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7화
<어떤 세계>
―♬♪♬
핸드폰 알람이 요란하게 울렸다. 힘겹게 눈을 떠 침대 옆을 굴러다니던 핸드폰을 잡아채 알람을 껐다.
“너 체육복 챙겼어?”
“아 맞다!”
“하여튼……
“오늘 지의도 9시 수업이라고 하지 않았나?”
‘왜 이렇게 소란스럽지?’
베개에 얼굴을 한참 묻고 있을 때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몸을 돌려 천장을 바라보자 불 하나가 나가버린 형광등과 곰팡이가 핀 벽이 눈에 들어왔다.
눈앞에 있는 모든 것들이 이질적으로 느껴져서 지금 여기가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하기 힘들어졌다.
―타다닥.
교복을 입은 누군가 내 방으로 성큼 들어왔다. 고개를 돌려 교복에 붙은 명찰을 보고 나서야 난 깨달았다.
[신지유]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오늘 나 학교 끝나고 옷 사주는 거 안 까먹었지?”
지유는 내가 졸업한 중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지유의 마지막 얼굴보다는 성숙했지만, 역시 어린 티가 아직 남아 있었다.
“언니?”
어리둥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병실 침대에 누워 책을 읽다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짓는 표정과 똑같았으니까.
―투둑.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자 지유가 화들짝 놀라며 제자리에서 버벅거렸다.
“어, 어어? 왜, 왜 울어?”
“…눈에 뭐가 들어갔나 봐.”
“아, 그런 거야? 깜짝 놀랐네…….”
잠옷 소매로 눈가를 톡톡 두드렸다. 큰 힘을 줬다가 이 꿈에서 허무하게 깨버릴까 봐 두려워서였다.
―바스락.
자리에서 일어나자 지유의 시선도 나를 따라 올라갔다.
“…작네.”
“와… 아침부터 갑자기 시비야?”
“신지유~ 학교 안 가?”
“갈 거야!”
지유는 아빠에게 대답한 후 허겁지겁 가방을 챙겨 메곤 내게 한 번 더 경고했다.
“나 오늘 3시에 끝나니까 그때까지 학교 앞으로 와, 알았지?”
* * *
‘꿈이 이렇게까지 구체적이고 선명할 필요가 있나?’
꿈속은 그야말로 내가 바라던 세계 그 자체였다. 지유의 병은 새롭게 개발된 신약 덕에 완치되어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됐고, 올해로 벌써 중학교 3학년이었다.
던전과 몬스터는 게임과 만화 속에서나 존재했다. 지유의 치료 때문에 쌓였던 빚은 다행히 절반 넘게 갚아 올해만 노력하면 전부 다 갚을 수 있었다.
“지의야, 운동화 안 챙겨?”
“어? 어, 챙겨야지.”
“와, 기말 3주 남음.”
“장난하냐? 시간 개 빠르네.”
그리고 난 대학교 1학년이었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만 본 캠퍼스 생활이 눈 앞에 펼쳐지자 심장의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처음 보는 친구들이 자연스럽게 내 이름을 부르고 커다란 체육관에서 다 같이 수업을 들었다.
그토록 바라고 꿈꿔왔던 진짜 평화였다.
“지의야!”
친구들과 함께 체육관 밖으로 나오자 늘 듣던 목소리가 들렸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양복과 트렌치코트 대신 흰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세빈이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같은 학교에 다닌다는 설정인 것 같았다.
“푸흡.”
낯설지만 그제야 제 나이로 보이는 세빈이 때문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졌지만, 다행히 아무도 듣지 못했다.
주변을 슬쩍 보니 다들 세빈이의 등장이 놀랍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느 정도 안면을 튼 건지 가볍게 인사까지 나누고 있었다.
“근데 어떻게 둘이 전공 수업만 빼고 모든 수업이 다 똑같냐.”
“한 개는 같이 들으려고 신청했는데 다른 것까지 다 같은 건 진짜 우연이야.”
세빈이는 그렇게 대답하곤 내 옆에 딱 붙어 섰다.
‘확실히 헌터일 때보다 표정이 밝네.’
몬스터와 게이트의 위험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탓일까, 세빈이의 눈동자는 평소보다 반짝거렸다. 세빈이와 나를 둘러싸고 있던 환경이 얼마나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지 알게 된 순간이었다.
―탁.
잠깐 생각에 잠긴 틈을 타 세빈이가 어깨동무를 하곤 다른 건물 쪽으로 발을 돌렸다.
“그럼 우리 먼저 갈게!”
“응~ 잘 가!”
“어, 내일 봐!”
친구들과 헤어진 후 세빈이와 함께 학교 교정을 가로질렀다. 늘 그렇듯 불필요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어차피 꿈이란 걸 알고 있으니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오늘 점심 뭐 먹을까? 학식 메뉴 맛있는 것 같던데.”
세빈이도 자신에게 꽂히는 시선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평소처럼 대화를 이어 나갔다. 세빈이의 핸드폰 화면엔 헌터넷 대신 학식 메뉴가 쓰여 있는 창이 떠 있었다.
식사 메뉴를 고르는 것이 하루 고민의 전부인, 이런 따분함과 지루함이 귀했다. 이 꿈에서만큼은 게이트가 갑자기 생기거나 폭발해 몬스터가 쏟아져나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냥 평생 이렇게 살고 싶다.”
“응?”
“어?”
나도 모르게 속마음을 입 밖으로 말을 뱉었다. 세빈이가 나를 바라보며 되묻자 나는 또다시 바보 같은 대답을 하고 말았다. 세빈이는 우뚝 멈춰서서 배시시 웃곤 내 어깨를 감싼 팔에 힘을 주었다.
“나도. 너랑 평생 같이 다니면서 점심 메뉴나 고민하면서 살고 싶어.”
“……”
“…저녁, 야식 메뉴도 괜찮고.”
“야식? 너 야식 잘 안 먹…….”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어진 세빈이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세빈이가 한 말을 한참 곱씹고 나서야 숨은 뜻을 이해했다.
‘진짜 세빈이도 아닌데, 진짜 별 꿈을 다 꾸네…….’
순정 만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상황에 나까지 머쓱해져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꿈에서 깨고 나서도 나 혼자 세빈이를 의식하는 바보 같은 실수만 하지 않길 바랐다.
* * *
3시까지 학교 앞으로 오라는 지유의 불호령에 수업이 끝나자마자 학교 앞으로 뛰어갔다. 교복을 입은 애들이 쏟아져 나왔고 난 교문 앞을 서성거리며 지유의 얼굴을 찾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들과 함께 나오는 지유를 발견했다.
“지유야!”
정말 오랜만에 불렀다. 입 밖으로 튀어나온 그 애의 이름이 어색하게 느껴져서 또다시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지유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방긋 웃곤 손을 흔들었다. 목 위에서 끊어지는 동그란 바가지 머리가 찰랑찰랑 흔들렸다.
―탁.
지유가 내 팔에 팔짱을 끼웠다. 꿈이란 걸 알고 있지만 팔에서 느껴지는 지유의 무게와 온기가 너무나도 생생했다. 실제로 겪어보지도 못한 일인데도 말이다.
“지유네 언니다.”
“안녕하세요~”
“어, 안녕…….”
또다시 눈물이 울컥 차올라 짧게 대답했다. 다행히 내 목소리가 떨린다는 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지유야 내일 봐!”
“엉!”
지유는 친구들에게 손을 흔든 후 나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언니, 얼른 가자!”
“응.”
지유가 팔을 끄는 대로 움직였다. 도착하고 보니 내가 일하던 옷 가게였다. 꿈속에서도 같은 곳에서 일하는 게 재미있어 웃음이 났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내내 지유는 재잘거리며 입을 쉬지 않았다.
말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아이라는 걸 세상이 알았다면, 지유를 이렇게 일찍 데려가진 않았을 것이다.
“딴생각했지.”
“어, 어? 아니 듣고 있었어. 내일 수학여행이라며.”
“응. 그래서 애들끼리 하얀색으로 옷 맞춰 입기로 했어.”
“그냥 집에 있는 흰 티 아무거나 입지?”
“아, 그건 너무 구리잖아~ 나 사고 싶은 거 있단 말이야.”
지유가 입을 비죽거리며 투덜거렸다. 병실에 있을 땐 울지도 않고 불평한 적도 없는 애가 고작 옷 하나로 징징대는 게 신선해서 나도 모르게 지유를 빤히 보게 됐다.
‘이 애의 평생의 불평거리가 이런 거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언니, 내려야 해.”
“아, 응.”
지유를 따라 지하철에서 내렸다. 몸이 기억하는지 내가 일하던 매장까지 지도 없이 찾아갈 수 있었다. 지유를 데리고 들어가자 매니저님이 날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 여기가 지의 씨 동생?”
“신지유입니다!”
“지의 씨 닮아서 씩씩하네. 천천히 보다 가~”
“언니 이게 내가 사고 싶은 거야.”
지유는 넓은 매장을 누비다 행거 앞으로 나를 끌어왔다. 좀 특이하게 생긴 강아지 그래픽이 인쇄된 새하얀 티셔츠가 걸려 있었다.
“이 이상한 강아지는 뭐야?”
“이상한 강아지라니. 왕왕이 몰라? 그거 콜라보 티셔츠야.”
유행하는 캐릭터였나 보다. 자세히 보니 지유의 핸드폰 배경 화면에도 저런 강아지가 있었던 것 같았다. 지유는 제일 작은 사이즈를 집어 거울 앞으로 총총 걸어가더니 제 몸에 대보았다.
“귀여운데? 사이즈도 맞을 것 같고.”
“응. 청바지에 넣어 입으면 좋을…….”
지유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고개를 돌리자 지유가 가격표를 내려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슬쩍 보니 5만 원을 훌쩍 넘는 가격에 당황한 것 같았다.
‘꿈속의 나는 얼마나 갖고 있으려나.’
바로 은행 어플을 켜 잔고를 확인했다.
[831,580원]
월급을 받은 지 얼마 안 됐는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잔고가 넉넉했다. 적어도 이 꿈에서 깨기 전까지는 지유가 원하는 걸 사줄 수 있겠지.
―달그락.
난 매장 입구에 있던 바구니를 가져와 지유가 들고 있던 옷을 집어넣었다. 지유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고, 난 가볍게 대답했다.
“수학여행이잖아. 사고 싶은 거 다 골라.”
“지, 진짜로? 엄마한테 혼나면 어떡해?”
“괜찮아. 나 사실 보너스 좀 받았거든.”
“…진짜 나 더 사도 돼?”
“응. 바지든 뭐든 다 골라.”
지유의 입꼬리가 씰룩거리며 올라갔다.
“고마워, 언니!”
지유는 환한 미소를 입가에 띄운 채 매장을 더욱 맹렬한 기세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
.
.
“아이구, 힘들다…….”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어…….”
양손에 종이봉투를 한가득 들고 매장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저녁 시간이었다. 지유는 자기가 직접 고른 옷들이 마음에 드는지 종이봉투를 흘긋 보며 실실 웃었다.
“…배고프다.”
“그치.”
“뭐 좀 먹고 갈까?”
“돈 많이 썼는데, 그냥 집밥 먹자.”
“아냐. 기왕 나왔는데 좋은 거 먹자.”
지유에게 대답하며 문득 고개를 들자 형형색색의 불빛으로 반짝거리는 남산 서울 타워가 눈에 들어왔다. 그 불빛에 왠지 모르게 홀린 기분이 들었다.
“지유야, 너 남산 서울 타워 가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