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Part 2. 사랑을 깨닫다 (3/6)

Part 2. 사랑을 깨닫다

역시 사람이 하루만에 180도 달라진다는 건 불가능한가 보다. 다현이는 그날 이후로도 여전히 조금 심술궂고, 여전히 조금 쌀쌀맞으며, 여전히 조금…… 음. 아니다. 이건 조금이 아니지. 여전히 지나치게 무뚝뚝하다.

나를 부르는 호칭은, 제멋대로다. 처음엔 순순히 <형>이라 불러 사람을 근질근질하게 만들었던 주제에, 어느새 나의 <다렁아~>에 대응해 <지렁아>라고 부르기도 하고 심하면 <야>라고 하기도 하며 어쩔 땐 한심하다는 마음을 담아 <바보야>라고 부를 때도 있다. 하지만 가끔, 정말 가끔은 <형>이라고 불러 준다. 그럴 땐 정말 기분이 좋다.

그 호칭은, 정말로 별일 아닐 때 지나가는 듯이 툭 튀어나온다. 그러니까 녀석이 특별히 기분이 좋다거나 내가 뭔가 이쁨 받을 짓을 했다거나 할 때가 아닌 정말로 무방비한 상태에 빠져있을 때 지나가는 듯이 툭, 하고 들려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래. 

‘형, 거기 안경 좀 집어줘.’

……그래서 더 좋다.

거기다 대고 너무 기쁜 나머지, ‘응? 뭐라고? 방금 뭐라고 그랬어? 다시 한 번 말해볼래?’라고 하는 따위의 만행을 저질렀다간 바로 이마에 핏줄을 세우며 자신의 2층 방으로 올라가기 십상이다. 나는 그럴 땐 두근두근 기쁨으로 가득 찬 마음을 애써 숨기며, ‘어, 어… 그래. 자, 여기.’하고 어색하게 건네곤 한다. 그럼 녀석도 별말 없이 안경을 받아든다. 힐끔 바로 본 녀석의 옆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하지만 이제는 어딘지 모르게 살짝 굳어있다는 걸 알 수 있게 되었다. 지도 어색해서 저러는 거야…. 나는 그럼 풋 하고 터질 것 같은 웃음을 애써 참으며 TV로 시선을 돌린다. 왜 웃냐고 화내면 TV 가 너무 웃겨서 그런다고 하면 되거든. 하핫.

어쨌든 이런 식으로 곁에서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고 있는 녀석을 보는 건 참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하아~”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앞에서 말한 것만큼 나는 평탄하고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있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초조함과 불안으로 일색인 하루를 보내고 있다. 한숨을 내쉬는 내 손에는 구형 핸드폰이 꾹 쥐어져 있었다.

으… 그러니까 뭐가 문제냐면, 문제가 너무 없는 게 문제다.

나는 답답함에 머리를 벅벅 긁고는 액정에 떠있는 이름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하늘.

‘정지후. ……우울할 땐 알지?’

알아. 알고 있어. 지금 생각해보니 넌 정말 얍삽한 녀석이야. 이제 어떻게 할 거냐? 너 때문에 난 이제 우울한 일이 생기면 네 전화번호가 제일 먼저 떠오를 것 같다…….

고통스런 마음으로 핸드폰 화면을 노려보았다. 

녀석과 그렇게 헤어진 지 일주일. 그 후로 녀석과는 단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있다. 웃기는 일이다. 별 감정이 없을 땐 원하지 않아도 잘만 마주치더니 정작 바라게 되니까 그런 우연이 발생하지 않는다. 혹 녀석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집에 돌아가는 길에 억지로 다현이를 끌고 편의점 앞도 서성거려 봤지만 녀석을 만난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고 보면 이제 신정섭의 심부름을 하지 않게 된 것도 녀석과 마주칠 기회가 줄어든 원인 중 하나인가…. 

아아. 녀석과 마주칠 수만 있다면 설사 신정섭이 심부름을 시킨다 해도 기쁘게 다녀올 텐데.

…라는 생각이 들 만큼 나는 지금 절박한 심정이었다.

완전 미쳤구나, 정지후. 휴우….

다시 핸드폰을 노려보았다. 조용히 엄지손가락을 뻗어 SAND버튼 위에 올려놓는다.

눌러. 눌러, 정지후! 어서 힘을 줘! 꾹 힘을 주고, 수화기를 귀에 대어서 녀석이 전화를 받으면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어, 난데. 심심해서 전화 한 번 해봤다. 지금 뭐하냐~?’라고 말하면 되는 것이다. 자, 어서 해!!

“…….”

그러나 결국 부들부들 떨던 손에 힘을 빼고야 만다.

…윽, 또 실패다. 벌써 몇 번째냐.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으로 괴로워하고 있는데, 그때 누군가 갑자기 툭 하고 가볍게 어깨를 쳐왔다.

“뭐해?”

“헉!”

으다다다다닷!! SAND버튼 눌렀어!! 어떡해!! 어떡해!! END, END!!

다행히 기적과 같은 손놀림에 의해서 통화는 00:00초를 지나기 전에 종료할 수 있었다.

……휴우. 깜짝이야. 큰일 날 뻔 했잖아. 어떤 자식이야?

“뭐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놀라?”

“아…”

다, 다현이……. 하하. 너무 집중한 나머지 다현이네 반 수업이 끝난 것도 눈치 못 채고 있었다.

“아니, 뭐… 그냥…”

“무슨 핸드폰하고 원수졌어?”

“음, 아니라니깐… 얼른 집에나 가자.”

“…….”

얼버무리는 내 말에 다현이는 잠시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별다른 말없이 앞을 향했다. 나는 녀석을 따라 나란히 걸으며 여전히 심란한 머릿속을 정리하려고 애썼다.

아, 정말 도둑이 제 발 절인다고. 녀석에게 아무 마음도 없었으면 안부삼아 어떻게 지내냐고 전화 걸 수 있었을 텐데. 아무래도 흑심(?)이 있다 보니 자꾸 변명거리를 찾게 된다.

왜 전화했냐고 그러면 뭐라 그러지? 요즘 잠이 안 와서 우울해? 

…말이 될 리가. 

곧 시험 기간인데 공부가 안 되서 우울하구나? 

…당장 끊을지도. 

으으, 내 머리의 한계다. 도저히 마땅한 변명 거리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썩 괜찮은 변명 거리를 찾지 못하는 이상 나는 녀석에게 전화를 건다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다…….

아아. 하늘아. 하늘아…….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어떻게 지내고 있니? 잘 지내고 있는 거야?

급기야는 상사병 환자처럼 끙끙 앓고 있는데 갑자기 옆쪽에서 띠리리리~ 하고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헛. 깜짝이야. 뭐야, 이 요란한 벨소리는……이 아니라, 이건? 어디서 한 번 들어본 벨소리?

멈칫 하며 고개를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다현이 조용히 핸드폰을 받고 있었다.

“왜. …어. 지금 끝나고 가는 중인데.”

왜라고? 전화 받자마자 난데없이 왜라니?

……아, 맞다. 전에 전화 걸었던 그 사람이구나. 왜 방향치라던…….

“응. 그러지, 뭐. 알았다.”

탁-

다현은 아주 짤막하게 대화를 끝내고 폴더를 닫았다. 그나저나 이 무뚝뚝한 녀석이 저렇게 편하게 대하는 상대가 대체 누굴까 싶어서 빤히 쳐다보는데 녀석이 슥 내 쪽을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형, 잠깐 음료수라도 마시고 가지 않을래?”

“…!!!”

……우, 웃으면 안돼!!

그렇게 해서 녀석과 음료수를 마시기 위해 편의점을 향했다.

‘학교 매점 아직 안 닫았는데 뭐 하러 편의점까지 가?’

……음, 정다렁. 며칠 전에 니가 했던 그 질문, 다시 그대로 되돌려주마. 나는 속으로 투덜투덜 거리며 앞장서는 녀석의 뒤를 따라갔다. 뭐, 혹시 편의점에 가면 하늘이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니 편의점에 가는 게 싫은 건 아니다만. 이제 그런 우연은 포기한지 오래…

“…!”

라고 생각하며 편의점을 바라보던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편의점 한 쪽 옆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커다란 물체가 놓여있는 걸 발견한 것이다. 

뭐지, 저건…….

…설마? 설마… 설마??

나는 참지 못하고 앞으로 뛰어나갔다. 앞서 걷고 있던 다현이를 제치는 순간 녀석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게 스쳐 지나간다.

“하아, 하아-”

단숨에 편의점 앞까지 뛰어왔다. 그리고 편의점 옆에 놓여진 커다란 물체의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 벅찬 가슴을 도저히 진정시킬 수 없었다.

─푸른빛의 오토바이.

하늘이의 오토바이였다. 밝게 웃는 녀석과 잘 어울리는 푸른색.

두근두근.

심하게 심장이 요동쳤다. 나는 녀석의 오토바이가 맞는지 몇 번이고 확인하며 떨리는 심장을 달래려 애썼다. 

“왜 그래?”

“핫…!!”

……까, 깜짝이야.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해야 될 거 아니냐.

나는 어느새 다가온 다현이 묻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그대로 잡고 있던 바이크를 쓰러뜨릴 뻔 했다. 그러나 불굴의 의지력으로 정신을 수습하여 녀석을 향해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해 보이는데 성공했다.

“쉿! 조용해 해봐. 조용히.”

“…?”

음, 이러니까 무슨 범죄자라도 된 기분이군. 의아한 눈빛을 하면서도 일단은 입을 다무는 녀석을 만족스럽게 쳐다보고 나는 다시 편의점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슬그머니 벽 뒤에 숨어서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자,

“…!”

마침 카운터 앞에 서 있던 하늘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아아… 하늘이다. 하늘이야…. 조, 좋다…….

무슨 즐거운 일이라도 있는지 하늘이는 카운터 앞에 서서 밝게 웃고 있었다.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그 모습을 훔쳐보고 있는데, 그때였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것은.

“…?”

하늘이 여전히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알바 생을 향해 뭐라뭐라 말하자 알바 생이 아무 거리낌 없는 동작으로 담배를 빼들어 하늘이에게 건넨 것이다. 순간 너무 놀라 입을 쩍 벌려 버렸다. 뭐, 뭐야? 저래도 되는 거야? 신분증 확인은 커녕, 바코드도 안 찍었어…

경악하고 있는 사이, 하늘이에게 담배를 건넨 알바 생이 일전의 그 성질 드러운 알바 생 누나라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표정이 전에 비해 확 달라져 있어 잠깐 알아보지 못했다. 알바 생 누나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는 하늘이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담배를 받아든 하늘은 그런 알바 생 누나를 장난스럽게 쳐다보더니 뭐라고 중얼거렸다. 아마 입모양을 봐서는,

‘고, 마, 워’

그리고 손을 들어 가볍게 두어 번 흔들고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

순간, 내가 지금 본 게 뭐지…싶었다. 빤히 교복을 입고 있는 녀석한테 담배를 팔다니. 아니, 그것보다 지금 저렇게 하늘이 떠난 자리를 뒤늦게 홀린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알바 생 누나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사랑에 빠진 여자의 그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어라?”

…헉!!

너무나 집중해 있던 나는 난데없이 뒤쪽에서 들려온 하늘이의 목소리에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젠장! 그러고 보니 깜빡했다! 하늘이 내 시야에서 사라지면 당연히 가게 바깥으로 나오고 있다는 건데!! 멍청이 같이 그걸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

스스로의 바보스러움을 한탄하며 이대로 땅으로 꺼지고만 싶었다. 훔쳐보고 있던 걸 대체 뭐라고 변명하면 좋을까? 두근두근 하는 심정으로 끼기긱 굳은 얼굴을 돌리자, 하늘은 아직 나를 발견하지 못한 듯 다른 쪽을 보며 웃고 있었다.

“…?”

휴. 다, 다행이다. …가 아니라 지금 누굴 보고 있는 거……다현이?

“왔냐?”

싱글싱글 웃으며 손에 든 담배를 한 번 공중으로 던졌다 잡은 하늘은 틀림없이 다현이를 보며 말을 건네고 있었다. 뭐야…? 둘이 아는 사이…? 또 한 번 놀라움에 눈을 크게 뜨는데 그런 내 시선을 느낀 것인지 뒤늦게 하늘이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

그리고는 굉장히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잠깐 얼빠진 표정으로 내 쪽을 보고 있던 하늘이 다현이를 한 번 쳐다보고 다시 나를 쳐다보더니 또 다현이를 쳐다보며 기가 막힌다는 듯 중얼거렸다.

“뭐야, 이 자식아. 너 같이 온다고 말 안 했…”

“상관없어, 이제.”

“뭐?”

“상관없으니까, 이제.”

“…….”

그 말에 하늘이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더니 이내 알겠다는 듯 공중에 띄운 담배를 탁 낚아채며 말했다.

“너네 화해했구나?”

그게 무슨 말……

여전히 혼자만 상황을 이해 못해 혼란을 느끼는 나에게 다현이 가볍게 손짓했다.

“이리 와봐, 형.”

“…??”

그때는 너무 당황해서 <형>이란 말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엉거주춤 둘이 서 있는 곳까지 다가가자 다현이는 하늘이 쪽을 힐끔 쳐다보더니 다시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서로 아는 사이겠지만… 정식으로 소개할게, 형. 내 친구 하늘이야.”

“…?”

엉?

지금 들은 말을 잠깐 이해하지 못했다. 뭐지… 나 방금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나는 멍하니 다현이를 쳐다봤다. 무표정한 얼굴로 내 쪽을 쳐다보고 있다. 이번엔 하늘이를 봤다. 싱긋 웃는다.

“…….”

그러니까… 지금, 뭐라고? 내 친구 하늘이라고?

“에엑?!!”

뒤늦게 그 말을 이해한 나는 비명을 지르며 한 발짝 물러났다. 

뭐야? 그럼 일전의 그 방향치 친구가 하늘이?!!

너무 놀라 말도 제대로 안 나왔다. 나도 모르게 하늘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어버버 거리고 있자, 하늘이 특유의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인사했다.

“오랜만이야, 지후야.”

지… 진짜 그 하늘이다…….

“여기 있어. 내가 주문해올게.”

그 후 난데없이 ‘밥 먹으러 가자’라고 제안한 다현은 그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떠났다. 덕분에 하늘과 나는 둘이 남게 되었다.

으으, 왠지 어색하다…….

나는 맞은편에 앉아있는 하늘이를 힐끔 쳐다보았다. 하늘이는 웬일인지 조용한 표정으로 창가를 내다보고 있었다.

“…….”

무슨 생각을 저렇게 열심히 하는 걸까? 평소 같았으면 싱글싱글 웃으면서 계속 장난을 걸어도 모자를 텐데.

왠지 어색한 분위기에 나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계속 꼼지락 거렸다. 뭐야, 이래서야 꼭…… 애초에 전혀 모르던 사이끼리 소개 받은 거 같잖아.

“그러니까……”

그렇게 어색해 어색해 공기를 열심히 내뿜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이 중얼거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은 어느새 창가를 보던 시선을 내 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새삼 소개시켜준다는 건, 역시…… 미움 받기 싫다는 얘긴가.”

“응?”

무슨 말……?

의아한 표정을 짓자 하늘은 그냥 싱긋 웃어보였다.

“정다현, 하여간에. 이런 건 다 날 시킨단 말이야. 자기가 직접 할 것이지.”

“…?”

뭐라고? 다현이가 너한테 뭘 시킨다고? 대답하자니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고 무시하고 있으려니 나 들으라고 하는 말 같아서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땀만 삐질삐질 흘리며 녀석을 쳐다보고 있자 하늘은 드디어 혼잣말을 그만두기로 했는지 진지하게 턱을 괴고는 내 이름을 불렀다.

“지후야.”

“응? …응??”

핫… 당황해서 바보같이 두 번 물어보고 말았다.

“얼마 전에 내가 공원 앞에서 담배를 피며 놀고 있는데 말이지… 갑자기 전화가 왔어.”

“…?”

“누군가 싶어 봤더니 평소엔 절대 먼저 전화 안 하는 냉정한 친구 놈이더라구. 이놈이 웬일로 전화를 다 했나 싶어서 얼른 받았지.”

“…? 응.”

대체 하늘이는 지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뜬금없이 시작된 그의 얘기에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일단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하늘이는 계속 중얼거렸다.

“전화를 받으니까 이 녀석이 난데없이 지금 어디냐고 묻는 거야. 굉장히 다급한 목소리로. 그래서 ‘왜? 학교 근처에 있는 공원이다’라고 말해줬지.”

“엉.”

혹시 하늘이는 자기 얘기 하는 걸 엄청 좋아하는 걸까…….

전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는 얘기에 조금 당황하면서도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하늘이는 더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 녀석이 갑자기 엄청 놀라더라구. 그리고는 지금 공원 안에 누가 있냐고 묻는 거야.”

“응.”

거기까지 말하고 하늘이는 잠시 뜸을 두었다 다시 말했다.

“그래서 나도 깜짝 놀라 대답했지. 야, 어떻게 알았냐. 지금 신정섭이 너희 학교 어떤 애 끌고 다굴 한다고 들어갔는데-”

“?!”

신정섭?! 공원? 다굴??

남 일 같지 않은 얘기에 점점 당황스러움을 느끼는데 하늘이 그런 나를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랑 관련 있는 일이야? 내가 물었지. 그러니까, 그 녀석… 정다현이가 굉장히 절박하게 말하더군. ──그 녀석이야.”

“…?”

“그 녀석? 내가 일부러 모른 척 하고 물으니까, 녀석이 다시 쥐어짜내는 목소리로 대답했어.”

하늘은 잠시 말을 멈추고는 싱긋 웃더니 다현이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중얼거렸다.

“내…형.”

“?!”

그대로 사고가 정지해버렸다. 나는 꼼짝도 않고 하늘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하늘은 내 반응을 즐기고 있는 듯 싱글싱글 웃기만 했다.

뭐지… 나 방금, 상황과 지독하게 어울리지 않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뭐라고?”

결국 잘못 들었다고 판단을 내렸다. 뒤늦게 되물어보자 하늘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내 형.”

“…….”

음. 이, 이상하네. 또 잘못 들은 건가?

“저기, 다시 한 번… 뭐라고?”

“내 형. 다시 말해줘? 내 형, 내 형, 내 형, 내…”

“스, 스톱!”

그렇게 임팩트 큰 말을, 그렇게 무미건조한 톤으로, 그렇게 반복해서 내뱉다니!

깜짝 놀라서 재빨리 손을 뻗으며 만류하자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다물고 씨익 웃고 있었다.

“이해했냐?”

그리고는 능청스럽게 묻는다. 으, 으음… 나는 뻗었던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끙끙 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내 머리로는 하늘이 말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형이라니…… 말이 되냐. 그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냐구. 그때 정다현이 전화로 뭐라 그랬는데. 나랑 상관없는 놈이니까 때려죽이든 말든 맘대로 하라고 그랬는데. 그런데 느닷없이 하늘이한테 전화를 걸어서는 <내 형>이라 그랬다고? 

“저기, 나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데, 하늘아…….”

“응. 어디가 어떻게 이해가 안 가는지 구체적으로 질문해봐, 대답해줄게.”

혼란스러운 내 머리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 작정인지 하늘이 진지한 말투와는 전혀 다르게 안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그러니까… 그때 다현이는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던 걸로 아는데.”

“응.”

“……잘못 들은 거 아냐? 사실은 내 봉이라고 말했다거나.”

“푸학!”

나름대로 진지하게 말했는데 하늘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아, 아니, 난 진심으로 말한 건데 말이지…. 테이블 위에 엎어져서는 어깨까지 부들부들 떨며 웃고 있는 하늘이를 나는 조금 원망스런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한참 웃던 하늘이 뒤늦게 내 시선을 눈치 챘는지 고개를 든다. 그리고 헛기침을 두 번 하고는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웃기려고 한 얘기 아냐?”

“…….”

…아니라니깐.

민망함에 침묵하며 다른 곳만 노려보고 있자니 하늘이 다시 큭큭 웃고는 말했다. 

“애초에 말이지…”

“…?”

“그 녀석은 널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

“?!”

……뭐라고?!

창가를 노려보던 시선을 다시 하늘이에게로 돌렸다. 하늘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내가 지금 제대로 이해한 게 맞나? 머릿속으로 여러 의문들이 교차했지만 정작 입으로 나오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눈만 크게 뜬 채 하늘이를 봤다. 하늘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게 녀석에겐 제일 큰 불행이었지.”

“…….”

“그 녀석은 자기 엄마를 진짜 사랑하거든. 그리고 딱 그만큼 아버지를 미워해.”

“…….”

두근두근. 심장이 불안하게 술렁였다. 일전에 다현이가 통화하는 장면을 몰래 훔쳐봤던 일이 떠올랐다.

‘같이 살아주지 않으셔도 괜찮으니까…’

너무나 절실했던 목소리. 듣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저릿했던 그 목소리.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문득 하늘이의 등 너머로 계단을 올라오는 다현이의 모습이 보였다. 무표정하게 접시를 움켜쥐고는, 천천히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나는 그 모습을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그때, 다현이 내 시선을 눈치 챘는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한 가지 말해두자면, 녀석이 어떤 기분이었을지 네가 혼자서 상상해 본거 몇 배 이상으로 녀석은 힘들었을 거야.”

“…….”

하늘이 나직이 중얼거렸고 나는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왜냐하면 나와 눈이 마주친 다현이의 눈동자가 얼핏 웃음기를 담았기 때문이다.

햄버거를 먹는 내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눈앞에 놓여있는 음식들을 거의 본능적으로 집어먹으며 혼란스런 머리를 정리하려 애썼다.

다현이가 사실은 날 싫어한 게 아니었다…….

그럼 일전의 그 말은? 다 진심이 아니었단 말인가?

힐끔 다현이를 쳐다보자 다른 곳을 쳐다보며 묵묵히 콜라를 마시고 있었다. 하늘이도 그 후로 별다른 말이 없다. 그렇게 묘한 침묵 속에서 식사가 끝났다.

다 먹고 나자 다현이 접시를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 먹었으면 가자.”

“그래.”

“엉.”

우리도 동의를 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쓰레기를 치우러가는 다현이를 따라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팔목을 턱 잡아왔다. 응? 뒤돌아보자 하늘이었다.

“우린 나가있자~”

헛… 치우는 녀석을 버리고 먼저 나가있자고?

당황해서 되물을 사이도 없이 하늘이 나를 질질 끌고 갔다. 윽.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어. 하늘이의 이 마이페이스적인 면을. 이 녀석이 한 번 ‘나랑 뭐 하자’를 내뱉으면 상대의 대답 같은 건 전혀 상관이 없었지.

결국 질질 끌려서 가게 밖까지 나오게 되었다. 하늘이는 유리문에 등을 기대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음, 그러고 보니 웃기다. 하늘이 하늘을 보다니.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하늘이 갑자기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싱긋 웃었다.

“머리는 정리됐어?”

“아…”

이, 이런 일로 얼굴 붉히지 말자, 정지후!

“대, 대충은.”

“다현이 말야.”

“응?”

“나 중학교 때 그 녀석이랑 같은 학교였거든. 그때까지만 해도 그 녀석, 그렇게 사귀기 어려운 녀석은 아니었어.”

그렇게 말하고 하늘은 교복 윗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나름대로 친구도 사귀고 그랬거든, 그때는. 비뚤어진 중학생이긴 했지만……. 단체로 어울려서 돌아다니고, 가끔 싸움도 하고 그랬지.”

헛… 그, 그런 시절이 있었단 말인가? 저 정다현이가? 놀라워하고 있는데 하늘이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더니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녀석… 지금 고등학교에서는 친구가 하나도 없다며?”

“…….”

“원래 안 그랬는데 말야… 갑자기 스스로 고립되기 시작하더라구. 아무래도 그때부터였던 거 같아.”

그때부터…?

의아한 시선을 보내자 하늘이 칙 담배에 불을 붙이며 중얼거렸다.

“아버지의 외도를 목격한 다음날부터.”

“…….”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늘아… 오늘 니가 기어코 나를 울릴 셈이구나. 나는 필사적으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달아오른 눈시울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다현이의 얼굴이 자꾸 생각나면서 가슴이 아팠다.

“다현이 말야. 일부러 미움 받으려고 심하게 대해놓고도 막상 니가 등 돌리니까 어쩔 줄 몰라서 끙끙 앓던 녀석이야.”

“…….”

다현이가?

믿을 수 없어서 눈을 크게 뜨는데 하늘이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 녀석, 안 그래 보여도 사실 엄청 외로움을 많이 타니까… 니가 좀 잘해줘. 그 녀석 안 외롭게.”

“…….”

굉장히 따스한 울림의 목소리.

하늘이는…… 하늘이는 정말 다정하구나.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리고 다현이를 정말 소중하게 생각해.

그때서야 미처 생각 못했던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하늘이가 그때 날 도와주러 왔던 건, 다현이의 부탁 때문이었다…….

그래, 그것도 지금 깨달았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은 다현이가 날 싫어한 게 아니었다니. 기쁘다. 정말 기뻐. 그렇게 싸늘한 말을 내뱉은 후에, 사실은 내가 걱정되어 바로 하늘이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니…… 이게 어디 믿을 수나 있는 얘기냔 말이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너무 기쁘고 설레서 그대로 하늘이라도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심정이다.

하지만.

‘미안하다. 나, 내정간섭은 안 한다 주의라.’

‘헤헷, 나 좀만 껴들려고…’

하늘이가 갑자기 돌변했던 이유가 전부 다현이 때문이었다니.

복잡한 심경이었다. 기쁘면서도 조금 실망한 것 같은, 그런 희한한 기분.

‘니가 좀 잘해줘. 그 녀석 안 외롭게.’

하늘이가 그 후에 나에게 잘해줬던 건 전부 내가 다현이의 형이기 때문이었나…….

입맛이 쓰다. 

부럽다. 정다렁…….

“…뭐하는 거야.”

“음. 너한테 잘해주고 있는 중이야.”

“?;”

집에 돌아온 나는 나름대로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다현이한테 잘해주자! 하지만 막상 행동을 개시하려고 마음먹으니,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선물을 해줄까? 아냐, 아무 날도 아닌데 무슨 선물. 당황할 거야. 어떡하지? 뭘 어떻게 해줘야 좋을까.

의욕만 충만한 나는 괴로운 기분이 들었다. 으아악! 잘해주고 싶어, 잘해주고 싶다구! 온몸이 근질근질 거린다. 지금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다현이 얼굴만 보면 낮에 들었던 말이 떠오르면서, 말도 못할 사랑스러움으로 온몸이 근질근질 거려오는 것이다.

……그렇게 고심한 끝에, 결국 내가 내린 결정은 <다현이의 시중 들어주기>였다.

방에서 나오다가 녀석이 소파에 앉아 책을 읽는 걸 목격했다. 좋아, 바로 지금이 기회다. 나는 슬금슬금 녀석의 뒤로 다가가 어깨를 잡고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현이 갑자기 온몸을 경직시키며 저렇게 물어왔던 것이다……. 

나름대로 진지한 내 대답에 다현이 잠시 땀을 단 얼굴로 쳐다보더니, 탁 하고 손을 쳐내며 말했다.

“과, 관둬.”

“뭘 관둬! 괜찮으니까 가만히 있으라! 어디, 귀여운 내 동생아. 목은 안 마르냐? 뭐든지 말만 해라. 이 형이 오늘은 특별히 서비스해주마!”

“…….”

다현이는 잠시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포기한 듯 책을 집어 들었다. 히히. 그 모습에 나는 더 신나서 어깨를 주물렀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어깨 주무르는 거 하나는 자신 있지롱!

“시원해, 시원해? 어? 대답해봐. 시원해?”

“…….”

이 녀석이 아무래도 무시해버리기로 마음을 굳힌 것 같다. 다현이는 나의 호들갑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독서삼매경에 빠져들었다. 

쳇, 그래… 간만에 네 주특기를 발휘해보겠다 이거지? 그런다고 내가 굴할 것 같으냐!

…라지만 나도 미친놈처럼 혼자 중얼거릴 수는 없었기 때문에 조용히 입을 다물고 어깨를 주무르는 일에 열중할 수밖에 없었다. 

음, 이쪽에 근육이 많이 뭉쳤군. 좋아, 집중공략이다! 으으음… 그나저나 피부 되게 딱딱하네. 우리 다렁이는 몸도 좋아… 후우……. 끝내주는데…….

“저기… 지금 주무르는 거야, 더듬는 거야?” 

…핫. 녀석의 말에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그러나 뒤늦게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어깨를 주무르던 손이 녀석의 가슴께까지 내려가 있는 상태였다. 으아악! 내가 지금 뭐하는 거야! 이건 완전히 성추행하는 손놀림이잖아!! 

나는 후다닥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민망함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너, 너무 집중한 나머지 본연의 목적을 상실하고 있었어!

“마, 마사지 한 거다!”

“…….”

어설프게 둘러대 봤지만 다현이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미, 믿는 건가? …아니. 가소로워 하고 있는 건지도.

“미안. 이젠 제대로 할게.”

다시 정신을 수습하고 녀석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젠 주무르는 일에만 충실해야지… 혹시 이제 하지 말라고 뿌리치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녀석은 싫지는 않았던 모양인지 가만히 책을 들고 앉아있었다. 

허헛. 귀여운 녀석.

나는 다시 녀석의 어깨를 주무르면서 오늘 하늘이에게 들은 얘기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하늘이랑 같은 중학교에 다녔다고 했지…….

“하늘이랑 같은 중학교에 다녔다면서?”

“…? 응.”

나는 슬쩍 녀석의 눈치를 살피며 물어보았다. 다현이는 페이지를 넘기던 손을 잠깐 멈추더니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 다시 책장을 넘겼다.

“헤에. 어떻게 알게 된 거야?”

“그냥… 옆자리였어.”

“그래…?”

“응.”

흐으음.

“하늘이랑 많이 친하지? 제일 친했어?” 

“…?? 제일 믿을 수 있는 녀석이었지. 지금도 그렇지만.”

“그래…?”

“응.”

“…….”

“…….”

제일 믿을 수 있는 녀석이라…….

그렇구나. 다현이에게도 하늘이는 특별한 존재구나. 왠지 이젠 하늘이가 부러워지려고 하는데.

“…형.”

“으, 응?!”

앗. 갑자기 형이라 그래서 당황했다. 나도 모르게 큰 목소리를 내자 녀석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더니 조용히 물어보았다.

“하늘이한테 관심 있어?”

허어어어어억――!! 

난데없이 정곡을 찔러오는 질문에 놀라서 그대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녀석이 의아한 표정으로 뒤돌아본다. 나는 완전히 당황해서는 제대로 대답도 못하고 필사적으로 어버버거렸다.

“어, 아니… 그러니까, 저기… 과, 관심이 있달까. 치, 친해지고 싶달까! 그, 그러니까 나는 그냥 수, 순수하게…… 그래, 순수하게!! 수, 순수한 관심의 표현이랄까……”

으악, 대체 뭔 말이야!!

그대로 머리를 싸잡고 울면서 뛰쳐나가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거의 울상으로 일그러져있는데, 다현이 그런 나를 불쌍하게 여긴 것인지 간단하게 요약해서 물어주었다.

“…하늘이랑 친해지고 싶다고?”

“어, 응!! 응!! 그, 그 말이야, 내 말이!”

으아, 수상해. 수상해. 내가 생각해도 진짜 수상하다! 

너무 당황해서는 제대로 된 임기응변을 못하고 말았다. 어떡하지. 분명히 다현이가 이상하게 생각했을 거다. 간신히 나한테 마음을 열었는데 변태 형인 걸 깨닫고 등 돌리면 어떻게 해!

“흐음… 그럼 나중에 하늘이 불러서 어디 같이 놀러나 갈까?”

에?

“뭐, 뭐라고?”

내가 아무래도 지금 잘못 들은 것 같은데.

“하늘이 불러서 같이 놀러가자고.”

“지, 진짜??”

“싫으면 말고…”

“시, 싫긴, 다렁아!!”

휙 등 돌리며 중얼거린 녀석의 말에 나는 얼른 달려들어 녀석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뒤에서 갑자기 끌어안긴 녀석이 당황해서 발버둥 친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핫핫핫 하고 명쾌하게 웃으며 녀석의 목을 더욱더 꽈악 끌어안았다.

“고맙다, 다렁아! 고마워~~”

“…놔.”

내 동생은 너무 쿨 하다니까!

……그리고 내 동생은 너무 모범적이다.

나는 기가 막힌 심정으로 눈앞에 놓인 건물을 바라보았다. 내 옆에 서 있는 하늘이도 별반 다를 바 없는 표정으로 건물을 바라보고 있다. 뭐야, 내 눈이 잘못 된 건가? 잠시 할 말을 잃어 입만 헤 벌리고 있는 우리에게 다현이 말했다.

“뭐해? 들어가자.”

“…….”

“…….”

저기, 나는 분명히 ‘놀러가자’라고 들은 거 같은데. 

“…다현아.”

“응?”

“너 설마 여기 들어가자고 날 부른 거냐?”

“응.”

“…….”

다현이의 쌈박한 대답에 하늘이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나랑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다시 눈앞의 건물을 바라본다. 하지만 다시 한 번 확인해 본다한들 눈앞의 건물에 써져있는 ‘00도서관’이란 글씨가 변할 리는 없었다.

“나보고 지금 공부를 하라고?”

“곧 시험이잖아.”

“…….”

“…….”

하늘이와 나는 다시 할 말을 잃었다. 

아, 아니… 진심이야, 정다렁? 정말 우리 셋이 여기 들어가서 사이좋게 공부나 하자고?

그래도 설마…란 생각에 발을 못 떼고 있는데, 다현이는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건물 안에 들어갔다. 우리가 안 따라 들어올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한다는 듯한 동작이다.

이, 이거 아무래도 진심인 거 같은데. 어떡하지??

슬쩍 옆에 있는 하늘이를 보자 하늘이는 아직도 기가 막힌 상태에서 못 빠져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미치겠네, 정다현. 또 무슨 생각이야?”

하늘이는 잠시 불만스럽게 궁시렁 거리더니 휙 나를 돌아보았다.

“할 수 없지. 우리도 들어가자~”

……결국 들어가는 거냐.

하늘이는 그렇게 내뱉고는 휙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결국 나도 그 뒤를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도서관 안에 들어가자, 다현이 숫자가 적혀 있는 종이를 우리에게 나눠주었다.

“이게 뭐야?”

“번호표.”

“헤에…”

하늘이 신기하다는 듯 종이를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난 이런데 첨 와봤어.”

“…나도.”

……음.

그렇게 공부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온 두 인생은, 주춤주춤 어색한 발걸음으로 모범생이 안내하는 길을 따랐다.

헤에, 도서관이 이렇게 생긴 데 였구나… 되게 조용하군. 

나는 주변을 열심히 돌아보며 앞장서는 다현이의 뒤를 따라갔다. 계단을 올라가서 ‘제 2열람실’이라고 써져있는 문 안으로 들어가자 일렬로 쭈욱 늘어선 책상 위에 학생들이 거의 빽빽하게 앉아있었다.

으윽… 뜨, 뜨겁다. 뭐냐, 이 넘치는 학구열은…

문에 들어서면서부터 기가 죽어버린 하늘과 나는 지금이라도 다현이를 말려볼까 하는 생각에 서로 마주봤지만 어느새 다현이는 저만치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빠, 빠른 녀석…

결국 나도 녀석의 옆에 자리를 잡았고, 하늘이도 그 옆에 앉았다.

“…지후야.”

그리고 대충 가방을 벗고 책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하늘이 조용히 내 이름을 불렀다. 응? 나는 의아함에 얼굴을 돌렸다.

“나, 가방이 없다.”

“…….”

“책 좀 빌려줘.”

“그, 그래.”

그러고 보니 여태껏 하늘이가 가방을 메고 다니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어….

왠지 모를 유쾌함에 나는 조금 키득거리며 뭐 빌려줄 만한 책이 없나 가방을 뒤졌다……가 할 말을 잃었다. 가, 가방을 가지고 다니는 나도 그닥 상황이 낫지는 않구나. 오늘따라 왜 쓸데없는 예체능 교과서 밖에 보이지 않는 거냐.

“…다렁아.”

“…?”

“책 좀 빌려줘. …두 권.”

“…….”

막 수학책과 공책을 꺼내서 책상에 올려놓던 다현이 잠시 기가 막힌다는 듯 우리를 쳐다보더니, 영어책과 국사책을 꺼내 건넸다. 오오, 정다렁! 난 솔직히 그 가방에 손수건 하나만 덜렁 들었을 줄 알았다! 나는 싱글싱글 웃으며 녀석에게 고맙다고 말하고는 책 한권을 하늘이에게 건넸다. 하늘이는 조금 심란한 표정으로 눈앞에 내밀어진 영어책을 받아들었다.

…음. 미안하다, 하늘아. 나는 그래도 그나마 국사가 낫거든. 하지만 국사나 영어나 심란하긴 마찬가지 아니겠냐.

그렇게 곤혹스런 기분으로 책만 노려보고 있는데 다현이 갑자기 턱 하고 노트 한권과 페이지가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여기부터 여기까지가 시험 범위. 이건 중요한 것만 정리한 노트니까 봐.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고.”

“오오. 고, 고맙다.”

“이건 하늘이 줘.”

“응!”

그러나 하늘이는 영어 해석이 나열된 노트를 받자 더 심란한 표정이 되었다.

“하아아…….”

하, 하늘아. 땅 꺼지겠다. 힘내!!……가 아니라 나도 힘내야지.

나는 비장하게 다현이 건네준 종이쪽지에 적힌 페이지를 펴고 노트도 같이 펼쳐 들었다.

좋아, 고려 시대의 건축과 조각. 고려 시대의 예술은 귀족 사회의 특색이 반영되어, 귀족적이면서도 불교적인 화려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흠, 이건가? 되게 아슬아슬하게도 쌓았네. 응? 이건 뭐야?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푸하하하. 진짜 못생겼다. 뭐? 개성 있고, 향토적이며 자유분방함을 엿볼 수 있어? 향토적이라는 건 결국 촌스럽단 얘기 아냐? 으하하하.

……그렇게 공부하다 삼천포로 빠져서 킥킥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이 책상 위를 톡톡 두들겨 왔다. 얼굴을 돌리자 하늘이는 그 잠깐 사이에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나 30분만 잘 테니까 깨워줘…”

반쯤 풀린 눈으로 하늘이가 속삭였다.

귀, 귀엽다…….

후아암 하고 하품을 하며 그렇게 중얼거린 하늘이는 금방 책상 위로 엎어졌다. 나는 잠시 발그레한 기분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맨날 싱글싱글 여유롭던 하늘이의 이런 모습을 보게 되다니…운이 좋다.

정다렁! 럭키!

“변태 같으니.”

경멸어린 시선으로 녀석이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혐오스럽기 그지없다는 표현으로 나를 한 번 쓱 훑어보고는 미련 없이 등을 돌린다. 그 모습에 난 심장이 찢겨져 나갈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잠깐, 가지마… 제발 가지 말아라. 나 미워하지 마… 제발… 니가 날 미워하면, 이제 난……

뛰어가서 녀석의 손목을 붙잡았다. 하지만 손에 닿기가 무섭게 녀석이 탁 뿌리쳐낸다.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녀석은 나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손대지 말랬지. 더러우니까.”

하지만… 네가 아무리 그래도 다현아, 난 네가……

“……어나… 일어나라니까.”

…응?

갑작스럽게 어깨를 흔들어오는 느낌에 정신이 들었다. 반짝 하고 눈을 뜨니 좁은 칸막이 안에서 나는 팔을 베고 자고 있었다.

헛. 어, 언제 잠든 거지.

민망함에 얼른 몸을 일으키고 눈을 부비자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다현이가 눈에 들어왔다.

“어제 8시에 자놓고 잠이 와?”

“음… 책이 너무 난해해서…”

“…….”

뭘 그렇게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그러냐? 하핫. 녀석의 미심쩍은 시선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고 보니 하늘이는…? 30분 뒤에 깨워주기로 했는데.

옆을 보자 하늘이는 아직도 꿈속을 헤매고 있는 중이었다. 이, 이런, 한 시간이 넘었잖아.

“하늘아… 하늘아, 일어나.”

이름을 부르며 두세 번 흔들고 나자 하늘이는 부스스한 모습으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아직 잠이 덜 깬 듯 가물가물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나로 하여금 다시 한 번 행복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귀여워─♡ 진짜 귀엽다!

양 볼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는데 뒤에서 다현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졸리면 나가서 커피 좀 뽑아와.”

하지만 하늘이는 아직도 비몽사몽. 내, 내가 갔다 오는 수밖에 없겠구나. 뭐 갔다 오면 잠도 깨고 좋지.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자 다현이 손에 들고 있던 샤프를 뱅그르르 돌리더니 중얼거렸다.

“내 것도.”

……암. 내가 설마 니 몫을 잊겠니. 이 형님만 믿어라!

나는 크게 기지개를 켜며 열람실 안을 빠져나왔다. 자판기는 열람실과 가까운 곳에 비치되어 있어, 밖으로 나오자마자 찾을 수 있었다.

에, 보자. 전부 밀크 커피로 뽑아 가면 되겠지?

나는 바지 뒷주머니에 쑤셔 넣어놨던 천 원짜리 지폐 하나를 꺼내서 반닥반닥하게 편 뒤, 기계 안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밀크 커피라고 써진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자 곧 모락모락 김이 나는 커피가 빠져 나온다.

그렇게 하나 뽑고, 두 개 뽑을 때까지는 별 문제 없다가 세 번째에서 손이 모자란다 - 라는 난감한 상황에 부딪쳤지만 불굴의 의지력으로 인해 세 개째까지 모두 손에 쥐는 것에 성공했다.

휘유~ 그런데 이거 좀 아슬아슬한 걸.

종이컵 두개를 아슬아슬하게 손가락에 끼자 걸을 때마다 뜨거운 내용물이 튀어나올 것처럼 출렁거렸다. 이거 잘못 걸었다가는 그대로 손에 화상입기 십상이겠다…. 나는 덜덜 떨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뻗어갔다.

그런데……

“으하하핫, 그러니까 그 새끼가 바로 줄행랑을 치더라니까!”

이렇게 열심히 인 내 어깨를 치고 가다니…!

난데없이 부딪혀온 어깨에 중심이 크게 흔들리며 커피가 왈칵 쏟아졌다. 순식간에 뜨거운 커피가 손을 적신다.

“앗, 뜨거!!!”

“으아악, 뭐야!”

손과 어깨에 커피를 맞은 두 사람의 비명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악, 뜨거! 진짜 뜨거워! 미치겠다…….

나는 살인적인 고통을 참기 위해 필살의 인내력을 발휘해야 했다. 휴우, 그나저나 그 와중에도 컵을 떨어뜨리지 않았다니 정말 기적이다. 그래도 두개만 새로 뽑으면 될 것 같은데? 300원이라도 사수해서 정말 다행이야….

그 와중에도 소박한 기쁨을 느끼고 있는데…

“새꺄, 뭐야? 이 옷 어떻게 할 거야?”

라고 나랑 부딪힌 한 녀석이 험악하게 말해왔다.

그 말에 시선을 들어 녀석의 어깨 쪽을 바라보니 하얀 교복 셔츠 위에 갈색 커피 자국이 적나라하게 새겨져 있었다.

“음, 미안하다. 일부러 그런 게 아냐.”

새끼가 조심해서 걷고 있는데 지가 부딪혀놓고…

“뭐야? 미안하면 다야? 어쩔 거냐구, 이거??”

“…….” 

쳇, 이놈이 어디서 땡깡이야?? 지가 잘못해놓고.

나는 분노를 담아 녀석을 노려보았다. 녀석도 한층 더 험악해진 시선으로 나를 노려본다.

음… 아, 안되겠다…. 눈싸움은 패배다. 

아~ 같은 형젠데 왜 나는 다렁이의 살기 어린 눈빛이 안 되는 거냐고요…

“어, 어쩌긴~ 빨면 되지! 마르기 전에 얼른 화장실 가서 빨아라! 금방 깨끗해질 거다!”

“이 새끼가!!”

허억. 이 눔아! 갑자기 어깨를 밀치면 어떡해! 또 쏟았잖아!

나는 눈을 부릅뜨고 녀석을 보았다. 다행히 이번엔 손에 맞지 않아서 뜨거움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간신히 사수했던 300원 마저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들끓었다.

“그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이거 어떡할 거냐고, 이 새끼야.”

“아, 알았다… 짜식~ 진작 말하지. 걱정마라. 내가 빨아 주께.”

“…….”

제길. 거 안 그렇게 생겨가지고 성격 되게 더럽네. 하지만 어쩌겠어… 저쪽은 셋, 난 하나거늘.

녀석들이 험악한 기세로 길을 막고 있어서, 그대로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냥 확 한 놈 받아버리고 열람실로 튀어버릴까. 그런 다음 나도 다렁이랑 하늘이에게 구조 요청을……

“지후야~ 얼른 안 들어오고 뭐해?”

그때 기적과도 같이 하늘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 하늘이! 때를 잘 맞추는 구나! 반가운 마음에 얼른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얼굴을 돌리자 하늘이는 물론 다현이까지 서 있었다.

“…!”

내 쪽을 바라본 다현이는 놀란 표정으로 뛰어왔다.

“손 왜 그래? 안 뜨거워?”

“훗, 안 뜨거……울 리가 있겠어? 주, 죽겠다. 다렁아.”

다현이는 내 말에 잠시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커피로 젖은 내 손을 망설임 없이 붙잡고 끌어당겼다.

“바보야, 뭐해? 빨리 화장실 가서 씻어내야지.”

“아, 저기…”

나, 나도 진작 그러고 싶었는데 말이지…

다현이의 말에 힐끔 내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던 녀석들을 쳐다보자 난데없는 일행 등장에 조금 당황한 듯 당당하던 기색이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다렁이가 분위기로 좀 사람을 눌러야지. 거기다 딱 겉보기에도 럭셔리 양아치(…) 분위기를 풍기는 하늘이도 있다.

“얘들은 뭐냐?”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하늘이 껄렁껄렁하게 걸어오며 물었다. 녀석들은 하늘이와 다현이를 바라보며 형세가 불리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그럼 다음부터 조심해.”

라고 말하는 것으로 자리를 피하려 했다. 하지만 내 손과 한 녀석의 어깨 부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늘이는 싱긋 웃는 얼굴로 손을 들어 녀석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 잠깐만.”

“뭐야?”

“그냥 가면 안 되지~. 나 커피 뽑아주고 가야지.”

“…….”

하, 하늘이 따봉!!

나도 모르게 엄지손가락을 척 치켜세우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는데 다현이 다시 내 손을 끌었다.

“빨리 씻으러 가자.”

“아, 알았다.”

그렇게 다현이와 손을 씻기 위해 화장실을 향하는 가운데, 하늘이는 여전히 도망가려는 녀석들의 뒷덜미를 붙잡으며 ‘나 커피 뽑아주고 가라니까~’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여, 역시 하늘이라니까.

화장실에 들어온 다현이는 대충 세면기의 물을 틀어 손을 씻으라고 말하고는 자신도 손을 헹군 뒤 화장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흐음, 뭐야? 볼 일 보러 나온 거였냐? 그러고 보니 나도 화장실 온 김에 볼일이나 볼까.

나는 적당히 커피 물을 닦아내고 데인 손을 진정시킨 뒤 다현이를 따라 들어갔다. 

다현이는 막 볼일을 마쳤는지 바지 지퍼를 올리고 있었다. 

“…….”

…음. 왠지 모르게 좀 어색한걸.

나는 뻘쭘하게 다현이랑 한 칸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는 바지 지퍼를 내렸다. 힐끔, 내 쪽을 쳐다보는 다현이의 시선이 느껴진다. 허허, 다렁아. 뭘 그렇게 쳐다보고 그러냐. 

나는 쭈뼛쭈뼛 식은땀이 날 거 같은 걸 간신히 참아내며 볼일을 보았다. 긴장을 해서 그런지 오줌도 제대로 안 나온다. 아, 왜 이렇게 긴장되는 거야…. 그냥 참을 걸 그랬다고 뒤늦은 후회를 하며 간신히 볼일을 마칠 수 있었다. 

아, 안되겠다. 이렇게 어색해서야… 나중에 목욕탕을 같이 가보던가 해야지. 그나저나 안 그래도 어색해 죽겠는데 저 녀석은 뭘 그렇게 쳐다보고 그래? 볼게 어딨다고.

다시 세면대로 와서 손을 씻고 있자니 다현이 다가와 휴지를 건넸다.

“풋.”

나는 정갈하게 한 칸 한 칸 맞춰 접혀진 휴지를 보고 긴장했던 것도 잊고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 다렁아, 너 진짜 결벽증 아니냐? 

다현이는 웃고 있는 나를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휙 화장실 안을 빠져나가버렸다. 앗, 같이 가! 

그렇게 화장실 안을 빠져나오자 창가 쪽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오오, 그림 좋은걸. 한손은 창틀에 걸친 채 담배를 들고, 다른 한손은 커피를 들고… 응? 그런데 저거 캔 커피 아냐?

“왔냐? 마셔라~”

…무서운 하늘이.

하늘이는 다현이와 나를 발견하자 창틀 한쪽에 세워놨던 캔 커피 두개를 던지며 말했다. 나는 그 커피 하나를 손으로 잡으며 새삼 하늘이란 인물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다. 

양아치 기본기 중 하나인 삥 뜯기를 실행했단 말인가!

“늘아.”

응?

그래도 일단 공짜로 생긴 캔 커피 마다않고 한 모금 마시려는데, 옆에서 튀어나온 다현이의 난데없는 호칭에 하마터면 그대로 뿜어낼 뻔했다.

뭐, 뭐야? 내가 헛 걸 들었나? 

“응?”

헉!!!!

하늘이가 대답하는 걸 보니 헛 걸 들은 게 아닌가 보다!!

“담배 꺼라.”

“왜? 피면 안 되냐?”

하늘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힐끔 나를 봤다. 뭐, 뭐야? 난 왜?

“금연이다.”

“쳇, 방금 불 붙였는데.”

하늘이는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담배를 비벼 껐다.

귀, 귀여운 하늘이….

그나저나 늘이라니. 나도 그렇게 불러보고 싶다….

‘늘이야♡’

흐흐흐… 혼자서 그렇게 부르는 상상을 하며 즐거워하고 있는데 문득 등 뒤에서 ‘하늘이 형?!’하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들렸다.

응? 

고개를 돌려보자 하늘이랑 같은 교복을 입은 무리 두 명이 경악에 찬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아, 아니. 진짜 하늘이 형 맞아요?”

“하늘이 형 왜 그래요?! 머리에 총 맞았어요?!!”

“…이 새끼들이. 죽고 싶어 환장했냐?”

마치 못 볼 걸 봤다는 듯한 녀석들의 태도에 하늘이 살벌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표정만은 반가운 듯 웃고 있다. 

그러고 보니 하늘이가 따르는 후배가 좀 많았지…. 하지만 도서관에 오는 후배도 있을 줄이야. 

“늬들이야말로 이런데 웬일이냐? 나야 이제 슬슬 대학 진학을 위해 공부 좀 하려고 그러지.”

“푸하하!! 형, 무슨 그런 질 나쁜 농담을…”

퍽-

지나치게 기어오른 후배들은 결국 한 대 맞고 말았다. 녀석들이 얻어맞은 머리를 움켜잡고 훌쩍훌쩍 댄다. 쯧쯧. 그러게 하늘 높은 줄을 알아야지. 전혀 안 불쌍하다고 생각하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머리를 문지르던 녀석 하나가 이쪽을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응? 뭐, 뭐야… 내가 뭘 어쨌다구. 녀석은 갑자기 꾸벅 허리를 90도 각도로 숙였다.

“다현 선배님?! 안녕하세요!!”

“뭐?! …헛. 안녕하세요, 다현 선배님!”

뭐야, 날 보고 놀란 게 아니구나……가 아니라 다현 선배님이라니?!

그 말에 내 옆에 있는 녀석을 쳐다보았다. 다현이 무심한 표정으로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게 보인다. 

“엥?”

웬 선배님?! 정작 같은 학교인 하늘이는 형이라고 부르면서.

나도 모르게 얼빠진 목소리를 내자 뒤에서 큭큭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하늘이었다.

“아, 이 녀석들은 중학교 후배이기도 하거든.”

아하… 같은 중학교 나왔다고 했지.

그제야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그래도 뭔가 좀 이상하긴 하다. 하늘이는 형인데 다현이는 선배님이라니. 

자유분방하고 누구에게나 허물없이 대하는 하늘이. 

절제되어 있고 냉정하며 누가 다가오든 무심한 다현이.

왠지 두 사람의 성격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호칭인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다른 두 사람이 친한 친구라는 사실 자체도 신기하다. 

새삼 놀라워하고 있는데 녀석들이 하늘이가 말을 거는 걸 보고는 나에게 시선을 모았다. 

“이 분은 누구…”

“아, 늬들은 그때 안 왔지? 다현이 형이야.”

하늘이 척 내 어깨에 한쪽 팔을 걸치며 말했다. 으다다닷. 하늘아. 갑작스런 스킨쉽은 정신 건강에 좋지 않아.

“아하! 안녕하세요, 지후 형! 아,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헛… 으, 응. 그래라.”

……왜 이놈들이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거지.

속으로 잠시 당황했지만 애써 평정을 가장하며 말했다. 그렇게 어색하게 서 있는데, 다현이 다 먹은 커피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며 말했다.

“난 들어간다.”

“뭐? 벌써?”

“너도 대충 하고 들어와라.”

깜짝 놀라 물어보는 하늘이에게 매정하게 대답한 다현이 슥 날 봤다.

“형은?”

“나? 아, 나, 나도 들어가야지!”

다현이가 갑자기 쳐다봐서 조금 당황했다. 얼른 하늘이의 손에서 빠져나오며 대답하자 다현이는 잠시 날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휙 열람실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내, 내 표정 방금 이상했을까. 

“별 수 없지. 나도 들어가야겠다. 잘들 놀다 가라.”

“컥! 놀다가긴요! 공부하다 갈 거예요!!”

“크큭. 그러든가.”

하늘이는 싱글싱글 웃으며 대답하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멍하니 서 있던 나도 뒤늦게 그 뒤를 따르는데, 문득 뒤에서 한 녀석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두 분 같이 다니시는 거 오랜만에 보네요.”

그 말에 하늘이 씨익 웃으며 뒤돌아본다.

“그렇지?”

‘스스로 고립되기 시작하더라구…’

얼마 전에 하늘이가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하늘이도… 예외는 아니었던 건가.

나는 제일 앞서 걸어가고 있는 다현이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왠지 가슴이 찡했다.

그 뒤로 수업이 끝나면 셋이 함께 도서관에 가게 되었다.

하늘이는 공부할 거면 부르지 좀 말라고 투덜거리면서도 매일 나왔다. 나 역시 공부는 그닥 즐기지 않지만 매일 매일이 가슴 설레고 재미있다. 대체 다현이의 ‘놀러가자’가 언제 ‘공부하자’로 탈바꿈 한 건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찌됐든 참여 멤버 탓인지 하루하루는 정말 짧다고 생각될 정도로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기말고사가 코앞에 다가왔을 때였다.

“다현아, 잠깐만. 너 혹시 엑셀 쓸 줄 아니?”

수업이 끝나고 하늘이와 만나기 위해 건물 안을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웬 여선생이 다현이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느 정도는요.”

“잘 됐다. 그럼 잠깐 선생님 좀 도와줄래? 지금 진짜 곤란하거든. 다현아, 부탁한다~”

“…….”

다현이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나를 보며 말했다.

“하늘이랑 먼저 가 있어.”

“아, 그래… 아는 선생님이셔?”

“1학년 때 담임.”

그렇게 말한 다현이는 곧 고맙다고 엄청 소란을 떠는 선생님께 붙들려 다시 건물 안으로 끌려갔다.

뭐, 별 수 없나. 너무 잘나도 고생이라니까.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오늘 안 그래도 수업이 늦게 끝났으므로 서둘러야 했다. 

하지만 우리의 선생님이기도 한 다렁이를 데리고 가다니. 늘 자기 공부도 착실히 하면서 우리 공부까지 꼼꼼하게 봐주는 선생님이었는데. 다렁이가 없으면 과연 하늘이랑 내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할 수 있을까…? 

…절대 없을 거 같은데.

미심쩍은 생각이 확신으로 변하고 있는 사이, 하늘이네 학교와 우리 학교의 중간 지점인 편의점 앞에 도착했다.

하지만 하늘이는 없었다. 늘 그렇듯 오토바이가 세워져 있는 걸로 봐서는 가게 안에 있는 것 같다.

딸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카운터 앞에 서 있는 하늘이가 눈에 들어왔다.

“하느…”

“진짜라니까. 진짜 사귀는 사람 있다구.”

…엥? 이게 난데없이 무슨 말?

반가운 마음에 막 하늘이의 이름을 부르려던 나는 갑작스레 터져 나온 하늘이의 충격 고백에 눈을 크게 떴다. 사귀는 사람…? 하늘이한테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그대로 얼어있는데 문득 하늘이가 소리를 들었는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나를 발견하고 잠시 눈을 크게 뜨다가, 곧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엉거주춤 하늘이 옆에 다가섰다. 

그런데! 

“??”

옆에 서기가 무섭게 하늘이 갑자기 손을 뻗더니, 내 한쪽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하늘이는 정면을 바라보며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얘야. 내가 사귀는 사람.”

“?!!??”

헉…!

그게 난데없이 무슨 소리냐, 하늘아?!! 당황해서 하늘이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하자, 엄청난 힘이 어깨를 꽉 붙들어왔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헉…… 하늘아? 하늘아, 왜 그래? 

“이젠 거절할 말이 없어서 남자랑 사귄다고 거짓말까지 하니? 됐어. 니가 아무리 그래도 난 포기 안 할 거니까.”

아?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일전에 봤던 그 알바 생 누나가 고집스런 표정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누나 모르는 구나. 난 누구 사귈 때 남자, 여자 안 가려. 못 믿겠으면 아무나 우리 학교 녀석들 붙잡고 물어봐. 진짜라고 할 테니까.”

“그럼, 난 왜 안돼? 남자도 되면서 나는 왜 안 되는데?”

“그야…”

그 말에 하늘이 나를 더욱 품에 꼭 끌어안았다. 희미하게 담배향이 났다.

“내가 이 녀석을 좋아하니까 그러지.”

“…….”

“거짓,”

“하늘이한테 접근하지 마세요!!”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알바 생 누나가 깜짝 놀라며 나를 쳐다보았다. 내 어깨를 끌어안고 있던 하늘이의 손도 휘청거리며 떨어져나간다. 하늘이 당황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으나, 나는 개의치 않고 위풍당당하게 소리쳤다.

“하늘이는 내 꺼니까!!”

“푸하하하!!”

편의점에서 좀 떨어진 곳까지 걸어오자, 하늘이는 작렬이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 아하하하…! 미치겠다. 진짜… 고마워, 지후야. 덕분에 살았어.”

두근두근 하는 심정으로 하늘이와 나란히 걷고 있던 나는 조금 당황했다. 하늘이는 너무 웃다가 눈물까지 고여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하하… 고맙긴, 하늘아. 내가 한 일이 뭐 있다고… 난 그냥 진심을 말한 것뿐인데. 

그런데 너 지금 뭐가 그렇게 웃기냐…….

“갑자기 그래서 당황했지? 이야아, 그래도 눈치 하난 죽이더라. 요즘 사실 그 일 때문에 골머리 좀 썩고 있었는데 덕분에 살았어. 고마워.”

“…….”

잠깐…… 잠깐, 잠깐만.

그, 그럼 뭐야…? 그럼 그게 다 그 알바 생 누나를 떼어내기 위해 거짓말한 거였단 말인가? 전부 다??

충격으로 굳어있는데 하늘이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끌고 왔던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응? 그러고 보니 다현이는?”

“…….”

“지후야?”

“…….”

크, 큰일났다. 실망이 너무 커서 표정 관리가 안 된다.

얼빠진 표정으로 서 있는 내가 이상했는지 하늘이 나를 불렀다. 그래도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내가 이 녀석을 좋아하니까 그러지.’

그럼 그게 전부 진심이 아니었단 말야…? 그 누나를 떼어내기 위해서 다 지어낸 말이었다구?

“지후야??”

하늘이 다시 한 번 내 이름을 불렀다. 헛… 나는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내, 내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하늘이가 이상하게 생각하겠어. 나는 재빨리 정신을 수습하여 얼굴을 들었다. 그런데…

“!”

고개를 들자, 하늘이의 얼굴이 코앞에 있어 깜짝 놀랐다!

나도 모르게 입을 가리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대답 없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 들여다보고 있던 하늘이 의아한 표정으로 얼굴을 든다. 큰일이다. 모든 열이 얼굴로 몰렸다. 화악─ 하고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하늘이의 눈이 점점 놀라움으로 크게 떠졌다.

“…….”

“…….”

탁-

나는 그대로 등을 돌려 도망쳤다. 

들켰다…! 들켜버렸어!

머리가 혼란으로 터질 것 같은 가운데서도, 그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 길로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걱정이 돼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혼자 멋대로 착각해서는 그걸 못 숨기다니, 바보같이…!

자책감에 괴로워하며 방에 처박혀 있는데,

“왜 먼저 갔어?”

라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확 열렸다.

침대 구석지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나는 그 소리에 얼굴을 들었다. 다현이었다. 

“다, 다렁아아…….”

다현이 얼굴을 보니 괜히 더 서러워졌다. 나는 녀석을 부르며 침대 구석지에서 슬금슬금 기어 나왔다. 다현이는 잠시 황당한 표정으로 그런 나를 보고 있다가 물었다.

“하늘이랑 무슨 일 있었어?”

“다렁아… 나, 나 어떡하냐….”

“무슨 일인데?”

큰 일. 그것도 엄~청 큰 일. 흑흑….

차마 소리 내서 말은 못하고 혼자 슬퍼하고 있자, 다현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흑흑. 다렁아. 나도 무슨 일인지 말하고 싶다. 정말 정말 말하고 싶다. 하지만…… 차마 네게만은 말할 수가 없구나. 네가 날 싫어할까봐.

그때 갑자기 눈앞으로 뭔가가 불쑥 내밀어졌다.

이게 뭐야…? 후…시딘……? 세 개나?

“?”

고개를 들어보니 다현이가 다른 쪽을 바라보며 삐딱하게 서 있었다.

“오다가 생각나서 샀어.”

“응??”

이걸 왜? 난데없이 웬 후시딘? 누가 심하게 다쳤나?

“전에…”

“응?”

“전에 내가 많이 썼다고 속상해했잖아.”

“…….”

“자, 빨리 받아.”

“…….”

나는 멍청하니 눈앞에 내밀어진 후시딘을 바라보았다. 녀석이 빨리 받으라는 듯 다시 불쑥 내민다. 엉겁결에 받아들었다.

그렇다고 이걸 세 개나……

“푸하하하하!!”

…사냐, 다렁아!!!!

미치겠다! 어떡해!! 너무 웃겨!!

나는 풀이 죽어있던 내 처지도 잊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녀석이 당황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본다. 하지만 그 얼굴이 더 웃겨서 나는 이제 아예 침대 위로 무너져서 끅끅거리며 웃어 제꼈다.

“그래, 그게 마음에 걸렸어? 그래서 내 생각하면서 샀다고? 으하하하!”

“…그냥 약국이 보이길래 사온거야.”

“응! 응, 알았어! 푸하하하.”

“기운 차렸으면 난 간다.”

“아, 그래, 그래… 고맙…”

손사레를 치며 거기까지 말하던 나는 갑자기 웃음을 그치고 말았다. 다현이가 내뱉은 한마디가 묘하게 가슴을 울렸다.

‘기운 차렸으면’

두근두근.

걱정한 건가? 기운 없는 거 보고… 나 걱정해 준거냐, 다렁아?

심장이 뛴다. 

솔직하게 털어놓아도 괜찮을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애초에 말이지. 저 녀석은 널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

말해도… 되지 않을까? 녀석이라면 이해해 주지 않을까?

“…다현아.”

나는 나가려는 녀석을 불렀다.

내 이야기를 다 들은 다현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충격을 받았는지,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 입을 꾹 다물고 있다. 나는 불안하게 다현이의 표정을 살폈다. 

괘, 괜히 말했나…….

뒤늦은 후회감이 몰려왔다.

역시…… 말하지 말걸 그랬어. 그냥 힘들어도 혼자서 삭히는 거였는데. 

그냥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절친한 친구다. 제아무리 다현이라 해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

“…….”

무슨 말이든 해라, 다현아… 제발…….

후회감으로 인해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떡하지… 다현이가 날 싫어하면 어떡하지……어떻게 해…….

“…음.”

“…!”

한참 만에 다현이 작게 침음성을 내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들어 녀석을 보았다. 다현이는 복잡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 방으로 갈게.”

“…!”

자, 잠깐! 다현아…! 다현아!!

소리 내어 외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안 나왔다. 당황한 표정으로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난 날 버려두고 다현이는 그대로 방을 빠져나갔다.

그날 밤은 내내 잠을 설쳤다. 

꿈에 다현이가 나왔다. 등을 돌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반가워서 단숨에 다가가 녀석의 어깨를 쳤다.

‘다렁아~!’ 

다현이 천천히 얼굴을 돌려 나를 보았다. 

‘…….’

나는 훅 숨을 크게 들이켰다. 다현이 경멸어린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건드리지 마, 녀석이 말한다. 호모새끼, 혐오감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녀석이 말했다. 

“…!”

그와 동시에 눈을 떴다. 식은땀으로 온몸이 푹 젖어있었다.

“하아, 하아……” 

나는 커다랗게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움켜잡았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비슷한 꿈을 일전에도 한 번 꿨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계속 불안했던 건가……. 하핫.

나는 자조적인 웃음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때 문득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연고 세 개가 눈에 들어왔다.

‘오다가 생각나서 샀어.’

녀석의 그 말이 떠오르자 다시 가슴이 지끈거렸다.

나는 책상 앞으로 다가가 연고 세 개를 가만히 집어 들었다. 다른 곳을 바라보며 삐딱하게 서서는, 어쩐지 쑥스러워하는 것 같이 보였던 녀석의 얼굴이 떠오른다. 픽. 웃음을 흘리며 두 번째 서랍을 열었다. 구석지의 가장 좋아하는 자리에, 반이 움푹 들어간 연고 하나가 놓여있었다.

하늘이가 줬던 연고…….

바보 같으니. 연고가 아까워서 속상해했던 게 아니다. 이걸 준 사람이 하늘이었기 때문에 그랬던 거다.

하지만.

…갑자기 보물이 세 개나 늘어버렸군.

나는 다시 피식 웃으며, 연고 세 개를 움푹 들어간 연고 옆에 나란히 눕혀놓고 서랍 문을 닫았다. 

괜찮을 거야. 자아, 떨지 말고 나가자!

라고 단단히 마음먹은 나는 방문을 확 열어 제꼈다.

“계속 생각해봤는데.”

…헉! 

문을 열기가 무섭게 어디서 나타난 건지 다현이 불쑥 튀어나와서 깜짝 놀랐다. 뭐, 뭐야… 임마.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그것도 그렇게 바로 용건부터 말하며 달려들다니. 

“하늘이는 안돼.”

…응?

놀란 심장을 달래기가 무섭게 다현이 굉장히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녀석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의지를 굳힌 듯 매우 확고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왜 안돼…?”

저렇게 부정할 여지도 없는 명령형의 문장을 들으면 누구라도 이런 질문이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그래도 눈치를 봐가며 조심스럽게 물어본다고 물어봤는데, 녀석은 그 말에 갑자기 인상을 확 굳히며 날 노려보았다. 

으, 으메…! 다현아. 자, 잘못했어. 그렇게 노려보지 마라.

“어쨌든 그 녀석은 안돼.”

“…….”

“그, 그러니까 왜……히익! …아야!”

용감하게 다시 반박을 시도했던 나는 녀석의 살기 어린 눈빛에 쫄아 뒷걸음질을 치다가, 벽에 뒤통수를 박는다- 라는 상당히 쪽팔린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너무 아파서 나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나왔다. 부딪친 뒤통수를 문지르며 얼굴을 팍 찡그리고 있자, 조금 전만 해도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풍기던 다현이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아?”

“…….”

…괜찮을 리가 없지. 병 주고 약 주냐, 다렁아.

하지만 사실 녀석의 그 모습에 많이 안도했다.

“헤헤…”

왠지 웃음이 새어나왔다. 

뭘 그렇게 걱정했던 건지…….

그래, 다현이는 이런 녀석이었다. 전에 나 싫다고 그렇게 냉정하게 굴었을 때도, 내가 넘어지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엉거주춤 다가오던 녀석이었다.

“후후훗…”

내가 계속 웃자 다현이 뭘 그렇게 웃냐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그래도 괜히 웃겼다. 고개를 숙이고 크크큭 하고 웃고 있으려니 다현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머리 박아놓고 좋냐?”

“…….”

…음, 그래. 

기본적으론 이런 성격이란 걸 잠시 깜박 했다…….

그날 하늘이는 도서관에 나오지 않았다. 다현이가 전화를 걸어 물어보자, ‘나 앞으로 안 나갈 거니까 부르지 마라’ 라고 말했다고 한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그 대답에 충격 받았다.

…역시 내 감정을 눈치 챈 거야.

다시 자책감과 실망감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잘 숨겼어야 하는 건데. 하늘이가 날 좋아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는데. 그냥 친해지기만 해도, 지금처럼 셋이 모여 하루하루 즐겁게 지내기만 해도 나는 좋았는데.

이제 아예 친구조차도 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완전 풀이 죽어있는데, 내 옆에 가만히 서 있던 다현이 갑자기 불쑥 중얼거렸다.

“…하늘이가 그렇게 좋아?”

…에?

난데없는 질문에 고개를 들고 다현이를 쳐다보았다. 다현이는 어쩐지 복잡해 보이는 표정으로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심란하기도 하겠지. 자기 친구를 형인 내가 좋아한다는데.

하지만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까. 쌈박하게 ‘응, 좋아’ 라고 대답하면 분명 다현이의 심기를 건드리게 될 것 같다. 그렇다고 ‘아니, 사실 별로 안 좋아’라고 변명하는 것도 웃기지 않은가. 너무 속보일 것 같고.

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이 축 처진 고개를 위아래로 한 번 움직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

하지만 그 대답 역시 다현이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다. 녀석은 내 대답에 차갑게 표정을 굳히더니, 한참 만에 굉장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어디가.”

에?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보자, 다현은 이를 악문 발음으로 또박또박 다시 말했다.

“그 녀석 어디가 그렇게 좋은데.”

“…….”

어디가 그렇게 좋냐니… 그런 걸 갑자기 물으면, 저…

“대답하면 화내려고?”

“…….”

정곡을 찌르는 내 대답에 다현은 잠시 침묵했다.

것 봐. 난 그냥 묵비권을 행사 할란다, 다렁아. 그나마 그게 제일 나을 거 같거든.

“…화 안 내.”

…거짓말.

“진짜 화 안 낼 테니까 말해봐.”

“…….”

정말일까?

나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하늘이의 모습을 떠올랐다. 

“글쎄, 어디가 그렇게 좋냐고 물어보면…… 분위기…랄까…. 항상 여유롭고 느긋해 보이는 모습하고… 어떤 것에도 구애되지 않는 것 같은 그 분위기… 아, 그리고 특유의 싱글거리는 얼굴도 좋아! 거기다 다정하고, 목소리 울림도 따뜻하고, 장난기 많고……하늘이라는 이름도 좋은 거 같고……”

하늘이 얼굴을 떠올리며 좋은 점을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중얼거리고 말았다. 양 볼을 붉게 물들이고는 떠오르는 대로 중얼중얼 말하고 있는데, 문득 옆에서 알 수 없는 오한을 느꼈다.

헉… 자, 잠깐만. 나 지금 너무 열심히 말하고 있지 않아…?

순간 아차 싶어 끼기긱 고개를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정면을 바라보며 걷고 있는 다현이 굉장히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게 얼마나 심했냐 하면, 우리들 앞쪽에서 걸어오던 사람들이 너무 놀라 주춤주춤 옆으로 피해가고 있을 정도였다.

“…….”

다, 다렁아. 너 꼭 사람 한 둘 쯤은 죽이고 온 사람 같다? 그, 그러게 안 말한다니깐.

나는 완전히 얼어서 그대로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내가 입을 다물자 무섭게 표정을 굳히고 있던 다현이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흐음. 그래?”

……무시무시한 표정과는 다르게 녀석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그게 다였다.

으아아!! 그게 더 무서워!! 차라리 화를 내라, 다현아…!!

나는 속으로 절규하며 앞을 향해 열심히 걸었다. 

“…….”

“…….”

묘한 정적이 감돈다. 다현이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한참 만에 다현이 입을 열었다.

“…나는?”

“응?”

“나는 어디가 좋아?”

“…….”

하하… 내 귀가 잠시 제 기능을 상실했나.

응? 하는 얼굴로 어색하게 웃어보이자 녀석이 다시 말했다.

“나는 어디가 좋냐고.”

“…….”

헉!! 제발 내가 잘못 들은 거라고 해다오, 다현아! 

나는 애써 부정하려 노력했지만, 녀석이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 해 와서 그럴 수가 없었다. 크, 큰일났다. 여기서 잘못 말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뭐야… 뭘 그렇게 기대에 찬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거냐, 정다렁…!

“너, 너, 넌……”

“…….”

“넌…!”

“…….”

으아아. 가, 갑자기 생각하려니까 생각도 안 나네! 어떡해!!

내 대답이 늦어지자 다현이의 표정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갔다. 아, 안돼! 빠, 빨리 생각해내야 한다! 다렁이의 좋은 점… 다렁이의 좋은 점이라…….

“그러니까, 넌!!!!! ………귀여워.”

…흑.

이게 짧은 시간에 안에 내가 해낼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난 거의 울상이 된 얼굴로 중얼거렸다. 녀석이 그 말에 얼빠진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그리곤 믿고 싶지 않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게 다야?”

“아, 아냐!! 그럴 리가!! 넌…!!” 

“…….”

“……되게 귀여워.”

……미치겠다….

녀석의 표정이 점점 실망감으로 짙어져 가는 걸 보면서, 나는 스스로의 바보스러움에 대한 자책감으로 고통스러운 기분이 되었다.

“…억지로 말하느라 애썼군.”

상처받은 표정으로 녀석이 중얼거렸다.

헉?! 아냐! 억지로 지어낸 말이 아니라 진짜다…! 그리고 <귀여워>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찬사인데…….

“여하간 하늘이는 안돼.”

녀석은 다시 막무가내로 중얼거렸다. 

또, 또 그 말이냐…….

“왜…”

“음. 일단 그 녀석은 남자고… 그거 말고도 그닥, 연애 대상으로서는 좋다고 할 수 없어. 친구로서는 정말 괜찮은 녀석이지만, 연애 관계는 뭐랄까. 좀 복잡한 편이랄까……. 아니, 그보다는 워낙 대쉬 해오는 녀석들이 많은 거겠지만. 여하간 본인도 별로 진지하게 사귀는 거 좋아하지 않고, 가볍게 놀다가 끝낼 정도라면 괜찮겠지만……” 

이번에도 화내리라 생각하며 기대도 안하고 웅얼거린 내 질문에, 놀랍게도 다현은 꽤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진심이라면 그만 두는 게 좋아.”

“…….”

하지만 그 말이 꽤 충격적이어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벼운 관계를 선호한다고…? 그만 두는 게 좋다고…?

그런가……. 그렇구나. 하늘이는 그랬구나. 맞아… 왠지 그런 분위기가 풍기긴 했다……. 인기도 많을 거 같았고.

다현이 말대로 포기하는 게 나을까.

말없이 축 처져있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다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여태껏 남학교만 다녔지?”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친구 사귀어본 적은 있어?”

이번엔 좌우로 흔들었다.

“그래…? 그럼…… 그래서 그런가. 착각하고 있는 거야, 네가. 아직 여자친구를 사귀어 본 적이 없어서 그래.”

“…….”

“시험 끝나면… 내가 소개팅 시켜줄게. 학원 다닐 때 알던 여자애 중에 괜찮은 애가 하나 있는데.”

“…….”

“기분 전환 겸으로 한 번 만나봐. 그럼 착각이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래….”

나는 열심히 날 설득하려 애쓰는 다현이를 서글프게 바라보며, 힘없이 대답했다.

“하아아…….”

한숨이 푹푹 나온다. 시험이 끝나는 마지막 날, 나는 가방을 챙겨들고 나오면서 굉장히 심란한 기분이었다. 

정말 해야 되는 걸까, 이 소개팅…… 아아, 내가 어쩌다 소개팅까지 하게 된 건지. 딱히 여자친구를 갖고 싶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는데.

하늘이는 그 후로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한두 번은 바이크가 길거리에 세워져 있는 모습을 발견했는데, 어째서인지 하늘이는 그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도, 일부러 나를 피해 다니는 것 같다. 

정말 바보같이… 그 상황이면 당연히 귀찮게 따라붙는 여자를 거절하기 위해 연기를 한 건데, 그걸 왜 혼자 착각해가지고 하늘이랑 이런 어색한 사이가 되었단 말이더냐.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어쨌든 지금은 다현이의 말대로 하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녀석의 말대로 내가 착각…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니까. 

게다가 나도 다현이한테 미움 받는 건 싫은데다, 하늘이도 나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하면 다시 예전처럼 지내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의 나에겐 여자 친구를 만드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런 생각들을 하자 조금 힘이 났다. 좋아… 기왕 하는 거, 열심히 한 번 해보자. 이런 기회를 마다하다니 이 얼마나 사치스런 투정이란 말이냐!

그때 막 뒷문에서 나오고 있던 다현이와 마주쳤다.

“시험은 잘 봤어?”

“하하… 묻지 마라.”

“음… 어쨌든 가자. 1시에 피자헛에서 만나기로 했어.”

허허, 다렁아. 뭐가 그렇게 급했니. 그 여자애네 학교는 시험 끝났대냐?

녀석의 추진력에 다시 한 번 놀라면서 나는 엉거주춤 녀석을 따라갔다. 

“…….”

“…….”

목적지로 걸어가는 동안, 녀석은 아무 말도 없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다현이는 그때 이후로 여전히 조금 화가 나있는 상태인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전처럼 말도 안 되는 심술을 부린다거나 경멸해마지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어쩐지 전에 비해서 말수가 많이 줄었달까? 단순한 대화 외에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때면, 가끔 굉장히 화가 난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때도 있고… 날 대하는 태도가 묘하게 쌀쌀맞은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 역시 아직 화가 안 풀린 것 같다.

나는 힐끗 무표정하게 앞을 보며 걷고 있는 녀석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이렇게 미움 받고 있는 상태로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기, 다현아. 나……”

“…?”

“하늘이 포기할게.”

“?!”

그 말에 다현이 굉장히 놀란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니 말대로 할게. 니 말이 맞는 것 같아. 남자를 좋아한다니…… 역시 이런 건 정상이 아니잖아.” 

“…….”

“나 소개팅 열심히 할 거야. 여자친구 만들게.”

일부러 씩씩하게 웃으면서 중얼거리자, 다현이는 조금 복잡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야… 기뻐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 혹시 미안해하는 건가? 

“나한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다현아. 니 말이 맞는 얘긴데, 뭐. 너도 다 나 걱정해서 그런 거잖아? 고맙다.”

“……그래….”

한참 만에 다현이 중얼거린 말은 그게 다였다.

으아아, 다현아~! 왜 화가 풀리긴 커녕 더 화가 난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거냐?! 아무래도 이 정도 가지고는 약했나??

“그러고 보니 나한테 소개 시켜주려는 여자애는 어떤 애야? 예뻐?”

“…….”

흑… 이젠 대답도 안 해…….

결국 입 다물고 조용히 걷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간신히 목적지인 피자헛에 도착하자, 다현이는 잠시 문 앞에 망설이는 동작으로 서 있었다. 왜 그러지? 

“뭐 잊고 왔…”

딸랑-

…다현아. 사람이 말하고 있으면 좀 듣고 움직여줘라.

나는 부랴부랴 먼저 문을 밀고 들어가는 녀석을 따라갔다. 다현은 2층으로 올라가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한 테이블을 향해 걸어갔다. 그곳에는 어깨까지 오는 생머리를 반 묶음 한 여자애가 혼자 앉아있었다. 아, 혹시 이 애인가? 

“일찍 왔네.”

“아, 우리는 오늘 두 과목만 시험 봤거든.”

가방을 의자 위에 내려놓으며 중얼거린 다현이의 말에 여자애는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나저나, 이야아… 이거 기대 이상인데. 진짜 예쁘게 생겼다. 

“앉아.”

뻘쭘하게 서서 여자애의 얼굴을 보며 감탄하고 있었더니, 다현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다렁아… 너 왜 아직도 그렇게 화가나 있는 거냐? 나 노력하고 있잖아, 이렇게! 열심히 한다니까? 

“아, 안녕하세요.”

“아, 네. 하하… 안녕하세요.”

밝게 웃으며 건네 온 여자애의 인사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다현이 형이라면서요? 진짜예요? 난 다현이한테 형이 있는 줄 이번에 처음 알았거든요.”

“아, 네… 사정상 좀 떨어져 지내다 와서…”

“전 다현이는 반드시 외동아들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둘이 별로 안 닮았네요. 그쪽이 더 동생 같아요.”

“아하하, 그래요……?”

으아아!! 어색해, 어색해~ 동갑인 것 같은데 존댓말 써야해? 그냥 말 놓자 그럴까? 아, 그전에 이름을 먼저 물어봐야 하나? 어떡하지? 다현아! 나 좀 도와줘! 

라고 구조의 눈길을 담아 다현이를 힐끗 쳐다보자, 헉…….

따, 딴 데 보고 있다.

……다현아. 니가 주선해놓고는 이렇게 비협조적일 수 있는 거냐?

“이름이 뭐예요? 아, 그전에 동갑이라고 들었는데 서로 말 놓을까요?”

다행히 여자애 쪽에서 먼저 자연스럽게 물어주었다. 휴우….

“아, 네…가 아니라… 응. 그, 그러자. 하핫.”

“푸후… 내 이름은 권지예야.”

“아, 난 정지후.”

“…….”

“…….”

으, 음… 뭔가 옆쪽에서 알 수 없는 오라가 발산되어 나오는 것 같은 건, 단순한 내 착각인가?

하지만 나만 그런 생각을 했던 건 아닌 모양이다. 지예라고 했던 그 여자애도 조금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다현이 쪽을 쳐다보았다. 

“…….”

다현아…소개팅 해 주러 와서 입 다물고 가만히 앉아있기만 하는 건 대체 무슨 심보냐. 게다가 그렇게 무서운 표정이라니. …아직도 화가 안 풀렸나?

“주문 받겠습니다.”

그때 다행히 알바 생이 나타나서 우리의 어색함을 깨주었다.

“아, 잠시만요. 뭐 먹을까? 뭐 좋아하는 거 있어?”

“글쎄… 리치골드 먹을까?”

“그래, 그러자~ 그럼, 음… 리치골드 3~4인용… 아, 둘이 먹기엔 좀 많은가?”

라고 말하며 고개를 드는데, 문득 옆에서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다, 다렁아? 뭘 그렇게 날 쳐다보냐….

“아, 다현이 너도 먹고 갈래? 밥 안 먹었잖아.” 

“응.”

내 질문에 다현이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하하… 소개팅이 아니라 꼭 셋이 놀러 나온 것 같다. 보통 이런 건가? 난 뭐 난 소개팅하면 주선자는 대충 소개시켜준 다음에 자리를 비켜주는 건 줄 알았지. 내가 잘못 알았나 보다…. 

어찌됐든 그렇게 주문이 끝나고 조금 뒤에 알바 생이 와서 샐러드 접시랑 콜라를 가져다주었다.

“샐러드 담아와.”

“응?”

“형이 바깥쪽이잖아. 담아와.”

“…어, 어… 그, 그래…”

나는 어색하게 접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 음. 지, 진짜 그냥 셋이 어울려서 노는 게 맞는가봐….

어쨌든 나는 대충 여러 가지 종류의 샐러드를 접시에 담아 넣고 자리로 돌아왔다. 자리로 돌아오니 다현이는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고 지예라는 여자애는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자~ 머, 먹자. 먹어. 하핫.”

나는 이 어색한 분위기를 탈피하기 위해 최대한 발랄하게 외쳤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분위기는 나아지지 않았다. 

미, 미치겠네. 무슨 말이든 해보자.

“어디 학교 다녀?”

“응? **여고. 알아?”

“아니… 교, 교복이 예쁜 것 같아서. 하하하…”

……으아아, 차라리 돌아버릴래… 이 뻘쭘함과 어색함이라니. 작업의 지읒자도 안 되는구나, 난.

“하하. 교복만?”

“아, 아냐… 너, 너도 예뻐.”

“푸훗…”

아. 우, 웃었다. 

드디어 성공했다는 생각에 한시름 놓고 있는데 갑자기 옆쪽에서 퍽 소리가 터졌다. 응? 깜짝 놀라 옆을 쳐다보자 다현이 포크로 샐러드를 찍고 있었다. 으, 으메… 다현아. 무슨 샐러드하고 원수졌냐? 뭘 그렇게 격렬하게 찍고 그러냐?

“…실수로 미끄러졌어.”

“…….”

“신경 쓰지 말고 얘기해.”

“…….”

지예랑 내가 놀라서 쳐다보자 녀석이 중얼거렸다. 그, 그래…. 우리는 다시 끊긴 대화에 집중하기 위해 애썼다.

“그런데, 지후야.” 

“응?”

“너 소개팅 첨 해보는 거지? 왠지 그럴 것 같아.”

“응. 하하… 사실 처음이야. 그, 그런데 처음이면 뭐 안 좋은 거 있나?”

“아니~ 귀여워서. 후후후.”

파삭-

지예의 웃음소리 뒤로 뭔가가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게 무엇인지 확인하기가 무섭게 허벅지에서 차가운 느낌이 나서 나는 벌떡 일어나야했다. 

콜라다…! 콜라가 허벅지를 타고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

너무 놀라서 말도 제대로 안 나왔다. 그저 경악에 찬 표정으로 젖은 바지와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쳐다보고 있으려니, 다현이 무표정한 얼굴로 휴지를 건네주었다.

“미안. 팔에 맞았나봐.”

“…….”

“이걸로 닦아.”

“…….”

…다, 다현아. 너 오늘 왜 그러냐? 왜 계속 나 같은 짓을 하고 그래?

흑흑… 나는 서글프게 휴지로 젖은 바지를 닦았다. 아, 이 위치 정말 싫다. 오해의 소지가 너무 많은 부위야. 

어쨌든 열심히 바지를 닦아내고 나자 다시 분위기는 썰렁해져 있었다.

“…다현아.”

그때, 정적을 깨고 지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현은 힐끗 지예를 쳐다봤다.

“저… 이제 그만 가도 되는데…”

“…….”

헉! 저렇게 대놓고 말하다니! 안 그럴 거 같이 생겨가지고 정말 대단한 여자 아이다.

나는 걱정스러운 느낌이 들어 힐끗 다현이를 쳐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다현이는 눈에 띄게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래… 알았어.”

한참 만에 다현이 조용히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저… 다, 다현아…”

“재미있게 놀다 와.”

“…….”

내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녀석을 부르자, 녀석은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짧게 중얼거리고는 그대로 가게 안을 빠져나갔다. 나는 녀석이 나간 자리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

어쩐지 기분이 이상하다. 이상하게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미안해. 저기, 난 사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오늘 그 사람을 포기하려고 나온 건데, 역시 아직 누굴 사귀고 그럴 단계는 아닌 거 같아.’

……뺨 맞았다.

제길. 역시 너무 솔직하게 말했나. 그냥 마음에 안 든다고 대충 둘러댈 걸.

나는 빨갛게 부은 볼을 문지르며 후회 막심한 기분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정확히는 ‘다현이가 신경 쓰여서 빨리 집에 돌아오고 싶은 거’였지만, 어쨌든 대충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매우 쪽팔렸다. 

뺨에는 손바닥 자국에 바지는 콜라 자국에…… 사람들이 다 한 번씩은 이쪽을 쳐다보며 지나가는구나. 흑흑. 지후야. 언제부터 자국의 인생이 되었느냐.

그렇게 혼자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데, 문득 문 앞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명이 아니라 두 명…… 잠깐, 오토바이?

퍽─!

그중 내 쪽을 향하고 있는 하늘이의 얼굴을 알아보기가 무섭게 녀석이 주먹을 맞으며 바닥에 처박혔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하늘아!”

깜짝 놀라서 바로 녀석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가는데, 문득 크큭…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웃음소리에 놀라 발을 멈추었다. 하늘이 웃고 있었다.

“성질 좀 죽여라, 다현아.”

하늘은 숙이고 있던 얼굴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다현이?! 다현이라고?! 다현이가 왜 하늘이를…….

그 말에 깜짝 놀라 때린 상대를 쳐다보는데, 

“안녕, 지후야. 오랜만이지?”

라고 중얼거리는 하늘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흠칫, 하늘이의 말에 뒤돌아서 있던 녀석의 몸이 눈에 띄게 굳었다. 나는 녀석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다현아?”

“…….”

나는 조심스럽게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내 부름에 녀석의 어깨가 움찔 떨린다. 녀석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

다현이는 어째서인지 굉장히 놀란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뭐야… 왜 그런 표정을…….

녀석의 표정에 나도 놀라 멍하니 녀석을 마주보았다. 그러자 다현이 갑자기 입술을 질끈 깨물며 눈을 피한다. 에…? 

“다, 다현아?”

의아함에 다시 녀석의 이름을 부르자, 녀석은 휙 골목 반대편을 향해 몸을 돌리더니 그대로 전력질주(!)를 했다. 헉…!! 어, 어디 가, 다현아?!! 깜짝 놀라 붙잡을 사이도 없이 녀석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

바, 방금 뭐였지?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기가 막혀서 그대로 벙쪄 있는데 문득 밑에서 유쾌해 죽겠다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큭… 크크큭…”

나는 멍하니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았다. 다현이에게 얻어맞은 볼이 벌겋게 부어오른 하늘이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걱정 마. 금방 들어올 거니까.”

“…싸운 거야?”

“아니야.”

하늘이는 바로 대답하고는 툭툭 몸을 털며 일어났다. 그리고 세워진 바이크 앞으로 다가간다.

“지후야.”

바이크 손잡이를 붙잡던 하늘이 문득 생각난 듯 나를 불렀다. 

“응?”

“내가 말한 거, 아직 기억하고 있지?”

“…?”

어떤 거…?

“저 녀석 외롭지 않게 해주라는 말….”

“아…”

“그럼 난 간다.”

부아아아앙-----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채 하늘이 마저 떠나버렸다.

쏴아아아-

저녁때가 되자 비가 오기 시작했다. 그냥 비도 아니고 장마 비다. 거의 퍼붓는다 싶을 정도로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면서 나는 불안으로 가슴이 술렁거렸다.

뭐야, 비도 이렇게 많이 오는데 왜 안 들어오는 거야…….

빨리 돌아올 거라는 하늘이의 예상과는 다르게 다현이는 자정이 넘은 지금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다…….

나는 걱정이 돼서 도저히 잘 수가 없었다. 오늘 녀석의 이상했던 태도도 신경 쓰이고 하늘이의 마지막 말도 신경 쓰인다. 그렇게 소파에 쭈그리고 앉아 녀석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문득 정적 속에서 달칵 하고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

왔구나!

나는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뚝뚝- 현관 앞에 도착하자 물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난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푹 젖은 다현이 현관 앞에 서 있었다.

“바보야…! 비가 오면 나한테 전화를 해야지!!”

나는 녀석의 모습에 깜짝 놀라 소리치며 그대로 욕실로 달려가 수건을 꺼내왔다. 그때까지도 다현이는 말없이 현관 앞에 서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조용히 서 있는 게 어쩐지 을씨년스럽게까지 보일 정도다. 나는 얼른 꺼내온 수건을 녀석의 머리에 뒤집어 씌웠다.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전화했으면 내가 바로 마중 나갔을 텐데…”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파 나는 녀석의 젖은 얼굴을 꼼꼼하게 닦아주며 중얼거렸다. 그때까지도 다현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

문득 나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녀석이 수건 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수건을 푹 쓰고 있는 녀석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다현아?”

그런데 녀석의 이름을 부르며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는 순간, 탁 손목이 잡혔다. 나는 깜짝 놀라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스르륵 하고 수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와 동시에 따뜻한 게 입술에 닿았다.

“!!!”

나는 너무 놀라 그대로 굳어버렸다.

커다랗게 눈을 뜬 내 시야에 굳게 감겨진 녀석의 눈이 들어온다. 귀여운 속 쌍꺼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입술을 가르며 혀가 들어왔다. 

“!!!”

쏴아아아-

창밖으로 비 오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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