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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급 비명헌터-312화 (312/366)

312화

<어떤 파괴자의 꿈>

―타다닥.

마지막으로 세빈이의 신호가 끊긴 곳이 잠실 주변이라는 말에 그 방향을 향해 한참 달렸다. 하늘로 높이 뻗은 타워와 석촌호수가 가까워졌지만 세빈이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강세빈!!”

세빈이의 이름을 크게 불러도 당연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직 내가 세빈이를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존재가 사라진 것은 아닌데, 아무래도 경계 같은 곳에 혼자 고립되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나는 고개를 내려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강세빈, 친구, 잊지 마]

매직으로 꾹꾹 눌러쓴 글씨가 살짝 번져 있었다. 세빈이의 존재가 사라지면 이 글씨도 없어지겠지만 쓴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지, 지의 씨! 저쪽에 이상한 균열이 있어요!”

그때 나를 따라 날아온 알렌이 소리쳤다. 그는 호수를 가로지르는 도로 위를 가리켰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찌그러진 차들의 행렬 위에 세로로 길게 찢어진 검은 균열이 보였다.

―후웅!

빠르게 하강해 균열과 거리를 좁혔다. 의심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었고 세빈이가 이 안에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제발 무사해줘.”

균열 앞에 착지해 그 안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파지직.

[각성자 ‘강세빈’의 ‘너는 내 옆에 계속 있기만 하면 돼’의 씨앗 개화]

[각성자 ‘강세빈’은 각성자 ‘신지의’의 말에 영향을 받는다.]

[고유 스킬 ‘호령여산(號令如山)’의 파괴력 증가]

세빈이의 몸에 심어둔 말의 씨앗이 또 하나 개화했다. 난데없이 벌어진 상황에 다리가 멈췄고 눈앞에 뜬 상태창을 이해하느라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살아 있어.’

세빈이는 살아 있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그것이 행동에 영향을 미쳤다.

―쨍그랑!

“읏!”

그때 균열이 유리처럼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균열이 있던 곳을 바라보자 반짝거리는 연기의 안에서 걸어 나오는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또각.

연기를 뚫고 정장 바지를 입은 긴 다리가 슥 나타났다. 자연스럽게 시선을 올려 그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눈이 크게 떠졌고, 그 역시 나와 시선이 맞닿자마자 활짝 웃었다.

“지의야!”

세빈이였다. 신호가 끊긴 수십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감정이 미친 듯이 널뛰었는데, 그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세빈이는 멀쩡했다.

세빈이의 큰 눈이 순식간에 반으로 접혀 예쁜 호선을 그렸다. 그 해맑은 얼굴을 보자마자 마음이 놓여 가슴이 울컥했고 세빈이를 향해 성큼 다가갔다.

“또 사라질까 봐 진짜 걱정했어.”

“미안해.”

“네가 사과할 일 아니야.”

“아니, 내가 사과해야 하는 일이 맞아.”

세빈이가 힘없이 픽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왜냐면 또 바보같이 김강희에게 넘어가 나 스스로를 잃을 뻔했거든.”

“…역시 김강희 짓이었구나.”

“응.”

“지금 그 자식 어디 있어?”

“여기.”

―쿵.

갑자기 발밑에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내리자 피범벅이 된 누군가의 몸이 바닥에 처박혀 있었다.

엉망이 된 은색 머리카락과 깨진 안경…….

“어?!”

의심할 여지 없이 김강희였다. 순간적으로 사고가 정지해 그와 세빈이만 번갈아 쳐다보자 세빈이가 평온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살아 있어. 기절만 시킨 거야.”

“어, 어떻게 된 건지 간단하게 얘기해 줘.”

지금 보니 세빈이의 넥타이가 김강희의 양 손목을 친친 감고 있었다. 완전히 의식을 잃은 상태라 그럴 필요까진 없어 보였는데 확실하게 하려는 듯했다.

“자기한테 협조하면 너랑 단둘이 살아남게 해주겠다고 했어.”

“하, 어이가 없네…….”

“솔직히 말해서, 넘어갈 뻔했어.”

“뭐?”

내 비아냥이 미안해질 정도로 세빈이가 담백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갑자기 내가 나타나더라고.”

“…98번째?”

“응.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면서 정신 차리게 해줬지.”

세빈이는 머쓱한 듯 웃었다. 나는 그 얼굴을 바라보며 왠지 모르게 코끝이 찡해졌다.

‘내 마지막 부탁을 들어준 거구나.’

급하게 전한 부탁이었는데 98번째의 세빈이는 현재의 자신이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게 바로잡아 주었다. 다정함을 담은 검은 눈동자에서 다시는 사라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뭔데?”

세빈이가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녀석이 내게 흡수됐어. 갖고 있던 기억이랑 업까지 전부.”

“아……!”

얼굴을 홱 들자 세빈이가 입을 꾹 다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반쯤 내리깔았던 눈을 다시 떠 나를 바라보았다.

“네 부탁이라고 하길래 일단 받아들이긴 했는데, 어떻게 된 거야?”

“아, 그게…….”

―콰드득.

그때 발밑에서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나와 세빈이가 동시에 고개를 내리자 김강희의 척추가 비정상적으로 높게 솟아 있었다. 본능적인 위험을 느껴 뒤로 물러나기 무섭게 그의 몸에서 시커먼 덩굴이 솟구쳐 나오기 시작했다.

덩굴은 하늘을 향해 뻗어가더니 곧 지옥도에 닿았고, 결국 김강희와 지옥도가 연결된 모양새가 됐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나와 세빈이는 의식을 잃은 김강희를 사이에 둔 채 혼란스러운 시선만 교환할 뿐이었다.

―우드득.

덩굴이 기계에 연료를 주입하듯 꿈틀거리며 김강희의 몸 안에 무언가를 밀어 넣자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의식을 잃은 상태였지만, 그는 자신의 손을 묶어둔 세빈이의 넥타이를 쉽게 끊어내곤 한 손을 자신의 가슴 한가운데 올렸다.

―콰그작!

얼마 안 있어 그의 손이 가슴을 파고들었고 손을 비틀어 무언가를 뽑아냈다.

“…파편?!”

분명 창조자의 파편과 똑같은 생김새이긴 했다. 하지만 김강희의 손에 들린 건 검푸른 색이 아닌, 순수한 빨간색이었다. 어떤 색과도 섞이지 않은 강렬한 붉은 빛을 띄는 보석이 심장처럼 움찔대고 있었다.

―콰직!

김강희가 한 손으로 파편을 부쉈다. 그러자 지옥도와 연결된 덩굴이 붉게 물들었고 순식간에 그의 몸을 휘감았다. 김강희를 집어삼킨 덩굴은 그대로 땅 밑으로 들어갔다.

“윽?!”

“지의야!”

그와 동시에 내 몸도 밑으로 훅 꺼졌다.

‘다리가……!’

고개를 내리자 내 다리에도 붉은 덩굴이 친친 감겨 있었고 아득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치지직.

[파괴자가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린 순간, 세상은 필멸을 직감했습니다.]

흐릿해지기 시작하는 의식 속에서 붉은 글씨가 눈앞에서 번쩍거렸다. 난 볼 안쪽을 깨물며 겨우 정신을 잡았고 글자들을 하나씩 꼼꼼하게 읽었다.

[파괴자가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 절대자가 된다면 세상이 재창조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이를 수습할 구원자를 필사적으로 찾았고, 결국 멍청할 정도로 순수한 영혼을 구원자로 삼았습니다.]

멍청할 정도로 순수한 영혼은 아마 나를 말하는 거겠지. 마음대로 날 희생양으로 점 찍은 주제에 참 예의 없는 언행이다.

―치지직.

[입장한 중생 8명]

[파괴자의 아틀리에에 입장합니다.]

[*신세계의 핵을 찾아 파괴하면 파괴자의 아틀리에를 무너트릴 수 있습니다*]

그 문장을 끝으로 눈앞이 암흑으로 물들었다.

* * *

―타닥.

“아.”

두 발이 땅에 닿자마자 의식이 돌아왔다.

‘여긴 정원인가?’

주위를 둘러보니 탁 트인 잔디밭 위였다. 수풀 울타리로 둘러싸인 정원엔 잘 가꾼 나무들이 심겨 있었고, 형형색색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중간엔 새하얀 테이블과 의자도 여러 개 놓여 있어 영화에서나 볼법한 이상적인 정원의 모습 같았다.

―바스락.

“아!”

“지의야!”

“신지의 헌터!”

나무 몇 개를 지나 광장처럼 보이는 넓은 공간에 발을 들이자 여러 사람들의 얼굴이 동시에 눈에 들어왔다. 세빈이와 최민 헌터가 놀란 얼굴로 내게 성큼 다가왔고 그 옆엔 반가운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들 어떻게 온 거야……?”

레일리, 조슈아, 비스, 그리고 센. 내가 창조자로부터 해방시킨 소중한 동료들이었다.

레일리는 턱으로 다른 사람들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전부 비슷하게 온 것 같더군. 웬 이상한 덩굴에 끌려와서 말이지.”

“여기도 창조자의 파편인 걸까요?”

“그건 아닌 것 같다. 상태창에 파괴자의 아틀리에라고 했어.”

조슈아와 비스가 차례로 이야기할 때쯤 센이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텁.

그리고는 내 손을 쥐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무사했군요.”

“네. 센 씨도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마음 같아선 길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네요.”

그가 살며시 웃으며 다시 뒤로 물러났다. 지금 보니 비스와 조슈아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말을 걸 타이밍을 재는 듯한 두 사람을 향해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조슈아, 비스 너희들도 크게 다친 곳 없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감사합니다. 신지의 헌터 덕분에 준비를 잘 할 수 있었으니까요.”

“…우리도 예상했던 것보다는 인명 피해를 줄였다.”

“우리 비스는 고맙다는 얘기를 한 거란다, 빛의 아이야.”

“칼리 님!”

갑자기 나타난 칼리가 깔깔 웃으며 비스의 볼을 쿡 찔렀다.

‘하여간 언제쯤 솔직해지려는지.’

하미준 헌터와 비슷한 나이일 텐데 이런 모습을 보면 꼭 내 또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분 잠깐 제 얘기 좀 들어주시겠어요?”

그때 조슈아가 손을 들며 모두의 주의를 끌었다. 전부 자신에게 시선이 꽂힌 걸 확인한 후 그가 말을 이어갔다.

“이 조합이 조금 낯설어서요. 저를 포함해서 여기 네 명은 옛날 사도들이라 치고…….”

“저쪽은 어떤 이유로 끌려온 건지 모르겠군.”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거예요, 레일리 씨.”

레일리의 시선이 최민 헌터와 세빈이를 향했다. 내가 생각해도 조금 이질적인 구성이었다.

“전 조율자의 사도였습니다.”

“조율자?”

“창조자와 같은 절대자입니다.”

“절대자의 사도였던 자들이 떨어진 거라면 신지의 헌터와 강세빈 헌터는 어째서 휘말린 걸까요…….”

최민 헌터의 말에 센이 손가락으로 제 팔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지난 생까지 통 틀면 나도 절대자의 사도라고 칠 순 있지만 세빈이는 여전히 의문점이었다. 8명이나 되는 인원이 갖고 있는 공통 범주, 그런 게 있을 리가…

“아.”

“지의, 왜 그러지?”

있었다. 우리 모두에게 있는 공통점이 머릿속에 퍼뜩 떠올랐다.

고개를 들자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그들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업이야.”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모든 생명체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충격]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8명이 모일 리가 없었다.

“업이 있었거나, 지금 있는 각성자들을 전부 데려온 것 같아.”

“강세빈 헌터, 업이 있으십니까?”

“네. 말하자면 좀 길지만, 아무튼 있어요.”

세빈이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최민 헌터에게 답하자 이번엔 모두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불편한 정적이 이 공간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지의, 네게도 설마 업이 있었나?”

무거운 침묵을 뚫고 비스가 입을 열었다.

‘저렇게 놀란 얼굴을 한 비스는 처음 보네.’

비스만이 아니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내 입에서 나올 말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짧게 이야기할게.”

난 숨을 들이마신 후 지옥도의 끝에서 나를 기다리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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