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355화 (355/366)
  • 외전 17화

    “지은아, 그게 무슨 소리야?”

    “…….”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니.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반년 동안 사귈 정도로 우리 지은이가 참을성이 좋은 애가 아닌데, 응?”

    미준은 고개를 돌려 지은을 바라보았다. 미준의 말을 들은 지은은 천천히 몸을 앞으로 숙이더니 양팔로 얼굴을 감싸며 제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좋아했던 건 언니가 아니라, 언니 같은 사람이랑 연애하는 그 상황이었던 거야.”

    지은의 목소리에 물기가 서려 있었다. 자신 앞에서 단 한 번도 눈물을 보인 적 없는 지은이었기에 미준은 크게 당황했다.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보다 지은이 우는 것에 더 충격을 받았다.

    “언니는 8년 전이나 지금이나 참 이상하고 멋있는 사람이야. 다정하고 배려심도 깊어.”

    “지은아.”

    “그래서 그런 언니의 애인이라는 게 자랑스러웠어. 웃기지? 자랑할 게 없어서 누구의 애인이라는 것에서 뿌듯함을 느끼고.”

    지은이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눈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내 연약한 자존감을 언니를 통해서 채우고 있던 거야. 내 능력으론 도저히 나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으니까.”

    “…그걸 갑자기 깨달은 거야?”

    “무슨 소리야?”

    “우리 지은이가 그걸 깨닫게 만든 누군가가 있는 것 같아서.”

    지은의 두 눈이 커졌다. 그 변화는 수긍이나 마찬가지였다. 미준은 손수건으로 지은의 눈가를 닦아주며 나지막이 말을 뱉었다.

    “츠구나가 카렌, 그 사람이야?”

    “…….”

    “우리 지은이를 원망하지 않아. 난 그냥 궁금한 거야. 우리 지은이가 어떻게 내면의 성장을 겪었는지를 말이야.”

    미준은 한쪽 턱을 괸 채 지은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은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곤 자신의 솔직한 감정과 던전 안에서 있던 일을 전부 털어놓았다.

    지은은 투병 중에, 즉 자신이 가장 약하고 힘들었을 때 그림을 시작했다. 그리고 카렌은 그런 지은의 그림에 위로받았다. 그 말을 들은 지은은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첫 번째 단계를 통과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계기로 카렌과 빠르게 가까워졌다. 지은에게 원래 호감이 있던 카렌은 그에게 사귀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더욱 열렬히 구애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지은은 카렌에 대한 마음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

    사건은 그들이 게이트에 휘말렸을 때 벌어졌다. 스튜디오 정중앙에 떨어진 게이트에 촬영장은 아수라장이 됐었다.

    전기까지 나가 내부가 캄캄했고 주위를 헤매다 결국 스튜디오에 있던 일부 인원이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카렌과 지은도 그중 하나였다. 공황 발작이 온 카렌을 지은이 진정시켰고, 헌터들이 올 때까지 숨을 곳을 찾아다녔다. 지은의 힘으로 새 인생을 시작했다는 사람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은의 그런 정성이 통해서였을까, 아니면 지은을 지키고 싶었던 카렌의 진심이 통해서였을까. 카렌은 각성했고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구했다.

    카렌은 이 모든 공을 지은에게 돌렸고, 지은이 또다시 자신의 인생을 구한 것이라 이야기했다.

    지은은 그 순간 자신을 사랑할 수 있었다. 자신이 가장 약했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카렌은 지은이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근거 그 자체가 되어주었다.

    “나한테 말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

    “지은이 네가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줬을 거야. 네가 더 빛나길 원한다면 그런 자리를 만들어 줬을 것이고, 능력을 더 키우고 싶다면 교육을…….”

    “그건 나 스스로의 힘으로 이뤄낸 게 아니잖아.”

    미준은 뒤통수를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방법은 근본부터 글러 먹었다는 걸 실감했기 때문이다.

    “지은아.”

    미준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지은의 앞에 앉았고,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췄다. 지은은 미안한 마음에 눈물만 뚝뚝 떨어트릴 뿐이었다.

    “솔직히 말할게.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난 아직 네가 너무 좋고, 멀어지고 싶지 않아.”

    “…….”

    “네가 나를 이용해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든, 자존감을 채우든 나한텐 아무 상관이 없어. 넌 그게 싫다고 했지만 난 신경 안 써.”

    ―텁.

    미준이 지은의 손등 위로 제 손을 포갰다. 그러자 지은의 손이 완전히 가려졌다.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것 같아.’

    미준은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토록 누군가를 제 곁에서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계속해서 새어 나오는 마음을 숨기기 힘들었다.

    “그러니까 그냥 내 옆에 있어 주면 안 될까?”

    미준이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말이 결국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괴로워 보이는 눈과 그와 반대로 애써 웃는 입. 지은은 그 얼굴을 바라보며 울음을 삼키다 곧 고개를 떨구었다.

    “미안해.”

    “…….”

    “그냥 내가 이기적인 애로 남게 해 줘.”

    하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지은은 결국 미준에게 이별을 고했고, 미준은 그가 제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기적처럼 재회한 8년 전의 짝사랑과 꿈 같았던 반년간의 연애는 단 10분 만에 사라졌다. 늘 그렇듯 눈물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허함이 미준을 집어삼킨 탓에, 그는 뭐에 홀린 듯 양주 진열장 앞으로 발을 옮겼다.

    마시다 남은 위스키를 병째 입에 들이부었다. 목구멍이 타는 듯한 감각과 함께 머리가 핑 돌았고, 미준은 크게 휘청거리며 위스키 병을 놓쳤다.

    ―쿵.

    병은 다행히 깨지지 않았고 바닥에 금만 살짝 갔다. 미준은 그 위스키 병을 내려다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넌 진짜 특이한 사람이야, 지은아…….”

    미준의 돈이 탐이 났거나, ‘그 하미준의 애인’이라는 소리가 듣고 싶어서 연인이 된 사람이야 셀 수 없이 많았다. 미준이라는 사람 자체에 호감을 갖고 온 사람도 어느샌가 그런 부류의 사람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지은은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을 경계했다. 지은은 늘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 했고, 결국 자신을 필요로 하는 카렌의 곁으로 갔다.

    스스로를 사랑하고 싶었던 지은과 스스로를 사랑하게 된 계기가 되어준 카렌, 그들은 서로를 원했던 것이다.

    “나도, 네가, 필요한데…….”

    ―끼익.

    미준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정신이 몽롱한 채로 소파 위로 몸을 뉘었다. 방금까지 지은이 앉아 있던 곳인데 벌써 차가워진 지 오래였다.

    그날 느낀 두통은 그 어느 때보다 길고 날카로웠다. 미준은 꼬박 사흘을 앓아누웠다.

    * * *

    “미준 누나, 나 영화 보고 싶어!”

    “어떤 거? 심야도 괜찮으면 아예 상영관을 빌려주지.”

    “정말? 누나 최고~”

    오밀조밀한 인상의 남자가 미준의 팔에 매달린 채 꺄르륵 웃었다. 그리고는 핸드폰 화면을 두드려 미준에게 내밀었다.

    미준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핸드폰을 받아들다 이내 멈칫했다. 포물선을 그리던 입꼬리도 서서히 내려갔고 얼굴엔 그늘이 졌다.

    “이 영화는…….”

    “안티 로맨틱 도쿄! 일본 영화인데 관객 수가 벌써 1,200만 명이 넘었대. 국내에서도 500만 명이나 봤다고 하더라고.”

    남자가 재잘거리며 영화에 대한 정보를 늘어놓기 시작했지만 미준은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모를 리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 영화를 너무 잘 알아서 문제였다. ‘안티 로맨틱 도쿄’는 미준의 전 연인이었던 지은이 카렌의 손 대역으로 나온 영화였으니까.

    어떻게 촬영했고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그리고 종국에는 카렌과 지은이 연인이 되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어차피 옛날 일이니까.’

    1년 전 미준이 받은 상처는 이미 치료된 지 오래였다. 지금이라면 지은의 손은 물론이고, 얼굴을 정면으로 보아도 아무렇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래, 보러 가자. 영화관에 연락해 둘게.”

    .

    .

    .

    영화관에 미준과 그의 애인이 도착하자 직원이 익숙하다는 듯 그들을 가장 안쪽 상영관으로 이끌었다. 침대에 가까운 의자가 설치된 특별 상영관이었다.

    두 사람 외엔 아무도 없는 상영관에 애인은 방방 뛰었고 재빠르게 한가운데 자리에 앉아 영화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미준은 포스터를 찬찬히 살폈다. 그림이 그려진 도화지 더미 위에 카렌이 서 있었다. 얼굴과 옷에 붉은 물감이 피처럼 튀어 있어서 섬뜩한 느낌을 주었지만, 그것이 나약하고 비겁했던 자신을 죽이고 새롭게 태어났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

    상영관의 불이 꺼졌다. 영화는 평화로운 클래식 음악과 함께 카렌의 아역이 물속에서 헤엄치는 것으로 시작됐다. 미준은 숨을 죽인 채로 조용히 영화에 몰입했다.

    영화의 내용은 평론가의 리뷰를 얼핏 본 대로였다. 약혼자의 극단적 선택을 두 눈으로 목격한 ‘타즈코’가 심각한 대인 기피증과 공황장애를 앓다 결국 방 안에 틀어박힌다.

    악몽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고통 속에서 살아가던 그에게 한 편의 편지가 날아오고, 편지에 적힌 장소로 가 예술 활동을 시작한다.

    타즈코가 고통을 예술로 승화하며 약혼자의 사망 사건을 조사하는 미스터리 성장 영화였다.

    잘 만든 영화였다. 스토리는 물론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했고, 대사에서도 고민한 흔적이 느껴졌다. 하지만 미준의 주의는 오직 타즈코가 그림을 그리는 장면에만 쏠려 있었다.

    ‘저렇게 처절하게 그림을 그려왔구나.’

    타즈코를 연기하는 지은의 손에서 그동안 지은이 살아온 시간이 느껴졌다. 부러트릴 듯이 꽉 쥔 붓과 거친 스트로크, 그 끝에 완성된 그림은 유화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선명했다.

    스크린엔 숨을 헐떡거리는 카렌 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림을 이야기할 때 반짝거리던 지은의 눈동자가 보이는 듯했다.

    타즈코가 약혼자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을 해결하고 예술적으로도 인정을 받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났다. 미준은 엔딩 크레딧에 올라온 수많은 이름 중 단 한 사람의 이름에 시선이 고정됐다.

    [그림 제공 | 선지은]

    크레딧의 꽤 상단에 지은의 이름이 보였다. 미준은 그 이름이 위로 올라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하하하…….”

    그리고는 조용히 소리 내어 웃었다. 미준의 애인이 그를 이상하게 쳐다보았지만 미준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언니는 8년 전이나 지금이나 참 이상하고 멋있는 사람이야.’

    지은이 미준에게 이별을 고할 때 이야기했던 말이 떠올랐다. 만약 지금 미준이 지은을 만난다면 그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었다.

    자신을 감싸주고 몬스터로부터 동기와 선배들을 구해줬을 때부터 훌륭한 예술가가 된 지금까지, 멋있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고.

    미준의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던 지은에 대한 미련은 엔딩 크레딧이 끝나는 동시에 사라졌다. 지은은 자신의 곁을 떠나 있을 때 가장 빛나고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늘 그렇게 눈부시게 있어 줘.’

    자신이 유일하게 좋아했던 사람, ‘선지은’에 대한 미준의 마지막 인사였다.

    * * *

    ―일본 교토, 예식장.

    “…하미준이 왔다 갔다고?”

    “응. 축의금만 내고 갔어.”

    “진짜 정신이 나갔나…….”

    피로연 직후, 카렌은 축의금 접수를 담당했던 친구의 말을 듣자마자 인상을 구겼다. 대기실에 그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지은이 만나고 간 거 아니겠지?”

    “그럴 린 없을 거야. 왜냐면 그때 한창 식 중이었거든.”

    “청첩장도 안 보냈는데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진짜…….”

    카렌이 잇새로 앓는 소리를 내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의 친구는 우물쭈물하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근데 금액이 좀 커서… 네가 알아야 할 것 같아.”

    “하, 재수 없네. 누군 두 사람 먹여 살릴 재산이 없는 줄 아나… 얼만데?”

    “8천만 엔.”

    카렌이 눈을 크게 뜨며 친구를 바라보았다. 친구는 그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걸 확인시켜주듯 고개를 한 번 더 끄덕였다.

    “수표로 내고 갔어. 위조 수표 아닌 건 진작 확인했고.”

    “…그 인간 진짜 미친 걸까?”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그런 금액을 내긴 힘들겠지.”

    친구는 머릿속으로 미준을 떠올렸다. 수수한 셔츠 차림이었지만 예식장에 있는 그 누구보다 눈에 띄었던 미준은 봉투도 없이 수표를 내밀곤 준비된 방명록에 이름도 쓰지 않았다.

    한창 결혼식이 진행되던 예식장 안을 바라보고 다시 떠나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후련하게 느껴졌을 뿐이었다.

    “그 와중에 7천도 아니고 8천으로 준 게 진짜 열 받는데?”

    “그러게. 이쪽 문화를 잘 몰랐나?”

    “아니, 분명 일부러 엿 먹으라고 그랬을 거야.”

    카렌은 애인 관계는 복잡해도 교양 수준은 높은 미준이 일본의 홀수 축의금 문화를 모를 리 없다고 확신했다.

    ‘다른 짝수도 많았을 텐데 왜 하필 8이지?’

    ―드르륵.

    카렌이 얼굴을 구기며 미준의 의중을 파악하려 한 그때 대기실 문을 열고 지은이 나타났다.

    “카렌, 여기서 뭐 해?”

    “우리 신부가 오길 기다렸지.”

    카렌이 양팔을 벌리자 지은이 배시시 웃으며 그의 품에 안겼다. 조금의 빈틈도 없이 자신의 신부를 끌어안은 카렌의 얼굴이 완전히 풀어졌다.

    방금까지 미준의 의중을 생각하느라 머리가 터질 것 같았는데, 지은의 포옹 한 번으로 모든 것이 사르르 녹았다.

    지옥도가 사라진 이후의 어떤 결혼식은 수많은 축복과 누군가의 마지막 미련이 담긴 채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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