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화
[파괴자가 사망하였습니다]
[재앙 ‘지옥도’가 소멸합니다]
―콰과광!
벼락이 치는 듯한 굉음과 함께 지옥도가 반으로 쪼개졌다. 지옥도는 계속해서 부서지기 시작하더니 곧 수백 개의 파편이 되어 완전히 소멸했다.
끝났다. 진정한 끝이었다. 세상을 파멸시키려던 지옥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업을 가진 자도 없으니 세상이 희생양으로 삼을 인간도 없었다.
김강희와 세상을 상대로 얻은 진짜 승리였다.
“와아아!”
“으아아아!”
사람들의 환호성이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98번째에 비하면 훨씬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아서일까, 후련한 외침이 더욱 크고 선명하게 들렸다. 고개를 돌려 세빈이와 최민 헌터를 바라보자 두 사람은 조금은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드디어 끝났네.”
세빈이가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새카만 눈동자엔 간만에 빛이 깃들어 있었다. 최민 헌터도 양볼에 보조개가 파일 정도로 은은하게 웃었지만 눈은 조금 쓸쓸해 보였다.
고생한 두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후두둑.
바닥 쪽으로 고개를 내리자 또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조차 제대로 감지 못한 채 죽어버린 동료들을 보자 잠깐 잊고 있던 절망감이 내 몸을 집어삼켰다.
―툭.
그때 세빈이가 내 어깨를 감싸 안은 채 중얼거렸다.
“네 잘못이 아니었어, 지의야.”
내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위로였을 것이다. 동료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할까 봐 건넨 다정한 위로에 나는 눈물을 닦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아직 마지막 수가 남았어.’
난 쓰러진 동료들을 향해 한 발짝 나아갔다. 의아한 얼굴로 내 행동을 지켜보던 두 사람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가 살릴 수 있을지도 몰라.”
“…뭐?”
―파아앗.
세빈이가 되묻자마자 상태창이 기다렸다는 듯 눈앞에 떴다.
<사명>
[세상을 구원하는 자]
[달성도 대폭 상승]
[달성도 : 100%]
[달성 완료]
[구원자의 소원 획득]
마침내 내게 남은 유일한 사명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어쩌면 여기 있는 모두를 살릴 기회를 손에 넣었다.
―파지직!
“지의야!”
“신지의 헌터!”
내 주위로 푸른 스파크가 일었다. 내게 다가오려는 두 사람을 밀어내듯 스파크는 더욱 위협적으로 나를 감쌌다.
[구원자 ‘신지의’의 소원을 청취합니다.]
세상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일 준비를 했다. 내가 죽어야만 나타나던 권능인 ‘말의 힘’처럼 직접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 같았다. 난 숨을 들이마신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각성자 레일리 힐데가르트 아서 프레데릭, 조슈아 체스터, 비스 바즈라차르야, 아마노 레이를 살려줘.”
[구원자 ‘신지의’의 소원 실현 가능 여부를 파악합니다.]
창조자는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건 불가하다고 했다. 절대자에겐 불가능하더라도 어쩌면 이 세상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난 멈춘 글자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세상으로부터 대답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소원은 쉼표가 사용되지 않은 한 문장으로만 가능합니다.]
[구원자 ‘신지의’의 소원을 청취합니다.]
“하!”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터졌다. 사람 이름을 나열한 것만으로 소원을 이뤄주기 어렵다는 대답은 예상하지도 못했다.
‘설마 내가 한 사람만 살리도록 유도하는 건가?’
세상의 졸렬한 태도에 이를 아득 갈았다. 세상이 그렇게 나온다면 오히려 한 방 먹일 수 있는 소원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사도들을 전부 살리면서 한 문장으로 끝낼 수 있는 소원, 그 소원을 빌려면…….
“…후우.”
난 한숨을 쉬며 분을 삭이곤 상태창을 향해 다시 이야기했다.
“지옥도가 열린 이후로 사망한 모든 사람들을 부활시켜.”
―파지직.
상태창에 커다란 노이즈가 꼈다 이내 사라졌다. 고민하듯 다음 상태창을 띄울 때까지의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구원자 ‘신지의’의 소원 실현 가능 여부를 파악합니다.]
한참 기다리고 나서야 상태창이 떴다. 이것마저 불가하다고 하면 난 정말로 한 사람만 살려야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겠지. 이들이 애초에 사도가 되는 걸 막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쿵.
이들 중 한 사람만 살릴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심장이 내려앉았다. 난 눈을 질끈 감은 채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의야……?”
그때 세빈이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세빈이와 최민 헌터 두 사람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에게 이 상태창이 보일 리 없으니 난 허공에 대고 말을 중얼거리는 미친 인간으로 보였을 것이다.
난 그들을 향해 애써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걱정 마. 모든 걸 바로 잡을게.”
―치지직.
[조건부 실현 가능]
[판단을 위해 구원자 ‘신지의’를 세상의 틈에 소환합니다.]
‘조건부 실현?’
―쿠구궁.
“윽!”
상태창을 전부 다 읽기도 전에 몸이 아래로 훅 꺼졌다. 시야가 순식간에 새하얗게 물들었고 몸은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아 속이 울렁거렸다.
―쿵.
한참 떨어지던 몸이 결국 바닥에 닿긴 닿았다.
“으…….”
전신에 퍼진 묵직한 통증에 한 번에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양팔에 힘을 주고 상체부터 천천히 들어 올리자 눈앞에 새하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꼭 처음 각성을 했던 것 같은 공간이었다.
‘여기가 세상의 틈인가?’
소원을 이루어 주겠다는 명쾌한 대답 대신 ‘조건부 실현’이라는 애매한 말을 들은 탓에 찝찝함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쿵, 쿵, 쿵.
그때 푸른 상태창이 묵직한 파열음과 함께 눈앞에 나타났다.
[구원자 ‘신지의’의 소원은 ‘지옥도가 열린 이후로 사망한 모든 사람의 부활’입니다.]
[해당 소원은 세상의 질서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절충안을 제시합니다.]
―쿵.
[1. 구원자 ‘신지의’가 있던 국가의 사람만 부활]
[2. 재앙 ‘지옥도’의 소멸 전 3일 이내로 사망한 사람만 부활]
‘이게 조건부 실현이구나.’
세상은 내 소원이 질서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제멋대로 타협안을 내밀었다. 첫 번째 타협안은 지역을 제한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기한을 제한하는 것이다. 어떤 타협안이든 적어도 사도들은 전부 살릴 수 있었다.
―아득.
‘내가 이걸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들여야 해?’
맞물린 이끼리 부딪혀 소리를 냈다. 세상은 날 구원자로 지명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날 바보 취급하고 있었다. 내가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이유로 일방적으로 내게 선택을 강요했다.
내 희생은 세상이 아니라 동료, 그리고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더 이상 세상이 원하는 방향으로 타협할 수 없다.
―탕!
상태창을 향해 자아의 방아쇠를 당겼다. 글자가 가로로 크게 흔들리더니 곧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네가 원하는 대로 세상을 구해 줬더니, 이제 와서 조건을 걸다니. 좀 불합리하지 않아?”
―치지직.
세상이 동요하듯 상태창이 좌우로 흔들렸다.
“내가 이야기한 소원, 그대로 실현시켜. 그렇지 않으면 시간을 되돌리는 소원을 빌고 창조자의 편에 설 테니까.”
―파지직.
이번엔 스파크가 크게 튀었다. 진심이 조금도 들어 있지 않은 내 허세에도 강하게 반응하는 걸 보니 세상도 궁지에 몰리긴 했나 보다.
‘오히려 잘 됐어.’
내가 고집을 꺾지 않으면 세상은 어떻게든 내 요구를 충족시킬 방법을 찾아 나설 것이다. 그럼 난 그것을 가만히 기다리다 받아먹기만 하면 된다.
―치직.
생각을 마쳤는지 세상이 내게 다른 상태창을 들이밀었다.
[구원자 ‘신지의’의 삶을 해체합니다.]
[구원자 ‘신지의’에게 세상의 질서에 영향을 미칠 자격이 있는지 판단합니다.]
―쿵.
“큭……!”
갑자기 몸이 무거워졌다. 두 발로 서 있는 게 힘들 정도라서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상태창만 노려보았다.
‘내 삶을 뜯어보겠다는 건가……!’
세상을 구한 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세상은 내 삶 전체를 훑어보며 내게 소원을 들어줄 자격이 있는지를 판단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의 삶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은 탓에 머리까지 욱신거렸다.
“허억, 헉, 윽…….”
[구원자 ‘신지의’의 삶을 판단합니다.]
몸을 짓누르는 무형의 힘이 사라졌다. 머리도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해졌고 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상이 내 삶에 내린 정의를 확인했다.
[비명(非命)]
[제 명에 죽지 못한 삶]
[비명의 구원자 ‘신지의’에게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 기회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보니 내 삶이 조금은 처량하게 느껴졌다. 회귀를 시작하고 나서부터 내 삶은 내 것이 아니었다. 세상을 구하는 것만이 인생의 목표였고 내 희생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을 땐 내 삶마저 포기하려 했다.
하지만 이번 삶은 좀처럼 포기할 수 없었다. 내가 구한, 그리고 나를 구해준 동료들과 계속해서 함께하고 싶었다.
[비명의 구원자 ‘신지의’가 구한 생명의 수가 소원 실현을 통해 살리려 한 생명의 수보다 많습니다.]
[비명의 구원자 ‘신지의’에게 세상의 질서에 영향을 미칠 자격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비명의 구원자 ‘신지의’에게 진정한 삶의 의미를 부여합니다.]
―파아아앗.
따뜻한 공기가 피부에 스몄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상태창 때문에 상황을 이해하는 데 꽤 시간이 걸렸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비명의 구원자 ‘신지의’의 소원을 실현합니다.]
그동안 내가 해왔던 모든 일들은 헛되지 않았다는 것.
“하하, 하, 윽, 웁…….”
웃음과 눈물이 동시에 터졌다. 안도감에 허파에 바람이 들어간 양 계속 웃음이 터졌는데 눈물도 쉬지 않고 흘러내렸다.
이대로 사도들을 만났다면 조슈아와 센은 걱정을 했을 것이고, 비스는 당황했을 것이다. 그리고 레일리는 그런 나를 놀리다 따뜻하게 위로해 주겠지.
‘얼른 보고 싶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것뿐이었다. 당장 동료들이 살아난 모습을 보고 싶었다.
―후우웅.
몸이 둥실 떠올랐다. 세상의 틈에서 빠져나와 다시 내가 있던 곳으로 보내려는 건지, 시야가 또다시 새하얗게 물들고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속이 뒤흔들리는 불쾌함은 없었다. 그저 다시 그들을 만나게 될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