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 그림자 밟기=)(2권) (2/11)

02. 그림자 밟기=)

“컷! 수고했어, 도하 씨. 이거 뭐 촬영을 늦게 시작해도 워낙 실수가 없어서 원래보다 더 빨리 끝나게 생겼네.”

“수고하셨습니다, 감독님.”

촬영 거부 사태로 가라앉았던 촬영장 분위기를 띄우려는 것인지, 감독은 평소보다 더욱 들뜬 목소리로 남도하의 연기를 칭찬했다. 촬영이 일찍 끝날 거라는 기대감에 오랜 시간 대기해야 했던 스태프들의 태도도 호의적이었다.

“그럼 다들 식사… 아, 저기 오네.”

촬영이 끝나기를 기다린 것인지 공원 안쪽으로 커다란 트럭이 두 대 연이어 들어왔다. 그러곤 스태프를 피해 널찍한 공터에 테이블과 음식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갑자기 들이닥치기는 했지만,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남도하도 한 번 시선을 주곤 도윤범이 건네주는 레몬 물로 갈증을 풀었다. 신인 배우가 아니라면 다들 눈에 익게 봤을 광경이다. 그저 특이한 거라면 유달리 커다란 차량이 두 대나 들어온다는 것 정도.

“수고했어요, 형.”

“어, 너도. 우리도 점심 저기서 먹으면 되겠다.”

밥 차.

출연진 중 팬 층이 두터운 배우에게 온 것일 테다. 요즘 커피차 정도는 흔하지만, 웬만한 배우가 아니라면 밥 차까지 보내 주진 않는다. 숙련된 사람들처럼 빠르게 음식을 준비하는 직원들을 보니 뭔가, 이상했다.

“형… 저 플래카드….”

그래, 그들이 펼쳐 건 커다란 플래카드 말이다. 보통 거기엔 밥 차를 준비한 쪽과, 누구를 위한 것인지가 쓰여 있다. 그랬기에 남도하는 눈에 들어오는 글씨가 이해되지 않았다. 왜 그 플래카드에 제 이름이 쓰여 있는지.

남도하와 도윤범은 홀린 듯 준비 중인 밥 차 주변으로 다가갔다. 눈이 틀리지 않았다. 언제 찍은 사진인지 기억에도 남지 않은 남도하의 사진이 들어간 대형 현수막이 걸리고, 그 앞에 음식이 차려지고 있었다.

“남도하… 팬 카페 도랑도랑…? 선배님 팬클럽 이름이 도랑도랑이에요?”

“네…? 그게….”

“이, 이상하게 귀엽네요….”

옆에서 구경하며 방정맞은 목소리로 말을 건네는 스태프의 말에 답할 수 없었다. 팬 카페가 있는 줄도 몰랐고, 도랑도랑이라는… 이상한 이름도 처음 들어 보니까. 멍한 정신으로 플래카드와 착착 준비되어 가는 테이블을 둘러보고 있을 때, 스태프 한 명이 남도하를 잡아 그 앞에 세웠다.

“이런 거는 바로 인증샷 남겨 줘야 돼요. 그 옆에 기념품 하나 들어 보세요.”

스태프의 말에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걱대는 남도하를 보던 서주언도 나섰다. 팔짱을 끼고 구경하던 그는 남도하의 옆에 다가가 구도와 자세를 잡아 주곤 앵글 밖으로 빠져나왔다. 조금 굳은 듯한 표정이었지만, 그럭저럭 쓸 만했다. 그러곤 다시 남도하의 옆에 선 서주언과도 몇 장의 사진을 남겼다.

“저기… 형, 사진 좀 찍어 주세요.”

“누구? 나?”

“…네.”

남도하는 사진을 찍고 돌아서려는 서주언을 잡아챘다. 그러곤 제 휴대폰을 넘기고, 도윤범을 불렀다. 그가 매니저를 맡은 이후로 좋은 일이 연이어 생긴다. 기념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윤범과 함께 축하하고 싶었다.

“저희 좀 찍어 주세요.”

“형… 저는 괜찮은데요….”

“그래도, 우리도 한 장 찍어야지. 가만히 있어.”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 것인지. 남도하는 몸을 사리는 도윤범의 어깨를 힘줘 안았다. 손에 스치듯 닿은 그의 목이 뜨거운 불덩이처럼 느껴져 일부러 더 가깝게 당겼다. 그게 또 귀여워서 그랬다. 가끔 이해할 수 없는 포인트에서 도윤범이 귀여워 보이는 남도하였다. 딱, 지금처럼.

“날 사진사로 써먹을 줄은 몰랐네, 자.”

불만 섞인 말을 건넨 서주언은 사진을 찍고 휴대폰을 돌려줬다. 그러곤 남도하가 사진을 확인하기도 전, 할 일을 알려 줬다.

“제가 해요…?”

“원래 그런 거야. 보니까 팬 매니저나 뭐… 그런 건 없을 거 같고.”

바로, 기념품 나눠 주기. 스태프들이 뷔페식으로 된 몇 가지 음식을 접시에 담아오면 끝에서 함께 준비된 기념품을 나눠 줄 사람이 필요했다.

“안 해도 되는데, 보기 좋잖아. 보니까 선물도 좋은 거던데 생색 내기도 좋고.”

“해야죠… 제가.”

생색을 내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확인한 기념품이 상당히 특이했다. 남도하의 얼굴이 스티커로 붙어 있는 선물 상자 안엔 꽤 고가의 향수 브랜드에서 만든 디퓨저와 향초 세트가 들어 있었다. 브랜드만으로 만만치 않은 가격대가 예상됐다.

“저랑 같이해요.”

“아냐, 너도 가서 밥 먹어. 배고프겠다.”

도와주겠다는 도윤범에게 먼저 식사하라 얘길 해 봤지만, 그는 이번에도 말을 듣지 않았다. 이건 매니저 업무라는 핑계를 대고 버티자 그 도움을 거절할 수 없었다. 촬영 스태프가 많다 보니 순서대로 음식을 담고 기념품을 챙기는 줄이 길었다. 준비된 음식 종류가 상당히 많은 것도 한몫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잘 먹을게요.’라는 인사를 건네니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준비한 건 본인이 아닌데, 그 감사 인사를 대신 받으려니 그랬다.

“슬슬 저희도 먹을까요?”

“그래, 빨리 먹자. 배고프다.”

수많은 종류의 뷔페 음식을 조금씩 담고, 서주언과 감독이 있는 테이블에 앉고 나서야 알아챘다.

“어떤 거로 드릴까요?”

“그게….”

준비된 음식이 끝이 아니라는 걸. 밥 차를 끌고 온 직원들이 분주히 오가고, 먼저 음식을 담아 갔던 스태프들이 한참이나 식사를 끝내지 않는 걸 보고 의아하긴 했는데, 정신이 없어 미처 확인하지 못했었다.

“메인 메뉴는 스테이크랑 파스타, 랍스터로 준비돼 있습니다.”

직원의 말에 랍스터로 주문을 하고 나자 서주언이 묘한 표정으로 남도하를 바라봤다.

“…왜요?”

“한린 호텔 밥 차라고. 이런 건 나도 처음 보는데.”

“그러게, 나도 밥 차 그렇게 많이 먹어 봤어도 호텔 밥 차는 또 처음이야.”

서주언과 감독의 말에 제대로 대꾸할 수 없었다. 남도하도 인생 처음 받아보는 밥 차인 건 차치하고, 본인도 존재를 모르던 팬 카페에서 보낸 거니까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얼른 먹어요, 형. 음식 맛있어요.”

“그래. 너도 먹어.”

뭔가, 꿈을 꾸는 기분이다. 유명 배우도 촬영 중 한 번 받을까 말까 한 걸 자신이 받았다는 게.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음식이 유달리 달게 느껴졌다.

* * *

“야.”

그럼 그렇지. 남도하는 올 게 왔다고 생각했다. 지나칠 정도로 비현실적인 시간이 지나간 후, 뭔가 모를 찝찝함과 허전함이 남았는데, 아마 이건가 보다.

“왜.”

양우준 말이다.

“너 이거 꼴값인 거 알지?”

“하아… 또 뭐가.”

신경질이 잔뜩 나서 그걸 숨지기도 않았다. 생각해 보니 양우준은 아까 밥 차가 왔을 때 식사도 하지 않았다. 그러곤 차가 돌아가자마자 남도하에게 이리 짜증을 부리며 다가왔다. 평소에도 좋다 할 수 없는 태도였지만, 오늘은 서주언에게 욕을 들어먹은 탓인지 표정에서부터 정제되지 못한 감정이 그대로 느껴졌다.

“하도 인기가 없어서 모르나 본데, 밥 차도 순서가 있어.”

“순서?”

앞으로 팔짱을 낀 양우준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남도하를 향해 비웃음을 흘렸다.

“주연 배우도 아직 안 보냈는데, 네가 뭔데 먼저 촬영장에 밥 차를 보내.”

밥 차 들어오는데 웬 순서. 그제야 남도하는 아까 서주언의 행동이 이해됐다. 플래카드 앞에서 저와 함께 사진을 찍어 주던 일 말이다. 어쩌면 서주언은 혹시 모를 잡음을 미리 차단하려 그리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망상일 수도 있지만.

“그거야 제작진이랑 알아서 조율했겠지. 그리고, 주연들도 가만히 있는데 네가 왜 열을 내는데?”

괜히 좋은 일 하고 뺨 맞는 기분이라 남도하도 불만을 표했다. 어차피 제작진 모르게 밥 차가 들어왔을 리 없다. 더군다나 촬영에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왜 저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남도하의 말속에 숨겨진 가시에 찔린 것인지 양우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만하자, 우린 최대한 말 안 섞는 게 서로한테 좋을 거 같으니까.”

그 표정을 보자니 머지않아 뭔가가 또 터질 것만 같아 남도하가 먼저 몸을 돌렸다. 어떻게 된 게 양우준이랑 엮이기만 하면 이런 상황이 되어 버린다.

“너, 저거 자작극이지?”

“뭐?”

“네 돈 주고 시킨 거 아니냐고, 밥 차. 솔직히 너 팬 없는 걸 누가 몰라.”

두어 걸음 옮기던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장난이겠거니 하고 바라본 양우준의 얼굴은 진지했다. 그 모습에 남도하는 쌓여 가던 화마저 사라졌다. 하도 기가 막혀서 화를 내기도 민망했다.

“설마요.”

뭐라고 대꾸를 해 줘야 하는지 고민하던 중 빠르게 다가온 도윤범이 끼어들었다.

“전에 ‘어떤’ 배우가 자기 촬영장에 직접 밥 차 보냈다는 소문을 듣긴 했는데, 우리 형은 아니에요. 받아 본 적이 없으니 모르시겠지만, 호텔 뷔페면 돈 있다고 부를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아직은 담요를 덮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남도하의 어깨에 얇은 담요를 걸쳐 주는 도윤범의 말에도 가시가 있었다. 촬영장에 손수 밥 차를 보냈다는 ‘어떤’ 배우. 남도하도 얼핏 듣긴 했다. 언젠가 회사에서 양우준이 발작하며 내지르던 소리를.

“남도하, 너 나랑 잠깐 얘기 좀….”

“나중에요. 도하 형 좀 쉬어야 해서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남도하는 도윤범에게 팔뚝이 잡혀 걸음을 옮기면서도 이상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쟤 왜 이렇게 조용하지…?”

지금쯤, 발작하는 고함이 터져 나와야 정상인데 뒤에 남겨진 양우준에게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물론, 뒤를 돌아보진 않았다. 보지 않고도 뒤에서 쏘아지는 시선에 뒤통수가 뚫릴 것 같았으니까.

“부러워서 저런 거예요, 형. 신경 쓰지 마요.”

“아니 그게 아니라… 윤범아, 너 혹시 쟤랑 무슨 일 있었어?”

“일이요? 아뇨?”

오히려 의아한 듯 물어오는 도윤범인데… 남도하는 몇 번 느꼈던 묘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상하게 양우준이 도윤범에게 큰소리를 안 내는 것 같은 기분 말이다. 그가 예의를 차리는 걸 본 건 서주언을 대할 때가 유일했는데….

아니다, 어쩌면 그저 양우준은 저와 이원호에게만 성깔을 부리는 것인가 싶기도 했다. 스트레스 해소용 욕받이 뭐, 그런 거. 오래 생각해봤자 안 좋은 감정만 쌓여 갈 뿐이라는 걸 잘 알기에 머릿속에서 양우준에 대한 일을 털어 냈다.

“그건 뭐야?”

“아, 형 선물도 같이 왔더라고요.”

“…내 선물?”

도윤범의 손에 들린 물건에 대해 의문을 표하자, 공원 산책로를 따라 걸음을 옮기던 그가 멈춰 섰다. 그러곤 남도하의 앞에 무릎을 접어 앉았다.

“죄송해요…. 혹시 이상한 거일까 봐 제가 열어 봤어요.”

“그건 괜찮은데….”

그러곤 꽤 커다란 상자에서 신발을 하나 꺼내 내려놨다.

“운동화…?”

“네, 러닝화더라고요. 한번 신어 봐요.”

잠깐 얼을 타는 사이 원래 신고 있던 신발에서 발이 빠지고, 까만 운동화를 신어 버렸다. 도윤범은 러닝화의 줄까지 잘 당겨 리본을 묶어 줬다.

“이런 거 함부로 받으면 안 되는 거 아냐…?”

양쪽 발에 새 운동화를 신고 나서 바닥을 톡톡 짚어 대며 묻기엔 늦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마치 신발을 신지 않은 것처럼 가벼워 자꾸만 바닥을 짚어 보고 싶었다.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몸을 일으킨 도윤범은 남도하를 보며 짧게 미소 지었다. 마치 제가 선물을 받은 것처럼.

“그렇게 좋아요?”

“…어?”

“형이 웃고 있길래요.”

그제서야 남도하도 제가 웃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입으로는 이런 걸 받아도 되나 걱정을 하면서, 내심 새 신을 선물 받은 아이처럼 기분이 좋았다.

“우리 도하 형은 이런 명품 선물 좋아하는구나.”

절대, 명품이라서가 아니다. 놀리려는 건지 도윤범은 남도하의 뺨을 손끝으로 살짝 쓸었다.

따뜻한 손끝이 닿은 순간에야 남도하는 둘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걸 깨닫곤 한걸음 뒤로 몸을 물렸다. 뺨에 닿았던 손은 틀림없이 떨어져 나갔는데도 손끝에 쓸린 볼에서부터 시작된 열기가 빠르게 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장난치면 혼나, 너.”

흔히 할 수 있는 장난인데, 심장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낯선 울림을 퍼뜨린다. 그래서 남도하는 도윤범을 세워 둔 채 먼저 몸을 돌려 빠르게 걸음을 옮겨야 했다.

“형! 나머지 선물 안 봐요?”

“나중에.”

갑작스러운 스킨십 탓인지 순간 누군가의 모습이 스쳤다. 이런 낮에 그려 내기 힘든, 어둠에 싸인 어떤 남자.

* * *

“…혀, 형….”

“가만히 있어.”

“아, 아아…!”

“도윤범, 얌전히 좀 있어. 진짜 살살할 테니까.”

기어이 도윤범은 남도하의 손목을 부여잡았다. 두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지만, 그 모습이 상당히 귀여웠다. 다 큰 놈이 울상을 지으며 제 팔에 매달려 있는 모습 말이다.

“자꾸 그러면 더 아프게 한다.”

조금 더 놀려 먹고 싶은 생각에 좀 낮은 목소리로 말을 하자 도윤범은 마지못해 남도하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렇지만 얼굴은 여전했다. 귀엽다는 말이다.

“네가 도와달라며.”

“그건 그런데… 아프다니까요.”

시작은 도윤범이었다. 촬영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남도하가 씻고 나오자, 도윤범은 쭈뼛대며 입을 열었다. 혼자 머리 감기가 너무 힘들다고. 그때야 남도하는 제 무신경함을 자책했다. 도윤범이 누구 때문에 다친 건데, 여태 그걸 신경도 못 써 줬다. 제게 닥친 문제만 신경 쓰느라 챙겨야 할 놈을 방치해 버렸다.

“진짜 살살 할게.”

하지만 운동을 했다는 놈이 무슨 겁이 이렇게 많은지, 붕대를 푸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상처에 손길이 스치는 것만으로 엄살을 부려댔다. 그리고 그 엄살은 상처를 피해 머리를 감겨 줄 때 절정에 다다랐다.

짜악!

기어이 샤워기를 잡지 않은 남도하의 손이 도윤범의 등을 내려쳤다. 허리를 숙이고 쪼그려 앉아 있던 도윤범이 놀라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남도하가 빠르게 뒷덜미를 잡았다. 잘못하면 상처에 물이 들어갈 수 있다.

“너 진짜 죽을래.”

“형…! 그래도 어, 어떻게 저를 때려요…!”

아무리 환자라고 하더라도 한계 범위를 넘었다. 남도하는 대답 대신 샴푸 거품을 내 상처를 피해 머리 한쪽만 조심스럽게 씻겼다. 자꾸 죽는소리를 하는 놈 때문에 씻겨 주는 시간만 길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머리털 다 밀어 버렸으면 좋잖아. 왜 고집을 부려.”

“안 돼요, 그건. 남자는 머리빨이 80인데 어떻게 밀어요.”

헛소리는 가볍게 무시했다. 고작 머리 하나 감겨 줬을 뿐인데, 마치 고된 일이라도 하고 온 것처럼 진이 빠졌다. 수건에 손을 닦으며 세면대에 허릴 대고 서 있던 남도하의 눈에 이상한 게 들었다.

지난번 보았던 것이 착각이 아닌가 보다. 그저 마르기만 한 몸이 아니었다. 목부터 어깨로, 팔로 이어지는 뽀얀 피부가 군살 없이 매끈하게 뻗어 있었다.

허리는 한 품에… 들어오려나. 그리고 가슴도 적당히 근육이 들어찼고…. 그런데 왜… 가슴이 점점 가까워질까….

“왜 그렇게 보고 있어요? 다른데도 씻겨 주려고요?”

뚝- 하고 수건을 들고 있던 손등에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졌다. 도윤범의 젖은 머리칼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닿고야 정신을 차렸다. 그러곤 급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뒤늦게 제가 정신을 놓고 어딜 바라보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장난… 하지 마.”

하지만 시선을 드는 것 역시 썩 좋은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젖은 머리칼과 얼굴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 장난일 게 틀림없는 말의 내용과는 다르게 그의 얼굴엔 웃음 한 점 찾아볼 수 없었다. 그 탓인지 남도하의 목구멍이 메말라가는 것 같았다. 입에 고인 침을 아무리 넘겨봐도 그 갈증은 풀어질 기미가 없었다.

“약 발라야 하니까 빨리 씻고 나와….”

이번에도 도윤범을 남겨 둔 채 도망치듯 욕실을 빠져나왔다. 반쯤 달려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야 호흡이 불편하다는 걸 깨달았다. 귓가까지 들려오는 심장 소리도 그제야 느껴졌다. 쿵쿵거리는 울림이 내뱉는 숨을 뜨겁게 달궜다. 어쩌면 아직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어떤 기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가만히 있으니 망상이 더 짙어지는 것 같은 기분에 일부러 더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제대로 풀지 않았던 짐도 정리해 옷장 안에 걸어 두고, 도윤범에게 발라 줄 약도 미리 찾아 거실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하지만 그것도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함께 저녁을 먹은 빈 그릇과 어제오늘 입은 빨래도 이미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편한 마음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집을 둘러봤다. 처음 도망치듯 왔을 때 느꼈던 첫인상처럼 깔끔하다.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모델하우스를 보는 것처럼 잡동사니 하나가 없었다. 그럼에도 모든 게 예상 가능한 위치에 있었다. 예를 들면, 남도하가 찾은 약은 거실 장 첫 번째 칸에 들어 있고, 물컵은 냉장고 옆 첫 번째 서랍에 있는 것처럼. 뭐든 여러 번 찾아 헤매는 어려움 없이 찾을 수 있었다.

“뭐 하고 있어요?”

의미 없는 시선으로 집을 훑던 중, 도윤범의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그러다 바로 다시 돌아서야 했다.

“옷… 안 가져갔어?”

“아뇨, 있는데요.”

“입어. 감기 걸려.”

“추워요? 보일러 켤까요?”

도윤범이 여전히 상의를 걸치지 않은 까닭이다. 그 탓에 조금 진정된 줄 알았던 심장의 울림이 다시 시작됐다. 두 사람이 대화하는 사이에도 도윤범의 말소리가 점점 커졌다. 목소리가 커진 것이 아니라, 거리가 좁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계절에 맞지 않는 질문을 건네 올 땐 목소리가 마치 귓가에 닿은 것 같았다. 그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였다.

“보, 보일러는 무슨….”

날씨도 잊은 몸은 두피를 뚫고 땀을 흘리고 있는 것 같았기에 추위 따위를 느낄 틈이 없었다.

“옷 빨리 입어.”

“벌써 입었는데요.”

“하아….”

장난기가 다분한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짧게 마주친 도윤범의 미소에 짜증이 치솟았다. 아니, 여전히 상의를 벗고 있는 모습 때문에.

또 속았다.

* * *

남도하는 스무 살이 되자마자 군대에 다녀왔다. 집에서 결사반대했지만, 처음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도망쳤다. 마치 그 나이까지 끝나지 않았던 사춘기의 반항처럼, 제게 달라붙은 짐을 벗어 던지고 달아나고 싶었다. 그리고 그 2년여의 시간이 남도하가 기억하는 유일한 자유였다. 남들에겐 지옥 같은 시간이라는 군대가 잊을 수 없는 휴가였다.

긴 휴가가 끝나고 또다시 버거운 짐을 짊어져야 했지만, 어쨌든 2년 가까운 군 생활을 하면서 남자들의 벗은 몸은 수없이 봤다는 말이다. 촬영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연, 단역에게 제대로 된 휴게실 따위가 주어질 리 없었고, 탈의실이 없는 촬영장이 태반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상, 하의를 벗어 대는 사람들을 수없이 봤고, 단 한 번도 그들을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아직도 삐졌어요…?”

“삐, 삐져?”

“아니, 화… 났어요…? 그냥 장난인데요….”

그런데 왜.

이 어린놈의 장난에 이리도 화가 나는지 모르겠다. 남도하는 제게 장난을 친 도윤범에게 짜증이 나 투박한 손길로 상처 치료를 해 줬다. 그러고도 화가 풀리지 않아 기어이 그가 냉장고에서 꺼내 오는 맥주마저 뺏어 들었다.

“무슨 환자가 술을 마셔.”

“에이, 맥주가 무슨 술이라고… 아, 알았어요.”

흔치 않게 뾰족해진 남도하의 시선을 받은 도윤범도 더 이상의 투정을 부리지 못한 채 맥주를 포기했다. 그 맥주는 속에서 천 불이 끓어오르는 것 같은 남도하의 목구멍으로 대신 넘어갔다.

“아, 맞다. 빨리 보내 줘요.”

“뭘.”

“아까 찍은 사진이요. 저도 가지고 있을래요.”

소파에 나란히 앉아 휴대폰을 들었다. 그가 낮에 있었던 일로 화제를 돌려준 덕분인지, 끓어오르던 감정도 조금은 진정됐다. 남도하도 서주언에게 사진을 부탁한 뒤 처음 보는 거였다.

“…이게….”

“뭐예요…?”

하지만 연이어 찍힌 사진을 몇 장이나 보곤 기가 막혔다. 조금 전과는 다른 이유로 짜증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어떻게… 제대로 나온 게 하나도 없어요…?”

“일부러 그런 거야, 서주언.”

남도하의 가슴이 조금 더 뜨거워졌다. 서주언이 찍어 준 사진을 보자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는 두 사람의 얼굴이 한 앵글에 잡힌 게 한 장도 없었다. 어떤 건 도윤범만, 어떤 건 남도하만. 또 어떤 사진은 두 사람의 가슴팍만 찍혀 있었다. 이따위 사진을 찍어 놓곤 어딘가에서 깔깔대며 웃고 있을 서주언을 생각하니 화가 들끓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사진첩을 닫고 연락처를 뒤졌다.

“왜요?”

“한마디 해야겠어.”

“됐어요. 보나 마나 형이 이럴 거 같아서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

“…어?”

“아니, 그게…. 아무튼 사진은 나중에 또 찍으면 되니까 전화하지 마요.”

도윤범은 남도하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빼앗으며 맥주 캔을 대신 쥐여 줬다.

“우리 좋은 날 스트레스 받지 마요.”

또, 이상한 도윤범이 나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대로 나온 사진이 없는 걸 보곤 우울해하던 아이가 아닌, 어른스러운 말을 뱉어 내는 남자. 참… 종잡을 수가 없는 놈이다.

“그래도 아쉽잖아.”

“…그렇긴 한데, 이제 와서 어쩌겠어요. 그리고 사진이 없다고 그 일이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어 보이는 도윤범을 보자니 남도하는 제가 괜한 투정을 부린 것만 같아 다른 말을 붙이기가 민망했다. 한마디 한마디 옳은 소리만 한다. 대답 대신 맥주를 한 모금 목구멍에 넘기고 말았다.

“근데요, 형.”

“어?”

“아까 그 선물이 그렇게 좋았어요?”

솔직히 말해서, 좋았다.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팬들이 보내 준 것이 싫을 수 없다. 감히 기대조차 해 보지 못했던 선물을 받았기에 아직도 꿈을 꾸는 것처럼 설렜다. 오후 촬영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좋았다.

“좋기는.”

하지만 진심을 말할 수는 없었다. 사실을 말해도 되겠지만, 그냥 속물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비싼 호텔 밥 차에, 명품 운동화를 받고 들뜬 것처럼 보이기 싫다. 적어도… 병아리 매니저 도윤범에게만큼은.

* * *

도윤범에겐 일찍 자겠다고 말했지만, 침대에 누운 남도하는 쉽사리 잠이 들지 못했다. 이유는 당연하게도… 도랑도랑 때문이다. 온종일 그들을 빨리 찾고 싶은 생각에 하루가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뭐야.”

하지만 한참이나 찾아봐도 인터넷에서 관련 사이트를 찾을 수 없었다. ‘남도하 팬카페’, ‘배우 남도하 팬클럽’, ‘남도하, 도랑도랑’ 같은, 입으로 읊기도 민망한 검색어를 아무리 바꿔 입력해도 나오는 사이트가 하나 없었다. 몇 개의 포털을 바꿔 가며 찾아봐도 마찬가지. 팬카페뿐 아니라 남도하의 기사마저 몇 줄 되지 않았다. 그 역시 모두 최근에 서주언 또는 살인자의 밤과 관련된 것이 전부였다.

몸을 돌려 누웠다. 배터리가 얼마 안 남고, 휴대폰이 뜨뜻해졌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져 버렸지만, 포기할 수가 없다. 호텔 뷔페를 밥 차로 보내 주고, 수만 원에 달하는 기념품을 수십 개나 준비한 사람들이다. 거기에 남도하에게 명품 브랜드의 러닝화와 트레이닝 재킷, 텀블러까지 보내 줬다. 어떻게든 찾아서 감사 인사를 남기고 싶었다.

한참이나 찾을 수 없는 도랑도랑 때문에 점점 지쳐 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비공개 커뮤니티일 수도 있을까. 뭐, 일반 사람들이 가입할 수 없는 그런 곳. 다른 포털 사이트를 몇 군데 더 뒤져 볼수록 그런 생각이 커졌다. 혹시… 비공개 커뮤니티가 아니라면, 어쩌면….

딸깍

이젠 포기해야 하나 싶던 순간이었다. 방이 어둠에 삼켜지며, 손바닥만 한 휴대폰 불빛만이 방 안을 채웠다. 남도하는 빠르게 휴대폰 화면을 껐다. 어둠 사이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오며 방문이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한참 동안 아무런 소리도, 기척도 느낄 수 없었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누군가 들어왔다.

“안 잤네.”

들려오는 익숙한 기계음에 긴장이 풀어졌다.

“하아….”

어느 틈에 거리를 좁혀온 것인지, 남자는 스탠드 불을 켜곤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침대가 작게 출렁이고 나서야 남도하는 제가 왜 그를 보며 긴장이 풀어졌는지 의아했다. 오히려 더욱더 긴장이 차올라야 정상인데 말이다.

“이젠 놀라지도 않네요.”

“…놀랐는데요….”

“거짓말도 하고.”

“…….”

토끼 가면은 남도하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뺏어 들었다. 당연히 항의는 못 했다. 확실히 몇 번의 조우로 그가 전처럼 두렵게 느껴지진 않았지만, 여전히 무서운 건 사실이다. 그 미묘한 차이를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다르다.

“비밀번호.”

“…왜, 왜요?”

그럼에도 이번엔 의문을 표해야 했다. 지금은 폐허가 돼 버린 집 현관과 통장, 카드 등. 모두 휴대폰 비밀번호와 같았기에 선뜻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남도하는 제 반문에 토끼 가면의 기분이 언짢아졌다고 생각했다. 후드 재킷 밖으로 튀어나온 그의 귀가 한쪽으로 삐딱하게 쏠린 걸 보면, 꼭 착각은 아닐 것 같다. 그를 만나며 깨달은 습관이다. 남자는 기분이 나쁠 때면 저리 고개가 한쪽으로 삐딱하게 쏠리는 버릇이 있었다.

“아니… 그건 사생활이기도 하고… 뭐, 뭐 하는 거예요!”

한참 이어지는 침묵을 버티지 못하고 변명을 줄줄이 뱉어내던 중, 남자는 불시에 휴대폰을 들어 남도하의 얼굴을 비췄다. 그러자 얼굴을 인식한 휴대폰 잠금이 풀려 버렸다. 평소 편리하게 이용하던 첨단 기술이 처음으로 짜증스러운 남도하였다.

“남도하 팬카페….”

“그거! …그런 거 아닌데요….”

화면에 떠오른 마지막 검색 기록을 읊는 목소리에 휴대폰을 빼앗으려 손이 튀어 나갔다가, 가면 아래서 작게 울리는 혀 차는 소리 때문에 원위치로 돌아왔다. 남자는 한참이나 장갑을 낀 손으로 남도하의 휴대폰을 들여다보곤 협탁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뭐… 나도 부정할 생각은 없는데, 남도하 씨도 본인이 예쁜 거 아나 보네요?”

“아니거든요.”

“그런데 왜 저런 걸 찾아볼까.”

“그건 그냥….”

남도하는 확신했다. 상대가 지금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 이상한 쪽으로 몰아가는 남자에게 제대로 항의도 못 해 속이 점점 시끄러워지는 와중, 그가 느릿하게 한쪽 손을 들어 올려 얼굴을 감싸자 잡생각이 흩어졌다.

“대답.”

“하아, 사실 오늘 낮에….”

학습 효과인지, 그의 재촉에 홀린 듯 입이 벌어졌다. 마치 준비했던 답변처럼 말이다. 어쩌면 그저 누군가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일이 일상인 서주언에게도, 날을 세운 양우준에게도, 병아리 인턴 도윤범에게도 꺼낼 수 없었던 속마음 말이다.

두서없이 이어지는 이야기에도 토끼 가면은 남도하의 뺨을 감싸 잡은 자세 그대로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그의 반응이 없는 탓에 남도하는 쉼 없이 입을 열어야 했다. 둘 사이에 흐를 침묵을 겪고 싶지 않았기에.

“그래서, 그 선물은 좋았고요?”

“뭐….”

“좋으니까 저런 거 찾아보고 있었겠지, 그쵸?”

“…네. 선물 주는데 누가 싫어해요.”

뒤늦게 너무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상관없을 것도 같았다. 어차피 그는 남도하 제 밑바닥이라고 할 수 있는 가라오케에서의 모습마저 알고 있었으니까. 속으로 속물이라고 욕할지 모르겠지만, 누가 누굴 욕하겠나. 상대는 괴한 혹은 사생, 그도 아니면 스토커일 뿐인데.

“맘에 들었다니 다행이네. 돈 쓴 보람이 있어.”

“…예?”

“그럼 갚아요, 이제.”

“무슨… 소리예요?”

토끼 가면은 침대 위로 아예 올라와 남도하를 마주 보며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러곤 태연하게 두 팔을 펼쳐 보였다. 하지만 의도를 깨달을 수 없는 말과 행동인 탓에 남도하는 멀뚱히 그를 지켜만 보고 있었다.

“갚으라고.”

망설임의 시간이 길어진 탓인지 토끼 가면의 입에선 나직한 기계음이 튀어나왔다. 반말은 덤이다. 그 탓에 길게 고민하지도 못하고 튀어 나가듯 몸을 날려 그를 끌어안았다. 한 손은 어깨 위에서부터, 한 손은 겨드랑이 아래에서부터 감쌌다. 아직도 낯설기만 한 온기가 품 안을 가득 채운 탓에 한참 뒤에야 그가 했던 말을 정리할 수 있었다.

“저기… 그쪽이 밥 차 보냈어요?”

“왜, 내가 보냈으면 싫어요?”

“…….”

“싫냐고.”

남자도 똑같이 남도하를 끌어안았다. 제 등을 감싸오는 손길에 몸에 긴장이 차오르면서도 못 버틸 정도로 싫지는 않았다. 뭐라 설명하기 어려웠지만, 혐오스러움이나 역겨움과는 다른 종류였다. 모난 목소리와 다르게 부드러운 손길로 보아, 그가 지금 화를 내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막연하게 두렵지도 않아 그의 질문에 대한 답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그럼… 도랑도랑도 없는 거네요.”

몇 시간이나 찾아 헤매던 미지의 팬 카페 말이다. 뭔가 허탈하기도 하고, 울적한 기분이 몰려왔다. 어쩌면 양우준이 했던 말이 썩 틀린 것은 아닐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건 나쁜 버릇인데.”

자작극… 까지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팬카페 같은 건 없는 거니까.

“그리고, 도랑도랑까지 없다고는 안 했는데?”

“…네?”

“있어, 그거.”

얼마나 그 자세를 유지했는지 모르겠다. 한참 만에 남자가 떨어져 나갔다. 그렇다고 거리가 멀어지진 않았다. 여전히 가까운 거릴 지키며 토끼 가면이 말을 이었다.

“온종일 표정이 별로길래 뭐가 맘에 안 든 줄 알았는데.”

“…온종일, 이요…?”

남자가 사용한 단어 하나에 시끄럽던 남도하의 머리가 비워졌다. ‘온종일.’ 그는 별다른 대꾸가 없었지만, 가면 아래에서 왠지 미소를 짓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자꾸 헛짓하지 말아요. 오늘도… 하마터면 정말 화날 뻔했으니까.”

어떤 부분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무슨 뜻으로 건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갑자기 돌변한 상대의 태도 때문에 남도하는 조금 긴장한 채 고갤 끄덕였다.

“착해요.”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남자였지만, 남도하는 그럴 수 없었다. 괴한은… 생각보다 근처 인물일 수 있다는 생각이 사고를 잠식했다.

* * *

‘띵.’ 경쾌한 알람 소리와 함께 우리의 하루가 시작됐다.

반사적으로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태블릿을 잡아 들어 선명하게 재생되는 화면을 눈에 담았다.

푸르스름한 햇볕이 덜 닫힌 커튼 사이로 파고들었다. 옅은 빛에 눈을 뜬 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마자 습관처럼 냉장고로 가 탄산수를 하나 꺼내 마시며 정신을 차렸다. 원래보다 조금 이른 기상이다. 그래서 커튼을 잘 치고 자야 하는데. 빈속에 탄산수를 마시는 것도 썩 좋지 않은데, 저 습관은 천천히 고쳐 줘야겠다.

300mL 작은 병 하나를 다 비워 낸 그는 방으로 돌아가 조그마한 다이아가 박힌 흰색 무선 이어폰을 양쪽 귀에 꽂고, 새로 선물한 트레이닝 재킷을 걸쳤다. 함께 보낸 러닝화 역시 꿰어 신었다.

“한정판인데 왜 모르지….”

태블릿 화면을 통해 현관문 밖으로 사라지는 그를 지켜보려니 조금 서운했다. 내가 보낸 선물들을 곱게 차려입은 건 예쁘다. 하지만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건 좀 아쉽다. 신발도, 재킷도 모두 한정판인데. 아직 국내엔 들어오지도 않은 것들이라 내 입장에서도 구하기 쉽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무선 이어폰도 특별히 신경 써 작은 보석을 넣은 건데…. 그는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다. 그의 무신경함이 귀엽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다.

“다음엔 더 큰 다이아로 해야겠네.”

아니다, 다음엔 그냥 내 이니셜을 새겨서 보내 줄까. 그럼 조금 더 만족스러울 거 같은데. 욕심 같아서는 그의 몸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내 이름을 새겨 버리고 싶지만….

태블릿 대신 휴대폰 화면으로 그가 달리는 동선을 확인하며 몰려오는 욕심을 눌러냈다. 안타깝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이미 계획과 상당히 틀어져 버렸기에 여기서 더 엇나가서는 안 된다. 상황이 조금 맘에 들지 않게 돌아가고 있지만… 아직은 참아야 한다.

이젠 희미해져 버린 그의 체취가 담긴 티셔츠에 얼굴을 파묻으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폐부 깊이 남도하의 향을 삼켰다. 자꾸만 욕심이 난다. 그의 옆에 있을 때면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할 정도로 탐이 난다. 옅어져 버린 체 향이 또 초조함을 키운다.

“또 티셔츠 바꿔 줘야겠네….”

머지않아서 갖고 말 거다. 얼마 남지 않았다, 남도하가 내 손에 들어오는 건.

* * *

“절대 안 돼요.”

“미쳤어? 네가 뭔데 된다 안 된다 훈수를 둬!”

남도하는 옆에 앉은 도윤범의 바지를 테이블 아래서 살짝 잡아당겼다. 누가 보더라도 이번엔 도윤범이 선을 넘었다. 웃음을 걸고 좋은 소식을 전하던 매니지먼트 팀장의 얼굴은 연이어 튀어나온 도윤범의 날 선 목소리 때문에 기어이 일그러지고 말았다.

“지금 촬영도 바쁘고, 이제 첫 방송 시작도 얼마 안 남았습니다.”

남도하의 손길을 느끼지 못한 것인지 도윤범의 입은 쉬지 않고 열렸다.

“너 미쳤지? 서주언보다 바빠? 걔도 한다는데 무슨 개소리야!”

그 탓에 팀장의 고함이 회의실 안을 가득 채워 버렸다.

“…팀장님, 잠깐만요. 도윤범, 따라와.”

무겁게 내려앉으려는 분위기를 깨려 남도하가 입을 열었다. 그러곤 도윤범을 불렀지만, 그는 듣지 못한 것처럼 자리에서 궁둥이를 떼지 않았다. 한 번 더 낮게 읊조리듯 부르고 나서야 그는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먼저 앞장서 회의실을 나가 버렸다. 회의실을 빠져나가며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느껴졌다.

“저게 미쳤나.”

“팀장님, 제가 잘 설명해서 데려올게요.”

괜히 뒤를 따르는 남도하가 다 당황스러웠다. 도윤범이 저러는 이유조차 알 수 없어서 더 그렇다. 회의실을 빠르게 벗어나 먼저 나간 도윤범을 쫓았지만, 그는 벌써 저 멀리 복도 끝까지 가 있었다. 반쯤 달리듯 다가가 그의 팔을 낚아챘다.

“따라와.”

“형….”

“조용히 따라와. 사람들 있어.”

복도를 오가는 몇몇 시선이 신경 쓰여 그의 팔을 붙잡은 채 휴게실까지 끌어왔다. 문을 닫고 두어 걸음 떨어져 서서, 서로가 서로의 시선을 피했다. 남도하는 이해할 수 없는 도윤범의 행동을 납득하려 노력했다. 곧바로 자신의 생각을 내뱉으면 모난 목소리로 화를 내 버릴 게 자명해서.

“왜 싫은데.”

최대한 감정을 진정시켰다 생각하고 입을 열었지만, 여전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팀장 앞에서 도윤범을 같이 타박했다가는 그가 회사에 밉보이게 될까 싶어 꾹꾹 참고 있었다.

“뭐 때문에 팀장님한테 그렇게 바득바득 대든 건데.”

저를 바라보지도, 그렇다고 대답을 하지도 않는 도윤범 때문에 조금 더 감정이 사나워졌다. 하지만 여태 이런 식으로 제멋대로 군 경우는 없었기에, 무언가 사정이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남도하는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화를 한 숨 식혔다. 그러곤 애써 시선을 틀어내는 기색이 역력한 도윤범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았다.

“윤범아, 얘길 해야 알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부드러운 목소리를 만들어 내야 했다. 마치 연기를 하는 것처럼, 제 감정과는 상이한 투로 입을 열고서야 도윤범의 시선이 남도하를 향했다.

“그거… 안 하면 안 돼요?”

하지만 도윤범이 입을 여는 순간, 남도하의 감정이 이상한 방향으로 틀어졌다. 이유조차 아직 듣지 못했지만, 마주한 두 눈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들려오는 힘없는 목소리에 그러자 답해 버릴 뻔했다. 딱… 그런 감정이 들게 하는 얼굴이었다.

“굳이 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하지만 그 표정은, 순간이었다. 눈꺼풀을 몇 번 깜박이는 사이 마치 헛것을 본 것처럼 도윤범의 얼굴은 평소와 같이 돌아와 있었다.

“내가 하는 일은 전부 굳이 안 해도 되는 일이야. 경찰도 아니고 의사도 아닌데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을까, 나한테?”

문제의 시작은, 섭외였다. 살인자의 밤 방영 홍보와 기념을 겸해 관찰 예능에 섭외됐다. 파일럿으로 진행되는 4부작 예능으로, 연예인들의 일상을 그리는 흔하디흔한 내용이었다. 주, 조연 여섯 명이 섭외됐다. 특별한 것이라면 예능에서 얼굴 보기가 쉽지 않은 서주언이 출연한다는 것뿐이었다.

“지금 드라마 촬영만 해도 바쁘잖아요. 더군다나 그런 방송 한 번에 사생활이 없어질 수 있어요. 득보다 실이 더 많을 수도 있다고요.”

“어쩌면 기회가 될 수도 있지. 넌 내가 잘되는 게 싫어?”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왜 그렇게까지 하는데요? 예능 안 하고도 연기 잘하는 배우 많잖아요. 형은 지금보다 잘될 수만 있으면 방법은 상관없어요?”

“그건…!”

서로 한 마디씩 내뱉을 때마다 쌓인 감정을 배설한 탓일까. 남도하답지 않은, 도윤범답지 않은 말들이 서로를 향했다. 먼저 선을 넘은 게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남도하는 제가 먼저 넘은 것도 같았지만, 마지막 튀어나온 도윤범의 말에 가슴이 찔렸다.

“그래. 상관없어, 방법 같은 거.”

사실이니까. 지긋지긋한 무명 생활이 아무렇지 않았을 리 없다. 두 손가락으로도 셀 수 없을 정도로 긴 무명의 시간을 버티다 드디어 볕이 들기 시작했다. 확언할 수는 없지만, 가능성이 보인다. 구렁텅이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두 다리에 버겁게 달라붙은 짐을 가볍게 만들 기회가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다가왔는데, 그대로 놓칠 생각은 없다.

“난 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정 싫으면….”

설사, 누군가를 잃어야 할지라도.

“…네 맘대로 해.”

일방 통보를 남기고 먼저 몸을 돌려 나왔다. 고작 몇 걸음을 떼기도 전에 후회가 밀려왔다. 사실 마지막으로 내뱉으려던 말은, ‘싫으면 그만둬.’였다. 하지만 차마 목구멍으로 그 말이 튀어나오질 못했다.

걸음을 옮기는 사이에도 망상이 몰려왔다. 대본 리딩을 위해 빌린 의상이 망가졌던 날, 매장에 들러 도윤범이 그걸 샀다는 걸 알고 돌아오던 날. 차오르는 화에 도윤범을 길가에 버리고 오려다 말았던 날.

그날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그날의 감정이 되돌아왔다. 틀림없이 비가 오지 않을 테고, 온다고 하더라도 건물 안이니 아무런 상관도 없다. 전처럼 길바닥에 버려두고 온 것이 아니라서 쓸쓸하게 거기 서서 남도하 저를 기다릴 리도 없다.

그런데 자꾸만 그런 기분이 들었다. 휴게실에 남겨진 그에게 세찬 비바람이 몰아칠 것만 같고, 공허한 공간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망상. 그래서 자꾸 마음이 약해지려 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 도윤범에게 그런 뜻이 아니라고, 조금 더 이성적인 방법으로 설득을 할까 싶은 생각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도윤범의 말이 꼭 틀린 것도 아니었다. 얼마 전 관찰 예능에 출연했던 아이돌 하나가 집 주소까지 공개돼 극성팬 때문에 정신적 피해를 호소하던 일도 있었다.

지이잉.

하지만 기다랗게 진동을 울리는 휴대폰에 떠오른 이름을 보곤 그 생각을 접었다. 돌아가려던 걸음도 멈췄고, 도윤범을 향하던 감정 자체가 옅어졌다. 그 빈자리를 채운 감정은 막막함이었다.

지이잉

진동과 함께 메시지가 들어왔다.

[돈 좀 보내라.]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같다. 지난 메시지를 그대로 복사해다 보낸 듯 위쪽 세 개의 메시지와 같은 내용의 것이었다. 월례 행사와 같던 일의 간격이 점점 더 좁아지고 있다. 한 달, 3주… 이젠 2주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막막하다. 출연료로 들어올 돈도 거의 없다. 통장엔 잔고를 정확히 기억할 수 있을 정도의 돈밖에 남지 않았다. 더는 보내 줄 돈이 없다는 말과 같다.

“하아….”

그래. 이런 시궁창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가릴 게 뭐가 있겠나. 예능이 아니라 그때 그 전범 기업의 맥주라도 들고 미소를 지어야 할 판이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회사 밖으로 나갔다. 도통 진정되지 않는 감정을 추슬러야 할 것 같다.

* * *

“마셔.”

“됐어요.”

“마시라고.”

한 시간이나 밖을 걷다 들어왔다. 낮엔 아직 여름의 흔적을 달고 있는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지만, 걸음을 옮기기 불편한 정도는 아니었다. 내리쬐는 햇살과는 다르게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해 마음을 진정시키기엔 충분했다. 밖에서 혼자 목을 풀 듯 몇 번이나 말하는 연습을 하며 제 감정도 확인했다. 이상 없다는 걸 확신하고, 카페에서 커피를 두 잔 사서 돌아온 참이다.

“윤범아.”

사과의 뜻이다.

“저 화났어요.”

그렇게 돌아온 남도하에게 도윤범도 다른 방식으로 사과를 건넸다. 팀장의 말에 의하면, 도윤범이 예의 바르게 제 언행을 사과하고 예능도 잘 준비 하겠다고 했단다.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도윤범의 사과 방법일 것이다.

“미안해. 형이 심했어.”

“알긴 해요?”

그래. 마치 도윤범이 자신의 성공을 원치 않는 사람처럼 취급하지 않았나.

“그럼. 그러니까 이렇게 미안하다고….”

“진짜, 다시는 그렇게 저한테 등 돌리지 말아요.”

“어…?”

남도하는 제 어깨를 감싸 쥐는 도윤범의 손아귀 힘에 입이 다물어졌다. 강한 힘은 아니었지만, 그의 손이 닿은 어깨에서부터 불똥이 튄 것처럼 열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위태로워 보이는 얼굴 때문인지, 그대로 그의 팔을 당겨 안아 주고 싶은 충동이 일순 몰려들었다.

“무슨 말을 해도 되니까, 얼굴 보고 얘기해요.”

남도하가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사이, 도윤범의 얼굴은 조금 더 어두워졌다. 착각이 아니다. 어쩌면 남도하 제가 그 휴게실에 도윤범을 내버려 두고 나왔을 때, 거기엔 폭풍우가 휘몰아쳤었는지도 모르겠다. 도윤범의 얼굴이 뭔지 모를 감정으로 이리 흠뻑 젖어 버린 걸 보면. 눈에 보일 정도로 아래턱에 힘을 준 채 제 답을 기다리고 있는 걸 보면.

“그래… 형이 미안해. 이젠 안 그럴게.”

그제야 도윤범의 얼굴에 다른 감정이 차올랐다. 안도, 였다. 누가 보아도 눈치챌 수 있을 안도. 마지막까지 등덜미를 안아 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꾹 참아 냈다. 스스로 이유를 알 수 없는 충동이 낯설었다.

* * *

“어서 오세요.”

“사전 미팅은 따로따로 하는 줄 알았는데요.”

도윤범은 화를 풀지 않았다. 섭외된 예능에 출연하는 걸 허락하는 것과는 별개로 여전히 그의 입에선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고, 출연 확정 전 사전 미팅을 위한 자리까지도 그 감정이 이어졌다.

“어… 우선 프로그램 컨셉부터 설명해 드려야 될 거 같아요. 앉으세요.”

이미 업무에 찌든 것 같은 담당 작가의 안내에 따라 자릴 잡고 앉았다.

“안녕하세요….”

회의 테이블의 건너편에 서주언과 그의 매니저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옅은 미소로 인사를 대신하는 그였다. 그 한 조각 미소가 꼭 인사만은 아닐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 첫 방송 시작하는 주에 맞춰서 토요일 여섯 시, 딱 4회만 특별 방영할 거예요.”

“근데 제목이 무슨….”

“…서주언 씨가 출연한다는 게 중요하죠….”

작가가 프로그램에 대해 설명하기도 전, 서주언이 자리에 놓인 종이를 슬쩍 들어보며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누구라도 비슷한 생각일 것이다.

「하루 살기」

그리 참신하다 할 수는 없는 제목이었다. 아무리 4화짜리 파일럿 프로그램이라고 하더라도.

“원래 가제는 ‘나도 혼자 산다’였는데 그게 나을까요…?”

“하루 살기가 낫네.”

그렇다. 다른 방송사에서 메가 히트를 친 프로그램의 아류로 남느니, 참신함이 조금 떨어지는 쪽을 택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총 여섯 분이 출연할 거고, 두 분씩 커플로 나오셔야 해요.”

“…커플요?”

“네, 커플요.”

도윤범의 물음에 작가는 쐐기를 박았다. 남도하는 이어지는 작가의 설명이 꽤 흥미로웠다. 그렇고 그런 예능인 건 맞지만, 기본 컨셉은 두 명이 서로의 집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이었다. 스케줄이 있으면 함께 이동하고, 휴식을 취할 때도 함께다.

“그럼 굳이 친한 척은 안 해도 되겠네.”

“네… 뭐, 그래도 적당히 친해져 가는 모습은 보여 주셔야 해요.”

“하루 만에?”

“정확히는 4일이요.”

서로의 집에서 1박 2일. 총 4일을 붙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아… 대본, 있죠?”

한숨을 한 번 내쉰 도윤범이 물었다.

“음… 없어요. 완전 리얼이요. 그게 컨셉이거든요. 요즘 시청자들은 조금만 작위적이어도 바로 눈치채요. 차라리 조금 덜 재밌어도 원래 모습 그대로 보여 주는 게 더 좋아요.”

남도하는 까딱까딱 떨어 대는 도윤범의 다리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 순간, 남도하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어떻게 여태 그걸 잊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잠깐만요… 집이요? 집에서 같이 지낸다고요?”

“네, 집이요. 도하 씨 집에서 이틀, 주언 씨 집에서 이틀.”

“그게….”

남도하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도윤범을 향했다. 그리고 그도 눈치챈 것 같다. 아랫입술이 뾰족하게 튀어나온 채 시선을 틀어 버리는 걸 보면.

* * *

“우리 도하가 밥이라도 한 번 사야 하는 거 아닌가.”

“…저요?”

사전 미팅을 끝내고 나오는 길. 서주언은 남도하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달라붙었다.

“어제 난리 날 뻔했는데, 몰라?”

알고 있다. 어제 서주언 팬 커뮤니티에서 살인자의 밤 조공에 대한 게 짧게 화제가 됐었다. 자신들이 나서지도 않았는데 밥 차가 들어갔다는 소문이 퍼진 탓이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한류스타라는 타이틀을 가진 서주언의 팬들은, 국내에 국한되지도 않았다. 양우준이 말했던 ‘순서’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도 많았다. 하지만 단 하나의 게시물이 그 목소리를 잠재웠다.

“…고마워요, 그건.”

서주언의 SNS에 올라온 한 장의 사진이었다. 남도하와 다정하게 붙어 찍은 그 한 장. 전혀 언짢아하지 않는 서주언의 짧은 글 덕분에 별다른 잡음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근데… 저는 어제 하루 살기 한다고 안 했었는데요?”

곧, 절친이 될 거라는 서주언의 의미심장한 글이 밥 차 사태를 덮어 버렸다.

“어차피 했을걸?”

“어떻게 알아요?”

서주언의 말엔 확신이 짙게 깔려 있었다. 남도하 자신도 모르던 걸, 어떻게 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서주언은 남도하의 어깨를 잡은 채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시선을 맞추고 섰다. 그의 눈과 입꼬리가 느릿하게 움직이다가 삽시간에 미소가 그려졌다.

“너 안 하면, 나도 안 한다고 했거든.”

그… 장난기가 다분한, 미소.

“그러니까 너랑 나랑 세트지.”

솔직히 이상하긴 했다. 출연 비중을 떠나 인기도순으로 보더라도 남도하 제가 그 프로그램에 나가는 건 상식 밖이었다. 그렇다고 그사이 다른 예능에서 눈에 띄는 활동을 했던 적도 없으니까 더욱더 의아했다. 더군다나 파트너가 서주언이라니. 제 나름대로 의문스러웠던 부분이라 그런지, 장난하지 말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서주언이 그랬다는 게 합리적이었다.

“…왜요?”

“재밌거든, 너.”

여전히 두 눈을 빛내던 서주언이 양어깨를 짚던 손 중 하나를 뗐다. 그러곤 느릿하게 남도하의 뺨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을 인지한 남도하는 차마 손길을 피하지 못했다. 시선도 마치 그에게 달라붙어 버린 것처럼 떼어 낼 수 없었다.

진창에서 빠져나갈 구원의 동아줄을 내려 준 게 서주언이다. 그렇게 바둥거려도 벗어 낼 수 없는 짐을 단 한순간에 털어 낼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 주었다. 지금보다 더 높은 곳을 바라봐도 된다는 욕심을 꿈꾸게 해 줬다. 단 한마디 말로, 그가 그랬다.

막 서주언의 손끝이 남도하의 뺨을 스치기 전, 시야의 사각에서 튀어나온 손이 그의 팔을 잡아챘다.

“그쪽 재밌으라고 출연하려는 거 아니고요.”

손목이 틀어 잡힌 서주언의 얼굴이 한순간에 엉망으로 일그러지는 것으로 봐, 힘 조절도 제대로 하지 않은 것 같다.

“출연할지 말지는 오늘 중으로 결정할 겁니다.”

그대로 서주언의 팔을 털어 낸 도윤범은 남도하를 제 뒤로 끌어당겼다. 몸집 차이가 있다 보니 도윤범의 어깨너머로 서주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서주언은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치솟아 제 손목을 한 번 바라보곤 도윤범을 쏘아 봤다.

“하.”

표정이 일그러지던 것도 잠시. 짧은 시간 서주언의 얼굴엔 웃음이 걸렸다.

“확실히 재밌네. 그럼 하루 살기 촬영 때 봐.”

서주언은 아직 출연 결정을 끝내지 않았다는 도윤범의 말을 무시하는 것처럼, 홀로 약속을 잡곤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남도하가 해결해야 할 진짜 문제는… 뒷모습만으로도 까만 아우라가 퍼져 나오는 것 같은, 도윤범이다.

* * *

“윤범아….”

남도하의 목소리가 기다랗게 늘어졌다. 그럼에도 앞에서 운전하는 도윤범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보조석으로 자리를 옮기고 싶지만, 참았다.

“아, 씨….”

차가 휘청였다. 도윤범의 입에서는 작은 소리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좋지 못한 감정이 여실히 느껴졌다.

“괜찮아요? 저 새끼가 운전을 좆같이….”

깜빡이도 켜지 않고 끼어든 차를 향해 기다란 클랙슨을 울렸다. 그러면서도 도윤범은 남도하를 돌아보며 안부를 물었다.

“괜찮아. 윤범아, 우리 얘기 좀 하자.”

또다시 침묵. 남도하의 안위만 확인하곤 도윤범의 입이 다시 다물어졌다. 손가락으로 핸들만 툭툭 두드려대며,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은 그는 집까지 쉬지 않고 차를 몰았다. 차를 댈 때도, 엘리베이터에 올라탈 때도 남도하는 그 침묵에 따라야 했다. 집에 들어와 제 방으로 쏙 들어가려는 도윤범의 팔을 붙잡아야 하는 것 역시나 남도하였다. 왜냐하면, 아쉬운 게 있으니까.

“도윤범, 진짜 이럴래? 언제는 하라며. 네 입으로 팀장님한테 얘기했잖아.”

말을 뱉고서야 아차 싶었다. 지금은 그를 잘 구슬려야 하는 상황인데, 어쩌다 보니 정제되지 않은 제 속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 버리고 말았다.

“형이 하고 싶으면 해야죠.”

“…해도 돼?”

“맘대로 해요.”

허락인지 아닌지 모를 말을 남기고 도윤범은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아….”

남도하는 속이 끓어오르는 것 같아 냉장고에서 탄산수를 하나 꺼내 마셨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짜릿한 감각에도 끓어오르는 속은 풀어질 기미가 없었다.

문제라면, 집이다. ‘하루 살기’ 컨셉을 보자면 주 무대는 아무래도 서로의 집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 남도하 제 처지가 어떻던가. 원래 살던 허름하기 짝이 없던 집은 복구 불가할 정도로 망가져 버렸고, 그 집에 침입했던 범인은 잡히지도 않은 상황이다. 그 탓에 도윤범의 집에 이렇게 얹혀사는 중이고. 그런 와중에 그의 집을 배경으로 예능을 찍겠다니.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양심이 있다면, 욕심내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이미 과분한 호의를 베푼 상대에게 더 큰 걸 요구하는 거니까.

마음이 시끄럽다. 제 욕심을 차리라는 시끄러운 소리와 양심도 없냐는 외침이 부딪쳤다. 적당히 지금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싶은 한편으로, 다가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생각이 맞서 싸운다. 그리고 그 싸움의 승자는….

* * *

“뭐예요?”

“…저녁.”

민망함에 목구멍이 막힌다. 빤히 보이는 속을 숨긴 채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는 시각적 정답을 읊어댔다. 당연히 음식에 대한 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의도를 물어보았던 것이었기에 도윤범은 별다른 대꾸 없이 식탁에 앉았다.

조용히 시작된 식사 자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적막해져 갔다. 이런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 보니 남도하 제가 식사를 준비한 것도 처음일 뿐만 아니라, 이리 어색한 식탁도 처음이다. 항상 무언가 대화가 끊이지 않았던 식탁 주변엔 밥알이 목구멍에 턱 걸려 버릴 것 같은 적막이 대신했다.

“다음부터는 하지 마요, 이런 거.”

그리고 기어이, 먼저 식사를 끝내고 자릴 지키고 앉아 있던 도윤범의 입에서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남도하가 마지막 밥 한 숟갈을 목구멍으로 넘긴 참이었다.

“…어?”

고개가 삐딱해진 도윤범의 얼굴이 참 낯설었다. 타박 같기도 하고, 화를 내는 것도 같다. 그 한편으로는 슬퍼 보이기도 했다. 공존할 수 없는 감정인데, 그래 보였다. 어쨌든 그 얼굴에서 남도하 제가 뭔가 실수를 했다는 건 깨달을 수 있었다.

“미안.”

너무나도 조그맣게 새어 나온 목소리라 그런지, 도윤범은 자릴 털고 일어섰다. 그대로 방에 들어가 버릴 거라는 생각과 다르게, 그는 식탁을 지나 남도하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하얗고 부드러운 손이 남도하의 팔뚝을 잡았다.

“이리 와요.”

투박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부드러운 손길로 이끈 도윤범은 남도하를 소파에 앉혀 놓은 채 주방으로 돌아가 설거지를 했다. 속이 복잡해 가만히 앉아 있는 쪽이 더 곤욕이란 걸 모르는 배려였다. 하지만 남도하를 소파에 앉힌 그는 틀림없이 기다리란 말을 남겼다. 지금만큼은, 도윤범이 법이고 규칙이었기에 그가 앉으라 한 자리에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기다려야 했다.

“다음부터는… 진짜 하지 마요.”

“어? 어.”

어느새 설거지를 끝낸 그가 남도하의 옆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보통 땐 소파의 끝과 끝에 앉아서 TV를 보곤 하던 것과는 다르게, 팔 하나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정신을 놓고 있다 들려온 말의 뜻도 헤아리지 못한 채 답을 해 버렸다.

“하아… 음식 같은 거 차리지 말라고요. 그러면 정말… 화낼 거예요, 저.”

그릇 몇 개를 씻어내는 사이, 도윤범은 어떤 감정을 흐르는 물에 떠내려 보낸 것 같다. 그의 목소리는 한결 차분해졌다. 완전히 괜찮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아까처럼 입만 열면 나오던 가시는 거둬졌다. 하지만 부단히 노력하는 게 보였다. 그랬기에 남도하는 이번에도 고개를 주억이며 그가 원하는 대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윤범아.”

그리고 지금.

“나 그거 꼭 하고 싶어.”

남도하는 이 마음 약한 남자를 이용하기로 했다.

“…이유는요? 이번에도 그냥이에요?”

올곧게 쏟아지는 시선이 무겁다. 그 눈빛은 마치 남도하 제 비밀을 모두 들춰내려는 양 매서웠다. 당장에라도 두 어깨에, 두 다리에 달라붙은 수많은 변명을 토해 내며 자기변호를 하고 싶었지만….

“…어.”

그럴 수 없었다. 차라리 그냥 이기적인 쪽을 택하고 싶었다. 적어도, 도윤범에겐 그러고 싶었다. 구질구질한 현실을 토로하는 것보다는 그쪽이 낫다고 생각했다.

“해요… 형이 하고 싶은 거.”

아까와 비슷한 내용이었지만, 남도하는 확신했다. 이번엔 도윤범이 허락한 거라고. 어쩌면 체념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의 입에선 남도하가 듣고 싶었던 답이 나왔다.

“대신, 저한테 자꾸 비밀 만들지 말아요.”

하지만 어째서 마음이 하나도 가벼워지지 않는지 모르겠다. 저 답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서일까. 아니면 제 어깨에 떨어지는 손길이 유달리 힘없이 느껴져서일까.

“저 정말 속상하려고 하니까요.”

도윤범의 두 눈을 직시하던 남도하는 심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당장에라도 어떤 감정이 눈에서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갈망이, 허물어져 버릴 것 같은 어깨를 감싸 주고 싶은 충동이 몰려왔다. 하마터면 손이 먼저 튀어 나갈 뻔했다.

“그래…. 고마워.”

충동을, 갈망을 눌러 낼 수 있었던 건 혐오였다. 착하기만 한 어린 남자를 이용해 먹으려는 주제에. 그에게 선택지조차 주지 않고 정해진 답을 하도록 강요한 주제에. 인제야 그 상처를 보듬어 주려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도윤범의 집에 얹혀살게 되었을 때도, 지금도. 조금 더 거슬러 그를 처음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저는 도윤범의 선택지를 빼앗은 채 원하는 답이 나오도록 만들었다. ‘나에게는 사연이 있어.’라는 생각으로 합리화하며, 스스로 면죄부를 부여했다. 대가 없는 친절을 강요했다.

하지만 모든 일에 대가가 따르지 않는 건 아니다. 남도하 제 선택이 언제나 옳은 건 아니었다. 도윤범의 말을 따르지 않은 대가는, 착한 그를 이용한 대가는… 생각보다 커다랗게 돌아왔다.

예상치도 못했던 방향으로.

* * *

-보증금이랑 월세 좀 올려 줘야겠어.

“거기 도둑 들어서 지금 살지도 못하고 있는데요.”

-도둑은! 없어진 것도 없다면서?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 집값 떨어지니까.

전화기를 잡은 남도하는 짜증이 치솟았다. 지금은 살지도 못하는 빌라의 집주인 전화였다. 대뜸 연락해 꺼낸 말이 월세와 보증금을 올려 달라는 말이었다.

-보증금은 지금보다 500만 더 주고, 월세는 15. 그래도 요즘 이 동네 시세보다 싼 거야.

속이 갑갑해졌다. 누군가에겐 저렴할지 모를 그 월세마저 버겁기만 했다. 제대로 관리라는 걸 해 주지도 않으며 뜯어가는 관리비도, 공과금도 아깝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태연하게 말하는 15만 원이라는 금액을 더해 보니 매달 저걸 내고 살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거기에 얼마 전 집에서 받았던 연락마저 떠오르자 생각은 빠르게 정리됐다.

“집 뺄게요.”

이미 꽤 여러 번 이사를 다녔다. 조금 더 보증금이 적고 월세가 싼 곳을 찾아서. 이젠 정말 서울 밖으로 빠져나가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 막막하긴 했지만, 며칠 간격으로 돈을 재촉하는 전화가 걸려 오는 걸 지켜보고 있느니 보증금을 빼서 집에 보내 주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 그리고 한 달 정도만 지나면 살인자의 밤 출연료가 들어올 테니 그때까지만 버티면 보증금은 다시 만들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무슨 전화예요?”

전화를 끊고 한참 머리를 굴릴 때, 도윤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빌라를 빼기 전에 그와 먼저 이야기 나눴어야 한다는 걸.

“그… 윤범아.”

미치겠다. 왜 이렇게 도윤범에게 신세 질 일만 연이어 벌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남도하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나 전에 살던 집 있잖아.”

“네. 거기 청소는 끝냈는데….”

“아… 그래?”

조금 더 미안해졌다. 남도하가 잊고 있던 사이 도윤범이 거기마저 관리하고 있었나 보다.

“그냥 텅 비었어요. 남은 것도 없고요. 경찰도 범인을 잡는 건지, 마는 건지 모르겠네요.”

“원래… 그런 건 잡기 힘들어.”

“아무래도 동네가 좀… CCTV도 없고 그랬으니까요. 근데 거기가 왜요?”

“아… 그게… 그 집 나오려고 하는데….”

정확히는, 이미 나오기로 했다. 도윤범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잘했어요.”

“어?”

“안 그래도 거기 위험해서 맘에 안 들었거든요.”

“그렇긴 하지…. 그래서 말인데….”

“괜찮으면 여기서 지내요. 새집 구할 때까지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싶었는데, 이번에도 도윤범이 먼저 남도하가 듣고 싶던 말을 들려줬다. 남도하는 이를 악물었다. 휴대폰을 쥔 손에도 힘이 가득 들어찼다.

“형 안 불편하면 그렇게 해요.”

“…고마워, 윤범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뱉어 내는 도윤범의 말은, 이번에도 남도하를 위하고 있었다. 제가 아쉬울 게 하나 없는 입장이면서도 그는 마치 남도하가 선택할 수 있는 상황처럼 만들어 주었다. 갈 곳이 없고, 돈도 없다는 초라한 현실을 내비치지 않게 해 주었다. 보증금을 빼 집에 보내 줘야 하고, 다음 출연료가 입금될 때까지 네 집에서 빌붙어야 한다는 말도 꺼내지 않게 했다.

“저도 고마워요.”

참… 쓸데없을 정도로 착한 아이다.

* * *

“생각보다 깔끔하네.”

“…뭘 생각하고 오셨길래요.”

“그냥, 어디 다 쓰러져 가는 판자촌 반지하 정도?”

“아, 예.”

집으로 들어서며 쏟아 내는 서주언의 망언에 남도하는 카메라를 한번 힐끔 바라봤다. 사전에 집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가 모든 공간을 비추게 되었다. 촬영 스태프도 최소한으로 배치되었고, 미리 들었던 말처럼 아무런 대본이나 지시 사항 한 줄 전달되지 않았다. 하지만 서주언의 망언을 보니, 적어도 이 장면이 방송을 탈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며 편하게 대하기로 했다.

“쟤는 왜?”

“쟤 아니고 윤범이요.”

“그러니까, 쟤.”

거실에 떡하니 서 있던 도윤범은 더는 싫은 티를 내지 않았다. 사전 인터뷰 때도 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이왕 방송에 나올 거 조금 더 그럴싸한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며 인테리어 소품도 몇 개 바꿨고, 폴톤에 달려가 두 손에 다 들 수도 없을 정도의 옷을 협찬받아 왔다. 음식도 어디서 잔뜩 사 와 냉장고를 채웠다. ‘냉장고는 백퍼 열어 봐요.’라는 확신과 함께.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자주 마주치는 서주언 앞에 서면 털을 바짝 세우곤 했는데, 지금도 역시 그랬다.

“윤범이랑 같이 사니까요.”

“아… 그랬지, 참.”

“…알고 있었어요?”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서주언의 태도가 더 이상했다. 남도하 제가 집을 옮겼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지만, 도윤범의 집으로 옮긴 세세한 사정까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것마저 알고 있다.

“글쎄…. 말했지, 생각보다 너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다니까.”

서주언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소파에 자릴 잡고 앉았다. 남도하도 다른 쪽 소파에 앉았다.

“근데 우리 뭐 하고 노냐.”

“그러게요.”

남도하와 서주언의 시선이 동시에 도윤범을 향했다. 남도하는 준비성 좋은 도윤범이 무언가 생각한 게 없나 싶어 도움을 요구하는 거였고, 서주언의 시선에 담긴 뜻은 이해할 수 없었다. 대본이 없으면 적어도 소재 정도는 던져 줄 거라 생각했는데, 그마저도 없으니 막막하기만 했다.

한숨을 한 번 내쉰 도윤범은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으며 입을 열었다.

“우선 장 보러 가죠.”

“미쳤어? 난 밖에 나가면 한 걸음도 못 옮기는 사람이야.”

“이런 건 원래 일상생활을 그대로 보여 줘야 돼요. 그리고, 사람들이 다 서주언 씨만 바라보고 있을 거라는 편견은 좀 버리시죠.”

“하, 나를 뭐로 보고….”

“내기할래요? 밖에 나가서 몇 명이나 그쪽한테 말 거나?”

허리를 바짝 세우고 앞으로 팔짱을 낀 도윤범은 확신에 차 말했다. 남도하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의심했다. 저 두 사람 사실 친한 사이 아닐까… 하는 의심. 항상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않아서 그렇지, 막상 입을 여니 두 사람은 생각보다 합이 잘 맞았다.

“에이…. 그래도 저… 혀, 형이 장 보는 건 좀 그렇지.”

물론, 두 사람이 주고받는 시선이 썩 다정하진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입을 열어 둘 사이의 냉기를 걷어내려 한 건데, 어색한 호칭이 걸림돌이었다.

“글쎄요… 한 열 명이나 말 걸려나.”

“하.”

“아니다. 다섯 명?”

“야, 해. 내기.”

순간 도윤범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는 상황이 제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자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그리고 저 조금 유치한 내기는, 생각보다 너무 쉽게 끝이 났다. 보는 남도하가 다 허무할 정도로, 일방적이었다.

“한 명….”

“…정확히 말하면 그건 그냥 계산하면서 인사 건넨 거죠.”

“남도하, 조용히 해라.”

많은 사람들이 서주언을 알아보긴 했다. 하지만 막상 말을 걸며 다가오는 경우는 없었다. 낮 시간대의 대형 마트여서 그랬을 수도 있고, 그들에게 따라붙은 작은 카메라를 든 스태프 탓일 수도 있다… 라고 서주언은 돌아오는 차 안에서 변명을 붙였다. ‘길 막히면 지하철 타고 다니셔도 되겠어요. 알아보는 사람 없어서.’라는 도윤범의 놀림은 덤이었다. 도윤범의 완벽한 승리였다.

* * *

“상태야.”

한상태는, 서주언의 매니저다. 지난번 도윤범이 다쳐 병원에 실려 갔을 때, 피 칠갑을 한 남도하를 전문가 솜씨로 보살폈던 인물. 제법 몸집이 좋은 그가 식탁 한가운데 자리 잡고 앉았다. 그 옆엔 세트로 함께 붙어 다니는 서주언의 스타일리스트도 있다.

“너네, 솔직히 얘기해야 돼. 아무리 방송이라도 내 편 들어주고 그러면 안 돼.”

밖에서 대기 중이던 두 사람이 불려 온 건 조금 전 만든 요리의 시식을 위해서였다.

남도하와 도윤범, 서주언은 장 봐 온 재료를 가지고 음식을 만들었다. 당연히 도윤범의 아이디어였고, 서주언도 방송 분량을 생각해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이게….”

그래서 완성된 것은 세 개의 쓰레기… 비슷한 음식이었다. 나름 깔끔한 그릇에 각자 영혼을 담아 플레이팅 했지만, 거기 놓인 내용물은 그렇지 못했다.

“꼭 세 개 다 먹어 봐야 해요…? 그냥 안 먹고 고르면 안 돼요…?”

차려진 음식을 보던 매니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스타일리스트는 기어이 울상을 지었다. 남도하는 민망함에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나름 열심히 만들기는 했는데, 워낙 요리를 해 보지 않았기에 어설프기만 했다. 혼자 사는 처지에 온갖 재료를 사다 요리를 해 먹는 건 생각보다 사치였다. 편의점 도시락이나 배달 음식이 육체적, 금전적으로 이득이었다.

물론 요리에 재능이 없기도 했다. 저것마저 도윤범이 몰래 도와준 덕분에 그나마 접시에 담을 정도로 만들어졌다. 도윤범의 것이라고 해서 크게 훌륭하진 못했지만, 어쨌든 남도하보다는 나았다. 적어도 무엇을 만들었는지는 알아볼 수 있었으니까.

“빨리 먹어.”

어쩌면 당연하게도, 두 사람의 젓가락은 그나마 색깔이라도 제대로 낸 도윤범의 파스타로 향했다. 나름 초심자를 배려해 고른 메뉴가 제일 간단한 파스타였고, 놀랍게도 말을 꺼내든 도윤범의 요리 실력마저 형편없었다. 자신 있게 요리 대결을 하자 꺼내 들 실력이 절대 아니었다. 덕분에 방송은 재밌게 나올 거 같았다. 만천하에 서주언과 남도하의 요리 실력을 까발리는 대가로 말이다.

“윤범아… 너 요리 잘하는 거 아니었어?”

남도하는 죽상을 하고 시식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조그만 목소리로 의문을 표했다. 항상 냉장고 가득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고 있었기에 도윤범이 요리를 잘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만들어낸 결과물은… 썩 훌륭하다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면조차 제대로 삶지 못한 남도하나 서주언의 것보다는 나았다.

“기회가 별로 없었어요…. 좀 배울까요…?”

“무슨. 우리 맨날 집에서 밥 먹었는데, 그럼 저 반찬들은 다 뭐야?”

“당연히 사 왔죠, 저건.”

나중에 기회를 잡아 이야기 나눠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생각해보니 집에 얹혀살기 시작하며 자연스럽게 식사까지 함께하고 있으면서도 별도로 월세나 식비, 생활비를 주지도 않았다. 남도하는 언제나 편의점 도시락이나 배달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게 일상이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편의점 도시락을 먹은 게 언제인지도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매 끼니를 잘 챙겨 먹고 있었다. 두 사람 식비만 해도 만만치 않을 거란 걸 떠올리니 조금 더 미안한 마음이 커졌다.

“이거요! 이거만 먹을 만해요. 솔직히 다른 분들은 요리 안 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그사이 시식이 끝났다. 서주언 매니저의 독설과 함께. 당연히 두 사람의 선택은 도윤범이었고, 최하점은 서주언의 몫이었다. 남도하는 꼴찌를 면한 것만으로 만족했다. 거의 새 음식처럼 남아 있는 음식의 뒤처리는 요리를 한 본인들 몫이었는데, 결국 냉장고에서 사 온 반찬을 꺼내 식사를 끝내야 했다.

* * *

“비켜.”

“싫은데요.”

“네 방도 아니잖아.”

“서주언 씨는 ‘손님’인데 편하게 주무셔야죠.”

“뭐? 서주언, 씨이?”

정말 친해졌나 보다. 침대에 양반다릴 하고 앉은 남도하는 그렇게 판단했다. 식사를 끝내고, 서주언이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를 함께 봤다. 약간 뻘쭘하긴 했지만 맥주도 한잔했다. 장보기와 요리, 영화 감상과 간단한 대화로 방송 분량은 뽑을 만큼 뽑았다는 말이다.

그러고서 지금. 도윤범은 남도하 옆에 자릴 잡고 누웠고, 서주언은 좁은 침대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도윤범을 쫓아내려 했다. 남도하는 어린아이들처럼 잠자리로 투닥거리는 두 남자가… 솔직히 조금 귀엽기도 했다.

“그럼 내가 옆방에서 잘 테니까 둘이 여기서 자요.”

그래서 그런지 또 장난을 치고 싶었다. 도윤범은 그렇다 치고,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어려워하는 서주언이 그다지 무섭지 않은 남도하였기에 가능했다.

“미쳤어?”

“싫어요!”

그냥 던져 본 말에 두 남자의 목소리가 겹쳤다. 저렇게 호흡이 잘 맞는데, 왜 저리 서로를 싫어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리고 또, 저런 반응 역시 썩 싫지는 않은 남도하였다.

결국 지루한 싸움의 승자는 도윤범이었다. 자신의 안방까지 서주언에게 내어준 도윤범은 낮에 있었던 요리 대결과 장보기 내기의 승자임을 내세우며 서주언을 쫓아냈다. 서주언은 녹화도 잊은 채 험한 말을 내뱉다가 마지못해 밀려났다.

“옆에서 자도 되는데.”

침대가 작지는 않았지만, 도윤범은 굳이 이불을 꺼내 와 바닥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같이 자도 된다는 말도 듣지 않았다. 밑도 끝도 없이 촬영 중이니 편하게 자도록 하는 것도 매니저 업무라 우기는 도윤범의 말에 설득당해 버리고 말았다.

“얼른 자요. 피곤하잖아요.”

“…어, 너도.”

“잘 자요.”

집주인을 바닥에서 자게 해 마음이 불편해 잠이 오려나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남도하는 빠르게 몰려드는 수마를 이겨 내지 못했다. 오히려 평소보다도 깊은 숙면이었다.

* * *

아직 제대로 빛도 들어오지 않는 아침에 눈을 뜬 남도하는, 침대에 멍하니 앉아 아래 누워 있는 도윤범을 바라봤다. 완전한 아침은 아니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둡지는 않았다. 몸에서 반쯤 걷혀 내려간 이불, 한쪽 사이드 심이 말려 올라간 티셔츠와 그 사이로 보이는 뽀얀 속살… 까지 분간이 가능할 정도의 빛이 들었다.

“하아….”

쓸데없이 커다란 흰색 오버사이즈 티셔츠가 문제다. 팔뚝과 목, 배를 훤히 내놓은 줄도 모르고 순한 얼굴로 잠든 도윤범이 문제다. 조그맣게 벌어진 붉은 입술은 또 어떤가…. 유달리 크게 느껴지는 침 넘어가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남도하는 세차게 머릴 털며 시야를 채우던 것들을 떨쳐 냈다.

이건, 범죄다. 잠든 사람을 대상으로 행하는 성추행. 스스로 이해되지 않았다. 대체 왜, 도윤범에게 그런 시선을 던졌던 것인지. 짧은 순간이었음에도 그를 이상한 눈빛으로 훑은 제가 혐오스러웠다. 흘러내린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 주고, 그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일어났어?”

뒤꿈치를 들고 걸음을 옮기고, 숨도 참은 채 방 밖으로 나와 방문도 살살 닫았다. 도윤범이 깨지 않도록 말이다. 그런 노력도 무색하게 문고리를 닫자마자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내지를 뻔했다. 식탁에 엉덩이를 기대고 선 서주언은 커피 잔을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은 아침의 풍경과 어울리지 않았다. 마치 잠을 자지 않은 것처럼 투명한 얼굴뿐만 아니라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와 옷가지. 아직 해가 떠오르지도 않은 시간인 걸 감안하면 지나칠 정도로 완벽했다.

“뭐… 잘 때도 셔츠 입고 자요…?”

“잠옷인데, 이거.”

이래서 다들 서주언, 서주언 하나 보다. 요즘 자주 마주치다 보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편한 장소에서 보는 그의 모습이 또 새로웠다. 어떤 상태에서도 절대 망가질 수 없는 외모, 말이다. 그의 자신감은 아마도 저 얼굴에서 기인하는 것일 테다. 대중의 인기 여부와는 관계없이 저 얼굴을 달고 있다면 없던 자신감도 치솟을 것 같다. 저런 고가의 브랜드를 잠옷으로 쓰는 것마저 참 그답다.

“커피 줄까?”

서주언의 물음에 하마터면 그러자 할 뻔했다. 저래서 몇 년째 커피 CF를 놓치지 않나 보다 싶었다. 그는 보는 사람이 다 커피를 마시고 싶어지도록 만드는 재주가 있다.

“아뇨, 저는 아침엔 다른 거 마셔요.”

남도하는 냉장고로 가 줄 맞춰 서 있는 탄산수병을 꺼내 들어 단번에 반병 가량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제야 옅게 남아 있던 잠기운도, 방안에서 이유 없이 차오르던 열기도 날아가는 것 같았다.

“너 아침부터 탄산수 마시면 속 버려.”

“습관이에요.”

모르진 않지만 어쩌겠나. 몇 년을 이어 온 버릇이라 차가운 탄산수를 마셔야만 아침에 정신이 들었다.

“안 그래도 신기하더라.”

“뭐가요?”

“그거.”

서주언은 턱 끝으로 남도하가 손에 쥔 유리병을 가리켰다.

“이게… 왜요?”

“그거 한국에 안 들어오는 건데.”

“…그래요…?”

남도하는 스스로 둔감한 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십수 년을 이어 오던 일상과 다른 삶을 살게 된 탓인지, 조그마한 변화들을 눈치채지 못하곤 했다. 그럴 정신이 없었다는 쪽이 맞을 것 같다. 머리가 잘린 쥐가 든 택배 상자가 배달되는 와중에 남의 집 냉장고의 탄산수 브랜드를 신경 쓰고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물도 그렇고. 노르웨이 빙하수를 여기서 볼 줄은 몰랐어.”

물이 들어 있는 유리병이 생소하긴 했다. 하지만 요즘 워낙 많은 생수가 쏟아져 나오곤 했으니 많은 브랜드 중 하나일 거라 가볍게 넘겼다. 매일 마시는 물의 국적까지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뭐… 요즘 인터넷으로 다 살 수 있으니까요.”

어리다고, 대학생이라고, 인턴이라고 해서 노르웨이 빙하수를 마시면 안 되는 건 아니다. 누군가의 입장에서는 허세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 안의 사정을 모르면서 저리 비틀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남도하는 서주언의 옅디옅은 웃음을 그리 해석했다. 그래서 저도 잘 모르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도윤범의 편을 들었다. 어쩌면 자기변호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치고. 아침엔 뭐 해?”

매사 그렇듯 서주언은 대수롭지 않게 화제를 전환했다. 길게 이어 가고 싶은 감정은 아니었으니 남도하도 적당히 그 의도에 따르기로 했다.

“저는… 조깅하는데요. 같이 갈래요?”

“뭐, 그래. 어쨌든 오늘까지는 네 생활에 맞춰야 하니까.”

남도하가 방에 들어가 도윤범이 깨지 않게 숨죽이며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사이, 서주언도 적당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남도하는 습관처럼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으려다 멈췄다. 아무래도 같이 달리는 사람이 있는데, 평소처럼 귀를 막아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가요.”

아침만큼은 벌써 완연한 가을 날씨였다. 푸르스름, 아침 해가 떠오를락 말락 한 시간에 밖에 나오자 머리가 맑아지는 시원한 공기가 몸을 감싸고, 폐부를 채운 숨마저 개운했다. 쌓인 줄도 몰랐던 스트레스까지 풀리는 기분이다. 느릿하게 달리기 시작한 그들의 옆으로 한 명의 방송 스태프만 따라붙었다. 있는 듯 없는 듯 해 그다지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점점 더 이상하네.”

“또 뭐가요.”

서주언도 운동을 부지런히 하는가. 남도하는 그의 상태를 봐 가며 달리기 속도를 올리고 있었음에도 그는 뒤처지지 않고 옆에 붙어 달리고 있었다. 다소 거칠어진 호흡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태연하기만 했다.

“신발이랑 재킷.”

“…….”

“네가 산 거 아니지?”

물어오는 말은, 확신이었다. 달리며 돌아본 그의 얼굴 역시 그랬다.

“선물 받은 건데요.”

“이어폰도 그럴 거고.”

“…어떻게 알았어요?”

남도하는 뚝, 멈춰 섰다. 서너 걸음 더 달려 나가던 서주언도 몸을 돌린 채 제자리에서 느릿하게 두 다리를 교차하며, 멈춰 선 남도하를 바라봤다.

“누가 전 세계에 30켤레밖에 안 나온 신발을 신고 조깅을 하겠어.”

토끼 가면의 모습이 빠르게 뇌리를 스쳤다.

“트레이닝 재킷이랑 이어폰도 그렇고. 돈이랑 상관없이 구하기 힘든 것투성이잖아, 네 옆엔.”

도랑도랑이라는 의문의 팬 카페. 실존 여부를 확인하진 못했지만, 틀림없이 있을 거다. 제일 믿을 수 없는 남자가 말해 준 이야기임에도 이상하게 그럴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믿음은 괴한의 행동에서 기인한다. 그는 적어도, 남도하에게 피해를 끼친 적은 없었으니까. 거친 언행과는 별개로 말이다.

“너도 모르지, 그거 준 사람.”

“…….”

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때때로 무언은 긍정이 되곤 했다. 서주언은 남도하의 침묵을 그렇게 해석했다.

“도와줄까?”

“…네?”

“스토커 잡는 거.”

서주언도 제자리에 멈춰 섰다. 여전히 땀방울 하나 흘리지 않으며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는 모습이 신기할 정도였다. 작게 거칠어진 숨을 토해 내는 입꼬리가 장난스럽게 들려 올라갔다.

“그거 생각보다 잡기 쉬울 수도 있거든.”

“…스토커가 준 거 아니에요.”

“그럼?”

남도하는 그런 그를 지나쳐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제 팬이 준 거예요.”

스토커라….

과연 그를 스토커라 칭할 수 있을까. 남자는 무단 침입을 하고 칼을 들이댔다. 죽이겠다는 협박을 서슴없이 뱉어 내고, 포옹을 강요했다. 억지로 음식을 먹인 건 가벼운 축에 속한다.

서주언의 말을 깊은 생각 없이 반박하긴 했지만, 달리며 생각해 보니… 스토커가 맞는 것도 같다.

“근데… 어떻게 잡는데요…?”

“팬이라며?”

“…아무튼요.”

그리고 내심 그의 정체가 궁금하기도 하다. 악의적이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정체도 모르는 남자가 허구한 날 방에 침입하는 그 기분이 썩 좋을 수는 없으니까. 딱, 절반의 마음이다. 그의 실체를 알고 싶은 마음과 몰라도 상관없을 것 같은 마음. 도랑도랑 역시 그렇다.

“그걸 어떻게 해야 하냐면….”

갑자기, 서주언의 몸이 남도하를 향해 쇄도했다.

“이렇게.”

두 팔을 벌리며 쓰러질 듯 달려드는 그를 얼떨결에 받아 내야 했다. 언뜻 보기엔 스텝이 엉켜 넘어진 것 같기도 한데….

“뭐, 뭐 하는 거예요?”

의문을 표하는 남도하에게 서주언의 얼굴이 가깝게 다가오며, 얼굴에 머리칼이 닿을 정도로 거릴 좁힌 채 귓가에 나직이 한 단어만 읊조리고 떨어져 나갔다.

“덫.”

* * *

“하루 살기 첫 촬영 어떠셨어요?”

“어… 별로 촬영 같지 않았어요. 그냥 집에서 하루 쉬는 기분이었어요.”

똑같은 카메라 앞인데, 대본을 외워 연기할 때와는 또 다른 어색함이 몰려온 남도하는 옆에 앉은 서주언을 한번 훑었다. 옳은 답을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예능이 처음이라. 그래서 질문을 던진 건 작가였는데 서주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 눈빛을 읽은 것인지 서주언이 말을 이어받았다.

“우리 평소에 놀던 거랑 비슷하다는 말이에요. 저희 생각보다 친하거든요.”

남도하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붙인 말이 그럴싸했다. 남도하의 집에서 진행된 ‘하루 살기’ 촬영이 끝나고, 두 번째로 서주언의 일상을 함께하기 전 진행되는 사전 인터뷰였다.

“원래요?”

“네, 원래. 우리 서로 비밀도 꽤 많이 알아요.”

“어떤 비밀이요? 궁금해요.”

“얘기하면 도하가 싫어할 거 같은데… 해도 돼?”

새빨간 거짓말이다. 대본 리딩장에서 만난 게 처음이고, ‘서로’의 비밀이 아니라 남도하의 비밀을 서주언이 일방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남도하는 여전히 서주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목 끝까지 새어 나오려던 반박을 가슴속으로 눌러 냈다.

“그만 놀려요… 형.”

능글맞은 웃음을 걸고 있는 저 면상이 조금만 못생겼어도…. 남도하는 속마음을 숨긴 채 당장에라도 뭔가 발설할 것 같은 서주언을 조곤조곤 말려야 했다. 어쨌든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기도 하고, 사이좋은 모습을 내보여서 나쁠 건 없으니까. 예능 경험이 없기는 서주언도 마찬가지일 텐데 그는 능숙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그러면 오늘은 주언 씨 집에서 보내는 거죠?”

“우선 촬영 먼저 끝내야 하는데… 집은 아니고 다른 데로 갈 겁니다.”

남도하도 처음 듣는 이야기라 말을 뱉어 낸 장본인을 바라봤다. 별도로 정해진 대본이 없었으니 방송 분량 역시 본인이 채워야 했다. 그래서 막연히 서주언도 별다른 준비 없이 집에서 하루를 보내려 하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따로 생각해 둔 게 있나 보다.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걸고 남도하를 마주 봤다.

“재미있을 거예요.”

* * *

“재미? 재미 같은 소리 하네….”

“그러니까요. 저거 진짜 또라이 아니에요?”

흔치 않게 남도하의 입에서 진심 섞인 짜증이 튀어나왔다. 그보다 더한 말로 거드는 도윤범을 말리지도 않았다. 그럴 만했다. 서주언은 드라마 촬영이 끝나자마자 제가 직접 차를 운전해 이동했다. 남도하는 옆자리, 뒷자리에는 두 매니저가 자리한 채 한참이나 달렸다. 두어 시쯤 서울에서 출발한 차는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갈 때쯤 목적지에 다다랐다.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등 뒤엔 알록달록 찬란한 빛깔로 단풍이 물들어 가는 산이 펼쳐져 있고, 앞으론 넓은 강이 멈춘 듯 고요하게 흘렀다. 불어오는 바람이 조금 쌀쌀했지만, 적당히 시원했다. 오랜만에 도심을 벗어나 맞이하는 풍경 무엇 하나 싫지 않았다. 하지만….

“빨리 가져와.”

“하아… 가! 가요!”

그곳이 하룻밤 잠자리가 된다면 이야기가 또 달랐다. 뒤늦게 알아챘다. 도착한 곳이 캠핑장이라는 걸. 평일이라 그런지 널따란 잔디밭이 텅텅 비어 전세를 낸 것처럼 조용했다. 그 적막한 공간을 남도하와 도윤범의 앓는 소리와 짜증 섞인 투덜거림이 채웠다. 서주언은 그림이 좋아야 한다며 모닥불을 피우고 있었고, 남도하와 도윤범은 조금 떨어진 주차장에 세워 둔 차에서 커다란 텐트와 캠핑 용품을 바리바리 짊어져 옮겨야 했다.

“무슨 텐트가 돌덩이도 아니고 이렇게 무….”

불을 피우던 서주언 옆에 짐 덩어리를 던지듯 내려놓으며 뱉어 내는 남도하의 말에 서주언이 입만 뻐끔거렸다.

‘협찬, 협찬이야.’

“…가, 가볍지…. 원래 텐트는 엄청 무겁잖아요, 그쵸…?”

“쯧. 그래 가지고 협찬 퍽이나 해 주겠다.”

급히 말을 바꿔 봤지만, 서주언의 입에선 타박이 튀어나왔다. 말실수를 한 것인가 싶어 걱정했던 긴장이 한순간 풀어졌다.

“뭐야, 협찬 아니었어요?”

“당연히 협찬이지.”

“…근데 그렇게 대놓고 협찬이라고 말해도 돼요?”

“몰라? 못 쓰면 편집하겠지.”

어쩌면 저리 모든 일을 제 편한 대로 생각하고 넘길 수 있을까. 남도하도 고갤 털며 더는 협찬 건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 못 쓰면 편집하겠지.

“이런 것도 할 줄 알아요?”

서주언은 생각보다 빠르게 모닥불을 피우고, 남도하가 짊어지고 온 텐트를 펼쳤다. 당연히 방송용 쇼일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꽤 능숙한 행동이었다. 그는 매니저와 스태프가 제대로 설치하지 못해 헤매는 것까지 도와줄 정도였다. 모닥불 주변으로 네 개의 텐트가 펼쳐졌고, 저 멀리 카메라 앵글에 잡히지 않는 곳에 제작진용 텐트 두 개가 떨어져 있었다.

특별히 요리하지 않아도 되는 바비큐로 저녁 메뉴가 정해졌다. 아이스박스엔 술도 있었는데, 흔히 볼 수 없는 브랜드의 맥주와 스파클링 와인이었다. 조금은 이상한 조합이다.

“상태랑 너는 그만 빠져.”

막 식사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서주언은 도윤범과 제 매니저에게 자리를 비켜 달라 했다.

“…형, 담요 덮어요. 이제 쌀쌀해요.”

도윤범은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방송이니 서주언과 남도하 위주로 나오는 장면도 필요했으니까.

타닥, 탁.

넷이 있다 둘이 있는 탓인지, 도시에선 익숙한 인공의 소리가 하나도 들려오지 않는 탓인지 지나치게 무거운 적막이 흘렀다. 불에 삼켜지는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유일한 소음이었다. 그 불가에 나란히 앉아 다른 곳을 보았다. 남도하는 새하얗게 타오르는 모닥불을, 서주언은 그 너머 어둠 속 심연처럼 보이는 까만 물줄기를.

“빨리 물어봐.”

“…뭘요?”

적막을 뚫고 맥락 없는 재촉이 튀어나왔다.

“왜 이렇게 캠핑에 능숙하냐고, 안 물어봐?”

“아…. 많이 다녔으니까 그렇겠죠.”

“재미없네. 넌 예능 하면 안 되겠다. 애가 분량 뽑을 줄을 모르네.”

남도하 스스로 뼈저리게 느끼는 부분이었다. 그동안은 몸소 깨닫지 못했는데, 이제 보니 예능에 별다른 재능이 없었다. 막연히 이런 예능에 출연하는 연예인들을 부러워하곤 했는데, 막상 겪어보니 이건 연기와는 또 다른 분야라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그나마 서주언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는 아이스박스에서 맥주 두 캔을 집어와 하나를 남도하에게 건넸다.

“캠핑은 왜 다니는데요?”

“가끔, 가끔 사람에 지칠 때 있잖아.”

“…그렇죠.”

“그럴 때 도망쳐. 이렇게 아무도 없는 데 찾아서.”

서주언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가볍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뭔가 모르게 무겁게 느껴졌다. 그의 말이 이해될 것도 같고, 안 될 것도 같았다. 그가 사는 세상에 머무는 사람들은 모두가 서주언을 우러러볼 것이다.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무엇이라도 할 것이고, 어떤 불평도 입에 올리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곳엔 그에 걸맞은 스트레스가 있을 테니 서주언이 그들에게 받는 스트레스 또한 상상 이상일 수도 있다… 라고 감히 짐작했다. 겪어 보지 않은 일이라 쉽사리 공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사람에 지칠 때 도망치고 싶은 마음만큼은 이해할 수 있다는 거다. 서주언과는 상이한 이유였지만, 사람이 주는 스트레스가 버거운 건 남도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도하야, 너 그거 알아?”

“뭘요…?”

“우리 처음 만난 게 언제인지.”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이었지만, 남도하는 또렷이 기억한다.

“당연하죠. 날짜도 말할 수 있는데요.”

“아마 그날 아닐걸.”

“…네…?”

남도하가 기억하는 첫 만남은, 살인자의 밤 대본 리딩 날이다. 하지만 서주언은 꽤 확신에 찬 목소리로 남도하의 확신을 꺾었다.

“열여섯인가. 그때가 11월이었는데, 엄청 추웠거든. 근데 웬 미친놈이 교복 하복을 입고 학교를 돌아다니는 거야. 보니까 드라마 촬영 중이었더라고. 근데 그 꼴을 하고서 창문 아래 서서 물벼락을 내리 다섯 번을 맞는데, 애가 표정 하나 안 변해. 그러고는 컷 소리가 났는데도 물벼락 맞던 표정 그대로더라.”

“…그….”

그가 말하는 순간이 바로 기억났다. 주인공의 아역으로 출연했던 드라마였다. 나름 비중 있는 역할로, 그나마 얼굴도장을 찍은 작품이었으니 잊을 수 없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유쾌하다 할 수 없는 기억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드라마였지만, 어쨌든 남도하의 인생에 꽤 의미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었다.

“근데 아무도 수건 한 장 안 주더라고. 겉옷이라도 줘야 하는데 말이야.”

그땐 그랬다. 촬영 현장은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열악했고, 아역 하나하나까지 챙길 인력도 없었다. NG라도 냈다가는 욕을 들어먹는 일도 허다했고.

“그래서 내가 체육복을 던져 줬어. 고개 한 번 꾸벅이고 그걸 입는 놈을 보면서 생각했지. ‘아, 절대 배우 같은 건 안 해야겠다.’라고. 근데 또 한편으로는 궁금한 거야. 대체 얼마나 재밌길래 저런 표정을 하고서도 저 일을 할까. 당장 눈물이라도 터트릴 거 같은 얼굴을 하고서도 저게 그렇게 하고 싶은가 싶었어.”

남도하에겐 남아 있지 않은 기억이었다. 그때는 현실이 너무 힘들어 저런 자잘한 일까지 추억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럼….”

“그때, 우리 처음 만났어.”

좋지 않은 기억일까. 그의 기억에 악연으로 남았을까.

“나도 이름만 듣고는 몰랐는데, 나중에 찾아보니까 그게 너더라고.”

모닥불이 비치는 그의 얼굴을 보자니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근데 넌 여전히 그 표정이더라.”

누가 누구 얼굴을 논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남도하는 시끄러운 속에 맥주를 욱여넣어 잠재웠다. 어떤 얼굴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변함없이, 어쩌면 그때보다 더욱더 버거워진 짐을 생각하면 그리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니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나아지지 않는 감정이 있다. 남도하도 수 없이 물벼락을 맞던 그 날을 잊을 수 없다. 서로가 상이한 감정으로, 같은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고마워하면 되겠네요.”

“뭐…?”

“저 보면서 배우 하기로 했다면서요. 덕분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배우 된 거잖아요.”

“말은 바로 해. 네 덕분이 아니라 내 얼굴 덕분이야, 그건.”

일부러 무거워지는 분위기를 전환하려 꺼내든 말에 서주언이 정색을 하고 반기를 들었다. 장난이어야 할 말이 쓸데없이 진심 같아서 남도하는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서주언 식의 분위기 전환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맥주가 조금은… 달았다.

* * *

남도하에게는 별다른 친구가 없었다.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연기를 하느라 그런 탓이 제일 컸고, 먹고 살기 바쁜 그에게 우정을 쌓을 시간이 없는 탓도 있었다. 인맥을 유지하는 데도 생각보다 많은 돈과 시간이 들어갔다.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식사 비용 한번, 맥주 한 잔 값이 솔직히 아까웠다.

“도하가 이렇게 말이 많은 줄 몰랐네.”

그러다 보니 말수가 줄었다. 표현이 줄었다.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제대로 내비치지 않다 보니, 이제는 못 했다. 그렇게 해야만 몇 발짝 떨어진 거리에서라도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배운 덕이다.

“아님, 외로웠나.”

남도하는 제 입술을 한 번 핥았다. 혀끝에 닿는 아랫입술에서 마치 스파클링 와인이 배어 나오는 양 달큰한 향이 묻어났다. 놀리는 게 틀림없는 서주언의 목소리에 대답 대신 한번 웃고 말았다. 평소였다면 재수 없었을 그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이렇게 서주언과 말이 잘 통할 줄은 몰랐는데, 준비해 온 맥주와 스파클링 와인이 바닥날 때까지도 이야깃거리는 떨어지질 않았다. 같은 업계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서도 서로의 위치가 천지 차이인 탓인지, 동일한 주제도 서로의 입장에서 다르게 해석됐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졌다.

“…그만 잘래요.”

취했다, 완벽하게. 낯선 공간이 주는 새로움 때문인지, 그저 술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오랜만에 머리가 어질거릴 정도의 취기가 돌았다. 그 감각마저 기분이 나쁘지 않아 잠자리까지 이어가고 싶어져 먼저 몸을 일으켰다.

“같이 잘까?”

텐트로 들어가려던 남도하의 손목이 채였다. 당연히, 서주언이다. 돌아본 그의 얼굴엔 조금 전까지 가득하던 장난기가 싹 빠져 있었다. 그를 보고 남도하가 입을 열었다.

“…그럴…까요?”

서주언의 굳은 얼굴을 보자니 머리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와중에도 장난기가 솟았다. 참 이상한 일이다. 도윤범도 그렇고, 서주언도 그렇고. 누구에게나 친절한 남도하에게 있는 줄도 몰랐던 감정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지금처럼.

“너… 그러다 진짜 후회해.”

타오르던 모닥불을 오래 마주한 탓인가 보다. 사그라든 불길이 옮겨붙은 것처럼 절반의 어둠에 싸인 서주언의 모가지에 그 붉음이 옮아 와 피어올랐다. 남도하의 이런 도발을 예상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저도 장난이에요. 이것도 덫이에요?”

그런 서주언을 보며 거릴 가깝게 좁혔다. 그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곤 손을 흔들며 미련 없이 돌아서는 남도하의 기분이 실로 오랜만에 과하게 좋았다. 그 뒤에 남겨진 남자의 감정들이 어떤지도 모르고. 어떤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홀로 좋았다.

들어온 텐트 안쪽은 바깥보다 확연히 따뜻한 온기가 돌았다. 강바람 때문에 온몸에 달라붙어 있던 추위가 안쪽으로 들어서자마자 빠르게 떨어져 나갔다. 정갈하게 펼쳐진 이부자리 구석에 놓인 작은 난로가 보였다. 누구의 짓일지 그림처럼 그려졌다. 보기와 다르게 꼼꼼한 도윤범이 틀림없다. 바깥에서 가져온 감정이 여전히 긍정적인 쪽의 것이라 그런지, 연이어 떠오르는 얼굴 역시 그렇게 느껴졌다.

이제 잔다고 인사하며 잠깐 얼굴이라도 보고 올까 하다가, 따뜻해진 공기와 몸을 감싸는 침구에 홀린 듯 파고들어 버렸다. 잠기운이 짙어질 때야 방송 중이었다는 게 어렴풋이 떠오를 정도로, 좋은 시간이었다. 오늘 하루는 오랜만에 기분 좋게 마무리된다. 모든 게 만족스러웠다.

머리칼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눈을 뜨기 전까지는, 그랬다.

텐트 안엔 난로에서 퍼져 나오는 옅은 불빛만이 존재했지만, 저를 내려다보는 상대를 알아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까만 토끼 눈이라 확신할 수 없지만, 시선이 얽혔다. 머리를 쓸어내리던 손길도 뚝 멈춰 선 것으로 보아 맞는 것 같다.

“진짜 죽고 싶어요?”

그리고 그가 입을 열자마자 술기운도, 잠기운도 삽시간에 사라져 버렸다.

“죽고 싶냐고.”

지직거리는 기계음에 불만이 가득 섞여 나왔다. 그래서 그런지 그와 두 번째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가라오케에서 술에 취해 눈을 떴을 때, 딱 그때와 비슷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 때보다 더 할 수도 있을 것 같고.

제대로 답을 하지 않으면 또 어떤 화를 낼지 모르지만, 남도하의 목구멍은 공포에 막혀 버린 것처럼 벌어진 입에선 아무런 소리도 새어 나오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작게 흔들어 부정을 표하는 게 최선이었다.

“텐트에서 난로 켜고 자면 어떻게 해. 진짜 죽어요, 그러다.”

오늘은 장갑을 끼지 않았다. 차디찬 밤공기를 달고 온 손이 남도하의 뺨에 살짝 닿았다. 그러고서 건네는 남자의 말에 안도했다. 죽고 싶냐는 말의 의미가 다른 뜻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은 덕분이다.

“텐트를 좀 열고 자든지, 난로를 끄고 자든지 해야지. 알았죠?”

“…네.”

서늘하게 느껴지던 상대의 손끝에 남도하의 열기가 옮겨붙었다. 그의 손가락이 뺨을 반복적으로 쓸어내릴 때마다 서로의 체온이 맞춰졌다.

“어떻게… 왔어요?”

“고민 중이에요.”

그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상대는 남도하의 의문을 풀어 주지 않은 채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뱉어냈다.

“…죽여 버릴까, 말까… 엎어 버릴까, 말까.”

텐트 안이기 때문인지. 토끼 가면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작고, 낮았다. 남도하는 그의 입에서 한 단어, 한 단어 나올 때마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잠시 풀어졌던 긴장은 몇 배로 불어나 차올랐다.

“근데 아무나 죽이면 안 되니까, 참고 있어요.”

“…노, 농담… 좀, 하지….”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도저히 농담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상대의 발언 때문에 짧은 한 문장마저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했다. 남도하 저도, 그도 직접 언급하진 않았지만, 내심 강태운이 사고를 당한 게 아닐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어 버린 남도하의 목 아래로 남자의 팔이 파고들었다. 그러곤 그대로 굳은 몸을 일으켜 앉혔다. 여전히 생경할 정도의 힘이다.

“그러게…. 농담이어야 할 텐데.”

그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눈썹과 뺨을 지나 아랫입술을 쓸었다. 애틋하게, 다정하게, 소중한 것을 대하는 것처럼. 남도하는 느릿한 손길 덕분에 그가 생략한 주어가 본인이 아닐 거라는 생각을 했다. 항상 거친 단어를 쏟아 내는 말버릇과 다르게, 정작 그는 남도하 제게 신체적인 해를 끼친 적은 없었다.

“그… 선물이요. 돌려드리고 싶은데요.”

그래서 분위기를 돌려 보려 꺼내 본 말이, 실수였던 것 같다. 서주언에게 선물의 값어치를 듣고 나자 그대로 가지고 있기가 부담스러웠다. 이리 다시 만나면 꼭 얘기해야겠다고 다짐했던 말이었는데, 한마디 말로 상대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바뀌어 버리고 말았다.

“진짜 죽여야겠네.”

“아니, 아뇨! 그게 너무 비, 비싼 거라….”

남도하는 급히 그의 팔뚝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대화 주제를 잘못 골랐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저한테 그런 거 필요 없어요. 그냥… 그냥 팬만 해 줘요. 그런 선물 필요 없으니까요.”

“팬, 이라고.”

“…네.”

남자는 남도하의 두 손을 풀어내곤 꽤 오래 말을 잇지 않았다.

“생각이 바뀌었어.”

“…네?”

순간이었다. 남자는 남도하의 팔을 잡아채 강한 힘으로 몸을 감싸 안았다. 놀란 마음에 상대의 기분을 생각도 하지 않고 버둥거려 봤지만, 역시 무용지물이었다. 상대는 더욱더 강한 힘으로 등을 감싸 안을 뿐이었다.

“팬은 그만할래요.”

간질거리는 토끼털이 목에 닿았다. 조금 더 간격이 좁혀졌다.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남도하 제 것인지, 상대의 것인지조차 모를 정도로 가깝게. 두 사람이 입은 옷을 뚫고 서로의 체온이 섞여 버릴 정도로, 가깝게.

남도하는 어정쩡하게 공중을 맴돌던 손을 남자의 등에 감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기계음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그의 감정이, 그러하게 했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남도하는 그에게 새어 나오는 감정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힘으로 이길 수 없는 남자의 등이 한순간 무너져 버릴 것도 같았다. 이해되지 않는 감정들이 두 사람 사이에 휘몰아쳤다.

그 순간이었다. ‘딸칵’ 소리와 함께 남도하의 뒤편에 있던 난로의 불빛이 사라졌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어둠이 사위를 잠식했다. 까닭 모를 불안에 남도하는 제 품에 담긴 남자를 더욱더 힘주어 안았다. 까만 암흑에 눈이 채 익숙해지기도 전, 두 눈 위로 더 짙은 어둠이 더해졌다. 정확히는, 남자의 손이다. 감긴 눈꺼풀 위를 덮는 손길에 놀라 몸을 떼어 내려 했지만, 상대의 힘에 밀려 등이 바닥에 닿는 게 더 빨랐다.

“뭐, 뭐 하는… 읍…!”

의도 모를 행동에 의문을 표하려 입을 벌리자, 벌어진 입안으로 뜨거운 것이 밀고 들어왔다. 말캉거리고 지나치게 달궈진 살덩어리는, 다른 것으로 오해할 수 없는 신체 부위였다.

“으읍…!”

갑작스러운 상황에 입을 다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입안을 핥아 대는 혀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맞닿은 입술이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가며 두 사람의 간격을 더욱더 좁혀갔다. 혓바닥이 점점 더 딱딱해져 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며, 점막을 거칠게 쓸어 댈 뿐만 아니라 목젖까지 도망친 남도하의 혓바닥에 비벼 대길 반복했다.

두 눈이 가려져 있음에도 생경한 감각에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두 손은 바닥의 이불을 잔뜩 움켜쥐고 있었다. 숨을 쉬는 것마저 잊어버렸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을 삼켜 내고, 일부는 입꼬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남자도, 남도하도 그런 것 따위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흡…!”

호흡이 점점 더 가빠지는 것도 모르는지 남자의 행동은 더욱더 거칠어져 갔다. 입술까지 씹어먹을 것처럼 제 입에 물고 혓바닥을 비벼 대고, 남도하의 혀를 빨아당겨 묶어버리려는 양 비벼대길 반복했다. 그 탓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야가 점멸했다.

이불을 움켜쥔 손에 땀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호흡이 달리는 기분에 옅게 정신이 돌아와 남자의 몸을 밀쳐보려 했지만, 그는 한 손으로 남도하의 팔을 잡아 머리 위로 끌어 올려 눌렸다. 남도하에게는 한 손이 더 남아 있었음에도 반항을 포기했다. 그는 틀어잡은 손목이 시큰할 정도로 강하게 움켜쥐는 것으로 더 이상 반항하지 말라는 의도를 전했다.

“자, 잠깐… 으읍…!”

찰나의 시간 상대가 떨어져 나갔다가 다시 달라붙었다. 마치 흔적을 남기는 것처럼 좁은 입안을 사방으로 훑고, 빨아 대길 반복했다. 거친 행동은 남도하가 남는 손으로 그의 허리춤을 힘껏 끌어안은 후에야 멈춰 섰다.

“하아… 학….”

남도하가 거친 숨을 몰아쉬는 사이, 남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작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 다음, 남도하의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숨을 몰아쉬는 와중에 다급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어둠 사이에서 까만 토끼 눈과 마주쳤다. 상대는 누워 있는 남도하의 몸 위에 여전히 올라타 있는 자세로, 머리 양옆에 손을 짚은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팔 하나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거리를 유지한 그는, 다시 기계음을 품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 이제 안 해, 팬.”

* * *

“자요, 빨리.”

그게 가능할 리 없다.

“눈 감고.”

남도하는 누워 있는 제 옆에 앉아 있는 토끼 가면 때문에 잠이 들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순순히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그 탓에 고막까지 커다랗게 울리는 심장 소리만 더욱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 와중에 남자가 남도하의 가슴팍에 손바닥을 펼쳐 올리자 심장이 저 아래 바닥에 처박히는 것 같은 아찔한 기분까지 느껴야 했다. 그리고 손바닥 전체가 남도하의 가슴팍에 닿아 있던 남자도 비정상적인 속도로 뛰는 심장 소리를 눈치챘다.

“그러니까 술을 왜 그렇게 마셔요. 혼나요, 자꾸 그렇게 정신 못 차리고 술 마시면.”

“아, 아니… 네….”

술 때문이 아니라고 반박하려 벌어졌던 입은 그저 순순히 알았다 답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제 가슴팍이 요란스럽게 울려대는 원인을 스스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술을 탓하는 그의 말에 동조하고 말았다. 잇새에 베어 문 입술이… 여전히 뜨겁다.

* * *

한숨도 못 잤다. 그저 눈을 감고 잠든 척해야 했다. 지난밤 괴한… 아니, 남자는 남도하를 눕혀 두곤 억지로 잠을 재웠다. 가슴팍을 규칙적으로 두드리는 손길에도 당연히 잠이 들 수 없었고, 덕분에 그와 꽤 많은 대화를 나눴다. 길게 이어졌던 스킨십의 영향인지 남자는 그 앞에 보여 주던 거친 감정을 더는 토해 내지 않았다. 상당히 진정된 태도로 남도하의 수면을 재촉했다.

하지만 아예 잠들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어느 순간 정신이 흐려졌다 돌아왔을 때 남자는 텐트 안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 뒤로 이리저리 몸을 뒤척여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제게 일어난 일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라 꿈이었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거칠게 요동치는 심장 박동과 그의 타액을 머금은 것처럼 부풀어 오른 입술을 손끝으로 매만져 보면 꿈이 아닌 현실이란 걸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몰려오는 그 기억 때문에 떠오르는 태양을 맨정신으로 맞이해야 했다.

몽롱한 정신으로 러닝 복을 갈아입었다. 아직 아침 해가 완연히 밝아 오지 않아 쌀쌀하게 느껴지는 바깥공기였음에도 오히려 텐트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정신이 개운했다. 이제야 뇌가 굴러가는 것 같았다. 강 위엔 뿌연 물안개가 잔뜩 껴 있었고, 사방이 고요했다.

텐트촌을 뒤로하고 달렸다. 왼발 오른발을 규칙적으로, 점점 더 빠르게 내디뎠다. 조깅이라기 보다는 전력 질주에 가까워질 정도로. 폐부 깊이 채워져 있던 남자의 향기를 모두 거친 숨에 섞어 내보낼 정도로.

“하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박동하는 사이, 남도하는 입술을 짓씹었다. 이리 멀리까지 달려왔는데도 도통 떨어져 나가지 않는 지난밤의 기억 때문에 짜증이 몰려왔다. 그리고 그보다 더욱더 이해할 수 없는 건, 그 밤의 기억이 싫지 않다는 거다.

* * *

열두 살. 카메라 앞에 처음으로 선 이후, 초등학교를 지나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동안 학교에 제대로 간 기억이 거의 없었다. 오히려 그 나이에 어떤 작품을 했는지를 떠올리는 게 더 쉬웠다. 그만큼 학창 시절의 추억 따위가 없다는 거다. 하지만 유일하게 뚜렷한 기억이 있었다. 학창 시절의 추억이라고 부를 만한 유일한 기억은 그 아이뿐이다.

열여덟. 워낙 학교에 제대로 나가지 않는 남도하였기에 친구가 있을 리 없었다. 배우라는 허울에 학기 초엔 관심받긴 했지만, 제대로 된 작품 하나 하지 못하는 무명이었기에 아이들의 호기심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가끔 학교에 갈 때면 그저 멍하니 책상에 앉아 창밖을 구경하는 게 전부였다. 진도는 따라갈 수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우정을 유지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기에 스스로 고립되는 쪽을 택했다. 학업에 무관심한 태도와 또래보다 발육이 좋아 팔다리가 기다랗던 탓에 불량하게까지 보였다. 겉모습만 놓고 보았을 땐, 그랬다.

그런 무기력한 남도하의 학교생활에 유일한 예외가 하나 있었다. 고1이 되었을 때 같은 반 반장이었던 아이. 한 학년이 올라와서도 그는 여전히 반장을 하고 있었고, 반은 달랐다. 그럼에도 그는 남도하가 등교한 날이면 귀신같이 찾아오곤 했다.

“뭐해, 물 끓잖아.”

“아…. 죄송해요.”

라면을 끓이다 말고 갑자기 그 아이의 기억이 떠오른 이유는, 그가 남도하의 첫사랑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아침을 준비하는 순간까지 남도하의 머릿속엔 온통 하나의 일만 떠오르는 탓에 기억을 거슬러 가다 10년 가까이 된 낡은 순간까지 닿아 버렸다. 같은 남자라는 걸 제외하면 토끼 가면과 그 아이는 단 하나의 공통점도 없는데 어쩌다 거기까지 생각이 흘러가 버렸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서주언의 목소리를 듣고야 현실로 돌아와 상념을 털어내고, 끓어오르는 물에 라면을 털어 넣었다.

“잠 못 잤나 보네.”

“…그냥 잠자리가 좀 불편해서요.”

정확히는 잠자리가 아니라 마음이 불편해서다. 온 정신을 사납게 만든 키스 때문에. 아침 일찍 달리기를 하고 온 덕분에 심장이 터질 듯 쿵쾅대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온 생각이 그와의 입맞춤으로 귀결되는 건 변하지 않았다.

“형, 제가 할게요. 가서 앉아 계세요.”

남도하의 손에 들려 있던 기다란 나무젓가락을 도윤범이 채갔다. 누가 보더라도 남도하는 지금 라면 하나 제대로 끓이지 못할 상태로 보였다.

“그럴래…?”

평소였다면 괜찮다 사양했겠지만, 지금 식사 생각 자체가 없어서 고작 라면 하나 끓이는 것도 망쳐 버릴 것 같아 순순히 넘기고 말았다. 간이 의자에 앉아 멍한 시선으로 라면을 끓이는 도윤범을 보다가, 귓가에 들려오는 말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늘 아침 먹는 것까지만 촬영하면 될 거 같아요.”

“왜? 저녁까지 찍어도 되는데.”

“원래 촬영 길게 하시는 거 싫어하시면서 웬일이에요?”

서주언과 그의 매니저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서 떠오르는 게 있었다.

“형… 우리 텐트 앞에도 전부 카메라 있죠…?”

“당연하지. 지금 저기 찍고 있잖아.”

서주언의 턱짓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조그마한 카메라 앵글과 눈이 마주쳤다. 곳곳에 놓여 있는 카메라는… 지난밤에 일어난 일을 모두 담았을 것이다. 그 사실에 생각이 닿자 심장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어쩌면… 상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지 모른다.

* * *

“형,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어? 아냐.”

“오늘 왜 그렇게 정신이 없어요? 어디 아픈 거 아니죠…?”

도윤범의 손이 남도하의 이마를 짚었다. 갑자기 닿은 신체 접촉에 남도하는 화들짝 놀라 몸을 물리며 그의 손을 털어 냈다. 지난밤, 남도하의 두 눈을 가리던 어떤 손길이 떠오른 탓이다. 정확히는 그 상태로 이어진 입맞춤 때문이다.

“…왜 그래요.”

“미, 미안… 놀라서.”

딱딱하게 굳었다가, 상처받은 표정으로 변해가는 도윤범의 얼굴을 보고서야 아차 싶었다. 마치 불쾌한 것이 닿은 것처럼 지나치게 싫은 티를 내 버렸다. 손이 닿은 게 싫은 것도 아니었고, 그의 탓이 아닌데.

“미안해.”

“…괜찮아요.”

전혀 괜찮지 않은 목소리로 괜찮다 하는 도윤범을 보며 남도하는 갑갑한 숨을 내쉬곤, 화제를 돌렸다. 날 선 반응을 내비친 이유를 설명할 수도 없으니까.

“윤범아.”

“네?”

“그… 우리 어젯밤 촬영 영상 좀 보자고 할 수 있을까?”

“볼 수는 있을 거 같은데… 왜요?”

“뭐 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도윤범은 여전히 조금 가라앉은 표정을 한 채 한참이나 남도하를 바라봤다. 얼굴이 뚫어질 것 같은 강렬한 눈빛에 애써 속마음이 티 나지 않게 숨겨야 했다. 최대한 태연함을 가장했다. 길어지는 그의 침묵 때문에 아니라고, 괜찮다고 말을 바꾸려 할 때, 도윤범의 입이 열렸다.

“그래요. 보러 가요.”

앞장서는 도윤범을 따라 연출진이 머무는 대형 텐트로 향했다. 아침 식사 장면을 찍는 것으로 촬영은 마무리가 돼 그들도 짐을 챙기는 중이었다.

“죄송한데 어젯밤 촬영 영상 좀 확인할 수 있을까요?”

“네, 어떤 거요?”

카메라를 정리하던 스태프는 대수롭지 않게 허락했다. 도윤범도 정확히는 듣지 못했던 탓에 뒤로 돌아 남도하를 바라봤다.

“형, 어떤 거요?”

“제 텐트 입구 부분 찍은 거요.”

당장 카메라를 보여 주려던 스태프는 남도하가 콕 찍어 말을 하자 제 뒷머리를 긁적이며 움직임을 멈췄다.

“그게… 거기 영상이 다 지워져서요.”

“지워져요…?”

“하아…. 저도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선배님 텐트 앞쪽 찍던 카메라만 싹 날아갔어요….”

어린 스태프는 다른 사람에겐 꼭 비밀로 해 달라는 말을 덧붙였다. 감독이나 작가가 알면 크게 혼이 날 거라면서. 곤란해하는 그에게 괜찮다는 형식적인 말을 건네고 빠져나왔다.

하긴…. 상대가 그 토끼 가면이라면, 이리 간단하게 그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을 리 없을 텐데. 멍청한 생각이었다.

“형, 갑자기 텐트 앞은 왜요?”

“…한번 보고 싶어서.”

“보고… 싶어요…?”

“응.”

처음으로, 그 무서운 남자가 기다려진다. 온 정신을 사납게 하는 이 감정을 빨리 확인해 보아야 한다. 생소한 감각으로 사고를 좀먹어 가는 감정을 떨쳐내려면 그를 다시 만나야 할 것 같다. 다시 마주하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 * *

“윤범아, 빨리 앉아 봐.”

“왜요?”

수건으로 머릴 털며 나오는 도윤범을 낚아채 소파로 끌고 와 앉혔다.

“이게 뭐예요…?”

“너 다친 거도 다 나았고, 오늘 예능 첫 방송이잖아.”

“아….”

도윤범이 씻는 사이, 남도하는 거실 테이블 위에 술상을 차려 두었다. 원래 독한 술은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고, 냉장고에도 맥주만 몇 개 있을 뿐이었기에 술은 자연스럽게 맥주로 정해졌다. 요리엔 별 재능이 없다는 걸 얼마 전 뼈저리게 느꼈기에 메뉴는 치킨으로 시켰다.

“저한테 얘기했음 만들어 드렸을 텐데요….”

“무슨. 치킨은 사 먹어야 맛이지.”

더군다나 도윤범 저도 요리를 그리 잘하지 못하면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두 사람이 지금부터 달라붙어 준비해도 내일 아침에나 끝날 거다. 맛을 장담할 수 없는 건 당연하고.

“빨리 앉아. 보면서 먹자.”

드라마 촬영은 다행히 평소보다 일찍 끝났다. 덕분에 토요일 여섯 시, ‘하루 살기’ 첫 방송을 볼 수 있게 됐다. 서주언과 남도하 서로의 하루를 함께 사는 체험을 끝내고, 방송국에서 진행된 녹화도 별다른 문제 없이 끝이 났다. 같이 출연하는 양우준의 날 선 시선을 받아 내야 하긴 했지만, 그 정도는 일상과도 같았기에 문제라고 칠 수도 없었다.

“저는 별로 생각 없는데….”

“…그럼 나 혼자 봐? 같이 먹으려고 치킨도 시켰는데…?”

남도하가 반칙을 썼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불쌍한 척을 하며 도윤범의 팔뚝을 붙잡았다. 혼자 보아도 무방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느새 도윤범과 함께하는 시간이 익숙해져 있었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모든 시간을 공유하고 있었음에도 이상할 정도로 불편하지 않았다. 마치 오랫동안 함께했던 사람처럼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도윤범은 ‘혼자 살기’ 촬영을 반대했고, 그 고집을 꺾은 건 순전히 남도하 제 욕심 때문이었다. 그의 집에 얹혀사는 주제에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에 무리한 부탁을 했다. 여전히 미안한 마음이 컸기에 이런 유치한 방법으로 재차 사과하고 있는 거다.

“알았어요. 봐요, 같이.”

이번에도 도윤범은 남도하의 마음을 불편하지 않게 해 줬다. 소파 아래 바닥에 앉아 맥주를 들었다. 남도하는 도윤범의 뒤통수를 보며 소파에 앉았다. 동글동글한 머리통이 눈에 들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그 뒷모습이 귀여워 남도하는 앞에 있는 도윤범의 머리칼을 헤집어 댔다.

“…마셔요.”

“어, 고마워.”

한참 그러고 있다 도윤범이 건네주는 맥주를 받아 들었다. 맥주 한 캔을 다 비워 낼 때쯤, TV 광고가 끝나고 ‘혼자 살기’ 첫 방송이 시작됐다. 남도하의 첫 예능 출연 작품이자, 드라마 ‘살인자의 밤’ 홍보를 위한.

“벌써 인터넷 난리더라고요.”

“그렇겠지. 서주언이 나오는데 조용한 게 더 이상하지.”

“전 서주언 그렇게 잘생겼는지 모르겠던데.”

“…왜? 왜 몰라…?”

“서주언보다 형이 더 잘생겼어요.”

동그란 뒤통수가 귀여운 소리를 한다. 형식적인 칭찬이란 걸 알면서도 썩 싫지는 않은 말이었다. 나이가 어려 그런지 저런 낯간지러운 소리를 진심처럼 잘도 뱉어 내곤 했다. 어쩌면 그저 가벼운 농담일 수도 있고.

“아, 시작한다. 이리 올라와서 봐.”

방송국 세트에서 촬영한 장면으로 방송이 시작했다. 서주언의 근황에 대한 인터뷰로 자연스럽게 드라마를 홍보했다. 물론, 저 멘트도 모두 정해진 대본이었다. 서주언의 연기가 워낙 뛰어나 그게 느껴지지 않을 뿐.

“근데 양우준이 왜 저기 들어가요?”

“우준이…? 쟤 나름 인기 많아.”

“…그래요?”

“쟤 누군지 몰라?”

“몰라요. 회사 와서 처음 봤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이름만 대면 아는 아이돌 그룹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멤버였는데. 그랬기에 이번 드라마 비중과 관계없이 예능에 함께 섭외되었다. 편집을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인지, 다른 배우들의 분량이 먼저 방송을 탔다. 누군가는 남도하처럼 집에서 보내는 모습을, 누군가는 촬영장에서, 또는 어울리지 않게 봉사 활동을 가기도 했다.

“저건 욕먹겠네요.”

“…그러게.”

양우준이 그랬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어울리지도 않게 여자 주연을 맡은 배우와 함께 보육원을 찾았다. 가식 같은 모습이 막 지루해지려던 순간, 화면이 넘어가며 남도하의 집 현관 모습이 나왔다. 정확히는 도윤범의 집.

-생각보다 깔끔하네.

-…뭘 생각하고 오셨길래요.

-그냥, 어디 다 쓰러져 가는 판자촌 반지하 정도?

-아, 예.

첫 방문 때 서주언이 쏟아 낸 독설이 아무런 편집 없이 방송을 탔다. 틀림없이 그 당시만 해도 충분히 진심처럼 느껴졌었는데, 어우러진 자막과 MC들의 가벼운 목소리 덕분에 상당히 장난스럽게 변해 있었다. 스튜디오에서 이 장면을 보고, ‘저거 저대로 방송 타도 괜찮아요?’라고 서주언에게 물어보았지만, 그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투로 넘겼다.

방송은 큰 문제 없이 끝을 향해 갔다. 그런데 스튜디오에서 보았던 것과는 다른 화면이 흘러나왔다. 남도하와 서주언이 새벽같이 나가 조깅을 하는 장면이었다. 두 사람이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며 달리다가, 서주언의 다리가 엉키며 남도하를 향해 쇄도하는 모습이었다. 카메라마저 거칠게 흔들려 마치 다급한 상황에 남도하가 서주언을 구해 준 상황처럼 보였다. 그 장면을 끝으로 다음 화의 예고편이 나왔다.

“…저게… 왜 저렇게 끝나냐….”

예고편이 흘러나오던 중, 도윤범이 TV를 꺼 버렸다. 까만 화면이 나오고서도 한참이나 거실엔 무거운 침묵만 흘렀다. 길어지는 정적에 남도하는 옆에 앉은 도윤범의 눈치를 살피게 됐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저 차갑게 식은 거실 공기로 무언가 긍정적이지 못한 상황이란 것만 눈치챌 수 있었다.

“그만 쉬어요. 내일 아침부터 촬영 있잖아요.”

“어…?”

“먼저 들어갈게요.”

“저기, 윤범아….”

빈 맥주캔을 우그러트린 그는,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남도하의 부름에도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탁- 소리와 함께 방문이 닫히고, 남도하는 소파에 깊게 몸을 파묻었다. 그제야 숨이 쉬어지는 기분이었다. 왜 도윤범의 눈치를 살폈는지, 왜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고 판단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구도 손대지 않은 다 식은 치킨만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것마저 남도하의 마음을 조금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가슴 속에 자리 잡았던 작은 불안과 불편은, 마치 전조 증상이었던 양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 * *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이요.”

남도하는 어쩌면 자신이 찔리는 게 너무 많아 지나치게 눈치를 보았나 싶었다. 지난밤 먼저 방으로 들어간 도윤범은, 오늘 아침 평소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같이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촬영장에 가기 전 회사에 들를 때까지도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 불변이 남도하의 마음에 남아 있던 불편한 감정을 씻어 주었다.

“근데… 확실히 방송이 효과가 있나 봐요.”

“…그런가.”

남도하도 도윤범의 말을 이해하고 있었기에 뻘쭘하게 제 뺨을 긁적였다. 두 사람 모두 의도적으로 창밖을 등지고 서서 커피가 나오길 기다렸다.

“우리 도하 형 아주 뚫어지겠어요….”

“…그냥 보는 거겠지.”

원인은, 길 건너 소속사 앞을 서성이는 아이들이었다. 회사에 차를 대고 길 건너 카페에 커피를 사러 오는 사이, 두 사람을 향해 진득한 시선이 쫓아왔다. 그 시선은 카페의 통유리창 너머까지 달라붙어 있었다. 가까이 다가오진 않았지만, 오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곧은 시선들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관심이 낯설어 남도하는 애써 외면했고, 도윤범은 작은 못마땅함을 내비쳤다.

“가요. 이젠 진짜 경호까지 해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농담 그만해라.”

“저도 농담이었으면 좋겠네요.”

말 같지도 않은 도윤범의 투정을 들으며 커피를 들고 회사로 걸음을 옮길 때였다. 건물 앞 인도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일행 중 몇이 빠르게 다가왔다. 마치 그대로 몸통을 갖다 박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거침없는 속도로 다가오는 아이들을 보며, 도윤범은 남도하를 제 뒤로 감쌌지만….

“그, 매니저 오빠 맞죠?!”

여자애들의 관심 대상은 남도하가 아니었다. 서너 명의 아이들을 시작으로, 뒤편에서 서성이던 다른 사람들까지 남도하와 도윤범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서주언이랑 원래 친하냐,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되냐, 몇 살이냐, SNS 안 하냐는 둥. 끝없는 질문이 쏟아졌다, 도윤범에게. 묻지도 않은 채 휴대폰 카메라부터 들이미는 사람도 있었다.

“…죄송합니다.”

마치 공격하듯 거리를 좁혀오는 인파에 당황한 남도하가 도윤범의 팔을 잡아끌고 회사 건물로 도망치듯 들어와야 했다. 뒤에서 시끄럽게 부르는 소리에도 걸음을 멈추지 않고 빠르게 로비 안쪽으로 들어섰다.

“뭐, 뭐예요, 저게…?”

“…그러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의 원인은 한참 만에야 알아낼 수 있었다.

“이야, 이게 누구야. 실검 1위 커플이네?”

“…….”

대기실로 들어오는 이원호의 얼굴에 웃음이 한가득했다. 비웃음은 아니었지만, 남도하와 도윤범은 미소로 화답하지 못했다.

“어떻게 된 게 윤범이가 실검 1위냐. 서주언도 아니고, 살인자의 밤도 아니고.”

다들 이해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도윤범이 실검 1위를 차지해 버린 이 사건은 서주언 팬 커뮤니티에서 시작됐다. 지난밤 방송된 ‘혼자 살기’는 당연히 서주언이 모든 관심을 독차지했다. 그리고 그의 팬들은 서주언뿐만 아니라 그에게 필터링 되지 않은 말을 거리낌 없이 뱉는 도윤범에게 꽂혔다.

서주언 팬 커뮤니티 특유의 분위기가 그랬다.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쪽보다는 친구처럼 가볍게 여기곤 했다. 그랬기에 누구도 감히 서주언에게 하지 못할 말을 태연히 입에 올리는 도윤범마저 밉지 않게 받아들였다. 당연할지 모르겠지만, 도윤범의 얼굴 역시 한몫했다. 들불처럼 퍼져 나간 짧은 영상 몇 개는 밤사이 포털과 커뮤니티를 잠식했다.

“넌 그래도 어떻게 서주언이랑 그런 내기를 하냐.”

가장 높은 조회 수를 기록한 영상은, 도윤범의 도발로 서주언과 내기를 하는 장면이었다. 다음은 요리 경연. 그리고 그다음은 잠자리 쟁탈전. 하나같이 도윤범과 서주언이 맞서는 장면이다.

“저건 금방 사라질 거예요. 대신 우리 도하 형이 올라가야죠.”

한참 만에 도윤범의 입이 열렸다. 어린놈이 뭐 저리 초연한지 모르겠다. 남도하는 제가 얼떨떨한 탓에 도윤범도 같으리라 생각했는데, 열린 그의 입에서는 한 치의 흔들림도, 동요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치 타인의 이야기를 하는 듯 태연했다. 실시간 검색어 2위를 하는 남도하 저보다.

“어쨌든 너네 때문에 팀장 입이 귀에 걸렸어. 이러다 윤범이까지 연예인 하자는 거 아닌지 몰라.”

“설마요.”

“왜, 매니저 하다가 관심받아서 방송하는 애들도 있잖아.”

남도하는 건너편에 앉은 도윤범의 얼굴을 훑었다. 그의 첫인상에 대한 감상은 변하지 않았다. 연기력은 논외로 치더라도 얼굴과 태도만 놓고 보자면 도윤범은 충분한 가능성이 있었다. 호감형의 이목구비뿐만 아니라 뭔가 오묘한 분위기가 감도는 얼굴. 남성적인 한편으로 속을 알 수 없고, 진중한 듯하면서 장난스러움이 담겨 있다. 양우준보다 남성스러운 선이고, 서주언보다 친근한 얼굴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남도하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두 사람의 시선이 쏠렸다. 남도하 저도 놀랐다. 생각했던 것보다 감정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와 버렸다. 안 좋은 쪽의 감정.

“…그렇죠. 제가 무슨.”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모르겠다. 남도하 제가 어떤 뜻으로 방금 그 말을 뱉어 낸 것인지.

“괜찮아요. 어차피 저도 그런 쪽으로 관심 없으니까. 근데… 제 얼굴이 그렇게 별로예요?”

장난 같은 물음에 옆에서 방정을 떨며 도윤범의 외모를 찬양하는 이원호였지만, 남도하는 침묵을 지켰다. 솔직히 말해 당장 연예인을 하겠다고 나서면 대표가 쌍수 들고 달려올 것 같았음에도, 입을 다물었다. …이상한 욕심이었다. 대답 대신 얼음이 다 녹은 커피만 목구멍으로 넘겼다.

* * *

“난 아무래도 너희 소속사 사장한테 접대라도 받아야 될 거 같아.”

“…하아… 그러게요. 그니까 왜…!”

서주언의 농담에 남도하의 눌러 놓았던 짜증이 튀어나왔다. 차마 도윤범에게는 내비치지 못하던 감정이 서주언을 향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남도하의 의자에 딱 붙여 제 의자를 펼친 서주언은 실검 1위를 빼앗긴 게 아무렇지 않은지 구김 없는 얼굴을 가깝게 끌어왔다.

“내가 뭘? 네가 도와달라며.”

“뭘요.”

서주언은 조금 더 가깝게 거리를 좁혀 남도하의 귀에 속삭였다.

“스토커 잡기.”

“제, 제가 언제요?”

정확히 말해 도와달라 직접 이야기한 적은 없다. 그의 계획을 그저 지켜보았을 뿐이다.

“스토커인데, 안 잡고 싶어?”

“아니 그건 아닌데… 그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서주언은 다시 제 의자에 등을 파묻고 앉았다.

“조심해. 팬이랑 사생 그거 한 끗 차이야. 애정이 광기로 변하면… 생각보다 무서워.”

경험에서 나오는 말일까. 제대로 된 답도 하지 않은 채 서주언의 시선은 또다시 먼 곳을 향했다. 마치 지난 과거 속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하긴. 그라면 이런 일을 수도 없이 겪어 봤을 거다.

“근데 도윤범이 그렇게 관심받을 줄은 몰랐어.”

“그게 다 형 때문이잖아요.”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냐? 덕분에 우리 도하 이름도 실검에 두 개나 있던데.”

“예, 있죠. 남도하 매니저 이름, 남도하 매니저.”

“포털 사이트만 보면 안 되지.”

서주언은 제 휴대폰을 꺼내 손가락을 몇 번 움직여 화면을 들이밀었다.

“뭐예요?”

“SNS에서는 이 영상이 제일 많이 공유됐어.”

남도하와 서주언이 함께 달리는 모습이었다. 사이좋게 달리는 그들의 대화 내용까지는 나오지 않았지만, 표정만 놓고 보았을 때 두 사람은 상당히 친밀해 보였다. 가식 없는 모습으로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그 뒤, 방송의 마지막 장면. 서주언이 중심을 잃고 남도하의 품으로 쓰러지는 모습이 담긴 짧은 영상이었다.

“여기 봐. 여기선 우리 도하가 제일 인기 많잖아.”

서주언의 손가락을 따라 영상에 달린 댓글이 주르륵 나왔다. 그걸 보며 남도하의 미간이 접혔다.

“…여기도 마찬가지잖아요….”

이쪽도 상황은 비슷했다. 서주언 옆에 누구냐, 서주언 안아 준 거 누구냐. 남도하랑 서주언 케미가 좋다는 둥, 온통 서주언과 관련된 것뿐이다.

툴툴거리듯 말하긴 했지만, 관심받는 건 기껍다. 남도하가 그리도 바라던 대중의 관심이니까. 그것도 분에 넘칠 정도로 많은 관심이었기에 싫을 리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썩 즐겁지만은 않았다.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즐거움이었다.

“도하야.”

“네?”

“이럴 땐 그냥 ‘형, 고맙습니다.’ 하는 거야.”

“…….”

맞다. 어떻게 보면 이 모든 게 서주언의 배려였다. 그가 마음먹고 제가 관심받는 쪽을 택했다면, 방송의 방향은 오롯이 그를 중심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남도하나 도윤범 따위가 관심받는 일은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뭐 그건… 고마워요, 정말.”

서주언은 남도하의 말에 봄 햇살 같은 얼굴로 웃어 보였다. 두 눈 가득 첫눈 같은 반짝거림을 담은 채로. 남도하도 궁금하긴 했다. 그가 이러는 이유. 그저 10년도 넘은 첫 만남의 추억 때문일까. 정작 남도하 저는 기억도 하지 못하는 그 한순간.

“도하야.”

“네.”

“너 곧 계약 끝나잖아.”

“그렇죠…?”

갑작스럽게 변한 대화 주제 때문에 서주언의 호의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인지 길게 생각할 수 없었다.

“우리 회사로 올래?”

“…새, 샌즈요?”

“응.”

“에이, 무슨 농담을 그렇게 진지하게… 진짜요…?”

서주언의 얼굴은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지만, 농담의 기색이 없었다. 샌즈라면… 큰 회사는 아니었다. 규모로 놓고 보았을 때는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거기 소속된 배우들의 면면이 화려했다. 다른 쪽의 연예인은 없었고, 오로지 배우만을 위한 엔터테인먼트 회사였다. 열둘 밖에 되지 않는 배우만 가지고 상장까지 한 곳이다. 그들이 출연한 영화 관중 수만 합쳐도 1억을 가볍게 넘겼다. 그러니 배우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꿈의 소속사라고 보아야 할 곳이었다.

“왜요? 왜, 저를요?”

“예쁜 떡잎이라?”

“…….”

하마터면, 남도하의 입에서 된소리가 나올 뻔했다.

“농담이고, 진지하게 생각해 봐. 나 혼자만 결정해서 하는 말 아니니까.”

샌즈라… 샌즈. 이게, 생각하고 말 문제일까.

“…네, 고마워요.”

멀리서 저를 부르는 도윤범을 보고 먼저 촬영에 들어갔다.

나중에 기회를 잡아 물어봐야겠다. 왜 이렇게 자신을 챙겨 주는 것인지. 첫 만남부터 왜 그렇게 호의적이었는지. 그냥… 이유 없는 호의인지.

* * *

“피곤하죠, 형.”

“아냐, 괜찮아. 천천히 가도 돼, 윤범아.”

정오가 안 돼 시작한 촬영이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곧 첫 방송을 앞두고 있다 보니 두 개 촬영 팀으로 나누어 밤낮없이 촬영을 이어갔다. 괜찮다는 말과 다르게 남도하는 손끝 하나 움직일 기운도 없었다. 도윤범도 마찬가지일 테니 밤늦은 시간에 운전하는 그가 더 걱정이었다.

“양우준만 들어오면 촬영이 길어져요.”

“…그러게.”

남도하는 도윤범의 습관을 하나 알아챘다. 뒤에서는 아무에게도 존칭을 붙이지 않는다. 서주언도 그렇고 양우준도 그렇고.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의 입에서 욕설이 나오지 않은 게 아쉬울 정도였다. 양우준은 오후에 딱 한 장면을 찍으면서 어마어마한 시간을 잡아먹었다. 덕분에 연이어 촬영해야 하는 남도하와 서주언의 퇴근 시간도 늦어져 버렸다.

“빨리 올라가요, 형.”

어느새 차는 오피스텔 주차장에 도착했다. 도윤범은 그다지 피곤하지 않은 것인지 의상과 간식 가방을 챙기며 남도하를 재촉했다. 깜빡 졸았던 남도하도 비몽사몽 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서도 빨리 들어가 씻고 침대에 눕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어…?”

하지만 막 집 앞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기다리는 걸 보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몰려오던 피로와 졸음도 일순 사라졌다. 커다란 택배 상자가 문 앞에 있었다. 송장도 붙지 않은 채.

평범하기 짝이 없는 상자였음에도, 뇌리에서 잊혔던 어떤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가짜 손가락과 머리가 잘린 쥐. 그리고 붉은 글씨로 쓰여 있던 편지까지. 폭풍우가 들이닥친 바다 같은 요즘의 삶 아래, 그 사건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바쁜 일상에 젖어 잊었을 뿐, 해결된 게 아니다.

“형은 여기 있어요.”

도윤범은 손에 들고 있던 짐을 남도하에게 넘긴 채 먼저 걸음을 옮겼다. 남도하는 괜찮다는 말도 하지 못한 채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서서 그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테이프를 뜯고 상자를 연 도윤범은 안쪽을 바라보며 잠시 아무런 행동도, 말도 잇지 않았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왜…? 또 이상한 거 왔어?”

점점 커다랗게 뜀박질하는 가슴의 불안을 숨긴 채 최대한 태연한 척 묻고 나서야 도윤범의 입에서 기다란 숨이 튀어나왔다.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그는 도어락을 풀고, 상자를 든 채 현관문 안쪽으로 들어섰다. 남도하도 따라 들어가 거실에 상자를 내려놓는 도윤범을 지켜봤다.

“뭔데?”

“…이거요.”

그는 상자의 아래쪽을 잡고 그대로 거실 바닥에 내용물을 쏟아 냈다. 안쪽에서는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포장지에 싸인 작은 박스와 투명한 비닐로 포장된 간식이 우르르 떨어졌다. 도윤범이 쪼그려 앉아 하나하나 포장을 뜯을 때마다 튀어나오는 것들이 가관이었다.

“이거… 전부 유명한 브랜드 아냐…?”

“그런 거 같은데요.”

명품 셔츠와 티셔츠, 모자. 생소한 브랜드의 외국 간식거리와 가격을 가늠할 수 없는 스피커와 전자기기. 다양한 물건들이 거실 바닥을 가득 채웠다.

“하아…. 괜히 긴장했네.”

뒤늦게 긴장을 푼 남도하가 도윤범 옆에 쪼그려 앉았다. 물건들을 하나하나 눈으로 훑다 바닥에 떨어진 편지를 하나 주워 들었다. 손바닥만 한 베이지색 봉투에 들어 있는 편지였다. 봉투를 뜯어 거기 쓰인 편지를 읽다가, 남도하의 가슴팍이 다시 불편한 울림을 내보였다. 너무 이른 안도였다.

“사랑해… 윤범아….”

“네…? 뭐, 뭘 해요…?”

남도하의 목소리에 포장을 뜯던 도윤범의 시선이 들렸다.

“…저요?”

남도하는 솔직히, 이 선물이 본인 것이리라 생각했다. 선물이 탐나서라기보다도 상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도윤범 앞으로 온 것이었다.

“어, 너한테 온 거네.”

편지를 그에게 넘겼다. 정확히는 그에게 버렸다. 짧게 읽은 내용이 썩 달갑지 않았다. 시작하는 단어부터 뒤의 내용까지 전부 하나같이 달갑지 않아 손에 쥐고 있기도 싫었다. 남의 연애편지를 멋대로 열어 본 기분이었다.

“짐 정리 도와줄까?”

“…아뇨. 제가 할게요. 어서 씻어요, 형.”

솔직히 도와주고 싶지도 않았기에 도윤범의 거절이 내심 고마웠다. 그대로 몸을 일으켜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욕실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줄기를 잔뜩 뒤집어쓴 채 생각을 집중하자 또 다른 짜증이 몰려왔다.

나는, 왜 이리 편협한가.

어째서 도윤범이 선물을 받은 것에 그리 화를 냈을까. 함께 즐거워해 주지 못했을까. 남도하 제가 아니라 도윤범이 선물을 받았다는 부분을 질투한 것은 아니다. 고가의 물건들이 탐나는 것도 아니었다.

옳지 못한 감정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런 기분이 드는 이유에 대해서 스스로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심지어 어떤 감정이라고 콕 짚어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뜨거운 물에 살갗이 달아오르고 손끝이 부르틀 때까지도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이유를 몰랐다.

“잠깐 저러는 걸 거예요.”

“어? 어…. 그러니까 즐길 수 있을 때 실컷 즐겨.”

도윤범은 남도하가 욕실에서 나오길 기다린 것처럼 소파 팔걸이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채 말을 건넸다. 거실을 차지했던 물건들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씻는 사이 과하게 거칠어진 마음을 모두 정리할 수는 없었지만, 제 모난 감정이 잘못된 것이라는 건 알았다. 남도하는 최대한 가벼운 목소리로 마음에도 없는 소릴 지껄였다.

하지만 도윤범이 한 말은 그저 희망 사항이었다. 채 하루도 넘기지 않을 반짝 관심일 거란 예상을 비웃듯, 도윤범의 이름은 실검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까지도. 오히려 점점 더 많은 관심이 생겨나 뉴스로 소식이 전해지고, 그 뉴스가 또 다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게… 다 뭐예요?”

“야! 진짜 미치겠다, 이거.”

휑하다는 표현이 참 잘 어울리던 남도하의 작은 휴게실이 복작거렸다. 이원호와 매니지먼트 팀장 그리고 남도하와 도윤범. 네 사람이 들어온 것만으로도 그리 여유 있다 할 수 없는 공간 한쪽에 상당한 선물이 쌓여 있었다. 대부분이 인형이나 먹거리였지만, 그 양이 상당했다.

“도하 너랑 윤범이한테 온 것들인데… 엄청나다, 진짜. 우준이 아이돌 때 보는 거 같아.”

갑작스럽게 화제가 된 탓인지, 그 관심이 폭발적이었다. 어떤 부분이 대중의 도화선을 건드린 것처럼 말 그대로 폭발했다. 파일럿 예능 ‘하루 살기’의 다소 평이한 첫 화 시청률을 넘어서는 관심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리고 인터뷰 요청도 많이 들어오는데, 할 거지?”

팀장은 당연하다는 듯 물었고, 남도하가 고민하는 사이 도윤범이 입을 열었다.

“누구요?”

“뭘 물어. 당연히 너희 둘이지.”

“안 합니다, 전.”

“…뭐? 왜?”

예상도 못 한 반응이었는지, 팀장과 이원호의 시선이 동시에 도윤범에게 향했다. 남도하 역시 같은 반응이었다.

“제가 연예인도 아닌데 그걸 왜 하고 있어요.”

“야… 그래도 지금 네가 이렇게 관심을 받으면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야. 진짜 데뷔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안, 합니다.”

도윤범은 여전했다. 여전히 제게 닥친 상황의 제삼자인 것처럼 행동했다. 도윤범은 확고한 의사만 남긴 채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후우… 이놈이고 저놈이고…. 도하야, 네가 얘기 좀 해 봐라. 이거 너한테도 기회야.”

그래, 알고 있다. 도윤범 덕분에 남도하까지 세간의 관심을 얻고 있으니까. 도윤범을 설명하기 위해 남도하라는 이름이 언급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 이상으로 관심을 받고 있기는 했지만, 시작은 여전히 도윤범 혹은 서주언이었다.

“…글쎄요. 저도 썩 안 내키네요. 아직 드라마 첫 방송도 안 했는데 이런 거로 화제 되는 게 좋지는 않을 거 같아요. 다른 배우들한테도 민폐 같고요.”

“남도하, 정신 차려! 너 재계약해야 하잖아. 더군다나 네가 지금 더운 밥 찬밥 가릴 상황이….”

팀장이 있는 탓에 침묵을 지키던 이원호마저 가세했다. 남도하의 좋지 않은 상황까지 들먹이며 압박하고 들었지만, 역효과였다.

“한다고 해도, 나중에요. 지금은 아닌 거 같아요.”

반항심만 들었다. 이원호가 그런 의도로 꺼낸 말이 아니란 건 알지만, 역린을 건드렸다. 집안 사정이야 평생 겪어 온 것이라 새롭게 나빠질 것도 없었고, 계약에 관해서라면 남도하에게도 다른 카드가 생겼다. 서주언이 제안한 샌즈 이적이란 방패가 있기에 그들이 꺼내 든 계약 압박도 그다지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저 촬영 갈게요.”

남도하라고 해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이 기회를 붙잡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내키지 않는 마음이 더 컸다. 여전히 그 이유를 납득 가능하게 설명할 수 없었지만, 그랬다. 다른 배우들에게 폐를 끼칠 것 같다는 핑계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떠들어 댄 말.

“혹시, 나 때문에 안 하는 거 아니지…?”

복도 끝에서 통화하던 도윤범을 기다렸다가 함께 차로 향하던 길, 남도하가 물었다. 혹시라도 저 때문에 도윤범이 스스로 기회를 버린 걸까 봐. 앞길 창창한 놈 인생 하나 망쳐 놓는 것일까 봐.

어쩌면 이미 답이 정해져 있을지 모를 질문을 던지는 제가 우습기도 했다.

“연예인 아무나 하는 거 아니라면서요.”

“어…?”

“제가 그렇게 별로라면서요.”

투덜거리는 도윤범이 무슨 말을 하는지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기억을 되짚어 보니 어제 남도하 제가 배설한 감정에 섞여 나간 말이란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아니… 그 말은 그런 게 아니라… 하아… 미안. 그런 뜻으로 한 얘기 아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사이, 남도하는 도윤범의 어깨를 잡아 마주 보고 섰다.

“…나도 잘 모르겠다, 왜 그런 소릴 한 건지.”

그 말을 가슴에 담아 두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예고 없이 갑자기 들이닥친 지금 상황도 그랬고, 남도하 제 모난 마음의 정체만 생각하느라 상대가 느꼈을 감정까지 헤아리지 않았다.

“어쨌든 형이 실수했어. 그런 뜻 아닌 거 알지?”

“…….”

도윤범은 별다른 대꾸 없이 아랫입술만 툭 튀어나와 있었다. 여전히 무언가 못마땅하다는 것이다.

“…충분히 예뻐, 우리 윤범이.”

남도하는 지금 단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자신의 솔직한 생각을 전해야겠다는 것. 하지만 스스로 답을 내리지 못한 감정 때문인지, 이상한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말을 뱉어낸 후에야 이 또한 말실수인 것 같아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평소 자주 사용하는 단어도 아닌데 도윤범만 보면 자꾸 저 단어가 떠오르곤 했다. 심지어 예쁘다는 말이 어울리는 얼굴도 아닌데 말이다.

“…그래요?”

하지만 마주 보던 도윤범의 눈 아래, 뽀얀 뺨이 불그스레 물들며 빨간 입술을 오물대는 걸 보니 어쩌면 옳은 말을 한 것도 같았다.

“어디가 그렇게 예쁜데요?”

“몰라.”

“얼굴이요? 아님, 성격?”

“…아, 몰라.”

남도하는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먼저 몸을 실었고, 도윤범은 오랜만에 들뜬 목소리로 남도하의 팔에 달라붙었다. 커다란 강아지 새끼처럼. 팔을 타고 전해지는 온기에 다시, 그 기분이 들었다. 가슴께가 간질거리는 듯한 기분. 방정맞은 도윤범의 모습 덕분에 남도하도 가슴을 채우던 부정적인 감정이 빠르게 흩어졌다.

처음부터 이리해야 했다. 이유 모를 짜증을 부릴 게 아니라, 대화를 나눴어야 했다. 정신이 이상한 사람처럼, 해일처럼 몰려오는 긍정적인 기분에 제 팔에 달라붙은 도윤범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품 안에서 느껴지는 작은 온기 덕분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부정적인 감정마저 씻은 듯 사라졌다.

“걱정하지 말아요. 정말 금방 조용해질 테니까.”

근본도 없이 큰소리치는 도윤범이 귀여워 머리에 손을 얹어 머리칼을 헤집었다.

“걱정 안 해. 윤범이 잘 되는데 형이 왜 걱정을 해.”

“저는 연예인 말고 다른 쪽에 관심 있는데요.”

“어떤 거?”

“나중에 알려 줄게요. 형도 좋아할 거예요.”

참, 꿈이 많은 나이구나 싶었다. 뭐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모습이 한없이 귀엽고, 안타까웠다. 남도하는 그 희망을 짓밟는 대신, 세상의 풍파가 그에게 들이닥치지 않기를 짧게 염원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번엔 도윤범의 이야기가 틀리지 않았다. 포털의 실시간 검색어 상단을 차지하던 두 사람의 이름은 저 아래로 내려갔다. 하나의 뉴스가 이틀간 인터넷을 달구던 남도하와 도윤범을 완전히 밀어냈다.

[톱스타 K, 한밤중 만취 음주운전 사고로 성 기능 불구!]

강태운이 그 자리를 메웠다.

* * *

드디어 ‘살인자의 밤’ 첫 방영 시각이 다가왔다. 방송사도, 제작사도 사활을 건 기대작이었기에 특집 예능까지 편성했고,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팬들을 초대해 주, 조연 배우들과 함께 첫 방송을 시청하는 자리를 준비했다.

“이상하단 말이야.”

“뭐가요?”

극장에서 제일 큰 관을 대관했다. 티케팅을 위한 경쟁률도 어마어마했다고 전해 들었다. 대다수가 서주언의 팬으로 예상됐다. 아니면 아이돌 출신인 양우준 팬이거나. 어쨌든 특별한 이벤트이긴 했다. 극장에 미리 도착한 남도하의 대기실로 쳐들어온 서주언은 이상한 의문을 표했다.

“왜 갑자기 강태운 기사가 났을까.”

“…형이 어떻게 알아요? 케이라고만 나왔는데요.”

“도하가 그런 식으로 나오면 섭섭해.”

“…예?”

서주언은 기사에 언급된 케이가 강태운이라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인터넷에서는 강태운을 포함해 K로 추측할 수 있는 다양한 연예인이 거론되고 있었음에도. 그리고 오늘, 서주언은 평소와 무언가 분위기가 달랐다. 콕 짚어 이야기할 수는 없었지만, 묘하게 날이 선 것도 같고 시선이 예리한 것도 같고.

“내가 생각보다 아는 게 많아.”

…하긴. 남도하 제 귀에까지 들어올 정도라면, 이미 이 바닥에 파다하게 소문이 퍼진 것일 수도 있다. 괜히 강태운과 본인의 이야기까지 흘러가게 될까 걱정돼 더 자세한 것은 묻지 않기로 했다.

“…전 그거보다….”

남도하도 의문스러운 게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검색어 상단은 강태운 사건이 자리 잡았지만, 아래쪽엔 여전히 남도하와 서주언의 이름이 있었다. 그 사이 유일하게 도윤범 이름만 쏙 빠졌다. 그와 관련된 기사도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있었다. 이틀 동안 보였던 반응을 생각하면 꽤 갑작스러웠다.

“…아니에요.”

어쩌면 그저 이틀 반짝 관심이 시들해진 것일 수도 있고, 강태운 사건이 그 정도로 파급력을 가진 탓일 수도 있다. 그도 아니면 살인자의 밤 첫 방송을 앞두고 이제야 제대로 된 방향으로 관심이 쏟아지는 것일 수도 있고.

“형, 그만 들어가요.”

도윤범과 서주언 매니저는 그사이 꽤 친해진 것인지, 사이좋게 커다란 팝콘을 품에 안은 채 대기실로 들어섰다. 남도하는 달려가 도윤범의 손에 들린 음료수를 받아 들었다. 이상하게 도윤범이 뭔가 몸을 쓰는 일을 할 때면 불안불안했다. 멀쩡히 걷다 자빠질 것 같고, 무거운 걸 들다 다칠 것 같고.

“고마워요… 갈까요?”

“그래, 가자.”

강태운에게는 미안하지만, 그의 기사 덕분에 남도하의 기분이 꽤 좋아졌다. 제게 추악한 제안을 해 오던 놈이 뒤늦게 벌을 받는 것도 같고, 그가 놓친 드라마를 제가 하는 것도 그랬다. 상대가 무려 서주언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강태운 덕분에 도윤범 기사가 사라진 것도 그렇고….

모든 게 만족스럽다. 아니, 만족스러웠었다. 상영회가 끝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 * *

“순서대로 입장하시면 됩니다.”

스태프의 말에 따라 주, 조연 배우들이 순서대로 극장 안으로 입장했다. 그에 맞춰 커다란 박수와 함성이 들려왔고, 그 소리는 서주언이 입장할 때 절정에 다다랐다. 모든 배우진이 입장하고, 막 사회자가 입을 열려 할 때였다.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던 객석에서 조금 전보다 훨씬 더 커다란 함성이 터졌다.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쏠린 곳엔… 도윤범이 막 들어서고 있었다. 그도 갑작스러운 함성에 놀란 것인지 커튼 뒤로 빠르게 다시 몸을 밀어 넣었다.

“잠시만 조용히 해 주시고….”

실시간 검색어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관심까지 없어진 건 아니었다. 도윤범은 짧은 등장만으로 수많은 시선을 사로잡았다. 배우들은 각자 간단한 인사와 역할 소개를 끝내고 정해진 자리에 앉았다. 티저 예고편이 방영되며 극장 안 분위기가 달아올랐지만, 남도하의 가슴엔 공존할 수 없는 감정이 시끄럽게 엉켜 들고 있었다.

“…형, 이거 드세요.”

뒤에서 팝콘 통이 쑥 튀어나왔다. 언제 들어온 것인지 도윤범은 남도하의 뒷줄에 자리 잡고 앉아 팝콘을 내밀었다. 상영관이 점점 어두워지고, 메인 예고편이 흘러나오며 상영회가 시작됐다. 첫 촬영 장소를 보고 우려했던 것과 다르게 서울에서 촬영한 장면은 마치 홍콩의 뒷골목 어딘가 있을 법한 폐공장처럼 보였다.

“돈 좀 썼네.”

“…그러게요.”

CG에 돈을 처발랐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마치 영화처럼 시작한 도입부의 추격신은 흠잡을 곳이 없었다. 이미 스토리를 알고 있는 입장에서도 상당히 흥미로운 편집이었다. 한참이나 넋 놓고 스크린을 바라보다 보니 어느새 긴박감 넘치는 배경음악과 함께 방송이 끝나갔다. 다음 화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짧은 예고편까지 완벽했다. 드라마가 끝난 것이 아쉬울 정도의 여운이 남았다.

그리고 그때였다. 방송과는 확연히 다른 앵글로 찍힌 화면이 커다란 스크린을 채웠다. 찍는 줄도 몰랐던 비하인드 컷이었다. NG 장면과 촬영을 준비 중인 배우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남도하의 꿀차를 뺏어 먹는 서주언, 연습 중 난간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서주언의 허릴 감싸 안는 남도하. 도윤범의 사고로 인해 굳은 표정으로 앉아 대기하는 남도하의 뒤에서 장난치는 서주언.

“…저거 찍는 거 알고 계셨어요…?”

“당연한 거 아냐?”

짤막하게 지나가는 비하인드 영상의 대부분은 서주언과 남도하의 몫이었다. 첫 화의 비중이 그랬기에 어쩔 수 없는 탓도 있었지만, 느낌상 ‘혼자 살기’의 후광을 노리는 것 같기도 했다. 객석을 채운 서주언의 팬들은 그가 등장할 때마다 조용한 탄성을 내지르는 것으로 보아, 제대로 먹혀든 것 같다.

“하아… 얘기라도 해 주지 그랬어요.”

“그럼 재미없잖아.”

객석의 불이 켜지기 전, 배우진이 먼저 상영관을 빠져나갔다. 남도하는 커튼 뒤로 들어와 뒤따라올 도윤범을 기다렸지만, 한참이 지나도 그가 나오질 않았다. 모두가 빠져나오고도 모습을 비추지 않는 도윤범 때문에 결국 남도하가 안쪽으로 다시 걸음을 옮겨야 했다.

불이 켜진 상영관 안에서 도윤범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수십의 인파에 싸인 남자는, 그 하나뿐이었으니까. 마치 포위망을 좁혀오는 것처럼 스크린 앞 무대 아래, 도윤범의 사위를 인파가 둘러싸고 있었다. 멀리서도 확연히 그의 기분이 언짢은 것이 보였다. 일그러진 표정을 보자니 저대로 욕이라도 뱉어내는 건 아닐까 싶은 아찔한 생각마저 들었다.

“죄송합니다, 잠시만요.”

그래서 남도하는 약간 무식한 방법을 택했다. 힘으로 명백히 우세했기에 인파 사이로 몸을 비집어 넣어 도윤범을 향해 돌진했다.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소리와, 작은 함성이 뒤섞여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점점 더 빼곡해지는 인파 틈으로, 도윤범의 팔목을 낚아챘다. 그러곤 그대로 힘껏 당겨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쪽은 연예인 아니라서 찍으시면 안 됩니다.”

다시 인파를 뚫고 나갈 생각에 벌써 막막해진 남도하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씨알이나 먹힐까 걱정하던 남도하였는데, 몰려든 사람들의 눈빛이 이상했다.

“…남도하다….”

누군가 홀린 듯 남도하의 이름을 읊조렸다. 그 소리가 넓은 극장 안의 유일한 소음이었다. 도윤범을 잡아먹을 것처럼 몰려들던 사람들은 남도하의 등장과 함께 한 걸음쯤 거리를 유지한 채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선이 떨어지지도 않았다.

“제 매니저는… 찍…으시면 안 돼요.”

하지만 마치 그 말이 신호가 된 것처럼, 일순 수십 개의 입이 열리며 조금 전보다 더 시끄러운 목소리가 쏟아졌다. 그와 동시에 남도하와 도윤범을 향해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누가 서주언 팬 아니랄까 봐 카메라도 웬만한 기자들보다 더 좋은 것이었다.

“가자, 달려.”

남도하는 그때가 기회다 싶어 도윤범의 어깨를 힘껏 감싼 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내딛는 걸음걸음이, 짜증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들은 사진만 찍어 댈 뿐, 무대 뒤까지 쫓아 들어오진 않았다. 서주언의 팬이라 그런지 몰상식한 정도는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예의 있는 축이었다.

* * *

“넌 거기 왜 그러고 서 있어!”

대기실에 들어와 문을 잠근 후에야 남도하의 짜증이 터졌다, 애먼 도윤범에게.

“하아… 씨발….”

그리고 그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깊게 가라앉은 욕설이 도윤범에게서 튀어나왔다. 들리락 말락 한 욕지거리였다. 그는 남도하를 보지 않고 돌아선 채 허리에 한쪽 손을 얹고 허공을 향해 욕설을 뱉어냈다.

그제야 남도하도 정신이 들었다. 지금 화를 내야 하는 건 제가 아니다. 방금 상황은 도윤범이 자처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상황에 짜증을 부리지 않은 것을 칭찬해 줘야 옳다.

“뭘 잘했다고 욕을 해, 혼날래?”

그런데, 왜. 이리도 계속해 신경질이 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죄송해요.”

“경호해 준다더니, 내가 너 구해 주고 있네.”

입에서 쏟아지는 말마다 쓰레기 같다. 그저 감정 풀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걸 남도하 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게요…. 제가 형 옆에 있었어야 하는데. …정말 미안해요.”

“…어?”

하지만, 돌아서는 도윤범의 두 눈을 보자 일순 사고가 멎었다. 머리끝까지 치솟던 짜증도 사라졌다. 까만 두 눈동자에서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은 이유다. 짧게 스친 그 눈빛이 당혹스러웠다.

“정말… 제 잘못이네요, 이건. 다신 이런 일 없을 거예요.”

말을 하며 도윤범이 거릴 좁혔다. 삽시간에 몇 걸음 떨어져 있던 간격이 좁혀지고, 도윤범이 남도하의 등을 감싸며 가볍게 끌어안았다. 뭐 하는 짓이냐는 항의의 말을 하지도 못했다. 삼키는 숨에 항상 옅게만 느껴지던 도윤범의 향이 잔뜩 섞여 들었다. 갑작스럽게 좁혀 든 거리에 조금 전까지와는 다른 이유로 심장이 불편한 울림을 보였다.

귓가의 솜털을 간지럽히며 파고드는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뒤늦게 제가 너무 심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애먼 상대에게 화를 풀어 버렸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도윤범을 밀쳐 낼 수 없었다. 그저, 그의 등을 마주 안아 주고 말았다.

“다시는, 절대 그런 일 없어요. 약속해요.”

물론… 그런 것 치고도 도윤범의 상태가 과하게 이상한 것 같지만….

* * *

남도하는 자신의 현실이 제일 시궁창이라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이다. 개인사를 떠들어 대길 좋아하지 않는 탓에 남들에게 말하지 않을 뿐이다.

지금도 그렇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오늘은 최근 들어 가장 기분 좋은 날이라 할 수 있었다. 간만에 촬영이 없는 날이기도 했고, ‘살인자의 밤’ 출발이 좋았다. 주말 이틀 방영된 드라마는 모든 방송사를 통틀어 올 한해 첫 방송 시청률 신기록을 달성했다. 32.5%. 다음날 2화는 더 올라 38%에 육박했다.

거기에 더해 앞서 방송된 ‘혼자 살기’의 효과까지 더해지자 남도하의 이름은 모든 포털 인기 검색어 상위권을 맴돌았다. 벌써 광고 관련 제안까지 들어왔고, 회사에선 재계약 관련 이야기를 매우 조심스럽게 언급했다. 계약서만 들이밀던 태도가 달라졌다.

조연인 제 이름이 그리 알려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첫 방송을 보고서 알았다. 본인의 분량이 상당히 늘었다는 걸. 거기에 편집까지 남도하를 위한 것처럼 서주언과 비견될 정도로 눈에 띄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드라마 1화 말미에 나온 비하인드 영상이 화제의 중심에 섰다.

이번에도 서주언의 공이 컸다. 그와 노닥거리는 모습이 혼자살기 예능에서 어울리던 장면과 교묘하게 짜집기 되어 퍼져 나갔다. 이번에는 이상할 정도로 언론이 침묵했지만, SNS에서 무서울 정도로 확산됐다.

어쨌든 그렇게 좋았던 감정이 땅굴 저 깊은 곳까지 곤두박질쳤다. 단 하나의 메시지가 그렇게 만들었다.

[돈 좀 더 보내.]

“하아….”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았다. 도윤범의 집에 더 길게 얹혀살기로 한 이후, 전에 살던 빌라 보증금을 빼 집에 보낸 것 말이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그 보증금을 전부 보내지 않은 것뿐이다. 그 긴 인생의 학습 효과였다. 백을 보내면 백을, 천을 보내면 천을 쓴다는 걸 뼈저리게 깨우친 덕분이다. 그렇다고 돈을 보내지 않는다는 선택지 따위가 없다는 게 답답할 뿐이다.

“무슨 일 있어요?”

남도하는 휴대폰 측면 버튼을 길게 눌러 전원을 꺼 버렸다. 뒤늦게 대각선 소파에 앉은 도윤범의 시선을 깨달았다.

“별일 아냐.”

일이라면 도윤범에게 있는 것 같다. 최근 촬영이 많아진 탓일까. 아니면 벌써 매니저 일에 싫증이 나 버린 것일까. 정확하진 않지만, 첫 방송 상영회 즈음부터 도윤범의 낯빛이 어두웠다. 현저히 미소가 옅어졌고, 말수도 줄었다. 매니저 일에 눈을 빛내던 병아리가 아니다.

“윤범아, 며칠 쉴래…?”

“네? 왜요?”

“아니… 너 피곤해 보여서.”

그저 걱정이다. 스케줄도 바쁜데 갑자기 그만두겠다는 말을 하면 어쩌나 싶어서. 갈 곳도 없는 제게 집을 나가라 할까 싶어서 건네는, 지극히 이기적인 걱정.

“괜찮아요, 전.”

옅디옅은 미소가 걸렸다. 항상 함께하는 사람의 기분마저 좋아지게 하던 그 웃음이 아니었다. 누구의 기분도 나지게 하지 못하는, 그런 미소였다. 웃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정말 괜찮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쓸데없이… 착한 아이다. 남도하 제가 어떤 생각으로 걱정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웃어 보인다.

* * *

“…왜?”

성공적인 첫 방송 덕분에 촬영장은 매일 들뜬 분위기를 숨길 수 없었고, 벌써부터 포상 휴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스태프도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게 썩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누구라도 실패를 의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객관적인 수치가 그랬다.

“…그게….”

하지만, 단 한마디 말이 촬영장에 찬물… 아니, 차디찬 얼음물을 끼얹었다. 일방적으로 전달된 촬영 중지 통보였다. 때문에 이제 막 6화분 촬영 막바지에 한창이던 촬영장엔 적막이 흘렀다. 중단 이유 한 줄 전달되지 않은 탓이다. 화가 난 감독은 기다리라는 말만 남긴 채 제작사에 쫓아 들어간 참이다.

“말 똑바로 안 해!”

흔치 않게 서주언의 고성이 터졌다. 그는 항상 오만하고 자신감에 찌든 말을 뱉긴 했어도, 스태프에게 화를 내는 경우는 없었다. 아무리 촬영이 지연되고, 쪽대본을 들이밀어도 불만 없이 성실한 태도로 촬영에 임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내뱉는, 듣는 사람마저 기가 질릴 정도로 커다랗게 나온 고함에 스태프는 빠르게 입을 열었다.

“…투자를… 철회한다고 합니다.”

“어디.”

“K&M이요….”

그 대화를 듣던 수많은 입에서 탄식이 흘렀다. ‘살인자의 밤’이 강태운 없이도 무사히 촬영을 시작할 수 있었던 이유가 K&M의 전폭적인 투자였다. 원래 300억이던 제작비마저 서주언을 잡기 위해서인지 수십억이 늘었다. 전범 기업의 협찬 사태가 터졌을 때도 그들이 부족한 금액을 메꿔 주어 문제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하, 씨발….”

낮게 욕지거리를 삼키는 서주언과 남도하의 시선이 얽혔다.

“몰랐어?”

“…저요?”

갑작스레 제게 향하는 질문에 남도하는 말문이 막혔다. 질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하긴, 알았으면 여기 안 있겠지. 상태야, 짐 싸라. 가자.”

무슨 소리냐는 물음을 뱉어내기도 전, 서주언이 먼저 자릴 털고 일어났다. 꽤나 신경질적인 태도였다.

“형, 저희도 갈까요?”

“…조금만 기다려 보자. 감독님 들어갔으니까 곧 연락하시겠지.”

“그래요. 겉옷 입고 있어요. 이제 제법 쌀쌀하네요.”

“고마워.”

몇몇 배우는 서주언을 따라 자리를 떴다. 제작사 쪽 스태프들도 어느새 모두 돌아갔다. 하지만 남도하는 쉽사리 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제 손에 들어온 성공의 기회가, 이렇게 허망하게 날아가는 걸 넋 놓고 바라봐야 하는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지잉

손에 쥔 휴대폰의 진동에 빠르게 들어온 내용을 확인했다. 기대하던 연락은 아니었지만, 이 역시 다른 쪽으로 남도하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미끼가 너무 성공적이었나 봐.]

단번에 의미를 헤아리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무슨 뜻이냐는 물음에도 서주언에게서는 별다른 답장이 없었다. 전화 역시 받지 않았다. 마치 답은 스스로 생각하라는 것처럼.

미끼라….

그가 던진 돌멩이가 남도하의 가슴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 * *

“형, 집 도착했어요.”

“…어.”

서주언의 메시지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전에 말했던 덫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은 이해했다. 스토커인지, 사생인지, 팬인지 모를 남자를 잡기 위한 덫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을 꺼내든 시기가 이해되지 않았다. 드라마 촬영이 중단된 상황에 언급될 이야기는 아니었으니까.

“내일은 푹 쉬어요. 연락 오면 제가 말씀드릴게요.”

“아냐, 회사 가 봐야지. 어떻게 된 건지 확인도 해야 하고.”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회사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도윤범이 연락을 주었음에도 아직까지 별다른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회사에서도 정확한 사정을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잘 자요, 형.”

“어… 너도.”

불편한 휴식 시간이 찾아왔다. 쉼 없이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답 없는 고민에 빠져 있어야 했다. 갑자기 투자를 철회한 K&M에 대한 기사도 찾아보았지만, 별다른 뉴스는 나오지 않았다. 제작사의 반응도, 방송국 측 입장도 나오지 않았다.

착오겠지. …착오여야 하는데….

모두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이려 애쓰고 있을 때였다. ‘지이잉’ 손에 쥔 휴대폰이 울리는 진동에 빠르게 화면을 확인했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연락이었다. 지금 상황에선 더욱더 보고 싶지 않은 내용이었다.

“하아….”

메시지를 제대로 읽지도 않은 남도하는 은행 앱을 켜 남은 돈을 탈탈 털어 송금했다. 꼭 병원비에만 써라, 아껴 쓰라는 말도 더는 하지 않았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말이라는 걸 이미 잘 알고 있으니까.

얼마 안 되는 돈마저 이제 더는 보내 주기 어려울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자 드라마 제작이 중단된 상황이 더욱 암담해졌다. 이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실낱 희망이 바스러져 버린 것만 같았다.

차라리, 애초에 이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었다면 이리도 욕심이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내 것이 아닌 자리라 생각하고 주어진 삶에 만족하고 살았을지 모르겠다. 10년 넘게 피워 보지도 못한 꿈을 접어야만 하는가 싶어 속이 시끄러웠다.

하루, 이틀, 사흘. 속절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형, ……요?”

“…….”

“형!”

“어, 어?”

들려오는 도윤범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남도하는 좀 전까지 제가 무슨 상념에 젖어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최근이 이랬다.

“요즘 왜 그래요. 어디에 그렇게 정신이 팔려 있어요?”

“…아냐.”

누군가 남도하에게 괜찮냐 묻는다면, 답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처음 제작 중단 소식이 들려올 땐 반신반의했다. 투자자가 무려 K&M이었으며, 제작사도 탄탄했다. 공중파에서 갓 2회 방송만으로 38%의 시청률이 나왔고, 감독과 작가 그리고 주연 배우까지 업계 최고가 모였다.

시청자의 호평까지 이어졌기에 착오일 거라는 쪽으로 마음이 쏠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드라마 중단이 맞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뀔 수밖에 없었다.

“밥 좀 먹어요. 어제 저녁도 안 먹었잖아요.”

“생각 없어. 난 들어가서 좀 잘 게.”

“형…!”

입이 썼다. 음식 냄새만 맡아도 속이 메스껍고, 억지로 삼킨 음식은 제대로 소화도 되지 않아 위장을 편히 넘어가지 못했다. 물만 삼켜도 체기가 몰려와 빈속이 차라리 더 편했다. 식욕이 없는 건 둘째 치고 말이다.

뒤에서 부르는 도윤범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방에 들어가 침대에 머릴 대고 누웠다. 차라리 빨리 어떤 결과라도 나오길 바랐다. 이리도 고문 같은 침묵이 이어지는 것보다는 어떤 쪽이라도 답을 얻고 싶은 생각이 샘솟았다. 설사 그게 좋지 않은 쪽의 것이더라도 말이다.

모두에게 불편하던 침묵은, 전혀 예상도 못 한 인물이 깨트렸다.

* * *

“…드라마 엎어져서, 쉬는 중…? 이게 뭐야, 씨발!”

매니지먼트 팀장의 발작에 그의 앞에 서 있던 이원호 얼굴이 희게 질렸다.

“내기 이 새끼 SNS 다 끊으라고 했지! 씨발,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하냐고!”

남도하와 도윤범은 별다른 말 없이 팀장의 역정을 듣고만 있었다. 그의 의견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 더 보탤 말도, 덜어줄 말도 없었다. 문제의 시작은 양우준의 SNS에 올라온 한 장의 사진과 짧은 근황이었다. 그는 푸르게 빛이 나는 바닷가를 배경으로 해사하게 웃는 사진을 한 장 올렸다. 그리고 그 밑엔 드라마가 엎어져 쉬는 중이라는 글과, 사진과 상이한 눈물 이모티콘이 달려 있었다.

“이 새끼 지금 어디 있어!”

“…강원도 간 거 같습니…악…!”

이원호가 불확실한 정보를 전달하자, 팀장은 그의 정강이를 걷어차 버렸다.

“당장 글 내리라고 해. 벌써 기사 다 났는데 어쩔 거야, 대체!”

“그, 그게… 지금 연락이 잘….”

그 사이에도 팀장의 전화는 쉼 없이 울려 대고 있었다. 보나 마나 양우준의 SNS를 본 기자들의 전화일 테다. 제작사도, 방송국도, 배우와 스태프까지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양우준의 한마디 말이 폭탄이 되었다.

방송국에선 당장 오늘 저녁 살인자의 밤 3화 방영은 정상적으로 진행될 거라는 틀에 박힌 의견만 내놓았다. 추후 진행에 대해서는 별도의 언급이 없었다. 그 말이 오히려 양우준의 말에 힘을 실어 주는 셈이 되었다.

“하아… 씨발, 미치겠네.”

팀장이 끊임없이 울리던 전화를 받으며 나가자마자 이원호의 입에서 묵직한 감정이 터져 나왔다.

“일부러 저런 거 아니에요?”

“…….”

남도하가 건네는 말에 이원호는 별다른 반박을 달지 못했다. 남도하가 양우준과 사이가 좋지 않아 비틀어진 시선으로 바라본 탓이 아니라, 누가 보더라도 양우준은 드라마가 엎어진 걸 아쉬워하는 태도가 아니었으니까.

이런 상황에 웃음을 내비치는 건 그가 유일했다. 그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라면, 그리도 합류하고 싶어 애를 써 단역에 가까운 배역마저 마다하지 않은 주제에 왜 이제 와 저런 태도를 취하냐는 것뿐이다.

“서주언 쪽도 별말 없지…?”

“그건 형이 더 잘 알지 않아요?”

“뭐?”

“아니에요? 그쪽 매니저한테 계속 도하 형 얘기 흘려주고 계시길래 친한 줄 알았는데.”

이원호는 도윤범의 말도 제대로 받아치지 못했다. 그저 남도하와 도윤범을 번갈아 보다 손을 털며 방을 나가 버렸다. “왜 다들 나한테만 그러냐….”는 투정만 남긴 채.

다른 때였다면 남도하도 이원호에게 그 말이 진짜냐 캐물었겠지만, 지금은 그다지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다. 도윤범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치 않았다.

“형, 점심이라도 먹으러 갈까요?”

“아니, 별로….”

“형!”

도윤범의 짧은 고함에 축 처지려던 몸에 다시 힘이 들어찼다. 못마땅하거나 화를 낼 때도 목청을 키우지 않던 그였다. 그런 놈이 커다랗게 터뜨린 다그침에 놀라 눈을 맞춘 채 굳어 버렸다.

“왜 그래요, 요즘? 어제도 아무것도 안 먹고, 오늘도 여태 커피 반 잔 마신 게 전부잖아요!”

“…이, 입맛이 없어서….”

“하아… 그깟 드라마 좀 잘 안 된 거 가지고….”

“…뭐?”

그깟, 드라마…? 예상 못 한 고함에 놀랐던 머리가 일순 맑아졌다. 정확히는 도윤범이 뱉은 한마디 말이 다른 감정을 압도한 이유다.

“너한테는 그 드라마가 고작 그깟 이야?”

“아니… 형, 그런 뜻이 아니라….”

배신감이라고 하면 과장일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도윤범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가 남도하의 마음을 헤집어 댔다. 양우준이 저질러놓은 일보다도 이상하게 저 짧은 한마디에 더욱더 동요하고 말았다.

“나 집에 따로 간다.”

더 길게 말을 섞어 봤자 정제되지 못한 감정만 배설하고 말 것 같아 먼저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걸음을 옮겨 휴게실을 빠져나가기 전, 남도하의 팔이 낚아채이며 몸이 돌았다.

“제가 등 돌리고 가지 말라고 했죠.”

강제로 돌려져 도윤범을 마주 보는 순간, 들끓던 화가 멎었다. 과열되던 감정이 순간 식어 버렸다. 당장에라도 팔뚝이 끊어질 것 같은 통증은 그렇다 치고, 눈알을 그대로 뚫고 지나갈 것 같은 날카로운 시선과, 거칠게 피부를 때리는 목소리.

“얼굴 보고 얘기하자고 했죠.”

일순 심장이 터질 것처럼 조여들며 뜀박질하기 시작했다. 매섭게까지 느껴지는 도윤범의 얼굴 때문에 벌어진 입에서는 아무런 변명도 튀어나오지 못했다. 도윤범의 감정이 점점 더 격해지는 것만 같고, 숨통을 조여 오는 것도 같았다.

“집에 가요.”

얼마나 그리 마주 보고 서 있었는지 모르겠다. 낯설기만 한 도윤범의 태도에 남도하는 별다른 항변도 하지 못하고 손목이 붙들린 채 빠르게 걷는 도윤범에게 반쯤 끌려가듯 뒤를 따랐다.

강하게 틀어쥔 손목은 남도하를 차 뒷자리에 앉히고 나서야 풀어졌다.

도윤범이 차를 몰고 집으로 향하는 중에야 남도하는 제 손목이 불편할 정도로 욱신대는 걸 깨달았다. 손목뿐만 아니라 그가 처음 쥐었던 팔뚝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주먹으로 맞기라도 한 것처럼 묵직한 감각이 남아 있었다. 그 까닭인지, 마음 역시 조금 불편해졌다.

“야….”

이번에도, 길어지는 침묵을 버티지 못한 쪽은 남도하였다. 도윤범이 틀어쥐었던 손목을 제 손으로 감싼 채 정적을 깼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도윤범에게는 꽤 자주 과잉된 감정을 쏟아 내곤 했다. 좋은 감정도, 싫은 감정도 그랬다. 나름 이성적이고 인내심이 길다 생각했던 자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본능대로 행동하고 말을 뱉고 난 후에야 후회한 일이 몇 번인지 모를 정도였다.

“…나 배고파.”

이번에도 그랬다. 여전히 손목이 따끔거리는 것 같았지만, 도윤범이 심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회사에서의 일을 떠올려 보면 오히려 정제되지 못한 감정을 토설한 건 자신이었다. 어린아이처럼 말 한마디에 삐딱한 태도를 보였고, 대화로 의견 충돌을 해결하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은 채 자릴 피해 버리려 했다. 심지어 저를 걱정해 주던 상대에게 그랬다. 그래서… 조금 치사한 수를 썼다.

“오래 굶었으니까 죽 먹어요.”

“응, 죽 먹자.”

여전히 툴툴거리는 목소리였지만, 도윤범은 이번에도 남도하에게 무르기만 했다. 다른 말로 돌려 한 사과를 받아 주었다.

* * *

“이거 하나 먹어요.”

“뭐야?”

“소화제요. 며칠 만에 식사 제대로 한 거라 속 불편할 수도 있으니까요.”

식사를 끝내고 차에 타자마자 도윤범이 약과 생수를 건넸다. 안 그래도 마치 도윤범에게 보여 주려는 것처럼 커다란 죽 그릇을 모두 비워 낸 남도하의 속은 이미 불편했다.

“그러니까 자꾸 밥 안 먹고 그러지 말아요. 저… 진짜 속상하니까요.”

“응… 알았어.”

나이가 몇인데. 마치 끼니를 거르며 시위를 한 것만 같아 지난 시간이 좀 민망했다. 그래도 속이 좀 채워진 덕분인지, 무기력하고 예민해진 신경이 많이 차분해졌다.

“근데 너 진짜 운동하긴 했나 보더라?”

“무슨 말이에요?”

“나 손목 엄청 아파.”

부드럽게 차가 출발하고, 남도하가 농담을 꺼내 들었다. 지금은 셔츠 커프에 쓸리는 손목이 약간 불편한 정도였지만, 한껏 과장해 말했다. 그 정도로 기분이 풀어졌다는 걸 에둘러 표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 급정거했다.

“손목요? 봐요.”

“야, 야…! 갑자기 차를 그렇게 세우면 어떻게 해!”

통행량이 많지 않은 골목길이긴 하지만, 길 한복판에 차를 멈춰 세울 만한 위치는 아니었다. 도윤범은 그런 남도하의 목소리도 듣지 못한 것처럼 아예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그러곤 남도하가 앉아 있던 뒷자리 문을 열고 팔목을 잡아당겼다.

“하아, 이런….”

거친 욕지거리가 도윤범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정제되지 않은 단어 선정과 달리 조심스러운 손길이 남도하의 손목을 쓸었다.

“병원 가요.”

“자, 장난이야. 병원 갈 정도 아니야.”

붉은기가 옅디옅게 남았지만, 저렇게 호들갑을 떨 정도는 아니었다. 손목을 그러쥔 채 눈길이 떨어지지 않는 도윤범을 남도하가 진정시켜야 했다. 이런 쪽으론 장난이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농담이야, 농담! 진짜 안 아파.”

“…미안해요, 형….”

그대로 눈물이라도 왈칵 쏟아내는 건 아닐까 싶었다. 마치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희게 질린 얼굴까지 그런 생각을 키우는 데 일조했다. 남도하는 도윤범이 가볍게 쥔 손목을 틀어 빼내었다. 그러곤 반대로 그의 손을 붙잡았다.

“괜찮아, 형이 장난친 거야. 이런 손으로 좀 잡았다고 아플 리가 없잖아.”

거짓말이다. 솔직히 지금 남도하는 제 손안에 들어온 희멀건 손을 보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피부의 촉감은 부드럽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였다. 굳은살 하나 박혀있지 않은 것 하며, 마디마디도 매끄러워 절대 힘이 세 보이지 않는 손이었다. 이런 손에 잠깐 붙들린 것만으로 피부가 아릿해졌다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뒤에 차 온다, 빨리 타.”

연신 미안하다 사과하는 도윤범의 등을 떠밀어 운전석에 앉혀야 했다. 집으로 이동하는 내내 안절부절못하는 도윤범을 보며 몇 가지 깨달았다. 그의 기분도 상당히 풀어졌다는 것과 보기보다 더… 저를 생각해 준다는 것.

신체나 안전에 관련된 쪽으로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관리하는 도윤범이었다. 그의 일이 그런 거라는 건 알지만, 뭔가 조금 우스운 약점이었다. 이상한 약점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길이 좀 막히네요. 잠깐만 자고 계세요.”

“응.”

“건성으로 대답하지 말고요.”

눈치도 귀신같다. 시선을 창밖으로 던진 채 별생각 없이 답한 것마저 알아채다니. 그래도 오늘은 도윤범에게 미안한 것도 있고 하니 말을 잘 듣기로 했다. 그가 며칠에 한 번씩 집에서 빨아 커버를 갈아 주는 목베개를 베고 눈을 감았다.

당연히 잠이 올 리 없었다. 도윤범 앞에서만큼은 모난 감정을 갈무리하리라 다짐했지만, 속이 시끄러운 건 여전했다.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답답한 마음이 한가득하였다. 기분을 잠깐 환기했다고는 해도, 지금 닥친 상황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으니까.

다른 때였다면 어떤 방법이라도 떠올렸을 테지만, 이번엔 그런 생각 자체가 들지 않았다. 이미 한번 맛본 성공의 기회가 지나칠 정도로 달았다. 그 단맛이 지나간 뒤 남은 뒷맛이 씁쓸하게 느껴질 정도로.

* * *

도윤범의 말대로 길이 다소 막혔다. 집에 도착하자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시간이었다. 무슨 약인지 몰라도 그가 준 약을 먹고 깜빡 졸고 일어나자 쿡쿡 찌르는 것 같던 속이 한결 편안했다.

“형, 여기서 먼저 내려야겠어요. 차 댈 데가 없네요.”

“같이 가.”

도윤범이 운전하는 차는 한참이나 주차장을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원래 주차 공간이 부족한 오피스텔은 아니었지만, 주차장 한쪽 면 전부 페인트 작업 중이라 그런 것 같았다.

“바깥 주차장에 대야 해서 한참 걸어야 돼요. 먼저 올라가서 쉬고 있어요.”

남도하는 괜찮다며 같이 가자고 했고, 도윤범은 그런 남도하를 보며 짐짓 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얼핏 투정 같기도 하고, 장난 섞인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하고. 솔직히 무섭기보다는 같잖고 우스웠지만, 오늘은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어쨌든 이것도 다 남도하 저를 위해 하는 말이니까.

“얼른 와, 같이 야식 먹자.”

도윤범은 다시 차를 몰아 지상으로 올라갔고, 남도하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도윤범은 어떨 때는 입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사나운 기운을 풍기다가도, 어떨 때면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귀엽기도 했다. 공존할 수 없는 감정을 초 단위로 느끼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어쩌면 남도하 제가 도윤범에게 큰 신세를 지고 있어 가끔 그의 눈치를 지나치게 살피게 되는가 싶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고.

“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남도하의 입에서 자조적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눈치라니. 생각해 보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도윤범은 아무런 눈치도 주지 않았는데, 눈치를 볼 리가 없었다. 그저 혼자 빌붙어 사는 게 죄스러워 그리 느꼈던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오늘은 꼭 월세나 생활비를 부담하는 문제를 이야기해 봐야겠다고 다짐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비록 지금은 통장이 텅텅 비어 버렸지만, 언제까지 이리 십 원 한 푼 보태지 않고 얹혀만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최악의 상황으로… 드라마가 제작 중단된다 하더라도, 약간의 출연료는 들어올 테니 그걸로 얼마라도 쥐여 주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촬영이 중단된 드라마를 떠올리자 위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와는 다르게, 남도하의 심장은 저 아래 지하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끝도 없는 나락으로.

‘띵’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몰려오는 상념은 엘리베이터에 남겨 놓은 채 걸음을 뗐다.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더는 답답한 감정을 내비치지 않으려던 노력도 무색하게, 순간순간 중단된 드라마 생각이 사고의 중심에 등장해 버리곤 했다.

현관 도어락에 손가락을 대 잠금을 풀려는 순간이었다.

탁, 탁, 타닥….

활짝 열려 있는 비상문 안쪽, 비상계단에서부터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두어 층, 한 층, 반 층. 느릿하던 걸음이 점차 빨라지기 시작하는 걸 소리로 알 수 있었다. 이내 달려 내려오는 것인지, 굴러떨어지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소리가 점점 더 빨라지고, 커졌다. 갑자기 밝혀진 반 층 위 센서 등을 향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리는 남도하의 눈에 이상한 장면이 들었다. 저건….

푸악!

새까만 그림자가 덮치듯 가까워지는 모습이 동공을 가득 채움과 동시에, 무엇인지 모를 액체가 얼굴과 몸을 세차게 치고 지나갔다. 얼굴에 잔뜩 엉겨 붙은 액체가 시야를 가렸다. 두 손으로 눈가를 훑어 진득한 액체를 닦아내고 시야를 정리해 보았지만, 액체를 끼얹은 인물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저 계단 아래쪽으로 빠르게 달려 내려가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이게….”

붉다. 새빨간 액체가 전신을 축축하게 뒤덮어 버렸고, 얼굴을 훑었던 손도 검붉은 액체로 젖어 있는 것으로 보아 얼굴도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어떤 사건 현장처럼 사방에 퍼진 빨간 액체를 보다가, 그대로 달려 내려갔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무엇을 뒤집어쓴 것인지에 대해 고민할 틈도 없이 상대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층계 아래로 빠르게 달려 내려가는 소리를 뒤쫓았다. 물과 다르게 끈덕끈덕한 액체가 흘러내리며 시야가 자꾸 흐려지고, 몸에 들러붙은 옷 때문에 걸음도 불편했지만, 서너 개 층계를 단번에 뛰어 내려가며 조그맣게 앞서가는 걸음 소리를 뒤쫓았다.

“…하아, 학….”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층계를 내려가는 소리가 하나밖에 들리지 않았다. 걸음을 멈추고 턱 끝까지 차오른 거친 숨을 내쉴 때야 알아챘다. 달려 내려온 위쪽도, 아래쪽도 적막했다. 좁은 통로엔 남도하의 뜨거운 숨소리만 존재했다. 그제야 뭔가 실수를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황에 이리 쫓아 내려와 잡을 것이 아니라, 집 안으로 도망쳤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그리고 그 후회는, 위쪽에서 들려오기 시작한 걸음 소리 때문에 조금 더 커졌다. 일순 불안감이 엄습했다. 빠르게 달려 내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비상구로 들어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연신 눌렀다. 꼭대기 층에서 내려오고 있다는 붉은 표시등의 숫자가 너무 느리게 바뀌었다.

저를 쫓던 상대를 잡으려던 마음은 씻은 듯 사라지고, 그저 상대가 이번 층을 스쳐 지나가길 빌었다. 그 사이에도 비상구 밖에서 들려오는 걸음 소리가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았고, 남도하가 잊고 있던 게 있었다. 그가 지나온 자리엔 붉은 핏방울이 꼬리처럼 방울방울 떨어져 있었다. 그 탓인지 가까워지는 것 같던 발걸음 소리는 기어이 비상문 건너에 우뚝 멈춰 섰다.

끼익

잠깐의 정적 뒤, 문고리가 느릿하게 돌았다. 엘리베이터는 아직도 한참이나 위에 있었기에, 피할 곳이 없다는 걸 깨닫고 마음을 다잡았다. 피할 수 없다면, 붙잡기라도 해야 한다. 거칠게 요동치는 심장을 무시한 채 힘을 가득 주어 두 주먹을 말아 쥐었다. 하지만 열린 문 너머로 등장한 얼굴을 보곤 일순 긴장이 허물어져 버렸다.

“형! 무, 무슨 일이에요! 괜찮아요?”

당황에 젖은 도윤범이었다. 희게 질린 얼굴로 얼핏 패닉에 빠진 듯한 모습을 한.

“하아… 괜찮, 괜찮아….”

“어떻게 된 거예요. 꼴이 이게….”

가깝게 다가온 도윤범이 남도하의 얼굴을 쓸었다. 피부에 들러붙어 반쯤 굳은 붉은 액체를 쓸어내리는 도윤범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엉망이 된 남도하의 모습을 담고 있는 눈동자 역시 같았다.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두 눈에 일순 스쳤다. 그러곤 그대로 남도하의 팔을 당겨 힘껏 끌어안았다.

“…다친 데는 없어요?”

“어….”

남도하는 차마 그 손길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를 마주한 순간부터 느꼈던 안도를 조금 더 길게 이어가고 싶었다. 실제로는 길지 않은 시간이었을 테지만, 혼자 남겨졌던 시간이 뒤늦게 불안과 공포로 느껴졌다.

한참 만에야 몸을 감싸던 팔이 풀어졌다. 여전히 가까운 거리였다. 조금 전과 다름없이 걱정이 가득 담긴 도윤범의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얼굴을 훑는 엄지 하나가 가슴 안쪽 울컥하는 감정까지 불러일으켰다.

“우선 집에 가요.”

도윤범은 제가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 남도하에게 걸쳐주었다. 그러곤 어깨를 감싼 채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로 이끌었다. 조금은 강하게 어깨를 끌어안은 도윤범의 손길이 거칠게 요동치던 심장을 다독여 주는 것 같았다. 요란스럽게 뜀박질하던 가슴을 다독여 주는 온기였다.

하지만 조금은 이른 안도였다. 엘리베이터가 집 앞에서 열린 순간, 잠시 수그러들었던 심장의 박동이 다시 시작됐다.

“…이런, 씨발….”

남도하는 갑갑한 속내를 담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질끈 감아버렸고, 도윤범의 입에선 날카로운 감정이 그대로 튀어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현관 앞은 아까 남도하가 뒤집어쓴 붉은 액체가 사방에 퍼져있었고, 현관문과 벽에는 새빨간 스프레이로 온갖 욕설이 쓰여 있었다.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없었던 것이다.

“남창….”

차마 입으로 읊고 싶지도 않은 온갖 욕설이 남도하를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현관문 한가운데 조그마한 메모지가 붙어 있었고, 문고리에는 명품 로고가 선명한 종이봉투가 걸려 있었다. 문 앞에 선 도윤범은 신경질적으로 손바닥만 한 메모지를 떼어내 손으로 잔뜩 구겨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건 뭐야?”

“…안 봐도 돼요.”

사실 크게 궁금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내용을 예상할 수 있었으니까. 미처 벽과 문에 모두 적지 못한 욕 정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우선 들어가요. 집은 괜찮은 거 같으니까.”

찰박이는 붉은 액체 웅덩이를 밟고 문을 연 도윤범을 따라 들어갔다.

* * *

“괜찮아요?”

“어, 괜찮아.”

욕실 문을 열자마자 도윤범에게 손목이 붙들려 소파로 향했다. 평소보다 오랫동안 뜨거운 물을 맞고 있어야 했다. 뒤늦게 몸에서 배어나는 비릿한 냄새가 역겨웠다. 아무리 바디워시와 물로 씻어내고 닦아내도 살에 밴 것처럼 역한 냄새가 지워지질 않는 것 같았다.

뒤늦게 그게 무언가의 피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선명한 냄새를 다른 것으로 오해할 수도 없었다. 역겨운 냄새도 그랬지만,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필요도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생각을 정리하느라 오랜 시간 뜨거운 물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하아… 집 앞에서 문 열려고 하는데….”

그래도 다행히 요동치던 심장은 꽤 차분해졌다. 적어도 제게 벌어진 일을 도윤범에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이야기를 이어가는 사이에도 도윤범의 시선과 손길은 남도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하얀 티셔츠 아래 팔뚝을 확인하고, 얼굴과 목을 쓸며 이상 없음을 확인했다.

“그래서 다친 데는 없다는 거죠?”

“어….”

“다행이에요, 정말….”

마치 얇은 유리 조각품을 대하는 듯한 그 태도가 우스울 만도 했지만, 남도하는 이상하게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조금 더 자신이 안전하다고 확신을 주었으면 싶었다. 그의 부드러운 손길이, 걱정을 담은 시선이 그런 확신을 키워 주고 있었다. 더는 위험하지 않다고.

“윤범아, …또 그거지?”

그러고 있길 한참. 남도하는 자신이 생각한 범인에 대해 말했다.

“그런 거 같네요.”

촬영이 멈춘 살인자의 밤과 별개로, 예능은 문제없이 방영되고 있었다. 원래 짧은 회차로 기획된 것이었기에 촬영분을 분할해 방송하는 것이라 가능했다. 그래서 그런지 첫 방송 이후 도윤범에게 선물을 보냈던 사람, 혹은 사람들은 일회성으로 끝내지 않았다.

“신고, 했어?”

“아니요.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래….”

“잘 처리할 테니까 형은 아무 걱정하지 마요.”

대다수는 회사로 선물을 보내왔지만, ‘누군가’는 저렇게 며칠에 한 번씩 집 앞에 선물을 놓고 가곤 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애정이 다소 과한 팬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야 서주언이 언젠가 남긴 경고가 무겁게 다가왔다. 팬이랑 사생은 한 끗 차이라고. 애정이 광기로 변하면… 생각보다 무섭다고.

“그래, 그만 쉬자.”

“…형 오늘 야식….”

“다음에, 다음에 먹자.”

찝찝하긴 했다. 어떻게 보면 제게 달라붙은 토끼 가면에 비하면 한없이 가벼운 팬일 뿐이었지만, 그걸 지켜보는 남도하는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도윤범도 가만히 있는 상황에 선물에 대해 못마땅한 감정을 드러낼 수도 없었기에 반쯤 체념했었다. 더군다나 도윤범은 선물 공세에 동요하거나 즐기는 기색이 아니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것도 있었다.

“잘 자.”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도윤범의 팬이 남긴 선물은 흔적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어딘가에 소중히 보관해 놓은 것인지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것들이 남도하의 눈에 띄는 일은 없었다.

“하아….”

불도 켜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뛰어들었다. 뭐 이리 되는 일이 하나 없는지 모르겠다. 기대했던 드라마는 투자가 철회되고, 남은 돈이라곤 현찰 몇만 원이 전부다. 쓸데없이 모난 감정만 배설하고 말았다. 심지어 그건 도윤범 때문도 아닌데….

괜한 심술이 타인을 향해 버렸다. 어떻게 보면 도윤범도 이상한 사람이 들러붙은 탓에 피해를 보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데, 왜 그를 탓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괜찮냐 한마디 건네지 못한 자신이 뒤늦게 한심해졌다.

“…거지 같네….”

제멋대로 널뛰는 기분이 당혹스러울 정도다. 하루 사이에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들떴다가 나락을 경험하게 하는 이 감정. 지금은 나락이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진탕을 뒹구는 기분이다. 좋았던 일 하나 떠오르지 않고, 힘들고 막막한 현실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런 생각 사이로 하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장 낮은 바닥을 기어 다니는 순간, 위기의 순간이면 히어로처럼 등장하던 남자. 언제나 제가 예상 못 한순간에 기대치도 않았던 선물을 전하던 사람. 마치 그의 실체에 다가서려 하는 걸 눈치채고 꼭꼭 숨어 버린 것 같은… 괴한. 토끼 가면.

가을, 새벽, 강가 야영장, 텐트, 열기, 입맞춤.

이젠 꿈이었나 싶은 시간만 남긴 채 사라져 버린 새끼. 이상하게 그가 떠올랐다. 한번 머릿속에 차오른 그는, 다른 사고를 밀어내며 점점 더 선명하게 실체를 갖추며 생각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이 전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몽롱한 의식 사이로 익숙한 기계음이 귓가에 파고들었다.

“남도하 씨.”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켜 앉았다. 환청인가 싶을 정도로 당황스러웠다. 한창 그에 대해 떠올리고 있을 때 들려온 목소리였기에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며칠이나 모습을 보이지 않던 남자 때문에 결국은 마지막 입맞춤이 문제였던 것인가 하는 자책까지 들던 순간 그가 등장했다.

“오랜만이네요?”

“늦게 왔다고 화내는 거예요?”

남도하도 제 입에서 나온 목소리에 놀랐다. 상당히 투정 같았고, 목소리 가득 불만이 묻어나 있었다.

“…아니, 그건 아닌데요….”

어둠 사이로 가깝게 다가오는 남자의 기척을 느끼며 급히 변명을 붙였다. 놀라서 그랬다는 둥, 자다 깨서 그렇다는 둥.

“살 빠졌네요.”

이런 일도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인가. 남도하는 곁으로 다가온 남자가 얼굴을 쓸어내리며 하는 말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의 집에 멋대로 들어오는 그가, 이리도 아무렇지 않게 얼굴을 만져대는 그가 더는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기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뺨을 간지럽히는 장갑 낀 손길을 피해 몸을 뒤로 살짝 물렸다. 이유는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남자의 손길에 기분이 나빠져서는 아니었다.

“진짜 삐졌나 보네.”

“…그런 거 아니라고 했….”

“근데 기분 좆같은 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기계음 때문에 상대의 감정이 제대로 읽히지 않은 탓인지, 아니면 어느새 그를 친근하게 느끼던 탓인지. 남도하는 뒤늦게 그의 기분이 상당이 좋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급히 입을 다물어 투정 섞인 감정을 목구멍으로 삼켜 넣으며 제 얼굴을 원래 위치로 돌려놓아야 했다. 남자가 다시 주물러 댈 수 있도록 말이다.

“농담이에요.”

전혀 농담 같지 않은 소리를 하며 다시 남도하의 뺨을 감싸 잡았다. 그는 손끝으로 뺨을 연신 주물럭거리며, ‘살이 너무 빠졌다.’ ‘손에 감기는 맛이 없어졌다.’는 이상한 말을 늘어놓았다.

“이제는 매끼 밥도 억지로 먹여야 하나.”

“…아뇨….”

일순 이상한 생각이 스쳤다. 매 식사 시간, 그 요란한 자개 도시락통을 들고 찾아올 토끼 괴한. 말도 안 되게 많은 음식을 싸 와서는, 남길 때마다 못마땅한 시선을 던질 남자. 아니, 어쩌면 손가락만 한 칼을 모가지에 들이밀며 억지로 도시락을 비우게 할지도 모른다.

막상 남자를 눈앞에 놓고 보니 대체 아까까지 왜 그를 떠올리고 있었는지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틀림없이… 그런 미친놈인데.

“진짜 그 드라마 제작 중단했다고 밥도 안 먹고 그러는 건가.”

“…알고 있어요?”

“당연하죠, 내가 그런 건데.”

태연히 답하는 그의 말에 남도하의 사고가 순간 멎었다. 두 눈만 깜빡깜빡. 벌어진 입은 아무 소리도 뱉어 내지 못했다. 뜻을 이해해 갈수록 실시간으로 화가 차오르다가, 임계점을 넘어선 순간 남자의 손을 쳐내 버렸다. 부딪힌 손등이 시큰할 정도로 있는 힘껏.

“뭐 하는 짓인데요.”

“남도하 씨는 지금 뭐 하는 짓일까.”

“그쪽이 대체…!”

참아 낼 수 없는 분노가 쏟아져 나오려던 순간이었다.

“생각보다 머리가 안 좋은가.”

“뭐요?”

“내가 한 게 맞다면, 이따위 태도로 나와서 좋을 거 하나 없지 않을까?”

사람 가지고 장난하니 재미있었냐, 어떻게 누군가 생계가 걸린 일을 그리 처리할 수 있냐, 하는 화가 막 쏟아지기 직전이었다. 그가 읊조린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가 말한 것처럼 화부터 낸 것이 문제가 아니라, 왜 저 말을 한 치의 의심 없이 사실이라 믿었던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네요. 그쪽이 그런 건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마치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 같은 그의 언동에 짜증이 가득 담겨 비아냥에 가까운 목소리가 나왔다.

그는 주저 없이 자신이 촬영을 중단시켰다 했지만, 생각해 보면 이리 쉽게 믿을 이야기가 아니긴 했다. 무려 300억이 넘는 금액이 들어간 드라마다. 중단으로 인해 발생할 피해는 수많은 사람이 함께 짊어져야 하겠지만, 가장 큰 피해를 보아야 하는 건, 드라마를 중단시킨 당사자일 것이다. 어쩌면 상상도 못 할 위약금을 물어주어야 할 수도 있다.

“하, 진짜… 오늘 제대로 토라졌구나. 좆같은 소리까지 하면서 사람 속 슬슬 긁어 대는 거 보니까. 밥이나 좀 안 먹는다고 걱정할 게 아니었네.”

이건 촬영장에 밥 차를 보내거나, 집에 몰래 숨어드는 일과는 차원이 다르다. 일순 남도하도 그의 말을 순진하게 모두 믿어 버리긴 했지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눈앞의 남자가 촬영을 중단시킨 사람이 아니라고 보는 쪽이 타당했다.

“그럼 뭐, 그쪽이 K&M 엔터 대표라도 돼요?”

“글쎄.”

농담처럼 말을 하긴 했지만 생각도 하기 싫었다. K&M 대표를 못 봤다면 모르겠다. 머리가 반쯤 벗겨진 할아버지에 가까운 아저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런 할아버지와 가을 새벽 입맞춤을 했다 생각하면… 정말 죽어 버리고 싶으니까.

“지금 남도하 씨가 그런 걸 의심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뭐… 가요, 또.”

“항상 보면 남도하 씨는 너무 눈앞의 상황만 바라보는 거 같아.”

목 끝까지 변명이 튀어나왔지만, 깊은 한숨만 한번 내쉬고 말았다. 항상 눈앞에 닥친 현실이 가장 힘들고 벅찬데, 그 와중에 그럼 무엇을 또 생각해야 한다는 말인가. 당장 그것도 해결 못 해 허덕이는 사람인데.

“애초에 남도하 씨한테 그 역할을 준 게 난데, 왜 뺏는 건 못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게 무슨….”

“적어도 난 기회는 줬어요. 그걸 걷어찬 건 남도하 씨고.”

빠르게 이어지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입이 다물어졌다. 어둠 속에서 목소리만 듣는 탓일까. 어려운 단어 하나 없는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어 침대 옆 스탠드를 밝혔다. 낮은 조도의 노란 불빛이 방안을 채우며 흐릿하게만 보이던 남자의 모습이 또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서, 설명해요, 무슨 말인지.”

어쩌면 불을 켠 것은 실수였던 것 같다. 어차피 상대는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후드까지 뒤집어써 눈에 보이는 것으로 아무런 감정도 읽어 낼 수 없는데. 오히려 밝혀진 조명이 남도하의 당황에 젖은 얼굴을 그대로 드러낼 것이다.

“연기만 했어야죠, 그러니까.”

앞으로 팔짱을 낀 그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어 있었다. 무언가 못마땅할 때면 나오던 자세였다. 그는 저 말만 남긴 채 더 이상의 설명을 잇지 않았다. 길어지는 공백 사이를 복잡하게 얽힌 남도하의 생각이 차지했다. 얼기설기 꼬인 수많은 생각 사이로, 어떤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혹시… 방송 때문에 그래요…?”

이번에도 침묵. 하지만 남도하는 그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드라마 제작이 중단됐다는 통보가 온 날, 서주언이 보낸 메시지가 기억났다. 미끼가 너무 성공적이었다는 말. 어쩌면 그의 말처럼 이 괴한은 살인자의 밤과 무언가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는 확신이 피어났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서주언에게 전화를 걸어 그가 알고 있는 걸 묻고 싶었다. 틀림없이 그는… 이 괴한에 대해 뭔가 알고 있다. 적어도 남도하 저보다는 더 많은 것을.

“그거 때문에 화났어요?”

하지만 당장 집중해야 하는 쪽은 그쪽이 아니었다. 남도하의 생각이 정리되어 갈수록, 내뱉는 말이 조심스러워졌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생각해 보면, 그럴싸하게 아귀가 들어맞았다. 이어지는 침묵도 생각의 시간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한참 만에야 기계음이 들려왔다. 제 감정을 하나도 흘리지 않겠다는 것인지, 자세도 목소리도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그야….”

떠오르는 생각은 있는데, 말로 옮기기가 조심스러웠다. 그쪽 잡으려고 덫 놓자마자 걸려들었으니까요, 라고 하면 내일 태양이 떠오르는 걸 무사히 볼 수 없을 것 같고….

“팬이라면서요, 그러니까….”

“그거 그만한다고 했는데.”

어떤 형태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남도하 저를 향한 남다른 애정이 있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자신의 위험을 무시하고 도와줄 정도의 애정.

“…하잖아요….”

“똑바로 말해요.”

“조, 좋아하잖아요, 저.”

“…….”

“그러면! 그,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말을 하다 보니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기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방금 한 말은 못 들은 거로 해요….”

짧은 시간, 괜한 말을 뱉었다는 후회가 들었다. 의심이 아니라 반쯤 확신하고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도, 말도 하지 않는 상대를 보자니 또 대형 실수를 저지른 것만 같았다. 남도하가 입술 안쪽 연한 살을 자근자근 씹어 댈 때야 남자가 움직였다.

“그걸 아는 사람이 그따위로 행동해요?”

“…무, 무슨….”

“강태운 같은 새끼들한테 휘둘리지 말라고 애써 자리 만들어 줬더니, 이 새끼고 저 새끼고 아무하고나….”

확실하다. 남도하의 한마디가 그의 무언가를 건드렸다. 팔짱을 푼 그는 남도하의 모가지를 그러쥐었다.

“내가 경고했죠, 한 번만 더 내가 준 거 가지고 다른 새끼랑 노닥거리면….”

힘이 들어가진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이 남자가 이대로 손가락에 힘을 싣는 순간, 남도하 제 목뼈가 그대로 부러져 버릴 거라는 걸. 그리고 그 공포가, 잊고 있던 그의 경고를 떠올리게 했다.

“손모가지 잘라 버린다고.”

그랬다. 가라오케에 강태운을 만나러 가는 길, 남도하는 그가 선물한 시계를 차고 갔었다. 잘 어울린다는 칭찬과는 별개로, 한 번만 더 다른 새끼 만나러 갈 때 자기가 준 걸 차고 가면 손목을 잘라 버리겠다는 협박을 남겼었다.

“그, 그거… 안 차고….”

지금만큼은 저 말이 진심인 것 같았다. 까만색 토끼 눈알을 뚫고, 남도하를 훑는 눈길이 고민하는 것 같았다. 오른쪽 손목을 자를까, 왼쪽 손목을 자를까. 그 막연한 공포에 남도하의 입에선 제대로 된 문장이 나오지 못했다. 그런 남도하를 보며 토끼 괴한은 목을 감쌌던 손가락을 슬금슬금 움직여 어깨로 향했다.

“지금 내가 그딴 시계 말하는 거 같아요? 내 탓하지 말아요. 내가 준 기회 걷어찬 건 남도하 씨니까. 난, 틀림없이 기회도 줬고, 경고도 했어요.”

남자에게서 여태까지와는 다른 쪽의 감정이 쏟아져 나왔다. 화를 내는 것 같은 기분 한편으로… 다른 감정도 전해졌다. 어쨌든 손목을 자르겠다는 둥의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걸걸한 입버릇과는 다르게 그런 쪽의 호러를 선보이는 남자는 아니었으니까. 안도하고 나서야 남도하의 생각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저기요.”

지금 저 가면 너머, 그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잔뜩 섞여 나오는 기계음을 빼내면 어떤 목소리로 저런 말을 하고 있을까.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왠지… 슬픈 모습일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게 아니면 상처받은 모습은 아닐까.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근본 없는 두려움을 사라지며 다른 감정이 피어올랐다.

‘탁.’ 소리와 함께 방 안에 다시 어둠이 내려앉았다. 남도하가 스탠드를 꺼 버린 이유다. 갑자기 어두워진 탓에 남자의 입도, 움직임도 멈춰 섰다. 남도하는 제 어깨에 얹어진 남자의 팔뚝을 잡고, 그대로 당겼다. 얼떨결에 딸려오는 그의 등허리를 한 손으로 감싸 안았다.

“불안… 했어요?”

낮은 목소리로 작게 속삭이는 남도하의 말에 가면 뒤쪽에서 작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질투했어요?’라고 물으려다 말을 바꾸었다. 단어 하나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다른 느낌을 주었다. 그 생각이 옳았는지, 상대는 침묵으로 긍정하는 것 같았다.

조금 더 힘주어 그의 허리를 감싸며, 다른 손으로 남자의 가면을 들어 올렸다. 작은 동작 하나하나, 길지 않은 시간. 입이 바싹바싹 말라가는 기분이었지만, 최대한 태연히 행동을 이었다.

“…얌전히 있어 줘요.”

느릿한 손길로 상대에게 얼굴을 보려는 의도가 없다는 걸 전달했다. 가면 아래를 잡아 천천히 들췄다. 입술과 코언저리 정도까지. 그러곤 상대의 뒷덜미를 가볍게 감싸며, 거리를 점차 좁혀 나갔다. 조금 전까지 거친 감정을 토설하던 괴한은 의외로 순순히 남도하의 행동에 따랐다.

“저도… 확인해 보고 싶었거든요.”

서로의 가슴팍이 맞닿아 버릴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졌다. 남자에게서 시작된 뜨거운 숨이 남도하의 폐부로 스며들었다. 그렇게 조심스레 거리를 좁혀가다가, 닿았다. 지나치게 뜨겁고, 또 부드러운 그의 입술에.

손바닥을 타고 딱딱하게 경직되어 가는 남자의 몸이 느껴졌다. 그래서 조금 더 오래 입술을 맞댄 채 멈추어 있었다. 정말, 다른 의도가 없다는 마음을 전달하려고. 물론 그 사이 남도하의 심장은 목구멍으로 넘어올 것처럼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새까맣고 적막한 방 안, 커다랗게 울리기 시작한 박동이 귓가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차오르는 긴장을 눌러내려 남자의 허리를 더 강하게 당겨 안았다.

“큽….”

그러고 있기를 한참. 긴장이 조금 수그러든 남도하는 지금 상황이 조금 우스웠다. 조금 전까지 죽일 것처럼 으르렁대던 남자는 너무나도 얌전히 남도하의 품 안에 들어와 있었다. 낮은 웃음소리 때문인지 아래 남자는 조금 더 딱딱하게 굳은 것 같았다.

남도하는 입술을 더욱더 무겁게 짓누르며, 굳어있는 남자의 다물어진 입술 사이로 혓바닥을 밀어 넣었다. 그러곤 부드러운 짓으로 입안을 옮겨가며 훑었다. 그의 허리를 더욱더 강하게 당기며, 좁고 연한 살을 혀끝으로 간지럽히고 핥아 나가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 순간, 남자가 움직였다. 입술이 맞닿은 자세 그대로 몸이 돌았다. 남도하의 등이 침대에 닿고, 그가 남도하의 위에 올라탔다.

“흐읍….”

남도하의 입안으로 말랑거리는 살덩어리가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하지만 채 그 부드러움을 느끼기도 전, 그는 혀를 뒤로 물리며 떨어져 나가려 했다. 맞닿은 입술이 떨어지기 전에 남자의 뒷덜미를 눌러 다시 붙였다. 충동이었다. 지난번과 다르게 너무나도 짧게 닿았다 떨어지는 행위가 아쉬웠다. 그의 입안으로 혀를 옮겼다. 똑같은 입안일 텐데도, 상대의 안쪽은 더욱더 좁고, 뜨겁고… 부드러웠다.

혀끝에 닿는 점막도, 맞닿아 쓸리는 혓바닥도 낯설기는 했지만, 지독한 자극이었다. 차오르는 타액을 아무리 목구멍으로 넘겨도 짙은 갈증만 더해질 뿐이었다.

그의 몸을 품안 가득 힘주어 안고서야 확실히 깨달았다. 지난번, 그 입맞춤 이후 남겨진 감정이 착각이 아니었다는 걸.

* * *

기나긴 입맞춤은 남도하에게 여러 감정을 심어 버렸다. 시작은 말도 안 되는 동정심과 설득 그리고 확인이었다. 투정을 부리는 것 같은 남자를 달래려는 의도였다. 거기에 더해 지난번 남자와의 키스가 남긴 감정을 확인할 필요도 있었다. 언제나 작은 스킨십으로 화를 풀곤 하던 남자의 약점을 이용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 그와의 키스 후 남은 감정은, 의외로 허탈함이었다. 더는 남자의 말을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처음부터… 그쪽이었네요.”

운이 좋다 생각했다. 눈먼 행운이 연이어 찾아오는 것이라 믿었다. 강태운으로 액땜을 한 뒤, 27년 인생에 한 번 찾아오지 않던 행운이 온 것이라 생각했다. 누군가 말하던 것처럼, 인생에 몇 번 찾아온다는 그 기회에 드디어 닿은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오랜 세월 빛 보지 못한 자신에게도 공정한 기회가 주어졌다고.

“…왜….”

하지만 시작부터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다. 그쪽이 더 합리적인 이야기긴 했다. 비중이 작은 조연과 단역만 전전하던 제게 갑자기 그런 비중 있는 자리를 제안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였다.

“다른 일 해요, 그거 말고.”

다시 가면을 정리한 그가 스탠드 조명을 밝혔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에게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던 것처럼, 토끼 가면은 태연했다.

“내가 해 줄 수 있어요.”

“…….”

저리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것도 그렇고, 그간 상대가 보인 행동을 바탕으로 보자면 틀림없이 그럴 수 있는 능력을 손에 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주어지는 기회들이 자신의 것은 맞는 걸까…. 강태운이 제게 제안한 것과 무엇이 다를까.

“…아니요, 괜찮아요. 그런 거 안 해 주셔도….”

“착각하지 마요.”

“네?”

“내가 남도하 씨를 그 자리에 넣은 건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니까.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어요.”

남자는 이불로 시선을 떨구고 있던 남도하의 턱을 잡아 올렸다.

“근데 내가 불안해서 안 되겠어요. 주변에 자꾸 이상한 새끼들이 꼬여서.”

“아니, 그건 그냥… 하아… 연기잖아요.”

“나한테 계속 장난해서 좋을 거 없을 텐데요.”

“…….”

남도하는 짧게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반쯤 모험이지만, 어쩌면 상대가 원하는 답은 따로 있는 것 아닐까.

“사, 사실은… 일부러 그랬어요….”

“왜.”

“그쪽 찾고 싶어서요.”

“하.”

“저, 정말… 그래서 그런 건데, 어쨌든 죄송해요….”

저리 이상한 오해를 잔뜩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사실을 말하는 쪽이 낫겠다 싶었다.

“그러니까….”

“똑바로 말해요. 왜 그렇게 우물쭈물해요?”

그야, 정말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해야 하니까 그렇다.

“드라마 다시 하게 해 줘요. 다른 거 말고….”

“하아… 그건 안 된다고 했는데.”

나름 엄한 척 반말까지 뱉어내는 토끼 가면이었지만, 확연히 분위기가 달라졌다. 어쩌면 그와의 입맞춤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화를 내는 듯한 느낌은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해 줄 건데요?”

“똑똑하네, 도하 씨.”

역시, 남자는 원하는 게 있었다. 어떤 조건이 달라붙을지 한참 긴장감이 치솟고 있던 와중 튀어나온 남자의 말을 듣다가, 남도하는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 조금 미친 소리 같기도 했고, 약간 우습기도 한 그의 조건이었다.

“이해했어요?”

“…그러니까, 조, 조신하게… 행동하라는 거죠….”

“또.”

“더는 그쪽 정체 밝히려고 하지 말고.”

조신…하게라니. 마치 자신이 여러 사람을 홀리고 다니는 듯한 단어였다. 물론 어떤 뜻으로 건넨 말인지는 알고 있다. 더는 예능과 비하인드 영상에서 보이던 행동을 하지 말라는 거다.

“그런데요….”

“싫음 말고.”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남도하의 입술이 샐쭉거렸다. 앞으로 맞잡아 내려놓은 손은 있지도 않은 손끝 거스러미를 쓸어댔다. 남자는 이번엔 재촉하지 않으며 남도하가 말을 잇기만을 기다렸다.

“키, 키… 하아…. 그거까지 했는데요….”

“그래서요?”

하마터면 또, 욱하는 감정이 치솟을 뻔했다. 자신이 어떤 고뇌를 가지고 입을 맞춘 것인데. 만약 그에게 강태운과 같은 감정을 느꼈더라면, 드라마를 접으면 접었지 절대 그런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 듣는다면 미친 생각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와는 상이한 감정이란 걸 지금은 알고 있다. 이번 입맞춤을 통해 지난번 야영장에서 느꼈던 감정의 정체를 어느 정도 알아챌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상대는 키스마저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으니, 속이 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못 믿으면 됐어요.”

있는 용기, 없는 용기 끌어모아 키스까지 먼저 했는데. 정체도 모를 미친놈에게. 그런데 그는 마치 남도하가 원래 그런 행위에 익숙한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앙탈 부리는 거예요, 지금?”

반박을 뱉어내려다 입을 닫았다. 여기서 한마디만 더 받아쳤다가는 정말 앙탈 부리는 게 돼 버릴 것 같았다. 깊은숨을 한번 내쉬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고 말았다. 남자의 기분은 상당히 풀어진 것으로 보였지만, 반대로 남도하의 속은 천불이 들끓었다. 남자를 살살 달래서 드라마를 다시 시작하게 해 달라 설득하려 했는데, 지금 기분 같아서는 드라마 따위 아무렇게나 되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맘대로 해요.”

등을 휙 돌려 버렸다.

* * *

“저랑 얘기 좀 해요.”

“들었어, 드라마 다시 시작한다며.”

“그거 말고요.”

남도하는 흔치 않게 서주언에게 먼저 연락을 했다. 어딘가에서 그 토끼 가면이 바라보고 있을까 싶어 몇 차례나 망설이긴 했지만, 차오르는 궁금증을 눌러 낼 수가 없었다. 물론 만남은 쉽게 성사되지 못했다. 드라마 촬영이 아니더라도 서주언의 스케줄은 매우 바빠서, 그가 원하는 시간에 맞춰 짧게 얼굴을 보는 게 전부였다.

“뭔데 그래?”

“K&M이랑… 저랑 뭐 있죠?”

“…무슨 질문이 그따위지.”

말을 하고 보니 남도하 저도 질문이 이상하다는 건 이해했지만, 얼추 뜻은 전해졌으리라 생각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저번에… 그랬잖아요. 미끼가 너무 성공적이었나 보다고.”

“그랬지.”

“그때, 제 스토커… 아니, 팬 이야기 꺼낼 타이밍은 아니었잖아요.”

…팬이다, 팬. 그는 더 이상 팬은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렇게 믿을 테다. 스토커나 괴한…같은 것보다는 그쪽이 훨씬 마음이 편했다.

“나도 처음엔 그런 줄 알았지.”

“무슨 소리예요…?”

“너 빼고 다 알아. K&M에서 남도하, 너 콕 찍어서 배역 정해 준 거.”

“…….”

“그래서 나도 신기하더라고. 걔들이 돈은 잘 쓰는데, 또 그런 갑질은 안 한단 말이지. 근데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를 딱 찍으니까… 수상했지.”

서주언은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급조해 낸 말이 아니라는 거다.

“근데 미끼 좀 흘렸더니 300억이 넘게 들어간 드라마를 엎어 버린다? 당연히 네 그 이상한 ‘팬’이랑 K&M을 연관 짓는 게 더 빠르지 않겠어?”

‘밥 차나 선물도 그렇고.’라고 덧붙이는 서주언의 말을 들어보니 꽤… 합리적으로 들렸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는 지난밤 토끼 가면이 남긴 말과도 일맥상통했다. 남도하를 캐스팅한 건 누가 보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서주언이 다시 한번 확인해 줬다.

“그래서… 처음부터 저한테 그런 거예요…?”

“뭘 그래?”

“K&M 때문에 처음부터 그렇게 저한테 관심 보이셨냐고요.”

“글쎄…. 그것 때문에 관심이 더해지긴 했지. 더는 노코멘트.”

서주언은 애매한 말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관심이 더해졌다는 건, 그전에도 어떠한 관심이 존재했다는 말일 테다. 하지만 물병을 들어 목을 축이는 그를 보니 더 이상 힌트를 주고 싶은 마음은 없는 것 같다.

“어쨌든, 이번엔 끝까지 촬영할 수 있는 거지? 나 겁나 바쁜 사람이야.”

“그, 그걸 왜 저한테 물어요?”

“갑자기 와서 K&M에 대해서 물어보면 뻔한 거 아닌가.”

“…….”

서주언처럼 별다른 힌트를 흘리고 싶지 않았는데, 역시 그는 한 수 위였다. 뭔가 비밀을 만들래야 그럴 수가 없다. 모르긴 몰라도 남도하가 ‘누군가’와 만났다는 걸 눈치챈 것일 테다.

“갈게요.”

그의 CF 촬영 중간, 차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상당히 지쳐 보이는 서주언을 보며 남도하는 그만 물러날 때라는 걸 느꼈다. 막 차 문을 열려는 순간, 남도하의 손목이 붙들렸다.

“그렇다고 낙하산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냐.”

“…네?”

“너 실력 좋다고. 그 자리 누가 들어왔어도 너만큼 못 했을 거야.”

서주언은 눈꺼풀도 들어 올리지 않은 채 잠꼬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그렇다고.”

남도하는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네고 부리나케 차에서 내렸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낯간지러운 칭찬도 민망했지만, 손목이 잡히는 스킨십도 신경 쓰였다.

조신하게, 조신하게….

말 같지도 않은 토끼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만 같았다.

“얼마나 급한 일이길래 촬영장까지 쫓아와요?”

“아… 별거 아니야. 가자.”

차에 돌아오자 도윤범이 기다리고 있었다. 혼자서 와도 된다는 말을 듣지도 않은 채 제가 운전하는 차에 올라타게 했다.

“촬영 다시 시작해서 다행이죠…?”

“그럼. 다행…이지.”

오늘 아침 들려온 소식에 모두가 들썩였다. 소속사도 제작사도, 방송국도. 표면적으로는 배우들의 컨디션 관리를 위한 휴식 정도로 포장되었다. 열악한 드라마 제작 환경을 개선하겠다나 어쨌다나. 어쨌든, 그 소식과 함께 촬영이 재개되었다.

덕분에 남도하의 가장 큰 고민도 덜어진 셈이었지만, 오히려 더 큰 문제를 짊어진 것도 같았다. 손등으로 입술을 가볍게 문지르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고작 다른 사람과 노닥거리는 모습만으로 드라마를 중단시켜 버리는 새끼. 고작… 키스 한 번에 그걸 다시 뒤엎는 남자.

“형,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틀림없이 더는 그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아직까지 그의 온기가 입술에 붙어 있는 것만 같다.

“어? 아냐.”

“샵 먼저 가요, 우리.”

“…또…?”

“당연하죠. 촬영 시작했으니까 다시 한번 손 봐야죠. 뿌염도 하고.”

“뿌염… 말이지….”

우선… 당장 도윤범의 극성에서 살아남는 일이 더 문제긴 하다. 그도 촬영이 재개된 게 싫지 않은지, 상당히 들떠 보였다. 저런 상태의 도윤범이라면, 틀림없이 몇 시간은 붙들려 헤어와 의상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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