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328화 (328/366)

328화

―콰과광!

센의 거죽을 뒤집어쓴 연기자와 진짜 센이 부딪혔다. 그들의 손에 들린 새하얀 검이 마찰하는 소리가 공간에 크게 울려 퍼졌다.

나는 곧바로 오른쪽 눈을 감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상대적으로 조금 더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는 센의 머리 위로 ‘예술가의 역린’이라는 글자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탕!

“윽!”

“저쪽이야!”

―콰과광!

연기자의 몸에 내 탄환이 박히자 녀석이 인상을 찌푸리며 곧바로 아마테라스를 시전했다.

“아마테라스까지…….”

센이 공격 태세를 취하며 중얼거렸다. 자신과 똑 닮은 존재의 등장에 조금 놀란 눈치였다.

―우드득.

연기자는 세빈이의 그림자 손을 단번에 끊어낸 후 센과 우리가 있는 곳을 향해 광휘를 쏟아냈다.

―콰과광!!

간발의 차로 불로 된 벽이 먼저 우리의 머리 위를 덮었고, 동시에 아더의 방패가 그 위로 펼쳐져 광휘를 반대로 보냈다.

[현재 체력 : 2,136,089]

―탁.

체력이 닳자마자 또다시 주변이 암전되더니 곧 다시 밝아졌다.

“다들 괜찮나!”

“짜증 나게 구는군.”

똑같은 목소리로 다른 말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고개를 내리자 새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두 사람이 거울을 맞댄 것처럼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쾅!!

곧바로 거대한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두 명의 레일리가 서로를 죽일 것처럼 메이스를 맞대고 있었다. 아더의 방패는 서로의 공격을 계속해서 반사하고 있어 교착 상태에 빠졌다.

“지의!”

그중 한 레일리가 나를 향해 소리치자 곧바로 오른쪽 눈을 감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탄환은 내게 소리친 그 레일리의 이마에 정확히 박혔다.

‘진짜로 속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급박한 상황을 이용하려고 했던 건지 연기자는 너무나 당당한 태도로 내 이름을 외쳤다. 마치 자기가 진짜 레일리라는 걸 주장하듯이 말이다.

―콰앙!

조슈아의 발끝이 정확히 연기자의 턱을 가격했다. 연기자는 아더의 방패조차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그대로 뒤로 나동그라졌다.

“…체스터, 방금 좀 감정이 담기지 않았나?”

“기분 탓이겠죠.”

레일리가 못마땅한 얼굴로 조슈아를 바라보자, 그는 생글생글 웃으며 손등으로 땀을 닦았다.

―탁.

또다시 눈을 오래 감았다 뜬 것처럼 캄캄해졌던 시야가 돌아왔다.

―쾅!

“윽!”

“지의야?!”

‘이번엔 나구나……!’

연기자가 확성기 손잡이로 내 어깨를 내리쳤다. 관절을 정확히 가격해 어깨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세빈아, 이쪽이야!”

녀석은 뻔뻔스럽게 세빈이의 이름을 불렀다. 세빈이를 포함한 다른 동료들 모두가 나와 연기자를 번갈아 보기만 했다. 미리 만든 규칙을 누가 먼저 수행하는지 확인해 보려는 것이다.

―철컥.

나는 김강희를 향해 팔을 들곤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탄환은 불의 벽을 뚫고 김강희를 향해 날아갔지만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줄 순 없었다.

―콰과광!

“아악!”

하지만 내가 진짜라는 걸 증명하기엔 충분했다. 광휘가 벼락처럼 내리꽂히자 연기자는 나와 똑같은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쓰러졌다.

―탕!

내 쪽으로 기울어진 녀석의 멱살을 잡아챈 후 머리에 대고 곧바로 탄환을 발사했다.

‘영 기분이 별론데.’

내 얼굴을 보면서 처치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뒤통수에 방아쇠를 당기긴 했지만, 역시 불쾌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현재 체력 : 2,096,151]

―파사삭.

연기자의 체력마저 전부 소진시켰는지 내 손에 들려 있던 무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진짜 연기자만큼의 지능은 아닌가 보네요.”

“그러게. 훨씬 허술했어.”

조슈아가 손목을 풀며 다음 파편을 기다렸다.

―쾅!!

잠깐 숨 돌릴 틈도 없이 거대한 손이 불의 벽을 넘고 우리를 향해 떨어졌다. 그것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후 손이 날아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텅 빈 눈으로 우리를 내려다보는 김강희가 있었다.

“네가 만든 피조물들을 우리가 전부 부수고 있는 심정은 어떻지?”

“…….”

“하하하, 어리석은 중생. 이젠 말하는 법도 까먹은 모양이군.”

칼리의 도발에도 김강희는 말없이 우릴 응시하기만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러고 보니 공격 빈도가 확실히 줄었어.’

아까처럼 계속해서 폭발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염산을 뿜어대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지평선 너머에 엎드린 채 그곳에 있을 뿐이었다.

―치지직.

눈앞에 뜬 노이즈가 내 주의를 끌어왔다. 내가 부숴버린 연기자의 잔해가 다시 하나로 모이기 시작하더니, 곧 커다란 인영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났다.

형형색색의 꽃다발 머리와 양손에 든 나이프와 포크.

[미식가는 마지막 만찬이 될 식사를 주문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의 주문을 받아줄 주방장은 이제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현재 체력 : 2,096,151]

미식가의 등장이었다.

―쾅, 쾅, 쾅.

녀석이 분노한 듯 하늘에서 거대한 포크를 소환했다. 포크가 엄청난 굉음과 함께 땅에 박히자 땅 전체에 금이 갔다.

주방장이 없으면 음식을 소환할 수 없고, 미식가도 체력 회복을 할 수 없다. 지금의 녀석은 그저 덩치만 큰 몬스터일 뿐이다.

“주의해야 할 점 없어! 그냥 때려!”

―콰과광!

내 외침에 모두가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세빈이의 그림자가 녀석의 양팔을 강하게 움켜쥐어 움직임을 봉쇄하자, 아마테라스 상태의 센이 검으로 녀석의 목을 쳤다.

꽃다발에서 떨어져나온 꽃송이들이 이리저리 튀고 꽃잎은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미식가는 한 손으로 목을 잡으며 고통스러워하다 곧 반대쪽 손을 크게 휘두르며 엄청난 바람을 불게 했다.

―파바박!

그러자 꽃잎이 갑자기 날카로워지더니 칼날처럼 우리를 향해 날아왔다.

―챙그랑!

“쳇……!”

급하게 만든 쉴드로는 꽃잎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꽃잎이 닿자마자 깨져버린 쉴드를 버린 후 몸을 돌리자, 미처 막지 못한 꽃잎이 팔을 꽤 깊게 파고들곤 사라졌다.

[미식가는 더 이상 식사를 할 수 없음에 분노합니다.]

[새로운 맛을 찾는 재미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 겁니다.]

[미식가의 공격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미식가의 방어력이 대폭 하락합니다.]

[현재 체력 : 1,625,884]

―쾅, 쾅, 쾅

녀석의 공격이 아까와 확연히 달라졌다. 공격 하나의 위력은 물론 정확도까지 상승했다. 아무렇게나 휘두르던 포크와 나이프가 지금은 정확히 목표를 잡고 날아오기 시작했다.

“고군분투하는 모습, 역시 보기 좋네요.”

그때 혼이 나간 것처럼 줄곧 입을 다물던 김강희가 말문을 텄다.

―쿵.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우리가 서 있던 곳에 거대한 물 구체가 소환되었다. 본능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어 쉴드를 펼치자 구체가 기다렸다는 듯 폭발했다.

―콰과과광!

“윽……!”

“레일리!”

“레일리 씨!"

가장 전방에서 우리를 보호하던 레일리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팔이……!’

방금 전의 폭발이 아더의 방패까지 뚫은 건지 레일리의 양팔의 살가죽이 전부 벗겨져 있었다. 레일리는 이를 악문 채 뒤를 흘긋 돌아보곤 한쪽 입꼬리를 올려 씩 웃었다.

다른 동료들은 가벼운 화상에서 끝난 것에 안심한 눈치였다.

“녹두야!”

―콰광.

새하얀 배리어가 나와 레일리를 동시에 덮었다. 레일리는 그제야 반쯤 날아간 방패를 놓고 팔을 감싸 안았다.

하지만 피와 진물로 범벅이 된 팔은 작은 접촉에도 끔찍한 통증을 줬는지 레일리가 욕을 읊조리며 다시 손을 뗐다.

“다른 사람들은 나가서 미식가부터 해치워줘! 레일리는 내가 볼게!”

―쾅!

대답도 없이 모두 자리를 뜨자 배리어 안은 레일리의 거친 숨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다행히 다른 덴 괜찮은 것 같네.’

근육이 드러날 정도로 벗겨진 피부를 제외하곤 큰 부상이 없었다. 배리어 안의 빛무리가 부지런히 레일리의 팔을 감싸며 새 살이 돋는 걸 도왔다.

“머리가 어떻게 된 것 같군.”

갑자기 레일리가 중얼거렸다. 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 배리어 밖의 동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팔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는데도, 다들 멀쩡한 걸 보자마자 안심했으니 말이다.”

“…….”

“우리 길드원 말고도 이런 감정을 갖게 된 건, 역시 내 머리가 돌아버려서겠지.”

레일리가 낮게 웃었다. 지친 얼굴 위로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아마 몇 달 전의 레일리가 지금의 자신을 보면 깜짝 놀라겠지. 자기밖에 모르던 오만한 길드장이 다른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가장 앞으로 나서는 사람이 됐으니까.

[미식가는 결국 아무것도 입에 대지 못한 채 그대로 레스토랑을 떠나야 했습니다.]

[아니, 애초에 이곳에 미식가의 자리라는 건 없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현재 체력 : 1,078,730]

―쿠구궁.

미식가와의 전투는 비스의 낫이 녀석의 허리를 완전히 베어 놓으며 끝났다. 꽃잎들과 두꺼운 줄기가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지더니 곧이어 새로운 형체를 만들었다.

―사락.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녀석은 빠르게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엔 음악가를 위한 오케스트라도, 그리고 관객도 없습니다.]

[음악가는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바이올린을 듭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립니다.]

[현재 체력 : 1,078,730]

―♬♪♬

아름다운 바이올린 선율이 폐허가 된 정원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콰과광!

그러자 그의 몸을 감싼 오선이 촉수마냥 땅을 파고들어 사람들의 발목을 노렸다. 센이 검을 바닥에 꽂은 채 빠르게 달리자 오선이 우두둑하고 끊어졌고, 조슈아는 아예 땅에 생긴 틈으로 용암을 흘려보냈다.

[1악장이 무엇이었죠?]

[2악장은요?]

[음악가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저 어린 날의 자신처럼 손이 가는 대로 연주를 할 뿐입니다.]

[현재 체력 : 999,371]

미식가와 마찬가지로, 눈앞의 음악가 역시 정신계 스킬을 자유자재로 시전하던 음악가가 아니었다.

―철컥.

난 배리어 안쪽에서 녀석의 머리를 향해 바주카를 겨눴고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퍼버버벙!

음악가는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몸을 좌우로 가볍게 흔들며 자신의 연주에 완전히 심취해 있었다.

남은 건 음악가와 화가. 이 둘만 뛰어넘으면 마지막 페이즈에 접어들 수 있다.

난 자아를 더욱 꽉 쥐며 눈앞의 전투에 집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