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화
<인과응보>
생각이 멈췄다.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서 조금의 현실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무언가 뭉쳐 있어 뱉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숨을 어떻게 쉬는 지도 까먹은 탓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난 그저 눈동자만 굴려 쓰러진 이들을 바라보았다.
레일리는 제 키보다도 큰 만년필에 찔렸다. 날카롭게 갈린 펜촉이 정확히 그의 가슴 한가운데를 꿰뚫어, 레일리는 눈도 감지 못한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핏물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옮기자 이번엔 가면에 목이 베인 조슈아가 보였다. 엎드린 조슈아의 목 뒤로 단두대의 칼처럼 가면이 박혀 있었다.
―쿵, 쿵, 쿵.
보고 싶지 않은,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참상을 천천히 눈에 담는 동안 심장은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뛰었다.
난 고개를 돌려 팔레트 나이프에 짓이겨진 센을 보았다. 기모노가 아니었다면 알아보지 못했을 센의 옆엔 바이올린 현에 목이 감긴 채 악기 몸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비스가 있었다.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단 한 가지 분명했던 것은.
“아아, 아… 아……!”
의심할 여지 없이 모두 죽었다는 점이었다.
“아아아아악!!”
―콰과광!
내 절규에 호수 광장에 있던 모든 것이 진동하고 부서졌다. 호수는 바다처럼 파도쳤고 우리가 서 있는 광장의 판자 위로 넘쳐오기 시작했다.
―탁!
“지의야! 정신 차려!”
“신지의 헌터, 일단 진정하세요!”
“이거 놔, 이거 놔!”
세빈이와 최민 헌터가 내 곁으로 급하게 달려왔지만 조금도 진정할 수 없었다. 내 팔을 잡는 그들의 손을 뿌리치려 몸부림쳤다.
“하하하…….”
그때 잔뜩 쉰 웃음소리가 귀에 꽂혔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김강희가 나를 보며 표독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러게 내가 마지막 자비를 줬을 때 무시하면 안 되지.”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 때문에 오히려 머리가 차가워졌다. 빠르게 뛰던 심장이 제 속도를 찾다 못해 평소보다 훨씬 느리게 뛰었다.
―탕!
난 그 푸른 눈동자를 향해 자아의 방아쇠를 당겼다.
“…뭐 하시는 거예요?”
“…….”
하지만 최민 헌터가 내 오른쪽 손목을 잡아 위로 올려버린 탓에 탄환이 무의미하게 허공을 갈랐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불안한 듯한 최민 헌터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한순간의 분노로 후회할 일을 만들면 안 됩니다.”
“후회 안 해요. 지금 죽이지 않으면…….”
―두근.
건조한 목소리로 뱉어내는 다정한 우려. 전에도 이런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후회하지 않으십니까?”
그래, 조슈아를 죽이고 돌아오는 길에 최민 헌터가 내게 비슷한 질문을 했었다. 그리고 98번째의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대답했지.
지금도 똑같았다. 최민 헌터는 내가 후회하며 괴로워할까 봐 이번에도 제동을 걸어주고 있었다.
“지금 당장 네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어. 네가 원한다면 내가 저 인간을 언제든 죽일게.”
“…….”
“그러니까 일단은 무기 내려놓자, 응?”
세빈이까지 합세했다. 세빈이는 자아 쪽으로 천천히 손을 뻗었고 방아쇠에 걸어놨던 내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빼냈다.
―덜컹.
자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부글부글 끓던 가슴까지 진정됐고, 다시금 동료들의 죽음이 실감 났다. 레일리와 조슈아의 유치한 실랑이도, 그 실랑이에 핀잔을 건네는 비스도, 그리고 그런 그들을 보며 인자하게 웃는 센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동료를 지키지 못한 자에겐 눈물조차 허락되지 않는 걸까,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너무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신지의 헌터.”
“…….”
“그들의 운명은 사도가 됐을 때부터 정해져 있었네.”
김강희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어느새 너덜너덜해진 몸을 일으켜 난간에 기대어 선 상태였다.
“창조자의 파편이 몸에 들어왔다는 것, 그건 결국 신체의 일부가 이미 창조자의 것으로 대체된 것이나 마찬가지일세.”
“사도들에게서 창조자의 파편을 제거했을 땐 멀쩡했어. 도대체 어떤 수를 쓴 거지?”
김강희가 씩 웃었다.
“이식받은 심장을 떼어내고 원래의 심장으로 바꿨다고 해서, 수술 자국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지. 그렇지 않나?”
“…….”
“난 그 수술 자국을 조금 벌렸을 뿐이네. 사도들의 몸에 조금이라도 남은 창조자의 힘을 긁어모았고 그걸 터트린 걸세. 자네들이 내 역린과 싸우는 동안 나도 손 놓고 있던 것은 아니라서.”
‘그때였나…….’
김강희가 폭발 공격을 멈추고 잠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의 패배를 받아들이고 끝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
“자네는 나와의 싸움에서 분명히 이겼어. 나 역시 그걸 알고 있었지.”
―끼익.
김강희가 내 쪽으로 천천히 다가올수록 판자끼리 서로 맞닿아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래서 난 이 싸움을 다시 처음으로 돌릴 방법을 생각했네.”
“…….”
“시간을 돌려, 신지의 헌터.”
―쿵
그의 말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얼굴을 뒤덮은 검붉은 피와 대비되는 푸른 눈동자와 시선이 맞닿았다. 내가 무어라 반박하기 전에 김강희가 먼저 말을 덧붙였다.
“자네에게 그럴 힘이 있잖나. 시간을 돌리면 자네가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는 동료들과 다시 만날 수 있어.”
“지의야.”
“비록 그들과 지금처럼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말일세.”
궤변이다. 내가 여기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한들 세상이 내게 다음 기회를 줄 것이란 보장이 없다. 만약 준다고 하더라도 난 기억을 전부 잃은 상태일 테니 지금과 같은 결말을 만들지도 못할 것이다.
'그런데 난 왜 망설이고 있는 거지?'
김강희의 말에 동요하는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우득.
나도 모르게 물고 있던 아랫입술에 이가 파고들어 피가 흘렀다. 하지만 이런 통증도 사도였던 내 동료들이 느꼈을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중생의 역린과 싸울 때 김강희한테는 절대로 안 죽을 거라 호언장담했던 나를 어딘가에 묻고 싶었다. 내 얄팍한 자신이 동료들을 죽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치지직.
[재앙 ‘지옥도’가 소멸합니다.]
그때 지옥도의 소멸을 알리는 상태창이 나타났다. 그 글자들을 바라보며 나는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양옆에도 내가 신뢰해 마지않는 동료와 친구가 있었지만,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로 외롭고 고독했다.
상태창 너머로 보이는 동료들의 시체로 시선을 돌렸다.
‘죽은 사람들은 회색 글자로 보이는구나.’
구원자의 왼쪽 눈동자를 통해 본 그들의 정보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연한 회색으로 쓰여 있었다.
―후두둑.
그제야 눈물이 흘렀다. 허무함과 비참함, 그리고 요동치는 분노가 한데 섞이자 눈물이 되어 바닥을 적셨다.
“너무 슬퍼하지 말게, 신지의 헌터. 한 가지 방법이 아직 남아 있으, 윽!”
김강희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검은 손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서늘했던 세빈이의 얼굴이 나를 향하자 다시 다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내겐 누군가를 동요하게 만들 힘도, 대신해서 공격을 맞으면 절대로 죽지 않을 힘도, 그리고 짊어진 업을 파괴할 힘도 있었지만, 정작 지금 가장 필요한 누군가를 살릴 힘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난 뭘 위해 지금까지 싸웠지?’
처음엔 생존이 목적이었다. 종말로부터 살아남아 내 삶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회귀를 거듭할수록 생존 욕구는 서서히 잊혔고 오기만이 남았다. 포기하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기 때문에 어떻게든 종말을 내 손으로 끝내 보겠다는 지독한 아집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그리고 100번의 회귀를 거친 지금의 나는 ‘세상을 구원하는 자’라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 사명을 완수해야만 하는 이유는 센처럼 숭고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치지직.
[세상을 구원하는 자]
[세상을 종말로부터 지켜내라.]
[보상 : 구원자의 소원]
사명을 완수하고 받은 소원으로 지유를 살리고 싶어서였다. 지유와 함께 살고 싶다는 욕망이 내 지난 삶들을 불러냈고, 아이러니하게도 지유만큼이나 소중한 것들을 만들었다.
“하하하…….”
지금의 내게 있어 더 소중한 것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걸 이해하자마자 헛웃음이 터졌다.
“지의야!”
“신지의 헌터!”
―탁!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리자 세빈이가 급하게 내 허리를 감쌌고, 최민 헌터가 팔을 붙들었다. 눈물이 흘러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지만 한번 터진 눈물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난 진짜로 못된 언니야.’
사실 이미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지금 내게 함께 목숨을 걸고 싸운 동료만큼 소중한 건 없었다. 지유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살릴 수 있던 기회를 다른 곳에 사용한 이기심에 매일매일 고통받더라도, 나는 내 동료들을 위해 쓰고 싶었다.
“미안해, 지유야… 미안해…….”
“지의야……?”
―치지직.
그때 하늘이 다시 검붉은 빛으로 물들더니 곧 눈앞에 거대한 노이즈가 꼈다.
[회귀자의 업이 재앙 ‘지옥도’를 재창조합니다.]
[재창조까지 남은 시간 : 6시간]
[회귀자 사망 시 ‘지옥도’ 완전 소멸]
98번째 회귀와 마찬가지로 나의 희생을 원하는 세계의 경고였다.
“아하하하! 결국 자네의 운명도 이런 것이군!”
어느 틈에 그림자를 뜯어낸 건지 김강희가 큰 소리로 웃었다. 그는 엉망진창이 된 몸을 내 쪽으로 질질 끌어오며 계속해서 입을 움직였다.
“뭐, 여기서 동료들의 뒤를 따르고 세상을 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닥쳐…….”
“하지만 이렇게 포기할 건가? 어쩌면 다음 기회엔 자네도, 그리고 동료들도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을지도 모를 텐데.”
김강희는 어떻게든 내가 회귀를 택하도록 도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유에게 평생 속죄하면서 살 결심을 한 내게 그의 말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세빈이랑 최민 헌터, 둘 다 떨고 있네.'
내 희생을 강요하는 상태창에 두 사람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난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최민 헌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최민 헌터.”
“네.”
“방공호 좀 빌려주세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최민’이 동요한다.]
[발언 결과 : 수용]
지옥도가 열리기 전에 이미 부탁한 것이기에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의야.”
“걱정마.”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강세빈’이 동요한다.]
세빈이가 뭘 걱정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내가 쥐도 새도 모르게 방공호 안에서 목숨을 끊을까 봐 가슴을 졸이고 있겠지.
난 세빈이와 최민 헌터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반드시 돌아올 테니까.”
[발언 결과 : 신뢰]
세빈이는 아랫입술을 꾹 물며 잠시 울상을 짓다 곧 입꼬리만 힘겹게 올려 웃었다.
“기다릴게.”
“…그럼 열겠습니다.”
“신지의 헌터, 자네 대체……!”
―쾅!
김강희의 의문 섞인 외침을 뒤로 한 채 주위가 고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