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334화 (334/366)
  • 334화

    방공호 안은 조용하다 못해 적막했다. 심장이 뛰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더더욱 혼자 있는 것이 실감 났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지금 내겐 지난 모든 생의 ‘나’들이 있다. 어쩌면 회귀자의 업도 그만큼 더 강하게 나를 얽매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가진 업, 그것도 세상이 나를 희생하기 위해 뒤집어쓴 업을 끊어내는 게 정말로 가능할까.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뜨거운 공기가 폐부로 들어와 몸 전체가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해내야만 해.”

    나 혼자만의 삶이 아니다. 지난 생의 나, 나를 믿어준 사람들의 신뢰, 그리고 내 곁을 떠나가고 만 사도들의 삶까지 짊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난 반드시 내 두 눈으로 종말을 막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신뢰에 보답하고 사도들을 살릴 수 있을 테니까.

    ―쿵, 쿵.

    가슴에 손을 얹자 일정한 속도로 뛰는 박동이 손바닥을 타고 느껴졌다. 그러곤 눈을 감으며 첫 번째 삶부터 되짚었다.

    어리석은 삶이었다. 창조자의 사도가 되어 바보 같은 사도명을 갖고 녀석의 파편을 소중하게 갖고 있었다. 실현되지도 않을 소원을 빌고 창조자에게 이용만 당했다.

    ‘그래도 나를 원망하진 않아. 막 각성한 사람이 절대자의 거대한 거짓말을 어떻게 간파할 수 있겠어.’

    ―치지직.

    그때였다. 내 정신 어딘가에 있을 첫 번째 삶의 내게 이야기하듯 말하자 눈앞에 익숙한 상태창이 떴다.

    [연계 패시브 스킬 발동]

    [‘말이 씨가 된다’]

    [‘그래도 나를 원망하진 않아’의 씨앗을 회귀자 ‘신지의’에게 심겠습니까?]

    “하하, 하하하…….”

    안도감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에게 말의 씨앗을 심는 게 진짜로 가능할 줄 몰랐다.

    ‘네.’

    [회귀자 ‘신지의’에게 ‘그래도 나를 원망하진 않아’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후두둑.

    첫 번째 회귀자인 ‘나’가 가지고 있던 죄책감이 내게 전해지자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이 떨어졌다. 그리고 ‘원망하지 않는다’는 내 말에 용서받은 듯한 기분 역시 가슴에 스몄다.

    지독하게 외로웠던 두 번째의 회귀, 외롭진 않았지만 종말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던 세 번째 회귀, 그리고 모든 걸 포기한 네 번째 회귀한 삶. 난 차례차례 내가 살았던 모든 삶을 되새기며 후회를 거듭했다.

    [회귀자 ‘신지의’에게 ‘그때 네 판단은 잘못되지 않았어’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회귀자 ‘신지의’에게 ‘좋은 사람이 많다는 걸 알게 됐으니 의미 있는 삶이었어’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회귀자 ‘신지의’에게 ‘포기하고 싶은 기분이 뭔지 알아’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그리고 그 삶을 살았던 ‘나’를 위로했다. 그럴 때마다 ‘나’들의 감정과 삶의 기억이 선명하게 흘러들어와 속이 울렁거렸다.

    버텨내야 한다. 아직 떠올려야 할, 그리고 다독여야 할 삶이 많이 남았다.

    ―털썩.

    난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엎드린 채로 삶을 복기했다.

    씨앗을 심을 때마다 상태창이 바쁘게 떴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요동치는 감정에 숨까지 가빠왔고, 스킬을 반복해서 사용하다 보니 몸에 무리가 가는 게 점점 더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그리고 방공호 밖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 오롯이 내 삶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쉰 번째 회귀, 이때부터 누군가 죽어도 별로 슬퍼하지 않았어. 어차피 다시 살아날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거겠지. 네 인간성이 사라진 게 아니라, 그저 지치기 시작했던 것뿐이야.’

    [회귀자 ‘신지의’에게 ‘네 인간성이 사라진 게 아니라, 그저 지치기 시작했던 것뿐이야’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허억, 헉, 욱……!”

    절반을 끝냈다. 온몸에 힘이 풀려 완전히 쓰러지자 나무판자의 날카로운 부분이 얼굴을 긁었다. 피가 난 것 같았지만 지금은 그걸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이 스킬, 생각보다 기력 소모가 컸구나.’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가다듬자 새하얀 인영이 내 옆으로 나타났다.

    ‘…….’

    ‘…왜 그렇게 봐.’

    나와 똑같은 형체를 한 자아가 아무 말 없이 날 내려다보기만 했다. 표정이 보였다면 아마 잔뜩 심통 난 얼굴일 것 같았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화가 나.’

    ‘그동안 많이 도와줬잖아. 그렇게 말해준 것만으로도 고마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텁.

    자아가 내 손등 위에 제 손을 올려놓았다. 미지근한 온기가 날 위로해 주는 것 같아 조금은 기력이 돌아왔다. 난 손을 뒤집어 자아의 손을 잡은 채로 다시 말의 씨앗을 심기 시작했다.

    끝이 좋지 않았던 삶을 계속해서 반추하는 것은 정신력을 많이 깎아놓는 행위였다. 그때의 기억이 방금 겪은 것처럼 선명하다 보니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과 몬스터에게 당했던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흔여덟 번째……’

    나는 잠깐 생각을 멈췄다. 98번째의 내가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고 후회를 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어서 쉽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쿵, 쿵.

    그 시간선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심장이 쪼개지는 것처럼 욱신거렸다. 그 삶은 후회 그 이상의 감정으로 똘똘 뭉친 시간이었다.

    아군으로 판단한 사람들은 철저히 장기 말로 이용했고, 적으로 간주한 사도들은 기회를 보다가 완벽한 순간에 살해했다. 그때의 나는 창조자나 조율자와 별 다를 바 없었다.

    ‘세빈이랑 최민 헌터한테도 못 할 짓 했지.’

    날 걱정하는 세빈이를 성가시게 생각하며 방치했고, 한결같이 아군이었던 최민 헌터는 사도 살해 작전에 공범으로 끌어들였다. 손이 피로 범벅된 환상이 보여 머리가 또다시 내장이 꿈틀거렸다.

    아니, 생각해 보니 내 죄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세빈이의 썩어 문드러져 가는 속을 방치한 탓에 수십 명의 헌터들을 죽게 했다. 그로 인해 세빈이도 학살자의 업을 지게 만들었고.

    “…우리는 진짜 왜 그랬던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위로의 말이 튀어나오질 않았다. 철저히 합리성에 의해 행동한 결과는 비참하기 짝이 없었고, 내가 맞이한 결말 중 가장 끔찍했다.

    난 자아의 손을 꽉 잡은 채 98번째의 내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던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도대체 왜 모든 인간성을 버린 선택을 하게 된 건지 한참 생각했고, 결론은 금방 내려졌다.

    ‘지키고 싶은 게 없어서 그런 거였어.’

    ―두근.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그때의 우린 지옥도를 막는다는 생각 외엔 아무것도 없었어. 소중한 사람도 없었고, 신념도 없었지.’

    한마디 할 때마다 누군가 가슴을 두드리는 것처럼 전신이 울렸다. 꼭 98번째의 내가 후회에 몸부림치며 땅을 내리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우습게도 모든 비극이 벌어진 후에야 지키고 싶은 게 생겼어.’

    ―바스락.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며 98번째의 나에게 말을 이어갔다.

    ‘나와 세빈이를 지키고 싶었던 거잖아.’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회귀자 ‘신지의’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수긍]

    발언력에도 착실하게 반응했다. 98번째의 나는 내 말에 수긍했고, 그의 슬픔이 내게로 전해지자 또다시 눈물이 터졌다.

    98번째의 나는 지금의 내가 상처받을까 봐, 그리고 세빈이를 원망하고 싶지 않아서 내 기억을 지웠다. 누구보다 합리적이었던 98번째의 내가 나와 세빈이를 지키기 위해 가장 어리석은 판단을 해버린 것이다.

    ‘…나랑 세빈이를 생각해줘서 고맙다는 말은 차마 못 하겠지만. 외로운 싸움을 하느라 고생했어.’

    [회귀자 ‘신지의’에게 ‘외로운 싸움을 하느라 고생했어’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98번째의 나는 주변 사람들을 전부 잃고 나서야 버렸던 인간성을 찾았다. 그 외로움과 고독, 그리고 죄책감이 파도처럼 밀려와 내 몸을 집어삼켰다. 그 감정에 몸을 맡긴 채 99번째의 내게도 말을 건넸다.

    [회귀자 ‘신지의’에게 ‘네 실수는 더 나은 결과를 만들기 위한 마지막 발판이 됐어’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이렇게 99번째의 회귀자에게도 씨앗을 심었다. 씨앗을 심지 못한 건 지금의 나 하나뿐이다.

    ―바스락.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최민 헌터의 방공호가 문득 관 같다고 생각했다. 이 안에서 스스로의 죽음을 택했던 최민 헌터의 기분을 조금 알 것 같았다.

    “하아…….”

    호흡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쉰 후 다시 눈을 감았다. 각성한 시기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이 머릿속에서 영화처럼 재생되었다.

    그 어떤 시간선보다도 힘이 들고, 목숨도 몇 번 잃을 뻔했지만, 그보다 더 큰 행복과 보람을 느낀 시간선이었다. 내 옆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동료들이 늘어났고 다양한 형태의 행복을 알게 되었다.

    ‘이번에야말로 더 나은 결말을 볼 수 있을 거야.’

    불안과 슬픔으로 요동쳤던 가슴이 서서히 진정될 때쯤 눈앞에 황금색 글자가 나타났다.

    [‘이번에야말로 더 나은 결말을 볼 수 있을 거야’의 씨앗을 구원자 ‘신지의’에게 심겠습니까?]

    그 글자를 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말이 씨가 된다’라는 스킬명처럼 저 씨앗이 현실이 될 날이 머지않았음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네.’

    상태창을 향해 수긍하자 새로운 글자가 만들어졌다.

    [구원자 ‘신지의’에게 ‘이번에야말로 더 나은 결말을 볼 수 있을 거야’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파아앗!

    회귀한 횟수만큼 씨앗이 심어지자마자 갑자기 눈앞에 수십 개의 문장이 동시에 떠올랐다.

    [회귀자 ‘신지의’의 ‘그래도 나를 원망하진 않아’의 씨앗 개화]

    [회귀자 ‘신지의’의 ‘그때 네 판단은 잘못되지 않았어’의 씨앗 개화]

    .

    .

    .

    [구원자 ‘신지의’의 ‘이번에야말로 더 나은 결말을 볼 수 있을 거야’의 씨앗 개화]

    내가 심었던 모든 씨앗이 동시에 개화한 것이다.

    ‘지의야……!’

    ‘…다 됐네.’

    자아가 벅찬 듯 내 이름을 부르다 목이 멨다. 난 녀석을 향해 씩 웃어 보인 후 자아를 다시 확성기로 돌려놔 손에 쥐었다.

    ―파스슥.

    “신지의 헌터!”

    “지의야!”

    방공호 밖으로 나오자마자 사람들의 목소리가 일제히 귀에 꽂혔다. 김강희가 바닥에 엎어진 채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걸 제외하곤 방공호에 들어갈 때와 다를 것 없는 풍경이었다.

    [재창조까지 남은 시간 : 3시간 21분]

    뿔뿔이 흩어졌던 지옥도가 가장자리에서부터 형체를 잡아가고 있었다. 난 다시 고개를 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세빈이와 최민 헌터가 날 물끄러미 바라본 채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파괴할 수 있는 업이 감지되었습니다.]

    [‘카르마 : 학살자’]

    [목적을 위해서라면 동료도 무자비하게 벴던, 잔인한 학살자의 업.]

    조용히 카르마의 탄환을 장전하자 세빈이의 옆에 상태창이 나타났다. 난 불안해 보이는 세빈이에게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어딘가에서 듣고 있다면 들어줘.”

    “지, 지의야……?”

    “98번째의 나는 널 지키고 싶어서 회귀했어.”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학살자 ‘강세빈’이 동요한다.]

    [발언 결과 : 그리움]

    “…업을 청산해서 널 자유롭게 하기 전에 그 말을 꼭 하고 싶었어.”

    ―탕.

    [카르마 : 학살자가 파괴되었습니다.]

    98번째의 세빈이에게 마지막 인사를 한 후 곧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업이 파괴되었다는 상태창과 함께 세빈이가 순간 휘청거렸지만 곧 중심을 잡았다.

    “…과거의 날 완전히 보낸 거구나.”

    세빈이를 향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빈이는 내게 더 묻고 싶은 얼굴이었지만, 곧 마음을 고쳤는지 그저 조용히 미소 지었다.

    ―탁.

    발을 돌려 김강희 쪽으로 다가갔다. 그의 몸은 높은 곳에서 떨어진 석고상처럼 계속해서 금이 가고 있었다. 난 그 앞에 쪼그려 앉아 그와 눈을 마주쳤다.

    “네 말대로 세상을 살리려면 내가 죽어야 해. 회귀자의 업을 짊어졌으니까.”

    “그래서 날 지옥의 길동무로 삼을 셈인가?”

    “그럴 리가.”

    ―철컥.

    내 머리에 자아를 겨눴다.

    [파괴할 수 있는 업이 감지되었습니다.]

    [‘카르마 : 회귀자’]

    [있어서는 안 될 시간선을 만든 자의 업]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상태창이 나타났다. 숨을 들이마신 채 방아쇠에 건 손가락에 힘을 주자 김강희의 눈이 커졌다.

    ―탕!

    통증이 느껴지진 않았지만 몸 전체가 진동했다. 뒤에서 두 사람의 외침이 들렸지만 김강희의 벙찐 얼굴이 더 인상적이라 굳이 뒤를 돌진 않았다.

    [카르마 : 회귀자가 파괴되었습니다.]

    이제 이 세상에 회귀자의 업을 가진 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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