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352화 (352/366)

외전 14화

지은은 말 그대로 모범생이었다. 동기들에게는 친절하고, 선배에겐 깍듯했다. 교수가 농담 반 진심 반으로 대학원에 오라고 할 정도로 우수한 성적을 갖고 있는 데다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수능 성적 우수자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교성이 전혀 없다고 했다. 사람이 모이는 곳을 극도로 싫어했고, 혼자 다니는 것을 더 선호했다. 신입생 MT가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과 행사였다. 미준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윤상이한테 개길 땐 전혀 그런 성격으로 안 보였는데.’

미준은 강의실 복도에 기대어 선 채로 생각에 잠겼다. 똑부러지게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고, 미준에겐 몬스터를 유인해 달라고 요구하는 모습이 6개월이 지난 지금도 선명했다.

미준이 각성한 후 그는 지은과 친해지기 위해 노력했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실패의 주된 원인은 아이러니하게도 미준 본인에게 있었다.

국내 두 번째 S급 헌터는 은둔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세 번째 S급 헌터이자 전직 WNBA 선수의 딸인 미준에게 넘어갔다.

안 그래도 높은 미준의 SNS 팔로워가 수백만을 우습게 넘고, 어떤 학교를 나오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낱낱이 파헤쳐졌다.

쏟아지는 관심에 취하기도 잠시, 미준은 헌터로서 해야 할 일을 하느라 도저히 학교에 갈 시간이 나질 않았다. 지은의 이름만 겨우 알아낸 채로 무의미하게 한 학기가 흐른 것이다.

“하미준 아니야?”

“헐 미친, 대박.”

“졸업 했다고 그러지 않았어? 헌터 됐다며.”

지나가는 학생들이 미준을 보며 수군거리자, 미준은 고개를 들어 그들을 향해 싱긋 웃었다.

“이번이 막 학기~ 지금은 헌터 업무랑 학업이랑 병행 중이야.”

“헐, 들렸나 봐……!”

“사, 사진 한 장 찍어주실 수 있을까요?!”

“그럼~”

학생들이 서로를 보며 꺄르륵 웃더니 곧 미준과 함께 사진을 찍은 후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들은 좋아하는 연예인이라도 본 사람마냥 잔뜩 들떠 있었다.

“인찬이, 수진이 잘가~”

“가, 감사합니다!”

이름을 불러주자 그들은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허리를 연신 접어가며 인사하더니 곧 계단 밑으로 사라졌다. 그들의 웃음 소리가 복도에 한참 머물렀다.

―끼익.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강의실 문이 열렸다. 미준은 강의실을 빠져나오는 학생들을 빠르게 눈으로 훑으며 그가 간절하게 보고 싶던 학생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아.”

강의실 안으로 들어갈까 고민한 순간, 하나로 묶은 긴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부드럽고 나른해 보이는 눈과 시선이 맞닿자 미준은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어버렸다. 아마 그의 인생에서 지었던 미소 중 가장 바보 같은 미소였을 것이다.

“오랜만이야, 지은 후배님.”

“아, 네… 안녕하세요.”

반면 지은은 어정쩡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그는 미준을 신기한 듯 쳐다보며 할 말을 한참 골랐다.

“졸업 안 하셨네요.”

“이번이 마지막 학기라서. 아, 그거 들어줄게.”

미준이 지은의 손에 들린 두꺼운 전공책을 가리켰다. 전공책 중에서도 쓸데없이 양장본으로 만들어 무게가 두 배 더 무거워진 책으로 유명한 것이었다.

지은은 미준의 말을 무시하고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은 후 지퍼를 열었다.

“괜찮아요. 가방에 들어가요.”

“그럼 가방 들어줄게.”

“아니요. 괜찮아요.”

“우리 지은 후배님은 언제 안 괜찮아?”

“선배님이 지금 이렇게 나타나서 말 걸 때요.”

미준이 상처받은 얼굴을 하며 지은을 바라보았지만, 지은은 아랑곳하지 않고 들고 있던 전공 책을 자신의 백팩에 쑤셔 넣었다.

단호하게 이야기한 것치곤 지퍼가 아슬아슬하게 잠겼다. 지은이 쌀가마니에 가까운 가방을 내려보다 곧 결심한 듯 힘차게 들어 어깨에 바로 올렸다.

“아……!”

―탁!

지은의 중심이 가방 무게 때문에 순간적으로 뒤로 쏠렸다. 그가 휘청거리기 무섭게 미준이 지은의 가방을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진짜 괜찮아?”

“…내려주세요.”

“집까지 데려다줄게.”

“괜찮아요. 저 자취해요.”

“그래? 더 잘 됐네. 그럼 거기까지 가방 들어줄게.”

지은은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얼굴에 철면피를 몇 겹을 깐 건지 아무리 무안을 줘도 기가 꺾이는 법이 없었다.

MT 때 괜히 말 붙였다는 후회가 스멀스멀 들 때쯤 지은의 눈앞으로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들이밀어졌다.

“나 우리 지은 후배님이랑 친해지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제가 싫다고 하면 그만 하실 건가요?”

“응. 대신 딱 한 달의 유예기간을 줘.”

미준의 말에 지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계약이라도 되는 듯한 말에 미준의 설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딱 한 달간만 내가 우리 후배님을 좀 귀찮게 할 지도 몰라.”

“너무 당당한 거 아니에요?”

“한 달 후에도 여전히 내가 싫으면 그땐 정말 깔끔하게 물러날게.”

―스륵.

미준이 지은의 가방을 대신 어깨에 걸치며 말을 이어갔다.

“대신 한 달 후에 내가 조금이라도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다 싶으면, 그때 우리 지은 후배님 번호 줘.”

“싫어요.”

“유예기간~”

“어! 제 가방 주세요!”

미준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지은의 가방과 함께 계단을 내려갔고 그 뒤를 지은이 허겁지겁 쫓아갔다.

‘완전히 걸려들었어.’

미준은 건물 밖으로 나가며 키득거렸다. 사적인 연락 없이도 한 달 안에 반드시 지은을 제 여자친구로 만들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

.

.

그렇게 한 달 간의 기묘한 구애 활동이 시작되었다. 미준은 매일 지은의 마지막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강의실 앞에서 기다렸고, 식사를 같이하거나 커피를 마시자며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하미준이 같은 과 후배를 짝사랑한다는 소문이 퍼지고, 자연스레 지은에게로 관심이 쏠렸다.

지은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상황과 미준의 관심에 질색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저도 모르게 그를 의식하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 밖으로 나왔을 때 그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게 복도를 서성거렸다. 그러다 늦게 도착한 미준과 마주치면 속으로 안도했다.

“커피 안 마실 거야? 내가 힘~들게 사서 올라왔는데?”

“저 카페인 못 마셔요.”

“그렇구나~ 그럴 줄 알고 생딸기우유도 사왔지.”

“…이번만이에요. 다음엔 이런 거 사오지 마세요.”

미준이 건넨 호의에도 서서히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바람둥이에 사생활이 문란하다는 소문이 파다한 사람치고는 미준은 순수한 구석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지은도 서서히 미준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그렇게 약속했던 한 달이 흘렀다. 미준은 슬랙스와 셔츠 차림으로 지은의 강의실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 일부러 셔츠를 살짝 걷어서 전완근과 시계가 보이도록 연출했고, 덕분에 복도를 지나가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고백 타율 100%의 승부룩이라고.’

미준은 늘 그렇듯 우쭐해 있었다. 지은이 은근히 자신을 신경 쓰고 있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그는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수업이 끝나고 문에서 지은이 나온다. 지은에게 식사를 하자고 제안하면 자신의 제안을 마지 못해 받아줄 것이고, 그럼 미리 예약해둔 레스토랑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디저트를 먹을 때쯤 고백한다.

―끼이익.

미준이 완벽한 고백 시뮬레이션을 마칠 때쯤 강의실 문이 열렸다. 학생들이 하나둘씩 나오자 미준은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옷에 끼워 넣고 지은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지?’

아무리 대강의실이어도 지금쯤이면 지은이 강의실을 나왔어야 했다. 자신이 지은이 놓쳤을 리도 없고, 놓쳤다 하더라도 지은이 미준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 것이다.

미준은 결국 강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 하미준 학생 아닌가?”

“안녕하세요, 교수님~ 오랜만에 뵙네요.”

“작년만 해도 여기서 수업을 들었는데 갑자기 헌터가 됐다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그러니까요. 저도 아직 실감이 잘 안 나네요. 교수님, 혹시 오늘 선지은이라는 친구 수업 안 왔나요?”

“선지은 학생? 어디 보자…….”

교수가 안경을 내리고 바인더를 펼쳤다. 긴 출석부를 밑에서부터 훑다 펜 끝으로 지은의 이름을 가리켰다.

“오늘 결석했네.”

“결석이요……?”

“응. 안 그러던 학생인데… 어디 아픈가?”

“…감사합니다, 교수님.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미준은 곧바로 강의실을 뛰어나가 아는 후배들에게 전부 연락을 돌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지은의 행방을 몰랐다

같이 팀플 수업을 들었던 학생을 수소문해 지은의 전화번호를 받았지만,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자동 응답기의 대답만 들을 뿐이었다.

던전에라도 휘말렸나 싶어 협회에 신고된 모든 게이트들의 피해자 명단을 확인했지만, 지은의 이름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누군가 그를 도려내 간 것처럼 지은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깟 여자애가 뭐라고.”

부정, 걱정, 슬픔을 거치던 미준의 감정은 분노와 체념 단계에 이르렀다. 그는 침대에 누운 채로 지은을 떠올렸다.

지은에게 처음 흥미가 생긴 건 그의 행동 때문이었다. 관심과 스포트라이트와는 거리가 한참 먼 존재가 인생 그 자체가 스포트라이트였던 자신에게 다가오고, 심지어 감싸 주기까지 했다. 그것만으로 이미 지은은 미준이 지금까지 봐온 사람들의 유형과는 달랐다.

‘선지은'이라는 사람을 알면 알수록 호기심과 흥미는 호감으로 바뀌었다. 누군가의 행동이 재미있어서 그 사람을 좋아한다고 착각했던 것과는 달랐다. 이번에는 분명히, 미준은 ’선지은‘이라는 사람이 좋았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무너졌다. 지은은 미준의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졌고, 다시 찾기엔 미준의 알량한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컸다.

[번호를 삭제하시겠습니까?]

―탁.

미준은 그의 번호와 함께 억지로 지은에 대한 기억을 지웠다. 짧았던 한 달의 짝사랑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 * *

―8년 후.

“오늘 진~짜 맛있었다, 그치 누나~?”

“맛있게 먹었다니 다행이네.”

“여기 예약하기 힘든 곳이라며. 어떻게 한 거야?”

“우리 왕자님 모시고 온다니까 바로 알겠다고 하더라. 시우가 귀여워서 가능했던 거지.”

“하여간 주책은…,!”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 미준을 올려다보았지만 씰룩거리는 입꼬리와 붉어진 얼굴을 숨길 순 없었다. 그는 미준을 두고 잠시 화장실로 들어갔고, 그동안 미준은 호텔 로비를 서성거리며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럼 촬영 일정은 이메일로 다시 보내드리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네. 귀국일에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감독님.”

그때였다. 미준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꽂혔다. 그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미준은 제 눈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꿈인가?’

아니, 꿈이 아니었다. 눈을 비비고 볼을 꼬집어봐도 눈 앞의 인물은 바뀌지 않았다. 그 인물이 미준의 시선을 느끼고 뒤를 돌았다.

“…어?”

그러자 그도 미준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냈다.

―또각.

미준이 뭐에 홀린 양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마침내 미준과 그 인물이 마주했고, 미준은 그를 빤히 내려다 보았다.

부드러운 이목구비와 나른한 인상, 그리고 하나로 묶은 긴 머리카락. 어린 티를 완전히 벗어 분위기는 성숙해졌지만 미준은 그가 누구인지 한 번에 떠올릴 수 있었다.

“지은 후배님.”

8년 전 기억 저편에 묻어둔 미준의 짝사랑이 또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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