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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급 비명헌터-331화 (331/366)
  • 331화

    ―쾅!

    기절한 센의 앞에 최민 헌터가 불의 벽을 세웠다. 동시에 조슈아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센을 안아 올려 중생의 역린으로부터 멀리 떨어졌고 녹두의 배리어 안으로 옮겨 놓았다.

    센이라면 잘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센을 믿고 역린을 부수는 것뿐이다.

    자아의 방아쇠를 길게 당겨 공기를 진동시켰다. 역린의 움직임이 잠시 더뎌지긴 했지만 신체 전체를 마비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콰과광!

    “큿……!”

    녀석은 손톱으로 땅을 쳐올리며 내게 달려왔다. 칼날 같은 손톱의 끝이 아슬아슬하게 내 볼을 스치자 쓰라린 통증과 함께 땅에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탕!

    수평으로 날아오는 손톱을 위로 도약해 피한 후 곧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탄환이 정확히 녀석의 뒤통수에 박혔고, 그와 함께 녀석의 그림자에서 검은 손들이 튀어나와 녀석의 허리를 잡고 바닥으로 끌어당겼다.

    [현재 체력 : 187,458]

    역린은 세빈이의 ‘달그림자’에 얼굴을 박은 채로 바닥에서 몸부림쳤다.

    “신지의 헌터, 잠시 물러나 주세요!”

    ―쿵.

    조슈아의 말을 듣고 역린과 거리를 벌리자 녀석의 몸 위로 부글거리는 용암이 쏟아졌다. 용암은 역린을 전부 집어삼키더니 곧 시멘트처럼 딱딱하게 굳어 녀석의 몸을 잔디와 하나가 되게 만들었다.

    ―콰과광!!

    뒤이어 세빈이의 검과 비스의 창이 동시에 그 위에 찔러 넣었다. 그러자 시커먼 용암의 흔적이 깨져 역린의 등이 드러났다.

    ‘지금이다.’

    두 사람이 물러나는 타이밍에 맞춰 자아를 대검으로 바꿨고, 검날을 밑으로 한 채 낮말을 듣는 새를 해제했다.

    ―쾅!!

    그러자 대검은 내 몸무게까지 실은 채 역린의 등을 다시 한번 꿰뚫었다. 그 충격이 내 몸에도 전달돼 전신이 덜덜 떨렸지만 겨우 중심을 잡고 자아를 박격포로 바꿨다.

    ―콰직.

    녀석의 등에 직접 포구를 박아넣은 후 곧바로 몸을 굴려 피했다.

    ―콰과과광!!

    얼마 지나지 않아 포탄이 발포되었다. 녀석의 몸은 물론 정원의 땅 전체를 뒤흔든 탓에 흙이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현재 체력 : 92,732]

    “가끔 너도 과격할 때가 있군. 뭐, 효과는 확실하니 상관은 없지만.”

    레일리의 말에 어깨를 으쓱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는 연계 패시브 스킬인 ‘정복자’로 뒤집힌 땅을 겨우 잠재우며 어딘가에 묻힌 중생의 역린을 찾아다녔다.

    ‘아직 센은 못 깨어난 건가?’

    녹두의 배리어 쪽으로 고개를 쭉 빼자 여전히 센은 잠든 것처럼 누워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녹두도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의 상태를 알려 주었다.

    ―쾅!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중생의 역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신체의 절반이 날아갔고, 터져나간 단면에선 시커먼 액체가 울컥거리며 쏟아지고 있었다.

    ―파지직.

    그리고 녀석의 얼굴 위로 푸른 눈동자와 입이 또다시 나타났다.

    “조슈아, 레일리, 비스, 센… 아, 센은 아직 깨어나지 못했으니 못 듣겠군.”

    ‘아까보다 훨씬 침착해진 것 같은데.’

    눈과 입의 주인인 김강희는 예술가의 역린을 소환했을 때보다 더 차분하고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그가 하는 이야기를 잠자코 들었다.

    “이건 내가 자네들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자비야.”

    “…….”

    “내 편에 서게.”

    “X발, 개소리를…….”

    김강희의 말에 조슈아가 반사적으로 욕을 뱉었다. 평소 같았으면 무마하기 위해 두세 마디 말을 더 했겠지만, 지금의 조슈아는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어 보였다.

    “네가 뭐라고 우리에게 자비니 뭐니 하는 거지?”

    “하하하…….”

    레일리의 말을 들은 푸른 눈이 반으로 접히더니, 곧 게슴츠레하게 뜨며 우리들을 쭉 훑었다. 그 시선이 불쾌해 반사적으로 미간이 구겨졌다.

    “원래라면 미래의 창조자가 됐겠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제 그건 힘들 것 같고…….”

    “네가 질 거란 걸 알고는 있나 보네.”

    “난 제법 현실적인 인간이라서 말일세.”

    김강희가 나를 슬쩍 바라보곤 다시 사도들을 향해 말을 이어갔다.

    “자네들이 내 편에 섰을 때 목숨만큼은 보장해 줄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해 주면 좋겠군.”

    ―쾅!!

    그때 붉은 몸 위로 새하얀 빛줄기가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푸른 눈과 입이 종이처럼 팔랑거리며 밑으로 떨어졌다.

    “이제 와서 당신을 신뢰하라는 말인가요?”

    “센 씨!”

    “센!”

    빛무리와 함께 센이 나타났다. 그는 이를 악문 채 우리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고, 그동안 김강희의 눈과 입은 다시 역린의 얼굴에 붙었다. 푸른 눈이 센을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전 신뢰를 바라는 게 아닙니다, 센 협회장.”

    “그럼 뭘……!”

    “이곳에서 죽을지 말지 직접 결정하라는 말입니다.”

    ―쿠구궁.

    붉은 하늘이 주저앉았다. 높이 뛰었다간 그대로 머리를 부딪힐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와 가까워졌다.

    ‘몸이 무거워.’

    푸른 눈동자와 시선이 맞닿은 것만으로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가 사도들을 죽일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너무나도 당당한 그의 태도에 조금 동요했다.

    침착해야 한다. 중생의 역린만 부수면 김강희는 다시 인간으로 돌아올 것이다. 인간인 그가 우리를 이길 가능성은 없다.

    “다들 신경 쓸 필요 없어.”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모든 생명체가 동요한다.]

    한때 창조자의 사도였던 동료들을 향해 말을 건넸다. 시선이 내 쪽으로 넘어오자 나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웃은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린 안 죽어. 적어도 저 인간한테는 절대 안 죽을 거야.”

    태연하게 이야기하려 했는데 나도 모르게 목에 힘이 들어갔다. 다시 김강희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녀석은 기분 나쁘게 웃고 있었다. 입 밖으로 뱉은 숨이 살짝 떨렸지만 다행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발언 결과 : 자신감]

    ―쿵.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에 상태창이 떴고 옆에 있던 레일리가 가장 전방에 서서 아더의 방패를 땅에 꽂았다.

    “시끄럽군. 곱게 단두대 위로 가도 모자랄 판에 말이 너무 많다.”

    “그러니까요. 절대 저런 지도자는 되지 말아야지.”

    조슈아도 비아냥거리며 양손에 들린 잭나이프를 가볍게 휘둘렀다.

    “당신의 추악한 성정을 알았으니, 저도 미련 없이 당신을 없애겠습니다.”

    “이쯤 되니 네 삶이 딱하구나. 인간도, 신도 되지 못한 불쌍한 존재야.”

    “…한심하긴.”

    센과 칼리, 그리고 비스까지 말을 얹으며 마지막 전투를 준비했다. 그러자 김강희의 표정이 서서히 굳더니 곧 서늘한 얼굴을 한 채 입을 열었다.

    “…자네들은 죽기를 선택했군.”

    ―치지직.

    역린의 머리 위에 글자가 떠올랐다.

    [번뇌]

    김강희의 눈과 입이 서서히 사라짐과 동시에 그가 이야기했다.

    “마지막으로 고민할 시간을 주겠네. 마음이 바뀌었다면 공격을 그만두고 무기를 다른 곳을 향해 드는 게 좋을 거야.”

    ―투쾅!

    김강희의 일부분이 완전히 사라지자 중생의 역린이 그 자리에서 뛰어올라 긴 손톱을 횡으로 휘둘렀다. 날카로운 손톱 끝을 피해 뒤로 물러났고 일단 방아쇠부터 길게 당겼다.

    ―우우웅.

    소리 파도에 녀석의 몸이 살짝 깎여나갔다. 붉은 파편이 흙바닥을 뒹굴었지만 역린은 개의치 않고 제 손톱을 땅에 파묻었다.

    “얕은수를 쓰는군!”

    ―콰과광!!

    레일리가 곧바로 땅 위로 아더의 방패를 시전했다. 그러자 튀어나오려던 붉은 손톱이 막혀 다시 땅속으로 들어갔다. 역린이 당황한 듯 움직임이 잠시 멎은 틈을 타 최민 헌터가 운석처럼 녀석을 향해 떨어졌다.

    [현재 체력 : 76,671]

    푸른 불꽃에 휩싸인 그의 발끝이 역린의 턱을 정확히 가격해 목을 완전히 꺾어 버렸다.

    ―쾅!

    그때 세빈이가 귀신처럼 나타나 휘청거리는 역린의 머리를 잡아 바닥에 처박았다. 세빈이의 그림자가 꾸물거리며 그것을 땅으로 강하게 끌어당기자 새카만 궤적을 그리며 ‘영’이 녀석의 목을 벴다.

    ―철컥.

    나도 자아를 바주카로 바꿔 녀석을 향해 조준했다.

    ―정말로 그 인간이 사도들을 죽일 힘이 있는 거라면,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윽?!”

    ―펑.

    갑자기 머릿속을 파고든 내 목소리에 엉뚱한 곳으로 포탄을 날렸다. 포탄은 공기만 무의미하게 진동시키며 그대로 사라졌다.

    ‘김강희는 그럴 힘 없어. 일단 전투에 집중…….’

    ‘뭐?’

    ‘어?’

    오히려 자아가 되물었다. 내 목소리길래 당연히 자아라고 생각했는데, 자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목소리로 대답할 뿐이었다.

    ―어쩌면 김강희 말이 사실일지도 몰라. 아무리 내가 자유롭게 했어도 어쨌든 그들은 창조자의 사도들이었으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 창조자의 일부가 남아 있을 수도 있어.

    ―그걸 이용해서 죽인다면 충분히 가능성 있어.

    ―이 사람들이 죽으면, 난 뭘 위해 싸웠던 거야?

    애써 숨겨뒀던 내 불안이 정제된 문장이 되어 계속해서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콰과광!

    “윽!”

    그때 하늘에서 붉은 바늘이 쏟아졌다. 최민 헌터의 불꽃이 급하게 하늘을 가렸지만 이미 모두의 피가 흩뿌려진 후였다.

    “자꾸 쓸데없는 소리를……!”

    옆에 있던 비스가 귀를 틀어막으며 중얼거렸다. 지금 보니 다들 입을 움직이며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듯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쿵, 쿵, 쿵.

    모두 전투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는 틈을 타 중생의 역린은 더욱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녀석은 가장 가까이 있던 조슈아의 멱살을 낚아챘고, 손톱을 늘려 목을 찌르기 전에 세빈이의 검이 먼저 녀석의 손목을 벴다.

    하지만 평소보다 날이 얕게 들어간 것 같았다. 세빈이도 인상을 찌푸린 채 입으로 무언가를 읊조리고 있었다.

    ‘설마……!’

    역린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자 방금 전 무심코 넘겼던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번뇌]

    해탈, 그리고 번뇌. 우리의 정신을 무너트리러 온 두 번째 패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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