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353화 (353/366)

외전 15화

“하미준 선배님……?”

지은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미준을 바라보았다. 예상치 못한 만남에 말하는 것도 까먹은 듯 입을 달싹거렸다. 그의 눈에 비친 미준은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더 어른이 되어 있었다.

“하, 하하… 와, 그러니까, 음…….”

반가움보다 혼란스러운 감정이 먼저 들어 미준이 횡설수설했다. 8년 전의 기억이 물밀듯이 흘러들어와 미준의 마음을 뒤흔들었고, 심장은 몬스터와 전투를 치를 때처럼 쿵쿵거렸다.

“오래 기다렸지! 안에 사람이 많아…서?”

“…….”

“누나?”

그때 시우가 나타났다. 그는 미준에게 팔짱을 끼며 지은을 흘긋 쳐다보았고 곧 눈을 가늘게 뜨며 미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구야?”

“아, 대학교 후배.”

“그런 거였어? 난 또 누나 전애인인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

“먼저 집에 가 있을래? 후배랑 잠깐 얘기 좀 해야 할 것 같아서.”

“뭐?!”

미준의 말에 시우가 잔뜩 날이 선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준은 몸을 돌려 시우의 볼을 톡 건드리곤 이내 품에서 검은색 카드를 꺼내 시우의 바지 뒷주머니에 넣었다.

“미안. 이걸로 쇼핑 좀 하다가 들어가. 어쩌면 좀 늦을지도 모르거든.”

“누나, 저 여자 진짜로 전애인 아니지?”

“아니라니까. 의심되면 직접 물어봐도 돼.”

시우는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이야기하자 미준은 특유의 능글맞은 태도로 제 애인을 달랬다. 시우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미준을 바라보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시우가 호텔을 떠난 후 지은과 미준 사이엔 또 다시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진짜로 지은이네.’

미준은 여전히 지은과 재회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그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지은은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눈을 피했고 그제야 미준이 자신의 행동을 인지했다.

“시간 돼? 차나 한잔하자.”

“…네.”

8년 전의 지은과 달리 순순히 미준의 제안에 응해 주었다. 두 사람이 라운지로 들어가 가장 안쪽 자리에 앉았고 직원이 주문을 받으러 다가왔다.

“루이보스차, 뜨거운 걸로 한 잔이요.”

“전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네, 알겠습니다.”

직원이 고개를 꾸벅 숙인 후 사라지자 미준이 눈을 크게 뜨고 지은을 바라보았다.

“카페인 안 마신다고 하지 않았어?”

“요즘은 잘 마셔요. 원래는 한 잔만 마셔도 심장이 뛰었는데 이젠 세 잔을 마셔도 잠만 잘 오더라고요.”

지은치고 제법 긴 대답이었지만 다시 입을 다물고 유리컵에 든 물만 들이켰다.

미준은 여전히 제 앞에 지은이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8년 동안 지은을 그리워할 정도의 순정은 아니었지만, 쉴 새 없이 애인을 갈아치우는 동안에도 문득 지은을 떠올릴 때는 있었다.

떠난 인연을 붙잡지 않는 미준의 인생관에 있어 선지은이라는 사람은 확실한 이례였다.

“보고 싶었어.”

“…….”

“지은 후배님이 보고 싶었어.”

미준이 담백하게 진심을 뱉었다. 누군가를 유혹하기 위한 달콤한 말이 아니라 그의 순수한 진심이었다.

지은은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색한 정적이 흐를 때쯤 어느새 직원이 차와 커피를 가져와 그들의 앞에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도 될까?”

“……….”

“약속했던 한 달이 되는 날 왜 학교를 안 나왔는지. 그리고 그 이후에 왜 휴학을 했는지도.”

지은은 떨궜던 고개를 들어 미준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자신의 터틀넥 니트의 목 부분을 끌어내렸다.

“어?”

지은의 목에 가로로 긴 상처가 나 있었다. 수술 자국 같은 흉터에 미준이 두 눈을 크게 뜨자 지은은 옷매무새를 바로하며 말을 덧붙였다.

“잠깐 아팠어요. 갑상선 암 2기였거든요.”

“…지금은 괜찮아?”

“네. 완치 판정받은 지 오래예요. 매일 약만 잘 챙겨 먹으면 돼요.”

지은은 날씨 이야기하는 것처럼 편하게 말했지만, 미준은 사색이 됐다. 지은이 자신을 피했다고 생각했던 어린 자신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치료하느라 1년 동안 휴학했고 바로 복학하고 졸업했어요.”

“그렇구나. 치료가 잘 돼서 다행이야. 진짜로 다행이야.”

미준이 다정한 눈으로 지은을 쳐다보았다.

―달그락.

그러자 지은은 빨대로 얼음을 괜히 뒤적거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응?”

“연락 못 드렸잖아요. 분명 선배는 그 날도 기다리셨을 텐데.”

“아하하!”

지은이 비장하게 이야기한 것이 무안할 정도로 미준이 크게 웃었다.

“뭘 그런 거 갖고 죄송하다 그래. 시간이 좀 지나긴 했어도 만나긴 했잖아.”

“8년이나 지났잖아요. 어쩌면 평생 못 만났을 수도 있고.”

“평생 못 만났다면 우리 지은 후배님은 평생 나를 마음 어디 한 구석에 두고 있었겠네.”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면 제 말이 그런 결론으로 이어져요?”

“똑부러진 건 여전하구나.”

미준은 루이보스차로 목을 축이며 지은을 빤히 응시했다. 대화를 좀 했더니 아까보단 어색함이 좀 사라진 기분이었다.

“여긴 어쩌다 온 거야? 아까 만난 사람은 누구였어?”

“일본에서 활동하는 영화감독이에요. 그 감독님이랑 이야기할 게 있어서 들렀어요.”

“영화감독? 지은 후배님 배우야?”

“그럴 리가 있겠어요?”

지은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핸드폰을 몇 번 두드리더니 곧 미준에게 내밀었다. 한 SNS 그림 계정이었다. 화면 한가득 채운 수채화 그림에 미준이 넋을 놓고 스크롤을 내렸다.

“이, 이거 설마 다 지은 후배님이 그린 거야?”

“네. 치료 기간 동안 취미 삼아 한두 개씩 올렸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어요.”

지은의 계정은 수만 명의 팔로워를 갖고 있었다. 미준이 감탄하며 반짝거리는 눈으로 지은을 바라보자 지은은 애써 눈을 피하며 아메리카노만 들이켰다.

“그랬더니 드라마나 영화 감독들이 가끔 소품으로 쓸 그림을 요청하기도 하더라고요.”

“우리 지은 후배님 대단하네… 이런 재능이 있는 줄 몰랐어.”

“별 것도 아닌데요 뭘.”

“아니, 별 거야. 엄청 별 거야.”

미준이 지은의 손에 핸드폰을 쥐어주며 말을 덧붙였다.

“내가 잡고 싶었던 이 손이 그런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손이었다니. 역시 내 안목은 틀리지 않네.”

“…선배님도 정말 여전하시네요. 아니, 더 심해진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오늘도 그것 때문에 감독을 만난 거야?”

“네. 근데 이번엔 조금 다른 의뢰이긴 해요.”

지은이 핸드폰을 다시 가방 안에 넣곤 대답했다.

“이번 작품 주인공이 심각한 대인 기피증을 앓고 있는 천재 화가라는 설정이래요. 그래서 제가 그림을 그리는 장면이 필요하다고 하시더라고요.”

“아~ 그 음악 영화에서 악기 연주하는 부분은 전문 연주자 손만 찍는 거랑 비슷한 건가?”

“네. 아, 대외비니까 절대 말씀하지 마세요. 다음주에 제작 발표회가 있거든요.”

“절대 말 안 할 테니까 걱정마.”

미준이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지은을 빤히 쳐다보았다. 지은도 이번엔 그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했지만, 곧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려 결국 눈을 피했다.

‘진짜 웃기는 선배야.’

지은은 남은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심장의 떨림을 카페인 탓으로 돌렸다.

“그나저나 이젠 좀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무슨 대답이요?”

“내가 괜찮은 사람이면 번호 주기로 했잖아.”

“그런 옛날 일을……!”

“그런 옛날 일을 8년 동안 마음에 담아둔 사람은 우리 지은 후배님인데~?”

미준이 일부러 말꼬리를 늘이며 능글맞게 웃자 지은이 쉽게 받아치지 못했다. 차마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슥.

테이블 위에 고정되어 있던 지은의 시야 안으로 명함이 한 장 들어왔다.

[대한민국 헌터 협회]

[창조계 S급 헌터]

[하미준]

검은색 종이에 은박으로 글자가 쓰인 미준의 명함이었다. 지은이 명함을 집어들며 고개를 들자 미준이 싱긋 웃었다.

“연락 기다려도 되지?”

지은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지만 겨우 목에 힘을 주어 참았다.

“생각해 보고요.”

“역시 신중해.”

―드르륵.

미준이 자리에서 일어난 후 지은의 의자 옆에 섰다.

―탁.

그리곤 양손으로 지은의 의자를 잡고 고개만 살짝 숙여 그를 향해 이야기했다.

“집으로 데려다 줄게. 가자.”

* * *

“어, 지은아. 도착했어?”

―응. 자리에서 기다리는 중.

“알겠어. 나도 이제 발렛 맡기고 올라갈게.”

―천천히 와, 언니.

“나는 우리 지은이 입에서 언니라는 소리 나오는 게 너무 좋더라."

―…뭘 새삼. 아무튼 끊을게.

미준은 핸드폰에 입을 맞춘 후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는 레스토랑 직원에게서 발렛증을 받은 후 유유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미준과 지은이 연인으로 발전한 건 재회한 지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지난 8년 간의 그리움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서로의 애정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고, 미준의 담백한 고백으로 선후배 사이에서 연인이 되었다.

그 사실을 안 미준의 전 남자친구가 그의 집에서 난동을 피웠지만 미준은 이미 수십 차례 있던 일이라 능숙하게 그를 돌려보내고 관계를 끝냈다. 미준에게 있어 숨쉬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하미준 이름으로 예약했습니다.”

“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직원의 뒤를 따라 가장 안쪽 자리로 이동하자 지은의 뒷모습이 보였다.

―쪽.

미준이 지은의 볼에 짧게 입 맞춘 후 맞은편에 앉았다. 지은이 화들짝 놀라며 미준을 향해 뭐라 말을 뱉으려다 곧 고개를 저으며 포기했다. 그 모습을 본 직원만 애써 놀라지 않은 척을 하느라 노력할 뿐이었다.

직원이 주문을 받고 떠나자 미준이 기다렸다는 듯 테이블 위에 있던 지은의 손을 잡았다. 미준의 눈동자에 조금은 부끄러워 하는 듯한 지은이 담겼다.

“오늘 감독이랑 배우들 전체 미팅이었지? 어땠어?”

“조금 긴장하긴 했는데 괜찮았어. 배우분들도 전부 친절하시고.”

“다행이네. 그 주인공 역할 맡은 사람도 괜찮아? 그 사람이랑 같이 촬영한다며.”

“츠구나가 씨? 아무 말 안 하고 있을 때 좀 차가워 보였는데, 막상 얘기해보니까 엄청 상냥하시더라.”

지은이 물로 목을 축인 후 말을 이어갔다.

“알고 보니까 츠구나가 씨가 내 계정을 먼저 알고 계셨더라고. 그래서 감독님한테 날 추천하신 거였대.”

“오, 진짜? 그 인간 연기만 잘하는 게 아니라 그림 보는 눈도 있네.”

“너, 너무 띄워주지 마.”

“사실을 이야기한 것뿐이야. 지은이 그림을 보고 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걸.”

미준이 한창 지은의 그림에 대해 이야기 하는 동안 직원이 와인을 들고 왔다. 두 사람이 와인을 맛본 후 잔을 내려놓자 직원이 조심스럽게 다시 따라주었고 미소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달그락.

미준은 잔을 지은 쪽으로 살짝 들었다.

“그럼 우리 선지은 화가의 앞날을 축복하며 건배할까?”

“그리고 언니의 안전한 던전 공략도 기원하자.”

“아하하! 그래, 그래.”

―챙.

유리잔이 부딪쳐 맑은 소리를 냈다. 잔 너머로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늦봄의 바람처럼 따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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