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화
―일본 교토, 예식장.
“일어나, 이시카와. 아직 식 중이잖아.”
“이 몸은 졸려 죽겠단 말이다…….”
신부에게 편지를 읽어주는 카렌을 앞에 둔 채 이시카와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사와구치가 팔꿈치로 찔러가며 깨워봐도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는 제 소꿉친구를 깨우는 것을 포기하곤 이시카와의 머리를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지옥도가 완전히 소멸하고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복구되지 않은 땅들이 많았고, 사망자는 없어도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부상자들은 있었다.
힘든 상황에도 한 가지 분명한 건 희망이 있다는 점이었다. 미래엔 괜찮아질 거란 희망이 있으니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것이 두렵지 않았고, 그런 이들을 축복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카렌의 결혼식은 일본인들에게 있어 단순한 결혼식 그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아름다운 시작이구나.’
입을 맞추는 두 신부를 보며 센이 박수를 쳤다. 여기저기 터지는 함성과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축복하고 있는지 느꼈다.
카렌이 많은 사람들의 애정 어린 말속에서 출구 쪽으로 함께 행진하며 나아갈 때, 하객석에 앉아 있던 센과 눈을 맞췄다.
‘감사합니다. 센 님.’
카렌은 입 모양으로 이야기하며 고개를 숙였고, 센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본식이 끝나자 사람들은 하나둘씩 피로연장으로 발을 옮겼다. 센과 S급 헌터들이 앉은 테이블도 천천히 자리를 옮길 준비를 했다.
“아, 이런. 먼저 가봐야겠네요.”
“어라, 일정 있으셨나요?”
“네. 갈 곳이 있어서요.”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센이 운전 기사에게 답장을 보낸 후 야마모토를 향해 짧게 이야기했다.
“끝까지 못 봐서 미안하다고 카렌에게 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또 연락드릴게요.”
센은 모두의 인사를 받으며 예식장 밖으로 나왔고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리무진을 타고 도시 밖으로 나갔다.
―덜그럭.
아직 복구가 덜 된 도로에 진입하자 뒷자리에 뒀던 긴 나무 상자가 덜컹거렸다. 센은 나무 상자 위에 손을 올린 채 피식 웃곤 눈을 감았다. 몇 시간 후면 만나게 될 그리운 사람을 떠올리며.
.
.
.
“짐 들어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여기서부턴 저 혼자 들어가겠습니다. 한 시간 후에 다시 여기서 뵙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기사는 센에게 깍듯하게 인사한 후 다시 운전석에 올라탔다. 센은 높은 계단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쭉 훑다 바로 앞에 있던 돌기둥으로 눈을 옮겼다.
[여명]
인생의 절반을 보낸 곳, 여명 검도장이었다.
―탁, 탁, 탁.
센은 양손으로 나무 상자를 들고 계단을 하나씩 올라갔다. 아마테라스 상태라면 도약 한 번으로 도장 입구까지 갔을 테지만, 센은 차분하게 한 계단씩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 하나를 디딜 때마다 이곳에서 있던 일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그렇게 좋은 기억은 아니지만,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지.’
도장에 갑자기 떨어진 게이트 때문에 사람들이 대피하던 순간이 센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동생을 기절시켜 혼자서 던전에 들어가고 목숨을 걸고 싸우다 각성까지 했다.
―탁.
입구에 다다르자 동생인 토우야가 악에 받쳐 자신에게 소리 지르던 목소리가 귀에 꽂히는 듯했다. 센은 숨을 길게 들이마시며 호흡을 한번 가다듬곤 그대로 돌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토우야를 보러 왔는데, 혹시 안에 있을까요?”
“세, 센 님이다!”
“뭐라고?!”
한 사람의 외침으로 조용했던 도장이 순식간에 어수선해졌다. 밖에서 몸을 풀던 사람도, 건물 안에서 명상을 하던 사람도 모두 센 쪽으로 몸을 뺀 채 그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눈엔 호기심과 존경이 가득 서려 있었다.
센을 가장 먼저 맞이한 사람이 놀란 얼굴로 천천히 입을 뗐다.
“과, 관장님이라면 잠깐 외출하셨습니다. 아마 곧 돌아오실 거라 생각하는데… 어, 어떤 일 때문에 오신 건가요?”
“다른 건 아니고, 전해줄 물건이 있어서요.”
―바스락.
그때였다. 센의 뒤쪽에서 종이봉투가 떨어진 듯한 소리가 났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주변이 잠깐 고요해지자 이상함을 느낀 센이 뒤를 돌았고, 그러자 입구에 있던 사람과 시선이 맞닿았다.
센의 시선의 끝엔 다부진 체격의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주름이 얼굴 곳곳에 있었지만, 센을 바라보는 눈은 아이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센은 그 눈을 보자마자 남자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토우야.”
“누나……?”
토우야는 넋이 나간 얼굴로 센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바닥에 떨어트린 식재료는 완전히 까먹은 듯했다. 느릿하게 발을 옮기던 토우야는 무언가 생각난 듯 몸을 퍼뜩 떨더니 덜컥 움직임을 멈췄다.
“무, 무슨 생각으로 여길 다시 온 거야?”
“…….”
“다시는 안 볼 각오하고 나간 것 아니었어?”
토우야는 센을 보며 인상을 썼다. 반가움에 앞섰던 몸을 이성이 막은 것이다. 센은 잔뜩 경계하는 제 동생의 얼굴을 말없이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때랑 다를 게 없구나.’
도장을 나가는 센을 원망하면서도 누구보다 슬픈 눈을 하고 있던 20대의 토우야와 똑 닮아 보였다. 누군가에겐 듬직한 가주이자 관장이겠지만, 적어도 센의 눈엔 그랬다.
―탁, 탁.
이번엔 센이 토우야에게 다가갔다. 토우야는 그 자리에 멈춰선 채 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 널 버리고 혼자서 던전에 들어간 건 네가 못마땅하거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어.”
“…….”
“오히려 능력이 있으니 너라도 살리고 싶었던 거지.”
“그런 걸로 따지면 누나도 들어가지 말았어야지.”
토우야가 작게 중얼거리자 센이 픽 웃었다.
“그래서 사과하러 온 거야.”
“…뭐?”
“널 혼자 둬서 미안해, 토우야.”
30년 만의 사과였다. 토우야는 진지한 태도의 센을 보며 잠시 머리가 멍해짐을 느꼈다. 그동안 센은 머릿속으로 화가의 파편에서 벌어졌던 일을 떠올렸다.
지의가 모든 공격을 받을 것을 각오하고 자신을 두고 갔을 때, 센은 처음으로 남겨진 자들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무력감과 목숨을 빚졌다는 부채감, 아마 토우야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살아남는 게 그렇게 괴로운 일이란 걸 알았다면 그런 식으로 떠나진 않았을 거야.”
“…….”
“그리고 이걸 돌려주러 왔어.”
―탁.
센이 들고 있던 나무 상자를 토우야에게 내밀었다. 토우야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상자와 제 누나를 번갈아 보다 조심스럽게 그것을 열어보았다.
“어, 어?”
“더 일찍 전해 줬어야 했는데. 많이 늦었네.”
상자에 들어 있던 것은 아마노 가문의 보검인 ‘텐노카타나’였다. 이가 나가고 여기저기 녹슨 곳이 많았지만, 손잡이에 달린 특유의 문양이 그 검이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남매의 아버지가 가주의 상징으로서 센에게 줬던 보검이 지금은 토우야의 손에 있었다.
“여명 검도장의 관장, 아마노 가문의 가주, 전부 너야. 그러니까 이건 네가 갖고 있는 게 맞아.”
“…진짜로 떠나려는 거구나.”
“응?”
센이 눈을 크게 뜨자 토우야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말을 이어갔다.
“이제 누나의 인생에서 ‘아마노’라는 흔적을 모두 지우려는 거 아니야? 그래서 이 검도 내게 주는 거고?”
“…푸훕.”
“웃지마. 난 진지하다고.”
센이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쿡쿡 웃다 손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토우야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토우야가 깜짝 놀라 몸을 흠칫 떨었다.
“너도 어른이 되긴 했구나. 한 번 더 생각할 줄도 알고.”
“이제 내 나이가 몇인데……!”
“근데 네가 생각한 뜻 아니야. 그냥 너한테 사과하고 이걸 주고 싶어서 온 거거든.”
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반짝거리는 눈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사람들과 평화로운 산과 도장들. 그가 사랑하는 것들로 둘러싸인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안정감을 주었다.
“그래서 받아줄 거야?”
“…누나가 쓸 데가 없다면 받아줄게.”
“내 사과도 받아주면 좋을 텐데.”
센의 장난스러운 말에 토우야가 눈에 힘을 주었다. 누나의 말 한마디에 계속해서 동요하는 자신에게 질렸지만, 토우야는 알고 있었다.
하나뿐인 누나를 마주했을 때부터, 이미 원망이란 감정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애초에 사과할 필요도 없었어…….”
“그래? 다행이네.”
―달그락.
토우야는 텐노카타나를 받아 들며 웅얼거렸고, 제대로 듣지 못한 센이 눈짓으로 다시 이야기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차… 한잔하고 가라고.”
토우야가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도장 건물 안으로 성큼성큼 나아가자 센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다녀왔습니다.”
센, 일본 헌터의 정신, 아마테라스의 현신. 그 모든 이름들을 내려놓고, 아마노 가의 장녀인 ‘아마노 레이’로서 이야기했다.
* * *
―네팔 카트만두, 파슈파티나트 사원.
오늘도 바그마티 강엔 누군가의 유해가 뿌려졌다.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아직 슬픔을 떨치지 못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비스는 강가에 걸터앉아 멀리서 그 장례식을 지켜보았다.
―바스락.
그의 손에 들린 금잔화 꽃다발이 바람에 흔들리자 꽃잎 몇 장이 강 위로 떨어졌다. 비스의 시선도 꽃잎을 따라 강 하류로 향했다.
“이곳의 냄새는 몇 번을 와도 적응이 안 된단 말이지.”
그때 칼리가 튀어나와 금잔화 한 송이를 뽑더니 제 코에 그대로 갖다 댔다.
하지만 비스는 칼리에겐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바그마티 강만 바라보았다. 묘하게 분위기가 가라앉은 그를 보며 칼리는 들고 있던 꽃을 비스의 틀어 올린 머리에 꽂았다.
“뭐 하시는 겁니까?”
“그 아이를 떠올리고 있나 보구나.”
비스가 눈을 크게 떴다. 제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초월적인 존재에 새삼 경이로움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디브나 바즈라차르야, 그 이름은 비스의 가슴 속에 항상 자리하고 있었다. 자신이 ‘칼리의 창’이 되었던 이유도, 계속해서 사람들을 위해 몬스터를 해치웠던 이유도 전부 디브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아직도 그 애에 대한 죄책감을 갖고 있느냐?”
“조금은요.”
“그럴 필요 없다는 거, 머리로는 알고 있지?”
“…우습게도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사고였음에도 비스는 항상 디브나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했다.
비스는 디브나가 죽었던 그 순간을 무심코 떠올려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곧 감정을 추슬렀는지 다시 눈을 뜨고 말을 덧붙였다.
“그래서 여기 온 겁니다. 그때 못한 추모를 하려고요.”
―바스락.
비스가 금잔화를 한 움큼 쥐어 강을 향해 뿌렸다. 마치 디브나의 유해를 뿌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꽃잎은 강물 위를 헤엄치며 흘러갔고, 줄기들은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디브나의 유해도 이곳에 뿌려졌다고 하더군요. 이미 수년 전의 일이지만 그래도 강 어딘가에 그 애가 있을 거라 믿습니다.”
“만약 지금 그 애를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하고 싶으냐.”
꽃을 뿌리던 손이 멈췄다. 비스는 잠시 고민하다 다시 꽃을 움켜쥐며 입을 열었다.
“일단 미안하다고 해야겠죠.”
“그리고?”
―후두둑.
강 위로 꽃이 통째로 떨어졌다.
“고맙다고 할 겁니다.”
비스는 꽃다발에 있던 모든 금잔화를 한 번에 움켜쥐었다.
“인간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줘서 고맙다는 말을요.”
그가 가져온 금잔화가 전부 바그마티 강 위로 떨어졌다. 주홍빛의 꽃이 물에 둥둥 떠내려가자 비스는 왠지 모를 후련함을 느꼈다.
‘이제 이 땅에 쿠마리는 없어, 디브나. 결국 우리가 해낸 거야.’
꽃들이 완전히 비스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여전히 디브나는 비스의 가슴 속에서 존재했지만, 예전처럼 그를 떠올릴 때마다 대못을 박는 듯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
비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시내 쪽으로 발을 돌릴 때쯤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하자마자 비스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고, 곧 통화 버튼을 눌렀다.
“라울 국장, 무슨 일이지? 또 게이트가 열렸나?”
―네? 하하하! 아닙니다. 그것 때문에 전화를 건 게 아닙니다.
던전 관리국장인 라울이 자신을 찾을 일은 던전 파견 외엔 없었기에 비스는 잠깐 의아한 얼굴을 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전속 치유계 헌터 배치 말인데요, 다행히 적임자를 찾았거든요.
“그래? 어떤 애지?”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비스 님께서 구하셨던 그 쿠마리입니다.
―탁.
비스가 걸음을 멈췄다.
“…코피샤?”
―아! 기억하시는군요! 맞습니다, 그 친구입니다. 지옥도가 등장했을 때 그 친구가 거의 마을 하나를 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활약을 했더라고요.
비스는 피투성이가 됐던 자신을 구한, 그 어린아이를 떠올렸다. 몸에 상처가 나면 쿠마리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는 걸 알면서도 비스를 위해 기꺼이 피를 흘렸다. 그 용감했던 모습을 비스가 잊을 리가 없었다.
―혹시 성에 안 차시나요? 그럼 다른 치유계 헌터라도…….
“아니, 됐다. 가능한 빨리 그 애와 만나고 싶군.”
―아, 다행입니다! 그럼 미팅 일정 정해서 나중에 다시 연락드리죠!
전화를 끊은 후 비스는 다시 바그마티 강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손바닥에 밴 금잔화 향을 들이마시며 디브나와의 작별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