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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급 비명헌터-322화 (322/366)
  • 322화

    푸른 눈동자에서 뿜어내는 붉은 촉수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본능적인 불쾌감을 불러일으켰다.

    눈동자가 우주 공간을 부유하며 촉수를 휘두르는 동안 나는 구원자의 왼쪽 눈동자로 녀석을 살폈다.

    [‘신세계의 핵―발악’]

    [신세계를 건설하겠다는 파괴자의 발악]

    [*‘발악' 상태 유지 시 공격력이 대폭 상승하는 대신 방어력이 대폭 하락한다*]

    [*’체념' 상태 유지 시 회피력이 대폭 상승하는 대신 공격력이 대폭 하락한다*]

    ‘상황에 맞게 전투태세를 바꿔야겠네.’

    ―쿠궁.

    아더의 방패가 촉수를 한번 튕겨내자마자 바로 바스라졌다. 레일리가 몸을 움찔 떨며 놀라더니 곧 뒤로 움직여 녀석과 거리를 벌렸다.

    “한 번에 깨진 적은 없었는데.”

    “발악 상태라서 그럴 거야.”

    “발악?”

    레일리가 내 쪽으로 고개를 들며 물었다. 난 신세계의 핵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자아를 입가로 가져왔다.

    “저 녀석한텐 발악과 체념, 총 두 가지 상태가 있어.”

    ―콰광!!

    녀석의 촉수가 세빈이가 있던 곳을 내리찍었다. 땅이 움푹 파이다 못해 반경 5m 정도에 커다란 금이 갔다.

    ―또각.

    세빈이가 유유히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을 확인한 후에 곧바로 말을 이었다.

    “보다시피 발악 상태일 땐 공격력이 올라가고 방어력이 떨어져. 그리고 체념 상태에선 회피력이 상승하고, 공격력이 떨어지지.”

    “공격해야 할 타이밍엔 저희도 녀석의 공격을 조심해야 하는군요.”

    센이 광휘로 촉수를 태워버린 후 날아오는 잔해를 검으로 갈랐다.

    [창조가 존재하기 위해선 파괴가 선행돼야 합니다.]

    [파괴자가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 마지막 발악을 합니다.]

    [현재 체력 : 973,551]

    ―콰과과광!!

    푸른 눈동자에서 사람만 한 얼음덩어리가 떨어졌다. 끝이 날카롭게 갈려 있는 탓에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을 입을 것이 뻔했다.

    ‘그래도 우리 중에선 레일리가 제일 방어력이 좋으니까, 특성을 좀 활용할까.’

    업적 ‘구원자의 가호 아래’를 열어 레일리의 특성을 활성화했고 방어력도 최대치로 올렸다.

    “레일리, 네 방어력을 올리고 몬스터의 눈에 잘 띄게 해놨어. 발악 상태가 끝날 때까지 주의를 끌어줘.”

    “알았다. 다들 저놈의 뒤를 잘 노리도록.”

    ―쿵!

    레일리가 아더의 방패를 높이 들며 신세계의 핵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의 특성 덕에 사방으로 튀던 촉수들이 일제히 레일리를 향했고, 우리는 더욱 공격적으로 스킬을 퍼붓기 시작했다.

    세빈이의 그림자가 푸른 눈동자에 달라붙어 바닥으로 처박았다. 동시에 밑에서 대기하고 있던 센이 검을 아래에서 위로 휘둘러 상처를 입혔다. 상처 틈으로 광휘가 쏟아져 상처를 한 번 더 벌렸다.

    [현재 체력 : 946,658]

    방어력이 떨어져 우리들의 공격 하나하나가 녀석에게 치명상을 주었다. 예상한 것보다 빠르게 체력이 닳자 신세계의 핵은 더욱 맹렬하게 발악했다.

    ―후웅.

    녀석을 둘러싸고 있던 고리가 그림자를 뜯어내고 공중으로 높이 올라갔다. 내가 서 있는 곳까지 붕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퍼버버벙!

    허공을 떠다니던 눈물이 사방으로 퍼지더니 곧 폭발을 일으켰다.

    “아아악!”

    불규칙적으로 터진 폭발에 결국 다리를 내줬다. 허벅지를 깊게 파고든 열기와 통증이 다리의 감각을 마비시키기 무섭게 내 주위로 폭발이 몇 번 더 일어났다. 내 몸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탕!!

    낮말을 듣는 새로 착지를 할 새도 없이 일단 녀석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폭발을 뚫고 날아간 탄환이 핵의 한가운데를 관통했다.

    [현재 체력 : 899,914]

    푸른 눈동자가 고통에 좌우로 흔들리더니 곧 붉은 촉수를 뽑아내며 계속해서 공격을 이어갔다.

    ―탁!

    “커흑……!”

    세빈이가 내 몸을 받아내자마자 전신에 고통이 퍼졌다. 신경이 망가졌는지 다리엔 아무런 감각이 들지 않았다. 통증과 비정상적인 무감각이 뒤섞여 내가 지금 아픈 건지도 모를 상태가 되었다.

    ―쾅!!

    “이봐, 지의! 정신차려!”

    레일리의 목소리가 귀를 뚫고 들어왔다. 눈동자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니 레일리가 아더의 방패로 촉수를 막고 있었다.

    내 업적으로 방어력이 올라간 방패는 수십 개의 촉수에도 끄덕없었다. 난 천천히 시선을 내려 이번엔 내 몸을 살폈다.

    ‘젠장할…….’

    죽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처참한 몸이었다. 감각이 사라졌던 다리는 반쯤 날아가 너덜너덜해져 있었고, 아이테르의 로브는 원래의 색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피범벅이 된 상태였다.

    자연 치유를 기다리는 것보다 내 몸의 피가 모두 빠져나가 죽는 것이 훨씬 빠를 것 같았다. 이제 시야까지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으니까.

    ‘스틱스 강.’

    ―우드득.

    “어, 헉……!”

    완벽하게 치료된 순간의 감각이 전신에 남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덜덜 떨렸다. 그러자 세빈이가 내 몸을 제 쪽으로 더욱 끌어안았고,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이 떨림이 잦아들길 기다렸다.

    잠시 후 고통이 잠잠해지며 눈앞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온몸의 뼈를 새로 갈아 끼운 듯한 기분과 함께 고개를 돌리자 세빈이의 새카만 눈과 시선이 맞닿았다. 한껏 구겨져 있던 세빈이의 미간이 서서히 펴졌고 안심한 듯 숨을 길게 내쉬었다.

    ―툭.

    그러고는 내 어깨에 제 얼굴을 묻었다.

    “제발 치료할 거면 빨리 해줘… 어떻게 되는 줄 알았어.”

    “미안.”

    구불거리는 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세빈이가 몸을 움찔 떨더니 날 천천히 내려 주었다.

    ―콰광!

    그와 동시에 아더의 방패가 무너졌다. 녀석이 바닥을 따라 횡으로 촉수를 휘두르며 순식간에 대열을 헤집었다.

    공중엔 폭발을 일으키는 물방울, 지면은 촉수, 무엇하나 경계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쾅!!

    쉴드를 공중을 향해 쏘자 물방울에 닿은 쉴드가 가차 없이 터져 나갔다. 하미준 헌터가 카렌의 함정을 전부 파훼했던 걸 떠올리며 폭발 물방울부터 제거했다.

    [현재 체력 : 857,710]

    그러자 오히려 제 폭발에 휘말린 신세계의 핵이 공격을 입기 시작했다.

    “레일리, 방어 부탁해!”

    “알겠다!”

    ―쾅!!

    물방울을 어느 정도 제거하자마자 소리치자 레일리가 내 바로 앞에 서서 아더의 방패를 두껍게 세웠다.

    ―끼리릭.

    나는 자아를 바닥에 두고 박격포로 형태를 바꿨다. 신세계의 핵이 다시 한번 우리를 향해 촉수를 뱉어내기 전에 조립이 끝났고 자아의 몸체가 가볍게 진동하며 발포를 준비했다.

    ―퍼버버벙!!

    포탄이 아더의 방패를 뚫고 신세계의 핵을 향해 날아갔다. 핵의 주위를 감싼 고리까지 깨트리며 날아간 포탄은 푸른 눈동자에 닿자마자 자신이 터트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터트리며 녀석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현재 체력 : 758,472]

    그리고 효과는 확실했다. 순식간에 10만에 가까운 체력이 닳았고 쉴새 없이 움직이던 푸른 눈동자도 방금 공격으로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압도적인 힘 앞에 무력감을 느끼는 건 파괴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신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야망을 접으며 잠시 체념합니다.]

    [현재 체력 : 758,472]

    ―치지직.

    녀석의 몸이 반투명해지더니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흡!”

    ―촤아악.

    센이 높이 뛰어올라 녀석의 몸을 위에서 아래로 빠르게 갈랐다. 하지만 물을 베듯 잠깐 형체가 흐트러졌다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공격이 통하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네요. 이게 체념 상태라는 거죠?”

    “네. 그런 것 같아요.”

    센에게 대답하며 녀석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하얀 궤적과 함께 날아간 탄환은 신세계의 핵을 관통하는가 싶더니 곧 모습을 감추는 바람에 허무하게 공기만 진동시키고 사라졌다.

    [현재 체력 : 754,388]

    ‘확실히 제대로 닿지 않는군.’

    아까에 비해서 체력이 줄어드는 속도가 현저하게 더뎠다. 우리를 향해 계속해서 촉수를 휘두르긴 했지만 아까처럼 땅을 파고들거나 헤집어 놓지 못하고, 작은 흠만 만들 뿐이었다.

    서로에게 치명타를 주지 못하는 답답한 전투가 계속 이어졌다. 세빈이의 그림자가 녀석을 옭아매고 바닥으로 끌어내리면 광휘와 내 탄환이 그 푸른 눈동자 위로 쏟아졌다.

    ―콰과과광!!

    녀석이 일어나지 못하자 나는 다시 한번 박격포를 썼다. 신세계의 핵은 포탄을 스르륵 통과시키며 제 몸에 잠깐 생겼던 구멍을 다시 메우기 시작했지만 그럴 틈도 없이 세빈이가 녀석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예 녀석의 몸에 검을 꽂은 채로 무게를 실었고, 그러자 녀석의 몸에 세로로 길게 찢어진 상처가 났다.

    [현재 체력 : 725,919]

    “지긋지긋하군!”

    ―쾅!!

    세빈이가 착지하자마자 이번엔 레일리가 화풀이를 하듯 메이스로 촉수를 마구 내리쳤다. 촉수란 촉수는 죄다 끊어낼 기세로 공격을 퍼붓자 적게나마 체력이 닳았다.

    센의 광휘가 녀석의 바로 위에 생기더니 곧 벼락이 내리꽂히듯 빛줄기가 녀석을 관통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가 아니라면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인류의 번영과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파괴자는 의지를 다집니다.]

    [현재 체력 : 699,592]

    ―투쾅!

    공격하는 둥 마는 둥 하던 촉수가 일제히 땅속을 파고들었다. 얼마 안 있어 용암처럼 다시 치솟아, 지면 전체를 헤집어 놓았다. 세빈이는 무아를 사용하며 잠시 모습을 숨겼고 레일리과 센은 재빨리 양쪽으로 흩어졌다.

    ―콰드득.

    ‘뭐지……?’

    다시 발악 상태로 바뀐 것 같긴 한데 뭔가 달랐다. 푸른 눈동자를 감싸고 있던 고리가 일직선으로 펴지기 시작하더니 몸체의 뒤쪽에 붙었다. 곧이어 그것의 위로 깃털이 붙어 거대한 날개의 형태가 되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구원자의 왼쪽 눈동자로 형태가 변한 신세계의 핵을 바라보았다.

    ['신세계의 핵―발악’]

    [신세계를 건설하겠다는 파괴자의 발악]

    [*'발악' 상태 유지 시 공격력이 대폭 상승하는 대신 방어력이 대폭 하락한다*]

    [*'체념' 상태 유지 시 회피력이 대폭 상승하는 대신 공격력이 대폭 하락한다*]

    [*변화의 바람에 닿은 생명체는 신세계의 핵―발악에게 선동된다*]

    갑자기 생겨난 날개와 변화의 바람, 그리고 선동. 정확한 건 잘 모르겠지만 딱 하나만큼은 정확히 알 것 같았다.

    “저 날개 바람에 맞으면 안………!”

    ―휘이이잉!

    내 외침이 제대로 전달되기도 전에 신세계의 핵이 날갯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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