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모든 이야기가 해피 엔딩은 아니다=)
남도하의 어린 시절은 불행했다. 아니, 비단 어린 시절뿐만 아니라 인생 대부분의 시간이 그랬다. 가난과 불행은 마치 피와 살을 나눈 가족처럼 기억의 시작부터 등에 매달려 함께하고 있었다. 지겹도록 달라붙는 그것들은 아무리 몸부림쳐도 떨어질 기미가 없었다.
쉼 없이 일을 해도 돈은 항상 부족하기만 했고, 어린 남도하는 지쳐 갔다. 몸보다도 마음이 먼저 무너졌다. 스물. 뒤늦은 사춘기가 찾아온 것처럼, 방황을 했다. 아픈 동생도, 망나니 같은 형도, 제대로 된 벌이도 되지 않았으나 유일한 생계나 다름없던 직업마저 벗어 던졌다. 차곡차곡 모아 놓았던 돈이 든 카드만 동생의 손에 쥐여 주고 집을 나왔다. 그러고서 고작 도망간 곳이 군대였다.
남들은 인생을 버렸다 생각하기도 하고, 가기 싫어 온갖 수단을 동원해 빼려 하는 그 군대가 남도하에게는 가장 안온한 장소였다. 부대를 감싼 높다란 철책은, 남도하에게 달라붙은 가난과 불행이 쫓아오는 걸 막아 줬다. 바깥에 있을 때보다 더욱 편안하고, 따뜻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평생 그곳에서 세상과 격리된 채 살아가고 싶을 정도였다. 그 2년여의 시간이 남도하가 겪은 유일한 휴가였다.
“으… 추워.”
그리고 지금, 남도하는 다시 휴가를 왔다. 이번엔 그때와는 상황이 명백히 달랐지만, 마음이 무너진 것은 같았다. 지긋지긋하던 가난과 불행은 어느새 남도하의 어깨에서 사라져 있었다. 그런데도 연하디연한 마음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단 한 명이 그리 만들었다.
“…새, 새가 까까 훔쳐 가는데….”
한참 바닷가에 앉아 저무는 해를 바라보고 있을 때, 오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귓가를 채우는 여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딱 목소리처럼 귀여운 모습을 한 아기가 남도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네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누가 옷을 입혀 준 것인지 두꺼운 기모 바지는 안 그래도 짧은 다리를 더 짤막하게 보이게 했고, 그보다 더욱 두터운 점퍼와 모자까지 쓴 모습은 흡사 눈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옷이 너무 두꺼워 두 팔이 몸통에 닿지도 않을 정도로 완전 무장을 해 동그란 얼굴만 모자 바깥으로 빼꼼 나와 있었다.
“먹을래?”
얼굴은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시뻘겋게 달아올라 겨울의 추위를 저 홀로 겪고 있는 것만 같았다. 코끝에 떨어질락 말락 한 말간 콧물을 소맷자락으로 훔쳐 주며 묻자 아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바닷새에게 주려고 가져온 과자기는 했지만, 짧은 다리로 남도하 제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장난감 같은 손가락으로 새우 과자를 집어먹는 어린아이를 보니 이쪽도 괜찮겠다 싶었다.
“너 늦게 들어가면 아빠한테 혼날 텐데.”
“아빠 배 타고 나가서 내일 아침에 온다고 했는데…?”
“…그래?”
작은 섬마을이었다. 가구가 채 열 집이 되지 않았다. 관광지도 아니었고, 다른 섬에서 배를 한 번 갈아타고서야 올 수 있는 외딴 섬이었다.
“으응! 아빠가 맘마 먹고 코 자면 금방 온다고 했어.”
아이의 아빠는 남도하를 이 섬까지 태워 준 선장이었다. 그는 사람이 떠나 비어 있던 집까지 거의 헐값에 빌려주었다. 방황하다 흘러들어 간 다른 섬에서 사람 좋은 모습으로 제게 말을 걸던 선장의 얼굴이 떠오르자, 눈앞의 아이가 조금 더 안쓰럽게 느껴졌다. 누군가를 동정할 처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만, 혹 바람이라도 들어갈까 어린아이의 옷을 꼭 여며 주고서 배를 타야 했을 선장의 마음과 아빠가 나간 바다를 거니는 아이의 마음이 안타깝지 않을 수 없었다.
“천천히 먹어.”
“아아,”
“…뭐?”
조그만 손에 들린 과자가 남도하의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조금 전 닦아 준 맑은 콧물이 다시 스멀스멀 새어 나오고, 붉고 작은 입술께에는 과자 부스러기가 잔뜩 묻은 얼굴이 미소 지었다.
“빨리, 아!”
남도하는 못 이기는 척 입을 벌려 아이가 주는 과자를 받아먹어야 했다.
“맛이써?”
“응, 맛있다.”
마치 제 과자를 나누어 주는 것 같은 행태마저 귀엽게만 보였다. 배가 고팠던 것인지 작은 입은 쉼 없이 과자를 삼켜 냈다.
“우리 아빠가 저번에 이따만큼 큰 물고기도 잡아 왔었다?”
“그랬어? 엄청 컸나 보네.”
아이는 친구가 없는 것 같았다. 며칠 지켜본 이 섬에서 어린아이의 그림자를 본 기억이 없었다. 몇 없는 주민마저 대부분이 노인이었고, 아이의 아빠가 유일하게 젊은 축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의 입이 참 바빴다. 과자를 먹으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랴. 남도하는 그런 아이의 콧물을 연신 닦아 주며 바다 구경 대신 아이 구경을 해야 했다.
“형아… 쉬.”
“쉬 마려워?”
“으응.”
다 먹은 과자 봉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고, 아이를 안아 들었다. 조그만 놈이 보기보다 묵직했다.
“너희 집으로 가자.”
제대로 된 포장도로도 없었다. 동그란 자갈이 깔린 바닷가를 벗어나 탄탄하게 다져 놓은 흙길을 걸었다. 차 한 대만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고, 울퉁불퉁한 길이었다. 애초에 이 섬에 차가 단 한 대뿐이었다. 녹이 슬고 칠이 벗겨진 1톤 트럭이 이 섬의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당연히 아이의 아빠 것이다.
“하아… 문 열어 두고 나왔어?”
“으응…? 몰라…?”
마당을 가로질러 미닫이문 앞에 서니 두어 뼘가량 문이 열려 있었다. 신발을 벗어 두고 안쪽에 들어오자 바깥과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로 냉기가 감돌았다.
“어휴… 너무 춥다. 얼른 화장실 갔다 와.”
두꺼운 점퍼를 벗겨 주자 아이는 빠르게 화장실로 달려 들어갔다. 처음 들어와 보는 집이었지만, 다행히 보일러가 있었다. 온도를 조금 올리고 멍하니 서서 거실…로 추정되는 공간을 돌아봤다. 시골집이 다 그렇고 그렇겠지만, 아이의 집은 썩 훌륭하다 할 수는 없었다.
주방과 거실이 하나로 합쳐진 거실 벽은 아이가 크레파스로 그린 것이 틀림없는 낙서가 한가득했다. 바닥에도 커다란 스케치북과 크레파스가 뒹굴고 있었고, 주방 한쪽엔 고구마와 감자, 쌀이 잔뜩 쌓여 있었다.
“형아….”
울먹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아이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발목까지 바지가 내려가 있고, 두 손은 뭔지 모를 물에 젖어 있다. 그리고 밑의 바지도 축축하게 젖어 무슨 상황인지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괜찮아. 이리 와.”
남도하는 무릎을 대고 앉아 아이를 불렀다. 쪼르르르 달려온 놈은 남도하의 다독임에도 불구하고 굵은 눈물방울을 흘리며 꺽꺽거리는 울음을 터트렸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남도하에게는 그다지 당황스러운 장면이 아니었다. 그에게도 동생이 있었으니까.
“뚝. 괜찮아, 쉬야 하다가 그럴 수 있어. 혼자 쉬야도 할 줄 알고… 착하네.”
인제 보니 아이의 이름을 몰랐다. 빠르게 바지와 속옷을 벗겨 내며 기특하다 칭찬을 해 주니 쥐어짜던 눈물이 점차 잦아들었다.
“…끅, 착해…?”
“응, 착하다. 옷은 빨면 되는데, 뭘.”
“아빠, 아빠 오면 혼나는데….”
그럴 리가.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속상해 되레 큰 소리를 내는 것일 테다.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가리는 아이를 혼자 두고 떠날 아비의 마음이 그럴 것이다. 아이를 한번 가져 본 적 없지만, 아마 비슷한 마음이 아닐까 추측했다.
문득. 아이를 보자니 어떤 얼굴이 하나 떠올랐다. 다 큰 어른이고, 이렇게 화장실도 못 가리는 놈이 아닌데. 잊고 싶은 얼굴이었기에 남도하는 빠르게 생각을 털어냈다. 애써 여기까지 도망쳐 온 이유가 무엇인데.
“형이 도와줄까?”
“으응…?”
“아빠 오기 전에 빨래까지 해 놓으면 아빠 모르실 텐데. 뚝 그치면 형이 해 줄게.”
아이는 마치 연기였다는 듯, 남도하의 말 한마디에 눈물을 거두었다. 남도하는 어쩔 수 없이 웃음을 지어 보이며 아이를 안고 욕실로 들어갔다. 이 섬에서, 아니… 최근의 남도하에게 유일하게 웃음을 주는 존재는 이 아이뿐이었다.
“근데, 너 이름이 뭐야?”
* * *
“상연아.”
남도하의 부름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림을 그리던 아이가 밥상 앞으로 달려왔다. 이름이 상연이라고 한다. 어쩌다 보니 함께 저녁까지 먹게 되었다. 의도했다기보다도 혼자 밥을 먹을 아이가 안쓰러워 발걸음을 돌릴 수 없었다.
“어…? 형아는 안 먹어…?”
“난 아까 과자를 많이 먹어서 배불러.”
상연의 아빠는 제 아들을 위해 한 끼 식사를 차려 놓았다. 다 식은 밥과 국, 밑반찬 몇 개가 전부인 초라한 식단이 또 남도하의 발목을 부여잡았다. 국과 밥을 데우고 계란 프라이를 하나 해 주었다. 요리를 못 하기는 남도하도 매한가지라 더 맛있는 걸 만들어 줄 수도 없었다. 다행히 아이는 남도하가 차려 준 음식을 투정 없이 먹었다.
“골고루 먹어야지.”
남도하는 그 건너편에 앉아 아이가 밥을 한 숟갈 뜰 때마다 반찬을 하나씩 올려줬다. 입이 작아서 그런가. 부지런히 받아먹기는 하는데 식사가 상당히 오래 걸렸다. 설거지도 끝내고, 빨아 놓았던 옷도 건조대에 널어놓고. 어질러진 방도 대충 치우고, 초저녁부터 잠든 아이를 방에 눕혀 주고서야 집을 나왔다.
“하아… 진짜 섬이 춥긴 춥구나.”
새까만 어둠 사이에서도 퍼져 나가는 입김이 고스란히 보일 정도였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남도하가 머무는 집이 있었다. 선장님네 집 바로 아랫집이었다. 남도하는 집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마당을 넓게 차지한 평상에 등을 대고 누웠다.
“…더럽게 예쁘네….”
하늘 가득 새하얀 별이 점처럼 박혀 빛나고 있었다. 서울에선 한 번 올려다본 적 없던 하늘이었다. 그곳에서는 저런 별이 보일 리도 없었지만, 보고 있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모든 걸 등지고 도망쳐온 지금, 제게 닥친 일이 버거워 받아들이기 힘들어 외면을 택한 지금. 어떻게 보면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은 지금 같은 마음으로 보기엔 지나치게 예쁜 풍경이었다.
혼자 남은 밤이 되자 또다시 도윤범의 정체를 알아채던 순간이 떠올랐다. 도망쳐 와 꽤 괜찮아진 것도 같다가, 문득문득 이렇게 그 얼굴이 떠오를 때면 남도하의 마음에 부정적인 감정이 빠르게 퍼져 갔다. 그 감정의 정확한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배신감이었다.
‘형 저 좋아했잖아요. 거짓말할 생각은 마요. 키스까지 해 놓고 아니라고는 못 할 텐데요.’
그래, 그의 말이 맞다. 어떤 모습이라고 하더라도 상관없을 정도로, 얼굴도 모르던 상대를 좋아했다. 그리고 그만큼은 아니었지만, 토끼 가면이 아닌 도윤범에게도 마음이 없었다고는 하지 못하겠다. 그게 문제였다. 그 두 사람을 사이에 두고 얼마나 무겁고 긴 고뇌를 해야 했던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거쳐 하나를 버리는 선택을 해야 했던가.
하지만 도윤범은 그 모든 걸 알면서도 두 개의 신분을 연기하며 남도하를 농락했다. 그런 그의 속마음까지는 알고 싶지 않았고, 적어도 남도하가 느끼기엔 사람을 가지고 논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마치 남도하 저를 비웃듯 옆에서 지켜보며 즐겼을 거라 생각하면 자다가도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비릿한 미소로 제 마음을 짓밟는 도윤범의 얼굴이 뇌리에 떠오를 때면 부정적인 감정이 가슴을 집어삼키곤 했다.
그래서 답을 내렸다. 토끼 가면은, 도윤범은… 절대 저를 사랑하는 게 아니다. 그 감정을 가지고 저렇게 장난처럼 사람을 가지고 놀 수는 없는 거니까. 적어도 남도하가 믿는 사랑은 그런 게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인정한다. 도윤범이 주던 것들은 그동안 남도하에게 결여되어 있던 모든 것이었다. 안락하고 안온한 삶. 더는 돈에 허덕이지 않아도 되고, 그 덕분에 가족들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좋은 작품으로 더 높은 자리까지 초고속으로 올려 줄 것이 확실하다. 여태 누려 본 적 없는 인생을 살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라는 말인가.
세상의 풍파를 아직 덜 겪어 보아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심을 배신당한 채 도윤범과 함께하는 선택을 할 수는 없었다. 무서워서 도망친 것도 아니었다. 토끼 가면의 정체가 도윤범이라는 걸 알게 된 이후, 오히려 토끼 가면의 불가사의한 정체에서 기인한 공포감은 옅어졌다. 그저… 제게 여전히 다정한 척하는 도윤범을 보기 싫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차올라 그 모습을 보기 힘들었다.
그래서 남도하가 도윤범에게 답을 내려 주었다. 그가 품는 감정은 절대, 사랑이 아니라고. 이유조차 알고 싶지 않은 집착일 뿐이라고.
남도하는 온몸이 차게 식을 때까지 밤하늘을 바라보다 집으로 들어갔다. 별을 본 것인지, 떨쳐낼 수 없는 과거를 본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 * *
“학생.”
“아… 선장님, 저 학생 아니라니까요.”
오늘도 남도하의 일과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멍하니 앉아 바다를 내려다보고, 높다란 산인지, 언덕인지 모를 곳의 정상에 올라보고. 또 걷고, 앉아 있고.
“내 눈엔 그냥 학생이구먼, 뭘.”
상연의 아빠, 선장은 남도하의 옆 돌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도하예요, 남도하.”
“그래, 도하 학생이 우리 상연이 돌봐 줬다면서?”
“돌봐 주기는요. 그냥 밥 먹는 거 봐준 게 전부인데요.”
“애가 친구가 없어서 외로워. 나도 배운 거라고는 고기 잡는 거뿐이라 섬 밖으로 나갈 상황도 안 되고….”
선장은 꽤 젊은 편이었다. 남도하는 제가 세상의 가장 큰 풍파에 휩쓸렸다고 생각했는데, 옆의 남자를 보니 자만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바다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동자엔 지긋지긋함이 담겨 있었다. 겨울임에도 새까맣게 그을린 피부에서 고단했을 남자의 삶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래도 상연이가 착해요.”
“…예쁘지, 우리 상연이.”
말 못 할 사연이 많다는 건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 남자도 남도하처럼 무언가로부터 도망쳐 이 섬에 들어온 것일 수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일지도, 아님 그저 하루하루 힘겹게 버텨 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남도하는 제 사연을 털어놓을 생각이 없었기에 상대의 사정도 모른 척해 주어야 했다.
“이따 우리 집에 와서 저녁 먹어. 별건 없어도 혼자 먹는 것보단 낫겠지.”
“저번에 주신 반찬들도 남았는데요….”
“그게 여태 남아? 하루 치도 안 되는데!”
미안한 마음에 친절을 사양하다 한참이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조금 전까지는 무기력하게 보이던 선장은 날을 잡은 듯 남도하의 식습관에 대해 훈계를 늘어놓았다. 목에 핏대까지 세워 가며 화를 내듯 말이다.
“알았어요! 가요, 가. 저녁에 댁에 가서 먹을게요.”
남도하의 입에서 고분고분 저녁을 먹으러 가겠다는 말이 나오고서야 화를 내는 듯하던 잔소리가 멈췄다. 선장은 먼저 몸을 일으키며 남도하의 어깨를 턱 짚었다. 투박하고, 거칠고, 딱딱한 손이 조금은 강하게 어깨를 쥐고 말했다.
“늦지 않게 와.”
“…걱정 마세요.”
멀어지는 선장의 뒷모습을 보다 다시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참 이상한 남자였다. 여기에 오기 전 조금 더 큰 섬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배를 태워 줄 때도, 집을 알아봐 줄 때도 그는 남도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섬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어째서 여기로 왔냐, 무슨 사연이냐, 무슨 생각이냐 하는 질문 한번을 던지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 오다가다 마주치면 말을 걸고, 음식을 나누어 줄 뿐이었다. 그 빈도가 우연이라고 치기엔 지나치게 잦기는 했다.
“…죽을 생각은 없는데.”
밀려오는 파도를 보며 남도하는 김빠지는 웃음을 지었다. 선장이 내심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혹시라도, 남도하가 못된 선택을 하게 될까 봐 조마조마하는 마음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상식적으로 제정신인 사람이 이런 섬에서,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바다만 바라보고 있는 게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니까.
“빈손으로 갈 수도 없고… 어쩌나.”
요즘 남도하에게 유일한 온기를 베푸는 두 남자였다. 선장님과 상연이.
* * *
“할머니, 다 했어요.”
“아휴! 총각, 추운데 찬찬히 하지 그려!”
사다리를 막 내려오자마자 노파는 남도하의 꽁꽁 언 손을 움켜쥐며 고생했단 말을 연신 건넸다. 사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지붕의 슬레이트가 깨진 부분을 갈아주는 단순한 일일 뿐이었지만, 섬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 있는 사람도 선장님뿐이라 일손은 항상 부족했다.
“할머니… 그럼 저….”
남도하는 할머니의 마당 한구석을 차지한 닭장을 시선으로 한번 훑었다. 사실 목적은 명확했는데, 괜스레 노인의 식량을 뜯어가는 것만 같아 죄스러운 마음이었다.
“달걀 몇 개만 주시면 안 돼요…?”
그래도 매번 신세만 지는 선장님의 집에 빈손으로 가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돈을 주고 달걀을 사겠다고 할 수도 없었다. 이 섬에서만큼은 돈이 그다지 유용하지 않았다. 뭍과는 달리 물욕이 남아 있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닭알…? 떽!”
그런데 할머니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얼핏 화를 내는 것처럼 보여 남도하는 꽤나 당황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고 나자, 다른 의미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 * *
“선장님, 상연아.”
도망쳐 올 때 짐을 많이 챙길 상황이 되지 못했다. 그럴 정신도 없었다. 고작 티셔츠 두어 개, 속옷 서너 개. 겉옷 하나. 남도하가 들고 나온 것의 전부였다. 오늘은 개중에 가장 쓸 만한 옷으로 골라 입고, 손에는 아까 몸으로 때워 번 선물을 가지고 선장의 집으로 들어갔다.
“이게 뭐야?”
“아… 빈손으로 오기도 죄송해서요… 저기 언덕 아래 할머니가 주셨어요.”
“그 할망구도 참…!”
불같이 화를 내던 할머니는, 남도하에게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고는 닭장으로 들어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날렵한 솜씨로 닭을 한 마리 잡아챘다. 순식간에 목을 비틀어 손질까지 끝낸 닭을 까만 봉지에 담아 남도하의 손에 쥐여 줬다. 달걀 따위 말고 닭을 가져가라며.
“…나중에 상연이랑 드세요.”
“그냥 와도 되는데, 뭘 이런 거까지.”
생각도 못 한 선물이었던 듯, 선장은 기꺼운 표정으로 남도하가 건넨 봉지를 받아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지금의 남도하가 줄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 같다.
“앉아. 얼른 먹자.”
“형아!”
내복만 입고 있는 꼬맹이가 남도하의 다리에 달라붙었다. 선장이 밥상을 차리는 사이 상연은 남도하의 허벅지에 올라타 정신 사납게 입을 놀리며 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아, 그랬구나.’, ‘이야, 대단하다.’ 조금만 과장을 섞어 답해 줘도 아이는 신이나 더 긴 이야기를 꺼냈다. 화수분처럼 끝없는 말을 쏟아 내는 조그마한 입이었다.
“상연이 내려와.”
“시, 시른데… 형아랑 먹을래.”
밥상을 내오는 선장님의 말에도 상연은 남도하의 무릎에 앉아 꼼짝하지 않았다.
“너 이놈…!”
“괜찮아요. 그냥 이렇게 먹어도 돼요, 선장님.”
남도하도 제게 달라붙는 작은 온기가 싫지 않았다.
“그래도 불편해서 어떻게 먹어.”
“잘 먹을게요. 감사해요, 선장님.”
선장의 말대로 다소 불편하기는 했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식사를 하는 행위 자체보다도, 그냥 이런 평범한 안온함 속에 섞여 있는 것이 오히려 더 만족스러웠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타인의 온기였다. 이러고 있자니 괜스레 비슷한 온기를 건네던 어떤 얼굴 하나가 떠올라 버렸지만.
“내가 말이야, 지난번에 배 타고 나갔다가 어마어마하게 큰 놈을 잡아 왔다니까? 그때 카메라만 있었어도 내가 그걸….”
상연이 누굴 닮아 저렇게 말이 많은가 했는데, 범인은 선장이었다. 두 사람이 조잘조잘 떠들어 대는 덕분에 식사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하지만 적어도 그사이엔 딴생각이 파고들 틈 없이 오롯이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뭐… 약간 정신 사납기는 해도 망념에 삼켜지는 것보다는 이편이 나았다.
“술 한잔할까?”
“…그럴까요?”
식사를 끝낸 후, 상연이 남도하의 품에서 잠들었다. 선장은 그제야 본론을 꺼내듯 술을 한잔하자며 남도하를 밖으로 이끌었다.
“…어디 가세요?”
“밤바다 본 적 없지?”
“보여요?”
“당연하지.”
손에 덜렁덜렁 소주 몇 병과 마른오징어를 담은 봉투를 들고, 커다란 손전등을 하나 챙겨 앞장서는 선장의 뒤를 쫓았다. 혹시라도 익숙지 않은 흙길에 자빠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는지 선장이 든 손전등은 남도하의 발 앞을 향해 비추고 있었다. 제 아들을 챙길 때만큼이나 살뜰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바닷가에 다다랐지만, 선장의 확답과는 달리 제대로 보이는 게 없었다. 새까만 어둠만 눈앞을 채우고 있어 그곳이 바다라는 것도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였다.
“기다려 봐.”
선장은 손전등을 내려놓고는 어디론가 후다닥 달려가, 나뭇가지와 장작을 한가득 들고 왔다. 그러고선 능숙한 솜씨로 모닥불을 하나 피워 냈다.
“이제 춥지는 않지?”
“네… 그렇기는 한데….”
남도하는 선장이 자리를 잡고 앉는 옆에 따라 앉았다. 모닥불의 열기가 바닷바람의 냉기를 중화시켜 주는 것 같았다.
“한 잔 받아.”
“감사합니다.”
소주를 종이컵에 따라 한잔 목구멍으로 넘기자 냉기는 조금 옅어지고 열기가 약간 더 짙어졌다.
“아직도 안 보여?”
“…뭐가요?”
“바다.”
“당연한 거 아니에요…?”
선장은 남도하의 솔직한 말에 바닷가가 떠내려가라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꽉 막혔어?”
“…….”
“눈으로 보이는 것만 보지 말고, 귀로 들리는 소리도 좀 들어 봐.”
술이 한잔 들어가서 그럴까. 헛소리 같은 선장의 말을 한번 따라 보기로 했다. 여전히 제대로 보이는 게 없는 눈은 그냥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시야가 막히자 청각에 사고가 집중되는 건 당연했다.
“어떨 때는 보이는 것보다 소리가 더 정확하기도 하거든. 눈에 보이는 것들은 거짓말을 해도, 소리는 본 모습을 잘 못 숨겨.”
선장의 목소리 사이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가 들렸다. 조금 더 집중하자 새까만 어둠만 있다 생각했던 공간이 눈에 그려지는 듯했다. 높게 솟아 하얀 포말과 함께 밀려오는 파도, 찰박찰박 동그란 자갈에 부딪혔다 밀려나는 물살. 그 위를 쓸고 지나가는 바닷바람. 보이지 않는 공간에 그런 것들이 있었다.
“사람도 그렇더라고. 나도 조금만 일찍 알았으면 아마 이렇게 살지는 않았을 텐데.”
선장의 말에 남도하는 눈을 떴다. 주황색 모닥불 빛을 담은 그의 눈동자엔 짙은 후회가 잔뜩 서린 것 같았다. 이젠 되돌릴 수 없는 어떤 시간을 떠올리는 듯했다. 그래서 쉬이 무슨 뜻이냐 묻지 못하고 소주만 한잔 더 마시고 말았다.
“나랑 약속 하나 해.”
“…뭘요?”
“돌아가.”
“…네?”
힘 있는 선장의 목소리에 남도하는 순간 그가 저를 내치는 것인가 싶었다. 반론을 제기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명령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안도했다.
“있고 싶을 때까지, 오래 있어도 되는데… 언젠가는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라고.”
“아….”
“무슨 사정인지까지는 묻지 않을 테니까, 뭐가 됐든 포기는 하지 마.”
잔 가득 소주가 넘치게 채워졌다. 남도하도 선장의 잔을 채워 줬다.
“어쩌죠. 저는 선장님이랑 상연이랑 오래 살려고 했는데.”
“미, 미친…!”
남도하는 너무 무거워지는 분위기에 가벼운 장난을 한 번 던졌다. 그런데 선장에게 너무 잘 먹혀들어 버린 것 같다. 혼자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에서 타오르는 모닥불보다도 시뻘건 색으로 얼굴이 물들어 갔다. 말 같지도 않은 단어를 몇 번이나 고르다가 제대로 된 문장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솔직히 내가 젊었을 때 한 얼굴 하기는 했어.”
“…예?”
“뭍에만 나가면 여자들이 따라붙어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몰라.”
“아, 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그냥 호응하고 말았다.
“그래도 미안한데 나는 안 돼.”
아무래도 뭔가… 단단히 착각한 거 같다.
* * *
“도하야! 거기 잡아, 거기!”
“선장님이 당겨야죠!”
며칠 사이 남도하의 일상이 꽤 달라졌다. ‘도하 학생’ 또는 ‘학생’ 이라 남도하를 부르던 호칭이 달라진 것도 그렇고, 이 섬에서 꽤 오랜 시간 지내다 보니 자급자족할 방법을 마련해야 했다. 노인들처럼 밭을 일구고 동물을 키울 수는 없었다. 선장님처럼 낚시를 다녀올 수도 없었다.
“아빠가 당겨야 돼!”
“조용히 해, 인마!”
다행이었다. 섬에는 젊은 일꾼이 항상 필요했다. 선장님 홀로 처리할 수 없는 일을 남도하가 도와줬다. 이렇게 일손을 도와주고 음식과 생필품을 나눠 받을 수 있었다. 어쩌면 선장의 다른 의도였을 수도 있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바다만 보고 있는 남도하를 못마땅해했으니까.
“하아… 비닐하우스를 꼭 이 겨울에 고쳐야 해요?”
그래도 효과가 있었다. 선장이 이끄는 대로 정신없이 일하며 남도하는 제법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적어도 당장 바다로 뛰어드는 건 아닐까 걱정스럽던 눈빛은 어느새 지워졌다. 완전히 나아졌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일을 하는 시간 만큼은 평소와 같았다.
“몰라. 뒤지겠네, 진짜.”
비닐하우스의 비닐을 교체하는 작업은 생각보다 고됐다. 살을 에는 듯한 바람마저 후덥지근하게 느껴질 정도로 땀이 억수같이 쏟아졌다. 남도하도 그랬고, 선장도 그랬다.
“나 배고파, 아빠.”
조그만 놈만 빼고. 상연은 또 털옷을 잔뜩 껴입은 채 어른들을 따라와 옆에서 훈수를 뒀다. 작은 입을 정신없이 조잘거렸으니 배가 고프지 않을 수 없었다.
“안 되겠다. 오늘은 이 노인네 냉장고 거덜 내야겠다, 가자.”
괜히 힘이 빠져 밥을 하기 싫어서 하는 말일 테다. 하지만 남도하도 지치기는 마찬가지였기에 선장을 따라 비닐하우스의 주인 할아버지 집으로 향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꽁꽁 언 언덕배기를 내려가던 중이었다.
“아빠! 저기, 엄청 커!”
“…그러게, 저게 뭐지.”
저 멀리, 고요한 바다 한가운데 새하얀 배 한 대가 유유히 다가오고 있었다. 거리감을 무시한 채 커다란 크기를 자랑하는 배는, 언뜻 유람선처럼 보일 정도였다. 남도하도 그들을 따라 다가오는 하얀 배를 바라봤다.
“여기도 저런 배가 들어와요…?”
“그럴 리가. 저건 낚싯배도 아니라서 이런 데 올 배가 아닌데….”
“아빠! 우리 저거 보러 가자! 응? 보러 가자!”
상연은 배가 고프다 징징거리던 모습을 버리고, 이번엔 배 구경을 하러 가자 졸랐다.
“이쪽으로 오는 거 같기는 한데… 뭐 문제 있나.”
어떻게 보면 섬의 책임자와 같은 선장이었기에 이런 상황에 모른 체할 수는 없었다. 그는 상연을 안아 들고, 남도하가 뒤를 쫓았다. 언덕을 내려가 흙길을 지나 선착장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바닷가에 도착하자 선장의 배 한 대만 덩그러니 묶여 있었다. 그리고 다가오는 하얀 배는, 멀리서 보던 것보다 훨씬 커다랬다. 선착장에 배를 댈 수도 없을 정도였다.
“저게 뭐야. 유람선 아니야…?”
“요트네요… 좀, 큰.”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요트의 몇 배는 되지 않을까 싶은 크기였다. 수심 문제인지 더 다가오지 못한 배는 해안가에서 좀 떨어진 곳에 멈춰 섰고, 곧 작은 보트가 내려와 섬을 향해 다가왔다.
보트가 가까워질수록 익숙한 얼굴이 시야를 채우기 시작했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남도하는 눈앞에 보이는 장면이 믿어지지 않았다. 몸은 굳은 듯 꼼짝을 하지 않았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가까워지는 배를 시선으로 쫓을 뿐이었다.
그러다 결국 보트가 선착장에 닿고,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이 시야를 채우게 됐다. 충분히 대화를 섞을 수 있는 거리가 되었음에도 남도하는 입을 열 수 없었다. 마치 세상이 멈춰 선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를 한참이나 바라볼 뿐이었다. 영원 같은 시간이 흐르고….
“늦어서 미안해요, 형.”
저 홀로 험난한 겨울을 겪고 있는 것 같은 남자가 말했다.
“미안…해요.”
아니, 울었다.
* * *
바람이 불어왔다. 차디찬 바람이 머리칼을, 얼굴을, 그리고 마음을 쓸었다. 소리라고는 잔잔하게 밀려오는 파도 소리가 전부였다. 세상이 멈춘 것처럼, 선착장에 모인 사람들은 아무런 움직임도, 말도 없었다. 유일한 움직임은 도윤범의 뺨을 타고 흐르는 말간 눈물뿐이었다.
살이 내렸다. 항상 밝음으로 빛이 나던 도윤범의 얼굴은 농담을 조금 보태도 절대 좋아 보인다 말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때문에 더욱더 날이 선 것처럼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이 되어 버렸다. 그는, 그런 얼굴로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나 배고픈데….”
영원 같은 정적을 깬 건, 어린 목소리였다. 남도하의 다리에 달라붙은 아이는 바지춤을 당기며 제 의사를 전달했다. 그제야 남도하도 현실로 돌아왔다. 조금 전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깨닫지 못한 채 발밑의 아이를 안아 올렸다.
“…가자.”
그리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선장 역시 그 뒤를 따랐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게 틀림없는 남도하와 도윤범의 재회였기에 어떤 말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등 뒤에서 “형!”하고 부르는 소리에도 남도하의 걸음이 느려지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그 상황에서 빠르게 벗어나려는 듯, 두 다리만 더 부지런히 움직였다.
“…괜찮아?”
“괜찮아요. 빨리 가서 밥이나 먹죠. 엄청 배고프네요.”
누가 봐도 남도하의 상태는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조금은 넋이 나간 것도 같았고,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짜내는 게 명확히 느껴졌다. 비닐하우스의 주인 할아버지 집에서 식사를 할 때까지도 마찬가지였다. 평소보다 더 많은 밥을 먹고, 말을 했다. 당연히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상연만 남도하의 말에 부지런히 대꾸를 했다.
“오늘은 좀 쉬어.”
“아직 일도 다 안 끝났는데요?”
“됐어. 내일 하지 뭐. 내가 피곤해서 못 하겠으니까 가서 좀 쉬어.”
남도하는 선장의 말을 들으며 제 연기가 어설펐다는 걸 깨달았다. 요즘은 좀 괜찮아졌다 생각했던 감정은, 도윤범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폭풍이 들이닥친 바다와 같아졌다. 수많은 생각과 감정이 위태롭게 넘실댔다. 툭 치면 간신히 막아 놓은 둑이 터져 그대로 폭발할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상태였다.
“…그럼 쉬세요. 내일 아침에 다시 올게요.”
“술 필요하면 꺼내 가고.”
“네, 감사합니다.”
선장이 제 보물 창고마저 개방했다. 육지의 물건을 구하기가 쉽지 않은 곳이었기에 저 정도면 해 줄 수 있는 최대의 위로를 건넨 셈이다. 조금 전 목도한 일에 대해 묻지 않은 것도 그렇고.
“…욕실도 좀 쓸게요.”
남도하는 선장의 집으로 향했다. 따뜻한 물이 나오는 집은 그 집이 유일했기에 어쩌다 보니 남도하도 선장의 집에서 일상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물을 틀어 놓고 한참이나 기다리고서야 얼음 같은 물이 미지근한 정도로 바뀌었다. 하루 종일 땀을 흘리고 흙을 묻혀가며 일하던 몸을 씻어 내는데도 아무런 개운함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잡념이 떨어져 나가며, 다른 생각 하나가 더욱더 마음을 갑갑하게 했다.
* * *
“돌아가.”
“형… 얘기만 좀 해요, 네?”
어떤 의도였을까. 남도하는 해 질 녘 바닷가로 산책을 나왔다. 당연한 것인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걸음은 선착장 방향으로 향했다. 겨울의 태양은 생각보다 일찍 모습을 감추곤 했다. 선착장으로 향하는 사이 수평선에 닿아 모습을 감추려 하는 태양이 괜스레 불안하게만 느껴졌다.
“여기서 이러고 있는다고 내 생각 바뀔 건 없어.”
그 불안한 기분은 선착장에 선 남자를 보고 짜증이 되었다. 아까 남도하가 몸을 돌렸을 때처럼, 그는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이번에도 제가 도윤범의 의도대로 행동한 것만 같아 남도하의 입에서 뾰족한 목소리가 나왔다. 옷 같지도 않은 얇은 코트 하나만 걸친 모습도 짜증 났다. 여긴 도시가 아니라서 밤공기가 얼마나 차가운데. 저것도 틀림없이 의도한 거겠지.
도윤범의 모든 것이 의심스럽고,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짜증스러웠다.
“…미안해요, 형.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화내고 욕해도 되니까, 얼굴 좀 보고 얘기해요.”
“오지 마. 너만 보면 또 숨어 버리고 싶어지니까.”
대체 어떻게 찾아낸 것인가 싶었다.
남도하는 나름 머리를 써 도망쳤다. 부산, 목포, 춘천. 사방을 돌고, 배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서 서해의 작은 섬까지 숨어들었다. 휴대폰도 가져오지 않았고, 카드는 강원도를 마지막으로 사용하지 않았으니 찾기 쉽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남도하의 위치가 들켜 버렸다.
“난 너랑 이렇게 얘기하는 것도 힘들다. 그냥, 가.”
남도하는 제 할 말만 마친 채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도 등을 보였다. 하지만 도윤범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걸음을 돌려야 했다.
“도원이도 같이 왔어요, 형.”
“너…! 미쳤어? 도원이를 왜 데려와, 여길.”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에 남도하의 화가 먼저 터졌다. 빠르게 다가가 도윤범의 어깨를 밀치듯 움켜쥐고, 다시 얼굴을 맞댈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저를 보네요….”
“장난하지 마, 진짜 화나려고 하니까.”
도윤범의 어깨를 쥔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그 와중에 또 작은 짜증이 솟았다. 얼굴만 마른 게 아니었다. 마디가 툭 튀어나온 어깨뼈가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로 형편없이 야위어 있었다. 남도하의 화에도 도윤범의 입술은 호선을 그렸다. 얼마나 짓씹었으면 피딱지가 내려앉아 볼품없는 입술이 미소 지었다.
“도원이가… 형 연락 안 돼서 걱정 많이 했어요. 그렇게 돈만 주고 가면 어떻게 해요.”
“어디 있어, 내 동생.”
“배에요. 볼래요?”
대화 같지도 않은 대화를 몇 개 주고받은 탓일까. 도윤범의 목소리에 조금은 힘이 돌아온 것 같았다. 남도하는 애써 무시하며 먼저 도윤범이 타고 왔던 작은 보트에 올랐다. 답은 하지 않았지만, 긍정의 답변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도윤범도 보트에 따라 탔다.
보트가 방향을 틀어 커다란 요트를 향했다. 가까워질수록 그 크기가 더욱 놀랍기만 했다. 흡사 유람선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커다란 요트 근처에 도착하자 줄이 내려와 보트를 갑판까지 들어 올렸다.
“잠깐만 기다려요.”
도윤범이 제정신이 아니라고는 생각했지만, 배를 보니 그 생각이 더 확고해졌다. 갑판만 하더라도 수십 명이 올라탈 수 있을 것 같았고, 아래쪽으로도 꽤 넓은 방과 공간이 있을 게 자명했다. 여태 이렇게 큰 요트를 본 적도 없었다. 한참 의미 없는 시선으로 배를 훑고 있을 때였다.
“형!”
이젠 제법 남자 같은 목소리를 가지게 된, 익숙한 부름이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리던 남도하는 그대로 멈춰서 버렸다.
“…도원아.”
저 멀리서 다가오는 남도원에게 닿지도 않을 부름이 작은 목소리로 흘러나왔다. 두 눈을 뜨고도 보이는 광경을 믿을 수 없던 남도하는 가까워지는 동생에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
제게 다가오는 남도원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빠르다 할 수 있는 속도는 아니었지만, 두 사람의 간격이 줄어들고 있었다. 그것도… 남도원 스스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마치 걸음마를 하는 아이처럼 어색한 걸음걸이였지만, 저 스스로 걸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너, 어떻게 된 거야. 어, 어떻게….”
정신을 차린 남도하는 두어 발짝 떨어져 미소 짓는 동생을 끌어안았다. 어색하기만 한 눈높이였다. 동생을 처음 안아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멀쩡히 선 남도원의 어깨를 감싸 안아 본 적은 없었다. 작은 어깨를 힘주어 안자 남도원은 제 형의 허리를 감싸 당겼다.
“이제 형 혼자 고생 안 해도 돼.”
남도원의 입에서 처음 나온 말에 남도하의 감정이 터졌다. 들끓던 감정 중 가슴 깊이 숨어 있던 안도와, 슬픔, 기쁨이 뒤섞여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앞으로는 내 걱정하지 말고, 형 살고 싶은 대로 살아도 돼.”
다 알고 있었구나. 남도하의 품에 갇힌 채 전하는 말이 너무 무거웠다. 나름 티를 내지 않았다 생각했건만, 남도원은 이미 제가 남도하의 짐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제, 그 모든 굴레를 벗겨 주겠노라 이야기했다.
“어떻게 된 거야, 도원아.”
남도하는 한참이나 동생의 뒤통수를 쓸어내리다 몸을 떼어 냈다. 눈물로 엉망이 된 남도원의 얼굴을 손으로 쓸어 주며 어떻게 두 다리로 걷게 되었는지를 먼저 물었다.
“들어가서 얘기해요, 형. 도원이 아직 조금 더 걷는 연습해야 해요.”
도윤범은 자연스럽게 남도원의 손을 잡아 주며 안쪽으로 이끌었다. 대체 제가 자리를 비운 한 달 가까운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그 손 당장 놓으라는 말을 하고 싶은 마음이 반, 우선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은 생각이 반이었다.
그리고 결국 마음은 후자로 기울었다. 남도하는 그들을 따라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젠 해가 완전 져 버린 바다 위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마치 어떤 호텔의 스위트 룸 거실을 연상시키는 인테리어를 한 공간이 나왔다.
“어떻게 된 건데, 이게.”
남도하는 도윤범을 무시한 채 제 동생에게 질문을 던졌다. 도윤범도 두 사람의 재회를 즐기라는 것인지, 별다른 말을 보태지 않은 채 멀리서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그게, 재단에서 해 줬는데….”
“재단?”
“그… 도랑도랑이라고. 그쵸, 형?”
도윤범은 작게 고개를 끄덕여 남도원의 말에 긍정했다.
“하아… 뭘 해 줬는데.”
도랑도랑이라니. 결국은 도윤범이 해 줬다는 말 아닌가.
“그러니까….”
“도원이 다리는 아예 못 쓰는 게 아니에요. 보조 장치만 있으면 걸을 수 있어요. 신경을 연결해야 해서 돈이 많이 들고, 복잡할 뿐이죠.”
도윤범의 말을 들으며 남도원의 다리를 만져 보니 바지 안쪽에 딱딱한 메탈 구조물이 다릴 감싸고 있었다. 결국은 또 돈이 문제였다. 걸을 수 있는 아이가 여태 휠체어를 타고 생활하게 만든 건 또 남도하 저였다.
“이젠 휠체어 없이 걸을 수 있어요. 조금 더 걷는 연습만 하면, 혼자서 일상생활도 할 수 있고, 남들처럼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 수 있어요.”
그리고 또, 마지막으로 남은 진창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동아줄을 내미는 것 역시 도윤범이다. 어떤 의도로 행한 짓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이 역시 저 자신을 위해서인지, 또다시 기만하기 위해서인지. 그런데도 남도하는 도윤범의 말을 멈출 수 없었다. 스스로 정리할 수 없는 마음 때문에 입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화를 내지도, 고맙다는 말도 차마 나오지 않았다. 대체 이 아이는 어째서…. 마음이 조금 더 시끄러워졌다.
* * *
“…도원아.”
남도하는 잠든 동생의 어깨를 작게 흔들었다. 하지만 먼 길을 오느라 피곤했던 탓인지 남도원은 선실 안 침대에 누운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조금 더 재우기로 하고 어린아이 같기만 하던 동생의 얼굴을 가볍게 쓸었다.
“그냥 자고 가요, 형. 도원이가 원래 몸이 좀 약해서 무리하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남도하는 문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못 들은 체했다.
“개새끼라고 욕해도 할 말 없는데요… 전 형이 마음만 바꿀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이번엔 내 동생이라고?”
“네, 맞아요. 형한테 소중한 사람이니까요. 덕분에 형이랑 이렇게 대화도 할 수 있잖아요.”
“따라와.”
잠든 동생을 앞에 두고 나누기엔 적합하지 않은 대화였다. 남도하는 도윤범을 잡아끌고 갑판으로 나왔다. 이 와중에도 왜. 손목마저 당장 부러질 것처럼 말라비틀어진 게 신경 쓰이는 걸까. 그게 또 짜증이 되어 남도하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미안한데, 그렇게 고맙지는 않거든. 내가 부탁한 일도 아니고.”
“아니요. 형은 지금 너무 고마워서 어떤 말도 못 하는 걸 거예요.”
“네가 대체! 뭘 그렇게 잘 아는데.”
마치 속내를 들킨 것처럼, 남도하는 더욱 화를 냈다.
“형에 대해서라면 형보다 더 잘 알 수도 있죠, 사랑하니까요.”
“하, 개소리 좀 하지 마.”
아무래도 아직은 대화를 나눌 감정 상태가 되지 못했다. 도윤범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입을 열려니 정제되지 못한 화만 계속해 끓어올랐다. 너무나도 무거운 목소리로 사랑이라는 말을 언급하는 것마저도 못마땅했다.
“내가 말 했지. 너 그거 사랑 아니야. 누가 그따위로 사랑을 해.”
더는 대화하기를 포기하고 남도하가 먼저 걸음을 돌렸다. 그리도 먼저 몸을 돌리는 걸 싫어하던 도윤범은 이번에도 남도하를 붙잡지 않았다, 못했다.
“그냥 미친 거야, 너.”
독설 같은 말만 남긴 채, 남도원이 잠든 방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차디찬 밤바람이 몰아치는 갑판 위엔 위태롭게 흔들리는 한 남자만 남았다.
* * *
“저 사람이 너한테 뭐 어떻게 한 거 아니야?”
“윤범이 형? 했지, 하기는….”
“뭘.”
“아니! 형… 왜 이렇게 화를 내…? 내가 뭐 잘못했어?”
남도하는 두 손까지 휘휘 젓는 동생을 보며 정제되지 않은 감정을 최대한 내리눌렀다. 도윤범 이야기를 하려니 이랬다.
아침에 날이 밝자마자 남도원을 데리고 섬으로 왔다. 뒤를 쫓으려는 도윤범에게 모난 시선을 던지며 홀로 남겨 두고 선장에게 빌린 집으로 돌아왔다.
“미안, 화낸 건 아닌데… 갑자기 네가 여기까지 오니까 놀라서 그렇지.”
“형이 연락도 안 되는데 어떻게 해. 내가 아는 번호라고는 윤범이 형뿐이고.”
“…윤범이 형….”
“형이 병원까지 매번 데려다줬어… 슬쩍 물어보니까 이거 엄청 비싼 거래. 그리고 돈 있어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거도 아니래. 미국 의사 선생님이 치료해 줬어.”
한 달 전 만났던 동생이 맞나 싶었다. 섬과 육지의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것도 같았다. 남도하 저는 한 달 전 그 진창 같은 감정에서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고 있었는데, 남도원은 그사이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안 아팠어…?”
“조금. 근데 이렇게 걸어 다닐 수 있어서 너무 좋아, 형.”
“학교는 어떻게 하고 왔어. 그래도 학교는 졸업해야지.”
“형… 겨울 방학이야.”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구나. 남도하는 학교를 다닐 때도 제대로 등교를 하지 않았었기에 방학의 시작과 끝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다.
“근데 형… 여기 살아…?”
“어? 어… 그냥 쉬러 온 건데….”
차마 도망쳐 왔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래도 상관없던 집이 너무나 초라하게 보였다. 당장 쓰러질 것 같은 시골집, 보일러도 없어 연탄을 넣어 줘야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로 온기가 올라오는 구들장. 따뜻한 물도 나오지 않는 수도.
“좋네.”
“뭐?”
이불을 뒤집어쓰고 마루에 앉아 어제 동네 할아버지가 준 고구마를 까먹으며 남도원이 말했다.
“저기 바다도 예쁘게 보이고, 섬도 아담하고. 딱 여행 온 거 같은데?”
“…그래?”
남도원의 시선엔 이상한 필터가 끼워진 것 같다. 모든 게 예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보이는 마법의 필터. 아마, 그건 도윤범이 준 것일 테다.
“근데 형… 윤범이 형이랑 싸웠어?”
“뭐? 싸우기는. 우리 그런 사이도 아니야.”
“…그래? 윤범이 형이….”
“도원아, 우리 윗집에 놀러 가자. 거기 꼬맹이 하나 있는데, 엄청 귀여워.”
남도하는 말을 돌렸다.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 도윤범이 남도원에게 선행을 베푼 이유는 이미 들었다. 하지만 아직 남도하의 마음은 도윤범에게 차마 고맙다는 말을 할 정도로 풀어지지 못했다. 그저, 지금 당장 꼴 보기 싫은 요트를 끌고 사라지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게 고작이었다. 남도원 입에서 나올 도윤범 찬양까지 들어 줄 정도는 아니었다.
* * *
“가자.”
“선장님, 저 동생도 왔고….”
“도하가 이렇게 책임감 없는 어른인 줄 몰랐네. 밑에 노인네는 당장 비닐하우스가 없어서 내년 1년 내내 쫄쫄 굶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참 야박하구먼.”
“선장님! 또 무슨 얘기를 그렇게 살벌하게 하세요….”
선장은 남도하와 동생이 찾아가자 반갑게 맞아 주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어제 하다 만 작업을 하러 빨리 나가자 성화를 부렸다. 이해 못할 건 아니었다. 또 축 처져 어딘가 핀트가 어긋난 것처럼 보이는 남도하를 보며 일부러 몸을 굴리려는 선작 특유의 위로 방법이었다.
“하아… 알았어요, 가요.”
“아빠! 나도 갈래!”
남도원의 다리가 로보트 같다고 한참 만지작거리던 상연이 얼른 겉옷을 들고 달려왔다. 남도하는 그런 상연에게 능숙하게 옷을 입혀 주었다. 혼자 있는 걸 싫어하는 껌딱지가 따라붙으리라는 건 당연했으니까.
“형, 나도 가도 돼?”
“추울 텐데….”
남도원을 혼자 두기도 그렇고, 데리고 가기도 조금 그랬다.
“기다려 봐. 쓸 만한 게 있지.”
호기롭게 앞장서 밖으로 나간 선장은 물건이 잔뜩 쌓인 창고 안에서 낡은 석유 난로를 하나 꺼냈다.
“…그거 작동해요…?”
“아마? 뭐 이런 게 고장 날 리가 있나.”
난로를 발로 툭툭 찰 때마다 뽀얀 먼지가 공중으로 잔뜩 퍼져 나갔다. 언뜻 보기에도 남도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골동품이었다. 선장은 마치 난로를 박살 내려는 것처럼 투박한 손길로 먼지를 털어 내고, 석유를 가득 넣었다.
“고구마 챙겨라.”
상연이 알뜰하게 고구마 간식까지 두 손 가득 들고 집을 나섰다. 일을 하러 가는 건데 느낌은 마치 소풍을 나가는 것 같았다. 남도하도, 남도원도.
“걸을 만해?”
“응. 조금만 천천히 걸으면 괜찮아.”
다리가 짧아 걸음이 느린 상연이 있어 다행이었다. 산책을 하는 듯 느릿하게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5분이면 갈 길이 15분도 넘게 걸려 도착했지만, 아무도 짜증을 부리는 사람은 없었다.
“여기서 상연이랑 놀고 있어. 형은 선장님이랑 일 좀 하고 올 테니까.”
“응, 천천히 해.”
다행히 상연은 남도원도 잘 따랐다. 둘이 나란히 앉아 연신 웃음을 터뜨리며 대화하는 걸 보며 선장과 어제 하다만 작업을 시작했다.
“잠도 못 잤나 보네.”
“잘 잤어요.”
“우리 상연이 두고 야반도주하려는 건 아니지?”
남도하는 비닐을 당기며 하는 선장의 말에 순간 얼이 빠졌다.
“누가 들으면 오해해요, 선장님.”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촉이 발달하는 걸까. 사실 얼핏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도하야, 사람은 사람들 틈에서 살아야 돼. 언제까지 피하기만 해서 될 일이 아니야.”
“이런 섬에 사는 분이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요….”
“쯧, 사실은….”
오늘따라 선장의 입이 바빴다. 처음으로 그의 사연을 꺼내 놓았다. 젊은 나이에 이 섬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상연이 엄마 없이 아빠와 단둘이 남게 된 이야기.
“…순정파였네요, 선장님.”
대단한 사연은 아니었지만, 남들에게 쉽사리 꺼내고 싶지 않을 법한 이야기였다. 이 역시 선장 특유의 위로 방법일지 모르겠다. 서로 반대편에 서서 눈도 마주치지 않아야만 꺼낼 수 있는 제 상처를 내비치며, 지금 닥친 상황을 잘 추스르라는 마음은 전해 받았다.
“근데 저건 언제까지 무시할 건가. 목 빠지겠는데.”
남도하는 선장의 말을 듣지 못한 척 비닐을 야무지게 당겨 바닥에 고정하는 작업에 집중했다. 돌덩이처럼 언 땅이 어쩌면 그렇게 딱딱한지 있는 힘껏 바닥에 정을 박아 넣어야 했다. 아까부터 느끼고 있기는 했다. 저 멀리서 쏘아지는 시선을. 한 번만 바라봐 달라는 듯 저를 바라보는 눈길을 알아채지 못할 수 없었다. 도윤범 말이다.
“이리 오는데?”
“선장님, 힘 좀 쓰세요. 이러다가 오늘도 못 끝내겠어요.”
남도하는 작은 짜증을 담아 망치로 정을 박아 넣었다. 고된 노동을 시작해서 그런지,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망념 때문인지 머리에서 열이 나는 기분이었다. 그때, 남도하의 손에 들려 있던 망치가 사라졌다. 뒤에서 튀어나온 손이 팔뚝만큼 기다랗고, 커다란 망치를 가져가며 남도하의 몸을 슬쩍 밀며 자리를 차고 들어왔다.
“…그렇게 하면 다쳐요.”
얇은 점퍼 하나만 걸친 도윤범은 재주 좋게 단번에 언 땅에 정을 박아 넣었다. 커다란 동작 한 번이면 충분했다.
“이야, 생긴 거랑 다르게 힘이 좋네. 잘됐네, 일손 좀 도와라.”
“선장님!”
“아, 오늘 중으로는 끝내야 할 거 아냐. 이따가 통발도 가지러 가야 되는데 언제 끝낼 거야, 이걸.”
능글맞게 웃으며 도윤범을 잡일에 끌어들이는 선장이었다. 남도하는 못마땅함을 숨긴 채 한숨만 한 번 내쉬곤 다시 일을 시작했다. 필요 없으니 꺼지라는 말도, 그럼 잘 도와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둘이 호흡도 잘 맞네.”
남도하가 비닐을 당겨 오면 도윤범이 바닥에 고정을 했다. 생긴 것만 봐서는 힘도 못 쓰게 생긴 놈이 보기보다 능숙하게 망치를 휘두르는 걸 보며 내심 놀라기는 했다. 하긴, 그 괴력을 자랑하던 토끼 가면이라면 이 정도는 일도 아니겠지. 남도하는 또다시 토끼 가면이 떠오르자 도윤범이 꼴도 보기 싫어졌다.
“잠깐 쉬었다 할까? 점심도 먹어야 할 거 같은데.”
두 사람이 하던 일을 셋이 하니 훨씬 빨랐다. 이제 마무리만 남겨 놓은 상황에서 조금만 쉬었다 하기로 했다.
“제가 도시락 좀 싸 왔는데요….”
흙과 먼지로 엉망이 된 손을 바지춤에 닦은 도윤범은 커다란 도시락 가방을 가지고 달려왔다. 미리 이럴 계획이었는지, 다섯 사람이 먹고도 남을 정도로 커다랬다.
“우와! 아빠, 이거 봐!”
도시락을 펼치자 상연이가 제일 신났다. 항상 밥과 반찬으로 이뤄진 식사만 하던 아이에게는 별세계의 음식처럼 보일 것이다. 오색빛깔로 물든 커다란 김밥과 먹기 좋게 한입 크기로 잘린 양념 갈비. 그리고 누가 보아도 남도하를 위한 것으로 보이는 다른 도시락 하나.
“형, 손 닦고 어서 드세요. 보온이라 별로 안 식었을 거예요.”
돈가스와 떡볶이, 튀김과 해산물이 잔뜩 들어간 주먹밥. 외식을 할 때면 언제나 즐겨 먹던 메뉴였다. 도윤범은 멍하니 앉은 남도하의 손을 잡아 직접 물티슈로 닦아 주었다.
“난 생각 없어서. 맛있게 드세요.”
엉망으로 더러워진 손에 닿는 부드러운 손길을 털어냈다. 그러곤 그대로 몸을 일으켜 저 멀리로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도윤범과 싸우는 모습을 보일 수도 없어 내린 선택이었다. 그렇다고 지금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그가 괜찮은 건 아니었다.
“따라오지 마.”
“저도 그냥 걷는 건데요.”
정처 없이 옮기는 걸음 뒤에, 다른 발자국이 따라붙었다. 뒤를 돌아보진 않았지만 목소리를 들어보니 꽤 먼 거리를 유지하며 쫓아오는 것 같았다.
“너 이런다고 내 생각 안 바뀌어.”
“…미안해요, 형. 다 제 잘못이에요.”
진심일까. 진짜… 진심으로 하는 사과일까?
남도하는 순간 제 뇌리를 스치는 의문을 빠르게 털어 냈다. 진심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인가. 저런 사과를 한다고 해서 그사이 저를 가지고 놀던 도윤범의 행동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닌데.
아마 머지않아 지쳐 떨어질 거다. 지금은 잠깐 미안한 척하고 있을 수 있지만, 저게 얼마나 가겠나. 딱 그 정도의 감정일 거다.
남도하는 그렇게 생각했다.
* * *
“이게 통발이구나… 처음 보네요.”
“나도 여기 와서 처음….”
남도하는 도윤범의 목소리에 순순히 답을 하다 입을 다물었다. 비닐하우스 공사를 끝낸 선장은 남도하에게 특명을 내렸다. 바닷가에 걸어 놓은 통발을 돌아보며 저녁 찬 거리를 건져오라고. 항상 두 사람이 같이하던 일이었는데, 오늘은 남도하 홀로 그 일을 하게 했다. 남도하가 집을 나서자 도윤범이 그림자처럼 뒤에 달라붙어 따라왔다.
“와, 문어도 있네요. 형 문어 좋아하는데, 잘됐어요.”
도윤범은 통발 안에 잡힌 문어를 보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그리고 남도하는 또 못 들은 척 묵묵히 통발 안에 손을 넣어 문어를 잡아 꺼낼 뿐 답을 하지 않았다. 다른 통발들은 허탕이었다. 작은 물고기 몇 마리가 있었지만, 먹기엔 너무 작아 풀어 주어야 했다. 이마저 재주가 없어 그런지 선장과 함께할 때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어느새 해가 수평선에 닿는 시간이 되었다.
“그만해, 이제. 더는 네 장난에 어울릴 생각 없으니까.”
남도하는 항상 저무는 해를 바라보던 바닷가에 멈춰 서서 도윤범을 직시했다. 찰박찰박 바닷물이 밀려왔다 쓸려가며 잔잔한 소음만 빚어내는 해안가였다. 오늘따라 유독 매서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날씨였다.
“못… 그래요, 형. 형은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요, 저는 못 해요.”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 매서웠나 보다.
“제가 다 잘못했어요.”
마주한 도윤범의 얼굴을 바람이 치고 지나갈 때마다, 그의 얼굴은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좀 전까지 나름 밝은 척 떠들던 입은 한마디 한마디를 꺼낼 때마다 안쓰러울 정도로 떨렸고, 두 눈두덩이는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다 결국,
“그러니까… 저 버리지 마요, 네…?”
또다시 도윤범의 두 눈에서 말간 눈물이 흘렀다. 또, 남도하는 그대로 걸음을 돌렸다. 이번에도 도윤범 홀로 바닷가에 남겨 둔 채.
* * *
“심심하면 이제 집에 돌아가도 돼.”
“아냐. 나도 여기 좋아, 형이랑 같이 있어서.”
남도하는 남도원을 요트에서 재우고 있었다. 아무래도 단열이 잘 되지 않는 낡은 집에서 재우기엔 걱정이 됐다. 도윤범과 함께 두는 게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괜히 동생까지 함께 고생시키다 감기라도 걸릴까 싶었다. 선착장에서 배에 태워 보내려는데, 도윤범이 따라 타지 않았다.
“도원아, 먼저 가서 저녁 먹고 있어.”
넌 왜 안가냐, 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자 도윤범은 남도원을 향해 인사를 건네며 남도하도 요즘 몇 번 마주친 적 있는 남자와 함께 보트를 출발시켰다.
“형, 생선 큰 거 잡혔던데 오늘은 그거 구워 먹을까요?”
남도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붙이는 도윤범을 무시한 채 걸음을 옮겼다. 해안가 자갈밭을 지나 익숙한 흙길을 따라 집으로 방향을 잡았다.
“구워 먹는 거 싫으면 찜으로 해 볼까요? 제가 레시피 찾아볼게요. 형은 매운 거 좋아하니까….”
남도하의 뒤를 따르며 도윤범은 쉼 없이 입을 놀렸다. 솔직히 말해 남도하는 그가 머지않아 본색을 드러낼 거라 봤다. 처음엔 반성하는 척, 미안한 척하겠지만 결국은 화를 내고 제멋대로 힘으로 저를 끌고 가려 할 거라고 생각했다. 남도하가 아는 토끼 가면은 그런 남자였으니까.
아니면 무언가를 협박을 할 수도 있다고 봤다. 네 동생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냐, 연예인 인생 그대로 끝내고 싶냐, 하는 그런 거. 도망치기 전, 도윤범이 내비쳤던 모습을 보면 망상은 아닐 것 같았다. 제멋대로 회사와 집을 옮기게 하고서 24시간 달라붙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던 놈이니까.
“그만 따라와.”
대체 어떤 모습이 진짜 도윤범일까. 매니저로 옆을 맴돌던 그와 토끼 가면을 쓰고 찾아오던 남자의 갭이 너무 커 두 사람을 하나로 합쳐 놓으니 도통 제가 알던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형….”
남도하는 대문 어귀에서 선을 그었다.
“그만, 제발 그만 좀 하자.”
이 장난 같은 놀이를 그만하라고. 또다시 비틀린 마음이 목구멍을 넘어 나왔다.
“진짜 또 다른 데로 가 버리고 싶어지니까.”
몇 번이나 반복된 일이다. 이렇게 남도하가 모난 말을 던지며 등을 보이고, 다음날이면 도윤범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는 낯으로 나타난다. 서툰 손짓으로 일손을 돕고, 뒤를 졸졸 따라다니곤 했다.
저런 말 따위로 떨어져 나가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자꾸 도윤범을 볼 때면 끓어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도윤범은 오늘도 남도하가 그어 놓은 선을 침범하지 않았다. 마당으로 들어서는 남도하의 뒤를 쫓지 않은 채 집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남도하는 그런 도윤범을 무시한 채 그대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더럽게 춥네.”
집에 들어와서도 외투를 벗을 수 없었다. 하아, 깊은 한숨을 쉬면 입김이 몽글몽글 퍼져 나올 정도로 온기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집이었다. 몸이 지친 건지, 마음이 지친 건지. 남도하는 이불을 잔뜩 끌어안고 몸을 뉘었다. 아무리 이불에 몸을 말고 뒤집어써도 온몸을 얼려 버릴 것 같은 추위가 가시지 않았다.
지독하게 추운 겨울밤이었다.
* * *
후두둑, 후둑-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뜨겁고 갑갑한 공기 역시 눈을 뜨게 하는데 일조했다. 몽롱한 정신에 이불을 걷어 내고 외투를 벗어야 했다. 잠들 때까지만 해도 몰려오는 추위에 달달 떨었는데, 지금은 또 뜨거운 공기 때문에 숨이 막혔다.
“…뭐야.”
방바닥에 앉아 땀으로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바닥에 손을 대보니 뜨끈한 기운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방안은 여전히 어두웠고, 바깥에서는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마치 한겨울에 장마라도 찾아온 것 같았다. 섬이라 그런지 바람도 폭우만큼이나 거세게 몰아쳐 폭풍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뜨거운 방바닥과 폭풍우. 남도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떤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그대로 방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자 예상처럼 매서운 바람과 함께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어둠 때문인지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줄기 때문인지 눈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비가 쏟아진다 하더라도 계절은 겨울이다. 때문에 폐부가 조여 올 정도로 삼키는 숨이 찼다. 얼음장 같은 숨을 삼키자 심장의 요동이 더 심해졌다. 몰려오는 불안에 그대로 빗줄기 속으로 뛰어들었다. 신발을 찾아 신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언젠가, 이런 상상을 한 적 있었다.
“윤범아!”
도윤범이 처음으로 거짓말을 했던 날. 길거리에 그를 버리고 오려다 결국 그러지 못했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을 보며, 그 아이를 거기 그렇게 버려두고 올 수 없었다. 빗줄기 사이에 쓸쓸히 홀로 서 있을 아이를 그리면 마음이 편치 않았으니까.
“도윤범!”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을 지나 나왔는데도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잠깐 사이에 남도하는 쏟아지는 비에 쫄딱 젖어 버렸다. 어둠 속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아 어쩌면 잠에서 깨자마자 망상을 한 것일까 했다.
혹시, 이 빗줄기 속에서 도윤범이 저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망상. 남도하 제가 잠든 사이 서툴게 연탄을 갈아 넣고서 또 이 앞에 쓸쓸히 서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 그 생각이 남도하를 빗속으로 몰아넣었다.
“하, 하아….”
남도하는 두 손으로 빗물이 흘러 눈도 제대로 뜨기 힘든 얼굴을 쓸었다.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라고. 도윤범이 비를 맞고 있든, 폭풍우 한가운데 남아 있든 대체 무슨 상관이라고… 그의 부재가 이렇게 안도가 되는 걸까. 실없는 웃음만 나왔다. 미워서 꼴도 보기 싫은 놈인데, 또 그가 이 빗줄기 사이에 없다는 게 다행이라 생각하는 모순이었다.
“…형.”
막 몸을 돌릴 때였다. 빗소리 사이로 희미한 목소리가 마치 환청처럼 들렸다. 꼭 내리는 빗줄기가 목소리에 잔뜩 스며든 것만 같은 부름이었다. 잠시 안도했던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뭐 하는 거야, 너.”
어둠과 빗줄기, 매서운 바람 사이였다. 담벼락 구석에 등을 기대고 쪼그려 앉은 인영이 얼핏 눈에 들었다.
“형이 또, 없어져 버릴까 봐요….”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는 도윤범을 보며 남도하는 침음했다. 두 눈을 꼭 감고서 마음 깊숙한 곳에서 솟아나는 감정을 눌렀다. 여전히 도윤범이 저질렀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용서할 수 없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왜 이딴 몰골이 이리도 심장을 헤집어 대는 것만 같은지 알 수 없었다.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운 도윤범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리도 힘을 잘 쓰던 아이는 무기력하게 남도하의 손길에 따랐다. 비바람을 뒤로하고 집 안으로 이끌고 들어왔다. 후끈한 공기가 채우고 있던 방 안에 들어오자 바깥의 추위가 얼마나 매서웠는지 더욱 생생히 느껴졌다. 잠깐 맞은 비에 오한이 드는 듯했다.
불을 켜고 도윤범을 바라봤다. 얼굴은 하얗다 못해 창백하게까지 보일 정도였고, 몸은 경련하듯 잘게 떨렸다. 뚝, 뚝- 머리칼과 옷에 잔뜩 스며든 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얼굴에서도 물줄기가 턱을 타고 흘렀다. 그게 빗물인지, 다른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눈물이다. 남도하의 손이 차갑게 언 얼굴을 감싸 쥐자 방에 들어와 처음으로 시선을 맞춘 도윤범의 눈에서 왈칵 투명한 물줄기가 흘러나왔다.
“옷 갈아입어.”
손에 닿는 불편한 촉감에 정신을 차리고 손을 뗐다. 그럴 리 없는데 흐르는 눈물이 너무 뜨거워 손가락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아팠다. 그런데도 마치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한 것처럼 투박한 손길로 옷과 수건을 건넸다.
“대체 왜 거기 그러고 있어. 비가 오면 배로 가든지, 집으로… 하아, 됐다.”
타박을 하려던 남도하는 말을 멈추고 등을 돌려 젖은 옷을 갈아입었다. 잠깐 겨울비를 맞은 것만으로도 몸이 추웠다 더웠다를 반복하는데, 대체 몇 시간이나 저러고 있었던 걸까. 남도하는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형은… 왜 그랬어요.”
“무슨 소리야.”
그사이 건네준 옷으로 갈아입은 도윤범이 남도하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앞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여전히 머리칼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도 모르는지, 수건을 손에 쥔 도윤범은 제 몸의 남은 물기를 닦는 대신 남도하의 다리를 잡아챘다.
“왜, 맨발로 달려 나왔는데요?”
흙탕물이 묻은 발을 닦아 주며 묻는 말에 남도하는 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저 스스로도 그 답을 알 수 없었으니까. 그도 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는지, 마치 소중한 물건을 닦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두 발을 닦아 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잘못 생각했어요. 처음엔 어떤 모양이라고 하더라도 형이 제 옆에만 있으면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요, 이젠 싫어요. 차라리 못 봤으면 모르겠는데… 형이 제 옆에서 웃고 행복한 모습이 보고 싶어요.”
처음으로 제 이야기를 끊지 않고 들어 준 이유일까. 도윤범은 이미 먼지 하나 남지 않은 남도하의 발을 수건으로 감싼 채 속마음을 꺼내 놓았다. 얼마나 속으로 되뇌고 반복한 이야기인지,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지나치게 많은 감정이 뒤섞여 무거운 목소리였지만.
“근데 처음부터 그러려던 건 아니었어요. 처음엔 그냥… 형이 좋았어요. 말 한 번 섞어 본 적도 없는 사람이 좋았다니까, 좀 웃기죠? 근데 저는 그랬어요. 형 때문에 이렇게 살아 있는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근데 그런 형이 위험하니까, 도와줘야 하는데 가면 쓰고 나가는 거밖에 방법이 없었어요.”
꽤, 긴 이야기였다. 도윤범은 제가 토끼 가면을 쓰고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또 매니저로 곁을 맴돌 수밖에 없던 변명을 숨김없이 이야기했다. 적어도 남도하는 그렇게 느꼈다. 지금 도윤범은 한 치의 거짓도 섞지 않은 진짜 도윤범이라고.
“…실수라고, 시행착오 같은 거라고 한 번만 용서해 주면 안 돼요?”
긴 이야기를 끝내고, 도윤범은 질문으로 말을 마쳤다. 그사이 남도하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이야기는 토끼 가면과의 일이었고, 어떤 일은 도윤범과의 일이었다. 또 어떤 건 알고 있던 이야기였고, 모르던 이야기도 있었다. 모든 사실을 알고 나자 하나의 커다란 그림이 완성됐다.
방음이 될 리 없는 낡은 집이 내려앉을 것처럼 빗줄기가 굵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겨울비가 이렇게 요란하게 올 리가 없는데. 좁은 방엔 그저 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뿐이었다. 남도하는 자세를 바르게 하고 앉았다.
도윤범의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복잡한 심경이 정리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눈시울이 붉어진 남자를 마주 보고 있으려니 속이 더욱 좋지 못했다. 여전히 핏기가 가셔 돌아오지 않는 피부색도 그렇고, 며칠 새 더 말라 버린 것처럼 핼쑥해진 얼굴에선 예전의 생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움츠러든 어깨는 더욱더 작아 보였다. 손만 한번 휘둘러도 그대로 먼지 조각이 되어 버릴 것만 같을 정도로 위태로워 보였다.
“아니. 못 해.”
실수라니. 시행착오라니. 용서라니.
남도하의 짤막한 한마디에 도윤범은 세상을 잃은 것 같은 얼굴이 돼 버렸다. 그런 모습 역시 못마땅하기만 했다. 그래서 남도하가 움직였다. 무릎을 세워 상체를 일으키며 도윤범을 멱살을 움켜쥐었다. 힘껏 끌어당기자 도윤범은 맥없이 끌려왔다. 당황에 젖은 얼굴을 보며 남는 손으로 등을 감싸 받쳤다. 언제 이렇게 또 가벼워져 버렸을까. 못마땅함이 조금 더 자라났다.
들끓는 이 감정을 확인해야 한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이 마음의 정체를 알아야겠다.
당황한 듯 벌어진 도윤범의 입에 그대로 입술을 포갰다. 딱딱하게 굳어 버리는 몸을 힘껏 끌어안았다. 혀를 밀어 넣으며 정제되지 못하던 감정을 토설했다. 멱살을 쥐었던 손을 옮겨 차갑게 식은 뺨을 감쌌다. 밀려나려는 몸을 더욱 힘주어 안았다.
“흡….”
좁은 입안으로 거칠게 밀고 들어갔다. 맞물린 틈새를 완전히 없애 버릴 것처럼 달라붙어 도윤범의 입안을 헤집었다. 혓바닥이 점막을 훑고 지나갈 때마다 더욱 거센 감정이 피어났다. 화풀이하듯 입을 맞대고 있는 사이에도 새로운 마음들이 가슴에서 샘솟았다. 저 홀로 입안을 얼마나 짓씹었는지 남도하의 혀끝을 타고 비릿하고 시큼한 혈 향이 느껴질 정도였다.
“끕….”
짓눌린 신음과 함께, 뺨을 감싼 손으로 스며드는 물기에야 정신을 차렸다. 힘겹게 입을 벌린 채 제 행동을 받아 내려 노력하는 아이가 이제야 느껴졌다. 그래서 다시, 입술을 떼어 내야 했다.
“…아직은, 못 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도윤범을 다시 당겨 안으며 입술을 맞댔다. 차갑게 얼어 있던 도윤범이 남도하의 온기로 물들어 갈수록, 흐릿하게만 보이던 감정의 실체가 조금씩 선명해져 갔다.
젖은 몸을 제대로 닦지도 않고 옷을 도로 입었던 탓에 도윤범의 옷은 벗기는 쪽이 나았다. 그대로 입고 있다가는 추위만 더 심해져 버릴 것 같았다. 남도하는 입술을 떼지 않은 채 뜨거운 방바닥에 도윤범을 밀어 눕혔다. 한참을 안고 있었는데도 도윤범의 몸에서는 바깥의 찬기가 완전히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대로 젖은 티셔츠를 돌돌 말아 올렸다. 작은 반항을 하는 도윤범을 무시한 채 바지와 젖은 속옷까지 단번에 벗겨 버렸다.
“흡, 형…!”
갑자기 나체의 몸으로 만들어 버린 탓인지, 도윤범의 목소리에서는 방에 들어와 처음으로 높은 부름이 나왔다. 숨소리마저 잔뜩 거칠어져 벗겨 놓은 가슴팍이 요란스럽게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눈에 들었다.
“왜.”
남도하는 저답지 않은 목소리가 스스로도 낯설었다. 신경질적이고, 날이 서 있다. 못마땅하고 부정적인 감정이 한가득 깃들어 있었다. 도윤범이 작은 부정만 표해도 그대로 폭풍우 속으로 내던져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하는 짓은 또 달랐다. 도윤범이 빠르게 고개를 도리질하자 두꺼운 이불을 끌어와 그의 젖은 몸에 덮어 줬다. 남도하도 나름 거대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도윤범이 제게 했던 짓을 생각하면 당장 집 밖으로 내쫓고 싶은 마음이 드는 반면, 또 그러고 싶지 않은 마음이 대립했다.
“우선 좀 쉬어.”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 갈등이 더 깊어지는 것 같아 남도하는 불을 꺼 버렸다. 그러곤 도윤범이 누운 자리 옆에 앉아 후회해야 했다. 대체 입은 왜 맞추고, 애 옷은 왜 벗겼을까. 어둠 속에서 말 못 할 자책이 밀려들었다.
“…형, 안 자요…?”
도윤범은 어둠에 눈이 익숙해졌는지, 슬쩍 남도하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그 미력하기 그지없는 손길에 남도하의 갈등이 더욱더 복잡해졌다. 그러던 중 마음 가득 차오르던 부정적인 감정의 기원을 찾았다. 정확히는, 이유를 붙였다.
“읍…!”
얼굴만 빼꼼히 이불 밖으로 내밀고 있던 도윤범의 입술을 다시 물었다. 이불 안으로 손을 넣어 그의 맨몸을 감싸 안았다. 여전히 차가운 기운을 떨쳐내지 못한 몸은 안쓰러울 정도로 차갑기만 했다. 도윤범은 잠시 놀란 듯 보였지만, 그런 남도하의 행동을 막아서지는 않았다.
아까 화풀이를 하듯 입을 맞추던 것과는 다르게 부드러운 짓으로 입안을 훑었다. 뒷덜미를 받치고 걸레짝처럼 헤진 도윤범의 입술 안쪽과 점막을 치료하듯 매만졌다. 그러게 왜. 스스로 감당도 못할 짓을 벌여 혼자 벌을 받는다는 말인가. 이렇게 후회할 짓을 왜 그렇게 태연히 벌였다는 건가.
“흐읍….”
도윤범은 마치 벌을 받는 것처럼, 남도하가 제게 하는 행위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아님 기꺼운지 또다시 눈물을 왈칵 쏟아 냈다. 남도하는 그 눈물을 미처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입술을 떼어 내고 아래쪽으로 움직였다. 목선을 타고 내려가며 입을 맞추며 도윤범의 위에 올라탄 채 이불 속으로 얼굴을 밀어 넣었다.
남도하의 입술이 선을 그리듯 도윤범의 몸을 타고 내려갈 때마다, 조금 전과는 극명하게 다른 열기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연한 살을 이로 짓씹고, 또 입에 넣어 혀를 굴려 핥아댈 때마다 몇 시간이나 밖에서 달고 왔던 냉기가 자취를 감춰 갔다.
“아, 잠깐…!”
그러다 남도하의 입술이 도윤범의 가슴팍에 닿았다. 차갑게 식은 가슴팍을 데워 주듯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입을 맞추다 볼록하게 솟은 유두를 입안으로 삼켰다. 추위 때문인지 딱딱하게 기립한 유륜 근처를 입술로 물고 유두에 혀를 비벼 댔다. 그러다 꾸욱 누르기도 하고, 잇새에 넣어 다소 강하게 짓씹기도 했다.
“하, 형…! 읍….”
가면이 없어졌음에도 도윤범은 이를 악물고 새어 나오려는 신음을 참았다.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을 텐데. 남도하는 별다른 말 없이 빳빳하게 힘이 들어간 유두를 입에서 빼냈다. 그러곤 손끝으로 젖은 유두를 지분거리며 반대쪽도 똑같이 입에 머금어 빨아대길 반복했다. 그사이, 도윤범의 몸에 남아 있던 찬기는 완벽하게 떨어져 나갔다. 오히려 남도하가 들어 있는 이불이 갑갑하게 느껴질 정도로 열기가 차올라 옅은 땀이 흐를 정도였다.
“아직도 추워?”
남도하는 한참이나 도윤범의 양 유두를 씹고 핥고 또 비틀어대다 이불 밖으로 머리를 빼내며 그의 복부에 걸터앉아 상체를 세웠다. 여전히 도윤범의 한쪽 유두를 엄지와 검지로 비틀며 물었다.
“하, 아뇨… 읏, 안 추워요….”
그래 보였다. 간신히 쥐어짠 도윤범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짙은 열기가 감돌았다. 남도하는 그대로 제 맨투맨티를 벗어 던졌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남도하도 이젠 참기 어려운 흥분이 몰려왔다. 도윤범의 몸과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작은 신음 조각이 그렇게 만들었다. 머릿속을 시끄럽게 하던 수많은 생각을 모두 지워 버릴 정도로 본능에만 충실하게 만들었다.
“이리 와.”
남도하가 옆으로 누우며 하는 말에 도윤범은 빠르게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딱, 강아지 새끼 같은 꼴이었다. 남도하는 제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끌어 내리곤 도윤범의 다리 한쪽을 제 몸 위로 걸쳤다. 한 손은 목덜미 아래로 찔러 넣어 어깨를 감싸 당기고, 다른 손으로는 훤히 드러난 도윤범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민망한 듯하면서도 도윤범은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입술마저 도로 키스를 하며 막아 버렸다. 그때 두 사람의 가슴팍 사이에 껴 있던 도윤범의 손이 처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좁은 틈을 가르고 들어가며 남도하의 성기를 부드럽게 감쌌다. 예상 못 했던 행동이었기에 남도하의 입에서도 짓눌린 신음이 작게 새어 나왔다. 도윤범은 조금 더 강하게 성기를 쥐며 작은 손짓으로 흔들어 댔다. 어설픈 자극에 남도하의 혀가 더욱더 거칠게 도윤범의 입안을 헤집었다. 혓바닥을 목젖까지 찔러 넣을 것처럼 밀어 넣으며 그의 등덜미와 엉덩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하, 하아….”
잠시 입이 떨어지자 서로의 밭은 숨이 뒤섞였다. 도윤범은 여전히 소중한 물건처럼 남도하의 성기를 손으로 꼭 움켜쥐고 거칠게 숨을 내쉬고 있었는데, 남도하는 상황과 맞지 않는 그 모습이 조금은 우습게도 보였다. 그래서 도윤범을 그대로 들어 제 몸 위로 올렸다.
“조금 더 올라와.”
“…더요?”
“더.”
이미 가슴께에 앉아 있었는데도 더 위로 올라오라 하니 도윤범의 목소리에 당혹스러움이 담겼다. 하지만 그 의도를 파악했는지 도윤범은 허벅지로 남도하의 어깨 위를 짚으며 제 성기가 남도하의의 얼굴 근처까지 오도록 당겨 앉았다.
“이 와중에도 세우고 있네.”
흡사 질타하는 것 같은 말과는 다르게 부드러운 입술이 도윤범의 성기 끝에 입을 맞췄다. 확실히 이제 도윤범의 몸에 달라붙어 있던 냉기가 완전히 떨어져 나간 것 같다. 남도하의 입술에 닿는 매끄러운 귀두는 조금 전 입을 맞추었던 입술보다도 더욱더 뜨겁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혀를 내밀어 요도 끝부분을 할짝이자 도윤범의 엉덩이가 들리며 제 성기를 남도하의 입술에 더욱더 가깝게 가져다 댔다.
“하아… 형.”
점점 더 거리를 좁히며 다가오는 성기를 그대로 입에 머금었다. 이미 한껏 부풀어 있다 생각했던 게 입안으로 들어오며 더욱더 힘이 들어가며 다시 한번 크기를 키웠다. 입술을 모아 성기를 빨아 당기며 귀두를 혀로 감싸 핥을 때마다 도윤범의 몸이 튀었다.
“윽….”
각도를 맞추려 어정쩡한 자세로 들린 도윤범의 양 엉덩이를 잡았다. 살이 빠졌다고 해도 모든 부위가 그런 것은 아닌지, 그의 엉덩이는 부드러운 촉감으로 남도하의 손바닥을 가득 채울 정도의 살이 남아 있었다. 약간 힘을 주어 엉덩이를 잡아 벌리고, 그 사이로 검지 하나를 밀어 넣었다. 예상 못한 부위에 자극이 있었던 탓인지 도윤범의 엉덩이에 잔뜩 힘이 들어갔지만, 그 손길을 털어 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엉덩이를 더욱 높게 쳐들며 남도하가 만지기 좋은 자세를 만들었다.
“더, 더러워… 읏….”
엉덩이 골 사이를 쓸던 남도하의 손끝에 피부와는 명백히 다른 촉감이 닿았다. 앙다물어진 구멍은 침입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손끝이 닿자마자 더욱더 조여들며 제 모습을 숨기려 했다. 하지만 혀를 세워 입안에 들어온 도윤범의 요도에 찔러 넣을 듯 비벼 대자 그의 하반신에 들어찬 힘이 조금은 풀어졌다.
연하디연한 살이 참 생소했다. 입안을 채우고서 단물 같은 프리컴을 연신 쏟아 내는 타인의 성기는 그렇다 치고, 손끝에 닿는 매끈하고 오밀조밀 모인 구멍의 감각 역시 낯설었다. 하지만 남도하는 제 성기에 터질 것처럼 피가 쏠리는 거로 봐, 그 역시 흥분이란 걸 알아챘다. 구멍에 넣지도 않고 근처를 매만지는 것만으로 빳빳해진 성기에 통증이 들 정도였다.
“흣, 제가 할게요… 네? 형… 제발요.”
무엇을 하겠다는 걸까. 도윤범은 흥분에 젖은 듯, 눈물을 머금은 듯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그러면서도 남도하의 입에 물린 제 성기를 빼낼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답을 할 수 없는 게 당연했기에 남도하는 그저 고개를 작게 움직이며 도윤범의 성기를 더욱 깊게 삼켰다 빼내길 반복하며 구멍 대신 엉덩이를 양손으로 쥐고 터트릴 것처럼 주물렀다.
정돈되지 못한 호흡의 도윤범은 그대로 제 엉덩이골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아윽…!”
조금 전과는 명백히 다른 신음이 도윤범의 입에서 터졌다. 남도하의 손에 들어찬 엉덩이는 잔뜩 긴장이 들어갔고, 몸이 딱딱하게 굳는 게 느껴졌다.
“하, 하악….”
도윤범의 신음엔 점점 더 물기가 묻어났다. 이를 악물고 참는 거 같았지만, 느끼지 못할 수 없었다. 남도하는 손을 더듬어 도윤범의 엉덩이 사이를 매만졌다. 꽉 다물어졌던 그의 구멍엔 손가락이 하나 박혀 있었다. 구멍께를 쓸어보니 고작 두어 마디나 들어갔으려나 싶었지만, 그마저도 버거워 보였다. 남도하는 제 입에 들어차 있던 성기를 뱉고 입을 열었다.
“빼.”
“아니에요, 윽… 할 수 있어요.”
마치 보란 듯 도윤범은 제 손가락을 더욱더 깊게 구멍에 밀어 넣었다.
“빼라고. 그게 될 리가 없잖아.”
조금 더 엄한 목소리로 말하며 남도하가 직접 구멍에 들어찬 도윤범의 손가락을 천천히 잡아 뺐다. 나오는 동작마저 매끄럽지 않았다. 그럴 만했다. 아무런 윤활제도 없이, 생 손가락을 다물어진 구멍에 억지로 집어넣었으니까. 아무리 경험이 없다 해도 알 수 있었다. 저 구멍은 그런 식으로 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네가 그러면 내가 좋아할 거 같아?”
“…죄송해요, 형….”
도윤범은 금세 시무룩해졌다. 화를 내려던 건 아닌데, 목소리엔 화가 담겼다. 어째서. 이 아이는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잠시 잊고 있던 의문이 다시 떠올랐다. 하지만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적어도 지금 도윤범은 어둠을 이용해 거짓된 태도를 보이지는 않는다는 거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리 행동해야 할 정도로 절박하다는 거다.
“엎드려.”
도윤범은 남도하의 말에 몸을 일으켜 두 팔로 바닥을 짚고, 무릎을 바닥에 댄 체 엉덩이를 대고 엎드렸다. 조금 전 제 손으로 구멍에 손가락을 하나 밀어 넣을 때의 통증 때문일까. 그의 몸은 다른 흥분을 잊은 채 딱딱하게 굳어버린 것 같았다.
“움직이지 마.”
“…네.”
이런 태도를 보이는 이유를… 그래, 들어 보기는 하자.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우선은 도윤범에게 쌓인 화를 풀어야 한다, 라고 남도하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실제로는 그저 풀어질 기미가 없는 흥분에 다른 사고가 먹혀 버린 것뿐이었지만.
“아, 잠깐… 형!”
남도하가 움직이는 순간, 도윤범의 입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터졌다. 남도하는 도윤범의 아랫배에 손을 밀어 넣어 강하게 당기며, 다른 손으로 한쪽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그러곤 그대로 그의 엉덩이골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뜨거운 숨결이 닿는 것만으로 도윤범이 제게 벌어질 일을 예상한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형, 더러워요… 아, 흣…!”
다급한 음성에도 남도하는 멈추지 않았다. 손끝으로 매만질 땐 오밀조밀한 주름이 있던 작은 구멍에 손가락을 억지로 밀어 넣었던 탓인지, 조그맣게 부풀어 있었다. 남도하는 혀를 내밀어 구멍 아래 회음부에서부터 구멍을 지나 위쪽까지 길게 핥아 올라갔다. 그러곤 다시 같은 속도로 내려갔다가 질척하게 젖어들 때쯤 구멍에 입을 맞추듯 입술을 맞대고 혀를 세워 밀어 넣었다.
“안, 읏…!”
도윤범에게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은 여전히 유효한 것인지, 그는 두 다리와 팔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자세를 유지했다. 입에서는 삼킬 수 없는 신음이 연신 터졌고, 남도하가 혀를 움직일 때마다 생소하고 민망한 물기 젖은 소리가 방안에 퍼졌다. 사납게 내려치는 빗소리가 질척이는 소리를 그나마 조금 숨겨 주었다.
힘든 건 도윤범만이 아니었다. 남도하도 생전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던 부위를 애무하는 게 처음이었기에 거부감이 없었다면 거짓이다. 하지만 상대가 도윤범이라고 생각하자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녹진하게 풀어지는 구멍이 혀를 더욱 매끄럽게 받아들여 갈수록 남도하의 성기는 쿠퍼액을 쏟아 내며 흥분을 토해 내려 아우성쳤다. 당장 손으로라도 흔들어 대고 싶을 정도의 자극이 몰려왔다. 이 구멍에 혓바닥이 아니라 다른 걸 넣으면 어떨까. 충분히 풀어졌을까? 모르겠다. 더는 참기가 어려웠다.
“하, 하으….”
“싫으면 지금 말해.”
남도하는 도윤범의 허리를 감싸 이불 위에 바르게 눕혔다. 그러곤 그의 두 다리를 제 어깨에 걸쳐 엉덩이가 들쳐 올라가게 만들었다. 무릎을 대고 앉아 엉덩이골 사이에 빳빳하게 기립한 제 성기의 귀두를 맞춘 채 마지막 물음을 던졌다. 도윤범의 입에서 부정이 나오지 않길 바라는 이기심은 어쩔 수 없었다.
“해, 해 주세요… 형.”
그리고 예상처럼, 도윤범의 입에서는 긍정의 답이 나왔다. 그것도 아주 예쁜 말로.
“하고 싶어요, 형이랑….”
남도하도 더는 걸릴 게 없었다. 그대로 상체를 숙이며 뜨거운 구멍에 성기를 밀어 넣기 시작했다.
“아, 윽…!”
하지만 제대로 풀어지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것인지… 도윤범의 입에서는 참아 내기 힘든 신음이 새어 나왔다. 흥분에 눈이 멀었던 남도하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채 귀두도 다 집어넣지 않았는데…? 빼야 하는가 싶었지만, 아주 조금 도윤범의 몸 안에 들어간 것만으로도 성기가 미친 듯 아우성쳤다. 쫀쫀하게 달라붙는 내벽을 가르며 성기를 밀어 넣고 싶은 충동이 몰려올 정도로 자극적인 감각이었다.
“안 아프게 할게.”
모른다. 그렇게 해 본 적이 없으니까. 아니, 처음이니까. 그저 거짓말 같은 말을 하며 남도하는 상체를 숙여 밭은 숨을 토하는 도윤범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도윤범은 마치 그걸 기다렸던 것처럼 남도하의 목에 두 팔을 두르며 매달렸다. 통증을 잊기 위해서인지 도윤범의 혀가 부지런히 남도하의 입안으로 넘어와 구석구석을 핥아 댔다. 조그맣고 말랑거리는 혀가 다급히 점막을 쓸고 혀를 맞비벼 대는 감각에 남도하는 머리가 아찔해지는 거 같았다. 무슨 의도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좋지 못한 행동이었다.
“읍…!”
도윤범이 흥분을 더해 버린 탓에 더는 참지 못하고 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약간은 뻑뻑한 감각이 있었지만, 가능할 것 같았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리고 귀두가, 기둥이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마치 내벽은 살아 있는 것처럼 남도하의 성기를 감싼 채 주무르고, 또 빨아 대는 것처럼 움직였다. 그 감각에 밀어 넣는 동작을 멈출 수 없었다. 그나마 느릿하게 움직이는 게 남도하가 보일 수 있는 최선이었다.
“으, 으읍… 흡…!”
도윤범의 머리통을 손으로 감싼 채 아랫입술을 입안으로 삼켜 물었다. 말캉거리는 입술을 혀끝으로 쓸 때마다 시큼한 피 맛이 먼저 느껴졌다. 더는 짓씹지 말라고, 남도하는 제 혀를 도윤범의 입에 물려 주었다. 마치 사탕을 받아먹는 아이처럼 목에 매달려 연신 신음을 흘리며 혀를 달게도 빨아 댔다.
“으윽….”
더는 참기 어려운 흥분에 남도하는 슬며시 입술을 떼어 내며 허리를 슬쩍 뒤로 물렸다. 손가락 한두 마디만큼이나 빠져나갔으려나. 좁은 내벽이 딸려 나올 듯 남도하의 성기에 달라붙어 놓아 주지 않으려 욕심 부렸다.
“아파?”
도윤범은 고개를 도리질하며 괜찮다 했지만,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다.
“입술 물지 마.”
자꾸만 잇새로 말아 물어 댄 입술이 이젠 헤질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남도하는 도윤범의 입술에 제 손가락을 두 개 밀어 넣었다. 좁은 입안을 헤집으며 두 손가락 사이에 말캉거리는 혓바닥을 끼워 비비며 조금의 시간을 가졌다.
“흐, 읏….”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도윤범의 목구멍에서 넘어오는 신음이 달라졌다. 성기를 쥐어짤 것처럼 조여들던 구멍도 잠시 긴장이 풀어졌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남도하가 허리를 힘껏 쳐올렸다. 도윤범도 예상하지 못했는지 남도하의 손가락을 다소 강하게 물었다.
“하아… 괜찮아, 안 움직일게.”
남도하는 다시 상체를 숙이며 도윤범의 머리통을 감싸 안았다. 당장이라도 허리를 거칠게 흔들고 싶은 욕망이 들끓었지만, 그랬다가는 입술처럼 아래쪽도 상처가 나 버릴 것만 같았다. 남도하는 대신 도윤범의 젖꼭지로 방향을 틀었다. 놀란 마음을 달래 주듯 부드럽게 유두를 흡입하고, 핥았다. 까슬한 혀끝으로 유륜을 훑고, 입술을 모아 발기한 유두를 압박했다.
“하, 혀, 형… 아, 아읏….”
조금 전까지만 해도 통증을 연상시키던 신음이 달라졌다. 밭은 숨에 섞여 나오는 신음엔 숨기기 어려운 흥분이 달라붙었다. 도윤범의 유두를 입에 문 채 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짧게 두어 번 뺐다 넣었다, 그러고는 다시 길게 한 번 뺐다가 넣으며 어디선가 들었던 부분을 찾으려 노력했다. 오밀조밀 모여들며 성기를 주무르는 내벽의 감각에 다른 생각을 하기가 힘들었지만, 허리짓이 시작되자 도윤범의 몸에 긴장이 차오르는 게 느껴져 마음이 급해졌다.
“흐, 흣…!”
미세하게 튀어나온 듯한 부분이 귀두에 걸렸다. 들었던 것보다 매우 깊은 곳에 자리한 극점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효과가 있었는지 남도하가 그 부분을 반복해 쓸어댈 때마다 얌전히 자세를 지키던 도윤범은 온몸을 뒤틀었다.
“형, 하, 하윽… 이상해요, 아, 하아…!”
신체의 변화를 남도하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귀두와 기둥으로 도윤범이 느끼는 부분을 스칠 때마다 구멍이 더욱더 강하게 성기를 물었다. 허릴 뒤로 물릴 때면 내벽이 성기에 달라붙어 따라 나오고, 쾅 하고 처박을 때면 녹진하게 풀어진 구멍이 부드럽게 벌어지며 성기를 주물렀다. 빠르게 몰려오는 사정감을 참으며 허리를 더욱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윤범의 다리를 어깨에 걸친 채 상체를 숙이자 반사적으로 엉덩이가 더욱 위쪽으로 지켜 들렸다. 덕분에 남도하의 성기가 뿌리까지 파고들었고, 자세가 달라진 탓에 성기는 조금 전과는 또 다른 부위를 자극했다. 어느새 도윤범의 입에서는 통증을 상기시키기 어려운 신음이 연신 흐르고 있었다.
“잠깐, 천천히요! 흣…!”
도윤범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남도하는 한쪽 다리를 어깨에서 내려 제 허리에 감은 채 가랑이 사이로 손을 뻗었다.
“만지지 마요, 형…! 하, 아윽…!”
어쩌면 이렇게까지 예민할까. 도윤범의 성기는 빳빳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남도하가 손으로 감싸 쥐는 것만으로도 더욱더 힘이 들어가며 부피를 한 번 더 키우는 게 느껴졌다. 손바닥으로 질척해진 귀두를 감싸 비비며 허리짓에 박차를 가했다. 성기를 뽑아낼 것처럼 뒤로 물렸다가 뿌리까지 단번에 밀어 넣었다. 찰싹이는 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참기 힘든 사정감에 동작이 점점 더 거칠어졌다.
“자, 잠깐…! 흐읏, 아…!”
도윤범의 것을 쥐고 있던 남도하의 손을 뜨거운 액체가 뒤덮었다. 그의 성기에서 정액이 터질 때마다 내벽이 더욱더 자극적으로 성기를 빨아댔다. 사정을 재촉하는 흥분에 남도하도 성기를 다급하게 뽑아내야 했다. 아쉬웠지만, 완전히 이성이 끊어지지는 않았다.
“하아, 하….”
손으로 몇 번 훑지도 않아 도윤범의 몸 위로 뜨거운 정액이 잔뜩 튀었다. 배를 넘어 가슴팍까지. 딱 커다랗던 흥분만큼이나 사정이 길었다. 이젠 방 안이 너무 덥게 느껴졌다. 오래달리기를 한 것처럼 밭은 숨을 뱉던 남도하는 도윤범 위로 몸을 포갰다.
“괜찮아?”
“…안아 주면 안 돼요?”
우물쭈물 말하는 도윤범이었다. 남도하는 그에게 올라타 있던 자세를 틀어 도윤범을 품에 가두었다. 그러고서 사방으로 널브러진 이불을 모아 도윤범의 몸에 덮어 주었다.
“더워요.”
남도하도 더웠다. 낡아 빠진 연탄보일러의 온기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뜨거운 열기가 방안에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도윤범은 덥다는 말과는 다르게 남도하의 품에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한겨울에 흘린 땀과 정액으로 끈적이는 서로의 몸이었지만, 누구도 그걸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그사이 비바람이 더욱 거세졌나 보다. 일순 적막해진 방안과 다르게 요란스러운 소리가 집 밖에서 들려왔다. 이유 없이 불안해질 만한 날씨였음에도 남도하는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했다. 정신없이 흥분만 풀어냈다 생각했는데, 저도 모르는 사이 남도하는 또 다른 정답도 찾았다.
도윤범을 볼 때마다 주체하기 힘들던 짜증이 몰려오던 이유, 그 답을 얼핏 마주한 것 같았다. 남도하는 도윤범의 등을 조금 더 강하게 감쌌다.
* * *
“우리 집이 좀 잘 살았어요.”
유난스러운 겨울비였다. 한여름의 폭풍우가 온 것처럼 밤새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그 사이로 낯선 목소리가 퍼졌다. 남도하의 품에 안긴 도윤범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마치 처음 들어보는 사람의 것처럼 낯설기만 했다. 숨은 뜻을 헤아리기 어려운 말이었지만, 남도하는 한번 들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상한 일도 참 많이 벌어졌어요. 어릴 때 유괴만 두 번이나 당해 봤으면 말 다 한 거겠죠.”
유괴… 라.
“K&M에다가 자식이라고는 저밖에 없거든요. 그러니 유괴에 성공만 하면 돈을 한두 푼 주겠어요.”
남도하 입장에서는 생각조차 하기 힘든 이야기를 꽤 태연하게 꺼내 놓았다.
“처음에는 잘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어릴 때였는데, 금방 구출됐어요. 근데 두 번째는… 열두 살이었어요. 등하교할 때는 혼자가 아니니까 괜찮았는데, 사고는 소풍 날 터졌어요. 사실 그 전에는 소풍도 한 번 못 가 봤었거든요. 그러다 이제 괜찮겠구나 싶어서 부모님도 허락한 거였는데, 하필 그날 유괴를 당한 거죠.”
차마 뭐라 대꾸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부잣집이라고 다 좋은 건 아니구나 하는 말도 적절치 않았으니까. 그저 품에 들어온 아이의 등을 한번 힘주어 안고 말았다. 가슴팍에 대고 고해성사를 하듯, 품 안의 도윤범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일주일도 넘게 갇혀 있었어요. 차라리 나이가 어려서 기억이라도 흐릿하면 좋을 텐데, 그러기엔 머리가 너무 큰 나이였나 봐요. 허름한 창고 같은 집도, 묵은 곰팡이 냄새도, 밤이면 살을 에는 추위도 또렷하게 기억나거든요. 나중에 듣고 보니 몸값을 올리려고 그랬다나 봐요.”
안타까운 사연이다. 도윤범뿐 아니라 누구에게라도 일어나서는 안 되는 그런 일이다. …하지만 이 시점에 왜 저런 이야기를 꺼내는 걸까. 얼핏 부정적인 생각이 피어나려 했지만, 묵묵히 더 들어 보기로 했다.
“손도 묶여 있고 발도 묶여 있어서 꼼짝도 못 했죠. 쓰레기처럼 처박혀서 어린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세요? 처음엔 너무 살고 싶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이 바뀌더라고요. 죽고 싶다고. 너무 무서워서 그냥 콱 죽었으면 좋겠다고.”
남도하도 이해 못할 감정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격한 감정도 품어 본 사람이, 남도하 저였으니까. 허구한 날 엄마를 때리던 아빠를 보며 그냥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어릴 때 한 번은 엄마를 때리던 아빠의 등 뒤에서 제 머리통만 한 돌을 들고 고민한 적도 있었다. 이런 사람은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 물론 실행에 옮길 용기는 없었다. 그래도 저 고뇌만큼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그놈들이 드라마 하나만 반복해서 틀어 뒀었어요. 여러 편도 아니고, 딱 하나였어요. 소리도 안 들리고, 그냥 화면만 나왔어요. 근데 하도 여러 번 보다 보니까 소리가 안 들려도 내용이 이해되더라고요. 남자애는 허구한 날 괴롭힘을 당해요. 사물함에 넣어 놓은 책은 찢겨 있고, 책상엔 온갖 욕이 한가득하고, 머리 위로 물이 쏟아져요. 그런데도 그 애는 버티더라고요. 눈 하나 깜빡 안 하고서.”
처음 들어봐야 할 이야기가 이상하게 익숙했다. 10년도 넘은 드라마 이야기이지만, 얼마 전에도 누군가가 언급한 적 있던 드라마였다.
“저렇게 버텨 보면 되나…? 생각하면서 버텼어요.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무섭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텔레비전 화면을 보면 그 애가 버티고 있었거든요.”
“…그게….”
“천운이라고 해야 할지, 거의 열흘 가까이 돼서야 구조됐대요. 근데 그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더라고요. 몇 날을 방에 처박혀서 드라마만 봤어요. 치료받고 학교 다니다가도 문득 그때 기억이 떠오르면 다시 방에 처박혀서 그 드라마를 보고는 했어요. 열세 살, 열네 살, 열다섯 살… 그리고 지금까지. 형은 그때부터 제 옆에 있었어요.”
남도하에게는 악몽 같은 드라마였다. 열다섯, 아빠가 객사한 뒤였다. 빚쟁이들이 매일같이 빚 독촉을 하는 상황에 생계를 거의 홀로 책임져야 하는 일이 버거웠다. 원치 않게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해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드라마를 다르게 추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서주언도 그랬고, 도윤범도 그렇다.
“이해 못 해도 돼요. 그런데요, 저한테도 살아갈 이유가 필요했어요. 제멋대로 형을 그 이유로 삼아 버린 거지만, 그래야 살 수 있었어요….”
이게, 그 말도 못 할 집착의 이유인가 보다. 남도하 제가 절대 사랑이 아닐 거라 확신했던 감정의 정체가 여기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 후로도 긴 이야기가 이어졌다. 도윤범은 마치 이제야 제가 뒤집어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내는 것처럼, 어디에도 털어놓지 못했던 진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남도하는 자신의 삶이 제일 버겁다 생각했다. 실제로도 평탄하지 않았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 아이도 참 외로웠겠구나 싶었다. 명백히 다른 이유이지만, 쉽지 않은 시간을 버텼을 거라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한참이나 품에 안겨 입을 놀리던 도윤범이 움직였다. 고개를 들어 남도하를 마주 보는 얼굴은 딱 목소리와 같았다. 어둠 사이에도 지금 감정만큼은 숨김없이 알아챌 수 있었다.
“잘못했어요, 형. 제가 잘못했어요… 전부.”
답을 할 수 없었다. 차마 괜찮다는 말도, 이해한다는 말도 쉽사리 목구멍을 넘어오지 못했다.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고 해서, 그 행동의 동기를 알았다고 해서 도윤범에게 받은 상처가 모두 씻겨 내려갈 수는 없었다. 아무리 실수였다고 하더라도 남도하의 가슴에 너무나도 큰 상흔을 남겨 버렸다.
“…생각 좀 하자, 나도.”
그저 도윤범의 뒷덜미를 당겨 안고 말았다. 무슨 답이라도 해 주고 싶었지만, 복잡하게 꼬인 속내에 입으로 나오는 말은 저게 전부였다. 마른 등을 쉼 없이 쓸었다. 손에 닿는 야윈 어깻죽지에 숨이 불편해졌다.
빗소리는 점점 더 요란스러워졌다. 바람도 매서워졌다. 그만큼 혼란스러운 밤이 깊어갔다. 누구도 잠들 수 없는 시간이었다.
* * *
참, 대단한 아이다. 어쩌면 이렇게 모든 행동, 말 하나가 남도하의 신경을 거스르는 것인지 모르겠다. 남도하는 시도 때도 없이 몰려오는 짜증의 이유를 지난밤 깨닫기는 했다. 스스로 인정할 수 없었을 뿐이다.
“하아, 하아… 선장님! 일어나셨어요?”
남도하는 흙길을 따라 내달렸다. 밤새 내린 비가 새벽에 얼어붙었는지 흙길마저 미끄러워 제대로 걸음을 옮기기 어려웠다. 차갑게 식은 공기가 온몸을 쓸고 지나가는데도 가빠진 호흡에 이마에서 땀이 흐르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그게… 혹시 근처에 의사 없겠죠…?”
자고 일어나니 도윤범의 상태가 이상했다. 비를 너무 많이 맞은 탓인지, 아니면 그 뒤의 일이 문제였던 것인지 온몸이 끓듯 열을 내며 이마에서 식은땀을 연신 흘려댔다. 지난밤 먼저 잠든 도윤범의 몸을 물수건으로 닦아 주었던 것처럼, 다시 미지근한 물수건으로 닦아줘 봤지만 차도가 없었다. 의식마저 흐릿한 모습을 보자니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누가 아픈데?”
“그… 윤범이가 열이 나는데요….”
“상연이 먹는 약이 있기는 한데… 애들 거라 잘 안 들을 텐데…?”
도윤범의 상태를 들은 선장은 혹시 모르니 약을 챙겨 남도하의 집으로 갔다. 방 안에 들어서자 남도하가 집을 나설 때와는 다른 모습이 기다리고 있었다.
“너, 뭐해.”
“괜찮아요… 형.”
곱게 뉘여 놨던 도윤범은 벽에 어깨를 기댄 채 앉아 있었다. 괜찮다는 말과 다르게 앉은 자세만으로도 힘겨워 보였다. 입술은 파리하게 말라 있었고, 억지로 지어 보인 미소에 입술이 갈라져 핏물을 내비칠 정도였다.
“…너, 애한테 뭔 짓을 했냐.”
선장은 슬쩍 남도하의 귀에 대고 의문을 던졌다.
“…….”
“아주… 애 몸이 도화지가 따로 없네. 그렇게 싫은 척은 다 하더니.”
놀림 같은 말에도 반박할 수 없었다. 남도하 제 눈에도 도윤범의 몸에 남은 지난밤의 흔적이 고스란히 보였으니까. 급한 대로 티셔츠를 입혀 놓기는 했지만, 모가지에 울긋불긋 피어난 울혈을 모두 가릴 수는 없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요… 병원에라도 데려가야 할 거 같은데요.”
“오늘 파도가 너무 센데. 저대로 배 타고 나가면 더 안 좋아질 수도 있어.”
남도하는 도윤범의 등을 받쳐 도로 눕혔다. 괜찮다는 말과 다르게 이젠 또 오한이 드는지, 이불 안으로 파고드는 도윤범의 아래턱이 바들바들 떨렸다. 우선 선장이 챙겨 준 물약을 먹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효과가 없을 것 같았다. 차분히 기다리기 힘들어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휴대폰 비밀번호 뭐야.”
말리려 걸어 두었던 도윤범의 옷 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가 타고 온 배에 약이나 의사가 있는지 물어보는 게 좋을 거 같았다. 짤막한 숨을 내쉬던 도윤범은 눈도 뜨지 않고 입을 열었다.
“형… 생일이요.”
“아이고….”
그들의 대화를 듣던 선장의 입에서 짙은 탄식이 나왔고, 남도하는 민망함에 듣지 못한 척하며 잠금을 풀었다. 왜 비밀번호를 남의 생일로 해 두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통화 목록에 ‘아저씨’라 저장된 이름을 보고 상대를 유추할 수 있었다. 매번 보트를 몰고 오가던 남자에게 도윤범이 아저씨라 부르던 기억이 떠올랐다.
계속해 괜찮다 말하는 도윤범의 의사를 무시한 채 전화를 걸었다.
* * *
“배 타고 갈까요?”
“우선 약 먹이시고, 좀 계시면 의사 올 겁니다. 저희가 가는 것보다는 그쪽에서 오는 게 나아요.”
확실히 도윤범이 보통 놈은 아닌가 보다. ‘아저씨’라는 사람은 도윤범의 상태를 보고서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배에서 응급약을 가져와 건네주고, 어딘가에 전화해 의사를 불렀다.
“그럼 의사 도착할 때까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예….”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이리 이성적으로 나오니 남도하 저 홀로 괜히 호들갑을 떤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이 썩 틀린 것은 아니었는지, 도윤범의 상태는 빠르게 호전됐다. 열도 내렸고, 얼굴 혈색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남도하는 잠든 도윤범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널 어쩌면 좋냐.”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던 짜증의 이유는 스스로 깨달았다. 밀려드는 배신감에 여기까지 도망쳐 왔지만, 도윤범을 향하는 감정을 고작 배신감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미움도 감정이라고, 아무 마음도 없는 사람에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아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홀로 말을 붙이며 분위기를 띄우려 하고, 또 남도하의 한마디에 눈물을 내비치고. 얼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참기 힘든 화가 치밀었다가 또 막상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그건 그거대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젖은 수건으로 땀을 많이 흘렸던 도윤범의 몸을 다시 한번 닦아 줬다. 이불을 목 끝까지 당겨 덮어 주고, 잠든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방 밖으로 나갔다.
“형, 윤범이 형 괜찮아…?”
“응. 지금 자고 있어. 걱정하지 말고 상연이랑 놀고 있어.”
남도원이 찾아왔다. 소식을 들은 것인지 그의 얼굴에도 수심이 가득했다. 남도하는 얼핏 의문스럽기도 했다. 언제 이렇게 두 사람이 친해졌을까.
“형… 있잖아.”
“응?”
남도원은 다리가 저린지 마루에 걸터앉으며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난 윤범이 형 좋은 사람 같은데….”
옆에서 지켜봤으니 대충 눈치를 챘을 거다. 남도하 제가 도윤범을 마땅치 않아 한다는 걸. 모든 사람이 알면서도 굳이 남도하에게 말하지 않던 이슈였다. 어쩌면 믿음이었을 수도 있겠다. ‘남도하가 그럴 정도면 이유가 있겠지.’ 하는.
“그래… 착한 애지.”
“응. 형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일 수도 있어.”
짧은 시간 애를 이렇게까지 홀리다니. 남도하는 제 동생이 하는 말이 조금 기가 막혔지만 반박하지 않았다. 남도원의 입에서 저런 평가가 나오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 실상 도윤범이 남도원에게 친절했던 이유는 짐작이 되지만, 굳이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다. 적어도 남도원에게는 도윤범이 좋은 사람으로만 남아 있어도 될 것 같았다.
“선장님 댁에 가서 밥 먹고 상연이랑 놀고 있어. 난 의사 선생님 오는 거 봐야 하니까.”
“나는 이따가 배 오면 집에 먼저 가려고.”
“…혼자?”
“아니, 데려다준대. 그리고 나 돌아가면 학원 다닐 거야, 형.”
남도원은 할 말을 생각해 왔던 것처럼 쉼 없이 입을 열었다. 겁이 많고 소심하던 아이가 꽤 달라져 있었다.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뭐든 배워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했다. 예전이었다면 영혼 없이 ‘그래’라고 답하고 말아야 했겠지만, 지금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완전히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남도원도 이제 한 사람의 몫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도윤범 덕분에.
“그래. 하고 싶은 거 다 해 봐. 그러다 일자리도 찾고 그러자.”
죽을 때까지 평생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야 할, 벗어 낼 수 없는 굴레라고 생각했다. 업보려니. 하지만… 이젠 아니다. 어느새 남도하의 등에 올려져 버겁게 짓누르던 삶의 무게는 대부분 떨어져 나가 있었다. 도윤범이 그랬다.
* * *
“죽 좀 먹어.”
의사가 다녀갔다. 꽤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이렇게 외진 섬이라는 걸 감안하면 매우 빠르게 도착한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주사를 한 대 맞고 잠을 좀 자고 나자 도윤범의 상태는 눈에 띄게 호전됐다.
“…형은요?”
“난 좀 전에 먹었어.”
“거짓말 같은데….”
거짓말은 아니었다. 선장님은 죽을 만들며 남도하에게 먼저 먹였다. 밤새 힘을 많이 썼으니 얼마나 피곤하겠냐는 뼈 있는 걱정을 하면서. 민망함에 죽을 마시듯 먹어야 했다. 그러고서 도윤범의 것까지 챙겨주는 다정한 남자였다.
“선장님이 만들어 줬나 보네요.”
“…어. 나중에 인사드려. 약도 주시고, 죽도 끓여 주셨으니까.”
남도하는 조금 민망했다. 직접 만들어 보려 했지만, 집에는 제대로 된 재료도 없었을 뿐 아니라 요리 실력 역시 형편없었다. 배달 음식도 없는 이곳에서 살다 보니 요리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한층 짙어졌다. 천만다행으로 여전히 기운이 없어 보이던 도윤범은 죽 그릇을 모두 비워 냈다.
“그럼 쉬어.”
“형, 조금만 옆에 있어 주면 안 돼요…?”
빈 그릇을 들고 나가려던 남도하는 걸음을 멈춰야 했다. 그럴 리 없는데 저를 향하는 목소리가 위태롭게 들리는 듯했다. 조심스럽고 힘없는 목소리 때문에 괜스레 지난 저녁 폭우 속에서 대문 앞을 지키던 도윤범의 모습이 떠올라 버렸다.
“누워. 너 좀 더 쉬어야 하니까.”
하여 그대로 도윤범을 두고 나갈 수 없었다. 쟁반을 한쪽으로 밀어 놓고 딱딱한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방은 몇 시간에 한 번씩 연탄을 바꿔 가며 온기를 잃지 않게 유지하고 있었다. 그대로 나가지 않겠다는 뜻을 전한 덕분인지 도윤범은 이불 위에 몸을 뉘었다. 남도하는 말똥말똥 눈을 뜨고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시선을 슬쩍 돌렸다.
차라리 도윤범이 정신을 잃고 있는 쪽이 낫다 싶었다. 그를 보려니 괜히 지난밤 있었던 ‘그 일’이 머릿속을 맴돌며 속을 시끄럽게 했다.
“허리가 너무 아파요. 엉덩이도 아프고… 형이 씻겨 줬어요?”
남도하는 침음했다. 젖은 수건으로 잠든 도윤범의 몸을 닦아 주던 순간이 떠올랐다. 어쩔 수 없었다. 따뜻한 물도 나오지 않는 집에서 제대로 씻길 수도 없어 물수건으로 몇 번이나 제가 남긴 흔적을 훔쳐야 했다. 그사이에도 끓어오르던 흑심을 달래기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미안. 몸이 안 좋은 줄은 몰랐어서.”
누렇게 다 낡은 벽지를 보며 말했다. 마치 아픈 아이에게 못된 짓을 저지른 것만 같아 오늘 아침부터 꽤 오래 자책해야 했다.
“고마워요, 형.”
이불 밖으로 튀어나온 손이 남도하의 손을 감쌌다. 무엇이 고맙다는 건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남도하는 이번에도 그 손을 털어 낼 수 없었다. 여전히 이런 도윤범이 매우 못마땅하지만, 어쨌든 자신이 그렇게 화를 주체할 수 없었던 이유는 확실히 알았으니까.
“고마워하지 마.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 거니까. 너 생각해서 한 건 아냐, 어제 일 아무것도.”
“…그래도 고마워요, 전부.”
“자고 있어. 일하러 갔다 올 테니까.”
“같이 갈까요?”
“얌전히 있어. 확… 쫓아내기 전에.”
툴툴거리는 목소리처럼 투박한 손길로 이불을 덮어 줬다. 도윤범도 지금 이게 끝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서인지, 길게 질척이지는 않았다. 어쩌면 도저히 움직일 몸 상태가 아니어서일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아… 미쳤지, 미쳤어.”
방 밖으로 나오자마자 매서운 바람이 들이쳤다. 그런데도 속이 더 뜨거워 찬바람이라도 좀 맞아야 할 것 같았다. 가만히 있으면 답 없는 생각만 더욱 짙어질 뿐이라 애써 몸을 움직였다. 바닷가 바위 사이에 설치한 통발을 확인하고 바람에 망가진 아랫집 할아버지 집 닭장도 고쳐 줬다. 그 덕분에 저녁상을 차릴 정도의 식재료를 얻을 수 있었다.
* * *
“뭐 하냐. 이제 바다 보고 있는 건 안 하는 줄 알았더니.”
“아… 오셨어요.”
집에 돌아가지 않고 바닷가에 앉아 해가 지는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야… 이제 내 식량 창고를 아주 탈탈 털어 가는구나.”
“…죄송합니다.”
통발에서 뺀 게 틀림없는 생선이 버젓이 있었으니 발뺌을 할 수도 없었다.
“도하 네 동생 간다니까 상연이가 울고불고 난리가 났더라.”
“아… 괜히 미안하네요. 저희 아니었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요.”
“오랜만에 사람 사는 거 같고 좋던데 뭘. 어차피 다 이렇게 왔다가 가는 거지.”
황혼의 시간이었다. 두 남자는 서로 이야기하며 저물어 가는 붉은 태양을 넋 놓고 바라봤다. 바다에 걸린 듯 움직이지 않는 것 같은 태양은 느리지만, 천천히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도하야.”
“네, 선장님.”
“어차피 해도 후회할 거 같고, 안 해도 후회할 거면 그냥 해. 해 보지도 않고 평생 후회하는 건 너무 힘들더라.”
언제나 저무는 해는 아쉬움을 남겼다. 이 자리에 앉아 수 없이 바라보던 태양이 떨어지던 순간, 남도하는 수많은 아쉬움을 삼켜야 했다. 자책도 했고 타인을 탓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모두가 아쉬움이었다. 그러지 말 걸, 그때 만나지 말 걸, 마음을 주지 말 걸….
“그러려고요. 저… 그래도 되겠죠?”
남도하는 이리도 제 마음이 힘든 이유 역시 찾았다. 이번에도 모든 원인은 도윤범이었다.
“해, 인마! 다 해 보고 나서 후회하자, 차라리.”
* * *
“형아…!”
상연이는 남도하를 유달리 잘 따랐다. 나이 차이가 꽤 나서 절대 형이라고 부를 상대가 아니었음에도 아이의 눈에는 형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저 멀리서 꽁꽁 싸맨 어린이가 짧은 다리를 바삐 움직이며 남도하를 향해 달려왔다.
“뭐야.”
막 상연이 남도하의 다리에 달라붙기 전, 모자를 잔뜩 뒤집어쓴 상연의 머리통을 턱 막는 손길에 아이의 걸음이 멈췄다. 제 행동을 막아선 놈을 보며 상연이 뾰족한 시선을 던졌지만, 상대는 일말의 타격도 받지 않은 듯했다.
“비켜!”
어린아이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튀어나왔지만, 남도하의 앞을 막아선 남자, 도윤범은 비켜 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싫은데? 쪼그만 게 어디서 그렇게 아무한테나 안겨.”
“씨… 너 싫어!”
“응. 나도 너 싫거든.”
도윤범은 상연이와 친해지는 데 실패했다. 정확히는 친해지려는 노력 자체를 하지 않았고, 수시로 이렇게 시비를 걸고 있었다.
“도윤범, 그만해. 너보다 스무 살이나 어린 애랑 뭐 하는 거야.”
“형! 나이가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요?”
남도하가 상연을 안아 들자 도윤범의 목소리가 앓는 소리로 바뀌었다. 반대로 상연은 헤실거리며 짧은 두 팔을 남도하의 목에 둘렀다.
“다섯 살이야, 다섯 살.”
“요즘 애들이 얼마나 빠른데요. 특히 얘는 더해요. 쥐방울만 한 게 벌써부터 예쁜 거만 밝히고.”
“나 쥐방울 아니거든!”
상연은 남도하가 제 편을 들고 나서자 더 큰소리를 쳤다. 남도하와 도윤범 사이의 상하 관계를 정확히 인지한 덕분이다. 남도하의 한마디면 도윤범이 입을 다물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만해라. 자꾸 싸울 거면 그냥 집에 가.”
“…아니에요. 안 싸워요.”
도윤범의 몸살이 완전히 나은 지도 꽤 지났다. 그사이 남도원은 집으로 돌아갔고, 선장님은 한 번 배를 타고 밤낚시를 다녀왔다. 그때 상연은 자연스럽게 남도하와 시간을 보냈는데, 그때부터 도윤범과 상연이의 기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다섯 살 어린이에게 시비를 거는 도윤범도 도윤범이었지만, 저보다 몇 배는 커다란 어른에게 지지 않는 상연이도 제법이었다.
“난 형아가 쟤랑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
상연이는 커다란 소리로 남도하의 귀에 속삭였다. 손으로 가리고 속닥거리는 듯 보이기는 했지만, 도윤범의 귀에까지 그 소리가 들릴 정도였으니 상연의 의도는 성공이라고 보아야 했다.
“그래? 그러면 상연이하고 살까?”
“상연이랑 아빠랑 형아랑 같이 살면 좋을 거 같아!”
아이는 남도하의 품에 안긴 채 짧은 다리를 휘저으며 솔직한 감정을 전했다. 남도하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그저 상연이를 조금 더 힘주어 안고 말았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또 다른 이는 똑같이 태연히 넘기지 못했다.
도윤범은 두 사람을 지나쳐 앞장서 걸었다. 걸음을 내딛는 뒷모습에서도 정돈되지 못한 감정이 그대로 읽혔다. 대체 어떤 부분에서 삐졌을까. 저랑 같이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부분? 아님 아빠랑 셋이 살고 싶다던 부분?
남도하는 머지않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 * *
“형은 너무 위기의식이 없는 거 같아요.”
선장님의 준비로 오늘은 야외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낚시를 나갔다 오며 오랜만에 육지에서 고기와 채소를 잔뜩 구해와 바닷가 자갈밭 위에 불고기 판이 벌이려 했다. 불을 피울 땔감을 나르던 중, 도윤범이 남도하에게 불만을 표했다. 오랜만에 듣는 못마땅함이 가득 들어찬 목소리였다.
“그렇지. 내가 위기의식이 없기는 했지.”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요….”
물론 본전도 못 찾을 투정이었다. 선장님이 미리 한쪽에 모아 둔 마른 장작을 챙기며 받아친 남도하의 말에 도윤범은 침음했다. 의도했던 바와 다르게 괜히 잊고 싶은 ‘토끼 가면’에 대한 이야기로 전개가 튀어 버렸다.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요. 솔직히 아무 이유 없이 친절한 사람이 있을 거 같아요?”
도윤범은 이야기가 나온 김에 속에 쌓인 말을 하기로 작정한 것 같다. 남도하를 슬쩍 밀치며 잘 마른 장작을 직접 챙기기 시작했다. 요즘의 도윤범이 이랬다. 남도하가 뭐라도 하려 하면 먼저 나서서 제가 직접 일을 하기 바빴다. 소일거리가 된 마을 주민들의 심부름도 어느새 도윤범의 차지가 되어 있었다. 그물을 손질하고, 바람에 날아간 지붕을 고치는 둥. 조그만 섬에서도 매일같이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그 대신 반찬이나 음식 재료를 얻을 수 있었으니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누구 얘기야?”
“저… 선장님이요. 형이 뭘 모르는 거 같은데요, 남자들 생각은 다 똑같다고요.”
도윤범은 생각보다 일을 잘했다. 야무지다고 해야 할까. 보드랍고 여물지 않은 듯한 피부의 손이 행하는 거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뭐, 토끼 가면일 때를 생각하면 못할 일이 없어 보이기도 했지만.
“…선장님이, 뭘?”
“형이 몰라서 그러는데, 진짜 딴생각 품고 있을 수도 있다고요….”
하지만 요즘 남도하가 대화를 조금은 받아 준 탓인지, 도윤범의 입에서 오늘 헛소리가 방언처럼 쏟아져 나왔다.
“…미쳤어? 애 아빠야.”
“애 아빠는 뭐 사람 아니에요? 전 충분히 의심스럽던데요.”
“네가 제일 의심스러워.”
“저는 그냥 형을 사랑하는 건데요?”
바닷바람이 남도하의 얼굴을 치고 지나갔다. 유달리 끈적이는 것 같고, 숨 막히는 습한 공기가. 참, 한결같은 뻔뻔함이었다. 어떻게 저 말을 저리 당당하고 또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까…? 남도하는 마치 제가 그 말을 한 것처럼 몰려오는 민망함에 먼저 걸음을 돌렸다.
“형! 같이 가요…!”
도윤범은 장작을 챙겨 빠르게 걷는 남도하의 옆을 따라 걸었다.
“아무튼 조심해요. 제가 보기엔 틀림없이 형한테 흑심 있는 거 같으니까요.”
“그래서 다섯 살짜리 어린이한테도 질투를 했나 봐.”
“쟤도 보통이 아니에요. 제 눈엔 다 수상해요.”
말이 통하지 않는 것 같아 남도하는 고개를 털며 조금 더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장작 얼른 넣어라. 오랜만에 고기 배 터지게 먹어 보자.”
돌을 쌓아 만든 간이 아궁이 위에 솥뚜껑이 올라갔다. 고기와 갖은 채소가 올라가 삽시간에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주변을 감쌌다. 오랜만에 찬바람도 불지 않는 따뜻한 날이라 더 좋았다. 바다에서 바로 잡은 해산물까지 더해지자 부족함이 없었다.
“형아, 아.”
“나…? 괜찮은데….”
상연이 손으로 한참 주물러 대던 고기가 상추에 싸져 남도하의 입 앞에 다가왔다. 정말 조금, 머뭇대다 결국 아이가 내민 걸 받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맛있지? 내가 줘서!”
“응, 맛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챙겨 준 것이니 없던 맛도 생길 것 같기는 했다.
“얀마. 아빠는 안 주고 왜 형만 줘.”
상연이가 바빠졌다. 잘 익은 고기를 제 입에도 하나 넣어야 했고, 아빠 입에도 넣어 줘야 했고 또 남도하에게도 줬다. 보란 듯 도윤범은 패스했다.
“형, 이거 먹어요. 형은 해산물 더 좋아하잖아요.”
도윤범도 바빴다. 잘 익은 새우 껍질을 먹기 좋게 벗겨 남도하의 앞접시에 올려 줬다.
“너 먹어. 잘 먹어야지.”
남도하가 보기에 도윤범은 아직 완전하다 할 수 없었다. 제가 말을 받아 주자 확실히 요즘 들어 조금 괜찮아지기는 했지만, 마음속 걱정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는지 문득 수심 가득한 얼굴이 되고는 했다. 나름 잘 먹이고 있었는데도 살도 제대로 오르지 않은 건 당연했다.
시간이 오후로 접어들 때쯤 식사가 끝났다. 식사 흔적을 완전히 지우고, 난로 대신으로 모닥불만 켜 두었다. 선장님이 잠든 상연이를 집으로 옮겨 두는 사이, 남도하와 도윤범만 바닷가에 남았다.
“아직 추워. 덮어.”
“…고마워요.”
태양이 유달리 밝은 날이었다. 바다도 평온하게 멈춰 있어 마치 호수처럼 보이기도 했다. 찬란하게 내리치는 햇살이 수면에 닿으면 눈부시게 쪼개졌다.
“여기 좋네요… 진짜.”
“그렇지.”
“우리 여기서 살까요? 그냥 이렇게 살아도 좋을 거 같은데.”
도윤범의 장난 같은 말에 남도하는 옅은 웃음을 지었다. 솔직한 말로 남도하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이런 생활이 썩 싫지 않았다. 아무런 고민도 없는 곳에서 자급자족하며 최소한의 생계를 이어가는 일.
“안 그래도 조금 더 있으려고.”
“형 있고 싶을 때까지 있어요. 저도 그럴 거예요.”
도윤범도 재촉하지 않았다. 마치 옆에만 있을 수 있다면, 어디라도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
“아니. 너는 돌아가.”
남도하가 다음 말을 잇기 전까지의 이야기다. 일순 타협의 여지가 없는 목소리가 나왔다.
“…네?”
“내가 생각할 시간이 조금 필요하다고 했지.”
“그건….”
“그 생각 끝났어.”
순간 찬바람이 거세게 두 사람을 치고 지나갔다. 따뜻한 온기를 품은 듯하던 바람이 일순 매서워졌다. 그래서 그런지 도윤범의 얼굴 역시 빠르게 굳어 갔다. 애써 품었던 실낱같은 희망이 사라진 듯, 표정이 허물어졌다.
“이게 내 답이야. 그만 돌아가.”
바람이 조금 더 차가워졌다.
* * *
“이거 아쉬워서 어떻게 하나.”
“또 놀러 올게요, 선장님.”
“그렇게 바쁜 배우님이 올 수나 있겠어?”
“바쁘기는요. 시간 날 때마다 올게요.”
남도하는 두 달 가까운 시간을 섬에서 보냈다. 도윤범은 진작 쫓겨 갔다. 또 사라지는 꼴을 보고 싶냐는 남도하의 협박에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세상을 잃은 것 같은 뒷모습은 아직도 남도하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다. 하지만 남도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도윤범과 함께하며 보낸 시간은 특별했다. 아무런 거짓과 가식도 없는 그의 모습을 충분히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도윤범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충분히 반성하고 있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불쑥불쑥 떠오르는 부정적인 감정을 완전히 떨쳐 내기 어려웠다. 마음 깊은 곳 잃지도 않은 다른 감정이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그대로 도윤범을 용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형아… 이제 가는 거야…?”
상연이의 커다란 눈엔 말간 눈물이 잔뜩 고였다. 시뻘게진 볼을 한 채 저를 올려 보는 아이를 향해 무릎을 접어 앉았다. 바닷가에서 새우 과자를 나눠 먹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러 버렸다. 함께한 시간이 좋았던 만큼, 남도하도 아쉬움이 커다랬다.
“또 놀러 올 거야. 상연이 보러 올게.”
남도하가 등덜미를 감싸 안아 주자 아이는 품에 안겨 꺽꺽거리는 울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짧은 인연도 이별엔 아쉬움이 남았다. 아이는 언젠가 원래의 일상을 되찾을 테지만, 한동안 이번 겨울을 떨쳐 내지 못할 거다. 그게 좋은 의미이든 그렇지 않든.
“그러니까 아빠 말씀 잘 듣고 있어야 해. 그러면 형이 또 금방 올게.”
힘주어 아이의 등을 안아 줬다. 아쉬움이 담긴 이별의 시간이 길었다. 한참만에야 상연이를 놓아 주고 섬에 올 때처럼 작은 가방만 하나 들고 선장의 배에 올라탔다.
“저번에 그 큰 섬까지만 태워 주시면 돼요, 선장님.”
“그냥 한 번에 육지까지 가. 귀찮게 뭐 하러.”
망망대해 사방을 바다가 채우고 있었다. 섬에서 한참 나아온 뒤에도 선장과 남도하 사이에 별다른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이제 보니 상연이와 선장님은 빼다 박은 듯 닮아 있었다. 섬에서 내보이던 상연의 감정이 선장의 얼굴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선장님이 와도 돼요. 상연이랑 같이요.”
“…거기가 어디라고. 난 뭍에만 올라가도 멀미가 나는 사람이야.”
“그래도요. 서울 오시면 제가 제대로 보답할게요. 그동안 신세 진 게 너무 많아서….”
참 별난 인연이었다. 배우 생활을 하며 아득바득 살아갈 때엔 주변에 제대로 된 사람 하나 남아 있지 않았었다. 친분을 유지하고 인연을 만드는 데도 돈이 들어간다 생각해 혼자인 쪽을 선택하고는 했었으니까. 하지만 인생 가장 초라한 몰골로, 빈손이나 다름없이 도망친 곳에서 과분한 사람을 만났다. 시작은 도피였지만, 그들 덕분에 치유의 시간이 되었다.
“다음엔 그놈이랑 같이 와.”
저 멀리 항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두 달 넘게 섬에 있다 나오니 시골 항구마저 거대한 도시처럼 느껴지는 기현상이었다. 남도하는 한창 항구에 시선을 빼앗겼다가 선장이 하는 말에 고개를 돌렸다.
“아주 몹쓸 놈처럼 보이지는 않더라.”
“몹쓸 놈… 일 수도 있는데요?”
남도하는 선장과 대화를 하며 손가락 한 마디보다 작은 검정색 기기를 손끝에 올렸다.
“그게 뭐야?”
“몹쓸 놈이 한 몹쓸 짓이요.”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도윤범은 떠나며 남도하의 짐에 위치 추적기를 붙여 놓았다. 짐 가방 구석에. 이 반성 없는 놈을 어쩌면 좋을까 고민하다 보니 생각이 절로 길어졌고, 여태 이걸 버리지 않고 있었다. 육지에 닿기 전, 남도하는 바다에 추적기를 던져 버렸다.
두 달 만의 귀환이었다. 모든 생각을 정리한, 남도하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