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모든 이야기가 해피 엔딩은 아니다 side : B=)
“본부장님, 퇴근 안 하세요?”
“해야죠. 먼저 들어가세요.”
이 거지 같은 회사를 그만둘까, 말까. 수백 번은 몰려왔던 충동이 다시 들끓었다. 남도하가 내게 남긴 말이 아니었다면, 진작 그만뒀을 거다. ‘제대로 살고 있어.’ 내가 마지막 희망을 기대할 수 있게 하는 말이었다. 내가 ‘제대로’ 살고 있으면, 그가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일말의 기대를 품어 볼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그래서 처음엔 의지를 다잡았다. 회사로 돌아와 자릴 비운 사이 쌓인 일도 빠르게 처리했고, 남도하를 위한 자리를 더 견고하게 만들었다. 정작 주인공이 없었지만, 그를 위해 무언가를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기꺼웠다.
솔직히 말해 섬으로 그를 찾아 들어갈 때까지만 하더라도 남도하가 화를 풀 거라는 기대도 할 수 없었다. 물론 그 과정이 수월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희망을 품어도 될 정도로 사이가 말랑해졌었다. 그대로라면 함께 섬에 평생 머물러도 좋을 정도였다. 어차피 내 곁에 남도하만 있다면, 거기가 어디든 아무 상관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 남도하의 태도가 돌변했다.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하루가 다르게 마음을 풀어가는 것 같던 그는 내게 축객령을 내렸다. 이해할 수 없는 변화였지만,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을 건네는 남도하의 표정에 담긴 감정을 얼추 알아챌 수 있었으니까. 마치 마지막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별을 말하던 그의 얼굴은 꼭 누구에게 한대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말을 하는 제가 더 힘들고 아파 보였다. 그래서 당장은 잠시 자리를 비켜 줘야 했다.
떠나기 전 마지막 보호 장치로 남긴 위치 추적기마저 들통 난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하루하루 피가 마른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충동이 몰려든다. 당장 남도하를 찾으러 가고 싶은 마음을 눌러 내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 * *
“…뭐야, 이게.”
늦은 퇴근을 하고 집에 오니 현관문에 이상한 게 걸려 있었다. 다소 커다란 종이 쇼핑백이었다. 피곤함에 안쪽을 확인하지도 않고 쇼핑백을 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식탁에 내용물을 하나하나 꺼내 놓자 가관이었다. 어디 식당에서 한정식 세트를 그대로 포장해 온 것인지 온갖 음식이 튀어나왔다. 포장 용기 중 하나에 쪽지가 붙어 있었다.
“밥은 잘 챙겨 먹어야죠, 점심부터 계속 굶으면 어떻게 해요…?”
…이게 뭐야. 요즘 꽤 멍하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주변의 모든 위협을 해결했다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휴대폰을 꺼냈다.
“아저씨, 접니다.”
- 네, 도련… 아니 본부장님. 무슨 일인가요…?
“양우준이랑 그 새끼 애인은 잘 있나요.”
- 집에 처박혀서 꼼짝도 안 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확인했습니다.
“…그래요. 잘 감시해 주세요.”
제일 의심스럽던 놈들은 아닌 거 같다. 외국으로 보내 버렸으니 쉽사리 돌아오지는 못할 거다. 그렇다면….
“요즘 한가하신가 봐요.”
- 대뜸 무슨 개소리야.
“잠깐 만나죠.”
- 나 바빠. 네가 여기로 와.
서주언은 건방지기 짝이 없는 투로 전화를 받았다. 양우준 쪽이 아니라면, 어쩌면 서주언일 수도 있겠다. 남도하가 사라진 사이 그는 내게 꽤 많은 짜증을 부렸었다. 대내외적으로는 남도하가 차기작을 구상하며 휴식을 취하는 중이라고 발표했는데, 서주언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옷도 채 갈아입지 못하고 그대로 다시 서주언에게 향했다. 무슨 돈독이 오른 건지 쉬지도 않고 일을 하는 그는 광고 촬영 중이었다. 내 얼굴을 본 서주언이 잠시 쉬어가자 말하며 다가왔다. 바쁘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지 서주언의 얼굴도 꽤 지쳐 보였다.
“뭔데.”
“사람 붙였죠, 나한테.”
“무슨 개소리야. 내가 너한테 왜?”
“남도하 사라진 거 때문에 빡쳐서 그런 거 아니에요?”
한참 나를 직시하던 서주언의 입에서 꽤 커다란 웃음이 터졌다.
“괘씸하기는 해. 내가 고작 그딴 꼴이나 보려고 했던 게 아니긴 했지. 너희 마지막 결말이 썩 마음에 안 들기는 한데, 그거로 너한테 사람 붙일 필요가 있을까?”
“그래도….”
“그리고, 잊지 마. 난 나름 너희 두 사람 사이 응원해 주던 조력자였다는 걸.”
“…….”
“도하가 너 버려서 빡치는 건 알겠는데, 난 남도하 없는 도윤범한테는 아무런 관심도 없으니까 헛소리하지 마.”
작은 거짓말의 흔적이라도 찾아보려 했지만, 그의 얼굴엔 비웃음과 조롱만 담겨 있을 뿐, 거짓의 기색은 읽히지 않았다.
“하아….”
“또 이상한 새끼 붙었나 보지? 그러게. 못된 짓을 좀 작작했어야지.”
남도하와의 미래를 생각하며 구한 집이었다. 그런 집이 또다시 누군지도 모를 괴한에게 노출되었다. 고작 도시락 하나였지만, 충분히 찝찝할 물건이다.
“곧 연말 시상식인데. 도하가 그때까지 돌아오려나 모르겠네…?”
“…신경 끄시죠.”
괜한 의심을 접고 돌아서려 할 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메시지를 열어 보니 사진이 한 장 떠올랐다.
“…하.”
기가 막혔다. 지금, 나와 서주언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멀리서 찍은 사진이었다.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스튜디오엔 수많은 직원이 오가고 있었지만, 모두가 낯선 사람이었다. 각자 자기 일에 분주한 모습에서 수상한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뭔데?”
“이거요.”
사진을 본 서주언도 인상이 찌푸려졌다. 내 기분도 마찬가지이고. 확실하다. 또다시 미친놈이 달라붙었다.
* * *
[한식 안 좋아하는 거 같아서 양식으로 사 왔어요. 먹고 자는 게 좋을 거예요.]
서주언을 만나고 돌아오자 식탁 위에 다른 음식이 올려져 있었다. 먹기 좋게 잘린 스테이크와 스프, 샐러드와 매쉬포테이토가 놓였는데, 아직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것으로 봐 오래지 않아 다녀간 것 같았다.
“이 미친 새끼가….”
집 안까지 들어왔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었다. 나와 남도하를 위해 준비한 집에, 감히 제멋대로 침범하다니. 음식을 그대로 쓰레기통에 처박으려 할 때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먹으라고요. 그거 버리면 후회할 거예요.]
화가 조금 더 커지며,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집 안에 나를 감시하는 무언가가 있다. 내가 여러 번 설치해 봤으니 잘 안다. 카메라나 마이크가 있을 법한 곳들을 하나하나 뒤졌다. 놀랍게도, 열 개의 카메라와 다섯 개의 마이크가 발견됐다. 언제부터 이런 게 설치되어 있었을까…? 그리고 대체… 누가…?
집 보안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했다. 현관문 비밀번호는 12자리로 바꿔 나조차 외우기 힘들게 했고, 지문은 나와 남도하의 것만 남겨 두었다. 집 안에도 역으로 감시 카메라를 설치했다. 누군가 들어서는 순간 얼굴이 모두 찍힐 수 있도록. 상대를 잘못 골랐다. 이런 쪽이라면 나도 꽤 전문가다.
* * *
“본부장님….”
“왜요, 아저씨.”
잠을 잘 자지 못해 피곤한 몸으로 출근길에 나섰다.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는 남도하도 그렇고 최근 등장한 괴한까지 신경을 자극해 잠자리가 불편하다. 차에서 잠깐 눈을 감고 피로를 풀려 하니 운전을 맡아 준 아저씨가 말을 걸어왔다.
“아무래도 미행이 붙은 거 같은데….”
“미행요? 설마요.”
“저도 설마설마했는데… 사실 며칠 전부터 똑같은 차가 계속 뒤에 따라오는 거 같아서요….”
확신 없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최근 있었던 일을 떠올리니 어쩌면 저 말이 사실일 수도 있을 거 같았다.
“저 뒤에 하얀 차요?”
“네, 저거요.”
“잡아요, 저 차.”
내 말을 귀신같이 알아들은 아저씨는 우회전을 하자마자 정차된 차 사이에 섞여들었다.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우리를 쫓던 하얀 차가 앞으로 나가는 순간, 그 뒤를 쫓기 시작했다. 오해는 아니었는지 흰색 승용차는 제 정체가 발각됐다는 걸 깨닫고 갑자기 질주하기 시작했다. 확신한다, 저놈이다. 내게 이상한 도시락을 보내고 집에 무단으로 침입한 놈.
“저거… 보통 놈이 아닌 거 같은데요…?”
아저씨의 운전 실력이야 나도 익히 알고 있다. 그런데도 놈은 그보다 앞섰다. 따라잡았다 싶으면 여유롭게 차선을 바꿔 가며 거리를 벌리고, 또 따라붙나 싶으면 저 멀리 달아나 버리곤 했다. 명백히 놀리는 듯한 행동에 화가 치밀었다. ‘끼이익!’ 신호에 걸린 차가 급정거했다.
“괜찮으세요?”
“하아… 네.”
“죄송합니다… 저거 너무 빠르네요….”
신호를 피한 놈은 유유히 교차로를 지나 사라졌다. 저 멀리 사라지는 차 꽁무니를 보며 어쩔 수 없이 방향을 회사로 바꿔야 했다. 아침부터 시작한 추격전에 다소 늦게 출근했다. 이젠 정말 이 일마저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치솟는다. 남도하를 찾으러 가도 부족할 시간에 이따위 일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거기에 웬 미친놈까지 등장해 정신을 사납게 한다.
“본부장님, 퀵 왔는데요. 책상에 뒀습니다.”
“네.”
내 기분 탓인지 뭔가 기분 나쁜 미소를 짓는 것처럼 보이는 직원을 지나쳐 사무실에 들어오니 책상 위에 작은 상자가 하나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꽃다발 하나까지.
[다음부터는 아침에 운동을 해요. 아무리 거칠게 운전해 봤자 건강에는 아무런 도움도 안 되니까.]
…이거, 완전 미친 새끼 아니야…?
솔직히 금방 잡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아니면 잠깐 이러다 말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놈은 집요했다. 내가 어디를 가든 지켜보고 있었고, 무엇을 하든 알고 있었다. 심지어 집 안에도 몇 번 들어온 흔적이 있었다. 가끔 퇴근하고 돌아오면 식지 않은 음식이 차려져 있었고, 또 어느 땐 회사로 점심 식사와 꽃다발 따위를 보냈다. 아무리 집 보안을 바꾸고 추가해도 감시망에 걸려드는 건 전무했다. 그리고 휴대폰으로 나를 찍은 사진이 매일같이 들어오고 있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마치 투명 인간처럼 말이다.
“한 잔 더 주세요.”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는 기분이다. 이젠 더는 남도하를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다는 불안에 이상한 놈까지 끼얹어지자 맨정신을 유지하는 게 더 힘들었다. 차라리 술의 기운이라도 빌리는 쪽이 편했다. 그렇다고 남도하를 향한 마음이 옅어지는 일은 없었지만. 목구멍으로 아무리 뜨거운 양주를 넘겨도 갈증이 풀어지지 않는다. 고작 한 달도 안 되는 시간을 떨어져 있었지만, 남도하를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이 내 사고를 좀먹어 가는 것만 같다.
모든 게 내 탓이라는 걸 알고 있다. 어떻게든 그를 곁에만 두면 그만이라는 생각 자체가 틀렸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나는 온전한 남도하를, 나를 위해 미소 지어 주는 남도하를 원한다. 그리고 그 기회를 날려 버린 것 역시 누구도 아닌 나라서, 자책만 쌓여 갈 뿐이다.
이건, 남도하가 내게 내리는 벌이다. 저의 감정을 무시하고 멋대로 군 대가를 이렇게 치르게 하는 것이다. 그가 내게 돌아오기만 한다면, 이보다 더 힘든 일도 버텨 낼 수 있다. …돌아오기만 한다면. 하지만 하루하루 희망이 옅어지고 있었다.
“대리 좀 불러 주세요.”
양주 한 병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장이라도 정신이 끊어질 것 같은 감각에 걸음을 내딛기도 힘들었다. 차라리 다행이다. 뇌가 멎은 것처럼 아무런 생각도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 쪽이 더 편하다. 흐려지는 남도하의 얼굴이 아쉽지만, 적어도 그 기억 때문에 아프지는 않으니까.
“청담동 리온으로 가죠.”
차에 올라타 눈을 감았다. 부드럽게 주행하는 차 안에 머리를 대자 빠르게 졸음이 몰려왔다. 술이라도 이리 마셔야 제대로 잠이 들 수 있다. 잠이 들락 말락 하는 와중에 귓가로 대리 기사의 목소리가 얼핏 들려왔지만, 수마에 빠져드는 게 더 빨랐다. …뭔가 익숙한 듯한 음성이었는데….
* * *
눈을 떴는데도 흐릿한 시야와 정신이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조도가 낮은 노란 조명마저 망막을 찢는 것처럼 따갑게 느껴져 몇 번이나 눈을 깜빡여야 했다.
“깼어?”
익숙하고, 또 섬뜩한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일어서려는 내 의사와 달리 침대에 누운 자세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읍…!”
변함없는 모습의 내 방 침대 위였지만, 두 다리와 팔이 무언가로 결박돼 꼼짝할 수 없었다. 입도 막혀 제대로 된 목소리가 나오지 못한 채 답답하게 눌린 소리만 나왔다. 목을 들어 목소리의 방향으로 눈알을 굴려 보니 침대 끄트머리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그러게, 왜 보내 준 음식을 하나도 안 먹어. 속상하게.”
그는 내가 지금 이 꼴이 된 이유를 설명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저 이상한 목소리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인위적으로 변조된 음성이, 소름 끼칠 정도로 익숙했다. 까만 후드를 뒤집어쓰고 등을 보이던 남자가 느리게 몸을 돌렸다. 얼추 예상한 것처럼, 그의 얼굴엔 미소를 짓고 있는 흰색 토끼 가면이 쓰여 있었다.
“으읍…!”
순간 위기감이 들이닥쳤다. 며칠째 내 주변을 맴돌던 놈이 기어이 이런 일까지 저질렀다. 지금 처한 상황만 놓고 보았을 때, 놈은 절대 긍정적인 쪽의 감정은 아닐 거 같다. 이렇게 손발을 묶고, 입까지 막아 버린 걸 보면. 미친 듯 앞으로 묶인 손을 흔들어 보았지만, 두 다리에 줄이 연결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내가 꽃도 얼마나 신경 써서 골랐는데, 그걸 그냥 다 버리길래 얼마나 속상했는지 몰라. 아님 너무 싸구려라 마음에 안 들었나.”
누굴까. 하도 벌여 놓은 일이 많아 특정하기가 어렵다. 양우준이 정말 돌아온 걸 수도, 서주언이나 강태운이 일을 벌인 걸 수도 있다. 내가 쓰던 토끼 가면의 정체까지 알고 있을 정도라면, 그 정도로 용의자를 추릴 수 있을 거 같다. …아니면 정말 예상도 못 한 제3의 인물일 수도 있고.
“당황하면 그런 표정도 짓네.”
남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내 머리 쪽으로 다가왔다. 체격은… 안타깝게도 크다. 옷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보다 훨씬 커 보인다.
“걱정하지 마. 해칠 생각은 없으니까.”
장갑을 낀 남자의 손이 내 모가지를 훑었다. 해칠 생각이 없다는 말과는 참 상이한 행동이었다. 그의 말처럼 위협적이지는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이리 무력하게 급소를 내주는 게 썩 기꺼울 수는 없었다.
“입 풀어 줄까?”
상대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이나 다리를 풀어 주지 않더라도, 대화를 통해 놈이 원하는 걸 알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 입을 꽉 막고 있던 테이프가 떨어져 나갔다.
“소리는 맘껏 질러도 돼. 방음이 너무 잘돼 있어서 아무도 못 들을 테니까.”
“…누구야, 너.”
처음부터 그럴 계획은 없었다. 내가 준비한 집이라 더 잘 알고 있다. 아무리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도 누구도 듣지 못할 거다.
“누구인지 가늠도 안 되나 봐? 대체 얼마나 여기저기 척을 지고 다닌 거야.”
흰 토끼 가면이 이렇게 역겨운 거였나. 내가 쓸 때만 하더라도 아무렇지 않던 가면을 직접 마주 보려니 웃는 표정마저 하나도 귀여워 보이질 않았다. 오히려 변조된 목소리와 더해지니 기괴하게까지 느껴졌다.
“원하는 게 뭔데.”
입 하나 트인 것만으로 마음의 동요가 옅어졌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놈은 정말 나를 해칠 마음이 없는 거 같다. 그러려 했다면 정신이 들기 전에 죽였을 테니까. 물론 대화 후에 그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지만, 적어도 대화를 할 의사는 있다는 게 희망적이다.
“일주일 동안 어땠어? 네가 하던 것처럼 똑같이 당하던 기분.”
음식을 보내고 선물을 보냈다. 또 내가 어딘가로 이동할 때마다 따라붙기 일쑤였다. 어떨 땐 나를 지켜보는 사진을 보내기도 했다. 언제나 내 곁에 놈이 머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대체…!”
“설마 짜증 내는 건 아니겠지. 넌 몇 달, 몇 년이나 그렇게 남도하 곁에 있었잖아.”
“…뭐?”
상대는 매우 태연했다. 마치 내가 화를 내리라는 것까지 예상한 것 같다. 길었던 내 외사랑에 대해서까지 아는 사람이라는 부분에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가 내 두 눈을 한 손으로 가렸다. 부드러운 장갑을 눈가에서 털어 내려 반항해 봤지만, 고갯짓만으로 가능할 리 없었다.
“뭐 하는 거야!”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입술에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다. 마치, 입술과 같이 말캉거리고 뜨거운 살덩어리가 내게 닿았다.
“읍…!”
이를 악물어 다문 입술 틈으로 혓바닥이 억지로 밀고 들어오려 했다. 쉽지 않다 생각한 것인지 상대는 다문 내 입을 통째로 삼키려는 듯 입을 맞췄다. 아무리 입을 다물어도 내게 닿는 촉감까지 완전히 막을 수 없었다.
“이건 또 어때?”
“너…!”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남자는 다물어진 내 입술을 가볍게 핥으며 떨어져 나갔다. 축축하게 타액이 묻은 내 입술을 한번 짓씹으며 짜증 섞인 항의를 했다. 하지만 더 적극적인 항의를 할 수는 없었다. 순간, 이해하기 어려운 기분이 몰려든 탓이다. 그 감각을 깨닫기도 전, 심장이 먼저 터질 것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에 반해 남자는 태연했다. 목소리도 그러했고, 또 묶인 내 손을 풀어 주는 동작도 그랬다. 우악스럽게 묶여 있는 줄 알았던 손목은 간단한 동작에 쉽사리 풀어질 정도로 허술하게 엮여 있었다. 내가 만약 당황하지 않았더라면, 조금의 시간만 들여서도 충분히 풀 수 있을 정도로.
두 손은 이미 자유를 찾았지만, 나는 내가 누운 침대 곁에 엉덩이를 대고 앉은 남자를 바로 공격할 수 없었다. 주먹만 한번 내질러도 상대를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음에도.
“내가 네 옆에 숨어 있을 때 솔직히 싫었지? 뭐가 들었는지도 모를 음식도 그렇고, 무슨 의도로 주위를 맴도는지도 알 수 없으니 불안했을 테고.”
…싫었다, 매우. 내가 원한 적 없는 타인의 친절이 반갑지 않았다. 위해를 가한 건 아니었음에도 달가워할 수 없었다. 예전에 내게 비슷한 짓을 했던 양우준이 있었다. 그는 그저 남도하의 질투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수단이었으니 썩 싫지는 않았다. 범인도 금방 알아챌 수 있었고, 선물이 올 때마다 나에게 투정을 부리는 남도하의 모습을 보는 건 묘미와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매일같이 작은 스트레스가 쌓여 가고 있던 참이다.
“…네… 싫었어요.”
“아무리 좋은 의도라고 하더라도 모든 행동이 용서되는 건 아니야.”
마치 훈계를 듣는 기분이라고 할까. 내 존댓말이 튀어나온 것도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그사이 멍하니 누워 있던 내 두 다리마저 자유를 찾았다. 그는 대체 무슨 의도로 나를 묶어 두었던 것인지 모를 정도로 너무나도 쉽게 결박을 없애 주었다.
“또 뭐든 협박이나 힘으로 해결하는 것도 안 좋은 짓이고.”
“네….”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자연스럽게 그와의 거리가 좁혀들었다. 팔 하나 정도의 거리였지만, 나는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가면을 쓰고 나를 직시하는 그를 가만히 바라다봤다. 가슴팍을 찢을 것처럼 방망이질하던 심장이 이젠 저릿해졌다. 누군가 가슴에 손을 넣어 심장을 터트리려는 듯 움켜쥔 양 통증이 밀려들었다.
이미, 그의 가면은 무용지물이었다.
“뭐야. 벌써 들켰나 보네.”
아랫입술을 잔뜩 짓씹었다. 살이 터져나가라 물고서 가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마지막 기계음을 끝으로, 그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갑을 벗고, 재킷의 후드를 걷었다. 그러고서 가면의 아랫부분을 잡아 들어 올렸다.
“더 혼내 주고 싶었는데.”
“…형….”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런 상황이 그리 두렵지 않았던 것도, 입맞춤이 심히 불쾌하지 않았던 것도, 그 상대가 모두 남도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아무리 얼굴을 가린다고 하더라도 본질이 달라지지 않으니까.
“왜 형이 준 걸 다 버려.”
답을 할 수 없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그가 진짜 남도하인지 확인해야 했다. 그의 허리를 감싸 당겨 안았다. 그러자 그의 손은 기다렸다는 듯 내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랐지.”
어느새 터져 버린 눈물에 숨이 막힌다. 숨을 삼킬 때마다 섞여드는 남도하의 향이 멎어 버릴 것 같던 심장을 다시 뛰게 한다. 오늘이라도 죽어 버리는 게 낫겠다 싶던 나약한 내게 또 하루를 연명해 준다. 희망이라고는 하나 없던 삶의 다음을 기약하게 한다.
그의 등을 힘껏 당겨 안았다. 나의 전부가 돌아왔다.
* * *
“이제 화 다 풀어진 거죠…?”
한참 만에야 눈물이 멎었다. 나도 내가 그리 눈물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남도하 덕분에 알았다. 그를 잃는다는 생각을 하면, 그가 내게 영영 등을 돌린다 떠올리면 심장이 저릿해지며 눈가가 시큰해진다. 홀로 있을 때면 눈물조차 흐르지 않을 정도로 절망적인 나날이었다. 그러던 내게, 꿈같은 온기가 닿아 있다.
남도하가 지금 나란히 앉아 내 어깨를 감싸 안아 주는 이 상황은 여전히 비현실적이다. 침대 헤드에 서로의 등을 기대고, 그가 내 한쪽 어깨를 감싸 제 쪽으로 당겨 안았다. 난 몸을 살짝 돌려 한쪽 팔로 남도하의 허리춤을 끌어안았다.
“윤범아.”
“…네.”
남도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않은 채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난 아직도 네가 날 사랑한다는 말을 못 믿겠어.”
지나치게 평온한 투로 이야기하는 목소리와 달리,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내 심장을 갈가리 찢었다. 마음 같아서는 가슴을 갈라 남도하를 향해 뛰는 심장을 보여 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건…!”
“그래. 다를 수 있지. 어떻게 좋아하는 감정을 표출하는 방법이 모두 같을 수 있겠어.”
막 반론을 하기도 전에 남도하가 말을 이었다. 그의 차분한 목소리를 보니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입을 다물고 그를 조금 더 힘주어 안고 말았다. 화답하듯 남도하도 내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다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야. 사랑이라는 이름만 붙여서 무슨 짓이든 해도 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나는 네가 사랑이라고 하는 네 감정을 솔직히 이해 못 해.”
듣고 싶지 않았던 쪽의 이야기다.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는 남도하의 목소리를 듣자면, 그는 홀로 무언가 답을 내린 것 같다.
“근데, 그건 이제 아무 상관 없을 거 같아.”
남도하는 쥐고 있던 어깨를 풀어 주며 나를 바라봤다. 자세를 바르게 해 나도 그를 보고 앉았다. 아랫입술을 힘주어 물자 입안에 연한 피 맛이 느껴졌다. 그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이 듣고 싶지 않다. 이건 마치 나에게 마지막을 고하는 것 같지 않나…. 고개가 절로 떨궈졌다. 하지만 채 그의 시선을 피하기도 전, 고개가 다시 들렸다. 남도하가 한쪽 손으로 내 뺨을 감싸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엄지는 내 입술께를 쓸며 짓씹은 입술을 풀게 만들었다.
“윤범아.”
“…….”
그럴 리 없는데, 남도하가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는 것처럼도 보였다. 슬퍼 보이기도 하고, 또 동정심을 담은 것도 같고, 또… 얼핏 애정이 깃든 것 같은 착각이 드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좋아해.”
그의 입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나왔다.
“내가, 윤범이를 좋아해서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을 거 같아.”
나의 수많은 밤. 잠자리에 누워 수없이 그렸던 꿈이 있다. 남도하가 내게 사랑한다 말하는 날. 망상처럼 말도 안 되던 때도 있었고, 또 어떨 땐 곧 가능할 것처럼 느껴지는 날도 있었다. 최근엔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사치처럼 느껴져 그저 남도하가 돌아오기만을 기원해야 했다. 내게 화를 내고 욕하고 때려도 좋으니, 그저 내 곁에서 사라지지 않기만을 바라야 할 정도로 내가 우리의 관계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런 내게, 남도하가 고백을 했다.
“형… 저, 저는…!”
뺨을 감싸고 있던 그의 커다란 손이 스멀스멀 뒷덜미로 옮겨 갔다. 그러곤 순간이었다. 우리의 간격이 사라져 버리는 건. 부딪치듯 남도하와 내 입술이 포개졌다. 아까와는 다르게 순종적으로 벌어진 내 입으로 남도하의 혀가 파고들었다. 다가오던 것과는 달리 부드러운 행동이었다. 혓바닥으로 걸레짝처럼 헤진 입술 안쪽을 훑고, 제 입술로 내 아랫입술을 감싸 부드럽게 빨았다.
피까지 내비치던 입술에서는 통증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남도하가 전한 말과 지금 행하는 행동이 그 정도로 내 정신을 쏙 뽑아 버렸다. 그는 마치 상처를 치료하는 것처럼, 제가 한 고백이 사실이라 증명하듯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혓바닥은 다독이듯 입안 점막과 내 혀를 간지럽혔고, 뒷덜미와 등을 강하게 조이며 안정감을 주었다.
“네 대답은 필요 없어. 이번엔 나도 이기적으로 굴 거야.”
한참 만에 남도하가 떨어져 나갔다. 앞에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도 잊을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여전히 내 입안엔 남도하의 향이 잔뜩 달라붙어 버렸다. 그가 가면을 쓰고 찾아왔을 때, 입맞춤으로 그의 정체를 조금 더 확신할 수 있었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지만, 정신이 아득해지게 하는 남도하의 향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도 그 향이 달라붙은 것처럼 달게만 느껴져 그냥 고개를 주억이고 말았다. 무슨 말을 하든, 남도하의 말이 옳다.
“다시는 절대 거짓말하지 마.”
남도하의 손끝이 얼굴을 간지럽힌다. 그렇기에 내 답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감시도 안 되고, 나 모르게 무슨 일도 하면 안 돼. 아무리 나를 위해서라고 해도, 절대.”
그 어떤 조건을 내건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지킬 거다. 그게 남도하가 내 곁에 머무는 조건이라면, 지켜야만 한다. 나의 옆에서 그가 웃음 짓는 걸 볼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거면 돼요?”
남도하가 말하고 있다. 내게 내렸던 벌을 이제 거두겠다고. 고작 저 가벼운 조건으로 자신을 기만한 나를 용서하겠다고. 어쩌면, 남도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인한 사람인 것 같다. 나의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 나를 지탱해 줄 버팀목이 되어 줄 사람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내 울타리에 가두어 그를 지킬 수 없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냥 내가 그의 울타리에 들어가면 그만이다. 어떤 형태라도 난 남도하의 곁에 설 수만 있다면 상관없으니까.
“우선은.”
“그럴게요, 형.”
“뭐, 뭐 하는 거야…!”
남도하의 허리를 감싸며 침대에 그를 눕혔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모습도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그런 단어가 절대 어울릴 수 없는 남자임에도, 그가 내게 전한 마음이 어여쁘기만 해 그리 보였다.
“미안하다는 말은 나중에 할게요. 고맙다는 말도, 보고 싶었다는 말도요.”
조금 전까지의 패기는 어디로 간 것인지 작게 당황하는 그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사랑해요, 형.”
아직 그는 내 말을 믿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걸 증명하고 말 거다. 남도하를 향하는 나의 감정이 사랑이라는 걸. 적어도, 그는 내게 기회를 주겠다 하고 있다. 아무런 협박과 거짓, 기만도 없이 얻어낸 성과다.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을 거다. 한평생이 걸린다 해도 상관없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나의 편일 테니까.
“절대 후회하지 않게 할게요. 평생, 제가 그렇게 해 줄게요.”
“갑자기 무, 무슨 소리야? 평생…?”
당황으로 벌어진 입에 입술을 포갰다. 잠시 멈춰 있던 그는 내 목덜미를 당겨 안는 것으로 입맞춤을 허락했다. 고개를 틀어 가며 입술 틈을 더욱 세밀하게 맞추어 나갔다. 그러자 우리의 사이는 더없이 가까워졌다. 육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그 어느 때보다 가까워졌다.
남도하가 나를 택한 선택에 아무런 후회도 남지 않아야 한다. 훗날 이 날을 되돌아볼 때 인생에서 제일 잘한 선택이라 생각하게끔 만들어 줄 거다. 가장 높은 자리에서 더없이 평온한 삶을 살아가게 할 거다. 물론, 그 옆엔 내가 서 있을 거다. 이번엔 남도하도 허락하지 않았나. 이제부터는 모든 게 합법이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해피 엔딩일 수는 없다. 시련과 좌절, 불행을 거치고서도 결국 새드 엔딩으로 끝을 맞이하는 이야기도 허다하다. 하지만 나는 확신한다. 우리의 이야기는 이제 막 발단을 넘었을 뿐이고, 긴 이야기 끝에도 해피 엔딩이 기다릴 거다. 내가… 아니, 우리가 그렇게 만들 거다.
더없이 포근한 온기가 내 몸을 감싸 온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