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화
“공략 수고하셨습니다. 먼저 이동해 보겠습니다.”
“몸조심하세요, 강세빈 헌터!”
세빈은 헌터들을 뒤로 한 채 곧바로 근처에 있는 게이트를 향해 달려갔다.
‘이제야 두 개가 해결된 것 같은데…….’
그는 헌터넷으로 지도를 확인한 후 건물 벽을 타고 올라갔다. 건물에 진 세빈의 그림자가 세빈을 단단히 잡아준 덕에 밑으로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탁.
상가 건물 옥상에 올라 주위를 살폈다. 자신이 철원 S급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나온 사이에 몬스터들이 하나둘씩 빠져나오기 시작해 헌터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져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몬스터가 대피소를 공격할까 봐 던전 밖에서 전투하다 보니, 정작 던전을 공략할 인원이 턱없이 부족했다.
세빈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 전투의 끝이 보일 듯 보이지 않아 속이 답답해졌기 때문이었다.
―콰과광!!
그때 굉음이 들렸다. 세빈이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곧바로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의 시야의 끝엔 '천마(天馬)'와 전투를 벌이고 있는 지의가 있었다.
그가 바닥에 착지하기 무섭게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 나갔고, 천마의 발목을 끊어놓기 위해 미리 그림자들을 조종했다.
―치지직.
“…뭐야?”
세빈이 지의와 제법 가까워졌다고 느낀 그 순간 온 세상이 새카맣게 물들었다.
―쾅!
어둠은 그의 공격을 더욱 강하게 만들 뿐이었다. 검을 양손으로 쥐어 가로로 벴지만 공간 전체가 진동할 뿐 아무런 흠집도 생기지 않았다. 세빈은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운 채 적의 기습에 대비했다.
“역시 걸려들 줄 알았네.”
―키이잉!
잠시 후, 차분하다 못해 얼어붙은 듯한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세빈이 그쪽으로 검을 휘둘렀다. 새하얀 구체에 검이 막혀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닿진 못했다.
세빈은 잔뜩 인상을 쓴 채로 제 검이 향한 곳을 노려보았다. 싱긋 웃고 있는 푸른 눈동자와 시선이 맞닿았다.
“…또 당신 짓이군.”
“어머, 이제 격식도 차리지 않기로 한 건가?”
“내가 다시 세상에 돌아오고 나서 당신을 죽이지 않은 것만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예의는 다 차렸다고 생각하는데.”
―쾅!
세빈의 그림자가 순식간에 위로 치솟아 강희의 턱을 노렸다. 하지만 이 역시 구체에 의해 무력해졌다.
‘반격할 기미가 안 보이네.’
세빈은 본능적으로 강희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유인한 것이 아님을 눈치채곤 일단 검을 거뒀다. 강희는 반쯤 깨진 안경을 올리며 제 주위에 있던 구체를 들여다보았다. 구체 안엔 지의가 천마와 한창 전투를 벌이는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방금 내게 걸려들었다고 했지.”
“그렇네.”
“그럼 지금 지의가 싸우고 있는 모습은 네가 만들어 낸 건가?”
“아하하, 설마.”
강희가 어깨를 으쓱이며 낮게 웃었다.
“자네가 본 건 진짜 신지의 헌터야. 난 그 모습을 자네 앞으로 송출시킨 것뿐이고. 자네는… 그래, 내가 만든 화면 속으로 들어온 거나 마찬가지겠군.”
“쓸데없는 소리 들어줄 시간 없어.”
―철컹.
세빈의 검이 다시 강희의 목을 향했다. 날 끝이 이미 그의 목에 닿아 있어 조금이라도 힘을 주어 휘두른다면 강희는 순식간에 머리가 날아갈 것이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강희는 태연했다. 입가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고 눈동자엔 자신, 그 이상의 확신이 서려 있었다.
“정말 눈물 나는 우정이야. 바로 앞에 게이트가 있어도 더 멀리 있는 신지의 헌터 쪽으로 가려고 하니.”
“……….”
“아니, 어쩌면 애정이려나?”
세빈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그 작은 변화를 눈치챈 강희는 더욱 차분한 태도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난 그렇게 깊은 감정을 나눠 본 인간이 없네. 그래서 자네가 신지의 헌터에 대한 마음도 솔직히 말해서 신기해.”
“더 들어줄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탈그락.
그때 강희가 세빈의 검을 움켜쥐었다. 시뻘건 피가 그의 손바닥을 타고 밑으로 뚝뚝 떨어지자 세빈이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둘만 있도록 해주겠네.”
“…뭐?”
“자네와 신지의 헌터, 둘만 이 세상에 남겨 주겠다고.”
‘이 인간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세빈은 검을 거둬 강희의 피를 한번 털어내곤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그에게 있어 강희의 이런 여유가 당연히 달갑지 않았다. 강희의 이런 행동 뒤엔 분명 속셈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것이 절대 세빈 자신, 그리고 지의에게 도움이 되진 않을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세빈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강희를 응시했다. 서늘했던 인상이 다소 나른해져 강희의 이야기에 완전히 흥미를 잃은 듯한 얼굴이 됐다.
“당신한테 그럴 힘이 남아 있어? 지금도 계속 무너지고 있는데.”
“자네만 협조하면 가능하지.”
“아쉽게 됐네. 난 당신한테 협조할 생각 없거…….”
“최민 헌터를 거슬린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세빈은 누군가 자신의 뒤통수를 내려치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당연히 그의 머리를 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잘 억눌렀다고 생각했던 날 것의 감정이 갑자기 끄집어내져서 동요했을 뿐이었다.
‘정말 미성숙하군.’
강희는 순식간에 경직된 세빈의 얼굴을 보며 씩 웃었다.
“참 재미있지 않나? 신지의 헌터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늘 최민 헌터가 옆에 있다는 게?”
“……….”
“마치 그를 구하는 게 최민 헌터의 사명인 듯한 생각까지 드네.”
강희의 한마디 한마디가 칼날이 되어 세빈의 가슴을 후벼팠다. 가슴 속에 꽁꽁 숨겨 두었던 더럽고 추악한 질투심이 당장이라도 껍질을 벗고 밖으로 나올 것만 같았다.
지의가 민을 매우 신뢰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민이 능력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둘 다 믿음직한 사람이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세빈의 가슴엔 여전히 어떤 감정이 고여 있었다.
‘왜 나는 안 되는 거야?’
하나뿐인 소꿉친구도, 곁을 내어줄 수 있는 동료도, 위험에 처할 때마다 구해주는 구세주도 전부 자신이길 바랐다. 지의가 자신의 전부인 만큼 지의도 자신을 원하길 바랐다.
―우득.
세빈이 입술을 세게 깨물어 결국 피가 흘렀다. 턱을 타고 흐른 피는 밑으로 뚝 떨어져 세빈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시커먼 질투의 흔적이었다.
“자네는 원하는 걸 가질 자격이 있어. 이젠 좀 욕심을 내보는 게 어떤가?”
‘내가 원하는 것…….’
세빈은 자신의 상태창을 열어 사명을 빤히 바라보았다.
<사명>
[인어공주]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네 것으로 만들어라. 할 수 있다면.]
[달성도 : 99%]
[보상 : 내세의 연]
각성과 동시에 이 사명을 받았다. 세빈은 자연스럽게 지의를 떠올렸지만 절대로 이 사명을 이룰 수 없다고 확신했다. 지의의 마음속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달성도가 올라 99%에 도달했어도, 그 1%는 절대로 채울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만약 이 세상에 정말로 단둘만 남는다면 내 사명을 달성할 유일한 기회가 아닐까?’
세빈의 머릿속에 비겁하고 끔찍한 상상이 가득 들어차기 시작했다. 도덕과 욕망이 세빈의 목을 동시에 조르고 이성이 마비되어 갔다.
―끼기기기긱.
그때 공간을 가로지르는 새하얀 금이 생겼다. 세빈과 강희가 동시에 고개를 들자 누군가 공간을 비집고 들어오려는 것처럼 커다란 손 두 개가 금 사이를 벌리기 시작했다.
‘김강희의 짓이 아닌가?!’
세빈은 재빨리 시선을 옮겨 강희의 얼굴을 살폈다. 그 역시 눈을 잔뜩 크게 뜬 채로, 이 공간에 들어오려는 피범벅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빈이 다시 고개를 돌리자 그 손이 묘하게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푹.
“커헉……!”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피범벅의 손이 갑자기 세빈을 꿰뚫고 다시 빠져나가더니 이내 그의 몸을 잡고 공간 밖으로 끄집어냈다.
―쿵.
세빈은 새하얀 공간에 엎어졌다. 그는 관통됐던 가슴을 더듬으며 자신의 상태를 살폈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다음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학습 능력이 그렇게 없을 줄이야.”
“너…….”
98번째의 세빈이었다. 눈가가 검게 물들어 있어 섬뜩하게 보였고 전에 만났을 때에 비해 훨씬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세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과거의 자신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김강희한테 또 넘어갈 뻔했네. 그것도 똑같은 이유로.”
“…설마 전에도 이런 선택을 한 적이 있어?”
“그래.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가니까 김강희의 말을 덥석 믿은 거지. 결과는 맹독 던전에 떨어져 무아를 사용하다 부작용으로 인해 존재 소멸.”
98번째의 세빈은 팔짱을 끼며 현재의 자신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게 네가 원하는 거야? 지의가 죽는 걸 눈앞에서 지켜만 보는 것?”
“나도 이런 내가 끔찍해.”
세빈이 양손으로 얼굴을 세게 쓸어내렸다.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검은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품고 있던 더러운 질투심과 열등감을 견딜 수 없었다. 민을 향한 부정적인 감정도 온전히 시기와 질투의 산물이라는 걸 알고 있다고 해서, 끓어오르는 감정이 갑자기 평화를 되찾는 건 아니었다.
‘어떤 감정인지 아니까 더 역겹네.’
98번째의 세빈은 현재의 세빈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지의의 부탁을 떠올리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네가 존재하기만 하면 내세의 연은 자연스럽게 이어질 거야.”
“……….”
“우리들이 바로 그 증거잖아.”
현재의 세빈이 과거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보는 사람이 불안해질 정도로 크게 흔들리던 눈동자가 서서히 한 곳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우둑.
98번째의 세빈이 현재의 세빈의 멱살을 잡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최민 헌터가 매번 지의를 구했듯, 우리도 지의의 하나뿐인 소꿉친구로서 존재했지."
“…맞아.”
“그깟 사명에 매달리지 않아도 지의와의 연은 맺어져 있다고, 내 말 알아들어?”
―콰득.
현재의 세빈이 98번째의 세빈의 손목을 잡아 비틀었다. 98번째의 세빈이 인상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나자, 현재의 세빈은 후련한 듯 조용히 미소 지었다.
“너는 내 옆에 계속 있기만 하면 돼.”
세빈은 화가의 파편 안에서 지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자신의 소꿉친구는 몇 번이고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는데 정작 세빈은 그저 어리석은 조바심만 내왔다.
‘난 예나 지금이나 지의의 옆에 있을 사람이야.’
불안이 눈 녹듯 사라지고 세빈의 가슴 속엔 어느새 자신에 대한 확신이 가득 찼다. 세빈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중얼거렸다.
“빨리 지의를 만나러 가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