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Sweet but Psycho=)
“누, 누구…!”
“…쉬… 괜찮아. 조용히 있으면 안 다쳐요.”
남도하는 얼굴에 닿는 물체의 감각에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어둠에 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차갑고 딱딱한 감각이 무엇인지 모를 수 없었다. 거기에 더해 들려오는 목소리는 이상하게 변조되어 남자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돈은… 얼마 없기는 한데 지갑에 있….”
“조용히, 하라고 했죠.”
뾰족한 칼 끝의 느낌이 얼굴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려 목울대 근처에 닿았다. 한마디만 더 보탰다가는 그대로 목을 꿰뚫어 버릴 것만 같아 더 이상의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살인범일까, 강도일까…? 갑작스러운 상황에 머리가 하얗게 비어 버렸다.
“내가 작은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줄 거죠?”
“네, 네…!”
목젖을 조금 더 압박하는 감각에 남도하는 뇌를 거치지 않은 답을 뱉어냈다. 대체 어느 틈에 집에 들어온 것인지 모르겠다. 상체를 압박하는 무게에 잠에서 깨어나 보니, 지금 이 상황이었다. 누군지도 모를 미친놈이 자신의 몸에 올라타 칼을 겨누고 있는 상황.
“내일 일정 하나 있죠?”
“…예.”
“그거 가지 마세요.”
“그게 무슨….”
“부탁 들어준다면서요. 아니면… 여기서 그냥 죽어도 되고.”
칼을 쥐지 않은 손이 얼굴을 쓸었다. 손에도 장갑을 낀 것인지 부드러운 천의 촉감이 느껴졌다.
“대답, 해야죠.”
“…알았어요.”
“착해요. 죽인다는 건 농담이에요.”
이상한 기계음의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상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지직거리는 소리라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뺨을 가볍게 꼬집는 손길에 남자의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유는 궁금해하지 말고요.”
“…….”
“다 그쪽을 위해서라는 거만 알아 둬요. 내가 메시지까지 보냈는데 덜컥 약속을 잡아 버리면 어떻게 해요?”
볼을 꼬집던 손이 머리로 옮겨가 개새끼에게 하듯 머리칼을 헤집어 댔다. 한참이나 어두운 곳을 눈에 담고 있던 덕분인지 조금씩 사내의 모습이 눈에 들었다. 주변의 어둠보다도 더욱 검은 옷을 걸치고, 얼굴엔 새하얀 가면을 썼다. …뒤집어쓴 후드 바깥으로 기다란 귀가 튀어나온, 토끼 가면이다. 그리고, 생각보다 덩치가 크지는 않다. 상대를 인식하고 나자 남도하는 순간 고민이 스쳤다.
이대로 상대를 제압할까.
“그리고 경찰에 신고해도 재미없을 거예요. 뭐… 신고해도 상관없기는 한데 우리 귀찮게 살지 마요.”
가슴팍에 올라탄 무게가 그리 위협적이지 않다. 칼을 들기는 했지만, 전혀 감당 불가한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아니다. 어쩌면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왜… 저한테 이러시는 거죠…?”
우선 상대의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말을 걸었다. 미친놈에게 그런 이유 따위가 있을 리도 없고, 별로 궁금하지도 않지만.
“내가 남도하 씨 팬이거든. 지켜 줘야죠.”
변조된 목소리 탓인지 그의 감정이 읽히질 않는다. 장난인지, 진심인지. 그런 감정 역시 알고 싶지 않은 남도하는 그사이 오른손을 조심스럽게 움직여, 칼을 쥐고 있던 그의 손목을 쳐 냈다.
타앗!
남자의 손에서 벗어난 칼이 침대 밖 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남도하는 빠르게 상대의 손목을 낚아챘다. 한 손에 쥐여지는 양 손목을 잡아 제압하려 했지만….
“하아… 씨발, 진짜.”
비틀어 빼내는 힘이 너무 세다. 가는 팔만 보고는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예상과 다르게 거친 동작으로 손안에 들어있던 팔목이 빠져나감과 동시에, 남도하의 양 손목이 상대의 한쪽 손에 붙들려 버렸다. 아무리 버둥거려도 팔은 마치 끈으로 묶인 것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당황스러울 정도의 힘이었다.
“얌전히 있으라고 했죠. 진짜 죽고 싶어요?”
설상가상 그는 남도하의 두 팔을 잡아 머리 위로 올려 강한 힘으로 짓눌렀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머리는 당황으로 젖어 버렸다.
“아니면 좋게 좋게 말하니까 만만해 보였나.”
“그, 그게… 읍…!”
간신히 열린 입이 다시 막혀 버렸다. 두 팔을 붙잡지 않은 손이 벌어졌던 입을 짓눌렀다. 심장은 삽시간에 위험 신호를 보내듯 커다란 울림을 보였고, 그 탓에 호흡이 달려왔다. 코로 내쉬고 들이켜는 숨이 부족하다. 한순간의 판단 착오로 나름 호의적이던 상대의 행동에 날이 서 버렸다.
“자꾸 이렇게 나오면 내가 너무 섭섭해요. 남도하 씨는 팬한테 이렇게 대하나?”
남도하는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든 고갤 최대한 흔들어 부정을 표했다. 팬이라는 말도 믿을 수 없지만, 지금은 어쨌든 상대의 기분에 맞춰 줘야 한다. 칼이 없더라도 힘으로 그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제대로 느끼는 중이다.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정신도 그렇고, 신체적으로도 그렇다.
“또 그러면 저 진짜 화내요. 알았어요?”
자신이 남도하를 힘으로 압도한다는 사실을 남자도 눈치챘다. 두 팔을 옥죄던 손과 입을 막고 있던 것이 동시에 떨어져 나갔다. 하고 싶은 대로 해 보라는 자신감이 느껴지는 행동이었다.
“하아….”
“대답 안 해요?”
변조된 목소리임에도 이상하게 남자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감도는 것 같았다. 어쩌면 남도하의 입술 주변을 톡톡 두드리는 가벼운 행동 탓일 수도 있겠다.
“하아… 정말 나 화나게 할 거예요?”
“아니, 아니요. …죄송, 해요.”
상대의 감정을 읽기가 어렵다. 장난스러운 한편으로, 진심으로 짜증을 내는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지금 제 목줄을 쥔 것이 남자라는 건 확실했기에 남도하는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했다.
“…왜 이렇게 벌벌 떨어요, 속상하게.”
남자는 남도하의 굳은 얼굴을 내려다보며 아까처럼 가볍게 뺨을 꼬집었다. 아니, 이번엔 두 손으로 양 뺨을 주욱 당겼다. 당연히 통증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없었지만, 마치 흉기로 위협이라도 당하는 기분에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하아… 그러니까 왜 괜한 짓을 해서는…. 내 말만 잘 들었어도 우리가 이렇게 어색할 필요 없잖아요.”
무언가 잘못된 이야기가 틀림없음에도, ‘네….’ 라는 대답만이 남도하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어쨌든 하나 더 확실한 것은, 이 남자가 자신을 해치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우세한 상황에서도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것이 그 반증이다. 어쩌면 아까 그가 말한 팬이라는 이야기는 거짓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여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지만, 이런 부류의 ‘팬’을 소문으로 들어 본 적은 있다.
사생.
조연, 단역만 맡는 무명 배우에 가까운 남도하였기에 여태 팬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지만, 어쩌면… 아이돌에게나 붙는다는 사생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물론, 그 생각만으로 민망했다. 자신에게 그냥 팬도 아닌 사생이라니.
“저, 저기요….”
“왜요.”
그가 해치지 않을 거라는 믿음 때문인지, 근본 없는 용기가 솟았다. 그가 말했던 것처럼 만약 자신의 팬이 맞는다면… 설득이 쉬울 수도 있다.
“사인… 해 드려요? 아님 뭐, 사진이라도 찍어 드려요…?”
“…….”
얼굴을 주물러 대던 상대의 움직임이 멎었다. 무언가 잘못된 이야기를 꺼낸 것 같다는 후회가 들었다.
“아니, 아니! 그럼 뭐, 포옹이라도 해 드릴까요?”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말에도 위에 올라탄 남자는 아무런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사, 살려만 주시면… 다 해 드릴게요.”
상대의 침묵 때문인지, 남도하는 자신이 뱉어낸 말에 스스로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생각해 보니 누가 제 사인을 원하고, 사진을 원하고… 포옹을 원하겠나. 심지어 상대는 같은 남자가 아닌가. 실제로 그런 걸 해 본 적도 없던 것은 둘째 치고, 저런 건 정말 아이돌 팬에게나 어울리는 팬 서비스일 뿐이었다. 남자가 그런 걸 원할 리 없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진짜요?”
“예?”
“사진 찍어도 돼요? 포옹도요?”
“그게….”
“사인은 어디에 해 줄 건데요. 모, 몸에도 해 주나…?”
틀림없이 변조된 목소리 때문에 감정을 읽기가 어려웠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지금은 상당히 들뜬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예… 원하시면요.”
“흐음….”
가면을 뚫고 기다란 한숨이 쏟아졌다. 그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남도하는 입이 말라 갔다.
“오늘은 포옹… 해 줘요, 그럼.”
한참 만에 나온 말과 함께 남자는 남도하의 가슴팍에서 내려오며 뒷덜미를 감싸듯 당겨 올렸다. 그제야 확실히 알았다. 상대는, 생각보다 훨씬 힘이 세다. 남도하도 작은 체격이 아니었음에도 그의 손길에 너무나도 쉽게 달려 올라가 버렸다.
그리고 또 하나 깨달았다. 그는 무식할 정도의 힘에 비해 몸집이 크지는 않다. 같은 눈높이로 앉아 있으니 제대로 느껴졌다.
“후우… 포옹만 해 주면, 그냥 갈… 거죠…?”
“네.”
조도가 낮은 방임에도 사내의 고개가 미친 듯 위아래로 흔들리는 게 보였다. 아직도 고작 포옹 한 번에 그가 물러날 거라는 말이 믿어지진 않았지만, 어차피 지금 상황에 선택지 같은 건 없었다. 팔 하나 정도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를 향해 거리를 좁혔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게 말도 안 되는 짓이라는 건 알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그저 이 미친놈이 약속을 지키기만을 바랄 수밖에.
“하….”
어설프게 상대의 등을 감싸 당기자, 변조된 목소리의 낮은 탄식과 비슷한 숨이 튀어나왔다. 남도하는 반대로 입이 바싹 마르며 손바닥에 땀이 차올랐다. 어떤 짓을 벌일지 모를 상대를 품에 안는 것이 영 꺼림칙했지만, 의외로 그는 별다른 행동 없이 얌전히 포옹을 받아들였다.
“그럼 이제 그만….”
“잠, 잠깐!”
고작 몇 초나 흘렀을까. 참기 어려운 어색함에 남도하가 먼저 몸을 떼어 내려 했지만, 허리춤을 움켜잡는 손길에 떼어 내려던 몸을 다시 원상 복귀시켜야 했다. 등을 감쌌던 손도 빠르게 원위치시켰다.
“내가 아까 한 말 잊으면 안 돼요.”
“…네.”
“착하다. 그럼… 다음에 또 만나요. 휴대폰은 거실에 놓고 갈게요. 열만 세고 밖으로 나와요, 알았죠?”
다음, 이라니. 생각만으로도 소름 돋는 말이었지만, 어쨌든 그는 약속을 지키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았기에 더는 자극하지 않기로 했다. 조심스럽게 등을 감싼 팔을 풀어내자 사내는 몸을 일으켜 뒷걸음질 치며 방을 빠져나갔다. 아니, 나가려던 방문을 잡은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숫자, 안 세요?”
“…입으로요…?”
“당연하죠. 갑자기 쫓아 나오면 어떻게 해요.”
그럴 생각도 없다. 이대로 얌전히 사라져 주기만 한다면, 더는 바랄 게 없다. 그리고 그를 쫓아 나가서 뭘 어쩌겠나. 이해할 수 없는 힘 차이를 이미 겪어 보았기에 무모한 도전을 하고 싶지 않다.
“…열, 아홉….”
“아 그리고, 휴대폰 옆에 선물 하나 놓고 갈게요. 잘 자요.”
그 말을 끝으로 남자는 문을 닫고 나갔다. 말을 잘 듣는 아이처럼, 남도하는 어둠 속에서 하나까지 숫자를 읊조렸다. 그러고서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나가자 거실은 불이 켜져 있을 뿐 별다른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더 이상한 것은 현관문마저 이중 보안 장치가 안쪽에서 걸려 있다는 거다.
“하아…. 뭐야 이게….”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남자가 마치 귀신이라도 되는 것 같다. …4층인데 설마…. 잠겨 있지 않은 건 베란다 창뿐인데, 그곳으로 뛰어내렸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높다. 만약 거실 소파 위에 올려진 휴대폰 옆에 작은 상자가 없었다면, 꼼짝없이 자다가 꿈이라도 꿨다고 믿었을 거다.
꿈이 아닌 현실이란 걸 깨달은 남도하는 급히 휴대폰을 들다가 움직임을 멈췄다. 경찰에 신고하기도, 회사에 알리기도 애매한 탓이다. ‘어떤 남자가 쳐들어와서 포옹해 주니까 그냥 갔습니다.’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기도 썩 달갑지 않은 내용일 뿐만 아니라, 믿어 주기나 하려나 모르겠다. 더군다나 회사에서 있으나 마나 한 존재인 배우의 부름에 달려와 줄 사람 또한 없다.
남도하는 휴대폰을 도로 소파에 던져 버렸다. 타인의 침입에 놀라기는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당장 신고해야 한다는 위기감이 들지 않았다. 기묘하게도.
“…이게… 뭐야.”
그리고, 휴대폰 옆에 있던 상자를 열어 보곤 어딘가에 연락해야 한다는 생각을 잠시 잊어버렸다.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브랜드의 시계가 상자 안에 들어 있었다.
[사랑해요.]
동글동글한 글씨의 정갈한 메모와 함께.
…아무래도, 신고해야겠다. 휴대폰을 다시 잡아 들었다.
* * *
“저기… 형.”
“왜.”
“오늘 드라마 미팅 취소하면 안 될까요?”
매니저, 이원호는 남도하의 목소리에도 별다른 대꾸 없이 휴대폰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네가 미쳤지. 너 그 드라마라도 출연 안 하면 고정 스케줄 아무것도 없어. 하반기 내내.”
“뭐… 그렇기는 한데 별로 안 내켜서요.”
“헛소리하지 말고 무조건 나가. 안 그래도 너 계약 기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아무 일도 안 하고 있으면 회사에서 미쳤다고 계약 연장하겠냐.”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자신의 현실에 남도하의 입이 다물어졌다. 생각해 보니 우습다. 당장 단역조차 없어 2주 넘게 놀고 있는 주제에 누군지도 모르는 괴한이 건넨 말을 따르려 했다니. 매니저의 말처럼 지금만 하더라도 스케줄 하나 없이 회사에 출근 도장을 찍고 있다.
“난 저녁에 우준이 픽업해야 하니까 혼자 갔다 와. 실수하지 말고.”
“알았어요. 죄송해요, 괜한 소리 해서.”
담당 매니저 따위가 있을 리도 없다. 그나마 자신 일을 이렇게 형식적으로라도 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다행일 뿐이다. 이원호가 아니었다면 완벽하게 방치당하고 있었을 거다.
“도하야, 옷은 좀 신경 쓰고 가라. 그래도 꽤 비중 있는 조연 제안한 건데 그러고 가면 좀 그렇잖냐.”
“아… 네. 집에 가서 갈아입고 갈게요.”
매니저는 작게 혀를 차며 먼저 자릴 털고 일어났다. 인사를 하며 제 옷을 한번 내려다본 남도하는 입이 썼다. 사실 집에서 나올 때 이미 신경 써서 입고 온 거다. 이원호에게 미팅을 취소해 달라 말할까 말까 고민하면서도 그 배역을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랬기에 있는 옷 중에 그나마 쓸 만한 것으로 입고 온 건데 그의 눈엔 마땅치 않았나 보다.
역시, 괴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길 잘했다. 아마 어젯밤에 전화라도 했다가는 좋지 않은 소리만 들었을 것 같다. 신고를 받고 집에 찾아온 경찰이 그랬던 것처럼. ‘연예인이라면서요. 팬이 그럴 수도 있지 뭘 신고까지 하세요.’ 라던 경찰 말이다. 아무런 피해 사실이 없고, 출입문까지 잠겨 있었다는 이야기에 경찰은 마치 허위 신고를 받은 것처럼 남도하를 대했었다. 남자가 무슨 그런 거로 신고까지 하냐고.
‘웬만하면 잘 설득하세요. 팬이라잖아요.’ 명백한 비웃음이자 질타였다. 그런 일로 신고하지 말라는.
여전히 기이한 꿈처럼 느껴지는 괴한과의 만남이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가 경고했던 스케줄이라는 것은 틀림없이 오늘 저녁에 약속한 드라마 조연 출연 관련 미팅일 것이다. 남자는 스치듯 이야기했었다.
‘내가 메시지까지 보냈는데 덜컥 약속을 잡아 버리면 어떻게 해요?’
며칠 전 번호 없는 메시지가 오기는 했었다. 드라마 ‘살인자의 밤’에 출연하지 말라고. 그때만 하더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는데, 지난밤 그런 일을 겪고 나자 출연 자체가 조금 찝찝해졌다.
“하아….”
남도하는 머릴 털며 어젯밤의 기억을 애써 떨쳐냈다.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다. 오히려 정체도 모를 남자가 건넨 말만 믿고 하반기 기대작 조연 자리를 걷어차려 했다는 게 우스울 뿐이다. 뭐, 그리 비중 있는 역할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세 시 반. 아직 약속 시각까지는 시간이 있다.
* * *
“형, 저 약속 장소 왔는데 여기 맞아요? 그… 술집 같은데요?”
- 맞아. 술 한잔하면서 얘기하자더라.
“아… 그래요.”
- 바빠, 끊어. 너 진짜 실수하면 안 된다.
소란스러운 촬영장 소음과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오피스 건물 사이에 섞인 고층의 가라오케. 얼굴 알리기를 꺼리는 연예인들이 자주 찾는 곳이라는 건 알고 있다. 제대로 된 간판도 달리지 않아 아는 사람이 아니면 들어가지도 못한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1층에서부터 까만 정장을 갖춰 입은 경비원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예약자 이름을 말하고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32층에 있는 가게로 올라갔다. 어두컴컴한 가게 안을 오가는 몇몇 사람을 보자니 남도하는 제 행색이 조금 더 초라하게 느껴졌다. 나름 신경 써 정장을 차려입고 왔음에도 고가의 옷으로 치장한 사람들에 비하면 일상복에 가까워 보였다. 뭐… 깔끔하긴 해도 값이 싼 옷은 맞다.
“이쪽으로 오시죠.”
그나마, 손목에 채워진 시계가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지난밤 괴한이 놓고 간 선물 말이다. 집에 돌아가 옷을 갈아입으며 몇 번이나 망설였다. 풀었다 차기를 반복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침입자가 준 물건을 차고 나오는 게 영 찝찝하긴 했다. 하지만 역시 차고 오길 잘한 것 같다. 묵직하게 손목을 감싸는 시계가, 그나마 자신감을 좀 주는 것도 같았다. 손으로 시계가 채워진 손목을 한 번 쓸었다. 깊은숨을 한번 내뱉고, 안내받은 방으로 들어갔다.
“어…? 안녕, 하세요.”
소파에 앉아 있는 인물을 보고 반사적으로 인사를 건네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방을 잘못 들어온 것 같다.
“이 방이 아닌가 보네요. 실례했습니다.”
“도하 씨, 여기 맞아요. 내가 보자고 했어.”
강태운. 요즘 한창 인기가 절정에 오른 배우다. 남도하가 조연 중 하나로 출연하려는 드라마 살인자의 밤에서 이미 주연으로 확정된 인물이었다. 멀리서 얼굴만 본 적 있을 뿐, 실제로 말을 섞는 건 처음이었다.
“저는 감독님 뵙는 줄 알았는데요.”
“우선 앉죠? 설명해 줄 테니까.”
저게 탑 배우의 모습일까. 까만 바지에 오버사이즈의 흰색 셔츠를 한 장 걸쳤을 뿐인데, 완벽한 정장을 차려입은 자신보다 더욱 멋스럽게 느껴졌다. 어쩌면 소파에 등을 깊게 파묻은 여유로운 자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남도하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겨 그의 맞은편에 자릴 잡았다.
“우리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죠?”
“…네, 그런 거 같네요.”
강태운은 양주를 두 잔 따라 한 잔을 남도하에게 내밀어 왔다. 얼음도 넣지 않은 온더록스 글라스에 찰랑거리는 노란 액체가 위태로울 정도로 가득 담겼다.
“우선 한 잔 마셔요.”
“제가 술을 잘 못 해서요.”
“하아… 도하가 영 뻣뻣하네.”
갑작스럽게 변한 강태운의 말투 때문에, 예고 없이 튀어나온 반말에 대해 항의할 타이밍을 놓쳤다.
“아, 말 놔도 되지? 내가 형이잖아, 한 살.”
“…네. 편한 대로 하세요.”
“마셔.”
턱짓으로 다시 한번 재촉하는 강태운의 목소리가 더는 제안처럼 들리지 않았다. 남도하는 한 번 더 입을 열어 거절을 표했다가 더욱더 딱딱해지는 강태운의 표정을 보며 결국 잔을 잡아 들었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뜨거운 감각에 당장에라도 구토가 올라올 것 같았다. 그럼에도 잔에 담긴 양주를 모두 비워 내고 빈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술도 시원시원하게 잘 먹으면서 왜 빼고 그래. 한 잔 더 마셔.”
석 잔을 연거푸 마시고서야 강태운의 행동이 잠시 멈췄다. 빈속에 술을 너무 빠르게 마신 탓인지 시야가 작게 일렁였다.
“내가 감독님한테 너 추천했거든. 솔직히… 네가 맡기엔 비중이 좀… 알지, 너도?”
“그게 무슨….”
말꼬리를 흐리던 강태운이 제 잔을 손에 들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느릿하게 테이블을 돌아 남도하의 옆에 자릴 잡고 앉았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 엉덩이를 옆으로 옮기려 했지만, 허리춤에 감겨 오는 강태운의 손이 그 움직임을 저지했다.
“…불편합니다.”
취기가 올라오는 상황에도 허리에 닿은 손이 기분 나빠 빠르게 잡아챘다. 강태운의 체격도 작지는 않았지만, 남도하에 비하면 한참이나 왜소해 보였다. 당연히 힘으로도 비벼 볼 정도가 아니었으니 커다란 남도하의 손에 잡힌 손목을 풀어내지 못한 채 얼굴을 찡그릴 뿐이었다. 손안에서 버둥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반항이라고 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허접한 힘이었다.
“너, 드라마 출연 안 할 거야?”
“지금 그 얘기가 왜….”
“이따위로 나오면 나도 감독님한테 다시 얘기할 수밖에 없어.”
명백한, 협박이었다.
“왜 그래, 아역부터 치면 연예계 생활은 나보다 선배잖아. 누가 너 잡아먹는데?”
힘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이 남도하의 손에 들어찬 힘을 풀게 했다. 강태운의 손목을 풀어주고 무릎에 손을 올려 주먹을 움켜쥐어 터져 나오려는 감정을 눌러냈다.
“도하야, 이 드라마 하려고 줄 선 애들이 한둘인 줄 알아? 한석훈, 김인겸… 그런 애들도 시나리오 달라고 난리야. 그런데 내가 널 찍었다고.”
알고 있다. 300억이 넘는 투자금이 들어가는 드라마다. 수많은 배우가 두세 자리밖에 없는 조연뿐 아니라 단역이라도 맡으려 혈안이 되어 있다. 물론 투자금 대다수가 강태운의 출연료겠지만.
“…원하시는 게 뭡니까.”
기다리던 물음이었는지, 목을 긁는 것처럼 웃어 보인 강태운은 말 대신 행동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의 손이 다시 허리에 감겨 들며, 달아오른 얼굴이 목에 닿았다. 예민한 살에 닿는 숨결에 남도하의 이성이 끊어질 뻔했다. 욕지거리가 터져 나오며 상대의 머리통에 주먹을 날리기 전, 짧게 닿았던 얼굴이 떨어져 나갔다.
“뻔한 거 아냐? 이런 데 오면서 설마 그냥 술만 마실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거 아냐.”
“…….”
소문이 있기는 했다. 강태운이 게이라는 소문과, 그가 주연을 맡는 드라마에 특정인을 묶어 팔기로 출연시켜 준다고. 그런 그와 함께 드라마에 들어간 배우들이 전부 탄탄대로를 타서 그 소문은 꽤 신빙성 있는 이야기로 연예계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리고 그 상대 배우들이 하나같이 남도하처럼 남자답고 선이 강한 미남형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게 또 하나의 추측 근거였다. 조금은 허무맹랑한 소문이었지만, 그 실상은 지금 남도하가 직접 확인하고 있다.
“…우선 술이나 한잔하죠.”
상황 파악은 끝났다. 하지만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쪽이 나았을 것 같다. 강태운이 저를 부른 이유를 알고 나자 부정적인 감정이 빠르게 차올랐다. 허탈감, 분노, 좌절감, 초라함. 이렇게까지 해서 배역을 따내야 하는가, 살 한 번 섞고 그 역할을 맡는다면 이득을 보는 것일까. 꼬여 가는 생각을 정리하며 강태운의 잔에 술을 채워 줬다.
“눈치는 좋네. 운 좋은 줄 알아. 내 마음에만 들면 지금보다 좀 더 비중 있는 역할로 대본도 고쳐 줄 테니까.”
왼손으로 술잔을 잡아 든 강태운이 남도하의 탄탄한 팔뚝에 팔짱을 꼈다. 가볍게 그러쥐는 손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지만, 이번엔 그를 털어 내지 못했다. 원래부터 술을 잘 마시는 편인지 강태운은 쉼 없이 잔을 비워 냈고, 그가 마시는 것의 딱 두 배를 남도하가 마셔야 했다. 불순한 의도일 게 뻔했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
“조금만 천천히, 후우… 마시죠.”
짧은 시간 사이에 속이 뜨겁게 달아올라 마치 불덩이를 삼킨 것만 같았다. 뱉어 내는 숨이 달궈지고, 얼굴이 터질 것처럼 열감이 느껴진다.
“더워? 벗겨 줘?”
강태운은 손을 뻗어 남도하의 타이를 끌어 내렸다. 그러곤 느릿하게 셔츠의 단추를 풀어 나갔다.
“열이 많네. 어휴… 가슴 좀 봐. 운동 열심히 하나 봐.”
단추를 풀던 강태운은 다른 손으로 제 사타구니 사이를 위아래로 쓸어 댔다. 이미 바지로도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부풀어 오른 것이 흉측하게 보였다. 그걸 의식하고 나자 반듯하게 그어 놓은 듯한 남도하의 짙은 눈썹이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니까 너만 너무 좋은 거 아냐? 드라마 출연시켜 줘, 여기… 기분 좋게 해 줘.”
제 앞섶을 훑던 강태운의 손이 남도하의 가랑이 앞을 가볍게 쥐었다.
“잠깐, 화장실 좀…!”
서너 개의 셔츠 단추가 풀어질 때까지도 남도하는 고민에 싸였다. 하지만 강태운의 손길이 직접적으로 닿자 뭔가 참을 수 없는 감정이 들끓었다. 급하게 마신 술 때문인지 몸은 열기를 머금어 생각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했다. 급히 자릴 털고 일어나 룸 안에 있는 화장실로 도망치듯 달려갔다.
“넌 준비 안 해도 돼. 난 다 하고 왔으니까 빨리 나와. 형이 지금 좀 급해서.”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를 뒤로하고 화장실 문을 안에서 잠갔다. 안전한 공간이라고 인식한 탓인지 심장은 뒤늦게 거칠게 요동쳤다. 세면대에 물을 틀고 얼굴에 찬물을 연거푸 끼얹었다. 술이 조금이라도 깨길 바라고 한 행동이었지만, 그 사이에도 술기운이 무섭게 몸을 잠식해 갔다.
“하, 하아….”
거울에 비친 남도하가 미소 지었다. 넥타이는 기다랗게 내려와 걸려 있고, 그사이 하얀 셔츠는 가슴팍이 훤히 드러날 정도로 엉망으로 풀어져 있다. 그 모습이 마치, 술집 접대부나 남창이 된 것만 같았다. 더는 초라한 제 몰골을 마주하기 싫어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주저앉아 무릎 사이에 고개를 처박아 버렸다.
이게… 잘하는 짓일까.
급격하게 몰려오는 술기운에 의식이 흐려졌다. 그리고 그제야 마음을 정했다. 아무리 성공에 눈이 멀었어도, 이건 아니다. 강태운의 손길이, 숨결이 닿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데 어떻게 살을 섞을 수 있겠나. 나가서 하지 않겠다고 말해야 하는데,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오히려 머리가 회전하듯 돌며 몸이 바닥을 향해 쓰러져 갔다.
* * *
“…도하 씨.”
머리칼을 간지럽히는 감각에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마주한 모습에, 눈을 다시 질끈 감아 버렸다.
“눈 떠요. 지금 장난할 기분 아니니까.”
여전히 머리가 지끈거리지만, 술기운이 한순간에 날아가는 것만 같다. 지직거리는 기계음이 귓가에 꽂히며 의식이 빠르게 돌아왔다.
“오늘 일정 취소하라고 했죠.”
눈을 뜨자 흐릿한 시야 사이로 후드티를 걸친 채 하얀 토끼 가면을 쓴 남자의 모습이 제일 먼저 들었다. 놈이다. 지난밤 집에 쳐들어왔던 미친놈.
“왜 이렇게 말을 안 듣지, 짜증 나게.”
그리고 털이 복슬복슬 달린 하얀 가면엔, 붉은 액체가 가득 튀어 있었다. 색깔로 보았을 때, 무엇인지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털끝에 아슬아슬하게 달려 있던 핏방울 하나가 뚝- 하고 남도하의 뺨으로 떨어져 내렸다. 눕혀진 몸은 아무런 압박이 없었음에도 긴장 때문인지 굳은 듯 꼼짝하지 않았다.
“내가 가짜 칼 들고 가니까 장난하는 거 같아요?”
안 그래도 지난밤, 경찰이 남도하의 신고를 우습게 생각한 이유가 그것이었다. 날도 서 있지 않은 모형 칼. 하지만 그 칼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그 장난감 같은 칼로도 충분히 남도하의 목을 쑤셔 버릴 수 있었을 테니까.
“대답 안 해요?”
남도하는 빠르게 고개를 도리질 쳐 부정을 표했다.
“입은 장식이에요? 왜 대가리만 쳐 흔들어요.”
여전히 변조된 음성은 감정이 없었다.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동작만 봐서는 상당히 다정한 태도였지만, 남도하는 왠지 그가 매우 화가 나 있다고 생각했다.
“아뇨! 안 오려고 했는데….”
자꾸만 가면에 튄 핏자국에 눈이 간다. 심지어 눈앞에서 오가는 남자의 손도 붉은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다. 그 때문에 남도하의 몸은 더욱더 긴장 상태에 빠져 버렸다. 뇌가 굴러가지 않는 탓에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못했다.
“하아… 미안해요. 내가 흥분했어요. 그러니까 왜 말을 안 들어요, 속상하게.”
습관인지, 남자는 남도하의 한쪽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장갑을 끼지 않은 손길이 약간 차갑게 닿았다.
“위험했잖아요, 그쵸?”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처럼 뺨을 주물럭대며 묻는 말에 남도하는 두려움이 아닌 이상한 기분이 몰려왔다. 틀림없이 부정적인 쪽의 상황인데, 묘하게 공포심보다도 민망함이 앞섰다. 자신이 남자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고, 그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는 걸 인식한 탓이다.
“잠깐, 몸 좀….”
“얌전히 있어요.”
허리에 힘을 줘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어깨를 감싸 쥐는 남자의 힘에 뒤통수가 다시 그의 허벅지에 닿아 버렸다. 그는 미동도 없이 남도하를 내려다보며 널따란 어깨를 일정한 속도로 부드럽게 두드렸다.
“그런데요.”
영원 같은 시간이었다. 남도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시선을 상대의 가슴팍에 던지고 있다가, 그의 입이 열리자 하얀 가면을 바라봤다.
“아까 설마 그 새끼랑 진짜 하려고 했어요?”
“그쪽이 그걸 어떻게….”
방 안에는 단 두 사람뿐이었다. 남도하 자신과 더러운 제안을 했던 강태운. 그러고 보니 강태운이 보이지 않는다.
“머리 굴리지 말고 대답해요.”
방 안 어디에서도 누군가의 기척이 읽히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장소가 옮겨진 것 같지도 않다.
“그게….”
남자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다.
“이건 그 새끼가 벗겼어요? 아님 남도하 씨가 혼자 벗었어요?”
남자의 손이 벌어진 셔츠의 앞섶을 모은 후, 밑에서부터 단추를 하나하나 채우며 올라왔다. 다소 자극적으로 드러났던 가슴 근육이 다시 숨겨졌다.
“아냐, 대답하지 마요. 안 듣는 게 나을 거 같아.”
목 끝까지 단추를 모두 채우곤, 넥타이까지 바르게 매어 주었다. 그러곤 끈적거리는 손끝으로 남도하의 입술 주변을 쓸었다. 남도하는 본래 강인하고 선이 굵은 얼굴이었다. 쌍꺼풀이 없는 눈은 다정한 듯하면서도 특유의 강함이 담겨 있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당황에 젖어 딱딱하게 굳어 있을 뿐이지만.
“만약에 남도하 씨가 직접 벗은 거라면… 정말 화날 거 같거든.”
손으로 턱을 감싸 쥐고, 엄지로 반복적으로 입술 아래를 쓸어 대는 남자의 말이 영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한참이나 그 자세를 유지하던 남자는 남도하의 한쪽 팔을 잡곤, 당겨 쥐었다.
“시계도 잘 어울리네요. 그럴 거 같았어요.”
“이거, 돌려….”
“근데 한 번만 더 내가 준 거 가지고 이딴 데 오면, 손목까지 잘라 버릴 줄 알아요.”
“…드릴게, 예?”
나직한 남도하의 목소리와 남자의 기계음이 겹쳤다. 그가 뱉어 낸 말을 이해하자 남도하의 몸이 빠르게 굳어 갔다. 손목을… 자른다고 했다. 당장에라도 손목이 잘려 나갈 것만 같은 기분에 그의 손에 잡힌 팔을 힘주어 풀어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체격도, 손도 남도하가 남자보다 더 커다랬지만, 지금은 크기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 또 실수했네…. 그냥 자르겠다는 게 아니라, 다른 새끼 만나면 자르겠다는 건데.”
그 말이 그 말이다. 삽시간에 정신이 들어 남자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던 몸을 빠르게 일으켜 앉았다. 이번엔 그도 남도하의 행동을 막아서지 않았다. 가까운 거리였음에도 여전히 남자에게서는 아무런 긴장도 읽히지 않았다. 그 긴장은 오롯이 남도하의 몫이었다. 남도하 저보다 작은 체격인데도 말 한마디로 위압감을 주는 남자였다.
“오늘 정말 위험했다는 것만 알아 둬요. 그러니까 사람 경고 함부로 무시하지 마요.”
“…네.”
남도하의 대답에 남자에게서 찢어지는 음성의 웃음소리가 퍼져 나왔다. 그와 함께 그의 손이 남도하의 머리칼 사이로 파고들어 헤집어 댔다.
“착해요. 이대로 바로 집으로 가요.”
남자는 먼저 몸을 일으켰다. 가벼운 동작으로 테이블을 넘어 문으로 향했다. 까만 바지와 운동화, 후드 점퍼를 걸치고 있는 몸이 날렵해 보였다. 조명이 어둑한 탓에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지난밤보다는 더 확실히 상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남도하 씨는 여기서 아무도 못 본 겁니다. 화장실 갔다 나오니까 강태운은 없었어요. 그게 오늘 있었던 일의 전부예요. 알았죠?”
남도하가 알아들었다는 답을 하고서야 그는 몸을 돌려 출입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의 모습을 보다가 남도하가 입을 열었다.
“저기요.”
남자는 출입문을 잡은 채 움직임을 멈췄다. 그제야 남도하는 제가 별다른 의도를 가지지 않고 그를 불러 세웠다는 걸 깨달았다. 궁금한 것은 많다. 어떻게 온 것인지, 강태운은 어디로 간 것인지, 정체가 무엇인지, 가면과 손에 묻은 피는 누구의 것인지.
“안… 하려고 했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입에서 나온 말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아까 남자가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던 물음에 대한 답이었다. 이어지는 침묵에 남도하는 제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감싸 쥐었다.
“안 할 겁니다, 그 배역.”
그러나 남자는 더 이상의 말을 잇지 않고 문밖으로 사라졌다. 아, 한마디 말을 남겼다. 열까지 세고 나오라고. 그의 말처럼 소리 내어 열까지 숫자를 세고 밖으로 나갔을 때, 역시나 남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 * *
“남도하, 너 어제 강태운 만난 거 아냐?”
“…알고 계셨어요?”
회사에 출근하지 않았다. 어차피 남도하가 오든 말든 신경 쓰는 사람도 없었기에 그냥 자체 휴무였다. 그런데 웬일로 점심시간이 지난 시각 매니저 이원호가 남도하의 집으로 찾아왔다.
“뭐… 어쩌냐. 너 한번 꼭 만나야겠다고 지랄을 하는데.”
“하아. 형, 그래도 어떻게 그런 걸 말도 안 해 줘요.”
“…별일 없었지…?”
이원호의 태도로 남도하는 확신했다. 적어도 그는 강태운이 어떤 취향을 가졌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걸.
“후… 저 그 드라마 안 할래요.”
“야, 네가 하고 말고 할 일이 아니야. 지금 강태운 회사 난리 났어.”
“왜… 요?”
“걔 지금 병원에 있대. 강태운 하나 보고 투자받은 건데, 드라마 다 엎어지게 생겼다.”
이원호는 짜증스럽게 뒤통수를 긁어 대다 소파에 몸을 파묻고 퍼져 버렸다.
“무슨 일인데요…?”
“너, 설마 어제 걔한테 무슨 짓 한 거 아니지?”
순간 흰 토끼 가면을 쓴 남자의 모습이 스쳤지만, 남도하는 그가 미리 알려 준 대로만 말했다. 거짓말은 아니다. 그저 그 괴한에 대한 내용만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 안 그래도 그 술집에서도 그렇게 말했다고 하던데….”
“어떻게 된 건데요.”
“강태운… 고자 됐다는데…?”
“…고자, 요?”
입이 근질거렸는지 이원호는 남도하가 묻지 않은 말까지 술술 꺼내 놓았다.
“교통사고가 났는데, 그게 터져요…?”
“재수도 없지. 두 팔도 아작 나서 지금 반송장처럼 누워 있대. 아직 언론은 모르는 거 같고. 하긴, 그런 얘길 어떻게 하냐. 씨발 음주 운전하다 사고 나서 고자 됐다고.”
남도하가 기억하는 강태운은, 그렇게 많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리고 술 한두 잔 정도는 가볍게 마시며 멀쩡한 모습을 보였다. 적어도 마지막 기억은 그랬다. 그런데 저렇게 심각한 사고가 났다는 게 쉽사리 믿어지지 않았다.
또다시 하얀 가면의 남자가 떠올랐지만, 확실하지도 않은 말을 입에 담지는 않기로 했다. 더군다나 강태운이 그렇게 된 것이 그렇게 안타깝지도 않다. 오히려 조금 속이 시원한 기분도 들었다. 아직도 그가 몸을 만지던 순간을 떠올리면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그래서 너도 살인자의 밤 못 할 거 같다. 어차피 그 드라마 자체가 나가리 된 거 같지만.”
“참, 재수가 없으려니까 이렇게 안 풀리냐.” 라는 이원호의 말까지 듣고 있자니 욱하는 기분이 몰려왔다. 하마터면 강태운에게 험한 일을 당할 뻔한 사람 앞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은 걸 안타까워하는 것만 같아서.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알기는 하지만,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다.
“다른 일 알아보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아마 완전 거짓은 아닐 것이다. 그나마 회사에서 작은 일이라도 알아봐 주는 건 이 사람뿐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월세를 내기도 빠듯했을 것이다.
“야, 나 우준이 데리러 간다.”
그놈의 우준이. 요즘 한창 잘나가는 같은 회사 배우 양우준. 강태운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회사에서 밀고 있는 아이돌 출신 배우였다. 이제 막 비중 있는 조연과 주연의 경계선을 오가는 정도였다. 남도하 기준 인성이 엉망이라 그렇지 얼굴이나 연기는 꽤 쓸 만했다. 목이 부러지기라도 한 건지 누구에게든 먼저 인사하는 꼴을 볼 수가 없는 놈이었다.
이원호가 빠져나가고, 남도하는 방에 들어가 침대 협탁에 올려 두었던 벨벳 케이스를 들어 올렸다. 케이스를 열자 복잡한 톱니바퀴가 얼기설기 엉켜 있는 디자인의 동그란 시계가 나왔다. 금색과 은색으로 조립되어 검은색 가죽끈에 연결된 명품 시계였다. 진품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5천만 원이 넘는 시계였다.
“5천만 원….”
헛웃음이 나왔다. 당연히 가짜겠지. 5천만 원이 넘는 시계를 선물이라고 남의 집에 툭 던지고 가는 괴한이 어디 있나.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운 생각에 남도하는 시계를 다시 케이스에 넣어 서랍 깊은 곳에 쑤셔 넣었다. 어제는 무슨 생각으로 그걸 차고 나갔는지 모르겠지만, 영 찝찝한 기분이 드는 물건이었다. 그걸 준 상대 역시 마찬가지다.
* * *
“잠깐…!”
“미안한데 여기서 죽어 줘야겠어.”
“…그런, 커억….”
상대가 날카로운 칼날을 남도하의 배에 찔러 넣자, 붉은 핏줄기가 분수처럼 쏘아졌다. 그대로 몸이 뒤로 넘어가며, 수영장 물에 삼켜졌다. 물에 잉크를 떨군 것처럼 붉은 핏자국만 수면에 어지럽게 퍼져 나갔다. 돌덩이를 달아놓은 양 남도하의 몸은 하염없이 물 밑으로 가라앉았다.
“컷!”
물속에서 작게 들려오는 컷 사인을 듣지 못한 남도하는 수영장 바닥에 몸이 닿은 후에야 바닥을 발로 차 물 위로 떠올랐다.
“하아… 학….”
하마터면 정말 익사할 뻔했다. 물 밖으로 나와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가방을 뒤져 수건을 꺼내 젖은 몸을 대충 닦고 스태프들에게 수고했다는 인사를 건넸다.
“도하 씨는 연기는 언제 봐도 참 좋아. 덕분에 빨리 끝났어.”
“감사합니다, 감독님.”
“얼른 좋은 역할 하나 줘야 하는데.”
인사치레라는 걸 알면서도 남도하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 맡은 역할도 그저 주인공의 칼을 맞는 건달1일 뿐이었다. 그나마 주인공과 가까운 사이라 5화나 출연할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이 최근엔 점점 더 이런 몸 쓰는 역할만 늘어나는 것 같아 씁쓸했지만, 그나마 체격이 작지 않아 이런 배역이라도 맡을 수 있는 게 다행이었다. 더군다나 액션이라면 나름 자신 있기도 했고.
“아무 때나 불러 주세요, 감독님.”
“그래 들어가 봐. 근데 매니저랑 같이 안 왔어?”
“아… 예.”
“어휴, 몸도 다 젖어서 그냥 가려면 힘들 텐데….”
감독의 과한 친절에 주변의 시선이 남도하에게 쏟아졌다. 옷이야 소품이니 반납해야 하고, 머리는 쫄딱 젖어서 이대로 가기엔 조금 무리가 있기는 했다.
“괜찮습니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솔직히 남도하 본인이 제일 걱정스러웠다. 문제는 촬영 장소였다. 경기도 외곽의 허허벌판이라 아침에 올 때는 서울에서 촬영 팀 차를 얻어 타고 왔다지만, 아직 한참이나 남은 촬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얻어 타고 갈 수도 없었다.
화장실에서 몸의 물기를 닦고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택시라도 불러야 하나 싶어 휴대폰을 뒤적이며 폐 수영장 건물 밖으로 나가자 입구에 주황색 택시가 한 대 서 있었다.
“…타도 되나요?”
“네, 타세요.”
“가까운 버스 정류장까지만 탈 건데요….”
“괜찮으니까 타세요.”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는 곳에 택시가 왜 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차에 올라타고 봤다. 낡은 도로 탓에 덜컹거리던 차는 어느새 매끄러운 포장도로를 내달렸다. 지도로 가까운 버스 정류장이 어디인지 찾아보던 중 전화가 들어왔다.
“네, 형.”
- 촬영 끝났지? 미안하다, 야. 갑자기 너랑 우준이 스케줄이 겹칠 게 뭐냐.
“괜찮아요. 지금 돌아가는 중이에요.”
- 아무튼, 우선 회사로 좀 와라. 너 난리 났다.
말하는 내용처럼 이원호의 목소리도 평소보다 약간 톤이 높았다. 특별히 잘못한 것이 없었음에도 괜히 그의 말이 불안하게 느껴졌다.
“무슨 일인데요?”
- 와서 얘기해. 마음 단단히 먹어라.
그냥 좀 말해 주면 좋으련만, 그는 협박 같은 말만 남긴 채 전화를 끊었다. 한 시간도 넘는 시간 동안 가시방석에 앉아 가게 생겼다.
“기사님, 강남까지 타고 가도 될까요?”
“당연히 되죠. 좀 자고 계시면 도착해서 깨워 드릴게.”
택시비를 생각하면 속이 뒤집어질 것 같지만, 불편한 마음으로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회사까지 갈 수는 없었다. 촬영 때문에 새벽같이 집에서 나왔던 탓에 피곤에 절은 몸을 의자에 깊게 파묻었다.
“…손님?”
잠깐 눈만 감고 있겠다는 게 어느새 잠들어 버렸나 보다. 택시 기사의 목소리에 눈을 뜨니 익숙한 회사 건물 앞이었다.
“…얼마죠.”
“예? 돈은 벌써 받았는데요?”
“…네?”
“예약하신 분 아니에요? 아니, 옷 보니까 맞는 거 같은데.”
택시 기사는 전화로 예약을 받고 요금은 선금으로 받았다고 했다. 목적지가 어디든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금액을. 순간 후드 티를 뒤집어쓴 토끼 가면의 남자가 떠올랐지만, 머리를 세차게 털었다. 오히려 매니저 이원호가 차를 보냈을 가능성이 더 높다. 택시에 타자마자 전화를 걸어 회사로 오라 하지 않았나. 급한 일이 있어 택시를 보낸 것일 테다.
“남도하, 도하야! 여기, 여기.”
택시에서 내릴 때까지만 해도 이원호가 통화 중 남긴 말을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1층 로비까지 나와서 저를 기다리다 팔을 낚아채는 그를 보자니 이제야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형, 지금 우준이 스케줄 따라가 있을 시간 아니에요…?”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대표님이 너 빨리 데려오라고 난리야, 난리.”
이원호는 말을 하는 사이에도 남도하의 팔을 당기며 걸음을 재촉했다. 반쯤 달리듯 회의실이 있는 2층에 도착했다. 그곳의 존재를 알고 있기는 했지만, 별도로 들어와 본 기억은 없는 곳이었다.
“안녕하세요….”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남도하는 숙이려던 고개도 멈춘 채 자릴 채운 사람들의 면면을 확인했다. 언제 마지막으로 얼굴을 마주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대표와 실무를 담당하는 이사. 배우 파트의 매니지먼트 총괄 팀장까지. 평소 같은 테이블에 앉을 일이 없는 사람들이 총집합했다.
“어서 앉아요, 도하 씨.”
원래 저렇게도 웃던 사람이던가. 이 회사와 계약 후 처음 보는 것 같은 대표의 웃음을 보며 문가 근처 자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원호야! 너는 배우 혼자 촬영장에 가게 하면 어쩌냐!”
“아… 그게, 우준이 스케줄이랑 겹쳐서 말입니다….”
총괄 팀장의 말에 의아함이 먼저 들었다. 왜냐하면 원래 그랬으니까. 올 한해 회사에서 지원해 준 차를 타고 스케줄을 소화한 게 손에 꼽을 정도다. 제일 잘 알고 있을 사람이 새삼스레 왜 저런 소리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무슨 일이죠…?”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남도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름 의심하는 바가 있기는 했다. 얼마 남지 않은 재계약 관련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다. 뭔가 사고를 친 기억은 없고, 그나마 이렇게 대화를 할 만한 안건은 그것이 전부였으니까. 그게 대표까지 참석할 정도로 큰일은 아닌 것 같지만.
“이거, 한번 읽어 봐요.”
끝에 앉아 있는 남도하와 정 반대편에 자리한 대표는 테이블 위로 종이 뭉치 하나를 밀었다. 남도하는 재주 좋게 제 앞에 멈춰 선 종이의 표지에 쓰여 있는 걸 보곤 손으로 잡아 들었다.
“…살인자의 밤 시놉이네요.”
얼마 전까지 조연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싶어 하던 드라마다. 대중에게는 강태운이 촬영 중 불의의 사고를 당해 제작이 중단되었다는, 그 불운의 드라마. 실제론 음주 운전으로 고자가 된 것이지만 어쨌든.
“스토리 조금 손 봐서 다시 시작한다고 하네요. 새로운 투자자 잡아서요.”
“아… 그런가요.”
“그리고 그쪽에서 제안이 왔어요. 도하 씨가 꼭 합류해 줬으면 좋겠다고. 주인공만큼은 아니지만 꽤 비중 있는 조연이더라고요. 캐릭터도 좋고요.”
“저를… 요…?”
제작비도 원래 예정되었던 것보다 조금 늘어날 거라고 했다. 강태운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는 했지만, 연출이나 작가진만 하더라도 흥행 보증수표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더군다나 상대 쪽에서 먼저 제안이 왔다는 믿기지 않는 말에 그저 시놉시스를 멍한 눈으로 담았다. 상단에 손글씨로 ‘남도하 배우님’ 이란 글씨가 쓰여 있는 걸 보면, 귀가 잘못되진 않은 것 같다.
“당장 2주 뒤부터 촬영 시작한다는데, 괜찮겠죠?”
“그렇게 빨리요?”
“남자 주인공도 벌써 확정됐어요. 서주언 씨요.”
서주언… 이라니. 많은 출연료를 준다 해도 돈으로 잡을 수 없는 배우였다. 몇 년 전 찍은 드라마 하나로 전 세계적인 팬덤을 쌓았다. 연예인의 연예인, 그런 존재였다.
“네, 하겠습니다.”
몇 년 만에 일다운 일이 생겼다. 적어도 몇 달은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정도는 될 것이고, 운이 좋다면 더 높은 자리를 욕심낼 수도 있는 그런 일. 거절할 이유가 없다.
“그럼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특별히 저 하나 때문에 모여 있던 것은 아니었는지, 남도하는 변함없이 앉아 있는 그들의 눈치를 보다 먼저 몸을 일으켰다. 이원호만 남도하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재주도 좋아?”
그리고 회의실을 나서자마자 좋았던 기분이 단박에 가라앉아 버렸다. 유달리 삐딱한 목소리와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뭐가?”
“그 자리 너한테 과분한 건 알지? 욕심부리다가 탈 나.”
촬영이 있다던 양우준이 돌아와 있었다. 그것도 못마땅함을 가득 담은 얼굴로.
“우준아, 누가 보면 네가 이 역할 못 맡아서 심술부리는 줄 알겠다.”
남도하는 그런 양우준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려 주고 몸을 돌렸다. 그의 아이돌 때부터 팀이 해체하고 배우로 전향한 지금까지 마주하는 사이인데, 왜 저렇게 항상 날이 서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또, 지금은 남도하 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잘나가는 주제에 왜 저리 모나게 굴고.
“몸이라도 대 줬나.”
뒤에서 혼잣말처럼 들려오는 비아냥에 남도하의 걸음이 멈췄다.
“우준아! 너 아무리 그래도 그런 말을….”
“형은 좀 빠져. 낄 때 안 낄 때 구분 못 해?”
한숨을 한번 내쉰 남도하는 몸을 다시 돌려 양우준의 마주 보고 섰다. 양우준도 물러설 생각은 없는지 남도하를 똑바로 직시했다. 두 사람이 마주 서자 서로의 차이가 명확히 드러났다. 아이돌 출신의 양우준은 선이 얇고 오밀조밀 예쁜 외모의 얼굴이었고, 그에 반해 남도하는 양우준보다 한 뼘은 커다란 키에 골격이 크고 남자다운 인상의 얼굴이었다.
“우준이가 어떻게 그렇게 잘 알까? 대 주면 배역 주는 걸.”
“뭐…?”
“아, 이번에 들어간 드라마 설마 대 주고 들어간 거야? 누구한테? 감독? 너무 늙었던데.”
“이런 씨발…!”
양우준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주먹을 내질렀다.
타악.
싸움이라곤 해 본 적도 없다고 스스로 증명하는 것처럼 느릿한 동작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양우준의 손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남도하에게 붙들렸다.
“아무나 잡고 그렇게 열폭하는 습관 좀 버려, 우준아.”
“으, 으윽…! 놔… 씨발!”
남도하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저 타고난 체격과 운동신경이 나쁘지 않을 뿐이고, 어쩌다 보니 맡는 배역 중 액션이 많아 몸에 밴 반사 신경이 좋았다. 싸움과 거리가 멀기는 매한가지였다.
“아니면, 이번에는 대 줘도 싫대?”
이원호가 듣지 못하게 양우준의 귓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그의 몸이 빠르게 굳어 갔다. 회사에서 소란 떨고 싶지 않았던 남도하는 잡고 있던 팔을 풀어 줬다. 그러고서 돌아서는 제 기분도 썩 좋지는 못했다.
“도하야! 너 왜 그래, 인마.”
“하아… 또 왜요.”
“아무리 그래도 네가 우준이한테 그러면 안 되지.”
항상 이런 식이다. 먼저 긁어 댄 게 누군데. 조금만 모난 태도를 보이면 남도하만 못된 인성의 소유자가 돼 버린다. 아니, 모두가 양우준의 성격이 모난 탓이란 걸 알면서도 남도하에게 참기를 강요했다.
“우준이가 그 배역 진짜 하고 싶어 했어. 하도 극성이라 사실 시나리오 왔을 때 우준이 들이밀었다가 대차게 까였다. 그래서 저러니까 네가 이해해라.”
아…. 그냥 평소처럼 타박이나 하고 말지. 괜히 달라붙는 말에 남도하는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사정이 있는 줄 알았으면 그렇게까지 몰아붙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하야, 태워다 줄게.”
회사 앞까지 따라 나온 이원호는 평소와 달리 과하다 싶을 정도의 친절을 베풀었다.
“태워 주긴 누굴 태워 줘. 형은 내 차나 운전해.”
차 쪽으로 몸을 틀던 남도하의 뒤에서 튀어나온 양우준이 이원호를 잡아채 갔다.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멀어지는 이원호의 뒷모습을 보며 묻지 못한 말이 떠올랐다. 아까 보내 줬던 택시 말이다. …뭐 다음에 물어보면 될 일이다.
* * *
남도하는 자신이 감정 변화가 그리 크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주어진 상황에 비교적 잘 적응하고, 지나치게 비상식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어느 정도 타협하고 받아들이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추, 축하드려요…!”
“…저요?”
“네? 네.”
집에 들어가기 전 편의점을 찾은 참이다. 온종일 집에 있을 때를 제외하곤 매일같이 들러 물이나 맥주, 어떨 땐 도시락 따위를 사곤 했다. 오늘은 맥주다. 좋은 일도 있었으니 자축의 의미다. 그런데 계산을 끝내고 나가려던 남도하에게 알바생이 커다란 상자를 내밀며 걸음을 멈춰 세웠다.
“제가 왜요?”
“구매 이벤트인데… 오, 오늘 100번째 손님한테 드리는… 케이크인데….”
나이가 어린 탓일까. 남도하의 물음에 알바생은 얼굴도 제대로 마주 보지 못한 채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했다. 결론은, 100번째 구매 이벤트에 당첨되었으니 눈앞의 케이크를 가져가라는 거였다.
“전 혼자 살아서 이렇게 큰 건 못 먹어요. 다른 분 주세요.”
“아니! 그러면 안… 되는데요…?”
“…네…?”
언뜻 보기에도 홀로 처리하기는 힘들 것 같아 거절하고 돌아서려 했지만, 알바생은 더욱더 당황에 젖은 목소리로 남도하를 불러 세웠다.
“그냥 가져가시면… 안 돼요?”
“…네, 뭐….”
남도하 본인도 알바라면 질리도록 해 보았기에 알고 있다. 저런 귀찮은 일까지 떠맡고 싶지 않다는 걸. 괜한 사람을 곤란하게 만든 것도 같아 계산대 위에 올라온 케이크 상자를 들어 올렸다. 남으면 그냥 버릴 생각으로.
“감사합니다.”
저녁은 뭘 시켜야 하나 고민했는데, 케이크로 대충 때우면 될 것 같다.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씻고 나와 냉장고에 넣어 두었던 맥주와 케이크를 들고, 거실 테이블에 자릴 잡고 앉고서야 알았다.
「Paul」
요즘 한창 인터넷에서 뜨는 프랑스 파티쉐가 있는 호텔 베이커리 표 케이크였다. 일일 한정 수량만 판매하는 탓에 사고 싶다고 다 살 수 있는 케이크가 아니었다.
“미쳤네.”
상자에서 꺼낸 케이크 역시 이름값을 했다. 딸기와 크림, 빵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무엇으로 잘라 낸 것인지 단면은 매끄러운 사각형이고, 혼자 먹기에 조금 많은가 싶은 정도의 크기였다. 포크로 귀퉁이를 잘라 먹어 보니 맛 또한 나쁘지 않았다. 단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남도하였음에도 포크가 쉼 없이 움직였다.
한류스타 서주언 씨가 싱가포르 창이 공항에… 수백 명의 팬….
서주언이라…. 적적한 집에 켜 놓은 TV에서 서주언에 대한 뉴스가 흘러나왔다. 한국에 있는 시간보다 해외에 있을 때가 더 많은 배우였다. 남도하도 조연, 단역으로 아역부터 배우 생활을 해 왔지만 여태 그를 만나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얼굴 보기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출연한다면 드라마 흥행은 확정이라고 보아야 했다.
“…뭐야….”
정신을 놓고 TV를 보다 보니 손이 허전했다. 기계처럼 퍼먹던 포크 끝에 걸리는 게 없었다. 다 먹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케이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세 캔이나 사 왔던 맥주도 함께.
기분이 좋아 그런지 술이 잘 받는다. 어쩌면 비싼 안주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남도하는 편의점에 가 맥주를 조금 더 사 올까 하다 그냥 양치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침대에 누워 생각해 보니 오늘은 참 좋은 일의 연속인 것 같다. 허허벌판에서 기다리던 택시부터 드라마 조연 출연에 이어 케이크까지. 오랜만에 일진이 좋은 날이라 그런지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그날부터였다. 무언가 미묘하게 일상이 틀어지기 시작한 것은.
* * *
아직 아침 해가 떠오르기 전에 일어난 남도하는 냉장고를 닫으려다가, 다시 열었다. 줄지어 선 물병 사이에 다 마신 줄 알았던 탄산수가 하나 껴 있었다.
“흐음….”
이젠 병원에 한번 갔다 와야 하는가 싶다. 벌써 몇 번이나 반복된 일이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미세한 변화가 신경 쓰였다. 예를 들면 아침에 버리려고 문 앞에 내놓은 쓰레기봉투가 사라졌다거나, 이렇게 다 마신 줄 알았던 음료수가 냉장고 깊숙이 하나 처박혀 있다거나.
조금 더 이상한 일을 예로 들자면 회사에 다녀와 빨래를 하려 했던 것 같은데, 빨래통엔 아침에 벗어 놓은 옷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거나, 몇 년이나 입어서 후줄근하게 늘어난 티셔츠가 새 옷처럼 보인다거나….
하나같이 확신할 수 없는 변화였다. 남도하 제가 세탁기를 돌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새 옷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다. 그러다 보니 설명하기 어려운 찝찝함이 느껴졌다. 남도하는 한참 냉장고 안쪽을 노려보다 탄산수를 꺼내 마셨다. 그러곤 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쓸어내렸다.
아무래도 요즘 새로 들어가는 드라마 때문에 스트레스가 극심한 것 같다. 처음 맡는 비중 있는 역할이라 지나칠 정도로 대본을 들여다보긴 했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탄산수로 정신을 차리고 옷을 갈아입었다. 검은색 트레이닝복과 얇은 후드 점퍼를 걸치고 휴대폰과 이어폰을 챙겨 집을 나섰다.
조깅, 꽤 오래 이어온 습관이다. 정신없이 달리다 보면 머릿속을 시끄럽게 하는 생각들이 잠잠해지고는 했다.
* * *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감사… 이건 안 시켰는데요?”
“아, 서비스요. 단골이시니까요.”
요즘 남도하의 일진이 좋다. 드라마 조연 자리를 꿰찬 이후로 거의 매일 눈먼 행운이 찾아온다. 편의점에서 받은 고가의 케이크도 그랬고, 카페에 가거나 배달 음식을 시킬 때도 서비스가 항상 따라붙었다. 오늘은 햄 치즈 샌드위치다. 아침을 먹지 않았는데 이걸로 대신할 수 있을 것 같다.
“감사합니다.”
커피와 샌드위치를 들고 길 건너 소속사 건물로 향했다. 회사 앞에는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는 아이돌 그룹의 팬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몇몇 있었지만, 아무도 남도하에게 관심을 보이진 않았다. 익숙한 일이다.
아니, 일이었다.
“저기….”
막 회사 정문으로 들어서려던 남도하의 앞을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막아섰다. 고등학생이나 되었을까 싶은.
“네?”
“이거….”
아이는 미소를 숨기지 못하며 크지 않은 쇼핑백을 남도하에게 내밀었다.
“아… 죄송한데 선물 전달은 못 해 드려요.”
몇 번 이런 경우가 있었다. 자기 ‘오빠들’에게 선물을 좀 대신 전해 달라고. 남도하와 같은 소속사의 아이돌 팬일 거다. 거절할 때마다 싫은 소리를 들어야 했지만, 선물 셔틀까지 해 줄 정도로 남도하의 마음이 넓지는 못했다.
“아뇨, 이거 오빠 드리는 거예요! 팬이에요.”
아이는 뭐가 우스운 것인지 얼굴에서 미소를 거두지 않고는 멍하니 서 있던 남도하에게 억지로 봉투를 들려 주곤 제 친구들 쪽으로 달아나 버렸다.
“저기요…!”
처음 겪어 보는 상황에 당황한 남도하는 멀어진 자칭 ‘팬’을 불러 보았지만 소녀는 멀리에서 손을 흔들어 보일 뿐이었다.
“잘생겼어요!”
…마치 성악을 한 것처럼 목청이 좋다. 커다란 소리로 외치는 건 그녀인데, 이상하게 민망한 기분에 남도하는 고개를 숙여 꾸벅 인사하고 건물 안으로 도망치듯 들어와 버렸다. 어색한 칭찬도 그렇고, 커다란 외침에 주변의 시선이 제게 쏟아진 탓도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고야 손에 들린 쇼핑백을 깨달았다.
“일찍 왔네?”
“안녕하세요, 형. 저 원래 오는 시간인데요.”
“곧 촬영 들어가면 정신없을 테니까 시간 있을 때 미리 쉬어.”
여전히 회사에 들어서는 남도하에게 아는 체하는 사람은 이원호뿐이었다. 그도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힐끔거리는 게 전부였지만.
“뭘 그렇게 바리바리 싸 들고 왔어?”
“아….”
남도하의 양손이 무거웠다. 한쪽엔 커피와 샌드위치 봉투, 다른 손엔 ‘팬’이 준 선물. 남도하는 아침 출근길에 있었던 일을 간단히 이야기해 주었다.
“이야, 그래서 그게 뭔데?”
“글쎄요….”
서비스로 받은 샌드위치의 절반을 이원호에게 건네고 나머지를 입에 넣었다. 다른 것도 빨리 풀어 보라는 이원호의 재촉에 핑크색 리본으로 묶여 있는 하얀 쇼핑백을 열어 보았다.
“이거… 무선 이어폰이네?”
“그렇네요…. 이런 거 받아도 돼요? …돌려주고 올까요…?”
20만 원이 넘는 물건이 튀어나오자 남도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끽해야 인형이나 뭐… 편지 정도나 들어 있을 줄 알았는데.
“야, 뭘 돌려줘. 요즘에 이 정도 선물은 아무것도 아니야. 얼마 전에 우준이는 몇백만 원어치 신발이랑 옷도 턱턱 받더라.”
“…그래도 좀….”
원래 그런 건가. 손바닥만 한 상자를 손에 든 남도하는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처음으로 선물을 받은 것도 그런데, 본인 기준 지나치게 비싼 선물로 느껴졌다.
“아직 출연 확정 기사도 안 냈는데 별일이긴 하다?”
이원호도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의아함을 숨기진 않았다. 이원호가 회사에 들어오기도 전부터 전속 계약을 맺었던 고인물이 선물을 받아 오는 걸 처음 봤으니까 그럴 만하다. 샌드위치를 먹는 것도 잊고 한참이나 선물을 바라보던 남도하는 상자를 다시 쇼핑백에 넣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돌려주는 게 맞는 거 같아요.”
“얌마, 뭘 그렇게까지 해.”
별거 아닌 일로 유난 떨지 말라는 이원호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와 봤지만, 선물을 건네줬던 소녀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거봐. 그냥 써, 임마. 요즘 줄 달린 이어폰 쓰는 사람 너밖에 없어.”
밖에 나갔다 돌아오니 이원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어 보였다.
“형… 그거 제 커피인데요.”
남도하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제 것처럼 마시면서 말이다.
* * *
“싫어요.”
시작됐다, 양우준의 생떼가.
“우준아, 그럼 당장 도하 드라마 들어가야 하는데 어쩌냐.”
“그건 회사에서 알아서 해야죠. 어쨌든 원호 형은 계속 저랑 움직일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매니저 조율을 위한 자리였다. 팀장은 이원호를 남도하에게 붙여 주겠다고 했지만, 양우준이 단칼에 거절했다.
“너는 아직 다음 작품 들어가려면 시간 좀 있잖아.”
“그것도 회사 탓이죠. 일 못 물어오는 거.”
저, 성깔머리하고는. 남도하는 양우준과 미팅한다는 말을 듣고 어느 정도 전개가 이리 흘러가리라 예상했기에 별말을 섞지 않았다. 요즘 회사에서 제일 잘나가는 배우 중 하나이다 보니 팀장은 그의 건방진 태도에도 별다른 항의도 못 했다. 이원호는 제 의견도 내지 못한 채 멀뚱멀뚱 앉아만 있다. 미팅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형이 너 맡아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던 당당함은 양우준 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사람 하나 새로 써요, 그럼. 무슨 매니저 돌려 막기를 해. 피곤하니까 이런 일로 부르지 좀 마요.”
자리에 앉은 지 5분도 지나지 않아 양우준이 몸을 일으켰다.
“뭐 해, 안 가?”
“어…? 가, 가야지….”
이원호는 양우준의 재촉에 그림자처럼 그의 뒤에 붙어 회의실을 나갔다.
“저 좆만 한 새끼가 망하게 생긴 거 살려 줬더니 건방을 떠네….”
그들이 완전히 빠져나가고 나서야 팀장의 본심이 나왔다. 왜, 앞에서는 하지도 못 하는 말을 뒤에서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하아, 도하야….”
“그냥 혼자 다닐게요.”
“이번엔 그게 안 되니까 하는 말이지. 족히 3개월은 찍어야 될 텐데 전국 여기저기 너 혼자 어떻게 다니냐. 비중이 생각보다 커.”
하긴, 그동안에는 워낙 출연 분이 적기도 했고 장소 이동도 잦지 않았기에 굳이 매니저가 필요하지 않았지만, 지난번처럼 산속이나 오지에서 촬영을 하면 이야기가 또 달라진다.
“미안한데 아무나 구해지는 사람 잠깐 쓰자. 그사이에 제대로 된 매니저 붙여 줄 테니까.”
“…네, 저는 괜찮아요.”
어차피 매니저가 생긴다고 해도, 운전과 스케줄 조율 외에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아니, 그럴 것이다. 제게 전담 매니저가 붙어 본 적이 없었기에 알 수 없었다. 남도하 자신을 좀 무시하기는 하지만… 그나마 안면이 있는 이원호가 되지 않은 것이 조금 아쉽긴 했다.
* * *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남도하는 커피를 좋아했다. 특히 날씨와 관계없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만을 마셨다. 하지만 웬만해서는 하루에 한 잔만 마셨는데,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아침에 한 잔을 사고, 점심엔 그냥 회사 휴게실에 있는 인스턴트커피에 얼음을 넣어 마셨다. 의외로 하루 두 번 커피를 사 먹는 게 부담이었다. 하지만 이젠 이야기가 다르다. ‘살인자의 밤’ 스케줄이 잡힌 이후에 회사에서 법인 카드를 받았다. 촬영이 시작하지 않아 아직은 조금 눈치가 보이지만, 커피 정도는 사 먹고 있다.
“감사합니…어, 어…!”
픽업 테이블에서 커피를 들고 몸을 돌려세우다가, 남도하의 발끝에 무언가가 걸렸다. 그와 동시에 시야가 빠르게 흔들리며 몸이 균형을 잃었다. 틀림없이 넘어진다고 확신하고 눈을 질끈 내리감았는데, 딱딱한 바닥 대신 이상한 촉감이 몸을 받아 주었다.
“괜찮아요…?”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에 눈을 뜨자 웬… 남자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두 팔로 바닥을 짚고 상체를 세워 바라봐도 확실히 사람이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누워 있는 남자의 몸에 자신이 올라타고 있는 상황을 깨달은 남도하는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 했지만 허리에 감긴 남자의 손 때문에 어정쩡하게 거리만 벌어질 뿐, 완전히 몸을 세울 수 없었다.
“…저기, 손 좀요….”
“아, 네. 죄송해요.”
허리에 닿아 있던 손이 풀어진 뒤, 먼저 일어서 바닥에 널브러진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상대는 멍한 눈으로 한참이나 남도하의 얼굴과 손을 번갈아 봤다. 내민 손이 어색해져 거둬들여야 하나 싶을 때야 그는 남도하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안 다치셨어요?”
일어선 남자는 남도하의 옷을 손으로 가볍게 털어 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남도하 저보다 더 큰 문제는….
“아, 이걸 어쩌죠. 옷이 완전…. 죄송합니다. 변상해 드려야 될 것 같은데….”
일어선 남자의 모습이 엉망이었다. 어두운 계통의 슈트와 안쪽의 하얀 셔츠, 스트라이프 넥타이까지 온통 갈색 커피 물이 들어 버렸다. 재킷이야 그렇다 쳐도 셔츠는 너무 많이 젖어 당장 입기도 어려워 보일 정도였다. 급하게 픽업 테이블에 있는 티슈를 집어와 그의 젖은 옷을 닦아 봤지만, 도통 수습 불가였다.
“그러게요… 면접인데, 오늘….”
“아…. 정말 죄송합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남자는 딱 그 정도 나이로 보였다. 사회초년생 또는 대학생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다. 이마의 절반 정도를 앞머리가 가리고 있는 남자 역시 제 꼴을 확인하곤 조금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죠. 그보다 안 다치셨어요?”
지금 남도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제대로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면접인데, 면접에 가야 하는 사람 옷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미 옷에 다 스며들어 버린 커피를 조금이라도 더 닦아 보려 티슈를 쥔 손을 쉼 없이 움직였다.
“그만하셔도 돼요. 괜찮아요, 정말.”
그런 남도하의 손을 남자가 움켜쥐었다.
“진정해요. 진짜 괜찮으니까.”
손을 감싸는 부드러운 감각에 남도하의 정신이 돌아왔다. 마주 본 남자는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고 있었다. 상황에 맞지 않지만 그 미소가 참… 예쁘다는 생각이 스쳤다. 나이에 걸맞게 장난스럽고 가벼운 미소가 참 잘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안 다쳤어요?”
“…네, 저는 괜찮은 거 같네요.”
이상한 남자였다. 몇 번이나 남도하 제게 다치지 않았는지를 확인한다. 태연한 남자의 태도 덕분에 놀란 마음이 진정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눈앞에 엉망을 한 그의 행색이 달라지진 않았다.
“저기, 면접이 몇 시예요?”
“한 시요.”
“이 근처죠?”
“네, 왜요…?”
남도하는 순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여전히 자신의 손목을 쥐고 있는 남자의 손을 풀어내고, 시간을 확인했다. 20분 정도 남았다.
“저랑 잠깐 어디 좀 가요.”
“…지금요?”
“면접, 그러고 갈 수는 없잖아요.”
어쨌든 자신의 실수이니 책임을 지긴 하겠지만, 면접에 저러고 가야 할 남자를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다행히 회사에 여분의 옷이 몇 개 정도 있으니 그중 하나를 빌려주면 될 것 같다.
“잠깐만요. 커피 좀….”
마음이 급한 남도하와 다르게 남자는 태연하게 커피를 하나 산 후에야 종종걸음으로 남도하를 따라나섰다.
“…저기, 어디 가는 거예요?”
참, 일찍도 묻는다. 남도하는 뒤늦게 행선지를 묻는 남자가 조금 우스웠다. 이미 저를 따라 회사로 들어와 엘리베이터에 탄 후 묻기엔 늦은 질문이다.
“제가 예비로 갖다 놓는 옷이 있는데 그거라도 입는 게 나을 거 같아서요.”
“옷…이요?”
“그러고서 면접 갈 수는 없잖아요. 내려요, 다 왔어요.”
빠르게 걸음을 옮겨 대기실로 쓰는 방으로 남자를 데리고 들어갔다. 하지만 막상 그를 세워 놓고 보니 회사에 가져다 뒀던 셔츠를 내밀기가 조금 민망했다. 생각해 보니 지난 촬영에 잠깐 입고 벗어 두었던 옷이다.
“…이거라도 입으실래요?”
그래도 갈색 커피가 얼룩덜룩 묻어난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이번에도 한참이나 내민 손을 바라만 보는 남자 때문에 남도하의 민망함이 조금 더 커졌다. 셔츠는 완전 엉망으로 꾸깃꾸깃하진 않았지만, 확실히 착용했던 티가 났다.
“…정말요…?”
“네. 뭐, 변상을 안 하겠다는 건 아니고요…. 괜히 저 때문에 면접 망치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요.”
남도하의 변명 같은 말에도 오랫동안 멀뚱히 서 있던 남자는 느릿하게 손에 들린 하얀 셔츠를 가져갔다. 그러곤 제가 걸치고 있던 타이와 재킷을 벗었다. 꽤 빠른 손길로 셔츠의 단추까지 풀어내고, 펄럭- 소리가 나게 커피 물이 든 옷을 벗어내던 남자는 소매에서 팔을 마저 빼내기 전 남도하를 마주 봤다.
“왜… 그렇게 봐요?”
남자의 말에 남도하는 급하게 몸을 돌려세웠다. 생각해 보니 옷을 벗는 사람을 너무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사이에도 보기보다는 몸이 탄탄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던 자신이 미친 것 같았다. 뒤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자 어색함이 더해갔다. 괜히 목덜미가 달아오르는 것도 같고, 두피를 뚫고 땀이 새어 나오는 것도 같다.
“갈아입었어요. 돌아봐도 돼요.”
웃음기를 잔뜩 머금은 남자의 목소리 때문에 몸을 돌리기가 싫어졌다.
“다 갈아입었다니까요?”
목소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등을 톡톡 두드리는 손길에 반사적으로 다시 몸이 돌아갔다. 착각이 아니었는지 남자는 입꼬리가 올라간 시원스러운 미소를 걸고 있었다. 뭔가… 커다란 강아지 같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잘… 했어요….”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그의 눈을 보다 남도하의 입에서 이상한 칭찬이 나와 버렸다.
“아니, 자, 잘 어울리네요.”
눈꼬리가 접히며 큭, 하는 웃음소리가 작게 터져 나온 것 같은데, 못 들은 척했다.
“좀 큰 거 같은데… 재킷 입으면 괜찮을 거 같아요.”
어색한 상황에 급하게 말을 돌렸다. 언뜻 봤을 땐 아예 안 맞을 줄 알았는데, 막상 입혀 보니 그렇게 작은 체구는 아닌지 못 봐줄 정도로 크진 않았다.
“그러게요. 형은 보기보다 체격이 좋으시네요.”
남도하는 꽤 체격이 컸다. 완전 근육질까진 아니었지만, 원래 타고난 골격이 좋은 편이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은 이유도 있다. 덕분에 그와 함께 한 화면에 잡히는 남자 배우들은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이는 피해를 보아야 했다.
“형, 이요…?”
“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낯선 호칭으로 남도하를 부르던 남자는 제 볼을 긁적이며 귀 끝을 붉혔다. …무슨 사내놈 피부가 저렇게 하얀지…. 하긴, 아까 몸도 허연 게….
“아뇨, 괜찮아요! 제가 형이겠죠, 뭐….”
몰려오는 이상한 생각에 남도하는 빠르게 다른 말로 또 화제를 틀었다.
“면접, 늦겠어요.”
“저… 근데….”
면접을 생각하면 이렇게 여유를 부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남자는 우물쭈물하며 남도하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왜요…?”
“저 타이 못 매요.”
“아.”
하긴, 얼굴에 딱 ‘나 사내요’하고 쓰여 있기는 했지만, 수염 자국도 없이 보송보송한 게 솜털도 빠지지 않은 것처럼 생겼다.
“주세요, 제가 해 드릴게요.”
스타일리스트가 없는 탓에 이런 건 익숙했다. 다행히 스트라이프 타이는 물기가 마르자 커피 자국이 그리 흉하게 보이지 않았다. 셔츠 깃을 세우고 타이를 매 주는데… 남도하는 뭔가 이상한 기분이었다. 제 시야보다 조금 낮은 곳에서 끈덕진 시선이 달라붙어 오는 것 같았다. 애써 무시하고 타이를 매 주는 것에 집중해 봤지만….
꿀꺽.
툭 튀어나온 사내의 목울대가 출렁이며 침 넘어가는 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착각인지 몰라도 하얀 셔츠 밖으로 나온 목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도 같다. 아니… 착각이 아닌 거 같다. 타이를 다 매 주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 그를 바라보니 뽀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디 안 좋아요…?”
“아뇨, 그냥… 덥네요.”
고갤 도리질한 남자는 재킷을 걸치곤 그대로 방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런 그의 팔뚝을 남도하가 잡아채 멈춰 세웠다.
“잠깐만요. 연락처 받아 가셔야죠. 면접 끝나면 연락하세요.”
“왜요…?”
“변상해야죠, 저거.”
“변상… 하신다고요?”
“네. 그럴게요. 그래야 저도 좀 덜 죄송할 거 같고요.”
또 잠깐 멍하니 서 있던 남자는 남도하에게 제 휴대폰을 내밀었다.
“…커피 드세요. 형 드리려고 산 거예요.”
휴대폰을 돌려받은 남자는 문을 빠져나가기 전 남도하에게 저 말만 남기고는 부리나케 달려나갔다. 급히 달려가는 모습을 보니 면접이 걱정스럽기만 했다. 낯선 상대지만, 이왕이면 면접이 잘됐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야 자신의 실수가 조금은 덮어질 것 같아서. 테이블 위에는 남자가 벗어 놓은 셔츠와 아까 카페에서 사 온 아이스커피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후우….”
이상하게 정신이 하나도 없는 기분이다. 목이 타들어 가는 느낌에 남자가 놓고 간 커피를 길게 빨아들였다. 그러고서 커피 물이 들어 엉망이 돼 버린 흰 셔츠를 잡아 들었다. 얼마나 변상을 해야 할지 확인해 두려고.
“하아… 씨…발….”
목덜미의 브랜드 라벨을 보자마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티셔츠 한 장에 백만 원이 훌쩍 넘는 명품 브랜드였다. 셔츠는 그보다 훨씬 비쌀 테니까…. 어쩌면 그냥 아까 카페에서 상대의 탓으로 밀고 나갔어야 했나 싶은 비겁한 후회가 몰려왔다. 남자의 태도로 봤을 때 그럴 리 없을 것 같지만, 셔츠에 더해 슈트까지 변상해야 한다면 통장이 정말 텅텅 비어 버릴지 모르겠다. 상대가 면접을 잘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조금 더 간절해졌다.
지잉.
실제로 인터넷에서 찾아본 남자의 셔츠 가격은 최저가가 150만 원에 가까웠다. 멍한 정신으로 빨대를 입에 물고 영혼 없이 커피만 홀짝이던 남도하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네, 팀장님.”
- 도하야 회사지? 잠깐만 회의실로 와 봐.
흔치 않은 매니지먼트 팀장의 호출에 남도하는 2층 회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거기에서, 익숙한 사람을 마주쳤다.
“무슨… 일이에요?”
네 명의 남자가 줄지어 의자에 앉아 있었고, 테이블 건너편에 매니지먼트 팀장이 자리했다. 남도하도 어색하게 팀장의 옆에 앉기는 했는데 무슨 자리인지 알 수 없었다.
“사실은 회계팀 인턴 뽑으려고 부른 애들인데, 여기서 네 매니저 뽑자 그냥. 요즘 사람이 너무 안 구해진다.”
남도하에게 가깝게 다가온 팀장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딱, 한 달만 데리고 써. 내가 책임지고 다른 매니저 붙여 줄 테니까.”
“…그래도 회계팀 지원했는데 매니저 하라면 하겠어요…?”
앞에 사람들을 앉혀 두고 대화를 나누려니 눈치가 보여 남도하의 목소리도 같이 작아졌다.
“미리 물어봤어. 얘네는 한대. 너도 한번 봐. 어쨌든 너랑 같이 일해야 하니까.”
말을 마친 팀장은 거리를 벌려 면접자들을 향해 앉았다. 가릴 처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회계팀에 지원한 사람을 어떻게 매니저로 쓴다는 말인지 쉽사리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당장 필요한 것은 맞았기에 지금은 찬물 더운물 가리지 않기로 했다.
“운전할 줄 아시는 분?”
남도하가 알고 있는 남자와 또 다른 사람이 손을 들었다.
“저, 1종이요!”
그는… 그러니까 남도하의 셔츠를 걸친 남자는 묻지 않은 자기소개까지 덧붙였다.
“도윤범 씨….”
팀장의 입을 통해서 남자의 이름을 알게 됐다. 도윤범, 제 손으로 넥타이도 못 매는 남자.
“아직 대학생이네요…?”
“4학년이요. 이번 학기가 마지막이라 상관없습니다.”
“학교가 문제가 아니라… 너무 어린데. 매니저 그거 생각보다 힘들어요.”
팀장은 도윤범의 나이가 영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남도하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저 태권도 국대 출신인데요. 경호도 할 수 있어요.”
그런 분위기를 읽은 것인지 도윤범은 자신의 또 다른 장기를 늘어놓았지만….
“뭐, 그래요.”
팀장은 여전히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고 다른 면접자를 상대로 질문을 이어 갔다. 남도하도 앞에 앉은 면접자들을 훑어보았는데, 이미 알던 상대라 그런지 도윤범만 눈에 들었다. 아니, 어쩌면 그저 외모 탓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처음 카페에서 그를 마주했을 땐 연예인인 줄 알았다. 근처에 매니지먼트 회사가 많으니 이름을 모르는 배우나 아이돌, 뭐 그런 일을 하는 줄 알았다. 얼굴만 놓고 봤을 땐 딱 그랬다. 깔끔하게 생기고, 남자다우면서도 묘하게 귀여운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형.’
남도하와 시선이 얽힌 도윤범의 입이 작게 움직였다. 소리가 새어 나오진 않았지만, 남도하는 직감적으로 그가 자신을 부른 거란 걸 알아챘다. 눈동자를 맞춘 채 붉은 입술이 툭 튀어나와서, 조금은 날카롭게 보이던 눈꼬리가 축 처져 내려갔다.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아 내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울상을 짓는 그를 보고 있자니… 미안하게도 웃음이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래도 입가에 힘을 가득 주고 웃음을 참아 봤는데, 이어지는 도윤범의 행동에 남도하는 결국 고개를 떨구고 조용히 웃음을 흘려 버렸다. 남도하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탓인지 도윤범은 제 셔츠를 툭툭 쳐 댔다.
명백한 협박이었다. 옷을 망쳐 놨으니 면접에 협조하라고.
참… 신기한 일이다. 그 모습이 썩 미워 보이지 않는 걸 보면.
“도하야, 누구로 할까?”
“팀장님, 제가 골라도 돼요?”
남도하의 말에 팀장은 잠시 말을 멎었다. 평소의 남도하는,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비교적 그 의견을 잘 따르는 편이었다. 작품을 고를 때도 그랬다. 그런 성격을 알기에 회사 사람들도 좋은 말로 남도하를 편하게 생각했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만만한 성격을 알고 무시하기도 했다. 그런 남도하가 간만에 자신의 의견을 냈다.
“뭐… 그래. 어차피 너랑 일해야 하니까.”
팀장의 허락에 남도하는 네 개의 이력서 중 하나를 챙겼다. 그러곤 도윤범을 향해 한 번 웃어 주었다. 이상하게 불법 청탁을 받은 것 같기는 한데, 뭐… 괜찮을 것 같다.
면접은 끝난 것 같다.
* * *
“이거 협박당한 기분이네.”
“…….”
“아니, 취업 청탁인가.”
“…형, 저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면접을 끝내고, 남도하는 도윤범을 제가 쓰는 휴게실로 다시 데리고 왔다. 전화로 결과만 알려 주면 된다는 팀장에게 본인이 직접 연락하겠다고 하고서 말이다. 그러고서 아까 면접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자 도윤범은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으로 변명을 붙였다.
“이렇게… 셔츠 만지작거리면서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 바라봤잖아요.”
남도하는 아직도 그 모습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너무나도 간절해 보였기에 그의 시선을 못 본 척할 수 없었다. 자신도 여기저기 오디션이며 면접을 수없이 봤었기에 그 절박함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저 이 회사 꼭 들어오고 싶었거든요.”
“여길…요?”
“네. 사실은 회계 팀보다 매니저가 더 하고 싶었어요. 회계팀 자리 났길래 얼른 지원하긴 했지만.”
“왜… 하필 여기를요?”
“그게….”
솔직히 말해 매니저라는 일이 그렇게 탐나는 직업은 아니다. 월급이 박봉인 것도 그렇고, 사방에서 쏟아지는 갑질을 버텨 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담당 연예인이 진상이면 지옥을 경험하게 될 수도 있다. 매니저 야반도주는 생각보다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신입 매니저를 잘 쓰지 않는 사연 역시나 거기에 있다.
“그냥… 로망이라고 할까요.”
대학생이라고 하더니, 아직 망상에 젖어 있나 보다. TV에서 단편적으로 나오는 연예인과 매니저의 모습만 보면 저런 헛된 꿈을 꿀 수도 있다. 그 이면에 숨겨진 세계를 알고 있는 남도하는 씁쓸함에 입꼬리가 말려 올라갈 것 같았다.
“어쩌죠. 그쪽이 담당할 사람은 그렇게 유명하지 않은데.”
“남…도하.”
“어…?”
“형이죠?”
감정 표현에 솔직한 편인지 남자의 얼굴엔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어디 치약 모델이라도 하나. 하얀 치아가 제 얼굴처럼 참 가지런히 줄지어 있다.
“알고 있었어요?”
남도하는 상대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을 거라고 확신했다. 길거리를 지나다녀도 간혹 힐끔 쳐다보는 사람이 있을 뿐, 누군지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까. 그리고 알아보는 사람들 역시 남도하의 이름까지는 알지 못했다. ‘어? 그….’ 정도의 반응이 전부였다.
“당연하죠. 팬이에요.”
도윤범은 입에 발린 소리를 하며 손을 내밀었다. 남도하는 저도 모르게 테이블 위로 몸을 당겨 손을 맞잡았다. 팬… 이라니. 어찌어찌 면접 준비를 하며 이름이나 얼굴은 알고 있나 본데, 저 말은 아마 거짓일 거다. 뒤에서 그렇게 연예인을 씹어 대던 사람들도 막상 당사자가 눈앞에 있으면 제일 먼저 꺼내 드는 말이 저거였다. ‘팬이에요.’
“그리고, 제 이름 도윤범이요. 잘 부탁드려요.”
“저도요.”
태권도를 했다더니 어쩌면 아주 옛날 일인지도 모르겠다. 악수를 하며 맞잡은 도윤범의 손은 지나칠 정도로 부드러웠다. 그 보들거리는 감각에 시선이 절로 갔다. 손톱도 짤막하고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고, 뽀얀 손은 운동이 아니라 고생 한 번 해 보지 않은 티가 났다. 제 손으로 넥타이도 매지 못하는 게 이해되는 손이었다. 그에 반해 남도하 제 손은….
“…형?”
“네?”
“손… 계속 잡고 있을까요…?”
“아, 죄송해요.”
쓸데없는 잡념에 빠져 너무 길게 잡고 있었나 보다. 남도하는 빠르게 상대의 손을 놓아 주었다.
“그럼, 내일부터 출근하면 되죠?”
“네. 우선은 회사로 오시면 될 거 같아요. 아직 촬영 시작을 안 해서….”
스케줄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직 없다. 일이 없는 것이야 이미 일상처럼 익숙한 상황이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그런 이야기를 꺼내 놓으려니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더군다나 매니저 업무에 눈을 빛내는 병아리에게 일이 없다는 걸 말하기가 미안했다.
“그리고 이거….”
남도하는 작은 쇼핑백에 넣어 두었던 도윤범의 셔츠를 돌려주었다.
“아, 이거 돌려드려요…?”
내용물을 확인한 도윤범은 제가 걸치고 있던 남도하의 셔츠를 가리켰다.
“아뇨, 그냥 입고 가세요. 나중에 돌려줘요. 근데 이거… 세탁해도 못 입을 거 같은데 어쩌죠….”
사실 이 엉망이 된 셔츠를 보며 고민이 깊었다. 모른 척 시치미를 뗄까, 갑자기 등장해 접촉사고를 일으킨 상대를 탓할까. 적어도 절반의 책임은 떠넘겨 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가 대학생이라는 걸, 나이가 어리다는 걸 알고 나자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이 들었다.
“그러게요…. 큰맘 먹고 산 건데.”
추욱 처지는 도윤범의 눈꼬리를 보니 더욱더 미안해져 버렸다. 어려서부터 연기를 하느라 대학조차 나오지 않은 남도하였지만, 대학생이 저런 명품을 턱턱 살 정도로 여유 있지 않으리란 것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미안해요. 제가 물어 드릴게요.”
“그래요, 그럼.”
“…….”
솔직히 말해서, 남도하는 도윤범이 한 번쯤 거절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저렇게 날름 받아먹겠다고 나설 줄 몰랐다는 말이다. 하지만 마주 본 입꼬리가 장난스럽게 들려 올라간 걸 보곤 뒤늦게 장난이라는 걸 알았다.
“농담이에요. 정말 괜찮아요. 어차피 매니저 일할 땐 저런 옷 안 입어도 되잖아요?”
“아뇨. 그냥 넘어가기엔 비싼 거던데요….”
더는 시무룩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답답했는지 넥타이를 풀어 건네준 쇼핑백에 넣는 그의 태도에서는 망가진 옷에 대한 미련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미안해요?”
“뭐, 그렇죠.”
“그럼….”
도윤범은 의자에서 엉덩이가 떨어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가깝게 몸을 당겨 앉으며 입을 열었다.
“저, 저녁 사 주세요.”
“…저녁, 밥이요?”
“네. 면접 때문에 점심도 못 먹었더니 배고파요.”
도윤범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말했다. 까맣고 깊은 두 눈이 이번엔 농담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걸로… 돼요?”
그리고 참 구차하지만, 남도하는 그 말이 내심 고마웠다.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빠듯한 통장을 생각하면 셔츠 값을 물어 주기가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런 거라뇨. 엄청 비싼 거 먹을 건데요?”
“…….”
“랍스터를 먹을까, 와규를 먹을까….”
…취소다. 어쩌면 옷값보다 식사비가 더 나오는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 * *
“주문….”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하나씩 다 주세요. 아, 이건 빼고요.”
“이걸… 전부요…?”
도윤범의 주문을 받아 적으려던 직원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네.”
그럼에도 한 번 정한 주문은 변하지 않았고, 직원은 메뉴판을 가지고 사라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도하도 꽤 당황했다. 우선, 지나칠 정도로 많은 메뉴를 주문한 이유가 제일 크고, 그다음은….
“분식집… 이네요?”
“네. 분식 안 좋아하세요? 여기 나름 유명한 곳인데.”
좋아한다. 가격도 착할 뿐만 아니라, 평소 맵고 짠 자극적인 음식을 좋아하는 남도하였다. 혼자 식사를 해결할 때도 자주 찾고, 배달도 일주일에 두세 번씩은 시켜 먹을 정도다.
“비싼 거 먹겠다더니.”
“섭섭해요? 좀 더 맛있는 거 사 주고 싶었어요?”
…꼬리를 봐야겠다. 테이블 위로 팔을 올려 얼굴을 들이미는 도윤범을 보자면 엉덩이 어딘가에 커다란 꼬랑지가 달리지 않았을까 싶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어떤 얼굴 하나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닮지도 않았는데, 그냥 떠올랐다.
“그럼 다음에 또 사 주세요.”
“…남기지나 말아요.”
“안 남기면 또 사 주시는 거죠?”
요즘 애들은 다 이런가. 끈덕지게 물어오는 도윤범 때문에 기어이 남도하의 입에서 웃음이 나왔다. 헛웃음. 뭐 저렇게 당당하게 밥을 사 달라 요구하는지 모르겠다.
“봐서요. 오늘 음식 안 남기면.”
돌려 말했지만, 넌 어차피 음식을 남길 테니 다시는 밥을 사 주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내기할래요? 우리가 저거 다 먹나 못 먹나?”
“…우리…?”
“그럼 저걸 저 혼자 먹어요…?”
주문은 제가 알아서 끝내 놓고, 뒤처리는 함께하자니. 대화를 나누는 사이 테이블 위로 하나하나 올라오는 음식은 하나같이 남도하도 좋아하는 것이었지만, 뻔뻔한 놈을 보자니 썩 협조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라고 생각했다. 젓가락을 들기 전까지는.
“형, 좀 더 시킬까요…?”
“…아뇨….”
하지만 막상 식사를 시작하자 남도하는 빠르게 음식을 바닥냈다. 나름 유명한 곳이라던 도윤범의 말이 사실이었다. 해물 떡볶이, 참치김밥, 짬뽕라면과 모둠 튀김. 거기에 사이드로 시킨 어묵탕까지. 메뉴 하나하나의 양이 적지 않아서 둘이 먹기엔 상당한 양이었는데, 어느새 전부 바닥을 드러냈다.
“괜히 몸이 큰 게 아니었네… 엄청 잘 드시네요. 이거 마셔요.”
“제가 원래 이러지 않는데….”
도윤범이 내민 복숭아 음료를 받아 들면서도 변명이 달라붙었다. 민망함이다. 며칠 굶은 것처럼 볼썽사납게 식사를 한 것에 대한.
“그럼, 약속 지키셔야 돼요? 다음에 또 밥 사 주기.”
“하아… 그래요.”
옷을 망가트린 것이 미안해 밥을 사 주려 한 것인데, 남도하 자신이 더 많이 먹어 버리는 짓을 저질렀다. 심지어 평소 먹던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을 먹었다. 지금도 그 많던 음식이 제 뱃속에 오롯이 들어가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다음엔 진짜 비싼 거 먹을 거예요.”
그래, 다음에 호텔 뷔페라도 한번 데려가야겠다. 이놈이 한번 마음껏 먹어 보라고.
* * *
집에 돌아온 남도하는 가방에 챙겨 두었던 종이를 꺼내 들고 소파에 앉았다.
“도윤범. 스물넷….”
도윤범의 이력서였다. 나이가 생각보다 어렸다. 4학년이면 한 스물다섯, 여섯은 됐을 줄 알았는데.
“한국 대학교 경영…?”
한국 대학교면 수재 중의 수재만 들어갈 수 있을 텐데. 더군다나 경영이라니…. 이건 오버 스펙이다. 상장조차 하지 않은 연예 기획사에 취직하기엔 지나치게 좋은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력서를 읽던 중, 이 이력서 자체가 의심스러워졌다. 어쩌면 전부 가짜일 수도 있을 것 같다.
태권도 청소년 국가대표. 전국체전 금메달. 아시아 선수권 금메달.
화려한 수상 경력뿐만 아니라 토익과 토플, 학교 성적까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지나칠 정도로 완벽한 배경을 가지고 매니저 일을 하려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도윤범….”
얼굴만 봐서는 절대 공부를 잘하게 생기진 않았다. 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그냥 버릇없는 부잣집 도련님 같다고 할까.
남도하는 이력서를 한쪽에 던져두었다. 장난스럽게 끌려 올라가던 귀여운 입꼬리가 생각난다. 까맣고 깊은 두 눈도 그렇고, 붉게 달아오르던 얼굴과 잔 근육이 붙어 있던 뽀얀 몸….
“하아….”
자꾸만 떠오르는 이상한 기억을 떨치고, 대본을 꺼내 들었다. 밥을 너무 많이 먹었나 보다. 잡생각이 이리 많아지는 걸 보면. 하지만 오늘따라 대본마저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 * *
“저거 누구야?”
양우준의 물음에 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막 도윤범은 대기실을 빠져나간 참이고, 대본을 읽던 남도하는 저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도 하지 않아서다. 달갑게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을 사이가 아니니까.
“야, 방금 나간 애 누구냐고.”
남도하는 제 어깨를 툭 치는 손길에 뜨거운 콧김을 한 번 토해 내고, 들고 있던 대본을 무릎에 올려놓았다. 이걸 또 힘으로 밀어붙여야 하나 생각하다가 그냥 한 번 더 참기로 했다.
“내 매니저.”
“…쟤가? 너를? 어려 보이던데?”
어려 보이는 게 아니라, 어리다.
“야!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대꾸를 해.”
“후… 어려, 인턴이야.”
두 번 참았다. 언제나 인내심이 바닥날 때까지 사람을 몰아붙이는 저 지랄 맞은 양우준의 성격도 참 한결같다. 저러니 아이돌 7년 계약이 끝나자마자 나머지 멤버들이 양우준만 빼고 따로 팀을 만들어 회사를 나가지 않았을까 싶다.
“뭔데, 뭐가? 우리 우준이가 또 왜 이럴까?”
천만다행이다. 남도하의 인내심이 끝을 보이려 할 때, 매니저를 맡는 이원호가 들어와 양우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거리를 벌렸다.
“무슨 새 매니저를 나도 모르게 뽑아?”
“매니저…? 아, 윤범이?”
아침에 이미 인사를 주고받았는지 이원호는 도윤범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어차피 네 매니저도 아닌데 상관없잖아, 우준아.”
지금, 남도하는 딱 매니저의 고달픔을 마주하고 있다. 이유조차 알 수 없는 신경질을 부리는 양우준과,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뱉어 내는 놈을 달래는 매니저. 자신은 도윤범에게 절대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각오를 한 번 더 다졌다.
“왜 상관이 없어!”
발작하듯 소리치는 양우준의 목소리에 이원호도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야, 바꿔.”
그리고 그건 남도하도 마찬가지였고….
“바꿔? 뭘?”
이제 막 방으로 돌아온 도윤범도 그랬다.
“매니저 바꾸자고. 얘 내가 쓸래.”
영문도 모르는 도윤범의 팔을 잡아끄는 양우준을 보며, 남도하의 마지막 이성이 끊어졌다.
남도하는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도윤범을 쥐고 있는 손목을 힘주어 잡았다.
“양우준, 다시 말해 봐.”
정제되지 못한 감정 탓인지, 팔목을 쥔 손아귀 힘이 점점 더 거칠어졌다.
“너 미쳤어? 놔, 놔…!”
“다시 말해 보라고.”
평소와 다른 남도하의 감정이 양우준에게는 닿지 않은 것일까.
“얘 내가 쓴, 아악…!”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한 남도하는 도윤범에게 닿아 있던 양우준의 손목을 억지로 비틀어 떼어 냈다.
“사람이 물건이야? 네가 쓰고 싶으면 쓰고, 버리고 싶으면 버리게?”
“미, 미친 새끼… 야!”
“언제는 원호 형이랑 해야겠다며. 그래서 내가 매니저 새로 구했잖아.”
양우준은 제 팔이 뒤틀리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몸이 따라 돌았다. 기괴한 모양으로 돌아간 몸을 바라보던 남도하는 양우준을 바닥에 던지듯 밀쳐 버렸다. 그 참에 양우준에게 쌓여 있던 감정도 조금 배설했다. 참아 두었던 것일 뿐, 아무렇지 않던 것이 아니다.
“넌 뭐가 그렇게 다 쉬워. 네가 원하면 다 들어줄 거 같아?”
왜, 새파랗게 어린 매니저 하나마저 탐을 내냐는 말은 넣어 두었다. 그 말까지 꺼내 들었다가는 모두가 아는 자신의 바닥을 스스로 내비치는 꼴이 될 것만 같았다.
“하…. 씨발, 이 미친 새끼가 진짜. 내가 이대로 넘어갈 거 같아? 너 계약 기간도 얼마 안 남았다는 데 한번 소속사 없이 뛰어 봐야 정신 차리지.”
남도하의 감정이 어떻든 양우준은 물러서지 않았다. 힘으로 안 된다는 걸 알게 된 탓인지, 더욱 독기 서린 목소리로 협박을 서슴없이 뱉어 냈다.
“해. 마음대로 해 봐.”
참 미안하지만, 이번만큼은 양우준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살인자의 밤, 그 드라마 조연을 따냈는데 그리 쉽게 내치지는 않을 거라는 판단이 섰다. 제대로 된 일이 없을 때도 몇 년이나 계약 관계를 유지한 회사였다. 큰돈을 벌어다 주지는 못했지만, 그 정도 의리는 있으리라 믿었다.
“내가 이런 새끼 하나 못 데려갈 거 같아? 꼼짝 말고 기다려.”
씩씩거리던 양우준은 괜히 도윤범의 가슴팍을 툭 밀치며 방을 나갔다.
“우, 우준아…! 형이랑 같이 가야지!”
그런 그를 말리는 건 조금 전 한마디 말로 버림받은 매니저 이원호뿐이다. 남도하는 그런 이원호를 뜯어말리고 싶은 마음 한편으로, 그들의 일에 더는 관여하고 싶지 않은 생각도 들었다.
“괜찮아요…?”
“아… 미안해요. 쟤가 원래 성격이 좀 저래요.”
출근 첫날부터 험한 꼴을 당하게 만들었다. 도윤범이 어디서부터 대화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졸지에 물건 취급을 당하고 양우준의 날 선 신경질까지 받게 해 미안했다. 만약 남도하 제 매니저를 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 테니까.
“괜찮아요. 저분은 딱… 딱, 성격대로 생겼는데요, 뭘.”
남도하는 수치심인지 짜증인지 모를 감정으로 가슴팍이 불편하게 울렸다. 그런 그와는 다르게 도윤범은 약간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양우준에 대한 첫인상을 내놓았다.
“성격대로…?”
“…좆같… 아니! 이, 이상하게요….”
…좆같은 성격대로… 좆같이 생겼다고. 도윤범의 말을 이해한 남도하는 헛웃음이 터졌다. 이 어린놈이 보기보다 입이 험하다. 얼굴이 붉어져서 두 손을 휘젓는 것만 봐서는 조금 전 태연히 욕을 한 놈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하. 그런 말 쓰면 혼나요, 윤범 씨.”
반쯤 농담으로 건넨 말이었는데, 도윤범은 고개를 도리질하며 거리를 좁혀 남도하의 두 손목을 맞잡았다.
“윤범이요.”
“네, 윤범 씨.”
“아니요. 윤범아, 하고 불러 줘요, 네?”
“…….”
갑작스러운 화제의 전환이 어색하다. 남도하는 원래 낯가림이 심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처음 보는 사람과 말을 트고 지낼 정도로 넉살이 좋지도 못했다.
“안 그러면 저 확 저거한테 가 버릴 거예요.”
남도하는 제 양 팔목을 붙잡은 손과, 뽀얀 얼굴을 번갈아 봤다. 팔 힘은 적어도 양우준보다는 센 것 같다. 하지만 그와 어울리지 않게 동공이 평소보다 두 배는 커진 듯한 얼굴로 협박을 하는 모습이 우스웠다. 어쩌면 이렇게 하나도 무섭지 않은 협박이 있을까. 심지어 기분마저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입꼬리가 올라갈 것만 같았다.
“싫은데….”
삽시간에 무너져 내리는 표정을 보다가, 기어이 남도하의 얼굴에 커다란 웃음이 걸려 버렸다. 딱, 기대하던 얼굴이었다. 가만히 있을 때면 날카로운 짐승 같은 얼굴을 한 놈의 얼굴이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으로 변하는 모습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다.
“어려운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장난이야, 윤범아.”
그 얼굴 때문에 남도하는 손을 들어 도윤범의 머리를 헤집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파고드는 머리칼이 부드럽게 느껴져 생각보다 조금 더 길게 쓸어 댔다.
“형… 이라고 해도 되죠?”
“벌써 하고 있잖아.”
또 더운가. 아님, 장난 좀 쳤다고 아직 삐져 있나. 도윤범의 귀와 목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무슨 피부색이 저렇게 잘 변하는지 모르겠다.
“도하… 형.”
“왜, 윤범아.”
다른 건 모르겠지만, 애는 착한 것 같아 맘에 든다. 좀, 귀엽기도 하고.
* * *
“도하야! 도하야…!”
“형, 우준이 따라간 거 아니었어요?”
모레 대본 리딩 스케줄이 잡혀 오늘, 내일은 최대한 집에서 휴식을 가질 생각이었다. 회사에 나온다고 해도 집에 있는 것과 별다른 건 없었지만, 아까처럼 양우준 같은 부류의 인간과 어울리며 정신력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잠깐만 이리 와 봐.”
뭔가 급해 보이는 이원호가 집에 가려던 남도하를 휴게실로 잡아끌었다.
“왜요, 또 무슨 일 있어요…?”
“있었지, 아주 대박 사건.”
“…무슨 일이요…?”
양우준이 그렇게 큰소리를 치고 나갔으니 일이 없는 게 더 이상하긴 했다. 애써 사고의 외각으로 미뤄 두었던 일을 이제 마주할 순간인가 보다.
“우준이 새끼 대표한테 아주 작살나게 욕 얻어먹었다. 너 재계약하지 말라고 했다가.”
그건, 상식선에서 봤을 때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양우준이 잘나가는 편이라고 하더라도 대표 입장에서 그런 연예인 한둘 본 것이 아닐 테다. 이제 갓 주연 반열에 올라선 배우 하나 구워삶는 건 일도 아니라는 말이다. 대표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겐 그의 갑질이 먹힐지 모르겠지만, 대표에게라면 씨알도 먹히지 않으리란 걸 쉽게 예상할 수 있었기에 그리 놀라운 소식은 아니었다.
“근데 대표님이… 매니저는 바꿔 주겠다고 했거든.”
“…설마…요.”
남도하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 갔다. 특별한 정이 있어서라기보다, 의미가 남다른 아이 아닌가. 처음으로 자신만 담당하는 전담 매니저가 생겼다. 경력도 없는 인턴이지만, 어쨌든. 마치 아껴 먹으려 손에 쥐고 있던 사탕을 홀랑 빼앗겨 버린 기분이었다.
“제가 대표님한테 한번….”
“아니, 끝까지 들어 봐.”
손가락 마디가 희게 변하도록 주먹을 꽉 움켜쥔 남도하의 팔을 이원호가 잡아챘다. 이제 보니 이원호의 얼굴에 웃음이 한가득이다. 그를 웃게 한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대표가 나랑 윤범이를 불러서 얘길 했지. 근데 그 새끼가 뭐라고 한 줄 알아?”
“새끼 아니고 윤범이요.”
“아무튼.”
“…뭐라고 했는데요…?”
설마, 한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직은 도윤범에게 옅은 믿음뿐인 남도하는 저를 바라보며 뜸 들이는 이원호 때문에 입이 말라갔다.
“퇴사하겠습니다. 양우준 씨랑 일할 줄 알았으면 애초에 출근도 안 했죠, 대표님. 이러면서 우준이 앞에서 대놓고 말하더라?”
이원호는 되지도 않는 연기로 도윤범을 흉내 내며 말을 전했다.
“에이, 설마요. 걔 그런 말 못… 할걸요?”
고작 이틀 본 것이 전부이지만, 저런 소리를 할 수 있는 아이로 보이진 않았다. 제 입에서 나온 욕설 한마디에도 당황에 젖어 얼굴을 붉히던 놈이… 대표 앞에서, 그것도 양우준을 앞에 두고 저런 소리를 했을 리 없다.
“진짜라니까? 대표도 깜짝 놀라서 나가 보라고 했어. 양우준처럼 지랄을 한 건 아닌데, 장난 아니게 싸했어.”
이원호는 원래 입이 가볍다. 그리고 허풍이 세고 거짓말도 잘한다. 그의 그런 성격을 잘 알기에 남도하도 길게 말씨름하지 않고 그의 말에 동조하고 말았다. 물론, 전혀 믿지는 않는다. 보나 마나 80%는 허풍일 거다.
“어쨌든,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그냥 지금 이대로 가는 거로.”
잘됐다. 이원호가 싫은 건 아니지만, 생각해 보니 도윤범이 조금 더 나은 것 같다. 이틀 만에 두 사람에 대한 평가가 바뀌었다.
“형!”
어떻게 찾아낸 것인지, 구석 빈 회의실에서 대화를 나누던 남도하의 뒤에 있던 문이 벌컥 열리며 도윤범이 머리통을 들이밀었다.
“…어?”
“안 가요? 데려다줄게요.”
“가자, 가야지.”
이원호에게 인사를 건네고 먼저 방을 나섰다. 그걸 따라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도윤범을 보니 역시 이원호의 말에 거짓이 많이 섞여 있는 것 같다. 그럼 그렇지.
“형, 주세요.”
“…뭘?”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길, 도윤범은 걸음을 옮기며 남도하에게 손바닥을 펼쳐 내밀었다.
“법카요. 그거 제가 가지고 있는 거예요.”
“아… 들었어?”
“당연하죠. 매니저 일인데요. 얼른요.”
남도하도 모르지 않았기에 오늘 당장 그에게 법인 카드를 맡기려다가 말았다. 이상하게… 사고를 칠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지금만 해도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걸 보면 왠지 큰일이 날 것 같다.
“너, 이거 진짜 함부로 쓰면 안 돼.”
“걱정하지 마요. 그 정도로 생각 없지는 않아요.”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넘기면서도 손을 놓지 않고 마지막 경고를 붙였다.
“농담 아니고, 진짜.”
“알았다니까요. 보니까 한도도 얼마 안 되던데요, 뭘.”
꾹 움켜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삽시간에 손끝에서 빠져나간 카드가 도윤범의 주머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우리 생활비 같은 거야. 그거 다 떨어지면 쫄쫄 굶어야 돼.”
조금, 과장을 섞어서 설명했다. 병아리 인턴 눈높이 수업 같은 거다.
“우리…요?”
“그럼, 그걸로 나 혼자 먹겠어? 너랑 같이 다니는데 우리 같이 쓰는 거지.”
“그러면… 형….”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이, 도윤범이 남도하를 마주 보고 섰다.
“…저 첫 출근 기념으로 꽃등심 먹을까요? 법인 카드로요.”
“…….”
아무래도, 그 큰 사고는 머지않아 터질 것 같다.
* * *
“그만 가.”
“안 돼요. 이것도 매니저 일이에요.”
“…차도 없는데, 무슨.”
“좀만 참아요. 내일부터는 차도 배차해 준대요.”
사실 그동안 차가 없는 것은 그다지… 아니, 약간 불편하긴 했다. 워낙 오래 차 없이 지낸 탓에 익숙해졌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민망했다. 같이 버스 정류장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려니 든 생각이다.
“미안하다. 괜히 나 때문에 너까지 고생하는 거 같네.”
“그게 왜 형 때문이에요?”
“남들 차 타고 퇴근할 때 넌 버스 타고 퇴근해야 하잖아.”
매니저 대우도 담당하는 연예인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랬기에 이원호도 그 더러운 꼴을 보면서도 양우준 옆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건 회사가 병신… 아니, 허, 허접해서 그런 거죠….”
“쪼그만 게, 입만 열리면 욕이 나오네?”
“…죄송해요….”
타박한 것은 아닌데, 도윤범은 삽시간에 시무룩해졌다. 그저 고운 얼굴로 거친 욕을 하는 모습이 영 어울리지 않아 나온 말일 뿐이다.
“농담이야. 편하게 얘기해도 돼.”
“…저는, 덕분에 이렇게 일찍 퇴근해서 좋은데요?”
“그것도 얼마 안 남았어. 내일부터는 진짜 바쁠 거야.”
애는 애인지, 일찍 퇴근한 것으로 좋아하는 도윤범이었다. 쓸데없는 말을 주고받으며 버스를 타고 퇴근 시간 전에 강남을 벗어났다. 매일 공무원처럼 남들 퇴근 시간에 맞춰 집에 가던 남도하 입장에서도 이른 퇴근이었다.
“진짜 혼자 가도 되는데.”
“어떻게 연예인을 혼자 보내요. 멀쩡한 매니저가 이렇게 있는데.”
“…좀 작게 말해.”
그다지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괜히 몰려오는 부끄러움에 옆에 앉은 도윤범의 어깨를 감싸 안고 귀에 속삭였다. 아무렇지 않던 일상이 병아리 인턴 앞에서는 이상하게 창피해지기 시작했다.
“나 알아보는 사람도 없어. 이렇게 얼굴 다 내놓고 다녀도 아무도 못 알아보잖아.”
정작 너도 내가 어디 나왔었는지 모르지 않냐… 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진짜 모르면 창피할 것 같아서.
“전 그래서 더 좋은데요.”
“…어?”
남도하의 품 안에 몸이 갇힌 도윤범은 고개만 창밖으로 틀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나만의 스타… 그런 거 같아서 좋아요, 저는.”
귀 아래 목덜미가 또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그리고,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요. 얼굴이 그래서… 무슨 일 당할지 어떻게 알아요.”
“하….”
쏟아지는 도윤범의 말에 또 남도하의 웃음이 터졌다. 나만의 스타, 라는 이상한 단어도 그렇고, 무슨 다섯 살 어린이를 대하는 듯한 저 걱정 어린 목소리가 우습기만 했다.
“내가 윤범이보다도 큰데? 이렇게 어깨도 한 팔로 감을 정도로?”
“…몸은 그래도… 어쨌든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요. 이제 출퇴근은 저랑 같이하는 거예요. 알았죠?”
“글쎄… 내 출근 시간 맞추려면 윤범이 새벽에 일어나야 할 텐데.”
“…….”
“아니, 촬영 들어가면 아예 집에 못 갈 수도 있겠구나.”
“…확실히, 매일 같이 출퇴근할 필요는 없겠죠…?”
엄한 척하던 도윤범은 순식간에 꼬리를 말았다. 이래서는 매니저를 키워서 써먹어야겠다. 기 센 방송가 사람들한테 한 입 거리밖에 되지 않을 것 같아 벌써 걱정스럽기만 했다.
“어, 내려요.”
막… 하차 벨을 누르려던 남도하보다 도윤범이 조금 빨랐다. 그런데, 순간 이상한 생각이 스쳤다.
…도윤범이 내리는 정류장을 어떻게 알지…?
* * *
집으로 향하는 길,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윤범아, 너 우리 집 어딘지 알아?”
“당연하죠.”
“알아…?”
태연히 튀어나오는 대답에 남도하가 반대로 놀랐다.
“형, 제가 매니저인데 그걸 모르면 어떻게 해요. 이 앞에서 우회전, 편의점 지나서 두 번째 건물!”
“어떻게?”
“회사에서 주소 받아서 스트릿 뷰로 미리 찾아봤죠. 혹시 형 데리러 가야 하는데 길 못 찾을까 봐요.”
뿌듯하게 말하는 도윤범을 보다 한숨 섞인 웃음을 뱉어냈다. 괜한 의심을 했다. 그저 생긴 것과 다르게 준비성이 조금 철저한 놈인가 보다. 이리도 생각해 주는 걸 보면, 생각보다 아주 엉망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이 생겼다.
“너도 그만 들어가 봐.”
“집까지 안 가고요?”
“편의점 좀 들렀다가 가려고.”
“…저녁도 안 먹었는데….”
남도하는 순간 고민했다. 이놈 저녁을 먹여서 보내야 하나. 집엔 먹을 만한 게 없는데 굳이 식당까지 찾아가야 하는가 고민스러웠다.
“첫날이니까 일찍 들어가서 쉬어. 밥은 다음에 먹자.”
삽시간에 축 처지는 어깨를 보니 좀 미안한 기분이 들기는 하지만, 내심 일찍 놓아주는 쪽을 더 좋아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이 아르바이트할 때도 일찍 퇴근하는 것만큼 좋은 일이 없었으니까 다르지 않을 테다.
“그럼 내일 아침에 차 가지고 올게요. 저녁 꼭 챙겨 드세요.”
“그래, 조심해서 가. 고마워, 데려다줘서.”
편의점 앞에 서서 도윤범의 뒤통수가 사라질 때까지 지켜봤다. 거북이 등딱지처럼 백팩을 메고, 얇은 점퍼를 걸친 모습이 어제 슈트를 입었을 때와는 또 달랐다. 아무리 봐도 남도하 제가 저놈을 데려다주어야 할 것 같은데….
이제 보니 상황이 조금 우스웠다. 덩치도 더 작은 게 말끝마다 매니저라고 하며 자신을 데려다준 것도, 차도 없어서 버스를 타고 집까지 함께 온 것도. 그래도 매니저가 생겼다는 부분만큼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어서 오세요.”
도윤범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도 한참이나 서 있다가 편의점으로 들어섰다. 오늘 저녁은 도시락으로 때워야겠다.
* * *
“도하 형! 여기요!”
“언제부터 기다린 거야? 전화라도 하지 그랬어.”
빌라 정문을 나서자마자 맞은편에 서 있던 커다란 강아지… 아니, 도윤범이 두 팔을 머리 위로 휘휘 저으며 반가운 척을 했다.
“아까 왔어요. 형 방해될까 봐 얌전히 기다렸죠.”
아침에 오겠다는 놈이 하도 연락이 없어서 거실에 한참 앉아 있다가 그냥 혼자 출근하러 나온 참이었다. 그런데 도윤범은 이미 도착해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근데 형… 차가 좀….”
“…저거야…?”
“임시로 타라던데요….”
남도하가 지금 소속사 「더 라인」과 함께 한 지도 6년이 되어 간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군대에 다녀오고, 그 이후 한곳에 정착했다. 회사 자체도 10년이 채 되지 않았고, 처음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이름조차 없는 회사였다. 그사이 수많은 가수와 배우를 발굴하고 또 영입했다. 이젠 중견 연예 기획사 정도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붕붕이… 구나….”
그런 회사 역사의 시작부터 존재했던 중고차가 한 대 있다. 요즘은 잘 나오지도 않는 은색 승합차인데, 처음 구매할 때부터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이 여태까지 회사에 남아 있었다.
“붕붕이요…?”
“어, 그래도 이놈이 용하게 고장도 안 나.”
겉모습만 봐서는 당장에라도 폐차장으로 끌려가야 하게 생겼는데, 남도하가 아는 한 저 차가 망가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끈질긴 생명력이었다. 덕분에 붕붕이라는 애칭까지 붙은 회사의 명물이었다. 안 좋은 쪽으로.
“그래도 제가 차 받으면서 들었는데요, 형….”
도윤범은 몸을 가깝게 끌어당겨 대단한 비밀을 발설하는 것처럼 남도하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이 차 타기만 하면 다 대박 난다던데요?”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놈을 보니 남도하는 웃음이 새 나올 것 같았다. 무슨 망상을 꿈꾸는지 모르겠지만, 절대 사실이 아니다. 일례로 남도하도 몇 년 전에 나름 비중 있는 조연을 맡아 붕붕이를 두 달 정도 탄 적이 있었는데, 그 드라마는 20화를 채우지도 못하고 14화 조기종영 했다. 역대 시청률 최하 순위 3위에 랭크되는 불명예와 함께. 그리고 저런 소문 역시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다.
“그래. 그러니까 붕붕이 배차된 거 너무 속상해하지 마.”
하지만 도윤범에게는 굳이 말하지 않기로 했다. 핑크빛 미래를 그리고 있을 병아리 매니저의 실낱같은 희망을 짓밟고 싶지는 않았다. 뭐, 하필 저 폐차시켜야 할 차를 내준 게 썩 달갑지는 않지만 어쩌겠나. 회사에서의 위치가 아직 저 정도인 것을.
“그래도 제가 안쪽 스팀 청소까지 싹 해 놨어요. 어서 타요.”
뿌듯한 목소리의 도윤범은 손수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
“…앞에 타도 되는데.”
“에이, 절대 안 돼요! 뒤에서 편하게 가세요. 뭐… 차 자체가 편하지는 않겠지만….”
이따금 차를 배차받을 때도 항상 보조석에 앉아서 다니다 보니 뒷자리에 앉는 것이 오히려 더 어색했지만, 남도하는 내색하지 않고 올라탔다.
“윤범아, 뭘 이런 것까지 다 준비했어…?”
“아, 차가 후져서 냉장고도 없더라고요…. 그래도 아직 시원할 테니까 지금 드세요.”
어디서 구해 온 것인지 모르겠지만, 운전석 뒷자리엔 작은 카페가 꾸려져 있었다. 젤리와 캔디, 탄산수와 이온 음료가 담긴 상자. 거기에 담요, 목 베개 그리고 아이스 아메리카노까지.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커피 먼저 드세요.”
“돈 많이 들었….”
“법카 긁었는데요. 제 커피까지요.”
안전벨트를 매고 차를 출발시키며 하는 도윤범의 말에, 간질거리던 남도하의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아무리 봐도 태연하게 큰 사고를 칠 놈이다. 그래도 뭐, 뭔가 진짜 매니저가 생긴 것 같아서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형 내일 대본 리딩 있는 거 아시죠?”
“응, 전에 들었어.”
거의 열흘 만에 잡힌 스케줄인데 모를 수가 없다. 내일 아침이면 남도하의 휴대폰 알람이 친절하게 스케줄을 알려 줄 예정이다.
“기자들도 부른다고 하더라고요. 앞부분은 공개한대요.”
“…그래…?”
“그래서 이따가 스타일리스트 만나고, 샵 잠깐 들를 거예요.”
생각보다 큰 규모로 진행되나 보다. 모든 출연진이 모이는 대본 리딩 자체가 처음은 아니지만, 언론 공개 형식으로 진행하는 건 남도하도 처음이었다. 그저 출연진 간에 합만 맞춰 보는 선에서 끝나리라 생각했는데, 카메라까지 따라붙는다면 또 얘기가 다르다.
“…근데 윤범아.”
“네, 형.”
“너 제법 매니저 같다?”
“…그래요…? 괘, 괜찮아요?”
남도하는 생각했다. 도윤범에게 너무 기대를 안 한 것 같다고.
어제 같이 퇴근하고 나서 언제 저렇게 세세한 일정을 잡아 두었는지 모르겠다. 그 더러운 붕붕이의 내부를 새 차처럼 만들어 놓은 것도 그렇고, 운전 솜씨는 또 어떤가. 울퉁불퉁하고 꼬불꼬불한 남도하의 집 앞 도로를 부드럽게 달리고 있다. 택시를 탈 때면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멀미가 날 정도로 불친절한 길인데 말이다.
“응, 예쁘다.”
농담이 아니라, 처음 생긴 매니저가 예쁘기만 하다.
* * *
“지금… 장난하세요?”
순간, 남도하의 심장이 철렁했다.
“뭐, 뭐가요.”
그리고, 저 모난 목소리를 직접적으로 받아 내는 스타일리스트 역시 삽시간에 겁을 집어먹은 듯 얼굴을 굳혔다.
“이 중에 뭘 고르라는 건데요. 아니, 애초에 이 옷들 도하 형 옷은 맞아요? 사이즈 좀 봐요. 팔뚝도 안 들어가게 생겼는데, 무슨.”
“…그게….”
문제는 회사 전담 스타일리스트 중 하나가 가져온 옷이었다. 바지와 셔츠 열댓 개를 들고 왔는데, 패션에 무감한 남도하가 보기에도 그다지 입고 싶지 않은 옷이었다.
“이런 거 입고 카메라 앞에 서면 볼만하겠어요, 그쵸?”
도윤범이 집어 든 것은 등판에 까만색 잉크로 커다란 호랑이가 프린팅된 셔츠였다.
“협찬이 없는데 어떻게 해요! 이것도 우준 오빠 협찬받은 거에서 빼 온 거거든요?”
스타일리스트도 성격이 보통은 아닌지 도끼눈을 뜨고서 날 선 도윤범을 마주 봤다. 두 사람 사이에 말 없는 신경전이 오갔다.
“윤범아, 그만해. 그냥 아무거나 입고 가도 돼. 그렇게 큰 행사도 아니라서 다 편하게 입고 올 거야.”
얼굴조차 처음 보는 스타일리스트에게 말을 하기도 그래서 그나마 안면이 있는 도윤범의 팔을 잡고 두 사람을 떼어 놨다.
“그만 가 보세요. 옷은 알아서 입을게요.”
짜증 난 감정을 숨기지 않던 스타일리스트는 가져왔던 옷들을 팔뚝에 걸친 채 방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저걸 진짜…!”
“윤범아, 그만해.”
“하아… 형, 저 너무 화나요….”
그래 보인다. 제 화를 다 풀어내지 못한 것인지, 도윤범은 당사자인 남도하보다도 더욱더 씩씩거리고 있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건 당연하다. 상황에 맞지 않게 그 모습이 좀 우스워 보이기도 했다. 꼭 초등학생들 기 싸움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대로 뒀으면 왠지 두 사람이 울며 머리채를 잡고 드잡이질을 하진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괜찮아. 쟤 말도 맞지 뭘. 협찬받을 짬이 아닌데 어떻게 해.”
“그것도 실력이에요. 그런 능력 없으면 스타일리스트 하지 말아야죠.”
솔직히 말해서 남도하도 조금 섭섭하긴 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말이라도 하지 않았으면 기대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보내 준다는 스타일리스트는 마치 양우준이 입기를 거부한 것처럼 생긴 옷만 모아서 남도하 제게 내밀지 않았나.
“됐어. 형도 집에 옷 엄청 많아.”
“아뇨, 형. 제가 협찬받아 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요.”
“어…?”
아랫입술이 툭 튀어나오고, 뜨거운 콧김을 뿜어 대는 것 같은 도윤범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우선 샵 먼저 가요, 우리.”
그러곤 마음을 추스르지도 않은 채 남도하의 손을 잡아끌었다. 예상도 못 한 스킨십에 남도하는 멍하니 그 손길에 따랐다. 거칠기만 한 제 손에 닿는 부드러운 피부의 촉감이 생소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뭔가, 간질거리듯.
“근데… 공식 촬영도 아닌데 샵까지 가야 될까?”
“형, 요즘 사람들은요…. 생얼 같은 자연스러움을 좋아하면서 또 막상 맨얼굴로 카메라 앞에 나오면 온갖 욕을 달아요. 쟤는 무슨 자신감이냐, 상대 배우에 대한 배려가 저리 없냐. 사진 하나 잘못 찍히면 평생 지우지도 못하는 흑역사 생성이에요.”
“내가… 그렇게 배려 없이 생겼어…?”
도윤범의 말을 듣던 남도하는 뒷덜미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으로 제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애가, 생각보다 돌직구다.
“아, 아뇨! 그런 뜻이 아니라… 형은 생얼이 더 예쁜, 아니 멋있는데요….”
스타일리스트를 만난 후부터 한참이나 날이 서 있던 도윤범이 이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조금 더 이상한 상태 같기도 하고.
“농담이야. 그래서, 풀메이크업이라도 해야 돼?”
“아뇨? 그것도 안 돼요. 과하면 안 한 것보다 못해요. 꾸안꾸, 내일 형 컨셉이에요.”
“꾸… 안꾸….”
“가요.”
쓸데없이 비장한 도윤범을 따라나서는 남도하는 작게 웃음이 났다. 손을 잡아끄는 힘에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서기는 했는데, 누군가 자기 일에 이리 발 벗고 나서 주는 게 좀 신기한 기분이었다. 어떻게 보면 남인데. 저렇게까지 열성적인 건 인턴이라 그런 거겠지.
그런 도윤범의 열정은 미용실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조금 더 심해졌다.
“야… 여기 맞아…?”
“그렇다는데요.”
“우리가 이런 델 쓴다고…?”
주차를 하고 청담동 한복판에 있는 3층 단독 건물로 들어갔다. 한 번도 회사와 계약된 미용실에 와 본 적이 없다. 사실 그런 곳이 있다는 것도 이번에 도윤범에게 들었다. 양우준만 하더라도 따로 협찬받은 미용실을 이용한다고 했다.
“글쎄요…. 저는 그냥 알려 준 대로 온 거라.”
하긴, 물을 사람이 잘못됐다. 출근한 지 이틀밖에 안 된 놈이 알 리가 없는데, 하도 능숙하게 행동해서 순간 그 사실을 잊었다. 볼을 긁적이는 도윤범을 보자니 역시 정확한 사정은 모르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등장한 헤어 디자이너는 현란한 솜씨의 가위질을 선보였다.
“조심히… 거기는 살짝만요!”
그리고 그 사이사이 도윤범의 참견이 쉼 없이 이어져 정교한 작업이라도 하는 양 한 시간가량이나 제자리에 앉아 있어야 했다.
“…윤범아.”
“네?”
“그만… 해….”
하도 말이 많아서, 수많은 미용실 직원의 시선이 남도하에게 쏟아졌다. 더군다나 워낙 조심스럽게 가위질을 하다 보니 이게 머리칼을 자른 것인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만하래요. 나머지는 내일 해 주세요.”
“내일 또 와?”
“당연하죠. 내일 스케줄 가기 전에 아침에 잠깐 들렀다가 가면 될 거 같아요.”
원래… 다 이렇게 하나. 벌써 내일 또 이러고 있을 생각에 귀찮은 마음 한편으로, 꼭 싫지만은 않았다. 뭔가 제대로 된 관리를 받는 것 같달까.
* * *
남도하는 어스름하게 눈꺼풀을 뚫고 들어오는 빛에 눈을 떴다. 아직 방 안엔 절반의 어둠이 남아 있었지만, 얼른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잠을 자긴 했는데 이상하게 눈만 감았다 뜬 것 같은 몸 상태였다. 무거운 머리를 세차게 흔들고 일어나 탄산수로 정신을 차렸다. 그러곤 평소보다 조금 이르게 동네를 한 바퀴 달리고 돌아와 몸을 씻었다.
[저 도착했어요.]
대충 준비를 하고 다시 한번 대본을 훑어보던 중 들어온 메시지를 봤다. 아홉 시. 약속 시각보다 훨씬 빠르다. 도윤범의 메시지를 보고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
“형!”
“왜 이렇게 일찍 왔어. 리딩은 점심 때 시작하는데.”
“그러니까요. 무슨 리딩을 점심시간에 한대요. 사람 밥도 못 먹게.”
“아니 그 말이 아니라….”
이상한 쪽으로 빠지는 이야기였다.
“얼른 타요. 샵 갔다가 가려면 시간 없어요.”
도윤범의 재촉에 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남도하의 자리 뒤쪽엔 커다란 종이 가방이 한가득 있었다.
“저건 다 뭐야?”
“제가 협찬받아 온다고 했잖아요.”
“…협찬…?”
잊었다. 도윤범이 스타일리스트와 싸우고 뱉어낸 헛소리 정도로 여기고 말았다.
“그걸 진짜 받아 왔어?”
“당연하죠. 서로 주겠다던데요.”
그럴 리가. 고갤 돌려 종이 가방을 한 번 보고, 앞에서 운전 중인 도윤범을 한 번 보고. 물건이 있으니 거짓말은 아닐 텐데 썩 믿기는 말은 아니었다. 그러다 번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설마, 너… 법인 카드 긁은 건 아니지?”
“네…? 에이… 설마요. 그 카드 한도로 저거 다 사지도 못해요.”
“아… 그렇지.”
하긴, 한도도 그렇고 한 번 입자고 저 옷들을 샀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형, 옆에 커피랑 샌드위치 있어요. 오늘 대본 리딩까지 시간 없어서 밥 못 드실 테니까 그거라도 드세요.”
“뭘 이런 거까지 사 왔어. 너는, 먹었어?”
“그럼요.”
익숙한 카페 로고가 새겨진 샌드위치를 잡아들었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걸 보면 집에 도착하기 전에 바로 사 온 것 같았다. 긴장돼 아침도 건너뛰었지만, 그래도 신경 써 사 온 걸 못 본 체할 수도 없었다. 샌드위치 꼬랑지가 남도하의 입으로 사라질 때쯤 차가 어제 그 미용실 앞에 멈춰 섰다.
* * *
“형! 이것도 잘 어울리네요. 근데 아까 입은 까만 셔츠가 더 멋있는 거 같아요.”
“…근데 이거 좀 과한 거 아니야…?”
도윤범이 빌려온 옷을 갈아입어 보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졌다. 그보다 앞서 한 시간가량 ‘집에서 대충 자다 나온 것처럼 자연스럽게 헝클어진 머리’를 연출하느라 그런 탓도 있다. 더군다나 도윤범은 무슨 재주인지 몰라도 상당히 유명한 브랜드의 옷을 잔뜩 빌려 와 남도하에게 하나씩 입혀 보고 있었다. 마지막 옷까지 입어 본 후에야 처음 입었던 옷으로 결정된 참이다.
“괜찮아?”
“예뻐… 아니, 멋있어요….”
진짜 어디 몸이 안 좋은가. 도윤범의 얼굴이 또다시 붉게 달아오른 걸 보고 든 생각이다.
“가자, 늦겠다.”
멍하니 서 있는 도윤범이 이유 없이 귀여워 보였다. 처음 생긴 매니저라 그런지, 이리 열심히 챙겨 줘서 그런 건지. 어쨌든 가슴께가 간질거리는 감정이 들게 하는 놈이었다. 머릴 한번 헤집어 주고 선택되지 못한 옷을 챙겼다. 나름 일찍 출발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대본 리딩 장소에 도착하자 여유 시간이 거의 없었다.
“형 자리 여기네요.”
“어. 넌 잠깐 나가 있어.”
“나가요? 왜요? 뒤에 조용히 앉아 있으면 안 돼요…?”
“…안 돼.”
대본 리딩 장소는 생각보다 훨씬 커다랬다. 공간이 워낙 넓어서 매니저가 뒤에 앉아 있어도 무방할 정도로. 하지만 원래 매니저가 동석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기에 지정된 자리에 앉은 남도하는 시무룩해진 도윤범을 밖으로 내보내야 했다.
“앞에서 기다릴게요.”
“아냐, 차에서 기다려. 피곤하잖아.”
도윤범은 남도하의 자리 아래 조그만 가방을 하나 내려놓았다.
“여기 물이랑 사탕 들었어요. 필요한 거 있으면 바로 메시지 보내요?”
“알았어.”
참, 보기보다 꼼꼼한 성격이다.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으로 밖으로 나가는 도윤범을 눈에 담다가, 대본을 펼쳤다. 그렇게 연습했는데도 불안하기만 해 잠깐이라도 더 읽어 보기로 했다.
“예쁘게 입고 왔네.”
한참 대본을 집중해 훑던 중, 눈앞의 대본이 누군가의 손에 의해 사라져 버렸다. 무례한 행동에 짜증이 솟아 고갤 들었던 남도하는 마주한 얼굴에 놀라 입이 벌어진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상대는 남도하의 대본을 돌돌 말아 손에 쥔 채 상체를 가깝게 끌어와 얼굴을 마주 댔다.
“얼굴도 제대로 생겼고.”
한 뼘 정도나 될까. 지나치게 가깝게 몸을 가져다 댄 남자에게서 연한 우디향과 머스크향이 풍겼다. 중성적인 느낌이었다.
“서, 서주언….”
TV에서나 보던 남자가 실제로 눈앞에 등장하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도 얼굴이 닿을 것처럼 가깝게.
“형 이름을 그렇게 막 부르면 안 되는데.”
“죄송해요. 이,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당황해서요.”
남도하는 급하게 의자를 뒤로 물려 거릴 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상 일어서서 보니 상대는 그렇게 키가 크진 않았다. 남도하보다 조금 작거나, 비슷한 정도. 그치만 비현실적인 얼굴 크기 때문에 키가 유달리 크게 보이는 사람이었다. 화면발이 아니었다.
“확실히… 그렇네.”
“…네?”
남도하는 저를 위아래로 훑으며 꺼내든 상대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냐, 그런 게 있어. 근데 무슨 대본을 이렇게 걸레짝이 되도록 봐?”
“아… 주세요, 그거.”
서주언은 남도하의 대본집을 손에 들고 팔랑거리며 페이지를 넘겼다. 일기장이라도 들킨 것처럼 남도하는 그의 손에 들린 대본을 빠르게 뺏어 들었다.
“열심히 하네. 이 정성이면 로스쿨 가도 되겠어.”
“…….”
틀림없이 말투는 그리 기분 나쁘지 않은데 묘하게 거슬렸다. 자격지심인지 모르겠지만, 조연이 뭘 그리 열심히 하냐는 타박 같기도 하고 몇 줄 되지도 않는 대사를 그렇게까지 외워야 하냐는 놀림 같기도 하고.
“근데 너… 아니다, 나중에 얘기하자.”
서주언이 무언가 말을 이으려 할 때, 문이 열리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덕분에 약간 어색하던 분위기가 풀어졌다. 당연하게도 방금 들어온 사람들의 관심은 서주언에게 집중됐다. 그걸 시작으로 속속 빈자리들이 채워졌다.
기다란 테이블의 정중앙에 위치해 기자들의 눈에 가장 잘 보이는 자리를 배정받은 서주언이 움직인 건 그때였다. 그는 자신의 이름표를 덜렁덜렁 들고 남도하의 옆자리로 옮겨 왔다. 그러곤 그 자리에 있던 원래 이름표를 옆으로 밀어 버리며 태연히 앉았다.
“저… 주언 씨, 자리는 원래 그대로 앉아야 하는데요….”
조연출이 눈치를 보며 서주언에게 말을 붙였지만, 서주언은 가벼운 턱짓 한 번으로 그를 물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서주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된다. 입술을 한 번 물어 보인 조연출은 결국 그가 앉은 자리를 기준으로 자리 배치를 다시 해야 했다.
“남도하 씨는 그럼 저쪽으로….”
“여긴 그대로 두고.”
조연출의 말에 막 엉덩이를 떼려던 남도하의 팔을 서주언이 잡아챘다.
“…예….”
톱스타는 다 이런가. 조금은 몰상식해 보이는 서주언의 행동에 남도하는 기분이 언짢았다. 대본을 펼쳐서 잠깐이라도 더 읽어 보고 싶은데, 테이블에 턱을 괴고 저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눈빛 때문에 이도 저도 못 하고 시선을 앞으로 던진 채 멍하니 앉아 있어야 했다. 서주언 이야기다.
“왜요.”
“그냥. 나 이거 먹어도 돼?”
“아니 그건….”
서주언은 남도하의 의자 아래 있던, 도윤범이 싸 준 간식 가방을 들어 올렸다. 그러곤 자연스럽게 그 안에 있던 것들을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애기야 뭐야. 생긴 거랑 다르게 무슨 간식 가방을 가지고 다녀.”
“하아… 줘요, 빨리.”
성의 없는 손길로 목에 좋은 캔디와 비타민 젤리를 책상에 쏟아 내곤 그중 하나를 꺼내 제 입에 쏙 집어넣고 있었다. 아직 남도하 저도 먹지 못한 걸. 서주언의 손에 들린 가방을 빼앗아 테이블을 쓸어 너저분하게 나와 있던 간식을 가방에 담았다. 역시, 사람은 겉만 봐서는 모른다더니 서주언도 어쩔 수 없는 연예인인가 보다. 이리 제멋대로인 걸 보면.
“빨리 시작하죠?”
아그작 아그작 사탕을 씹어 먹은 서주언은 이번에도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의자에 팔짱을 끼고 앉아 있다가 시간을 보곤 리딩을 시작하자 했다. 원래 약속된 시간에서 정확히 1분이 지난 시각이었다.
“…그게 아직 한 분 덜 와서요.”
제작만 했다 하면 대박이 나는 감독도, 작가도 모두 이미 자리에 앉아 있는 상황이다. 연세가 많은 선생님들 역시 마찬가지다. 남, 여 주연도 한참 전에 왔다. 그런데 여전히 오지 않은 한 명 때문에 기자들은 아직 밖에서 대기 중이었다.
“하아… 난 약속 시간 안 지키는 게 제일 싫어, 그치?”
“…네… 네?”
남도하는 제게 물어오는 말에 저도 모르게 답을 해 버렸다. 얼떨결에 답하긴 했지만, 그건 남도하도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이런 자리에 지각하는 건 매우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늦었네요.”
그리고… 그 불편한 정적을 깨고 등장한 인물을 보곤 남도하의 기분이 조금 더 안 좋아졌다.
“양우준 씨, 저기 빈자리 앉으세요.”
양우준… 이었다. 늦게 온 것도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런 것인지 느릿한 걸음으로 한 명 한 명 인사를 건네며 제 자리로 향했다. 사전에 들었던 말이 없었던 탓에 그의 등장에 남도하가 제일 당황스러웠다. 남도하의 옆을 지나던 양우준은 보일락 말락 한 비틀린 미소를 지어 보이곤 지나쳐 갔다.
“안녕하세요, 주언이 형!”
그러곤 그 얼굴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의 반가운 목소리로 서주언에게 인사를 건넸다.
“빨리빨리 좀 다니죠? 그쪽 하나 때문에 지금 몇 사람이 기다립니까.”
남도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조금 전까지 제 무릎 위에 올려놓은 가방에서 자꾸 사탕을 하나씩 꺼내 먹던 얄미운 남자가 꽤 날 선 목소리로 양우준을 타박했다. 그 목소리에 수많은 시선이 그들에게 쏟아졌다.
“시작하죠.”
날 선 목소리에 양우준은 결국 내밀었던 손을 무안하게 집어넣은 채 자리로 가 앉아야 했다.
“그럼 기자단 입장하겠습니다. 15분 정도만 간단하게 촬영할 건데, 다 아시겠지만… 조금만 친한 모습 보여 주세요.”
“별걸 다 시키네, 씨발. 얼굴을 이제 봤는데 친하긴 뭘 친해.”
남도하의 옆에 앉은 서주언은 쉼 없이 불만을 쏟아 냈다. 그러면서도 카메라를 든 기자단이 들어서자 자세를 바로 하며 테이블로 상체를 끌어당겨 앉았다.
“도하야.”
“…예?”
“대본 좀 같이 보자. 안 가져왔어.”
“…….”
진짜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지. 안 그래도 끊임없이 밀고 들어오는 기자단을 보며 긴장이 차올라 죽겠는데, 옆에 앉은 서주언마저 정신을 사납게 하고 있다. 하필 그의 옆에 자리한 탓에 동그란 카메라 렌즈가 전부 그들을 향해 있었다. 정확히는 옆에 앉은 서주언에게.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한 사람씩 맡은 배역을 설명하고 작가의 간단한 시놉시스와 인물 설명이 있었다. 그렇게 남도하가 며칠이나 밤새워 외웠던 1화의 대본 리딩이 시작되었다.
“도하야, 이리 와 봐.”
“…왜요?”
“빨리.”
작은 소리로 부르는 서주언의 목소리에 남도하는 몸을 조금 가깝게 끌어 앉았다.
“아,”
“뭐…!”
불러놓고 한참 말이 없는 얼굴을 마주 보다가,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서주언의 말에 의문을 표하려 입을 벌린 순간이었다. 입안으로 달달한 사탕이 쏙 밀고 들어왔다. 하마터면 놀라서 동그란 알맹이를 그대로 목구멍으로 넘겨 버릴 뻔했다. 그와 동시에 연출진 뒤편에 있던 기자단의 카메라 셔터 소리가 방 안을 온통 채울 정도로 터져 나왔다.
“뭐, 뭐 하는 거예요…!”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작게 항의하자 서주언이 남도하의 의자를 더욱더 가깝게 당겨 손으로 귓가를 가린 채 입을 대고 속삭였다.
“친한 척하라잖아, 웃어.”
웃었다. 헛웃음. 남도하는 생각했다. 자신이 서주언이란 사람에 대해 뭔가 착각하고 있던 것 같다고. 톱스타라서, 얼굴도 보기 힘든 미스터리한 배우라서 어딘가 대단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옆에 놓고 보니 그냥 딱… 미친놈이다. 이 중요한 자리에 대본도 들고 오지 않고서 장난만 치는 걸 보라.
“자, 그럼 기자분들은 이만 나가 주시고요. 리딩 시작하겠습니다.”
형식적으로 대사를 한두 줄씩 읽어 가며 기자단 앞에서 연기를 선보이고,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그제야 본격적인 리딩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서주언이 변했다.
“여기요.”
“필요 없어.”
장난스럽던 목소리와 표정도 사라졌다. 그러곤 남도하가 내민 대본마저 그대로 돌려주었다. 앞부분은 거의 서주언 단독이라고 보아야 했다. 감정선에 대한 부분이라 대사도 엄청났고, 무거운 분위기를 연출해야 했다. 제 장면이 아님에도 그 장면을 인상 깊게 봤었다. 그리고 서주언은, 남도하가 머릿속에 그렸던 모습 그대로의 연기를 선보였다.
대본도 없이 말이다.
“좋네요. 역시 서주언 씨는 실망시키는 법이 없어요.”
깐깐하기로 소문난, 연기 경력 30년이 넘는 선생님들께도 독설을 일삼기로 유명한 작가마저 서주언의 연기를 칭찬할 정도였다.
“이어 가죠.”
너무 강렬하게 시작을 연 탓인지 그 뒤로 대본을 읽어 나가는 사람마다 꽤 많은 지적이 이어졌다. 그러다 양우준이 입을 열었을 때였다.
“…제가 거길 왜 가야 하죠?”
“잠깐, 지금 동화책 읽어요? 아님, 늦게 합류했다고 대본이랑 시놉 제대로 안 읽고 오셨나 봐요?”
긴 대사를 치지도 않았다. 고작 한 문장 입에 올리자마자 작가는 리딩을 멈췄다.
“저 친구는 목소리 톤도 안 맞고 캐릭터가 영 아니잖아요, 감독님.”
“…캐릭터를 살짝 바꾸자, 김 작가.”
푹 내쉬는 한숨에 커다란 회의실 전체가 인위적인 적막에 휩싸였다. 남도하의 자리에선 양우준의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틀림없이 짜증이 가득 담겨 있을 것이다.
“씨발, 저걸 연기라고 하냐.”
비웃음이 가득 담긴 서주언의 목소리였지만, 남도하도 일정 부분 동의하는 바였다. 양우준의 연기가 형편없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배역이 영 맞지 않았다. 무게를 잡고 강한 역할인데 그의 이미지 자체가 그런 쪽이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청춘물 쪽에 어울린다.
“이어 가죠.”
하필 그다음 신이 남도하였다. 한창 무거워진 분위기에 제 대사를 읽으려니 괜스레 더욱 긴장이 들어차는 것 같았다.
“우리라고 다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 너 같은….”
남도하의 역할은, 남자 주인공을 맡은 서주언과 대립하는 악역이었다. 서사가 깊은 악역. 원래였다면 탐내 보지도 못할 정도로 비중이 큰 역할이었다. 남도하와 서주언이 대사를 주고받았다. 거의 10여 분이 흐를 때까지도 아무도 멈추는 사람이 없었다.
“…좋네요. 남, 도하 씨요.”
“네.”
테이블 아래로 내리고 있던 주먹에 땀이 배어나는 것 같았다. 정신을 놓고 대본을 읽은 것도 그렇고, 대본도 없이 그 긴 대사를 주고받아 준 서주언도 그렇고. 그걸 칭찬한 작가와 감독도 그렇고. 자연스럽게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고, 남도하는 슬쩍 옆자리에 앉은 남자를 살폈다.
참 신기한 사람이다.
연기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세상 제일 무기력하고, 장난스럽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막상 리딩을 시작하자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펼치듯 감정을 담은 목소리가 나왔다. 머릿속에 이미 대본이 모두 들어 있는 것처럼 작은 감정선 하나까지도 작가가 요구한 그대로였다.
뭐… 생각보다 형편없는 사람은 아닌가 보다.
대본 리딩은 그렇게 두 시간여가 더 진행되었다. 목이 칼칼해 도윤범이 싸 준 물을 마시다가 남도하는 작게 웃음이 났다. 물병에 네임펜으로 눈웃음 그림과 함께 ‘화이팅!’이라는 손글씨가 쓰여 있었다. 더불어 안쪽엔 작은 레몬 조각이 들어가 있어서 물을 목구멍으로 넘기자 그냥 물보다 조금 더 시원한 느낌이었다. 하는 짓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러면 촬영 때 뵙겠습니다.”
오랜만의 대본 리딩이라 그런지 남도하도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비중이 큰 역할을 처음 맡아 봐서 쉼 없이 입을 열어야 했던 탓도 있는 것 같다.
“야.”
밤샘 촬영을 한 것처럼 피로가 몰려와 빠르게 회의실을 빠져나가려 할 때, 누군가 남도하의 팔을 낚아챘다.
“…네?”
“밥 먹자.”
또다시 건들건들해진 서주언이었다.
“지금요? 세 시밖에 안 됐는데요.”
“난 누구랑 달라서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아.”
말하는 투가 영 재수 없다. 스케줄이 없는 건 사실이고 서주언이 바쁜 것 또한 온 국민이 아는 일이지만, 굳이 저걸 저렇게 대놓고 말할 필요가 있나 싶다.
“후우… 그럴….”
“도하 형.”
막, 서주언에게 긍정의 답을 하려 할 때였다. 뒤에서 튀어나온 손이 남도하의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
“차에서 기다리라니까, 왜 여기서 기다렸어.”
“그냥요. 차까지 오다가 형 납치당하면 어떻게 해요.”
오자마자 간식 가방을 뺏어 들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진지하게 하는 도윤범이었다.
“빨리 가자, 밥 먹으러.”
서주언의 재촉에 다시 입을 열었던 남도하는….
“아, 다음에요. …저도 다음 스케줄이 있어서요….”
방금 하려던 대답과는 상이한 답을 내놓아야 했다.
“…스케줄? 그래, 그럼.”
등 뒤에서 도윤범이 남도하의 옷을 티 나지 않게 잡아당긴 탓이다. 저번에 면접 때 제 셔츠를 걸치고 건네 오던 무언의 협박이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잠깐 서주언의 시선이 떨어진 사이에 바라본 도윤범의 아랫입술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
“주언이 형, 저랑 밥 먹어요!”
그리고 정말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누구?”
“…아까 인사드렸는데요. 양우준이요….”
“아, 그 발연기. 언제 봤다고 친한 척이죠. 그쪽은 아무나 보고 형이라고 하나요. 선배님이라고 불러 줬으면 좋겠네요.”
“…죄송합니다… 선배님….”
그들의 대화를 듣던 남도하는 기가 막혔다. 우선, 누구에게나 건방지기 짝이 없던 양우준이 순한 양이 된 게 신기했다. 뭐… 상대가 서주언이라면 이해는 된다. 그리고 또 놀라웠던 건, 서주언의 입에서 쏟아진 말 때문이다. 그는 처음 남도하를 볼 때부터 반말을 지껄였다. 남의 가방을 뒤져 사탕을 꺼내 먹은 건 덤이다. 그런 주제에 누구에게 선배님이네, 친한 척을 하네 하는지 모르겠다.
“그럼 전 먼저.”
길게 마주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상황에 남도하가 먼저 몸을 돌렸다.
“도하야, 연락할게.”
뒤에서 들려오는 서주언의 목소리에 마음과는 다르게 몸을 돌려 고갤 꾸벅 숙여 인사를 건넸다. 조금 전 안 들었다면 모르겠지만, 선후배 관계나 예의를 꽤 중시하는 사람인 것 같으니까. 더군다나 이 드라마의 주연인 그에게 밉보여서 좋을 게 하나 없다. 얼굴은 반듯하게 생긴 게 성격이 왜 저런지 모르겠다.
“얌마, 너 죽을래?”
“뭐가요….”
“형이 사회생활 좀 하려는데, 왜 눈치를 줘.”
차에 올라타자마자 남도하는 도윤범을 타박했다. 그러자 도윤범은 여전히 툴툴거리는 목소리를 숨기지 못한 채 대답했다.
“저는… 형이랑 같이 먹으려고 식당도 다 알아봤는데….”
“…그래?”
“나름, 우리 첫 스케줄이잖아요. 그러니까 같이 건배 한 번은 해야죠….”
“…맞네. 형이 잘못했네.”
주둥이가 툭 튀어나온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제 딴엔 남도하와 축하 파티라도 하려고 한 건데, 그것도 모르고 서주언을 홀랑 따라가 버리려 한 것 때문에 삐졌나 보다.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으리란 걸 몰랐던 남도하는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몰려왔다.
“미안해. 형이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어. 가자, 맛있는 거 먹으러. 나 엄청 배고파.”
미안함에 괜히 더 과장된 감정을 전달했다. 그제야 도윤범의 표정이 바뀌었다.
“배, 배고파요? 그래서 제가 간식 싸 줬잖아요. 거기 뒤에 과자 있으니까 하나 먹고 계세요. 아니다, 과자 먹으면 입맛 없으니까 사탕 하나만 먹고 있어요. 금방 가요.”
“…천천히 해.”
도윤범은 저러다 사고 내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호들갑을 떨었다.
“벨트 매고.”
“아… 맞다. 차가 후져서 안전벨트 센서도 없어서 그래요.”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니고, 그냥 배고프다고 한마디 한 건데도 마치 응급실로 향하는 양 정신을 못 차리는 도윤범이었다. 대본 리딩 때문에 꽤 긴장해 있던 남도하는 그 방정맞은 모습에야 웃음이 나왔다. 어린애라 그런가. 하는 짓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다.
“오늘은 꽃등심 먹어도 되죠?”
아주… 짧게 말이다.
* * *
“왜에… 형이 맛있게 구워 줄게.”
“…안 먹어요.”
도윤범이 삐졌다.
“형이 진짜 맛있게 잘 구워. 고깃집 알바를 몇 년이나 했는데.”
소고기 노래를 부르던 놈을 삼겹살집에 데려온 탓이다. 심통이 단단히 나서는 입을 삐죽 내밀곤 쌈 채소와 함께 나온 오이만 우걱우걱 먹고 있었다. 양 눈이 쭉 찢어진 게 못마땅한 감정이 가득 들어찼다.
“고마워.”
남도하는 부루퉁하게 감정을 숨기지 않는 얼굴을 외면하며 다 익은 고기를 도윤범의 앞접시로 옮겨 주었다. 그러면서 슬쩍 오늘 그에게 느꼈던 감정 일부도 건넸다.
“뭐가요.”
“너 아니었으면 완전 엉망이었을 거야. 하마터면 나만 이상한 꼴로 갈 뻔했어.”
도윤범이 큰일을 했다. 남도하는 그동안 자신이 겪었던 대본 리딩만 생각했다. 카메라가 없는 자리에 오는 연예인들은 생각보다 훨씬 평범한 모습이었기에, 당연히 이번에도 그러리라 예상했었다. 리딩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도윤범이 조금 오버하고 있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하나둘 들어오는 배우들을 보니 자신이 차려입은 옷이 절대 과하게 보이지 않았다. 특히 양우준은 음악 방송 무대에 서는 것처럼 풀 메이크업을 하고 왔다.
“그, 그거야… 그냥 제 일인데요, 뭘….”
확실히 부끄러움이 많은가 보다. 도윤범은 남도하를 바라보지도 않고 젓가락을 들어 삼겹살을 먹기 시작했다. 이미 술이라도 거나하게 취한 것처럼 얼핏 보이는 그의 목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야.”
남도하는 말을 한 뒤에야 뭔가 민망해졌다. 언제나 인사말처럼 저런 감사를 표하곤 했다. 촬영장에서도, 회사에서도. 하물며 식당이나 편의점에서도. 하지만 이렇게 진심이 담긴 말을 꺼내 본 건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진짜 감사 인사 말이다. 홀로 차오르는 민망함에 고기가 타지 않게 집게를 이리저리 휘저어 댈 때, 앞으로 하얀 손이 밀려왔다.
“뭐…?”
동그랗게 싼 쌈을 든 채로.
“아.”
한참 도윤범의 손을 바라보다, 얼굴을 바라봤다. 그가 내민 상추쌈을 받아들려 하니 손이 휙 하고 빠져나가 버렸다.
“빨리요, 팔 빠지겠어요.”
“아니 내가 먹어도….”
도윤범은 엉덩이까지 들고 엉거주춤하게 일어서 남도하의 입 앞에 쌈을 들이밀었다. 막 괜찮다, 내가 먹겠다 말하려 벌어졌던 입안으로 쌈이 밀고 들어왔다. 얼결에 받아먹은 걸 뱉어 낼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이 저작 운동을 이어 갔다.
“맛있어요?”
얼마나 크게 싸서 준 것인지 양 볼을 가득 채운 고기와 채소 때문에 제대로 답도 못 하고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니까, 꽃등심 먹었으면 얼마나 더 맛있었겠어요.”
도윤범은 여전히 툴툴거리는 목소리를 한 채 남도하의 손에 들린 집게를 빼앗아 갔다.
“내가 구워.”
“안 돼요. 손에 기름이라도 튀면 어떻게 해요. 저쪽으로 떨어져 있어요.”
남도하는 도윤범의 말에 제 손을 한번 내려다봤다. 그리고 집게를 들고 휘적휘적 불판 위 고기를 저어 대는 도윤범의 손을 바라봤다. 한 번도 이런 걸 해 본 적 없는 양 행동이 어설픈 것은 둘째 치고, 뽀얀 저 손에 기름이 튀는 게 더 문제 아닐까 싶었다. 제 손이야 하도 험한 일을 많이 해서 절대 곱다 할 수 있는 쪽도 아니었다.
“형은 얼굴로 먹고 살아서 손 좀 망가져도 괜찮아.”
그래서 그의 손에 들린 집게를 도로 빼앗아왔다. 남도하 제가 생각해도 좀… 뻔뻔한 핑계를 갖다 붙이며. 그 선택이 옳았다. 잠깐 그에게 집게를 맡긴 것뿐인데 하마터면 삼겹살이 숯덩이가 될 뻔했다.
“그래도….”
매니저가 이렇게 멀쩡하게 있는데 배우가 직접 고기를 굽고 있으면 어떻게 하냐, 나중에 촬영할 때 손 클로즈업이라도 되면 어쩌냐. 앞에서 주저리주저리 떠들어 대는 목소리가 우습기만 했다. 하지만 도윤범은 남도하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다른 선택을 했다.
“여기요.”
“괜찮다니까….”
“…이것도 안 먹으면 진짜 저…!”
쌈 싸기 말이다. 남도하가 건네주는 고기를 족족 싸서 다시 내밀었다. 거절의 뜻을 내비치자 조그만 놈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바라봤다. 물론, 전혀 위협이 되지는 못한다. 남도하는 흘러나오려는 웃음 대신 그가 내미는 쌈을 받아먹었다. 그러다가 불판 위에 올려놓은 마늘 조각이 타닥! 하고 튀어 오르는 순간, 남도하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아, 맞다!”
“왜요…?”
“이 옷, 반납해야 하는 거 아냐…?”
그제야 떠올랐다. 지금 제가 걸친 옷이 협찬이라는 걸. 멀쩡한 꼴로 돌려보내야 하는 옷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 고기 냄새까지 배게 만들었다.
“아… 깜짝이야. 괜찮아요, 이 정도는.”
“그래…?”
양우준이 아이돌 그룹을 할 때였던가. 회사 복도에서 그의 스타일리스트가 눈물까지 찍어 내며 울던 모습이 떠올랐다. 협찬받은 옷이 엉망이 돼서 다음부터는 그 샵에서 옷을 못 빌리게 됐다고.
“어디 찢어진 것도 아닌데요, 뭘. 옷 빌려주면서 그 정도 생각도 안 했겠어요? 걱정 안 해도 돼요.”
찝찝함이 남아 있던 남도하를 보며 도윤범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새로운 쌈을 싸 내밀면서.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 그의 태도를 보자니 괜한 호들갑을 떤 것도 같았다.
“아 맞다! 우리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요.”
남도하의 입이 채 다 벌어지기도 전에 쌈을 밀어 넣은 도윤범은 급하게 손을 닦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왜? 무슨 일 있어?”
“당연히 있죠!”
그러곤 그대로 몸을 일으켜 남도하의 옆으로 자릴 옮겼다. 도윤범이 내민 휴대폰 화면엔 초록색 포털 사이트 앱이 켜져 있었다.
사…ㄹ…인자의…밤.
도윤범이 한 자 한 자 누르는 글씨가 완성되고야 그가 왜 이리 호들갑을 떨었는지 알아챘다.
“그게 벌써 올라오나?”
“아마 대본 리딩 끝날 때 맞춰서 기사 냈을걸요?”
그의 예상이 맞았다. 살인자의 밤이라는 키워드만으로 오늘 있었던 대본 리딩 현장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중 제일 상단의 기사가….
[‘살인자의 밤’ 서주언의 다정함에 심쿵!]
도윤범의 손가락이 안 그래도 눈길을 끄는 기사 제목을 눌렀다. 내용은 흔하디흔한 홍보 기사였지만, 함께 있는 사진이 영 이상했다.
“…왜 이런 걸 기사로….”
서주언의 손에 들린 조그만 사탕이 남도하의 입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이었다. 연속 촬영을 한 것인지, 남도하와 서주언의 눈빛이 맞닿는 순간부터, 그의 손에 들린 사탕이 남도하의 입으로 들어가고, 남도하가 짧게 당황하며 귓속말을 주고받는다. 그러곤 두 사람의 시선이 섞이며 웃는 사진으로 마무리되었다.
“뭐, 뭐 저런 사진을 쓰냐….”
연이어 누른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월드 스타급 달콤함, ‘서주언’ 하나로 시작부터 화기애애한 리딩 현장 등. 온통 서주언의 행동을 찬양하는 기사 일색이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실린 사진 역시 처음과 다르지 않았다. 약속이라도 한 듯 살인자의 밤 리딩 현장 기사는 모두가 서주언과 남도하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출연 배우들과 연출진이 다 같이 자세를 잡고 찍은 단체 사진은 일부일 뿐이었고, 큰 관심도 받지 못했다.
“…그래도 기사 많이 났네. 윤범이 덕분에 나도 잘 나왔다, 그치?”
“네, 뭐 그렇네요.”
수많은 사진에 남도하가 있긴 했지만, 기사 어디에도 그의 이름은 제대로 언급되지 않았다. 기자들의 관심은 오롯이 서주언에게 쏠려 있었다. 그나마 기사 하단의 댓글에 서주언의 상대가 누군지 묻는 글이 가물에 콩 나듯 달려 있을 뿐이었다. 뭐… 이것만으로도 조금 이상한 기분이긴 했다. 그동안 이렇게 기사에 실린 일 자체가 없다시피 했으니까.
“가요, 그만.”
“벌써? 아직 술도 안 시켰는데.”
“…다음에요. 저 운전도 해야 하니까 다음에 마셔요, 우리.”
아직 읽지 못한 기사가 많은데. 조금 더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뭔가 모르게 피곤해 보이는 도윤범을 보며 남도하는 자리를 정리했다. 그렇게 축하 파티를 하자고 하더니 축배를 들기도 전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니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 뭐 오늘만 날인 건 아니니까. 더군다나 언제부터 저런 거 하나하나 축하했다고.
“일찍 들어가서 쉬어요. 오늘 수고했어요, 형.”
“…어. 너도 조심해서 가.”
남도하는 집 앞에서 내리며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뭐라 설명하긴 어렵지만, 도윤범의 태도가 조금 신경 쓰였다. 평소처럼 대화를 나누며 집까지 왔음에도 그랬다. 그래서 그런지 도윤범이 탄 차가 골목 끝을 빠져나갈 때까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아…!”
찝찝함을 뒤로하고 집에 들어와 옷을 갈아입다가 깨달았다. 협찬받은 옷을 여태 돌려주지 않았다는 걸 말이다. 내일 돌려줄 생각으로 옷걸이에 걸어 섬유 탈취제를 뿌려 두었다. 아무리 괜찮다고는 하지만, 고기 냄새가 밴 걸 그대로 갖다주기도 민망했다. 더군다나 넘보기도 어려운 고가의 브랜드에서 무명 배우에 가까운 제게 빌려준 것인데.
씻고 잠자리에 누워서도 남도하의 하루는 끝나지 않았다. 마치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가슴께가 작게 두근거려왔다. 침대에서 뒤척이며 휴대폰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내가 이렇게 생겼었나, 서주언을 보며 저리 웃었나. 사진만 봐서는 상당히 친해 보이네. 역시 톱스타는 상황 대처가 좋구나.
당시 서주언의 행동에 화딱지가 났었는데, 막상 이렇게 기사가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자 그의 행동이 또 밉지 않게 보였다. 뭐… 제대로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다음에 만나면 정말 밥이라도 한번 사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더는 버티지 못할 정도로 졸음이 눈꺼풀을 끌어당기고서야 남도하의 하루가 마무리됐다.
그리고 남도하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악몽이 기다리고 있었다.
* * *
「Foltone」
셔츠 한 장을 만들 때도 모든 공정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진다는 명품 브랜드다. 그것도 전부 이탈리아 현지에서. 그러니 가격이 만만치 않은 것은 둘째 치고, 방송가 따위에 협찬을 하지도 않는단다. 그런 브랜드에서 남도하에게 협찬을 했다. 셔츠와 바지, 슈즈까지 풀 세트로. 협찬을 뚫은 도윤범의 말에 의하면 그렇다.
“이, 이게….”
그랬던 옷이, 걸레짝처럼 찢어져 온 거실에 퍼져 있었다. 자기 전 냄새를 빼려 섬유 탈취제를 뿌려 옷걸이에 걸어 두었던 그 옷 말이다. 무엇으로 찢은 것인지는 몰라도, 미리 옷을 보지 못했더라면 거실을 가득 채운 천 쪼가리가 옷이라는 것도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난도질이 나 있었다.
아래턱에 힘을 가득 주고 손으로 바닥을 쓸며 옷 쪼가리를 주워 모았다. 그러다 순간 어떤 모습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핏빛으로 물든 흰색 토끼털 가면을 쓴 남자. 후드 점퍼를 걸치고, 제 목에 칼을 들이밀었던 괴한. 어느 틈에 들어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내가 이리 해 놓았을 거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손에 가득 담긴 옷 쪼가리를 힘껏 움켜쥐었다.
“저기… 윤범아.”
“네?”
차를 타고 회사로 향하던 중, 남도하가 용기를 냈다. 그가 빌려 왔던 옷에 대해 말하려 입을 벌리긴 했는데, 발밑에 내려놓은 쇼핑백을 보니 눈앞이 캄캄했다.
“그… 있잖아….”
“아, 형 잠깐만 계세요. 커피랑 빵 좀 사 올게요.”
남도하가 말할 타이밍을 보며 시간을 끄는 사이, 차는 어느새 회사 앞에 도착해 버렸다. 갓길에 차를 댄 도윤범은 항상 들르는 카페로 달려 들어갔다.
“하아….”
갑갑한 숨을 한번 내쉰 남도하는 생각했다. 그래. 이왕 회사까지 온 거, 제대로 얼굴 보고 이야기하자. 생각해 보니 운전하는 도윤범에게 망가진 옷 이야기를 건네는 것도 치사하다. 어쨌든 의상을 협찬받아 온 도윤범이 곤란할 상황이 되었으니 제대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안녕… 하세요….”
커피를 사 들고 도윤범과 대기실 겸 휴게실로 쓰는 방으로 향하다 복도를 오가는 이원호를 마주쳤다. 인사를 건네려다 보니 이원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넌 씨발, 어디서 그딴 옷을 빌려 와!”
방문이 닫혀 있는데도 안쪽에서 양우준의 고함이 벽을 뚫고 그대로 들려왔다. 단 한마디 문장으로 그를 상대하고 있는 게 누구일지 알아챌 수 있었다.
“쟤 또 왜 저래요?”
남도하의 물음에 이원호는 두 손으로 제 머리털을 쥐어뜯으며 입을 열었다.
“남도하, 너. 너 때문에….”
“…네…?”
“너는 폴톤 입고 대본 리딩 갔는데, 자기는 왜….”
이원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 사이, 벽 너머에서 “한성이 웬 말이냐고!”라는 양우준의 고함이 들려왔다.
“쟤 거기 모델이잖아요.”
“그러니까.”
“그래서 입은 거 아니에요…?”
“그래. 그러니까 말이야.”
양우준은 국내 유명 의류 브랜드를 몇 개나 거느린 회사의 브랜드 이미지 모델을 맡고 있었다. 특정 상품이나 제품군이 아닌 그 회사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모델이라고 한동안 꽤나 으스대고 다녔던 그였다.
“근데 저 옷이 문제가 아니야.”
이원호도 질렸다는 표정으로 남도하가 매일 짱박혀 있는 휴게실을 향해 먼저 걸음을 옮겼다. 남도하와 도윤범도 그의 신세 한탄을 들으며 따라 들어갔다.
“또 뭐가 문젠데요?”
“어제 대본 리딩부터 문제였지.”
“아, 맞다. 형, 쟤가 왜 살인자의 밤에 들어가요?”
남도하도 생각난 김에 궁금한 걸 물었다. 틀림없이 출연진 명단에 양우준은 없었다. 그가 맡을 만한 배역도 없었다.
“왜겠냐. 또 생떼 쓴 거지. 이사님이랑 팀장님이 저거 집어넣는다고 아주 난리를 피웠다. 배역도 거의 단역에 가까운 조연인데도 꼭 해야겠다고 아주 지랄을… 야, 커피 좀 줘 봐.”
이원호는 악몽을 떨쳐 내듯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몸을 떨었다.
“이건 우리 형 건데요.”
매니저도 제 배우를 닮아 가는지 이원호는 아랫사람을 대하듯 도윤범을 향해 커피를 요구했지만, 이 어린 놈은 재빠르게 빨대를 남도하의 입에 물려 버렸다. 남도하도 얼떨결에 그가 물려 주는 빨대로 커피를 주욱 당겨 마셨다.
“하나 더 있잖아.”
“이건 제 거요.”
이원호의 내민 손이 부끄럽게 도윤범은 뺨이 쏙 들어갈 정도로 힘주어 빨대를 빨았다. 두 사람이 제 앞에서 나란히 아이스커피를 먹고 있는 꼴을 보자니 이원호는 작게 짜증이 솟았다.
“하아… 아주 환장의 짝꿍이네.”
“환상이요, 환장이 아니라.”
환장할 노릇이다. 저 인턴 매니저가 한마디를 안 지고 달려든다.
“아니, 형 그래서 그 역할을 양우준이 한다고요?”
뭔가 미묘한 신경전 같은 상황에 남도하가 껴들었다. 말 전하기를 좋아하는 이원호라 작은 관심만 가져 줘도 금세 제 입을 놀리기 바빠질 거다.
“그래, 무슨 배역이든 상관없으니까 무조건 그 드라마 해야겠다더라. 그거 한다고 다른 드라마 주연도 걷어찼어, 미친 새끼가.”
“…아무리 대작이라고 해도….”
“제대로 미친 거지, 저 새끼도.”
남도하도 동의했다. 아무리 기대작이라고 하더라도 요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양우준이 맡기엔 지나칠 정도로 작은 배역이었다. 그의 이름을 보고 비중을 조금 늘려 주겠다는 말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 화에 한 번 얼굴이나 비출까 싶은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진짜 문제는, 이거.”
이원호는 휴대폰에 사진 한 장을 띄워 남도하에게 내밀었다.
“이게 왜요….”
익숙한 것이었다. 지난밤 남도하를 잠들지 못하게 하던 그 사진이었다. 서주언이 남도하의 입에 사탕을 밀어 넣는 사진. 하루가 지난 오늘까지도 포털 메인엔 저 사진이 걸려 있을 정도였다.
“왜겠냐. 왜 지가 아니라 네가 메인에 걸렸냐는 거지.”
“하.”
거기까지 듣다가, 남도하는 웃음이 터져 버렸다. 진짜 우습기도 했고 허탈하기도 했다. 정확히는 남도하의 기사가 아니라 서주언의 기사다. 그의 다정함을 찬양하는 기사. 사탕도, 함께 나눠 보는 대본도 모두 남도하의 것이었지만, 그 행동의 주체가 서주언이었기에 모두가 그의 다정함을 위한 배경이 되었다. 남도하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의 다정함을 꾸며 주는 소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얌마, 너 웃을 일이 아니야. 지금 우준이 제대로 빡 돌아서 아무나 잡고 시비 털고 있어.”
그러니 제일 위험한 상대인 남도하에게 조심하라는 말이었다.
“여기 양우준 기사도 있는데요.”
한 손에 커피를 쥔 도윤범이 휴대폰 화면을 들이밀었다.
“…큭….”
그리고, 그 사진 하나 때문에 이원호와 남도하의 입에서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100미터 밖에서도 눈에 띄는 미모, ‘양우준’]
비아냥이었다. 주르륵 앉은 배우진 사이에 혼자 허옇게 메이크업이 떠 얼굴이 회색빛에 가깝게 보이는 양우준이었다. 실제로 볼 때는 저렇게까지 못 봐줄 정도는 아니었는데, 플래시가 터진 탓인지 양우준 홀로 과하게 메이크업을 한 것이 눈에 띄었다. 얼굴과 목의 경계가 뚜렷한 것도 그렇고.
“너, 너! 그거 우준이 앞에서 꺼내면 난리 난다. 안 그래도 지 기사 제대로 안 났다고 있는 대로 짜증 내고 있는 중이니까.”
남도하는 그 사진을 보니 스타일리스트에게 역성을 내는 양우준의 마음이 조금 이해되는 것도 같았다. 자신도 도윤범이 호들갑을 떨며 준비를 시킬 때만 하더라도 유난을 심하게 떤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딱 적당한 선을 지켰다. 양우준처럼 과하지도, 그렇다고 초라하지도 않은 몰골로 어쩌면 영원히 지워지지 않은 기사의 한쪽 면을 장식하게 됐다. 그것도, 서주언의 옆에서.
“아무튼, 너희 둘 다 조심해. 지금 우준이가 벼르고 있으니까.”
양우준에게 전화가 들어오는지 이원호는 진동이 울리는 제 휴대폰을 들고 급하게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거봐요. 제 말 듣길 잘했죠?”
“…그러게.”
도윤범은 뿌듯하게 말하며 가방에서 샌드위치 봉투를 꺼내 들었다.
“얼른 먹어요. 저 형 있어서 일부러 안 꺼냈어요.”
남도하는 도윤범의 눈치에 감탄했다. 아마 조금 전 샌드위치를 꺼내 놓았으면, 틀림없이 반쪽은 이원호의 배 속으로 들어가 버렸을 것이다.
“너도 먹어.”
반쪽을 잘라 도윤범에게 주고 마주 앉아 있으려니 슬슬 불편한 생각이 남도하의 머릿속을 떠돌았다. 어서 말해야 하는데, 이제 말해야 하는데…. 샌드위치만 다 먹고 말할까. 아니다, 커피만 다 마시고 말하자.
틀림없이 그의 얼굴을 보며 협찬받아 온 옷에 대한 소식을 전하려 했지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결국 손에 들린 샌드위치가 모두 사라지고, 커피마저 테이크아웃 잔이 텅 비고 나서야 남도하가 입을 열었다.
“저기… 윤범아.”
“네?”
“그, 어제 협찬받았던 옷 있잖아.”
“아… 그거. 깜빡했네요.”
잊고 있던 것인지 동공이 커다랗게 변하는 도윤범을 보며 남도하는 제 옆에 고이 두었던 쇼핑백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챙겨 왔어요?”
“그게….”
쇼핑백을 건네받는 도윤범을 보고 남도하는 긴 숨을 한 번 내뱉었다.
“이거… 뭐예요?”
“미안.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는데, 그냥 변상하는 쪽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 대체 어떻게 해야 옷이 이렇게….”
남도하는 고민했다. 도윤범에게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할지. 최근 등장한 토끼 가면 괴한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아야 할까, 말까. 자칭 ‘팬’이라던 그 남자 말이다. 아침에 일어나 거실이 난장판이 된 것을 보고 다른 부분을 확인해 봤지만, 옷 이외에 망가진 것이나 없어진 물건은 없었다. 원래 귀중품이라고 부를 만한 것도 없기도 했고.
“무슨 일인데요.”
“…별일 아니야. 그냥 내가 변상하는 거로 하자. 그쪽에는 잘 이야기하고… 아니다, 내가 가서 말하는 게 낫겠다.”
“아니, 형. 옷 말고 형이요. 괜찮아요…?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니에요?”
아찔하긴 했다. 자신이 잠든 사이 누군가 집에 다녀갔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운이 나빴다면 옷이 아니라 제 몸이 저리 찢겨 나갔을 수도 있는 일이다.
“…아냐. 그런 거.”
하지만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답을 내렸다. 만약 이 일을 벌인 게 정말 그 토끼 가면이라면, 적어도 생명을 노리는 쪽의 호러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는 앞선 두 번의 만남에서도 무력한 남도하를 해치지 않았으니까.
“가자. 형이 직접 가서 얘기할게.”
“아니… 괜찮아요. 옷은 신경 쓰지 마세요.”
물론, 상대가 그 ‘팬’이든 아니든 상당히 찝찝한 상황인 것은 맞지만, 이상하게 그와의 만남에 대해 털어놓기가 조심스러웠다. 잠을 자던 중 들어와 포옹을 해 줬던 것도 그렇고, 배역을 따기 위해 강태운과 달갑지 않은 쪽으로 만났던 일도 그랬다. 특히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울상을 짓고 있는 눈앞의 병아리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배역 맡으려고 강태운이랑 섹스할 뻔한 순간에 구해 준 괴한이 있는데….’
절대, 말할 수 없는 이야기다. 차라리 제 실수로 옷이 망가진 거로 하고 싶다. 어쩌면 그가 아닐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조금 더 아찔하긴 했다.
“정말 저 혼자 가도 돼요.”
“아냐. 그래도 나 보고 빌려준 옷인데, 내가 가서 사과하는 게 맞아.”
남도하가 고집을 부렸다. 협찬해 준 매장에 찾아가 홀로 상황을 설명하고 처리하겠다는 도윤범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제 실수도 아닌 일로 머리를 숙이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어린놈이 혹여라도 험한 일을 당하지는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약간의 무력까지 동원해서 도윤범을 데리고 매장에 직접 왔다.
“하아… 진짜….”
그 고집에 도윤범이 투정을 부렸다. 자신을 그렇게 못 믿는 거냐, 무슨 연예인이 이런 일로 직접 찾아가 사과를 하냐. 등쌀에 밀려 운전해 오는 내내 앞자리에 앉은 도윤범의 입이 쉬지 않고 불만을 토로했다. 문을 열고 매장으로 들어서면서도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안 그래도 어제 기사 잘… 어머, 직접 오셨어요?”
매장으로 들어서자마자 도윤범을 보며 반갑게 다가오던 직원은 남도하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협찬해 주신 옷 때문에요.”
“…협찬한 옷… 이요?”
“어제 빌려주신 옷이….”
“빌려줘요…?”
직원은, 말을 꺼내든 남도하와 멀뚱히 서 있는 도윤범을 번갈아 바라봤다. 남도하는 그 시선에서 무언가 이야기가 엇나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해명을 요구하는 두 쌍의 시선이 도윤범을 향했다.
그는 뒷머리를 긁적이곤, 입술을 한번 짓씹었다. 시선은 정처 없이 흔들린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윤범아.”
남도하의 재촉이 나오고야 도윤범이 입을 열었다.
“…하아…. 형 진짜 잠깐만 나가 계시면 안 돼요?”
어렵게 열렸던 입은, 애원을 토해 냈다.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 같은 당혹스러움을 담은 얼굴로. 하지만 이번만큼은 남도하도 그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 지금 분위기로 봤을 때, 꼭 알아야 하는 비밀이 있는 거 같으니까.
“…실은 협찬은 협찬인데요….”
한참 만에 도윤범의 입에서 진실이 쏟아졌다. 결론은….
“샀다는 거네.”
“아뇨! 그냥 산 게 아니라 80% 할인받은 건데요….”
“그러니까, 20% 내고 샀다는 거잖아.”
“…네에….”
남도하는 기가 막혔다.
“아! 혀, 협찬 맞아요…. 저희가 원래 연예인 할인 그런 거 일절 없는데, 처음으로 해 드린 거예요.”
싸늘해져 가는 그들의 대화를 듣던 직원이 말을 얹었다. 눈치가 좋은 건지, 그녀는 도윤범의 편을 들어줬다. 하지만 그 말이 확인 사살이라는 것은 모르는 것 같다.
“하아….”
정수리가 보일 정도로 대가리를 처박고 있는 도윤범을 보자니 남도하는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어머, 안녕하세요.”
이대로 나가야 하나 싶을 때 또 다른 사람이 남도하에게 다가오며 인사를 건넸다.
“…예. 안녕하세요.”
“남도하 씨 맞죠? 서주언 씨랑 같이 드라마 들어가시는….”
“아, 예.”
점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녀는 남도하와 도윤범을 안쪽으로 이끌었다. 기분 같아서는 당장 도윤범을 데리고 매장을 나서고 싶었지만, 과하게 친한 척을 하는 점장의 호의를 무시할 수 없었다.
“안 그래도 매니저분한테 연락하려고 했는데 잘됐네요.”
“네…?”
“저희가 남도하 씨 의상 협찬하고 싶어서요.”
소파 테이블에 자리하자마자 꺼내든 이야기에 남도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연락하려 했다는 말까지 들었을 때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뻔했다. 짧은 순간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연이어 나온 이야기가 더 당혹스러웠다.
“저…요? 왜요?”
“그런 드라마 촬영하시는데, 저희도 좋은 기회이지 않을까요?”
남도하는 점장의 애매한 답변에 숨겨진 뜻을 알아챘다. 보나 마나 서주언 때문이다. 그의 옆에 달라붙어 있는 사진이 인터넷을 도배하기도 했고, 앞으로 드라마가 시작하면 서주언의 옆에 등장할 기회가 더 많아질 테니까. 꿩 대신 닭, 서주언 대신 남도하. 뭐… 그럴 급이 아니라는 건 스스로 제일 잘 알고 있지만, 마땅한 이유는 저것뿐이다.
“그래서 어제 결제하신 것도 돌려드릴게요.”
“아니요, 이건….”
남도하는 난색을 표했다. 익숙지 않은 친절이 당혹스러웠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잠깐의 난색을 무색하게 만드는 도윤범이었다.
“윤범아!”
도윤범은 남도하의 작은 다그침이 들리지도 않는지, 점장이 내민 봉투를 그대로 제 주머니에 찔러 넣곤 모른 체 시치미를 떼고 앉았다. 예의 없는 행동에 한 소리 할까 하다가 나중으로 미뤘다.
“죄송합니다….”
“죄송하긴요, 정말 돌려드리려고 했어요. 그리고 앞으로 의상은 저희가 제공해 드릴 테니까 담당자 통해서 미리 필요한 의상만 말씀해 주세요.”
점장도 도윤범의 태도에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조그만 놈이 뻔뻔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분위기도 조금 가벼워졌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남도하였지만, 이어지는 점장의 설명에 정말 자신에게 협찬이 붙었다는 걸 받아들이게 됐다.
“노출 빈도나 의상 파손도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대신 드라마 촬영 외엔 꼭 저희 옷 입어 주세요.”
아무래도 드라마 협찬 의상이 있어 노출이 많지 않을 거라는 점을 말해 보았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촬영 이외에 노출될 일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다. 하룻밤 사이에 엉망이 되어 버린 옷이 담긴 쇼핑백을 꺼내 놓을 기회조차 없었다.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매장을 빠져나오는 그들에게 두 손 무겁게 옷까지 챙겨 주었으니 거짓은 아닐 것 같다. 심지어 이번엔 반납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까지 붙었다. 선물… 이라며.
“도윤범.”
물론 남도하는 그 선물도 거절하려 하였지만, 도윤범이 훌쩍 집어 들곤 먼저 매장을 빠져나가 버렸다. 남도하는 한참이나 쌓였던 못마땅함을 차 안에서 터트렸다.
“저 앞에 차 세워.”
“…네?”
“세우라고.”
낮게 읊조리는 남도하의 목소리 때문인지 차가 휘청였다. 핸들을 잡은 도윤범의 손이 흔들린 탓이다. 낯선 목소리에 평소처럼 대꾸하지 못한 도윤범이 급히 갓길에 차를 댔다.
“내려.”
“혀, 형….”
“안 내려?”
차가 멈춰 서자마자 내린 남도하가 운전석 문을 열고 도윤범을 끌어내렸다. 안전벨트까지 손수 풀어서. 그러곤 자신이 운전석에 앉았다. 갑작스러운 상황 탓인지 도윤범은 입도 열지 못한 채 남도하가 끌어내린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뭐 해, 안 타?”
“타, 타요!”
사실, 남도하는 조금 전 도윤범을 그냥 길가에 버리고 가려고 했다. 뿔난 망아지처럼 제멋대로 구는 매니저 따위 필요하지 않으니까.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런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아 참았을 뿐, 거짓말을 한 도윤범에 대한 화가 풀어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그 화가 커졌다.
하지만 그 모진 생각은, 차에서 끌려 내려온 도윤범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무너져 버렸다.
오래 키운 강아지를 휴가지에 버리면, 그 강아지는 주인을 보며 저런 표정을 지을까… 라는 생각이 스쳤다. 길가에 굳은 듯 서 있는 도윤범은 마치 자신이 버려졌다는 걸 깨달은 커다란 강아지 같았다. 자신의 실수를 알고 있어서, 변명도 붙이지 못하는 강아지.
날씨 탓도 있었다. 하늘이 꾸물꾸물한 게 꼭 당장에라도 비를 쏟아낼 것만 같았다. 빗속에 홀로 남겨질 놈을 떠올리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끝까지 모질지 못했다.
“벨트.”
“네, 네….”
보조석에 앉은 도윤범이 벨트를 맨 후에야 차를 출발시켰다. 터져 나오려는 화를 조금은 눌러낼 필요가 있었다. 제멋대로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은 감정도 진정시켜야 했다. 큰소리가 날지도 모르니 인적이 많지 않은 곳으로 향해야 한다.
“형….”
“뭐.”
핸들을 손끝으로 툭툭 두드리며 신호를 기다리던 남도하가 모난 목소리로 답했다. 뭘 잘했다고 입을 여냐는 타박도 조금 담았다.
“…신호 바뀌었는데요….”
정신을 어디에 둔 것인지 초록 불로 바뀐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걸 알려 주려던 도윤범에게 괜한 짜증을 부렸구나 싶어 약간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남도하의 날 선 태도 때문에 차 안은 숨 막히는 침묵이 쌓였다. 그나마 다른 자동차보다 유달리 시끄럽게 돌아가는 붕붕이의 엔진 소리가 유일한 소음이었다.
“내려.”
남도하의 목소리에도 도윤범은 꼼짝을 안 했다.
“하아….”
이 밤톨만 한 자식이 또 저를 무시하나 싶어 남도하의 입에서 답답한 숨이 튀어나왔다. 아니다, 과잉 감정이다. 며칠 지켜본 도윤범의 성격을 봤을 때, 그가 지금 반항하거나 무시하는 건 아니라는 답을 내렸다.
“나도 내릴 거니까, 내리라고.”
정답이었다. 남도하 저도 따라 내릴 거라는 말을 한 후에야 도윤범이 차에서 내렸다. 낯선 곳도 아니고 매일같이 출근 도장을 찍는 회사 건너편 카페인데 뭐 저리 겁을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카페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고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을 보며 남도하는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별다른 말 없이 앞장서 카페 안으로 들어가자 도윤범이 그 뒤를 따랐다. 커피를 시키고 제일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점심시간도 지나고, 퇴근 시간도 아니다 보니 카페 안은 불편한 이야기를 꺼내도 좋을 정도로 조용했다.
“할 말 없어?”
“그게….”
매장에서 회사까지 돌아오며 남도하도 수많은 생각을 했다. 당장 내쫓아 버릴까, 새로운 매니저를 구할 때까지만 쓸까.
“잘못했어요… 형.”
“고개.”
“…네?”
“고개 들으라고. 너 지금 테이블한테 사과해?”
그런 생각을 했다. 그저 시기의 문제였을 뿐, 내쫓아야 한다는 결론은 같았다. 손에 들린 법인 카드로 언젠가 한 번 사고를 치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크게, 빨리 터트릴 줄은 몰랐으니까. 하지만 눈앞에서 고개를 테이블에 처박을 것처럼 숙이고, 어깨를 움츠린 놈을 보자니 그게 또 못마땅했다. 아직 뭐라 화도 내지 않았는데 잔뜩 주눅 든 모습이 안쓰럽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해 봐, 해명.”
도윤범은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잘못했어요.”란 말 외엔 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아….”
남도하는 앞의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속에서 천불이 나는데,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해 지금 이 화가 도윤범 때문인지도 확실치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도윤범의 행동 이유가 스스로 납득되고 있었다. 스타일리스트가 엉망인 옷을 가지고 온 일이 시작이다.
“다른 옷들도 다 산 거야?”
“아, 아뇨! 그건 진짜 협찬이에요….”
처음 맡은 연예인은 상상 이상으로 무능했다. 제대로 된 협찬도 받지 못할 정도로. 그래서 스스로 발 벗고 뛰었다. 스타일리스트도 아니면서 괘념치 않았다. 인맥이든 인터넷이든 무언가를 통해 정보를 모으고, 발품을 팔았다.
어떤 곳에선 흔쾌히 제공했고, 어떤 곳에선 말을 꺼내자마자 내쫓았다. 그러다, 정말 놓치고 싶지 않은 브랜드를 찾았다. 시선을 끌기도 좋고 의미도 남다르다. 예산이 빠듯하지만, 식비를 조금 아끼면 어떻게든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무려 80%나 할인해 주는데.
“잘못… 했어요….”
남도하는, 마치 도윤범이 저리 말하는 것 같았다.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잘못했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지만, 그 역시 남도하 자신을 위한 배려라고 생각했다. 저런 이야기를 꺼내려면, 초라한 남도하의 현실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테니까. 그걸 언급하지 않고는 설명이 불가할 테니까.
“내놔.”
“네…?”
“카드 내놓으라고.”
그래서, 더는 제 감정을 배설하지 않기로 했다. 착각일지 모르겠지만, 그는 다시는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 저 잘려요…?”
오해한 거 같다. 그저 카드만 남도하가 관리할 생각이었는데, 카드를 빼앗고 쫓아내려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그럼, 그대로 넘어갈 줄 알았어?”
그리고 당장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얼굴이, 남도하의 이상한 부분을 건드렸다. 이미 그를 향한 화가 상당히 풀어졌음에도 괜한 심술을 부리고 싶게 만들었다. 저 얼굴이 말이다.
“저, 저 학자금 대출도 갚아야 되고… 이렇게 잘리면 이력서에도 한 줄 못 쓰는데요….”
만약 남도하 자신이었으면 어땠을까. 기본적으로 저런 과잉 충성 자체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도 틀림없이 자기변호를 했을 테다.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이라고. 상황이 그랬다고.
“얼른 내놔.”
“네….”
생각할수록 더 괜찮은 놈인 것도 같다. 아까는 그저 거짓말한 부분에 대해 화가 났었는데, 누가 그렇게까지 해서 자신을 챙겨 준 적이 있었나. 제 사욕을 위한 것도 아니고, 그의 거짓말도 전부 남도하 저를 위한 것 아니던가.
“넌 형한테 용돈 받아서 써, 앞으로.”
순간 도윤범의 얼굴이 멍해졌다. 남도하가 한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한 탓이다. 그리고 홀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의문을 스쳤다가, 점차 입꼬리가 치솟으려 하다가, 울상을 지었다가. 순차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얼굴을 보다가 기어이 남도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래,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쪽보단 저쪽이 훨씬 보기 좋다.
“형!”
“왜.”
홀로 무슨 다짐을 한 것인지 이제야 도윤범의 목소리에 다시 힘이 실렸다.
“다시는 의상 안 살게요.”
“…뭐?”
“옷… 산 거 때문에 화낸 거 아니에요…?”
그냥… 자를까 저걸. 뭔가 핵심을 잘 못 짚은 거 같은데….
* * *
탁
막 잠이 들락 말락 하던 시각, 방 밖에서 들려온 소리에 남도하는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수마에 빠져들려 하던 것도 잊고 정신이 말짱해졌다. 삽시간에 심장 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기까지도 수많은 갈등이 몰려왔다. 이 문을 열어도 될까, 실수일까 하는 갈등. 마음을 다잡고 문고리를 돌렸다. 한참 그렇게 문턱에 서 있다가 어둠이 내려앉은 거실 불을 켰다.
어둠에 익숙하던 눈을 몇 번 찡그려 봤지만, 제가 기억하던 거실 풍경과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다. 살림이라고 할 만한 것도, 가구라고 갖춘 것도 많지 않았기에 불변을 알아채기는 어렵지 않았다. 작은 변화도 없다는 걸 인식하고 나서야 가슴을 데우던 숨을 토해 냈다. 긴장을 풀고 움직여 소리의 출처를 찾아보니 욕실이었다. 선반에 올려져 있던 샴푸 통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허리를 숙여 샴푸 통을 들어 올리다가, 남도하는 하나의 생각이 스쳤다.
마지막으로 샴푸를 산 게 언제더라….
손에 든 샴푸는 꽤 묵직했다. 절반, 아니 3분의 2 정도는 채워져 있는 것 같다. 샴푸를 원래 자리로 돌려놓고, 빠르게 현관으로 향했다. 그사이에 심장은 또다시 커다란 소리의 울림을 토해 냈다. 다행히 현관 안전 고리는 채워져 있다.
베란다는… 하아…. 괴한의 침입 이후, 몇 번이나 집주인에게 이야기했다. 베란다 잠금 고리가 망가진 것인지 자꾸 흘러 내려와 고정되지 않는다고. 그런데도 여태 그걸 고쳐 주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4층이라 별 상관없어요. 3층도 맨날 열어 두고 사는데 뭘. 우리 동네 치안이 얼마나 좋은데 남자가 그런 걸 걱정해?’
집주인은 저런 소리를 늘어놓으며 이번 계약이 끝나면 월세를 올려 달라는 말만 덧붙였다. 남도하는 어차피 망가져 고정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베란다 잠금 고리를 다시 올려 걸었다. 창도 다시 한번 꽉 닫았다.
“하아….”
소파에 뒤통수를 기대고 천장을 바라보며 앉았다. 샴푸 통 하나 때문에 잠 기운이 싹 달아나버렸다. 망상일까. 비단 샴푸뿐만 아니라 생필품이 리필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 말이다. 지난번 옷이 찢어진 일이 있기 전에도 그런 생각을 스치듯 하긴 했지만, 그저 착각이려니 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그 일이 있고 난 뒤부터, 저런 사소한 것들이 점점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그보다 앞에 집에 침입했던 팬인지, 스토커인지, 괴한인지 모를 남자와는 느낌이 달랐다. 그를 만난 지 시간이 좀 지난 탓인지, 지금은 상대가 위협적이었다는 느낌마저 흐릿해졌다.
물론 아직 이 변화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어떤 날은 냉장고의 탄산수와 음료수의 개수를 세어 두기도 했는데, 나중에 확인해 봐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빨래도 그랬고, 옷을 넣어 두는 서랍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미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한참이나 고민하던 남도하는 덫을 놓기로 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조금 우습지만, 옳든 틀리든 확실히 하고 싶었다.
* * *
“형, 있잖아요. 옛날에 형 아이돌 로드매니저도 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야, 말도 마라.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소름 끼치는 거 같으니까.”
“왜요?”
도윤범이 의상 협찬을 해 주기로 한 샵에 간 사이, 남도하는 이원호에게 궁금했던 걸 물었다. 그사이 몇 번이나 물어봐야지 하다가 망설였던 질문이었다.
“애들도 극성이지, 팬도 극성이지. 아주 그 사이에 껴서 갈려 나갈 뻔했어.”
이원호는 그때의 악몽을 떠올리는 것처럼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자신의 영웅담을 쏟아 놓았다. 사실 별로 관심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남도하 저도 묻고 싶은 말이 있었기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럼 스토커… 같은 팬들도 있어요…?”
“사생? 많지, 많아도 너무 많지. 지들은 팬이라는데, 내가 보기엔 아니야.”
“어떤데요?”
“왜 예전에 우준이도 있었잖아, 스토커. 걔 집에 몰래 들어가서 사진 찍어 메신저로 보내고, 옷 훔쳐 가고. 저녁에 집에 들어가는데 아파트 앞에 숨어 있다가 가방 소매치기하고.”
들어 보니 기억나는 것도 같다. 양우준이 배우로 그럭저럭 잘나가는 이유는, 예쁘장하게 생긴 얼굴 때문이다. 가수 활동을 할 땐 그게 더했다. 연약하고 귀여운 외모가 보호 욕구를 자극한다나. 실제 성격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 소리를 할 수 없지만, 어쨌든 대중적인 반응이 그러했다. 그러다 보니 팬도 상당히 많았고, 회사가 소란스러울 정도로 극성팬에게 당한 경우도 허다했다.
“그럼 형 혹시….”
밑밥은 충분히 깔았다. 남도하는 이제 제가 진짜 궁금했던 걸 묻기로 했다.
“집에 와서 뭘 사다 놓기도 할까요?”
“뭐, 선물? 그런 것도 많지.”
“아뇨…. 그… 샴푸라든가, 물… 이라든가 뭐, 세제나….”
처음 말을 꺼낼 때까지만 해도 나름 물어볼 만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제 입에서 하나하나 품목을 나열할 때마다 일그러지는 이원호의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괜한 걸 물은 것 같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도하야.”
“네…?”
“요즘도 가족들 때문에 생활 어렵냐…?”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요….”
기어이 남도하가 별로 꺼내고 싶지 않은 주제로 이야기가 튀어 버렸다. 그것도 어울리지 않게 걱정을 가득 담은 목소리까지 딸려 나왔다. 이원호가 남도하를 매몰차게 모른 체하지 않는 이유가 저것이었다. 남도하의 집안 형편.
“그런 애들은 없어, 인마. 생필품 살 돈도 없으면 나한테 얘길 해. 그 정도는 빌려줄 테니까.”
“아니, 정말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아, 형 저 내일부터 촬영이에요.”
“알아. 우준이도 같이 가잖아.”
남도하는 말을 틀었다. 그리고 그 얕은 의도에 이원호도 따라 주었다. 이원호도 우연히 남도하의 사정을 알게 됐을 뿐, 남도하는 제 개인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매우 꺼렸다. 이번에도 더는 언급하고 싶지 않다는 기색이 만연했기에 길게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역할이라 걱정이네요.”
“걱정은, 무슨. 카메라만 갖다 대면 눈알이 돌아가면서.”
“제가요…? 저 맨날 얼마나 긴장하는데요.”
“암튼, 너 이번에 정말 잘해야 돼. 서주언 옆에 착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말라고.”
서주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남도하는 또 하나 궁금한 게 떠올랐다.
“형, 근데 왜… 기사 사진이 다 바뀌었을까요?”
대본 리딩 당일과 다음 날까지. 인터넷은 온통 서주언이 남도하에게 사탕을 먹여 주는 사진으로 도배되다시피 했었다. 덕분에 아직 첫 촬영도 시작하지 않은 드라마에 대한 관심이 엄청나게 치솟았다. 하지만 그다음 날부터 기사에 삽입된 사진은 배우들이 모두 모여 찍은 단체 사진으로 바뀌었다. 물론 이미 SNS에 파다하게 퍼져 있는 사진이었지만, 적어도 언론사에서 제공하는 기사에는 더 이상 남도하에게 사탕을 먹여 주는 서주언의 사진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낸들 아냐. 우준이만 신났더라. 걔는 심보가 왜 그러나 모르겠다.”
남도하도 나름 아쉽기는 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어쨌든 얼굴을 알리게 된 것 역시 사실이니까. 그 사진을 보는 100명 중 한 명 정도는 남도하의 존재를 궁금해했으니까. 물론, 그마저 2일 천하로 끝나 버렸다.
“형! 의상 받아 왔어요.”
한참 양우준 욕을 들어 주고 있을 때, 도윤범이 두 손 가득 옷을 들고 돌아왔다. 남도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품에 담긴 옷을 받아 들었다.
“뭐가 이렇게 많아?”
“글쎄요…? 전 그냥 주는 대로 받아 온… 진짜예요… 형….”
남도하는 지난번 협찬 사태 이후, 뒤끝을 부리지 않았다. 하지만 도윤범 홀로 눈치를 보곤 했는데, 지금도 그렇다. 조금 의심스러운 시선을 던지자 억울함이 가득 담긴 눈으로 자신의 결백을 내비쳤다.
“도하야, 너 그거 뭐야?”
“협찬요. 우리 도하 형, 협찬.”
이원호는 산더미처럼 쌓인 옷을 보고 남도하에게 물었는데, 답을 한 건 도윤범이었다. 그것도 조금 전까지 울먹이던 목소리가 아닌, 꽤 뿌듯해하는 목소리로.
“폴톤….”
“처음이에요, 우리나라에서.”
생각해 보니 도윤범이 큰일을 하기는 했다. 그 과정에서 약간의 실수와 행운이 따르기는 했지만, 결론적으로 남도하 제게 인생 첫 협찬 물품을 안겼다. 그것도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물론 드라마에서는 입을 수 없으니 저걸 대체 어디에 내보여야 할지가 더 고민이었지만.
“미쳤네… 우준이한테는 절대 말하지 마라.”
두 사람의 입에서 절대 협찬에 대한 걸 양우준에게 알리지 않겠다는 답을 듣고서야 이원호가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당연히 양우준의 전화를 받고서.
“내놔.”
“뭘요…?”
“커피 사고 남은 잔돈이랑 영수증.”
남도하는 두 사람만 남았을 때야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꺼냈다.
“하아… 여, 영수증 깜빡했는데요….”
도윤범은 제 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한 천 원짜리와 동전을 꺼내 남도하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지난번 협찬 물품 사기건 이후, 남도하는 정말 도윤범에게 용돈을 줬다. 법인 카드도 돌려주지 않았고, 커피 값은 남도하 제 돈으로 해결하고 있었다.
“영수증 없어? 그럼 윤범이 월급에서 까야겠네.”
“혀, 형….”
농담이다. 커피 가격은 남도하의 머릿속에도 있어서 잔돈만 봐도 10원 한 푼 빼먹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럴 금액이 아니기도 하고. 더군다나 얼마 되지도 않는 인턴 월급에 손을 댈 생각도 없지만, 저리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면 이렇게 모난 말이 튀어 나가곤 했다.
“그러게, 누가 영수증 깜빡하래.”
도윤범이 사 온 커피를 한 모금 삼키며 마지막 장난을 뱉어 내자, 이 어린놈이 소파에 털썩 앉으며 다리를 꼬았다. 등받이에 팔을 걸치며, 표정도 뭔가 달라졌다.
“형이 자꾸 그러면 안 될 텐데요.”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느끼긴 했는데, 저리 앉아 있으니 마치 어떤 화보의 한 장면 같았다. 잘 빠진 몸매도 그랬고, 비율도 좋아서 아무 옷이나 걸쳐 놓아도 태가 예뻤다. 씨익 들려 올라가는 입꼬리까지 더해지자 남도하는 하마터면 휴대폰을 꺼내 들어 그 모습을 찍을 뻔했다.
“오늘 대본 연습은 혼자 벽 보고 하면 되겠다, 그쵸?”
“…….”
“저는 카페에 영수증 찾으러 가야 하니까요.”
이놈이 지금….
“…형 협박하는 거야?”
“그러니까… 영수증이랑 퉁쳐요. 그럼 대본 연습 같이해 줄게요.”
참, 이리도 안 무서운 협박이 있을까.
* * *
“피곤하죠.”
“…누구 때문일까.”
“그러게요. 뭐 그렇게 조심성이 없는지.”
뭔가 이야기가 또 틀어지고 있는 기분에 남도하는 차 뒷좌석에 앉아 입을 다물었다. 피곤한 이유는, 이번에도 그 헤어샵이다. 당장 내일부터 첫 촬영이라 대본을 들여다보기도 바쁜데 도윤범은 남도하를 미용실로 잡아끌었다. 샵에 간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예상했던 것처럼 네 시간 가까이 잡혀 있어야 했다.
“이럴 거면 염색은 뭐 하러 하냐고.”
“달라요, 형.”
같다. 적어도 남도하 눈엔 원래 까만 머리 색과 지금의 머리 색은 전혀 다르지 않다. 염색 컬러를 고르던 도윤범은, ‘배역에 맞춰 빛을 받으면 무정한 이미지가 느껴지는 색상.’이라고 설명했다. 헤어 스타일리스트도 당황스러운 눈빛을 던졌고, 듣는 남도하도 마찬가지였다. 견본 색상을 수십 개나 보여 주고야 염색이 시작될 수 있었다. 결론은 검은색인데, 짙게 톤다운 된 회색빛이 돌아 자연 갈색의 느낌이 없는 색이었다. 당연히 남도하의 눈엔 그 색이 그 색이었다.
“엄청 예뻐요.”
“예… 뭐?”
“아니, 머, 멋있어요….”
기나긴 염색이 끝나고 의자에서 일어서려 할 때, 도윤범의 손에 어깨가 잡혀 다시 자리에 앉아야 했다. ‘커트해야죠.’라는 말에 좌절했다. 하지만 이번엔 지난번과는 다르게 조금 짧다 싶게 잘랐다. 사실 남도하는 헤어스타일에 대해 그다지 고민하지 않았었는데, 막상 도윤범이 보여 주는 사진을 보고 납득했다. 그가 준비한 사진이 남도하가 살인자의 밤에서 맡은 악역에 훨씬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안… 이상해?”
그랬기에 엉덩이에 쥐가 날 것 같던 시간을 버티다 이제 집에 가는 길이다. 긴 시간 끝에 마주한 결과는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투자한 시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다만 전보다 길이가 짧아진 머리가 좀 어색해 손으로 계속 쓸어 대게 됐다.
“멋있다니까요.”
쟤는 저런 말을 뭐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뱉어 내는지 모르겠다. 줄줄이 이어지는 칭찬에 남도하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고 말았다. 칭찬에 이리 약한 타입이었던가. 그가 쏟아 내는 말이 이상하게 심장을 간질거렸다. 시선은 창밖에 두었지만, 청각은 도윤범의 노랫소리 같은 목소리에 집중했다. 연신 이어지는 칭찬 말이다.
“형?”
“…어, 어?”
정신을 놓고 있다가 들려오는 부름에야 의식이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혹시… 오늘 저랑 같이 있고 싶어요?”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뭐?”
“아까 도착했는데 안 내리길래요. 긴장돼서 그래요?”
뒤를 돌아보는 도윤범의 목소리엔 웃음기가 가득했다. 조그만 놈이 어른을 놀려 먹는다.
“긴장은 무슨…. 너도 조심해서 들어가. 아침에 일찍 와야 돼서 힘들겠다.”
“전 괜찮아요. 형, 옆에 있는 거 가지고 가세요.”
남도하는 옆자리에 있던 쇼핑백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그게 뭔지 물어봤어야 했는데, 차가 골목을 빠져나가고 나서야 손에 들린 쇼핑백에 대해 묻지 않은 게 떠올랐다. 집에 올라와 열어보니 도시락이 튀어나왔다. 함박스테이크로 보이는 것과 밥, 반찬이 정갈하게 담긴.
“언제 산 거야, 이건….”
저녁 식사보다도 우선 씻고 싶은 생각이 더 컸다. 별다른 걸 하지도 않았는데 미용실에 너무 오래 잡혀 있던 탓인지 뜨거운 물에 몸을 던지자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평소보다 조금 더 오래 몸을 씻고, 대본을 들고 거실 테이블 앞 바닥에 앉았다.
사실 도윤범 앞에서는 태연한 척했지만, 긴장 때문인지 별다른 식욕이 없었다. 하지만 막상 그가 준비한 도시락을 보니 허기가 졌다. 아까 미용실에서 염색하는 사이에 자리를 잠깐 비우더니 그사이에 사 둔 것 같았다.
“아… 맞다.”
입안에 들어온 함박스테이크가 꽤 부드럽다고 생각하다가 번쩍 떠오른 게 있었다. 오늘 도윤범에게 저녁 식사 비용을 따로 준 기억이 없다. 그렇다면 제 돈으로 이걸 샀다는 건데…. 조금 전까지 목구멍으로 잘만 넘어가던 식사가 약간 불편해졌다.
아무래도 법인 카드를 다시 돌려주어야겠다는 결심과 함께 휴대폰을 들었다. 아직 첫 월급도 받지 않은 놈이 사 준 걸 알면서도 모른 척 입을 닦을 수 없었다. 고맙다고, 잘 먹겠다고 메시지를 보내니 마치 대화 창을 띄워 놓았던 것처럼 빠른 회신이 돌아왔다. 이상한 동물이 하트를 날리는 이모티콘이다.
…아무래도 혼내야겠다. 운전 중에 휴대폰을 하다니.
내려놓은 휴대폰이 다시 진동하길래 도윤범에게 한 소리 하려 빠르게 집어 들었다. 자꾸 운전 중에 메시지 보내지 말라고.
[뭐 해?]
그런데 메신저에 떠오른 건 도윤범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저장조차 되어 있지 않은, 이름도 없이 점 하나만 찍혀 있는 프로필이었다. 대화를 나눴던 기록 역시 없는 사람이다.
[저녁 먹네.]
대화창을 켜 놓고 있던 잠깐 사이 다른 메시지가 하나 더 들어왔다. 그 메시지까지 확인하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숫자 1이 사라지는 거로 상대는 자신이 메시지를 확인한 걸 알아챈 것 같다.
휴대폰을 손에 든 채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그제야 집 안이 지나치게 적막하다는 걸 깨닫곤 TV를 켰다. 열려 있던 베란다 창의 커튼도 쳤다. 현관문까지 한 번 더 확인하고, 아침에 나가기 전 던져 놓은 덫을 확인했다.
빨래통은… 아니다. 냉장고도, 옷장도, 식료품과 세제도 모두가 한 치의 어긋남 없이 그대로였다. 남도하는 오늘 아침 집을 나가기 전, 집 구석구석을 사진으로 남겨 두었다. 자신의 기억력을 믿을 수가 없어서 그랬다. 하지만 모든 것이 아침과 같았다. 일부러 뒤섞어 놓은 빨랫감도, 삐딱하게 놓은 탄산수도. 작은 휴대폰 화면에 남아 있는 사진과 차이가 없었다.
“하아….”
인정했다. 어쩌면 과민반응인 것 같다고. 이원호가 말했던 것처럼, 생필품을 리필해 놓는 괴한은 없다. 헌 옷을 새 옷으로, 다 떨어져 가는 샴푸에 똑같은 제품을 채워 놓고, 탄산수 한 병을 몰래 가져다 놓는 스토커라니…. 망상이 짙었다. 하지만 여전히 찝찝한 게 남아 있다.
[내 메시지 씹으면 후회할 텐데.]
[남도하.]
[야.]
집 안을 확인하는 사이 줄기차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정체 모를 이 사람. 한참 그 메시지들을 바라보다가 물음표 하나를 찍어 보냈다. 누구세요, 제가 밥 먹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토끼 가면이세요? …이런저런 말을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다 고른 게 물음표였다. 자신에 대한 어떤 정보도 흘리고 싶지 않았다.
휴대폰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자니 숫자 1이 사라졌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회신… 아니, 전화가 왔다. 역시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지만, 어렵지 않게 메시지를 보낸 상대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피에 젖은 토끼 가면이 뇌리를 스치자 통화 버튼을 눌렀다. 겪어 본 성격대로라면, 전화를 받지 않았다가는 오늘 밤 그를 다시 만나야 할 수도 있을 것 같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여보세요…?”
- 너 진짜 혼날래? 어디서 물음표 하나만 딸랑 보내.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맥이 풀려 버렸다. 아니, 다른 의미로 조금 더 긴장이 몰려왔다.
“서주언… 씨…?”
- 서주언, 씨이? 너 저번부터 호칭이 이상하다?
“아니! 죄송해요.”
삐딱해진 서주언의 목소리에 사과를 하기는 했는데, 마땅한 호칭이 떠오르지 않았다. 서주언 씨를 서주언 씨라 부르지 그럼 뭐라 부른단 말인가. 데뷔도 남도하가 더 빨랐으니 선배님이라 부를 수도 없는 일이다.
- 형.
“네?”
- 형이라고 불러.
웃기는 남자다. 지난번에 양우준이 제게 형이라고 부르니 언제 봤다고 형이냐며 역정을 내던 사람이 서주언이다. 그런 친근한 호칭으로 부를 사이가 아니다. 얼굴을 본 것도, 대화를 한 것도 대본 리딩 현장이 처음이었으니까. 더군다나….
“제 번호는 어떻게 아셨어요?”
- 그래. 네 번호 알아내는 건 좀 어렵더라. 어떻게 된 게 너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
- 너 그렇게 사회생활 하면 안 돼.
어쩌다 보니 남도하의 좁은 인맥과 사회성 결여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요점은 이게 아닌데…. 대충 다른 누군가에게 물어 알아냈다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당연히 서주언에게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라고 말대꾸할 깡도 없었다. 끓어오르는 속을 숨긴 채 그저 기다란 숨만 한 번 토해 내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저 밥 먹는 건 어떻게 아셨는데요.”
남도하는 나름 진지했다. 생각할수록 찝찝한 부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서주언에게서는 찢어지는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휴대폰을 가깝게 댄 귀가 따가울 정도로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 글쎄.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
“…아뇨. 안 궁금해졌어요.”
- 내일 촬영 끝나고 같이 밥 먹자. 그때 알려 줄게.
“아니요. 저는 내일…”
- 내일 봐.
무어라 거절의 말을 붙이려 했지만, 그는 제대로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제멋대로 식사 약속까지 잡아 버리고 말이다. 남도하는 들고 있던 휴대폰을 소파에 턱 내려놓았다. 마음 같아서는 집어 던지고 싶었지만.
연예계 생활이 길었던 남도하는, 참 별의별 인간들을 다 만나보았다. 하지만 이리도 묘하게 재수 없는 상대는 또 처음이었다. 앞서 제게 추태를 부리던 강태운이나 양우준과는 결이 다른 불편함이었다. 속에서 천불이 끓어오르게 하는 재주가 있달까. TV에서 보던 이미지와 상이한 종류의 오만함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그래도 없는 사람처럼 무시당하는 것보다는 낫다. 양우준에게 모나게 굴던 그의 태도를 보지 않았나. 그쪽보다는 훨씬 낫다, 라고 합리화하며 차게 식어 버린 식사를 이어 갔다.
그런데 식사 중인 건 진짜 어떻게 알았지. …설마 서주언이….
떠오른 생각에 실소가 흘렀다. 망상이 지나치다. 서주언이 그 토끼 가면이라니. 때마침 TV 화면에 서주언이 모델을 맡은 외제 차 SUV 광고가 흘러나왔다. 완벽하다는 표현이나 어울릴 남자를 보자니 이 정도면 정말 병원에 가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저런 남자가… 그럴 리가. 순간이라도 그런 망상을 했다는 게 민망했다.
그건 그렇고… 어디서 산 건지 모르겠지만, 식은 도시락이 맛있다. 도윤범이 고르는 메뉴는 단 한 번도 남도하를 실망시키는 일이 없었다.
* * *
“여기… 라는 거지.”
“와, 이거 사기 같은데요? 300억 대작은 개뿔. 제작비 다 빼돌린 거 아니에요?”
그러게. 남도하는 도윤범의 말에 하마터면 제 속마음을 드러낼 뻔했다. 그의 표현이 조금 과하긴 했지만, 썩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았다. 첫 촬영 장소라며 알려 준 위치가 그러했다.
“서울에 아직도 이런 데가 있나 봐요.”
주변은 허허벌판이고, 무성하게 자란 잡초밭 사이에 쓸데없이 커다란 폐건물이 있었다. 원래 용도는 창고나 공장이지 않았을까 싶은 그런 곳이었다.
“…여기가 홍콩처럼 보일까요…?”
“뭐… 영상 좀 손보면 되겠지?”
오늘 촬영할 장면은 남도하와 서주언이 처음 만나는 장면이었다. 드라마의 오프닝 장면이자, 이야기의 가장 핵심이 되는 신이라서 원래는 홍콩 로케이션 예정이었지만, 서주언의 스케줄이 맞지 않았다. 그래서 배경만 홍콩 현지에서 촬영하고 배우들은 한국에서 연기해 영상을 합치기로 했단다. 설명만 들었을 때는 조악한 CG가 걱정스러웠지만, 서주언이 있는데 설마 그리 허접스럽게 할까 하는 믿음이 들기도 했다.
“일찍 오셨네요, 남… 도하 씨죠?”
한번 인사를 나눴던 조감독이 남도하를 기억했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싶었던 것 같은데, 억지로 외운 티가 역력했다. 원래 촬영 시작 시각이 여덟 시다. 30분 정도 일찍 도착한 거라 그리 이르다 할 수 있는 시간은 아니었는데, 현장은 생각보다 훨씬 정돈되어 있지 않았다.
“대기 장소가 따로 없어서요…. 차에서 기다리셔야 할 거 같은데요.”
“네, 안쪽 잠깐 구경해도 될까요?”
조감독의 허락에 남도하는 건물 주변을 돌아보고, 안쪽까지 살폈다. 겉보기처럼 안쪽도 상당히 넓었다. CG를 위해서인지 건물의 절반은 초록색 크로마키 스크린이 막고 있었다. 그 앞으로 추락 장면을 위한 난간과 안전 매트가 설치 중이었다.
“이렇게 보니까 또 장난 아니네요.”
졸래졸래 따라 들어온 도윤범은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남도하도 마땅한 대꾸를 해 줄 수 없었다. 이미 수도 없이 읽어 본 대본이고, 머릿속으로 가상 시뮬레이션을 돌려 본 장면이었음에도 긴장이 됐다. 마지막까지 실수가 없도록 홀로 동선을 그리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가자.”
머릿속에 그 공간을 옮겨 그리듯 외운 후에야 걸음을 옮겼다. 모르긴 몰라도 서주언 장면을 먼저 촬영할 테니 대기 시간이 꽤 길어질 것 같았다.
“윤범아.”
“네?”
“나 오늘 촬영 끝나고 약속 있어.”
차에 돌아와 대기하며 남도하는 촬영 이후의 일정을 일러주었다. 지난번 대본 리딩 때처럼 도윤범 홀로 뒤풀이 계획을 잡지 않도록. 아직도 서주언의 일방적인 약속 통보가 못마땅하긴 했지만, 그 약속을 깰 배짱이 없었다. 그리고 이틀 천하이긴 했어도 그의 제멋대로 행동 덕분에 수많은 기사에 얼굴까지 실릴 수 있었으니 함께 식사 한번 하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무슨… 약속이요?”
“서주언 씨가 저녁 먹자더라고.”
“아….”
“우리 뒤풀이는 내일 하자.”
“그래요. 오늘만 날도 아니니까 괜찮아요. 그래도 촬영 끝나고 가시면 피곤해서 괜찮겠어요?”
또 입이 툭 튀어나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도윤범은 생각보다 순순히 그러자 했다. 다행이긴 한데….
“윤범이가 좋아하는 거 같네.”
뭔가 묘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남도하 저는 어젯밤 서주언의 일방 통보 이후, 도윤범에게 그 사실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제일 먼저 했다. 그런데 정작 도윤범은 첫 촬영 뒤풀이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처럼 굴고 있다.
“설마요. 저도 아쉬워요. 근데 어쩌겠어요….”
틀림없이 일찍 퇴근하는 걸 좋아하겠지. 아침에도 새벽같이 픽업을 왔으니까.
남도하는 도윤범의 속이 빤히 보이는 것 같았다. 인턴이니까, 아직 대학생이니까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 한편으로 섭섭한 마음도 들었다. 조금, 정말 조금.
“형, 저 잠깐만요.”
차에서 내리는 도윤범을 보며 남도하는 끄트머리가 헤지다 못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1화 대본을 꺼내 들었다. 먼저 약속을 잡은 건 저인데, 왜 섭섭한지 스스로 이해되지 않았다. 한참 대본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차 문이 열리는 소리에 눈을 돌렸다. 당연히 도윤범일 거라 생각했는데….
“남도하.”
서주언이 차에 올라탔다.
“안녕… 하세요?”
“이게 뭐야. 진짜 어린이라도 키우는 거 아냐? 무슨 차에도 간식 천지야.”
서주언은 뒷자리 한쪽을 차지하던 간식 상자를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려놓으며 차에 탔다. 마치 제 차에 올라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그를 보며 또 제대로 항의도 못 했다.
“넌 형이 왔는데 인사하러도 안 와?”
“내가 이렇게 직접 와야겠냐.”는 소리까지 덧붙이니 남도하도 울컥했다. 예상 못 한 상대의 등장에 순간 놀라긴 했는데, 아무리 서주언이라도 할 말은 해야겠다. 예의를 그리 중시하던 사람이 꺼내기엔 적절치 않은 말이다.
“저기… 제가 데뷔 15년 차인데요….”
열두 살, 처음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운이 좋았다. 아니, 어떻게 보면 운이 나빴다. 그나마 특출 난 얼굴 하나 덕분에 먹고 살았고, 그 얼굴 탓에 이렇게 살고 있다. 모든 원흉이, 이 얼굴에서 시작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였기에 굳이 그 시절의 낡은 이야기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런 이야기까지 꺼내 들어야 할 정도로… 얄밉다, 이 남자.
“그래서? 뭐, 선배님 소리라도 들어야겠다는 꼰대 같은 소리는 안 하겠지, 설마.”
“꼬, 꼰대라뇨…! 저번에 그쪽이 우준이한테….”
“꼰대 맞네. 그것도 젊은 꼰대.”
서주언은 혀를 차며 남도하의 말을 잘라냈다. 남도하 저도 진심으로 선배님 소리를 듣고 싶었다기보다도 계속 ‘형’ 소리를 지껄이는 서주언에게 항의하려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이제 남도하를 꼰대 취급하고 있다.
“그리고, 형한테 자꾸 그쪽, 저기, 이렇게 부를래?”
서주언이 말을 하며 거리를 가깝게 좁혔다. 안 그래도 비좁은 차량인데, 그가 상체를 조금 당겨 앉는 것만으로 두 사람의 얼굴이 팔 하나 간격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의 얼굴을 보며 남도하는 생각했다. 이게, 도윤범이 말하던 꾸안꾸… 그런 걸까. 메이크업을 했는데 이렇게 자연스러운 걸까, 하지 않았는데도 이리… 생긴 걸까. 어쨌든 얼굴은 참 잘도 생겼다.
“뭐, 뭘 그렇게 빤히 봐? 사람 민망하게….”
가깝게 다가올 때까지 호기롭던 서주언의 모습은 삽시간에 사라졌다. 그는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남도하를 보다가 거리를 벌리고 반대편 창에 팔을 기대앉았다.
“귀 빨개졌네요.”
그리고 그의 귀 끝이 옅게 달아올랐고, 남도하가 콕 집어 말하자 목덜미까지 번져 내려갔다. 서주언은 다리를 꼬며 마치 남도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척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런 모습을 보는 남도하는 꽤 신기했다. 안하무인에 뻔뻔한 인성의 소유자라 생각했던 남자가 귀 끝을 붉힐 수도 있다는 게. 그 모습이 조금은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밥, 먹기로 한 거 안 까먹었지?”
서주언의 입에선 약간 날이 선 것 같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 모습이 꼭… 털을 바짝 세운 고양이 같달까. 자신의 약한 부분을 드러내지 않으려 일부러 모난 태도를 내비치는 것도 같았다. 여전히 시선을 맞추지 않고 물어오는 말에 남도하는 긍정의 답을 내놓았다.
“아, 촬영은 왜 이렇게 시작을 안 해.”
“아니 자꾸 왜…!”
서주언은 불평을 쏟아 내며 바닥에 내려놓았던 간식 바구니에 있던 젤리를 뜯어 한 움큼 제 입에 넣었다. 도윤범의 설명에 의하면 그냥 젤리가 아니라 비타민C 젤리라서 하루에 한 봉지는 먹어도 괜찮다던 젤리.
“자.”
그러곤 노란 곰돌이 모양 젤리를 하나 남도하 앞으로 내밀었다.
“됐어요.”
“빨리 먹어. 또 내가 다 먹었느니 어쩌니 그러지 말고.”
슬쩍 밀어내는 손길 때문인지 서주언은 조금 짜증을 담아 재촉했다. 어떻게 보면 투정 같기도 하고. 손끝으로 젤리만 잡아 빼내려 해도 마찬가지였다. 한참이나 시선을 주고받다가 미간을 접으며 턱 끝으로 제 손을 지목하는 서주언을 보며 체념했다. 그냥 저 장단에 어울려 주려 고개를 가져다 댔다. 젤리에 입을 갖다 대려 할 때,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몸을 바로 했다.
“왜요.”
“서, 선배님… 촬영… 시작한다는데요….”
처음 보는 스태프였다. 삐딱하게 튀어나온 서주언의 물음 때문에 당황에 젖은 어린 스태프. 한숨을 푹 내쉰 서주언은 제 손에 들려 있던 젤리를 남도하의 손에 쥐여 주곤 먼저 차에서 내렸다. 별다른 걸 하고 있던 것도 아닌데, 남도하는 이상하게 도둑질이라도 하다 걸린 기분이었다.
“뭐 해.”
“뭘…요?”
차 문이 그대로 닫힐 거라는 생각과 다르게 서주언은 문을 잡은 채 남도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구경 안 해?”
“…해야 돼요?”
“너, 내가 연기하는 거 볼 수 있는 기회가 흔한 게 아니야.”
말하는 본새가 영 못마땅했는데, 그 말도 틀리지 않은 것 같았다. 남도하도 서주언을 톱스타로 만들어 준 드라마를 봤기에 그의 인기가 비단 얼굴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갈게요.”
그런 상대의 연기를 봐 둬서 나쁜 건 없다. 아니, 오히려 합을 맞출 때 더 도움이 될 거라는 판단이 서서 대본을 챙겨 내렸다. 그사이 서주언은 큰 걸음으로 앞장서 멀어졌다.
“형.”
남도하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팔이 낚아채였다. 꽤 빠르게 옮기던 몸이 붙들린 탓에 균형이 살짝 흐트러질 정도였다.
“어디 가요.”
도윤범이다. 그것도 뭔가 못마땅한 얼굴을 한.
“…촬영 구경하러 가는데…?”
그 얼굴을 보자니 죄지은 것도 없이 목소리가 조심스러워졌다.
“그럼 저한테 말을 해야죠.”
“어? 아… 미안.”
하도 혼자 활동하는 일이 잦았기에 도윤범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이렇게 여러 배우와 스태프들이 혼잡하게 오가는 곳에서는 되도록 단독 행동을 하면 안 됐는데.
“미안해, 깜빡했어.”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보니 도윤범이 화가 많이 났나 싶었다.
“아니… 제가 준비한 게 있는데 그냥 가서 그렇죠….”
어쩌면 착각이었나 싶기도 하다. 도윤범은 입술이 작게 튀어나와서는 반쯤 달리듯 차 트렁크로 가 뭔가를 잔뜩 꺼내왔다. 들고 온 박스는 도윤범의 가슴팍과 얼굴을 전부 가려 눈알만 빼꼼 튀어나올 정도로 컸다.
“가요.”
커다란 박스를 품에 안은 채 앞장서는 도윤범을 따랐다. 그 사이에도 촬영장에서 절대 혼자 돌아다니면 안 된다, 화장실 갈 때도 얘기를 해야 한다는 둥 잔소리가 기다랗게 달라붙었다. 응, 알았어, 미안해. 남도하의 입도 부지런히 반성의 말을 읊어야 했다. 조그만 게 이제 보니 보통 잔소리꾼이 아니다. 어쨌든 도윤범이 틀린 말을 하는 건 아니라 꾹 참고 듣기로 했다.
“잠깐만요, 여기 앉아요.”
건물 안쪽에 들어선 도윤범은 적당한 자리에 박스를 내려놓았다. 그러곤 안에서 접이식 의자를 꺼내 펼치기 시작했다.
“…여기…?”
그가 의자를 설치하기 시작하자 주변의 시선이 쏟아졌다. 촬영장에서 의자를 꺼내 드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보통 배우들도, 감독도 오래 서서 대기할 수 없어서 접이식 의자를 가지고 오곤 하니까. 그런데 문제는….
“윤범아… 이건 좀….”
“왜요. 얼마나 편한데요. 제가 앉아 보고 산 건데요?”
의자의 모양이다. 보통 등의 절반 정도만 기댈 수 있는 간이 의자의 형태를 하고 있다. 그런데 도윤범이 가져온 것은 뒤통수까지 기대고 누울 수 있는 디자인이었다. 크기도 상당했다.
“빨리요.”
우물쭈물하는 남도하의 팔을 끌어 반강제로 의자에 앉히는 도윤범이었다. 왠지 사방에서 따가운 눈총이 꽂히는 것만 같아 불편했는데, 막상 의자에 앉아 보니 편하기는 했다. 목 받침대까지 있어서 몸을 완전히 기대앉을 수 있었다.
“다리는 여기에 올리시면 돼요.”
“윤범아, 그건… 괜찮을 거 같은데….”
들리지 않나 보다. 도윤범은 남도하의 의견을 무시한 채 무릎을 접어 앉아 남도하의 다리를 발 받침대에 올려놓았다. 그러곤 적당한 위치까지 다시 잡아 주고 몸을 일으켰다.
“편하죠?”
까만 두 눈이 초롱초롱. 뭔가 칭찬을 바라는 듯 반짝거리는 눈동자 때문에 남도하는 제 솔직한 심정을 드러낼 수 없었다. ‘창피하니까 갖다 넣어.’라는 말 대신….
“그래, 편하다. 고마워.”
그저 칭찬을 건네고 말았다. 정답이었는지 도윤범의 입꼬리가 들썩였다. 저리도 감정을 숨기지 못할까. 여전히 사방에서 시선이 쏟아지는 것 같았지만, 남도하는 그냥 모른 체하기로 했다. 뭐, 촬영팀과 한참이나 떨어진 구석이기도 하고, 조금… 아주 조금 더 큰 의자일 뿐이다, 라고 합리화하면서.
“이것도 좀 드세요.”
“뭐야?”
하지만 조금 과한 감이 있어 발 받침대는 도윤범에게 건넸다. 마음 같아서는 도윤범을 제가 앉은 큰 의자에 앉히고, 자신이 발 받침대에 앉고 싶었지만, 가능할 리 없었다. 옆에 앉은 도윤범은 여전히 바빴다. 상자에서 담요를 꺼내 덮어 주고, 대본을 올리고 볼 수 있는 쿠션을 건네줬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보온병에서 쪼르륵 갈색 액체를 따라 건넸다.
“도라지랑 배랑 생강이랑 꿀 넣고 끓인 거예요.”
“…이걸 언제 만들고 있었….”
“산 건데요.”
아…. 잘… 했네. 그래, 이런 건 사야지.
몰려오려던 감격이 사라졌다. 그래도 이런 거라도 신경 써준 게 어디냐 싶어 입을 대보니 맛도 나쁘지 않았다. 생강 맛이 너무 강해 역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목구멍을 넘어가는 액체는 달달한 맛만 느껴질 뿐 씁쓸하거나 매운맛은 나지 않았다.
“맛있네. 근데 넌 뭘 이렇게 많이 준비해 왔어.”
“제가 말했잖아요. 저는 매니저가 로망이었다니까요.”
지금 도윤범이 더 낮은 곳에 앉아서 올려다보는 탓일까. 그 얼굴이 묘했다. 두 눈 가득 핑크빛 망상이 들어찬 것도 같고, 제가 원하던 연예계의 뒷면에 만족한 것도 같았다. 그런 병아리 매니저가 제법 기특했다.
“다행이다. 다른 사람한테 윤범이 안 뺏겨서.”
그리고 남도하도 그런 병아리 매니저가 마음에 들었다. 전담 매니저를 가져 본 적은 없었지만, 다른 배우와 매니저의 관계를 지켜봤을 때, 이리도 제 연예인을 챙기는 매니저는 흔치 않았다. 어쨌든 직장인이니까 딱 돈 받은 만큼만 했다. 어쩌면 한 달도 안 된 신입의 과잉 열정일 수도 있지만… 예쁜 건 예쁜 거다. 손을 들어 도윤범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첫 출연료를 받으면 이놈한테도 작은 선물을 하나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아, 뭘 또 기다리래. 당장 시작할 것처럼 부르더니.”
그런 남도하의 몽글몽글하던 감상을 깨트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넨 소풍 왔냐?”
서주언 말이다. 그는 남도하의 손에 들린 꿀차를 뺏어 들어 자연스럽게 마셨다.
“맛은 있네. 한 잔만 더 줘 봐.”
“없는데요.”
“너한테 한 말 아닌데.”
“줘요, 뚜껑. 씻어 와야겠네.”
그리고 그 뻔뻔한 태도에 맞선 건, 도윤범이다. 툭툭 말을 던지는 도윤범을 보며 남도하는 그의 바지를 티 나지 않게 살짝 잡아당겨 봤지만, 오히려 점점 날 선 공기가 주변을 감싸는 것 같았다. 그 탓인지 서주언도 도윤범에게 삐딱한 시선을 던졌다.
“이거, 네 매니저야?”
한참 도윤범과 시선을 주고받던 서주언이 남도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순간 남도하도 약간 화가 났다. 지난번 양우준도 그렇고, 왜 자꾸 도윤범을 물건처럼 대하는지 모르겠다. 서주언은 얄밉기는 해도 나름 귀여운 구석도 있다고 생각했던 아까의 감상을 취소하고 싶어졌다.
“윤범아, 차에 가서 형 2화 대본 좀 가져다줘.”
꾸물거리는 도윤범을 한 번 더 재촉해서 내보내고, 서주언을 마주 보고 섰다.
“저기요.”
“죽을래? 형이라고 하라니까?”
“그러면 그쪽부터 다른 사람 물건 대하듯 말하지 마세요. 저한테는 막 대하셔도 되는데요, 제 매니저한테까지 그러면 좀….”
속상하니까요. 뒷말은 붙이지 않았다. 서주언과 저는 비교 대상 자체가 아니니 자존심이 상할 것도 아니지만, 저 때문에 매니저까지 무시당하는 초라한 현실을 스스로 언급하기 싫었다.
“뭐…?”
화를 내는 건 남도하 저인데, 이상하게 제 속이 더 상했다. 자기가 못나 매니저까지 이런 취급을 당한다고 생각하니 그랬다. 도윤범을 내보내길 잘했다는 생각이 스쳤다.
“이게 어디서 무게를 잡고 있어. 죽을래?”
그리고 저런 말도 상대를 봐 가며 건네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안타깝게도 서주언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는 것 같다. 그는 남도하의 어깨를 툭 짚으며 뾰족한 시선을 던졌다. 여전히 장난기가 다분한 게, 남도하는 제 감정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걸 알았다.
“넌 저녁 약속이나….”
“안녕하세요, 선배님!”
안 그래도 좋다 할 수 없던 기분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더 안 좋아졌다. 양우준이 빠르게 거리를 좁히며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 감상은 남도하의 것만은 아니었는지, 서주언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눈알만 굴려 상대를 확인했다. 인사도 받아 주지 않은 건 당연했다.
“아무튼, 이따 봐.”
그대로 서주언은 남도하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자릴 떠났다. 저 멀리서 촬영 준비가 끝났다고 그를 부르는 스태프의 목소리가 들려온 까닭이다.
“하, 진짜 씨발….”
서주언의 뒷모습이 촬영 스태프 사이로 사라지고, 양우준의 입에서 짜증스러운 욕이 튀어나왔다. 깊은 한숨 역시 함께였다. 남도하는 그런 양우준을 못 본 척 자리에 앉았다.
“야.”
“왜.”
“넌 눈치 좀 챙겨.”
“그래.”
양우준의 갈 곳 잃은 짜증이 남도하를 향했다.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그러리라 예상했기에, 굳이 받아치지 않고 받아 줬다.
“주언 선배도 이런 건 안 챙겨 와. 정도를 알아야지.”
양우준은 남도하가 앉아 있는 의자를 향해 툭툭 발길질을 했다.
“누가 보면 주연인 줄 알겠어.”
“그러게, 주연도 가만히 있는데 우준이가 왜 화를 내나 모르겠네.”
“좀 비중 있는 역할 맡았다고 큰소리도 낸다?”
툭, 툭, 툭. 의자를 쳐 대는 발길질에 남도하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려 했다. 괜한 말로 받아쳤다는 후회도 조금 들었다. 촬영장에서 소란 떨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그대로 앉아 있을 수 없어 자릴 털고 일어서 양우준을 마주 보고 섰다.
“뭐 하세요.”
양우준을 어떻게 얌전히 시켜야 하나 고민스럽던 참에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본을 가져온 도윤범은 남도하와 양우준 사이를 파고들며 섰다. 양우준을 마주 보고, 남도하에게 등을 보이며.
“안 했는데? 아무것도….”
“방금 우리 형 의자 발로 차셨잖아요.”
“아니, 그건 그냥….”
이상했다. 남도하가 느끼는 체감 온도가 삽시간에 변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냉기가 감돌고 있었는데, 도윤범의 등장과 함께 그 차가운 기운이 삽시간에 거둬진 것 같았다. 양우준 말이다. 있는 대로 신경질을 부리던 그의 말투도 한순간에 달라졌다.
“오늘 저녁 촬영 아니에요?”
“…내 스케줄도 알고 있었어…?”
의외의 상황이다. 도윤범이 양우준의 스케줄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양우준이 도윤범을 대하는 태도도 그렇다.
“원호 형이 저기서 찾던데요. 가 보세요.”
“어….”
양우준은 도윤범과 남도하를 번갈아 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누가 보아도 할 말이 많은데 참는 것 같았다. 그래도 더 이상 시끄러운 소리를 낼 생각은 없다는 걸 알아챈 것인지, 도윤범이 먼저 두 사람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그러곤 삐딱해진 남도하의 의자를 원래대로 정리했다.
“하아… 넌 나중에 보자.”
양우준은 속삭이듯 모난 목소리로 협박 같은 말을 남긴 채 남도하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못마땅한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지만, 남도하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하도 많이 겪은 탓인지 그리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런데 양우준이 남도하를 지나쳐 걸음을 옮기는 순간이었다.
“…어, 어!”
갑자기 균형을 잃은 양우준이 옆에 있던 대형 스탠드 조명을 향해 쓰러졌다. 속절없이 자빠지는 그의 몸과 부딪힌 철제 조명도 커다랗게 앞뒤로 흔들리다가, 남도하를 향해 기울어졌다.
“형…!”
피할 수 없다. 커다란 헤드가 그대로 남도하 저를 직격할 거라는 걸 알아채고 두 팔을 올려 얼굴을 가렸다. 약간은 혼잡한 소리가 오가던 촬영장에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길게 이어지던 타격음이 끝나고서도 남도하의 몸엔 별다른 충격이 없었다. 이질적인 느낌이 있기는 했다. 바닥에 자빠진 제 몸을 감싸는, 온기였다.
“형, 괜찮아요?”
도윤범이었다. 남도하는 어느새 바닥에 자빠져 있고, 틀림없이 두세 걸음 떨어져 있던 도윤범이 제 위에 올라타 얼굴을 마주 댄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 다쳤어요?”
갑작스러운 상황에 남도하는 제대로 답도 못 하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런데….
툭.
남도하의 뺨에 뭔가가 떨어져 내렸다. 그게 시작이었다. 툭, 투둑, 투두둑…. 눈앞에 있는 도윤범의 얼굴을 타고 흐른 붉은 피가 빠르게 아래로 흘러내렸다.
“너, 너 머리가…!”
“하아… 다행이에요….”
도윤범이 웃었다. 제 얼굴을 타고 흐르는 붉은 액체가 얼마나 많은지, 붉은지도 모르고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비켜 봐…! 너 머리에서 피 나!”
남도하는 도윤범을 밀치며 몸을 빼냈다. 예상했던 것처럼 스탠드 조명이 쓰러졌다. 그것도 도윤범의 몸 위로. 그때 어디가 잘못 맞은 것인지 도윤범의 얼굴을 타고 쉼 없이 피가 흘러내렸다.
“이, 이걸… 어떻게… 잠깐만 움직이지 마.”
패닉이었다. 도윤범은 무어라 말을 걸어왔고 저 멀리서 스태프들이 달려오는 게 보였지만, 남도하는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도윤범의 얼굴을 적시는 붉은 핏물에서 시선이 떨어지질 않았다.
“수, 수건 어딨지… 아니, 119 불러야 하는데….”
삽시간에 긴장에 빠진 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눈에 들어오는 게 없어 제 소매 춤으로 도윤범의 얼굴을 적시는 핏물을 닦아냈지만, 아무리 닦아도 흘러내리는 피가 훨씬 더 빨랐다.
“형!”
다급하게 움직이던 남도하의 손을 도윤범이 붙잡아 멈춰 세웠다. 강하게 잡는 손아귀 힘에야 정신이 돌아왔다.
“괜찮아요, 저. 진정해요.”
시끄럽게 울리던 심장 소리가 잦아들었다. 귓가를 채우던 이명 같은 소리도 사라졌다. 동요 없는 도윤범의 목소리 덕분이었다. 그사이 스태프들도 그들의 주변을 에워싸고, 응급 상자를 가져와 도윤범의 머리를 살폈다. 하지만 언뜻 보아도 상태가 좋지 못했다. 천만다행히 조명의 날개가 펼쳐져 있지 않아 날카로운 날개에 베이는 참사는 일어나진 않았지만, 무게가 상당해서 그런지 지혈조차 되지 않고 있었다.
“저, 병원… 병원 좀 다녀올게요.”
남도하는 스태프가 잡고 있던 붕대 뭉치를 건네받으며 도윤범을 일으켰다. 119를 부르긴 했지만, 도심지와 거리가 떨어져 있는 탓에 시간이 상당히 걸릴 것 같았다. 그래서 직접 병원으로 옮기는 쪽을 택했다.
“남도하.”
그런 남도하의 앞을 서주언이 막아섰다.
“미쳤어? 넌 촬영해야 하는데 어딜 가.”
“그, 그래도….”
“오늘 촬영 접을까? 이 사람들 다 돌려보낼래?”
날카롭게 꽂히는 서주언의 목소리에 남도하는 입술 안쪽 연한 살을 짓씹었다. 도윤범의 몸을 감싼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마음속에 두 개의 생각이 시끄럽게 엉켜 들었다. 촬영 따위 집어치우고 그를 병원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생각과 첫 촬영부터 문제를 일으킬 수 없다는 생각.
“형, 저 괜찮아요. 촬영하고 계세요.”
그리고 그 고뇌를 끝내 준 건 상처투성이 도윤범이었다. 그는 남도하의 팔을 풀며 제 손으로 지혈용 붕대를 잡았다.
“누가 다친 사람 좀 병원까지 데려다줘요.”
서주언의 말에 그나마 안면이라도 있는 이원호가 나섰다. 남도하는 그들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까지도 자신이 옳은 결정을 내린 것인지 확실할 수 없었다. 촬영 시작 전부터 사고가 난 탓에 현장이 어수선해졌다.
“괜찮아?”
“…네.”
서주언의 물음에, 괜찮지 않았지만 괜찮다 했다. 여전히 제 손을 붉게 물들인 피가 뜨거운 것 같다. 도윤범의 하얀 얼굴에 흘러내리던 핏줄기가 각막에 새겨진 것처럼 잊히지 않았다.
“옷 먼저 갈아입어. 아직 네 촬영은 시간 좀 있으니까.”
서주언은 제 매니저를 불러 남도하를 맡겼다. 남도하는 약간 멍한 정신으로 저를 이끄는 손길을 따랐다.
“넌 나 좀 볼까?”
“…저요…?”
“그래, 너.”
뒤에서 들려오는 서주언과 양우준의 대화엔 관심 두지 않았다. 온 신경이 눈앞에 보이지도 않는 한 명을 향했다. 불안한 생각이 빠르게 사고를 잠식해 갔다.
* * *
“형, 윤범이는요?”
- 괜찮아. 머리가 조금 터지긴 했는데, 별 탈 없다니까 걱정하지 마라.
한참만에야 이원호와 연락이 닿았다. 길게 이어지던 신호음 뒤, 사서함으로 넘어가길 수십 번. 그때마다 초조함이 커졌다. 머리를 다쳤으니까 위험할 수 있고, 보이지 않는 문제가 갑자기 생길 수도 있다. 어쩌면 병원까지 가는 사이 무슨 사고가 생겼을 수도 있다, 라는 생각이 끝없이 몰려들며 불안을 키웠다. 이원호가 전하는 안부에야 속을 시끄럽게 하던 생각이 흩어졌다.
- 그러니까 촬영이나 잘하고 있어. 금방 간다.
“…네, 형.”
도윤범을 부축할 때만 하더라도 이원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런 그의 목소리가 꽤 밝게 나오는 거로 봐서는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연락을 기다리는 사이 촬영을 구경하는 대신 차로 돌아와 대기하고 있었다. 뭔가를 집중해 보고 있을 마음 상태가 아니었다.
서주언이 붙여 준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는 상당히 전문적이었다. 정신을 놓은 남도하를 인형처럼 앉혀 두곤 손과 얼굴에 묻은 피를 빠르게 닦아 내고, 메이크업을 새로 했다. 엉망이 된 의상도 의상 팀에서 새로 받아와 갈아입혔다. 헤어스타일까지 망가지기 전과 같게 만들었다. 남도하에게 한마디 말도 건네지 않은 채.
“선배님, 촬영 들어갈게요.”
저를 부르는 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마음 한구석 불편한 감정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 이상으로 민폐를 끼칠 수도 없다. 어차피 촬영장에 남는 쪽을 택했으니 이 일이라도 제대로 처리해야 했다. 숨을 한 번 크게 삼키고, 촬영에 들어갔다.
* * *
남도하는 저를 바라보는 서주언을 보며 미소 지었다. 눈은 웃지 않고 입술만 비틀려 올라가는 기이한 웃음이었다. 설핏 광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곤 뒤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받쳐 줄 바닥 따위 없는 허공이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남도하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서주언이 팔을 뻗어 그런 남도하를 붙잡으려 했지만, 늦었다. 남도하의 몸이 빠르게 바닥으로 추락했다. 얼굴이 잔뜩 찌푸려진 서주언을 바라보는 남도하의 얼굴엔 희열에 찬 미소가 걸려 있었다.
“컷!”
바닥에 충돌하기 전, 와이어가 당겨 올라가며 남도하의 몸이 큰 충격 없이 안전 매트 위에 부드럽게 떨어졌다.
“괜찮아?”
2.5층 정도 높이의 난간 위에서 저를 내려다보는 서주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 장 감독한테 도하 씨 얘기 듣기는 했는데 생각보다 더한데?”
“예…?”
아직 와이어를 풀기도 전에 가깝게 다가와 말을 거는 감독의 목소리에 남도하는 긴장이 들어찼다. 혹시라도 뭔가 실수가 있었던 것일까 싶어 조금 전 촬영한 신을 빠르게 되뇌어야 했다.
“사실 쉽지 않은 장면이라 스턴트까지 준비했거든. 근데 오늘은 쓸 일이 없네?”
“아… 감사합니다.”
뒤늦게 칭찬이라는 걸 알아채곤 허리를 접어 인사했다. 액션 장면을 여러 번 해 본 게 이리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오늘 촬영 장면 중 꽤 많은 부분이 몸을 쓰는 것이었지만, 소화하지 못할 정도의 난이도는 아니었다. 합을 잘 맞춰준 서주언의 공도 컸다.
“도하 씨 덕분에 촬영 빨리 끝났어.”
“그런 일까지 있었는데 이리 연기를 깔끔하게 할 줄 몰랐어.”라는 둥, 이어지는 칭찬에 남도하는 두피를 뚫고 땀이 새어 나오는 기분이었다. 가감 없이 쏟아지는 칭찬을, 그것도 흥행 보증 수표 같은 감독이 건네는 말이 아직은 어색했다. 어쩌면 출연 배우의 멘탈을 관리해 주는 그의 방법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형!”
저 멀리서 다가오는 인영을 보고, 감독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왜 여기로 와! 괜찮아? 머리 어디가 얼마나 다쳤는데. CT는 찍어 본 거야?”
“하나씩! 하나씩 물어봐요, 형.”
머리에 하얀 붕대를 감은 도윤범이 손에 커피를 들고 밝게 웃고 있었다. 얼굴만 봐서는 촬영에 지친 남도하가 환자, 도윤범이 보호자 같다.
“수고했어요. 이거 마셔요.”
“말 돌리지 말고. 왜 여길 다시 와…. 집에 가서 쉬지.”
도윤범이 건네는 커피를 받아 들지도 않고 팔을 잡아끌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웃고 있는 얼굴 때문에 남도하는 짜증이 솟구쳤다. 도윤범도 그런 남도하의 감정을 읽은 것인지 뒤에서 괜찮다, 아무렇지 않다, 운동할 땐 더 심하게 다친 적도 많았다고 쉼 없이 밝은 목소리를 꾸몄다. 물론 남도하의 귀엔 들어오지도 않았다.
“…도하야. 저거 완전 또라이야, 또라이.”
도윤범을 억지로 의자에 앉히자 언제 다가온 것인지 이원호가 남도하의 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형, 다친 애를 여기로 다시 데리고 오면 어떻게 해요.”
꾹꾹 눌러 담았던 짜증 일부가 이원호를 향했다. 다친 도윤범에게 화를 낼 수도 없어서. 이원호도 흔치 않게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남도하를 보며 잠깐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야, 내가 데려온 게 아니라 지가 온다고 지랄을 하는데 어떻게 하냐….”
“그래도 그렇죠. 피를 그렇게… 하아….”
도윤범의 옷엔 아까의 참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상, 하의 가릴 것 없이 검붉게 변한 핏자국이 여전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자 색상이 더 진해지며 시선을 빼앗았다. 그저 얼굴만 모자란 놈처럼 웃고 있을 뿐이었다.
“대가리 꿰매야 하는데 머리 안 민다고 지랄하고, 시간 없다고 대충 마취 없이 하자고 또 생떼를… 어휴, 아무튼 나는 이제 모른다. 네가 알아서 해.”
이원호는 악몽을 털어 내듯 몸을 떨며 자리를 떴다. 마치 귀찮은 짐을 떠넘기는 것만 같았다.
“형… 커피….”
남도하는 멀어지는 이원호의 뒷모습을 보다가, 제 바짓단을 당기는 손길에 고개를 내렸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 와중에 커피는 또 뭐 하러 사 왔는지 모르겠다. 도윤범의 하얀 손가락을 타고 커피 컵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빨리 받아요. 팔 아파요.”
제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과장된 행동을 보이는 도윤범을 보며 남도하는 무릎을 구부려 그의 옆에 가깝게 앉았다. 커피는 대충 바닥에 내려놓았다.
“정말 괜찮아?”
“괜찮아요. 그냥 조금 찢어진 거예요.”
얼굴은 다시 말끔해졌다. 머릿속에 그려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 같던 피 칠갑을 한 몰골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멀쩡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저 말처럼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까지 돌아온 건 여전히 못마땅하지만, 그래도 제 눈으로 무사한 모습을 확인하자 마음이 놓이기는 했다.
“그러게. 정말 조금 찢어졌나 보네, 멀쩡한 거 보니까.”
뒤에서 들려오는 삐딱한 목소리 때문에 남도하의 신경이 곤두섰다. 촬영할 땐 꽤 진지한 모습으로 임하던 서주언이지만, 앵글을 벗어나자마자 제 성격을 드러냈다. 개차반 성격 말이다.
“가자, 밥 먹으러.”
그리고 그제야 잊고 있던 게 기억났다. 저녁 약속.
“아… 그거 다음으로 미루면 안 될까요…?”
“뭐? 왜?”
긴 고민 없이 뱉어낸 말이다. 촬영 자체도 어떻게 끝냈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그 이유는 당연히 도윤범이다. 남도하 자신을 구하려다 피 칠갑을 한 도윤범. 그러니 식사 약속 따위를 고민하고 있을 정신도 없었다. 서주언과의 약속이 먼저기는 했지만, 우선순위로 봤을 때 급한 건 그쪽이 아니다. 식사라면 언제든지 다시 할 수 있는 거니까.
“제 매니저가….”
“하.”
남도하의 입이 열리자마자 서주언의 입에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러곤 남도하와 뒤에 앉은 도윤범을 번갈아 봤다. 그의 침묵이 이어지는 사이에도 실시간으로 얼굴이 모나게 일그러졌다.
“하아… 대신 다음부터 내가 부르면 바로 튀어나와.”
“네… 네?”
“약속도 내가 편할 때 잡을 거니까 그런 줄 알아.”
“아니, 그래도 저도 스케줄이….”
서주언은 이번에도 제 할 말만 남기고 먼저 몸을 돌렸다. 괜히 약속 한번 미뤘다가 더 큰 문제를 만들어 버린 것 같기도 했다. 삐딱해진 목소리와 표정을 보자면 썩 틀린 예상은 아닐 것 같다.
“우리도 가자.”
“벌써 끝났어요?”
“당연하지.”
남도하도 몰랐다. 이렇게 빨리 촬영이 끝나리란 걸. 저도 그랬고, 서주언도 단 한 번의 NG도 없이 촬영을 마무리했다. 예상했던 여섯 시간에 훨씬 미치지 않았다. 촬영 분량에 비하면 상당히 빠른 속도였다. 저녁까지 촬영이 이어지겠지만, 남도하의 분량은 끝마쳤다.
“놔둬. 형이 할게.”
“에이, 그래도 어떻게….”
“도윤범, 비켜.”
제 상태도 모르는 건지, 펼쳐 놓았던 자리를 정리하려 하는 도윤범을 뜯어말렸다. 극구 괜찮다는 그에게 결국 딱딱한 목소리의 명령조로 말해야 했다. 남도하는 직접 짐을 챙겨 넣은 박스를 들고 앞장섰다. 커다란 상자를 들어 보니 보통 무게가 아니었다.
“열쇠 줘.”
“…왜요…?”
“너 그러고 운전하려고?”
“괜찮다니까요.”
딱, 한 대만 때릴까. 다친 사람에게 할 생각은 아니지만, 남도하는 정말 딱 한대만 도윤범을 때리고 싶었다. 하도 말을 안 들어서. 그래도 며칠 지켜보니 그를 다루는 방법을 알 것 같았다. 이런 도윤범에게는 조금 뾰족한 시선을 던지면….
“…여기요….”
이렇게 순한 양이 된다. 열쇠를 건네받은 남도하가 먼저 운전석에 앉았다.
“…형.”
차가 도심에 들어설 때까지도 차 안은 적막했다. 그리고 그 침묵을 이기지 못한 건 도윤범이었다.
“왜.”
“혹시 저 때문에 화났어요?”
화가 나긴 했다. 그리고, 상대가 도윤범인 것도 맞다.
“서주언이랑 식사 못 해서요…?”
“뭐?”
남도하는 하마터면 손에 쥔 핸들을 놓칠 뻔했다. 하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어서. 아예 생각의 중심에 있지도 않던 이름이 튀어나왔다.
“웬 서주언이야.”
“그, 그럼요…? 왜 그렇게 화났는데요….”
남도하는 갓길에 차를 세웠다. 아무래도 제가 너무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냈나 보다. 도윤범이 저리 풀이 죽은 걸 보면.
“도윤범, 너. 너 때문에.”
“저… 요?”
“하아…. 모르겠다. 네가 나 때문에 다친 것도 속상하고, 다시 돌아온 것도 짜증 나고. 멀쩡한 거 봐서 다행이긴 한데….”
남도하는 제 속을 그대로 털어놨다. 스스로 정리하지 못한 감정이 말이 되어 쏟아졌다. 뱉어내는 말은 제대로 된 문장도 되지 못했지만, 차를 몰고 오는 사이 켜켜이 쌓여 가던 생각을 털어놓자 마음이 좀 차분해지는 것도 같았다.
“도하 형.”
하지만 그 부정적인 감정이 옮겨가기라도 한 것인지, 이번엔 도윤범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어…?”
“그게 왜 형 탓이에요. 사고를 낸 건 양우준이고, 제가 매니저니까 현장에 돌아와야죠. 저도 지금 일하는 거예요. 이렇게 형이 운전하게 한 것도 저는 불편해요.”
쏟아지는 도윤범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직접적으로 뱉어내진 않았지만, 그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닫지 못할 정도의 머리는 아니었다.
“아… 그렇지. 매니저였지.”
저도 모르는 사이, 도윤범을 제 동생처럼 대하던 남도하였다. 틀림없이 그가 매니저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었음에도 남도하는 내심 다른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의 말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것도 그렇고, 저 어린애 아니에요. 형 경호까지 해 주기로 한 거 잊지 말아요.”
도윤범은 쐐기를 박는 말을 하며 남도하의 얼굴 앞으로 손도 대지 않고 있던 커피를 들이밀었다. 이제 마음이 좀 풀어졌으면 그걸 마시라는 속뜻을 읽었다. 그래서 별말 없이 까만 빨대를 물고 커피를 입에 담았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씁쓸한 커피가 조금… 달게 느껴졌다. 가슴을 꽉 막고 있던 상념이 쓸려 내려가는 것 같았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그제야 도윤범의 입에서도 낮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괜스레 어색해진 분위기에 남도하가 말을 돌렸다. 낯이 간지러운 기분이다. 어린놈에게 훈계를 들은 것도 같고, 이놈이 생각보다 속이 깊구나 싶기도 하고.
“근데 형, 서주언이랑 친해요?”
“서주언…? 아니? 나도 이번 작품 하면서 처음 봤어. 왜, 사인이라도 받아다 줘?”
물론 농담이다. 서주언에게 사인을 요구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연예인의 연예인이니 신기하긴 하지만, 그건 그와 대화를 나눠 보기 전까지의 감상일 뿐이다. 그리 제멋대로에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그에게 사인을 요구한다면, 틀림없이 온 신경을 긁는 말이 달라붙을 것이 자명하다. ‘형 사인이 그렇게 갖고 싶었어? 액자에 걸어 두게? 아님, 몸에 해 줄까?’ 같은 말.
“그걸 어디다 써요. 그냥 친해 보이길래요. 저번에 리딩 때도 그렇고….”
“그러게. 좀 친하게 지내야 하는데.”
“…네?”
“왜, 우리 의상도 서주언 보고 협찬해 준 걸 거 아냐. 근데 서주언이랑 사진 한 장 안 찍히면 싫어하지 않겠어?”
갑자기 오늘 저녁 약속을 무리해서라도 지켰어야 했나 싶다. 지난번 대본 리딩 때도 있지도 않은 스케줄을 핑계로 거절했는데, 이번에는 일방적으로 약속을 파투 내 버렸다. 감히 서주언의 식사 제안을 두 번이나 거절한 셈이 되었다.
“서, 설마 서주언 보고 협찬해 줬겠어요?”
“그럼 걔네가 미쳤다고 나 보고 해줬겠냐….”
남도하는 순진하기만 한 도윤범의 생각이 귀여웠다. 아직 때 묻지 않은 병아리 인턴의 생각 말이다.
“이 바닥이 다 그래. 그러니까 형이 사회생활 하러 갈 때 자꾸 방해하면 안 돼.”
“아쉬운가 봐요. 서주언이랑 밥 못 먹어서.”
이상한 투정을 부리는 것도 귀엽고.
“아쉽지. 너 서주언이랑 저녁 한 번 먹는 식사권이 얼마에 팔렸는지 모르지?”
“알고 싶지 않은데요.”
“1억 2천에 팔렸어. 내가 방금 1억 2천을 포기하고 윤범이를 고른 거라고.”
그래서 그런지 자꾸만 놀려먹고 싶다.
* * *
“도윤범.”
“안 돼요.”
“야.”
“…그렇게 봐도 안 돼요.”
저녁 식사를 끝내고, 식당 앞에서 기나긴 대치를 이어 가는 중이다.
“어떻게 널 혼자 보내.”
“택시 타고 가면 돼요.”
도윤범은 남도하를 데려다주겠다 하고, 남도하는 도윤범을 집에 데려다주려 했다. 아무리 지금 멀쩡한 꼴을 하고 있다고는 해도 오늘 머리가 터진 환자를 홀로 돌려보낼 순 없었다. 지금이라도 손을 잡고 병원에 다시 가서 제대로 검사를 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몰라요. 전 같이 갈 거예요.”
도윤범은 제멋대로 보조석에 앉아 차 문을 닫고 안전벨트까지 맸다.
“하아… 졌다, 졌어.”
어차피 운전도 남도하가 해야 하는데, ‘매니저 업무’를 들먹이며 집까지 함께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길게 시간을 끄느니 빨리 제 집에 도착해 그를 보내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 이상하게 저 매니저 업무에 대해서만큼은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내일은 오지 마. 어차피 촬영도 없으니까.”
“…저는 촬영 없어도 출근해야 하는데요? 인턴이라.”
“아…. 내가 회사에 얘기할게.”
“안 돼요. 저 다친 거 알면 잘릴 수도 있잖아요….”
그럴 리가. 칭찬을 해 줘도 모자랄 판에 잘리긴 왜 잘리나.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법카 맘대로 써, 촬영장에서 사고 내. 잘하면 인턴 기간 못 채울 수도 있겠네, 윤범이.”
“회사에 얘, 얘기하실 거예요…?”
“이렇게 자꾸 형 말 안 들으면 얘기해야지.”
참신하다. 주변에 온통 연예계에 찌든 요물들만 즐비하다 보니, 저런 어쭙잖은 협박에 바짝 조는 병아리가 재밌었다. 놀려먹는 재미가 있다고 할까. 그런 반응 때문에 남도하는 자꾸 마음과 다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러니까 내일은 집에서 쉬어, 알았지?”
“…….”
“대답.”
“…네….”
이젠 제법 도윤범을 다루는 방법도 알 것 같고. 무슨 사정인지는 몰라도 인턴에 목매는 걸 악용하려니 조금 미안하지만, 선의의 협박이다. 무리했다가 상처가 다시 터지기라도 하는 참사를 보고 싶지 않다.
“그럼 들어가 봐.”
“형도 푹 쉬세요. 오늘 수고 많았어요.”
남도하는 집 앞에 차를 대고 내렸다. 그러곤 백팩을 메고 서 있는 도윤범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윤범아.”
“네?”
“고마워, 오늘. 네 덕분에 촬영 잘했어. 다치지도 않았고.”
집까지 오는 사이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자책했다. 사실 고맙다는 말을 먼저 꺼냈어야 하는데 왜 그렇게 짜증을 부렸나 모르겠다. 실컷 짜증을 부린 후에야 후회가 몰려왔다.
“저도 고마워요.”
“뭐가?”
“그냥요, 다.”
실없는 말을 뱉어 낸 도윤범이 먼저 몸을 돌렸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남도하도 집으로 올라갔다. 유달리 길게 느껴지는 하루다. 첫 촬영과 사고가 겹치다 보니 마치 몇 날 며칠 밤을 새운 것처럼 뒤늦게 피곤이 몰려왔다.
항상 오르내리던 계단마저 유달리 길고, 가파르게 느껴질 정도였다. 다행히 내일은 촬영이 없어 오후 늦게나 회사에 출근해야겠다고 생각하며 4층에 도착했을 때였다. 현관문 앞에 택배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별다른 송장도 없이 딸랑 「남도하 님」이라고 쓰여 있을 뿐이었다.
집으로 들어가기 전 택배 상자를 먼저 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래야 한다는 본능이 먼저 움직였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 걸 마주하는 순간, 상자를 집어 던지고 몇 발짝이나 몸을 뒤로 물려야 했다.
남도하의 손에서 벗어나 바닥을 떨어진 택배 상자 바깥으로, 붉은 피에 젖은 손가락이 나뒹굴었다.
삽시간에 거칠어진 심장 소리가 온몸을 집어삼켰다. 바닥에 흩어져 나온 내용물을 제대로 눈에 담지도 못하고, 남도하는 그대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여보세요?”
빌라 앞에 나오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그 간단한 동작도 떨리는 손가락 탓에 몇 번의 헛손질 끝에 가능했다.
- 형? 무슨 일 있어요?
“윤범아… 잠깐 다시 와 줄 수 있어? 아니, 와 줘.”
여전히 심장이 요동쳐 논리적인 말을 뱉어 내기 어려웠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도윤범에게 우선 집으로 좀 와 달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 목소리만으로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걸 전하기엔 충분했다.
“형!”
전화 통화가 끊어지지도 않은 채, 저 멀리서 도윤범이 빠르게 거리를 좁히며 달려오는 게 보였다. 남도하도 그를 향해 달려갔다.
“윤범아, 집에 이상한 게 왔는데. 손가락이 들어 있는 상자가…!”
“형! 진정해요. 진정하고, 천천히 말해 봐요.”
도윤범은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남도하의 등을 감싸 안았다. 조금은 강한 힘으로 몸을 감싸는 온기가 닿고서야 남도하는 제가 꽤 긴장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한참이나 그렇게 끌어안고 있은 후에야 남도하의 입에서 나오는 숨이 자연스러워졌다.
“괜찮아요?”
도윤범은 남도하의 등을 느릿하게 쓸어내리며 물었다. 순간 놀랐던 마음이 옅어진 탓인지, 그 손길이 조금은 이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 어….”
남도하는 뒤늦게 제가 도윤범에게 안겨 있던 걸 깨닫고 몸을 가볍게 밀며 빠져나왔다.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매니저 품에 파고들다니. 조금 전 목도한 충격적인 상황도 잊을 정도로 민망함이 차올랐다.
“무슨 일인데요.”
“…집에 이상한 게 왔어….”
“뭐가요.”
“그….”
도윤범은 한 발짝 앞서 걸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남도하는 제가 목격한 걸 설명하며 그 뒤를 따랐다. 아무런 동요도 없는 차분한 말투로 대꾸하며 느릿하게 옮기던 도윤범의 걸음은, 3층 현관 앞에서 멈춰 섰다.
“여기서 기다려요. 제가 보고 올 테니까.”
“윤범아, 그냥 경찰 부르는 게 낫지 않을까?”
“확인은 하고 불러야죠.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요.”
남도하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 도윤범이 홀로 층계를 올랐다. 뒤늦게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를 곳에 그를 홀로 보낸 게 걱정스러워 뒤를 따라 계단을 오르며 커다랗게 목소리를 냈다.
“윤범아, 괜찮아?”
“네. 지금 내려가요.”
잠시 뒤 도윤범이 택배 상자를 들고 내려왔다. 그리고 그의 한쪽 손에….
“그거…!”
아까 남도하가 본 손가락이 들려 있었다.
“가짜예요, 손가락은. 아마 방송에서 쓰는 그런 거 같은데요?”
가짜라는 말을 들었는데도 믿어지지 않았다. 그가 들고 있는 것은 누가 보아도 손가락이었다. …잘린 손가락.
“그럼 안에 다른 건? 그것도 가짜야…?”
“하아… 그건 진짜 죽은 쥐요.”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어두운색 털이 있고 꼬리가 달려 있던 모습이 얼핏 기억났다.
“이건 경찰에 신고해야겠는데요. 회사에 말해서 처리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어. 그래, 그러자.”
도윤범은 가짜 손가락을 택배 상자에 도로 집어넣곤 차에 옮겨둔 후, 다시 돌아왔다.
“괜찮아요?”
몇 번이나 묻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남도하는 차마 괜찮다는 말을 건네진 못했다. 단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일이 벌어져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리고 순간 든 생각이 있었다.
“잠깐만.”
그동안 미묘하게 신경을 거스르던 집 안의 변화와, 하얀 토끼 가면 남자가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그 생각이 과잉 반응이 아니라면, 집 안쪽에도 무언가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제가 먼저 들어갈게요.”
현관문을 잡고 기다란 숨을 내뱉은 탓일까. 도윤범이 남도하의 어깨를 뒤로 당기며 앞장섰다. 뭔가 상황이 좀 이상한 것 같은데, 어떻게 보면 지금 저보다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그가 앞장서는 것이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현관문 안쪽으로 들어가던 두 사람의 행동이 무색하게 집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괜찮은 거 같은데요…?”
“그렇네….”
도윤범은 빠르게 방과 화장실, 주방을 훑었다. 남도하 제가 보기에도 집안은 아침과 별다른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소파에 걸터앉는 남도하의 옆에 도윤범이 앉았다. 2인용 작은 소파인 탓인지, 뒤늦게 불안이 떨어져 나간 탓인지 좁디좁은 거리가 점점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 소파에 누군가와 나란히 앉아 본 적이 없어서일 수도 있겠다.
“같이 있어 줄까요?”
“…어? 뭐?”
“무서운 거 아니에요?”
도윤범이 하는 말에 지난 제 행동이 떠올랐다. 마치 겁에 질린 어린아이처럼 그에게 달라붙었던 자신의 행동 말이다. 짧은 순간이기는 했지만 나이도 어리고 체격도 더 작은 놈에게 지나치게 의지했다. 정말 못난 꼴을 제대로 보이고 말았다.
“무섭기는. 너도 가서 쉬어.”
“아니면 다른 데서 잠깐 지내는 건 어때요? 저 택배 상자 처리할 때까지만요.”
“…아냐. 괜찮아.”
“형,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해요.”
도윤범이 제시한 두 가지 제안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집에 머무르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방도 하나뿐이고, 소파에서 자기엔 지나치게 작다. 그렇다고 제가 호텔에 가서 지내는 것도… 어렵다. 당장 어제 통장을 탈탈 털어 집에 송금한 탓에 호텔이 아닌 모텔비도 부담스러운 지갑 사정이었다.
“내가 너무 당황했었나 봐. 이제 괜찮아.”
“그래도….”
“늦었다. 어서 가 봐.”
그리고, 뒤늦게 제 집에 도윤범을 들인 게 조금 부끄러워졌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이 다 거기서 거기겠지만, 오늘따라 유달리 집이 휑하고 거실도 초라한 것만 같았다. 걱정이 가득 담긴 도윤범의 얼굴마저 이 집 때문인 것 같았다.
반쯤 떠밀 듯 도윤범을 돌려보냈다. 마지막으로 현관문을 나서면서까지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하라는 잔소리가 달라붙었다. 막상 혼자 집안에 남으니 약간 싸늘한 기운이 감도는 것 같았다. 아직 춥다 할 정도의 날씨는 아니었음에도. 머리가 없는 쥐와 가짜 손가락을 넣은 택배 상자. 그리고 그 안에 있던 어떤 쪽지.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그 내용은 미처 확인하지도 못했다.
그동안 특별히 겁이 많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카메라가 돌아가는 중엔 그 어떤 위험한 장면도 소화해 냈으니까. 거기에다 빼어나진 않아도 스스로 지킬 힘 정도는 있다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과연… 그럴까.
최근의 사건들로 의심이 피어났다. 감히 반항할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의 힘을 보이던 자칭 팬. 잠든 사이 찢겨 나간 옷과 다분히 불순한 의도를 담은 택배 상자. 주체를 특정할 수 없는 위협. 그런 것들은 남도하의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 쪽의 무력이었다. 사지 멀쩡한 성인 남자라고 해서 아무런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한참이나 거실에서 지금 닥친 상황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의 끝엔 이상한 결론이 내려졌다.
지금, 토끼 가면이 화가 났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는 또다시 무언가 경고를 보낸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가 그런 것이 아니라면… 하나가 더 있다.
토끼 가면과는 다른, 하나 더.
* * *
“말을 해요.”
“…뭐가.”
“알면서 이럴래요?”
도윤범이 화났다. 삐딱하게 접힌 얼굴에 짜증이 한가득이고, 가슴 앞으로 낀 팔짱은 못마땅함의 상징이다.
“그냥, 그러고 싶어.”
남도하는, 오랜만에 아침 조깅을 건너뛰었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아침 촬영이 있더라도 새벽에 조금 더 일찍 일어나 운동을 할 정도로 특별한 일이 아니면 빼먹지 않는 습관이었다. 그 불변이 깨진 이유는 당연하게도 지난 밤 한잠도 자지 못한 탓이다. 첫 촬영의 피로도 제대로 풀지 못했다. 늘어지게 자려던 계획을 바꿔 해가 뜨자마자 회사로 바로 온 참이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어떻게 그걸 신고도 안 하고 넘어가요!”
“…그냥 그러자.”
“하아… 그럼! 적어도 이유라도 말을 해 줘요.”
도윤범은 여전히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모자를 눌러썼다. 앞머리를 올린 탓인지, 모자챙 아래 까만 눈썹과 형형하게 빛나는 두 눈이 맹수의 것처럼 날카롭게 느껴졌다. 어쩌면 그저 그의 불편한 심기가 두 눈에 그대로 드러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남도하는 생각보다 더욱더 날카로운 태도로 나오는 도윤범 때문에 당혹스러움을 느껴야 했다. 적당히 구슬리면 되리라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아마 이것도 그가 항상 말하는 ‘매니저 업무’에 포함되는 사항인가 보다.
“아니면 제가 신고해요. 이건 ‘어떤 개새끼가 장난쳤구나’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라고요.”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누군지도 모를 상대를 향한 욕설마저 심장을 철렁하게 할 정도였다. 정제되지 못한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하아… 신고해 봐야 소용없어, 이런 건.”
“그걸 형이 어떻게 아는데요.”
“해 봤으니까.”
처음엔, 도윤범을 타이르려 했다. 그리고 다음엔 짜증도 좀 내봤다. 하지만 남도하가 타이르려 할 때면 도윤범은 더욱더 기다란 설명을 붙이며 남도하를 설득했고, 짜증을 낼 때면 더욱더 딱딱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그렇다고 다친 놈에게 힘을 쓸 수도 없어서, 포기했다.
“이런 적 또 있었어요?”
“어.”
“언제요.”
“몰라도 돼.”
“형!”
앉아 있는데도 다리가 풀리는 기분을 알까? 지금 남도하가 딱 그랬다. 커다랗게 터져 나온 도윤범의 목소리에 남도하는 말문이 막혔다. 애써 맞추지 않고 있던 시선마저 다시 닿아 버렸다. 항상 웃음기가 가득 담겨 있던 도윤범의 두 눈이 마치 빨갛게 보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딱 그 정도로 날이 선 도윤범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의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그렇게 알아 둬…. 신고는 안 돼.”
말문이 막힌 남도하가 먼저 자릴 털고 일어났다. 도윤범도 화가 많이 난 것인지 뒤를 쫓지 않았다. 남도하는 주머니에서 무선 이어폰을 꺼내 양 귀에 꽂고, 빈 회의실에 들어가 앉았다. 지금으로서는 그 누구와도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아….”
지난밤엔 당연히 신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이 겹겹이 쌓여 갈수록 그러지 않는 쪽이 좋을 거라는 판단이 섰다. 만약 그 상자가 토끼 가면이 보낸 거라면, 경찰에 신고하는 순간 더욱더 귀찮은 상황이 되어 버릴 거라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그는 4층 집의 현관문을 통하지 않고 들어왔을 뿐만 아니라 외부인 출입이 까다로운 가라오케에 몰래 숨어들었다. 강태운의 교통사고와 관련이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더욱더 두려운 상대라는 말과 같다. 남도하 저와의 이해할 수 없는 힘 차이 역시 이리 행동하게 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기억이 왜곡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만났던 상대가 그다지 위협적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칼을 들고 오밤중에 쳐들어오긴 했지만, 결론적으로 그가 강태운에게서 지켜 준 셈이었다. 그의 경고를 듣지 않아 험한 꼴을 당할 뻔한 걸 한 번 더 구해 주기까지 했다.
그랬기에 이번에도 그가 그 상자를 보냈다면 무언가 주의를 주려는 걸 수 있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신고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라 그가 보내는 경고의 의미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머리가 잘린 쥐와 가짜 손가락이 의미하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그 앞의 협찬 의상이 난도질당한 건 또 뭐고.
지난밤에 이어 또다시 답 없는 고민이 어지러이 엉켜갔다.
“일어나요.”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남도하는 제 몸을 흔들어 깨우는 손길에 정신이 들었다. 고민을 하던 것인지, 깜빡 존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이어폰을 빼며 고개를 들자 여전히 한쪽 눈썹이 모나게 찌그러진 도윤범이 기다리고 있었다.
“야….”
“왜요.”
“표정 좀 풀어….”
원래 이렇지 않았는데…. 웃음이 많고, 귀 끝을 잘 붉히던 놈과 같은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도윤범은 한 손으로 제 얼굴을 한번 쓸곤, 신경질적으로 모자를 벗어 테이블에 던져 놓았다. 그러곤 남도하의 앞에 앉아 커피와 샌드위치를 테이블 위로 밀었다.
“드세요.”
“….”
“신고 안 할 테니까, 드세요.”
…그거 때문이 아닌데. 앞에서 뜨거운 콧김을 뿜어대는 저 때문에 없던 입맛도 달아나는 기분인데, 도윤범은 뭔가 착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나름 화를 눌러내는 게 보였기에 남도하는 커피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러곤 쏘아지는 눈살을 못 이기고 샌드위치까지 집어야 했다. 도윤범의 삐딱해진 눈썹은, 샌드위치 꽁다리까지 모두 남도하의 입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풀어졌다.
“진짜 이렇게 말 안 듣는 연예인 처음 봐요.”
도윤범이 팔짱을 꼈다.
“어린애도 아니고 정말.”
또다시 잔소리를 시작했지만, 남도하는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는 어느새 원래의 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너 매니저 처음이잖아. 그러니까 당연히 처음 보겠지. 어디 가도 형처럼 성격 좋은 사람 못 만나.”
그래서 남도하도 농담으로 받았다. 말 같지도 않은 고집을 피운 건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다. 그걸 이리 들어준 도윤범이 고마웠다.
“회사에 보고 안 했다가 저 잘리면 형이 책임져요.”
“그래.”
“…네?”
“형이 윤범이 책임질게, 평생.”
사실 남도하는 오늘 출근하자마자 매니지먼트 팀장을 찾아갔다. 도윤범의 인턴 기간을 늘려 달라 말하려고. 다른 매니저를 새로 구할 필요가 없다는 말까지 붙였다. 팀장은 쉽게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사람을 새로 구하는 귀찮은 일을 처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때문인지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 주었다. 아직 도윤범 본인에겐 그 내용을 전해지지 않은 것 같지만.
“뭐, 뭐 그렇게 쉽게 누굴 책임진다고 해요…?”
아, 이제야 완전히 원래의 도윤범이 돌아왔다. 귀 끝이 삽시간에 달아오르는 걸 보니 틀림없다.
“왜, 형이랑 평생 하기는 싫어?”
“펴, 평생… 이요…?”
남도하도 여러 매니저를 거쳐 보지 않은 건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도윤범이 상당히 괜찮은 축에 속한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가장 큰 장점은, 그가 옆에 있어도 불편하지 않다는 거다. 눈을 뜨고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함께하는 사람이 불편하다면, 그것만큼 힘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으면서까지 배우를 지켜 주려는 매니저 역시 흔치 않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사이 도윤범이 매니저 본분의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물론, 평생은 농담이다. 당황에 젖어가는 도윤범을 볼 때면 자꾸만 이런 장난을 치고 싶어져서 큰일이다.
“싫으면 말고.”
“뭐… 누가 싫대요….”
* * *
“야, 한 모금만.”
“형, 커피는 좀… 하아, 여기요.”
있는 사람이 더한다고 할까. 회사에서 지원하는 법인 카드 한도만 하더라도 자신이 받은 것보다 배는 될 텐데…. 남도하는 할 말이 많았지만, 그냥 제가 마시던 커피의 절반을 종이컵에 따라 이원호에게 주고 말았다. 어떻게 된 게 커피 한 번을 안 사 주면서 매번 이렇게 뺏어 먹는지 모르겠다. 도윤범이 있었다면 틀림없이 거절했겠지만, 안타깝게도 의상을 반납하고 새로운 걸 받으러 간 참이다.
“내가 지금 커피 사러 갈 정신이 없다.”
이원호는 남도하가 건넨 커피를 단번에 비워 내곤 테이블 위에 쓰러지듯 머릴 기댔다.
“촬영… 좀 전에 끝났어.”
“양우준이요?”
“그럼 누구겠냐….”
말을 하는 사이에도 이원호의 목소리가 잠에 절여지고 있었다.
“어쩌다가요…? 걔 저녁 촬영 아니었어요?”
“하아…. 말도 마라….”
이원호는 마치 좀비처럼 몸을 일으켰다. 퀭한 눈으로 당장에라도 쓰러져 잠들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도 그의 입은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서 부지런히 떠들어 댔다.
“양우준이 없어져요…?”
생각해 보니, 어제 촬영 중에 양우준을 본 기억이 없었다. 그때는 사고가 터지고 첫 촬영 중이라 워낙 정신이 없었으니 누가 있고 없는지를 챙길 겨를이 없기도 했지만, 어쨌든 보지 못했다. 양우준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도윤범의 사고 직후 서주언과 대화를 나누던 모습이었다.
“전화도 안 받아서 진짜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했는데, 촬영 시작 전에 오긴 했어. 근데 진짜 문제는 촬영 들어가서였지….”
이원호의 말에 따르면, 끝도 없는 NG 행렬이었단다. 고작 세 장면을 찍는데 아침까지 촬영이 이어졌다고.
“걔가 그 정도는 아니지 않아요…?”
“몰라. 내가 봐도 이상하긴 했어. 몇 줄 되지도 않는 대사도 제대로 못 치더라.”
양우준의 비중이 워낙 작다. 더군다나 단독으로 나오는 신도 거의 없어서 조금의 실수 정도는 상대 배우가 충분히 커버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연기가 그 정도로 형편없지는 않았다. 속히 말하는 ‘발연기’라 평가받을 정도는 아니라는 말이다. 적어도 남도하가 볼 때는 그랬기에 더욱더 이해되지 않았다.
“아주 다른 배우들이랑 스태프들 짜증이…. 하아… 이러다가 안 그래도 얼마 안 되는 비중 더 줄어들지는 않으려나 모르겠다.”
“그러게 왜 그런 역할을 하겠다고 생떼를 써 가지고….”라고 덧붙이며 이원호는 다시 테이블 위로 머리를 떨궜다. 자신이 떠들어 대고 싶던 말을 전부 쏟아 낸 것 같다. 때맞춰 남도하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에 떠오른 이름은, 지금으로서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 상대였다.
“네.”
- 죽을래?
“…안녕하세요, …형….”
지난밤부터 이어지던 감정이 옅게 남아 있던 탓일까. 남도하는 평소보다 딱딱하게 전화를 받았다. 누구에게라도 이렇게 대하는 경우가 흔치는 않았는데, 이상하게 이 남자에겐 모난 목소리가 자꾸 튀어 나간다. 서주언 말이다.
- 나와. 밥 먹자.
밥 못 먹어서 죽은 귀신이 붙었나. 입만 열면 밥 먹자는 말이 따라 나온다.
“오늘 촬영하시지 않아요?”
- 그러니까 빨리 나와. 시간 없어.
전화기를 귀에서 떼어 내고, 한숨을 한 번 푹 내쉬었다. 지금은 밥 생각이 없다. 아침엔 도윤범 때문에 억지로 샌드위치를 하나 넘기긴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몸이 피곤해져 밥보다는 집에 들어가 쉬고 싶은 생각이 몰려오던 참이었다.
“어디로요?”
- 너희 회사 앞.
창밖으로 내려다보니 회사 건물 앞에 까만색 밴이 서 있었다. 잠깐 기다리란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곤 걸음을 옮기다 휴대폰을 다시 꺼냈다.
“윤범아.”
-네, 형.
“나 잠깐 나가서 밥 좀 먹고 들어올게.”
어제도 촬영장에서 말도 없이 자리를 뜨려다 잔소리를 길게 들어야 했기에 오늘은 사전에 위치를 알려 주기로 했다.
-아… 그럴래요? 점심때 되기는 했네요.
“응. 너도 밥 사 먹고 천천히 들어와.”
막 전화를 끊으려 할 때 도윤범이 남도하를 불렀다.
-근데, 누구랑요?
“어…? 원호, 형.”
이상한 일이다. 틀림없이 서주언이라고 말하려 했는데, 입에서는 이원호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회사 테이블에 쓰러진 듯 잠든, 이원호. 아침도 부실하게 먹었으니 점심이라도 많이 먹으라는 도윤범의 잔소리를 들으며 전화를 끊었다.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기분을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하긴, 이원호나 서주언이나.
“도하야.”
“…네?”
남도하가 회사를 빠져나와 밴에 올라타자마자 서주언이 얼굴을 가깝게 끌어다 앉았다. 남도하는 생각보다 훨씬 넓고 좋은 차 내부에 정신이 팔려있다가 귓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그를 마주 보았다.
“잠 못 잤어?”
“아… 티 나요?”
서주언은 언제나처럼 TV를 뚫고 나온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얼굴이 두 뼘이나 될까 싶은 가까운 거리에서 남도하를 마주 보고 있다.
“왜? 어제 촬영도 일찍 끝났잖아.”
“그냥… 좀….”
그의 매니저가 운전하는 차가 식당으로 향하는 사이에도 서주언은 끈질기게 불면의 이유를 물어왔지만, 남도하는 입을 꾹 다물고 말하지 않았다. 그냥 잠이 안 왔다, 첫 촬영 때문에 긴장했나 보다는 둥 생각나는 온갖 변명을 붙이면서.
“그런데요…. 저번에 저 식사 중인 거 어떻게 알았어요?”
상대가 서주언인 탓에 룸으로 된 식당으로 왔다. 방에 들어와서도 끈질기게 이어오는 그의 질문에, 남도하는 질문으로 받아쳤다. 지난번 남도하를 긴장으로 몰아넣었던 서주언의 메시지 테러… 를 말하는 거다.
“아, 그거.”
서주언은 화보처럼 물 잔을 들어 올려 목을 축이곤, 테이블 위로 몸을 끌어 앉았다. 그의 모습을 보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은 저런 자세, 표정 하나까지도 연습을 하나. 쓸데없이 멋을 부리며 물을 마시고 있다.
“궁금해?”
“…네.”
“나도 그게 궁금했는데.”
“뭐가요?”
가깝게 다가온 그의 두 눈은 호기심을 숨기지 않았다. 원래, 서주언은 남성적인 이미지의 배우는 아니었다. 남자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그러지만… 굳이 나누자면 예쁘고 잘생긴 얼굴의 배우였다. 이온 음료 CF에 어울리는 맑은 이미지라고 할까. 지금, 그는 딱 그런 표정으로 남도하를 마주 봤다.
“너 무슨 사채라도 썼어? 아니면, 누구한테 쫓기거나.”
하지만 역시나 그의 입에선, 예쁜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질 떨어지는 말이 나왔다.
“갑자기 무슨.”
“그때 네 태도 봐서는 무슨 죄지은 사람 같던데. 아니면 쫓기는 사람이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엔 메시지를 보낸 상대가 토끼 가면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최근 일어난 일들이 남도하의 행동을 조심스럽게 만든 탓이다.
“그냥… 누군지도 몰랐으니까 그렇죠.”
“귀찮게 달라붙는 사람이라도 있나.”
“…….”
“맞네.”
서주언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웃었다. “도하는 거짓말 잘 못 하는구나.”라면서.
“어제도 그래서 잠 못 잔 거야?”
“하아… 맞아요.”
완벽히 맞다 할 수는 없지만, 그냥 그런 거로 치고 넘어가기로 했다. 대충 속아 주고 넘어가면 좋으련만, 그는 그런 배려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냥 알겠던데.”
“뭘요…?”
“너 생각보다 규칙적으로 살더라고. 맨날 회사 출근하고, 퇴근 시간 되면 집에 가고. 주변에 친한 연예인도 딱히 없잖아.”
“…….”
“그래서 그때쯤이면 집에 있을 거고, 시간으로 봐서 저녁 먹고 있겠구나… 찍었지.”
“하….”
꽤 합리적으로 들렸다. 누구에게 들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남도하의 연락처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평소 동선 또한 어렵지 않게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순간이라도 서주언을 토끼 가면과 연관 지었던 게 민망한 일이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바쁜 배우가 토끼 가면을 쓰고 괴한 짓을 하다니. 망상이 지나쳤다.
“우리 도하한테 관심 보이는 것들이 많나 보네.”
“아니, 아니에요! 관심은 무슨… 그럴 리가 없잖아요….”
놀리는 투는 아니었지만, 서주언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니 민망함이 극에 달했다. 그가 사는 세상엔 남도하 저가 경험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을 테니까. 모르긴 몰라도 남도하가 겪는 일을 일상처럼 여기며 살아가고 있을 거다.
“말하기 싫어하는 거 같으니까 더 묻지는 않겠는데, 가벼운 마음으로 넘기지는 않는 게 좋을 거야.”
“네…?”
“생각보다 극단적인 일도 꽤 많이 일어나. 아무리 애정이라도 하더라도 그 애정이 틀린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
조금 전까지 장난스럽던 서주언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선보일 때처럼. 그런 그의 경고가 조금 더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마치… 모든 걸 알고 말하는 것 같은 저 경고.
* * *
“이제 와요?”
“어…. 점심 먹었어?”
“네. 맛있는 거 드셨어요?”
서주언과 식사를 끝내고 오니 도윤범이 돌아와 있었다.
“옷을 뭐 이렇게 많이 받아 왔어.”
“글쎄요…. 촬영 때는 못 입어도 다른 때 입고 다니래요.”
“진짜 미안해서 어쩌지….”
애써 협찬까지 해 주었는데, 드라마 촬영 때는 의상팀이 준비한 협찬 물품을 입어야 해서 개인 물건을 착용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별도의 스케줄이 없는 남도하는 애써 협찬받은 옷을 입고 나갈 곳이 없었다. 다른 연예인처럼 별도의 스케줄이 없어 출근길, 퇴근길 모습이 찍힐 리도 없으니까.
“괜찮아요. 촬영장에서 잠깐씩 입으면 스틸 컷이나, 비하인드 영상에도 나올 거고… 나중에 인터뷰하고 그럴 때 입어도 되잖아요.”
“그거로 되려나….”
태연하게 넘기는 도윤범에게서는 아침의 짜증이 완전히 지워졌다. 그래서 남도하는 궁금하던 걸 묻기로 했다.
“윤범아, 혹시 어제 그 박스 어떻게 했어?”
“쥐만 버렸어요. 사진은 다 남겨 두고요.”
“잘했어. 그런데 그 안에 혹시… 편지 있지 않았어…?”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상자 안쪽, 정확히는 쥐와 손가락 아래쪽에 붉은색 글씨를 얼핏 보았던 것 같다.
“…네.”
“거기 뭐라고 쓰여 있었어?”
“모르는 게 나아요.”
“그래도 내가 알아야….”
“별말 아니었어요. 그냥 흔한 욕이에요, 형.”
도윤범은 남도하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으며 말을 끊었다. 명백히 말하고 싶지 않다는 의도가 읽혔다. 하지만, 그 메시지를 보낸 것이 토끼 가면이라면 그 안에 꼭 알아야 하는 내용이 들어 있을 수도 있다.
“그래도 내가 알아야 할 내용이 있을 수도 있고….”
“형, 절대 아니에요. 그냥 욕이었어요. 저 못 믿어요?”
단호한 도윤범의 태도에 한발 물러섰다. 신고도 못 하게 하고 회사에도 알리지 않았다. 거기에 제 말까지 믿어 주지 않은 탓인지, 도윤범의 얼굴이 작게 굳어졌다. 그런 그에게 제 고집만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다음에 다시 분위기를 봐서 묻기로 했다. 지금은 한발 물러설 타이밍이라 판단했다.
“집에 가요. 아무래도 형 일찍 가서 쉬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안 그래도 피곤이 몰려와 그래야겠다 싶었다. 당장 내일 촬영이 있어서 오늘은 어떻게라도 조금 쉬어 둬야 했다. 협찬받아 온 옷 중 몇 개만 챙겨 든 도윤범이 앞장섰다. 앞에서 걸어가는 그를 보며 남도하는 생각했다. 상처가 다 나으면 모자는 쓰지 말라고 해야겠다고. 이상하게 그가 모자를 눌러 쓴 탓인지, 오늘따라 도윤범의 얼굴이 유달리 매섭게 느껴졌다.
* * *
“내일은 점심 촬영이지?”
“네. 점심 먹고 가면 될 거 같아요. 근처 공원이랑 세트에서 찍을 거라 미리 안 나가도 돼요.”
“그래. 너도 그럼 천천히 와.”
고작 옷가지 몇 개 옮기는 건데, 집 앞에 도착한 도윤범은 굳이 제가 그 옷더미를 들고 남도하의 뒤를 따랐다. 이상하게 오늘은 고집이 센 도윤범이라 한참 실랑이를 하다 결국 그의 뜻대로 하도록 둬야 했다.
“…어?”
그리고 4층에 도착했을 때, 남도하의 걸음이 멈춰 섰다. 어제와는 다른 이유로.
“이거… 왜 이래요?”
남도하의 시선을 따라간 도윤범의 목소리에도 의문이 깃들었다. 그는 뻣뻣하게 굳은 남도하의 품에 옷더미를 넘기곤, 엉망으로 망가진 도어락을 살폈다.
“뭐로 박살 낸 거 같은데요….”
그가 툭- 손을 대자마자 아슬아슬하게 문에 붙어 있던 도어락이 통째로 떨어져 내렸다. 낡은 문고리도 함께였다.
끼이익.
도윤범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앞장서 들어섰다. 남도하도 그의 뒤를 따랐다. 몇 년을 살아 익숙한 집이었음에도 마치 처음 발을 들이는 곳처럼 낯선 공기가 집 안을 채우고 있는 것 같았다. 기분 탓인지 폐부로 스며드는 숨이 유달리 차게 느껴졌다. 현관에 발을 들이자마자 등덜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흙먼지가 엉망으로 뿌려진 현관을 보곤 두 사람은 신발도 벗지 못한 채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이게….”
짧은 복도를 지나 눈에 들어온 광경에, 남도하는 품에 들고 있던 옷더미를 놓쳐 버렸다. 커다란 베란다 창이 깨져 있고, 커튼은 날카로운 것에 엉망으로 찢겨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린다. 집 안의 모든 가구와 물건이 박살 나 있다. TV는 양쪽으로 갈라져 바닥에 처박혀 있고, 흙먼지가 잔뜩 묻은 발자국이 거실에 가득했다.
“…뭐야….”
그리고… 그 난장판 가운데, 머리통이 터져 하얀 솜을 토해 내는 곰 인형이 놓여 있었다. 한쪽 눈알이 얼굴에서 떨어져 길게 이어진 실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남도하가 인형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이, 도윤범은 빠르게 집안을 훑고 돌아왔다.
“도둑은… 아닌 거 같죠?”
“어? 어….”
쉽사리 무엇 하나 손대지 못한 채 대화를 나눴다. 제 집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난장판이 된 꼴을 보자니 어떤 걸 확인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살림이라고 부를 만한 작은 2인 소파와 테이블, TV와 식탁까지 전부 박살이 났다. 그럼에도 어제의 사건이 떠오른 남도하는 도윤범의 의견에 동의했다. 도둑이라면 이리 난장판을 만들어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티 나지 않게 필요한 물건만 챙겨 조용히 나갔을 테다.
“우선 옷만 간단하게 챙겨요.”
“…왜?”
“여기 있을 거예요?”
“아….”
이번에도 도윤범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방 안으로 남도하를 이끌며 옷가지를 챙기길 기다렸다. 방 안의 모습도 거실과 다르지 않았다. 대체 무엇으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방으로 찢겨 나간 침구뿐만 아니라 침대 자체도 한쪽 다리가 부러져 삐딱하게 자빠져 있었다.
“경찰에 신고해야겠지?”
“…네.”
쌓여 가는 긴장을 털어내려 입을 열었다. 옷가지 몇 개를 챙기고, 속옷을 가방에 넣다 보니 깊은 안쪽에 어두운 색깔의 시계 케이스가 눈에 들었다. 잠깐 망설이다 그것도 가방에 넣었다.
“가요.”
“경찰… 안 부르고…?”
“제가 해요.”
짐 가방을 뺏어 든 도윤범이 남도하의 손을 잡았다. 손을 타고 전해지는 낯선 감각에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온 신경이 난장판이 된 집에 쏠린 탓이다. 화라고 하기도, 공포라고 하기도 애매한 감정이었다. 그 정도로 지금 벌어진 일이 비현실적이었다. 머릿속이 곤죽이 되어 버린 것처럼 하나의 생각도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 * *
“여기서 기다려요.”
“너는?”
“경찰에 신고하고 올게요. 끝내고 금방 올 테니까 쉬고 있어요.”
도윤범이 이끄는 손길을 따라 낯선 공간에 들어섰다. 이동하는 내내 두 사람 사이에 별다른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어디로 간다는 말도, 어디로 향하는 것이냐는 물음조차 없었다.
“어디야, 여기?”
“저희 집이요. 호텔은 좀 그럴 거 같아서요.”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었다. 깨끗하게 정리된 방이었다. 취침 이외의 용도는 없는 것인지, 붙박이 옷장과 침대, 협탁과 스탠드만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그 정갈한 모습이 도윤범과 잘 어울리기도 했고, 어색하기도 했다.
“혼자 있어도 괜찮겠어요?”
침대에 걸터앉은 남도하를 향해 도윤범이 상체를 숙이며 다가왔다.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가깝게 좁혀진 얼굴을 보고야 정신을 차렸다. 걱정이 한가득 담긴 얼굴 말이다.
“괘, 괜찮아. 아니다… 같이 가자.”
참 이상한 일이다. 나이도 저보다 세 살이나 어린놈에게 자꾸만 의지하게 된다. 언제나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하곤 했으면서 마치 오랫동안 누군가에게 기대 왔던 것처럼 굴게 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매니저라고 하더라도 이런 일에 경험이 있을 리 만무한 그에게 떠맡기는 것보단 직접 나서는 쪽이 옳다는 생각에 뒤늦게 들어 몸을 일으켰다.
“앉아요.”
아니. 일으키려 했지만, 양쪽 어깨가 도윤범에게 잡혀 그대로 다시 엉덩이가 침대에 닿아 버렸다. 조금 전까지 걱정을 담았던 까만 눈동자가 뾰족해졌다. 목소리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도 내가 가서….”
“형, 이번엔 제 말 들어요. 어제 일… 하아… 아무튼, 이번엔 제 말대로 해요.”
남도하는 바로 알아챘다. 도윤범이 삼켜 낸 말은 ‘어제 일 경찰에 신고만 했어도 이런 일 없었잖아요.’라는 걸. 그리고 지금 도윤범에겐 아무 말도 먹히지 않을 거라는 것 역시. 어쨌든 이 일은 매니저의 담당 업무라는 거다.
“…알았어. 대신 혼자 들어가지 말고 경찰 불러서 같이 들어가, 알았지?”
남도하의 입에서 제가 원하는 답이 나온 후에야 도윤범의 시선이 풀어졌다. 쉬고 있으라는 말을 남긴 그가 집을 빠져나가고, 혼자 남은 남도하는 침대에 그대로 쓰러져 누웠다. 높다란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해 보니 오늘 도윤범의 새로운 모습을 많이 본 것 같았다. 그동안 그놈이 화를 낼 때면 약간 투정을 부리는 것 같아서 귀엽곤 했는데, 오늘만 보자면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도 어려웠다.
아니다. 지금 상황엔 그런 장난스러움을 담아내는 게 더 이상하겠지. 어떻게 보면 저 반응이 더 자연스러운 걸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쨌든 다른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도윤범의 화가 난 얼굴이 뇌리에 길게 남았다. 몰려오는 두통에 눈을 감았다.
“…형.”
흐릿한 정신 사이로 들리는 부름에 느릿하게 눈을 떴다. 그사이 잠이 들었던 것인지, 깊은 수마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었다. 돌아온 도윤범에게서는 바깥의 차가운 기운이 옅게 묻어났다.
“…미안, 잠들었나 봐.”
“잘했어요. 잠깐이라도 자야죠.”
어둑해진 창밖을 보니 잠깐 잠든 게 아닌 것 같았다. 몸을 일으켜 앉은 남도하는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정신을 차렸다. 뒤늦게야 팔자 좋게 늘어져 잤던 게 민망해졌다. 그럴 상황이 아닌데 심하게 여유로웠다.
“어떻게 됐어?”
“경찰에서 조사한대요. 근데 동네에 CCTV도 거의 없어서 쉽지 않을 거 같아요.”
“하아…. 그래, 수고했어.”
“그래도 한동안은 집에 못 갈 거 같아요. 다시 보니까 멀쩡한 게 하나도 없어요.”
정신이 없어 제대로 살피지도 못했지만, 얼마 되지도 않는 옷가지를 제외하고 제대로 된 형태를 한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은 기억이 난다. 그리고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살림살이 몇 개 부서진 게 아니기도 하고.
도윤범은 남도하의 옆에 엉덩이를 대고 앉으며 입을 열었다.
“근데 형….”
“어…?”
“전에도 경찰에 신고한 적 있다면서요.”
“…….”
“저한텐 그런 얘기 없었잖아요.”
남도하는 고민했다. 이 상황에서 도윤범에게 ‘그 일’에 대해 털어놓아도 될까. 최근 들어 그에게 의지하는 것과는 별개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모든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반응도 머릿속에 그리고 싶지 않고, 적당한 거짓말을 섞어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게… 잘 모르겠어.”
“네…?”
그래. 지금은 아니다.
“나중에 얘기하자, 나중에….”
남도하는 스스로 먼저 답을 내리고 싶었다. 그저 느낌일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경찰은 이번 일에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스쳤다. 지난번 신고했을 때와 같이 흐지부지 넘어가게 될 거라는 불신이 들었다.
“조금만 기다려 줘.”
엉켜 버린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 * *
“형, 그래도 어떻게 모텔에서 지내요.”
“그게 편해.”
도윤범의 집에서 씻고, 속이 좋지 않다는 말로 저녁 식사를 거절한 남도하는 짐을 챙겼다. 생각해 보니 더 이상 그에게 폐를 끼치기도 미안했다. 얼마나 머물러야 할지도 모르는데 인턴 매니저의 방 하나를 차지하고 있을 수는 없다.
“제가 안 편해요. 어차피 빈방이고, 저 밥 먹을 때 같이 먹는 건데요, 뭘.”
누군가에 민폐를 끼치는 건 딱 질색이다. 도윤범 입장에서 보자면 회사 직장 상사를 집에 들여 같이 생활하는 꼴이 아닌가. 출근해서도, 퇴근해서도 일상을 함께하는 게 좋을 리 없다. 그 정도로 눈치가 없지 않다.
“고마워. 근데 그냥 혼자 있는 게 편해서….”
“그럼 제가 나갈까요?”
“뭐…?”
“형이 여기서 지내요, 그럼. 차라리 제가 모텔에서 지내는 게 낫죠. 그럴까요?”
도윤범도 물러설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집에 침입한 범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혼자 두냐, 배우가 모텔에 드나드는 건 보기 좋지 않다는 둥. 마치 준비된 것 같은 잔소리가 쏟아졌다.
“며칠만요. 아니, 집 청소 끝날 때까지만 여기 있어요.”
건네는 말은 설득이고 제안이 틀림없었는데, 도윤범이 무력을 행사했다. 남도하의 어깨에 걸린 가방을 뺏어 들곤 방으로 등을 떠밀었다.
“이래야 제 마음이 편할 거 같아요.”
힘으로 하자면 남도하 제 뜻을 굽힐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남도하는 그 손길을 따라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찍 쉬어요. 오늘 피곤했잖아요.”
별다른 말 없이 문을 닫고 나가는 도윤범이 눈치챈 것 같았다. 남도하 제가 오늘 이 방에서 잠을 잘 거라는 걸, 적어도 집이 정리될 때까지는 여기에 머물 거라는 걸.
“하아….”
남도하는 방 안에 홀로 남겨진 뒤에야 자괴감이 들었다. 어쩌면 저는 처음부터 도윤범이 저리 말해 주길 바란 건 아닐까… 싶은 생각에. 어린 매니저 입에서 저런 말이 튀어나오도록 유도한 건 본인이 아닐까 싶었다. 모텔에서 지내는 게 편하다는 허풍을 떨며, 실은 그가 붙잡아 주길 바라며. 이리도 쉽게 마음이 바뀐 걸 보면, 썩 틀리진 않을 것 같았다.
도윤범이 먼저 저리 말해 준 덕분에 초라하기만 한 현실을 드러내지 않아도 됐다. 모텔비도 아깝고, 누구 며칠 신세 질 사람마저 딱히 없는 현실 말이다. 뭐… 그렇다고 그에게 신세를 져야 하는 마음이 썩 편하진 않았다. 한없이 쌓여 가는 고맙고 미안한 일들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꽤 오래 바닥에 앉아 있다 옷을 갈아입고 불을 껐다. 속이 시끄러워 침대에 누워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토닥, 토닥.
규칙적으로 등을 작게 두드리는 감각이 기분 좋다. 뒤통수를 가볍게 쓸어내리는 손길 역시 그렇다. 몸을 감싸는 온기도 포근해 남도하는 그 열기가 퍼져 나오는 곳으로 몸을 조금 더 붙였다. 그러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깼네.”
…그런 온기가 느껴져서는 안 되니까. 눈을 뜨고 몸을 살짝 뒤로 물리자마자 하얀 토끼 가면이 시야를 채웠다.
“다, 당신… 읍…!”
“조용히.”
정신을 차린 남도하의 입에서 발작 같은 소리가 튀어나오자 남자는 장갑을 낀 손으로 입을 막아버렸다. 여전히 지직거리는 기계음으로 변조된 목소리가 짧게 경고했다.
“남도하.”
남도하와 같이 침대에 누워 있던 그는 먼저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입을 막고 있던 손도 떼어 냈다.
“바, 밖에 다른 사람 있어요.”
“알아. 그 새끼 어떻게 될지 궁금하면 한번 소리 질러 봐.”
그리고 오늘 그는 기분이 매우 언짢은 것 같았다. 그저 기계음일 뿐이지만, 상당히 차갑게 느껴졌다. 앞선 두 번의 만남과는 다르게 반말을 뱉어 내는 것도 그런 생각을 키웠다.
“아뇨! 그, 그런 게 아니라….”
말을 하고 난 후에야 아차 싶었다. 도윤범에 대해 숨겨도 모자랄 판에 같이 위험에 빠트려 버린 거 아닌가. 상대가 이 토끼 가면이라면, 도윤범과 함께 덤벼도 이길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남도하는 남자의 눈치를 살피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다른 의도가 없다는 걸 내보이려 그를 바라보며 느릿하게 움직였다. 토끼 가면은 남도하가 몸을 일으켜 앉고 나서도 한참이나 움직임도, 말도 없이 앉아 있었다. 가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왠지 제게 닿는 그의 시선이 뜨겁게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길어지는 침묵을 이기지 못한 남도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호, 혹시… 제가 그 드라마 해서 이래요…?”
“살인자의 밤.”
역시, 상대는 알고 있었다.
“그거 때문에 온 거 아니고.”
택배 상자를 받은 후, 만약 범인이 토끼 가면이라면 틀림없이 그 드라마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전에도 살인자의 밤 출연 미팅을 취소하라 했었으니까. 결론적으로 그 미팅 자체보다도 강태운이 문제인 것 같았지만, 어쨌든.
“지난번에 신고했던데.”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첫 만남을 말하는 거다. 두 번째 만남에 대해서는 경찰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으니까.
“그건…!”
“조용히 해. 오늘은 내가 물을 때만 입 열어.”
남자는 부드럽게 강요했다. 장갑을 낀 손으로 남도하의 한쪽 뺨을 간지럽히며, 변조된 기계음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짜증을 담아서. 상반된 분위기 때문에 변명을 토해 내려던 남도하의 입이 다물어졌다. 아래턱을 힘주어 물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에게 뱉어 낼 변명 따위가 준비되어 있지도 않다는 걸.
“어젠 왜 신고 안 했지.”
질문인지 아닌지 헷갈린 탓에 남도하는 입을 열지 못했다. 괴한이 손끝으로 입술께를 톡톡 두드리며 재촉할 때야 저를 향한 물음이라는 걸 깨닫곤 입을 열었다.
“그, 그건….”
긴장 때문인지, 그가 주의를 줬던 탓인지. 남도하의 입에선 제 귀에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 초라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대답.”
다시 한번 답을 재촉하는 토끼 가면을 바라봤다. 팔 하나 정도의 간격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남도하 저와 닿아 있지 않은 상대의 다른 손에 뭐가 들려 있을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어둠에 가려진 반대쪽 손엔 진짜 칼이 들려 있을지도 모른다.
“…그전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그런데도, 영혼까지 용기를 끌어모아 입을 열었다. 사내도 남도하의 질문은 예상 밖이었는지, 잠깐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남도하에게 그 시간은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당장에라도 질문을 취소하고 싶을 정도로.
“해 봐.”
그의 허락을 듣고 숨을 깊게 삼켰다.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를 애써 눌러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어제와 오늘, 남도하의 깊은 고뇌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던 의문을 던졌다.
“…어제 그쪽이 택배 보냈어요?”
손가락으로 남도하의 뺨을 가볍게 간질거리던 그의 움직임이 멎었다. 틀림없이 조금 전과 같은 토끼 가면일 텐데, 삽시간에 그 아래에서 흉포한 시선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남도하.”
“예, 예…?”
착각이 아니었는지, 남자의 입에서 튀어나온 부름도 지나치게 차가웠다.
“난 이렇게 네 손가락을 직접 잡을 수 있는데, 내가 왜 가짜 손가락이나 보내야 하지?”
뺨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팔뚝으로. 손등을 지나 검지를 쓸어내리며 읊조리는 말에 심장이 철렁했다. 남도하는 저도 모르게 남자를 피해 두 손을 뒤로 돌려 맞잡았다.
‘네 손가락을 직접 잘라도 되는데 왜 가짜 손가락을 보내냐.’는 뜻과, ‘어쭙잖게 택배의 내용물을 숨기려 들지 말아라.’라는 그의 뜻이 읽힌 탓이다. 몇 번 마주하진 않았지만, 이쯤에서 남자의 기계음 섞인 웃음소리가 튀어나와야 하는데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그 침묵에 남도하는 손을 다시 앞으로 돌려 이불 위에 내려놓았다.
“그럼 이제 내가 물은 말에 대답해.”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남도하의 손목을 낚아채며 재차 물어왔다. 잊은 건 아니다. 남도하 제가 묻기 전에 남자가 먼저 물었던 질문을.
“…그, 그쪽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조금 전 그가 꺼내 든 말로, 그가 보낸 택배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여전히 뭔가 못마땅한 듯 한쪽으로 삐딱하게 틀어진 토끼 귀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만약에 그쪽이 보낸 거면, 저번처럼 뭔가 도움을 주려고 한 걸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머릿속을 떠돌기만 하던 생각을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었던 탓일까. 남도하는 제 입에서 단어 하나하나 튀어나올 때마다 뒷덜미가 축축해지는 것 같았다. 제가 뱉어내는 말을 이해할수록 서늘한 땀이 목덜미를 적셨다. 괴한에게… 도움이라니.
“…그래서, 신고도 안 했다.”
“…….”
어쨌든 이 괴한이 보낸 걸 수도 있어서 신고하지 않은 건 맞다. 그게 무언가 경고를 하려 하는 거라고 믿었던 탓도 있고, 두려움도 있다. 신고 후의 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지금도 이렇게 새로 옮긴 거처를 바로 찾아온 걸 보라.
“이거… 내가 오해할 뻔했잖아요.”
“예…?”
“난 또 남도하 씨가 스토킹 즐기는 줄 알고 화낼 뻔했어요.”
갑자기 남자의 말투가 바뀌었다. 오늘 처음으로 존댓말이 나왔다. 그의 입에서 “참길 잘했네.”라는 말이 나올 땐 조금 얼이 빠졌다. 변조된 음성에서도 정제되지 않은 감정이 그대로 읽혔는데, 만약 참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나 때문에… 신고도 안 했다는 말이죠.”
남자는 규칙적인 속도로 남도하의 손등을 두드렸다. 삐딱하게 돌아갔던 토끼 귀도 제 위치를 잡았다. 거리도 한 뼘쯤 좁혀진 것 같다.
“그래도 저번에 신고한 건 혼나야죠.”
“그건…!”
“그건, 뭐.”
‘다 지난 일을 왜 이제 와 얘길 꺼내냐, 너도 신고해도 상관없다고 하지 않았냐.’라는 설명을 최대한 모나지 않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꺼내 놓아야 했다. 다시 존댓말을 사용하고 있다지만, 그와의 관계가 변한 것은 아니니까.
“뭐, 그럼… 상이라고 해요.”
몸을 일으킨 남자가 침대 옆 협탁의 스탠드를 켰다. 갑자기 밝아진 시야에 눈을 깜빡이던 사이, 양반다리를 하고 있던 남도하의 다리 위에 뭔가가 올라왔다.
“…이게 뭐예요?”
“상.”
절대 일반적으로 보이지 않는… 3단 자개 찬합이었다. 까만 배경에 흐트러지는 매화 가지가 자개로 그려져 있었다. 남자는 장갑 낀 손으로 직접 도시락통을 풀어 놓았다. 안에서 튀어나온 건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것이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먹어요.”
“이, 이걸요…?”
제일 밑단엔 밥이 있었는데… 한 폭의 그림처럼 검은색, 붉은색, 노란색, 보라색, 흰색으로 꽃과 나무, 바위가 그려져 있었다. 손을 대기도 미안할 정도로 완성도가 높았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칸에는 어디 한정식집에서 만든 듯한 갖가지 음식이 가득 들어있었다. 밥을 제외하고 딱 열두 개였다.
“빨리.”
손에 쥐여 주는 젓가락을 들고 남자와 도시락을 번갈아 봤다. 갑자기 들이닥친 상대도 당황스러운데, 화를 내다가 밥을 먹으라는 건 더 당황스럽다. 그럼에도 손에 든 젓가락을 움직여야 했다. 저녁을 거른 탓인지, 반강제로 식사하는 지금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게 맛이 나쁘지 않았다.
“잘 먹네.”
애써 앞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무시한 채 식사를 이어 가던 중 들려온 목소리에 젓가락질을 멈췄다. 그가 뱉어낸 말에야 정신이 들었다. 지금 상황에 지나치게 위기의식이 없었다. 속 좋게 괴한이 싸 온 도시락을 먹고 있다니.
식사를 멈추고 마주 보자 상대는 턱짓으로 식사를 이어가길 종용했다. 다시 식사를 시작하면서 생각해 봐도 이상할 정도였다. 낯선 남자가 무서운 느낌 한 편으로 그렇지 않기도 했다. 갑자기 칼을 꺼내 들어 위협할 것 같다가도, 이리 그를 앞에 두고 밥을 먹는 게 불편하지 않기도 하다.
“어제 받은 택배는 제대로 신고하는 거예요, 알았죠? 지저분하잖아.”
입안에 음식물이 있어 고개만 작게 끄덕여 답했다. 저번부터 이 남자는 가끔 어린아이에게 하듯 남도하를 대하곤 했다. 얼굴이나 손을 만지는 손길도 그렇고, 저런 유치한 단어 선정도 그렇고. 물론, 그가 화를 내는 것보다는 저쪽이 낫기는 하다.
“저기….”
“왜요.”
“…더는 못 먹겠어요.”
미련하다 싶을 정도로 욱여넣었는데도 절반 가까이 음식이 남았다.
“입맛에 안 맞나….”
혼잣말처럼 읊조린 토끼 가면이 남은 반찬들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입맛의 문제가 아니라 홀로 먹기에 지나치게 많은 양이 문제였다. 맛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도 나쁘지 않게 느껴질 정도로 훌륭했다.
“다음엔 양식으로 준비해야겠네.”
“아뇨!”
그가 건네준 물을 마시던 남도하는 사레가 들릴 뻔했다. 한식과 양식 중 한식을 더 선호하는 건 차치하고, 다음이라는 말이 싫다. 왜 저 혼자 자꾸 다음 만남을 기약한다는 말인가.
“그렇게 대놓고 싫은 티 내면 내가 곱게는 못 가는데.”
“아니… 그게 그러니까….”
도시락통을 정리한 남자가 삐딱해졌다. 커다란 찬합을 침대 한쪽으로 밀어 두곤 남도하의 손에 들린 물병마저 빼앗았다.
“내놔.”
“뭐, 뭘요…?”
“밥값.”
하마터면 욱해서 소릴 내지를 뻔했다. 먹겠다고 한 적도 없는 도시락을 싸 와 반강제로 먹인 주제에 이제 와 밥값을 내라니.
“…얼만데요….”
그 끓어오르는 울화와는 다른 말을 뱉어냈다. 애써 풀어진 것 같은 괴한의 기분을 다시 상하게 하고 싶지도 않고, 원하는 게 돈이라면 빨리 가지고 사라져줬으면 좋겠어서.
“남도하 씨는 항상 돈으로 일을 해결하려 하네. 생각해 보면 더 쉬운 방법도 있는데.”
“…그게 무슨….”
슬쩍. 남자가 남도하의 손목을 당겼다. 재촉이 담긴 손짓에 그의 말에 숨겨진 속뜻을 알아챘다.
“…안아 줘요…?”
정답인 거 같다. 하지만 태연히 말한 것과는 다르게 남도하는 쉽사리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첫 만남엔 너무 당황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고 포옹을 해 줬지만, 이번엔 쓸데없이 이성적인 상태라 그렇다.
“아님 여기서 그냥 자고 가도 되고.”
이어지는 말이 고민을 끝내 줬다. 빠르게 사내의 팔을 낚아채 품으로 잡아끌었다. 차라리 잠깐 그를 끌어안고 말지, 같이 자고 싶은 생각은 없다. 빠른 속도로 당긴 탓인지 조금은 강하게 부딪혀오는 그의 어깨와 허리춤을 감쌌다. 뒤늦게야 남도하는 손바닥에 땀이 배어나는 거 같았다.
“그런데요.”
상대도 남도하의 허리를 가볍게 끌어안으며 입을 열었다.
“원래 이렇게 아무나 쉽게 안아 줘요?”
“무, 무슨…!”
“가만히, 있어요.”
말도 안 되는 의심에 남도하는 몸을 털어 내려 했지만, 허릴 감싼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가며 움직임을 막아 버렸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때문에 두 팔을 다시 등 뒤로 둘러 감아야 하는 것도 당연했다.
“대답해야죠.”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요….”
목숨이 걸려 있으니 어쩔 수 없지 않냐고 하면 안 되겠지. 원래는 그렇지 않은데 너한테만 이러는 거다, 라고 해도 안 될 거 같고. 별거 아닌 물음에 생각이 복잡해져 버렸다.
“계속 후회되네.”
길어지는 침묵을 깨고 남자의 입에서 이상한 말이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내가 실수한 거 같아.”
그러곤 먼저 몸을 떼어 내며 가까운 거리에서 남도하를 바라봤다. 그제야 보였다. 토끼 가면의 하얀 털 일부에 남아 있는 색 바랜 얼룩이. 아마 이전 만남에서 남은 참상일 것이다. 그… 강태운의 흔적.
“그러니까. 자꾸 후회하게 만들지 말아요.”
여전히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알아들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래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가면 아래에서 상대가 미소를 짓고 있을 것 같다.
* * *
“일어났어요?”
“미안…. 내가 늦잠 잤나 봐.”
“아니에요. 아직 시간 충분해요. 앉아요, 밥 먼저 먹어요.”
남도하는 방에서 나오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민망함이 커졌다. 도윤범은 이미 음식이 차려진 식탁에 앉아 있다가 남도하가 나오자 냄비가 올려진 가스 불을 켰다.
“잘 잤어요?”
“어? 어….”
잘 잤다. 몰려 있던 피로를 모두 풀어낸 것처럼 몸이 개운했다. 자다 깨 괴한이 싸다 준 도시락까지 먹어서 속도 허하지 않다. 더군다나 그 괴한으로 인해 하나의 고민이 덜어졌으니 마음마저 약간 편해졌다. 하지만 얹혀사는 주제에 과하게 태평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윤범아.”
“네?”
“엊그제 그 택배도 신고하자. 회사에도 얘기하고, 필요하면 내가 경찰서 갈게.”
식탁에 앉아 준비한 말을 꺼냈다. 지난밤 토끼 가면이 떠난 후, 뒤늦게 불안이 치솟았다. 세 번째 마주한 그에 대한 게 아니었다. 그가 아닌, 제3의 인물이 있다는 부분 말이다. 누구인지도, 의도도 알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게 생각 이상으로 찝찝했다.
확실한 건 남도하 저를 향한 악의적인 감정이 가득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제야 토끼 가면에게 묻지 못한 말을 떠올렸다. 손가락 택배뿐 아니라, 집이 박살 난 것과 옷이 엉망으로 찢겼던 것. 그에 대한 걸 묻지 않았다.
“왜 갑자기… 생각을 바꿨어요?”
“…그냥. 그리고 사실은….”
도윤범은 끓어오른 국을 그릇에 담아 자리에 앉았다. 남도하는 식사를 시작하는 대신 입을 열었다.
“전에 그 협찬 옷 난도질한 것도 같은 놈인 거 같아.”
“…옷… 이요?”
“어. 그 옷이랑 택배… 그리고 집 박살 낸 거까지.”
괴한에게 확답을 듣지는 못했지만, 스스로 답을 내렸다.
“그리고요?”
“어?”
“그게 다예요?”
도윤범은 뾰족한 시선으로 남도하를 직시했다. …마치 무언가를 알아챈 것처럼, 혹은 뭔가를 캐내려는 것처럼.
그 물음에 남도하는 다시 한번 낯선 남자를 떠올려야 했다. 적어도… 그 토끼 가면이 그런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것 같다.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모를 믿음이지만, 그런 답을 내렸다. 다음, 그가 말했던 다음 만남 때 물으면 될 일이다. 어쩐지 다음이 머지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응, 그게 다야.”
그리고 아직, 그에 대한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지 않았다. 무언가 못마땅한 듯 미간이 접히는 도윤범이라고 하더라도, 말하고 싶지 않다.
* * *
“이건 좀 곤란한데요.”
“하아…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이건.”
“그렇죠. 선택할 문제가 아니죠, 이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는 남도하는 당황스러웠다. 이미 촬영 준비도 끝난 상황에 도윤범의 저지로 촬영은 시작도 못 하고 있다. 문제의 발단은, 남도하의 한마디였다. 아니, 그보다 앞서 그에게 전해진 촬영 소품으로 나온 맥주였다.
“전범 기업에다가 한국에서 팔지도 않는 맥주를 들고 자연스럽게 찍으라는 거잖아요. 심지어 이 제품 상표권 소송까지 진행 중인데요.”
처음 보는 제품이었다. 외국어로 쓰여 있는 패키징뿐만 아니라, 브랜드마저 낯설었다. 그에 의문을 표하자 도윤범은 그대로 그걸 들고 조연출과 부딪쳤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이 됐다.
“이거 벌써 PPL 확정된 거라 어쩔 수 없다니까요. 감독님도 작가님도 다 컨펌한 건데 왜….”
“그렇겠죠. 나중에 문제 돼도 저 전범 맥주 들고 있던 사람은 본인들이 아니니까요.”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제작사와 연출진 입장을 생각하자면 이미 투자받은 금액이 있으니 해당 제품의 노출 빈도를 지켜야 하는 걸 이해한다. 머리로는 그들의 상황이 이해되지만, 도윤범이 하는 말도 하나같이 옳은 말이라 누구를 말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요즘 시청자들 옛날이랑 달라요. 이런 거 귀신같이 알아본다고요.”
“그래서, 못 하시겠다고요?”
항상 사람 좋은 척하던 조연출도 슬슬 짜증이 몰려오나 보다. 지연되는 촬영으로 다른 스태프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기어이 감독까지 저 멀리서 몸을 돌려 무슨 일인지 확인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 PPL 제품 하나 안 들었다가 일이 완전 엉망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 막 남도하가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어, 못 해.”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가 작게 벌어졌던 남도하의 입을 다물게 했다.
“…일찍 오셨네요….”
“지금 나더러 이딴 걸 들고, ‘아, 시원하네.’ 이런 대사를 치라는 거잖아.”
서주언이다. 그는 도윤범의 손에 들린 맥주를 이리저리 돌려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생각해 보니 서주언도 집에서 맥주를 마시는 장면이 있었다. 여러 맥주를 협찬받은 건 아닐 테니 그도 남도하와 같은 걸 마셔야 한다는 말이다.
“내가 이래 보여도 한국 음식 홍보대사야.”
서주언이 쏟아 내는 비틀린 비아냥에 조연출은 별다른 말을 붙이지 못했다. 그러곤 결국 감독을 불러왔지만, 연출과 작가, 제작사 그 누구도 서주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그렇게 두 사람의 깽판 아닌 깽판으로 시작도 못 한 촬영이 일시 중단되었다.
“형, 잠깐만 기다려요.”
“어디 가?”
“차에서 마실 거 좀 가지고 올게요.”
도윤범이 자릴 뜨기 무섭게 다른 인물이 다가왔다. 서주언과 그의 매니저다.
“우리 도하가 생각보다 고집 있네.”
“아니 저는 그냥 처음 보는 제품이라….”
서주언은 넓은 촬영장 중 굳이 남도하의 옆에 제 자리를 펼쳤다. 그리고 어디서 구한 건지 남도하가 쓰던 것과 비슷한… 아니, 그보다 더 요란한 접이식 의자를 준비해 왔다. 팔걸이까지 만들어지는, 몸이 거의 눕혀지는 의자. 태평하게 눕는 모습이 꼭 홀로 휴양을 온 것 같았다.
“제가 한 것도 아니고 매니저가 다 말했는데요, 뭘.”
“그러게. 저거… 아니, 쟤가 보기보다 똘똘해?”
그렇다. 도윤범은 익숙하지 않은 브랜드였음에도 전범 기업이라는 것과 상표권 분쟁 중이라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무리는 아니었다. 서류로 봤던 각종 스펙이 사실이라면, 평소엔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보통 머리가 아닐 거다.
“어쨌든 감사해요.”
“감사는 무슨. 나도 저딴 거 들고 찍기 싫어.”
서주언은 별거 아니라는 듯 가볍게 흘렸지만, 만약 그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남도하는 틀림없이 그 제품을 들고 촬영했을 것이다. 위치가 그랬다. 서주언 정도는 되어야 PPL을 거절할 수 있지, 남도하라면 역할 자체를 걸고 반항했어야 할 것이다. 그럴 배짱 자체도 없었고, 재수가 없으면 진상 배우로 찍혀 버릴 수도 있었다. 그 욕받이를 서주언이 자처해 준 거니 고맙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잠은 잘 잤고?”
“…네?”
갑자기 묻는 말에 되물음이 튀어 나갔다.
“새 집에서, 잘 잤냐고.”
의자에 온몸을 파묻고서 고개만 돌려 물어오는 말에 남도하는 순간 얼굴을 굳혔다.
“어, 어떻게 아세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아침을 먹고 촬영장으로 바로 온 탓에 회사에도 들르지 않았다.
“그걸… 나만 알까, 과연.”
아니, 한 명 더 알고 있다.
“아무도 안 믿는 게 좋을 거야.”
…토끼 가면.
“어디서… 들었는데요.”
태연하게 물었지만, 남도하는 입이 바싹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조금은 진지한 태도를 보이는 서주언의 모습에 토끼 가면이 겹쳐 보이는 것도 같았다. 이제 보니 체격도 비슷하다.
“궁금해?”
“…네.”
서주언의 시선이 남도하에게 올곧게 꽂혔다. 까만 두 눈이 뚫어져라 바라보다가는, 눈꼬리가 휘었다. 입꼬리가 끌려 올라왔다.
“그럼 형이랑 밥 먹자. 그럼 알려 줄게.”
“하아… 장난하지 말고요.”
“장난이라고는 안 했는데.”
그 장난스러움이 가득 담긴 표정 때문에 순간 긴장이 풀어졌다. 머릿속을 떠돌던 토끼 가면도 사라졌다. 뒤늦게 망상이 심했다는 생각이 스쳤다. 누가 봐도 지금 서주언은 남도하를 놀리는 표정이다.
“그럴 필요 없어요.”
남도하가 막 맥이 풀리는 순간,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와 동시에 눈앞에 텀블러 하나가 나타나고.
“마셔요, 형. 저번에 그 차예요.”
“어, 고마워. 근데 뭐가 그럴 필요 없어?”
“보나 마나 원호 형이에요. 제가 아침에 원호 형한테만 얘기했거든요.”
남도하는 도윤범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려 서주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봤지만, 그의 표정만으로는 정답이라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오히려 알 듯 말 듯 내비치는 웃음 때문에 더욱 헷갈렸다.
“도하야, 생각해 봐.”
“뭘요…?”
그는 말을 한 도윤범 대신 남도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너한테 이상한 스토커가 붙었어. 근데 그걸 내가 알아. 너랑 직접적인 관계도 없던, 내가.”
“그야 그건 저번에….”
남도하는 말을 멈췄다. 순간 서주언과 식사에 대해 도윤범에게 거짓말을 했던 게 떠오른 탓이다. 다행인지 도윤범은 그 말을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럼 우리 사이에 걸친 몇 명이나 그 이야기를 알고 있을 거 같아? 네가 집 옮기고 하루도 안 돼서 내 귀에까지 들어왔는데.”
“…그래서요…?”
그의 말을 알아들을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
“나머지는 밥 먹으면서 알려 줄게.”
“제가 언제 밥 먹는다고…!”
“내 얘기 들어 보는 게 좋을 텐데.”
서주언은 확신하는 것 같다. 남도하가 저와 밥을 먹게 될 거라고. 저리 미련 없이 머릴 기대고 누워 두 눈을 감아 버리는 걸 보면, 틀림없다.
“헛소리예요.”
도윤범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지만, 그다지 설득력은 없었다. 이미 서주언의 한마디가 남도하의 마음에 불안의 씨앗을 심어 버렸다. 토끼 가면이든 제3의 인물이든 처리해야 한다. 어쩌면 경찰보다 서주언 쪽이 더 노련한 대처 방법을 알고 있을 수도 있다. 그의 세상에서 저런 일은 흔하디흔한 일일 테니까.
“…선배님들.”
촬영이 중단된 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서주언은 안대를 쓰고 죽은 듯 누워 있고, 남도하는 제 탓에 촬영이 중단되고, 서주언의 이상한 말까지 신경 쓰여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대본만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다.
“촬영 시작한다는데요….”
연출진 중 어려 보이는 스태프가 다가와 촬영 재개를 알렸다.
“그래서, 저 쓰레기 맥주를 들라고.”
서주언은 안대도 벗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아니요! 다른 PPL로 교체했는데… 아… 잠깐만요.”
서주언의 삐딱한 목소리 탓인지 스태프는 제대로 설명도 하지 못한 채 도움을 구하러 달려갔다. 그러고 돌아온 건 감독이었다.
“이거 창피하네.”
남도하는 다가오는 감독을 보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고, 서주언도 그의 목소리를 듣고야 안대를 벗었다.
“나도 그렇고 김 작가도 그렇고 보통 압박받은 게 아니었거든.”
남도하의 예상은, 짜증이었다. 촬영을 거부한 것에 대해 감독의 입에서 좋지 못한 말이 쏟아져 나오리라 생각했지만, 그는 멋쩍은 웃음을 보이며 PPL 교체 내용을 전했다. 그들도 방송사의 압력으로 어쩔 수 없이 협찬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면서.
“그러면 더 빼기 어려웠을 텐데요.”
“나도 오늘 촬영 접어야 하나 생각했는데, 협찬 빼기로 했어.”
감독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은 남도하는 서주언의 눈치를 살폈다. 제작비가 걸려 있으니 이렇게 쉽게 협찬을 뺄 수가 없을 텐데. 더군다나 저런… 제품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금액을 투자했을 것이 자명했다.
“K&M 엔터에서 추가로 투자받기로 했다나… 그렇대.”
“K&M이라….”
감독과 대화를 나누던 서주언의 시선이 남도하에게 틀어졌다. 감독 역시 마찬가지였다.
“…왜요, 그게…?”
그 시선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한 남도하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지만, 별다른 설명이 따라붙지 않았다. K&M이라면 남도하도 잘 알고 있다. 촬영이 재개된 ‘살인자의 밤’ 메인 투자자다. 300억이 넘는 제작비 중 6할 이상을 투자한 곳이니 모를 수가 없었다.
“뭐… 잘됐네. 그럼 시작하죠.”
남도하에게만 찝찝함을 남긴 채 촬영 준비가 시작됐다.
“뭐야, 왜 아직도 시작 안 하고 있어?”
남도하가 의상을 갈아입고 헤어와 메이크업을 정리하고 있을 때, 이원호가 다가왔다. 그리고 그 뒤엔 당연하게도….
“안녕하세요, 선배님.”
세트 상품 양우준이 붙어 왔다. 해사한 웃음을 걸고 서주언에게 허리를 굽히는 놈.
“넌 눈이 좀 안 좋나 봐?”
“네…?”
“여기, 선배님 안 보여? 아니면 뭐, 대가리도 사람 봐 가면서 숙이나.”
서주언은 남도하를 가리켰다. 정확히, 턱짓으로 지목하며 비아냥댔다. 그 행동이 더 경우 없어 보이는 건 모르는 것 같다.
“저희가 원래….”
남도하는 원래 양우준과 인사하고 지내는 사이가 아니라는 걸 말해 주려 입을 열었지만, 서주언의 뾰족한 시선을 받곤 입을 다물었다. 따지자면 자기도 연예계 후배인 주제에 누가 누구 예의를 찾는다는 말인가. 자기 예의가 제일 이상하면서, 다른 사람의 예의를 차리는 사람이다.
“죄송… 합니다.”
“너 그러고 다니면 연예인 병 걸렸다고 욕먹어.”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구경하는 남도하의 손에 땀이 배어나는 거 같았다. 도윤범은 당연하고 양우준의 매니저인 이원호마저 한마디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마땅한 대꾸를 찾지 못한 것인지 양우준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남도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엎드려 절 받기도 아니고. 우리 땐 안 저랬는데, 그치?”
덧붙이는 서주언의 입에서 작게 혀 차는 소리까지 나왔다. 손을 휘휘 내저으며 양우준을 쫓아낸 서주언은 다시 안대를 쓰고 몸을 눕혔다. 그러게, 뭐하러 서주언에게 친한 척을 해 대며 매번 이런 모난 소리를 듣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리고 양우준의 쌓인 화는 당연하게도 남도하를 향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남도하를 찢어 죽일 양 쏘아보곤 이원호와 함께 자릴 떠났다.
“형, 촬영 시작한대요. 가요.”
도윤범을 따라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오늘도 왠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다고. 그리고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들어맞기도 했고, 완벽히 틀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