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화
―달칵.
‘이게 마지막 기력 회복제네.’
네 번째 문 안으로 들어가기 전 딱 10분의 휴식 시간을 갖기로 했다. 인벤토리에 있던 기력 회복제 뚜껑을 열어 입에 털어 넣자 혀의 수분을 모두 빨아들이는 듯한 쓴맛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이 맛에 죽어도 적응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지옥도가 열리고 나서 세 병도 더 넘게 마셨더니 이젠 물 없이도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이젠 진짜로 끝이 보이는 것 같네요.”
그때 조슈아가 기지개를 켜며 내게 다가왔다. 그의 얼굴도 피로에 절여져 있었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는 듯 살짝 미소 지었다.
“그러게. 아, 벤자민은 잘 지내?”
“그럼요. 유치원에 보냈는데 생각보다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조슈아는 아예 핸드폰까지 꺼내 자신의 배경 화면을 보여 주었다. 직접 그린 그림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벤자민의 사진이었다.
“귀엽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 보낼 걸 그랬어요.”
조슈아의 얼굴에 잠깐 쓸쓸한 미소가 스쳤다. 벤자민을 속여 왔던 시간이 여전히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앞으로 같이 보낼 시간이 더 많잖아. 얼른 해결하고 돌아가자.”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조슈아 체스터’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의지]
조슈아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지의야, 가자.”
“알겠어.”
그때 세빈이가 나를 향해 손짓했다. 다른 사람들도 준비가 다 됐는지 네 번째 문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끼이익
문을 활짝 열고 안으로 발을 들이자 이번에도 우주 같은 공간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아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공간에 수십 개의 게이트가 날아다니고 있다는 점이었다.
“저기 있군.”
비스가 손으로 가리킨 곳에 김강희가 있었고, 그의 옆엔 창조자가 태평하게 누운 채 그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강희는 손으로 자신의 앞에 있는 지옥도에 손을 얹으며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내가 모아준 게이트들 어때애? 마음에 들어?”
“응. 빼돌릴 수 있는 대로 전부 빼돌려. 여기에 이어붙여야 하니까.”
김강희가 싱긋 웃자 창조자의 입꼬리도 위로 올라갔다. 제 파트너의 태도가 마음에 든 눈치였다.
“그러니까 이게 뭐라고 했지이?”
“지옥도.”
“이름 잘 지었네에. 이게 세상에 떨어지면 정말로 지옥이 될 테니까아.”
김강희가 손짓할 때마다 허공을 떠다니던 게이트가 지옥도에 덕지덕지 붙었다. 울퉁불퉁한 표면 주위로 검푸른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흠…….”
“무슨 문제라도 있어어?”
“이걸로 충분하지 않을 것 같아서.”
김강희는 만족스럽지 않은지 지옥도에 기댄 채 생각에 잠겼다. 그가 눈을 감고 한참 고민하다 이내 눈을 크게 떴고 창조자를 향해 성큼 다가갔다.
“몬스터들의 힘을 조금 키웠으면 하는데. 괜찮은 방법 없어?”
“글쎄에…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 같은데…….”
“좀 떠올려 봐. 게이트 내부의 균형을 망가트리거나 경계를 끌어오거나 하는 방법으로.”
“으으음…….”
―쿠구궁.
그때 창조자가 몸을 일으켰다. 거대한 몸이 움직이자 공간 전체가 흔들렸고 맞물려 있던 게이트 틈새로 돌가루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내 힘을 쓰면 될 것 같아아. 그때 내가 보여준 그 힘.”
“그럼 빌려줘.”
“근데 안 돼애…….”
“왜?”
―파지직.
창조자의 손에 거대한 보석이 들렸다. 보기만 해도 기분 나쁜 기운이 보석을 완전히 감싸고 있었다.
“이걸 바로 지옥도에 붙였다간 힘을 견디지 못하고 지금 바로 세상에 떨어질 거야아.”
“하아, 그럼 안 되지. 사람들이 그런 개죽음을 당하는 걸 원치 않아.”
“하.”
김강희의 말을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졌다.
‘치열하게 싸우는 건 아름답고, 개죽음은 싫다라…….’
그는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모습을 예술 작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감상할 만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아주 대단한 예술가 납셨어.
내 심기가 뒤틀리는 동안에도 김강희와 창조자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거 잠깐 나눌 수도 있어?”
“이걸?”
“응.”
“가능은 하지이. 근데 어떻게 하게?”
김강희가 조용히 미소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우리도 좀 동료가 필요할 것 같아서.”
“설마 이 힘을 다른 사람한테 나눠 주겠다는 거야?”
“빌려주는 거지.”
그러고 보니 네 번째 화병에 둔 쪽지는 그가 사도들을 포섭했다는 내용이었다. 그가 말하는 동료는 사도임에 틀림없었다.
고개를 살짝 들어 주위를 살폈다. 조슈아와 비스가 김강희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고, 반면 센과 레일리는 차분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간절해 보이는 각성자를 찾아가서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고 네 파편을 간직하게 만들어. 아, 계약의 형태가 좋겠네. 언제라도 네가 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
“그리고 지옥도를 여는 시점에 그들을 소환해서 다시 파편을 뺏고 그들을 죽여.”
“…역시 강희 넌 제정신이 아니야아.”
―쾅!
비스가 들고 있던 낫으로 땅을 강하게 내리쳤다.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절박함을 이용하고, 목숨마저 끝내려 했던 김강희의 악랄함에 완전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괜찮다, 비스. 너는 지금 여기에 있지 않느냐.”
비스의 등 뒤에서 나타난 칼리가 그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달랬다. 하지만 비스의 검은 눈동자는 여전히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창조자는 보석을 꿀꺽 삼킨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떠나려는 창조자를 향해 김강희가 말을 덧붙였다.
“아, 웬만하면 S급으로 골라. 살려두면 지옥도를 상대할 핵심 전력이 될 테니까.”
“알겠어, 알겠어~”
―파아앗.
검은 풍경이 김강희와 함께 사라지더니 곧 파도가 치는 해변으로 바뀌었다.
하늘은 주홍빛 노을로 물들여져 있었고 이따금 바다향을 가득 머금은 바람이 얼굴을 쓸었다.
“여긴…….”
“오랜만이군.”
조슈아와 레일리가 주위를 둘러보며 조금 놀란 티를 냈다. 사도였던 네 사람과 내가 모를 리가 없는 장소였다. 그야 여기는 창조자가 사도들을 불러내는 장소였으니까.
―치지직.
창조자의 앞에 네 명의 인영이 동시에 생겨났다. 실루엣만으로도 그들이 이제는 내 동료가 된 구 사도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창조자는 그들에게 파편을 내밀며 이야기했다.
“네가 원하는 걸 이뤄줄게. 대신 이 부적을 보호해 줘.”
얄팍한 거짓말에 속은 사도들이 창조자의 파편을 손에 쥐었다. 그러자 새카맸던 실루엣에 색이 입혀지더니 곧 실제와 똑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딱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검은 스파크가 그들을 에워싸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설마 저것들과 싸워야 하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많아 보입니다.”
“불쾌하군.”
최민 헌터가 대답하자 비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두 손으로 낫을 더욱 꽉 쥐었다.
‘진짜 저 네 명을 상대해야 하면 엄청 큰일인데.’
S급 몬스터도 아니고 S급 헌터다. 아무리 우리의 머릿수가 저쪽의 거의 두 배라고 해도 손쉽게 해치울 순 없을 것이다.
―쿠구궁.
한창 긴장한 채로 자아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얹을 때쯤, 모래사장 위로 파도가 부서졌다. 새하얀 거품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더니 곧 거대한 탑의 형태가 됐고 그 속에서 검은 스파크가 튀어나왔다.
촉수처럼 길게 뻗은 스파크는 곧 이 공간 속의 사도들과 연결되었다. 신세계의 핵과 연결된 미등록 각성자와 같은 모습이었다.
―치지직.
녀석들의 머리 위에 설명창이 나타났다.
[신세계의 핵―오만]
[현재 체력 : 700,000]
[신세계의 핵―표리부동]
[현재 체력 : 350,000]
[신세계의 핵―비탄]
[현재 체력 : 500,000]
[신세계의 핵―희생]
[현재 체력 : 400,000]
사도들이 갖고 있던 파편의 이름들이었다. 레일리의 오만, 조슈아의 표리부동, 비스의 비탄, 그리고 센의 희생. 그들은 감정 없는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며 무기를 들었다.
―콰과광!!
설명창을 겨우 다 읽자마자 용암 폭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시뻘건 액체를 피하기 무섭게 이번엔 ‘광휘’가 지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노렸다.
―콰그작!
그때 검은 그림자가 ‘오만’의 목을 잡아 바다 쪽으로 던져 버렸고, 동시에 레일리가 비탄을 모래사장 속으로 묻어 버렸다. 상황을 파악할 아주 짧은 틈이 만들어졌다.
상대는 넷, 우리는 일곱. 일단 2인 1조로 상대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관건은 어떤 조합으로 상대할지다.
나는 구원자의 왼쪽 눈동자로 헌터들을 빠르게 훑은 후 곧바로 입을 열었다.
“나랑 세빈이가 오만을 상대할게. 아더의 방패에 공격이 반사돼도 내 스킬은 영향을 못 주고, 세빈이는 피할 능력이 있으니까.”
“알겠다.”
“최민 헌터는 불 속성 스킬에 면역이 높으니까 표리부동을 맡아 주세요. 조슈아 너도.”
“알겠습니다.”
‘남은 건 센, 비스, 그리고 레일리인데…….’
아직 전투에 나서지 않고 우리를 가만히 지켜보는 희생과 남은 세 사람을 번갈아 보다, 곧 판단을 내렸다.
“비스랑 센 씨는 비탄, 그리고 레일리 네가 희생을 맡아줘.”
“레일리 씨 혼자서 괜찮을까요?”
“날 너무 과소평가 하는 것 아닌가, 체스터?”
“걱정을 해 드려도 이런 취급이니 원…….”
―쾅!
그때 바다에 빠졌던 오만이 다시 해변으로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흠뻑 젖어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지만, 황금색 눈은 아까보다 더욱 매서워 당장이라도 우리의 숨통을 끊어놓을 기세였다.
“제 스킬에 제한 시간이 있어서 그럴 겁니다. 전투가 장기전으로 돌입한다면 레일리 씨가 압도적으로 유리하겠죠. 그쵸, 신지의 헌터?”
“맞아요.”
센이 내 의도를 정확히 알아차렸다. 그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인 후 난 ‘오만’ 쪽으로 발을 옮겼고 세빈이도 검을 뽑아 들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먼저 정리되는 쪽이 레일리를 지원하러 가는 거야. 다들 알았지?”
“알겠다.”
“네!”
“알겠습니다.”
각기 다른 목소리로 든든한 대답이 돌아왔다.
―철컥.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오만’을 향해 자아를 겨눴고 그대로 녀석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난전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