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329화 (329/366)
  • 329화

    ―지옥도 개방 25일 차

    ―삐빅.

    손목시계가 짧은 알람을 보내자 책상에 엎어져 있던 미준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파르르 떨며 곧바로 상체를 일으켰다.

    [02:13 AM]

    ‘두 시간이나 잤군…….’

    그는 시간을 한번 확인한 후 주위를 둘러보았다. 새벽 근무 담당 협회 직원들이 계속해서 던전 공략 상황을 살피고 헌터들을 배치하느라 미준이 깬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중 가장 나이 많은 직원이 그를 흘긋 보곤 싱긋 웃었다.

    “벌써 일어났어요?”

    “세상모르고 두 시간이나 잤네요.”

    “3일을 깨어 있었는데, 두 시간 잔 거면 말도 안 되게 적게 잔 거죠.”

    직원이 물 탄 기력 회복제를 마시는 동안 미준이 그의 옆에 털썩 앉았다.

    “별일 없었죠?”

    “네. 공략 완료율 98%예요. 수도권 외 지역은 전부 정리 끝났고, 성북구, 은평구, 그리고 강남구에 S급 게이트 한 개씩 남았어요.”

    “어디 보자…….”

    미준이 허리를 숙여 직원의 모니터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S급 게이트 중에서도 상급으로 분류되는 게이트만 남은 탓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필 그 세 사람의 신호가 끊긴 상황인데…….’

    그의 머릿속에 지의와 세빈, 그리고 민이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지의가 광화문에서 경주 S급 던전의 보스인 ‘천마(天馬)’를 쓰러트린 후로부터 일주일이 지날 때까지 세 사람의 위치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거리에서 그들을 봤다는 목격담조차 나오지 않았다.

    “…차도윤 헌터 중심으로 공격 및 방어계 최소 A급, 그리고 치유계 최소 B급으로 맞춰서 공략팀 짜 주세요.”

    “네.”

    “그리고 강남구에 있는 건 제가 공략할게요.”

    직원이 놀란 듯 고개를 홱 들자 미준이 입꼬리를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 제 실력 못 믿어요?”

    “하미준 헌터가 S급인 건 맞지만 공격계 스킬이 A급이다 보니 아무래도 걱정되는 면은 있죠.”

    “평가 한번 가차 없으시네요. 물론 그래서 제가 우리 정 실장님 좋아하지만.”

    미준 역시 직원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S급 게이트를 공략하는데 S급 공격계 헌터 없이 들어가는 건 여러모로 위험 부담이 큰 일이었다.

    ‘딱 한 사람이라도 데려올 수 있다면…….’

    ―위잉.

    그때 미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혹시 지의의 전화일까 싶어 인벤토리에서 잽싸게 핸드폰을 꺼냈지만, 발신자는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카렌?”

    ―네, 저예요. 바쁘니까 용건만 간단하게 얘기할게요. 저랑 이시카와, 지금 한국으로 갈 거예요. 입국 가능한 공항 있어요?

    “아니, 뭐?”

    숨도 안 쉬고 말을 쏟아낸 탓에 미준이 질문을 던질 틈이 없었다. 미준은 목을 가다듬곤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우리 쪽에서 따로 요청한 건…….”

    ―센 님의 부탁이에요.

    “센 전 협회장이?”

    ―네. 만약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건 분명 신지의 헌터와 관련된 일일 테니 바로 한국으로 날아가라는 말이 있었거든요.

    “…설마 센 전 협회장도 실종됐어?”

    전화기 너머로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네. 갑자기 눈앞에서 웬 덩굴이 센 님을 끌고 갔어요.

    “실종된 지는 얼마나 됐어?”

    ―아마 일주일 정도.

    ‘우리 쪽이랑 실종된 시점도 비슷해.’

    미준이 잠시 생각에 잠기자 카렌이 말을 덧붙였다.

    ―신지의 헌터에게도 무슨 일이 생기긴 했나 보네요.

    “……….”

    ―아무튼 저희도 던전을 해결하느라 지금에서야 사람을 보낼 수 있게 됐어요.

    “알겠어. 안 그래도 마침 힘이 필요하던 상황이었거든. 공항 상황은 내가 확인해 보고 다시 연락할게.”

    ―네.

    미준은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참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덩굴이 끌고 갔다고……?’

    미준의 생각이 닿지 못하는 상상 밖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불쾌한 궁금증을 뒤로한 채 미준은 공항 쪽으로 파견된 직원에게 호출 신호를 보냈다.

    * * *

    [비탄의 음악가라 불렸던 그는 이제 아무런 고통도, 그리고 슬픔도 느끼지 못합니다.]

    [모든 미련과 번뇌로부터 벗어난 것입니다.]

    [현재 체력 : 999,371]

    설명창 말대로 평온한 연주가 이어지고 있었다. 쑥대밭이 된 정원과 대비되는 분위기의 곡이었다.

    “치료 고맙다.”

    “괜찮겠어?”

    “뼈는 멀쩡하니 전투에는 지장없다.”

    ―우득.

    레일리가 가죽 코트의 소매 부분을 아예 뜯어버린 후 인벤토리 안으로 던졌다. 그러자 헌터용 기능성 상의 위로 그의 근육 라인이 훤히 드러났다. 새삼 이렇게 보니 근거리 전투와 방어에 특화된 헌터라는 게 실감 났다.

    ―콰과광!

    배리어를 해제하기 무섭게 음표가 우박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떨어진 곳은 움푹 꺼졌고 난 그것들을 피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곧이어 내 쪽으로 달려온 녹두가 자세를 낮추며 말을 걸었다.

    ‘언니, 타! 체력 아껴야지.’

    ‘고마워.’

    ―탁!

    녀석의 등에 올라타자마자 자아를 든 팔을 음악가 쪽으로 들었다.

    ―탕, 탕, 탕.

    면적이 크니 정확히 조준하고 쏘지 않아도 전부 녀석의 몸 어딘가에 박혔다. 곧바로 비스가 창으로 음악가의 악보 머리를 꿰뚫었고, 조슈아는 상처 틈으로 용암을 들이부었다.

    [현재 체력 : 928,671]

    빠른 연계 공격에 음악가의 체력도 빠르게 줄었다. 녀석은 자신이 몸이 무너져 내리고 있음에도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촤악!

    “아우―!”

    “녹두… 윽!”

    오선 줄기가 우리를 끈질기게 쫓더니 결국 녹두의 발목을 휘감았다. 오선이 녹두를 흔드는 바람에 녀석에게서 떨어질 뻔했지만 녀석의 목을 끌어안으며 겨우 버텼다.

    ―탕!!

    그리고 발목 쪽으로 탄환을 발사했다. 묵직한 탄환 한 발이 오선을 찢자 녹두의 움직임이 자유로워졌다. 녀석은 음악가를 마주 본 채로 한껏 매서운 얼굴을 했고 곧이어 입을 쩍 벌렸다.

    ―콰과과광!

    울음소리가 빛줄기가 되어 녀석의 몸을 세로로 갈랐다.

    ―퍼버벙.

    나도 녹두의 공격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자아를 바주카로 바꿔 방아쇠를 당겼다. 포탄이 녀석의 갈라진 몸 틈을 파고들어 커다란 균열을 만들어 버렸다.

    [현재 체력 : 772,184]

    “방어력이 더 떨어진 것 같습니다! 계속 퍼붓죠!”

    센이 소리치며 양손으로 검을 높이 들었다. 그의 검 주위로 빛이 모여든 탓에 검의 길이가 두세 배는 더 크게 보였다.

    ―콰과광!

    그가 검을 휘두르자 새하얀 빛이 별똥별처럼 떨어졌다. 음악가의 다리에 정통으로 맞자, 녀석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바이올린을 켜는 팔은 멈추지 않았다.

    그 틈을 타 세빈이의 그림자가 녀석의 허벅지를 휘감아 땅속으로 끌어당겼다. 나무처럼 완전히 땅에 박혀버린 녀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연주에 몰두하고 있었다.

    [현재 체력 : 715,578]

    “다들 물러나!”

    ―끼리릭.

    자아를 박격포로 바꾸며 녀석의 바로 앞에 떨어트렸다. 음악가의 팔을 노리던 조슈아가 그대로 녀석을 뛰어넘으며 불꽃 궤적을 남겼고 그와 동시에 포탄이 발포됐다.

    ―콰과과광!

    포탄은 음악가의 머리는 물론 김강희와 우리 사이를 막던 불의 벽까지 뚫고 지나갔다. 새삼 어마어마한 파괴력이 실감 나 잠시 멍해졌다가 금방 정신을 차리고 음악가로 시선을 옮겼다.

    [“마지막 연주로 괜찮은 공간이었어.”]

    [음악가는 모든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현재 체력 : 499,171]

    ―사아아아.

    음악가의 몸이 수백, 아니 수천 개의 음표가 되어 바닥에 차곡히 쌓였다. 녀석의 완전한 소멸이었다.

    “이제 뭐가 남은 거죠?”

    “화가. 그 녀석이 우리 중 누군가의 그림을 그릴 거야. 그림이 완성되면 죽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다들 캔버스랑 손부터 처리해 줘.”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모든 생명체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수긍]

    화가의 체력이 49만보다는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무래도 이전 전투에서 체력을 한 번에 많이 빼놓은 덕인 것 같았다.

    ‘뭐, 어쨌든 우리한테 불리할 건 없지.’

    고개를 들어 김강희를 바라보았다. 역린의 체력이 떨어질수록 녀석의 몸도 가장자리부터 서서히 깨지고 있었다. 부식된 몸과 텅 빈 눈은 그가 삶을 포기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리고 그림의 대상이 된 사람들만이 화가를 공격할 수 있습니다. 몸 주변에 액자가 생기면 계속 공격해 주세요."”

    센이 설명을 덧붙이며 검을 고쳐 쥐었다.

    ―우드득.

    그때 음악가의 잔해가 지점토처럼 하나로 뭉쳐졌다. 그러고는 곧 화가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센이 갖고 있던 파편 안에서 본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캔버스 안으로 스스로 들어갔음에도, 작품 활동을 향한 그의 열정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희생하는 화가는 최후의 작품을 그리려 합니다.]

    [현재 체력 : 499,171]

    ―쿵.

    최민 헌터에게 액자가 생겼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흘긋 보더니 곧 공격 태세를 취했고 손바닥만 한 수첩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를 향해 손을 뻗었다.

    ―퍼버벙!

    강한 폭발이 일었다. 푸른 불꽃과 붉은 불꽃이 동시에 터져 녀석의 수첩을 태우자 화가가 품에 있던 팔레트 나이프를 꺼내 공중으로 던졌다.

    ―쾅, 쾅, 쾅.

    집채만 한 팔레트 나이프가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이프들의 틈으로 겨우 몸을 피하며, 최민 헌터가 공격을 더욱 쉽게 넣을 수 있도록 방아쇠를 길게 당겼다.

    소리 파도에 삼켜진 나이프들과 화가의 움직임이 멎었다.

    ―챙그랑!

    그러자 비스가 허공에 있던 나이프들을 낫으로 단번에 쳐냈고, 화가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검은 손들이 뱀처럼 녀석의 몸을 휘감았다.

    ―펑, 펑, 펑.

    그림을 그릴 틈을 조금도 주지 않았다. 최민 헌터는 녀석의 전신을 불태우고 폭발을 일으키며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이어갔다.

    끝이 보이는 전투에 다른 헌터들도 모든 힘을 끌어다 쓰는 듯했다.

    [현재 체력 : 227,451]

    ―쿵.

    녀석은 그림 대상을 나로 바꿨다. 내 몸 주위에 생긴 액자를 확인하자마자 나는 자아를 바주카로 바꾼 후 소리쳤다.

    “최민 헌터, 레일리! 엄호 부탁할게!”

    “알겠습니다.”

    “나만 믿어라.”

    자아의 충전도가 얼마 남지 않았다. 애매한 출력으로 박격포를 쓰는 것보다 바주카로 한 발씩 제대로 꽂아 넣는 게 훨씬 효과가 좋을 것이다.

    ―쾅!

    화가의 머리 바로 앞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탄환이 빠져나갈 때마다 팔레트 나이프와 용암 같은 물감들이 나를 노렸지만, 최민 헌터의 불꽃과 레일리의 방패가 그것들을 막았다.

    [희생하는 화가는 작품 활동에 박차를 가합니다.]

    [현재 체력 : 174,892]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가 울려 퍼졌다. 녀석의 수첩엔 어느새 내 골격이 그려져 있었고, 앞치마 주머니에서 크레파스를 꺼내 채색할 준비를 했다.

    ―쿠구궁.

    하지만 곧 그림자 손에 잡혀 수첩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녀석이 허무한 듯 잔해를 바라보다 곧 새로운 수첩을 꺼내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현재 체력 : 84,272]

    사실상 발악에 불과했다. 녀석이 허둥대는 동안 이미 너무 많은 체력을 소모했다.

    ―철컥.

    나는 마지막 공격이 될 포탄에 힘을 실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퍼버버벙!

    [현재 체력 : 0]

    길고 길었던 예술가의 역린과의 전투가 이제야 끝을 맞이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