐."
이런……. 다렁아, 나 깨워도 되는데. 깨워도 된다니까. 응? 하늘아, 나 사실 안 잔다. 나 사실 안 잔다구!
"그런데 당분간 여기서 지내도 괜찮냐고 하던데 무슨 일 있냐?"
어? 나는 이불을 그러쥔 채 눈을 크게 떴다.
"흠, 그래? 나야 뭐 혼자 지내기 심심하던 차에 잘 됐다 싶어서 그러라고 했지. 그런데 그 전에 이거 하나는 확실히 하자, 다현아."
역시 다현이가 맞구나. 심장은 이제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뛰기 시작했다.
"─손 대도 되지?"
"?!"
뭐…?
급속도로 뛰고 있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도 한 집에서 살면서 참을 자신은 없어서 말이야, 아까도 엄청 꼴렸는데 간신히 참았다구. 너도 확실히 포기했으면 이제 완전히 손 떼야 되지 않겠냐? 지금도 엄연히 사귀는 건 나잖냐. 뭐, 내가 알아서 소중하게 잘 다룰 테니 넘 걱정은 말…… 끊겼네."
미리 생각해놓은 것 처럼 두두두 내뱉던 하늘이의 말은 허무하게 매듭 되었다. 나는 아까 고개를 돌려버린 걸 후회했다. 지금 하늘이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그나저나 그게 무슨 말이지? 확실히 포기했으면, 이라고? 그럼 역시 하늘이한테 나와 사귀라고 부탁한 사람이 다현인가?
초조하게 이불을 꾹 쥐고 누워 있는데, 문득 끼이익 하고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저벅저벅, 하고 점점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
나는 어쩐지 불안으로 가슴이 심하게 술렁였다. 입안에 침이 한가득 고였는데도 도저히 삼킬 틈이 없다. 눈을 감아 세상은 온통 암흑이었지만, 이마 위로 따가운 시선이 박혀 있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냥 이대로 일어나 버릴까? 그런데 어떻게 일어나지? 뒤척이는 척 하면서 잠에서 막 깬 듯이? 아니면 벌떡?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 위로 따뜻한 체온이 닿았다. 난 깜짝 놀랐다. 그 순간 흠칫 하고 몸을 떨지 않은 게 용할 정도다. 그대로 눈을 감고 숨을 죽이고 있는데 천천히 머리 위에 닿은 손가락이 흐트러진 앞머리를 정리해주었다.
"……된다고 하면 확 뺏어버리려고 했는데."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문득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 된다네."
뒤 이어 하하, 하는 장난기 어린 웃음 소리도 딸려나왔다. 그리고는 다시 정적. 한참 후에 녀석이 바닥에 앉는 것 같은 기척과 함께 침대에 무게감이 전해졌다. 아마도 녀석이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은 듯 하다. 나는 꼼짝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다.
"넌 신기한 녀석이야, 지후야."
녀석이 다시 정적을 깨트렸다.
"같이 있으면 외롭다고 느낄 틈이 없거든."
난 숨을 죽였다. 어쩐지 쓸쓸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다현이랑 나는 근본적인 데가 굉장히 닮아있지."
하늘이는 잠시 뜸을 들였다 말했다.
"사랑에 대한 보답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것."
위이잉, 에어컨이 돌아가는 소리와 TV 속에서 흘러 나오는 희미한 사람의 말소리 위로 겹쳐지는 하늘이의 목소리는, 너무나 담담하고…… 또 너무나 슬펐다.
"그래서 절대로 솔직할 수가 없다. 누군가에게 끌리기 시작하면 그 감정에 충실하기 이전에 공포심을 먼저 느끼거든. 그래서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서툴고, 말도 안 되는 허세만 부려. 사실 속으론 어디까지 좋아해야 내가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까만 생각하느라 전전긍긍하고 있거든."
하늘이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덧붙였다.
"덕분에 상처 받을 일은 적지."
그리고 한번 더 덧붙인다.
"때문에 늘 외롭고."
난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영원과도 같은 하늘이의 혼잣말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다현이나 나같은 녀석에게 그래서 넌 신기한 녀석이야. 감정을 표현하는 일에 있어 너무 솔직하고, 올곧거든."
하늘이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했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강렬하게 끌리는 법이지."
뭐……?
난 눈을 크게 떴다.
"뭐, 됐어. 널 좋아했던 건 아니야, 지후야. 감정이 제대로 발달하기도 전에 난 니가 다현이 형이라는 걸 알아버렸거든."
"……."
"그래도 짧은 며칠 간이었지만 함께 지내면서 꽤 재미있었다. 뭐랄까, 꼭 즐거운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었어."
"……."
뭐야, 데자뷰 현상인가? ……라고 생각하던 나는 뒤늦게 그 말이 다현이가 했던 말과 지나치게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난 왠지 목구멍에서 뜨거운 게 치밀어 올라와 이를 악물었다. 숨 쉬기가 갑갑하다. 하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원칙이란 건 중요하지."
더 없이 낮고……
"하지만 깨트릴 수 없는 건 아니야."
진지한 목소리.
"그 녀석은 이제 니가 없으면 안돼, 지후야. 완전히 망가져. 아니, 이미 반 정도 망가졌는지도 몰라."
다정한 목소리.
"그걸 고칠 수 있는 것도…… 나머지 반 마저 망가트려 버릴 수 있는 것도…… 너밖에 없어, 지후야."
이상하다. 눈 앞이 흐려.
"넌 어떻게 할래?"
하늘이 또박또박 입을 연다.
"세상 사람 모두에게 손가락질 받으며 인륜을 배반한 짐승 취급을 받을지라도…… 그 원칙을 깨트림으로써, 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면……"
하늘이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담담하게 묻는다.
"넌 어떻게 할래?"
"……져……"
목이 메어온다.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이 없으면…… 나도 망가져……."
갑자기 내가 입을 열었음에도 하늘이는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나는 이불 위로 고개를 푹 파묻었다. 눈시울이 뜨겁다. 그대로 타들어갈 것 같았다.
다현아…… 다현아……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어, 다현아……. 나한테 말하지 그랬어…….
그때였다.
긴 정적 속을 뚫고 딩동딩동 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왔군."
하늘이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녀석, 날아왔나? 왜 이렇게 빨리 왔어?"
그렇게 말하는 하늘이의 목소리엔 장난기가 가득 묻어 있었다. 나는 몸을 웅크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늘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기척이 난다.
─딩동딩동.
초인종이 계속해서 요란하게 울려댔다.
하늘이는 내가 움켜쥐고 있던 이불을 잡아 끌더니, 이마 바로 아래까지 씌워주었다.
"계속 자는 척 하고 있어 봐."
하늘이는 그렇게 말하고 내 몸을 가볍게 토닥인 뒤에 밖으로 나갔다. 곧 철컥, 하고 현관 문 여는 소리가 들린다. 그와 동시에 쿠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거친 호흡 소리가 들렸다.
"웬일이냐?"
이건 하늘이 목소리다. 그 능청스러움에 난 혼란으로 가득한 가운데서도 좀 황당함을 느꼈다. 하늘아, 진심으로 존경한다.
"후우…… 어디 있어?"
"뭐가?"
"형…… 어딨어?"
"……."
두근두근.
억눌린 목소리. 뛰어왔는지 호흡이 심하게 거칠어져 있다. 난 가슴이 매우 두근거렸다. 다현아…… 다현아……. 지금 당장 침대에서 뛰쳐나가 녀석을 끌어안아버리고 싶은 강한 충동이 인다.
"아까 말했잖아. 내 방에서 잔다니까."
하늘이의 대답에 난 숨을 죽였다. 이윽고 녀석의 거친 숨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끼이익, 하늘이가 나갈 때 닫아놓은 방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가 난다. 그러나 조금 전의 조급한 기색과 다르게 다가오는 발소리는 매우 느렸다.
"어쩔 건데?"
하늘이 목소리다.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 다현아. 태도를 확실하게 해라. 분명히 말하지만, 나한테 맡긴 건 너야."
"……."
다현이의 대답은 없었다. 드러내놓은 이마 위로 따가운 시선이 박힌다. 문득 커다란 손이 희미하게 이마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굉장히 안타깝게 느껴지는 움직임이었다.
"……만 보고……"
"뭐?"
"잠깐 얼굴만 보고 갈게……."
"……."
너무나 절실한 목소리. 가슴 속을 후벼파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나는 다시 뜨거운 뭔가가 치밀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터트려, 다현아."
하늘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 말에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리던 녀석의 손이 공중에서 뚝 멎는다.
"참지 말고 터트려 버려."
"……."
"세상의 이목이 그렇게 중요해? 터트려 봐. 그 녀석은 받아줄 거야."
"……."
다현은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짧은 정적이 흐른다. 난 숨을 죽이고 녀석의 대답을 기다렸다. 한참 만에 녀석이 입을 열었다.
"……안 돼."
대답은 부정이었다. 난 머릿속에 커다란 돌이 떨어져 내리는 느낌을 받았다.
"내 이기심 때문에…… 형을 불행하게 만들 순 없어……."
"!"
다현이 힘겹게 말했다. 나는 이불 속에서 눈을 부릅 떴다. 그대로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부탁한다, 하늘아……."
다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함부로 대하지 마…… 항상 웃을 수 있게 해줘…… 부탁이다……."
눈시울이 뜨겁다. 눈앞이 급속도로 흐려졌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때,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기척이 났다. 손이 다시 한번 안타깝게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간다.
하늘아……! 미안하다. 나,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어!
난 뒤집어 쓰고 있던 이불을 머리 위로 확 걷어올리며 일어났다. 그때, 뒤돌아선 녀석의 등 너머로 이쪽을 보며 웃고 있는 하늘이와 눈이 마주쳤다.
"─라고 바보는 끝까지 오기를 부리는데, 지후야."
다현이 걸음을 딱 멈췄다. 하늘이 싱글싱글 웃으며 묻는다.
"좀 더 똑똑한 바보 형은 어떻게 생각해?"
천천히,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녀석이 얼굴을 돌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는 날 바라본다. 난 원망스러움에 녀석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나도 안돼."
"……."
"니가 웃지 않으면, 나도 웃을 수 없어."
"……."
"니가 불행하면……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불행해."
"……."
녀석은 아직도 놀란 얼굴을 한 채 가만히 날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 만에 녀석이, 마치 기묘한 수수께끼를 푸는 것 같은 표정으로 천천히,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슨…… 무슨 뜻이야?"
난 간단하게 해답을 내주었다.
"사랑해, 다현아."
천천히,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녀석이 얼굴을 돌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는 날 바라본다. 난 원망스러움에 녀석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나도 안돼."
"……."
"니가 웃지 않으면, 나도 웃을 수 없어."
"……."
"니가 불행하면……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불행해."
"……."
녀석은 아직도 놀란 얼굴을 한 채 날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 만에 녀석이, 마치 기묘한 수수께끼를 푸는 것 같은 표정으로 천천히,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슨…… 무슨 뜻이야?"
난 간단하게 해답을 내주었다.
"사랑해, 다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