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백일몽(Day dream) side B (1)=)
여섯 시.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같은 시각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떨 때는 알람이 먼저 울리기도 하고, 어떨 때는 스스로 일어나기도 했다. 오차는 10분 남짓. 생긴 것처럼 남도하는 참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
덕분에 나도 매일 이른 시간 눈을 떴다. 함께 똑같은 아침을 맞이하는 게 얼마나 긍정적인 효과인가. 탄산수를 마시며 정신을 차리는 남도하를 보려니 조금, 귀여웠다. 탄산수가 똑 떨어진 것도 모르는 그를 보고 밤사이 조용히 집에 들어가 넣어 놓았는데, 냉장고 앞에서 한참이나 서성이는 걸 보니 인제야 이상한 걸 눈치챈 것 같다.
“귀엽네….”
태블릿 화면 너머, 의아해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손끝으로 화면을 쓸었다. 앞에 있었다면 당장 입을 맞춰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생긴 것과 달리 남도하는 꽤 무감각했다. 벌써 몇 달이나 이어 온 내 도움을 이제야 슬슬 눈치채고 있었다. 대놓고 흔적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소소한 변화를 알아채기는 어렵지 않았을 텐데 그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잘도 뛰네, 진짜.”
그가 집을 나가는 모습을 확인한 후, 나도 외출 준비를 했다. 씻고 나올 때에야 남도하의 위치가 집 근처에 다다라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그는 정해진 규칙을 따르는 것처럼 행동했다. 간단한 아침을 먹고 씻는다. 그러곤 남들 출근 시간에 맞추어 집 앞에서 버스를 탔다. 직원이 아닌 배우였기에 굳이 소속사에 매일같이 출근할 필요가 없었는데, 그는 주말을 제외하고는 매일 출근 도장을 찍었다.
“어, 어…!”
오늘은 버스에 자리가 없었다. 이어폰을 낀 채 손잡이를 잡고 있던 남도하가 잠시 두 손으로 휴대폰을 만지는 사이, 버스가 크게 흔들렸다. 균형을 잃은 남도하의 몸을 뒤에서 슬쩍 잡아 줬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건네는 그를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서야. 이러니 내가 옆에 붙어 있을 수밖에 없는 거다.
버스에서 내려 커피를 사고, 회사 건물로 들어가는 남도하를 조용히 배웅했다. 오늘도 아마 퇴근 시간까지는 회사 안에 있을 것이다. 별다른 스케줄이 없었으니까.
“계산해 주세요.”
나의 낮은 꽤 바빴다. 원하든 원치 않든 개인적인 일을 처리해야 했고, 남도하도 돌봐야 했다. 물론… 그가 알아채지 못하게 말이다. 마트에 가 남도하의 집에 떨어졌을 법한 물건들을 조금 샀다. 오늘은 샴푸, 세제, 티셔츠 몇 개다.
집 비밀번호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다. 지문이 묻은 네 개의 숫자로 유추해야 했는데, 그와 관련된 날짜를 떠올려 보니 군대 제대 날짜였다. 짤막한 머리의 남도하라…. 그 모습도 멋있기는 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군 복무 당시 사진을 몇 장 구해서 가지고 있다.
“하아… 이 거지 같은 집구석은 진짜….”
현관을 열고 남도하의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원체 낡은 빌라인 탓도 있지만, 내 기준으로… 아니, 대다수의 사람들 평균으로 보아도 허름하다 할 수밖에 없는 집이었다. 유달리 어두컴컴한 거실 조명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집에 있는 것만으로 부정적인 기분이 자라나 버릴 것 같은 공간이다. 베란다 창을 활짝 열어도 햇볕이 제대로 들지 않았다.
반쯤 체념한 채 환기를 시키려 창을 열고, 청소기를 돌린 후 사 온 물건들을 원래 통에 채워 넣었다. 남도하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적당히. 생각 이상으로 무심한 남도하의 사정은 이해한다. 벌이가 시원찮다 보니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듯하다. 자고로 사람은 돈이 없으면 다른 일에 집중할 수가 없는 법이다. 당장 생계가 급급하니 이따위 샴푸가 떨어지는 일에 집중할 여력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챙겨 주는 게 당연하고.
“…하.”
빨래 바구니에 벗어 놓은 옷가지를 세탁기에 넣다가, 몰려오는 충동을 이기지 못했다. 아침에 벗어 놓은 티셔츠를 쥐고 얼굴을 파묻었다. 옅게 남은 남도하의 향이 폐부를 채워 올수록 심장이 요동쳤다. 삼켜도 삼켜도 숨이 부족해지는 기분이고 갈증이 몰려와 입안이 메말라갔다.
“미치겠네….”
아랫도리는 이미 한계 이상으로 힘이 들어가 버렸다. 남겨진 흔적만으로도 내겐 충분한 자극이었고, 흥분이었다. 남도하는 내게 그런 존재였다.
이 이상의 짓을 하지 않은 건 마지막 남은 이성 덕분이다. 얼마나 참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그리고 좀 미안하지만, 이 티셔츠도 내 집으로 가야 할 것 같다. 대신 똑같은 브랜드의 새 티셔츠를 빨랫감 사이에 섞어 세탁기를 돌렸다. 뭐… 원래 이러려고 새 티셔츠를 사 온 것이기도 하지만.
오늘은 과연 남도하가 눈치챌까? 내심 내 존재를 알아채 줬으면 하기도 하고, 영영 몰랐으면 싶기도 하다. 어차피 곧 모습을 드러내야겠지만, 이런 모습으로 그의 앞에 서고 싶지는 않다.
물건들을 원래 위치에 정리해 놓고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집을 빠져나왔다. 그대로 계단으로 한 층을 올라가 집으로 들어갔다.
그래, 남도하의 바로 윗집. 이곳이 내 집이다.
* * *
언제 입어도 정장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 평소보다 움직임을 제한한다고나 할까. 더군다나 남도하가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말끔하면서도 지나치게 부담스럽지 않은 옷을 고르는 일은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물론 제일 중요한 건 그의 시선을 빼앗을 정도로 예뻐야 한다는 것이지만.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썩 보기 좋지 않았다. 지나치게 딱딱해 보인다고 할까. 첫인상이 얼마나 중요한데, 이런 몰골로 그의 앞에 설 수는 없다. 얼굴 근육을 풀고 몇 번이나 웃는 연습을 했다. 만족스러운 표정이 나올 때까지 표정을 확인하고, 집을 나섰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세요.”
그의 루틴이 깨졌다. 원래 남도하는 아침에만 아메리카노를 사 마셨다. 그런데 며칠째 점심시간에도 나와 커피를 사 가고는 했다. 오늘도 그러리라 예상해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평소처럼 등장한 그였다.
주문을 하고 픽업 테이블 앞에 서 있는 남도하를 감상했다. 평범한 복장이었지만, 시선을 끄는 모습이었다. 키가 커 마치 모델처럼 보이기도 했고, 왜소하지 않은 체격이 다부졌다. 그리고 얼굴. 결 좋은 피부와 짙은 눈썹. 남자답게 솟은 콧대까지 가히 완벽하다 할 수 있었다. 나만의 감상은 아닌지, 커피를 전해 주는 카페 직원이 슬쩍 남도하의 얼굴을 훔쳐보고 있었다. 감히, 누구를.
못마땅한 감정을 숨긴 채 커피를 받는 그의 뒤로 다가갔다.
“감사합니… 어, 어…!”
다리를 슬쩍 걸어 그의 균형을 깨트리고, 나를 향해 넘어지도록 허리를 잡아끌었다. 이런 첫 만남을 계획했던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왕이면 기억에 남을 만한 사건을 만들어 주는 게 좋지 않겠는가. 예상처럼 남도하는 커피로 엉망이 된 내 옷을 보며 당황에 젖어 버렸다.
이렇게 가까이서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이라 그럴까. 안절부절못하는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유달리 귀엽게 보였다. 항상 경직돼 있던 겉모습이었는데, 인간적인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이 정도로 끝내려나 싶었는데 그는 면접을 앞두고 있다는 내게 셔츠까지 빌려주는 친절을 보였다.
“잠깐만요. 연락처 받아 가셔야죠. 면접 끝나면 연락하세요.”
“왜요…?”
“변상해야죠, 저거.”
“변상… 하신다고요?”
“네. 그럴게요. 그래야 저도 좀 덜 죄송할 거 같고요.”
기대치 않은 선물을 받은 기분이라고나 할까. 그냥 ‘네가 다리를 걸어 자빠졌으니 네가 알아서 해라.’라고 하면 그만일 사고인데도 남도하는 변상을 하겠다 했다. 당연히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생각이고.
“…커피 드세요. 형 드리려고 산 거예요.”
그래도 너무 반가운 티를 내지 않으려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처음부터 부담스럽게 달라붙으면 역효과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다시 로비로 내려가 인포 데스크 앞에 섰다.
“면접 보러 왔는데요.”
“성함이요.”
“도윤범이요.”
사실 원래 이런 방법으로 남도하에게 접근할 생각은 없었다. 그를 지켜보던 것은 하나의 취미생활이었을 뿐, 그로 인해 남도하와의 접점을 만들려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남도하가 출연을 논의한다는 드라마 ‘살인자의 밤’ 그 주연 배우가 문제였다. 함께 출연하는 남자 배우들을 성 노리개처럼 부려 먹는 악질이었다. 표면화되지는 않았지만, 남도하가 모르는 연예계 뒷세계에서는 꽤 유명한 이야기였다. 소문 정도가 아니라 팩트였고.
메시지를 보냈음에도 남도하는 그 미팅을 취소하지 않았다. 집에 쳐들어가 협박을 할 때도 내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얼굴을 내보일 수도 없고, 혹시라도 놀라지 않을까 싶어 고른 토끼 가면이 문제였으려나. 남도하는 나와의 약속을 어기고 강태운을 만나러 나갔다.
그는 그때 말했다. 강태운에게 몸을 팔려고 하지는 않았다고. 나는 그 말을 믿는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더 이상 그를 혼자 둘 수 없다는 불안이 몰아쳐 이렇게 계획과 달리 ‘더 라인’에 위장 취업까지 하게 됐다. 조금이라도 가까운 곁에서 그를 지켜 주기 위해. 또다시 강태운 같은 쓰레기와 엮이지 않도록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까지도 내 일이었다. 다소… 귀찮은 일이긴 했지만 어쩌겠나. 모두가 남도하를 위한 일인데.
“혹시, 매니저 관심 있는 분 계세요?”
그리고 면접을 기다리던 중, 의도치 않았던 행운까지 따라 줬다. 회계팀 자리가 나 얼른 지원한 것이었는데, 매니지먼트 쪽으로 인턴을 뽑는단다. 지원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내 예상이 맞다면, 그 자리는 틀림없이 남도하의 매니저 자리일 테니까. 예상처럼 면접장에 남도하 본인이 직접 들어서며 내 예상에 확신을 줬다. 미리 안면을 터놓기를 참 잘했다. 저리 내게서 눈도 떼지 못하는 걸 보면, 합격은 확실해 보인다.
그게, 우리의 공식적인 첫 만남이었다.
* * *
“잘 자요.”
지금, 내 품 안에서 고이 잠이 든 이 남자와의 첫만남 말이다. 부드러운 머리칼을 쓸고, 귓불을 몇 번 훑었다. 넓고 딱딱한 어깨를 더욱더 힘주어 안았다.
어떻게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남도하와의 만남 이후 모든 게 의도와 다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내가 설계한 것 이상으로 친해져 버렸고, 토끼 가면을 쓴 채 만나는 일이 잦아졌다.
모든 계획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꼭 싫은 것만은 아니었다. 조금 이상한 모양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지금 함께하고 있지 않나. 남도하는 내게 마음을 열어가는 중이니 기껍지 않을 수 없다. 이제는 이런 그를 지켜 줄 시간이다. 잠든 그를 슬며시 눕혀 두고 전화를 걸었다.
“아까 그 새끼는 잡았죠?”
오늘, 내가 잠시 떨어져 있던 사이 남도하가 부산에서 큰 변을 당할 뻔했다. 나와 남도하가 함께할 미래를 위해 아주 잠시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말이다. 이사회가 조금만 늦게 끝났어도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발생했을 것이다.
꽤 재미있는 짓을 꾸미는 놈들을 옆에서 지켜보던 게 화근이었다. 내게 과도한 친절을 베푸는 타인을 보며 질투하는 남도하를 보자니 이물질들을 정리하고 싶지가 않았었다.
그가 뾰로통하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질투해 주기를, 나를 탐해 주기를 바랐다.
“잡아 두세요, 죽이지는 말고. 상처도 잘 치료해요.”
하지만 그들은 오늘 선을 넘었다. 감히, 내 남도하에게 손을 대려고 했다. 어쭙잖은 협박이나 하고 말았다면 나도 그들의 장난을 그저 지켜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점점 더 직접적으로 변하는 위협에 머지않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그들이 먼저 움직일 줄은 몰랐다.
“이제 정말 아무 걱정하지 마요.”
허름한 골목길에서 상처가 난 남도하를, 무너져 버릴 것 같던 남자를 마주하던 순간을 기억한다. 나를 보며 안도하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그런 일을 겪고서도 내게 달라붙어 온기를 갈구하던 남도하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사랑해요, 형.”
더 완벽하게 지켜 주어야 한다. 누구도 그를 다치게 할 수 없도록. 다시는, 그런 위험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 줄 거다.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손에 쥐여 주고 세상 가장 높은 곳에 올려놓을 거다.
이미 그도 나를 갈망하기 시작했으니, 모든 게 순조롭다.
* * *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뭐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다는 찝찝함을 지울 수 없었다. 부산에서 돌아온 남도하를 픽업한 이후 든 생각이다. 그가 올라오기 전, 헬기를 타고 먼저 와 모든 준비를 해 두었음에도 이유 모를 긴장이 차 안에 감돌았다.
“너 어젯밤에 어디 있었어?”
지난밤 내 동선에 대해 묻는 남도하를 보며, 올 게 왔구나 생각했다. 당연히 준비된 답이 있었고, 사전에 알리바이를 마련해 놓았기에 남도하가 눈치챌 일은 없었다. 그리고 이 정도 잦은 만남이 이어진다면 그가 내 정체를 눈치챌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최대한 토끼 가면을 쓴 채 만나는 일은 자제하려 했지만, 어쩌다 보니 가면을 쓴 채 살까지 섞어 버리고 말았다.
“너 혹시, 어제 부산에 있지 않았어?”
반쯤 확신한 채 묻는 걸 보니 그가 의심하는 것 같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토끼 가면을 쓰고 다닐 때면 펑퍼짐한 옷차림과 가면, 후드와 장갑으로 최대한 외형을 숨겼다. 목소리마저 변조를 했다. 하지만 지난밤엔 급하게 남도하를 지키러 싸움판에 뛰어든 탓에 옷을 갈아입을 시간이 없었다. 체격으로도 충분히 유추가 가능했을 것이고, 나체로 몸을 겹치며 더 확신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형. 그랬으면 제가 연락을 했겠죠.”
하지만 정체가 드러나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다. 그의 옆에 서는 도윤범은, 완전무결해야 한다. 하나의 흠도 없는 남자여야 한다. 토끼 가면을 쓰고 남의 집에 숨어드는 존재여서는 안 된다. 비록 그 상태로 남도하와 꽤 많은 일을 하기는 했지만, 이제부터라도 그의 관심을 진짜 도윤범에게 돌려야 한다. 그동안 지켜본 바에 의하면, 남도하는 현실의 내게도 꽤 관심이 있으니까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좀 쉬어요, 형. 저는 레포트 하나 끝낼 게 있어서요.”
집에 데려다주자 남도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관리 사무실로 향했다. 미리 손을 써 놓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CCTV에서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을 거다. 이미 파일 자체를 바꿔치기해 두었으니까.
그리고 양우준. 이 골칫거리도 한동안 내 명령을 어기는 일은 없을 거다. 그랬다가는 진정한 나락을 맞이하게 될 테니까. 뭐, 이러나저러나 그 길로 향하게 되겠지만.
“내가 데려다줄게.”
다행히 남도하는 깊게 의심하지 않았다. 어느새 평소의 다정한 남자로 돌아와 있었다. 웃으며 나를 학교까지 태워다 줄 정도로. 더는 의심하는 듯한 말을 하지도 않았다.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 가는 그를 보며 조금 걱정이 됐다. 상처가 심하진 않아도 며칠 푹 쉬어야 할 텐데, 벌써 이렇게 돌아다녀도 되는가 싶었다.
[병원 다녀왔어요.]
하지만 기우였다. 날 학교에 내려 주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도하에게 메시지가 들어왔다. 물론, 토끼 가면에게 보내는 거였다. 시킨 적도 없는 보고를 하는 그가 귀엽기만 했다.
“잡아 두기는 했는데, 양손은 못 쓸 거 같습니다, 평생.”
“그래요.”
“어떻게 할까요?”
옆에서 상황 보고를 하는 아저씨… 잠깐, 이 사람 이름이 뭐였더라. 아무튼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리긴 하는데, 내 관심은 작은 휴대폰 화면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뭐 좋은 일 있으신가 보네요?”
“아무래도.”
남도하에게 착하다는 칭찬 메시지를 하나 보내고 미련을 접어 두고 현실로 돌아왔다. 남도하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쪽도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아빠한테 이야기하셨죠?”
“…예.”
“하아, 또 혼나겠네…. 그냥 좀 조용히 처리해 주시면 좋을 텐데요, 더 큰 사고 치기 전에.”
나름 협박이었다. 이후에 있을 일까지 보고를 한다면, 더 큰 문제를 만들어 버리겠다고. 그렇게 되면 10년 가까이 내 곁을 지킨 아저씨라고 해도 상당한 타격을 받을 거다.
“최대한, 해 보겠습니다. 근데 저도 어쩔 수 없는 위치라….”
“그렇겠죠, 돈 나오는 데가 거긴데.”
원망은 하지 않는다. 어쨌든 내게 월급을 받는 사람은 아니니까.
“어제 그 새끼는 그냥 살려만 두세요. 손은 어차피 앞으로도 쓸 일 없을 테니까 상관없어요.”
순진한 남도하는 지난 밤 저를 습격한 괴한을 살려 달라는 말을 했다. 그땐 정말 하마터면 놈을 죽여 버릴 뻔했었는데, 그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지은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좀 더 조용히, 확실히 처리하려는 것뿐이다.
“전에 말씀하신 파일입니다.”
아저씨가 건네주는 봉투를 받아 내용물을 확인했다.
“우준이가 아주 더럽게 놀았네… 이걸 어떻게 처리하나.”
“아무래도 연예인이라 함부로 손댔다가는….”
“걱정 마세요, 입을 아예 못 열게 하면 되죠.”
양우준 파일은 가관이었다. 서주언에게, 내게 그렇게 들러붙었던 이유가 있었다. 인기에 목마른 흔한 연예인인 줄 알았더니, 다른 쪽으로 더러운 종자였다.
“성매매라… 증거 있어요?”
“뒤에 있습니다.”
아주… 흥미롭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망가질 수도 있구나 싶을 정도로 엉망인 삶을 살아가는 놈이었다.
“도박 빚이 30억이 넘습니다. 곧 터지게 생겼고요.”
“그 돈도 없대요?”
“…보통 사람들은 없습니다.”
꽤 잘나가는 연예인에, 10년 가까이 가수와 배우 생활을 했으니 그 정도 돈은 있을 줄 알았는데. 하긴, 도박에 미쳐 빚이 30억인데 번 돈이라고 곱게 뒀을 리가 없다.
“이거면 되겠네요. 이쪽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하아… 도련님, 이건 정말 안 하시면 안 될까요?”
본인이 자료를 다 건네줘 놓고 아저씨는 우는 소리를 냈다. 그럴 거면 이 자료를 주기 전에 말을 했어야지.
“그래서 제가, 그 둘 잘 지켜보라고 했을 텐데요. 이번 일엔 아저씨도 일부 책임이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그런 투정까지 들어 주고 싶지 않아 일부러 더 삐딱한 목소리를 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양우준과 지난밤의 괴한. 그 둘의 존재를 모르던 것은 아니었다. 그랬기에 더 눈여겨보라 했지만, 잠깐 시선이 떨어진 사이 일이 벌어져 하마터면 남도하를 영영 잃어버릴 뻔했다. 그와 관련된 일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실수라고 하더라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예… 그리고, 회장님이 집에 한번 오라고 하십니다.”
“봐서요, 나중에. 그만 가 보세요.”
어차피 집에 가 봤자 잔소리만 듣고 있어야 할 게 뻔하니 최대한 본가에 가는 일은 삼가고 싶다. 볼일은 다 봤으니 아저씨를 남겨 둔 채 먼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남도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형, 저 끝났어요!] 하고, 눈이 초롱초롱 빛나는 동물 이모티콘까지 하나 보냈다.
메시지 앱의 대화창은 딱 다섯 개뿐이었다. 집, 회사, 이원호, 양우준 그리고 남도하. 물론 제대로 대화를 주고받는 상대는 남도하뿐이었다. 이름 세 글자만으로도 사랑스러운, 남도하.
“형, 형! 여기요!”
저 멀리서 다가오는 쓰레기 같은 차를 보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머지않아 저 똥차부터 갖다 버려야겠다고 생각을 하며 단번에 후면 주차를 하는 남자를 바라봤다. 어쩌면 저렇게 못 하는 것도 없는지 모르겠다.
“뭐야, 왜 그렇게 반가워해?”
“그냥요. 밖에서 보니까 더 반갑네요? 형, 우리 학교 앞에서 밥 먹고 가요.”
차에 타지 않고 남도하를 잡아끌었다. 약간 망설이는 것 같은 그를 보며, 입술을 슬쩍 내밀었다. 눈꼬리는 축 내리고. 그동안 지켜보며 깨달은 남도하를 다루는 방법 중 하나이다. 그는 내가 이렇게 나올 때면….
“그래, 먹자. 안 그래도 배고팠어.”
역시,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다. 활짝 웃으며 차에서 내리는 그의 팔뚝에 달라붙었다.
“어, 얼른 가자….”
그런데 남도하가 조금 이상했다. 기분 나쁘게 쳐 내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슬며시 내 팔을 풀어 내며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그사이 꽤 가까워진 관계였기에 이 정도 스킨십은 자주 있었는데… 이상한 일이다.
“뭐 먹고 싶어요?”
티 내지 않고 그의 옆에 서 걸음을 맞췄다. 마음 같아서는 팔뚝이 아니라 허리, 어깨를 끌어안고 싶지만, 뭐….
“음… 여기 뭐가 맛있는데?”
“아, 우리 학교가요….”
순간 치고 들어온 남도하의 질문에 당황했다. 학교 앞에서 밥을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친한 사람 하나 없기도 했고, 시간이 남을 때면 남도하의 뒤를 쫓거나 그가 나오는 작품을 보기 바빴으니까 한가롭게 학교 앞에서 밥을 먹을 일도 없었다.
“돈가스! 돈가스… 맛있어요.”
모른다. 그냥 저 앞에 보이는 간판 중 하나를 보고 말했다. 그리고 남도하의 입맛에는 저런 음식이 잘 맞는다는 것도 감안했다.
“그럼, 오랜만에 칼질이나 좀 해 볼까?”
“스테이크로 먹을까요…?”
“됐어. 저게 더 좋아.”
참 어려운 남자였다. 값비싼 음식보다 저런 분식류를 더 선호했다. 떡볶이나 라면, 햄, 돈가스 같은 것들. 스테이크보다 돈가스를 더 좋아한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요즘엔 그래도 조금 건강하게 먹이고 있지만, 갈 길이 멀다.
“맛있어요?”
“어? 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남도하는 마치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처럼 커다란 돈가스를 먹었다. 잘 먹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보기가 좋았다.
“아,”
“아니… 내가 먹을게.”
“빨리요, 아!”
그가 시킨 것과는 다른 돈가스를 한 조각 잘라 그의 입 앞에 내밀었다. 딱딱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도리질하는 남도하를 보며 손을 내리지 않은 채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그리고 예상처럼, 그는 그제야 쭈뼛쭈뼛 다가와 내민 고기 조각을 베어 물었다.
조그맣게 벌어지는 입술을 보자니 심장이 급격히 요동치는 기분이었다. 지난밤, 저 입술이 내게 입을 맞췄다는 걸 떠올리니 식욕이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대신 그 자리는 다른 욕망이 채웠다.
“맛, 있어요?”
“어. 맛있네….”
여전히 조금 굳어 있는 남도하의 얼굴이었지만, 그마저도 내게는 하나의 자극일 뿐이었다. 저 입술이 얼마나 부드럽고, 또 안쪽이 얼마나 뜨거운지 잘 알고 있으니까. 돈가스를 써는 저 손은 또 어떻던가.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서로의 물건을 훑던 그 손길이 떠올리자 머리 전체에 열감이 몰렸다. 저리 건조하게 생긴 남자가,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아뇨… 괜찮아요. 어서 먹어요, 형.”
그의 접시로 고기를 더 얹어 주었다. 잘 먹어야 상처도 빨리 나을 거고, 저 몸을 유지하려면 많이 먹어야 하기도 하고.
“이모, 여기 떡볶이도 하나만 주세요.”
“윤범아, 너무 많아.”
“걱정 말아요.”
어차피, 형이 다 먹을 거니까요. 뒷말은 하지 않았다. 저리 말하면서 테이블에 올라온 음식을 남기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에 그는 오늘도 틀림없이 주문한 음식을 모두 먹을 거다.
* * *
사실 남도하와 같이 살 생각까지는 못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미리 왜 그런 생각을 안 했을까 후회스러울 정도로 매우 만족스럽다.
“하아… 형도, 참.”
양치하고 칫솔을 살균기에 꽂아 놓지 않는 작은 실수도 밉지가 않다. 그런 번거로운 일은 내가 옆에서 챙겨 주면 되니까. 더군다나 더는 그의 집에 몰래 숨어들어 생필품을 채워 놓지 않아도 된다는 부분이 제일 좋았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남도하에게 붙은 괴한… 아니, 정확히는 안티팬 덕분이다. 가짜 손가락과 대가리가 잘린 쥐 사체를 보는 순간 머릿속에 번쩍, 생각이 솟았다. 당시엔 놈의 정체를 알지 못했는데, 그 사건을 이용해 남도하를 우리 집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조금 미안하지만… 남도하가 집을 비운 사이 집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으며 자연스럽게 우리 집에 머물게 했다. 당연히 남도하는 아직 범인이 괴한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뭐… 죽을죄를 지은 놈에게 하나의 죄를 더 덮어씌우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어쨌든 남도하에게도 안락한 집이 생겼으니 서로에게 좋은 일 아닌가.
“윤범아, 형 잠깐만 나갔다 올게.”
“어디… 가요?”
촬영을 며칠 미루어 뒀더니 남도하가 꽤 바빴다. 중간 중간 병원에 다녀오는 건 모른 척하고 있었는데, 이번엔 예상도 못 한 외출이었다.
“아… 그, 집 좀 보고 오려고.”
“네…?”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정신이 멍했다. 집이라니…? 여기가, 우리의 집인데…? 심지어 이 집도 새집이나 다름이 없었다. 원래는 남도하가 살던 허름한 빌라 위층에 머물다가 그와 함께 살기 위해서 구한 집이니까.
“불편한 거라도 있어요? 갑자기 왜요…?”
“아니, 그건 아니고….”
제대로 답을 하지 않는 남도하가 또 이상하다.
뭐 저리 생각이 많고 비밀이 많은지 모르겠다.
“형, 저는 형이랑 같이 사는 게 좋은데요….”
“…뭐?”
이번엔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했다. 멀뚱히 서 있는 그의 손을 끌어다 잡고, 진심을 말했다.
“제가 불편해요?”
“아니, 윤범아. 그런 말이 아니라 계속 신세 질 수도 없잖아.”
누가 그랬던가. 진심은 통한다고. 내 목소리에 묻어나는 절망감, 박탈감은 적어도 제대로 전해진 것 같다. 저렇게 당황에 젖은 얼굴로 변명하는 걸 보면.
“저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조금 더 강하게 남도하의 손을 쥐었다. 까슬까슬한 손끝이 여전히 내 가슴을 아프게 한다. 고단했을 남도하의 삶이 여실히 묻어나는 촉감이었다. 몰랐던 시절이라면 그냥 넘겼을 수도 있지만, 이미 그의 과거를 아는 내가, 어떻게 그를 다시 험난한 바깥세상으로 나가게 둘 수가 있겠나.
“형이랑 같이 지내는 거… 좋아요, 전.”
그는, 오롯이 내 세상에 살아야 한다. 어떠한 불안도 위협도 없는 평온한 삶을 살아야 한다. 더는 같잖은 돈 따위에 휘둘려 몸을 팔아야 하는가 하는 고뇌도 없어야 하며, 월세를 내기 위해 위험한 배역 따위를 맡는 일도 없어야 한다.
“윤범아….”
그게 아니더라도 이미 내 손에 들어온 남도하를 놓아줄 생각은 없다.
“정말이에요, 형.”
그대로 그의 팔을 당겨, 어깨를 슬며시 끌어안았다. 버둥거리며 밀어내려는 손길은 무시했다.
전에도 그가 이 집을 나가려던 일이 있었다. 내게 말도 하지 않고 몰래. 그때만 생각하면 여전히 열불이 끓어오른다. 그 탓에 괜히 쓸데도 없는 집을 시세의 두 배나 주고 세를 얻지 않았나.
“다시 생각해 줄 거죠…?”
“아, 알았으니까 이것 좀 풀어 봐….”
긍정적인 답을 내뱉는 남도하를 보며,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웃었다. 역시, 그는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떼어 내고 싶지 않은 몸을 억지로 뗐다.
“그럼, 월세라도 제대로 받아…. 나도 불편하니까.”
하지만 다시 마주한 얼굴이 조금 낯설다. 남도하의 모든 표정을 알고 있다 생각했는데, 지금 보는 표정은 또 처음인 것만 같았다. 유달리 굳은 표정도 그렇고, 시선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것도 그렇고….
뭔가 모를 작은 불안이 솟았다.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이다.
* * *
“늦었어요, 아저씨.”
“도련님, 저도 죽겠어요… 새벽마다 이거 배달하느라.”
다섯 시. 나의 하루가 시작된다. 여전히 곤히 잠든 남도하보다 한 시간 이른 하루다. 새벽같이 만든 반찬을 받아 냉장고를 채워 둬야 한다.
“수고하셨어요. 가 보세요.”
남도하는 이 모든 게 인터넷 반찬 가게에서 배송 오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 순진함이 조금 귀여울 정도였다. 내가 미쳤다고 어떤 재료로 만들었을지도 모를 음식을 남도하에게 먹이겠나. 매일 새벽 본가에서 직접 만든 음식으로 우리의 식탁을 채우고 있었다. 그의 입맛엔 다소 심심한 맛이라는 걸 알지만, 안 그래도 커피와 탄산수, 맥주처럼 위에 자극이 가는 음식투성이인 그의 식습관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그리고 틈틈이 요리를 배워 보려 하긴 했는데, 미안하게도 내게 그런 재능은 없었다. 물론, 면 하나 제대로 삶지 못하는 남도하에 비해서는 훌륭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그에게 먹일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벌써 일어났어?”
“아, 형. 오늘은 갈비찜 시켰어요.”
냉장고로 달려가 탄산수를 하나 꺼내 남도하에게 건넸다. 그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탄산수를 마시는 나쁜 버릇이 있었는데, 이걸 주지 않으면 작은 투정을 부리곤 했다. 그 모습도 귀엽기는 했지만, 적당히 타협해 이것마저 못 먹게 하지는 않았다.
“고마워.”
“오늘은 잘 잤어요?”
딱 봐도 잘 잔 것 같다. 정갈한 평소 모습과는 달리 머리가 부스스하게 솟은 걸 보면 말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지난 밤 일찍 잠자리에 든 것을 직접 카메라로 확인하기도 했고.
“어… 요즘은 괜찮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불면으로 고생하던 남도하였다. 하지만 내가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편안히 잠들곤 했었는데, 더는 그러지 않아도 될 정도로 원래의 수면 패턴을 되찾은 것 같다. 아마 그의 고민 중 일부가 해결된 것 같았다.
“신기해요. 형 머리는 어떻게 이렇게 뻗치지.”
그냥 지켜볼 수가 없었다. 멍한 표정으로 탄산수를 마시는 그의 머리칼을 가볍게 매만지고 말았다.
“너도 마찬가지거든.”
그리고… 남도하의 손이 내 머리칼 사이로 파고들었다. 복수를 하는 것처럼 마구잡이로 헤집는 손길이었지만, 다정했다.
“아… 미안. 조깅 가야겠다.”
하지만 그 분위기는 일순 흩어졌다. 남도하의 의도였다. 그는 누가 보아도 당황한 것처럼 몸을 돌려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 마신 탄산수병을 내려놓지도 않고서. 그가 들어간 방문을 보면서 찝찝함이 조금 더 커졌다.
어쩌면 뭔가, 일이 잘못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 * *
내 느낌이 틀리기를 빌었다. 문득문득 드는, 거리감. 그는 여전히 친절했고, 다정했다. 그런데도 묘하게 내게 거리를 두는 게 느껴졌다. 꽤 익숙해졌으리라 생각한 스킨십을 과도하게 싫어하는 것 같았고, 내가 다가갈 때마다 표정이 굳기 일쑤였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토끼 가면의 휴대폰으로 꽤 잦은 연락을 주고 있었다. 특히, 내가 그에게 평범한 관계 이상의 친절함이나 스킨십을 보인 후에는 어김없이 메시지를 보내고는 했다.
“형, 저 의상 좀 받아 올게요.”
“나도 잠깐 나가려고 했는데.”
“어디요…?”
“그… 주언이 형이 잠깐 보자고 해서.”
남도하의 주변엔 참 짜증 나는 인간투성이였다. 거지 같은 삼류 소속사는 그렇다 치고, 매니저 같지도 않은 이원호와 딱 그 매니저 수준에 맞는 양우준. 그의 등골을 뽑아 먹으려는 가족까지. 하지만 그런 것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짜증 나는 존재는 단연 서주언이었다.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남도하의 곁을 맴도는 남자.
“그래요. 가는 길에 내려 줄게요.”
이번엔 또 어떤 일로 내 신경을 거스르려나. 옷을 챙겨 입고 나온 남도하의 팔을 가볍게 잡았다. 어김없이 그의 몸이 살짝 굳는 게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치솟으려는 짜증을 이렇게라도 풀어야 했다.
“어디서 만나기로 했어요?”
“…폴톤 근처에서 보기로 했어.”
서주언의 집에서 보기로 했구나. 왜 거짓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의 태도를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어떤 감정인지까지는 알 수 없어도 어쨌든 나를 신경 쓰고 있다는 말과도 같으니까.
“윤범아, 형이 할 말이 있는데.”
“뭔데요?”
차 옆자리에 앉은 남도하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궁금해서 죽을 것 같은 기분을 누르며 태연한 척 갓길에 차를 댔다. 서주언의 집이 한 블록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춰서 남도하를 직시했다.
“…아니다. 이따가 저녁에 얘기하자.”
“중요한 얘기예요?”
“어? 아니, 그 정도는 아니고….”
지금 당장 말할 생각은 없는지, 남도하는 저녁에 보자는 말만 남긴 채 차에서 내렸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차를 출발했다. 부디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들려줘야 할 텐데.
* * *
“어? 오늘 촬영 없는데 무슨 일로 오셨어요?”
살인자의 밤 촬영이 아예 미뤄진 건 아니었다. 그저 남도하의 장면만 일부 미루었을 뿐이다. 신이 많이 겹치는 서주언까지 타의에 의한 휴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고.
“회사에서 우준이 형한테 뭐 좀 전해 주라고 해서요.”
“아, 선배님 촬영하고 계세요.”
“네. 기다릴게요.”
막내 스태프는 분주히 촬영장 안으로 사라졌다. 아무래도 배우는 내가 하는 쪽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준비하지도 않았던 거짓말이 이리도 쉽게 술술 나오는 걸 보면 말이다. 스태프의 말처럼 양우준은 아파트 옥상에 설치된 세트에서 촬영 중이었다. 철근 구조물로 엉성하게 엮인 난간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이었다. 당연히 바닥엔 안전 매트가 깔려 있었고, 등에도 와이어가 달려 있었다.
“다시 한번 들어갈게요. 준비해 주세요.”
조연출의 건조한 음성에 곳곳에서 탄성이 나왔다. 앞의 상황을 보지는 못했지만,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양우준이 또 삽질을 이어 가는 중일 것이다. 양우준은 독살스러운 말투와 겉모습과는 달리 생각보다 멘탈이 강한 축에 속하진 않았다. 특히 무언가 심적 동요가 있을 때면 촬영 때 더 잦은 실수를 하고는 했다.
“아… 우준 씨, 그렇게 맥없이 떨어지면 어떻게 해….”
지금처럼 말이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 철근 구조물에서 허물어지듯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급히 와이어가 당겨 올려져 바닥에 처박히는 꼴은 면했지만, 내면의 동요가 그대로 읽혔다. 그러게, 왜 감당도 못 할 짓을 했을까.
“다시 한번 갈게요.”
양우준은 다시 철근 구조물 위에 섰다. 아무래도 아파트 옥상이라 그런지 바람이 셌다. 계절도 이젠 제법 매서움을 품은 바람이 몰아치는 때였다. 불어오는 바람에 양우준의 머리칼이 흩날렸다. 그의 두 눈은 어떤 감정을 전달하려는 것처럼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사실 재밌는 놈이었다. 어떻게 보면 양우준 덕분에 남도하와 한 집에 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일말의 고마움이 없지는 않다. 그랬기에 여태 그의 정체를 조용히 혼자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먼저 선을 넘었다.
“어, 어…!”
감독의 사인에 양우준이 몸을 날리는 순간이었다. 와이어의 도르래가 타, 탁! 소리를 내며 역방향으로 감겼다. 양우준의 몸은 그에 따라 높은 곳으로 달려 올라갔고, 갑작스러운 움직임과 불어오는 바람에 커다란 궤도를 그리며 공중에서 거칠게 흔들렸다.
“뭐야! 도르래! 도르래 풀어!”
다급한 목소리가 사방에서 터지고, 양우준을 들어 올리고 있는 도르래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쉽사리 고치지는 못할 것이다. 아저씨가 제대로 손을 봐 뒀다면 틀림없이 그럴 거다. 나는 공중에 매달린 양우준을 여유롭게 감상했다. 마치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 같다고 할까.
저대로 건물 밖으로 날려 버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개인적인 만족도는 그게 최상을 찍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고려해야 할 부분이 하나 더 있었다. 남도하, 그를 생각해야 했다. 지난번 내 심기를 불편하게 한 죄로 드라마를 엎어 버리려 했다. 하지만 그때 오히려 벌을 받은 건 나였다. 하루가 다르게 말라 가는 남도하를 보는 건 지옥과 다름없는 시간이었다. 고작 이깟 드라마가 뭐라고. 인생을, 영혼을 건 듯 집착하는 그 마음을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그만큼 그에게 소중한 것이란 걸 알고 있기에, 다시 같은 짓을 저지를 수는 없었다.
“풀렸어요! 천천히 내릴게요…!”
최소한 살인자의 밤 드라마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야 한다. 그래야 남도하가 행복할 테니까. 그리고… 그쪽이 내게도 득이 될 것이다. 그 생각 하나로 저 양우준과 서주언을 멀쩡한 꼴로 남겨 두는 거니까, 꼭 그래야만 한다.
“괜찮아요, 형?”
안전 매트에 내려온 양우준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바지에 오줌을 지리지는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바들바들 떠는 모습에 자꾸만 입꼬리가 치솟으려 했다. 참을 수가 없어서 웃음을 숨기지 못하고 물어 버렸다.
“…….”
“큰일이네. 저랑 가서 잠깐 쉬어요.”
내 얼굴을 보고는 더욱더 파리하게 떨고 있었다. 미친 새끼, 내가 뭘 했다고 저러지. 어쨌든 분위기 파악은 어느 정도 한 것 같은 양우준의 등에 달린 와이어를 풀어 일으켜 세웠다.
“잠깐….”
“얌전히 따라와요. 진짜 건물 밖으로 던져 버리기 전에.”
힘없는 그를 부축해 주는 척 옆에 서서 귓가에 속삭였다.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하게, 조용히.
“차로 갈까요?”
같은 회사 배우와 매니저라는 관계 덕분에 내가 양우준을 챙기는 모습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게을러 터진 이원호가 이 순간엔 참 고마웠다. 어디 처박혀 있는지 제 배우가 뒈지게 생겼는데 코빼기도 비추지 않고 있지 않나.
양우준의 어깨를 감싼 채 지하 주차장에 세워 두었던 차로 왔다. 이런 놈이 남도하의 시트에 앉는 게 조금 못마땅했지만, 넘어가기로 했다. 내게 시선도 맞추지 못한 채 지나칠 정도로 바들바들 떨어 대는 모습이 과하다 싶었다.
“왜 이렇게 떨어? 진짜 놀랐나 보네. 내가 죽일 줄 알았어?”
양우준의 어깨에 손을 얹자 발작하듯 몸을 빼내었다.
“잘못, 잘못했어….”
“이 온도 차는 대체 뭐야. 저번엔 남도하한테 다 말하겠다고 협박하지 않았나?”
나는 처음부터 신분을 숨긴 채 남도하에게 접근하려는 계획이 없었다. 강태운이라는 새끼만 없었어도,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다. 그랬기에 애초에 정체를 숨기는 일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그나마 남도하가 조금… 무덤덤한 편이라 다행이었다.
언젠가는 정체가 드러날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의외로 내 정체를 제일 먼저 눈치챈 것은 양우준이었다. 귀신같은 촉이라고 해야 할까, 돈 냄새를 잘 맡는 거라고 해야 할까.
“실수야! 실수였어… 정말….”
의심은 남도하가 살인자의 밤 주요 배역에 캐스팅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양우준은 그 캐스팅을 납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조연… 아니 단역에 가깝던 남도하에게 그런 배역을 맡기는 제작사라, 충분히 의심할 여지가 있기는 했다.
드라마의 최대 투자사인 K&M 엔터의 뒤엔 K&M 그룹이 있었다. 당연히 그것만으로 내 정체를 알아낼 수는 없었다. 대중에 공개된 그 어떤 서류에도 도윤범이란 이름은 드러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소소한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작년에 있었던 K&M 엔터의 대표, 우리 작은 아버지의 아들 결혼식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자리에 양우준이 참석했다. 어떻게 된 머리인지 그 곳에 있던 내 얼굴을 기억했다, 놀랍게도.
“내가 경고했잖아, 함부로 날뛰지 말라고.”
“그러니까… 내가 잘못했다니까…?”
그 뒤는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K&M가의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이 남도하의 매니저로 등장했다. K&M 엔터가 투자하는 드라마에 캐스팅이 되고, 요란스러운 팬이 등장하고. 흔하지 않은 성씨도 한몫했다, 라고 양우준이 몇 차례 만남에서 내게 털어놓았다.
뒷조사와 미행을 하며 내 정체를 확신한 양우준의 관심이 쏟아졌다. 서주언에게 집착에 가깝게 접근하던 태도를 일순 바꿔 버렸다. 생긴 것처럼 계산이 참 밝은 놈이었다. 착한 척, 다정한 척 굴며 제 매니저로 삼아 날 옆에 두려 했지만, 제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자 태도를 바꿔 협박을 했다.
“그런데, 너. 조금… 창피하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
“…어?”
“아무리 망한 연예인이라고 해도 말이야, 무슨 사생팬이랑 그렇게 가깝게 지내지?”
그의 심복이라고나 할까. 남도하를 습격했던 놈은 양우준의 사생팬이었다. 아이돌로 이름을 날리기 전부터 이어진 인연이라고 하니 꽤 오래된 인연이었다. 내 정체를 의심한 건 양우준, 뒤를 캐 정체를 확신한 건 그 사생팬이었다.
간혹 그런 연예인이 있다고는 들었다. 인기가 없어도 너무 없어 하나의 관심이 반가워 팬과 정도 이상으로 친분을 쌓는 경우. 딱, 양우준이 그랬다. 그 관계는 아이돌 기간을 지나 여태 이어지고 있었다.
양우준의 충견과 같은 놈은 출신이 출신이라 그런지, 남도하에게 꽤 위협적인 안티팬 노릇을 톡톡히 했다. 내 곁에서 떼어 내기 위해서. 하지만 그 덕분에 남도하는 더욱더 내게 의지하게 되었으니 그 부분을 따로 지적하고 싶은 건 아니다. 하는 짓이 괘씸한 것과는 별개로 결론적으로 내게 도움이 되는 일이었으니까. 어째서 남도하만 없다면 내가 제게 관심을 주게 되리라 망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보니까 너희 서로 참 많이 좋아했더라고.”
“무슨….”
“이런 것도 많던데, 집에.”
괴한의 집엔 참 흥미로운 게 많았다. 양우준의 성매매 증거와 여러 아이돌, 배우를 향한 스토킹 증거가 쏟아졌는데, 내 입장에서도 너무 심하다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런 잔잔한 짓을 제외하더라도 재미있는 사진과 영상이 뭉텅이로 쏟아졌다. 휴대폰 화면을 터치해 영상 중 하나를 틀었다. 높은 교성이 터지며 살 부딪치는 소리가 차 안을 채웠다.
“꺼, 꺼!”
“몰랐나 봐, 이런 거 찍는 줄? 난 또 하도 열심히 하길래 알고 찍은 줄 알았지.”
괴한과 양우준의 섹스 동영상과 그가 잠든 사이 찍은 사진이 수백, 수천 장이 있었다. 거의 광기에 가깝게 수집했다고 봐야 할 정도였다. 양우준이 그를 어떻게 꼬드겨 제 수족처럼 부려먹었는지 너무나 잘 알 것 같았다.
“네 팬한테 처음엔 그냥 부탁만 해도 턱턱 들어줬겠지. 근데 점점 그 대가가 비싸졌을 거고.”
“…아니야, 그런 거.”
“그럼 뭐, 진짜 사랑이라도 해서 했다고? 하긴, 그쪽이 덜 쪽팔리긴 하겠다.”
알고 싶지 않았다. 진짜 사랑을 해서 떡을 쳤는지, 그를 부려 먹으려 어쩔 수 없이 몇 번 잠자리를 가진 것뿐인지.
“데스패치에서 좋아하겠다, 그치? 오랜만에 대형 기사잖아.”
“잘못, 잘못했어…!”
좁디좁은 차 안, 양우준은 그 좁은 틈새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앉았다. 제 절박함을 알아봐 달라는 것 같았다.
“일어나, 네 무릎이 무슨 가치가 있다고 꿇어.”
“으, 으윽…!”
구두를 신고 올 걸 그랬다. 운동화로 양우준의 허벅지를 아무리 짓이겨 봐도 힘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 같다. 마음 같아서는 저 가짜 코에도 주먹을 몇 대 날려주고 싶었지만, 나도 원하는 게 있어 그리하지 못하는 게 천추의 한이었다.
“근데 얘는 생각보다 널 별로 안 사랑한 거 같더라고.”
그의 허벅지를 짓밟은 채 휴대폰 화면을 다시 보여줬다. 사진을 제대로 보았는지, 고통으로 붉어지던 얼굴이 사색이 되어 갔다. 그럴 만했다.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보아야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핏물을 뒤집어쓴 살덩어리와 비슷한 몰골을 하고 있으니까. 그 괴한 이야기이다.
“네가 시켜서 스토킹하고, 다른 연예인 괴롭힌 거라고 자백했어. 애가 어쩌면 그렇게 꼼꼼한지 문자랑 통화, 대화 녹음까지 다 가지고 있지 뭐야.”
자백이라는 말은 다소 틀린 말이었지만, 어쨌든 그 새끼 입에서 모든 말이 나오기는 했다. 이가 다 부러져 제대로 말을 알아듣기도 어려웠지만, 뭐.
“제발… 커억…!”
양우준은 어울리지도 않게 가증스러운 눈물을 쏟았다. 그 모습에 화를 누르지 못하고 발을 들어 그의 가슴팍을 힘껏 걷어차 버렸다. 차가 좁아 멀리 날아가지 못하고 쓰레기처럼 차 문과 앞좌석 사이에 처박힌 얼굴에 다시 한번 발을 날릴까 하다가 멈췄다. 대신 얻어맞은 가슴팍을 움켜쥐어 내게 시선을 맞추게 했다.
“어디서 눈물을 보여, 역겹게. 닥치고 기다려. 숨만 쉬고 살아. 허튼짓이라도 했다가는 저 새끼고 너고 둘 다 죽여 버릴 거니까.”
사방으로 떨리는 젖은 눈동자를 뽑아 버리고 싶은 마음이다. 저 눈깔이, 주둥이가, 저 더러운 손이 남도하를 죽이려 했다는 걸 생각하면 온몸을 찢어발겨도 화가 풀리지 않을 것 같다.
“으, 커억!”
그래서 결국 참지 못하고 가슴팍에 다시 한번 발길질을 날려야 했다. 내가 참아 줄 수 있는 건 딱 여기까지다. 이대로 숨통을 끊지 않는 것이 최대의 자비다.
“우준이 형.”
“흐, 흐윽….”
“하아… 그만 울라고 두 번이나 얘기했어요. 입 찢어 버리기 전에 다물어요.”
바닥에 널브러진 그의 어깨를 끌어 시트에 다시 앉혔다. 발자국이 남은 옷도 털어 주고, 매무새를 다듬어 주었다. 그래, 언제라도 처리할 수 있는 놈에게 조금 더 벌을 주는 거라고 생각하자.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불안과 공포일 테니까, 마음껏 두려워했으면 좋겠다.
“사, 살려 줘….”
“무슨 그런 당연한 얘길 해요, 형.”
당연히 살려 줄 거다, 드라마에서 제 역할을 끝낼 때까지는. 그 뒤는… 모르겠다. 살 수도 있고, 못 그럴 수도 있고.
“죽은 듯 살아요. 허튼짓하는 순간 이번엔 형 집으로 대가리 없는 ‘팬’ 시체가 갈 수도 있으니까요. 모든 증거도 내가 가지고 있다는 거 잊지 마요.”
양우준은 제대로 알아들은 것 같다. 내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까지. 미친 듯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면 확실하다.
“그만 가요. 그리고 NG 좀 작작 내요. 쪽팔리니까.”
“고마, 고마워….”
병신. 도망치듯 달려가는 양우준을 보자니 비웃음이 절로 나왔다. 참 사람들은 이상하다. 아무리 좋은 말로 하려 해도 듣지를 않는다. 꼭 이리 어쩔 수 없는 선택지를 주어야만 고분고분 말을 들어 먹는다. 뭐, 내겐 오히려 이쪽이 더 쉽기는 하지만.
남도하가 걱정하던 고민을 하나 해결했으니, 오늘은 같이 야식이라도 시켜 먹어야겠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괴한을 처리했다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 * *
[뭐 해요?]
[물어볼 거 있는데요.]
[바빠요?]
시간 간격을 두고 세 개의 메시지가 들어왔다. 내 휴대폰에 꽂힌 두 개의 유심칩 중, 토끼 가면 전용으로 온 것이다. 평소엔 꺼 두었다 가끔 확인만 하는 것인데, 최근 남도하로부터 이쪽으로 꽤 많은 연락이 오고 있다.
“하아….”
그가 씻는 사이 잠깐 확인만 하고 답장은 하지 않았다. 어떤 내용일지는 모르겠지만, 더는 토끼 가면의 신분으로 남도하와 접점을 만들고 싶지 않다. 이젠 저런 고민들을 진짜 도윤범, 나와 나누어야 하는데….
“윤범아, 우리 샴푸 바꿨어?”
“어… 네.”
2주 가까이 된 일을 이제야 물어보는 남도하다. 욕실에서 막 씻고 나오는 남도하를 향해 다가갔다.
“머리 잘 말려야죠. 이제 추워서 감기 걸려요.”
그의 어깨에 걸린 수건을 가로챘다. 물기가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닦고 나온 남도하의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고 가볍게 흔들며 물기를 닦아 줬다. 나보다 조금 키가 큰 그였지만, 까치발을 들 정도는 아니었다.
“윤범아.”
내 손목을 붙잡는 남도하의 손길은 무시했다. 한참이나 그렇게 그의 머리를 털어 주고 수건을 떼어 내자, 눈 아래 뺨이 조금 불그스레 달아오른 것 같은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하지 마, 덥다.”
“그래요? 맥주 마실까요?”
손길처럼 꽤 경직된 목소리가 나를 향했다. 얼핏 부정적인 감정처럼 읽히기도 했지만 얼굴에 깃든 표정까지 그렇지는 않았다. 지난 부산에서도 저런 얼굴이었을까? 어둠 속에서 서로의 살을 탐하던 시간, 저렇게 달뜬 얼굴을 하고 있었으려나.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표정만 봐서는 꽤 긍정적인 상황 같았다. 당연히 모른 척해 줬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두 뺨을 감싸고 입을 맞추고 싶지만.
“할 이야기도 있다면서요.”
“어….”
약간 정신이 없는 것 같은 남도하를 소파로 이끌었다. 귀엽다. 저렇게 스킨십에 약한 남자가, 어떻게 그런 대범한 짓을 저질러 버렸을까. 냉장고에서 맥주 네 캔을 꺼내 테이블로 돌아갔다. 그제야 남도하의 얼굴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뭔데요?”
오늘은 어떤 이야기로 내 기분을 즐겁게 해 주려나.
“윤범아 사실은, 내가 계약이 얼마 안 남았잖아.”
하지만 막상 튀어나온 이야기는 내가 기대하던 쪽의 것은 아니었다. 뭐, 남도하 상황에서는 중요한 문제 중 하나이기는 하지만.
“그쵸. 이젠 정말 얼마 안 남았죠.”
남도하가 왜 계약을 미루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상관은 없다. 그가 더 라인에 머물면 나도 남아 있을 거고, 그가 다른 곳에 가겠다면 따라가면 그만인 일이니까. 그러다 때가 되었을 때 내 정체를 밝히며 나의 품으로 데려오면 된다.
“나 옮기려고.”
“아, 그래요.”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더 라인에서 제안한 조건은 딱 양심 없다는 소리를 듣지 않을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더군다나 아직까지도 그 쓰레기 같은 차를 바꿔 주지 않는 걸 보면 글러 먹은 회사다. 나도 옮기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안 아쉽나 봐…?”
“…네?”
남도하의 물음에 순간 사고가 멎었다. 아쉬워…? 내가, 왜? 어차피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함께하게 될 텐데. 의아한 시선을 던지다 남도하의 말을 이해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 어디로 가는데요?”
아마, 그는 내가 떨어지게 되는 걸 걱정했나 보다. 귀여워라. 뭐 저런 쓸데없는 걱정을 한 것인지 모르겠다. 미안하지만 난 어떤 수를 써서라도 남도하의 곁에 머물 거다. 그곳이 어디가 되더라도.
“샌즈.”
“어디… 요?”
하지만 그의 입이 열리는 순간, 반대로 내 얼굴이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나, 샌즈로 옮긴다고.”
생각도 하지 않았던 선택지다. 미안한 말이지만… 남도하가 가기에는 다소 상위 매니지먼트였기에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제 막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 그가 가기엔 급이 맞지 않는다고 해야 하려나.
“서주언이 오래요?”
아마 그 답은 서주언일 것이다. 속이 시커먼 그 새끼의 계략이 틀림없다.
“제안 받은 지는 좀 됐어.”
남도하는 제대로 답하지 않았지만, 틀림없다.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는 서주언을 떠올리자 급속도로 기분이 나빠졌다.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남도하는 내게 몇 번이나 재계약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던 것도 같다. 회사가 마음에 드냐는 둥, 옮기면 어떨 것 같냐는 둥.
“샌즈… 말이죠.”
그때는 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어, 좋은 기회잖아.”
하지만 일말의 희망이 남아 있었다. 남도하도 내게 마음이 없지 않으니까 틀림없이 함께 가자고 할 것이다. 그 사이 매니저의 역할도 상당히 훌륭하게 소화해 내긴 했으니까. 의도는 약간 달랐지만, 어쨌든.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더 이상의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저는…요?”
“어?”
맥주를 들이켜던 그가 나를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마치 그의 고민 중 나에 대한 것은 일절 없었다는 듯 말이다.
“전, 그냥 남아요?”
기어이 내가 직접 물어야 했다.
“그게, 윤범아. 너는 어차피 학교도 졸업해야 하고, 지금 회사도 마음에 든다면서…. 그리고 솔직히 네가 매니저 하고 있을 상황도 아닌 거 같고….”
준비했나. 남도하는 내 의문에 빠르게 변명을 덧붙였다. 한국 대학교인데 로드 매니저나 하고 있는 게 말이 되냐, 더 라인에서 인턴만 끝내고 나중에 훨씬 좋은 곳으로 가야 하지 않겠냐, 하는 현실적인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마치 우리 아빠를 마주한 것처럼 나오는 말마다 듣기 싫은 소리뿐이었다. 모두 맞는 말이라 더 그렇다.
“형.”
그래서 지금. 결론은 저 혼자 옮기겠다는 말 아닌가. 끓어오르는 속을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왜 남도하는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걸까. 내 곁에 서 있기만 하면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텐데.
“언제는 평생 같이하자면서요.”
“윤범아, 그건 그냥….”
그래, 그냥 한 말이겠지. 아무 생각 없이. 하지만 그 어떤 말에도 각자의 무게가 있다. 아무런 생각 없이 뱉어 낸 한마디도, 어떤 사람에게는 세상 가장 무거운 언약이 되기도 한다. 저 말은 내게 그런 의미였다.
자리를 남도하의 옆으로 옮겼다.
“형… 솔직히 말해도 돼요?”
순간 고민이 스쳤다. 남도하를 어떻게 할까. 여기서 내가 화를 내면 어떨까. 그런다면 틀림없이 남도하는 다시 한번 생각을 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보다 더 훌륭한 무기가 있다. 남도하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올 좋은 방법이 있다.
“뭔데…?”
감정. 그간 함께하며 쌓인 우리의 감정. 그걸 이용하면 된다.
“전 형이랑 계속 같이하고 싶어요.”
의아한 듯, 당황한 듯 굳은 남도하의 손을 슬며시 감싸 잡았다. 커다란 손을 양손에 쥐고 말을 이었다. 엄지로 부드럽게 그의 손등을 쓸었다.
“회사가 좋다 말한 건 그 매니저 일이 좋다는 게 아니에요. 형 매니저라서 좋다는 거예요, 저는.”
전해졌을까, 진심이. 적잖이 당황한 것 같은 남도하를 보면 적어도 내가 제게서 떨어지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뜻 정도는 알아챈 것 같다.
“그… 윤범아.”
“전 앞으로도 형 매니저 하고 싶어요. 이렇게 계속 옆에 있고 싶어요.”
쐐기를 박았다. 이런 직접적인 말도 알아듣지 못한다면, 더 솔직한 단어로 고백을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거칠게 요동치는 남도하의 눈동자를 보니 얼추 알아들은 것 같았다. 벌어진 입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다시 다물어졌고, 내게 잡힌 손을 힘주어 빼내고 있었다.
“도윤범….”
진심을 담은 눈빛을 한참이나 보내자, 그가 먼저 시선을 틀었다. 그러고서 나온 목소리는 언제 동요했었냐는 듯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렇게 아무 말이나 함부로 하지 마. …오해하니까.”
“오해할 소리 안 했어요. 진심을 얘기한 건데요.”
오해라니. 오히려 부족한 표현이 미안할 뿐인데.
“하아…. 장난하지 마. 어쨌든, 난 샌즈로 옮길 거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남도하는 얼핏 신경질을 부리는 것처럼 보였다. 제 할 말을 하며 먼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참 못된 버릇 중 하나였다. 타인과 감정적으로 부딪히는 일을 달가워하지 않는 성격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는 충돌이 발생할 것 같으면 이렇게 자리를 피하곤 했다.
“형, 앉아요.”
그런 남도하의 팔뚝을 낚아채 그대로 소파에 주저앉혔다. 다소 강하게 당긴 탓인지 힘을 풀고 있던 그는 맥없이 엉덩이가 닿아 버렸고,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러지 말라고 했죠.”
난 틀림없이 몇 번이나 이야기했다. 그런데도 또, 내게 등을 돌렸다.
남도하가 나에게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해도 나는 용서한다. 순간 화를 낼 수는 있지만, 결국은 그리하게 된다. 아직은 내가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건 예외다.
남도하가 나에게서 멀어진다는 상상만으로도, 나를 버리고 사라져 버린다는 가정만으로도 심장이 나락에 처박히는 기분이 든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이 내겐 그런 의미다.
“얘기로 해결하자고 했잖아요, 몇 번이나.”
“너, 지금 뭐하는…!”
정제되지 못한 감정이 들끓었다. 반작용으로 손에 쥔 남도하의 손목을 너무 세게 움켜쥐었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과했던 힘에 놀라 그의 손목을 풀어주자 내가 쥐었던 부분에 붉은 손자국이 남았다.
“하아…. 미안해요, 형.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형이 저만 버리고 간다고 하니까 저도 모르게….”
남도하에게 더는 없어야 할 흔적을 보며 빠르게 제정신이 돌아왔다. 그러곤 자책했고, 변명했다. 남도하의 허약한 마음을 이용해 내 행동을 정당화했다. 사실 진심이기도 하고.
“버, 버리긴 누가 뭘 버려! 무슨 그런 소리를 해. 우리가 뭐….”
남도하는 내가 그의 샌즈 이적 소식을 들을 때만큼이나 당황한 듯 급히 말을 이었지만, 그 사이 나온 말이 이상하다. 우리가, 뭐…? 뒷말은 무엇일까. 그럴 사이가 아니지 않냐는 말? 높은 가능성으로 그럴 것 같았다.
어쩌면 내가 뭔가 판단 착오를 하고 있었던 걸까. 적어도 나는, 우리의 마음의 크기는 비록 다를지라도 서로를 향하는 감정만큼은 비슷한 모양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같이 가요, 그럼.”
참자. 우선은, 그러자. 여기서 더 감정을 폭발시켰다가는 나도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겠다.
“뭐…?”
“저도 샌즈로 가겠다고요. 어떻게 형만 보내요. 저는 못 그래요.”
어차피 아직은 정체를 밝히기도 애매한 시점이다. K&M 엔터도 아직 내 수중에 떨어지지 않았고, 남도하를 완벽하게 지켜 줄 상황이 되지 못한다. 죽기보다 싫지만, 오히려 서주언을 옆에 두고 위험 요소를 제거하는 쪽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윤범아, 그건 아닌 거 같아. 형도 그 생각 안 해 본 건 아닌데, 너는 네 인생 살아야지.”
하지만 남도하는 또 내 의견에 반론을 제기했다. 내가 괜찮다는데, 대체 누가 누굴 걱정하고 있다는 말인가. 나의 길은 처음부터 이리 정해져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도하의 옆에서 그와 함께 하는 삶이라면, 그 어떤 모습으로, 직업으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고작 매니저면 어떤가. 그 상대가 남도하라면 충분하다.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는데요. 저는 그거면 돼요. 아니. 계속하고 싶어요, 형 매니저.”
남도하는 꽤 말을 잘한다. 의견이 부딪히는 일을 싫어할 뿐, 그런 상황에서도 제 할 말을 잘하는 편이었다. 논리적으로. 하지만, 나는 그보다 조금 더 잘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남도하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내가 남도하에 관해 아는 부분이 훨씬 많으니까.
“그래도….”
예상처럼, 남도하의 굳건하던 표정이 빠르게 무너졌다. 복잡한 심경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설마 내가 그렇게 쉽게 떨어져 나갈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안 돼.”
“왜요. 매니저 못 데려온대요? 그럼 제가 알아서 들어갈게요.”
“그런 건 아닌데, 하아….”
그럴 것이다. 고작 매니저 하나인데, 그걸 못 데려오게 하는 회사는 많지 않을 테다. 어떤 조건으로 계약을 하기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손발을 맞추던 매니저와 함께 회사를 옮기는 경우는 흔했으니까.
“저 일 잘하잖아요. 형….”
“알아, 아는데….”
남도하의 고뇌가 시작됐다. 표정만으로도 얼마나 치열하게 감정이 부딪히는지 알 것 같았다.
“전 형이랑 일하는 게 좋은데요….”
“그래. 나도 그런데, 그래서 안 돼… 윤범아.”
그리고 그 고뇌 끝엔, 허무함이 차올랐다. 자포자기한 듯 입을 여는 남도하의 표정은 무언가를 내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긍정적인 감정 하나 없는 부정이 찌든 얼굴이 내게 말하고 있었다.
“…네? 그게 왜…?”
이번만큼은,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화를 내지도 못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틀림없이 남도하의 입에서는 긍정의 말이 나와야 했다. 하지만 뜻 모를 소리만 하던 그는 결국 쐐기를 박았다.
남도하의 눈에 순간 동정이 담겼다. 내게 향해서는 안 되는 감정이 깃든 채, 나의 손을 감싸 쥐었다. 내가 남긴 선명한 붉은 손자국을 매단 채 힘주어 잡으며 입을 열었다.
“집도 곧 나갈게. 계약하면… 숙소도 준다고 하더라고.”
“형!”
“그동안 진짜 고마웠어, 윤범아. 근데 이렇게 하는 게 맞아.”
너무 놀라면 말도 안 나온다는 이야기를 내가 지금 깨우치고 있다. 무슨 말이든 꺼내 남도하의 생각을 바꿔 놓아야 하는데, 벌어진 내 입에서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홀로 무슨 생각을 끝낸 것인가 했는데, 이런 쪽의 답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나를, 버리는 선택을 하다니.
“그렇다고 우리 관계도 끝나는 건 아니니까 앞으로도 자주 보면 되잖아, 윤범아.”
남도하가 내 머릿속에 들어와 생각을 온통 뒤죽박죽으로 뒤섞어 놓았다. 얼기설기 꼬인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멍하니 그의 말을 듣고만 있다가, 남도하가 몸을 일으키는 순간에야 제정신이 돌아왔다.
“형, 저는 싫어요.”
그를 따라 일어서 또다시 내게 등을 보인 남도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돌덩이처럼 굳은 남도하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지만, 조금 더 강하게 당겨 안으며 얼굴을 그의 넓은 어깨에 떨구었다. 그러고서… 차마 두 눈을 맞추고 전하긴 어려웠던 마음을 꺼내 놓았다.
“…저, 형 좋아해요.”
언제나 남도하와 함께할 때면 내 예상은 보기 좋게 엇나가곤 했다. 예상했던 대로 일이 흘러가는 경우가 없었다. 아무리 준비를 해도 항상 그 예상 밖의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지금 이 고백도 그렇다. 나를 버리려 하는 남자의 동정심을 유발하려 꺼내야 하는 말이 아니었다. 매달리듯 애정을 갈구하듯 전할 감정이 아니었다.
“…뭐…?”
하지만 남도하를 곁에 두기 위해서라면. 그가 내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다. 나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남자가 내게 등을 돌리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 오히려 이런 상황이 되기 전 마음을 털어놓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마저 든다.
너무나도 확고해 더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감정을 전하는 일인데, 이해하기 어려운 불안이 몰려온다. 그대로 나를 털어내고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남도하의 허리를 더욱 당겨 안았다. 몰려오는 초조함을 숨기며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해요, 형.”
그래, 이 정도 고백은 아무것도 아니다.
백 번, 천 번도 말할 수 있다. 사랑해요, 형.
사랑이라는 말의 뜻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머릿속을 둥실둥실 떠다니는 몇 개의 단어로 설명할 수는 있겠지만, 콕 집어서 그게 어떤 상태이고, 어떤 감정이고, 어떤 모양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아마 대다수의 사람은 그러지 못할 것이다. ‘보고 싶고, 좋아하고, 같이 있고 싶고, 같이 있으면 기분이 좋고….’ 애매하고 알 듯 말 듯 한 이야기만 늘어놓게 되겠지.
“저, 형 좋아해요.”
하지만 나는 아주 정확하고, 간략하게 설명할 수 있다. 남도하다. 그 한 단어로 모든 게 설명된다. 내 인생, 가장 두렵고 무서웠던 순간부터 나와 함께한 사람. 사랑이라는 감정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던 어린 시절부터 마음을 차지한 사람. 내 삶의 유일한 목적과 같은 사람.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나. 남도하가 내게 전하는 모든 감정이, 내가 남도하에게 느끼는 모든 감정이 사랑이다.
“무슨 소리야, 대체…?”
꽤 힘껏 움켜쥐고 있다 생각했던 손이 풀어졌다. 남도하는 몸을 돌려 두어 걸음 거리를 두고 나를 바라봤다.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부끄러운 말을 한 것도 아니고,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니까.
“다시 말해 줘요…?”
“아니, 윤범아 그게 아니라…!”
“좋아한다고….”
“그만! 그만 말해도 돼.”
남도하는 마치 내 목소리에 얻어맞은 것처럼 한 걸음 더 뒤로 물러섰다. 오늘 꽤 당황하는 모습을 여러 번 보여 주던 그였는데, 지금이 단연 최고였다. 두 눈은 사정없이 내 양쪽 눈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고, 입술을 잇새에 물었다가 놓았다가. 저 홀로 고개를 휘저었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다가.
“그럴 수… 있잖아요. 남자라 싫은 거예요…?”
고개를 떨궜다. 그러고서 힘없는 목소리로 천천히 이야기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남도하의 약한 마음을 한 번 더 이용하기로 했다. 모질지 못한 그는 이런 나를 두고 절대 떠날 수 없을 테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좀 당황스러워서….”
예상대로다. 남도하는 축 처진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여전히 정돈되지 못한 문장이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도 나름 긍정의 신호로 읽어도 좋을 것 같다. 그의 반응을 확인하고야 쌓이던 불안이 풀어지는 것 같다. 역시 그는 여전히 내가 알던 남도하와 같다. 이제 여기서 확정 지어 주면 그만이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너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슬며시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췄다.
“그러니까 형….”
“그런데 윤범아….”
우리의 목소리가 겹쳤다. 그런데…?
“…안 돼, 그러면….”
“…네?”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은 사람은 난데, 남도하의 얼굴이 울상이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엔 혼란이 가득 깃들어 있고, 그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단호한 목소리가 나왔다.
“네가 남자라서 그렇다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그래, 알고 있던 부분이다. 남도하는 남자를 좋아할 수 있다는 걸. 나를 향하던 그 수많은 감정들이 연애 감정이 아니라면 무엇이었겠나. 입을 맞추고 살을 섞던 육체적 행동들도 그렇고.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미안.”
동정하듯, 힘내라는 듯. 남도하는 내 어깨를 몇 번 두드려 주곤 자리를 떴다. 이번엔 그를 붙잡지 못했다. 들려온 말이, 너무 기가 막혀서.
* * *
남도하와 첫 키스를 했던 날이 떠오른다. 그날, 손에 꼽을 정도로 화가 났었다. 그가 그리 원하던 대로 예능 촬영까지 하게 해 줬다. 그딴 쓸데없는 것 따위 하지 않아도 앞으로 차곡차곡 올라갈 일만 남아 있는데, 제게 온 허접한 기회마저 잃고 싶어 하지 않았다.
무소유의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욕심 없던 사람이 그렇게 하고 싶어 하니 어떻게 말리겠나. 제 일에 대해서만큼은 누구보다 욕심을 부리고 열심히 했기에 그러자 했다. 하지만 그는 보란 듯 내 앞에서 서주언과 불순한 감정을 주고받았다. 그 뒤에야 토끼 가면을 자극하기 위한 연기였다는 걸 알게 되긴 했지만, 당시만 해도 참을 수 없는 화가 들끓었다.
술에 취해 텐트로 들어간 남도하를 따라 들어갔다. 눌러낼 수 없는 감정을 폭발시킬 필요도 있었고, 남도하가 아직 나의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하기도 했다. 질 낮고, 일방적인 감정이라는 건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내 키스를 받아들이는 남도하를 보며 희망이 피어났다. 내가 남도하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남도하도 나를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
그 뒤로는 순탄했다. 우리의 사이는 하루가 다르게 가까워졌다. 내가 토끼 가면을 쓰고 찾아갈 때마다 그 간격은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그러다 기어이 서로의 가장 은밀한 속살까지도 섞게 될 정도로.
“네, 오늘 잠깐 만나요.”
하지만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 남도하는 결국 나를 선택하지 않았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과 행위들은 무엇이었을까. 남도하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인가. 키스하는 사람 따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 따로. 복잡한 속내에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지금, 방 안에서 서주언과 전화 통화를 하는 남도하의 목소리를 문밖에서 훔쳐 듣자니 의심이 커졌다. 어쩌면 문제는 또 서주언인 건 아닐까. 이제 남도하의 주변에 남은 마지막 혹 덩어리는 서주언뿐이다. 그가 아니라면 남도하가 나를 거절할 리가 없는데. 속이 시커먼 놈이 어떤 목적으로 접근한지도 모르면서.
“형, 가요.”
그가 통화를 끝낸 걸 확인하고, 문을 두어 번 두드리며 말했다. 오늘부터는 드라마 촬영이 시작돼 스케줄을 소화해야 한다. 밀린 촬영을 몰아서 하려면 아무래도 정신없이 바쁠 것이다.
“어, 일찍 준비했네.”
방에서 나오는 남도하는 여전히 예쁘다. 하지만 마치 지난밤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기만 한 태도에 욱하는 감정이 치솟았다. 내가 제게 고백했던 일이 정말 아무 일도 아닌, 그냥 그런 일일 뿐일까. 여전히 어젯밤의 감정이 이어지고 있는 나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대체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데요?
목구멍 끝까지 올라오는 물음을 눌러내야 했다. 우선은 남도하를 지나치게 자극하는 쪽도 좋지 않으니까. 그리고… 의심 가는 부분이 두 가지 있다. 확인이 먼저다.
* * *
“형, 혼자 촬영하고 있을 수 있어요? 저 잠깐 학교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은데요.”
“어? 어, 괜찮아. 갔다 와.”
이젠 익숙해질 법도 한데, 서주언과 대기 의자를 딱 붙여놓고 앉아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오늘따라 유달리 꼴 보기 싫다.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도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남도하와 서주언의 시선. 함께 놓고 보니 참…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해 짜증이 커진다.
“그럼 잘하고 있어요. 끝나기 전에 돌아올게요.”
하지만 저것도 곧 끝이다. 회사 차는 두고 택시를 잡아탔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렇게 물러설 마음이 없다. 원래 어려울 거라 예상했던 길이다. 그리 쉽게 남도하의 마음을 갖지는 못하리란 걸 알고 있었고, 굳이 마음까지 갖지 못하더라도… 어떤 모양으로라도 내 옆에 있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아빠 있죠?”
“…누구…?”
하도 오랜만에 회사에 오는 거라 그런지 비서실 직원들은 내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멍 때리는 그들을 무시하고 육중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미리 연락도 하지 않았는데 다행히 사무실에 있었다. 하긴, 할 일이 뭐가 있겠나, 회장이.
“아빠.”
“너 이 새끼!”
아빠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성난 황소처럼 들이닥쳤다. 그 행동만 봐서는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지만….
“왜 이렇게 집에 안 들어와! 어?”
내 팔을 잡아 소파로 이끌었다.
“일한다고 했잖아.”
“하아… 윤범아, 너 요즘 일은 안 하고 딴짓만 하고 다니는 거 같던데.”
아저씨가 다 말했나 보다. 아빠의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 담기는 걸 보니, 확실한 것 같다. 하지만 오늘은 아빠의 잔소리를 들어 줄 시간이 없다.
“나 부탁 하나만.”
“안 된다.”
“그래…?”
가장 쉬운 방법을 선택한 것일 뿐, 방법이 아빠만 있는 건 아니다. 조금 더 귀찮아지겠지만. 몸을 일으키자마자 아빠가 내 팔뚝을 잡아 다시 자리에 앉혔다.
“앉아, 우선! 며칠 만에 보는 건데 왜 이렇게 급해. 천천히 얘기하자, 윤범아.”
어느 정도 예상한 전개긴 하다. 아빠도 엄마도 내겐 무르기만 하니까.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여전히 나를 어린 초등학생 아들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뭔데, 이번에는.”
“내가 엔터는 가져간다고 했잖아.”
“…우선, 엔터만 물려받는 거지. 결국은 다 해야 하고.”
“나머지는 관심 없어.”
K&M 그룹. 누군가에게는 갖고 싶어 안달이 난 회사이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렇지 않다. 이 큰 규모의 회사를 제대로 경영할 생각은 한 톨도 없다. 뭐 하러 그런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간다는 말인가.
“…어쨌든, 그게 왜. 며칠 전에 이사회 회의해서 그러기로 했잖아.”
“조금 빨리 받아야 할 거 같아.”
“대학 졸업은 해야지.”
내가 욕심내는 계열사는 K&M 엔터뿐이었다. 방송과 영화 투자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 기업 내에서 차지하는 매출 비중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규모였지만, 난 그게 필요했다. 남도하를 위해서. 그리고 능구렁이 같은 우리 아빠는 내가 엔터에 관심이 있다는 걸 알고는 이미 사전 작업을 끝마쳤다. 지배 구조의 고리를 파고들면 기업의 중요 계열사를 쥐고 흔드는 회사가 K&M 엔터가 되도록 만들었다. 귀찮은 회사들까지 전부 떠안게 하려고.
“그래도 일 하나만 먼저 하고 싶은데….”
그 부분은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나중에 전문 경영인이나 앉혀 두면 되는 일이기도 하고, 정 귀찮으면 매각하면 그만이다. 아빠가 알면 뒷덜미를 잡고 쓰러지겠지만.
“하아… 뭔데.”
“매니지먼트 하나 차려야 될 거 같아.”
잠시 아빠는 넋이 나간 것처럼 내 얼굴을 바라봤다. 기가 찬 것 같기도 하고, 어이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한참만에야 아빠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크게 터졌다.
“그게 뭐 별거라고! 해, 그 정도는 맘껏 해.”
나도 아빠를 보고 마주 웃어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리 좋은지, 아빠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더 크게 번졌다.
“윤범아, 오랜만에 엄마랑 같이 점심 먹을까?”
“그래, 그러자.”
마음이 급하지만, 내 부탁을 들어준 값은 확실히 계산해야 한다. 착한 아들 역할을 하면서. 어쨌든, 남도하를 내 손에 쥐게 해 줄 자리를 줄 사람이 우리 아빠니까. 뭐… 지금도 못 줘서 안달이긴 하다만.
* * *
“네, 샌즈 압박하세요.”
- 잘 안 먹힐 텐데….
“그쪽 대표도 대가리가 있으면 생각을 하겠죠. 곁다리 하나 들이느냐, K&M이랑 척을 지느냐. 어려운 산수인가요.”
K&M 엔터를 맡고 있는 작은아버지 말도 이해는 된다. 샌즈 정도의 회사라면 웬만한 수로 압박하기가 어렵다. 배우 개개인이 가진 값어치가 상상 이상이니까. 하지만 그들이 지켜야 하는 상대가 ‘남도하’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가능성도 확실하지 않은 배우 하나를 지키기 위해 드라마와 영화 최대 투자자를 척지는 바보 같은 행동을 하지는 않을 거다.
“그리고, 그 어디서도 K&M 이름이 나와서는 안 됩니다.”
남도하에게 다시 한번 시련을 주어야겠지만, 상관없다. 더 높은 곳으로, 더 안전한 곳으로 올려 보내 주면 그만이니까. 당연히 내 곁에서만 가능하다. 우리가 함께하지 않는다면, 나도 남도하도 그 자리엔 설 수 없다.
“그러게… 왜 자꾸 도망을 가요, 속상하게.”
전화 통화를 끊고 태블릿 화면을 쓸었다. 몇 걸음만 옮겨도 닿을 거리에 있지만, 아직은 닿을 수 없는 남도하가 잠든 모습이 액정을 채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 곤히 잠든 남도하. 이렇게 내 공간에서 편안히 잠들 수 있는데, 왜 스스로 험난한 바깥에 나가 고생을 하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 * *
“형, 집에 들어가기 전에 마트 들렀다가 갈까요?”
“아… 나 약속 있는데. 주말에 같이 장 보러 가자, 윤범아.”
남도하는 한결같았다. 하지만 나는 미묘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무감각하지 않았다. 그의 말투, 표정, 단어 하나로 그의 감정을 알아채는 일이 익숙한 내게는 보였다. 남도하가 내게 거리를 두고 있는 게. 언제부터였을까. 아마… 내가 그에게 고백을 한 뒤인 것 같다.
“그래요…? 무슨 약속이요?”
그 뒤로 남도하도, 나도 더는 내가 남도하에게 느끼는 감정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입에서 나왔던 거절을 다시 듣고 싶지 않아서였고, 남도하는 아마… 그거로 끝이라고 생각해서일 테다. 그대로 우리의 사이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돌아갔다.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그… 이적 때문에.”
마음을 바꿔 샌즈로 옮기지 않겠다 하지도 않았고, 이사를 나가지 않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내 마음에 대해 다시 묻는 일도 없었다. 그저 저 홀로 나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 두고 제가 그 선을 넘는 일도, 내가 선을 넘는 일도 없게 했다.
“데려다줄까요?”
“아니, 괜찮아. 집 앞에서 볼 거라.”
약속의 주체가 누구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따로 알아보지 않고도 서주언일 거라 확신했다. 그래서 묻지도 않았다.
“그래요. 너무 늦게 들어오지 말고요.”
오피스텔 앞 도로에 정차하고 차에서 내렸다.
“괜찮아. 바로 앞이야.”
“알아요. 그래도 추우니까 조심해요. 형 추위도 많이 타는데.”
뒷자리에서 내리는 남도하의 점퍼 앞섶을 채워 줬다. 내가 여며 주지 않았다면 그는 이렇게 매서운 바람이 불어오는 데도 그대로 약속 장소까지 갔을 거다.
“…고마워….”
참 이상한 일이었다. 남도하는 나보다 키도 크고, 객관적으로 예쁘고 귀여운 축의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쌍꺼풀 없이 날카로운 눈매하며 오똑한 콧대가 어우려져 선이 굵은 얼굴 때문에 남자답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그런데도 이렇게 착한 말을 내뱉을 때마다 충동이 몰려들고는 했다. 이번에도 그랬다. 우물쭈물 열린 입이 너무… 귀여워 그의 뺨을 가볍게 꼬집고 말았다.
“윤범아.”
낮은 목소리로 명백히 거절 의사를 보이는 남도하였지만, 내 손길이 닿았던 그의 뺨에 옅은 붉음이 차올랐다. 딱 보기 좋을 정도의 생기가 돌았다.
“장난이에요. 조심해서 갔다 와요.”
대체 왜 내가 아니라는 걸까. 이렇게 내 손이 닿는 것만으로도 열꽃을 피우면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궁금증이 몰려오지만, 우선은 물러나기로 했다. 남도하는 내가 비켜서자마자 “금방 들어갈게.”라는 말만 남기고 멀어졌다. 그의 모습이 좁은 골목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도 내 시선은 떨어지지 않았다.
해가 져 싸늘해진 날씨가 내겐 더 매서운 것 같다. 불어오는 바람도 불길하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아마, 남도하는 그보다 더 매섭고 불쾌한 소식을 전해 들어야 할 것이다. 따뜻한 집으로 어서 돌아가야겠다. 나도, 남도하도.
* * *
“왔어요? 식사는요?”
“어? 어… 별로 생각이 없네.”
집에 들어온 남도하에게서는 완연한 찬기가 풍겼다. 비유적인 표현이기도 하고, 실제로 그렇기도 했다. 얼마나 밖을 돌아다니다 온 것인지 온기를 잃은 계절이 그대로 달라붙어 왔다. 귀 끝이 붉어지고 얼굴도 핏기가 가신 것처럼 창백했다.
“무슨 일 있어요, 형…?”
소식을 전해 들었나 보다. 남도하를 이렇게 감정적으로 뒤흔드는 일은 우습게도 그의 커리어와 관련된 일뿐이었다. 예전에 살인자의 밤 드라마를 중단시켰을 때처럼 반쯤 넋이 나간 그를 거실 소파에 앉혔다.
“샌즈에서 아무래도 나 못 옮길 거 같다네….”
예상대로다. 아니, 예상보다 이른 연락이었다. 적어도 며칠은 고민할 줄 알았는데 단 하루 만에 말을 뒤엎었다. 그 정도로 K&M의 힘이 대단하다 할 수도 있겠고, 안타깝게도 남도하의 위치가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이유도 있겠다.
“갑자기요?”
시무룩해진 남도하를 보자니 내가 벌여 놓은 일인데도 짜증이 났다. 고작 이 정도 대우밖에 못 해 주는 것들이 남도하를 탐냈다는 것도 그렇고, 어떻게 남도하를 이리 쉽게 포기할 수 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는 모든 게 만족스러워야 함에도 이상하게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그러게. 갑자기 그러더라, 계약 못 하게 됐다고. 사정이 있대.”
“그래도 어떻게 이렇게….”
“나 혼자 괜히 기대하다가 헛물 켠 거지, 뭐.”
남도하에게 이번 좌절은 몇 번째였을까. 평탄하지 않았을 그의 삶을 생각하면 틀림없이 수많은 역경과 좌절이 있었을 것이다. 이번에도 결국은 자신을 탓하고 있을까? 초연한 듯한 표정으로 결과를 받아들이는 남도하를 보자니 기분이 조금 더 안 좋아졌다.
“괜찮아요, 형. 회사가 샌즈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남도하의 손등에 손을 포갰다. 따뜻한 곳에 들어온 지가 한참인데도 그의 손은 여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그렇겠지. 또 기회가 있겠지, 뭐.”
얼마나 넋이 나간 것인지, 최근 들어 작은 스킨십에도 손길을 피하기 바쁘던 그는 내 손길을 털어낼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게 좋기도 하고, 또 싫기도 하다. 남도하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잡았다.
“그럼요. 틀림없이 그럴 거예요, 형.”
확신을 담아 말했다. 지나치게 확정적으로 말하는 내 마음을 알아챈 것인지 남도하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그 눈빛이 묻는다. 뭘 그렇게 확신하냐고.
“형은 충분히 그럴 수 있어요.”
약속이기도 하고, 다짐이기도 하다. 더는 남도하의 삶에 좌절과 실패는 없을 거다. 그 어떤 것이라도 원하는 것은 갖게 될 테고, 그가 받아야 할 정당한 대우를 받게 될 거다. 마지막으로 안긴 이 좌절이 기억조차 나지 않는 곳으로 올려 보내 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 거다.
당연히, 남도하는 내 손을 잡은 채 올라가야 한다.
* * *
“윤범아, 도하 계약한다고 하더라?”
오랜만에 회사에 오니 이원호가 또 시끄러운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네. 1년 계약이라는 거 같던데요.”
“걔도 웃긴다. 지가 뭐 1년 뒤면 톱스타라도 될 줄 아는 건가.”
“그걸 형이 어떻게 알아요?”
“야! 사람 그릇이 있는 거야. 도하가 연기나 얼굴은 좀 되기는 해도, 지금 자리도 반짝이야.”
그래. 그러니까 네가 이런 삼류 매니지먼트 회사에서 양우준이나 맡고 있는 거다. 이렇게 인물 보는 눈이 없는데, 회사 보는 눈이라고 있으려고.
“도하 형 걱정보다는 양우준 걱정이나 하시는 게 낫지 않겠어요?”
“뭐…?”
“요즘 좀, 미친놈 같던데요.”
“미, 뭐…?”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나를 보는 이원호를 향해 웃어 주며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미친놈이요.”
나와 단둘이 만났던 이후, 양우준은 요즘 정신줄을 놓아 버렸다. 아예 맛이 간 거 같다고 해야 하려나. 거의 카메라 앞에 서기 어려울 정도의 상태였다. 비단 내 의견뿐만이 아닌지, 제작진과 제작사는 양우준 분량을 급하게 줄이다 그도 안 되니 하차로 방향을 잡은 상황이었다.
“그러게. 옆에서 잘 좀 돌보지 그러셨어요. 왜 그런 꼴이 되게 둬요.”
이원호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려 주고 자리를 일어났다. 어디 되지도 않는 것들이 남도하를 뒤에서 씹어 대는지 모르겠다. 남도하 이야기를 서주언 쪽에 흘려 줄 때부터 맘에 들지 않았던 놈이 끝까지 밉상 짓을 한다. 양우준도 그렇지만 이원호에게 가치를 부여하자면, 아마 하염없이 0에 수렴하는 인간이다. 재활용도 불가한 쓰레기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형, 촬영 늦겠어요. 그만 갈까요?”
“어, 그러자. 이제 촬영도 몇 번 안 남았지?”
남도하는 생각보다 일찍 기운을 차렸다. 원래 저렇게 포기가 빠른 성격인지, 아니면 속이 곪아 터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네. 이제 정말 몇 번만 더 찍으면 돼요. 샵 잠깐 들렀다가 가면 될 거 같아요. 머리 많이 길었네요.”
“…또…?”
귀엽다. 표정에서부터 샵에 가기 싫다는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니 일부러 미용실 예약을 더 부지런히 잡을 수밖에 없었다. 마치 병원에 가기 싫어 칭얼거리는 어린이 같다고 할까. 물론, 몸집이나 얼굴을 보면 절대 그럴 수 없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느껴진다.
“어서 가요.”
“하아, 알았어….”
남도하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는 내가 기분 나쁘지 않게 슬쩍 팔을 빼내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근데 그 미용실 있잖아.”
“네.”
“왜 우리 말고는 아무도 안 써? 잘 자르는 거 같던데….”
차로 향하는 사이 남도하의 입이 열렸다. 매우, 듣고 싶지 않았던 쪽의 질문이다.
“글쎄요…. 더 좋은데 다니나 보죠, 뭐.”
“아, 그런가. 난 거기도 좋던데.”
이럴 때는 약간 순진한 남도하의 성격이 매우 좋다. 그 미용실은 연예인 협찬 따위를 하지 않는다. 그러니 더 라인에 소속된 떨거지들이 그곳에 올 일이 없는 게 당연하다. 커트 한 번에 수십만 원일뿐만 아니라 철저하게 멤버십 예약제로만 손님을 받는 곳이었다. 그러니 다소 둔한 남도하의 눈에도 좋아 보였을 것이다. 순진하게 여태 그게 협찬이라 믿는 이 남자를 어쩌면 좋을까. 이래서 내가 남도하를 바깥세상에 내놓을 수 없는 거다.
“맘에 들어요, 거기…?”
“어? 어. 오늘은 윤범이 너도 자를래? 내가 낼게.”
…큰일 날 소리. 아마 커트 비용만 들어도 놀라 자빠질 거다.
“다음에요. 오늘은 시간이 안 돼요.”
그래도 뭐, 나를 생각해 주는 마음이면 충분하다.
* * *
“너 혹시, 도하한테 무슨 짓 한 거 아니지?”
남도하가 촬영에 들어간 사이, 서주언이 내게 말을 걸었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명백한 태도로 나를 무시하던 과거의 그를 생각하면 말이다.
“무슨 짓이요?”
“글쎄. 요즘 좀 이상한 일이 있어서.”
“일은 그쪽이 하셨겠죠. 왜 제대로 확정되지도 않은 이적 얘기를 해서 우리 형 기운만 빠지게 해요?”
“하, 우리… 형?”
“네, 우리 형이요.”
내 목소리가 삐딱해진 탓인지, 서주언의 목소리도 마찬가지로 모나졌다. 하지만 이제는 상관없다. 어차피 드라마 촬영도 다 끝나가는 마당에 서주언의 감정이 어떻든 무슨 상관인가. 더군다나 남도하의 이적마저 막힌 상황이니 물불 가릴 게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보기에 넌 선을 넘었거든?”
저 말로 확신했다. 적어도 서주언은 내가 남도하를 바라보는 시선에 담긴 감정을 눈치챘다. 하지만 나도 알고 있는 게 있다.
“그 선은 저만 넘지는 않았죠. 강태운은 건강해요? 발기는 잘 되나 모르겠네요.”
내 입에서 나온 이름 하나에 서주언의 얼굴이 험상궂어졌다. 저렇게 순진해서야. 세상 사람들이 그 비밀을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냥 모른 척해 주는 게 아니라?
“아! 원래 강태운은 쓸 일 없겠구나, 참.”
“그걸… 어떻게 알았지.”
“이럴 땐 부정부터 하고 보셔야 해요. 그 얘길 저만 아는 건 아닐걸요.”
“…그럴 리가.”
“어쨌든 도하 형한테 괜히 이상한 생각 품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드리는 경고예요.”
사실 서주언의 의도는 여전히 의문스럽다. 그가 예전에 남도하에게 손을 대려 한 강태운과 오랜 연인 사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가 대체 왜 남도하에게 친절함을 가장해 접근한 것인지는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지만, 더 캐물었다가는 내 정체마저 탄로 날 수가 있어 더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서주언도 깨끗한 이유로 남도하에게 접근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막 대화를 끝내고 돌아서려던 내 등에 대고 서주언이 말을 이었다.
“내가 하나 가설을 세웠는데.”
“…….”
언제 당황했냐는 듯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매끄러웠다. 마치 연기를 하는 것처럼.
“남도하 스토커는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어. 그리고 K&M과 관련이 있지. 좋은 말로 팬, 나쁜 말로 사생이라고 할까? 아마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을 거야. 그리고 틀림없이, 남자야.”
…저게 지금 나랑 게임을 하자는 건가.
“일반적인 애착 이상의 감정을 품고 있을 거고, 질투심도 많지. 아니, 소유욕이라고 하는 게 좋겠네. 그리고 그 스토커는 높은 확률로… 너야, 도윤범.”
뭐, 항상 나를 향해 날카로운 눈길을 던지는 서주언이었으니 놀랍지는 않다. 그리고 이 정도로 날뛰었으면 정체가 점점 탄로 나지 않을 수 없다는 건 충분히 감안했던 부분이다. 이딴 일은 심적 동요를 일으킬 일도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네. 맞아요, 저.”
뒤돌아서며 정답을 들려줬다. 서주언도 아무런 동요가 없는 거로 봐 꽤 확신했던 것 같다. 몇 걸음 떨어졌던 거리를 다시 좁히며 입을 열었다. 나라고 아무것도 몰라서 입을 다물고 있었던 건 아니다.
“나도 가설을 하나 세웠어요. 서주언 씨는 강태운이랑 오래 만나기는 했지만, 사이가 썩 좋지 않았어요. 몇 번 헤어졌다 재결합하길 반복했죠. 문제는 강태운의 가벼운 엉덩이였어요.”
“…너!”
“근데, 그러다 사고가 나서 강태운이 고자가 돼 버렸다네요? 하필 남도하를 꼬시려다가 말이죠. 그래도 미우나 고우나 애인인데, 강태운을 그렇게 만든 놈들을 가만히 둘 수는 없었죠. 그래서, 기회를 봐 복수하려고 남도하의 곁을 맴돌았다, 어때요?”
내가 떠올린 것 중 가장 가능성이 높은 가설을 늘어놓았다. 수많은 가설 중, 그나마 가장 말이 되는 이유는 저것뿐이었다. 아시아의 모든 인구가 알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남자가 남도하에게 유독 친절을 베풀 이유가 없었다.
난 사람의 선의를 믿지 않는다. 그들이 베푸는 친절에는 마땅한 이유가 있다. 이유 모를 친절을 베푸는 서주언을 의심하고 조사하다 보니 내가 고자로 만든 강태운에게까지 닿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 저 이유가 아니라면 그 대단한 서주언이 남도하에게 접근할 이유가 없었다.
“하, 이거 한 방 먹었네.”
서주언을 마주 보고 서자 그는 연기 같지 않은 웃음을 토해 냈다. 한참 웃던 그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지워지지 않았다. 가식이 아니라, 정말 재미있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따악!’ 하는 소리와 함께 골이 울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뭐예요?”
서주언이 내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세게. 골이 울릴 정도의 통증에 반사적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전혀 예상도 못 한 공격이 당황스럽다.
“틀렸어, 인마. 무슨 스릴러 영화 찍냐? 내가 왜 복수나 하고 있어, 시간 아깝게. 뭐, 절반은 맞았다고 치고.”
“…아니라고요…?”
이 역시 당황스럽다. 확실할 거라 생각했던 가설이 깨진 것도, 서주언이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내 말을 받아들이는 것도.
“어쨌든 우리 사이에 비밀이 생겼네. 잘 지켜라, 그 비밀.”
“꼭 그쪽은 남도하한테 아무 말도 안 하겠다는 것처럼 들리네요?”
“말하면, 협박할 거 아니야? 증거는 얼마든지 있다, 너랑 강태운이랑 떡 치는 영상 인터넷에 뿌려 버리기 전에 입 다물어라… 뭐, 그런 협박 하려고 했지?”
뭐야. 이젠 서주언도 조금 무섭다. 어떻게 내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하려던 말을 알고 있을까. 당연히 남도하의 곁을 맴돌 때부터 그에 대한 증거는 다 모아 두었다. 실제 섹스 영상까지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비슷한 것들은 얼마든지 있다.
“맞네. 그러려고 했네, 이 새끼. 난 도하한테 절대 말 안 해. 어쨌든 위험한 놈은 아니라는 건 알았으니까.”
“그 말이 더 수상하다는 건 알고 있죠? 그쪽이 남도하의 안전을 생각한다는 거 자체가 믿음이 안 가요.”
“그렇기는 하네.”
“허튼짓하지 마요. 조금만 이상한 낌새 보여도 양우준처럼 되는 건 한순간일 테니까.”
재수 없는 새끼지만, 이상하게 그러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든다. 그저 경고를 남긴 것일 뿐, 그는 약속을 지킬 것 같다. 얼굴에 옅게 감도는 미소가 그런 생각을 키운다.
“근데. 과연 그 비밀이 너한테 도움이 될까, 윤범아?”
서주언은 뜻 모를 말을 남긴 채 먼저 몸을 돌렸다. 그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뜬 듯 들렸다. 뭔가 흥미로운 걸 발견한 것처럼, 즐거워 보였다. 멀어지는 걸음도 가벼운 것만 같고. 제가 남자랑, 그것도 강태운이랑 연인 사이라는 비밀이 걸렸는데도 말이다.
마지막에 남긴 말은 뭘까…. 역시 속을 알 수 없는 남자다.
* * *
순조롭다. 아니, 순조로웠다. 남도하를 더 라인에 앉혀 두는 것까지는 성공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 뒤로도 다소… 내게 거리를 두기는 했지만, 여전히 나의 시선이 닿는 곳에 머무르는 남도하가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항상 인생은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번갈아 찾아오는 걸까. 지금 상황을 봐서는 그런 것 같다.
“어딜… 간다고요?”
“이사 가려고. 이제 출연료도 상당히 모았고, 작은 전셋집 정도는 구할 수 있을 거 같아.”
“형!”
“윤범아, 전에도 얘기했잖아.”
남도하의 이적 관련 이야기가 없던 일이 되었으니 당연히 집도 그대로 머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저 홀로 또 일을 벌이려 하고 있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했잖아요.”
“언제까지 남의 집에 계속 얹혀살 수는 없잖아. 지금까지 도와준 거는 고마운데, 이 이상은 나도 너무 부담스러워.”
재고의 여지가 없는 듯한 목소리가 나왔다. 거의 확정과 같은 통보였다.
“전 형이랑 사는 게 좋은데요….”
당연한 결과였지만, 남도하의 단호한 표정은 삽시간에 무너졌다. 머지않아 그는 결국 다시 생각해 보겠다는 말을 꺼낼 것이다.
“미안…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남도하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등을 보인 채 말을 이었다.
“난 윤범아, 좋아하는 사람 있어.”
남도하답지 않게 꽤 굳은 마음을 먹은 것 같다. 어떤 말로 내가 설득하더라도 마음을 돌리지 않겠다는 마음.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저렇게 다시 한번 꺼내 놓는 걸 보면 틀림없다. 남도하가 방에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나도 방으로 들어왔다. 붙박이 옷장 안 금고를 열어 토끼 가면을 꺼냈다.
“하아, 이걸 어쩌나.”
처음 토끼 가면을 쓸 때까지만 해도 단순 일회용이었다. 당장 다른 놈에게 원치 않는 일을 당할 남도하를 지켜 주려는 의도뿐이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내가 찾아갔던 날, 나를 끌어안던 그 온기가 문제였다. 한번 생겨난 욕심과 욕망은 ‘딱 한 번만 더’ 하는 욕심을 빚어 냈다. 그 결과가 지금까지 이어져 결국 가면을 쓴 채 남도하와 맨살을 맞대기까지 했다.
‘좋아하는 사람 있어.’
남도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는다. 그동안, 토끼 가면을 쓰지 않은 나를 향하던 그의 감정에도 일말의 애정이 담겨 있었다고 확신한다. 그 마음의 크기는 내가 가진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비슷한 생김새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그가 저리 말한다면, 두 가지 가설이 있다.
하나는 안타깝게도, 서주언이다. 남도하는 정에 약했으니까, 제게 다정하게 대해 주는 서주언에게 말 못 할 감정을 품었을 가능성도 있다. 드라마 촬영 중 유달리 가깝게 지내고는 하던 두 사람이었고, 나 모르게 만난 일도 몇 번이나 있었을 정도니까 망상은 아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 * *
‘탁’
오늘 밤. 남도하를 잠 못 들게 하는 고민은 무엇일까. 침대에 곤히 누워 있는 모습을 보고는 잠이 들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제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바람처럼 일어나 앉는 걸 보니 이 밤도 그에겐 불면의 밤이었던 것 같다.
“안 잤네요.”
남도하에게서는 아무런 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어둠은 내게도 익숙한 공간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답답한 가면까지 써서 시야는 더욱더 흐렸다. 침대 옆 협탁의 조명을 낮게 밝혔다. 그제야 나를 바라보는 남도하의 시선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건 명백히… 화가 난 표정이다.
“뭐 하는 거예요, 지금.”
목소리도 마찬가지다. 저녁이라 그런지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던 이유인지, 남도하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낮고, 딱딱했다. 틀어진 감정이 그대로 전해졌다.
“뭐가요.”
“왜 그렇게 연락이 안 되고, 또 오지도 않는 건데요.”
아마 다른 때였다면, 이런 남도하를 보며 가면 속에서 홀로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나를 기다렸다는 말을 저렇게 화난 목소리로 하는데, 기껍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런 그를 보며 침대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아’ 하는 한숨 소리가 나더니 남도하는 내게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무슨 일 있었어요?”
짧은 시간 어떤 생각을 한 것인지 남도하는 이제 걱정을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저 고개를 도리질해 부정을 표했다. 일이라면 너무나도 많았지만, 남도하가 굳이 알 필요 없는 세계의 이야기들뿐이라 여기서 늘어놓을 필요는 없었다.
“근데 왜 그렇게 연락이 안 되냐고요. 그렇게 맨날 꺼 둘 거면 뭐 하러 번호를 알려 줘요.”
“…그건 남도하 씨 동생한테 알려 준 건데.”
“그 얘기가 아닐 텐데요.”
남도하가 날을 잡았다. 내 신변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확인한 그는 또다시 목소리가 바뀌었다. 마치 훈계를 하는 것처럼 앞으로 팔짱을 끼고 허리를 곧게 편 채 내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나름, 엄한 모습이었다.
“남도하 씨, 내가 앞으로는 자주 못 찾아올 거 같은데 어쩌죠?”
팔짱을 낀 남도하의 손을 잡아끌었다. 화가 났다는 감정을 숨기지 않는 그였음에도, 순순히 딸려왔다.
“…왜요.”
“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그도 내 분위기가 전과 같이 장난스럽지 않다는 걸 알아챈 것인지, 투정 같던 모습을 지웠다.
“무슨 일 없다면서요.”
“아직은 없다는 말이에요.”
남도하의 손을 맞잡을 때, 그의 시선에 담긴 불안을 읽는 순간 깨달았다. 나의 생각을 얼기설기 꼬아 버리던 의문의 답을 찾은 것 같았다. 하긴, 모를 수 없기는 했다. 그에게만 알려 준 토끼 가면 전용 번호로 줄기차게 메시지가 들어오고 있었으니까. 일부러 답장도 하지 않았지만, 몇 시간, 혹은 며칠에 한 번씩 메시지를 남기고는 했다.
“남도하 씨.”
“…네?”
“내 정체… 궁금해요?”
남도하는, 나를 좋아한다. 도윤범이 아닌, 토끼 가면을 쓴 나를.
“정체라… 궁금하죠. 알고 싶어요. 뭐, 그쪽이 하지 말라고는 했어도, 몇 번 찾아보려고 하기도 했고요.”
남도하는 장갑 낀 내 손을 주물러 대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요?”
“근데,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 같기도 해요.”
“…정말요?”
“네. 그 뭐야… 진짜 그 할아버지만 아니면요….”
이래서 내가 이 가면을 갖다 버릴 수가 없다. 남도하는 항상 내 앞에서는 모든 속마음을 진실하게 털어놓고는 했다. 아무리 가까운 이원호나 서주언, 또는 원래의 내게도 꺼내 놓지 않는 마음을 이리 쉽게 말하곤 했다.
“할아버지는 아닌데….”
“그럼 됐어요. 준비되면 보여 줘요. 강요는 안 할 테니까.”
그는 조금 더 강하게 내 팔을 움켜쥐었다. 진심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충동이 몰려든다. 여기서 내가 가면을 벗어도 되지 않을까? 누구든 상관없다고 하지 않나. 하지만… 나는 그런 모험을 할 수가 없다. 가장 확실하고, 가장 안전한 방법을 택해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틀어졌던 길을 다시 올바르게 돌려놓아야 한다.
“남도하 씨, 할 말이 있어요.”
“…뭔데요…?”
“내일 회사로 연락이 갈 겁니다.”
“연락이요…?”
갑자기 업무 이야기가 나오자 남도하의 얼굴엔 의문이 깃들었다.
“네.”
“저한테 왜요?”
“전속 계약이요. 거기로 옮기세요. 내… 부탁이라고 하죠.”
그는 정신이 나간 것처럼 멍한 표정으로 내 얼굴만 바라봤다. 정확히는 토끼 가면을.
“샌즈로 못 옮겨서 속상해했잖아요. 그딴 데랑은 비교도 안 되는 곳으로 보내 줄게요.”
“아니, 저는 이미 더 라인이랑 1년 계약도 했는데요?”
“그건 제가 알아서 처리해요.”
순간 남도하는 침묵했다. 그러고서 부지런히 머리를 굴리는 게 빤히 읽혔다.
“저, 믿죠…?”
남도하는 바로 답을 하는 대신 한참이나 나를 바라봤다. 항상 생각을 읽기 쉽다고 생각했던 남자였는데, 지금만큼은 아무런 답도 찾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가 원하지 않아도 강제로 데려오는 방법도 있지만, 우선은 기회를 주고 싶다.
“그럴게요.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보다는 낫겠죠.”
남도하가 웃었다. 아무런 고뇌도, 의심도 없는 밝은 웃음이었다. 역시. 남도하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조금 더 안전한 공간을 만들어 줄 테다. 내게서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그런 보금자리를 선사하고… 비틀어진 우리의 관계를 원래대로 돌려놓을 거다.
“그래서 한동안은 연락 안 될 거예요. 괜찮죠?”
남도하는 내 등을 당겨 안았다. 예상도 못 한 온기가 전해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없어요, 그런 거.”
“그럼 괜찮아요.”
내심, 틀리기를 바랐다.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고. 이런 모습의 나라도 좋아해 주는 남자이니 좋으면서도, 하필 이런 꼴을 한 내게 마음을 준 남도하가 싫기도 하다. 하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모습으로 다시 그의 앞에 서면 그만이다.
잠시만, 안녕이다.
* * *
“야! 대박, 대박 소식!”
이원호는 언제나처럼 방정을 떨며 우리 대기실로 들이닥쳤다. 어디 매니저 그룹 채팅방이 있는지, 그딴 데서 듣는 온갖 찌라시를 저렇게 호들갑을 떨며 옮기고는 했기에 그다지 기대감은 없었다. 비단 나만의 감상은 아닌지 남도하도 작게 인사를 건넬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우리 회사 투자받는다는데?”
“…투자요?”
“어, 그것도 50억.”
이번 주제엔 남도하도 솔깃한지, 대본을 내려놓고 이원호의 얼굴을 바로 보고 앉았다. 내 입장에서는 별다른 흥미도 없는 이야기였지만, 남도하를 따라 관심 있는 척 귀를 기울였다.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이원호가 말을 이었다.
“그것도… 무려 K&M 엔터에서 투자하는 거래.”
“K&M…이요…?”
“아무래도 거기서 우리를 되게 좋게 봤나 봐. 이러다가 우리 회사 상장하는 거 아니냐?”
헛소리. 고작 50억 투자로 상장할 거였으면 대한민국 매니지먼트 회사 절반은 상장했을 거다. 더군다나 제대로 된 연예인 하나 없는 주제에 상장은 무슨. 경제의 ‘경’자도 모르니 저런 병신 같은 소리를 늘어놓는 거다.
“지금 회의실에서 미팅하고 있어.”
“잘된 거죠…?
“당연하지! 도하 너도 인마! 그러니까 한 5년 계약했어야지. 너 그러다 내년에 또 찬밥 신세 된다.”
50억이라… 확실히 부담되는 금액이기는 했다. 특히 이런 허접한 회사에 쥐여 주기엔 지나치게 큰 금액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거로 남도하를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분도 받게 될 테니 큰 손해는 나지 않을 거라 확신한다. 뭐… 솔직히 나는 더 라인이 망한다 하더라도 상관없기는 하지만.
“형, 양우준 데리러 안 가요? 병원 치료받을 시간 같은데.”
방해꾼을 빨리 쫓아냈다. 이원호는 시간을 보고는 급하게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그때 내 휴대폰이 진동했다. 매니지먼트 팀장이었다. 그는 일방 통보와 같은 말만 몇 마디 건네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형, 회의실로 잠깐 오라네요…?”
“나?”
“네, 저랑 같이 가요.”
함께 회의실 앞에 서서 남도하의 옷을 바르게 정리해 줬다. 원래도 깔끔했지만, 그냥 한 번 더 그를 만져 보고 싶어서.
“도하 씨 앉아요.”
이미 미팅은 끝난 것인지 회의실에는 매니지먼트 팀장과 대표, 그리고 처음 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남도하가 자리에 앉고, 그 옆에 나도 따라 앉았다.
“얼마 전에 1년 전속 계약했었죠.”
“네, 대표님.”
“좀 아쉽기는 했어요. 도하 씨랑 오래 같이하고 싶었는데 1년만 하겠다고 해서. 그래도 우리 회사 거의 처음부터 함께한 가족이잖아요?”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도 안 나온다. 가족이라니. 누가 보면 되게 소중히 여기던 배우에 대해 이야기하는 줄 알겠다. 어디 다 부서지게 생긴 차를 내주고, 내가 오기 전까지는 매니저 하나 붙여 주지 않았던 주제에.
“네, 생각이 조금 많았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죠?”
그동안 지켜보니 남도하는 생각보다 이런 자리에서 크게 긴장하지 않는 것 같다. 어쩌면 내가 토끼 가면을 쓰고 그에게 미리 귀띔을 해 준 덕분일 수도 있겠다.
“남도하 씨를 모셔가고 싶다는 회사가 있어요.”
“…거기가 K&M인가요?”
“이렇게 소문이 빠르다니까. 네, 맞아요.”
대표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남도하를 또다시 버리는 선택을 한 것임에도 그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조건은 남도하 씨랑 별도로 협의하겠다고 하고, 회사는… 동의했습니다.”
“그랬군요.”
“남도하 씨 미래를 위해서도 그쪽이 더 좋다고 판단한 거니까, 섭섭하게 생각하시지는 않았으면 좋겠네요.”
웃기는 놈들이네. 왜 자기들이 남도하를 내주는 조건으로 투자금을 받은 부분은 쏙 빼고 이야기하는 거지.
“알겠습니다. 그쪽이랑 조건은 따로 얘기하도록 하죠.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꽤 기분 나쁠 수 있는 상황인데도 남도하의 태도는 상당히 태연했다.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좋아하는 것도 같았다. 그 어떠한 조건도 듣지 못했고, 어찌 보면 또다시 인생의 좌절이라 할 수 있는 일이 벌어졌는데도 그는 기뻐 보였다.
“그럼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할 말을 모두 들은 남도하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방을 나간 사이 나도 한마디를 남겼다.
“팀장님, 저도 계약 끝내 주세요.”
“뭐…? 너 연장 안 해? 왜? 정규직 전환해 줄까?”
“아뇨. 필요 없어졌어요, 이제.”
당황한 듯한 팀장에게서 무어라 말이 더 달라붙었지만, 미련 없이 방을 나섰다. 이젠 더 이상 이곳에 볼 일이 남아 있지 않다. 나도, 남도하도.
“형, 잘된 거죠…?”
“글쎄. 잘된 거 같기는 한데…. 그쪽 만나 봐야 알겠지?”
그의 기분이 좋아졌다. 내 질문에 애매한 투로 답하는 것과는 달리 남도하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웃음이 걸려 있는 걸 보면 확실하다. 그는 지금 누구를 떠올리는 걸까. 토끼 가면일까. 언젠가는 나를 떠올리면서도 저런 웃음을 짓게 될 테지. 준비는 차곡차곡 진행되고 있다.
* * *
[K&M 엔터, 매니지먼트 사업 진출 선언! 첫 주자는 ‘살인자의 밤’ 남도하!]
“형, 기사 엄청 나왔어요.”
“…그러게, 되게 많네…?”
남도하의 이적은 순식간에 진행됐다. 더 라인도 길게 붙잡을 마음이 없었고, 남도하의 생각도 확고했던 덕분에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조금은 허무할 정도로 성사된 이적으로 정리해야 할 부분은 그저 지금 남도하가 촬영 중인 드라마뿐이었다.
“이번 작품까지만 같이 해야겠네….”
언제는 나랑 같이 샌즈로 옮길 생각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남도하의 입에서는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가 나왔다. 어쩌면 그냥 내 바람 때문에 그리 들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죠, 뭐.”
보란 듯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줬다. 마음 같아서는 남도하의 남은 스케줄도 새로운 소속사로 모두 가져오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내가 그의 곁에 붙어 있을 명목이 없었다. 나머지가 모두 정리되는 대로 기존 스케줄도 순차적으로 이관하는 것으로 정리했다. ‘유종의 미’라는 말을 붙여서, 서로가 모두 동의한 이적이었다는 걸 드러내기에도 나쁘지 않은 그림이었다.
“근데… 그만둔다고 했다면서? 팀장님이 그러던데, 너 데려가는 거냐고….”
남도하는 조심스럽게 내 속내를 캐보려 했다. ‘혹시 너, 나 따라오려고 그러는 거냐.’ 하는 물음을 돌려 말하는 것 같았다. 남도하답게 예쁜 말로 우려를 드러냈다.
“그냥요. 형도 전에 그랬잖아요.”
“어?”
“제자리로 가라고. 그래서 조금 더 저한테 맞는 곳으로 가려고요. 전공도 더 살리고.”
“아… 그래. 그렇지, 잘 생각했어.”
잘 생각했다는 건지, 왜 그런 선택을 했냐는 건지. 그에 대해 세상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내가 보기에도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표정과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는 내게 맞는 일을 하라더니.
“다 형 덕분이에요.”
“무슨…. 아무튼 잘 됐다, 우리 둘 다.”
“그러게요.”
남도하 때문에 일정이 많이 앞당겨지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 같기도 하다. 특히 이번 일로 우리 부모님이 가장 좋아하고 있으니 어떻게 보면 이게 참된 효도 아니겠는가. 남도하 덕분에 팔자에 없을 줄 알았던 효도를 다 해 본다.
“아, 형. 연락 왔네요, K&M이요.”
조용하던 휴대폰이 진동을 울렸다. 이적 서류에 사인을 한 이후, 남도하의 이적을 도와줄 K&M측 담당자였다. 각별히 신경 써 골라 달라고 했으니 모르긴 몰라도 이원호 같은 부류의 인간을 보내지는 않았을 거다.
“가자.”
소풍 가는 어린이 같다고 할까. 남도하는 설레는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런 그의 겉옷을 챙겨주며 오피스텔 로비로 나오자 커다란 밴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도하 씨.”
두 명이 차에서 내려 인사를 건넸다. 한 명은 로드매니저로 보이고, 나머지 한 명은….
“맞죠, 고혜선 팀장님…?”
“어? 저 아시네요? 반가워요. 제가 전반적으로 책임지게 됐어요. 앞으로 우리 잘해 봐요.”
남도하도 알아본 것 같다. 매니지먼트계의 톱스타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손을 탄 배우며 가수 중 성공하지 않은 케이스가 없을 정도로 소문난 전문가였다. 자세한 계약 조건은 모르겠지만, 웬만한 회사원의 몇 배나 되는 연봉을 주고 데려왔을 것이다.
“타요. 가면서 이야기하죠.”
팀장은 나와 남도하를 배려하는 것인지 보조석에 탔고, 남도하와 내가 뒷자리에 앉았다.
“이거… 서주언 차랑 같은 거지?”
그럴 리가. 남도하의 차는 내가 직접 골랐다. 농담을 조금 보태 미사일을 직통으로 맞아도 안전할 차로 개조했다.
“그거보다 한 단계 높은 거 같네요.”
그동안 더 라인에서 쓰레기 같은 승합차를 타고 다니느라 내가 다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였기에 특별히 신경 썼다. 자고로 연예인의 품격은 차에서 가장 먼저 드러나고는 한다. 회사가 얼마나 그 연예인을 신경 쓰는지는 차만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다.
“좋네, 차가….”
“맘에 들어요?”
“어? 아니, 뭐 그냥.”
두리번거리는 남도하의 모습을 보자니 차는 잘 고른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나머지 준비한 것들도 부디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도하 씨, 이사할 집으로 먼저 갈게요. 계약은 끝났는데 아직 내부 공사가 조금 남아서 며칠 정도 걸릴 거 같아요.”
“아, 네. 알겠습니다.”
남도하는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아마 내가 옆에 있는 탓인 것 같다. 집에서 나가는 건에 대해 몇 번이나 의견 충돌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상관없다. 어차피 내 손으로 직접 구한 집이고, 집에 들여놓을 가구, 침구 하나까지 전부 내가 직접 고른 것들이니까.
“여기 엄청 비쌀 텐데….”
혹시라도 내가 구한 집의 가치를 남도하가 모르고 넘어갈까 싶어 직접 한 번 언급해 줬다.
“말도 마세요. 여기 빈집도 없는데 대체 어떻게 구했는지 모르겠어요.”
다행히 고 팀장이 눈치 좋게 내 말을 받아 주었다. 내심 자신의 배경이 되는 K&M을 자랑하고 싶어 꺼낸 말이겠지만.
“저도 회사 여기저기 꽤 다녀 봤는데, K&M만큼 돈 잘 쓰는 데는 또 없는 거 같아요.”
“그래요…?”
“그럼요. 계약금도 꽤 받으셨잖아요, 도하 씨.”
고 팀장은 장난스러운 투로 소곤거리듯 말하며 앞장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팀장을 잘 뽑은 거 같다. 옆에서 저렇게 회사의 장점을 늘어놓아 주니 내가 할 일이 줄었다.
로비에서부터 신분을 확인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탈 수 있는 고급 빌라였다. 크고 넓은 외관에 비해 세대수가 적어 오고 가는 인적도 많지 않아 보안에도 적합했다.
“한번 둘러보세요. 필요하신 거 있으면 말씀해 주시고요. 회사에서 다 추가해 주겠다고 하네요.”
제집처럼 소개하는 팀장의 안내에 남도하와 함께 집 안쪽으로 들어갔다. 현관을 지나 꽤 긴 복도를 지나고서야 거실이 나왔다.
“여기가… 숙소라고요…?”
“좋네요. 그쵸, 형?”
“어? 어… 좀 과한 거 같기는 한데….”
어쩜 저렇게 예상을 빗나가지 않을까. 이보다 하나 더 큰 평수로 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랬다면 부담스러워서 못 살겠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정도는 다 살아요. 그쵸, 팀장님?”
“네? 설마요. 여기 가격이 얼만데요. 웬만한 연예인도 여기는 못 살아요.”
저 사람이 잘 나가다가 삽질을 하네.
“그래도 그만큼 회사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마세요. 저희 회사 남는 건 돈밖에 없어요.”
아니구나. 말을 참 잘하는 사람이구나.
“그래요, 형. 이왕이면 좋은 집에서 살면 더 좋죠, 뭐.”
“그래도 혼자 살 건데 방이 뭐 이렇게 많아…?”
혼자 살기는 왜 혼자 산다는 말인가. 내가 무슨 마음으로 이 집을 준비했는데.
지금 살던 오피스텔은 급하게 구하느라 제대로 꾸미지 못해 내심 마음에 걸렸었다. 이번만큼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최고로 준비했다. 우리가 함께할 곳이니까.
“가구나 뭐 그런 건 어때요? 커튼이 너무 칙칙하지는 않아요?”
“아니. 좋아, 전부.”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남도하는 말을 하는 사이에도 집안을 둘러보느라 시선이 바빴다. 예전에 보았던 남도하의 본가가 생각나 더욱더 신경을 쓴 부분도 있었다. 내겐 누구보다도 예쁘고, 멋진 남도하와는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그 집만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지는 기분이다. 더는 남도하의 인생에 그런 기억을 더해 주고 싶지 않다.
“다행이에요, 마음에 든다니까.”
내 말에 남도하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옅은 의문이 묻어났다. 네가 왜 좋아하냐는 물음을 입 대신 눈빛으로 전하는 것 같았다.
“형이 잘돼서 저도 기분 좋아요.”
그저 웃어 주고 말았다. 진심이기도 하니까. 그래도 그 마음만큼은 제대로 전해진 것인지 남도하의 얼굴에도 미소가 그려졌다. 보는 사람의 마음마저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따뜻한 미소가.
“그럼 집은 이대로 공사 끝내고, 한 일주일 뒤에 이사 들어오시면 될 것 같아요.”
“네, 감사합니다.”
집이 넓어 한참이나 구경해야 했다. 네 개의 방과 거실, 주방. 가는 곳마다 남도하는 말을 아꼈지만, 만족스러워하는 감정은 여실히 전해졌다. 함께하던 사이 그의 취향을 조금 더 잘 알아 두었던 게 이렇게 도움이 된다.
“아휴, 제가 뭘 한 게 있나요. 그럼 회사로 갈까요?”
“아직 사무실이 없다고 들었는데요.”
맞다. 남도하와 계약을 할 당시만 하더라도 K&M 엔터엔 담당 팀이 없었다. 급조된 조직이니 그럴 만했다.
“아무래도 기존에 하던 업무랑 밀접한 관련도 없어서 사옥을 따로 구했어요. 바로 이 근처예요.”
추가로 다른 연예인을 매니지할 생각은 없다. 그랬기에 사실 사무실이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지만, 남도하가 유달리 회사에 대한 애착이 강한 편이었기에 사무실을 따로 구했다. 일이 없어도 회사에 출근할 정도이니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나.
“이 건물이에요. 동네가 조용해서 좋을 거 같아요.”
“1층에 카페가 있네요?”
“아, 네. 이번에 리모델링하면서 들어왔다고 하더라고요.”
맞춤이라고 할까. 3층 건물 중 1층엔 남도하가 좋아하는 프랜차이즈 카페를 넣었다. 아무 데나 점포를 내지 않는다는 그들이었지만, 서울의 살인적인 월세를 무기로 내세워 절충하니 못 할 것도 없었다.
“잘됐네요. 형, 저기 커피 좋아하잖아요.”
“그러게. 회사도 귀엽다, 그치?”
“형이랑 잘 어울려요.”
“…그럴 리가.”
어떤 부분을 보고 귀엽다고 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나름 남도하의 이미지에 맞추어 꽤 현대적이고 모던한 이미지를 구현한 건데. 어쩌면 그의 눈에 뭐든 반짝이고 예뻐 보이는 이상한 필터가 끼워진 것일 수도 있겠다.
“들어오세요. 사무실도 아직 정리 중이라 약간 정신이 없네요.”
팀장을 따라 들어가 걸음을 옮기는 사이에도 내부는 여러 사람들이 오가며 정리를 하고 있었다. 단 한 명을 위해서라기엔 과한 인원이랄 수도 있었지만, 그 한 명이 남도하라면 당연히 이래야 하는 게 옳다. 오히려 여태 이 정도밖에 정리해 놓지 않았다는 게 못마땅할 뿐이다. 첫 이미지가 얼마나 중요한데, 이리 어질러진 상태로 남도하가 방문하게 하다니.
“도하 씨 방은 따로 준비했어요. 회사 오실 일 있으면 앞으로 여기 쓰시면 됩니다.”
“여기요…? 이렇게 넓을 필요는 없는데요?”
“글쎄요… 저도 직접 준비한 거는 아니라서. 그냥 쓰세요. 어차피 여기 말고도 남는 사무실 많아요.”
내 손길이 닿은 이 공간만 유일하게 공사가 끝나 있었다. 집과 전반적인 인테리어 색감을 맞췄다. 항상 피곤할 그를 위해 안마의자도 하나 놓았고, 잠시 눈을 붙일 수 있도록 소파는 최대한 크고, 편안한 거로 준비했다.
“잠시 앉아서 얘기할까요?”
“네, 그래요.”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는 남도하와 고 팀장을 보며 커피 머신에서 커피를 내렸다. 남도하의 것에는 얼음을 넣어 시원한 아메리카노로 만들어 건네며 나도 따라 앉았다.
“고마워.”
“뭘요.”
전해 준 커피를 벌컥벌컥 마시는 걸 보니 꽤 갈증이 심했나 보다.
“앞으로 살인자의 밤 끝날 때까지는 옆에 계신 분이 계속 케어해 주신다고 하던데요.”
“아니요. 인수인계 끝날 때까지입니다.”
“아… 그런가요…?”
이번엔 내 입으로 확실히 말했다. 살인자의 밤이 거의 끝나 가는 건 맞지만, 마지막까지 기다릴 수는 없다.
“…왜? 끝날 때까지 하는 거 아니었어?”
남도하도 자세한 일정에 대해서는 처음 듣는 부분이라 그런지 나를 보며 의문을 표했다.
“이렇게 좋은 회사가 있는데, 제가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그래도 마지막까지는 같이하는 줄 알았는데.”
참, 사람 마음 약해지게 하는 재주가 있다.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또 다른 관계로 만나게 될 텐데, 그 짧은 공백마저 만들고 싶지 않게 만드는 남도하다.
“걱정하지 마요. 여기 계신 분들도 잘해 줄 거예요.”
그래야만 할 거다. 내가 남도하의 곁을 잠시 비우는 사이, 사소한 실수도 없이 그를 지켜 줘야 한다.
“그쵸, 팀장님?”
“…네? 네….”
고 팀장은 순순히 답을 하고서야 갸우뚱 생각에 빠졌다. 제가 왜 내 질문에 답을 했는지 모르겠나 보다.
* * *
“나 혼자 가도 되는데….”
“그래도 어떻게 이사를 혼자 해요, 형.”
“봐, 짐도 없잖아.”
시간은 참 빠르게 흘렀다. 나도 요즘 유달리 바쁜 한 때를 보내고 있었고, 남도하도 그랬다. 속절없이 흐른 시간은 기어이 남도하의 이사 날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요. 이거라도 도와주게 해 줘요, 네?”
“하아… 그래. 짐 옮기고 맛있는 거 먹자. 형이 사 줄게.”
이삿짐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원래 나와 살기 전 집에 있던 가구는 내가 다 박살을 내 쓰레기가 되어 버렸고, 우리 집에도 모든 살림살이가 있었기에 남도하가 추가로 사야 할 건 없었다. 거기에 새로운 집에도 숟가락 하나, 휴지 한 통까지 전부 새것으로 준비해 뒀으니 이번에도 몸만 옮기면 됐다. 고작 캐리어 두 개에 들어간 옷이 전부였다. 그것들도 대부분 내가 사 준 것이라는 게 꽤 만족스럽다.
“진짜죠? 저 엄청 비싼 거 먹을 건데요?”
“뭐, 와규?”
“아니요.”
“그럼 랍스터?”
남도하도 우리의 첫 만남을 기억하는 걸까. 저것들은 내가 그에게 첫 만남에서 장난처럼 던진 메뉴들이었다. 그때, 그는 저런 보기를 던지는 것만으로 얼굴이 흙색이 될 정도로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았다.
“먹어도 돼요?”
“맘껏 먹어. 다 사 줄게, 오늘은.”
하지만 지금은 웃음으로 받아치며 내 머리를 헝클었다. 머리칼을 헤집어 대는 손길에 충동이 몰려온다. 그대로 그의 품에 파고들고 싶은 욕심이 밀물처럼 몰려들지만, 조금만 더 참기로 했다. 지금보다 더 완벽하게 그를 안을 수 있도록.
* * *
예상처럼 이사는 순식간이었다. 두 개의 가방에 들어 있던 옷을 드레스룸에 걸어 두는 게 전부였는데, 앞으로 옷이 많아질 걸 감안해 미리 커다랗게 만든 탓인지 옷 몇 개만 옷걸이에 걸린 모습이 다소 초라했다. 하지만 뭐 어떤가. 곧 옷장이 꽉꽉 찰 정도로 사 줄 건데.
“비밀번호는 전에 너희 집이랑 같아.”
옷 정리를 끝내고, 남도하는 슬쩍 저 말을 뱉었다. 이미 알고 있지만, 이제 막 들은 것처럼 의문의 시선을 던져야 했다. 어떤 의도로 한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알아 두라고. 말했잖아, 집 나간다고 아예 안 보고 살자는 건 아니라고.”
남도하는 여전히 남도하다. 혹시라도 제 이사로 내가 마음을 다쳤을까 걱정하는 것 같다. 나의 고백을 받아 줄 수는 없어도, 상처는 주기 싫다는 의도일까. 아니, 무의식중 아직 나를 향한 감정을 지우지 못한 것이라 믿고 싶다.
“고마워요. 맨날 놀러 와야겠다.”
“그래. 집에서 혼자 밥 먹지 말고 나랑 같이 먹어.”
…남도하가 만든 요리라. 미안한 말이지만 그것만큼은 정말 사양하고 싶다. 나를 생각하는 마음만 받도록 하자.
“밥 먹으러 가요. 형 집에 장도 봐야 될 거 같고요.”
“아… 그건 내가 해도 되는데. 너무 부려먹는 거 같아서….”
“온 김에 같이 해요. 대신 밥 맛있는 거 사 주면 되죠. 비싼 거로.”
남도하의 등을 떠밀며 집을 나섰다. 마트에서 장을 보기는 했는데, 솔직히 살 것도 없었다. 이미 몸만 들어가 살아도 불편하지 않도록 모든 걸 갖춰 놓았으니까. 간단하게 장을 보고 식사를 하러 갔다.
“…여기서, 먹자고?”
“네. 저는 여기가 그렇게 맛있더라고요.”
남도하의 입맛을 알아내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그는 나를 만나기 전까지 대부분의 식사를 편의점 도시락이나 배달 음식으로 때우고는 했다. 그의 집에 자주 배달되는 음식을 보며 입맛을 유추할 수 있었다.
생긴 것과는 다르게 자극적인 식단을 좋아했고, 그중 가장 좋아하는 건 분식 메뉴였다. 그런데도 그렇게… 탄탄한 근육 몸매를 유지하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뭐… 싫다는 건 아니고.
“그래도 오늘은 진짜 맛있는 거 사 주고 싶은데.”
그 어떤 식탁이라고 하더라도 나에게는 같은 의미다. 진짜 와규를 먹더라도, 랍스터를 먹더라도, 떡볶이를 먹더라도. 앞에 앉은 사람이 남도하라면, 내게는 다르지 않다.
“우리 처음 먹었던 데도 여기였는데, 기억해요?”
“당연하지. 어떻게 잊어, 그걸.”
난 메뉴까지 기억하는데. 그때도 남도하가 좋아하는 것들만 골라 시켰었다. 그는 모르겠지만. 오늘도 그때와 같은 메뉴로 주문을 하고, 그가 식사하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봤다. 여전히 먹성 좋게 접시를 비워 나가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불러오는 기분이다. 앞으로 며칠은 이 모습을 이리 가까이서 바라볼 수 없을 거라 생각하니 조금 안타깝기도 하다.
“하아… 배부르다.”
“그럼 이 앞에 잠깐 산책할까요? 오늘은 바람도 별로 안 차던데.”
당연히 주문한 음식은 싹 비웠고, 남도하는 포만감을 드러냈다. 그의 카드로 계산을 하고 건너편에서 커피 두 잔을 테이크아웃 해서 길을 거닐었다. 낮이라 그런지 인적이 많지 않았지만, 이제 드문드문 남도하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제 맘 편하게 산책도 못 하겠네요.”
“그러게… 예전엔 아무도 못 알아봤는데.”
싫다. 개인적으로는 매우 못마땅하다. 남도하의 직업이 배우라는 게 이럴 때마다 짜증스러워 죽을 것 같다. 아무도 남도하를 바라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그가 좋아하는 일이 배우인데 어쩌겠나. 이 정도는 내가 감내해야지. 다행히 우리를 향해 말을 거는 사람이 없어 산책이 불가한 정도는 아니었다.
“넌 이제 뭐 할 거야?”
나란히 걸음을 맞추어 걷던 중, 남도하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하고 싶은 일 해야죠.”
“전에 얘기했던 거?”
“네. 조금 예정이랑 달라지는 했는데, 결과는 같을 거예요.”
시기가 조금 빨라졌고, 급하게 일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지만, 결국 남도하의 옆에 서는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 오랜 꿈은 그렇게 이루어질 거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는데, 잘됐으면 좋겠다. 아니, 너는 잘할 거야.”
“그래야죠.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날은 여름이라고 하기도, 가을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날이었다. 낮에는 약간의 열기를 머금은 태양이 떠 있었고, 가로수는 초록빛에서 노란빛으로 변할락 말락 한 날이었다. 우리가 공식적인 처음 만났던 날의 이야기다.
그랬던 계절은 어느새 앙상한 뼈대를 드러낸 가로수가 초라히 서 있는 때가 되었다. 한때는 오색찬란한 빛으로 거리를 물들이던 이파리가 떨어져 나가 그 어느 때보다 쓸쓸한 모습을 하고 있는 날, 우리는 잠깐 헤어지기로 했다.
“저 없어도 괜찮죠? 잘할 수 있죠?”
“글쎄…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나는.”
남도하의 말에 걸음이 멈추었다. 그도 옮기던 걸음을 멈추고 한 발짝 뒤에 떨어진 나를 바라보며 돌아섰다.
“윤범이가 일을 너무 잘해서, 누가 와도 마음에 들려나 모르겠어.”
“…그런 사람 싫다고 한 게 누군데요.”
하늘을 얼룩덜룩하게 만들던 구름이 걷혔다. 구름 사이를 뚫고 선명한 색을 머금은 햇빛이 한 줄기 들이쳤다. 나를 보고 미소 짓는 남도하의 얼굴로. 이미 내겐 찬란한 모습으로 보이던 그의 얼굴이 더욱더 빛이 났다.
이 잠깐의 헤어짐마저 갖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그만큼 잘했다는 말이야. 나도 처음이기는 마찬가지지만… 윤범이가 최고였어, 내 매니저 중에.”
어떤 의미로 하는 말인지는 충분히 알고 있다. 나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면서도 그 감정의 실체를 혼동하지 않도록 적당히 선을 긋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제 준비는 다 끝났다. 매니저 도윤범이 아니라, 토끼 가면을 쓴 스토커 도윤범이 아니라 진짜 내 모습으로 그의 앞에 설 준비.
“저도요, 형.”
남도하는 나에게 최고이고, 최선이다. 비록 그는 아직 자신의 마음이 내가 가진 것과는 다른 모양이라고 확신하는 것 같지만, 그 생각을 깨트려 줄 거다. 그에게도 내가 최선이고, 최고가 될 수 있도록. 그러기 위한 잠시의 이별이다.
사랑해요, 형.
* * *
“생각보다 투자가 비전문적이네요. 솔직히 놀랐어요, 작은아버지.”
“아무래도 이쪽 일이 우리 그룹 집중 사업이 아니다 보니까. 나도 겸직이고.”
그동안 K&M엔터를 맡고 있던 작은아버지는 여전히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 같았다. 미리 받아 본 회사 자료들을 검토하다 보니 신기할 정도였다. 허술해도 이렇게 허술할 수가 없었다.
“이건 뭐 그냥 무당 불러서 성공할 작품 찍으라고 한 거나 다름없을 거 같은데요. 투자 위험 평가도 전혀 안 돼 있을 수가 있나요.”
책임을 따지는 건 아니다. 어차피 작은아버지는 대표라는 직함만 걸어 두고 있을 뿐, 실제로 회사 일에 크게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래도 인마, 너 들어올 때까지 여기 지키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나는 그냥 하와이 리조트나 관리하겠다니까?”
열일곱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아빠에게 다소 당돌한 부탁을 했다. K&M엔터를 달라고. 어린 아들의 장난 같은 말로 치부할 수 있는 이야기였음에도, 회사 일에 흥미를 보이는 모습이 기꺼웠는지 바로 그러라 했다. 대신 조건은 한국대를 졸업하는 것.
비록 아직 졸업을 하지는 못했지만, 입학하는 것으로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아빠는 아마 내가 한국대를 졸업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약속을 지켰을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조그만 영화 투자사에 불과하던 K&M을 업계 1위로 만들어 놓았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기업 지배 구조의 핵심으로 엮어 놓았다.
“그동안 감사했어요.”
“감사는 무슨. 근데 윤범아, 아무래도 조금… 이르지 않냐.”
그렇다. 아직 스물넷이라는 나이가 가장 큰 걸림돌이다. 이미 이사회에서는 동의를 구한 부분이었기에 문제 될 것이 없었지만, 이젠 바깥의 시선도 무시할 수 없는 위치였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자리 지켜 주세요. 일 처리는 제가 다 할 테니까요.”
“바지사장 하라는 거지?”
“일하기 싫다면서요. 월급만 받아 가시면 되는데, 잘된 거 아니에요?”
“이 새끼, 한 마디를 안 지네. 대충 본부장 정도 달고 들어오면 되겠지. 그 정도는 크게 눈에 띄지 않으니까.”
“…무슨 본부요? 그런 자리가 있어요?”
“그런 조직이 없기는 한데…. 대충 하나 만들지 뭐.”
이미 소문은 퍼졌다. K&M가의 아들이 엔터로 들어왔다는 소문. 의도적으로 퍼트린 소문이기에 내가 맡을 자리가 본부장이든 대리든 사원이든 그 부분은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을 거다. 결국 이 회사를 움직이는 사람이 나라는 걸.
그나마 K&M엔터가 그룹 전체로 볼 때 매우 작은 매출 규모를 차지하기에 어떤 자리로 들어간다 해도 세관의 관심을 받지는 않을 거다.
“며칠 뒤에 정식으로 출근하면 될 거 같다. 일 좀 살살 하고.”
“걱정 마세요.”
새로운 회사 자료를 다운받은 랩톱을 들고 자리를 일어났다. 조용히 회사를 빠져나와 운전대를 잡았다. 몸이 너무 피곤해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만, 남도하의 촬영장으로 방향을 잡았다. 드라마 촬영 막바지에 접어들어 오히려 더욱더 촬영 분량이 많아진 것 같다. 밤낮으로 촬영에 임하는 그가 걱정될 정도였다.
“저러다 다치는 건 아닌지 몰라….”
저 멀리서 촬영 중인 그의 모습을 바라봤다. 수많은 스태프에 싸여 제대로 보이지도 않지만, 내 눈에는 점처럼 자그마한 남도하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인다. 비록 아직 곁으로 다가갈 수는 없지만, 이렇게 먼 거리에서라도 그를 바라봐야 안심이 된다.
그래서 편안한 집을 포기하고 남도하가 내 눈에 들어오는 곳에서 랩톱을 켰다. 모니터를 한 번 보고, 남도하를 한 번 보고. 너무나도 귀찮고 하기 싫은 일과, 너무나도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일. 그걸 같이 하니 그나마 평행이 맞춰지는 것 같다. 내 준비도 막바지다. 그의 마지막 촬영 때에 맞추려면 시간이 많지 않다.
* * *
“하아… 진짜 귀찮아 죽겠네.”
이번에도 안타깝게 너무나도 귀찮고 하기 싫은 일이다.
“왜, 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잖아, 조용히 있었잖아!”
시끄럽다. 어쩌면 이렇게 목소리마저 듣기 싫을 수가 있을까.
“우준아, 그래서 여태 살려 줬잖아. 왜? 빨리 보내 줄까.”
다리가 풀린 것인지 내가 제집에 찾아가자마자 현관에 주저앉은 양우준의 꼴이 우습기만 했다. 그의 앞에 무릎을 접어 앉아 시선을 맞췄다.
“됐어. 조용히 살 테니까 그냥 좀…!”
“이번엔 도와주러 온 건데. 너 도박 빚 존나 많잖아. 도와주려는 건데 진짜 나 그냥 가?”
빚 이야기가 나오자 양우준의 시선에 혼란이 깃들었다. 어떻게 안 것인가 궁금한 것 같다.
“그거 곧 터지게 생겼던데. 드라마 촬영도 제대로 못 하면서 도박은 계속했나 봐?”
30억가량이던 빚은 거의 40억에 육박했다. 당장 오늘 그 기사가 터질지, 내일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원하는 게 뭔데….”
“내가 고민이 좀 많았어.”
“무슨….”
“너랑 그 팬 새끼를 그냥 찢어 죽일까, 태워 죽일까.”
양우준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래, 농담이 아니다. 정말 어떻게 죽여야 속이 좀 풀어질까 고민을 많이 했다.
“근데 그러면 누가 좀 싫어할 거 같더라고.”
양우준의 왼쪽 팔뚝을 붙잡았다. 그는 되지도 않는 힘으로 나를 털어 내려 했지만, 가능할 리 없었다. 앙상한 팔뚝엔 울긋불긋 주삿바늘 자국이 한가득했다. 혈관을 제대로 찾을 수 없었던 것인지 손등에까지 멍 자국이 있었다.
“그리고 그냥 둬도 곧 뒈질 거 같기도 하고.”
“…살려, 살려 줘…! 남도하한테는 절대 얘기 안 한다니까…!”
“그건 이제 상관없어. 내가 직접 얘기할 거거든.”
제 마지막 무기마저 사라졌다는 걸 알아챈 양우준의 눈가가 축축해졌다. 그나마 여태 양우준을 정리하지 않았던 것은 오롯이 남도하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그가 내 정체를 알게 되거나, 출연진이 갑자기 사라지면 마무리만 남은 드라마에 악영향이 갈 테니까.
“은퇴해야겠지, 우준아?”
끄덕. 여전히 내 손에 제 은밀한 팬이 붙잡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인지, 아무런 반론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서 해외 잠깐 나가 있자, 괜찮지? 얌전히만 지내면 살려 줄 테니까 걱정 말고.”
미친 듯 끄덕이는 대가리. 순종적인 양우준의 뺨을 몇 번 툭툭 치고 몸을 일으켰다.
“오늘 바로 은퇴 기사 내보내.”
“그, 그런데… 아직 계약 기간도 남았고….”
“내가 그것까지 처리해 줘야 할까.”
좋은 말로 하면 이렇게 삽시간에 요구 사항이 늘어난다. 널브러진 양우준의 허벅지를 구두 굽으로 꾸욱 짓이겼다. 죽는다고 소리를 지르며 발작하는 걸 보니 진짜 다리를 잘라 버릴까 싶은 충동마저 들 정도다.
“왜, 네 팬은 양팔을 못 쓰니까 너는 두 다리를 잘라 줄까?”
“미안, 미안… 악…! 정리할게, 오늘! 꼭… 으악!”
이렇게 할 수 있는 일을 왜 처맞고서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나도 편하게 대화로 먼저 일을 처리하고 싶은데. 원하는 답을 듣고 그의 허벅지를 짓이기던 행동을 멈췄다.
“오늘 밤에 바로 비행기 타. 짐은 간단히 챙기고.”
“…윽… 호, 혼자…?”
당연히 그럴 리가.
“아니, 선물도 같이 보내 줄 테니까 기대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양우준의 집을 나왔다. 모르긴 몰라도 양우준은 더 이상 한국에 발을 디딜 수 없을 거다. 상상을 초월하는 도박 빚도 그렇고, 약물 중독. 거기에 제가 평생 책임져야 할지 모를 두 팔이 망가진 괴한 새끼까지 같이 보내 줄 예정이니까. 혼이 나간 양우준을 뒤로하고 차로 돌아왔다. 악연이라 할 수 있는 인연은 여기까지다.
“아저씨, 준비해 주세요.”
“이거 오랜만에 큰 사건 하나 나오겠네.”
“강태운 복귀한다는데, 그 기사 나오는 날 맞춰서 터트리죠. 아예 관심도 못 받게.”
“…그렇게까지요…?”
“그렇게까지, 당해야 할 놈들이에요.”
양우준과 스토커를 죽이지 않는 것으로 내 배려는 끝이다. 두 사람은 인적도 없는 외국으로 보내 버릴 거다. 이미 망가져 버린 것 같지만, 약과 도박에 절어 한국에 돌아올 생각도 못 할 것이고, 한국에서는 양우준의 도박 기사와 해외 도피 기사가 터져 오고 싶어도 못 오게 될 테지.
“그래도 양우준이 헛짓거리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럴 카드가 없어요. 만약 그렇게 나오면 양우준이랑 스토커가 한 짓까지 터트리면 그만이에요. 그럼 누가 그 새끼 말을 믿겠어요.”
완벽한 덫에 가뒀다. 양우준은 두 팔이 망가진 제 팬과 평생을 떠돌이로 살아갈 거다. 남도하를 죽이려 한 대가로는 부족한 감이 있지만, 현실적인 타협안이다.
강태운도 마찬가지다. 다시는 이 바닥에 발을 못 붙이게 할 수도 있겠지만, 그나마 비밀을 잘 지키고 있는 서주언과의 의리를 생각해 이 정도로 끝내려는 것이고.
“도련님… 이제 정말 회사 일만 신경 쓰셔야 합니다…?”
글쎄…. 이리 어렵게 남도하의 옆에 설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 거지 같은 회사 일이 눈에 들어오기는 하려나 모르겠다. 다시 만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떠올리자 심장이 두근댄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하지만 모든 일이 내 생각처럼 흘러가는 건 아니었다. 남도하의 곁에서 항상 그랬듯 계획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