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백일몽(Day dream) (2)=)
“그… 윤범아….”
얼마 전 잠에서 깬 남도하는, 매우 당황스러웠다. 틀림없이 어제저녁 공원에 있었다. 그런데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익숙한 침대 위였다. 그다지 달갑지 않던 주제의 대화를 나누던 중 밀려드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든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집에 올 때까지 정신이 없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요, 입맛이 없어요?”
“아니, 그건 아니고….”
틀림없이 토끼 가면이 옮겼을 것이다. 그곳엔 두 사람뿐이었으니까. 그리도 무방비하게 잠이 든 것도 뒤늦게 섬뜩했지만, 혹시라도 도윤범이 무언가를 보거나 소리를 들었을까 싶어 슬쩍 떠봤다. 다행히 아무것도 모르는 기색이었다.
“어제… 일찍 잤지, 너?”
“그런 거 같은데요? 요즘 피곤해서 머리만 대면 잠드는 거 같아요.”
멋쩍은 듯 뺨을 긁적이는 얼굴이 태연했다. 하지만 남도하는 작은 찝찝함이 남았다. 기억이 왜곡된 것인지, 아니면 숙면 사이 꾼 꿈의 잔재인지 모르겠지만, 지난밤 도윤범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치.”
혹시, 설마… 하는 의심이 이번에도 스멀스멀 피어올랐지만, 금세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자책했다. 요즘 너무 모든 사람을 의심하는 병이 생긴 것 같다고. 하다못해 이제는 도윤범이라니.
“형, 오늘 뮤지컬 보러 갈래요?”
망상을 떨쳐 내며 한참 식사를 이어가고 있을 때, 도윤범이 대뜸 이상한 소리를 했다.
“오늘? 무슨 뮤지컬?”
“그냥… 쉬는 날이잖아요. 공짜 표도 생겼고요.”
스케줄을 잘 맞춘 덕분인지, 그리 바쁜 촬영 일정 중에도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쉬는 날이 있었다. 그리고 그게 오늘인 것도 맞고.
“오랜만에 저녁도 나가서 먹으면 어떨까 싶은데… 별로예요?”
전혀 예상을 못 했던 말이라 그렇지, 썩 싫지는 않았다. 무기력하게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좋을 것 같았다.
“아냐, 그러자.”
남도하의 긍정적 답변에 도윤범의 얼굴에도 일순 미소가 번졌다. 별말도 아닌 걸 뭐 저리 조심스럽게 물어오는지 모르겠다. 또 뭐 저렇게까지 좋아하고.
“빨리 먹어. 설거지는 내가 할게.”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같이 집 청소를 했다. 그사이 간단하게 청소를 하긴 했지만, 마음먹고 하니 집안일이 끝도 없었다. 생필품도 사 오고, 빨래까지 끝냈다. 그래도 혼자 하는 것보다는 확실히 덜 힘들었다.
“미치겠네, 진짜….”
그리고 이제 뮤지컬을 보러 가야 하는데, 거울 앞에 선 남도하가 바빴다. 이상하게 걸칠 옷이 하나도 없는 것 같고, 멀쩡한 옷도 무언가 하나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색이 좀 칙칙한 것 같다거나, 핏이 애매하다거나, 같이 신을 신발이 안 어울린다거나.
“형, 멀었어요?”
“어… 잠깐만…!”
그렇게 힘들게 옷을 고르긴 골랐는데, 더 큰 문제는 머리였다. 원래 머리에 뭘 바르고 다니지도 않았었는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든 것인지 모르겠다. 옷을 갖춰 입고 보니 수수한 머리가 뭔가 이상했다. 그래서 촬영장에서 메이크업을 받을 때처럼 홀로 왁스를 짜 머리에 발랐는데, 그게 사달이 났다.
마치 머리칼이 떡 진 것처럼 달라붙었고, 왼쪽 오른쪽 6:4 가르마를 타 놓은 모양이 되어 버렸다. 어떻게 수습을 해보려 손을 댈수록 상황만 더욱더 악화될 뿐이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욕실로 달려가려 할 때였다.
“형, 여기서 더 늦으면… 우리… 그….”
벌컥 방문이 열리며 도윤범이 머리통을 방 안으로 밀어 넣었고, 두 사람의 시선이 닿았다.
“…큭….”
그리고 한참 뒤, 도윤범의 입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리며 문이 도로 닫혔다.
“저, 저 아무것도 못 봤어요… 형.”
웃음기를 가득 머금은 도윤범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봐, 틀림없이 다 본 것 같다. 몰려오는 자괴감에 이미 엉망이 된 머리를 헝클어트려 버렸다. 꼴도 보기 싫었다.
결국, 머리를 다시 감아야 했다. 그리고 도윤범은 아무 말 없이 왁스와 스프레이를 들고 와 남도하의 머리를 만져 주었다. 그리 전문적인 솜씨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남도하보다는 훌륭했다.
“웃지 마라.”
“안, 웃고….”
입꼬리에 힘을 가득 준 채 웃음을 눌러 내는 게 더 기분 나쁜 건 모르나 보다. 마음 같아서는 머릴 손대 주는 손길마저 털어 버리고 싶지만, 홀로 세팅했다가는 어떻게 되는지 잘 알았기에 잠자코 있기로 했다.
“아! 멋있다, 도하 형.”
“…다 됐어?”
“네, 손만 씻고 올게요.”
도윤범이 손을 씻으러 간 사이 남도하는 방에서 짐을 챙겨 나왔다. 고른 옷이 조금 과한가 싶기도 했는데, 이제 보니 괜찮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헤어 스타일과도 잘 어울릴 뿐만 아니라, 도윤범이 입은 옷과 비교해도 절대 과해 보이지 않았다.
“잘 어울리네, 자식.”
남도하가 선물했던, 80% 할인가가 수십 만 원에 달하던 셔츠. 평소 입고 다니던 가벼운 복장과는 다른 느낌으로 잘 어울렸다. 조금 더 무게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 괜히 그가 면접을 보러 회사에 찾아왔던 날이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갈까요?”
매일의 일상과 같으면서도, 묘하게 다른 기분이었다. 언제나처럼 함께 현관을 나서고 엘리베이터에 탄다. 주차장에서 도윤범이 운전석에 앉았고….
“아, 형!”
“어…?”
자연스럽게 뒷좌석으로 향하던 남도하가 차 문을 잡은 채 멈춰 섰다. 갑자기 튀어나온 고함에 놀라 시선을 맞추니 도윤범이 도끼눈을 뜨고 바라보고 있었다.
“왜, 왜…?”
“오늘은 거기 아니거든요?”
“아… 미안.”
습관처럼 뒷자리에 앉으려 했는데, 오늘은 일을 하러 가는 게 아니니 옆자리에 앉으라는 칭얼거림이었다. 원래도 보조석이 더 익숙했는데, 언제부터 이리 뒷좌석에 자연스럽게 착석하게 됐는지 모르겠다.
“형이 운전할까?”
“…그건 안 돼요. 저번에 보니까 운전 엄청 거칠게 하던데요.”
내친김에 운전까지 하겠다 하니 단칼에 거절하는 도윤범이었다.
“그때는 그럴 만했지. 윤범이가 형한테 거짓말해서 얼마나 화났는데.”
“…지난 얘길 꺼내고 그래요….”
다 지난 과거를 들먹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어쩌다 보니 떠오른 기억일 뿐.
남도하는 생각했다. 그 당시엔 정말 화나던 일인데, 이상하게 그 기억마저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고. 어쩌면 시간이 지나며 도윤범의 좋은 모습을 더욱 많이 보게 되며 기억이 왜곡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형이 운전은 너보다 나을걸?”
“그럴 리가요. 저 스무 살 때부터 운전한 사람이에요.”
“하, 스무 살? 형은 대리운전만 3년을 했어.”
“…대리운전요…?”
군대에 다녀온 이후, 일이 별로 없었다. 더군다나 드라마나 영화 출연을 한다 하더라도 생활비와 집에 보내 줄 돈이 충분하지는 않았다. 필수적으로 겸업을 해야 했고, 그나마 벌이가 괜찮으면서 자유롭게 시간을 골라 할 수 있는 게 대리운전이었다. 그 외에도 잡다하게 해 본 일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아무튼….”
하지만 도윤범에겐 그런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대리운전이라는 말도 뱉고서야 아차 싶었다.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경력처럼 읊었는지 후회스러웠다.
“그 시계는 뭐예요?”
“아… 이거.”
다행인지 불행인지, 화제가 돌아갔다. 남도하의 손목에 채워진 시계, 토끼 괴한이 준 선물로.
“…예전부터 있던 거야.”
거짓말은 아니다. 도윤범을 만나기 전에 받았던 것이니까. 하지만 대놓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받은 선물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비싸 보이는데.”
“짝퉁이야, 짝퉁.”
때맞춰 차가 신호에 걸리자 도윤범이 남도하의 손목을 낚아챘다.
“형, 이런 건 가짜로 만드는 게 더 어려워요.”
기하학적으로 들어간 톱니 모양이 정교하긴 했다. 손목에 감기는 가죽끈도 신기할 정도로 부드러웠고. 처음엔 짝퉁이라고 생각했던 물건이지만, 지금은 사실 모르겠다. 가짜든, 진짜든 상관없을 것 같고. 어쨌든 이젠 이 시계도 편하게 차기로 했다. 지금은 그래도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잘 어울리네요.”
“…어…?”
신호가 바뀌고 차가 출발했다. 순간 남도하는 이상한 환청이 들리는 기분이었다. 도윤범의 목소리가 기계음이 섞인 음성처럼 들리는 착각. 언젠가 토끼 괴한이 이 시계를 찬 걸 보고 잘 어울린다 말했다. 그때는 지금과 매우 다른 자리였고, 남자는 그 칭찬 이후 손목을 잘라 버리겠다는 협박까지 했었다. 절대 비슷할 수 없는 상황인데, 문득 그 목소리가 덧씌워졌다.
“…윤범아, 너 혹시 토끼 좋아해?”
“토끼…요?”
“어… 토끼.”
“아뇨. 저는 동물 자체를 안 좋아해요.”
그래, 다 큰 남자가 토끼를 좋아하는 경우는 별로 없겠지. 그 특이 취향을 가진 남자 빼곤. 당연히 착각이라 생각하며 괜한 망상을 떨쳐 내려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형은요?”
“나? 나는 글쎄…. 키워 본 적은 없는데, 좋아하는 것도 같아.”
“…같, 아요?”
“응, 아마 잘 키울 거 같은데.”
문득 지나치게 커다란, 팔다리가 달린, 후드를 뒤집어쓴 괴상한 토끼가 떠올랐다.
* * *
“진짜, 여기야…?”
“네, 여기 맞아요.”
“왜? 더 맛있는 거 먹어도 되는데…?”
식사를 위해 도착한 식당을 보고 남도하의 입에서 당황에 젖은 목소리가 나왔다.
“여기도 맛있는데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처음, 도윤범과 식사를 했던 분식집이었다. 물론 일반 분식집보다 꽤 고급스럽게 인테리어를 해 놨고, 음식도 정갈하게 나오기는 했다. 하지만 생각했던 식당이 아니었다.
“난… 이런 데로 올 줄 몰랐어서….”
이유는 모르겠지만, 당연히 좀 더 제대로 된 정찬이 나오는 식당을 예상했다. 코스 요리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칼질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올 줄 알았다. 아니면 파스타라도.
“전 여기 좋은데요. 형이랑 처음으로 온 데라서 그런지.”
“아니, 나도 싫다는 건 아니고….”
이놈은 무슨 말을 이리도 예쁘게 하는지 모르겠다. 똑같은 식당인데 도윤범이 하는 말을 듣고 나자 괜히 다르게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더군다나 조금 경제 상황이 나아졌다고 바로 사치를 부리려 했던 것마저 민망해졌다. 분수에 맞게 먹고 써야 하는데. 대학생 인턴과 지갑 가벼운 어른의 분수.
그렇게 마음을 다잡아 봐도 여전히 만족스러운 메뉴가 아니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젓가락을 들기 전까지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형, 여기 음식이 그렇게 맛있어요…?”
“…….”
“포장 좀 할까요?”
“…그만해라….”
참 이상한 일이다. 왜 이 식당만 오면 며칠 굶은 사람처럼 식사하게 되는 걸까. 이번에도 두 사람이 다 먹기엔 과하게 많은 메뉴였음에도, 남긴 음식이 하나 없었다. 당연히 남도하가 거의 다 먹었다.
“제가 분식을 좀 배울까 봐요. 집에서는 이렇게 잘 안 먹으면서.”
도윤범은 웃음기를 잃지 않은 목소리로 작은 투정을 부렸다.
“그게 아니라… 이상하게 주문은 네가 했는데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라 그래.”
“저는 형이 뭐 좋아하는지 잘 아니까요.”
“알아…?”
“그럼요. 형은 매운 거 좋아하는데 잘 못 먹고, 조금 짜게 먹어요. 햄이나 소시지 같은 거 좋아하고.”
딱 맞다. 도윤범의 집에서 살기 전에는 대부분 외식이나 편의점 도시락 같은 것으로 식사를 때우다 보니 점점 더 자극적인 입맛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햄이나 소시지 같은 건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음식이다.
“그렇게 잘 아는데 왜….”
“집에서는 그렇게 안 해 주냐고요?”
“어….”
도윤범이 해 주는 음식은 충분히 맛있다. 대부분이 사 오는 것이라 하긴 했지만, 종류도 다양하고 편의점 도시락 따위에 비하면 훨씬 훌륭했다. 하지만 다소 밋밋한 간이었다.
“너무 짜고 맵게 먹으면 건강에도 안 좋고, 속 아파요. 대신 이렇게 가끔 밖에서 사 먹어요, 알았죠?”
남도하는 작게 고개를 주억이고 말았다. 또, 어른스럽게 말하는 도윤범이 나왔다. 마치 막냇동생에게나 할 법한 투로 설득을 했다. 그뿐만 아니라 말을 하는 사이 남도하의 뺨까지 한 번 꼬집고 지나갔다. 그 행동이 틀렸다는 건 한참 뒤에나 떠올랐다.
그의 손이 테이블을 넘어 닿았다 떨어져 나갈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손길 때문에 습관적으로 뺨을 만져 대는 어떤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탓에 화를 낼 타이밍마저 놓쳐 버리고 말았다. 뭔가… 이질적인 심장의 울림이 시작됐다.
“그만 갈까요? 뮤지컬 시간 늦겠어요.”
절대, 느껴져서는 안 될 심장의 박동.
* * *
생각지도 못했던 선물 같은 날이 있다. 기대치도 않았던 일이 하루를 행복하게 해 주는 날.
남도하의 지난 세월 그런 날은 거의 없었다고 봐야 했지만, 최근 들어 꽤 빈번하게 경험하고 있었다. 그 시작이 살인자의 밤 드라마를 하게 된 이후인지, 토끼 가면을 만난 이후인지, 아니면 도윤범을 만난 직후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배우 생활을 한 이후 고생한 보답이 이제야 돌아오는 듯한 일상이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요즘 머릿속을 어지럽게 하는 고민마저도 긍정적인 쪽의 것들이라 할 수 있었다. 반평생 속 끓이던 고민에 비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오늘도 그랬다. 순간 도윤범을 향해 불순한 감정을 느끼긴 했어도 전반적으로 매우 기분이 좋았다. 간밤에 잠을 깊이 잔 것을 시작으로, 함께 집 청소를 한 것도 그랬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가 헤어스타일을 만져 준 일도 재밌는 기억이었고, 처음엔 마땅찮던 식사 자리마저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
“네가 말한 게 이거였어…?”
조금 우스운 생각이지만, 마치 오랜 친구와 하루를 보낸 것도 같고, 꼭… 데이트 같기도 했다. 여태 제대로 된 데이트라는 걸 해 본 적도 없었지만, 상황만 놓고 보면 그랬다. 같이 장을 보고 청소를 하고 밥을 먹고 뮤지컬을 보는 하루.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일정 아닌가.
“네… 그렇기는 한데….”
오늘은 정말 소속사를 옮기는 문제를 진지하게 상담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뮤지컬을 보고 난 이후, 함께 간단히 술 한잔하며 이야기를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예술의 전당에 들어서자마자 깨졌다.
“그 티켓 준 게 양우준이야, 설마?”
“네…. 근데 자기 출연하는 날 아니라고 했는데요….”
실수다. 미리 어떤 공연인지 묻지 않은 탓이다. 양우준이 뮤지컬을 새로 들어간다는 건 알고 있었다. 꽤 이름 있는 뮤지컬이었고, 같은 배역을 맡은 배우만 세 명에 달하는 대형 작품이었다. 하지만 하필 양우준이 준 티켓은 제가 공연하는 날이었다. 반응으로 보아 도윤범도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고.
“하아….”
오늘이 첫 공연 날인지 입구에서부터 팬과 기자들이 드문드문 진을 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영화나 보러 가자고 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에 올릴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남도하를 알아본 일부 기자의 카메라마저 향해 있었다.
“온 김에 보고 가요. 여기서 그냥 가면 그림 이상할 거 같은데.”
“그래… 야지.”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양우준이 무슨 생각으로 제가 공연하는 뮤지컬 티켓을 도윤범에게 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남도하가 따라붙어 올 거란 것까지 예상하지는 못했을 테니까. 나름 좋은 자리로 골라 준 것인지 무대와 객석의 거리도 가까웠다. 신경 써 옷을 골라 입은 게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
“근데… 이거 좀 이상하지 않아?”
“그러게요.”
“너무 조용한데….”
브로드웨이에서 소위 대박이 난 뮤지컬이 원작이었다. 출연진도 꽤 탄탄한 축이었고, 유일한 잡음이라면 양우준뿐이었다. 어울리는 캐스팅이었느냐는 갑론을박이 펼쳐졌었다. 원래 아이돌 출신 가수가 출연하면 종종 빚어지고는 하던 문제였기에 ‘실력으로 보여 주겠다.’는 틀에 박힌 대응만 했을 뿐이다.
“기자들이 더 많은 거 같은데요….”
“팬들도 있기는 해.”
수많은 객석이 텅 빈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빈자리가 채워진 자리보다 많았다. 그 탓인지 공연도 무언가 매끄럽지 않게 시작을 열었고, 미묘하게 어색한 기운이 공연 내내 흘렀다. 그러다 공연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였다.
“…가사 까먹었나 보네.”
출연진 중 하나가 당황에 젖었다. 웅장한 배경음은 그대로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거기에 어우러져야 할 목소리가 없었다. 대형 사고라고 할 수 있었다. 객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던 중, 다른 목소리가 극장 안에 울렸다. 양우준이었다.
“생각보다는 좀 하네요.”
“…그렇네.”
실력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런 면모가 있는 줄은 몰랐다. 양우준은 마치 자신의 캐스팅 논란을 잠재우려는 것처럼 빠르게 상대가 놓친 부분을 메웠다. 덕분에 가사를 잊은 배우도 가사를 기억해 냈는지, 두 사람이 하모니를 이루며 더욱 풍성한 소리로 음향을 채웠다. 평소의 양우준과 어울리지 않게 프로다운 모습이었다.
그 뒤로는 다행히 큰 사고 없이 공연이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매끄럽지 못했던 진행 탓인지, 객석이 많이 비어 있었던 영향인지 커튼콜에 나선 배우들의 얼굴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나름 제 몫을 훌륭하게 처리한 양우준의 표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빨리 가야 될 거 같은데.”
“그렇네요. 터질 거 같아요.”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남도하는 양우준과 짧게 시선이 스쳤던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눈빛에 담긴 위험을 감지했다. 뭔가 모르게 불똥이 튈 것 같은 위험 신호. 비단 남도하만의 감상은 아니었는지 도윤범도 같은 의견을 냈다.
배우들이 무대 뒤로 들어가는 순간 제일 먼저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관객이 많지 않았던 덕분에 빠르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우려했던 불상사는 없었지만, 돌아오는 차 안엔 인위적인 적막이 감돌았다. 공연을 보러 오기 전과는 확연히 다른 온도가 좁은 차 안을 메웠다.
“윤범아, 집 앞에 차 대고 맥주 한잔하고 들어갈까?”
“아, 그럴까요?”
집에 도착할 때쯤, 남도하가 어색한 정적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일정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잠시 흘러간 탓에 기분이 썩 좋다 할 수는 없었지만, 준비했던 말을 오늘은 꼭 꺼내야 한다는 판단이 섰다. 오히려 공연을 보고 온 탓에 그 마음이 조금 더 확고해졌다. 더는 미루고 싶지 않았다.
“근데 너 휴대폰 계속 울리는 거 같은데.”
집으로 오는 사이 도윤범의 휴대폰은 규칙적인 간격으로 진동하며 알람을 보내고 있었다. 운전 중에는 확인하지 않던 그는 주차장에 차를 대고서야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별거 아니에요.”
“그래…?”
“네, 건너편 상가에 새로 생긴 데 있던데 거기로 갈까요?”
표정만 봐서는 무언가 일이 있는 것 같은데. 한쪽 눈썹이 모나게 올라간 채 투박한 손길로 휴대폰을 훑는 도윤범은 누가 보아도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했다. 왠지 달갑지 않은 내용일 것 같은 기분에 무슨 일이냐 묻지도 않고 그저 도윤범을 따라 걸음을 옮기고 말았다. 어떤 내용인지 알지 않는 쪽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 오피스텔 정문으로 빠져나가려던 때 도윤범이 다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아…. 어쩌죠, 형. 저 잠깐 누구 좀 만나고 와야 할 거 같은데….”
“어? 갑자기…?”
우두커니 멈춰 서 휴대폰을 확인하던 도윤범의 입에서 무거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표정도 장난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원래 저런 장난을 치는 부류도 아니었고.
“먼저 집에 올라가… 아니 같이 가요. 형 데려다주고 갈게요.”
옮기던 걸음의 방향이 틀어졌다. 의견을 물었던 것은 아닌지 도윤범은 남도하의 팔뚝을 잡은 채 걸음을 재촉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고 집 현관문을 열 때까지도 일방적이었다. 남도하의 의사는 일절 반영되지 못했다.
“잠깐 쉬고 있어요. 금방 올게요.”
마치 우선순위에서 완벽히 밀려 버린 것처럼. 짐을 처리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말했다.
“도윤범.”
폭풍우가 몰려오는 바다 한가운데 던져진 기분이 들었다. 짧은 시간 집까지 오는 사이 쌓인 감정이 모이고 뭉쳐 커다란 해일이 되었다.
“잠깐 얘기 좀 해.”
“저 지금 좀….”
이번엔 남도하가 이기적으로 굴기로 했다. 명백히 거절 의사를 밝히는 도윤범을 못 본 척했다. 아니, 그 태도가 오히려 타오르는 감정에 장작을 집어넣는 꼴이 되었다. 손목을 잡고 그대로 집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몇 발짝 되지도 않는 걸음을 옮기는 사이에도 실시간으로 손목을 쥔 손에 힘이 더해 갔다. 반쯤 던지듯 소파에 도윤범을 앉혔다.
“형, 왜 그래요…?”
남도하는 위태롭게 넘실거리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엉덩이를 대고 앉지도 못했다. 던져 놓은 대로 굳은 듯 멈춘 도윤범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누군데.”
“…네?”
“누구 만나러 가냐고. 적어도 무슨 일인지 얘기는 해야 하는 거 아냐?”
수많은 외출 사이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 너무 잦다 싶을 정도로 자리를 비우곤 하는 도윤범이었지만, 어쨌든 자신의 개인 시간에 그런 거니까.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대로 넘어가기가 힘들었다. 상황도 그러했고, 짚이는 구석이 있어 더 그랬다.
“양우준이야?”
지난번 그들의 만남을 훔쳐본 이유인지, 제일 먼저 떠오른 얼굴이 양우준이었다. 내심 아니길 바라고 묻는 말이었지만 도윤범에게서는 아무런 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침묵으로 제 의심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깨달아야 했다. 제일 상상하고 싶지 않던 상대였다.
“넌 대체 왜…!”
하필 또 왜 양우준이라는 말인가. 그것도 자신과 함께 있는 시간마저 파하며 만나야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수많은 것을 포기하고, 욕심내지 않았다. 남도하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회사에서 알게 모르게 다른 배우들에 비해 부족한 지원을 해 줄 때도 아무런 불만도 표하지 않았다. 도윤범을 매니저로 쓰게 된 이유 역시 그러랬다.
그러다 하나, 단 한 명 욕심이 났다. 수많은 것들을 양보했으니 이 하나라도 곁에 두고 싶었다. 그랬던 도윤범마저 빼앗겨 버린 것만 같았다. 머릿속에서는 오만가지 망상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딱 그만큼 차오른 화가 목소리에 섞여 나왔다.
“형… 좀 진정해요. 왜 그렇게 화를 내요?”
달래려는 것인지, 화를 돋우려는 것인지.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도윤범이 남도하의 양어깨를 짚었다. 마치 이런 남도하의 마음을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양우준 맞는데, 잠깐 볼 수도 있잖아요.”
남도하의 상식으로는 그럴 수 없다. 적어도 오늘은, 그럴 수 없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도윤범은 오늘을 어떻게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남도하에게 오늘은 그래서는 안 되는 날이었다.
“잠깐 아니잖아. 너 요즘 매일 양우준 만나던 거잖아.”
이번에도 침묵. 실상 그들의 만남을 직접 목도한 것은 단 한 번뿐이지만, 추측으로 던져 본 말 역시 이 순간 사실이 되어 버렸다. 내심 부정이 나오거나, 적어도 변명이라도 붙을 줄 알았지만 도윤범의 태도는 그와 상이한 것이었다.
“그게 왜요?”
도윤범은 여전히 태연했다. 남도하가 화를 쏟아 낼 때까지만 해도 낯선 모습 때문인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는데, 어느새 홀로 여유를 되찾았다. 남도하가 화를 쏟아붓고 있었으니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이긴 했지만, 그에게서는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을 정도로 고요해 보였다.
“왜, 라니. 당연히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냐?”
그 모습마저 남도하에겐 여유로 읽혔다. 뻔뻔함이라고 생각했다. 양어깨를 짚은 도윤범의 팔을 쳐냈다. 몇 날 며칠 그들의 만남에 대해 걱정하고 고민하던 남도하의 고뇌는 오롯이 제 것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도윤범은 처음부터 양우준과의 만남을 비밀로 하려던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저, 말할 필요 자체를 느끼지 못했을 뿐일지도. 지금 저 태연한 반문만 보아도 충분히 그래 보였다.
“형, 지금 조금 이상한 거 알아요?”
하긴. 도윤범은 제가 맡은 매니저 업무에 대해서는 착실하게 처리하고 있었지만, 그 외에는 속을 알 수 없었다. 남도하 이외의 일에 대해서는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고, 그의 과잉스러운 팬에 대해서도 그랬다. 그사이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을 신경 쓰던 것은 저 혼자였다고 생각하자 억울함마저 들 정도였다.
그 정도 말도 못 하냐는 반박을 하려던 때, 도윤범이 쉬지 않고 입을 열었다.
“꼭 바람피우는 애인 대하는 거 같아요.”
이번엔 남도하의 입이 침묵했다. 들려온 말이 하도 기가 막혀서, 마땅히 받아칠 말을 찾지 못했다. 그저 짧은 시간 서로의 시선만 올곧게 닿아 있었다.
그리고 다음 말까지 이어지자, 사고가 완전 멎어 버렸다.
“형, 저 좋아해요?”
* * *
열여덟. 남다른 신체적 성장과 별개로 아직은 미성숙한 어린애였다. 자신이 겪었던 감정이 사랑이었다는 걸, 계절이 바뀌고 나서야 깨달을 정도로 미숙했다. 이미 끝나 버린 감정을 되뇌며 그것이 제 첫사랑이었다는 걸 알아챌 정도로.
철없던 시절 여름날 꿈처럼 스쳐 지나간 인연이 아쉽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현실의 짐을 짊어지고 있을 때면 머릿속에 그 아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사치처럼 느껴지곤 했다. 지나가는 세월에 그 기억마저 마모되었다. 흐려진 상대의 얼굴은 이리 낡은 기억을 헤집어야만 흐릿하게 떠오를 정도였다.
이제 와 철 지난 첫사랑을 그리는 것은 아니었다. 도윤범이 남긴 말에 그 모습이 스쳐 지나간 건 자연스러운 사고였다. 남도하의 인생, 사랑이라고 말할 만한 상대는 그 아이뿐이었으니까.
“후우….”
침대에 누워 다시 생각해 보아도 기가 막혔다. 속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천불이 끓어오르게 하는 한마디였다.
“형, 저 좋아해요? …하.”
다시 입에 올려 보아도 우스운 말이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인물이, 예상도 못 한 순간에 한 말이 뒤늦게 괘씸했다. 거기다 대고 남도하 제가 뭐라고 했더라. 일순 당황에 젖어 마치 기억이 날아간 것처럼 당시 상황이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다. 정확히는….
‘무, 무슨! 말도 안 되는….’까지밖에 말하지 못했다. 그러곤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가 버렸다. 밖에서 도윤범이 마저 이야기하자고, 이렇게 피하면 어떡하냐고 하는 말에도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고, 이리 자발적 감금 상태로 방에 처박힌 상황이었다.
안 그래도 요즘 불면에 시달리는 날이 연이어 이어지고 있었으니 당연히 침대에 누워 뜬 눈으로 쌓인 화를 삭이고 있어야 했다. 아무리 뒤척여도 도윤범이 내뱉은 말이 머릿속에 각인이라도 된 것처럼 계속해 떠오르고 있었다.
좋아한다. 남도하가, 도윤범을.
기이한 말이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전제다. 그저 욕심에 가까운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가져 본 적 없던 매니저를 잃고 싶지 않은 욕심. 그것도 하필 제일 사이가 좋지 않은 양우준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은 욕심. 생각 이상으로 매니저 일도 잘하고, 이리 집까지 빌려 줄 정도로 친절한 아이에 대한 욕심.
틀림없이 시작은 그랬다.
하지만 지금. 적막한 저녁, 시간이 너무나도 많았던 이유인지. 도윤범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것이라 치부하고 싶은 마음 한편에서, 자신의 지난 행동을 돌이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가 던진 작은 돌멩이가 사고 아래 고요히 가라앉아 있던 감정들을 헤집기 시작했다.
질투라는 이름을 붙였던 감정의 밑, 그 말로 설명되지 않는 말과 행동들이 떠올랐다. 아니, 질투와 소유욕을 불러일으킨 원인이 따로 있을 것이다. 일개 매니저를 향하는 감정이라고 치부하기엔 지나치게 커다란 기복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긍정적인 쪽도, 부정적인 쪽도 마찬가지로 그러했다. 끝없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암막 커튼의 좁은 틈으로 아침 햇살이 치고 들어오기 시작할 때야 남도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부, 간혹.
도윤범에게 다른 감정을 품었던 적이 있었다는 걸.
* * *
“어서 오세요.”
“집 좀 보러 왔는데요.”
인정했다. 그리고 확신한다. 그 감정이 잦지는 않았다고. 얼굴도 말끔하게 생겼고, 애교도 많은 놈이었다. 객관적으로… 남도하가 좋아하는 외형을 하고 있었던 것도 맞다. 그런 얼굴뿐만 아니라, 그의 몸에 시선을 빼앗겼던 일도 있었다.
더군다나 오랜 시간 혼자나 다름없던 외로운 일상에 파고든 타인이었고, 심지어 다정했다. 외로운 줄도 모르던 남도하의 곁을 지켜 주던 사람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업무적인 친절 그 이상이었던 것도 같다. 도윤범을 탓하려는 게 아니라, 그런 외모로 그리 친절한 남자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말이다. 그 호감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인정했다. 도윤범에게 일반적인 친분 이상의 호감이 없지는 않았다는 걸.
“전세요?”
“월세요. 그… 거실 하나 방 하나 있는 집이면 될 것 같아요.”
최근 이틀. 남도하는 ‘그날 저녁’ 있었던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도윤범도 ‘그 일’을 더는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오늘, 스케줄을 끝낸 남도하가 홀로 외출을 할 때까지도. 그사이 도윤범과의 대화는 현저히 줄었지만, 반대로 생각이 많아졌다. 그리고 찾은 답이 도윤범에게 더 이상 신세를 지지 않는 것이었다. 어쩌면 단순한 도피일 수도 있고.
“몇 군데 보여 드릴까요?”
“지금요?”
“어차피 빈 집이라서 괜찮아요.”
자리에 채 앉기도 전, 대략적인 금액대만 들은 부동산 사장님이 앞장서 나갔다. 부담 없는 월세와 보증금으로 알아보다 보니 썩 훌륭하다 할 수 없는 집이 대부분이었다. 멀쩡한 모습을 한 도윤범의 집에 살고 있었기에 둘러본 매물이 더 탐탁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 집이 제일 괜찮죠?”
떨떠름한 남도하의 태도를 읽은 것인지, 사장님은 마치 숨겨 놓았던 보물을 보여 주는 양 큰소리치며 마지막 집으로 들어섰다.
“…네, 괜찮네요.”
“역도 가까운데 동네가 조용하고, 월세도 싸요.”
확실히 앞에 본 집들에 비하면 괜찮은 편이었다. 신축에 방도 좁지 않았고, 월세와 보증금마저 부담되지 않는 집이었다. 혼자 살기에 나쁘지 않았다. 도윤범의 집에 들어가기 전 살던 빌라와 비슷한 가격이면서 오히려 더 깨끗했다.
“그럼 여기로 하시죠?”
“생각 좀 해 보고 싶은데요.”
“이런 집은 언제 나갈지 몰라요! 이 동네 시세보다 싸게 나온 데예요.”
“…그런가요.”
며칠 뒤 들어올 출연료까지 합치면 보증금은 충분할 것 같았다. 집도 객관적으로 나쁘지 않았고. 계약금이라도 걸라는 말에 100만 원을 이체해 주고, 부동산을 빠져나왔다. 여덟 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었음에도 남도하는 느긋하게 집으로 향했다. 집 앞에 도착해서도 바로 들어가지 않고 근처 카페에 앉아 한 시간가량 시간을 때우다 집에 들어갔다.
“늦었네요. 어디 갔다 와요?”
“어… 잠깐 볼 일이 좀 있어서.”
스케줄이 끝난 뒤 따라붙겠다던 도윤범을 어렵게 떼어 내야 했다. ‘개인적인 일이야.’라고 선을 그었다. 숨겨진 속뜻은, ‘네가 양우준 만나고 다니던 것처럼, 내 시간을 방해하지 말아라.’라는 것이었고, 도윤범은 알아들은 듯 물러났다.
“식사는요?”
“괜찮아. 먹고 왔어.”
“안 먹었잖아요.”
도윤범을 피해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팔뚝이 붙들렸다. 힘없이 붙잡은 팔을 털어내면 틀림없이 쉬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하지만 제 팔을 붙잡는 질척거림이 기이할 정도로 따뜻하게 느껴져서, 그럴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도윤범이 건네는 친절이 또 싫지는 않았다.
“별로 생각이 없어서.”
“형, 요즘 안 그래도 바쁜데 식사라도 잘 챙겨 먹어야죠.”
평소와 다름없는 도윤범이었다. 짐짓 엄한 목소리 같기도 하고, 설득하는 듯하기도 하고. 그날 저녁 이후 둘의 대화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남도하의 의도였다. 그도 남도하의 눈치를 살피는 것처럼 말이 줄어들기는 했어도 태도만큼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굴고 있었다.
“앉아요. 저도 아직 안 먹었어요.”
억지로 식탁에 끌려와 앉았다. 남도하는 깊은숨만 한 번 내쉬고 말았다. 상황만 놓고 보았을 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은 맞다. 그저 사소한 다툼… 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충돌이었다. 남도하 저의 유치한 질투로부터 시작한 충돌. 그리고 그 이후 알아챈 감정 역시 오롯이 자신의 것이었기에, 도윤범의 행동이 변할 이유는 없었다.
사실 그사이 도윤범이 제 눈치를 보는 걸 알고는 있었다. 도윤범 입장에서 보자면, 갑자기 이유 모를 화를 내던 남도하 제가 얼마나 당황스러웠겠나. 저를 좋아하냐는 질문도 하도 기가 막혀 꺼낸 물음이었을 거라는 걸 지금은 알고 있었다.
“어디 갔다 왔어요?”
도윤범은 가스 불 앞에 등을 돌리고서 재차 물어왔다.
“…그냥, 볼일이 좀 있어서.”
“볼일, 요.”
뚝배기에 담긴 채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찌개가 식탁에 올라왔다. 따로 더 보탤 말이 없었던 남도하가 먼저 식사를 시작했고, 한참 뒤에 도윤범이 숟가락을 들었다.
“형, 무슨 고민 있으면 저한테 꼭 얘기해요.”
“고민…? 고민은 무슨.”
“그래도요. 혹시 있으면요.”
아직은, 집을 빼는 일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다. 당연히 이른 시일 내에 이야기해야 하는 문제이기는 했지만, 남도하 제 마음이 아직 완벽히 정리되지 않은 탓에 도윤범과 길게 말을 섞기가 불편했다. 그래서 그냥, “그래.”하고 건조한 대답만 하고 말았다.
지금 제일 큰 고민이라면, 도윤범이다. 아니, 도윤범을 향해 피어난 불순한 감정. 그리고 그때마다 떠오르는 또 다른 사람. 늦은 밤, 텐트 안에서 입을 맞추던 남자, 그가 자꾸 떠오르며 마음은 점점 더 심란해졌다.
* * *
“형, 여기 물이요.”
“어, 고마워.”
“잘 자요.”
“그래, 너도.”
생수병 하나를 건네준 도윤범이 먼저 제 방으로 들어갔다. 남도하도 건네받은 물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곤 서랍과 옷장을 채운 짐들을 둘러봤다.
“…언제 이렇게 많아진 거야.”
처음 이 집에 도망치듯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제대로 된 짐이 얼마 되지 않아 옷장이 텅텅 비어 보일 정도였다. 괴한이 예전 빌라를 다 박살 내 살림살이 하나 가져오지 못한 탓도 있고, 계절이 맞지 않는 옷을 다용도실에 처박아 둔 이유도 있었다. 휑하게 몇 개의 티셔츠와 바지만 옷장을 채우고 있었는데, 어느새 끝없이 늘어나 옷장 가득 걸려 있었다.
당장 입지 않을 옷들을 하나하나 정리했다. 이미 계절이 지난 옷이나, 며칠 내로 입지 않을 옷 같은 것 말이다. 옷걸이에 걸려 있던 옷들을 꺼내 접으며 생각해 보니 자꾸 쓸데없는 생각이 몰려들었다.
추억이라고 할 정도로 거창한 기억은 아니었지만, 최근 자주 입었던 옷들엔 공통적인 사람이 하나 엮여 있었다. 그가 협찬을 받아 온 것도 있었고, 함께 가서 산 것도 있었고.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불순한 생각을 정리하려 시작한 짐 정리가 오히려 도윤범을 뚜렷이 그리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짐 정리도 나중으로 미뤘다.
* * *
“네…? 아니 그래서 계약금까지 드렸잖아요?”
-미안하게 됐어요. 계좌 번호 주면 당장 돌려드릴게요.
아침 조깅을 다녀오자마자 전화가 왔다. 전화를 걸기엔 다소 이른 감이 있는 아침, 부동산 사장님이었다.
“그래도 어떻게 계약을 그렇게 일방적으로….”
어제 생떼를 쓰다시피 해서 계약금 먼저 건네게 만든 사장님. 당장 언제 집이 나갈지 모른다고 말하던 사람. 남도하 제가 보기에도 그럴 수 있는 집이었기에, 계약금을 송금했다. 그런데 채 하루가 지나기도 전, 계약을 못 하게 되었단다.
-저도 당황스럽다니까요. 다른 부동산에서 월세를 두 배로 올려서 받기로 했다니까 할 말이 있어야지.
길게 이야기해 봤자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 알았다는 말과 함께 통화를 끝내고 말았다. 다른 집을 알아봐 주겠다는 것도 다시 생각해 보고 연락을 주겠다 하며 사양했다.
“무슨 일 있어요?”
“어? 일어났어?”
방에서 막 나오는 도윤범을 보니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이 조금 더 커졌다. 틀림없이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하루라도 빨리 집을 나와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불순한 감정을 털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차라리 잘되었다 싶기도 했다. 갈팡질팡한 마음이 지금은 또 이사를 미루게 만들었다.
“별일 아니….”
막, 별일 아니라 둘러대려 할 때였다. 가까이 다가온 도윤범이 남도하의 팔뚝을 감싸 안으며 어깨에 제 머리를 기댔다. 졸음기가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왜 이렇게 잠이 안 깨는지 모르겠다는 칭얼거림을 달고서 말이다.
“야, 좀….”
“눈이 안 떠져요.”
여전히 익숙지 않은 스킨십 때문에 몸이 일순 굳어 버렸다. 트레이닝 재킷이 팔뚝을 감싸고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통화하는 소리 들리던데,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어… 없어.”
남도하는 생각했다. 참 큰일이라고. 도윤범은 지나치게 위기의식이 없다. 다른 때는 그렇지 않았지만, 아침의 그는 유달리 무해했다. 애써 눌러놓은 감정을 끓어오르게 할 정도로. 남도하는 도윤범의 몸을 조심스럽게 떼어 냈다. 오랫동안 닿아 있어서 좋을 게 하나 없었으니까.
“다행이에요. 아침 먹어요, 우리.”
그래, 언젠가 서주언이 말했다. 팬과 사생은 한 끗 차이라고. 아직 서로에게 붙은 스토커가 제대로 처리되지도 않았는데, 저런 도윤범을 홀로 두는 것도 찝찝한 일이다. 자신의 감정이야 스스로 조절하면 되는 일이니까, 조금 시간을 두고 집을 알아보며 당장 위험할 수 있는 일이 해결된 뒤 집을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내가 차릴게, 아침.”
저, 어린아이 같은 도윤범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감정은 충분히 정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 * *
열여섯. 가을도, 겨울도 아닌 그 계절은 유달리 혹독했다. 앞선 날들이라고 행복과 비슷한 모양의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어떤 하루를 기점으로 인생의 무게가 달라졌다. 그보다 앞선 1년 전, 열다섯의 같은 날 아빠가 죽었다. 그의 평소 행실에 걸맞게 길거리에서 객사했다. 그것도 그리 좋아하던 술에 잔뜩 찌든 채 외로이 죽어 싸늘한 시신은 다음 날 아침에야 행인에게 발견되었다.
우습게도 그 소식에 눈물 흘리는 가족 하나 없었다. 엄마도 그랬고, 형제들도 그랬고, 남도하도 그랬다. 누군가의 죽음을 깨우치기 어렸던 탓은 아니었다. 매일같이 술에 취해 들어와 엄마를 때리는 아빠를, 몇 푼 있지도 않은 돈을 10원짜리 하나까지 긁어가 제 목구멍으로 들어갈 술을 사는 데 쓰는 남자의 죽음을 슬퍼하기는 어려웠다.
추억이라고 뭉뚱그려 떠올릴 기억마저 없는 사내였다. 어쩌면 그 하나의 죽음으로 마를 날 없던 엄마의 눈물을, 가라앉을 틈 없이 쌓여 가던 멍과 상처를 더는 보지 않아도 된다면 잘된 것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삶이 그렇게 원하는 대로 흘러가 주지 않는 시기였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빚쟁이들이 들이닥쳤다. 수백, 수천, 수억. 수없이 많은 사람이 매일같이 돈을 내놓으라 닦달했다. 그때의 남도하도, 엄마도, 형도, 동생도 몰랐다. 빚도 포기할 수 있다는 걸 말이다. 그저 죽은 아빠의, 남편의 빚을 물려받는 게 당연하다 생각하던 순진한, 멍청한 가족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마저 어떤 빚쟁이의 질 나쁜 조롱 때문이었다. 선심 쓰듯 채무도 포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 때는, 남도하의 아빠가 죽은 지 거의 1년여가 흐른 후였다. 채무 상속 포기 기한 역시 한참을 지나 있었다. 명백한 조롱이었다.
“도원아.”
올해가 마지막이다, 내년부터는 찾지 않겠다, 무슨 추억할 거리가 있다고 이리 해마다 챙기는 것인가, 무거운 짐을 안겨 준 채 떠나 버린 사람들이 아닌가, 라고 작년에도 생각했고 올해도 생각 중이다.
“하아….”
그런데도 어김없이 올해도 남도하의 두 손 무겁게 장 본 물건이 들려 있었다. 요리를 하고 있을 시간도, 실력도 없었기에 그저 만들어진 음식을 사 오는 것뿐이지만, 이마저 썩 달갑지는 않은 일이었다.
“도원….”
0.5층. 1층과 다름없는 집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두 손 무겁던 짐을 내려놓았다. 그러고서 눈에 들어오는 집안 풍경에, 남도하는 제가 집을 잘못 들어온 것인가 싶었다. 어두컴컴하던 전등도, 답답하게 현관 절반을 차지하던 지나치게 커다란 신발장도 사라졌다.
“형, 왔어?”
한참 만에야 방에서 나오는 동생, 남도원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짐을 들고 다시 집을 나가 버릴 뻔했다. 그 정도로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낯설었다.
“뭐야 이게?”
멀리서 저를 바라보는 남도원을 보며 주섬주섬 봉지들을 챙겨 거실로 들어갔다. 워낙 좁은 집이었기에 몇 발짝 만에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집이 어떻게… 왜 이래?”
“형이 보낸 거 아니었어…?”
거실엔 없던 소파가 생겼고, 커다란 TV가 벽에 걸려 있었다. 벽지도 바닥도 모두가 바뀌었다. 한눈에 들어오는 주방까지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다른 집에 들어온 것처럼, 시선이 닿는 모든 것들이 낯선 물건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휠체어나 목발 없이는 한 걸음도 뗄 수 없던 남도원은 벽을 따라 달린 봉을 잡고 혼자 힘으로 서 있었다. 엉거주춤한 자세였지만, 제힘으로 서 있는 모습을 얼마 만에 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남도하는 궁금증을 뒤로한 채 설명을 듣기 전, 동생을 낯선 소파로 부축해 앉혔다.
“어떻게 된 건데.”
남도하의 동생은 나이보다 작은 아이였다. 태어날 때부터 제 기능을 못 하던 한쪽 다리 때문이었다. 스물의 나이였음에도 여전히 소년의 모습을 담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기도 했다.
“이거….”
남도원은 설명 대신 주머니에서 구깃구깃한 종이를 한 장 꺼냈다.
“크, 큰형한테는 주지 말랬는데….”
작은형한테 주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으니까 괜찮을 거라며 종이를 남도하에게 건넸다.
“하.”
계속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것인지, 작은 명함의 테두리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그리고 거기 쓰여 있는 이름이, 참 우습고 낯익었다.
“이 사람들이 와서 이렇게 해 줬다고?”
“어? 어…. 학교 갔다 온 사이에 해 놔서 나도 잘 못 봤는데….”
“형은, 모르고?”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최근 들어 형의 돈 독촉이 사라졌다. 그 인간 성격상 한 달 가까이 돈을 달라 하지 않을 리가 없는데.
“알아. 좋아하는 거 같던데….”
의심 가는 구석이 있기도 하고, 남도원도 정확한 사정을 알 것 같지 않아 길게 묻지 않기로 했다.
“형 친구 맞아.”
걱정을 담은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동생에게 거짓을 말해야 했다. 뭐, 완전 모르는 사람이 아닌 것은 맞다. 그제야 남도원의 얼굴에서 불안이 지워졌다.
“밥은, 잘 먹고? 학교는 별일 없지?”
“응…. 큰형이 그래도 밥을 차려 주고 나가.”
남도하가 여전히 제 형을 완전히 놓지 않는 이유가 저것이었다. 인생의 반성이 없는 것처럼, 제 아비가 하던 짓을 그대로 반복하는 형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막냇동생만큼은 그런대로 챙기고 있었으니까. 그것마저 제대로 하지 않았다면 조금은 매몰차게 핏줄에게 등을 돌리지 않았을까 싶었다.
“학교도 잘 다니니까 걱정하지 마.”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었다. 남도원은 타고난 몸이 약했던 탓에 다리뿐만 아니라 찬바람만 조금 맞아도 시름시름 앓기 일쑤였다. 그뿐 아니라 성치 않은 몸으로 등하교하는 것마저 돈이 들었다. 그랬기에 남도하는 일을 쉴 수 없었다. 쳇바퀴 굴러가는 삶을 한시도 멈출 수 없었다.
“이 명함은 형이 가져갈게.”
“내가 잘못한 거 아니지…?”
남도원은 혹시라도 제가 무언가 실수라도 했을까 싶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 아냐. 그 사람 얼굴 봤어?”
“아저씨던데….”
“아저씨…?”
어제, 그제. 이틀 만에 집을 이리 바꿔 놓았단다. 주인도 없는 집에 멋대로 들어와서. 여전히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가 그랬는지는 알았다. 그래서 그런지 집의 변화가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상대가 아저씨라는 말에 일순 소름이 오소소 돋는 기분이었지만, 직접 확인해 보면 될 일이다. 남도하는 명함을 주머니에 넣고, 사 온 음식을 그릇에 옮겨 담았다.
사용감이 없는 접시에 다 식은 전과 과일을, 나물을 올렸다. 몇 가지 되지도 않지만 남도하의 마음을 생각하면 그마저 과분하다 할 수 있었다. 새로 생긴 거실 테이블은 몇 분 만에 제사상으로 탈바꿈했다.
“도원아, 절해야지.”
“…싫어, 형.”
새삼스럽지는 않다. 남도원은 단 한 번도 제사상 앞에서 절을 하지 않았다. 한참이나 어릴 적 기억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인지, 부모님이 그립지 않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저를 그리 편애하던 엄마를 떠올린다면, 그립지 않을 수가 없을 텐데.
달갑지 않기로는 뒤지지 않는 마음이었기에 강요하지는 않았다. 남도하 홀로 절을 올리고 초라한 제사상 앞에 자리 잡았다. 매년 반복되는 감정이 또다시 몰려와 부정적인 기분을 키워 갔다. 상반된 의미로 그리고 싶지 않은 얼굴들이 너무나도 선명히 떠올랐다.
“밥 먹자, 배고프다.”
정말, 올해를 마지막으로 더는 제사 같은 거 지내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리 불편한 마음으로 제사를 지내는 게 무슨 도움이 되겠나.
냉장고에는 그럭저럭 먹을 반찬도 몇 가지가 있어 간단히 상을 차려 식사를 끝냈다. 이마저 없었다면, 남도하는 오늘 제 형에게 오랜만에 먼저 전화를 걸었을지 모르겠다. 제사도 잊고 집을 비운 그 형 말이다.
“형… 돈, 그만 보내도 돼. 어차피 거의 다 큰 형이 쓴단 말이야. 나도 곧 졸업하니까, 이제 괜찮아.”
“그래. 넌 그런 걱정 안 해도 돼. 형 요즘 드라마 잘되잖아.”
“그래도….”
알고 있다. 알면서도 보내지 않을 수가 없을 뿐이다. 졸업 후에도 돈은 계속해 들어갈 것이다. 불편한 몸으로 제 벌이를 하고 살아가기는 쉽지 않을 테니까. 멀쩡한 몸을 한 남도하 저도 이리 밥벌이가 어렵지 않던가. 평생, 이리 살아야 할 수도 있다는 각오는 이미 되어 있었다.
“정말 괜찮으니까, 너는 공부만 열심히 해.”
그런 속마음을 숨긴 채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안 그래도 소심하고 걱정 많은 동생의 고민을 더 늘려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오랜만에 만난 김에 밀린 이야기를 길게 나누었다. 남도원의 기다란 눈꺼풀이 끔뻑끔뻑 내려왔다 올라가길 반복하다가, 기어이 감겨 버릴 때까지.
두 팔로 들어 올려 침대까지 안아 옮겼다. 이미 성인임에도 한없이 가벼운 무게가 또 안타까웠다. 그리고 미안했다. 한참이나 잠든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집을 빠져나왔다. 죄책감도, 미안함도 같이 남겨 놓은 채.
* * *
“여보세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 택시 안에서 명함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거기 쓰여있는 이름은, 아무리 봐도 장난 같았다. 하지만 남도하에겐 익숙한 것이었다.
“도랑도랑… 아닌가요?”
그랬다. 남도하의 팬클럽을 자처하던 도랑도랑이었다. 그게 왜 거기에서 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명함엔 그 이름이 쓰여 있었다. 이상하게 생긴 토끼 대가리가 음각으로 찍혀서. 그 명함을 보자니 어이가 없기도 하고, 약간 화가 나기도 했다.
-남도하 씨.
여태 전화번호도 알려 주지 않던 남자가, 동생에게 번호를 주고 간 것 아닌가. 그것도 제멋대로 집을 온통 새집으로 만들어 놓고서. 마치 전화가 오리란 걸 알았던 것처럼, 변조된 목소리엔 어떤 동요도 없었다.
“잠깐 만나죠.”
-바쁜데.
“바빠도 잠깐…! 하아, 만나요, 잠깐만. 할 말 있어요.”
-그때 그 공원에서 기다려요.
뺀질거리는 말투에 욱하는 감정이 잠시 솟았다가 내려갔다. 당장 무슨 짓을 벌인 것이냐 따져 묻고 싶은 걸 꾹 참아야 했다. 이해할 수 없는 짓을 벌인 남자의 태연한 목소리를 듣자니 쌓여 있던 울분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택시를 타고 지난번 토끼 가면을 만났던 공원까지 이동하는 내내 감정이 점점 거칠어져 갔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남자의 해명을 듣고 말겠다고 다짐하며 한창 기다리고 있을 때, 멀리서부터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일찍 왔네요.”
아직은 그리 늦은 저녁이라 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태연하게 토끼 가면을 쓰고, 후드를 뒤집어쓴 채 손엔 테이크아웃 카페 컵을 들고 있었다. 가면만 없었다면 마치 동네에 산책 나온 모습과 같았다. 어쩐지 가면 뒤에서 남자가 옅게 웃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앉아요.”
“받아요.”
그는 남도하의 목소리를 못 들은 것처럼, 멀뚱히 서서 컵을 내밀 뿐이었다. 지금은 그다지 그가 주는 걸 받아먹고 싶지 않아 손도 내밀지 않았다. 그러자 머리 위에서 쯧- 하며 혀 차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받으라고 했어요.”
틀림없이 오자마자 그를 앉혀 두고 할 말이 산더미 같았다. 쏘아붙일 말이 너무 많아서 어떤 이야기 먼저 꺼내야 할지 고민될 정도로. 하지만 가면 너머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튀어나오자 남도하는 별다른 항변도 뱉지 못한 채 손을 내밀어 그가 건네는 걸 받아 들어 버렸다.
“…앉아요, 이제.”
“마셔요.”
그제야 토끼 가면도 남도하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정면을 바라보는 남도하와는 다르게, 몸을 돌려 팔을 벤치 등받이에 걸친 채로 남도하를 보고 앉았다. 이번에도 남도하는, 그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 내며 테이크아웃 컵의 뚜껑을 열었다. 체념과 가까운 행동이었다. 어차피 그의 말에 따르지 않으면 대화는 시작조차 해 보지 못할 거란 걸 깨달은 덕분이다. 그런데 눈에 들어오는 음료가 예상과 달랐다.
“캐모마일이에요. 잠 안 올 때 좋대요.”
컵을 얼굴 가까이 가져다 대자 꽃향기가 물씬 풍겨왔다. 차 종류를 그다지 선호하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지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왜 이렇게 화가 잔뜩 났어요?”
“하아…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그래도 잠깐 시간을 둔 덕분일까. 제멋대로 터져 나올 것 같던 남도하의 감정이 정돈됐다.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묻어나는 못마땅함까지 어쩔 수는 없었지만.
“우리 집은 대체 어떻게 안 거고, 또 거기 살림살이는 왜 전부 바꿔 놓은 건데요.”
“신경 쓰이니까.”
“…네?”
“신경 쓸 일도 아닌데, 남도하 씨가 그런 일에 골머리 썩는 게 보기 싫어서.”
“그게 무슨…!”
“이러면 남도하 씨가 쓸데없는 생각 안 하고 내 생각할 시간이 더 많아지잖아.”
무슨 답변을 기대했을까. 태연히 늘어놓는 헛소리 같은 말에 남도하는 화를 낼 타이밍마저 놓쳐 버렸다. 조금 미안한 기색이라도 내비치면 네 죄를 반성하라 큰소리를 쳤을 것이고, 반성의 기미가 없으면 죄목을 하나하나 읊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상치도 못했던 대꾸를 해 오는 남자의 태도에 기가 막혔다.
“뭐, 내가 잘못이라도 했어요? 왜 그렇게 화를 낼까 말까 하고 있지.”
“당연히 제 동의도 안 구하고…!”
“동생 이름으로 계약돼 있던데, 그 집.”
“…….”
“동생이 허락했어요. 형이라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
“근데 왜 남도하 씨가 이러지? 다들 성인인데 뭐가 문제야?”
순간 고민했다. 손에 든 캐모마일 차를 저 토끼 가면에 끼얹어 버릴까, 말까. 반박을 하고 싶어도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문장 하나하나가 옳은 소리라서 대꾸할 말이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인 것 같은데, 그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또 아예 말이 안 되는 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남도하 씨.”
“네.”
불퉁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럴 때는 그냥 고마워요, 라고 하면 돼요.”
“하나도 안 고마운데요. 애초에 부탁하지도 않은 일이고요.”
“그럼 뭐, 벌써 집에 다 설치한 걸 떼기라도 할까요?”
그럴 순 없었다. 안 봤다면 모르겠지만, 남도하 저도 두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나. 혼자 걷는 것도 힘든 동생이, 휠체어 없이 집 안을 돌아다닐 수 있게 된 걸. 집에 혼자 있을 때면 홀로 화장실에 다녀오기도 쉽지 않은 아이였다. 문과 문턱, 화장실과 주방까지. 모두가 몸이 불편한 남도원을 위해 맞춘 듯 고쳐져 있었다.
“…우리 집은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못 하는 게 있으려고.”
어떻게 보면 소름 끼치게 무서운 일이기는 했지만, 하도 여러 번 겪어 본 탓인지 그다지 두렵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하긴, 오밤중에 남의 집에 흔적 없이 드나드는 남자에게 그런 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겠다.
“아저씨라면서요?”
“뭐…?”
“그쪽 아저씨라던데요, 내 동생이.”
어차피 상대와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할 것 같아 다른 주제로 대화를 틀었다. 그가 말하고 싶지 않은 내용을 억지로 토설하게 할 능력이 없다.
“그건!”
남자가 벌컥 몸을 일으켰다. 그와 함께 조금 전과 달리 높고 커다란 음성이 튀어나왔다. 명백히 당황에 젖은 것 같았다. 뭔가, 평소와 다른 새로운 모습이 꽤 신선했다.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모습이었다. 순간 이상한 기시감이 느껴졌지만, 이어지는 남자의 말에 망념이 빠르게 흩어졌다.
“…아니거든요, 아저씨?”
그렇겠지. 당연히 원래 모습이 아닐 거라 생각했다. 그리 쉽게 얼굴을 드러낼 리가 없으니까. 그럴 거였다면 오늘 이렇게 가면을 쓰고 등장하지도 않았을 거다.
“그리고, 우리 형한테 돈도 줬죠.”
“아니.”
“다음부터는 절대 주지 말아요. …어차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니까.”
그 인간이 이리 오래 조용할 리가 없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돈을 재촉해야 함에도 벌써 한참이나 돈 이야기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 말은 틀림없이 어딘가 돈 나올 구석이 있다는 말일 거고, 그런 인간에게 돈을 줄 사람은 여기, 이 남자밖에 없다.
“글쎄. 그건 좀 생각해 보고.”
발뺌을 하던 그는 금세 태도를 전환하며 다시 벤치에 앉았다.
“그쪽한테 선택하라는 게 아니에요. 이건 부탁도 아니고요.”
당연히 그가 제멋대로 굴도록 지켜볼 생각은 없었다. 이미 남도하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숨겨진 치부와 같은 모습을 들킨 것만으로도 충분히 민망했다. 더군다나 의도치 않게 도움까지 잔뜩 받아 버렸으니까. 이 이상으로 타인이 자신의 삶 이면을 들여다보게 두고 싶지 않았다.
“도와준 건 고마운데… 이번엔 선 넘었어요.”
상대가 이 토끼 가면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는 이미 남도하의 바닥 같은 비밀을 알고 있는 남자였지만, 그런 일과 별개로 개인사를 내비치는 일이 달갑지는 않았다. 어쩌면 이 남자라서 더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지만.
“말했는데.”
“뭘요.”
“신경 쓰인다고.”
“대체 그게… 하아, 어떻게 이유가 되는데요.”
궤변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태연히 지껄이고 있다.
“설마, 그걸 여태 몰라요?”
“뭐가… 왜, 왜 그래요… 갑자기.”
얌전히 앉아 있던 남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멀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진 거리였지만, 삽시간에 간격을 없애 버렸다. 그러곤 장갑 낀 손으로 남도하의 뒷덜미를 감싸 쥐었다. 손아귀에 힘이 들어찬 것은 아니었지만, 남도하의 몸과 입을 멈추게 하기엔 충분했다.
“그것도 말했는데요.”
“어, 언제요…?”
“나 팬 안 한다고 했잖아요.”
“…….”
“그럼 뭘 거 같아요?”
남자는 더욱더 거리를 좁혔다. 까만 가짜 눈알과 부드러워 보이는 토끼털이 어두운 조명 아래서도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가깝게 다가왔다. 한 뼘 정도나 될까 싶을 정도로 가까이. 그 때문인지 남자의 질문에 대한 답은 머릿속에 떠오르지도 못했다. 그저 작게 고개를 도리질하고 말았다.
“숙제예요. 생각해 봐요.”
말을 하면서도 그는 점점 더 거리를 좁혔다. 손가락 하나, 한마디. 눈도 깜빡이지 못한 채 남자의 행동을 지켜봤다. 다가오던 그는 박치기를 하듯 가볍게 이마를 박고는 다시 거리를 벌렸다. 뒷덜미를 감싸던 손길도 떨어져 나갔다. 박치기가 신호가 된 것처럼, 그제야 남도하의 사고도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무슨 말이에요?”
“숙제라고 했는데, 정답을 알려 달라고 하면 안 되죠.”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던 사고 한편에서, 그럴듯한 가정이 떠올랐다. 물론 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어쨌든 부담스러워요.”
동기가 무엇이든, 가족까지 챙겨 주는 이 낯선 친절은 충분히 부담스러웠다. 누구에게라도 받고 싶지 않은 종류의 관심이었다.
“부담 갖지 마요. 공짜 아니니까.”
“그게 또 무슨 말이에요….”
“갚아요, 전부.”
하마터면 또 욱하는 감정이 끓어 올라올 뻔했다. 제멋대로 원한 적 없던 친절을 베풀고서 갚으라니 어이가 없었다.
“하아, 얼마인데요.”
“또.”
가면 뒤에서 짧은 질타가 튀어나왔다. 삐딱하게 고개가 기울어진 게, 못마땅한 것 같다.
“자꾸 그렇게 돈으로 다 해결하려고 하지 말라니까요. 더 쉬운 방법이 있다고.”
매번 큰돈이 들어가는 선물을 건네는 사람이 저런 소리를 하는 게 우스웠지만,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하아… 이리 와요.”
다른 방법으로 빚을 갚으라는 말이다. 남도하는 손에 든 차를 한쪽에 내려놓고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이 남자를 다루는 방법을 이젠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뭐 하는 거예요.”
“갚으라면서요.”
당연히 품 안으로 파고들 거라 생각했던 남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남도하 씨는 자의식 과잉이구나.”
“…네…?”
“설마, 포옹 한 번으로 그걸 퉁치겠다는 거예요? 더군다나, 이렇게 뻥 뚫린 야외에서 그러는 취미도 있었어요?”
활짝 펼쳤던 팔을 내렸다. 자의식… 과잉이라고 했다. 민망함에 등덜미가 서늘해지는 것 같았고, 머리가 뜨겁게 김을 내뿜는 것도 같았다.
“나중에 갚아요. 포옹 따위로는 안 돼요, 이번엔.”
“…따위…?”
“아니! 포옹으로는. 어쨌든, 안 돼요.”
도통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괜히 딴생각을 해 버린 게 민망해 캐모마일 차를 물처럼 들이켰다. 옆에 앉은 토끼 가면도 시선을 거두지는 않았지만, 무언가를 생각하듯 별다른 말이 없어 조금 더 민망한 기분이 커졌다.
“동생은 남도하 씨 안 닮았던데.”
“걔는 스무 살밖에 안 됐으니까 그렇죠.”
“더 귀엽더라고.”
“헛소리하지…!”
“헛소리?”
“…아무튼 하지 마요, 그런 말.”
안 닮기는 했다. 굳이 따지자면 남도하는 선이 깔끔한 미남형의 얼굴이었고, 동생 남도원은 조금 더 선이 얇고 여려 보이는 얼굴이었다. 형제라는 걸 알고 보면 이목구비가 비슷하긴 했지만, 이미지 자체는 천지 차이였다.
“동생은 원래 몸이 불편했어요?”
“…네. 원래 그랬기도 했고, 사고도… 있었어요.”
일곱 살이나 어린 동생은, 태어날 때부터 한쪽 다리가 성치 않았다. 그 탓에 걸음마도 느렸고, 운동이 적은 탓인지 건강도 좋지 않았다. 절뚝거리며 걷는 게 고작이었다. 물론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적어도 혼자 힘으로 걷는 건 가능했다.
11년 전, 오늘. 사고가 있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랬다.
“엄마가… 죽었거든요.”
그날은 참 이상한 날이었다. 아역 치고 실수 한 번 하지 않던 남도하가 NG 행렬을 이어 간 날이었다. 덕분에 촬영이 꽤 지연돼 버렸고, 밤늦은 시간에야 방송국을 벗어날 수 있었다. 남도원은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엄마의 등에 업힌 채 새근새근 잠이 들어 있었다.
“보통 때였으면 그냥 집으로 갔을 텐데 엄마가 밥을 먹고 가자고 하더라고요.”
늦은 시간 문을 연 식당도 많지 않았고, 눈에 보이는 건 24시간 분식 체인점이었다. 평소보다 많은 음식을 시켜 남도하 앞으로 그릇을 밀어 주던 엄마였다. 도원이를 깨워 같이 먹자 함에도 괜찮다고, 많이 먹으라고 했었다. 항상 아픈 막내를 가엽게 여겨 챙기기 바쁘던 그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도하야, 내일 여기로 연락해.’
식사를 끝내고, 식당을 나와 택시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남도원을 등에 업은 그녀는 남도하에게 꾸깃꾸깃한 쪽지를 하나 건네주었다. 무엇이냐 묻는 말에도 전화해 보면 알 거라는 말만 남겼다. 겨울도 아닌 그날, 불어오던 밤바람이 유달리 매섭게 느껴졌다.
“그러고 나서 다음날 집이 텅 비었더라고요. 엄마도, 도원이도.”
그게 마지막이었다. 아침 햇살이 채 들어오기도 전, 빌라 건물 옥상이었다. 실족사로 기록되었지만, 남도하는 알고 있었다. 그녀 스스로 삶을 마무리했다는 걸. 빚에 허덕이는 삶을 자신의 선에서 끊고 싶었다는 걸. 남도하의 손에 쥐여 준 쪽지가, 그 증거였다.
“그때 다쳐서 도원이는 아예 못 걷게 됐어요. 아마 엄마 딴에는 빚만 없으면, 아픈 동생만 없으면 저랑 형이 알아서 잘 살아갈 줄 알았겠죠.”
남은 자식들을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그리도 아끼던 자식이라 그랬던 것인지. 그녀는 남도원과 함께 마지막을 맞으려 했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큰 장애를 가지고 평생을 살아가게 되었다. 그녀는 그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던 빚만 안고 떠나갔다.
“그렇게 됐어요.”
“그 번호는… 변호사였겠네.”
“네, 채무 정리해 줄 변호사요.”
처음이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낡은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 말이다. 항상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감정을 요동치게 만들던 기억이었음에도, 막상 말로 털어놓자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후련했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사연을 들어주길 바랐던 것처럼, 가슴 속 깊게 응어리져 있던 무언가가 뚫리는 기분이었다. 깊게 삼켰다 내쉬는 숨이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았다. 이야기가 끝나고도 한참, 남자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하긴, 이런 구질구질한 사연을 늘어놓았으니 마땅히 할 대꾸가 없을 것도 같았다. 어쩌면 생각 이상으로 청승맞은 이야기가 달갑지 않은 것일 수도 있고.
“잘 컸네, 도하 씨.”
한참이나 그리 조용히 앉아 있던 남자는 남도하의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그러곤 마치 막냇동생에게나 할 법한 칭찬을 붙였다. 순간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이 남자는 정말 나이가 많을 수도 있겠다고. 그가 하는 이상한 칭찬과 위로가 썩 싫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한테 빚진 거 없애 주진 않을 거예요.”
“…없애 달라고 안 했는데요.”
“빨리 갚고 싶은 건가.”
“…….”
취소다. 미친놈이다, 역시.
“갈래요, 그만.”
“그래요.”
오늘도 제 무릎에 누워 자라고 할까 싶어 먼저 몸을 일으켰다. 뒤늦게 남자에게 너무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 같은 후회도 들어서 오래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오늘… 정말 고마워요. 제가 부탁한 건 아니지만.”
“고마운 만큼 더 비싸게 갚으면 돼요.”
그가 말하는 ‘비싼’ 방법이 무엇일지 알 것 같아 더 긴말을 붙이지 않았다. 농담이겠지만, 역시 제정신은 아닌 것 같다. 벤치에 앉아 있는 그를 보며 먼저 몸을 돌렸다. 두어 걸음 옮기다가, 다시 몸을 휙 돌렸다.
“그런데요, 왜 저한테는 연락처 안 줬어요?”
아무래도 이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동생이 더 예뻐서요.”
아니…. 어쩌면 그냥 묻지 않는 쪽이 좋았을 수도 있겠다.
* * *
집에 돌아오니 열한 시가 넘어 있었다. 조용히 씻고 방에 들어온 남도하는 바로 휴대폰을 잡아 들었다. 그러고는 통화 목록에 남아 있는 남자의 번호를 저장했다. 단순한 그 작업에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름을 뭐라고 넣어야 할지 몰라 한참이나 썼다 지우길 반복해야 했다. 토끼, 괴한, 미친놈…. 그러다 결국 도랑도랑으로 적고 말았다. 유치하지만, 왠지 그와 잘 어울리는 단어였다.
“설마… 진짜 아저씨는 아니겠지.”
남도하는 지금,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이었다. 10년 넘게 마음에 담겨 있던 묵은 기억 일부를 털어놓은 것도, 타인의 낯선 친절을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것도. 어떻게 보자면 극히 남도하답지 못했다. 누구에게나 완전히 마음을 터놓지 못하던 평소 성격답지 않았다.
어쩌면 상대의 정체를 모르는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벽, 의자, 대나무 숲. 그런 존재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은 것과 비슷했다. 떳떳이 자신의 정체도 밝히지 못하는 남자라서, 확실히 부담이 덜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토끼 가면의 행동 동기를 아는 이유가 제일 컸다. 상대가 내준 숙제의 답을 알고 있으니까. 사실 그 이유를 모른다고 발뺌하는 게 더 어려운 일이었다. 남도하 제가 생각하는 이유가 아니라면, 남자의 행동은 설명되지 않았다.
휴대폰을 움켜쥔 손에 스르륵 힘이 빠졌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몰려드는 수마에 빠져드는 건 한순간이었다. 토끼 괴한을 만난 날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숙면이었다.
* * *
‘형, 이거….’
유달리 작고 하얀 손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햇볕 한 점 받지 못한 듯 희고 여렸다. 열여덟의 남도하가 내밀어진 종이를 받아들었다. 이미 어른의 모습에 가까운, 소년이었다. 작고 왜소한 아이와 함께 있으니 큰 체격이 더욱 도드라졌다. 우물쭈물 내민 종이는 학교에서 보낸 안내문이었다. 봄 소풍 안내문.
‘도원이 소풍 가나 보네?’
‘가지 말까…?’
다른 학교와 다르게 남도원이 다니는 곳은 1년에 한 번만 소풍을 갔다. 이동이 불편한 아이들이 많다 보니 대동하고 먼 곳으로 떠나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보호자가 동반하는 경우가 꽤 많았지만, 남도하에겐 없는 선택지였다.
‘왜 안 가, 가야지. 예쁜 옷 입고 가자.’
안타깝게도, 아이들은 너무나도 빨리 자랐다. 남도원도 마찬가지였다. 성장이 더뎌 또래보다 두세 살은 어려 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신체적 성장이 느린 대신 생각이 먼저 자라 버렸다. 넉넉지 않은 집안 형편을, 제가 먹고 쓰는 돈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동생이 안타깝기만 했다.
‘가도 돼…?’
‘당연하지.’
자신만만하게 말하긴 했지만,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자 숨이 턱 막혀 왔다. 당장 어제 월세를 낸 까닭에 돈이 얼마 있는지는 계산해 볼 필요도 없었다. 0원. 말 그대로 10원 한 푼 남지 않았다.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형편이 나아지는 건 아니었다.
열여섯, 세 형제만 남기 전에도 남도하가 생계를 책임지다시피 했다. 그때만 해도 엄마가 돈 관리를 했었기에 몰랐다. 이리도 돈 나갈 구멍이 많다는 것을. 식당에서 하루 몇 시간씩 주방 일을 해 생활비를 벌어 오는 엄마의 역할이 절대 작지 않았다는 걸.
형은 지금 시기 좋게 군대에 있었다. 그리고 그가 있다 한들 도움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생활비만 더 들었을 뿐. 결론적으로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이야기다.
‘하아….’
잠든 남도원을 내려다보던 남도하는 낡은 빌라를 빠져나왔다. 노란 가로등 옆, 얇은 잎이 겹겹이 싸인 벚꽃이 나무줄기 가득 흐드러지게 펴 있었다. 만개한 분홍 꽃나무를 보자니 속이 조금 더 울적해졌다. 누군가는 1년에 한번 찾아오는 찬란한 봄날을 즐기고 있을 텐데 자신만 그 대열에서 소외된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감상마저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당장 남도원의 새 옷 하나 사 줄 돈도, 하물며 도시락을 준비할 돈마저 없는데 벚꽃놀이가 웬 말인가. 적어도 며칠은 기다려야 출연료가 들어올 테다. 냉장고에 있는 재료도 다 외울 수 있을 정도였다. 정말 끼니를 때울 정도의 밑반찬 몇 가지가 전부였다. 그것도 시장에서 산 것들. 그따위 반찬으로 도시락이라고 싸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답답함이 더 짙어져 버렸다.
가난이 창피하지는 않았다. 일생이 그러했기에 부끄럽지도 않았다. 하지만 당연하고 당당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자신이 아닌 동생에게까지 그 가난을 짊어지라 하고 싶지 않았다.
막연한 현실에, 막막함이 담긴 눈물이 터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왜 하필 벚꽃은 저리 곱게 피어 있는 것인지, 때맞춰 불어온 밤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은 또 왜 예쁘고 그런지.
몸집이 다 자라 어른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마음은 아직 연하디연했다. 차라리 자기 일이라면, 적어도 형의 일이었다면 이리 속이 타지는 않았을 거다. 하필 그, ‘남도원’이라서 부족함 없이 해 주고 싶었다.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 이젠 남도하의 아픈 손가락이 되어 버렸다.
‘남도하 씨.’
그 순간이었다. 남도하는 저를 부르는 익숙하고, 낯선 음성에 고개를 들었다. 가로등을 등진 채, 까만 후드 점퍼를 입은 남자가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뒤로는 여전히 벚꽃이 흩날리고 있었는데, 무언가 비현실적인 모습에 남도하는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바라봤다.
‘아직 날 추운데 왜 이러고 있을까.’
어둠에 잠긴 얼굴이 뿌옇게 흐려져 보이지 않았다. 마치 얼굴이 없는 사람처럼.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익숙한 듯, 낯선 듯한 그런 목소리였다. 남자가 거리를 좁히며 다가올 때까지도 얼굴이 보이질 않았다.
‘여긴 또 어떻게 왔어요.’
남도하의 입에서 불퉁한 목소리가 나왔다. 모르는 사람인데, 마치 오래 알고 있던 사이인 것처럼 말이다. 괜스레 코끝이 시큰거렸다.
‘선물.’
남자는 대답 대신 커다란 종이봉투를 건넸다. 안쪽엔 알록달록 작은 옷이 한가득 있었다. 딱 보아도 남도원의 것으로 보였다. 남자도, 남도하도 이런 어린아이 옷을 입을 수는 없으니까.
‘들어가요, 도시락 만들어야지.’
남자는 익숙하게 앞장서 낡은 빌라로 들어갔다. 그러곤 주방에 서서 요리를 시작했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남도하를 홀로 둔 채, 갖은 재료를 썰고 볶고 삶고. 순식간에 고운 김밥 한 통이 만들어졌다. 남도하는 아무런 의문도 표하지 못한 채 그런 그를 바라만 봤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요.’
가깝게 다가온 그는 남도하에게 김밥이 곱게 담긴 도시락을 건넸다. 얼떨결에 받아 든 남도하의 시선은 김밥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런 남도하의 눈두덩이를 남자가 엄지로 부드럽게 쓸었다. 아프지 않은 손길이, 이상하게 아려 오는 기분이었다. 이젠 눈가가 시큰해졌다.
‘이제 괜찮아요, 전부.’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던 자신의 초라한 삶을 얼굴도 보이지 않는 남자가 위로해 주고 있었다. 그의 손끝이 눈가를 몇 번 반복해 쓸어 댈 때에야 알았다. 제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고 있다는 걸. 그 손길에 남도하의 감정이 더 격해져 김밥이 담긴 도시락을 쥐고 목 놓아 울었다. 왜 이제야 왔냐는 의미 모를 원망까지 쏟아 냈다.
‘힘들었죠… 미안해요… 해서.’
그사이에도 남자는 남도하를 계속해 다독였다. 얼굴을 쓸어내리는 손길이, 등을 감싸는 온기가 그렇게 따뜻하고 포근할 수 없었다.
* * *
“하, 하아….”
눈꺼풀을 들어 올린 남도하는 손바닥으로 눈두덩이를 짓눌렀다.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잔 탓인지, 함께 찾아온 꿈이 이상했다. 틀림없이 그런 일이 있기는 했었다. 비슷한 일이 너무나도 많았지만, 남도원의 소풍 사건은 남도하에게 나름 트라우마 같은 기억이었다.
그때, 남도원은 결국 새 옷도 없고, 도시락도 없이 소풍에 가야 했다. 선생님에게 전화해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 하고 양해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가정사를 모르는 게 아닌 선생님이 도원의 도시락까지 챙겨 주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열여덟의 남도하에겐 나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가난은 절대 익숙해질 수 없는 족쇄였다.
그런데 어찌 된 것인지 꿈에선 그렇지 않았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던 그날, 등장한 남자는 말 그대로 꿈속 환영이었다. 실제론 존재한 적 없던 사람이었다. 아무 대가 없는 친절과 도움은 남도하 인생에 없었다. 그랬다면 저런 하찮은 일이 트라우마가 되지는 않았을 테니까.
얼굴도 보이지 않던 그 남자가 떠오르자 잠결에 눈가를 적시던 감정마저 부정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꿈에서 낯선 남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애초에 얼굴을 모르니까. 마치 그가 악몽 같던 기억을 하나 지워 준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악몽이어야 할 꿈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형, 일어났어요?”
한참이나 침대 위에서 꿈의 여운에 잠겨 있을 때 방문이 열렸다.
“…어, 일어났어.”
“잘 잤어요? 같이 조깅 갈까요?”
몸을 일으켜 앉자 침대 가까이 다가온 도윤범이 탄산수를 건넸다.
“고마워.”
같이 가도 되냐는 물음이 아니라, 따라나설 생각이었나 보다. 도윤범은 이미 위아래로 트레이닝복을 맞춰 입고 있었다.
“머리 뻗쳤어요.”
웃음기를 가득 머금은 도윤범은 손을 들어 남도하의 옆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제 머리도 부스스한 건 마찬가지이면서.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헤집는 다정한 손짓에 또다시 이상한 기분이 몰려와 침대를 먼저 벗어나야 했다. 왜 저리 자꾸 쓸데없이 스킨십을 하고, 또 예쁘게 웃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조금 전 지어 보이던 도윤범의 미소가 떠오르자 방금 물을 마셨는데도 입이 마르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잠을 잘 잔 덕분인지, 부정적인 쪽의 감정은 들지 않았다. 어쩌면 도윤범을 향한 마음을 인정했기에 그런 것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남은 건 그저… 정리하는 것뿐이니까. 아직 제대로 형체를 갖추지 않은 마음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27년 인생 포기하는 게 제일 쉬웠던 시간이었기에 이번에도 자신 있었다.
틀림없이,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 * *
도윤범과 함께 조깅을 하고 돌아와 씻고 나오자 아침밥이 차려져 있었다.
“윤범아, 이건 대체 언제 사 온 거야…?”
“배달시켰어요. 요즘은 새벽에 가져다주거든요.”
평소 아침은 간단하게 먹는 편이었다. 샐러드와 빵, 스크램블. 혹은 자극적이지 않은 한식. 그런데 오늘 아침은 조금 달랐다.
“더덕… 구이인가 봐. 이건 전복인 거 같고.”
반찬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마치 한정식집 식탁을 그대로 옮겨온 것처럼, 수많은 반찬이 아침상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알록달록 종류별로 다양한 찬에 젓가락을 어디로 먼저 옮겨야 할지도 모를 정도였다.
“형 부산 촬영 가야 하잖아요. 아직 드라마 한참 남았는데 벌써 지치면 어떻게 해요.”
“…그렇기는 한데… 어서 먹자.”
조금 과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이미 도착한 음식을 어쩌겠나. 남도하는 별다른 토를 달지 않고 식탁에 앉았다. 식사를 하는 중에도 도윤범은 제 밥을 먹기보다도 남도하에게 반찬을 옮겨 주기 바빴다. 모든 반찬을 최소 한번은 먹게끔 하려는 것인지 남도하의 앞접시에 음식들이 잔뜩 쌓여 갔다.
괜찮다는 말도, 너도 빨리 먹으라는 말도 듣지를 않았다. 아침치고는 과하게 배가 부르게 식사를 끝내야 했다. 그러고서도 끝이 아니었다. 도윤범은 커다란 약통을 들고 와서는 온갖 영양제를 챙기기 시작했다.
“윤범아, 이 정도면 약물 중독이야.”
“그럴 리가요. 애기처럼 투정 부리지 말고 빨리 먹어요.”
“애, 기….”
간 영양제, 칼슘, 아연, 프로폴리스, 비타민…. 어느새 종류가 더 많아졌다. 밥 없이 약만 먹어도 죽지 않을 것 같을 정도로.
“부산 촬영 갈 때도 싸 줄 테니까 시간 맞춰서 드셔야 돼요?”
약을 건네는 도윤범의 말이 조금 이상했다.
“…어? 나 혼자 가? 너는?”
오늘 부산 촬영이 예정돼 있었다. 배우들의 스케줄을 고려해 부산 장면을 모아서 찍기로 했다. 하루 만에 끝나지 않을 거라 1박을 해야 했다. 당연히 도윤범도 함께하리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아… 저 학교 일 때문에 이번에는 같이 못 가요.”
“아, 그래…. 회사에는 얘기했지?”
처음이었다. 도윤범이 스케줄에 함께하지 못한 일은. 그리고 이제야 다시 깨달았다. 그가 아직 대학생의 신분이었다는 걸. 하도 어른스러워 그걸 잊고는 했다. 채 졸업도 하지 않은 병아리 인턴이었다는 걸.
“이번엔 원호 형이 따라갈 거예요. 혼자 갔다 올 수 있죠?”
“다, 당연한 걸… 무슨.”
또다, 또. 농담을 붙이며 장난스럽게 웃어 보이는 도윤범의 얼굴을 보려니 울렁증이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영양제를 먹기 좋게 하루치씩 소분해 나누어 주고, 괜찮다는 데도 짐까지 손수 싸 주었다. 속옷만큼은 정말 괜찮다고 조금 큰 소리를 내야 할 정도로 극성을 떨었다. 간식과 세면용품, 충전기 등. 뭐 하나 빠트리지 않고 착착 짐을 꾸리는 게 역시 야무졌다.
사방을 뛰어다니며 짐을 챙기는 도윤범을 보자니 자꾸 마음이 시끄러워졌다. 생각해 보면 최근 들어 조금 더 유별나진 것 같았다. 아침 조깅을 함께하는 것도, 식사를 챙기는 것도. 거기에 더는 밤중에 집을 비우는 일도 없었다.
남도하가 한 발짝 거리를 벌리려 하면 도윤범은 두 발짝 좁혀 오고는 했다. 아니, 그런 기분이었다. 어쩌면 도윤범을 향하던 불순한 마음을 정리하려던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마음 정리가 생각처럼 되지 않고 있었다.
“도착하면 연락하고요. 알았죠?”
“…어.”
“다치지 않게 조심해야 해요?”
마치 초등학생 아들 소풍 보내는 것처럼 줄줄이 따라붙는 주의사항에 남도하는 연신 고개를 끄덕여 대답해야 했다. 도윤범은 남도하가 차에 올라탈 때까지,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시선을 떼어 내지 않았다.
차가 출발하고야 남도하는 도윤범을 탓했다. 저놈이 문제다. 매사 저런 태도로 나오는데, 대체 어떻게 마음을 정리할 수 있다는 말인가. 미운 구석이 있어야 미워하지. 괜히 제대로 정리되지 않는 제 마음을 도윤범의 탓으로 돌려야 했다.
* * *
“밥 먹을까?”
“형은 저 보면 밥 생각밖에 안 나세요?”
“그러게. 너 보면 좀 먹이고 싶은 생각이 들기는 해.”
“…그렇게 불쌍하게 생겼어요, 제가?”
장난처럼 던져 본 말에, 서주언이 꽤 진지하게 받아쳤다. 생각해 보니 이상하기는 했다. 서주언도, 토끼 괴한도, 도윤범도. 왜 그렇게 못 먹여 안달인지 모르겠다. 요즘 남도하는 어디서도 끼니를 거를 수가 없었다. 집에서는 도윤범이, 촬영장에서는 서주언이 달라붙어 매끼 제때 챙겨 먹고 있었다.
“내일 먹어요. 내일도 촬영 있으니까 제가 살게요.”
“말 바꾸기 없어.”
“비싼 거로 사 드릴게요.”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서주언에게라면 식사 정도는 얼마든지 사 줄 수 있다. 오늘 촬영만 하더라도 비중이 많은 그가 실수 없이 끝낸 덕분에 새벽까지 이어가지 않게 됐다. 뭐, 남도하 제가 잘한 것도 있었지만. 그래도 오늘은 부산까지 이동한 탓에 너무 피곤하기도 하고, 시간도 늦어 저녁을 먹기엔 조금 애매한 시간이었다.
“호텔은 어디야? 도윤범 없던데 태워다 줘?”
“…글쎄요? 회사에서 예약한다고 했는데…. 원호 형이 데려다줄 거예요.”
서주언이 제 매니저와 함께 먼저 자리를 떠나고, 남도하도 짐을 챙겨 차로 돌아갔다. 어떻게 된 게 이원호는 촬영 내내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마치 운전기사처럼 말이다. 그와 함께 일정을 소화한다고 할 때부터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놀랍지는 않았다. 늦은 저녁 끝난 촬영에 뒤늦게 피곤이 몰려오며 도윤범이 더 생각날 뿐이었다. 누구와 다르게 일 잘하고 착한 도윤범 말이다.
“어… 끝났어?”
“네, 가요.”
이원호는 시트를 잔뜩 뒤로 젖힌 채 잠들어 있다가 남도하가 차에 타자 뒤늦게 몸을 일으켰다. 목소리에선 여전히 졸음기가 가득 묻어났다.
“아, 얼른 가서 밥 먹고 자자. 피곤하다.”
“네… 그래요.”
부산에 도착한 시각이 채 점심이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휴식을 취하고서 밤까지 촬영을 이어 간 사람에게 피곤하다 하니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어차피 하루만 함께하면 될 상대였기에 긴말하지 않고 따랐다. 조금 더, 도윤범이 그리워졌다.
“형, 호텔이… 여기예요?”
“어, 그런 거 같은데….”
한참이나 좁은 길을 운전해 들어올 때부터 불안했다. 초행길이니 내비게이션에 의지해 도착한 곳은 생각 이상으로… 초라했다. 유달리 어둡고 허름한 동네일뿐만 아니라, 남도하 처지에서 보더라도 충분히 허접하다 할 수 있는 숙소였다. 외관만 봐서는 이름만 호텔일 뿐, 여관방 이상도 이하도 되지 않을 것 같은 곳이었다.
“뭐 이딴 데로 잡아 줬냐. 서주언네는 해운대 바닷가라던데.”
“하룻밤만 자죠, 뭐.”
트렁크에서 짐을 내리면서도 이원호의 쉼 없이 불평을 쏟아 냈다. ‘양우준이었으면 이런 데 잡아 주지도 않았을 거다.’, ‘너도 회사에 싫은 소리도 좀 하고 그래라.’ 결국은 또 양우준으로 귀결되는 이야기에 남도하는 네, 네 하고 영혼 없는 답변만 하고 말았다.
누가 예약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큰 불만은 없었다. 남도하는 그런 성격이었다. 그저 재계약 의사가 조금 더 옅어질 뿐이었다. 적어도 서주언의 샌즈로 옮기면 이따위 대접은 받지 않을 테니까.
“여보세요? 어, 우준아.”
막 호텔, 아니 숙소로 걸음을 옮기려던 때, 이원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상대는 양우준인 것 같고. 길지 않은 통화를 하는 사이 이원호의 얼굴이 시시각각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전화를 끊을 때쯤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왜 그래요?”
“하아, 이 미친 새끼를 어쩌면 좋냐, 진짜.”
“또 뭐라고 해요?”
“지금 오래… 당장.”
빤히 남도하의 스케줄에 따라온 걸 알고 있을 테다. 아무리 이원호가 뒤에서 양우준 욕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의사를 무시한 채 남도하의 스케줄을 쫓아오지는 못했을 테니까. 그리고 양우준이 저리 나온다면, 이원호가 어떻게 할 수 있을 리도 없다.
“가 봐요, 괜찮아요.”
“어떡하냐… 내일 KTX 타고 올래?”
“알아서 할게요. 주언이 형네 차도 있고요.”
이원호는 절반의 미안함과 절반의 짜증을 숨기지 않은 채 제 짐을 가지고 차로 돌아갔다. 그런 그를 보며 남도하는 사실 그다지 아쉽지 않았다. 어차피 이원호가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오늘 보았으니까. 오히려 혼자 움직이는 쪽이 더 속 편할 것 같았다. 멀어지는 차 뒤꽁무니를 보다가 숙소로 들어갔다. 너무 피곤해서 식욕마저 사라졌다.
1층에서 예약자 이름을 말하고 체크인할 때 확신했다. 여긴 의심의 여지 없는 모텔이다. 기다란 플라스틱 막대에 방 번호가 적힌 열쇠엔 모텔이란 글씨가 커다랗게 쓰여 있었다. 엘리베이터도 없어 캐리어를 들고 4층까지 걸어 올라가야 하는 것도 당연했다. 안 그래도 촬영으로 지쳤던 몸이 숙소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퍼져 버릴 것 같았다.
“후우….”
407호. 노랗고 빨간 싸구려 조명이 복도를 어둑하게 비추고 있었다. 바닥엔 언제 빨았는지도 모를 붉은 카펫이 깔려 있었고, 복도 창은 모두 막혀 바깥의 빛이 들지 않았다. 문고리에 열쇠를 넣고 돌리자 방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매끄럽지 못하게 열렸다. 캐리어를 끌고 들어와 어둠 속에서 손을 허우적대듯 벽을 짚었다. 폐부로 스며드는 묵은 모텔 특유의 냄새가 숨을 삼키기도 싫을 정도로 불쾌했다.
“뭐야….”
딸깍, 딸깍. 전등 스위치를 찾은 것 같은데, 위로 아래로 번갈아 눌러 보아도 방 안에 불이 켜지지 않았다.
하아, 그럼 그렇지. 호텔 꼬라지를 봐서는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다. 남도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플래시를 밝혔다. 짙은 어둠 사이로 핀 라이트처럼 좁은 빛이 퍼지며 작은 방을 비추었다. 다른 스위치를 찾아보려 캐리어를 끌고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때였다.
탁-하고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남도하 제 쪽이 아니라, 앞쪽 벽이 꺾어져 시선이 닿지 않는 어둠 안쪽이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청각에 집중했지만, 방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잘못 들은 것인가 싶어 다시 걸음을 옮기는 순간, 이번엔 원단 쓸리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이미 한번 자극받은 청각이 다행히 작은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별다른 인기척은 없었지만, 연이어 들려온 낯선 소리로 확신했다.
이 방 안에 ‘뭔가’ 있다.
사람인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런 소리를 낼 수 있는 존재가 있는 것 같다고. 그런 판단을 내리자 삽시간에 심장이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대로 달려서 방을 빠져나가야 하는가, 아니면 무엇인지 모를 상대를 확인해야 하는가.
“…너무 어둡네….”
답은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최근 들어 일어난 사건들로 인해 깨달았다. 기회가 된다면, 최대한 빨리 도망쳐 위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이번에도 그런 쪽의 호러일 거라는 확신은 없었지만, 직접 부닥치는 쪽은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두근대는 심장을 숨긴 채 남도하는 방과 현관을 잇는 짧고 좁은 복도에 캐리어를 애매하게 내려놓았다. 그러곤 뒷걸음질을 치며 현관문 쪽으로 이동했다. 시선은 뭐가 튀어나올지 모를 전방을 주시했다. 긴장 때문인지 호흡도, 걸음도 부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늦었네. 한참 기다렸잖아.”
벽 뒤에서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남도하의 두 다리가 우뚝 멈춰 섰다. 여전히 좁은 플래시 조명 안쪽에 보이는 것은 없었다. 차라리 익숙한 기계음이었다면 다행이었겠지만, 처음 들어 보는 남자 목소리였다.
남도하 저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 계속해 뒷걸음질을 친 것인지, 등 뒤로 딱딱한 현관문이 닿았다. 그때야 어둠 사이에서 새까만 인영이 나타났다.
“나야.”
까만 상, 하의를 갖춰 입은 보통 체격의 남자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얼굴엔….
“토끼…?”
토끼 가면을 뒤집어쓴, 남자였다. 그는 위해를 가할 생각이 없다는 듯, 친근한 말투로 말하며 느릿하게 간격을 좁혀 왔다. 하지만 그 익숙한 모습을 지켜보는 남도하의 심장은 더욱더 거친 소리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듣는 목소리였지만, 이성이 경고를 보냈다.
저 남자는, 제가 알던 그 토끼 가면이 아니라고. 확신할 어떤 이유도 없었지만, 그런 판단을 내렸다. 점점 더 좁혀지는 간격을 지켜보며 긴장이 더해 갔다. 발아래를 확인하지 못한 상대가 캐리어에 다리가 걸리며 시선이 흩어지는 순간, 그대로 손을 등 뒤로 돌려 문고리를 잡았다.
“하, 씨발. 생각보다 눈치가 좋네.”
다시 중심을 잡은 남자도 남도하가 제 정체를 알아챘다는 사실을 안 것 같았다. 남도하는 그대로 문고리를 잡아 돌리며 몸을 문밖으로 빼내었지만, 튀어나온 손이 모가지를 재빨리 휘감아 잡아당겼다. 급소를 짓누르는 우악스러운 손길에 제대로 반항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당겨져 문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어쩌지? 오늘은 흑기사도 없을 테니까 꿈도 꾸지 마.”
“커, 크윽…!”
점점 더 우악스럽게 숨통을 조여오는 팔뚝의 힘이 보통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도 싸움에 그리 능숙한 편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힘이 좋은 것과는 별개로 이런 몸싸움이 능숙해 보이지 않았다. 남도하는 호흡이 끊어지기 전, 있는 힘껏 팔꿈치로 놈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아악!”
예상치 못한 습격에 목을 옥죄던 손길이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몸부림을 치던 사이 남도하가 방 안으로, 남자가 출입문 앞을 막아서게 돼 버렸다. 설상가상 휴대폰은 바닥에 떨어져 버렸고, 퍼져 나온 플래시 불빛에 남자의 손에 들린 번쩍이는 쇠붙이가 선명히 보였다.
“너지, 그 손가락.”
“그건 가짜고.”
“핏물도.”
“그러게, 정중하게 부탁할 때 적당히 설치고 꺼졌어야지. 그랬으면 그런 꼴 안 당했을 거 아냐?”
남자는, 남도하가 시간을 끌어 보려 생각나는 대로 던진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가면이 익숙하지 않은 것인지 연신 손으로 토끼 가면을 매만졌다. 긴장으로 심장이 불편한 울림을 보이는 한편, 끓어오르는 분노 역시 함께였다. 여태 토끼 가면과는 상반된 스토킹과 협박을 일삼던 상대가 직접 찾아온 것 아닌가.
놈은 집을 박살 내고, 죽인다는 협박을 일삼았다. 그런 간접적인 위협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공격까지 가했다. 절대 일반적인 안티 팬으로 볼 수 없는 상대였다.
“도윤범이랑 대체 무슨 사이인데?”
“내가 그런 것까지 알려 줘야 하나.”
하지만 질문을 던진 남도하는 대답을 듣지 못했음에도 이미 복잡한 미궁에 빠져 버린 기분이었다. 죽은 쥐 사체와 손가락을 보낸 건 도윤범이 방송을 타기 전이었다. 그에게 팬이 붙기 전의 이야기라는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 괴한은 두 가지 모두 자신이 했다고 하는 것일까. 떠오르는 대로 질문을 던진 후에야 이상한 걸 깨달았다. 어쩌면 본능이 먼저 느낀 걸 수도 있겠다.
“이건 팬심이라고 보기 좀 그런데.”
“그쪽 잣대로 볼 때나 그런 거고.”
한 손에 칼을 쥔 남자를 보다가, 재빠르게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잡아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달려드는 남자를 피해 방 안쪽으로 빠르게 피해 들어갔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무기로 쓸 만한 물건이 보이지 않았다.
“그쪽은 팬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이런 팬심도 있거든.”
기회를 노리던 것인지, 잠시 멈추었던 괴한이 다시 간격을 좁히며 쇄도했다. 가까워지는 단도의 칼날을 눈여겨보며 그대로 휴대폰을 상대의 얼굴에 집어 던졌다. 그러곤 가까운 거리에 들어온 괴한의 정강이를 힘껏 걷어찼다.
“크윽…!”
제대로 걸려든 것인지 칼이 괴한의 손에서 떨어져 나갔고, 상대는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남도하도 아무런 타격이 없지는 않았다. 그 사이 팔뚝에 칼날이 스쳤는지 화끈거리는 통증이 일었다. 상대가 자세를 잡기 전, 그의 가슴팍에 올라타 무릎으로 팔을 누른 채 모가지를 움켜쥐었다.
“이제 그 대단한 팬 얼굴 좀 볼까.”
“이, 이런 씨발…!”
거칠게 몸부림치는 사내를 간신히 힘으로 누른 채, 남자가 쓰고 있던 토끼 가면을 벗겨 냈다. 옅은 조명 사이로 간신히 보이는 이목구비는, 목소리만큼이나 낯선 것이었다. 서른 남짓 되었을까 싶은 남자의 얼굴은 당황인지 짜증인지 모를 감정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틈을 주지 않고 남자의 얼굴에 주먹을 몇 대 휘갈겼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커, 커억…!”
“하아, 대체 이 토끼 가면은 어떻게 알고 쓰고 왔을까.”
내려치던 주먹에 통증이 들 때야 멈춰 섰다. 우위를 점한 덕분인지 남도하의 이성이 제대로 흐르기 시작했다. 이 상황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단연 토끼 가면이었다. 우연히 같은 가면을 선택했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특이한 제품이었다. 웃는 얼굴인 것도 그렇고, 털이 복슬복슬 달린 것도 그렇고 일반적인 건 아니었다.
“하, 하악… 왜, 자주 보던 거라 익숙한가 봐? 너한테 붙은 그 새끼가 누군지 알려 줄까?”
“…뭐?”
“설마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밖에서까지 그렇게 대놓고 만났으면서.”
“…….”
자포자기한 것인지 남자는 더 이상 몸부림을 치지 않았다. 입술이 터져 핏물을 내비치는 채 얌전히 남도하 아래 깔려 있었지만, 표정만큼은 그가 우위에 선 것처럼 태연했다. 이유 모를 자신감이 잔뜩 깃들어 있었다.
“커, 커억…!”
상대의 장난에 놀아나고 싶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잠시 놀라긴 했다. 하지만 토끼 괴한의 정체를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혹은 그저 우연히 그 존재를 알고 떠보려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알고 싶지 않았다. 그저 그를 이용해 접근하려 했다는 부분이 괘씸할 뿐이었다. 놈의 모가지를 감싼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누, 누군지 알면… 크윽, 너도 놀랄 텐… 컥!”
더는 들어 줄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 상대의 얼굴도 확인했으니 빠르게 경찰에 신고하는 쪽이 좋을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 토끼 괴한의 정체가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딴 방법으로 알고 싶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아까 칼에 스친 자리에서 계속해 핏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팔뚝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액체가 생생히 느껴졌고, 상처 부위가 점점 더 뜨겁고 따가워졌다. 시간을 오래 끌 상황이 아니었다.
“어쩌지. 별로 안 궁금… 읏…!”
목을 누른 채 다른 손으로 옆에 떨어진 휴대폰을 잡아들려는 순간이었다. 남자의 팔뚝을 누르고 있던 허벅지에 홧홧한 열기가 쓸고 지나갔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떼어 내 거리를 벌려야 했다. 왼쪽 다리가 부자연스럽게 따라 움직였다. 어느새 남자의 손엔 다시 칼이 들려 있었다.
“하아… 진짜 죽는 줄 알았네.”
낭패였다. 어쩌면 상대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두들겨 패야 했던 게 아닐까 싶은 후회가 밀려왔다. 팔뚝과 다리가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퍼져 나오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도 남도하가 만만하지는 않다고 판단한 것인지 아까와 달리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간격을 좁혀왔다. 그에 맞춰 뒷걸음질 치며 간격을 유지했다. 머리를 굴려 보아도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 내 얼굴까지 봤으니 진짜 못 살려 주겠네. 원래 그럴 생각도 없기는 했지만.”
목숨을 구걸하고 싶은 마음이 반, 죽기 살기로 달려들고 싶은 마음이 반이었다. 상대가 원하는 말을 내뱉어 목숨이라도 구하는 게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비죽대는 얼굴을 보자니 또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그 갈등은 엉덩이에 나무 책상이 닿을 때까지도 이어졌다. 상대는 서너 걸음 앞까지 다가와 멈춰 섰다.
“근데 진짜 안 궁금해?”
불리하다. 상대도 약간 지쳐 보이긴 하지만 심각한 타격을 입은 건 오히려 남도하였다. 두 군데나 칼에 스친 탓에 움직임이 점점 굼떠졌다. 특히 허벅지 쪽 통증이 심해지고 있었다.
“알려 줄 생각은 있고?”
관심도 없는 말에 호응했다. 그러면서 눈에 띄지 않게 손을 뒤로 해 책상 위를 쓸었다. 무엇이라도 좋으니, 손에 걸리는 것이 있기를 빌면서. 다행이라면 몸싸움 중 자리가 옮겨진 탓에 남도하의 휴대폰 불빛이 멀어지며 짙어진 어둠이 남도하의 작은 움직임을 숨겨 주었다.
“뭐, 어차피 마지막인데. 알고 뒈지는 쪽이 더 재밌지 않을까?”
입이 말라가는 것 같고, 거칠게 울리는 심장이 목구멍으로 넘어올 것만 같았다. 남자는 덫에 걸린 사냥감을 잡으러 오는 것처럼 느릿하게 간격을 좁혀 왔다. 그때, 남도하의 손끝에 뭔가가 걸렸다. 차갑고, 딱딱한 것. 손가락으로 움켜쥐니 얇은 두께에 비해 꽤 묵직했다.
“…궁금하기는 한데….”
두 걸음, 한 걸음, 반걸음. 가깝게 다가온 남자가 칼을 쥔 손을 어깨 너머로 치켜들었다. 커다랗고 빠르지 않은 동작을 보며 남도하는 손에 잡힌 걸 그대로 상대의 얼굴을 향해 휘둘렀다.
-퍼억!
뭔가 터져 나가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몸이 빠르게 균형을 잃으며 바닥을 굴렀다.
“이런, 씨, 씨발…!”
철제 스탠드였다. 묵직한 받침대 부분에 얼굴을 가격당한 남자는 악에 받친 욕지거리를 뱉어 냈지만, 안타깝게도 치명적인 타격은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얼굴에서 흐르는 붉은 핏줄기가 상대의 화만 더 돋운 것만 같았다.
몸을 일으켜 세우는 남자를 보며 남도하는 몸을 돌렸다. 그러곤 그대로 출입문을 향해 내달렸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칼날이 스친 허벅지가 저릿했고, 팔뚝도 부자연스럽게 흔들렸다. 점점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다행히 출입문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러고도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절뚝거리는 다리를 한 채 반쯤 구르듯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3층, 2층, 1층… 숨 한번 편히 내쉬지 못하고 내달렸다. 그대로 카운터로 향했지만, 안쪽에서는 사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저기요! 아무도 없어요?”
숨을 내쉬기도 버거운 목소리로 도움을 청해 보았지만,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낭패였다. 낡은 호텔 어디서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고, 설상가상 뒤쪽 계단에서 빠르게 달려 내려오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카운터 안쪽에 전화기가 보였지만, 손을 뻗어 보아도 닿질 않았다. 카운터 문마저 굳게 닫혀 열리지 않았다. 더 시간을 끌었다가는 괴한에게 덜미가 잡혀 버릴 것 같은 생각에 무작정 건물 밖으로 빠져나갔다.
툭- 투두둑- 어느새 내리기 시작한 가을비가 시야를 불편하게 할 정도로 쏟아붓고 있었다. 어둠과 빗줄기가 제 모습을 가려 줄 테니 오히려 잘 되었다 싶은 생각에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빗물이 옷을 뚫고 스며들기 시작하자 상처의 통증이 더욱더 선명해졌다. 허벅지도, 팔뚝도 마찬가지였다. 옷에 스며드는 물기의 무게마저 버거울 정도로,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남도하!”
빗소리에 파묻혀 쫓아오는 걸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뒤를 돌아보아도 상대가 보이지 않았지만,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된 동네가 망해 버린 시가지와 같았다. 모든 상점의 문이 굳게 닫혀 있고, 가로등마저 간신히 걸음만 옮길 수 있을 정도로 드문드문 설치돼 있었다. 도움을 바랄 행인 하나 다니지 않는 길가였다. 몸이라도 숨기려 넓은 길을 피해 더욱 좁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도망쳐 봤자야. 너 지나간 길에 시뻘건 핏물 뚝뚝 흐르고 있다고.”
약간은 먼 거리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남도하는 제 발아래를 확인했다. 조도가 낮은 불빛 사이에서도 짙은 핏물이 다리에서 흘러내리는 게 선명히 보일 정도였다. 오히려 투명한 빗물에 섞여 그 짙음이 더욱더 도드라져 보였다.
“하아… 학….”
물기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러곤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더욱더 어두컴컴한 골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바닥을 나뒹굴던 짤막한 쇠막대기를 주워 들었다.
-탕, 탕, 탕!
마치 토끼몰이를 하는 것처럼, 쇠 철문을 치는 소리가 빗소리 사이로 점점 더 커다랗게 들려왔다.
“여기 숨어 있었나 보네.”
골목 초입. 흐릿한 가로등 불빛 아래 새까만 사내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마 저쪽에서는 어둠에 가려져 남도하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테다. 그런데도 그는 꽤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씨발, 사람 존나 귀찮게 하네. 이런 동네로 고르길 다행이지.”
타다다닥- 소리와 함께 돌벽을 칼끝으로 쓸며 거리를 좁혀 왔다. 남도하도 손에 쥔 쇠막대기를 힘주어 잡고, 숨을 한번 크게 삼켰다. 지금 몸 상태로는 상대를 절대 이길 수 없다는 판단이 섰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죽지 않으려면 몸부림이라도 쳐 보는 수밖에.
“그래도 죽을 자리는 잘 골랐네. 맘에 들어, 거지 같은 게 딱 너랑 어울리잖아.”
기어이. 남자는 남도하가 몸을 숨긴 전봇대 바로 건너편까지 다가와 버렸다. 이대로 끝인가, 어떻게 반전의 기회를 만들어 낼 수는 없을까. 빠르게 머리가 굴려봤지만, 안타깝게도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다. 설상가상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정신마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나와.”
톡톡. 전봇대를 두드리며 하는 말에 남도하는 깊게 숨을 삼켰다가 내뱉었다. 그러곤 손에 쥔 쇠막대를 조금 더 힘주어 잡았다. 절망적이지만, 무언가라도 해야 했다. 아무리 구질구질한 삶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마무리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까. 마음을 다잡고 상대에 맞서려 몸을 움직이려 할 때였다.
퍼억!
빗소리마저 삼켜 버릴 정도로 지나치게 커다란 타격음이 들려왔다. 전봇대 너머에서. 연이어 뭔가 박살 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고….
“아, 아악…!”
괴한의 찢어지는 고함이 좁은 골목을 메웠다.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남도하는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전봇대를 돌아 골목을 바라봤다. 시야가 뿌옇게 보일 정도로 내려치는 빗줄기 사이, 한 남자가 골목 가운데 서 있었다. 비에 젖기는 했지만,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고 구둣발로 괴한의 머리통을 짓밟고 서 있는 남자는… 새하얀 토끼 가면을 쓰고 있었다.
-퍼억!
서 있는 남자의 발길질 한 번에 묵직한 타격음이 터지며 빗소리를 집어삼켰다. 그 발길질을 머리로 받은 괴한은 다시 한번 짧은 비명을 내지르곤 바닥을 손가락으로 긁으며 토끼 가면과의 거리를 벌리려 했다.
“괜찮아요?”
그리고 토끼 가면은, 그런 남자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듯 남도하를 향해 빠르게 거리를 좁혀왔다. 어떤 대답을 바라고 던진 물음이 아니었는지, 반쯤 달리듯 다가온 그는 남도하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그러곤 마치 제 질문의 답을 스스로 찾는 것처럼 남도하의 등을, 뒷덜미와 머리를 연신 쓸어내렸다.
“하아… 다행이에요.”
차갑게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 뜨거운 열기가 피어났다. 남자가 건네주는 온기가 두려움으로 어지러이 뜀박질하던 남도하의 심장을 빠르게 진정시켰다. 안도였다. 이도 저도 할 수 없던 상황에 등장한 남자는, 말 그대로 구원이었다. 그의 등장만으로 짙어지던 두려움이 사라져 버렸다.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 상황에 두 팔을 남자의 등 뒤로 감았다. 남은 힘을 모두 주어 품 안 가득 그를 담고야 완전히 안심할 수 있었다.
“잠깐만 기다려요.”
그제야 남자도 남도하의 안위를 확인한 것 같았다. 젖은 뒤통수를 쓸어내리던 그는 남도하를 떼어 냈다. 그러곤 빗물을 가득 머금은 재킷을 벗어 남도하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추위를 조금이라도 떨쳐 내라는 것도 같았고, 무거워진 옷을 그저 맡기는 것도 같았다. 하얀 셔츠 사이 목에 걸린 실크 타이까지 푼 그는 남도하의 손에 타이를 건네주었다.
“금방 끝낼게요.”
“저기요! 그냥 경찰 부르는 게….”
그는 마치 남도하의 말을 못 들은 것처럼 돌아섰다. 빗물에 잔뜩 젖은 하얀 셔츠를 걸치고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에, 남도하는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느낌이 몰려왔다. 그동안 만날 때마다 걸치던 오버핏의 아노락이 아니라 그런지, 정장을 입은 눈앞의 남자가 낯설면서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괴한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남자를 보자니 그런 잡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조금 전 토끼 가면이 얼마나 세게 상대를 가격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도망치려던 괴한은 골목도 벗어나지 못한 채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세우고 서 있는 게 고작이었다.
“재밌는 걸 쓰고 왔네.”
두 사람은 비슷한 체격에, 비슷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이미 남도하에게 얼굴이 다 드러났음에도 괴한은 가면을 벗지 않고 있었다. 남도하는 남자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다릴 움직여 봤지만, 그사이 긴장이 풀린 탓인지 아까 칼날이 스친 허벅지 때문인지 내딛는 걸음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그리고 남자 역시 별다른 도움이 필요해 보이지 않기도 했다.
-빠각!
꽤 거리가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남자의 몸이 팽이처럼 돌며 구둣발이 괴한의 머리 높이까지 올라갔다. 빠르게 회전하던 속도 그대로 대가리에 꽂힌 발길질에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있던 괴한은 종이 인형처럼 벽에 부딪히며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져 버렸다.
토끼 가면은 여유로운 걸음으로 괴한의 앞까지 다가갔다. 따각, 따각. 남자의 구둣발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근데 장난도 적당히 쳐야지.”
“으, 으악…!”
느릿하게 다가가던 속도 그대로 바닥에 떨어진 손가락을 짓밟았다. 가벼운 동작이었음에도 찢어지는 고함을 쏟아 내는 괴한을 보니 당하는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쉬, 조용히.”
“커, 커억…!”
“어차피 도와주러 올 사람도 없다는 거 잘 알잖아, 너희가 일부러 고른 장소일 테니까.”
몸을 숙인 토끼 가면은 괴한의 모가지를 움켜쥐었다. 괴한은 한쪽 손이 자유롭지 못한 탓인지 남는 손으로 남자의 팔뚝을 할퀴며 몸부림치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목을 움켜쥔 손이 더욱더 우악스럽게 조여들 뿐이었다.
“사, 살려… 컥…!”
애원 섞인 목소리는 빗소리에 파묻혀 남도하의 귀에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숨통을 끊을 것처럼 목이 조인 탓에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올 수도 없었다. 정제되지 못한 감정이 그 손길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누구? 나한테 하는 말이야?”
모가지를 움켜쥔 남자는 능청스럽게 뒤를 돌아보며 주변을 훑었다. 다른 사람이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건 좀 뻔뻔하네. 남의 목숨은 하찮아도 네 목숨은 소중한가 봐?”
“아니, 내가… 흡…! 네 정, 체… 컥…!”
“입 닥치라고 했지.”
듣는 남도하의 등덜미가 다 서늘해지는 목소리였다. 그사이 토끼 가면이 화를 내는 장면을 꽤 여러 번 보았다 생각했던 남도하였지만, 지금 그의 상태는 단연 최악이었다. 대체 누가 괴한인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날이 선 아니, 폭주하는 모양새였다. 어두운 밤, 인적도 없는 골목길. 빗줄기까지 더해지자 스산한 분위기마저 들 정도였다.
“이 손이 그랬나 보지.”
남자는 제 구둣발로 잔뜩 짓이기던 손을 잡아들었다. 여전히 한쪽 손은 괴한의 목덜미를 쥐고 있었고.
“아, 아악…!”
우둑-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착각이 들었다. 삽시간에 기괴한 모양새로 꺾어진 괴한의 손목을 보다 남도하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타인의 손목을 망가트리는 걸 보니 확실히, 제가 알던 남자가 보통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다시 깨달았다.
“아님 이쪽인가?”
이미 기괴한 모양으로 바닥에 떨어진 손목을 두고 반대쪽 팔을 잡아드는 남자를 보곤 남도하가 걸음을 옮겼다. 마치 빗물이 몸에 잔뜩 스며든 것처럼 걸음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그런데도 최대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남자가 괴한을 죽이고 말 것 같았다. 저를 죽이려 한 놈이라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토끼 가면을 살인자로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것도 저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다.
“그만… 해요. 그냥 경찰에 신고해요.”
“금방 끝나요.”
바라보지도 않고 말을 하는 남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얇은 셔츠는 빗물에 잔뜩 젖어 손바닥에 닿는 남자의 몸이 고스란히 느껴지게 했다. 어떤 감정을 참아내고 있는 것처럼, 경직된 근육이 잘게 경련하는 게 전해졌다.
“저 조금 무서우려고 하니까 그만 해요, 예?”
가까이서 보니 괴한의 상태는 더 좋지 못했다. 아직 살아 있는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반응이 없었고, 한쪽 손목은 일반적으로 나올 수 없는 각도로 꺾여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이미 늦어버린 것인가 싶은 생각에 남도하는 재촉하듯 남자의 어깨를 조금 더 힘주어 잡았다.
“하아… 미안해요, 내가 흥분했네요.”
그제야 남자는 괴한을 짓누르던 몸을 일으켰다.
“아악…!”
하지만 손에 쥐고 있던 반대쪽 손목은 그대로 우두둑- 소리를 내며 비틀어져 버렸다. 순간 튀어나온 신음으로 상대가 죽지 않았다는 건 확인할 수 있었다.
“안 죽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네.”
“이리 와요.”
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양 손목이 모두 망가져 버린 건 소름 끼치게 징그러운 장면이었지만, 일말 아쉽기도 했다. 저를 죽이려던 놈을 살려줘야 한다는 점이 불만스러웠다.
“신고 안 해요?”
“내가 알아서 해요.”
“아니 그래도, 그럼 얼굴이라도 봐야 하지 않을까요.”
남자는 남도하의 걸음이 불편한 걸 알아챈 것인지 허리에 팔을 감았다. 남도하도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몸을 기댔다.
“이제부터 남도하 씨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요.”
경찰에 신고하지도, 그렇다고 상대의 신원을 확인하지도 않는 남자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래도 될 것 같았다. 그냥 그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도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언제나 그랬지만, 근본 없이 그런 믿음을 주는 남자였다.
“가요.”
* * *
“왜 그러고 있어요.”
“아… 옷이 젖어서 침대 버릴까 봐요.”
“상관없다니까요.”
남자는 남도하를 어떤 호텔로 이끌었다. 처음 보는 차를 타고, 꽤 비싼 가격일 게 틀림없는 호텔로 왔다. 회사에서 잡아 준 모텔인지 여관인지 모를 숙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곤 그는 신발도 벗지 않은 채 편히 쉬고 있으라는 말만 남기고서 다시 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지금, 뭔가를 잔뜩 들고 돌아왔다. 누군지 모를 노인까지 데리고서.
“이리 와요.”
별다른 설명 없이 방으로 들어선 그는 소파를 두드리며 남도하를 불렀다. 낯선 사람의 등장 때문에 조금 긴장한 채 걸음을 옮겼다. 아저씨인지, 할아버지인지. 어쨌든 그는 토끼 가면의 옆에 서서 무념무상의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마치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않는 것처럼.
“벗어요.”
“벗, 뭐요…?”
소파에 엉덩이를 대자마자 하는 남자의 말에 남도하는 새까만 인형 눈알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비에 젖은 건 상대도 마찬가지였기에 그의 토끼 가면에 맺힌 물방울이 뚝, 뚝 떨어져 내렸다. 대체 이 남자는… 저런 말을 뭐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뱉어 내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상처 보자고요. 벗어야 보죠.”
“아….”
순간 말을 잘 못 알아들은 게 민망해 빠른 손길로 단추를 풀어 칼날이 스쳤던 팔뚝을 보여줬다.
“흉지면 어쩌나, 이걸.”
그제야 뒤에 조용히 서 있던 노인이 다가왔다. 그러곤 말 한마디 없이 능숙한 손길로 상처를 살폈다. 남도하도 따로 묻지는 않았지만, 의료 종사자일 거라 확신했다.
“아파요?”
“괜찮아요, 이 정도는.”
날카로운 칼날에 베인 건 처음이었지만, 촬영 중 소소하게 다친 경우는 꽤 있었기에 이리 호들갑을 떨 정도로 큰 상처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남자와 함께 온 노인은 남도하의 상처에 약을 바르고, 거즈를 대 감았다. 소독약이 상처에 쏟아질 땐 악 소리가 절로 나올 뻔했지만, 이후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을 때는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깊게 찔리지는 않았습니다.”
“흉은?”
“아마 안 질 것 같습니다.”
“아마?”
삐딱해진 토끼 가면의 목소리에 노인은 다소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아니, 안 생깁니다.”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팔뚝인데, 상처 조금 생기면 뭐 어떻다고. 남도하가 괜찮다 한마디 하려 할 때 지직거리는 기계음이 말을 이었다.
“바지도 벗어요.”
“아니, 거긴 제가 알아서….”
“벗겨 줘요?”
“하아… 잠깐만 기다려요.”
사실 심하기로는 다리 쪽이 조금 더했다. 아직 남도하 저도 상처를 보지는 못했지만, 통증과 피가 쏟아지던 것만 봐서는 바지 안쪽 상처를 먼저 치료해야 할 것 같았기에 남자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남도하는 옷장에 걸린 가운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상체를 훤히 내놓은 상황에 바지까지 벗어 반라의 상태로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여기 올려요.”
남자는 제 허벅지를 툭툭 두드렸다. 남도하는 반항하기를 포기하고 그의 허벅지 위에 제 다리를 올려놓았다.
“하아, 아까 그 새끼를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확실히 다리 쪽 상처가 조금 더 컸다. 남자가 짙은 짜증을 부릴 정도로. 노인은 팔뚝을 대할 때보다 조금 더 조심스러운 손길로 상처를 살폈다.
“출혈이 많기는 했는데 다행히 여기도 깊지 않습니다. 꿰매지는 않아도 될 것 같고, 며칠 무리하지 말고 푹 쉬세요.”
팔뚝과 허벅지 모두 상처가 벌어지지 않게 처치를 하고, 붕대로 압박을 해 놓은 덕분인지 통증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약간 불편한 감각만 남은 정도였다.
“그만 가 보세요. 수고하셨어요.”
토끼 가면의 말에 막 치료를 끝낸 노인은 혹시 모르니 파상풍 주사는 꼭 맞으라는 말만 남긴 채 꾸벅 인사를 하고 호텔 방을 빠져나갔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이나 남도하의 붕대를 바라보던 토끼 가면이 입을 열었다.
“내일, 병원 가 봐요.”
“그래요.”
“대답만 하지 말고.”
“…….”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다. 정말 귀신같은 남자다.
“상처 조심해서 씻고 와요. 먹을 것 좀 시켜 놓을게요.”
남자의 말에 괜찮다고, 별생각 없다고, 그보다는 이야기나 먼저 하자고 말해 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남자도 비에 홀딱 젖어 찝찝할 것 같았고, 자신도 마찬가지였기에 남도하는 긴 말싸움 대신 욕실로 들어가 몸을 씻었다. 따뜻한 물로 상처를 피해 씻고 나자 기분이 조금은 진정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안전한 공간에, 그 안전을 보장해 줄 사람과 함께하고 있어서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잠깐, 안전한 사람…?
순간 스친 생각이 우스웠다. 아까 골목에서만 하더라도 소름 끼치게 무서운 목소리와 행동으로 괴한을 죽이려 들었던 남자인데. 어떻게 보면 가장 무서운 남자가 이상하게도 남도하에게만큼은 가장 안전한 사람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웃고 있어요?”
욕실에서 나오는 남도하를 보며 남자는 의아함을 표했다. 그사이 다른 욕실에서 씻은 것인지 그도 옷이 바뀌어 있었다. 정장을 벗어 던진 채 남도하처럼 까만색 호텔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얼굴엔 여전히 토끼털 가면이 쓰여 있었는데, 가면도 말린 것인지 아까와 달리 뽀송뽀송한 털로 되돌아와 있었다.
“아니에요, 근데 그걸 다 시켰어요?”
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룸서비스 음식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그냥 자긴 힘들 거 같아서.”
와인 한 병과 함께.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남도하도 궁금한 게 많았고, 남자도 오늘은 그걸 피하지 않을 것 같았다. 당장 돌아갈 생각이었다면 저리 씻고 옷을 갈아입지는 않았을 테니까.
“거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
남도하는 그가 준비한 음식을 먹으며 물었다. 그동안 지켜본 바로, 그는 이 음식을 먹지 않으면 아무런 의문도 해소해 주지 않을 게 자명했다.
“그건, 말하기 싫은데.”
“…….”
순간 머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서울의 집도 아니고, 부산이다. 심지어 남도하도 처음으로 가 본 동네의 허름한 골목길이었다. 아무리 남자라고 하더라도, 쉽게 찾아올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말이다.
반쯤 확신에 찬 질문을 던졌다.
“저한테 뭐 달아 놨죠.”
그러지 않고서야 그런 곳에 남자가 등장할 수는 없었다. 남자에게서는 가벼운 웃음이 묻어난 목소리가 나왔다.
“아니. 그런 방법 말고도 알아낼 방법은 많은데.”
사실일까. 위치 추적이나 뭐… 그런 걸 하는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좀 소름 끼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나?”
“네…?”
한참 남자가 어떻게 그곳에 찾아오게 된 것일까 고민하던 사이, 남자는 주제를 틀었다. 깊이 파고들지 말라는 태도가 명백했다. 이번에도 그는 비밀을 털어놓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내가 남도하 씨를 구해 줬다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아… 그건 뭐, 고마워요.”
정말, 위험한 순간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등덜미가 서늘해지는 것 같은 경험이었다. 호텔 자체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도 그렇고, 칼을 들고 위협하던 상황도 그렇다. 정말 1분이라도 남자가 늦게 등장했다면, 남도하는 그 허름한 골목, 억수 같이 쏟아지는 장대비 사이에서 싸늘한 시체가 되어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근데 왜, 경찰엔 신고 안 해요…?”
“경찰보다 더 좋은 수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래도… 여태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그 남자. 생각보다 끈질겨요.”
지겹게 따라붙던 남자였다. 드라마 살인자의 밤을 하며 유일하게 생겨 버린 골칫덩어리가 그 놈이었다.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괴롭게 하던 상대였다. 죽은 쥐와 손가락을 보내고, 집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이유도 모르게 도윤범에게 강한 집착을 보이며, 남도하에게 적대감을 내비쳤다. 기회만 된다면 또다시 남도하를 죽이려 들 거라는 합리적인 의심이 드는 상대였다. 그런 그를 너무 쉽게 놓아주고 온 것도 같아 뭔가 화근을 남긴 것만 같았다.
“걱정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다시는 만날 일도 없게 할게요.”
“대체… 뭐 하는 사람이에요, 그쪽?”
이번에도, 남자의 말이 너무 순순히 믿어졌다. 허무맹랑한 헛소리라고 치부하는 게 합리적임에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남자라면 정말 그럴 것 같았다. 어쩌면 그의 압도적인 무력을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왠지 그의 말대로 다시는 괴한을 마주할 일이 없을 것 같다는 믿음이 피어났다. 그 때문인지 상대의 직업이 상당히 궁금해졌다.
“돈도 많고, 남 뒷조사도 잘하고, 또 싸움도 잘하는데….”
“왜, 그래서 반했어요?”
“바! 반하기는 무슨….”
태연히 물어 오는 기계음에 먹던 음식이 튀어나올 뻔했다. 포크도 내려놓고 와인을 물처럼 비워 버렸다. 뭔가, 가면 뒤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일부러 이리 장난을 걸어오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의 질 낮은 농담 덕분에 아까의 일이 조금 더 희미해졌다.
“그렇게 자꾸 장난치는 습관, 안 좋은 거 알죠?”
몸 안쪽에 알코올이 들어간 탓인지, 가슴팍도 빠르게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급하게 마신 술 때문인지, 뭔가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기분도 들었고, 가슴께에서부터 열감이 피어나는 것도 같았다.
“그래서, 싫어요?”
한마디도 지지 않고 받아치는 남자가 좀… 얄밉다. 싫지는 않았지만, 곧이곧대로 대답해 주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남도하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하아… 됐어요. 잠이나 잘래요.”
남도하는 와인을 한잔 더 가득 따라 마시고, 먼저 침대에 몸을 눕혔다.
“그래요, 좀 쉬어요.”
그런데 당연히 따라오리라 생각했던 남자는 방의 조명만 어둑하게 조절할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쪽은 안 자요?”
“…침대 하나뿐인데.”
“넓어요, 침대.”
알아들었을까, 무슨 말을 하는지. 남자는 한참이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길지 않은 침묵 사이 남도하는 입이 바싹 말라가는 기분이었다. 조금 더 직접적인, 적극적인 표현을 해야 하는 것인가 고민하는 사이, 방 안이 완전히 어둠에 휩싸였다. 남자가 조명을 모두 꺼 버렸다. 그러곤 느릿하게 걸음을 옮겨 침대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흔들, 침대가 가볍게 꿀렁이며 침구 쓸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틀림없이 침대에 올라온 것 같기는 한데, 근처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
“네.”
대답하는 목소리도 상당히 멀리서 들려왔다. 마치, 방 끝에서 답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남도하는 팔을 뻗어 옆을 더듬어 보았는데, 역시나 손가락 끝까지 거리는 게 없었다.
“…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어요?”
여태 남도하의 방에 찾아오던 그는, 언제나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곤 했다. 편히 잠들 수 있도록 어깨를 내어 주고, 허벅지를 빌려줬다. 때론 이상한 협박으로 스킨십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던 남자가, 마치 내외를 하듯 침대 끄트머리에 몸을 대고 거리를 벌렸다.
“오늘은… 남도하 씨 편히 자라고 어쩔 수 없이 있는 겁니다.”
묻지도 않은 말까지 하면서 자신이 머무는 이유를 말했다. 그 모습이 뭔가, 우스웠다.
“그런 일도 있어서 놀라기도 했을 테니까, 뭐….”
답지 않게 우물쭈물하는 것도 같고, 변명 같기도 하고.
“어쩌죠.”
조금 미안한 말이었지만, 사실 남도하는 지금 그다지 두려운 기분은 아니었다. 일련의 사건이 벌어진 후이긴 했지만, 이 남자의 등장과 함께 몰려오던 공포는 진작에 털어 낸 후였다. 스스로도 멘탈이 이리 강했었나 싶을 정도로,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기묘한 안정감을 주는 남자 덕분이었다. 그와 함께할 때면 항상 이랬던 것도 같다. 두려운 건 오직 이 남자일 뿐, 다른 것들은 전혀 겁이 나지도, 생각나지도 않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난 아직 조금 무서운데.”
그래서 그런지 지금, 조용하고 어두운 방 안, 적당히 따뜻한 공기가 흐르고 조금 전 마신 와인 때문인지 약간의 열감과 몽롱한 정신 사이로 다른 감각이 빠르게 차올랐다. 이리 뻔뻔하게 거짓말까지 뱉어내야 할 정도로 주체하기 힘든 감정이 무섭게 일었다.
침대가 넓어도 너무 넓었다. 남도하는 빠르게 몸을 옮겨 남자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그대로 그의 위에 몸을 포개었다. 힘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체격으로는 남도하보다 다소 작은 남자는 남도하의 아래에 갇히듯 들어왔다.
“뭐 하는… 거죠.”
이런 행동을 하는 남도하라고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다. 혹시라도 상대가 남도하 저와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면, 이딴 짓을 한 대가는 상상 이상으로 참혹하게 치러야 할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아마, 그러지 않을 것 같았다. 기계음으로도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당황한 듯한 목소리로 말하면서도 이리 얌전히 제 밑에 깔려 있는 걸 보면.
“무섭다니까요.”
“장난하지 말고요….”
지금만큼은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최근 머릿속을 시끄럽게 뛰놀던 어떤 얼굴마저도 새하얗게 지워져 버렸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안 갚은 빚이 있는 거 같아요.”
“빚… 이요?”
“저번에 제 동생 집 고쳐 줬던 거, 지금 갚을래요. 그쪽이 갚으라면서요.”
“그건…!”
남자의 다급한 목소리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남도하의 손이, 작게 벌어진 남자의 가운 사이로 파고든 탓이다. 가슴팍을 쓸다가 점점 아래로 내려가 허리를 당겨 안았다.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남자의 피부가 상상 이상으로 부드러웠다. 조금 더 강하게 움켜쥐고 싶은 충동이 몰려들 정도였다.
“읏….”
그래서 그대로 남자의 목으로 입술을 처박았다.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 있겠지만, 입술에 닿는 목의 연한 살 역시 있는 줄도 몰랐던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흔한 바디워시 향일 텐데도 그에게서 풍겨 오는 냄새도 흥분을 부채질했다. 품 안에 갇힌 남자는 굳은 듯 움직임이 없었다. 그걸로 남도하는 상대도 긍정을 표했다 생각했다. 원치 않았다면, 아까 그 괴한처럼 남도하의 팔목은 그대로 뒤틀려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얌전히 있을 거죠.”
목에 입술을 대고 빨고 핥아 대던 입술을 떼어 냈다. 잠깐의 장난으로 남도하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차오르는 흥분이 목소리에 묻어난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확정적으로 묻는 말에 남자는 무언으로 긍정을 표했다. 남도하는 그의 가운을 더 넓게 벌리고, 탄탄하고 부드러운 허리춤을 쓸며 목에 얼굴을 다시 박았다. 그러곤 느릿하게 그의 가면을 들춰 올리는 동시에 입술로 선을 그리듯 남자의 목선을 타고 올라갔다.
“하.”
목젖 근처에 입을 맞출 때, 남자의 목젖이 크게 출렁이며 침이 넘어갔다. 어울리지 않게 긴장에 젖어 버린 게 읽혀 그런지, 남도하는 그 모습이 꽤 귀엽게 느껴졌다. 목젖에 입술을 대고 혀를 굴리며 간질거리게 입을 맞췄다.
일부러 느릿하게 움직이며 턱으로, 뺨으로 입을 맞췄다. 쪽, 쪽- 하는 물기 젖은 입맞춤 소리만이 방 안의 유일한 소음이었다. 아니, 맞닿은 가슴에서 퍼지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거친 심장 소리도 함께였다.
“숨 쉬어요.”
가면을 절반쯤 들어 올린 채, 가까운 거리에서 입을 열었다. 남자는 착한 아이처럼 남도하의 말에 입을 벌렸다. 그사이 숨도 참고 있었던 것인지, 뜨거운 숨결이 남도하의 입술에 닿았다. 마치 그게 기폭제가 된 것처럼, 남도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입술을 맞댔다. 숨을 쉬라는 사람의 행동치고는 다소 급해 보였다.
“흡….”
예상하지 못한 것인지, 긴장 때문인지 다시 다물어지려는 남자의 입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치열을 훑고, 작은 틈을 벌리고 안으로 들어가 좁은 점막을 핥아 나갔다. 혀끝으로 입천장과 혓바닥을 느릿하게 훑고 지나가길 반복하자 남자의 입이 조금 더 넓게 벌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남도하는 더욱더 입술을 가깝게 붙였다. 고개를 틀어 틈을 없애며 두 사람의 입술이 완전히 맞물리도록. 더 깊은 곳으로, 더 뜨거운 곳으로 혀를 찔러넣었다. 같은 와인을 마셨을 텐데도 남자의 안에서 느껴지는 향이 더욱 달고, 자극적이었다.
축축하게 젖어 가는 입술은 더 없이 달라붙었음에도 남도하는 몰려오는 갈증에 그의 안쪽을 핥아 나가는 혀의 움직임이 점점 더 바빠졌다. 목젖까지 찔러 넣을 것처럼 혀를 밀어 넣고, 상대의 말캉거리는 혓바닥에 비벼 대길 반복했다. 고개를 틀어 대며 매끈한 아랫입술을 빨아 당겨 혀로 훑었다.
“으….”
남도하는 저도 모르게 남자의 뒷덜미를 감싸 안고, 허리춤을 쓸어 대던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올라타 있던 몸을 살짝 틀어 그의 몸에서 내려와, 벌어진 가운 사이 그의 아랫배를 손으로 쓸었다. 이번에도 그는 예상하지 못한 것인지 남도하의 혀를 입술로 약간 강하게 물었다.
물론, 이 역시 남도하에게는 자극이라는 걸 깨닫지는 못한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좁은 입 안이 더욱더 촘촘하게 줄어들며 점막이 사방에서 혀를 자극하는 감각이 남은 이성을 끊어버리는 것 같았다.
긴장 때문인지 힘을 잔뜩 준 남자의 아랫배엔 근육이 딱딱하게 잡혔다. 손을 올려 복근을 만져도 마찬가지. 가슴팍까지 타고 올라올 때까지도 그는 미동이 없었다. 그러다 남도하의 손가락이 가슴의 툭 튀어나온 부분에 닿으려 할 때였다.
남자의 손이 남도하의 손목을 다급히 움켜쥐었다. 한참이나 맞닿아있던 입술을 그제야 떼어 냈다. 남도하의 심장은 터질 것처럼 요동쳤고, 튀어나오는 숨은 거칠기만 했다. 손가락 하나 정도 떨어진 아래서 쏟아지는 숨도 마찬가지였다. 달아오른 숨을 코로 내쉬는 소리가 정돈되지 못해 커다랗고 짤막했다. 가슴에 닿은 손바닥을 타고 그가 얼마나 긴장, 혹은 놀랐는지 알 수 있었다. 심장이 가슴팍을 뚫고 나올 것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쿵, 쿵, 쿵. 그 울림은 남도하의 가슴에서도 같이 터지고 있었다.
“그만, 할까요?”
질문이었지만, 사실 남도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얼굴을 내려 남자의 목을 핥으며 밑으로 향했다. 남도하의 입술이 연한 살에 닿을 때마다 움찔거리는 움직임이 읽혔지만, 거절을 표하진 않았다. 아까보다 더욱 자극적인 소리로 쪽쪽- 입을 맞추는 소리를 내며 쇄골, 가슴, 그리고 유두에 닿을 때까지도 그저 뻣뻣하게 굳어있을 뿐이었다. 이를 악물었는지 코로 튀어나오는 숨소리만 조금 더 거칠어졌다.
긍정을 읽은 남도하는 그대로 그의 가슴 사이, 유두를 입 안으로 삼켜 버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손목을 쥔 남자를 가벼이 털어낸 채, 그의 브리프로 손을 가져갔다.
또다시 움찔하는 게 느껴졌지만, 모르는 척했다. 입술 안쪽에 들어온 유두를 조금 힘주어 물며, 그대로 손끝에 잡힌 그의 브리프를 끌어 내렸다.
가슴팍에 입술을 댄 채 눈꺼풀을 들어도, 내려도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었다. 호텔 방 안쪽의 조명은 일절 없었고, 바깥에서 흘러들어오는 빛도 커튼에 가려져 한 줌 없었다. 그저 손끝에, 몸에 닿는 온기로 상대를 느껴야 했다.
그렇지만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었다. 남도하는 내심 놀랐다. 어둠 안에서, 자신을 숨기자 이렇게 대범해질 수 있다는 부분이 신기했다. 토끼 가면의 다른 용도가 일부 짐작되기도 했다.
“싫으면 지금 말해요.”
그리고 지금, 남자에게 스스럼없이 비겁한 소리까지 했다. 남도하답지 않게, 답을 정해 놓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가면을 들춰 놓아 단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는 사람에게, 대답을 하라 했다. 당연히 상대는 아무런 소리도 흘리지 않았다. 그저 가슴팍만 요란스럽게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을 뿐이었다.
“허락, 한 거예요.”
합리화했다. 아니, 나름 확신했다. 이 남자도 싫지는 않을 거라는 걸. 남도하는 딱딱하게 솟은 유두를 가볍게 혀로 핥았다. 또다시 움찔. 쿵쿵거리는 심장 박동이 남도하의 귀에까지 올곧게 꽂혔다.
어설퍼진 상대가 생각보다 싫지 않았다. 항상 무서운 협박을 일삼고, 오늘만 하더라도 말도 안 되는 무력을 내보이던 사내인데, 손톱보다도 작은 유두를 자극받은 것만으로 몸이 굳어 버리는 게 말이다. 마치 어딘가 묶이기라도 한 것처럼 제 아래 얌전히 있는 남자가 생소하면서도 기꺼웠다.
남도하는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솟은 유두 주변을 핥으며 손을 움직였다. 손끝에 걸리는 피부의 촉감이 조금 신경 쓰였다. 유달리 탄탄하고 매끄러운 듯한 사내의 몸에 까슬까슬하고 거친 자신의 손이 닿는다는 게. 부드러운 살에 상처를 내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감각이 마치 여물지 않은 피부처럼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허리춤과 아랫배를 쓸어내리던 손길은 남자의 허벅지 사이로 파고들었다.
“하아.”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한숨 소리에 하마터면 분위기에 맞지 않게 웃음을 흘릴 뻔했다. 남자는 어느새 가면을 내려쓴 것인지, 옅은 기계음이 섞인 낮은 신음 소리가 조그맣게 튀어나왔다.
“소리 안 참아도 되는데.”
어둠에 싸여 제대로 보이지도 않지만, 남도하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의 허벅지를 벌렸다. 그리고 그 사이 위치하리라 예상한 성기를 움켜쥐었다. 평범하다 할 법한 크기였지만, 타인의 것을 직접 잡아본 것은 처음이라 그런지, 손에 들어오는 성기가 낯설었다. 다른 피부보다 유달리 부드러운 것 같고, 딱딱하고 또, 뜨거웠다. 그런데 그보다도….
“설마, 벌써 쌌어요…?”
남자의 성기는 이미 어떤 액체로 잔뜩 젖어 있었다. 마치 사정한 것처럼 귀두부터 기둥까지 질척이는 액체로 덮여 남도하가 손을 가볍게 움직일 때마다 찌걱찌걱- 물기 젖은 소리가 빚어졌다.
“예민하구나….”
몇 번 훑지도 않았는데 그사이 남자의 성기는 더욱더 부풀어 오르며 딱딱해지고 있었다. 뭔가 신기한 장난감을 발견한 것처럼 그의 매끈한 귀두를 손바닥으로 감싸 돌리자 더 많은 쿠퍼액이 흘러나오며 남도하의 손을 적셨다.
“하,”
짧은 신음성과 함께 남자가 남도하의 팔목을 낚아챘다. 그러곤 반쯤 옆으로 누워 있던 남도하의 어깨를 밀치며 그 위로 올라탔다. 갑작스럽게 돌변한 태도에 잠시 넋이 나간 남도하는 멍하니 어둠 사이 제 위에 앉아 있을 남자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두 손에 들어오는 허리는 탄탄했지만, 확실히 선이 두껍지 않았다.
“왜요?”
“남도하 씨가 이렇게 적극적일 줄은 몰랐네요.”
그러게. 그건 남도하 스스로 제일 놀란 부분이었다. 잠시 상대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에게 가면이 있던 것처럼, 어둠이 내려앉아 자신의 표정을 가려 준다는 것만으로도 여태 있는 줄도 몰랐던 자신감이 솟았다. 마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어떤 짓을 하더라도 이 어둠이 제 정체를 숨겨 줄 것만 같았다.
“그러게요.”
그리고 지금, 나체의 남자가 그리 두렵지 않았다. 일종의 확신이었다. 그는, 남도하 제가 어떤 짓을 저지르더라도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 그래서 허리춤을 쥐던 손을 움직였다. 벌어진 다리 사이, 여전히 하늘로 솟은 남자의 성기를 가볍게 쥐었다.
“후회, 윽… 하지 말아요.”
“안 해요, 전.”
남도하의 말이 신호가 되었다. 토끼 가면은 그대로 남도하의 가운을 벌렸다. 그러면서 슬며시 제 성기에 닿아 있던 남도하의 손을 떼어 냈다.
“오늘은 그냥 남도하 씨 진정시켜 주려고 한 건데….”
그러곤 남도하의 가슴팍에 두 손을 얹었다. 그제야 아까 남자가 돌덩이처럼 굳어 버렸던 이유를 알았다. 제가 그의 몸을 쓸어 댈 때와는 또 다른 자극이었다. 부드러운 손이 맨살을 훑는 것만으로도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갔다.
“남도하 씨도… 얌전히 있어요.”
대답을 할 정신도 없었다. 아니, 그럴 틈도 주지 않고 남자는 남도하의 브리프를 끌어내렸다. 다리 밖으로 속옷이 완전 벗겨져 나가는 걸 느끼니 뭔지 모를 민망함이 자라나는 기분이었다. 더군다나 자신의 한쪽 허벅지에 올라타 맞닿은 살의 촉감 역시나 상상 이상으로 자극적이었다.
춥- 하는 작은 입맞춤 소리가 들리며, 남자의 입술이 가슴팍에 닿았다. 그러곤 혀를 굴리듯 움직이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혀를 굴리고, 입술을 모아 빨고. 복부, 배, 아랫배를 지나서 그대로 남도하의 귀두에 뜨거운 입김이 닿았다. 반사적으로 성기에 힘이 들어가 크게 튕겼다.
“자, 잠깐만….”
채 말을 끝맺기도 전, 남도하의 성기가 뜨거운 곳에 삼켜졌다. 놀란 마음에 남자의 머리통을 움켜쥐려 했지만 투박한 손길이 남도하의 손을 가볍게 쳐 냈다.
“아….”
그의 입 안은, 키스를 할 때 느꼈던 것보다 더 좁고 뜨겁게 느껴졌다. 매끈한 점막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조여들며 남도하의 성기를 자극했다. 그 와중에 남자의 혀가 둥글게 원을 그리며 귀두를 핥았다. 생소한 자극에 남도하의 성기에서는 투명한 쿠퍼액이 흘렀다.
마치 그걸 기다렸다는 것처럼 조금 더 강한 압력으로 빨아들이며, 성기의 기둥 부분까지 빠르게 남자의 입 안으로 들어갔다. ‘컥’ 하는 소리가 따라붙었지만, 멈추진 않았다. 입 안쪽보다 더 깊은 곳, 어쩌면 귀두가 목구멍까지 넘어가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들어가자 성기로 쏠리는 자극이 한층 더 짙어졌다.
“후우… 미안해요.”
그리고 그 충동을 이기지 못한 남도하가 허리를 튕겼다. 남자의 뒤통수를 가볍게 누른 채 느릿하게 허릴 들어 성기를 더 깊게 밀어 넣었다. 목구멍이 조여들었다 풀어지길 반복하며 안쪽의 성기를 자극했다.
찌걱, 찌걱. 자극적으로 들려오는 소리마저 허리짓을 멈출 수 없게 만들었다. 아직 전부 집어넣지 못한 성기까지 마저 넣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성기의 절반가량만 안쪽에 넣었다 빼길 반복했다. 목구멍의 연한 점막에 귀두가 비벼지는 촉감은 낯선 것이었지만, 딱 그만큼 자극적이기도 했다.
“흡…!”
제 허벅지를 툭툭 쳐 대는 손길에야 정신을 차리고 뒤통수를 누르던 손을 떼어 냈다.
“이리 와요.”
그러곤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앉으며, 조용히 숨을 내쉬던 남자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순순히 딸려온 그는 남도하의 허벅지 위에 올라타 앉았다.
“미안해요… 하아, 좀, 좋아서….”
처음이라 주체할 수 없었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아직 가면을 제대로 쓰지 못한 것인지 남자는 별다른 답이 없었다. 남도하는 그의 등을 감싸며 당겨 안았다. 품 안에 가득 들어오는 사내가 참 낯설었다. 여전히 모든 게 처음이었으니까. 맨살로 맞닿는 누군가의 체온도 그랬지만, 당연히 싫지 않았다. 연하게 풍기는 바디워시 향도 체향과 섞여 자극적이기만 했다. 얼굴을 파묻곤 쇄골 위 연한 살에 입을 맞췄다.
차올랐던 흥분 때문인지, 이번엔 그 동작이 부드럽지 않았다. 다소 거칠게 빨아 당겨 빨고, 이를 세워 씹었다. 입술을 모아 혀로 훑어 대며 그의 등을 더욱 바짝 당겨 안았다. 남자도 남도하의 목에 팔을 둘러 감았다.
“몸이 예뻐요, 보기보다.”
어깨에, 목덜미에, 턱에, 뺨에 입을 맞추며 물었다. 물론 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고, 제 소감을 말한 것뿐이었다. 거칠고 폭력적인 남자의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손에 닿는, 입술에 닿는 모든 것이 예뻤다.
남도하는 남자의 뒷덜미를 감싸 안은 채 꽉 다물어진 입술에 입을 맞췄다. 신음을 잔뜩 참아내고 있었던 것인지, 그의 입술을 혀로 한참이나 핥아 댄 후에야 작은 틈이 벌어졌다. 그 사이로 살덩어리를 밀어 넣으며, 다른 손을 서로의 몸이 겹쳐진 사이로 집어넣었다.
“읍…!”
더없이 좁혀진 두 사람의 간격 때문에 아까부터 맞닿아 있던 두 개의 성기를 한 손으로 움켜잡았다. 손을 가득 채우는 성기는 이미 질척이는 액체로 잔뜩 젖어 있었다. 남도하의 것은 남자의 타액으로, 그의 것은 미끈거리는 쿠퍼액으로.
그도 낯선 자극인 것은 매한가지인 듯 엉덩이를 뒤로 물리려 했지만, 남도하는 성기를 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며 위아래로 흔들기 시작했다. 부드럽고 딱딱한 성기가 비벼지는 촉감에 맞닿은 입 안쪽을 훑던 혀가 더 바빠졌다. 남도하의 힘에 밀려나려는 상대의 뒷덜미를 감싸고, 딱딱하게 세운 혀끝으로 점막을 찌르며 그의 혀에 가져다 비벼 댔다.
맞물린 입술 틈으로 흘러내리는 타액을 미처 닦아 낼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다소 소극적이었던 남자도 흥분에 삼켜진 것처럼 혀를 남도하의 입으로 넘겨 안쪽을 간지럽혔다. 입으로 입술을 빨아 당겨 애무하듯 빨아 대고, 혀를 비벼 자극했다. 그럴수록 성기를 쥔 손에 힘이 더해갔다. 찌걱찌걱- 성기 흔들어 대는 소리가 점점 더 바빠졌다.
남도하보다 상대가 조금 더 빠른 것인지, 그는 목덜미를 더 강하게 끌어안으며, 남도하의 혀를 입술로 강하게 물었다. 막힌 입술 사이로 달뜬 신음이 짧게 들려오며 남도하의 손에 뜨거운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익숙한 액체의 촉감을 이용해 더욱더 빠르게 두 개의 성기를 흔들었다. 머지않아 남도하의 것에서도 기다란 정액이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던 상황 때문인지 두 사람의 배와 가슴팍까지 끈적이는 액체로 잔뜩 젖어 버릴 정도였다.
“하아, 하….”
그제야 남도하는 입술을 떼어 냈다. 부드러운 손짓으로 남자의 등을 쓸어 주었다. 그도 지친 것처럼 남도하의 어깨를 끌어안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저기요….”
그러다 남도하가 입을 열었다.
“한 번만 더 할까요…?”
상대의 대답을 바라고 물은 건 아니었지만, 몸을 움찔 떤 그는 갑자기 침대 밖으로 도망치듯 나가 버렸다. 그러곤 욕실로 곧장 달려 들어갔다. 이상하게 풀어지지 않는 흥분 탓에 한 번 꺼내 본 말이었는데, 아무래도 실수인가 싶어 민망함이 커졌다.
* * *
“마셔요.”
욕실 안쪽에서는 꽤 오랫동안 물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리다 지친 남도하는 조금 전의 흔적을 스스로 정리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 서로의 젖은 옷을 옷걸이에 바르게 걸어 두었다. 한참 만에 나온 그는 얼마나 뜨거운 물을 맞은 것인지 새하얗던 목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가면은… 대체 언제까지 쓸 거예요…?”
아까와는 다르게 속살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운마저 단단하게 여민 채 토끼 가면을 또 뒤집어쓰고 있었다. 보는 사람이 다 답답해 보일 정도였다.
“글쎄. 오늘 같아서는 평생 안 벗고 싶은데요.”
남도하가 건네준 물을 마시지도 않고 손에 들고 있는 건 당연했다. 오늘도 가면을 벗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 같아 강요하지 않고 물이라도 마시라 자리를 비켜 주기로 했다. 욕실에서 뜨거운 물을 맞고 서 있자니 남도하는 조금 전 토끼 가면이 늦게 나온 이유를 알아챌 수 있었다.
“하아… 미쳤지….”
뒤늦은 후회와 현타가 몰려왔다. 호텔이라는 장소와, 어둑한 조명. 거기에 더해 아까 있었던 일까지 겹쳐져 감정적으로 지나치게 흔들리던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참 남도하 저 답지 않은 짓을 저질러 버리고 말았다.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고 있자니 실수를 한 것 같다는 생각이 쉽사리 떨어져 나가질 않았다. 정체도 모르는 남자와 그런 짓을 저질러 버렸다니.
“붕대 갈아야겠죠.”
“아… 네.”
대체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었던 것인지, 남도하는 제 팔과 다리에 상처가 있었다는 것마저 잊고 있었다. 지난밤 노인이 감아 준 붕대마저 다 젖어 버려 그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이런 몸으로 잘도 했네요.”
어설픈 동작으로 붕대를 감으며 뱉는 말에 남도하는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아까 어둠 안에서 적극적으로 행동하던 남도하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저기… 기분 나빴어요, 혹시?”
“남도하 씨는요?”
내심 답을 정해 놓고 물어본 말이었는데, 질문이 돌아왔다. 그의 물음에야 남도하는 자신의 감정을 돌이켜 생각해야 했다. 씻는 사이 제 행동을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만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그사이 남자는 붕대를 모두 갈아 주고, 남도하를 직시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남도하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와인 잔을 채워 빠르게 마셨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자신의 감정을 떠올릴 필요가 없었다. 그 행위 자체는 후회가 몰려오는 민망한 일이었지만, 싫지 않았으니까.
“글쎄요. 모르겠는데요.”
“뭐, 뭐요…?”
남도하의 대답에 상대편에선 꽤 당황에 젖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 모습이 아까 침대 위에서의 남자와 겹쳐 보이자 남도하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걸렸다.
“지금 그러니까… 별생각이 없다는 말이에요?”
다소 거칠어진 것 같은 남자의 목소리에도 두려움을 느낄 수는 없었다.
“몰라요. 잠이나 자요, 피곤해요.”
제대로 답을 하라는 남자의 말을 무시한 채,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불만을 표하면서도 그는 순순히 남도하를 따라 침대에 몸을 눕혔다. 불을 끄자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저기요.”
“왜요.”
“잠이 안 와요.”
“거짓말 같은데. 지금 남도하 씨 목소리에 졸음이 잔뜩 묻어나요.”
맞다. 이미 눈꺼풀이 내려앉아 잠이 들락 말락 했다. 남도하의 말에 숨은 뜻을 귀신같이 알아챈 남자는 남도하에게 가깝게 몸을 끌어왔다. 그러곤 남도하의 목 아래로 팔을 찔러 넣었다.
“뭐, 뭐해요?”
“재워 달라고 투정 부린 거 아니에요?”
“아니…!”
“습, 가만히 있어요. 나 오늘 화났으니까.”
남자는 남도하의 등을 감싸며, 제 쪽으로 가깝게 당겨 안았다. 이상한 자세에 그를 밀어내려 몸부림 쳐 보았지만, 당연히 힘으로 남자를 이길 수는 없었다. 깔끔하게 반항을 포기하고 그의 허리춤에 손을 감았다.
달라붙어 있는 탓에 따뜻하다 못해 더운 열기가 차올라 숨이 갑갑해졌다. 그럼에도 남도하도, 남자도 서로를 떼어 내지는 않았다. 송글송글 땀이 차오르는 온기마저도, 마치 다른 감정만 같았다.
“고마워요, 오늘.”
“미안해요. 늦게 와서.”
서로의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진심을 전했다.
“잘 자요.”
그리고 남도하는, 옅어지는 의식 사이로 하나의 생각을 끝냈다. 요즘 그의 최대 고민거리라고 할 수 있던 어떠한 감정 하나를 정확히 알아챌 수 있었다. 정답에 한 걸음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만약, 제 주변에 사랑이라는 감정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이 남자일 거라고. 위기의 순간마다 등장해 저를 도와주고, 지켜 주는 남자. 밤에 몰래 방에 숨어들어 오는 것마저 미워할 수 없는 남자. 가끔 강압적으로 굴기는 하지만, 결론적으로 모두가 남도하 저를 위하는 남자.
정체를 알 수 없음에도 입맞춤도, 그 이상도 싫지 않은 사람. 정체가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남자.
오늘 그의 등장으로부터 시작해, 마음이 확고해지는 남도하였다.
* * *
“깼어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숙면을 취한 남도하가 부스스 침대에서 일어나자 이미 평소처럼 오버핏의 새까만 후드 점퍼를 뒤집어쓰고 있는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옷 입어요. 숙소에서 가져왔어요.”
한쪽엔 남도하가 부산 출장에 싸 온 가방까지 도착해 있었다.
“몇 시예요…?”
“일곱 시요.”
이른 아침이었다. 새벽까지 여러 가지 사건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더 그랬다. 그런데 남자는 어느 틈에 남도하 제 숙소까지 다녀오고, 옷까지 갈아입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정신이 안 드네요.”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을 감은 채 침대에 앉아 있는 남도하를 향해 남자가 다가왔다. 그러곤 침대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그런 남도하의 옆머리를 헤집어 댔다. 그 감각이 썩 싫지 않았던 것도 잠깐. 순간 남도하는 깜짝 놀라 눈을 떠올렸다.
“왜 그래요?”
“…아니, 아니에요….”
또다시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눈을 떠 올리자마자 그 감각은 사라졌지만, 순간 들었던 기분이 아찔했다. 무언가, 낯설지 않은 감각. 설명할 길 없는 감정을 갈무리한 채 그가 가져온 캐리어에서 옷을 꺼내 입었다.
“먼저 가 볼게요. 휴대폰은 테이블 위에 올려놨고, 남은 촬영은 취소됐으니까 그렇게 알아요.”
여전히 잠이 덜 깬 탓인지 조금 정신이 멍한 남도하와 다르게 남자는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아침, 안 먹어요…?”
“…이러고요?”
“아… 그렇죠, 참.”
“곧 식사가 올라올 거예요. 먹고 천천히 가요.”
떠날 채비를 하는 그를 보며 말을 꺼내 보았는데, 제가 생각해도 말 같지 않은 소리였다. 가면을 쓰고 식사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호텔 방을 조용히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보던 남도하는 털썩 소파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하아….”
어찌 된 것인지 저 남자와 함께할 때면 항상 비현실적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혼자 남게 될 때면 그와 있던 기억은 꼭 꿈처럼 느껴지고는 했다. 숙소에서 잃어버렸던 휴대폰은 액정이 깨져 있었다. 휴대폰을 잡아들던 중, 소파 아래 떨어져 있던 네이비 톤의 넥타이가 눈에 띄었다.
지난밤, 남자가 차고 있던 타이였다. 빗속에서 재킷과 함께 제게 맡겼던 것. 그 낯선 복장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며 남도하는 타이를 들고 문 앞까지 반쯤 달려갔다. 문고리를 잡은 순간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너무 오래되어 잊고 있었던 남자의 경고였다.
그가 나가고 열까지 세고 밖으로 나와야 한다는 말. 지났을까? 모르겠다. 이제는 아무 상관없을지 모른다 혼자 판단하고 문을 열었다. 하지만 기다란 복도는 적막만 감돌았다. 인기척이 읽히지 않았다. 넥타이를 바라보던 남도하는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이젠 그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지 않았다.
‘띠리링’ 하는 작은 벨소리가 들렸다. 수화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휴대폰을 귀에서 떼자 그 벨소리는 조금 더 선명하게 들렸다. 여전히 들릴락 말락 한 소리였지만, 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소리는 바로 옆방에서 들려오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벨 소리는,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었다. 빠르게 휴대폰의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러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듯, 열린 방 안으로 몸을 숨겼다. 그제야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벨 소리는….
* * *
“형 어떻게 된 거예요? 갑자기 왜 촬영이 취소돼요?”
“…글쎄, 나도 잘….”
KTX를 타고 서울로 올라간다는 말에 도윤범이 마중을 나왔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도윤범은 지난밤 있었던 일을 캐물었다. 남도하를 홀로 두고 온 이원호를 향한 분노가 대다수를 차지했다. 하지만 그 말에 남도하는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다.
“피곤해요? 얼굴이 안 좋은데….”
룸미러로 도윤범과 시선이 마주쳤다. 남도하는 짧은 순간 닿는 그 눈빛을 해부하듯 자세히 훑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오는 사이, 머리가 곤죽이 된 것처럼 엉망이었다. 지난밤 있었던 사고 탓은 아니었다. 그 후 토끼 가면과 있었던 일도 아니다.
“윤범아.”
옆방에서 들리던 벨 소리가 문제였다. 기본으로 제공하는 흔하디흔한 벨 소리 중 하나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남도하 주변에서 그 음으로 벨 소리를 해 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도윤범.
“…네?”
“너 어젯밤에 어디 있었어?”
언젠가 남도하는 물어본 적도 있었다. 왜 이런 요란스러운 소리로 벨 소리를 해 두었냐고. 보통은 진동으로 해 놓는 것과 달리, 유달리 시끄럽고 음량이 큰 소리가 난 적이 있어서 기억에 남았다. 같은 휴대폰 기종을 쓰는 남도하 제 것과는 다른 벨 소리였다.
그랬기에 호텔 옆방에서 들리는 벨 소리를 듣는 순간, 문득문득 느꼈던 기시감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었다. 머리를 쓰다듬던 토끼 가면의 손길과 품 안에 들어오던 몸의 크기. 빗물에 젖은 뒷모습과 얼굴을 매만지던 손의 감각까지. 어느 순간 느껴지던 짧은 기시감의 정체가 이것이었다. 도윤범과 토끼 가면.
“저 학교에 저녁까지 있다가… 회사 잠깐 갔다 왔는데요?”
“몇 시에?”
“열 시… 인가…? 의상 반납 때문에요.”
취조 같은 물음에도 도윤범은 착실히 답했다. 그의 대답을 들으며 동선을 떠올렸다. 열 시에 회사에 있었다면, 시간상으로 부산까지 오기엔 무리가 있었다.
“아, 회사 나오다가 양우준도 봤어요. 또 화가 잔뜩 나 있던데.”
“…그래? 그러고서 집에 간 거야?”
“네. 집에 가서 잤죠…. 근데 형 혼자 있는 줄 알았으면 제가 갈 걸 그랬네요.”
거짓말일 테다. 어떤 증거도 없었지만, 남도하는 도윤범의 말이 온통 의심스러웠다.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었던 불신이었다.
앞에서 그가 운전을 하는 사이 참 오랜만에 양우준에게 메시지를 보내야 했다. 어제저녁 도윤범을 보았냐는 물음에 양우준에게서는 한참이나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뭐… 큰 기대를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왜 그러는데요, 형?”
심상치 않은 기운을 읽은 것인지 도윤범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남도하는 바로 네가 토끼 가면이냐 물어볼까 했지만, 적어도 일부 확신이 필요했다. 만약 도윤범이 그 토끼 가면이라면… 생각도 하기 싫었다.
어제 그가 회사에 있었는지, 집에 있었는지는 확인할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도윤범이 토끼 가면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또 다른 질문이 이어졌다. 남도하는 어느 정도 눈치를 챘다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적어도 네 입으로 사실을 말하라고.
“너 혹시, 어제 부산에 있지 않았어?”
누가 들어도 화가 들어찬 것이 틀림없는 목소리가 나오자, 직진하던 차가 작게 흔들리며 갓길에 급정거를 했다.
마치, 도윤범의 마음이 흔들린 것처럼.
“부산…이요?”
급하게 차를 세운 도윤범이 뒤를 돌아봤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묻는 말에 남도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어. 부산.”
“그럴 리가 없잖아요, 형. 그랬으면 제가 연락을 했겠죠.”
한참 굳은 것처럼 보이던 도윤범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왜요, 저랑 비슷한 사람이라도 봤어요? 제 얼굴이 그렇게 흔한 얼굴이 아닌데?”
평소와 다름없는 투로 농담까지 붙이는 그였다. 표정만 봐서는 남도하의 오해가 확실해 보였다. 저렇게 태연한 얼굴로 거짓을 말할 수 있는 아이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가슴 안에 자리 잡은 의심 때문인지 그의 말을 오롯이 믿기도 힘들었다. 뭔가 더 확인을 해야 하나 싶던 차에, 손안의 휴대폰이 진동을 울렸다.
[어.]
양우준에게서 온 짤막한 메시지였다. 그 메시지를 보는 순간 남도하는 속이 더 복잡해졌다.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모를 감정이 어지러이 들끓었다.
“집에 가자.”
그리고 그 감정이 섞여 짜증이 되었다. 도윤범이 토끼 괴한이 아니길 바라던 마음에 확신을 한 줌 더해 주는 메시지였음에도, 의심은 완전히 풀어질 수 없었다. 한 번 도윤범이 토끼 가면이라 떠올리자 꽤 많은 이야기의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여전히 저 아이 같은 얼굴과 토끼 가면의 행동을 일치시킬 수는 없었지만.
“오늘은 집에서 푹 쉬면 되겠어요. 촬영도 취소돼서.”
“그래.”
다시 차가 출발하고, 남도하의 생각은 점점 더 엉켜들었다. 틀림없이 토끼 가면의 정체를 더는 알고 싶지 않았다. 아직 가면을 벗지는 않았지만, 머지않아 언젠가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얼굴 따위를 모른다 하더라도 그사이 쌓인 감정으로 충분했으니까.
“좀 쉬어요, 형. 저는 레포트 하나 끝낼 게 있어서요.”
집에 도착해 도윤범은 짐을 풀고서 제 방으로 먼저 들어갔다. 멀어지는 뒷모습이 어젯밤 빗속에서 보았던 토끼 가면의 것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다른 것 같기도 했다. 남도하 제가 힘껏 끌어안았던 그 등이 맞는 것 같기도 했지만… 또 말도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방에 들어와 옷을 갈아입은 남도하는 조용히 집을 빠져나왔다. 조금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 * *
“죄송한데요… 혹시 CCTV 좀 볼 수 있을까요?”
오피스텔 관리실로 향했다. 도윤범의 말만 믿고 넘어갈 상황이 아니었다. 더는… 그럴 수 없었다. 양우준은 어젯밤 도윤범을 봤었다고 했지만, 그쪽도 신용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최소한 거짓말을 할 리 없는 CCTV를 보는 쪽이 좋을 것 같았다.
“이거 그냥 보여 주면 안 되는데….”
“저 여기 살고 있는데요. 다른 거 말고 딱 저희 집 앞부분만 보면 돼요.”
난색을 표하는 관리실 직원이었다. 경찰을 대동해야 한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만 확인할 수 있다는 둥의 말을 늘어놓았다. 이대로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 싶었던 때였다.
“근데… 그 배우… 맞죠? 요즘 드라마에 나오는.”
직원은 호기심이 들어찬 표정으로 남도하의 얼굴을 뜯어봤다. 기회다 싶어 모자를 벗고 얼굴이 더 잘 드러나도록 보여 줬다. 영업용 웃음도 잊지 않았다.
“네, 살인자의 밤이요. 그래서 좀 보고 싶은데요…. 아시잖아요, 저희 집에 좀 일이 몇 번 있었던 거….”
요즘 며칠은 꽤 조용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일같이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나. 오피스텔 보안에 대해 항의를 한 적도 있었기에 관리실 직원도 대충 상황을 알고는 있었다.
“원래는 안 되는데….”
“한 번만 부탁드릴게요.”
웃는 낯이 선해 보였던 덕분인지, 직원은 CCTV 화면을 켜 보여 줬다.
“언제요?”
“어젯밤이요. 한… 열 시쯤부터.”
엘리베이터부터 집 현관문까지가 한 화면에 담겨 있었다. 아무런 변화도 없는 화면을 빨리 감기로 넘겼다.
“잠시만요.”
한참 만에야 엘리베이터에서 한 명이 내렸다. 그러고서 그대로 집으로 들어갔다. 선명한 화질 덕분에 다른 사람으로 오해할 수도 없었다. 옆모습과 뒤통수만 제대로 보였음에도 확실히 도윤범이었다. 시간은 저녁 10시 35분. 그의 말대로 회사에서 바로 집으로 온 것이 틀림없었다.
“다시 나가네요.”
짧은 안도를 채 풀기도 전, 도윤범이 다시 밖으로 나왔다. 방금과 똑같은 복장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때부터 남도하의 심장이 작게 요동쳤다. 입술이 말라 가는 것도 같았다.
“화면 좀 빠르게 돌려 주세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윤범은 다시 집으로 들어섰다. 손목에 편의점 봉투를 건 채로. 그 뒤로도 몇 시간가량을 빨리 감기로 화면을 바라봤지만, 더 이상 집 안팎을 오가는 인적은 없었다. 도윤범도 별다른 외출을 하지 않았다.
“하아… 감사합니다.”
한참 동안 화면을 보여 준 직원에게 인사를 하고 사인까지 한 장 해 주고서 관리실을 나왔다.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던 사실을 직접 확인하자 그제야 내뱉는 숨이 조금 편안해졌다. 도윤범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부분도 흡족했고, 자신이 의심했던 일이 벌어지지 않은 걸 안도했다.
집에 돌아올 때까지도 도윤범은 방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남도하는 조용히 제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몸을 눕혔다. 눈을 감고 생각해 보니 웃음이 흘렀다.
이번에도 망상이었다.
그사이 꽤 많은 사람을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근처에 토끼 가면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이번엔 꽤 그럴듯했다. 시작은 그저 벨 소리 하나였을 뿐이지만, 그 뒤 떠오른 기시감의 정체를 알아채자 도윤범이 토끼 가면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보기 좋게 그 의심은 빗나가 버렸다. 양우준의 말이, CCTV가 그렇다 하지 않나. 여전히 토끼 가면과 도윤범의 비슷한 면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지만, 객관적인 사실만 봤을 때 두 사람은 동일인일 수가 없었다. 토끼 가면이 부산에서 남도하 저를 구해 줄 때, 도윤범은 집에 있었으니까.
더군다나 그 어린놈이, 토끼 가면이 하던 행동들을 했다고 믿기는 어려웠다. 평균 이상의 돈을 쓰는 것도 그렇고, 말도 안 되는 신체 능력으로 사람을 피떡으로 만든 일도 그렇고. 여전히 아이 같은 도윤범이 행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부자연스럽기만 했다.
“하아, 그럼 그렇지….”
남도하는 제 팔뚝 티셔츠 안쪽, 붕대가 감긴 상처를 가볍게 쥐었다. 그리고, 안도했다. 솔직히 말해 토끼 가면의 정체가 누구든 상관없었다. 정말 어디서 살인을 일삼는 범죄자만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유일한 예외가 있었다. 도윤범. 도윤범만큼은 안 됐다. 지난밤 남도하는 하나의 선택을 끝낸 참이었다. 토끼 괴한의 품에서 확신한 마음이 있었다.
“형, 자요?”
도윤범에게 꽤 흔들렸던 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항상 그랬듯, 이 아이는 착했고, 다정했고, 매사 남도하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는 했으니까. 싫어할 구석이 없는 아이였으니까. 어쩌면. 정말 어쩌면 도윤범도 제게 어떤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망상까지 한 적도 있었다.
“아니, 왜?”
“밥 먹을까요? 배고파요.”
하지만 어제, 그 남자와 함께하며 깨달았다. 도윤범에게 향하는 감정의 크기는 토끼 가면을 향하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살을 섞고 난 후의 감상이라서가 아니라, 지금도 그렇다. 그 남자와 도윤범을 천칭 양쪽에 올려놓으면, 저울은 한쪽으로 빠르게 기울어 버릴 것이다. 당연히 토끼 가면의 쪽이 훨씬 더 무겁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 등장하던 그를, 늦은 저녁 강가에서 나누었던 입맞춤을, 비 오는 골목에서 안아주던 온기를, 서로의 숨결을 섞어가며 부딪치던 감정들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그쪽도 남도하 제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데.
“그러자, 나도 배고프다. 레포트는 끝냈어?”
여전히 장난스럽게 웃는 낯의 도윤범을 마주하려면 마음이 일부 불편하기는 하다. 사람의 감정이 그리 한순간 마음먹은 대로 끊고, 또 맺어질 수는 없으니까. 둘이 함께 시작한 감정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남도하는 홀로 정리를 끝낸 참이다.
도윤범이 아니라, 그 남자를 선택했다.
* * *
“저 혼자 와도 되는데요….”
“괜찮아, 어차피 나도 잠깐 볼일 있어서.”
남도하는 도윤범에게 다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 상황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도 힘들었고, 비밀을 만들며 애매하게 둘러대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예 입을 다무는 쪽이 낫다고 판단했다. 어떻게 핑계를 대고 병원에 가야 고민하나 하고 있을 때, 도윤범이 학교에 다녀오겠다고 해 함께 집을 나왔다. 좋은 핑곗거리가 되었다.
“여기… 야?”
“아, 네.”
남도하는 대학을 다녀 본 적도 없었기에 드라마 촬영으로 잠깐 와 본 이후, 처음이었다. 별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음에도 뭔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저 오래 안 걸리는데, 이따가 저녁 먹고 같이 들어갈까요?”
“그래. 나도 잠깐 볼일 보고 이따가 데리러 올게.”
뭐가 그리 좋은 것인지 도윤범의 얼굴에선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그 모습이 귀여워 머리라도 한 번 헝클어 줄까 하다가 참았다.
“근데… 이건 뭐야?”
도윤범은 손목에 까만색 손목 보호대를 차고 있었다.
“아, 오랜만에 컴퓨터 써서 그런지 손목이 아파서요.”
대수롭지 않게 답한 도윤범은 가방을 챙겨 차에서 내렸다. 남도하도 잠시 주차를 해 놓고 따라 내려 멀어지는 도윤범의 모습을 바라봤다. 백팩을 메고 편한 옷차림을 한 그는 누가 보아도 지금 이 풍경과 어우러졌다.
주변을 오가는 또래의 아이들과 이질감 없이 섞여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또래의 아이였으니까. 제가 있어야 하는 공간에 놓고 보니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남도하는 제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도윤범은 제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게 옳다고. 감히 저런 아이에게 불손한 감정을 품었던 것마저 혐오스러울 정도였다. 어쩌면 생각보다 더 쉽게 도윤범을 향한 마음이 정리될 것 같았다.
아직 채 하루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토끼 가면이 생각나는 걸 보면 말이다. 남도하는 다시 차에 올라타 근처 병원으로 향했다. 착실하게 지난 밤 들었던 것처럼 파상풍 주사를 맞고, 환부도 다시 확인했다. 그러곤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병원 다녀왔어요.]
도랑도랑에게.
[잘했어요. 착해요.]
화면을 끄기도 전, 답장이 돌아왔다. 여전히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 같은 우스운 말투에 남도하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옆에 있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가벼운 손짓으로 뺨을 쓸거나 꼬집었을 거다. 어서 다음 만남이 있었으면 싶었다. 그와의 시간이 기다려졌다.
그 메시지를 보낸 상대가 누구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