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화
“하아, 하아…….”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까지 달리고 나서야 커다란 괘종시계에 에워싸인 붉은 뒤통수가 눈에 들어왔다.
“최민 헌터!”
―콰그작!
방아쇠를 당겨 녀석들을 단번에 해치우자 그가 뒤를 돌았고 나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최민 헌터는 길게 숨을 내쉬며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걸었다. 나는 그를 잠시 뒤로 한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 A급 게이트 차례군.’
평택 A급 게이트 서너 개가 주택가 한가운데 떨어져 있었다. 다행히 집들은 방공호로 잘 보호되고 있었지만 최민 헌터가 계속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체력 소모가 상당할 것이다.
“이쪽의 공략 팀들은 전부 배정되었는데, 어떤 일로 오신 겁니까?”
“아, 그게.”
난 고개를 돌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조율자랑 만날 수 있는 목걸이를 좀 빌려주세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최민’이 동요한다.]
[발언 결과 : 의문]
그가 잠시 눈을 크게 뜨더니 곧 말을 덧붙였다.
“그를 만나서 뭘 하실 생각이십니까?”
“지금쯤 김강희는 조바심이 날 거예요. 몬스터는 전부 다 파괴했고, 지옥도도 슬슬 끝을 바라보고 있으니까요.”
―쿵, 쿵.
그때 게이트 밖으로 또다시 몬스터가 빠져나왔다. 나와 최민 헌터는 동시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팔을 들어 전투태세를 취했다.
―퍼버벙!
불꽃이 괘종시계의 허리를 터트리자마자 소리 탄환이 시계 부분을 정확히 관통했다. 최민 헌터가 그 틈으로 다시 폭발을 일으켰다. 결국 괘종시계는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그대로 산산조각이 났다.
“그래서 조율자로 하여금 그를 죽이도록 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니요. 어차피 절대자들은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자기 손으로 직접 죽일 수 없어요.”
숨을 한번 고른 후 말을 이어갔다.
“대신 김강희를 조율자의 공간에 가둘 거예요.”
“아예 분리를 시키겠다는 말씀이시군요.”
“네. 김강희가 던전을 더 이상 꺼내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거든요.”
이전보다 게이트의 수가 줄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힘에 부치고 있다. 마지막 페이즈는 S급 게이트들만 나오니 정말로 장기전에 돌입하겠지. 그런 상황에서 S급 게이트 서너 개가 더 생성된다면 일은 더욱 복잡해질 거였다.
‘다른 나라의 상황도 슬슬 확인하고 싶고.’
레일리, 조슈아, 비스, 그리고 센. 각자의 위치에서 잘해 주고 있으리라 믿지만, 혹시라도 내가 모르는 사이에 더 이상 볼 수 없는 존재가 되었을까 봐 불안했다.
“지옥도가 다 해결된 후에 다시 불러낼 거예요. 처분은 그 후에 생각해 보려고요.”
“알겠습니다.”
―달그락.
최민 헌터가 인벤토리에서 목걸이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차가운 금속 촉감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자 나는 그것을 더욱 꽉 쥐며 최민 헌터를 향해 웃어 보였다.
“고마워요.”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입니다.”
―텁.
그는 내 어깨에 살짝 손을 올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다치지만 말아 주세요.”
“알겠어요. 최민 헌터도요.”
―쿵.
잠시 대화를 나눌 틈도 없었다. 또다시 쏟아져나오는 몬스터의 행렬에 최민 헌터의 불꽃이 사방으로 터졌다. 나도 방아쇠를 당겨 녀석들을 어느 정도 정리한 후 높이 뛰어 올라갔다.
“그럼 나중에 봐요!”
최민 헌터를 향해 손을 흔들며 더욱 높이 올라왔다. 그리고는 손에 쥔 목걸이를 내려다보았다.
‘굳이 최민 헌터가 아니어도 반응해야 할 텐데.’
나는 최민 헌터가 그를 불러냈던 것처럼 동그란 장식 위로 손을 올렸다.
―키이잉.
목걸이가 강하게 진동하더니 새하얀 구체가 튀어나왔다.
―파지직.
하지만 자신을 불러낸 게 옛 사도가 아니라는 걸 알아챘는지 위아래로 가볍게 흔들리던 구체가 갑자기 우뚝 멈췄다.
“…어째서 당신이 있는 거죠?”
“시간 없으니까 짧게 말할게. 김강희를 네가 있는 공간에 좀 가둬줘.”
―파지직.
또다시 스파크가 일었다.
“왜죠?”
“그 인간을 그대로 두면 상급 던전을 더 꺼낼 거고 그게 종말에 결정적으로 기인하거든.”
“확신하시나요?”
“응. 100% 확신해.”
조율자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목걸이의 바로 위에 떠 있는 채로 내 반응을 살필 뿐이었다.
‘그렇게 오래 끌어 봤자 다른 선택지도 없을 텐데.’
녀석의 되지도 않는 기 싸움에 슬슬 진저리가 나기 시작했다. 나는 인상을 있는 대로 구기며 바로 말을 덧붙였다.
“너나 나나 세상을 지킨다는 목적은 똑같잖아. 협조 좀 해.”
“…제가 그를 경계 어딘가에 가둔다고 칩시다.”
이제야 대답할 마음이 들었는지 조율자가 입을 열었다.
“창조자가 가만히 있을 것 같습니까?”
“그걸 막는 것까지 네 일이지. 절대자들 다툼에 인간을 끼려고 했어?”
―파지직.
이 녀석은 보면 볼수록 알기 쉬웠다. 온몸으로 못마땅함을 보여주는 녀석에게 그대로 쐐기를 박았다.
“그 잘난 존재 이유를 계속 갖고 싶다면 내 말대로 해. 내가 신호를 주면 바로 납치해서 집어넣으라고, 알겠어?”
나와 녀석 사이에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헌터들이 몬스터를 상대하는 소리와 전봇대 따위가 쓰러지는 소리만이 널리 울려 퍼질 뿐이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데리고 있으면 됩니까?”
결국 조율자가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애초에 바보가 아닌 이상 그가 내 제안을 거절할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통쾌한 마음을 눌러두고 바로 대답했다.
“내가 신호를 줄 때까지. 아마 지옥도를 수습한 이후가 될 거야.”
“그럼 가두는 시점은요?”
“그것도 내가 신호를 줄 때. 네가 그가 있는 곳으로 바로 이동할 순 없으니 다른 헌터에게 김강희를 데려오도록 할 거야.”
숨을 한번 고른 후 말을 덧붙였다.
“그때 내가 너를 소환할 거고, 넌 김강희를 데리고 경계든 어디든 네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면 돼.”
―우웅, 우웅.
조율자는 말없이 진동했다. 대충 알아들은 걸로 봐도 되겠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팟.
조율자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목걸이 안으로 들어갔다. 녀석의 태도에 기분 나빠 할 시기는 이제 지났다. 결과적으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굴러가고 있으니 말이다.
―휘이잉.
그때 초록빛 바람이 눈앞에 갑자기 나타났다. 바람이 불어온 곳에는 폐지 압축장처럼 보이는 장소에서 차도윤 헌터가 나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타이밍 좋네.’
이 작전엔 조율자만큼이나 차도윤 헌터의 역할도 중요했다. 그가 김강희를 이쪽으로 데리고 오는 데 실패하면 쓸데없는 충돌이 생기고 말 테니까.
―타닥.
나는 빠르게 하강해 그의 바로 앞에 착지한 후, 그와 정면으로 마주했다.
“이제 네 번째 페이즈인 것 같은데, 언제 회장님을 모셔오면 될까요?”
차도윤 헌터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쏟아냈다. 살짝 긴장한 듯 눈에 힘이 들어갔는지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우웅.
[공략] 신지의(SS) 파주 A급 게이트 2건
서울역 근처로 이동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때 헌터넷 알림이 날아왔다. 길게 이야기할 여유가 없다는 뜻이었다.
‘파주 A급 게이트면 차도윤 헌터가 갇혔던 그 게이트니까…….’
게이트의 위치가 계속해서 바뀌는 걸 고려해도 던전 밖 시간으로 하루 안에 클리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는 핸드폰에서 시선을 뗀 후 차도윤 헌터와 눈을 맞췄다.
“지금으로부터 50시간 후요.”
“…엇갈리진 않겠죠?”
“괜찮아요. 녹두가 이 주위를 순찰하고 있으니까 차도윤 헌터가 경복궁으로 갔을 때 저한테 알려주러 올 거예요.”
“그럼 다행이네요…….”
차도윤 헌터가 혀로 입술을 축이며 초조한 마음을 애써 달래는 듯했다.
“회장님을 아까 있던 그 공사장으로 모셔오면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제가 기절한 척하고 있을 거예요. 김강희가 방심했을 때 그를 경계로 보낼 거고요.”
“경, 경계요?”
“정확히는 경계 비스무리한 곳이죠.”
더 캐묻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너무 무기력해서 걱정된다고 해야 할지. 차도윤 헌터는 사색이 된 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 달싹이던 그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바로 죽이지는 않는다는 거죠?”
“…네.”
차도윤 헌터가 안심한 듯한 한숨을 순간적으로 내쉬다 곧 화들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아니, 그러니까…….”
“이해해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차도윤’이 동요한다.]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차도윤 헌터에게 있어 김강희는 수년간 존경하고 신뢰하던 사람이다. 고작 1년 정도 알고 지냈던 나도 김강희가 배신자라는 걸 알았을 때 분노와 배신감으로 몸이 떨렸는데, 미련을 쉽게 떨칠 수 없겠지.
[발언 결과 : 미안함]
“작전엔 절대 차질 없게 할게요. 만약 제가 또 신지의 헌터의 발목을 잡는다면 절…….”
“그럴 일 없어요. 차도윤 헌터 믿거든요.”
―우웅.
또다시 헌터넷 알림이 날아왔다. 시간을 더 이상 끌 수 없었다. 울상을 지은 차도윤 헌터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을 덧붙였다.
“작전, 잘 부탁할게요!”
“알겠습니다!”
그를 뒤로한 채 헌터넷 지도를 켰고 서울역 방향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 * *
“하하…….”
기묘할 정도로 평화로운 경복궁 안. 궁의 가장 안쪽에 있던 향원정엔 강희가 제 손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후두둑.
도자기 인형의 껍질이 벗겨지듯 그의 피부가 바스라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미 얼굴과 팔 일부분은 구멍이 뚫려 있어, 망가져 버린 헝겊 인형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무리하게 힘을 썼는데도 누구 하나 없애지 못했다니.’
자신의 힘을 쪼개어 만든 ‘파괴자의 의지’가 사라지자 이제 강희에게 남은 건 던전 몇 개를 만들어낼 힘이 전부였다.
강희가 고개를 들었다. 오직 그의 눈에만 보이는 수십, 수백 개의 구체가 그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구체의 안엔 던전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헌터들의 모습이 재생되었고, 수많은 구체 중 강희의 시선이 멈춘 곳은 세빈이 있던 전주 A급 던전이었다.
“아직도 미련을 갖고 있는 거야?”
그러자 강희의 뒤에서 검푸른 구체, 창조자가 말을 걸어왔다.
‘슬슬 이 자식도 조바심이 나나 보군.’
강희는 그의 바뀐 말투를 들으며 나지막이 그를 비웃었다.
“차도윤이 신지의를 포섭하는 데 성공하면 강세빈은 자연스럽게 따라오지. 그 이후에 그들을 한 번에 없애는 거야 어렵지 않고.”
“애초에 그 회귀자가 포섭될 리가 없잖아.”
“네 말이 맞아. 그래서 강세빈에게도 똑같은 제안을 할 거야.”
강희는 아까 보았던 세빈의 모습을 떠올렸다. 자신의 소꿉친구 옆에 서 있던 사람을 바라보던, 소름 끼칠 정도로 서늘한 얼굴을 말이다.
“질투에 눈먼 인간이 어떻게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겠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나는 반대…….”
“아니.”
강희의 푸른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 눈동자엔 확신과 자신감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과거의 어느 순간, 그 작전이 성공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강희는 자신이 느낀 기묘한 기시감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엔 누군가의 삶을, 그리고 이 세상을 파괴할 생각으로 가득했다.