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화
―쿠구궁.
예술가의 역린을 파괴하자마자 김강희의 몸이 깨진 빙산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김강희는 부서져 가는 제 몸을 바라보기만 하며 허탈한 듯 웃었다.
“다들 크게 다친 곳 없지?”
“괜찮다.”
“네.”
다치지 않았을 뿐 다들 체력적으로 한계가 왔을 것이다. 전투의 승리로 억지로 쥐어 짜낸 각성 상태가 마지막 역린을 상대할 때까지 버텨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싸울 의지를 잃은 건가요? 아니면 설마 여기서 끝?”
“…….”
조슈아가 김강희를 향해 비아냥거렸지만, 김강희는 그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조슈아를 갸륵하다는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쿠구궁.
김강희는 상체를 살짝 숙여 조슈아에게 말을 건넸다.
“끝이기를 바라고 있나 보군, 조슈아 군.”
“뭐, 조금?”
“하하하, 솔직한 젊은이야.”
김강희가 눈을 감은 채 작게 웃었다.
“그럼 나도 좀 솔직하게 나가도록 해볼까.”
―콰광!!
무언가 벼락처럼 땅에 내리꽂혔다. 지면 전체가 울릴 정도의 무게인 탓에 다리에 힘을 줬는데도 주저앉고 말았다. 지평선에 있던 김강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우리 앞에 놓인 거라곤 새빨간 사람의 형체뿐이었다.
그것은 다리를 꼰 채 허공에 앉아 있었다. 그러고는 우리가 전시품이라도 되는 양 천천히 고개를 돌려가며 우리를 관찰했다.
“역시 자네들은 가까이서 만날 때 더욱 아름다워.”
“김강희……!”
형체의 얼굴에 갑자기 김강희의 것을 얹은 듯한 푸른 눈과 입이 생겼다. 콜라주 그림처럼 이질적인 모습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녀석은 눈을 가늘게 뜨며 히죽 웃었다.
―쿵.
‘몸이 안 움직여……!’
눈동자도 돌리지 못할 정도로 전신의 감각이 마비되었다. 이 공간에 오직 나와 김강희만이 존재하는 듯했다. 정신계 스킬 그 이상의 힘이 내 뇌를 주무르는 듯했다.
“신지의 헌터, 자네에게도 사명이 있지?”
“…….”
“세상이 자네에게 힘을 준 이유, 각성의 이유 말일세.”
입을 움직여 뭐라 말을 하고 싶은데 이젠 숨 쉬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세상을 구원하는 자, 그게 내 사명이네.”
“뭐…라고?”
―콰그작!
그때, 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김강희의 머리를 관통했다. 몸을 옥죄던 무형의 힘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 폐부에 공기가 훅 들어왔다.
“컥! 콜록, 켁……!”
급하게 들어간 숨 때문에 기침이 터져 나오자 갈비뼈가 욱신거렸다.
급하게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상체를 숙이거나 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김강희의 눈과 입을 갖고 있던 붉은 사람도 처음 봤던 모습으로 돌아왔다.
“짜증 나게 구네…….”
세빈이 역시 입가를 슥 닦으며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세빈이의 손등에 피가 묻어나왔다.
정신계 스킬에 면역이 있는 세빈이마저 김강희의 스킬에 당했다. 그는 절대자는 되지 못했지만,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난 힘을 갖고 있는 건 확실해 보였다.
‘그나저나 김강희의 사명이 마음에 걸리는데.’
세상을 구원하는 자, 그것은 내 사명이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다가 100번째의 회귀 끝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과업.
그 사명을 완수하고 지유를 살려달라는 소원을 빌기 위해 지금까지 달려왔다. 지난 생의 내가 저질렀던 과오를 바로잡고, 업으로 인해 절대자, 또는 세상에 묶인 동료들을 자유롭게 했다.
‘그런데 그 사명이 김강희와 같다고?’
―파지직.
상황을 이해할 시간도 없이 붉은 형체 주변으로 스파크가 튀었다. 급하게 자아에 목소리를 주입하며 녀석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중생의 역린]
[현재 체력 : 300,000]
[*중생의 역린 파괴 시 파괴자의 업을 지닌 인간을 제거할 수 있다*]
[*파괴자의 업을 지닌 인간 제거 시 ■■자 김강희를 각성자로 돌려놓는 데 영향을 줄 수 있다*]
―콰과광!!
마지막 역린의 정체가 드러나자 세빈이의 그림자가 가장 먼저 역린의 발목을 노렸다. 하지만 그것은 그림자의 움직임을 읽은 듯 가볍게 뛰어오르더니 공중을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체력이 높지 않으니 공격 타이밍 한 번만 제대로 잡아도 큰 피해를 줄 수 있을 것이다. 녀석의 빠른 움직임을 눈으로 좇으며 방아쇠를 길게 당겼다.
―우우웅.
소리의 파도에 휩쓸린 녀석이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쿠구궁.
그러자 역린의 위로 용암 폭포가 쏟아졌다. 피부에 엄청난 열기가 느껴짐과 동시에 이번엔 광휘가 용암을 가르고 녀석의 몸을 관통시켰다. 역린은 바닥으로 추락했고 땅에 거세게 부딪히자마자 온몸의 관절이 이상한 방향으로 꺾였다.
[현재 체력 : 300,000]
“하, 어쩐지 쉽더니만.”
역린이 아무렇지 않게 몸을 일으키자 비스가 헛웃음을 치며 무기를 더욱 꽉 쥐었다.
―까드득.
역린은 제 손으로 직접 어긋나거나 부러진 관절의 위치를 잡았다. 뼈끼리 맞닿는 소리가 한참 울려 퍼지고 나서야 녀석이 다시 우릴 마주 보고 섰다.
[해탈]
갑자기 역린의 머리 위로 글자가 떴다. 녀석을 향해 자아를 들어 올리려다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신지의 헌터!”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최민 헌터의 외침과 동시에 역린이 내 눈앞에 바로 나타났다. 내가 녀석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것보다, 녀석의 손가락이 내 이마를 짚는 게 더 빨랐다.
―띵.
그러자 맑은 종소리와 함께 주위가 새하얗게 바뀌었다. 나의 거친 숨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장기간의 전투로 욱신거렸던 몸의 고통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아니, 정확히는 모든 감각으로부터 멀어진 것 같았다.
심장 박동이 원래의 속도를 되찾자 가빴던 숨도 서서히 진정되었다. 물 위를 떠다니는 것처럼 편안해졌고, 나도 모르게 눈이 사르르 감겼다.
몸이 편해지니 복잡했던 머릿속도 천천히 새하얗게 물들었다. 뭐 때문에 그렇게 목숨을 걸고 싸웠던 건지 이젠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사람을 이토록 편안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그래. 다 아무 의미 없던 일이었…….’
―파지직.
무심코 눈을 뜨자마자 내 손바닥에 적힌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많이 번져 있어서 몇몇 글씨는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딱 다섯 글자만큼은 선명했다.
[친구, 잊지마]
“…퍽이나 의미 없는 일이겠다.”
강제로 평온해졌던 마음이 요동치자 전투로 인한 피로감과 불쾌한 긴장감이 다시 살아났다. 온몸이 뻐근하게 쑤셔 왔지만 오히려 안도감이 들었다.
―파지직!
새하얀 공간도 검은 스파크를 뿜어내며 무너질 것처럼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아무래도 나의 마음 상태를 보여주는 듯했다.
방금 전 느낀 감정은 분명 중생의 역린이 가진 스킬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상태에 빠지기 전에 녀석의 머리 위에 '해탈'이라는 글씨가 있었어.’
내가 방금 겪은 그 이상한 평온함이 '해탈'이라는 스킬의 영향이 틀림없었다. 싸우는 이유마저 잊게 만들었으니, 보통 수준의 스킬이 아니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할 순 없다. 이번 고비만 넘기면 적어도 나를 제외한 다른 동료들의 목숨까지는 살릴 수 있을 것이다.
―탕!
공간에 생긴 새카만 균열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아슬아슬하게 나를 감싸고 있던 새하얀 풍경이 와르르 무너지더니 곧 커다란 굉음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헉……!”
시야가 돌아오자마자 새빨간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한 번에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자 녹두의 배리어 너머로 동료들이 전투를 벌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현재 체력 : 195,288]
‘체력이 줄어 있어!’
내가 녀석에게 당하기 전만 해도 꿈쩍도 하지 않던 체력 수치가 어느새 절반을 향해 가고 있었다.
“지의!”
“신지의 헌터, 괜찮으신가요?”
비스와 센이 내 쪽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쾅!
그러자 중생의 역린이 그들의 앞에 차례로 붉은 돌덩어리를 떨어트렸다. 다행히 레일리의 방패가 그것을 튕겨내며 역린을 정확히 맞혔고, 그대로 녀석을 멀리 보내버렸다.
[현재 체력 : 195,288]
하지만 체력은 또다시 요지부동이었다. 배리어에서 나와 전투 대열에 들어가자 동료들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세빈이는 한참 내 몸을 살피다 별 부상이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제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무래도 지의가 기절해 있는 동안만 공격이 들어가는 것 같군.”
레일리는 역린의 체력 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신지의 헌터, 혹시 쓰러져 있을 때 뭔가 겪으신 건가요?”
“아, 정신계 스킬 같았어. 웬 새하얀 공간에 끌려갔는데 삶에 대한 모든 미련을 강제로 버리게 만들더라.”
“말 그대로 해탈 상태로 만든 거군요.”
조슈아의 물음에 대답하자 센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파지직.
그때 레일리에 의해 멀리 날아갔던 중생의 역린이 다시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해탈 상태에 빠트릴 대상을 찾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내가 싸워야 하는 이유랑 현실에서 못다 한 일들을 떠올리자마자 해탈 상태가 풀렸어. 만약 걸린다면 일단 삶에 대한 것부터 최대한 생각해 줘.”
“알겠다. 나머지 녀석들은 그동안 저놈을 제거하지.”
―투쾅!
비스가 말을 마치자마자 역린이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칼날처럼 길어진 녀석의 손톱이 아더의 방패에 막히자 녀석은 단숨에 방패를 타고 올라 위쪽에서 레일리를 공격했다.
―서걱.
역린의 바로 등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세빈이가 '영'으로 녀석의 목을 벴다. 일반 몬스터였다면 진작 목이 떨어지고도 남을 공격이지만 녀석의 목과 체력은 여전히 멀쩡했다. 역린이 제자리에서 빙글 돌며 손톱을 휘두르자 레일리와 세빈이가 동시에 물러났다.
―파지직!
[해탈]
얼마 지나지 않아 글자가 떴다. 역린의 모습이 순간 사라지나 싶더니 갑자기 센의 앞에서 나타났다.
“센……!”
―띵.
그의 이름을 채 부르기도 전에 역린의 손가락이 센의 이마에 닿았다. 그의 몸이 천천히 뒤로 넘어가는 장면이 슬로모션 영상처럼 펼쳐졌다.
―쿵.
해탈에 빠진 센이 결국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