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344화 (344/366)
  • 외전 6화

    “부엌 베란다에 설치하면 될까요?”

    “네, 네…….”

    “원래 있던 건 수거해드리겠습니다~”

    “네…….”

    부엌 쪽으로 들어가는 설치 기사들을 뒤로한 채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터무니없는 상황에 머리가 지끈거릴 때쯤 마침 이 두통의 원인이 전화를 걸어왔다.

    ―최민입니다. 선물 도착했습니까?

    “네. 도착했어요…….”

    ―…혹시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니, 마음에 안 들고 자시고의 문제가 아니라…….”

    잔뜩 걱정하는 최민 헌터의 목소리에 또다시 어처구니가 사라져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졌다.

    “집들이 선물로 세탁기, 건조기 세트를 보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끽해야 과일 세트 정도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예상 밖을 벗어나다 못해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선물이었다. 대문을 통해 들어오는 거대한 세탁기 타워를 보자마자 무언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돌려보낼 수도 없는 상황이라 설치 기사들을 그대로 들여보냈다.

    ‘하긴 400억 주고 프로메테우스의 심장을 손에 넣은 사람이긴 하지…….’

    최민 헌터가 하미준 헌터처럼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거나 으리으리한 저택에 사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잠깐 잊고 있었다. 이 사람의 경제 관념도 상급 헌터에 맞춰져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발언력 상승]

    [구원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최민’이 동요한다.]

    [발언 결과 : 미안함]

    ―최소한의 성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그냥 제가 적응이 안 돼서 그런 거예요. 선물 고마워요, 진짜 잘 쓸게요.”

    [발언력 상승]

    [구원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최민’이 동요한다.]

    [발언 결과 : 안심]

    선물을 주는 사람이 미안해하는 상황에 급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최민 헌터가 안심했는지 그의 목소리가 조금은 원래의 톤을 찾았다.

    “그나저나 어젠 잘 들어갔어요? 엄청 늦게 헤어졌잖아요.”

    ―네. 잘 들어갔습니다.

    집들이 파티는 새벽 2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 돼서야 끝이 났다. 어제 처음 만난 사람들도 있었는데 다들 조금의 어색함도 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오히려 신지의 헌터 집에 너무 오랫동안 폐를 끼친 것 같아 죄송스럽군요.

    “전혀요. 그렇게 마음 놓고 놀아본 게 진짜 오랜만이라 좋았어요.”

    어제 일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잇새로 웃음이 샜다. 술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는데 뭐가 그리 즐거웠는지, 말 한마디할 때마다 사람들의 웃음이 끊이지 않았었다.

    어렸을 땐 빚 때문에 친구들끼리 생일 파티를 하고 싶다는 말도 못 꺼냈고, 성인이 되고 나선 나도 돈 버느라 정신이 없었다. 헌터가 된 이후엔 뭐, 말할 것도 없었고.

    아무런 걱정 없이 사람들과 웃고 떠드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이란 걸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그러셨다면 다행입니다.

    “최민 헌터는 어땠어요?”

    ―저도 즐거웠습니다.

    한결같이 무표정을 유지하던 최민 헌터도 어제만큼은 표정 변화가 꽤 다양했다. 조용히 미소를 짓기도 했고 놀라거나 당황한 기색을 보이기도 했다. 1년 전의 그라면 상상도 못할 모습이었다.

    ―신지의 헌터 덕분에 참 많은 게 바뀐 것 같습니다.

    “바뀌었다고요?”

    ―네. 세상의 종말을 막지 않았습니까.

    “저 혼자서 해낸 게 아닌데요, 뭘.”

    ―그리고 어떤 사람의 인생도 바꿨습니다.

    최민 헌터의 말을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전 사도들을 떠올렸다.

    “인생을 바꿨다기보단 제 과오를 청산한 것뿐이에요. 그리고 지옥도를 막으려면 그들의 힘이 필요하기도 했고요.”

    왠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져 소파 등받이에 완전히 몸을 기댄 채 마른세수를 했다.

    ―신지의 헌터는 자신의 성과를 축소하려는 경향이 있네요.

    “사실이라서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최민 헌터가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적어도 제 인생은 바뀌었으니까요.

    담담하게 내뱉었지만 진심이 느껴졌다.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입만 뻐끔거릴 때쯤 최민 헌터가 말을 덧붙였다.

    ―사람들이랑 어울릴 수 있던 것도, 행복한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던 것도 전부 신지의 헌터 덕분입니다.

    “…….”

    ―고맙습니다. 아니, 고맙다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로…

    “최, 최민 헌터 마음 잘 알겠어요. 저도 고마워요.”

    부끄러워서 결국 최민 헌터의 말을 끊어버렸다. 더 듣고 있다간 정말로 얼굴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감정에 솔직해진 최민 헌터를 볼 때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어색하기도 했다.

    ―하하!

    최민 헌터치고 꽤 큰 웃음소리였다.

    “최민 헌터가 그렇게 웃는 거 처음 듣는 것 같아요.”

    ―저도 이렇게 크게 웃어 본 건 처음이네요. 상대가 신지의 헌터라서 그런가.

    “허, 상대에 따라 웃음소리도 달라져요?”

    ―글쎄요.

    최민 헌터가 말끝을 길게 늘이다 곧 말을 이어갔다.

    ―아무래도 제가 신지의 헌터를 많이…….

    ―끼익.

    그때 베란다 문이 열리고 설치 기사 한 명이 거실로 나왔다.

    “설치 다 끝났습니다! 사용법 가르쳐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최민 헌터 잠시만요……!”

    ―…아, 아닙니다. 나중에 시간 될 때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어… 알겠어요.”

    ‘잠깐 기다려도 될 텐데.’

    황급히 전화를 끊는 최민 헌터의 행동에 이상함을 느꼈지만 일단 핸드폰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으며 베란다 쪽으로 발을 옮겼다.

    * * *

    세탁기랑 건조기 설치도 끝났고, 자잘하게 굴러다니던 나머지 짐들도 전부 정리했다.

    “푸하…….”

    마당에 나와 물을 마시며 한숨 돌렸다. 이제 겨우 새집으로 들어온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데 많은 시간이 흐른 기분이었다.

    ‘이젠 슬슬 보여줘도 괜찮겠지?’

    인벤토리에 물을 넣어두며 팔찌 위에 손을 올렸다.

    ―키잉.

    그러자 연둣빛 구체가 하늘을 날아다니다 곧 늑대의 모습을 하고 푸른 잔디 위로 착지했다.

    “짠!”

    ‘어, 어어?’

    녹두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동시에 내가 소리치자 녹두가 두 눈을 크게 뜨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에메랄드 같은 초록색 눈에 넓은 마당이 담겼고, 녀석은 땅에 얼굴을 박은 채 코를 킁킁거렸다.

    ‘여기 뭐야? 새집?’

    ‘응! 그리고 여긴 마당이야. 어때?’

    녹두는 잠시 멍하니 마당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발을 떼 담벼락 쪽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다행히 내 예상대로 녹두가 잔뜩 뛰어놀아도 될 정도로 넓었다.

    ‘너무 좋아…….’

    녀석은 실감이 안 나는 건지 넋이 나간 채로 중얼거리며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예전 집은 너무 좁아서 같이 지내기 힘들었잖아. 아랫집 눈치도 많이 보였고.’

    ‘…….’

    ‘이젠 계속 함께 지낼 수 있을 거야. 마당도 넓고 집도 넓거든. 아, 침실에도 네 공간 따로 만들어놨어!’

    녹두의 고개가 내 쪽으로 천천히 돌아왔다. 멍한 표정의 녀석이 코를 씰룩거리기 시작하더니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응?”

    ―툭.

    녹두가 내 머리를 입에 집어넣었다. 순식간에 캄캄해진 시야와 묘하게 축축해진 공기에 당혹스러움을 느끼기도 전에, 녀석의 상기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너무 좋아! 정말로 기뻐! 그럼 매일매일 언니 옆에서 있어도 되는 거야? 팔찌로 안 들어가도 돼?’

    ‘어, 어, 그럼……! 그나저나 입에서 좀 꺼내주면 안 될까?’

    ‘헉, 미안. 기뻐서 나도 모르게 그만…….’

    녹두는 다시 입을 벌려 내 머리를 놔주었다. 하지만 들뜬 감정은 조절이 안 되는지 제 커다란 머리를 내 쪽으로 계속해서 들이밀었다. 잔뜩 흥분한 녹두의 목과 머리를 양손으로 벅벅 긁어주며 온몸으로 녀석을 귀여워해 주었다.

    ‘이 마당 나 주려고 만든 거야?’

    ‘응. 원래는 다른 곳으로 가려고 했는데, 이 마당 보자마자 바로 계약했지.’

    ‘진짜 좋아! 여기서 언니랑 놀래! 아, 그리고 눈 오면 눈도 밟을래!’

    ‘그래, 그래. 그동안 못 했던 거 다 하자.’

    ―털썩.

    녹두가 헥헥거리다 마당 위로 벌러덩 누웠고, 나도 녀석의 몸 위로 조심스럽게 엎드렸다. 털의 부드러운 감촉과 잔디의 싱그러운 향이 얼굴에 훅 끼쳐 기분이 좋았다.

    ‘너무 늦어서 미안.’

    ‘왜? 뭐가 늦어?’

    ‘네가 더 어렸을 때 이런 집에 살았으면 나랑 교감할 시간도 많았을 거고, 그러면 더 빨리 컸을 텐데.’

    ―툭.

    녹두가 나를 위로하듯 제 머리로 내 등을 두어 번 토닥거렸다.

    ‘난 지금이라도 언니랑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행복해.’

    ‘…고마워.’

    ‘그리고 넓은 집에 안 살았어도 난 충분히 잘 컸다고 생각하는데.’

    “푸하하!”

    ‘어느새 다 커가지고 능청도 부릴 줄 알아.’

    뻔뻔해진 녹두가 귀엽고 우스워서 녀석의 배를 마구 간지럽혔다. 녹두는 헥헥거리며 몸부림쳤고 양팔로 내 몸을 누름으로써 내 행동을 멈추게 했다.

    ‘녹두야.'’

    ‘응?’

    ‘날 동반자로 삼아줘서 고마워. 한 번도 아니고 수십 번씩 날 만나러 와줘서 고마워.’

    언젠가 꼭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태양을 삼킨 늑대'는 단순히 어떤 던전을 공략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이 아니라, 각성자의 앞에 아무런 규칙이나 조건도 없이 불쑥 나타나는 아이템이었다. 즉, 아이템이 각성자를 직접 고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녹두가 나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이런 행복은 평생 느껴보지 못했겠지.

    ‘언니야말로 날 원해줘서 고마워.’

    ‘…원했다고?’

    ‘응.’

    예상 밖의 말에 상체를 일으켜 녹두를 바라보자 녀석은 내 무릎에 머리를 기대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나는 완벽한 내 편을 원하는 사람에게 찾아가게 되어 있어.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평생의 동반자를 바라는 사람들한테.'’

    ‘내가 그걸 바랐기 때문에 네가 나한테 온 거야?'’

    ‘응.’

    녹두를 만난 게 단순한 행운이 아니라 나의 간절한 바람 때문이라는 걸 알자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반복된 회귀,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 사람들에 대한 신뢰의 상실. 이 모든 게 쌓이다 보니 나도 모르는 새에 절대적인 내 편을 마음 깊은 곳에서 바랐나 보다. 그리고 녹두가 그에 응답한 것이고.

    ‘우린 서로 끌어당긴 거야. 그러니까 나도 언니한테 고맙다고 말할래.'’

    ‘…응. 고마워.'’

    ‘내가 더 고마워.’

    나와 녹두는 마당에 누운 채 그렇게 한참을 고맙다는 말만 반복했다. 말할 때마다 이상하게 두 눈이 뜨거워져서 녀석의 품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유달리 이번 가을은 공기가 따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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