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341화 (341/366)
  • 외전 3화

    <변하지 않는 계기>

    ―영국 런던, 버킹엄 궁전 내부.

    ‘하나도 안 바뀌었구만.’

    레일리는 궁 복도를 둘러보며 픽 웃었다. 러그를 밟는 느낌과 사치스러울 정도로 화려한 벽과 천장, 그리고 방금 닦은 것처럼 반짝거리는 샹들리에. 자신이 궁을 뛰쳐나왔을 때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길 바랍니다.”

    “하하, 이젠 접견실 신세인가…….”

    “국왕 폐하의 지시였습니다. 부디 이해해 주시길, 레일리 님.”

    ―쿵.

    레일리는 닫힌 문을 바라보다 곧 주변에 있던 장식품들을 손으로 직접 만져보았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오래된 물건의 감촉이 애틋하게 느껴졌다.

    레일리가 보고 자란 것이 이런 풍경인 터라 노블레스 건물도 버킹엄 궁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럼에도 레일리는 접견실에 있는 모든 것들을 그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서 오게, 레일리.”

    “오…….”

    그때 접견실의 문이 열리고 국왕, 글로리아 힐데가르트 아서 프레데릭이 모습을 드러냈다. 레일리가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짧은 머리카락과 나른해 보이는 눈매, 글로리아는 레일리와 모든 것이 정반대였지만 황금색 눈동자만큼은 똑 닮았다.

    글로리아가 바보같이 서 있는 제 언니를 못마땅한 듯 아래위로 훑다 곧 자리에 먼저 앉았다.

    “인사는 됐으니 자리에 앉게.”

    “이제 고작 서른 넘은 애가 늙은이 말투를 다 쓰고… 진짜 왕 같다, 너.”

    “레일리.”

    “네, 알겠습니다. 폐하.”

    레일리는 일부러 과하게 예의를 갖추며 글로리아의 맞은편에 앉았다.

    ―쿵.

    접견실의 문이 닫히고 프레데릭 자매만이 이 공간에 남겨지자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레일리는 갑자기 자신을 불러들인 동생의 의중을 헤아리느라 잠시 입을 다물다, 천천히 말문을 텄다.

    “오랜만이네?”

    “…….”

    “직접 본 건 내가 궁을 나올 때가 마지막이었잖아.”

    글로리아는 무표정으로 레일리를 바라보기만 했다. 레일리는 씩 웃으며 대답 없는 대화를 이어 나갔다.

    “나는 잘 지냈어. 지옥도 때문에 본부 건물이 무너지긴 했지만 두 달 안에 재건할 거야. 그리고…….”

    “…줄 알았어.”

    “뭐?”

    “죽은 줄 알았다고!”

    글로리아가 소리를 빽 지르자 레일리가 눈을 크게 떴다. 관리인이 있을 때만 해도 글로리아 국왕이었던 그가 순식간에 자신의 하나뿐인 여동생 ‘리아’가 되어 있었다.

    “푸훕…….”

    “웃음이 나와? 지옥도의 막판에 갑자기 실종됐다고 하길래 결국 네가 설치다가 어디서 죽어버린 줄 알았어.”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윈저성에 안치돼야 하는데 내가 어디 길바닥에서 죽겠어?”

    “왕실을 떠난 사람한테 줄 묫자리 없어.”

    “야박하십니다, 폐하.”

    레일리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키득거렸다. 글로리아가 능글거리는 제 언니를 보며 이마를 잠시 짚다 곧 표정을 정리하곤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네가 전에 부탁한 거, 답변받았어.”

    “뭐래?”

    “길드전은 다음 분기를 마지막으로 끝내기로 했대.”

    “아하하! 제이미 녀석, 어떤 얼굴로 그걸 승인했을까!”

    “목소리 좀 낮춰, 레일리. 아무도 널 왕실 사람으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총리 이름을 그렇게 부르면 우리 쪽에 피해가 간다고.”

    “걱정 마. 내가 더 망나니처럼 행동해줄 테니까.”

    길드전은 매번 큰 부상자, 때로는 사망자가 발생할 정도로 과열되어 있었지만, 던전 소유권이라는 어마어마한 경제적 가치로 인해 국가들이 묵인하던 행사였다.

    한때 레일리가 경쟁과 제1길드 설립에 눈이 멀었던 것처럼, 오직 길드전만을 위해 길드를 만드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다.

    ‘아우레올라 녀석들처럼 말이지.’

    그렇게 된 데에는 레일리의 책임도 일부 있었다. ‘영국 왕실의 탕자가 길드전에서 연승을 거두고 있다’는 사실은 길드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길드전으로 돈을 벌 궁리를 하는 이들까지 들어왔다.

    그래서 레일리는 자기 손으로 길드전을 끝내려 했다. 던전을 국가별로 관리하여 헌터들끼리의 의미 없는 싸움을 그만두게 하려는 의도였다.

    “네가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는데.”

    “노블레스는 길드전의 최대 수혜자라고 봐도 무방하니까. 뭐, 일각에서는 단물만 빼 먹고 버린다는 평도 나오겠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거야?”

    글로리아가 차분하게 묻자 레일리가 잠깐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뭐, 여러모로 심경의 변화가 있었거든. 진짜 적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고.”

    “…….”

    “왜 그래?”

    “철들었다 싶어서.”

    “그건 내가 네게 해야 하는 소리 아니야?”

    레일리가 소파에 거의 눕다시피 기대며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의와 함께 길드전을 하고 창조자의 파편을 몰아냈던 것이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졌다.

    ‘그래 철들었지. 누구 때문에 아주 제대로 철이 들었지.’

    ―끼익.

    레일리가 소파 등받이에서 등을 뗀 후 글로리아와 눈을 맞췄다.

    “너도 이제야 제법 군주 같아. 젊은 국왕이라고 무시당하지도 않을 것 같고.”

    “아직 멀었어. 여전히 날 풋내기 취급하는 녀석들이 많거든.”

    “아, 그래? 묻어줄까?”

    “하아… 철들었다는 발언은 철회해야겠네.”

    글로리아는 질린다는 듯 이야기했지만, 막상 삽을 들고 짜증 나는 인간들을 묻어버리는 제 언니를 상상하니 우스웠다.

    그는 한 손으로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가린 채 웃음을 삼켰고, 글로리아의 그런 습관을 알고 있던 레일리는 오히려 큰 소리로 웃었다.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던 10대의 프레데릭 자매로 돌아간 순간이었다.

    * * *

    ―미국 텍사스, 한 사립 유치원.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경로 안내를 종료합니다.]

    ―철컥.

    유치원 앞 주차장에 검은색 승용차가 급하게 들어섰다. 시동이 꺼지자마자 운전석에서 조슈아가 뛰어나왔고 사이드미러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아이 씨, 빌어먹을…….”

    던전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온 탓에 셔츠 주머니에 커피가 튀어 있는 걸 지금에서야 발견했다. 조슈아가 욕설을 중얼거리며 차에 가져다 놓았던 선글라스를 주머니에 꽂아 얼룩을 가렸다. 그러곤 셔츠 깃을 살짝 들어 냄새를 맡았다.

    ‘타는 냄새는 또 왜 이렇게 안 빠져…….’

    스킬 때문에 몸 자체에 매캐한 냄새가 배어 있었다. 조슈아는 향수로 온몸을 적시고 나서야 유치원 안으로 들어갔다.

    “아, 벤자민 보러 오신 거죠? 이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조슈아는 나쁜 말이라곤 전혀 모를 것 같은 얼굴로 교사를 향해 미소 지었다. 비록 자신이 공격계 헌터에 대형 전투 길드의 길드장이지만, 벤자민이 다니는 유치원에서만큼은 무해하고 믿음직스러운 보호자로 비치길 바랐다.

    ―드르륵.

    그는 한창 수업을 하고 있는 교실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그래서 이번 추수감사절에 가족끼리 다 같이 놀이공원에 가는 걸 그렸습니다!”

    “잘했어요, 애니. 다들 멋진 발표였어요.”

    아이들이 스케치북을 들고나와 자신의 그림을 소개하고 있었다. 조슈아는 교실 뒤편에 서서 수업을 참관하던 다른 학부모들과 가볍게 눈인사를 나눈 후 곧바로 금색 곱슬머리를 찾아 눈을 바삐 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벤자민과 눈이 마주쳤다. 벤자민은 조슈아를 보자마자 배시시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조슈아도 조용히 웃으며 그 미소에 화답했다.

    “그럼 다음은… 그래, 벤자민이 해 볼까?”

    “네!”

    두 사람을 흘긋 본 교사가 벤자민을 향해 이야기했다. 벤자민은 그림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 앞으로 나왔다. 아이는 긴장한 듯 놀란 눈으로 어른들을 바라보았지만, 곧 조슈아의 웃는 얼굴을 보며 용기를 냈다.

    ‘저건…….’

    조슈아는 핸드폰 카메라를 들다 말고 벤자민의 그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간판 색깔만 보아도 알 수 있는 프랜차이즈 레스토랑 안, 붉은 머리의 사람과 금발의 작은 사람이 마주 보고 밥을 먹고 있는 그림이었다. 벤자민은 수줍은 듯 우물쭈물하다 입을 열었다.

    “저는 저랑 삼촌이 자주 가는 레스토랑을 그렸습니다. 어… 저는 블루베리 팬케이크를 먹고, 삼촌은 치킨 앤 와플을 먹어요.”

    “나도 그거 좋아해!”

    “나 어제도 갔어!”

    아이들이 한마디씩 거들자 학부모들 사이에서 작은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조슈아는 그 어떤 말도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벤자민이 그린 저 레스토랑은 원래 벤자민의 부친인 ‘조슈아 크리머’와 함께 셋이서 자주 다니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평범하디 평범한 레스토랑이지만 그곳에서의 기억은 항상 좋았다. 팬케이크 위에 시럽을 뿌리는 데 열중인 벤자민, 벤자민이 시럽 주전자를 놓칠까 봐 불안해하는 조, 그리고 그 두 사람을 맞은편에서 바라보는 자신까지. 그 기억을 떠올린 것만으로 온몸의 긴장이 풀릴 정도였다.

    “그리고 이 레스토랑은… 삼촌이랑 처음 만난 곳입니다. 삼촌을 알게 된 장소라서 저는 이 레스토랑이 좋습니다!”

    ―후두둑.

    벤자민의 해맑은 미소에 기어코 조슈아의 두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의 옆에 서 있던 남자가 화들짝 놀라며 손수건을 건네자 조슈아는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걸 다 기억해, 진짜…….’

    조슈아는 혹시라도 벤자민이 볼까 싶어 빠르게 선글라스를 낀 후 아이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벤자민도 좋은 발표 고마워요. 자~ 이제 슬슬 수업을 마무리할까요?”

    .

    .

    .

    “못 올 수도 있다고 했잖아요!”

    “첫 참관 수업이잖아. 공략 끝내자마자 바로 뛰어왔지.”

    참관 수업에 늦을까 봐 보스 몬스터를 해치울 때까지 단 1분도 쉬지 않아 길드원들에게 쓴소리를 들은 것은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조슈아는 벤자민을 안아 든 채로 복도에 있던 유치원 원장에게 인사하곤 주차장으로 발을 옮겼다.

    “배고프지?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팬케이크요.”

    ―철컥.

    카시트 벨트를 채워주던 조슈아의 손이 잠깐 멈췄다. 그가 고개를 들자 반짝거리는 동그란 눈동자와 시선이 맞닿았다.

    “늘 가는 그 가게?”

    “네.”

    “…그 가게가 그렇게 좋아?”

    벤자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슈아가 한쪽 팔을 차 천장에 댄 채로 벤자민을 가만히 내려다보자 아이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삼촌이랑 아빠랑 그 가게에서 처음으로 밥 먹었을 때요…….”

    “응?”

    “그때 아빠가 삼촌한테 좋은 아빠가 될 것 같다고 했잖아요.”

    “컥……!”

    상상 밖의 발언에 조슈아가 사레가 들려 헛기침을 여러 번 토해냈다.

    “베, 벤자민 새삼 너 기억력 엄청 좋구나…….”

    “그 말을 들었을 때 삼촌이 제 아빠가 되는 상상을 해봤어요.”

    벤자민이 배시시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러면 아빠가 둘인 거잖아요! 엄청 든든했어요!”

    “……….”

    “그 레스토랑만 가면 그때 기억이 나요. 그래서 거기가 좋아요.”

    조슈아의 심장이 쿡쿡 쑤셨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친구에 대한 그리움, 벤자민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고마움. 그 모든 감정이 한데 섞여 그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쪽

    조슈아는 아무 말 없이 벤자민의 이마에 입 맞춰주곤 차 문을 닫았다. 벤자민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제 이마에 손을 얹으며 운전석을 향해 가는 조슈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덜컥.

    조슈아는 금방 운전석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그렇게 좋아하는데 안 갈 수가 있나. 가자, 가.”

    “와~”

    “대신 다음 외식 땐 더 좋은 거 먹으러 가자. 알겠지?”

    “헤헤, 네!”

    벤자민은 고개를 쭉 뺀 채 조슈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모르는 척해야겠다.’

    벤자민은 조슈아의 선글라스 밑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며 혼자서 키득거리다 곧 창문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부실 정도로 파란 하늘이 아이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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