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화
“비스!”
내가 소리치자 녹두가 배리어를 열어 사람들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레일리가 비스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눕힌 후 인벤토리에서 급하게 약병을 꺼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네가 보고 있는 대로다. 이 녀석의 거죽을 뒤집어쓴 몬스터와 싸우다 부상을 입었지.”
레일리가 헝겊에 약을 흠뻑 적셔 비스의 이마와 목 뒤를 눌렀다. 기절해 있었지만 신경이 반응한 듯 몸을 파르르 떨었다.
비스의 상처도 조슈아만큼이나 심각했다. 전신이 피로 뒤덮여 있어 정확히 어디를 어떻게 다친 건지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목과 머리 쪽 상처가 그나마 두드러지게 보였다. 창과 낫으로 이리저리 난도질을 당한 것 같았다.
“몬스터는?”
“네 친구와 센이 상대하고 있다. ‘희생’ 쪽은 이미 처리가 끝난 것 같더군.”
남은 몬스터는 결국 ‘비탄’ 하나뿐이었다. 클리어 속도 자체는 예상했던 것보다 빨랐지만 벌써 둘이나 큰 부상을 입었다. 아직 마지막 단계가 남아 있고 치유계 전문 헌터가 없는 상황, 잘 풀린다고 생각했던 상황이 순식간에 악화됐다.
마음 같아선 아이테르의 로브를 입히고 스틱스강이라도 쓰고 싶었다. 될 리가 없는 일을 계속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걸 보니 나도 정신적으로 많이 지친 모양이었다.
[파괴자는 만족스러웠습니다.]
[사도들의 몸에 이식된 창조자의 파편은 그들의 힘을 양분 삼아 조용히 힘을 키웠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파괴자는 사도들이 변절할 것을 대비하여 그 파편 안에 새로운 던전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의 예술에 대한 조예가 그것을 만드는 데 한몫했습니다.]
“예술가가 모두 괴짜라곤 할 수 없지만, 이 자식은 엄청난 괴짜인가 보군.”
“…역겨워.”
김강희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사람들을 희생시키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의 잔혹함과 인간답지 않은 모습에 역겨움과 서늘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쿠구궁.
센과 세빈이가 비탄을 해치웠는지 우리를 둘러싼 해변의 풍경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곧 화병이 있던 새하얀 공간으로 바뀌었다.
“조슈아 헌터……!”
그때 센과 세빈이가 배리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조슈아의 부상 사실을 몰랐던 센이 눈을 크게 떴고 인벤토리에서 붕대를 꺼내 능숙하게 상처 부위를 감았다.
지금 보니 센도 무리한 것처럼 보였다. 털이 달린 겉옷은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고 걷어 올린 팔엔 멍이 들거나 칼에 베인 듯한 흉터가 가득했다.
젊은 헌터들도 이렇게 기진맥진인 상태이니 센도 힘들 것이다. 그저 얼굴로 티를 안 냈을 뿐이다.
“센 씨, 이쪽도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
그는 조슈아의 복부에 붕대를 단단히 묶은 후 비스에게로 다가왔다. 비스의 상처를 보자마자 경악하더니 곧 소독약을 바르며 응급 처치를 시작했다.
비스의 의식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지만 배리어의 치유 효과와 센의 치료 덕에 조금씩 피가 멎고 있었다.
“큰일이군. 갑자기 둘이나 당해 버렸으니.”
“지의야, 배리어 치유 효과 얼마나 지속돼?”
“내가 배리어에 있는 동안에는 무조건 유지돼.”
―사아아.
빛무리가 비스의 상처에 스며들자 붕대 밖으로 축축하게 배어 나오던 피가 서서히 굳었다.
고개를 들어 조슈아 쪽을 바라보자, 그는 자기 치유 스킬까지 쓰고 있어 일단 웬만한 출혈은 막은 것 같았다.
“그럼 신지의 헌터가 이곳에 남는 게 좋을까요?”
“아무래도 그게 나을 것 같…….”
“됐, 어…….”
“비스!”
그때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비스가 입을 열었다. 고개를 내리자 비스가 눈을 감은 채로 입만 겨우 움직여서 말을 이어갔다.
“싸, 울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이라도 더…….”
“알겠어요. 말 그만하고 안정부터 취하세요.”
센이 그의 말을 끊은 후, 검붉은 피로 물든 붕대를 갈았다. 다행히 출혈은 완전히 멎은 것 같았다.
“한 10분 정도 쉬었다 다음으로 이동하죠. 그 정도면 조슈아도 몸을 움직일 정도는 될 거예요. 그럼 조슈아가 비스를 치유할 수도 있을 거고요.”
“그래도 부상자들만 남길 순 없으니 저희 중 한 사람은 남는 것 어떤가요?”
“아, 그건 동의한다.”
“저도요.”
센의 제안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의 얼굴을 슬쩍 보며 머릿속으로 후보를 추리다 곧 한 사람으로 시선이 꽂혔다.
시간조차도 막을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방공호를 열 수 있는 사람인 최민 헌터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남겠습니다.”
모두의 시선을 느꼈는지 최민 헌터가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고맙다는 말을 건넨 후 비스와 조슈아의 상태를 계속해서 살폈다.
시간이 좀 흐르자 조슈아가 상체를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됐다. 불안정하던 비스의 호흡도 원래의 속도를 되찾았고 벌어진 자상들의 위로 새살이 천천히 돋아나기 시작했다.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갈 준비를 하니 센이 인벤토리에 있던 온갖 약품과 기력 회복제를 한가득 꺼내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최민 헌터에게 각각 언제 쓰는 약인지 자세히 설명했다.
“그럼 잘 부탁드려요. 최민 헌터.”
“다치지 마세요.”
―끼이익.
그에게 인사를 건넨 후 마지막 문을 열었다.
* * *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건 눈을 뜰 수도 없을 만큼 밝은 빛이었다. 빛으로부터 등을 돌린 채로 살짝 눈을 떴고 눈앞에 뜬 상태창을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모든 것이 파괴자의 뜻대로 흘러가진 않았습니다.]
―파아앗.
빛이 순식간에 사그라들더니 주위가 어두컴컴한 침실 내부로 바뀌었다. 뒤를 돌자 커다란 침대에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김강희의 모습이 보였다.
“커헉!”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가 갑자기 숨을 토하며 괴로워했고 몸을 웅크린 채로 한참 기침을 했다.
“허억, 헉, 허억………!”
김강희가 몸을 일으키자 그의 코와 입이 검붉은 피로 범벅된 것이 보였다. 단 몇 초 만에 벌어진 일에 잠깐 벙쪘고, 곧이어 상태창이 다시 나타났다.
[창조자의 힘으로 멈춰 놓았던 세포의 변이가 다시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파괴자의 몸은 다시 그의 통제 범위에서 벗어난 겁니다.]
김강희는 나보다도 더 패닉이 된 채 얼굴을 더듬었고 허겁지겁 욕실을 향해 달려갔다.
“왜, 왜……?”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며 물을 틀었다. 세면대 밖으로 물이 튈 정도로 거칠게 세수를 했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기침이 터져 세면대 위로 자꾸만 피가 쏟아졌다.
[파괴자는 창조자의 힘에 문제가 생겼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습니다.]
[이 세상의 신이나 마찬가지인 절대자의 힘, 그 힘을 위협하는 새로운 힘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쉬이익.
그가 천명을 사용했다. 푸른 마법진이 신비롭게 반짝거리자 김강희의 눈이 커다래졌고 곧 한 손으로 세면대를 강하게 내리쳤다.
“강희야아~ 잠깐 괜찮…….”
그때 창조자가 나타나더니 김강희의 모습을 보자마자 말을 뚝 멈췄다. 김강희는 피범벅이 된 얼굴과 대비되는 푸른 눈동자로 그를 서늘하게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야?”
“닥쳐. 그건 내가 더 알고 싶으니까.”
“설마…….”
“윽!”
―파지직.
창조자가 김강희의 가슴에 손을 얹자마자 새카만 보석이 튀어나왔다. 보석은 창조자가 김강희에게 처음 보여줬을 때보다 물러 있었고, 군데군데 깨져 파편이 후두둑 떨어졌다.
“미래를 봤어. 처음 보는 젊은이가 나를 누르고 지옥도를 막았더군.”
“……….”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일이야. 당장 그 자식 찾아내서 죽여야 해.”
김강희가 이야기하는 젊은이가 나라는 건 단번에 눈치챘다. 김강희가 숨을 몰아쉬며 창조자를 노려보자,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게이트를 모으다가 잠깐 균열이 생겼거든. 근데 그사이에 사람이 하나 떨어졌어.”
“사람이? 너 도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근데 그 사람이 각성했어.”
김강희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는 세면대에 한쪽 손을 지탱하고 선 채, 다른 한 손으론 입을 가렸다.
[파괴자는 자신의 필멸을 알아챘습니다.]
[창조자의 실수로 각성한 자가 자신을 죽이고 세상의 구원자가 될 것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지옥도를 열려면 아직 일 년 반이나 남았어. 그 전에 죽이거나 우리 편으로 끌어와야 해.”
김강희가 뭐에 홀린 양 다 쉰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창조자 쪽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네가 책임지고 그 자식 처리해. 너도 내게 창조자 자리를 얼른 주고 쉬고 싶잖아.”
“일단 되는 데까진 해 볼게.”
“아니, 확실하게 해.”
―탁.
김강희가 창조자의 팔을 잡고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어중간하게 했다간 분명히 당할 테니까.”
―치이이익.
창조자와 김강희가 그 자리에서 녹아내리더니 침실의 풍경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상황은 파괴자에게 불리하게 흘러갔습니다.]
[사도들을 구원자에게 빼앗겼고 창조자의 힘이 약해져 지옥도의 파괴력은 날이 갈수록 바닥을 쳤습니다.]
[이 세상은 그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쨍그랑!
일그러지던 풍경이 산산조각 나고 광활한 우주가 펼쳐졌다. 그 우주의 한가운데엔 김강희의 푸른 눈동자만이 고리에 둘러싸인 채 둥둥 떠 있었다.
그것은 꼭 우주 어딘가에 존재하는 행성 같은 생김새였다.
[신세계의 핵―발악]
[신세계를 건설하겠다는 파괴자의 발악]
[현재 체력 : 1,000,000]
우리가 해치워야 하는 마지막 신세계의 핵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 전투가 피날레가 될 것이라는 걸 보여주듯 체력도 많았다.
“슬슬 끝이 보이는 것 같군요.”
그때 센이 중얼거렸다. 그는 아마테라스를 시전한 채 검을 높이 들었고 당장이라도 핵을 향해 튀어 나갈 것처럼 자세를 낮췄다.
‘그래, 이젠 정말 끝이 보인다.’
센의 말에 미소로 대꾸했다. 마지막 신세계의 핵, 이것만 해치우면 김강희의 일그러진 야욕을 저지할 수 있다. 지옥도도 소멸시킬 수 있고,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파바박!
핵에서 새빨간 촉수가 뿜어져 나왔다. 우리의 목을 노린 촉수를 피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탄환 한 발에 촉수가 찢겨 나가고 흑백의 검기가 그것들의 뿌리를 잘라냈다. 포기하지 않고 또다시 달려든 촉수는 아더의 방패에 의해 막혔다.
[현재 체력 : 998,381]
마지막 전투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