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에필로그=)
“형, 그런데요….”
“또, 왜.”
밤이 깊었다. 오랜만에 도윤범과 얼굴을 맞대고 저녁을 먹었고, 숙면을 위해서라며 남도하에게 따뜻한 차까지 마시게 했다. 잠도 제대로 못 자서 매일 술을 마시던 놈이…. 남도하는 도윤범이 하는 짓을 그대로 두고 봤다. 행동 하나하나 밉지 않았다.
어쩌면 남도하는 이런 도윤범이 보고 싶었던 것 같다. 온갖 방정을 떨며 이리저리 오가며 저를 챙겨 주고, 또 정신 사납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도윤범 말이다. 억지웃음을 지으며 상처받은 마음을 숨긴 채 애써 밝은 목소리를 꾸미지 않아도 되는 모습. 그 모습에야 남도하의 마음에서 불쑥 피어나곤 하던 짜증이 멎었다.
“어떻게 그렇게 귀신같이 따라다녔어요…?”
도윤범은 남도하에게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가슴팍에 얼굴을 들이밀며 남도하의 팔을 제 어깨에 둘러 감싸게 했다. 남도하는 여전히 안쓰러움이 먼저 드는 마른 어깨를 힘주어 안았다.
“그거 생각보다 재밌던데. 훔쳐보는 것도 재미있고, 뒤에 몰래 따라다니는 것도 스릴 있고.”
“형…!”
“왜, 윤범이도 몇 년이나 그랬다면서. 찾아보니까 네 방에 내 옷도 엄청 많던데, 그건 다 뭐에 썼나 모르겠네.”
웃음기 젖은 남도하의 목소리가 말을 마치자 적막이 감돌았다. 도윤범은 잠든 것처럼 미동도 없었는데, 슬쩍 내려다보니 목덜미와 귀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걸 보니, 남도하가 예상한 게 맞는 것 같았다. 이 앙큼한 놈을 어쩌면 좋을까…. 그리고 또 그런 도윤범이 싫지 않은 저는 또 어떻게 된 걸까.
남도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긴 혼란 속에서 끓어오르던 짜증과 화의 이유를 스스로 납득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도윤범의 말을 빌리자면 ‘사랑’이었고, 남도하의 입에서 나온 말로는 ‘좋아하는’ 감정이었다. 스스로 인정하고 나자 허탈했고, 또 마음이 편안해졌다.
도윤범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모두를 좋아했다. 토끼 가면을 쓴 도윤범도, 매니저 도윤범도. 거기에 모든 거짓을 털어 낸 도윤범마저 싫어할 수 없었다.
“또 형 옷 훔쳐 가면 나도 똑같이 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앞에 한 말이 농담은 아니었다.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도윤범이 하던 짓을 똑같이 따라해 보자 그의 생각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옳지 못한 짓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최소한의 안심을 할 수는 있었다. 매몰차게 도윤범을 섬 밖으로 떠밀었던 이후 별일은 없을까 걱정스러웠다. 위태로운 뒷모습을 바라보는 게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겠나.
집에는 잘 들어오는지, 잠은 잘 자는지, 밥은 잘 먹는지. 그걸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부분에서 안심이 됐다. 도윤범의 사고를 이해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고, 네가 한 짓이 대체 얼마나 기분 나쁜 짓인지 깨닫게 하기 위함도 있었다.
“진짜요?”
하지만 뭔가 잘못된 것 같다. 품에 푹 파고들었던 도윤범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의 얼굴엔 이유 모를 기대감이 들어차 있었다.
“뭐?”
“생각해 보니까, 좋은 거 같아요.”
“…뭐가?”
도윤범은 남도하의 목덜미에 팔을 두르며 얼굴을 가깝게 가져다 댔다. 이젠 그의 얼굴에 자연스러운 미소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다시 스물넷의 천진한 웃음이었다.
“형이 저한테 그렇게 해 주는 거요. 제 옷도 훔쳐 가고, 제 뒤에 따라다니고 그러면 좋겠어요. 위치도 파악하고 방에 카메라 설치해서 저 훔쳐봐도 좋아요.”
“…….”
“아니, 아예 시간마다 뭐 하고 있는지 사진 찍어서 보고할까요? 전 형이 그렇게 저 봐 주면 좋아요.”
아직은, 도윤범의 사고를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다. 제가 한 짓을 반성하라 한 건데, 괴한의 정체가 남도하라는 걸 안 도윤범은 오히려 더 좋아하고 있다.
“…말 잘 들으면 그럴게.”
고개를 빠르게 주억이는 걸 보니, 새롭게 도윤범을 길들일 방법을 알 것도 같다.
“근데요… 아까 왜 그렇게 빨리 풀어 줬어요? 더 묶어 줘도 좋았을 텐데.”
남도하는 도윤범의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건… 사실 안 묶고 싶었는데, 윤범이가 힘이 워낙 세야지.”
어쩔 수 없었다. 힘으로 도윤범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앞서 몇 번 경험해 봤기에, 토끼 가면을 쓰고 겁을 좀 주기 위해서 잠시 묶을 수밖에 없었다.
“너 옛날 일을 모르면 모를까, 알면서 어떻게 그래.”
“아….”
아무리 도윤범이 한 짓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남도하는 위협적인 상황을 연출할 수 없었다. 과거 어딘가에 갇혀 있었던 기억이 도윤범의 인생에 힘든 기억으로 남아 있을 테니까. 그래서 장소도 집, 결박도 팔에 힘만 주면 간단히 풀어질 정도로 묶어야 했다.
“팔 풀어 주면서 네가 갑자기 공격할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데….”
“제가 형을 어떻게 때려요.”
“그땐 몰랐잖아, 나인 거.”
남도하의 말에 도윤범은 김빠지는 웃음을 지으며 얼굴을 당겨 남도하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다시 거릴 벌렸다.
“왜 몰라요. 형이 저한테 입 맞출 때부터 느꼈어요. 그래서 하나도 안 무서웠는데.”
“말도 안 돼.”
“정말요. 전 형 입술이랑 혀도 기억하나 봐요.”
도윤범은 말을 하며 은근슬쩍 남도하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이젠 대놓고 제멋대로 애정 표현을 하는 도윤범이었지만, 썩 싫지는 않았다. 뒤에서 홀로 비밀을 숨긴 채 뭔가를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리 눈앞에서 솔직히 행동하게 두는 게 나았다. 남도하는 그런 스킨십이 낯설기는 했지만, 심장을 간질거리게 하는 건 사실이었다. 좋다는 말이다.
“윤범아.”
“네?”
“형도 궁금한 게 있었는데….”
남도하는 도윤범의 허리를 양손으로 잡아당겼다. 그러곤 제 허벅지 위로 올려 앉혔다. 조금 전에도 마주 보고 있었지만, 자세를 바꾸자 괜한 짓을 한 것인가 하는 후회가 들기도 했다. 옷으로 감싸져 있는데도 맞닿은 몸이 뭔가, 자극적이었다. 겹쳐진 허벅지도 그렇고 목에 둘러진 팔도 그렇고. 손에 들어오는 허리도 그렇고. 괜히 거실이 더워지는 거 같다.
“뭔데요?”
“그… 저번에 섬에서, 비 오던 날….”
“형이 제 엉덩이 찢은 날이요?”
“찌, 찢기는! 내, 내가 뭘 찢어….”
직구로 치고 들어온 도윤범의 말에 남도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 애가 이렇게 부끄러움이 없나 모르겠다….
“진짜 찢어졌는데. 저 그때 며칠이나 고생했는데요? 형 너무….”
도윤범이 잠시 말을 멈췄다. 남도하의 머리가 오랜만에 초비상으로 돌아갔다. 너무, 뭐…? 너무 무식하더라, 너무 못 하더라, 너무 별로더라…?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빠르게 사고를 잠식해 갔다.
“…크던데요…. 좀, 과해요.”
“아.”
남도하는 이제 뒷덜미에서 땀이 배어나는 거 같았다. 어차피 서로 모든 걸 본 사이이긴 하지만, 밝은 거실에서 나누기에 적합한 대화는 아니었다. 괜한 이야기를 꺼낸 것만 같았다.
“…미안. 사실은 내가 경험이 좀… 적어서….”
그래서 이실직고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살짝 거짓을 섞었다. 나이가 몇인데 차마 처음이었다고 말을 할 수는 없어서. 하지만 순간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웃음기를 잃지 않던 도윤범의 얼굴이 일순 굳어 버렸다. 딱딱해진 시선이 마치 토끼 가면을 마주하는 것만 같았다. 뭔가… 못마땅한 감정이 피어난 토끼.
“…왜, 그래…? 아니, 아주 적다는 건 아니고 오, 오랜만이라 그렇다는 거지 내가 그렇게 막 미숙하고 그러진 않은데….”
“형.”
“어?”
“누구랑요.”
남도하의 허벅지에 앉아 있던 도윤범이 남도하의 두 어깨를 움켜쥐었다. 살이 빠져 힘이 다 사라진 줄 알았던 놈은 사라졌다. 몸부림을 쳐도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을 정도로 단단한 손길이었고, 시선이었다.
“누구랑 그렇게 했는데요.”
“…다 지난 얘길 왜….”
“전 형이라서 처음으로 뒤까지 내주고 다 찢어졌는데.”
“…처음…?”
사실 남도하가 이 대화를 시작한 이유가 저거긴 했다. 혹시, 설마 그때 그게 처음이었냐는 걸 묻고 싶었다. 하필 그 뒤에 도윤범이 열병에 시달려 얼마나 홀로 자책해야 했는지 모른다. 아픈 아이에게 몹쓸 짓을 한 것 같아서. 그게 또 처음이면 더욱 미안할 거 같아서.
“어떤 새끼… 아니, 누구랑 했어요? 화 안 낼게요. 그냥 궁금해서 그래요. 다 지난 일이잖아요?”
도윤범은 누가 봐도 화가 잔뜩 났다. 눈이 좀, 이상해진 거 같다고 할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남도하의 한마디면 있지도 않았던 과거의 연인이 성치 못한 꼴을 당할 거 같았다.
“…되게 귀여운 사람인데….”
하지만 이상하게 더는 도윤범의 그런 모습이 무섭지 않았다. 마치 제 연약한 마음을 숨기려 더 날을 세우는 고양이 새끼 같달까. 그래서 그런 도윤범을 좀 놀려먹고 싶어졌다.
“…귀여워요?”
“어. 얼굴도 그렇고 하는 짓도 그래. 아마 평생 가도 못 잊을 거 같은데.”
어깨를 감싼 손에 점점 더 화가 들어차는 게 느껴졌다. 얼굴은 웃음기 한 점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보다 남도하는 웃음이 터져 버리고 말았다. 좀 더 놀려먹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사달이 날 거 같기도 했고, 그게 뭐라고 이렇게 진지해진 도윤범이 우습고, 귀엽기만 했다.
“웃어요, 지금?”
“하아… 그거 윤범이야, 도윤범.”
한참 만에 웃음을 멈춘 남도하는 도윤범의 등을 감싸 당겼다.
“미안. 내가 거짓말했어. 나도 윤범이가 처음이야.”
전무했던 연애 경험을 털어놓고 나서야 도윤범은 순순히 달려와 안도의 숨을 길게 토해 냈다.
“형이 좀 바쁘게 사느라, 연애 같은 거 하고 살 시간도 없었어.”
“그러니까… 제가 얼굴도 하는 짓도 귀여워서 평생 못 잊겠다는 거죠?”
“…어?”
“형이 그랬잖아요.”
“…그렇기는 한데….”
뭔가 도윤범과 대화를 이어 갈수록 이상한 수렁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실수인 것 같은 기분. 이번에도 도윤범은 위험해 보였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눈을 빛내는 놈이다.
“제가 그래서 준비한 게 있는데요….”
“…뭔데…?”
“따라와요.”
도윤범은 남도하의 손을 잡아끌었다. 앞장서는 도윤범을 따라가면서도 이유 모를 불안이 작게 피어났다. 넓은 거실과 복도를 지나 안방으로 향했다. 방의 조명을 흐릿하게 맞춘 도윤범이 서랍을 뒤졌다. 그러곤 침대 위에 몇 개의 물건을 내려놓았다. 근처에 서 하는 짓을 지켜보던 남도하는 기가 막혔다.
“…집에 왜 저런 게 있어…?”
“아, 이건 필요 없겠어요.”
커다란 윤활 젤이 종류별로 있다. 그리고 각양각색 콘돔이 있었는데, 그건 도윤범이 바닥으로 다 던져 버렸다.
“어차피 평생 우리끼리만 할 거니까.”
“…평생….”
“아니에요, 설마?”
도윤범은 순간 남도하의 팔을 잡아당겼다. 거의 내던져지다 싶게 침대로 쓰러졌다. 기다렸다는 듯 도윤범은 남도하의 위에 올라타며 제 상의를 벗어 던졌다.
“대답해요. 아니에요?”
남도하의 티셔츠 안으로 도윤범의 손이 파고들었다. 부드러운 손이 몸을 쓸고 지나가자 남도하도 잠시 차오르던 당황이 옅어지며 다른 감정이 빠르게 몸에 퍼져 갔다.
“윤범이 하는 거 봐서.”
“그럼 저도 형 하는 거 봐서요.”
“너…!”
어느새 남도하의 상의도 벗겨져 나갔다. 배꼽 부분부터 도윤범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길 반복하며 위쪽으로 올라왔다. 복부, 가슴 목을 지나 뺨에도 부드럽게 내려앉았다가 떨어졌다. 심술을 부리는 듯한 목소리와 달리 소중한 걸 대하는 듯 다정한 행동이었다.
“농담이에요. 오늘도 내일도, 매일매일 평생 못 잊을 날로 만들어 줄게요, 형. 우리 처음도, 두 번째, 세 번째… 매일 특별하게 사랑해 줄게요.”
…뭐 이렇게 심장 아픈 소리를 태연하게 할까. 조도가 낮은 조명 탓인지 가까이 마주한 도윤범의 눈빛이 더욱 깊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건 알아챌 수 있었다.
“근데 그거랑 섹스랑 무슨 상관인데…?”
도윤범 스스로 하는 다짐 같은 말을 조금 장난스럽게 받아줬다. 남도하는 아직 저런 소리를 스스럼없이 할 정도의 용기가 부족했다.
“내일부터는 우리 정말 바쁘거든요.”
“바뻐…? 왜? 아, 윤범아… 잠깐만!”
도윤범은 남도하의 바지 버클을 다급히 풀며 말을 이었다.
“우리 도하 형 스케줄이 엄청 밀려 있어요. 형이 좋아하는 방송 일 당장 시작해야 해서 앞으로 이럴 시간도 부족하다고요.”
투정 같은 말을 하며 남도하의 옷이 벗겼다. 여전히 그 무식한 힘은 어디로 간 게 아닌지, 어설픈 몸부림으로 그의 행동을 막아설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냥 체념했다.
“정말 방송 은퇴하고 싶어질 정도로 바빠질 거예요.”
오랜만에 맞닿는 살결에 정신이 산만해졌다. 부드러운 도윤범의 몸과 겹쳐지자 빠르게 신체의 변화가 생겨갔다. 그런데 그가 하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뭔가… 불안하다.
“기대해도 좋아요.”
과한 확인 같다고 할까. 항상 의욕이 넘치는 도윤범이었기에 기대 이상의 문제가 발생할 것도 같다. 하지만 하나 확신할 수는 있었다. 적어도 도윤범이라면, 남도하 제게 해가 갈 일을 하지는 않을 거라는 거다. 여전히 완전한 확신을 가질 수는 없지만, 그런 믿음이 드는 아이다.
남도하 제가 그 어떤 구렁텅이에 내던져진다 하더라도, 손을 내밀어 줄 거다.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진탕을 굴러야 한다면 기꺼이 함께 그 진탕에 몸을 던질 아이다.
도윤범을 마주하고서야 옳은 선택을 했다는 생각이 커졌다. 아직은 어설픈 놈은 앞으로도 틀림없이 잦은 실수를 할 것이다. 하루아침에 절대 고쳐지지 않을 거란 건 안다. 하지만 도윤범은 두 번 실수하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지켜본 그는 그랬다. 그래서 이번에도 기회를 줄 수 있었다.
“그래. 기대할게, 윤범아.”
진심으로 기대된다. 순탄하지만은 않을 도윤범과의 시간이. 조금은 힘들고 또 싸우는 날도 있겠지만, 결국 이 선택이 옳을 거라는 확신이 커진다. 틀림없이 옳다.
서로의 입술이 뜨겁게 닿았다. 마음이 닿았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