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1화
<신의 이름을 받은 자들>
―지옥도 소멸 4개월 후, 네팔.
카트만두 시내는 도시 복구 작업에 한창이었다.
정부가 지옥도에 의해 파괴됐던 주요 시설들을 재건하고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동안, 헌터들은 기존 던전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다.
지옥도 이후 네팔의 헌터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첫 번째 변화, 지옥도가 등장한 동시에 각성 사실을 숨기고 있던 미등록 각성자들이 우수수 튀어나왔다.
자기 자신, 가족, 혹은 이웃들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힘을 사용했고, 그들 중엔 B급 이상의 상급 각성자들도 여럿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변화, 던전에 대한 경각심이 매우 증가했다. 국민들은 늘 던전의 위협을 받아왔지만 그럴 때마다 그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모면해 왔다.
위험에 적응해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지옥도라는 새로운 형태의 위험이 등장했고, 전반적인 여론이 ‘우리도 방어 체제를 마련해야 한다.’로 하나가 되기 시작했다.
“야, 야. 비스 님이다.”
“정말?!”
그리고 그 변화의 바람은 비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존재가 국민들을 하나로 뭉치게 했고, 미등록 각성자들을 전부 국가 소속 헌터들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비스에겐 쿠마리의 신분으로 각성을 해 왕실과 국민, 심지어 가족에게까지 버려졌지만 ‘칼리의 창’으로서 꿋꿋이 구호 활동을 했다는 배경이 있어, 그를 우상으로 삼은 헌터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국가 소속 헌터들의 처우는 개선돼야 할 부분이 여전히 많았지만, 그럼에도 각성자들은 기쁜 마음으로 국가에 소속됐다.
그들은 대부분 비스를 본받고 싶어 했다.
―바스락.
비스는 카트만두 시내 외곽에 존재하는 A급 게이트 앞에 섰다. 그러자 다른 헌터들이 허리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비스는 적응되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구기다 곧 태블릿을 든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던전 상태는?”
“몬스터 포화 상태입니다. 지금 한 번 정리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쳇.”
남자는 다른 나라에서 빌려온 던전 탐지기에 찍힌 대로 이야기했다. 이곳에 있는 상급 헌터는 자신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C급 이하의 중하급 헌터들이었다.
비스와 어느 정도 공격력을 견줄 만한 헌터들은 전부 룸비니 S급 던전 현장으로 이동한 상태였다.
비스는 골치 아픈 상황에 잠시 눈앞이 아찔해졌지만, 곧 정신을 다잡고 다시 입을 열었다.
“라울한테 연락해서 A급 이상 헌터로 해외 파견 보내줄 국가 있는지 확인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군기가 바짝 든 남자가 핸드폰으로 라울에게 연락하며 잠시 뒤로 빠졌다.
“비스 님!”
그때 짐을 바리바리 짊어지고 온 코피샤가 나타났다.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등에 진 짐을 내려놓았고, 그 안에서 물을 한 병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제 고작 8살이 된 데다가, 쿠마리 생활로 인해 몸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아이가 들기엔 너무 무거운 가방이었다.
비스는 그런 코피샤를 향해 한숨을 길게 내쉬곤 입을 열었다.
“도대체 저 커다란 배낭엔 뭐가 든 거지?”
“공략에 필요할 것 같은 걸 전부 챙겼어요. 물이랑 단백질 바, 그리고 응급 처치 용품이랑 또…….”
“시판 제품인가? 관리국에서 판매하는 걸 사면 인벤토리 안에 들어갈 텐데.”
비스의 말을 들은 코피샤가 무언가를 깨달은 양 눈을 크게 떴다. 미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은 듯했다.
‘이 아이의 보호자가 된 건 옳은 판단이었겠지?’
비스는 네팔의 몇 안 되는 S급 헌터였기에 그에게 개인 치유계 헌터가 붙었다.
비스가 처음 코피샤의 이름을 들었을 때 반가운 마음에 그의 파트너이자 보호자가 되는 걸 수락했지만, 역시 던전에서 벌어지는 일은 이제 막 각성한 어린아이에겐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힘든 일이었다.
“마음이 너무 앞섰구나, 어린 각성자여.”
“앗 칼리 님……!”
비스 대신 칼리가 나와 그를 다정하게 나무랐다. 코피샤가 어깨를 흠칫 떨며 칼리를 올려다보자, 수백 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코피샤를 담았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음부턴 너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더 합리적인 판단을 하길 바란다. 알겠느냐?”
“네, 네…….”
칼리는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다시 비스의 옆으로 날아갔다.
“저 아이, 괜찮겠죠?”
“네가 고른 네 파트너 아니더냐. 비스 네가 판단해야지.”
“하아…….”
비스가 조용한 목소리로 칼리와 대화를 나누다 고개를 흘긋 돌려 다시 코피샤를 바라보았다. 그는 필요한 물건만 빼서 다른 작은 가방에 담곤 나머지 물건들은 던전 관리국 직원에게 넘기고 있었다.
“코피샤.”
“네?”
“잠깐 이쪽으로 와 봐.”
코피샤가 비스에게 다가오자 비스는 허리를 살짝 숙이며 말문을 텄다.
“무기는 잘 다루고 있나?”
“네! 이제 멈춰 있는 상대는 잘 맞춥니다!”
―파아앗.
코피샤가 차고 있던 목걸이에 손을 대자 그것이 빛을 뿜어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산탄총이 되었다. 던전 관리국에서 받은 무기였다.
코피샤는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자신감을 내비쳤지만, 비스의 머릿속은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한숨을 한번 쉬곤 그의 말에 대답했다.
“너도 알다시피 몬스터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야. 네 공격을 맞을 때까지 기다려주지도 않을 것이고.”
“네…….”
“그러니 너는 무기를 쓰기보단 네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라. 알았나?”
코피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되찾았던 자신감을 다시 잃은 듯한 기색을 보였다. 코피샤에겐 공격계, 방어계, 혹은 함정계처럼 몬스터를 제압할 스킬이 없기 때문에 무기로 자신을 보호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다못해 은신계 스킬이라도 있으면 조금 안심될 텐데.’
비스는 코피샤에게서 눈을 떼고 다시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비스 님, 현재 지원이 가능한 일본 S급 헌터가 있는데 괜찮으신가요? 강화계라고 합니다.”
“…센?”
“어, 맞습니다. 아시는 분인가요?”
“조금. 실력은 보장되어 있으니 그에게 지원을 요청해. 그리고 국내 B급 이상 방어계 헌터 한 명 더 불러주고.”
“알겠습니다.”
예상 밖의 재회가 성사됐다. 비스는 센과 함께 강희에 맞섰던 때를 떠올리며 지원이 도착할 때까지 천막 밑에서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 * *
“오랜만입니다, 비스 씨.”
“오랜만이군. 잘 지냈나?”
“더할 나위 없이 잘 지냈죠.”
헬리콥터에서 내린 센이 비스에게 악수를 청했다. 쪽잠을 자고 일어난 비스가 아까보다 훨씬 개운한 얼굴로 센의 손을 잡았고 위아래로 가볍게 흔들었다.
두 사람이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을 때쯤 비스의 등 뒤로 코피샤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센과 눈이 마주치자 코피샤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체구가 크거나 몸이 눈에 띄게 좋은 것도 아니었는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묘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이 아이는……?”
“아, 내 전속 치유계 헌터인 코피샤 바즈라차르야.”
“전속이라… 파트너 같은 건가요?”
“그런 셈이지. 난 이 아이의 보호자도 겸하고 있고.”
비스가 코피샤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자 코피샤가 화들짝 놀라며 합장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코, 코피샤 바즈라차르야입니다.”
“센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센의 부드러운 미소에 코피샤가 천천히 긴장을 풀었다.
타 지역에 있던 B급 방어계 헌터가 도착함으로써 A급 게이트를 클리어할 인원이 전부 모였다. 관리국 직원의 간단한 공략 브리핑을 들은 후 네 사람이 게이트 앞에 섰다.
“그럼 들어가지.”
―끼기긱.
비스가 거대한 황금 문을 열고 가장 먼저 던전 안으로 발을 들였다.
―♬♪♬
은은한 악기 소리가 던전 안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코끝을 간질이는 매캐한 연기 냄새와 눈앞이 어지러울 정도로 화려한 벽과 천장이, 이 공간이 사원 내부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가베쉬, 넌 코피샤 다치지 않게 옆에 딱 붙어 있어라.”
“알겠습니다.”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되기 전, 비스가 방어계 헌터인 가베쉬를 향해 한 번 더 경고했다. 비스와 센이 앞장서서 던전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동안, 코피샤는 양손으로 총을 꽉 쥐었다.
“어쩌다 저 아이와 파트너가 되신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센이 비스를 향해 조용히 속삭였다. 비스는 센에게 눈길을 주지 않은 채 짧게 대답했다.
“빌어먹을 정 때문에.”
“아하하, 정이요?”
센은 가볍게 웃은 후 말을 덧붙였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제 착각이었나 보네요.”
“당연하지. 난 인간이니까.”
비스는 ‘인간’에 힘을 주어 이야기했다. 그의 말에 센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쿵, 쿵, 쿵.
오른쪽 복도에 들어서자 예상한 대로 일반 몬스터들이 나타났다. 사람만 한 크기의 황금색 쥐였다.
―쾅!
녀석들과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센은 아마테라스로, 그리고 비스는 칼리로 변했다. 새하얀 빛무리와 검은 스파크가 대비되어 서로를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가베쉬!”
“네!”
비스의 외침에 가베쉬가 기다렸다는 듯 코피샤의 앞을 가로막았고 자신들의 주위로 빠르게 회전하는 가시 고리를 소환했다.
―두두두두.
그동안 황금 쥐들이 무서운 기세로 비스와 센을 향해 달려갔다. 땅을 디딜 때마다 사원 바닥에서 돌가루가 튀어 올랐고, 그것들은 곧 총알이 되어 헌터들의 급소를 노렸다.
“흡!”
―콰과광!
비스가 숨을 들이마시며 총알들을 단칼에 베었다. 대낫에 의해 반으로 쪼개진 총알은 다시 산산이 부서졌다.
비스의 일격 이후 이번엔 센이 검을 높이 들며 황금 쥐 무리의 한가운데 착지했다.
―푹.
미처 속도를 줄이지 못한 쥐가 센의 검에 그대로 꿰뚫렸다. 센은 쥐를 바닥에 꽂은 후 검을 뽑았고 동시에 쥐는 흔적도 없이 바스러졌다.
센을 에워싼 황금 쥐들이 사납게 울부짖으며 커다란 앞니로 그를 찍어누르려 입을 쩍 벌렸다. 센은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라 녀석의 머리 뒤쪽으로 훌쩍 넘었고 그대로 목 뒤를 깊게 벴다.
‘전투에 집중을 못 하는군.’
센은 비스 쪽으로 슬쩍 시선을 옮겼다. 비스는 센이 미처 잡지 못한 황금 쥐를 낫과 창으로 해치우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몸이 코피샤 쪽으로 움찔거리고 있었다.
그가 코피샤를 각별히 아끼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지만, 그 염려 때문에 위험한 상황이 생길 것 같아 불안했다.
―서걱!
센이 마지막 황금 쥐를 해치우자 비스가 곧바로 가베쉬 쪽으로 몸을 돌려 코피샤의 상태를 살폈다.
‘일단 지켜보기로 할까.'
건조한 목소리로 제 파트너를 살뜰히 챙기는 비스를 바라보며 센은 어깨를 으쓱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