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360화 (360/366)

외전 22화

―쾅!

중간 보스 몬스터인 지혜의 원숭이가 양손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그러자 땅속에서 나무 기둥이 치솟아 순식간에 전투 대형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가베쉬와 코피샤는 원숭이의 공격 범위에서 한참 떨어진 곳으로 재빠르게 발을 옮겼다

“비스 씨 물러나세요!”

―콰과광!

센이 높이 든 손을 아래로 내리자 ‘광휘’가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원숭이가 제 육중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릴 때쯤, 비스의 낫이 녀석의 가슴 한가운데를 깊게 베었다. 시커먼 피가 뿜어져 나와 사원 바닥을 적셨다.

비스가 쉬지 않고 공격을 이어갔다. 원숭이의 목부터 시작해 어깨, 그리고 팔까지 관절이란 관절은 전부 다 끊어 놓았다. 녀석은 이를 아득 갈며 붉게 충혈된 눈동자로 비스를 응시했다.

―탕!

그때였다. 원숭이가 팔로 비스를 쳐내려 한 순간 초록색 탄환들이 녀석의 손바닥을 그대로 관통했다. 너무 많은 공격을 받은 탓에 원숭이의 손이 가루가 되어 우수수 떨어졌다.

비스가 어깨를 움츠리며 총알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끝엔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코피샤가 있었다.

“쳇.”

―서걱!

비스가 혀를 차며 원숭이의 목을 쳤다. 비스가 녀석에게서 물러난 것을 확인한 후 이번엔 센이 스킬을 퍼부었다.

광휘가 무섭게 내리꽂히자 녀석의 움직임이 서서히 멎었고, 그 틈을 타 센이 검을 양손으로 쥐고 세로로 크게 베었다.

―쿵.

정확히 반으로 쪼개진 원숭이의 몸이 바닥에 처박히는 동시에 완전히 소멸했다. 비스가 빙의 상태를 풀며 바닥에 가볍게 착지했고, 곧바로 코피샤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코피샤는 기대감에 부푼 얼굴로 비스를 올려다보았다.

“비스 님! 방금 제 공격…….”

“내가 너한테 뭐라고 했어.”

하지만 코피샤의 바람과 달리 비스는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표정을 굳힌 채 자신을 나무라는 비스를 보며 코피샤는 잔뜩 얼었다.

“무기를 쓰는 것보다 뭐가 중요하다고 했지?”

“…제 안전이요.”

“치유계 헌터의 안전이 공략팀 전체의 생존율을 좌우한다. 우리가 네 안전을 신경 쓰는 건 당연한 거지만, 그 반대는 쓸데없는 일이야.”

“하, 하지만 방금 전 상황은 누가 봐도 제가 비스 님을 도울 수 있는 상황이었잖아요.”

“뭐라고?”

코피샤가 침착하게 자신의 생각을 전했지만 돌아온 건 날 선 반응이었다. 비스가 한숨을 푹 쉬며 미간을 짚자 코피샤는 우물쭈물거리며 그의 눈치를 보았다.

―텁.

어느 틈에 나타난 센이 코피샤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그의 다정한 손길에 코피샤가 움츠렸던 어깨를 폈고 센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부드러운 미소가 코피샤를 안심시켰다.

“비스 씨는 코피샤 양을 걱정하는 거예요.”

“이봐, 센.”

“제 말이 틀렸나요?”

센이 차분하게 되묻자 비스는 말문이 막혔다. 차마 부정할 수 없어서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하자 센은 싱긋 웃으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왜냐하면 비스 씨가 한 말이 틀린 말은 아니거든요. 공략팀에게 있어서 치료계 헌터는 정말로 소중한 존재예요.”

“C급이어도요?”

“등급이 뭐가 중요한가요. 존재한다는 것이 중요하지.”

―달그락.

센이 코피샤의 산탄총 총구를 살짝 건드렸다. 코피샤가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방금 그 공격은 확신을 갖고 한 거죠? 운에 맡긴 게 아니죠?”

“네. 바로 옆에 비스 님이 계셨으니까 신중하게 쐈어요.”

“잘했어요.”

비스에게 듣고 싶었던 말을 센에게서 들었다. 코피샤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였고 그런 그를 센이 기특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물론 비스 씨 말대로 코피샤 양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 주세요.”

“네에…―.”

“하지만 코피샤 양까지 공격에 나서야 하는 상황이라면 아까의 그 감각을 잊지 말아 주세요. 알았죠?”

“네!”

코피샤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센은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허리를 쭉 폈고, 그 모습을 본 비스는 그대로 몸을 돌려 보스가 있는 곳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역시 저 인간은 어른 중에서도 더 어른 같구나. 의미 없이 나이만 먹은 녀석들과는 확실히 다르군.”

비스는 칼리의 말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센이 본받을 만한 어른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자국에서 헌터들의 정신이라고 불리는 자는 저런 모습이구나.’

비스는 자연스레 자신과 센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자신과 센은 비슷한 점이 제법 많았다.

두 사람은 모두 자국 헌터들이 우상으로 삼는 존재이자, 고유 스킬이 신과 관련되어 있고, 국가에 자신을 바친 사람들이었다.

다른 것이라곤 속성과 성격, 그리고 나이뿐이었다.

‘나는 저런 어른이 되기엔 아직 한참 멀었겠지. 아니, 애초에 저런 인간이 되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비스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어금니를 꽉 물었다. 자신이 되고 싶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는 도저히 좁혀질 기미가 없었다.

“비스 씨.”

“깜짝이야…….”

그때 센이 비스의 옆으로 불쑥 나타났고, 비스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

“아까 제 행동이 불쾌하셨다면 미리 사과드려요.”

“딱히.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고.”

“하하, 이해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센이 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배려와 존중이 서려 있었다. 비스는 감히 흉내 내지도 못할 언동이었다.

“전투 내내 코피샤 양을 신경 쓰셨죠? 몸이 계속 그 아이 쪽으로 가시더라고요.”

“쳇, 무의식중에 그랬나 보군. 앞으론 전투에 조금 더 집중해 보겠다.”

“으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조금 다른 얘기예요.”

“뭐?”

비스가 의아한 눈으로 센을 바라보자 센은 픽 웃은 후 말을 이어갔다.

“걱정과 불신은 종이 한 장 차이예요. 아니, 어쩌면 모든 걱정은 불신을 기반하는 걸로 볼 수도 있겠네요. ”

“……”

“나, 혹은 다른 사람, 때로는 상황 자체에 확신이 없을 때 걱정이 생기니까요.”

센의 말에 비스는 머릿속으로 다른 상황을 떠올렸다.

‘만약 저 아이 대신 지의가 저 자리에 있었어도 지금처럼 화를 냈을까?’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의 답은 부정이었다. 당연한 결론이었다. 지의는 코피샤보다 훨씬 강하니까.

비스는 코피샤에 대한 걱정이 그의 능력에 대한 불신에서 시작됐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코피샤 양은 당연히 약합니다. 전투 경험이 많지도 않고, 체력과 힘이 유별나게 좋아 보이는 것도 아니니까요.”

―텁.

센이 비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지금부터 코피샤 양을 믿어주지 않으면, 저 아이는 끊임없이 자신의 힘을 의심하며 살아갈 거예요.”

“하아…….”

“일단 지금은 코피샤 양을 믿어줄 때예요.”

센은 비스의 등을 두어 번 토닥인 후 입을 다물었다.

‘그래. 센의 말이 맞다.’

능력과 힘에 대한 평가는 코피샤에겐 아직 일렀다. 스스로의 힘에 확신을 갖고 자신의 능력을 어떻게 응용할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지익.

비스는 칼리의 창끝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짧게 그었다. 피부가 살짝 찢어져 틈새로 피가 배어 나오자 비스는 그대로 몸을 돌려 코피샤에게로 다가갔다. 코피샤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아무 말 없이 비스를 올려다보았다.

“아까 전투 중에 찢어진 것 같군. 치료할 수 있겠나?”

“무, 물론이죠!”

코피샤는 두 손을 불끈 쥐며 숨을 깊게 들이마시곤 비스의 손바닥 위로 자신의 양손을 가져왔다.

―투두둑.

상처를 내지 않았는데도 코피샤의 손가락 끝에서 붉은 피가 한두 방울씩 떨어져 비스의 손바닥을 적셨다. 비스는 예상 밖의 치료 과정에 놀란 눈으로 코피샤를 바라보기만 했다.

“처음 이 스킬을 썼을 땐 무조건 칼에 찔려야 하는 줄 알았는데, 피를 몸 밖으로 밀어내는 걸 떠올리는 것만으로 사용할 수 있더라고요.”

“…스스로 알아낸 것인가?”

“네. 헤헤…….”

코피샤가 부끄러운 듯 배시시 웃는 동안 비스의 손바닥은 어느새 말끔하게 치료됐다. 비스는 속으로 감탄하며 제 손바닥과 코피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고맙다.”

“아, 아닙니다! 이 정도 실력으론…….”

“아니, 훌륭해. 사경을 헤매는 녀석도 목숨을 건질 순 있을 것이다.”

코피샤의 얼굴이 환해졌다. 줄곧 주눅 들어 있던 그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풀어지자 비스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았다.

* * *

“다들 충분히 쉰 것 같으니 바로 보스전 들어가지.”

“네!”

“좋습니다.”

보스 몬스터 소환 장소에서 체력을 회복하던 헌터들이 하나둘씩 일어났다. 비스는 칼리를 빙의시킨 채 게이트 앞으로 날아갔고 헌터들이 전투 준비를 마친 것을 확인한 후 게이트에 손을 댔다.

―쿠구구궁.

사원 내부가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천장은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돌가루가 우수수 쏟아졌다.

―쾅!

곧 사원 바닥에서 커다란 금잔화가 튀어나왔다. 녀석은 샛노란 꽃잎을 활짝 펼치며 자신의 사원에 들어온 모든 이들을 유혹했다.

“방심하면 당한다. 가시덩굴과 꽃잎 공격에 주의해라.”

“네!”

―콰광!

코피샤와 가베쉬가 힘차게 대답하는 동시에 금잔화의 양옆에서 가시덩굴이 치솟았다. 그것들은 전체를 바닥 전체를 빠르게 쓸더니 곧 가장 가까이에 있던 센과 비스를 한 번에 노렸다.

―서걱.

하지만 두 사람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센과 비스는 동시에 날아올라 무기를 높게 들었고 녀석의 몸체를 향해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콰과광!

두 사람이 벼락처럼 내리꽂히자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이 사원에 울려 퍼졌다. 기둥 뒤에 숨어 있던 코피샤와 가베쉬에게도 진동이 전해져 두 사람은 휘청거리다 그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흥, 꽤 단단하군.”

금잔화가 산산조각이 나고도 남았을 공격이지만 생각보다 녀석의 방어력이 높았다. 꽃잎이 몇 장 떨어지고 수술이 찢기는 것이 전부일 뿐, 녀석은 여전히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두 사람을 마주하고 있었다.

센은 금잔화에 시선을 고정한 채 검을 고쳐 쥐었다.

“조금 더 공격적으로 가야 할 것 같네요.”

센과 비스가 서로 시선을 교환한 후 약속한 듯이 좌우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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