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화
“괜찮으십니까?”
최민 헌터의 목소리가 가장 먼저 귀에 꽂혔다.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니 내가 알고 있는 풍경에서 크게 바뀌지 않았다.
아까보다 훨씬 나아진 조슈아가 자신의 치유계 스킬로 비스를 치료하고 있었다. 다행히 비스도 상체를 일으킬 정도는 됐는지 몸을 들어 우리들을 빤히 바라보다 다시 철퍼덕 누웠다.
―쿵.
“윽…….”
“아, 신지의 헌터!”
―탁.
옆에 있던 센이 또다시 나를 부축해 주었다. 나는 그제야 부랴부랴 ‘구원자의 가호 아래’를 해제하며 동시에 녹두를 소환했다. 녀석은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배리어를 넓게 펼치며 모든 사람들을 감쌌다.
체력을 되는대로 끌어온 탓에 머리는 물론 온몸이 웅웅 울렸다. 센이 나를 바닥에 조심스럽게 눕히자 걱정스러워하는 얼굴들이 시야에 잡혔고, 난 애써 웃으며 말을 건넸다.
“괘, 괜찮아… 잠깐 쉬면 금방 돌아올 거야…….”
잠이 쏟아지는 것처럼 눈꺼풀이 무거웠다. 잠시 눈을 감은 채로 숨을 몰아쉬자 귓가를 맴돌던 이명이 잦아들고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저림도 서서히 사라졌다.
“정말 이걸로 끝난 건가?”
그때 세빈이가 중얼거렸다. 눈을 뜨자 내리깐 검은 눈동자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이 보였다.
“아직까지 별다른 반응이 없는 게 마음에 걸리는군.”
“분명 신세계의 핵을 전부 부수면 아틀리에를 파괴할 수 있다고 했어요. 일단 김강희 회장을 끌어내릴 조건은 전부 완성된 것 아닐까요?”
센이 레일리에게 대답하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이 공간은 숨막힐 정도로 고요했다. 아틀리에가 파괴되긴커녕 우리가 나갈 만한 문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화병 다섯 개만 덩그러니 놓인 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진짜로 성공했네에…….”
“헉……!”
그때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상체를 한 번에 일으켜 자아를 손에 쥐었고, 다른 사람들도 바로 무기를 뽑아 든 채 한껏 경계했다.
―쩌적.
새하얀 공간에 가로로 새카만 금이 갔다. 달걀 껍질이 깨지듯 조각조각 뜯어져 바닥에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그 속에서 검푸른 눈동자가 나타났다.
우리를 엿보고 있는 창조자의 눈동자였다.
“결국 낯짝을 드러냈군, 창조자.”
“조슈아 안녀엉~ 많이 다쳤나 보네에.”
창조자가 눈을 반달로 접으며 히죽 웃자 조슈아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다치면 안 되지이. 벤을 또 혼자로 만들 셈이야아?”
“이 X끼가……!”
―쾅!!
시뻘건 용암이 창조자의 눈을 향했지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 채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창조자는 다시 눈을 깜박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어쩌다 이렇게 7명이 모이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강희가 다 뜻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
“김강희 어디 있어.”
창조자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나를 내려다보는 것만으로 엄청난 압박이 느껴졌지만 무섭진 않았다. 조율자도 그렇듯, 이 녀석도 결국 회귀한 나보다는 이 세상에 대해 모를 테니까.
“이 아틀리에 어딘가엔 있지 않을까아?”
제대로 된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직접 들으니 속이 뒤집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분명 소멸 조건은 맞췄다. 이게 일반적인 파편 던전이었다면 파편의 주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소멸했을 것이다.
하지만 김강희의 아틀리에는 달랐다. 마치 이 세상의 눈을 가리고 던전과 관련된 모든 법칙을 제 입맛대로 주무르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냥 이대로 이 안에 있는 건 어때애?”
“헛소리 하지 마.”
“헛소리 아니야아!”
―콰드득.
어느새 창조자가 균열 사이로 머리를 집어넣어 우리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검푸른 도마뱀 머리가 배리어 바로 앞까지 다가오자 녹두가 배리어를 한 겹 더 감싸며 녀석을 밀어냈다.
“너희들도 봤다시피 강희는 새로운 세상의 창조자가 될 거야아. 거기선 사람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던전도, 몬스터도 전부 강희가 통제할 수 있어. 완벽한 질서가 있는 세계라니까!”
“여기 있는 것들을 포기할 만큼 매력적인 세상은 아니군.”
비스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배리어 덕에 웬만한 상처들은 전부 치유가 됐는지 아까보다 훨씬 혈색이 돌아온 상태였고, 어느새 칼리까지 튀어나와 그의 머리 위에 떠 있었다. 마치 그를 수호하는 듯했다.
“네 후계자란 녀석은 지은 죄가 너무 많아 열반에 오르긴커녕 대초열지옥에 떨어져도 모자라다. 그런 자가 만든 세상에 누가 가고 싶어 하지?”
“종교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존재하지도 못했을 신이 혀는 참 길어어. 안 그래애?”
창조자를 바라보는 수십 개의 얼굴이 한꺼번에 싸늘하게 굳었다. 창조자는 재밌다는 듯 키득거리더니 곧 고개를 살짝 뒤로 뺐다.
―콰직.
“커흑……?”
뼈를 부수는 소리가 귀에 꽂히는 동시에 창조자의 눈이 커다래졌다.
‘어떻게 된 거지?’
―후두둑.
가로로 쭉 찢어진 입에서 새카만 액체가 주르륵 흐르자 새하얬던 벽과 바닥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녀석의 눈동자가 좌우로 크게 흔들렸고, 동시에 금이 점점 넓어져 이 공간 전체가 깨졌다.
―쨍그랑!
그러자 평화로운 정원의 풍경이 펼쳐졌다. 거인국에 온 것처럼 모든 사물이 큰 것을 제외하면 아까 들어온 풍경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뭐, 뭐야……!”
창조자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검푸른 스파크가 그의 몸 주변으로 일었고 피를 닮은 검은 액체가 잔디에 스미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자 창조자의 등 뒤로 다섯 명의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저것들은…….”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내가 알고 있는 존재들이었다.
―콰그작.
꽃다발 머리를 가진 미식가가 포크로 창조자의 등을 찍었다. 그러자 녀석의 옆에 있던 소설가가 고개를 숙여 머리의 잉크를 포크가 만든 상처의 틈으로 흘려보냈다.
―우득.
화가의 팔레트 나이프가 창조자의 팔과 다리를 짓이기자 음악가는 바이올린 활을 창조자의 목에 대고 실톱처럼 앞뒤로 움직였다.
“왜 저 녀석들이 우릴 도와주고 있는 거지?”
“…모르겠어.”
창조자의 파편이었던 녀석들이 우리 대신 창조자를 사지로 내몰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그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콰그작.
“윽……!”
그들의 제일 뒤에 서 있던 연기자가 창조자와 똑같은 모습을 하더니 곧 입을 크게 벌려 그의 꼬리부터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창조자의 비명이었다. 그는 제대로 된 반항 한번 해 보지 못한 채 계속해서 먹혔다. 애써 버둥거리는 팔과 다리가 애처롭기까지 했다.
“아하, 하하하… 아하하학!”
비명은 곧 자포자기한 웃음소리로 바뀌었다. 어느새 상반신이 먹힌 그는 입을 활짝 벌린 채 웃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강희! 김강희 네가 결국 일을 벌이는구나! 사랑스러워! 널 고른 건 내가 했던 선택 중 가장 옳은 선택이었어! 역시 네가 날 자유롭게……!”
―콰직.
연기자가 창조자의 머리까지 집어삼키자 그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파스슥.
창조자의 파편들이 사라졌다. 식사를 마친 연기자의 몸이 축 늘어졌고 이내 끈적하게 녹아 잔디에 스몄다.
―콰득.
그때 연기자의 척추가 솟았다. 아니, 자세히 보니 척추가 아니라 어떤 사람의 형체였다.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불쾌감 때문에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그 검붉은 인영에게서 시선을 뗄 순 없었다.
“…새로 태어난 기분이야.”
피를 잔뜩 뒤집어쓴 김강희였다. 그는 우리를 바라보며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었지만 우리는 모두 무기를 든 채로 그와 대치했다.
“창조자와 한패가 아니었나?”
“맞네. 동맹 관계였고, 제법 오래 유지하고 있었지.”
“그러면 왜…….”
“왜 죽였냐고?”
김강희는 제 가슴에 손을 올리더니 곧 새카만 보석을 꺼냈다. 그러고는 씩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죽인 게 아니야. 내가 그를 계승한 거지.”
“……….”
“어차피 내가 창조자의 자리에 올라가게 될 테니 조금 빨리 건네받은 것일 뿐일세.”
김강희는 창조자의 힘을 나눠 받고 있었다. 아마 우리가 이곳에서 고군분투하는 사이에 그의 힘을 대부분 흡수했고, 결국 창조자까지 집어삼킨 것이란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치지직.
김강희의 모습이 시도 때도 없이 바뀌었다. 언제는 젊은 남자였다가 어린아이였다가, 다시 여자가 되었다가, 곧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저걸 인간이라고 볼 수 있나?’
그가 이미 절대자가 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미 인간의 범주에선 벗어났다는 것이다.
“신지의 헌터, 난 자네가 참 궁금했네.”
“……….”
“자네는 어쩌다 삶의 굴레 속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 거지? 같은 삶을 몇 번이나 반복했던 건가?”
―콰드득.
김강희의 등 뒤로 피 묻은 손들이 튀어나왔다. 그것들은 서로의 팔뚝을 잡더니 곧 원의 형태가 되어 후광인 양 김강희의 뒤로 둥실 떠올랐다.
“자네가 삶을 반복했다는 건 그동안 날 이긴 적이 없다는 것이겠군.”
“…그럴지도 모르지.”
“아하하.”
김강희가 입을 가린 채 웃자 그의 웃음소리가 정원 전체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게 과연 나의 패배일까?”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 ‘김강희’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
난 그쪽으로 한 걸음 성큼 다가가 말을 이어갔다.
“내 회귀로 인해 그 정신 나간 신세계 계획도 전부 물거품으로 돌아갔어. 네가 창조자가 되기도 전에 내가 널 다시 인간 김강희로 돌려 버렸으니까."
“……….”
“결판이 난 적 없는 승부야.”
미간이 구겨진 그를 향해 한마디 더 덧붙였다.
“아, 정확히는 내가 한 번 이겼어. 지옥도는 못 막았지만 널 죽이는 덴 성공했었으니까.”
―콰과과광!
공간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땅과 하늘의 위치가 바뀌고 화분들이 중력을 무시한 채 공중을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김강희는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네는 정말 재밌는 사람이야, 신지의 헌터!”
―콰그작!
김강희가 말을 마치자마자 그의 뒤에 있던 팔이 그를 지평선 너머로 끌고 갔다. 모습을 감춘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을 가득 메울 만큼 거대해진 김강희가 나타났다. 그는 지평선에 팔을 올려 머리를 기댄 채 인자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신이 되려 하는 인간, 그리고 그를 다시 끌어내리려는 인간. 두 집단의 마지막 전투가 이번에야말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