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358화 (358/366)

외전 20화

‘너무 놀렸나?’

사랑에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는 진우의 반응이 재미있어서 일부러 더 짓궂게 굴었더니 진우의 행동이 완전히 고장 났다. 민숙은 얼어 있는 진우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해주고 싶은 건 당연한 거예요.”

“그, 그쵸……?”

“부끄럽다고 감정을 계속 숨기면 진심을 보여줘야 할 때 아무런 말도 못 할 수도 있으니까,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표현하는 연습을 해 보는 게 어때요?”

민숙의 진심 어린 조언에 진우가 눈을 반짝거렸다.

‘그러고 보니 미래 씨가 나타나면 맨날 숨기만 했지…….’

진우는 미래와 단둘이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래 앞에만 서면 입과 몸이 얼어버리는 데다가 미래 역시 대화에 협조적인 편이 아니었기에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 김민숙 헌터는 어떤 식으로 표현하셨어요?”

“하하, 저요? 으음……. 너무 오래돼서 기억도 잘 안 나네.”

민숙이 두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냥 평범하게 노력했던 것 같아요. 시간을 함께 보내려 애쓰고, 연락도 자주 주고받고… 아, 선물도 많이 줬고요.”

“아, 그러시구나…….”

“그러니까 상대도 마음을 열었고 결국 결혼까지 골인했죠.”

“헉, 정말요?!”

“네. 아, 이거 갑자기 말하려니까 좀 부끄럽네요.”

진우는 민숙보다도 더 부끄러워졌다. 미래를 좋아하면서 정작 그를 위해 해준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용기를 내지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르며 미래가 자신을 좋아해 주기만을 기다렸다는 걸 실감하고 말았다.

“제가 너무 게을렀던 것 같아요…….”

“풀 죽을 거 없어요. 지금부터라도 하면 되죠.”

진우는 인벤토리 한구석을 차지한 성곽의 파편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 이걸 계기로 가까워지는 거야.’

일반적인 선물과는 거리가 멀긴 했지만 진우는 의지를 불태우며 다시 행운의 토끼 발 위로 올라탔다. 방금 전과는 확실히 다른 눈빛이었다.

“중간 보스 포인트까지 빠르게 가죠!”

“그래요~ 아하하, 기운 차렸네.”

민숙은 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두심도 덩달아 신이 났는지 그의 팔에서 다시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김민숙 헌터.”

“네?”

그때 침묵을 유지하던 민이 말문을 텄다. 그는 민숙의 걸음에 맞추며 잠시 고민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아는 겁니까?”

민숙이 두 눈을 크게 뜨며 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차분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눈은 호기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다소 어둡고 메마른 인상의 민이 순간적으로 사춘기 소년처럼 보였다.

“으음, 글쎄요… 깊게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라서 잘 모르겠네요.”

“그렇습니까.”

“그냥 단순하게 생각해 보세요. 누군가와 계속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 없어요?”

‘같이 있고 싶다…….’

민은 민숙의 말을 찬찬히 곱씹었다. 가족을 제외하곤 헤어짐의 아쉬움을 경험해본 적이 없는 그였기에 민숙의 말을 한 번에 이해할 수 없었다.

“오히려 제가 최민 헌터한테 묻고 싶은걸요.”

“무엇을 말입니까?”

“왜 그런 질문을 하신 거예요?”

민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사실 민도 무심코 질문을 던졌던 것이었다. 민이 쉽게 입을 열지 못하자 민숙은 은은한 미소를 입가에 띄우며 가볍게 말을 덧붙였다.

“누군가를 떠올려서 그런 질문을 한 게 아닌가 싶어서요.”

“…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신경 쓰이는 사람이 생겼고, 내가 그 사람을 진짜로 좋아하는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은 거 아니에요?”

그의 말에 민이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곤 생각에 잠겼다. 그의 머릿속엔 각각의 이유로 신경이 쓰이는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신지의 헌터는 왜 신경이 쓰이는 거지?’

다른 사람들에겐 구체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지의에겐 그런 이유가 없었다. 이유 없이 그냥 마음이 쓰였다.

단편적인 기억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번져나가다 곧 지의와 통화하던 기억에 다다랐다.

‘아무래도 제가 신지의 헌터를 많이…….’

―펑.

무심코 자신의 진심이 새어 나왔던 때를 떠올리자 민은 자기도 모르게 허공에 폭발을 일으켰다. 그에 놀란 민숙이 어깨를 파르르 떨었지만, 민은 예전 기억에 정신이 팔린 탓에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내가 미쳤지.’

자신의 말을 지의가 듣지 못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자신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올 거라곤 예상도 못 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왜 그 말이 튀어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최민 헌터, 괜찮아요?”

“아,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생각에 너무 빠져 있다 보면 그럴 때도 있죠.”

민숙이 민을 능숙하게 다독인 후 말을 덧붙였다.

“최민 헌터의 머릿속에 있는 사람이 누군진 모르겠지만, 잘 되길 바랄게요.”

“…감사합니다.”

민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손등으로 볼을 두드렸다. 한껏 뜨거워진 피부가 얇은 살가죽을 타고 느껴졌다.

.

.

.

“공략 도와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어머, 그렇게 깍듯하게 인사 안해도 돼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공략을 다 끝내고 나온 진우가 몸을 180도로 접다시피 고개를 숙이자 민숙과 민이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진우가 천천히 허리를 피는 동시에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고, 다시 고개를 여러 번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공략은 무난하게 잘 마무리 되었다. 전투의 중간, 민이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겨 위험한 상황이 몇 번 벌어졌지만, 베테랑 헌터답게 능숙하게 대처했다.

‘성곽의 파편을 세 개나 얻었어!’

진우는 리무진에 올라타자마자 인벤토리에 고이 모셔놓은 벽돌을 보며 입술을 씰룩거렸다. 이 아이템이 미래와 가까워질 첫 번째 단계가 되어줄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댁으로 가시나요?”

“아니요! 협회 건물로 가주세요!”

진우가 발랄하게 이야기하자 기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마침 미래가 출근했을 시간이라 지금 당장 아이템을 건넬 생각이었다.

‘너무 피곤해 보이진 않겠지?’

그는 인벤토리에서 파우치를 꺼내 자신의 얼굴을 확인한 그는 당장이라도 음악 방송 녹화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분주하게 단장했다.

* * *

진우가 막상 연구실 앞에 오자 좀처럼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초인종을 누르기만 하면 미래가 나타날 텐데 고작 손가락을 움직일 용기가 없어 문 앞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

―우웅.

“너 뭐 하냐?”

“으악!”

그가 그 앞을 서성거리자 연구실의 문이 열리는 동시에 미래가 나타났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진우가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고, 미래는 그런 그를 심드렁한 얼굴로 바라볼 뿐이었다.

“저, 저 여기 있는 거 아셨어요?”

“CCTV 화면으로 뻔히 보이는데 모를 리가 있겠냐?”

“아, 아, 그러시겠구나. 아하하…”

“…진짜 뭘 잘못 처먹었나.”

진우의 얼빠진 행동에 미래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볼 일 있어서 온 거 아니냐?”

“네, 맞아요. 시간 길게 뺏지는 않을게요.”

“뭔데 이렇게 비장하게 말해? 일단 들어와.”

진우는 미래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 들어왔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연구실 안을 살펴보았다.

“미나 씨랑 무하 씨는요?”

“울산. 배리어겔 공장에 문제 생겨서.”

‘그럼 지금 나랑 미래 씨 단 둘뿐이라는 거잖아!’

안 그래도 긴장한 진우의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미래가 커피를 가지러 등을 돌린 사이 진우는 땀으로 흥건해진 손을 바지에 슥슥 닦곤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오늘 날씨 좋지 않나요? 완전 초가을 날씨예요!”

“아직 X나 덥던데.”

“……”

하지만 상대는 미래였다. 그런 시시콜콜한 주제로 대화가 이어질 리 없었다. 미래는 진우의 맞은편 벽에 기댄 채 커피를 들이켰고 곧 입을 열었다.

“그래서 뭐 때문에 온 거냐? 기력 회복제가 벌써 다 떨어졌을 린 없고. 뭐, 다른 거 요청하게?”

“미, 미래 씨한테 드릴 게 있어서요…….”

결국 진우는 또다시 제대로 된 대화도 못 해 보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그는 아쉬운 마음에 눈물을 삼키며 인벤토리 안에 넣어뒀던 분홍색 박스를 꺼냈다. 그러자 미래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박스와 진우를 번갈아 보았다.

“그거 뭐냐?”

“선물이에요.”

“선물? 어우 씨, 꽤 무겁네.”

―텁.

양손으로 박스를 받아 든 미래의 팔이 밑으로 훅 떨어지자 진우가 자기도 모르는 새에 미래의 양팔을 밑에서 받쳐주었다.

―쿵, 쿵.

진우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제 손 위로 가지런히 놓인 미래의 팔을 한참 바라보다 곧 화들짝 놀라며 손을 등 뒤로 숨겼다.

“헉! 죄, 죄, 죄송해요……!”

“뭐가?”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쿵.

미래가 박스를 소파 앞 테이블 위로 던지다시피 내려놓으며 말을 덧붙였다.

“너 오늘 유독 짜증 나게 군다?”

“죄송해요…….”

“그놈의 죄송하단 소리도 그만 좀 하고.”

“헉, 네. 죄송… 아니, 그, 네…….”

진우의 행동에 미래가 한숨을 푹 쉰 후 상자를 열었다.

“응?”

상자 안을 들여다본 미래는 순간 제 눈을 의심했다. 누가 보아도 초콜릿이나 쿠키가 들어갈 법한 상자에 난데없는 벽돌 두 개가 들어 있었다.

“성, 성곽의 파편이에요! 미래 씨 연구에 필요하시다고 들어서 가져왔어요!”

연구실 안으로 들어온 이후로 처음으로 진우가 자신감 있게 이야기했다.

“…어, 어어.”

하지만 미래의 태도는 약간 떨떠름했다. 평소처럼 성질을 부리지도, 아니면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할 말을 고르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혹시 주제넘은 짓을 한 건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진우의 걱정이 곧 부정적인 결론에 다다랐다. 진우는 온몸에 핏기가 싹 가신 채 덜덜 떨며 이야기했다.

“제, 제가 혹시 쓸데없는 짓을 한 건가요……?”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

미래가 급히 손을 내저으며 진우의 말을 끊은 후 안쪽 책상을 가리켰다. 진우가 잔뜩 울상이 된 채로 고개를 돌리자 네모난 기계 안에 수십 개의 시약병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미 재료 다 구해서 그 연구는 끝났어.”

“…하아아.”

‘다행이다.’

허탈하긴 했지만 자신이 우려했던 방향은 아니라 가슴을 쓸어내렸다. 안도감이 들고 나서야 자신의 행동이 조금 창피해졌고 진우는 머쓱한 얼굴로 미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 끝엔 성곽의 파편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는 미래가 있었다. 진우와 함께 아쉬워해 주거나 특별히 고맙다는 말을 기대한 것이 아니라서, 이런 반응만으로도 진우는 만족했다.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표현하는 연습을 해 보는 게 어때요?’

민숙의 말이 진우의 귓가에 맴돌자 그는 큰 결심을 한 듯 양손을 꽉 쥐었다.

“미, 미래 씨!”

“엉?”

“저 미래 씨 싫어하지 않아요!”

“뭐?”

미래가 인상을 구긴 탓에 진우의 기가 눌렸지만, 곧 다시 용기를 내고 말을 이어갔다.

“지난번에 미래 씨 좋아할 리 없다고 한 건 진짜 오해예요! 다, 당황해서 한 소리였어요!”

진우가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말하는 동안 한껏 패여 있던 미래의 미간이 서서히 펴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의 눈빛은 곧 실험물을 바라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매로 변했다.

“그래서?”

“네……?”

“네가 날 싫어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기는 건데?”

원인과 결과, 가정과 증명, 투입과 산출. 미래의 사고방식은 전부 그런 방식으로 작동했기에 진우의 말에 따른 결과가 알고 싶었다.

“무,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잘 모르겠지만…….”

그 질문에 진우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치, 친해지고 싶어요…….”

없는 용기까지 전부 쥐어 짜낸 말이었다. 진우가 입을 다물자 연구실 안엔 무거운 정적이 흘렀고, 미래는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해 다시 인상을 찡그렸다.

“헛소리하러 온 거면 가라.”

미래는 그 말과 함께 성곽의 파편을 부산물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망했구나.’

진우는 자신과 미래의 관계가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하며 문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월, 수, 금 오전 10시부터 한 시간.”

“네?”

“실험이 제일 바쁜 시간이야.”

―쿵.

미래가 냉장고를 닫은 후 진우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일손이 모자라니까 시간 되면 와라.”

“어, 어……!”

“뭐, 대답해.”

“알겠어요! 내, 내일 바로 갈게요!”

죽상이던 진우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마음 같아선 그 자리에서 방방 뛰고 싶었지만, 혹여 그랬다가 미래가 마음을 바꿀까 싶어 겨우 참았다.

진우는 헤실헤실 웃으며 문 쪽으로 발을 옮겼고 미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자, 잘 부탁드려요, 미래 씨!”

“너 나 처음 봤냐? 뭔, 인사를…….”

“헤헤헤…….”

―쿵.

진우의 바보 같은 웃음소리를 끝으로 연구실의 문이 닫혔다. 혼자 덩그러니 남은 미래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은 후 안경을 고쳐 썼다. 그는 냉장고에 기댄 채 탁자 위의 분홍색 박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떤 멍청이가 부산물을 선물 박스에 싸 오냐…….”

―달그락.

미래는 박스를 챙겨 재활용 박스 쪽으로 던지려 하다 멈칫하곤 창고 쪽으로 발을 돌렸다. 실험 도구들로 가득 차 있는 선반에 두기엔 너무 귀여운 상자였지만, 미래는 대충 올려놓았다.

‘뭐, 언젠가 쓸모가 있겠지.’

물론, 미래도 저 상자는 시간이 지나도 쓸모가 없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알고 있지만, 일단 두기로 했다. 마치 그 상자를 건넨 사람을 지켜보기로 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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