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314화 (314/366)
  • 314화

    “시간 순으로?”

    “응.”

    세빈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 씨앗만 들어 있는 가장 왼쪽 화병을 손으로 가리켰다.

    “지금 이 화병들도 씨앗으로 시작해서 꽃이 지는 걸로 끝나잖아. 아무래도 시간 순으로 배치된 게 아닌가 싶어서.”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같은 문제가 아니라면 말이지.”

    “으음, 일리가 있네요.”

    ―달그락.

    조슈아가 들고 있던 일기들을 화병 옆에 내려놓은 후 그중 하나를 들어 보였다.

    “만약 그렇다면 일기를 다시 자세히 읽어야겠네요. 다들 와주시겠어요?”

    꽃봉오리가 꽂힌 화병 앞에 옹기종기 모여 저마다 일기를 들여다보았다. 난 최민 헌터와 함께 천에 쓰인 일기를 빠르게 훑었다.

    [그때 그가 찾아왔다. 세상을 바꾸고 싶지 않냐고 물었다.]

    [나는 당연히 수긍했다.]

    [불확실성이 제거된 세상, 누군가가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세상이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을 테니까.]

    [내 대답을 들은 그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그는 나를 별종이라고 부르더니 곧 자신의 후계로 삼았다.]

    “…신지의 헌터는 이 일기의 주인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때 최민 헌터가 물었다.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은데.’

    애초에 이 공간은 김강희의 아틀리에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일기의 주인으로 생각되는 건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김강희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최민 헌터는 고개를 끄덕이곤 다른 일기장을 가져가러 발을 옮겼다.

    ‘사람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싶은 사람이 왜 세상을 무너트리는 데 동조하는 거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무래도 그에게 직접 듣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탁.

    최민 헌터가 나무판과 나뭇잎 일기를 가져와 내게 내밀었다. 나는 나무판을 먼저 집은 후 읽어 내려갔다.

    [그는 하루빨리 내게 자신의 자리를 넘겨주고 싶었음에도 하는 짓은 게을렀다.]

    [이 세상에, 정확히는 각성자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핑계를 댔다.]

    [그래서 난 그에게 협력자들을 구하라고 했다.]

    [되도록 절박한 처지에 놓인 S급의 상급 각성자들로.]

    [소원을 들어준다고 제안하면 금방 넘어올 테니 말이다.]

    [지옥도가 만들어졌을 때 위협이 될 인물을 미리 포섭해놓고, 그것이 열렸을 때 그들을 제거하면 손쉽게 세상을 초기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도도 다 김강희의 머릿속에서 나온 발상이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가 인간처럼 느껴지지 않아서 등골이 서늘해졌다.

    ―사락.

    최민 헌터가 건네는 나뭇잎 일기를 혹여 찢어질까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받았다.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나의 선택으로 인해 발생할 수백, 수천 가지의 상황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런 내 바람을 들어주듯 미래를 예지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괴수들이 도사리는 세상이 됐지만 말이다.]

    ―툭.

    어느새 내 옆에 온 비스가 수첩을 내밀었다. 다른 일기보다 훨씬 일그러진 글씨체로 문장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일이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다.]

    [사도가 사라지고 지옥도는 부서지고 있다.]

    [내 계획은 완벽했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이래선 안 된다.]

    [이걸 그대로 두면 이 세상은 쇠락해 갈 것이다.]

    [내가 바로잡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 세상을 새로 구축할 것이다.]

    내가 처음 얻었던 것을 포함해 다섯 개의 일기를 전부 읽었다. 다시 중앙으로 모이자 센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일기, 아무래도 김강희 회장의 것 같은데 다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100% 맞겠지. 사도를 모으게 한 것도 이 녀석 짓인 게 믿기지 않는군.”

    비스가 혀를 차며 얼굴을 팍 구겼다. 옆에 있던 조슈아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요. 조금…….”

    “생각보다 더 정신이 나간 녀석인 것 같구나.”

    비스의 옆에 둥둥 떠 있던 칼리가 갑자기 말을 얹었다. 우리 모두의 생각과 정확히 일치했는지 다들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일반적인 사람이 할 수 있는 발상과 사고 흐름이 아니었다. 김강희와 직접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다.

    ‘애초에 공감할 마음도 없기도 했고.’

    딴 생각은 넣어두고 일단 눈앞의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럼 순서부터 맞춰보자. 일단 이 나뭇잎에 각성 얘기가 나왔으니까 이게 첫 번째일 것 같아.”

    “그 다음은 이 종이일 겁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센이 기다렸다는 듯 종이를 가리켰다. 모두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센이 말을 덧붙였다.

    “각성자 의무 등록을 두고 싸운 얘기인 것 같더군요. 김강희 회장이 각성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고 벌어진 일이라 시기적으로 이게 맞을 겁니다.”

    “이 종이에 있는 불확실성 내용이 천에 다시 나오는 걸 보니, 그럼 이게 세 번째가 되겠네요.”

    세빈이가 나뭇잎, 쪽지, 천을 차례로 배열하더니 뒤로 물러났다.

    “사도를 모집한 게 그다음일 테니 저 수첩이 자연스럽게 마지막으로 오겠군.”

    퍼즐을 맞추듯 일기들을 순서대로 늘어놓았다. 일기 앞에 있던 헌터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하다 이내 말없이 일기를 들고 화병 앞으로 이동했다.

    ―달그락.

    위치에 맞는 화병 앞에 일기장을 동시에 내려놓았다.

    ―쿠구구궁.

    “읏!”

    “조심해, 레일리!”

    그러자 곧바로 화병 뒤에서 새빨간 문이 튀어나왔다. 하필 문이 튀어나온 위치에 있던 레일리가 문과 함께 몸이 붕 떴지만 이내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치지직.

    [신세계, 그것은 파괴자가 오랫동안 염원한 것입니다.]

    똑같이 생긴 문 다섯 개와 함께 오랜만에 설명창이 나타났다. 문과 마찬가지로 붉은 글씨였다.

    [자신의 통제와 규칙 속에서 유지되는 세상을 위해 파괴자는 이번 세상을 초기화하려 합니다.]

    [불규칙적인 세상을 바꿔 가는 것보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궤변이로군.”

    비스가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그의 말대로 궤변이고 끔찍한 발상이었다.

    [파괴자는 신세계의 진정한 절대자가 되고자 합니다.]

    [파괴자의 이런 기행을 이해하려면, 우린 그를 더욱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끼이익.

    그때 씨앗이 든 화병 뒤의 문이 열렸다.

    “다른 선택지가 없을 것 같군요.”

    “…다들 들어가자.”

    내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곤 하나둘 씩 새카만 문 너머로 발을 들였다.

    ―타닥.

    몸이 빨려들어가는 감각과 함께 발이 땅에 닿자 따스한 공기가 폐부에 스몄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 회사 건물 안이었다.

    검은 인영들이 사무실을 돌아다니거나 자리에 앉아 일하고 있었다. 우리들의 존재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신지의 헌터, 저쪽.”

    “아.”

    조슈아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이사 김강희]

    독립된 방 안에 하미준 헌터의 나이쯤 되어 보이는 김강희가 심각한 얼굴로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저렇게 젊은 김강희는 처음 보네.”

    “그러게.”

    부드러운 눈매와 살짝 올라가 있는 입꼬리를 보니 그의 지금 얼굴이 얼핏 보이긴 했다. 그의 방을 향해 다가가는 동안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귀에 꽂혔다.

    “김 이사님 진짜 대단하긴 하다. 서른 넷인데.”

    “그니까. 근데 나 같아도 저렇게 일 잘하면 나이고 뭐고 승진 시켰을 듯. 이번에도 17억짜리 계약 따왔다며.”

    대화의 대부분은 김강희가 얼마나 유능한 사람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원래는 대기업 임원이었다고 했지.’

    김강희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심심찮게 나오던 시기가 있었다. 최초, 또는 최고라는 타이틀을 전부 거머쥐며 승승장구를 하다 갑자기 각성을 하고 협회를 설립했다고 한다.

    “그런데… 좀 이상한 사람 같지 않아?”

    “응? 어떤 면에서?”

    “뭐랄까, 전에 엘리베이터에서 만나서 얘기 몇 번 나눈 적 있었거든.”

    대화의 주제가 갑자기 바뀌었다.

    “날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았어.”

    “뭔 소리야, 그게?”

    “아니, 내가 이번 프로젝트 때문에 마음고생 좀 했잖아. 근데 그 얘기를 먼저 꺼내면서 갑자기 한 외주 업체랑 연결해 주더라니까?”

    “좋은 거잖아. 나였으면 감동 받았을 것 같은데.”

    “으, 이게 말로 하니까 설명이 잘 안 되는데… 아무튼 얘기하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좀 끌려가는 느낌이 들어.”

    “기분 탓이겠지. 잘 됐으니까 그냥 넘겨.”

    두 사람의 대화 소리는 김강희의 집무실 문고리를 잡자마자 사그라들었다.

    ―끼익.

    우리 8명이 전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공간이었다. 김강희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 그가 보고 있는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쭉 뺐다.

    ‘그 사원이 말한 게 기분 탓이 아니었네.’

    모니터엔 모든 사원의 정보와 맡은 프로젝트, 그리고 회의 시간에 몇 번 말을 했는지까지 전부 나와 있었다. 그는 모든 상황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기 위해 강박적일 정도로 대비를 해왔다.

    좋게 말하면 노력, 나쁘게 말하면 집착이었다.

    ―끼리릭.

    그때 김강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한번 기지개를 켠 후 다시 팔을 내렸다.

    ―콰과광!

    “큿, 다들 조심해!”

    그러더니 얼마 안 있어 바닥이 무너져내렸다. 사무실에 있던 모든 물건이 함께 쏟아졌고 그중 일부는 그대로 불타 없어졌다.

    ―쿵.

    “윽!”

    “지의야!”

    착지에 실패해 허리부터 떨어졌다. 전신을 울리는 고통을 겨우 이겨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전투가 벌어질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우주처럼 광활하게 뻗은 공간에 고고하게 내려오는 김강희를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철컥.

    자아를 손에 쥔 후 하늘에 떠 있는 김강희를 바라보자 그도 몸을 파르르 떨며 무언가를 준비했다.

    ―콰드득.

    그의 등 뒤에서 가시철조망이 튀어나왔다. 철조망이 그의 온몸을 뒤덮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가시로 둘러싸인 구체가 되었다.

    긴장감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치지직.

    [신세계의 핵―통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통제하고자 하는 힘]

    [현재 체력 : 300,000]

    우리가 부숴야 하는 첫 번째 핵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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