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354화 (354/366)
  • 외전 16화

    “선지은 작가님 20분 후에 다시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네, 네!”

    지은이 팔레트와 붓을 촬영장 구석에 있던 개수대에서 깨끗이 닦았다. 거의 일주일 연속으로 촬영장에 와 그림을 그리다 보니 제 손을 찍는 카메라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벌써 내일이 지은 작가님의 마지막 촬영이네요~ 아쉬워라…….”

    “아, 츠구나가 씨. 오늘도 오셨네요?”

    “당연히 와야죠! ‘타즈코’의 손이 여기 있는데.”

    카렌은 자신의 배역 이름을 말하며 싱긋 웃었다. 그러자 지은도 가벼운 미소로 화답했다.

    지은은 자신의 촬영 날마다 카렌이 방문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은이 ‘타즈코’의 손을 연기하고 있기 때문에 나중에 자신이 연기할 때 참고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지은 작가님의 손에선 타즈코의 단단한 내면이 느껴져서 좋아요. 저도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연기하려고 하고 있죠.”

    “전 딱히 연기라고 할 만한 것도 없는데요, 뭘. 그냥 평소처럼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에요.”

    “그럼 지은 작가님의 내면이 강철처럼 단단한가 보네요.”

    카렌이 붓을 조심스럽게 손에 쥐곤 그것이 보석이라도 되는 양 찬찬히 살펴보았다.

    “대본을 처음 받았을 때 타즈코랑 제가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정말요?”

    “네! 전혀 상상 안 가시죠?”

    “어… 네.”

    “아하하! 그렇게 조심스럽게 대답하지 않으셔도 돼요!”

    카렌은 다 안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크게 웃었다. 주위에 있던 스태프들이 그들을 흘긋 보았지만, 곧 고개를 돌려 할 일을 마저 했다.

    “첫 작품을 완전히 말아먹고 나서 공황장애랑 대인기피증을 겪었어요. 모든 사람들이 제 연기와 역할을 비웃는 것 같다고 생각했죠, 애초에 아무도 안 봤는데.”

    “그러셨군요…….”

    “오디션을 보러 갈 용기조차 없었을 때 작가님의 그림을 본 거예요.”

    지은이 눈을 크게 떴다. 카렌의 푸른 눈동자가 다정한 빛을 띠며 조용히 지은을 응시했다.

    “바람에 흔들릴지라도 꺾이지 않는 억새가 되리라.”

    “어…….”

    “작가님이 그림이랑 함께 올렸던 글귀예요. 기억하시죠?”

    “기억하죠… 어린 마음에 썼던 건데 이렇게 들으니까 좀 부끄럽네요.”

    “부끄럽다뇨!”

    카렌이 바로 부정하자 지은이 화들짝 놀랐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될 정도로 큰 소리였고, 그 반응에 카렌이 되려 놀라 머쓱하게 웃었다.

    “모, 목소리가 너무 컸죠?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흥분해서…….”

    “괜찮아요. 츠구나가 씨도 흥분이란 걸 하는 사람이었군요…….”

    “아하하.”

    카렌은 들고 있던 붓을 다시 지은의 손에 쥐여주며 조용히 이야기했다.

    “그냥 누군가는 그 문장 덕분에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지은이 카렌을 빤히 쳐다보았다. 섬세한 이목구비와 다정한 눈빛에 저도 모르게 그에게 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카렌이 시선을 올려 지은과 눈을 맞췄고, 그에 놀란 지은이 붓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은은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져서 생각나는 대로 말을 뱉었다.

    “호, 혹시 그 누군가가 츠구나가 씨인가요?”

    “와, 작가님 눈치 진짜 빠르시다~”

    카렌은 일부러 호들갑을 떨며 지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의 능청스러움에 어색함이 눈 녹듯 사라졌고, 지은도 해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지은이 보는 카렌은 연기에 대한 열정과 애정, 그리고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과 함께 일을 하고, 자신이 그에게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데 도움을 줬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가슴 한구석이 간지러웠다.

    ‘이렇게 팬이 되는 거구나.’

    지은은 카렌을 응원하고 싶어졌다. 자신의 그림으로 인해 다시 일어난 그가 비상하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고 싶었다.

    * * *

    “나리타 공항. 지금 갈 수 있는 항공편 중 제일 빠른 걸로 해주세요.”

    “오후 2시에 출발하는 항공편으로 예약 도와드리겠습니다. 좌석은 어떤 걸로 해드릴까요?”

    “아무거나 남는… 아니다, 퍼스트로 해주세요. 좀 급해서.”

    직원이 발권하는 동안 미준은 계속해서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화면엔 치바 현에서 발생한 A급 게이트 때문에 사람들이 대피하는 소동이 발생했다는 뉴스가 떠 있었다. 공식적인 파견 협조 요청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미준은 던전 공략을 마치자마자 바로 공항으로 향했다.

    치바 A급 게이트가 지은이 촬영하던 스튜디오를 덮쳤기 때문이었다.

    [연락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음성 사서함으로…….]

    미준이 지은에게 또다시 전화를 걸어봤지만 받지 않았다. 아직까지 보고된 사망자는 없었다. 하지만 부상자가 계속해서 나오는 상황이었고, 공략도 마무리가 되지 않아 지은의 생사가 불분명했다.

    “지금 바로 전용 수속대로 이동해 주시면 됩니다.”

    미준이 여권과 탑승권을 챙겨 빠르게 수속대로 이동했다. 머릿속을 비집고 나오는 끔찍한 상상을 애써 무시하며 출국장으로 향했다.

    .

    .

    .

    사고 현장 주변 도로는 완전히 통제되었다. 민간인들의 대피가 끝난 상태라 헌터 협회 직원들과 헌터들만이 거리에 있었고, 앰뷸런스와 헌터 협회 차량이 바리케이드처럼 게이트를 겹겹이 싸고 있었다.

    그래서 미준은 현장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곳에서 택시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게이트 방향으로 달려가자 미준이 지은을 통해 몇 번 본 스튜디오 건물이 폭삭 주저앉아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달려가는 다리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지은이 안전한 곳으로 이미 대피한 후라서 자신이 헛걸음한 것이길 간절히 바랐다.

    “여기서부턴 통제 구역입니다. 대피해 주시길 바랍…….”

    “대한민국 헌터 협회 소속 하미준입니다. 혹시 저 스튜디오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대피했나요?”

    “네? 어, 아, 잠시만요.”

    협회 직원이 잠시 미준을 대기시킨 후 통역기를 끼우고 있던 다른 사람을 데리고 왔다.

    “한국의 헌터분이라고 하셨죠? 따로 협조 요청은 안 드렸던 것 같은데…….”

    “제 여자친구가 저 건물 안에 있었어요. 연락도 안 되고 대피를 한 건지, 못 한 건지도 알 수가 없어서 왔습니다. 부상자 명단에는 없었어요, 그리고…….”

    미준이 횡설수설하며 상황을 설명하자 협회 직원이 어두운 얼굴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스튜디오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대피했습니다. 하지만 일부 인원이 게이트 안으로 빨려 들어간 상황입니다.”

    “게이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고요…?”

    “부상자 명단에 없다면 연인 분께서 게이트 안에 계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헌터들이 지금 공략 중이니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앗, 헌터님!”

    미준이 협회 차량 보닛을 뛰어넘으며 게이트 쪽으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직원들이 그를 저지하려 앞을 막아섰지만 미준이 옆으로 민 탓에 속수무책으로 넘어졌다. 세 명이 동시에 달려들어 양팔과 다리를 붙잡고 나서야 겨우 미준의 움직임을 저지할 수 있었다.

    “놔 주시죠.”

    “여기서 더 들어가시면 저희도 법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하아… 놔 주시라고요.”

    “안 됩니다.”

    미준은 분노 때문에 피가 끓는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처음 알았다. 앞뒤 상황 따위 고려하지 않고 지금 자신을 막은 사람들을 어딘가 멀리 던져버리고 싶었다.

    미디어에 자신의 더러운 애인 관계가 알려지는 것보다 더 골치 아픈 일이 발생할 것이란 것도 알고 있었지만 미준의 이성은 갈기갈기 찢긴 지 오래였다.

    지금 당장 지은을 제 두 눈으로 보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쾅!

    그때 굳게 닫혀 있던 게이트가 열렸다. 몬스터가 유출된 건가 싶어 대기하고 있던 헌터들이 게이트 쪽으로 무기를 들었고, 미준의 몸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사람들도 한 발짝 물러서 몸을 숨길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과 달리 게이트에선 몬스터 같은 건 나타나지 않았다. 밖으로 나온 건 공략을 마친 헌터들과 그들이 보호하고 있던 민간인들이었다.

    ―또각.

    미준은 그들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주위의 소음도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도, 그에겐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누군가에게 몸을 의지한 채 한 걸음 한 걸음을 조심스럽게 내딛는 제 연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지은아.”

    “미준 언… 웁.”

    미준이 지은을 끌어안았다. 조금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꽉 당겨오자 지은이 두 눈을 크게 뜨더니 팔로 그의 등을 두드렸다.

    하지만 미준은 좀처럼 그를 놓아주지 않았고 지은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한참을 중얼거렸다.

    “진짜 걱정했어.”

    “…언니.”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더라. 네가 잘못 됐을까 봐, 그래서 평생 못 볼까 봐.”

    “나 여기 있잖아. 괜찮아.”

    “저기~”

    두 사람이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는 한편, 방금까지 지은을 부축해온 카렌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준이 고개를 들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카렌은 입꼬리만 살짝 올려 웃곤 말을 덧붙였다.

    “지금 지은 작가님께서 발목을 다치셨거든요. 일단 병원으로 먼저 이동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아, 그렇네요. 지은아, 몸에 힘 풀어.”

    “응…….”

    지은이 자연스럽게 미준의 목을 양팔로 끌어안자 미준은 그를 안아 올리며 앰뷸런스 쪽으로 걸어갔다. 카렌은 서늘한 눈으로 미준의 등을 바라보다 그의 어깨 너머로 빼꼼 고개를 내민 지은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카렌의 눈매가 순식간에 완만한 호선을 그렸다. 그에 지은도 안심했다는 듯 눈인사를 한 후 다시 미준의 품속으로 사라졌다.

    치바 현 A급 게이트 생성으로 인한 사망자는 없었다. 민간인들이 게이트 안으로 다수 빨려 들어간 상황에서 그것이 가능했던 건 카렌이 던전 안에서 S급으로 각성을 했기 때문이었다.

    카렌은 고유 스킬인 ‘하시히메’에 의존해 협회 소속 헌터들이 올 때까지 버텼고, 그 덕분에 자잘한 부상자를 제외하고 아무런 희생도 만들지 않았다.

    그 때문이었을까, 지은은 던전에서 나온 이후로 부쩍 카렌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했다. 일부러 그때 일을 입에 올리거나 카렌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는 게 아니라, 재채기처럼 지은의 의지와 상관없이 터져 나왔다.

    “으음~ 나를 두고 다른 사람 얘기를 하면 내가 질투가 나겠어, 안 나겠어?”

    “…아, 미안.”

    그럴 때마다 미준이 장난스럽게 대꾸했지만 지은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얼굴을 보자마자 미준은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붙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말 몇 마디로 상대를 파악할 정도로 눈치 빠른 미준이 제 애인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미준은 그 의문을 먼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두려움을 느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 아무래도 언니를 좋아했던 게 아닌 것 같아.”

    아슬아슬하게 쌓아 올린 나무 블럭 같던 두 사람의 관계는 결국 지은의 말 한마디에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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