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화
이 공간이 김강희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과 회귀자의 업, 그리고 지옥도의 진짜 소멸 조건을 이야기하자 분위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모두의 심장 소리가 들릴 정도로 적막해진 정원은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발언력 상태창이 얼마나 많이 떴는지 모르겠다. 말 한마디 할 때마다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상태창 때문에 아직도 눈이 아팠다.
“…저,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도저히 없는 건가요?”
“없어. 나 스스로 해결해야 해.”
조슈아에게 대답하자 모두가 짧게 탄식했다. 이렇게 절망적인 분위기를 만들려고 한 소리는 아니었는데, 결과적으로 모두의 사기를 꺾어버렸다.
“…그럼 방법은 찾았나?”
레일리가 말을 뱉었다. 한 손으로 입을 가린 그가 황금색 눈동자를 이글거리며 나를 집어삼킬 것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절망이나 좌절보다 투지로 불타는 듯했다.
“시도해볼 만한 건 하나 있어.”
“성공할 가능성은?”
“…글쎄.”
“쳇.”
내 말에 비스가 혀를 찼다. 가라앉은 분위기는 쉽게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짝.
손뼉을 마주쳐 일단 주의부터 환기시켰다. 저마다 침울한 얼굴로 있다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애써 미소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동안 너희들의 업을 모두 제거해 왔어. 그러니까 내 것도 제거할 방법이 분명 있을 거야.”
“……”
“그러니까, 일단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모든 생명체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수용]
다들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여기서 끙끙 앓아봤자 나아지는 게 없다고 판단했겠지. 이곳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도시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을지 모른다.
“여기가 어딘지부터 이야기해야 할 것 같군.”
“아까 상태창에서 파괴자의 아틀리에라는 글자를 봤어.”
“그리고 신세계의 핵이라는 걸 찾아야 한다고도 했죠.”
센이 내 말을 거들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여긴 파괴자, 즉 김강희가 만들어낸 공간이다.
이 공간을 부수려면 신세계의 핵을 부숴야 했다.
“흩어져서 단서가 될 만한 것부터 찾죠. 30분 후에 다시 이곳으로 모이는 걸로 하고.”
세빈이가 핸드폰으로 시계를 한 번 본 후 말했다. 다들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사방으로 흩어졌고 나도 사람들이 가지 않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신지의 헌터.”
“네?”
그때 센이 내 팔을 잡았다. 잿빛 눈동자와 정면으로 시선이 맞닿자 그가 곧 입을 열었다.
“저는… 아니, 아마 여기 있는 모두가 신지의 헌터를 걱정하고 있을 겁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적절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센은 내 반응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갔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인간성의 진정한 소멸이라고 생각해요.”
“…혹시 제가 그렇게 보였나요?”
“네.”
‘단칼에 대답하네.’
이번엔 정말로 희생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기 위해서 과거의 나들을 전부 흡수했고 그들과 함께 ‘구원자’라는 족쇄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엔 실패에 대한 불안이 있었다. 만약 스스로에게 말의 씨앗을 심는 것도, 그리고 개화시켜서 카르마의 탄환을 발사하는 것도 실패하면 난 아마…….
―텁.
센이 자신의 손바닥 위에 내 손을 올리곤 다른 손으로 내 손등을 쓸어주었다. 따뜻한 온기와 함께 그가 살아온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감촉이 손등을 통해 전달됐다.
“전 신지의 헌터가 인간이길 바라요. 생존을 위해서 때로는 이기적인 선택을 하는 그런 인간이요.”
“……”
“그러니까 신지의 헌터가 희생한다는 선택지 자체를 없애줬으면 해요. 동료들한테 의지도 하고요.”
센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걸렸다. 입과 눈 주변에 자잘한 주름이 생겼고, 그 얼굴을 보니 왠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쓰렸다.
‘정말 어른이구나.’
센과 이야기를 나눠 본 사람이라면 아마 모두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상황 파악이 빠르고 다른 사람을 생각해줄 줄 알며 정신적인 지지를 주는 사람은 흔치 않았으니까.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역시 축복받은 일이었다. 그들을 실망하게 할 순 없으니 나는 머릿속에서 나의 희생이라는 선택지를 지웠다.
―찹.
센의 손등 위에 내 손을 포갰다.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나지막이 이야기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희생하지 않고, 반드시 살아남을게요.”
센은 고개를 끄덕이곤 손을 빼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들처럼 단서를 모으러 어딘가로 발을 옮겼다.
‘슬슬 나도 찾아볼까.’
다들 먼 곳부터 조사하러 간 건지 정작 이 공간을 탐색하는 사람은 없었다.
―바스락.
나는 이 작은 광장을 에워싼 수풀 울타리부터 살폈다. ‘신세계의 핵’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진 물건은 없는 것 같았다.
‘김강희가 원한 건 결국 새로운 세상이었던 건가?’
장미 덩굴 옆 테이블을 살펴보는 동안 머릿속에서 물음표가 떠올랐다.
도대체 그가 이 세상에 무슨 불만이 있어서 세상을 무너트리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펄럭.
그때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도화지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건…….’
낯이 익은 그림이었다. 연필로 가볍게 그린 듯한 풍경화였고 드넓은 꽃밭 가운데엔 누군가 누워 있었다.
“헉……!”
그 그림 속에 있는 인물이 센이라는 걸 알자마자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화가의 파편에서 센이 대역 인형으로 교체되기를 기다리던 모습이었다.
다음 장엔 희생하는 화가가 그려져 있었다. 녀석의 전신과 입은 옷, 그리고 장신구 하나하나가 자세하게 나와 있었다. 각 페이즈에서 어떤 공격을 하는지에 대한 설명도 빼곡했다.
‘설마 김강희가 모든 파편을 설계한 건가?’
사도들이 갖고 있던 것은 창조자의 파편이긴 했지만, 이 메모들만 보면 김강희가 전부 설계한 것 같았다.
이곳이 파괴자의 아틀리에라고 했으니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장소로 제격이기도 하고.
―탁.
종이를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다른 곳으로 발을 옮겼다.
장미로 뒤덮인 벽을 따라 밑으로 내려오자 이번엔 잘 깎인 조각들이 눈에 들어왔다. 불규칙적으로 놓인 조각들의 사이로 들어가 그것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희생, 오만, 비탄, 표리부동…….”
조각의 작품명엔 전부 파편의 보스 몬스터와 관련이 있는 단어가 들어가 있었다.
조각들을 손으로 더듬으며 뭔가 숨겨진 게 없는지 찾아보았다. 아쉽게도 차가운 석고상의 촉감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렇다면…….’
―쿠구구궁.
조각을 받치고 있던 작품 받침대를 양손으로 밀었다. 제법 무거워서 팔이 덜덜 떨렸다.
마지막으로 희생의 조각을 밀고 나서야 밑에 있던 작은 홈이 눈에 들어왔다. 홈 안에는 꼬깃꼬깃하게 접은 쪽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 자리에서 바로 펴서 확인하자 휘갈겨 쓴 짧은 일기가 나타났다.
[전쟁이라는 말이 잘 어울렸다. 각성자가 각성자를 향해 무기를 들고 각자의 목표를 위해 싸웠다.]
[나는 이 전쟁의 원인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생각한 원인은 ‘불확실성’이었다.]
[미래를 알 수 없다는 불안,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이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은 것이다.]
[그것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면 이 갈등이 줄어들 수 있을까?]
누군가의 회고록 같았다.
글자 위로 그은 두 줄의 선과 여기저기 적힌 물음표가 고뇌의 흔적을 보여주는 듯했다.
나는 쪽지를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은 후 다시 만나기로 한 장소로 발을 돌렸다.
* * *
“일기로군.”
모두가 갖고 온 걸 한 자리에 모아 보니 한 사람이 쓴 일기라는 것이 눈에 보였다. 수첩, 나무판, 쪽지, 천, 심지어 나뭇잎까지. 적혀 있는 위치는 제각각이었지만 똑같은 글씨체로 쓴 각기 다른 내용의 일기였다.
‘창조자의 파편보다 불친절한 공간이네.’
이 일기가 신세계의 핵일 리는 없다. 아마 핵을 찾기 위한 단서에 가까울 텐데 입장할 때 빼고는 설명창이 코빼기도 비치지 않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타닥.
그때 주위를 한 번 더 돌아보고 온 최민 헌터가 우리의 앞에 착지했다.
“뭐 발견한 거라도 있나?”
“여기서부터 500m쯤 떨어진 곳에 게이트가 생겼습니다.”
“게이트요?”
최민 헌터가 조슈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열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다음 장소인 것 같습니다.”
“여기서 모을 수 있는 정보를 다 모았다는 뜻인가…….”
비스가 중얼거리며 손으로 턱을 쓸었다.
―달그락.
조슈아가 일기들을 품에 안으며 순식간에 정리했다.
“일단 이건 제가 챙길게요.”
“고마워. 다들 가자.”
그는 내 말에 미소로 대답한 후 최민 헌터가 가리켰던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나도 그쪽으로 발을 옮겼다.
―탁.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게이트가 눈에 들어왔다.
검붉은 액체로 뒤덮인 게이트는 이따금 스파크를 내뿜으며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지옥도랑 닮았네요.”
“동감입니다.”
세빈이의 말대로 색만 다른 지옥도 같았다.
숨을 한번 들이마신 후 불길한 분위기를 풍기는 문을 쭉 밀어 열자 이번엔 새하얀 공간이 우릴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공간의 한가운데, 투명한 꽃병 다섯 개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이게 무슨 퀴즈쇼도 아니고, 피곤하게 하는군.”
“여긴 씨앗만 담겨 있고 그다음은 줄기, 봉오리…….”
“이쪽은 다 핀 꽃이랑 시든 꽃입니다.”
센이 고개를 쭉 빼 나와 레일리를 향해 이야기했다. 꽃이 피고 지는 과정을 보여주듯 화병 안에 있는 씨앗은 오른쪽으로 갈수록 점점 개화하다 마지막엔 완전히 시들어 있었다.
“옮길 수는 없나 보네.”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세빈이가 화분을 손으로 쥐며 중얼거렸다. 접착제로 붙인 것처럼 화병과 받침대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고, 아무리 흔들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화병을 움직이는 게 정답이 아니란 얘긴데…….’
이 화병이 아무런 의미 없이 놓인 건 아닐 테니 분명 쓸모는 있을 것이다.
“저희 일기 몇 개였죠?”
그때 센이 천천히 걸어오며 이야기했다.
“5개요.”
“화병 개수랑 똑같군요."
시계 초침 같은 게타 소리를 배경 음악 삼아 눈앞의 화병을 다시 바라보았다.
꽃이 자라는 과정을 보여주는 다섯 개의 화병과 다섯 개로 쪼개진 일기.
―또각.
센이 걸음을 멈추자 게타 소리도 사라졌고, 동시에 머릿속에 그럴싸한 가정이 떠올랐다. 나는 고개를 들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일기들을 시간순으로 배열해 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